수요시편기도회



수요시편기도회 링크

(아래 링크를 통해서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주제: 수요시편기도회

시간: 매주 수요일  오후 8 시 

Eunkyu Kim이(가) 예약된 Zoom 회의에 귀하를 초대합니다.

https://us06web.zoom.us/j/82899018486?pwd=I03hClG3zfbp4cJvvGf1wKVoy8Gvlc.1



시편 87편

오늘 말씀은 다시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그리고 노래라고 합니다. 무엇을 향한 노래이냐 하면 성전을 향한 노래입니다. 고라 자손은 성전의 문을 지키고 노래를 인도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들이 일하는 곳을 노래합니다. 이상합니다. 하지만 성전 자체가 좋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때문에 그곳을 노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절에서 시인은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는 2절에 나오는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터전을 잡으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어떤 곳보다 그곳을 택하셔서 그곳에 계시기로 하셨습니다. 사람이 고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그곳을 고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십니다. 시온은 산 이름입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문이 없습니다. 여기서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그곳에 세워진 성전을 의미합니다. 3절에 보면 그 성은 하나님의 성이라고 불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온 우주에 충만하게 거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은 단 1센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시온을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신 곳이 없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하게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참으로 이 땅에 간섭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신들과 비교하여 볼 때 하나님께서 한 장소를 정하셔서 계신다는 것은 스스로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분이심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딱 한 곳을 정하셔서 그곳에 거하시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반면에 당시에 주변의 신들은 여러 지역에서 여러 지역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있습니다. 여러 곳에 제사할 수 있는 곳을 만들었습니다. 곳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각 지역마다 섬기는 신들이 달랐습니다. 신들마다 다스리는 곳의 이름을 붙여서 섬겼습니다. 아인트호벤의 바알, 덴 보쉬의 바알, 브레다의 바알 이렇게 구역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곳을 지정하셔서 그곳에 계셨고, 그곳으로 백성을 모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지역에 따라서 나뉘어져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다스리는 유일한 분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시온에 있는 성전은 오직 유일한 하나님이 거하시며 예배를 받으시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분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거하시기 때문에 성전은 영광스럽습니다. 성전이 칭송을 듣는 것은 그 성전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계시지만 교회 공동체서 특별히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임재를 드러내십니다. 교회가 거룩한 것도 그곳에서 거룩한 성령께서 함께 거하시기 때문이지 성도들이 완전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4절에서 라합은 이집트의 별명입니다. 이집트와 바벨론, 그리고 블레셋, 두로, 구스와 같은 여러 나라들이 언급이 됩니다. 그러면서 이 나라들이 하나님을 아는 자 중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온 사람들이 이 사람들도 시온에서 났다고 말할 것이라고 합니다. 애굽, 바벨론, 블레셋, 두로, 구스는 이방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의 적군들입니다. 하지만 이 성전에서 그들이 태어났다고 말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비록 이방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들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언젠가 그들도 부르실 것입니다. 시온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열방을 불러 모으시고 성전에서 예배하고 그곳에 다시 태어나 새로운 생명을 살아가도록 하실 것임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민족들이 등록할 것입니다. 그들의 거주 허가증 시온에서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등록이 되어 그곳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노래하고 뛰어 놉니다. 이것은 즐거운 잔치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시온에서 잔치를 하면서 노래하는데, 그 노래의 가사는 그들의 모든 근원이 이곳에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삶의 근원, 생명의 근원, 존재의 이유가 성전에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꿈꾸시던 비전입니다. 교회의 보편성입니다. 누구든지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싶고 그분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이 신분, 지위, 피부색, 민족 상관 없이 모두 교회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참된 이스라엘이시고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이 시편은 모든 민족들이 시온 성을 자신들의 영적인 고향으로 삼는 미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모든 민족들이 참된 성전이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는데, 온 세상은 마땅히 기뻐해야 합니다. 온 세상을 위한 구주께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백성들을 성전으로 불러 모으십니다. 예수님께로 불러 모으십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시고 모든 열방들을 예수님께로 초청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는 유대인을 향해서 복음을 전파하셨고, 이후에는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믿는 모든 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참된 생명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도록 하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 안에서 새 생명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의 길을 주시기 위해서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가 아니라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분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생명 책에 등록시키십니다. 요한 계시록 21장 25-26절은 지속적으로 열방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 안으로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보여줍니다. 참된 고향으로 들어옵니다. 그들은 하늘 나라에 등록된 하늘의 시민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의 참된 고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교제를 경험합니다.

 

우리의 평생에 우리의 정체성이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음을 기억하고 그분 안에서 참된 생명과 기쁨과 즐거움을 누립시다. 우리가 이 시편의 수혜자들이고, 이 시편에서 말하는 이방인들입니다. 다양한 배경과 성격을 지녔지만 모두가 한 가족이며, 한 공동체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며 참된 성전이시자 우리의 참된 고향인 예수님의 품을 기억합시다. 그분의 품에 안기어 누릴 행복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86편

오늘 시편 말씀의 표제를 보시면 다윗의 기도라고 되어있습니다. 앞에서 주로 공동체 시로서 시편을 살폈는데, 오늘 시편은 도움을 구하는 개인시입니다. 고라 자손의 시가 주로 공동체가 모였을 때 불렸다면, 이 시편은 공적으로도 시편을 불렀지만, 개인적으로도 불렸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특히 이 시는 기도라고 합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노래하며, 그분께 기도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먼저1절을 보시면, 시인은 먼저 자신의 처지를 고백합니다.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스스로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여기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다윗이거나 혹은 다윗의 계통의 자손이라면 이 궁핍과 가난이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영적이고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궁핍함과 가난함을 의미할 것입니다. 또 적들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함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시인은 지금 자신의 궁핍함과 가난함을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시인은 가난하고 궁핍하지만, 또한 하나님께 신실한 자입니다. 2절을 보시면 자신이 궁핍하고 가난하다고 하면서 무기력한 모습, 불쌍한 모습만 하나님께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자신이 경건하다고 합니다. 이 말을 히브리어로 보면 ‘헤세드’입니다. 그래서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경건하다”보다는 ‘신실하다’ “faithful”로 번역 되어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궁핍함과 가난함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존과 필요를 요청합니다. 그렇다고 단지 자신의 궁핍함과 가난함으로만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실함,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자임을 하나님께 기억해 주셔서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응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지키고, 계명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려움을 만났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을 구원하여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 4절 말씀을 보면 시인은 하나님께 종일 부르짖고, 하나님을 우러러 봅니다. 오직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실함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그분께만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자신에게 기쁨이 되심을 고백합니다. 나아가 5절에서 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기도 응답의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선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다. 그분이 인자하시기 때문에, 헤세드, 하나님의 언약에서 성실하시기 때문에 응답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평소에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을 자신의 열심과 신실함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속성에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성품이 평소에 늘 인자하고, 항상 하신 약속을 지키는 분이심을 알고 있다면, 그분을 신뢰할 수 있고, 그분이 나의 요청에 반드시 응답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그의 기도와 간구는 어느새 찬송으로 변합니다. 8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성품과 능력에 있어서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다른 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른 신들은 살아있는 신들이 아니라 인간이 모두 만들어 낸 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마땅히 그들은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놀라운 일들을 통하여서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또 시인은 하나님의 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기를 원합니다. 더 배우기 원합니다. 그것을 행하고 한 마음으로 경외하도록 해달라고 11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분께서 하신 일과 성품을 배워야 그분을 바르게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분에게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분과 깊이 교제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 없이는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는 배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바른 찬송을 드릴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알게 되면 자연스러운 반응으로서 하나님께 바른 찬송을 합니다(11-13) 11절은 배우는 것, 아는 것, 행하는 것, 그리고 경외함이 한 절에 들어가 있습니다. 배우고 알고, 행하고, 경외함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배움에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경외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인자하심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고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대한 간구로 돌아옵니다. 14절에서 17절을 보시면 교만한 자들이 자신을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자기의 영혼을 찾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럴 때 다시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하면서 기도합니다. 15절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금 송아지 사건 후에 하나님께서 떠나겠다고 할 때 모세가 이 백성과 함께 해 달라고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증거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분은 은혜로우시고 노하기 더디하시고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일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은총의 표적은 일종에 기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시인을 돕는 분이심을 알게 되고, 시인을 미워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분을 예배하고 그분께 다시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사이클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소망이 없음을 알아야 하고 우리 자신이 가난하고 궁핍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 가운데 바른 기도와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안되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붙들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성이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도 전에, 그분을 찬송할 수 있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분의 성품을 알고 신뢰하고 기도하고 또 그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는 이 시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찬송하겠습니다.


시편 85편

오늘 시편도 지난에 보았던 84편과 같이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성전의 문을 지키고 또 노래를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지은 노래입니다. 역시 인도자를 따라서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어서 공동체가 모였을 때 함께 부른 노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고라 자손의 시이고, 공동체가 모였을 때 함께 부른 노래이지만, 지난주에 보았던 시편 84편과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고라 자손이 성전을 향해서 가고 그곳에서 섬김을 갈망하는 내용이 84편이라면, 85편은 회복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1절과 2절이 다른 서론적인 말 없이 바로 나오기 때문에 굉장히 간절히, 급하게 기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1절을 보시면 일단 지금 이 시가 지어져 불리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으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온 것을 배경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도록 한 후에 이 시가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백성들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모든 죄를 덮어 주셔서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왔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분노를 거두시고 진노를 돌이키셨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하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수 있도록 합니다. 이 시를 함께 부르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과거에 회복을 주신 것 같이 지금도 회복을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그 때와 같이 지금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을 주시기를 3절에서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왔지만 여전히 죄악 가운데 있는 백성들의 회복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본격적으로 하나님께 회복을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유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돌이켜 그들에게 오시도록 간구하고, 또 백성들도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시인과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시고, 그들이 간구하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포로기에서 돌아온 백성들, 그리고 파괴된 성전의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로 봉사했던 자손들이 회복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를 거두시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원히 노하시지 않으시는 긍휼하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다시 그들을 살리시고, 주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을 기뻐하는 회복을 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도록 간청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돌아오시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이킬 때 회복이 주어질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7절부터 시인은 다시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회복을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들려 주실 회복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메시지는 한 단어로 ‘평화’입니다. 샬롬입니다.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에 진노하시고, 죄 때문에 멀어졌던 백성들에게 돌아오셔서 다시금 샬롬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다시 어리석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권면합니다. ‘평화’라고 하는 것은 단지 전쟁이 없는 평온한 상태만을 의미 하지 않습니다. 평화, 샬롬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던 적대감과 무한한 간격이 메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9절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임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적대적인 하나님께서 샬롬의 하나님으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심판의 하나님께서 구원의 하나님으로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이키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런 참된 평화의 회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떠나간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이 사는 땅에 임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평화가 다시 회복됩니다. 인애는 헤세드,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진리와 평화가 영광이 회복이 되는 참되고 복된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12절은 그 나라의 풍성함과 기쁨과 즐거움을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고 땅의 수확이 많아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지금 시인과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황폐해진 예루살렘과 땅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돌아 오시고, 그들이 돌이킨다면 그 땅이 다시 풍성한 땅이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치 에덴을 걸으셨던 것 같이 걸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회복을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여러가지 이유로 어려움과 위기와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때로 그것은 우리의 죄와 잘못한 것에 대한 심판일 수 있습니다. 혹은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해결책은 같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의지하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시에서 인자와 진리, 의와 평화라는 단어가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키워드들은 하나 같이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천사들은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들었던 말씀 같이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 가운데 거하시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이 은혜도 인자, 헤세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우리 사이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삶을 회복시켜 주시며,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호소하고, 그분 안에서 우리가 새 희망과 회복을 간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갈 때 그분 안에 있는 풍성함을 누리고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마무리하고 정리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한 해를 평가하면서 힘든 시기를 보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마무리 되어야 할 일들로 인해서 바쁩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영적인 침체와 스럼프를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이 시편을 기억하면서 기도하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참된 평화와 회복을 깊이 묵상하며 이전에 우리를 용서하시고 진노하심에서 돌이키시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참된 샬롬을 누리고 회복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연말에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와 위로와 회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84편

오늘은 읽은 시편의 표제를 보시면 고라 자손의 시라고 합니다. 고라 자손의 레위인들입니다. 그들은 성막의 문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성전이 지어진 후에는 자연스럽게 성전의 문을 지키고, 또 문에서 찬송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10절을 보면 악인의 집에 거하는 것보다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인도자를 따라서 깃딧에 맞춘 노래로 역시 공동체로 부르는 노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은 공동체로 모였을 때 부르는 노래이지만, 내용은 고라 자손이 집에서 성전을 향해서 출발하기 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서4절을 보면, 시인은 하나님의 장막이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고라 자손은 성전의 문지기 역할을 맡았는데,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지켰을 것입니다. 자신의 차례가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너무 좋아서 순서가 되어서 이제 갑니다. 영혼이 쇠약해질 정도로 성전에 가기를 소망합니다. 마치 상사병에 걸리는 것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성전에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임재하신 거룩한 집에 즐거운 마음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비록 가는 길이 험하고 어려울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마음과 육체가 회복되어 마침내 성전에 도착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시인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얼마나 갈망하는 지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성전에 둥지를 틀고 있는 새들을 부러워합니다. 성전에 둥지를 틀고 있는 참새와 제비들은 자기들의 새끼를 두는 집을 성전에 지어서 매일 매일 성전에 있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얼마나 좋겠는지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성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서 마음껏 찬송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1-4절이 성전에 도착하기까지 시인의 마음, 곧 하나님의 성전을 얼마나 사모하고 그곳에 가고 싶어 하는지 보여주었다면 이어지는 5절에서 8절은 길을 떠나는 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전으로 가는 길이 비록 힘겨운 일이지만 그 여정 속에서 하나님께 힘을 공급 받습니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말은 간절한 마음으로 성전으로 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힘을 얻어서 하나님과 교제의 자리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날 때에도 그곳에 마실 물이 항상 있을 것이며 시의적절한 비가 내려서 더위를 이겨날 수 있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7절을 보시면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마침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기쁨으로 시작하는 이 순례길은 때로 힘듭니다. 하지만 그 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을 얻고 더 나아갈 수 있고, 마침내 그 길고 길었던 순례의 길 끝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순례자는 그 여정 가운데 만군의 하나님,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께 기도를 들으시고 귀를 기울여 달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외침에 하나님께서 힘을 공급하시고, 이 눈물 골짜기 같은 삶에서도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순례길 가운데 경험하기 되는 것입니다.

또 마침내 성전에 갔을 때 시인은 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 왕이 있습니다. 그 왕이 바르게 통치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온 이스라엘에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왕은 공의와 예배에 대한 실제적인 책임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왕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시인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성전에 도착해서 찬양합니다. 긴 순례의 길 끝에 도착한 성전에서 시인은 그곳에서 하루가 다른 어떤 좋은 곳에서 보내는 천 날보다 낫다고 합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할지라도, 또 그 일 일시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악인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낫다고 고백합니다. 악인들과 함께 빌딩에 사느니 하나님과 함께 천막에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모하는 자들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좋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태양과 같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참된 방패, 곧 참된 보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와 영광을 나누어 주시며 모든 좋은 것을 아까지 않고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마지막으로 찬양의 고백으로 마칩니다. 주께 의지하는 자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시편은 이동에 대한 시입니다. 예루살렘 밖에서 성전 안으로 이동합니다. 일상적인 사모하는 삶에서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하는 삶으로 이동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에서 멀어져 있는 것에서 가까이 가는 것으로 이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동은 순례자의 길입니다. 이것은 크게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인생 전 과정이 바로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을 향한 여정, 순례자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사모하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날을 사모해야 합니다. 동시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오늘 시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일상에서 거룩한 삶으로 이동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성화에서 영화로 이동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일상에서 거룩한 삶으로 이동하는 삶의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월요일에서 토요일, 그리고 주일입니다. 주일에서 시작된 새로운 삶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삶을 가지고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살아가고 다시 주일로 이동합니다. 이런 패턴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창조의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패턴이라고, 예수님은 부활로서 그 안식일을 지금의 주일로 완성하셨습니다. 과거에는 주일예배를 준비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토요일 저녁에 주일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공동체적으로 만나고 예배함을 사모하며 준비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은 오늘 시편에서 고라 자손과 같이 일상 생활에서도 하나님과 만남,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고 사모하는 순례자의 길과 같았습니다. 끊임없이 일하는 세상 속에서, 마음으로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주일에 온 영적인 가족들과 모여 함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 길을 준비했습니다.

이 시편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과연 우리가 그 순례의 길을 걸어 성전에 도착하고 있는지 묻습니다. 물론 지금은 건물로서 성전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만 임재하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셔서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셔서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로 모이는 그곳에 성령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 자리를 우리를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듭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 드릴 영원한 예배와 찬송을 기대하고 사모하며 우리의 삶 전체를 살아가야 합니다. 그 과정은 녹록치 않을 수 있습니다. 들짐승과 더위와 목마름이 그 길을 걸을 때 찾아 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더 주셔서 마침내 그분 앞에 우리를 서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일주일의 삶이 녹록치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배를 사모하여 일상을 감당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또 그 힘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하시고 그분과 동행하도록 하셔서 참된 행복의 사람으로 우리를 세워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를 갈망하시고, 예배를 통해서 주실 은혜를 사모하면서 한 주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예배는 참된 기쁨과 위로와 힘과 능력이 넘칠 것입니다. 오는 주일에도 이 큰 행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83편

오늘 시편도 역시 아삽의 시입니다. 아삽의 시 중에서 마지막 시편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의 시편과 마찬가지고 공동체 예배 후에 우리의 삶 속에서 겪게 되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시편은 원수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매우 절박한 상황을 배경을 놓고 있습니다. 지금 공동체가 겪고 있는 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하는 하나님의 적들이 떠들고 머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직까지 침묵하고 계시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매우 긴급하게 침묵하지 마시고 잠잠하지 마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치려고 지금 회의를 하고 마치 맹수가 “으르릉” 거리듯이 모여서 작당을 하고 있습니다. 또 3절을 보시면 분명히 “주의 백성”을 치려고 간계를 꾸미고 있다고 합니다. 간계는 비밀 모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마치 바위에 숨겨 놓고 조심스럽게 돌보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치려고 지금 의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과 보호의 대상인 하나님의 백성을 그냥 공격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4절을 보시면 그들을 완전히 멸하고, 나라로서 더이상 유지되지 못하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후세대에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없애 버리려고 계획을 짜고 있는 것입니다. 상당한 위협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후세대에 기억되지 못한다는 것은 엄청난 수치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존재를 부정당하는 엄청난 모욕입니다. 시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고 있는 위협은 작은 위협이 아니라 존폐가 달려 있는 아주 강력한 위협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영적인 위협만 아니라 실제적인 위협입니다. 정말로 원수들이 그렇게 계획을 했고, 그대로 시행하려고 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면, 실제로 엄청난 위협에 직면하고 결국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상황입니다. 겪고 있는 이런 위기와 위협이 실제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의논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로 동맹까지 맺었습니다. 여기서 동맹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언약”과 같은 말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맺으신 언약과 같이 깨어지지 않은 그런 언약을 원수들끼리 맺은 것입니다. 6, 7, 8절에서 그 동맹을 맺은 민족들의 이름이 열거 됩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이들이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위협한 것이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민족들과 나라들이 실제로 존재 했고, 또 실제로 이스라엘을 위협했던 민족들의 이름들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나라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위협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실제적인 위협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9절에서 18절이 그 부르짖음의 내용입니다. 위협 속에서 부르짖음의 내용을 보면 이전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에 호소합니다. 사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통해서 미디안을 치시고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를 무찌르게 하시고 승리를 주셨습니다(8:12). 또 바락과 드보라를 통해서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무찔러 주신 것 같이 지금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자들에게도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셔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목장인 이스라엘을 취하여 그들의 것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역시 오늘 시편에서도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셔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성에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에게 하신 것 같이, 위협 속에서 심판을 내리시기를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간섭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위협하는 자들이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해 주시고, 산을 태우는 불길 같이 하나님께서 광풍을 내려 주시고 또 주님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닥친 위협이 실제적인 것 같이 하나님의 간섭도 매우 실제적으로 일어나 그들의 실제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시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간섭도 실제적입니다.

그렇게 간섭해 주셔서 위협하는 원수들에게 수치를 안겨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하심으로 그들이 하나님께서 온 세계의 지존자이심을 알게 해 주시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수치를 당하여 주의 이름을 찾도록 기도합니다. 또 완전히 망하게 함으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참된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런 요청은 다양한 차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는, 시인이 이렇게 실제적인 어려움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을 이용해서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 세상의 주되심이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원수들을 하나님의 주 되심을 알게 되어 그들 또한 하나님을 인정하고 돌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돌보시고 그들이 당하고 있는 실제적인 위협과 어려움을 해결하심으로 위협의 당사자인 원수들도 하나님만이 참된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알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원수들이 한 행동이 얼마나 무가치한 일인지 깨닫도록 만듭니다. 그들이 공격하고 대항하는 백성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게 될 때, 그들은 이제 정말로 큰일 났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는 실제적인 존재와 세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그들은 감히 하나님께 대적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협함으로 하나님께 도전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저와 여러분은 늘 사탄과 세상의 위협의 대상이 되고 공격과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위협은 실제적이고 또한 강력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오늘의 시편 기자처럼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원수들의 공격과 위협이 실제적인 것 같이 것이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 또한 실제적입니다. 이것은 단지 영적인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하심으로 실제적인 위협과 공격 가운데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위에 숨기시고 원수들의 강력한 연합 공격에서 지켜 주십니다. 원수들이 동맹을 맺고 언약을 맺고 우리를 공격하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맺은 언약이 훨씬 강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를 연합시키셔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분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우리에게 간섭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강력한 능력으로 우리의 상황을 바꾸시고 개입해 주십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원수와 같은 자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도록 만들어서 그들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만드시기도 합니다.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를 방해하고, 여러가지로 시험에 빠지게 만드는 사람들과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은 매우 실제적이고 위협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꺾으시고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원수와 같은 사람들, 나를 넘어지게 만들고, 낙심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통해서 사탄은 교회를 힘들게 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고 신앙생활을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위협입니다. 또 지하교회나 세계 곳곳에서 많은 그리스도 인들이 고난과 핍박 가운데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때때로 그렇게 교회를 핍박하는 자를 헤롯 왕과 같이 멸하시기도 하시고, 사도 바울과 같이 그들로 돌이키게

하셔서 교회를 지키시고 당신의 주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많은 실제적인 위협과 어려움을 하나님께 말씀드립시다. 하나님께서 속히 간섭하여 주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기도합시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신 것 같이 오늘 우리에게도 행하여 주시도록 기도하며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실제적인 문제와 어려움, 고민, 위협 속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주시도록, 그리하여 하나님만이 온 세상에서 유일한 참된 신이심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 응답을 우리 삶속에서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82편

오늘 말씀도 역시 아삽의 시입니다. 아삽은 레위인 중에서 성전에서 노래와 악기를 맡은 사람입니다. 아삽의 시가 73편부터 이어지는데, 우리는 지난 주에 특별히 79편에서 81편까지의 연결성을 살펴 보았습니다. 79편-80편이 이스라엘 백성 편에서 구원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 것이라면 81편은 하나님 편에서 구원 역사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모두 공동체 시로서 예배 중에 불렀기 때문에 예배와 관련된 시편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과 하나님 편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복을 주시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렇게 앞의 시편이 공적인 예배에 대해서 말했다면 오늘 시편 82편은 예배 후에 우리가 사는 삶의 문제, 일반적인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과 책임,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시편은 천상의 회의를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을 합니다. 1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고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신들의 모임은 여러 신들의 모임이라고 보고 하나님께서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분으로서 그들을 심판하는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상은 다른 신들이라고 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헛것으로 여기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신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상적인 존재들인 천사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욥기 1장 6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하나님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 섰다고 하는데, 바로 그런 장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여기서 말하는 신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것을 왕들과 같은 지도자의 모임으로 보는 것입니다. 시편이 쓰여질 당시에는 각 나라의 왕들을 신적인 존재로, 신적인 존재의 아들로서 취급하던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예로 볼 수 있는 것은 창세기 6장 2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동일하게 오늘 시편 82편에서도 인간의 지도자들, 왕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에서 신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오늘 시편에서 신들을 천상적인 존재들로, 천사들로 존재로 보면 오늘 전체 시편을 매끄럽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구절들을 볼 때, 천상적인 존재들이 가난한 자와 고아들을 위하여 재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오늘 시편에서는 신들의 모임, 즉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왕들과 지도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이렇게 1절에 나오는 신들을 백성들의 지도자들, 왕들로 본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시면 그들이 불공평한 판단을 하고 악인의 낯을 보기를 언제까지 할 것이냐고 책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그렇고 당시 다른 이방 왕들도 그렇고 왕이 하는 일 중에 아주 중요한 일 하나가 바로 재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판이 불공평하고 악인의 편을 드는 재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나라나 이방나라에 확대해서 적용하기 전에 먼저 1차적으로 이스라엘에 적용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여러 재판관들이 있었고 어렵고 해결이 안되는 문제는 왕이 판단했습니다. 아삽과 그의 후손들은 왕의 측근으로 왕의 일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에 왕들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실 만하도록 재판을 합니다. 열왕기상 3장 9절에 보면 솔로몬은 재판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왕들은 백성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하기 보다 자기를 위해서 부리고 착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판단을 그치고 이제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들을 구원하고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고 정당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왕들이 다스리길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 반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을 보시면 그들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해서 흑암 중에 왔다가 갔다가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나라는 엉망이 되어 그 터, 기초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을 대리하는 신들과 같은 존재로서 세웠고, 모두 지존자, 곧 가장 존귀한 분의 아들들로서 세웠지만 정작 그들은 신들과 같은 존재로서, 또 가장 존귀한 분의 아들들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을 보면 사람과 같이 죽으며 고관의 하나와 같이 넘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는 신적인 존재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들을 세웠는데, 제대로 그 값도 못하고 그냥 이방인 지도자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다시 한번 일어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심판해 달라고 하는 호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셔서 왕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세상에 보여주시고, 그들을 통해서 모든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세우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79편에서 81편이 예배에 시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82편은 공적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린 후에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세상 속에서 살아 갈 때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들로서 살지 못하는 이스라엘과 그 통치자들에게 주는 책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예배 후에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왕같은 제사장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살아가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과 보호를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 왕을 통해서 세상 속에서 제사장 나라로 세워져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지배하는 나라로 보여주기 위해서 세워졌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자들은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대신해서 성도들을 다스리고 보호하고 지키며 사랑하는 존재들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는 신적인 존재들로서 죄와 악을 미워하고 거부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을 구원하고 악인들의 손에서 구원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이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게 하시도록 교회를 세우시고, 그들을 신들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시편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한다며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고발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답하실 때 인용하십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 그분에 있는 모든 자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부름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통치자로서 교회를 통해서 모든 세상에 당신의 통치를 드러내시기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서 임하길 원하십니다. 온 세상의 왕이신 예수님의 온전한 다스림이 우리 개인을 넘어 우리 가정과 교회와 학교와 사회에 넘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때문에 먼저 죄가 우리 자신과 가정과 교회를 다스리지 못하도록 거부 해야 합니다. 또 모든 사람을 공평함과 의를 가지고 대하며, 정직하고, 주위에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에게 손을 내밀고,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여 죄의 종노릇하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인 정치 지도자들은 정책을 통해서 이 나라가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돌보는데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 통치자로서 우리 삶 가운데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을 드러내며 참된 신적인 존재들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81편 

오늘 시편의 표제를 보면 역시 아삽의 시 라고 되어 있고,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시 아삽의 시이고 공동체가 부른 노래입니다. 아삽의 시라는 것은 앞의 시들과 어떤 연결성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배 가운데 부른 노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깃딧은 지금은 알 수 없는 곡조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시면 축제의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초하루 보름 명절에 나팔을 부는 것은 이스라엘의 절기들에 나팔을 불러 사람들을 모으고 축제 가운데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오늘 시편은 이스라엘의 예배 방식, 형식을 볼 수도 있습니다. 먼저 1절에서 3절을 보시겠습니다. 찬양과 부름으로 시편이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기쁘게 노래하고 악기로 하나님을 향해서 외치고 나팔을 불자고 합니다. 특별히 나팔을 부는 것은 악기일 뿐만 아니라 백성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하고 예배로 부르는 것입니다. 언제 부르느냐하면 초하루, 보름, 그리고 우리의 명절입니다. 초하루는 월삭이라고 해서 매월 1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월 1일을 예배일로 지켜졌습니다. 그리고 보름과 우리의 명절이라는 표현은 보름인 우리의 명절, 혹은 보름동안 지키는 우리의 명절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름에 지키는 명절은 유월절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첫째 달 14일 저녁이 유월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날은 동시에 안식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배로 부르는 것은 매월 초하루, 매 안식일, 매 유월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보름에 드리는 명절이 또 있는데 일곱째 달 14일입니다. 속죄일입니다(레23:27, 32). 역시 안식일입니다. 레위기 23장에 보면 쉬어야 되는 안식 날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일을 중단하고 쉽니다.

 

4절에서는 왜 그렇게 하는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5절에서 하나님께서 애굽 땅을 치시고 이 절기에 드리는 예배로 그 증거를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매월 초하루와 안식일과 유월절을 만드셔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거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는 일이 매우 중요했던 것입니다. 매달, 매주, 매해 반복되는 매월 초하루, 안식일, 유월절, 속죄일 절기를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 사역의 증거로 삼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매 주일 예배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께서 명하셨고, 반복되는 예배는 통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구원의 일을 기념하고 찬송함으로 증거를 삼으십니다. 예배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고백하는 증거의 행위입니다. 이것이 매주일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이유입니다. 이 예배로 하나님은 매주 우리를 부르시며 당신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의 증거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5절 마지막 부분부터 16절까지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백성들이 모여서 듣는 일종의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타지 않은 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날 때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당신을 조상들의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음성의 내용은 이스라엘을 ‘그’라고 부르면서 어깨에서 짐을 벗겨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네’가 라고 하면서 2인칭으로 바뀌는데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이 고난 중에 부르짖을 때 건져 주시고 은밀한 곳에서 응답하고 므리바 물 가에서 시험했다고 합니다. 이는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시고 광야에서도 함께 하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시험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는지, 더 성숙하여 졌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셀라’라고 단락이 마치면서 8절 부터는 새롭게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초청하고 도전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이 듣기를 요청합니다. 다른 신들을 그들에게 두지 말라고 도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신 구원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만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지 다른 우상에게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입을 크게 열라고 합니다. 그러면 채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 역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아무런 먹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입에 채워주셨다는 것을 상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일시적으로 마음대로 하시도록 버려 두셨을 때 더 큰 재앙이 그들에게 닥쳤습니다. 이제 예배로 나아오는 모든 백성들이 그런 전초를 밟지 않기를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하나님께서는 13절에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라고 촉구하십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14절을 보시면, 그렇게 하면서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대적들을 치고 회복을 주십니다. 하지만 15절에 여호와를 미워하면서도 복종하는 척만 하는 자들은 영원히 그들의 길에서 돌이킬 수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결국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율례를 지키는 자들은 기름진 밀로 그들에게 먹이실 것입니다. 기름진 밀은 고운 밀가루, 고급 밀가루를 의미합니다. 그것으로 먹이시고, 또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만족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바르게 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먹이시고, 보호하심을 약속하십니다. 복의 약속으로 예배가 마무리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는 이스라엘의 예배를 옅보게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크게 초청과 말씀과 복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요소가 우리 예배에서도 녹아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응답하여 온 자들에게 하나님은 축복의 인사와 죄의 용서와 이전의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도전과 권면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의 복을 선포합니다.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늘날도 동일한 것을 약속하십니다. 광야에 있었던 바로 그 백성들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셨고, 구원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또한 채워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애굽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날마다 우리에게 구원과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예배를 돌리기보다 우리 계획과 방식을 추구하고 다른 무엇에 관심을 쏟으며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앞에서 시편 78편에서80편이 백성들의 입장에서 구원의 역사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호소한 것이라면, 81편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에게 옛 역사를 말씀하시고 그 백성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주일 예배와 또 기도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된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되새겨 주시고, 새롭게 도전하십니다. 또한 매주 새롭게 복을 선포하십니다. 이렇게 예배는 쌍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우리가 드리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예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사역의 증거로 삼으셨습니다. 동시에 우리 스스로에게도 증거가 됩니다. 매주일 있는 예배이지만 매주일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분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또 우리의 광야와 같은 일상 속에서 함께 하시고, 우리의 죄의 짐과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고, 입을 벌리기만 하면 채워 주시겠다는 약속, 영원히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신다는 삼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입을 벌린다는 것은 마치 어린 새가 어미 새가 주는 먹이를 먹기 위해서 오직 어미에게만 소망을 두고 신뢰하며 부리를 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중심이 주일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를 기점으로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 “내 백성아 내말을 들으라 내 도를 따라서 살아가라 그러면 내가 속히 원수를 물리쳐주고 너를 먹이고 만족감을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을 말씀을 붙들고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구원의 사역과 은혜와 복을 삶 가운데 누시고, 세상에서 증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80편

오늘 시편은 표제를 보면 아삽의 시입니다. 인도자를 따라 소산님 에둣에 맞춘 노래라고 합니다. 소산님 에둣이라는 것은 언약의 백합들이라는 뜻으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곡조입니다. 인도자를 따라 부른 노래이기 때문에 역시 공동체로서 함께 부른 공동체 시입니다. 그리고 내용을 보면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도움을 요청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탄식시입니다. 둘을 종합하면 공동체 탄식시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어떤 문제와 위기가 생겼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던 시입니다. 그것이 후대에 모여서 예배할 때 불려졌던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반복되는 후렴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3절, 7절과, 19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입니다. 반복되는 후렴구를 중심으로 시편도 단락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그 단락에 맞추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절에서 3절을 보십시오(PPT). 1절을 보시면 오늘 시편에서도 78-79편에서 보았던 양과 목자의 이미지가 이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자는 보통 목자가 아닙니다.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룹은 천사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쫓겨날 때 생명나무를 지켰던 천사가 그룹입니다. 이 그룹은 하나님 옆에서 수종을 드는 천사로 그려집니다. 특별히 이 그룹은 언약궤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영광을 보여줍니다.또 1절과 2절은 북쪽 지파를 대표하는 지파인 요셉 에브라임 므낫세를 언급합니다. 학자들은 이 시편이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한 후에 남유다 예루살렘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불렀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셔서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양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양은 한 없이 나약하여서 목자가 없으면 죽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반쪽이 황폐하게 된 상황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후렴구인 3절입니다. 먼저 우리를 돌이켜 달라고 합니다. 7절에서는 회복시켜 달라고 번역되었지만 같은 문구입니다. 그들을 돌이켜 달라고 하는 것은 다시 회복시켜 주심을 의미할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이켜 주시지 않으면 스스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또 주의 얼굴 빛을 다시 비추어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회복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와서부터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완성된 성막에서 가득했던 영광의 그 빛을 다시금 비추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이것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과 인도를 회복해 달라는 말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7절에서는 혹독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탄식이 이어집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심판은 그들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노하시고 눈물의 양식을 먹게 한 것입니다. 아주 슬퍼하면서 하나님께 탄식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상황은 이어지는 구절6절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고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몰락한 이스라엘을 서로 차지하려고 하는 주변 나라들의 모습과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비웃는 주변 나라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다시 한 번 7절에서 후렴구가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3절과 달리,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앞에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분과 의미 상으로 같습니다. 엄청난 능력과 힘과 영광을 지니고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분께 회복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다시 8절부터는 지금의 상황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와서 지금 있는 가나안 땅에 심으셔서 왕성했던 포도나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가꾸어 주실 때는 그들의 세력이 잎과 가득했던 포도 나무와 같이 왕성하게 뻗어 큰 산을 덮는 나무와 같았고, 또 지역적으로는 그들이 통치하던 땅이 유프라테스 강까지 넓게 확장 했었습니다. 바로 다윗과 솔로몬 때에 부강했던 때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고 있던 담을 허셔서 지나가던 사람이 포도열매를 따서 먹게 하시고, 멧돼지들이 와서 다치게 만들고 들짐승이 와서 먹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멸하는 모습을 이렇게 비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전의 이스라엘의 번영과 영광이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는 만군의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개입하여 주시고, 다시 돌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직접 심으신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지’라는 것은 원래 ‘아들’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심으신 이 포도나무가 불타고 베임을 당한다면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 또한 타격을 입게 될 것입니다. 중보자 모세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위해서 했던 중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 관계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 인자는 15절의 가지와 같은 말입니다. 1차적으로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이스라엘에게 다시 회복을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렇게 하시면 다시는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만 부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후렴구로 19절이 옵니다. 주님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시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시를 마무리 합니다. 이 시는 한마디로 영광의 회복을 꿈꾸는 시입니다. 하나님이 돌아오셔서 다시 돌보아 주시고, 다시 호의와 자비를 베푸셔서 심판을 거두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거두어 가셨던 얼굴 빛을 다시 비추어 달라고 하는 탄식시이며 동시에 회개시입니다. 단지 현재의 삶에 대한 불만이나 어려움에 대한 토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떠나신 상황을 한탄하며 돌아오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영광의 얼굴 빛을 궁극적으로 우리 예수님께서 다시 비추어 주십니다. 마태복음 17장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이 기도를 성취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을 통해서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멸망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들 중에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어가고, 세상의 질타와 모욕을 받을 때 우리가 의지할 곳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만군의 하나님, 그룹 사이에 계신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망했다고 느껴지고 눈물의 기도도 응답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일이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 때에도 다른 길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 안에서 양자로 삼아 주신 그 은혜의 하나님을 붙드는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임을 기억하고 다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를 돌이켜 주시도록, 다시 하나님의 영광의 빛, 회복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고, 우리 삶에 간섭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하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붙들고 나아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이 만군의 하나님, 능력이 많으시고 높으신 하나님, 우리의 참된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더욱 붙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79편 

시편 79편 망했을 때 드리는 기도

 

오늘 읽은 시편도 역시 아삽의 시입니다. 앞에서 읽은 시들과 동일한 저자 혹은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르는 탄식시입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부르짖는 시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의 탄식시가 아니라 공동체 탄식시 입니다. 4절부터 이어지는 ‘우리’라는 표현에서 공동체의 탄식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의 역사적인 배경은 조금은 명확합니다. 1절과 2절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듯이 이방 나라들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신 땅인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돌무더기로 만든 때입니다.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가 망할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보면 1절에서 4절까지 말씀을 보면 이방 나라들이 쳐들어 와서 성전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주님의 종들, 제사장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죽이고, 또 주님의 거룩한 무리(성도)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체를 장사하지 않고 그냥 두어서 동물에게 먹이로 주었습니다. 아주 큰 위기와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셨습니다. 나라는 망했습니다. 이웃 나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이런 기가 막힐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가 오늘 시편입니다.

 

사실 이렇게 이방 나라에 의해서 망하게 된 이유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어느 때까지 진노하셔서 회복을 주시지 않으실 것인지 탄식합니다. 시인이 무턱대고 하나님께 회복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8절을 보시면 회개함이 있습니다. 조상들의 죄악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억하지 마시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속히 그 믿음의 공동체에 회복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매우 가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매우 달게 받았고, 이제 충분하게 받았다고 합니다. 마치 자녀를 훈계하기 위해서 회초리를 들었을 때 너무 가혹하게 하면 아이가 정말 맞아 죽을 것 같은 그런 이미지입니다. 더 이상 진노하지 마시고 이제 그만 돌이켜 주시고 회복을 달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회복을 주시라고 간구하는 이유를 하나님의 영광에서 찾습니다. 9절을 보시면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고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 뼈아프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참된 백성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진노를 그치게 해달라고 한 것은 옛적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으로 그들을 진멸하려던 하나님께 모세가 한 말입니다. 모세는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 이 백성을 다 죽이면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끌어낸 백성들을 구원한 능력이 없어서 죽게 만들었다고 조롱 당할 것이라고 했던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돌이켜 주시고 회복을 주시길 바라며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각 나라와의 싸움은 그 나라들의 신들과의 싸움이고 이스라엘이 황폐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지키는 하나님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절에서 시인은 이제 그 진노의 방향을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하나님의 무능함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돌리도록 요청합니다.

그렇게 해 주셔서 주의 종들을 죽인 자들에게 보복을 해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포로로 잡혀가 갇히고 죽기로 예정된 자들을 지켜 보호하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보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벌을 일곱배나 갚아 달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이 시를 지어 부르는 공동체가 누구인지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립니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고 주의 목장의 양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기억하셔서 응답하시고, 그 감사와 영광을 대대에 찬송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 대대에 전한다는 말이 대대에 찬송한다는 말입니다.

 

이 시는 국가적으로 완전히 망한 상황에서 드리는 탄식 기도입니다. 완전히 망하게 되었고,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과 공동체의 관계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지속적으로 침략을 받은 예루살렘이 주의 기업이며, 주의 성전, 주의 종들, 주의 성도, 주의 이름, 주의 백성, 주의 목장의 양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공동체의 관계에 호소하며 기도를 합니다. 또 단지 벌이 무섭고 힘든 상황 때문에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응답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결국 오늘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겪게 되는 수 많은 어려움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임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 무턱대고 기도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셔야 마땅한 지 하나님께 아뢰면서 기도하며 탄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기도에 응답하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당신의 것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성도 중요하고 간절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목자가 되십니다. 그분은 잃어버린 양을 끝까지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보았던 시편 78편 마지막 구절 72절에서도 보았듯이 그분은 당신의 마음의 완전함과 그 손의 능숙함으로 양을 기르시고 지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세밀한 음성의 변화와 신음과 아픔을 그분은 다 아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탁월한 목자이기 때문에 우리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망했다고 생각될 때, 때로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아무에게도 말 못하는 고민과 아픔과 슬픔이 있을 때, 때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 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동일하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며, 그분의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오늘 시편 탄식의 응답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 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이 돌아왔고 성전을 재건하였고, 하나님께서 페르시아를 통해서 바벨론을 치셨습니다. 수치를 갚으셨습니다. 조롱하던 자들에게 수치를 갚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성전에 다시 임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또 범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당신의 영적인 양들과 백성들을 모으셨고,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양들을 모으셨습니다. 더 이상 성전은 없으며 저와 여러분이 성령이 거하는 성전으로 만드셨습니다. 완전한 회복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 교회가 주의 종들이며, 성전이며, 기업이며, 백성들이며, 양들이며,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망한 것 같고 세상 사람들의 조롱 속에서 살아갈 때, 오늘 날 교회가 욕을 먹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참 어려움 이 시대에도 우리가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탄식에 응답하십니다. 회복을 주십니다. 탄식이 변하여 찬송이 되도록 하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우리가 주님의 것, 주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회복을 주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78편 40-72절

 

지난 주에 시편 78편 39절까지 보았습니다. 전반부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이 시편의 목적이 후세대에게 교훈을 주는 것임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반면 교사를 삼아서 후 세대 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역시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 이어집니다. 전반부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던 이스라엘의 모습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후반부에서는 조금 더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0절에서 4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겨서 모든 분노를 다 쏟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하나님을 슬프게 했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거듭 반복적으로 반역하여 노엽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하지 않고 살아갔습니다.

 

43절에서 51절까지 말씀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에 이집트의 압제와 강압에 고통 당할 때 그들을 건지셨던 역사입니다. 그 역사적인 날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하고 정하신 절기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날도 잊고 살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 버리고 살아간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나일 강과 물들을 피로 변하게 하시고, 파리와 개구리, 메뚜기 우박, 전염병, 그리고 장자의 죽음으로 당신의 크신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내리신 재앙은 다름 아니라 그 당시 이집트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에 섬기는 신들을 치셔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며 모든 우상들을 능가하는 크신 능력이 있으신 분이심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또 52절에서 하나님의 양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떨 끝 하나 건들지 않으시고,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합니다. 또 광야에서 양 떼 같이 그들을 지도했다고 합니다. 양은 말을 안 듣고 고집이 셉니다. 그래서 목자가 가끔은 막대기와 지팡이로 목을 당겨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양 떼와 같았다는 것은 광야에서 그만큼 지난 주에 본 것 같이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시험하고 고집스럽게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노엽게 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을 안전히 인도하고 마침내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땅으로 인도하셔서 땅에 있는 사람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심으로 쫓아 내시고 하나님께서 마친 줄로 재어서 구역을 정해 준 것 같이 땅을 분배하여 나머지 땅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선물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응답은 배은 망덕이었습니다. 그 전 세대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원망한 것 같이 그 후세대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다른 신을 섬김으로 불순종을 합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곳에서 제사하지 않고 자기 산당들에서 사적으로 제사를 했습니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많은 산당들이 있었습니다. 원래 가나안 족속들은 각 지역마다 신을 섬기고 여러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었기 때문에 곳곳에 산당이 있었습니다. 산당에서 제사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주신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방법으로 제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성소, 거룩한 장소는 언약궤가 있는 한 곳만 지정해 주셨습니다. 언약궤는 처음에는 실로에 있었고 나중에는 시온성을 거쳐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지정하신 한 장소에서만 제사를 드리게 한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 우상들과 같이 취급되지 않는 온 우주의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우상들과 같이 당신을 취급할 때 노여워하십니다. 결국 이렇게 우상 숭배를 하는 백성들 때문에 하나님은 실로에 세워진 성막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고집불통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저리가 나신 것 같이 묘사 됩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파멸과 위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칼에 넘기십니다. 이웃 나라를 통해서 고통을 받도록 잠시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자 다시 잠에서 깨어난 용사와 같이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와 같이 일어나십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을 친다는 것은 술 취해서 난동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주는 두려움을 잊게 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 강력한 신적인 용사로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싸우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원수들을 물리치십니다. 그리고 전쟁의 날에 물러났던 에브라임이 아니라 유다 지파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소유, 보물인 이스라엘을 지키게 하십니다. 또 시온 산을 택하셔서 그곳에 성전을 지어 언약궤를 두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를 약속하십니다.

 

다윗은 양치기로서 양을 잘 돌보는 자였습니다. 고집스러운 양을 돌보는 목자, 백성을 돌보는 왕으로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의 마음의 완전함과 손의 능숙함으로 양들을 지도하였습니다. 거듭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며 고집스럽게 우상을 섬기는 양과 같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 왕을 세우셔서 범죄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신 것입니다.

 

시편 78편의 후반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선택한 백성들의 거듭되는 불순종에서도 끝없이 용서하시고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열정과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인간 왕을 세워서 백성을 돌보게 함으로 범죄를 막고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그 다스림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된 목자였습니다. 하지만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는 다윗도 결국 실패한다는 것을 압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또 그것을 감추기 위한 우리아의 살해로 마음의 온전함과 능숙한 손으로 백성을 돌보는데 실패합니다. 또 우리는 다윗 이후 어떤 왕도 하나님께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하고 백성을 바르게 다스리며 손의 능숙함으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것을 압니다. 왕들은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심을 거부하고 권력을 악용했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을 더 우상 숭배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결국 거듭 범죄하는 백성에게 사랑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방식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완전한 마음과 그의 손의 완전한 능숙함으로 백성을 지도하기 위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면서 마음의 완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얻은 의로움을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또 예수님은 참된 왕으로서 저와 여러분을 마음을 다해 돌보시고 우리를 잘 아시기 때문에 서툴게 우리를 다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완전히 우리와 같이 되셔서 고난과 어려움, 배고픔, 피곤함 배신 등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완전히 공감하시고, 거듭 불순종하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진노를 대신 받으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온전한 시온 성전으로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직접 보여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또 승천하시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우리 각자를 성령이 거하는 전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 가운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두 마음, 우상을 섬기지 않고 오직 한 분 주님과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속적으로 역사합니다. 이렇게 능숙하게 우리를 지도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거듭 범죄하고 끊임 없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노력,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것을 위해서 오늘도 당신의 전능하심을 사용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런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열정, 우리를 향한 하나님은 강한 능력을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고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기억하며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고 신실한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시편 78편 1-39절

시편 78편 1절-39절

 

오늘 말씀의 표제를 보면 역시 아삽이 지은 시입니다. 그리고 마스킬은 교훈이라는 뜻이지요. 교훈시입니다. 오늘 시편은 역사를 회고하는 긴 교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역사를 돌아보면서 교훈을 얻는 시 혹은 지혜를 얻는 지혜시라고 할 수 있지요. 한번에 다루기에는 너무 길기 때문에 오늘 39절까지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먼저1절에서 11절을 말씀이 이 시의 서론 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격적인 역사적 교훈을 얻기 전에 이 시편의 목적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구절을 보면 마치 잠언에서 처럼 자신의 지혜의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호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에 나오는 ‘비유’라는 말은 잠언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잠언은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지혜입니다. 격언이라고 번역이 되기도 합니다. 삶의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 비유라는 것은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비밀스러운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믿는 자들은 쉽게 깨닫고 믿지 않는 자들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또 혹시 제자들이 이해를 못하면 사용하신 비유를 설명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시인도 비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율법과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미 조상들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을 드러내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시인이 이렇게 다시 되새겨 주는 이유는 바로 후대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름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로 돌아갑니다. 과거의 역사를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헤프닝 정도로 이해하고 살아가고 있고, 또 언제든지 그렇게 생각할 위험이 있는 다음 세대에게 역사를 되새기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행하신 영광과 능력과 기적을 전하기 위해서 이 시를 지었다고 목적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이렇게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입니다. 5절에서 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진작에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의 조상들에게 당신께서 구원자이심을 증거하신 것, 그리고 그 분의 백성의로 살아가기 위한 특별한 삶의 규칙을 정하여 주실 때부터 이미 후대에 그것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훈을 전달 받은 후세대들이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않도록 하고, 그것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조상들의 잘한 것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배신하고 패역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았는지 반면 교사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참 서글픈 역사입니다.

 

9절에서 16절까지 보시면 어느 전쟁인지 알 수 없지만 에브라임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북쪽 지파는 언젠가 전쟁에서 남유다를 돕지 않고 물러났습니다. 이것은 비단 북쪽 지파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남유다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파 모두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거절했던 같은 매 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적인 싸움을 싸우지 않고 물러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기와 활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의 날에 싸우지 않았습니다. 타협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받아들이고 살았습니다. 11절에서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일과 보이신 기적들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서 영적인 싸움을 하지 않고 율법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의 방식을 버린 것입니다.

시인은 12절부터 16절까지 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기적을 되새겨 줍니다. 애굽 땅에서 나올 때 홍해를 가르시고, 건너게 하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밤낮 인도하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버렸습니다. 그들은 지속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탐욕대로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여,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그들을 먹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매일 아침 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매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징표였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하루치만 가져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틀치를 저장했고, 썩어 악취가 났습니다. 이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고기 때문에 애굽을 그리워 했습니다. 이런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고기를 주실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메추라기를 보내셔서 고기를 배부르게 먹도록 하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백성에게 진노하여서 재앙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한 백성들을 물을 주시고 먹을 것을 기적적인 방식으로 주신 것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4절을 보면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면 다시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들은 그런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고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다시 기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입니다. 좀 괜찮아졌다고 싶으면 하나님께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고, 믿는다고 아첨을 하고 거짓을 말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고 정함이 없고 언약에 성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말라기와 같은 선지서에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직전에 제사를 드리지만 눈멀고 다리 저는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삶에서 정의를 행하지 않고 사람들을 속이고 불신자와 다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겠다는 언약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긍휼하셔서 죄악을 덮어 주시고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그분의 진노를 여러번 돌이켰다고 합니다. 그분의 분노를 다 쏟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육체이며 죽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연약한 자들, 바람과 같은 자들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밥 먹듯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신앙으로 똘똘 뭉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신 때문에 참으시고 참으시고 또 참으셨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들을 크게 정리하면 이 시가 후세대가 역사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억하고, 옛 조상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배반했고, 지속적으로 범죄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긍휼하심 때문에 몇 번이고 돌이켰다는 것입니다.

 

그 후손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궁극적으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광야에서 먹이시고 입히셨던 하나님은 이스라엘 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시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 시편은 우리를 위한 시입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물러나서 싸우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불신앙으로 똘똘 뭉쳐있는 옛 이스라엘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금새 잊고 살아가며, 말로만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한다고 하고, 삶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지 않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언약에 신실하지 않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해 주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 멸망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임을 오늘 시편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면 잠시 정신 차렸다가 좀 편해지면 다시 하나님을 잊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은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삽을 통해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옛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살지 말고, 그들을 반면 교사를 삼아 살아가라고 이 시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 이 말씀은 저와 여러분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가 우리 다음 세대에게 반면 교사가 아니라 좋은 본이 되기를 도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지 못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으며 불신자와 같이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며 그분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라고 촉구합니다. 이 시편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기억하고 날마다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삶을 책임지시고 돌보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여 다음 세대에게 좋은 본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77편

오늘 시편도 역시 아삽의 시입니다.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두둔은 역대상 16장 41절을 보면 성전에서 악기 연주를 맡은 사람입니다. 여두둔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만든 노래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삽 작시에 여두둔 작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시편도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중간 중간 간주를 의미하는 셀라가 있습니다. 이 셀라를 중심으로 각 연을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에서 3절까지 연에서는 시인의 부르짖음이 나옵니다. 아삽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려움과 고난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2절에서 보면 나의 환난 날에 주님을 찾고 밤에는 기도하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떤 환란이 닥쳤고 그래서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쉬지 못한 것은 자신의 영혼이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는데도 곧바로 기도 응답이 오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여전히 기억하고 기도하고 있지만 아직 그 마음 속에는 불안하고 근심하고 마음이 상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밤에 잠도 못이루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여전히 밤에 잠을 잘 수 없습니다. 괴로움을 말로 표현을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기도 가운데 지난 날을 돌아 봅니다. 한 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을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그날을 기억하면서, 다시 그날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하나,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히 버린 것은 아닐까 다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은 아닐까, 그분의 인자하심은 이제 영영 다시 못 볼 수 없는 것인가?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이 워낙 강하여서 하나님께서 마치 자기를 완전히 버린 것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욥과 비슷한 상황을 아삽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자들도 겪을 수 있는 어려움과 고통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은 것입니다. 시인은 분명히 기도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0절에서 부터는 반전이 일어 납니다. 10절에 있는 나의 잘못이라는 말은 바로 이것이 바로 내 슬픔이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한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할 만큼 진짜로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에 시인은 지존자의 오른 손의 해를 기억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해는 years 입니다. 오른손은 강한 구원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셨던 그 해들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작은 소리도 읊조립니다. 묵상한다는 말입니다. 이전에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사역을 기억하고, 생각하면서, 중얼중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13절에서 처럼 탄식이 찬송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길은 지극히 거룩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분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놀라운 일을 행하신 분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하신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묘사되고 구원의 능력은 여러 구원의 사역을 요소를 담고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이 출애굽과 노아의 방주입니다. 왜냐하면 16절을 보시면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 했다고 묘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낸다는 것과 화살도 날아갔다고 하는 것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사용되었던 용어들입니다. 무지개가 활을 의미합니다. 또 18절을 보면 회오리 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고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다고 합니다. 이런 요소들도 모두 출애굽에서 홍해를 건넌 뒤에 시내산에서 백성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나타났던 현상들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양떼와 같이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 시는 고난으로 시작하지만 찬송으로 마칩니다. 그 찬송 속에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건지심을 확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난을 찬송으로 바꾼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묵상입니다. 이 묵상이 고난을 찬송으로 바꿉니다. 말씀이 어떻게 고난에 대한 탄식을 찬송으로 바꿀까요? 고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서 찬송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일까요?

 

다시 77편을 전체적으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9절을 잘 보시면, 내가, 내 음성으로, 내가 주를 찾았다. 내 손을 거두지 않았다.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했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했다. 내가 괴롭다.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했다… 이라고 하면서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상황을 보며 내가 힘을 다해서 기도했고, 내가 하나님을 기억했다고 합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이 중심입니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과 자신의 열심, 자시의 마음이 중심으로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10절을 기점으로 11절에서 20절에서 주어들을 보면 주께서, 주의 도는, 주는, 주의 팔로, 하나님이여, 주의 길이 이라고 하면서 주체가 하나님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난 받는 가운데 시선을 자기 자신과 상황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께로 바꾼 것입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시선이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중심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 시를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시선을 옮기는 시”라고 별명을 붙이기도 합니다. 고난과 환란의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했다. 내가 기도했다. 내가 주님을 찾았다, 내가 기억했다에서 하나님이 나를 돌보셨지, 하나님이 나를 찾으실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시지, 하나님의 길은 지극히 거룩하시지, 하나님은 구원을 시작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관심을 우리 자신에서 하나님께로 돌리게 만듭니다.

 

특별히 오늘 시편에서 언급된 출애굽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구원의 역사의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 인도하신 구원의 사건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사탄의 압제와 억압에서 고통 받는 우리를 건져내셔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참된 가나안 땅,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마지막 날까지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때로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장차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에게서 누릴 영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이유 모를 고난과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끝이 났는가?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나? 약속이 영원히 폐했나? 긍휼을 그치시는 것인가? 이런 의구심이 들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십자가가 바라보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탄식은 변하여 찬송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때에 반드시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의 길을 완주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76편

 오늘 시편 말씀도 표제를 보면 아삽의 시입니다. 역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는 공동체가 함께 모여 불렀던 노래라는 뜻입니다. 시편 삼권이 시작하면서 아삽의 시가 연속으로 73편에서 83편까지 이어집니다. 아삽의 시는 주로 위기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 76편도 마찬가지로 위기에 빠진 공동체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시편을 잘 보면 세 단락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기준은 ‘셀라’라는 말 때문입니다. 이 셀라라는 말은 음악적인 지시 사항인 것은 아는데 정확히 어떤 기능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일종의 간주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간주를 중심으로 1절에서 3절, 4절에서9절, 10절에서 13절 이렇게 세 부분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총 세 연으로 되어 있는 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중심 주제는 신적인 용사로소 백성에게 승리를 주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로 번역되면서 그런 모습이 잘 안 드러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원어를 설명하면서 본 시편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에서 3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 유다에 알려지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신 것을 말합니다. 이 알려지다는 것은 단지 지적인 의미나 의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관계적인 차원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 ‘야다’라는 말은 지적인 앎이 아니라 관계적인 앎, 주로 부부 관계에서 서로 안다고 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이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높임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신다고 합니다. 이름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 성품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이름들이 많이 있죠. 그 중에서 야훼, 스스로 있는 자, 앞으로 하시는 일을 통해서 어떤 분인지 보여주실 분이라는 뜻입니다(출3:14). 여호와라는 이름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높임을 받으셨는지가 2절과 3절에 드러납니다. 2절에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다고 하고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장막이라는 표현과 처소라는 표현은 사실은 ‘굴’과 ‘소굴’을 의미합니다. 주로 굴은 사자가 서식하는 곳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자와 같이 강력한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사자와 같이 강력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고 합니다. 또 시온성도 마찬가지로 강력한 사자이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은 바로 강력한 사자와 같이 신적인 전사, 강한 용사로 당신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평화가 있고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습니다. 그 성을 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노리는 이방 족속이 그곳에 쳐들어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앗수르와 산헤립이 그곳을 치러 왔다가 결국 그곳에 화살도 한 발 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결코 그 성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이어서 다음 연을 보시면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4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분이 정복한 산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존귀히 여김을 받으십니다.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이 듭니다. 잠이 들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강력한 장군들과 그들의 부하들도 모두 도움 도움을 얻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 했습니다. 출애굽때 바로와 군대부터 시작해서 앗수르의 군대로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면 결코 그곳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6절에서 언급되는 야곱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은 말입니다. 야곱의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그의 열 두 아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꾸짖으니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이 들게 되었습니다. 병거와 말은 당시 최고의 전쟁 무기였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첨단 군사 무기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그 백성은 마땅히 경외를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사자로서 또 전쟁에 능하신 신적인 용사로서 백성들을 시온에서 지키심을 노래했다면, 8절과 9절에서는 장차 심판하러 오실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신적인 용사, 강한 용사로서 자연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적을 무찌르고 남은 자들을 심판하는 것이 고대에 전쟁에서 승리한 용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땅의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십니다. 강력한 사자와 같은 분이실 뿐만 아니라 준엄한 재판장의 이미지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심판 주로 오실 때 아무도 그분을 대항하여 설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오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을 강한 용사와 사자와 같은 용사로서 지키시고 보호 하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백성들을 괴롭히던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판결 앞에서 땅의 모든 사람은 잠잠할 것입니다.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분의 심판이 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 연을 보면, 10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한 사람은 그 자신의 노여움을 복수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자신들이 서원한 것을 갚을 때가 됩니다. 서원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대한 응답하시면 어떤 것을 드리겠다고 하는 일종의 하나님과 약속이었습니다. 신자들은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건지시면 이렇게 하겠다고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에 응답하셨기 때문에 이제 백성들이 그것을 갚을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어떤 것을 맹세해서 꼭 기도 응답을 받으라는 것을 촉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반드시 하실 것이기 때문에 서원한 것을 갚을 때가 꼭 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확실성과 심판의 확실성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사방의 모든 나라들도 마땅히 경외할 분이신 하나님께 조공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단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열방의 하나님,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모든 나라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임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많은 높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무찌르시고 승리하셔서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시고 그에게 조공을 가지고 오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요한 계시록 14장 6절과 7절에서 땅에 거하는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광을 돌리고 경배하라고 하는 것 같이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악인을 물리치시는 모습 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들이 예수님을 믿고 돌아오는 것을 미리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편 76편은 신적인 용사, 사자와 같은 용사로서 예루살렘과 시온에서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승리의 노래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지역적인 곳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시온이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새로운 성전이신 예수님의 지체인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는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승리하신 용사로 그들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분의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에게 승리를 나누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원수 사탄에게서 승리하시고 얻으신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의와 은사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셔서 승리하는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합니다.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며 나아가도록 우리를 격려하시고,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도록 하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비 기독교적인 것들과 옳지 않은 삶의 방식을 정복하고, 우리가 서있는 모든 가정과 학교와 직장이 하나님의 복음으로 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에서 20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영적인 힘들과 권위들과 싸움이라고 하시고 전신 갑주를 취하라고 하십니다. 최후의 날에 우리의 모든 적들을 심판하실 것이지만, 우리에게 이 땅에서 승리를 맛보며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죄와 싸워 승리하며 불공정과 싸우고, 비 성경적인 문화와 사상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드러나도록 영적인 승리를 맛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69편

오늘 시편의 표제를 보시면 다윗의 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시 ‘인도자를 따라,’ 라고 되어 있어서 공동체로 모였을 때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리고 소산님에 맞춘 노래라고 합니다. 소산님은 음악의 종류인데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의로운 시인이 불의한 악인들에게 당하는 고통에 하나님께 소호하는 탄식시입니다. 본문이 길기 때문에 단락을 좀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단락은 1절에서 6절입니다. 이 단락의 내용은 하나님께 대한 첫번째 탄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부터 시인은 아주 다급하게 하나님을 부릅니다. 시인에게 닥친 어려움 때문입니다. 그 어려움은 자연재해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사실은 악한 사람들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까닭 없이, 정당한 이유 없이 시인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다급하게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것이 자신의 죄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님을 하나님께 소호합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죄를 이미 하나님께 다 말씀드렸고 하나님 앞에 숨긴 죄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통해서 신실한 자들이 욕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왕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무죄한 자신이 원수들에게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공동체에 큰 어려움이 됩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의 당위성을 공동체의 유익에서 찾고 있습니다. 시인 자신도 자신이지만 자신이 당한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시험이 되거나 부정적인 결과를 낳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숨기지 않고 회개하는 이유와 그런 자신을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 주시기를 원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어서 시인은 다시 한번 탄식하며 하나님께 말씀합니다. 7절을 보시면 자신이 핍박을 당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헌신과 열정이 오히려 그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배척되는 이유가 됩니다.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됩니다. 그가 금식 기도를 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하고 탄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섰을 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수군거립니다. 술취한 사람들은 그런 시인을 두고 노래를 부릅니다. 놀림감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는 열심으로 살아갈 때 조롱과 놀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힘껏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어지는 13절에서 18절까지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다시 여호와여! 라고 또 부릅니다.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자신에게 응답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응답의 당위성을 이번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의 진리에 둡니다. 큰 파도와 같은 엄청난 두려움과 대적들의 공세에서 건져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구원은 위기 가운데 건짐을 받는 제한적인 의미입니다. 큰 파도가 사람을 덮치는 것 같이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삼켜지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과 긍휼하심으로 응답해 달라고 호소 합니다. 당신의 얼굴을 감추지 마시라고 간절히 호소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속히 구원해 주시도록 18절에서 호소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시인은 정직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 언약에 신실한 사랑으로 자신을 건져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한 분이심으로 알고 믿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9절에서 21절을 보시면 다시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말씀드립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과 자신이 수치를 당하며 당하고 있는 능욕을 다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그 대적자들도 또한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어나고 있는 일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시인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비방으로 시인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썩어 문들어집니다. 또한 근심도 마음에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배고플 때 그들은 써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쓸개를 주고 목이 마를 때 셔서 마실 수 없는 식초를 줍니다. 이런 표현들을 볼 때 시인은 지금 많이 지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되는 위협과 조롱과 비방으로 거의 탈진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쯤 되니 시인도 원수들을 저주합니다. 22절부터 28절까지 저주의 말이 이어집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고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고, 눈도 어두워지게 하시고, 허리가 떨리고 하나님의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서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26절에 보면 시인이 당한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치신 것이고 상하게 하신 자를 조롱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시인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과 핍박이 모두 원수들 때문이 아님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수들은 고난 당하는 자를 더 고난을 당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상황을 해결 해주시기를 바라고 원수들을 처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나아가 시인은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워서 의인과 함께 기록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생명책은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런 구원을 얻은 자들의 목록에서 빼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구원해 주시지 말라는 뜻입니다. 의인이 누리는 똑같은 기쁨을 누릴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으로 인해서 가난하고 슬픔을 당하는 시인은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자신을 건져 주실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30절부터 마지막절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합니다. 시인의 슬픔과 탄식과 애통은 찬송과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감사합니다. 이 찬송이 황소를 드림보다 더욱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합니다. 황소는 제사를 드릴 때 드릴 수 있는 가장 비싼 제물입니다. 그런 제물보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그분을 노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곤고한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부자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찾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마음이 소생됩니다. 다시 살아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고 자기로 인하여 갇힌 자, 고통 당하는 자를 모른 척하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33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찬송하고 기뻐하는 것은 사람만으로 부족합니다. 하늘과 땅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찬양해야 한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시인의 두려움과 절망과 어려움이 순식간에 기쁨과 찬송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35절3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 때문입니다. 앞에서 호소했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서 우리는 사실 기도 안에 들어가는 모든 요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도움을 구하며, 때로 불평하고 한탄하고,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뢰를 고백하고, 또 때로는 원수들에 대해서 정당한 심판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도 오늘날 하나님으로 인해서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도움을 소호하는 기도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해 주시고 우리의 슬픔을 기쁨과 찬송을 바꿀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어려움 중에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시인과 같이 이유 없이 고통 당하셨지만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심으로 황소보다 더 귀한 당신의 몸을 드렸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이유 없이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상황 속에 갇혀 있지 말고, 기도하며 탄식하고 하나님께 다 아룁시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해결하시고 회복을 주실 것임을 믿고 하나님을 찾읍시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기쁨과 찬송이 있을 것입니다. 아멘.


시편 68편

오늘 읽은 시편의 표제를 보면 다윗의 시, 인도자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는 공동 모임, 예배에서 부른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3절을 보면 시인이 예배의 인도자로서 백성들을 모읍니다. 그 이유를 먼저 1,2절에서 설명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원수들을 흩었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도망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세력, 시인과 시인의 공동체를 괴롭히던 악한 자들은 연기가 바람에 불려 흩어지듯이, 불 앞에서 녹은 밀립과 같이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바짝 마른 밀랍은 금방 불에 타서 없어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한 용사로서 원수에게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3절과 4절을 보면 의인들은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4절에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구름기둥으로 함께하시던 것을 배경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의 찬송을 드리라고 백성을 부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백성을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보호하신 하나님은 다윗의 때에는 거룩한 처소, 성전에 계십니다. 하지만 성전에 앉으셨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하시고 그곳에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고아의 아버지와 과부들의 재판장으로서 계십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고독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가족을 주시고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5-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시인은 7절부터 과거를 회상하면서 거룩한 처소에 앉게 되신 과정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분은 광야에서 항상 백성들 앞서서 백성의 원수들, 악한 자들과 싸우시는 신적인 용사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하늘과 땅이 흔들릴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은 대단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흡족한 비를 주셔서 주의 기업인 이스라엘 백성이 곤핍할 때 견고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 회중,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거하셨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항상 은혜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여인들은 큰 무리를 지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였고, 여인들도 탈취물을 나눌 만큼 전쟁에서 연속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멈추고 쉴 때, 마치 양 우리에서 쉬는 양 같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금으로 씌운 비둘기 같이 아주 편안하고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온갖 높은 곳에 산당을 지어서 신을 섬기던 이방 민족들의 산들은 모두 하나님의 산이 됩니다. 특별히 바산의 산들은 높은 고지대에 있으며 그 위엄이 대단했습니다. 물론 그 위에도 이방 신들의 산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들의 산당들에 있던 우상들은 하나님 앞에 무너집니다. 원래 하나님의 산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우상이 있을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그가 계실 곳을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산의 높이나 위엄으로 보면 다른 산들이 훨씬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별로 높지도 않은 예루살렘을 택하셔서 그곳에 거하십니다. 그곳에 영원히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민족들보다 더 나아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의 어떠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구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 뿐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은혜입니다. 계속해서 시인은 17절에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위엄을 말합니다. 병거가 많은 것은 강력한 능력을 말합니다. 전능하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력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오늘 시편에서 말씀합니다. 주님은 전쟁에서 항상 승리하십니다. 그래서 사로 잡은 자들 취하시고 선물을 취하십니다. 바울은 이 구절을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인용합니다. 오늘 시편에서 행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예수님의 사역에 적용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과 죄와 사탄을 이기시고 승천함으로 이 시편에서 말하듯이 신적인 용사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완전히 이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역자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고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승리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 하듯이 예수님도 성령으로 그 백성인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십니다. 우리의 구원이 되시고 우리의 찬송이 되십니다. 시인은 계속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노래합니다. 20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덕분에 사망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원수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정수리는 적들의 교만함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원수들의 머리는 깨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바다 깊은 곳이나 높은 산 위에 숨어 있어도 찾아 내어 심히 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피에 이스라엘이 잠기게 될 것이라는 표현은 그만큼 심판이 준엄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성소에 들어가시는 행차를 볼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다윗이 오벧에돔에 집에 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는 것을 배경에 두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오시는 것을 왕의 행차로 본 것입니다. 사실 다윗 자신이 왕인데, 하나님을 참된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큰 모임, 대회 중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26절에 주님을 ‘송축한다’는 것은 축복한다는 뜻(bless)입니다. 하나님을 복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을 복되게 여기는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그 모인 공동체에는 지극히 연약한 족속인 베냐민부터 가장 강력한 유다의 지도자들과 제일 위쪽에 살고 있는 스불론과 납답리의 지도자들이 함께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8절에서 35절을 보면 이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에만 있을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도 나오고 구스인들에게서도 나올 것입니다. 32절을 보면 땅의 모든 왕국들이 하나님께 노래하고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주에 살펴 보았던 시편 67편의 주제였습니다. 오늘 시편에서도 반복이 됩니다.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모든 민족들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모든 열방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 찬송의 내용은 33절을 보면 “옛적에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는 것”입니다. 본래 “하늘을 탄 자”라는 표현은 비의 신 바알의 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들의 하늘을 탄 자이십니다. 바알과 비교가 안될 만큼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강력한 능력으로 애굽, 이집트에서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먹을 것을 공급하시고, 지켜주시고, 많은 적군들의 공격을 이기게 하신 바로 그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위엄과 영광은 성소, 곧 예배의 자리에서 충만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분을 노래하고 높이고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편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그분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 삼위 하나님 가운데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나아가 그분은 참으로 십자가에서 원수 마귀와 죄와 사망을 이기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모일 때 이 구원을 노래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싸워야 싸움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당시와 같이 육체적인 싸움은 없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사탄은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전쟁에서 승리하셨지만, 우리도 그 승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전투를 남겨 두셨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합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와 싸웁니다. 주님의 최종적인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이미 승리한 전쟁에 참여하시도록 지금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을 대해 높아진 모든 것을 예수의 이름 아래 굴복시키도록 오셨습니다(고후 10:5).

 

이 싸움을 싸워 볼 때에만 하나님의 큰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높아진 모든 것들과 싸우는 싸움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우리 삶 속에서 경험 할 수 없습니다. 그 싸움을 하면서, 우리 안에 남은 죄와 게으름과 말씀과 기도를 멀리하고 싶은 마음과 싸우고, 또 하나님의 가치가 아닌 세상의 가치와 싸우며 승리를 경험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찬송의 깊이와 넓이가 커지게 됩니다. 이런 싸움 없이 드리는 찬송은 단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이 영적인 싸움에 동참하여서 주중에 누린 승리의 기쁨을 가지고 주일에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시편 67편

오늘 시편은 찬송시, 혹은 축복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표제를 보시면 노래라고 되었습니다. 역시 인도자를 따라서 현악에 맞춘 노래로 일종의 악기 연주와 더불어 부르는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에 대한 노래라는 것을 우리는 1절에서 바로 알 수 있습니다. 1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시고 그분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신다고 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인 것 같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가 주일 예배 마지막에 삼위 하나님의 복을 선언할 때 듣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민수기 6장24절에서 26쩔까지 있는 말씀인데요. 이 말씀을 축약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민수기와 다른 점은 민수기에서는 아론이 백성들에게 이 복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시편에서는 그 복을 받는 입장에서, 혹은 그 복을 받아 살아가는 백성의 입장에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선포한 복이 참으로 우리에게 있기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 보다 더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늘 은혜 가운데 살아갑니다.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보다 그 이상을 늘 누리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늘 하나님의 얼굴 빛이 우리를 비춥니다.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늘 함께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 시는 주중에 늘 그 복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측면에서, 혹은 공동체로서 모여서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로 모였을 때 부르는 노래라는 것을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2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동체, 곧 시인의 공동체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주시도록 원하는 이유와 목적을 볼 수가 있는데요, 바로 주님의 도를 이 땅에, 그리고 주님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이것이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는 이유입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모든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도라는 것은 원어로 보면 ‘길’입니다. 이 길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way of lif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길이 참된 복된 길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인지 전파하기 위해서 은혜와 복을 주시도록 요청합니다. 또 구원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모든 나라들이 그곳에서 건짐 받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복을 주시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고 복을 주신 이유였습니다. 창세기 12절 3절을 보면 아브람을 부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6절에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에 그들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합니다. 모든 나라의 중보자로서 역할을 하도록 이스라엘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민족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는 것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 부름 받아 복을 받아 누리는 이유입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신 도와 구원을 전파함으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복과 번영을 누리는 이유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온 백성이 기뻐하고 즐겁게 노래합니다. 무엇을 기뻐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주님의 도를 전하고 구원을 전할 때 그 구원의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그렇지 않고 거부하는 자들에게 심판하시는 것이 찬송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할 때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복과 축복을 노래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도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통치를 노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의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노래해야 합니다. 땅 위의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심을 노래함으로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정의는 모든 국경을 초월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시고, 간섭하지 않으시는 곳은 이 땅에 단 1센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땅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삼위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의 큰 위로와 격려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심판이 다 때려부수고 다 없애는 그런 파괴적인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을 올바르게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을 심판하고 벌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경험한 모든 민족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5절에서 언급됩니다. 온 민족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신다는 것은 복음이 모든 인류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모든 인류가 구원을 얻을 것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인종과 지역과 신분의 차별이 없이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6절을 보시면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증표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고 있는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살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 땅에서 많은 소산물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이 열매를 내어 준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 하면서 먹을 것을 책임지시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땅이 산물을 내는 것은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고 계신다는 표징입니다. 일상의 일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일종의 사인이 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삶의 태도는 결국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어지는 모든 결과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성도는 그것을 알고 불신자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은혜이며 복입니다.

 

오늘 시편에서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진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택하여 복을 주시는 것은 결코 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셔서 그 복을 전파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이 은혜와 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그 복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복음 전파를 위해서 사용하도록 주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헌금을 많이 하고 모든 것을 교회 일에 사용해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우선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며 복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이웃과 복음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비판을 듣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서 지난 40년간 부어 주신 그 은혜와 복을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오늘 시편은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임재와 복을 구하며 다른 이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사용하도록 도전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도 주를 찬송하도록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매일의 삶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시는 복을 누리고 또한 주신 은혜와 복을 이웃에게 나누어 줌으로 하나님의 삶의 방식과 구원을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시편 66편

오늘 시편은 그냥 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장르는 찬송시, 감사히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저자를 알 수는 없습니다.또 이 시는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이기에 역시 공동체에서 예배시에 부른 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은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이 됩니다

 

오늘 시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12절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노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13절에서 20절까지는 그런 구원의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지, 감사를 사람으로서, 예배자로서의 반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시면 가장 먼저 시인은 이 시를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초청 혹은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 땅이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내어야 한다고 합니다. 뒤에서 우리가 볼 것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특정한 집단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만을 위한 사건은 아닙니다. 온 우주와 온 민족을 위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사건은 단지 지엽적인 사건이 아니라 온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로마서 8장 19절은 모든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길 고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심으로 궁극적으로 온 세상이 새하늘과 새 땅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땅도 하나님께 즐거워 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그냥 의미 없는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도 있습니다.

 

2절을 보시면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찬송해야 합니다. 3절 이후의 구절들을 보면 좀 더 구체적을 말합니다. 주의 일을 찬양합니다. 그 일이 얼마나 위엄이 있는지 말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주의 원수가 주님께 복종할 것이라는 믿음이 실현이 됩니다. 그것을 5절이 보여줍니다. 시인은 많은 사람들을 불러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본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눈으로 보는 듯한 생생한 증언을 들으라는 말입니다. 시편의 기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서 강을 건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출애굽에서 홍해를 가르고 나온 사건과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와 그 백성이 함께 요단 강을 건넌 사건을 배경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시인과 백성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행하신 놀라운 일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던 원수에게서 백성들을 건지셨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분이라는 것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7절을 보시면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인도하신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는 분임을 노래합니다. 그분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셔서 거역하는 자들과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눈으로 살피는 것은 심판을 전제해 두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분을 신뢰하는 자를 하나도 놓침이 없이 지킨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그 다음에 자기들 마음대로 살라고 하지 않으시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영원히 다스립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라는 말은 억압하고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지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거역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분이 무서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출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보살피시고 지켜 주시는 그 은혜 때문에 거역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목적은 아브람과 하신 약속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그들을 통해서 온 나라가 복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다른 이방 나라들도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나라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구출한 백성을 보호하시고 지킬 뿐만 아니라 성장하게 하십니다. 9절과 10절을 보시면 영혼을 살리신 하나님은 그 백성이 넘어지지 않게 보살피십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시험하십니다. 여기서 시험은 뒤에 이어지는 것과 같이 구원 받은 백성을 단련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누구를 탈락시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을 단련하여 더욱 순수해 지는 것과 같이, 백성들을 시험을 통해서 더욱 거룩하게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화의 삶을 살도록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12절을 보시면 결국 풍부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시험들과 어려움을 통해서 더욱 단단하게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13절에서 20절은 이렇게 애굽으로 부터, 죄로 부터 구원하시고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신 하나님께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반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시면 번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에 가는 것은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번제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서원한 것을 갚는 제물입니다. 시인이 환란 때에 구원을 베풀어 주시면 하나님께 갚아 드리겠다고 했던 서원을 갚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형성된 하나남과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죄에서 건짐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살아가면서 삶에 어려움이 닥쳐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개인적거나 사적이지 않고 공동체적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서원을 했지만, 그것을 갚는 날에 16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다 불러서 들으라고 합니다. 함께 그 경험을 나누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서 무엇을 합니까? 시인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선포합니다. 17절에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있습니다. 또 찬송이 있습니다. 18절에는 자신의 마음을 살핍니다. 자신의 마음이 회개하지 않고 죄에서 돌이키는 않는 삶을 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죄가 있는지 살폈습니다.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동반하는 삶을 살았는지 살핍니다. 그러한 삶을 살았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의 인자하심, 언약적 신실함,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모든 요소들이 시편 후반부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복음의 선포가 있고, 죄의 고백과 회개가 있으며, 기도와 찬송이 있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삶 속에서 거두지 않는 복의 약속과 선포가 있습니다. 구원 받은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함께하시고, 단련하시고,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십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그런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살아가면서 공동체적인 예배의 자리로 나아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선포하고 기도하며 찬송하며 언약적인 복을 누립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 신앙생활이라는 무엇인지 오늘 시편에서 잘 요약해서 보여줍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원의 사역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믿음 이후에 시작되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시는 삶,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며, 때로는 시험을 통해서 단련하시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며 매 주일 공동체적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반복적으로 듣고, 우리를 살피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언약적인 복을 받으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믿음의 여정을 살아가는 그런 삶입니다. 이러한 삶 끝에 결국 하나님께서 죄에서 이끌어내 풍부한 곳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들이시는 삶이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놀라운 구속의 사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여 풍부한 땅으로 인도하시며, 삶의 매 순간 붙드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특별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공동체적 예배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65편

오늘 시편도 다윗의 시편이고 인도자를 따라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공동체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본 시편들처럼 ‘하나님이여!’라고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앞에 시편들에서는 하나님을 부르고 나서 다윗이 당한 어려움을 하나님께 토로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시였던 반면에 시편 65편은 분위기가 조금 다릅니다. 원수들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탄식시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고 삶을 풍성하게 채워 주시는 것에 대한 찬송과 감사의 시입니다.

 

오늘 시편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4절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노래하고, 5절에서 8절은 능력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마지막으로 9절에서 13절은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채우시는 것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에서 4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의 성전이 시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 시온에서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하십니다. 1절을 보면 찬송이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곳에서 사람이 서원을 이행한다고 합니다. 또 2절을 보시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사람들이 나아온다고 합니다. 1, 2절을 통해서 우리는 다윗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서원해야 할 상황이 있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9절에서 하나님께서 추수를 풍성하게 하셨다는 것을 볼 때, 아마도 오랫동안 기근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근이 없어지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서원을 한 것으로 가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추수를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 하나님께 용서 받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온 땅에 기근을 내리셨고, 다윗은 용서를 구하며 응답하시면 그 때 어떤 것을 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회개할 때 용서해 주셨고, 또 곡식을 주셨기 때문에 성전에서 서원한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원한 것을 완성할 때는 제사와 함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징계로 인해서 기근과 가뭄이 왔고, 그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은 회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그 백성을 가까이 나아오도록 하십니다. 이런 자들이 4절을 보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32편에서도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고 합니다. 65편에서도 동일하게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복은 스스로의 노력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분 가까이 나오게 하시고 주의 뜰, 성전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부르셨기 때문에 얻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전은 아름답고 평안하고 거하고 싶은 곳이며 죄가 가려진 놀라운 곳입니다.

 

이어서 5절은 다시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런데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을 부릅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하면서 부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죄악을 용서 받은 자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단지 죄인을 용서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온 세상의 통치자이자 주인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멀리 있는 자들도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성전에 계시지만, 성전에 매이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분은 온 세상 어디에나 계시는 분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그분은 기도하는 자들에게 응답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그분의 능력으로 산을 굳게 세우시고 권능을 띠를 띠신 분입니다. 산은 단단하게 서 있는 것, 확고한 것을 의미합니다. 산을 굳게 세우시는 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흔들리지 않게 굳게 붙드시는 분입니다. 나아가 그분은 바다의 혼란을 진정시키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바다도 다스리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바다로 상징되는 악의 세력과 혼돈을 제압하시고 질서 정연하게 만드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끝에 있는 자들도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경험합니다. 악의 세력을 제어하시고, 바다와 물결을 주관하시고, 아침이 되는 것과 저녁이 되는 것을 주관하십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의 자전에 의해서 생기는 현상이 사실은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거하시는 분이시지만, 성전에만 그의 영향이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여전히 온 온 우주를 다스리며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이런 강한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을 돌보십니다. 9절에서 13절입니다. 땅을 돌보셔서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십니다. 물을 잘 끌어 대는 것은 농경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물이 충분히 있으면 농사가 잘 되게 됩니다. 그렇게 땅과 물을 예비하셔서 풍족한 곡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이전에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땅을 징계하심으로 가뭄이 있었다면, 이제는 회개하고 돌아 온 자들에게 곡식을 주십니다. 마치 룻기에서 베들레헴을 떠났다가 돌아온 나오미 같이 회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농사가 잘되고 먹을 것이 풍족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주어진 복이었습니다. 언약적인 복입니다. 약속된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그냥 보내시지 않으시고 삶을 회복시켜 주시고 풍성하게 해 주십니다.

그 복이 얼마나 큰 지, 들의 푸른 초장은 양들이 바글바글 합니다. 골짜기 넓은 뜰에는 곡식으로 덮여 있다고 1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으면 부자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풍족과 만족만을 주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9절에서 13절까지 보여지는 이미지는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모든 면에서 풍족함과 풍성함을 누리는 이미지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통해서 일생 전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에서 양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믿고 구하는 것 같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에게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과 만족감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물론 그것에는 물질적인 풍요로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그것이 많든 적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것으로 인해서 온전한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9절에서 13절을 보면 다윗은 능동적으로 그것을 취한 것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윤택하게 해 주시고, 곡식을 주시고, 주의 은택(토브, 좋은것), 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철저히 복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13절 마지막에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즐겁게 외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항상 있고 그것으로 노래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또한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고 나아오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고 회복을 주시고, 그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오늘 시편은 역시 우리 예수님께 성취가 됩니다. 예수님은 참된 성전으로서 그에게 회개하고 나오는 자들을 그분 안에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부활 승천하셔서 주님께 나아온 모든 자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항상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가지 결핍과 공허함으로 살아가던 저와 여러분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과 복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분 안에서만 만족감과 흔들리지 않음 누리도록 하십니다. 그의 백성인 교회에게 죄를 용서하시고 황폐한 삶을 풍족한 삶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던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우리 주님은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가장 좋은 것은 그분 자신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언약적 축복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잊고 살아서 그렇지 하나님은 지금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며, 강한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고, 참된 복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죄를 하시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함께하시는 풍성한 복된 삶을 주십니다. 그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시편 64편

오늘 시편 표제를 보면 다윗의 시입니다. 그리고 역시 인도자를 따라서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겪은 일이지만 후대에 공동체가 함께 노래했던 시이라는 말입니다. 이 시는 도움을 요청하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매우 급하게 하나님을 부름으로써 시를 시작을 합니다. 1절과 2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부른 후에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자신의 생명의 원수에게서 보존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을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자신을 숨겨 달라고 하고, 또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자신을 감추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확히 누가 다윗의 원수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윗이 근심하고 위협을 느낄 만큼,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원수들은 다윗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그들은 악을 꾀합니다. 어떤 악한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소동합니다. 원수들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그런데 그 회의의 주제가 무엇이냐 하면 어떻게 다윗의 생명을 해할지 의논하는 것입니다. 이런 논의 중에 있는 원수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지켜 주시고, 숨겨 주시고, 감추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모여서 회의를 하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윗은 이 악한 자들의 행동을 묘사합니다. 3절에서 6절입니다. 그들은 우선 그들의 말로써 악한 일을 합니다. 다윗은 그들의 말을 무기에 비유합니다. 칼 같이 혀를 갈고 닦습니다. 칼 같은 말로 시인을 죽이라고 준비중입니다. 또 그 혀는 화살 같이 쏩니다. 그런데 그 말을 쏠 때 숨어서 온전한 자를 쏩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칼과 같이 날카로운 말은 누가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숨어서 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소문은 출처를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치 숨어서 쏘는 것이 다윗에 대해서 악한 말을 하고, 좋지 못한 말들, 위협하는 말들, 마음에 상처주는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그들의 악한 행동 가운데 교만함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악한 말을 하면서, 칼과 화살과 같이 사람을 죽이는 말을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5절을 보시면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합니다. 역시 말로써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악한 목적 실행하는데, 그것을 옳다고 잘한다고 서로 격려합니다. 그리고 악한 일들을 함께 모여 계획하면서 아무도 그것을 모를 것이라고 거짓된 확신에 차 있습니다. 이어서 6절을 보면 죄악을 꾸미면서도 묘책을 찾았다고 합니다. 완벽한 범죄를 계획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교만한 말을 합니다. “이야, 우리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다” 여기서 말하는 속 뜻과 마음이 깊다는 말은 긍정적인 마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뜻에서 마음이 깊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92편 5절을 보면 마음이 깊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위해서 행하신 일을 깊다고 합니다. 또 로마서 11장 33절을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지식이 깊다, 마음이 깊다는 표현은 사실은 하나님께 대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악인들은 자신들의 세운 생각과 계획이 하나님의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의인을 헤치기 위해서 세운 계획이, 악한 목적으로 모여서 의논한 결과가 하나님의 생각과 깊이 만큼이나 깊다는 말입니다. 아주 교만하고 하나님을 자기 수준을 낮추는 말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자신들의 비밀 함정이나 악한 계획이 발각되거나 방해를 받지 않을 완벽한 계획이라고 서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7절부터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갑자기 쏘십니다. 하나님의 갑작스러운 개입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몰래, 숨어서, 갑자기 다윗을 해하려고 했던 그 계획 그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갑자기 임하셔서 화살과 같이 쏘십니다. 악한 자들의 계획이 완벽하다고 여겨지고, 의인이 다윗이 희망이 없어 보일 때 하나님의 개입이 극적으로 일어납니다. 도저히 희망이 없어 보이고, 그들이 계획이 완벽해 보일 때, 하나님은 갑자기 임하셔서 그들에게 심판을 행하시고, 그들은 엎드러집니다. 그리고 시인을 위협했던 그들의 혀는 오히려 그들을 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들을 보면서 지나는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인을 공격하고 교만하게 하나님을 무시하며 말로 공격하던 자들을 보며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의 1-2절의 부르짖음을 응답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혀와 달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선포하고 그분이 행하신 일을 깊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는 것은 그냥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과 사랑을 담은 두려움입니다. 결국 10절을 보시면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원수를 무찔러 주시고 회복을 주신 분께 피하게 되고, 그리고 그분의 행하신 일들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해하는 악인의 혀와 달리 의인의 입술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랑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오늘 시편 말씀은 악인들에게 위협 당하는 시인, 특별히 말로써 또 악한 계획으로 고통을 받는 시인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악인들의 계획을 폐하시고, 시인을 도우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경험한 의인들의 입에서 하나님을 자랑하게 될 것임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은 갑작스럽게 일어났습니다. 기대하지 못했을 때, 아무런 소망이 없어 보일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상황을 완전히 바꾸시고, 다급한 시인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찬송으로 바뀌도록 하셨습니다. 먼저 시인이 겪은 이런 억울함은 우리 주님께서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모여서 작당을 하고, 거짓 증인들을 많이 세워 죽이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악한 말들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극적으로 간섭하셔서 죽음에서 예수님을 살리시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입술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노래하고 찬송하도록 하셨습니다. 의인들의 공동체로서 찬송이 흘러나오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비슷한 상황을 겪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 같이 교회의 평판이 좋지 않은 시대에 살아가다 보면 원치 않게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와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대해서 좋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말로써 우리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공평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교만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여기는 사람들에게 결국은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우리는 오늘 시편에서 본 것 같이 의인들로서 악인들의 혀와 확연히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악인의 혀는 칼과 같고 화살과 같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혀입니다. 하지만 의인의 혀는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고 자랑하는 혀입니다. 우리의 혀와 입술이 악인의 혀와 입술이 아니라 의인의 혀로서 제기능을 잘 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말에서 다른 사람을 악하게 평가하기 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고 찬송하는 데에만 사용되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같은 의인의 공동체 안에서 본의 아니게 말로써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데 이런 부분에서 서로 세워주고 격려하고 혹 실수 했을 때 진심으로 사과하고 또 서로 기꺼이 용서해주며 우리 교회가 참된 의인들의 공동체로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고 찬송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시편 63 편

오늘 시편의 표제에서 다윗이 이 시의 시인임과 광야에 있을 때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에 있을 때는 다윗이 양떼를 치며 광야에서 있었을 때일 수도 있고,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광야에 있을 대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또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 칠 때 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에서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을 표현합니다. 광야에서 느끼는 그 갈증과 같이 자신의 영혼이 주님을 갈망하고 그의 육체가 주님을 갈망한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주님의 성소에서 주님의 권능과 영광을 경험한 것을 되새깁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에 압도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푹 젖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언약의 신실하심, 주님의 그 사랑이 너무나 커서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 그 신실한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몸과 영혼에 만족함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사랑만이 그를 채웁니다. 5절을 보시면 골수와 기름진 것은 가장 비싸고 가장 맛있는 음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감은 마치 정말 맛있는 음식, 가장 비싼 음식을 먹어서 배가 부른 것 같이 충족함과 만족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혼의 만족감과 채우짐은 그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인도합니다. 그의 입술이 너무 기쁘고 만족스러움으로 주님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그 찬송이 밤에 침상에까지 이어집니다. 6절에서 8절입니다. 그는 누워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억하고 노래합니다. 광야에서의 밤은 시인이 가장 육체적으로 감성적으로 취약해지는 시간입니다. 또한 가장 위험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어떻게 합니까? 주님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도움이시고 피난처이심을 다시금 기억합니다. 그리고 새벽 일찍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할 때 시인은 하나님께서 마치 어미 새가 그 새끼를 품는 것 같이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다윗의 적들을 부수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오직 하나님을 따르고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의 오른손으로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시면 다윗의 영혼을 노리는 누군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다윗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땅의 깊은 웅덩이에 빠질 것입니다. 광야에는 그런 구덩이들이 많습니다. 혹은 그들은 전쟁 중에 칼에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광야를 배회하는 들짐승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갈망하는 자는 그의 구원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대적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입이 죽음으로 막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시편에서 시인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적들과 또 위험한 광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과 능력을 회상합니다. 무엇보다 이 시인은 그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돌보심과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하고 있지만, 그는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귀히 여기고 그것을 신뢰합니다. 필요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 흔들리지 않은 언약적인 사랑을 위해서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런 시인의 모습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성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면하기 싫었던 십자가의 죽음을 직면하셨을 때,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이 시인의 열정을 반영합니다. 주님은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쫓아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적들을 물리치신 것과 같이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원수이자 우리의 원수인 죄와 사망, 사탄을 정복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시편의 기자가 표현한 하나님을 향한 이 갈망, 이 목마름은 요한 복음 7장 37절에서 38절에서 메아리로 울립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생수의 강이 그들 안에서 흘러 나올 것이다.” 그 생수의 강은 다름 아닌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성령을 마음에 모시는 자들에게 영혼의 죽음의 갈증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은 다른 어떤 것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만족감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영혼의 만족감과 하나님을 향한 갈증을 채워주는 생명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며 우리의 영혼의 갈증을 채웁시다. 우리 영혼의 하나님을 향할 갈망과 목마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채워짐을 경험하는 남은 고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62편

오늘 시편 역시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고,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합니다. 공동체의 노래이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고백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 본 시와는 분위기가 좀 다르죠. 59,60,61편을 보면 제일 먼저 어떻게 시작하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 시작했습니다. 어떤 위기 가운데 시인이 있었고,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시편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앞의 시들이 힘들고 어렵고 위기의 그 순간에 초점이 있다면, 오늘 시편은 이 위기와 어려움 후에 그 어려운 순간들을 회상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제를 현재형으로 함으로써 단지 과거의 일로만 치부하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함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잠잠히 기다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온다는 것을 철저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반석이시고, 구원이시고 요새이신 것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굳은 신뢰와 확신이 담긴 표현입니다. 인생의 위기 가운데 평온하게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굳은 신뢰 때문에 가능한 평온한 마음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치는 가운데 평온하게 주무실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반석과 구원과 요새로 굳게 신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위협이나 위기도 약한 것이 아닙니다. 3절을 보면 “너희”가 등장합니다. 시인을 괴롭히는 사람들이고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넘어지는 담과 같이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일제히, 순식간에 시인을 공격하려고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시인인 다윗, 왕의 자리에서 그를 떨어 뜨려고 거짓을 말하고 꾀를 씁니다. 입술로는 축복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저주를 하고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속임수를 자주 쓰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이런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고,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위협은 실제적이고 강력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어려움이 실제이듯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피난처 되심도 실제임을 다윗은 굳게 믿기 때문에 평온할 수 있습니다.

 

다시 시인은 자신의 영혼에게 말합니다. 5절에서 8절은 시편 62편의 핵심입니다. 시인과 원수의 관계를 4절이 말했다면 이제 5절은 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 옵니다. 5절이 1-2절과 거의 같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5절은 명령형이라는 것입니다. 또 구원이라는 단어가 소망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잠잠히 바란다는 말의 반대는 요동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동치는 것이 당연한 그 위기 속에서 그 마음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무릇’이라는 말은 ‘왜냐하면’이라는 말입니다. 막 요동치려는 그의 영혼, 그의 마음에 다윗은 말하는 것입니다. 조용할 수 있고, 평온함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의 소망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고, 또 이 상황을 온전히 해결되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반석이시고, 구원이시고, 요새이심을 믿고 있기 때문에 요동치려고 하는 그 영혼에게 명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7절을 보시면, 시인은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고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1,2절에 비해서 하나님께 대한 고백과 의지가 더욱 풍성해 집니다.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을 통해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후에 더욱 풍성하게 하나님께서 피난처와 반석과 구원과 영광이 되심을 경험한 것을 고백합니다. 위기 가운데 하나님을 잠잠히 기다리고 의지했을 때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한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광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위기 가운데 요동치는 마음과 영혼에게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도록 했을 때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과 반석과 요새와 피난처가 되어 주셨음을 이제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고 그렇게 하도록 격려합니다. 그것이 8절에서 12절 말씀입니다.

 

이제 회중들에게도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 의지하고 잠잠히 기다리라고 권면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고 이 하나님께 ‘마음을 토할 수’’있고, 동일한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자들에게 그렇게 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가 오직 다윗에게만 그렇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한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일한 하나님께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살아가는 자들에게 평온을 주시고 해결을 주십니다. 마음을 잠잠히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그렇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노래를 공동체로서 불렀고, 교회의 노래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해 지는 것입니다. 9절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은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사람은 입김과 같이, 입김보다 더 가벼운 존재라서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때로 포악하게 빼앗아 재물이 많아지는 것도 의지할 것이 안됩니다. 죄와 힘과 부는 결코 인간에게 참된 위로와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반석과 피난처가 됩니다.

 

사람이 의지해야 하는 것은 11절과 12절에 나오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또 그분이 약속한 것을 지킨다는 그분의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아 살아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신실함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신실함도 ‘헤세드’입니다. 언약에 신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에 자신을 메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언약을 붙들고 나오는 자에게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피난처와 반석이 되게 하시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자에게 구원과 영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대로 갚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전환하도록 하고, 삶의 태도를 고치도록 합니다.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신실함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본을 잘 보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위기 속에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시며 그분께만 소망을 두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묵묵 부답이실 때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당신께 소망을 주셨음을 부활을 통해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행한대로 갚으셨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구원과 영광을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러하셨던 것 같이 우리도 삶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과 신실한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인간의 어떠함을 의지 맙시다. 권력과 재력은 일상에 필요한 것이지만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그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잠잠히, 풍랑 속에서 주무시는 주님과 같이,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며 위기 속에서도 평온함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61편

오늘 시편의 표제를 보면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고, 인도자를 따라서 현악에 맞춘 노래라고 합니다. 정확한 배경은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도자를 따라서 부르는 노래이니까 공동체가 함께 부르는 노래입니다. 또 시편 61편은 처음에 1절에서 3절은 도움을 구하는 시의 느낌이 강하고 이후에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확신하는 신뢰의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에 도움을 구하시는 시 혹은 신뢰의 시로 분류가 됩니다. 시편 54편에서 63편까지는 공통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강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오늘 시편도 보시면 두려움에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 나아가는 것이 분명하게 보여지는 시입니다.

 

1절을 보시면 시인은 하나님을 부릅니다.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시고 이 기도에 귀를 기울여 들어 달라고 합니다. 이 기도에 주목하여 달라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이 시를 통해서 어떤 문제와 어려움을 시인이 겪고 있는 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2절을 보시면 시인의 마음이 약하여 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땅 끝에 있는 것 같이 느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시인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나 혹은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라면 성막이 있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단지 심리적인 거리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울을 피해서 약속의 땅에서, 성소에서 멀리 멀어져 있기도 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 시인은 부르짖습니다.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자신보다 높은 바위로 인도하여 달라고 합니다. 높은 바위는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아주 높은 바위를 의미합니다. 그곳에 피하면 아무도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주님에 대한 신뢰에 대한 고백이 연속으로 나옵니다.

 

3절을 보시면 주님의 나의 피난처,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시라고 합니다. 또 4절을 보시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주의 장막에 머물며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겠다고 합니다. 2절 후반부에서 4절까지 시인이 표현하는 일련의 이미지들을 보십시오. 높은 바위, 피난처, 견고한 망대, 주의 장막, 주의 날개 들은 모두 하나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장막 혹은 성전입니다. 이 이미지들 모두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을 보장하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런 장소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제공할 수 있는 장소이고, 하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5절은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서원을 들으셨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신뢰하는 자에게 주시는 기업은 무엇입니까? 바로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받는 보호와 안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주의 중심이며 다스리시고 상상하지 못할 능력과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며 또한 의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도 땅 끝에서 홀로 있는 듯한 외로움과 어려움이 찾아 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고 그분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분에게로 이끌어 주시고 참된 보호처와 피난처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기업, 보상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왕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왕이 장수하게 하시고 그의 왕위가 영원히 이어지도록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여기서 왕은 다윗 자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인격 뿐만 아니라 왕이라는 직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직분이 영원히 이스라엘에게 이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7절에서 다윗은 그 왕이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 거주한다는 것은 평생에 하나님의 장막에서 머무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 왕이 지속적으로 있을 수 있도록 인자와 진리로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주님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자신의 서원을 시행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평생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 왕권은 하나님께서 사무엘하 7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조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망했고, 지금 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부룩하고 이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약속을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왕으로 오셔서 참된 성전으로서 돌로 된 성전을 대신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충만한 성전이셨습니다(요2:19-20). 또 그분은 그 백성 가운데 장막을 치셔서 항상 함께 하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요1:14). 뿐만 아니라 그분은 당신의 영이신 성령을 각 성도들의 마음에 보내어 주셔서 각 성도들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도록 만드셨습니다(고전6:19). 때문에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냥 거주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영적인 자손들인 우리에게 늘 찬양의 제목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그의 특별한 임재는 특정한 장소인 성전에서 드러내실 때에 쓰여졌지만,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성령의 보내심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은 세상 끝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느낄 수는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원수인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나, 어려움을 당할 때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61편은 우리에게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높은 바위, 피난처, 견고한 망대, 주의 장막, 주의 날개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보좌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거룩한 성전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이 놀라운 약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가 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보호는 확실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60편

오늘 시편도 표제가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과 후대 공동체에 교훈하기 위해서 지은 시 입니다. 인도자를 따라서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다윗이 지은 시가 후대에 백성들이 공동체로 모였을 때 함께 부른 노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산에둣은 역시 당시의 어떤 음율이나 멜로디인데, 현재는 어떤 멜로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표제에서 구체적인 상황도 설명해 줍니다.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소금 골짜기에서 쳐서 만 이천 명을 죽인 때입니다. 이 때는 정확한 한 때가 아니라 여러 상황이 합쳐진 것입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와 싸우는 것은 역대상 19장에 기록되어 있고,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 에돔 사람을 죽인 일은 사무엘하 8장 13절 이하에 나옵니다. 두 싸움이 배경에 놓입니다.

 

우선 오늘 시편 말씀 1절에서 4절을 보시면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고, 분노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어떤 국가적인 어려움을 당하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시인은 지금은 회복시켜 주시라고 간절히 요청합니다. 1절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호흡으로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우리를 치셨지만 고쳐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 4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지진이나 혹은 큰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의 땅으로 와서 마치 갈라지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 다시 기워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돌이켜서 도와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또 3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셨다고 합니다.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포도주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연상하게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상징하는 포도주의 잔의 이미지를 간혹 이야기합니다. 예레미야 25:15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술잔을 받아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고 합니다. 또 요한 계시록 14장 10절은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합니다. 또 계시록 16장 19절에서도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패하도록 하셨고, 진노의 잔을 내리신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진노의 잔을 거두시고 회복을 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다고 합니다.

 

5절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져 달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건지시고 구원하여 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6절을 보면 “주께서”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면서, 이전에 백성을 심판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회복도 주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에게 위협을 당하고 공격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4-5절은 1절에서 3절과 다르게 당신의 백성을 대항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보호하시고 건져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6절에서 8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만국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시며 통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심으로 “내가 뛰놀리라”라고 하시는 데, 이 말은 하나님께 무슨 어린이처럼 뛰어논다는 말이 “내가 승리하리라”는 말씀입니다. 7절과8절의 지명과 관련된 하나님의 이미지는 해석이 상당히 어려워서 학자들 간에 통일된 의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겜, 숙곳, 길르앗, 므낫세, 에브라임, 유다, 모압, 에돔이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아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통치자 이심을 선언하셨기 때문에 시인은 그 말씀에 의지하여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9절에서 이제 다윗은 누가 과연 자신을 에돔으로 데리고 가서 견고한 성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승리를 얻게 할 것인지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10절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전과 같이 버리지 않으실까,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하지 않으실까 걱정하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셔서 대적을 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실 때 경험했던 쓰라린 패배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구원을 아무 소용이 없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능히 승리를 거둘 수 있겠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동하겠다고 다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대적인 에돔, 현재는 에돔이지만, 어떠한 적이 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백성의 대적을 밟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공동체의 시입니다. 그런데 그 시작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패배로 시작합니다. 또 마지막 도움의 호소도 이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았을 때 패배한 쓰라린 기억이 점철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패배를 맛보고, 실패를 경험했지만, 화자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찢어진 땅을 기워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호세아 6장 1절 말씀에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그들이 대적들에게 패하게 될 때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이 느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패배가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슬퍼하고 때로는 원망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올바른 반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닥친 어려움과 환란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시는 패배하고 힘없는 백성이 그들을 돕기 위해 오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하고 용감하게 전쟁에서 나섰습니다. 결국 승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전투를 매일 하고 있는 오늘날 저와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시편은 격려와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비록 우리의 삶 속에서 패배를 맛보며, 심지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고 있는 것 같이 느끼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느껴지지 않은 우리 삶의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 많은 악행과 전쟁과 테러로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시나, 하나님이 계시기는 한 것인가.. 의심이 드는 그러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말씀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도움을 구하며 용감하게 하루하루 우리의 영적인 전쟁과 삶을 살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가져다 주심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삶의 패배와 굴곡들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여전히 삶의 적진으로 용감하게 뛰어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59편

오늘 시편은 표제에서 그 배경의 되는 상황을 말해 줍니다. 바로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서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무엘상19장 11절에서 17절을 배경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딸 미갈의 남편이자 사위 다윗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자 미갈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키다가아침에 그를 죽이라고 명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갈이 다윗을 창문으로 내려 보내고 우상을 가져다가 침대에 눕히고 다윗인 것 처럼 행사하는 그 때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보낸 사람들에게 잡히면 죽을 목숨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시면 앞에서 시편 54, 55, 56, 57편과 같이 하나님을 부르면서 자신을 건져 달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과관계성 속에서 기도합니다. 자신을 건져 주시고 높이 들어 달라고 합니다. 둘 다 자신을 위기와 어려움에서 구원해 달라는 표현입니다. 2절에서도 유사한 의미의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나를 건지시고, 구원해 주소서라고 합니다. 시인을 위협하는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시인의 원수이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고,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원수에게서 구원해 달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안이 심각하다는 것과 시인의 간절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시인은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죄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시인은 아무런 잘못을 한 것이 없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울에게 충성된 종이자 사위였습니다.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사울이 보낸 자들은 다윗을 죽이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잡으러 온 사람들은 사울이 보내서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을 미워하여기꺼이 왕의 명령을 쫓아 온 자들인 것입니다. 

 

다윗에게 희망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깨어 살펴 주셔서 도와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무신다고 생각해서 깨워살펴 달라고 요청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속히 행동을 취해 주시라고 간절히 요청할 때 흔히 쓰던 표현이었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의도움심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이 표현은 하나님과 기도하는 자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5절을 보시면 이 기도를 들으시는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신실한 언약 백성으로서, 당신의 백성의 기도에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언약의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의 기도를 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을 붙들고 있는 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언약의 백성에게 신실한 하나님은 무능하고 그 민족에게만 힘을 쓰실 수 있는 국지적인 신들과 달리는 만군의 여호와,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분이심을 시인은알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기도하는 그분,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인지 분명한 지식과 관계 속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또한 악한 자들을 심판하실 분이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요청하면서 그 근거를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기도합니다.  

 

그 근거를 바탕으로 원수들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고 성으로 두루 다니면서 악한 말을 하며 스스로 아무도 자신의 악한 말을 듣고심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악한 말의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듣고 비웃으실 만한 것입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은 말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9절을 보시면 이렇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말을 하는 원수들과 달리 시인은 하나님은 자신의 요새, 강한 성, 견고한 성이라고 고백하며 찬송합니다. 하나님이주시는 힘으로 하나님을 더욱 바라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욱 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말을 쏟아 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자하심, 헤세드, 약속에 근거한변함 없는 사랑하심으로 자기를 영접하시고 원수가 하나님께 보복 당하는 것을 보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영접하신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보다 먼저 가시며 나의 길을 인도하시고, 반드시 지켜 주신다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1절을 보시면 시인은 그들을 그냥 죽여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들을 쉽게 잊어 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흩으시고, 낮추시고, 그들의 말로 한 저주와 거짓말 때문에 교만한 중에서, 범죄하는 가운데 사로잡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시인이 어떻게 보면 잔인하게 자신의 원수에게 하나님께서 벌해 달라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악한 자가 악함을 드러날 때 제대로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14절과 15절은 6-7절의 반복인데 상황이 좀 바뀐 반복입니다. 이들이 저녁에 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며 먹을 것을 찾지만 찾지 못해 굶주리는 것은 결국 그들의 먹잇감인 시인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6절-17절을 보면 시인은 찬송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과 힘을노래하고, 밤새 먹이를 못 찾아 주리고 목마른 그들과 대조적으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노래의 내용은 주님은 시인의 요새이시고, 환난날의 피난처가 되시고 그분의 자신의 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강한 요새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흥미롭게도 오늘 시편에서 사용된 ‘개’의 이미지는 신약 성경에서도 사용되는데, 대표적으로 요한 계시록 22장 15절입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게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에게 대해서 말하면서 개들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이 말씀은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다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떠나 교회를 괴롭히는 자들에게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인과 동일하게 우리를 죽이려는 원수들을 만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동일하게수많은 어려움과 원수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유 없이 교회 다니는 것을 싫어하고 조롱하며 때로 우리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좋은 않은 말을 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실 만한 일들을 하면서 그들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이유 없이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이 많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 시편은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수많은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시며, 요새가 되신다고 우리에게 격려와 용기를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알려 줍니다. 앞에서 시편 54에서 59편, 61에서 63편의 주제가 사실은 같습니다. 이렇게 같은 주제를 묶어 놓았습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묶어 놓은 것이겠지요. 예수님을 믿으며 살다가 보면 참 괴로울일 많고, 억울한 일 많고, 힘든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어려움과 환란을 당할 때 피난처가 되시고 요새가 되시니 그분에게 소망을 두고 그분을 신뢰하며 어려움가운데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 오늘 시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신실하신 분이시고, 약속을 어기지 않은 분이십니다. 언약에 신실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피난처와 요새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잊지 맙시다. 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환란 때에 그 분께 피하며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58편

오늘 시편 말씀은 다윗의 믹담시로 인도자를 따라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입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듯이 ‘믹담’이라는 표현은 아직까지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학자들 간에 일치된 의견이 없다고 했습니다. 알다스헷이라는 말도 이 시편을 부르는 가락인 것은 알지만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인도자를 따라서 맞춘 노래이기 때문에 다윗과 후대의 사람들이 공동체로서 이 노래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개인의 탄식시이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선지자적 예언시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내용들이 악인들, 특별히 공의를 행하지 않는 지도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중요한 것은 이것이 공동체에 주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 1절을 보시면 시인은 이 시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려줍니다. 바로 통치자들입니다. 여기서 통치자라는 말은 인간 지도자, 권력자, 재판장들을 의미할 수 있고, 동시에 영적인 악한 통치자를 의미할 수도 있는데, 1차적으로 불의한 인간 지도자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들이 정의를 말해야 하지만 침묵하고 올바르게 판결을 해야 하지만 잠잠한 것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이스라엘에 세워진 재판관, 권력자, 왕은 특별히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바르게 판결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의를 말하고 올바른 판결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침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의가 판을 치는데,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극적으로는 대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그들이 소극적인 차원에서 그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폭력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자신의 권력을 가지고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자들의다스림을 받은 공동체에 있습니다. 그래서 고립되어 있습니다. 3절에서 시인은 계속해서 그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멀어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멀어졌다’는 말은 ‘이방인이 되다’는 뜻입니다. 또 ‘곁길로 나아간다’는 표현은 ‘떠돌아다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들의 하는 짓이 이방인과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방인들과 다름 없는 삶을 살았고, 나아가 거짓들을 말하는 자들이었다고 고발합니다. 그들은 시인이 속한 언약 공동체에 한 번도 속해 본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유업을 얻지 못합니다. 그 나라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분명히 확실한 기준이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형제 사랑으로 요약되는 율법이 의와 불의를 가르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래서불의한 지도자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기준에 맞춰서 판결하고 재판하고 백성들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좀 떠나도, 형제나 이웃에게손해를 입혀도 그것에 눈감고, 재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의입니다. 

 

계속해서 시인은 그들의 행실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는 독사와 코브라와 같습니다. 그들은 독사와 같이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말과 행실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말과 행실입니다. 율법의 정신과 완전히 반대됩니다. 그들의 결정과 정책과 방향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귀가 먹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5절은 당시에 술사가 피리를 불면 그것을 듣고 뱀이 춤추거나 멈추거나 하는 그런 모습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피리 소리를 듣고 뱀은 춤을 추기도 하도 잠이 들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지도자들은 귀가 먹은 뱀과 같아서 술사들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여기서 술사는 지도자 곁에 있는 의로운 조언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능숙한 술객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아주 지혜롭고 의로운 자의 조언도 듣지 않고 따르지 않습니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 호소 합니다. 6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꺽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 사자와 같이 강력한 힘을가지고 불의를 향하는 자들의 힘을 상징하는 어금니를 뽑아 달라고 합니다. 그야 말로 이빨 빠진 호랑이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뿐만 아니라 강한 물살에 흘려 사라지게 하시고,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해 달라고 합니다. 화살이 꺾이면 안 쓸모 없어 집니다. 그리고 7절을 보시면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와 같게해 주시고 만삭 되지 못한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하고 나오자마자 죽은 것 같이 이 세상에 없던 자로 만들어 달라고 호소합니다. 뿐만 아니라 불로서 그들을 살라서 없애 달라고 합니다. 이런 언어들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비기독교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악인에게심하게 말해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시인은 하나님께 강한 표현을 씁니다. 이런 말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상당히 놀랍습니다. 하지만 이런 강한 표현들은 반대로 시인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크기를 말해 줍니다. 이 강한 자들, 악인들은 시인이 있는 공동체 안에 있는 힘있는 통치자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자는하나님 외에 다른 의지할 곳이 없는 아주 절박한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인에게 가장 큰 위로는 악인들이 보복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악인들이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폭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10절 마지막 부분에서 “그들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는다”는 표현은 전쟁터를 배경으로 합니다. 치열한전투 후에 대적을 물리치고 그들이 흘린 피에 발이 적셔지는 것입니다. 다소 잔인한 그림 언어이지만, 그만큼 속히 그리고 극적으로 악인들이 없어질 것을 소망하며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제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불의한 지도자들이 전쟁터에서 죽게 되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속히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없어졌을 때 사람들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구나,” “하나님께서 참으로 악인을 물리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이 정의를 세우신다고 하면서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정하게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오늘 시편의 시인과 같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아주 강한 표현으로 책망하는 요한의 말을 마태복음 3장 7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랍게도 마태복음 23장 33절에서 예수님은 요한의 말과 동일한 말을 역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불의를 행하고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통해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며 책망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지만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은 믿지 않고 불의를 행하는 지도자들에게 심판을 베풀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의한 지도자들, 부정 부패와 억압과 폭력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의 최후가 어떨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다스리는 자들이 너무나 적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 세상에 그들을 심판하시면서 당신의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불의한 통치자들이 교회를 핍박하고 억압할 때 교회는 마땅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서 심판해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불의와 억압을 끊고 임할 새로운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속히 올 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참된사랑의 나라를 소망합니다. 교회가 이 땅에서 그 나라의 샘플입니다. 완전히 의로운 나라, 완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나라는 주님이 오시면완성이 될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통해서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보여주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가 깊이 사랑하고, 감싸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모든 교회의 정책과 방향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불의한 지도자들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먼저 불의한 통치자들이 아니라 의로운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의와 의로움과 사랑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정의와 공정함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아래 사람 다스리고 섬기는것을 말합니다. 나보다 낮은 사람들,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들을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들로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감사하며, 사랑으로하나님의 돌보심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런 지도자들이 우리 교회에서 많이 배출되고 불의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의로움을 보여줄 통치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찬송한 후에 이 기도제목으로 함께 기도합시다. 

시편 57편

오늘 시편 말씀도 표제를 통해서 몇 가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역시 앞에서 51편에서부터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로 공동체가 함께 부른 것임을알 수 있습니다. 또 알다스헬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알 다스헬은 음악적인 지시를 알려주는 것인데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이 시가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굴에 숨어 있을 때 지은 것, 혹은 그 때를 생각하면 지은 시임을 알려 줍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 다닐 때는 아주 힘들고어려움 가운데 있던 시기였음을 사무엘상 22장-23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죽이려고 찾고, 자신이 구해 준 사람들도 그를 사울의 손에 넘기려고배신하고, 끝내는 블레셋으로 도망쳐서 미친 척도 해야 했던 시기입니다. 사울을 피해서 굴에 있었다는 것은 사무엘상 24장에서 엘게디 굴에서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던 때였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이것을 배경에 두고 오늘 시편 1절을 보시면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도 개인 탄식시, 혹은 도움을 구하는 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두 번 반복합니다.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주께로 피한다고 합니다. 동굴에 있을때 다윗은 아주 두려움 마음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날개는 안전과 보호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새가 그 새끼를 품어서 지키듯이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로 안전을 찾는다는 표현입니다. 그 날개 그늘에서 재앙이 지날 때까지 피하게 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한 다음에 시인은 그냥 기도가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렇게 행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확신을 표현입니다. 시인이 특별히 그분의 성품에 호소합니다. 먼저 시인이 기도한 그분은 바로 지존하신 분이십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분의 절대성을 의지하며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지존하시기만 한 분이 아니라 백성의 호소에 응답하시고 역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지켜보기만 하는 그런 신이 아니라 그 백성들의 삶에 간섭하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특별히 2절에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더정확하게는 모든 것을 갚으시는 하나님,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그에게로 피하는 자를 그냥 보기만 하지 않고 복수해 주시고 갚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3절을 보시면 그분은 도움을 그가 계신 하늘에서 보내셔서 시인을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 도움이 무엇입니까? 바로 인자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 언약에 신실하신 분, 그분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그분을대적하는 자에게는 심판을 베푸시는 언약적인 사랑을 진리를 따라 실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시인은 그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무턱대고 하나님이 내편이라고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에서 근거해서 자신의 편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4절에서 시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호소 합니다. 다윗은 지금 사자들 가운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고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과 같습니다. 표제에서 말하는 배경을 볼 때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자신의 위치를 사울에게 알려주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위협 뿐만 아니라동족들의 배반과 고자질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모함하고 사울에게 그 위치를 알려주어 목숨을 위험하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곧바로 이어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러한 어려움에 함몰되지 않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서 다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단지 자신을 위해서 도움 달라는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온 세계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높아지기 원한다는 것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근거한 찬송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만이 올려드릴 수 있는 찬송입니다. 이것은 아주 인격적입니다. 단지 도움만 보내 달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드러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무한한 능력과 존귀를 드러내고 싶어서 드리는 찬송입니다. 

 

이렇게 고백한 후에 다시 시인은 현실로 내려 와서 자신에게 위협을 하던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노래합니다. 6절을 보시면 그들이 시인을 막으려 그물을 준비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낙심이 되었습니다. 또 그들이 시인을 잡으려고 웅덩이를 파서 빠지게 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들이 빠졌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시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고 시인은 마음을 더욱 굳건하게 세웁니다. 그래서 7절에서 10절을 보시면 다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립니다. 시인의 마음은 이제 확정되었습니다. ‘확정’은 ‘세우다’는 뜻입니다. 낙심 되었던 그 마음이 이제 단단해 졌고, 견고히 세워졌습니다. 흔들림이 없이 방향을 확고하게 잡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고 노래하는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앞에서 1절에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말이 두 번 반복 되었듯이, 7절에서도 “내 마음이 확정되었다”고 두 번 반복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굳은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시인은 구원의 하나님을 온 세상에 노래합니다. 8절에서나오는 “내 영광”은 단순히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아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전인격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드러나는 본래 인간 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된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참된 인간을 찬송하는 인간입니다. 자신의 영광이 회복되고, 악기들도 깨어서제 기능을 하라고 합니다. 새벽을 깨운다는 표현은 온 세상의 창조의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경험하고 시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에 온 우주 만물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9절은 시인이 모든 만민들 가운데서 대표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지존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다시 주님의 인자하심의 크기와 진리의 크고 확실함을 하늘과 궁창에 비댓어 표현합니다. 하늘과 궁창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궁창은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궁창은 크고 변하진 않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가 어마어마하게 클 뿐만 아니라 변하지 않는다고 노래하는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인은 5절을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을 노래하면서 시가 마무리 됩니다. 

 

다윗과 이후에 이 노래를 부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리도 역시 “피난처”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변치 않으심이 우리의 피난처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피할 날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그분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움과 그분의 지존함을 확실히 알고 믿는 자들만이 그분을 피난처로 삼을 수 있고 그분께 나아가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모르고서는 우리의 피난처로 삼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헤세드’와 ‘진리’를 강력하게 신뢰합니다. 그것은 그분이 어떤 분이지 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우리를 보호할 만 하신 분이시고,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고, 그러기를 원하시며, 무엇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지 알 때 기도에 확신을 가지고 감사의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기도하는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 알아야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어려움과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그 경험들 속에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또 그분께서 하신 약속을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분이시고, 그에게 피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분이시고,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확정합시다. 또 우리가 구원을 경험하며, 그분의 영광이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삶을 살며 시인과 동일한 확신과 찬송을 우리도 부르며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56편

시편 56편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개인 탄식시입니다. 시인은 어떤 어려움 속에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는진술하지 않지만 가드에서 블레셋에게 잡혔을 때라고 합니다. 다윗의 삶을 볼 때 블레셋 지역에서 있었던 시기는 사울을 피해 아기스왕에게 갔을 때 스파이로 오해를 받아 잡혔 때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그런 상황이 아니라도 비슷한 상황에 있는 신자들에게 이 시편은 유용합니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의 모함과 압제와 침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을 부르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 다윗은 원수들이 자기를 공격하고 치는 것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지속적으로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위협들은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위협들은 지난 간 것도 아니고 앞으로 올 것이 아닌 현재 당면해 있는 위협입니다. 그들이 시인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들이 교만한 자들이고 악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렇게 두려워하는 날에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닥친 상황 속에서 두려움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두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좋은 예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입니다. 주님은두렵고 무서웠습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두려움과 어려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루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신뢰의 표현이 4절에 나옵니다. 4절에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두 번 반복합니다. 또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육신을 가진 사람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혈육을 가졌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대조가 됩니다. 인간은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지치고, 피곤하고, 육체의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의기자가 의지하는 하나님은 영십니다. 영이시기 때문에 결코 지키지 않으시고, 피곤하지 않으시며 제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을 의지하는 자는 육체를 가지고 한계를 가진 사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시인은 5절에서부터 원수들의 행동들을 묘사하며 어떻게 자신을 위협하는지 묘사합니다. 역시 ‘종일’이라는 말을 통해서 지속적으로당면해 있는 위협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종일 시인의 말을 곡해하고 사악 생각을 가지고 시인을 대합니다. 또 시인을 죽이기 위해서 기회를 옅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수의 행동들은 철저히 계획된 것입니다. 그들은 악한 일을 계획하고 숨어서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7절을 보시면 그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냥 두고 보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안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그들을 낮추실것입니다. 그러한 확신을 시인은 갖고 있습니다. 동시에 시인은 악인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분노하실 것을 간청하고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시인 자신을 아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보고 계셔서 자신의 유리함,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는자신의 고통을 헤아리고 계심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흘린 눈물을 하나님께서 주님의 항아리에 담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수사학적인 물음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눈물을 하나님께서 항아리가 다 담아 두시고 기록해 두셔서 결코 헛되거나 잊지 않게 보관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지금 당장은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억하고 계셔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갚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0절에서 11절을 보시면 시인은 4절과 거의 동일한데, 말씀을 찬송한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을 찬송한다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찬송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의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을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종종 믿음의 인물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를 들어 달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2장 13절에서 모세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을 중보하면서 이전에 하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셔서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와 유사하게 오늘 시편의 화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약속의 말씀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찬송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이 자신에게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시편 화자의 확신은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의 확신이자,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떤 피조물도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도는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제는 환란에서 구해 주셨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제를 드리겠다는 어떤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확실히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미리 감사를 드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의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자기의 생명을 건져주셨기 때문이고,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해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다윗은, 시적인 화자는 환란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 생명의 빛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생명의 빛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주는 선물인것입니다. 마지막 구절도 수사적인 의문문으로 끝납니다. 그것 역시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것에 대한 진술일 뿐입니다. 

 

오늘 시편은 오늘날 환란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은 당면한 현재의 문제와 환란과 억압과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도록 합니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수 많은 것들이 단지 하나님앞에서 먼지와 같은 인간들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듭니다. 사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큰 피해를 끼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의 삶에서 많은 부분에서 여유롭게 만듭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실제로 악한 자들이 행할 수 있는 것은 일시적인 것 뿐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계수하시고, 우리의 눈물을 항아리에담으시고,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원수와 같은 세상적인 걱정과 염려들, 미래에대한 막연한 두려움들,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수 많은 어려움들을 경험하며 삽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직면해 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런 신뢰만이 두려움 가운데 두려움을 이기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가장확실한 방법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