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읽기

4월 1일 (월요일) 예레미야 44장

이집트에서 정착해 흩어져 살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임합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 정착해서 살면서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다가 왜 망하게 되었는지 잊었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망한 것은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를 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 진노에서 살아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한 이집트로 가서 살면서 우상도 섬기는 기가 막힐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1-10).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들을 애굽 땅에서 멸하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예레미야의 경고를 듣고 도망치는 자들, 곧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오는 자들 외에는 모두 멸하게 될 것입니다(11-14).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의 반응은 충격적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거부하고,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 것은 하늘의 여신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전에 그 신을 섬길 때는 잘 먹고 살았는데, 그것을 그 친 후 부터는 재난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늘의 여신은 풍요와 다신의 신으로 풍요로운 삶을 준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남편의 이름으로 하늘의 여신을 섬기겠다고 다짐도 했습니다(15-19). 

 

예레미야는 이렇게 대답하는 모든 무리에게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조상들과 왕과 고관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행과 가증한 행위, 곧 우상 숭배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동일한 재난이 닥친 것이라고 전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도 하늘의 여왕을 섬기겠다고 다짐한 모든 사람들이 칼과 기근에 망하여 멸절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또 칼을 피하여 다시 유다로 돌아가는 사람만이 살아 남을 것임을 다시 한번 전합니다. 이 살아 남은자들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사실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이라는 것은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왕에게 사로잡힌 것 같이, 애굽 왕도 바벨론 왕에게 사로 잡힘으로 확증이 될 것입니다(10-30).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집트는 바벨론에게 패하였고, 그곳도 예루살렘과 같이 황폐하게 되었음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떠난 그 백성에게 여전히 그곳에서도 말씀으로 경고하셨고, 끝까지 돌아오도록 독려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황폐한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 온 사람들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당장은 소망이 없어 보이고, 더 상황이 좋아 보이지 않아도 그곳을 돌아오는 자들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당장은 하늘의 여왕을 섬기는 이집트가 더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파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당장에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황폐해 보일 수 있습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는 아무 소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 망한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 나셨고, 그들을 따르는 자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해 주셨고 참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 때로 괴롭고, 믿지 않는 자들이 더 잘되는 것이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에 낙담이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멸망할 것이고, 예수님께로 피한 자들은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풍요와 다산의 우상이 아니라 십자가의 참된 생명,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31일 (주일) 예레미야 43장

어제 말씀을 통해서 보았듯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이 자신들에 생각에 좋든지 좋지 않든지 따르겠다고 했던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군 지휘관들과 오만한 자들이 그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이미 예루살렘을 떠나 이집트로 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한 번 더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을 때 오만하게 반응합니다(1-2). 심지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을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이 바벨론에 그들을 넘기려고 한 것이라고 모함합니다. 결국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과 예레미야와 바룩을 데리고 애굽(이집트)으로 내려 갑니다(1-7).

 

하지만 그 곳에서도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유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큰 돌 여러 개를 가져다가 바로(파라오)의 왕궁 대문의 벽돌로 쌓은 축대에 진흙으로 감추라고 하십니다. 또 그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의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을 불러 그의 왕좌를 감춘 큰 돌들 위에 놓고 화려한 큰 장막을 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바벨론이 이집트를 쳐서 이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벨론 왕이 와서 애굽 사람들을 칼로 치고, 사로잡으며 또 온 땅을 치고 애굽의 신들의 신당을 불사를 것이라고 합니다. 옷을 두르듯이 애굽을 쉽게 물리치고 바벨론 왕은 평안히 그곳을 떠날 것이라고 합니다(8-13). 

 

42장에서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물었던 아사랴와 요하난와 오만한 자들은 단지 그들의 생각과 계획을 하나님께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묻는 행위 자체는 바른 것이지만, 그 동기는 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든지 순종하겠다고 했지만, 막상 하나님의 응답이 그들의 계획과 생각과 달랐을 때 그들은 거부합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계획과 뜻에 도움이 되고 맞을 때만 따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사자성어 ‘감탄고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달면 받고, 쓰면 뱉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께 우리의 계획과 뜻을 묻는 것은 옳고 바른 자세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나의 생각과 계획과 다를 때에도 순종할 것인지 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에서 남은 유다 민족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거스르고 이집트로 갑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바벨론 왕이 이집트를 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내 종'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우리보다 우리 상황을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계획과 생각에 다른 것을 말씀할 때도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할 때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선한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30일 (토요일) 예레미야 42장

이제 요하난을 중심으로 모든 군대의 지휘관들과 남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나아가 그에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갈 길을 알려주시면 그대로 행하겠다고 예레미야에게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숨김 없이 그대로 전해 주겠다고 대답합니다. 이 말을 들은 지휘관들과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다시 모든 말씀을 그대로 행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증인이 되실 것이며 하나님의 응답이 좋든지 좋지 않든지 순종함으로 복을 얻겠다고 다짐합니다(1-6). 

 

10일 후에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셨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을 비롯해서 모든 백성들을 불러 모읍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이집트로 가지 말고 이 땅에 눌러 앉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고 헐지 않으며, 심고 다시 뽑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에게 내린 재난을 돌이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기 때문에 바벨론 왕도 그들을 불쌍하게 여길 것입니다. 이는 바벨론 왕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이집트의 평화로움과 풍성함을 보고 그곳으로 간다면 전쟁의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 그들에게 미칠 것이고, 그곳에서 뿌리 내리고 살고자 하는 사람은 그곳에서 결국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노여움과 진노를 예루살렘 주민에게 부으신 것 같이 애굽, 곧 이집트를 의지하여 그곳으로 간 백성들에게 내리실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분명히 그들에게 경고하고 순종하지 않으려는 그들을 책망합니다(7-22).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 뜻을 구하는 것은 중요하고 옳은 일입니다. 소수로 남아 있는 남은 자들이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 기도하여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에게 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서 그 뜻을 묻고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중요하고 바람직합니다. 또 그 기도 응답과 말씀에 순종할 준비를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매순간 중요한 결정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서 묻고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땅히 해야할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3월 29일 (금요일) 예레미야 41장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일곱째 달이 지났을 때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바벨론 왕이 세운 총독 그다랴와 함께 식사를 하다가 그다랴를 죽이고 그와 함께 있는 다른 유다 사람과 바벨론 군사도 죽였습니다(1-3). 그후 흩어져 있다가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의 표현으로 수염을 깎고 팔 십명이 성전터로 돌아옵니다. 이들은 유대인 총독 그다랴가 미스바에서 다스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섬기고 바벨론에 항복하려고 왔을 것입니다. 그 때 이스마엘은 속임수로 맞이하고 곧 그들을 죽입니다. 그 중에 열 명만 음식을 주겠다고 애원하여 살려 줍니다. 또 이스마엘 미스바에 남아 있던 왕의 딸들과 바벨론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그다랴에 맡긴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아 암몬 자손에게로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사 지휘관이 이스마엘이 행한 모든 악행을 듣고 그와 싸우러 추격했습니다. 기브온 큰 물가에서 요하난은 이스마엘을 만났고 이스마엘과 함께 있던 포로들은 요하난을 보고 기뻐하며 요하난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이스마엘은 자신과 함께하는 여덟 명의 사람과 함께 암몬 자손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이스마엘이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경은 그를 왕의 종친의 후손으로 소개하고, 왕의 장관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포로들도 왕의 딸들을 데리고 암몬 자손에게로 가려고 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왕족에 대한 집착이 있고, 왕족이 아닌 그다랴가 총독이 된 것에 불만을 품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 유다 민족을 침공한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보다 바벨론을 대적하고 있던 암몬 자손의 편에 서기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는 암몬 자손과 이집트 등이 바벨론의 침공을 대비하고 적대적인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은 이스마엘의 손에서 사람들을 구하여 돌아 옵니다. 하지만 문제는 바벨론이 세운 총독 그다랴를 이스마엘을 죽였기 때문에 바벨론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할 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바벨론을 대적하는 나라 중 강대국인 이집트로 피난을 가기로 마음을 모으고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 머뭅니다(4-18).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이 패망한 후 정치적인 상황을 보여줍니다. 이스마엘은 바베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라는 예레미야의 말을 분명히 왕의 장관으로 있을 때부터 들었을 것이고, 실제로 지금 망하게 된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왕족에 대한 그릇된 자부심으로 암몬왕의 말을 듣고 바벨론의 통치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진정한 이스라엘 왕족의 모습이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왕이 포로로 잡혀간 이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출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기독교 집안, 장로, 목사 자녀, 신앙의 연수 등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왕같은 제사장들로 새로운 신분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 신분이 증거됩니다. 오늘도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신분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28일 (목요일) 예레미야 40장

예레미야는 여러 사람들과 섞여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길에 사령관 느부사라단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느부사라단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심판하신 것임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방인을 통해서 이런 말씀이 전해 지는 것은 이방인들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었는데, 그 백성들은 깨닫지 못했던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풀어주면서 그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면 선대해 줄 것이라고 하면서 함께 가자고 합니다. 그게 아니면 살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 사는 것을 택합니다.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내며 바벨론 왕이 세운 유다 총독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로 보내 줍니다(1-6).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남은 백성들과 어려움을 함께 감당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다랴는 예루살렘의 귀족 출신으로 예레미야의 말대로 바벨론에 항복한 사람입니다. 이집트를 의지하자고 했던 다른 귀족들과 다른 노선을 선택했습니다. 이에 바벨론 왕의 신임을 얻어 유다 총독으로 임명이 되어 지속적으로 바벨론에 복종할 수 있도록 남은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흩어졌던 유다 백성들 중 많은 이들이 그다랴의 정책에 호응하여 미스바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여름 추수시기 쯤이었기 때문에 많은 포도주와 과일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모인 사람들 중에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바벨론에 항복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같이 친애굽 노선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가 이스마엘을 통해서 그다랴를 죽이러 보냈음을 말하고 조용히 처리하겠다고 했지만 그다랴는 듣지 않았습니다(7-16). 결국 그다랴는 이스마엘에 의해 살해 당할 것입니다(41:2). 

 

오늘 말씀에서 예레미야는 남은 백성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 본문은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이야기들을 살펴볼 때 다시 애굽을 의지하려는 세력들을 억제하고 남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 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바벨론에 항복한 그다랴를 죽이고 이집트를 의지하고자 이스마엘과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세워가고자 하는 세력과 그 반대 세력은 항상 대적합니다. 우리 마음에도 그런 두 마음이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수 없이 많이 겪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지속적으로 살 수 있도록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남은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전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고 싶은것이 있다면 지속적으로 말씀을 신뢰함으로 끊어 내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오직 말씀을 따라서 살며 오직 하나님만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바랍니다. 아멘. 

 


3월 27일 (수요일) 예레미야 39장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결국 예루살렘은 시드기야가 다스린지 11년에 함락 되고 맙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하들은 예루살렘의 중앙 문에 앉습니다. 이는 그들이 도시의 중심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정복되었습니다(1-3). 한편 시드기야 왕은 도망하다가 잡혀 바벨론 왕에게 끌려가 심문을 당합니다. 아마도 바벨론을 배신한 이유에 대해서 심문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다른 모든 고위 관직자들도 죽입니다. 그리고 시드기야의 눈을 뽑아 바벨론을 데리고 가려고 결박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왕과 백성의 집들을 불사르고 예루살렘 성벽도 헐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항복한 사람들은 잡아서 바벨론으로 옮깁니다. 또 아무 소유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포도원과 밭을 주고 예루살렘에서 살도록 합니다(4-11). 바벨론 왕은 그의 사령관에게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에게는 선하게 대하게 하고, 심지어 그의 말도 들으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집으로 가서 백성과 함께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감옥에 있을 때 이미 구스인 에벳멜렉에게는 구원을 받아 목숨을 건질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12-18).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정복되었고, 성벽도 헐어졌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이집트를 의지하던 고위관리들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들도 죽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던 예레미야와 구스인 에벳벨렉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또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지지 않았던 밭도 이제는 돌려지게 되었습니다. 왕과 고관들이 율법을 따라서 행하지 않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소홀했을 때, 이방인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들을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은 환란 속에서도 건지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동일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환란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환란이나 어려움이 올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26일 (화요일) 예레미야 38장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에 머무르고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보내며 반드시 이 성이 망하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을 듣고 몇몇 고위 관리들은 왕에게 나아갑니다. 그리고는 예레미야가 이 성의 평안이 아니라 패망을 전하여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고 왕에게 말합니다. 이에 시드기야 왕은 그렇게 하도록 둡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돌보는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잡아서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습니다. 진창 구덩이에 예레미야는 갇혔습니다. 이 일을 듣고 구스인 에벳멜렉이 왕에게 나아가 다른 고관들이 예레미야에게 하는 일이 악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성 안에 떡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그가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왕은 에벳멜렉과 삼십 명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구출하게 하고 왕의 경호대가 머무는 뜰에 있을 수 있도록 합니다(1-13). 

또 왕은 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자신에게 비밀스럽게 오게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려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가 듣고 자신을 죽이지 않도록 약속하라고 합니다. 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줄 때에도 듣지 않을 것임을 말합니다. 시드기야 왕은 비밀스럽게 예레미야에게 그를 죽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지도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항복하면 생명을 건지게 될 것이고 이 성이 불살라 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시드기야는 오히려 바벨론 왕보다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유다인들이 자신을 모독하고 조롱할 것이 두렵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인들의 손에 왕을 넘기지 않을 것이고 또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한다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항복하기를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왕국에 남은 모든 여자들이 바벨론 왕과 고관들에게 잡혀가며 왕을 조롱할 것이며, 왕의 아내와 자녀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왕도 도망치다가 잡히며, 또 성은 불에 탈 것이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왕은 아무에게도 이 말을 알리지 않도록하고 또 다른 고관들이 왕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으면 다른 핑계를 대도록 하여 다른 고관의 손에서 죽지 않도록 해줍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이 함락이 될 때까지 감옥 뜰에 머뭅니다(14-28). 

 

오늘 말씀에서 구스인 에벳멜렉의 등장이 눈길을 끕니다.  그는 이방인 출신이지만 예루살렘에서 왕의 측근 중 한 사람으로 있으면서 예레미야의 동족과 달리 예레미야에게 행하는 것이 악한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이방인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지켜주십니다. 

 

또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반응이 어떻게 조화가 되는지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들의 죄악으로 심판을 하시지만, 그 가운데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들에게는 심판 가운데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운명론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의 헌신과 노력은 함께 작용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선택은 서로 상반 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되는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분명히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 선택에 따라서 그의 결말은 바뀔 것입니다. 하지만 끝내 그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불살라졌습니다. 시드기야가 불순종한 것은 순종했을 때 당할 어려움과 조롱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그런 조롱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생명을 건져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순종함으로 예상되는 어려움들도 견디게 해주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모두가 불의한 길을 걸을 때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을 운명론으로 여겨 삶을 게을리하거나 자포자기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시고 우리의 열심을 사용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할 때 예상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선택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25일 (월요일) 예레미야 37장

여호야김과 그의 아들 고니야를 이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바벨론 왕을 배신하려고 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의 주변에는 애굽을 의지해야 한다는 고관들이 많았기 때문에 바벨론에 항복해야 한다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을 둘러싸서 포위합니다. 그 때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자기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동족인 유다인 종들을 율법에 따라 놓아주기로 합니다(34장). 예레미야는 기도했고 하나님도 잠시 이집트의 왕이 바벨론과 싸우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어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의 포위를 풀게 하십니다. 그 틈을 타 우리가 34장 말씀에서 보았던 것 같이 자유를 주었던 노예를 다시 종으로 삼고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어깁니다. 친 애굽 정책을 주장하던 고위 관리들은 왕에게 더 신임을 얻었을 것이고 여전히 결국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는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1-10). 이 때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향인 베냐민 땅으로 가서 분깃을 받고자 예루살렘을 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32장에서 하나님께서 땅을 매매하라고 하신 것을 이행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베냐민 땅으로 향한 문에 가까이 갔을 때 문지기의 대장이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항복하러 간다고 생각하고 고위 관리에게 그를 데리고 갑니다. 예레미야는 나라를 버리러 간다는 오해를 받아 뚜껑 씌운 구덩이 감옥에 갇힙니다. 그곳은 매우 견디기 힘든 장소였습니다. 여러 날 후에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다시 불러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있는지 묻습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때의 상황은 물러갔던 바벨론의 군대가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였을 것입니다. 

 

이전에 포위를 잠시 풀었을 때는 바벨론에게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짓 예언자들이 득세를 했겠지만, 다시 바벨론에게 포위되자 그들은 도망치거나 숨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왕에게 자신을 다시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 보내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왕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왕궁 감옥에 가두어 매일 떡 하나를 성중에 떡이 떨어질 때까지 줍니다. 왕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보호하십니다(11-21). 

 

거짓 선지자와 달리 예레미야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고 신뢰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득세했다가 숨고 도망칩니다.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서 쉽게 마음을 바꿉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 마음이 바뀌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고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는 상황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따라서 살도록 하시기 위함 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잘될 때는 감사하고 힘들 때는 기도하며 인내하고 굳건하게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말씀을 굳게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오늘 하루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24일 (주일) 예레미야 36장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 김이 다스리던 4년째 되던 해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 때문에 갇혀 있었거나 아니면 부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기록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유다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하십니다(1-3). 이에 예레미야는 서리관 바룩을 부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도록 합니다. 바룩은 예레미야가 불러주는대로 두루마리에 받아 적었습니다. 그리고 바룩은 금식일에 그 두루마리를 가지고 성전으로 가서 백성의 귀에 낭독해 주었습니다(4-10). 그 말씀을 들은 미가야는 서기관들과 모든 높은 지위에 있는 관리들에게 바룩이 전한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바룩을 불러 그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모두 듣습니다. 그들은 두루마리에 적힌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말씀을 듣고 놀라 왕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유다가 하나님께 범한 죄로 인해 망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왕이 예레미야와 바룩에게 보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관들은 예레미야와 바룩에게 숨고, 숨은 곳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일러줍니다(11-19). 

 

고관들은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고 왕에게 가서 그 내용을 말해줍니다. 그러자 왕은 그 두루마리를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왕과 모든 고위 관리들 앞에서 낭독합니다. 왕은 그 두루마리 서너쪽을 읽을 때마다 칼로 째서 앞에 있던 난로에 태웁니다. 일부 고관들이 말려도 두루마리를 모두 태웁니다. 왕과 신하들 중 다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업신여겼고 무시했습니다.

이는 여호야김 왕의 아버지 요시야 왕이  성전을 고치다가 두루마리 율법 책이 발견되었을 때, 그들에게 당한 재앙이나 어려움이 하나님의 율법을 떠난 것 때문임을 알았을 때 옷을 찢고 회개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반응입니다. 여호야김 왕은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아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숨기셨습니다(20-26). 

왕이 두루마리를 불에 태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말씀을 기록하게 하십니다. 또 왕이 바벨론 왕이 와서 유다 땅을 멸할 것이라는 내용에 불만을 가졌는데,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그렇게 하실 뿐만 아니라 여호야김 왕을 폐위시키고 그 자녀가 왕위를 받지 못하며, 왕이 죽었을 때 그의 시체가 버림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고위 관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돌이키지 않았기에 큰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바룩을 통해서 다시 말씀을 주시고 이번 보다 더 많은 것을 기록하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더 설득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줍니다(27-32).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회개한 아버지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경고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받은 아들의 결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달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는 두 사람의 자세와 반응이 달랐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되어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과 구원의 계획과 은혜와 사랑과 심판이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문제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위로와 평안 가운데 이 땅에서 살다가 천국에 갈 것입니다. 거부하는 사람은 영원한 사망을 얻고,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 없이 살다가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바르게 반응하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길 바랍니다. 또 믿지 않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멘


3월 23일 (토요일) 예레미야 35장

오늘 말씀은 레갑 가문과 유다의 나머지 족속과의 대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간 상으로 34장보다 앞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레갑 사람들을 데리고 성전 한 방으로 가서 그들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레미야는 그대로 행하여 레갑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포도주를 금하며 선조들이 명령한 것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 명령을 지키려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집도 짓지 않고, 포도원이나  밭이나 씨앗을 가지지 않고 장막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1-11).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종자도 가지지 않는 것은 우상 숭배와 직결되는 가나안의 농경 문화를 거부한 것입니다. 농사를 통해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데, 가나안의 농경 문화를 접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을 섬겨야 농사가 잘 된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도 섬기고 가나안의 우상도 섬겼습니다. 포도주는 그 땅에서 얻은 소득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은 그런 삶을 거부하며 많은 불편을 감소하더라도 가나안 문화를 거부했고 후손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시드기야와 고관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의 삶과 대조적입니다. 레갑은 조상들의 명령도 신실하게 지키는데,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끝까지 버린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하나님께서 앞에서 말씀하신 모든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반면에 레갑 사람의 가문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섬길 자가 끊어지지 않고 나오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12-19).

 

레갑 가문은 모두가 가나안의 문화를 따라 살아가는 상황 속에서 그 문화를 멀리하며 자발적인 불편을 감수하였습니다. 악한 이방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삶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때 우리도 악한 문화와 유행에 동화되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유별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레갑 가문 사람들처럼 불편하지만 절제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고, 세속 문화에 물들게 하는 것들을 절제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한다고 해서 다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삶에 레갑 가문의 사람들의 삶과 가까운지,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의 삶에 가까운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과 더 깊은 관계를 위해서 절제해야 하는 부분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돌아보고 절제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22일 (금요일) 예레미야 34장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온 군대를 모아 예루살렘을 둘러쌌고 주변 성읍을 쳤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으로 잡혀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안히 죽고 그를 위해서 애도하며 기억될 것입니다(1-5).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애굽을 의지하고, 성이 포위되었을 때 도망치려고 했던 시드기야는 잡혀서 그의 아들들이 죽는 것을 눈으로 보고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됩니다(왕하25:1-7). 그럼에도 그는 바벨론에서 고문을 당하거나 하지 않고 평안히 죽게 되고, 또 사람들이 애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있은 후 정말로 느부갓네살은 공격을 개시했고 다른 모든 성읍은 정복되었고 예루살렘과 라기스와 아세가만 겨우 공격을 견디어 내고 있었습니다(6-7). 이렇게 위기가 닥치자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서 일종의 서약(계약)을 합니다. 이스라엘 종들을 놓아주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명한 것으로 가난하여 자신의 몸을 종으로 팔 수 밖 없는 이스라엘 동족이 6년을 섬기고 나면 7년 째에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신15:12). 이것은 당시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시드기야는 종에게 자유를 주어 그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고 그 모든 신하들도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뜻을 돌이켜 다시 자유를 주었던 사람들을 잡아 종으로 삼습니다. 학자들은 유다를 포위하고 있던 바벨론이 애굽의 북진으로 잠시 예루살렘의 포위를 풀고 전략지로 갔을 때 이런 느슨한 분위기를 틈타 다시 노예들을 잡아왔다고 봅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시드기야 왕과 신하들이 노예에게 자비를 주겠다는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게 자유를 주어 치시겠다고 합니다. 송아지 두 조각 사이로 지나갔다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맺을때 어기면 송아지와 같이 쪼개어 질 것이라고 일종의 맹세였습니다. 이스라엘 조상들도 그렇게 언약을 맺었고, 아마도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송아지와 같이 죽음을 맞이 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들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 곧 바벨론의 왕에게 명하여 다시 예루살렘에 오게 만들고 이 성이 빼앗아 불에 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8-22). 그리고 실제로 이 일은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이 한 것은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약속을 한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마침 그 때 바벨론의 군대를 물리십니다. 그러나 그때 완악한 하나님의 백성은 그 약속을 어깁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리기로 한 심판을 그대로 이행하십니다. 어쩌면 시드기야 왕과 그 신하들이 노예를 놓아주기로 하고 하나님께 약속을 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조금 상황이 나아지는 것을 보고 뜻을 돌이켜 결국 하나님과 약속을 어기고 하나님은 심판을 시행하십니다. 

우리들도 시드기야 왕처럼 위기의 상황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찾고 간절해집니다. 하나님과 이런 저런 약속들도 합니다. 하지만 위기의 상황이 해결되고 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과 맺은 약속도 실천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시드기야가 당한 일과 같은 일이 생기지는 않지만, 우리도 위기 속에서 하나님과 한 약속들을 잘 지키고 있는지, 힘들 때만 하나님을 찾고 평소에는 찾지 않는 그런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21일 (목요일) 예레미야 33장

예레미야가 왕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 두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선언하시고 예레미야가 부르짖을 때 반드시 응답하시고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때문에 그들을 반드시 갈대아인들(바벨론)의 손에 넘기고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게 하겠지만, 반드시 그 성을 치료하고 고쳐 낫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그 예루살렘 성은 평안과 진실이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며 죄를 깨끗하게 씻으셔서 결국 예루살렘을 회복시켜 주시고 세계 열방 앞에서 하나님의 기쁜 이름과 찬송과 영광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전에 이 성읍을 조롱했던 열방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베푸신 복으로 인해 두려움으로 떨게 될것입니다(1-9).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황폐했던 성읍의 거리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신랑과 신부가 기뻐하는 소리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와 성전에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리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곳에 다시 목자들을(지도자들) 세우시고 양떼를 모아 눕히시고 양의 숫자를 세는 소년의 손 아래로 양들이 지나가도록 하겠다 하십니다.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서 한 의로운 가지(자손)이 나와서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며, 예루살렘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만드실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레위 족속 제사장들도 끊이지 않도록 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제사가 유지되도록 하실 것입니다(10-18). 낮과 밤이 반복되는 것을 깨뜨릴 수 없듯이 이 언약은 결코 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0-21절은 반어법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윗에게 세운 언약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고, 레위 제사장을 세우겠다는 언약은 결코 파기 될 수 없고 반드시 이 다윗 자손과 레위 자손이 많아져서 다스림과 제사의 일이 유지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두 가계(남유다, 북이스라엘)를 버렸다고 여러 나라가 말하지만 그들과 맺은 언약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포로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고 그를 불쌍히 여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9-26).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자유하신 분이신 언약의 띠로 우리와 당신을 묶으셨습니다. 당신께서 하신 언약적인 약속과 맹세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백성을 돌보실 것입니다. 이 언약은 예수님께서 완전히 성취 하십니다. 예수님은 참된 다윗의 자손이며 제사장으로서 이 땅에서 오셔서 죄와 사탄을 물리치시고,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은 죄와 사탄의 포로에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녀로서 왕과 제사장으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과 레위의 자손이 참으로 많아졌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나라의 왕자와 공주들이며, 자신의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고 이웃을 섬기는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를 거부하며,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며, 주변 사람들을 섬기며 참된 하나님 나라의 왕과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20일 (수요일) 예레미야 32장

시드기야가 다스린지 10년에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쌌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넘겨지고 유다왕 시드기야는 바벨론으로 잡혀갈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이유로 왕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습니다(1-5).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사촌 하나멜이 와서 자기의 밭을 사라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촌 하나멜이 예레미야에게 왔고 자기의 밭을 사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땅을 사고 파는 것이 아닙니다. 땅을 사고 판다는 것은 하나멜의 형편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이 포위되면 물자가 들어 올 수 없기 때문에 경제가 완전히 파탄이 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땅을 사고 파는 행위 자체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이 함락되고 나면 모든 사람이 땅을 완전히 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성이 함락 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매매절차를 진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계약서를 봉인하여 열지 말고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15절의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살 수 있게 되도록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회복을 약속하십니다(6-15). 예레미야는 땅을 사고 파는 절차를 마친 후에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슬픔을 표현합니다. 먼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높으심을 찬양하고 출애굽부터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게 강하신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돌보셨는지 고백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우상 숭배를 함으로 하나님을 떠난 백성을 하나님께서 지금 심판하심으로 포위 되어 있음을 통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땅을 사도록 하신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다시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바벨론 왕에서 이 성과 도시를 넘길 것이라고 합니다. 그 원인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보내셔서 심판한 이 땅과 백성을 다시 모든 지방에서 모으시고 돌아오게 하며 안전하게 살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언약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고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된 삶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마음과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기꺼이 즐겁게 이 일을 행할 것입니다. 그들을 다시 포로에서 돌아오게 함으로 다시 땅을 회복하실 것입니다(16-44). 

 

하나님은 오늘도 유다 백성들에게 심판과 복을 말씀합니다. 심판이 실제로 일어나듯이 복도 실제로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바벨론에서도 돌볼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돌본다’는 말은 ‘찾아간다. 방문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항상 찾아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 심판하셨고 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방문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사시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에 진노하시고 심판하시지만,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회복을 약속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당신을 우리에게 다 주십니다. 하나님은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우리에게 회복을 주시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과 복을 누립시다. 또 우리도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참된 백성이 됩시다. 아멘. 


3월 19일 (화요일) 예레미야 31장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회복의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한 곳으로 돌아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한 지파도 빠짐없이 모두 회복의 은혜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게 될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으로 인도하시며 다시 세우셔서 처녀가 춤을 추는 것이 아름다움과 기쁨을 회복할 것입니다. 옛날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의 산들이 회복이 되고 에브라임 산에 파수꾼들이 외치며 함께 시온 성으로 올라가자고 할 것입니다. 이전에 여로보암이 우상을 세웠던 장소가 에브라임 근처 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두 시온으로 모여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모두 돌아오고 저주를 받았다고 여겨져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던 맹인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출산 후에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사람들도 모두 성전으로 모이게 될 것입니다(이것은 예수님께서 맹인과 다리 저는 자들과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쳐주심으로 성취되었음).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을 보고 시온으로 나아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물이 주위를 둘러싼 동산과 같이 늘 풍성함과 기쁨과 즐거움이 넘칠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제 몫을 받으며 백성들도 풍족한 복을 누릴 것입니다(1-14). 자녀를 잃고 애곡하는 소리가 그치고 위로를 받으며 잡혀 갔던 자녀들이 돌아오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책망하시면도 그를 불쌍히 여기며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며(‘끌어 안다’는 의미. 포로에서 돌아온 남편과 재회하는 것으로 볼수 있음)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 다시 회복되어 의로운 처소와 거룩한 산으로 다시 불리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다시 사람과 짐승을 많아지게 하며, 하나님께서 강력한 징벌로 그들에게 행하셨던 것 같이,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세우시고 심으실 것입니다. 다시는 죄가 대물림되지 않을 것이며(“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며 아들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의 뜻),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이스라엘과 유다(온 백성)와 세우실 것입니다. 이 새언약은 그들이 깨뜨린 시내산에서 맺은 것과 다를 것입니다. 십계명을 두 돌판에 새긴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돌판이 아니라 마음판에 기록하여 다시는 깨어지지 않도록 하고, 마음을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마음에 새겨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는 놀라운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하늘의 높이(오늘날로 우주의 높이)와 땅의 깊이를 측량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이 깨어지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 새롭게 세워지는 성은 시체와 재가 뿌려지는 모든 골짜기를 포함합니다. 이는 죄의 삯인 죽음을 정복하고 거룩한 성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15-40). 

 

하나님의 회복의 말씀은 심판의 말씀만큼 강력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을 주시고 그 회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황폐하였던 곳을 풍성하게 하시고, 소망이 없었던 곳을 아름답게 하시고, 소망과 희망을 풍성하게 베푸십니다. 특별히 새 언약은 다시는 깨어지지 않은 영원한 언약으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이 됩니다. 그분은 새 언약의 성취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맹인들과 다리 저는 자, 그리고 혈루병에 걸린 여인을 고쳐 주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 죄의 삯인 죽음을 십자가와 부활로써 이기심으로 정복하셨고, 그분 스스로 성전이 되셔서 믿는  온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자신과 연합시키시고, 온전한 기쁨과 회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성령께서 인도 하는 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새 언약의 백성으로 불러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주셨고, 또 앞으로 주실 참된 회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바랍니다. 아멘


3월 18일 (월요일) 예레미야 30장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하였습니다. 이번에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희망과 소망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기록하라고 하시는 것을 확실히 이루어질 것에 대한 보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붙잡힌 당신의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함께 돌아오게 하셔서 한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그들은 기한이 차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1-4). 비록 그들이 무서움과 환란의 때를 당하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환란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그들의 멍에와 묶인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 이방인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세우실 다윗 왕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 ‘다윗 왕’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1차적으로 포로 귀환을 통해서 다윗의 후손인 스룹바벨을 의미하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 메시야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천국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포로를 귀환하게 하신 것 같이, 죄와 사망의 종 되었던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참된 평안과 안전함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실 것이고 모든 민족이 멸망을 당해도 하나님의 백성만큼은 망하게 두지 않으실 것이라고 격려하십니다(5-11). 하나님은 그들의 범죄에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칠 수 없는 상처가 난 것 같이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고치시고 새 살이 돋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12-17).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범죄한 자를 그냥 넘어 가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징계 후에는 다시 고쳐주실 것입니다. 더욱 깨끗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폐허 위에 도시가 다시 세워지고 감사와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나오며 더욱 번성하게 되고 존귀하게 되어 예전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지도자들을 배출하고 통치자도 나와서 그들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또 바르게 통치함으로 더욱 더 하나님과 친밀히 지내게 만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언약이 새롭게 되고 더욱 깊은 관계가 될 것입니다(18-22).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심판하시지만 그 백성에게 회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23-24).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 백성에게 징계를 내리시되 버리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징계를 통해서 오히려 깨끗하게 만드시고 그들과 더 깊은 교제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언약적인 저주와 징계를 십자가에서 받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과 회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오늘 본문의 모든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세상 끝까지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참된 회복을 주십니다. 모든 백성은 망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망하지 않도록 붙드십니다. 오늘도 우리 이런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기억하고 기쁨 가운데 회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17일 (주일) 예레미야 29장

3월 17일 (주일) 예레미야 29장

3월 16일 (토요일) 예레미야 28장

예레미야가 멍에를 만들어 목에 달고 다닌 지 일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하나냐가 예레미야가 했던 것과 같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과 선지자 예레미야가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어 버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2년 안에 느부갓네살이 빼앗아 갔던 모든 성전 기구와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포로들을 다시 되돌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것을 듣고 있던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전에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전의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지와 동일한 메시지를 전했던 반면에 하나냐의 메시지는 달랐습니다. 예레미야는 만약 하나냐의 예언이 참으로 이루어진다면 그는 여호와께서 보낸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메고 있던 멍에를 꺾고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이라고 더 확실히 말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자기 길로 갔습니다(1-11).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길 하나냐에게 가서 그가 나무 멍에를 꺾었지만 그 대신 죄 멍에를 만들었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이전보다 더 강력한 징계와 억압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쇠 멍에로 바벨론 왕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넘기실 것입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냐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지도 않고 말씀을 듣지도 않았는데, 거짓예언을 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징계를 내리시고, 그 해에 죽을 것을 예언합니다. 예레미야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치셔서 그해 일곱째 달에 하나냐는 죽게 됩니다(12-17).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참된 선지자이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셨습니다. 때로는 위로와 격려를 하셨고, 병도 고쳐 주셨습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의 준엄한심판을 에언하시고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셨습니다. 성경은 복과 저주, 은혜와 심판, 공의와 사랑 모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복과 은혜와사랑에는 관심이 있지만 저주와 심판, 공의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좋은 말만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이단 마르시온도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시기에 구약을 거부하고,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만 인정하고 신약 성경만 인정했습니다. 참된 선지자로 부름 받은우리는 하나님의 일부 말씀만 아니라 전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격려와 축복에는 감사하고 경고에는 회개하고, 삶을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또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특정부분이 아니라 골고루 설교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참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15일 (금요일) 예레미야 27장

하나님은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왕 때부터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예레미야에게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냥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줄과 멍에를 목에 걸고 가라고 합니다. 줄과 멍에는 주로 짐승에게 씌워서 밭을 갈게 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예레미야의 목에 걸고 가도록 한 것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 왕의 포로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것을 시드기야를 보러 온 에돔, 모압, 두로, 시돈의 사신들에게도 주어 그들의 왕들에게 전달하도록 하여 온 천지를 만드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뻐하시는 자(바벨론 왕)에게 땅과 들짐승(주변 나라)들을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메지 않는 나라에게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벌을 주시겠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 있던 시드기야 왕에게 에돔, 모암, 두로, 시돈의 사신들이 온 것은 연합하여 바벨론을 대적하자는 동맹을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선지자, 복술자, 꿈꾸는 자, 술사, 요술사들은 각 나라에서 신들의 도움으로 미래를 말하는 사람들인데, 그들 중에서 바벨론과 싸워서 이길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거짓 예언하는 자들임을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자는 그곳에서 잡혀 가겠지만 바벨론에서 밭을 갈며 살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1-11). 

 

이에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모든 말씀을 전하여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합니다. 바벨론 왕을 섬기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은 가짜 선지자들입니다. 단지 왕의 기분을 맞추어 주기 위해서 왕이 듣고 싶은 말만 하는 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전에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 함께 바벨론 왕이 함께 가지고 간 성전의 기물들이 곧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하는 거짓 예언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여전히 성전에서 기다리는 제사장들에게 그 말을 듣지 말라고 전합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 다시 기물이 돌아와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기를 바라겠지만, 그들 또한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고 바벨론 왕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성전을 파괴되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 왕이 곧 돌아올 것이고 성전의 기구도 돌아올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들의 말이 맞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성전과 왕궁에 남은 것들은 옮겨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구하여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남아 있는 기구들도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성전 기구들을 돌보시고, 다시 가지고 돌아오실 것입니다(12-22). 그들은 바벨론 왕을 섬기고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정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을 배반하고 유다는 멸망하며, 성전은 파괴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졌습니다(왕하24:10-20).

 

당시 유다의 상황은 왕이 포로로 잡혀가고, 하나님의 성전의 보물을 빼앗기고, 금 그릇은 다 깨어지는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거짓 선지자들은 그 포로의 기간이 금방 끝이 나고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거짓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긴 기간(70년후)을 예고했습니다. 둘 다 회복을 예고한 것은 같지만 기간은 달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우리의 때와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고 따라가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려운 상황, 오랜 기도의 제목, 회복의 때가 우리의 기대와 달리 길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주님의 오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때가 우리의 기대와 다를 때에도 신뢰하며 인내합시다. 거짓 선지자들과 같이 우리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이루어짐을 믿고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14일 (목요일) 예레미야 26장

오늘 말씀은 25장 사건보다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즉위하자마자 악한 길을 행할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성전에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성전에 제사하러 오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제사를 드리러 오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율법에 순종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그 동안 선지자를 보내어 경고의 말씀을 했는데도 그들이 듣지 않았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한 때는 거룩한 곳이었다가 지금은 폐허가 된 실로와 같이 만들고 웃음거리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1-7). 

 

예레미야가 이러한 말씀을 가감없이 성전에서 전하자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죽이려고 합니다. 그 예언은 그들에게는 굉장히 듣기 싫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성전이 황폐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고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들은 유다의 정치 지도자들이 성전 문에 앉습니다. 성전 문에 앉는 것은 재판을 위해서 앉는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고관들과 모든 사람들이 처음에는 이렇게 예언하는 예레미야가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고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재앙을 돌이킬 것이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은 그들이 알아서 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셔서 전하라고 하신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자신을 죽인다면 무죄한 피를 흘린 것이라고 경고합니다(8-15). 이에 고관들과 백성들의 마음이 바뀌고 또 장로들 중몇 사람이 일어나 이전에 히스기야 왕 때 미가 선지자가 동일한 말씀을 전했을 때 히스기야 왕은 잘못을 돌이켰고, 하나님께서도 재앙을 돌이켰다고 합니다. 때문에 예레미야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합니다(16-19). 예레미야와 같이 선지자가 말씀을 전하다가 죽음의 위협을 겪는 것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선지자 우리야는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과 동일한 말씀을 전하다가 목숨의 위협으로 애굽으로 갔지만, 다시 잡혀와 여호야김 왕에게 죽임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의 서기관이었던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20-24). 위협은 실제였고 강력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할 때 선지자는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선지자 우리야 처럼 실제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참된 선지자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시고 십자가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로서 죽음을 이기시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선지자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선지자적인 사역을 물려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라고 불립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목숨의 위협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아내고, 말씀을 전하고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또 때로는 말씀 때문에 손해를 보려고 하거나 어려움을 감당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시고 보호하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불편함이나 실제적인 어려움이 닥쳐도 말씀대로 살아 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 교회 강단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감없이 전해지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실제로 목숨을 걸고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들과 사역자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13일(수요일) 예레미야 25장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난 23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다 백성에게 선지자를 보내어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틀림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지속적으로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끝내 유다 백성은 스스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에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당신의 종으로 삼아 유다를 멸하고, 70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게 하시겠다고 합니다(1-11). 그러나 하나님은 70년 뒤에 바벨론 왕의 악과 바벨론 사람들의 죄악을 징계하시면서 그들의 행위대로 갚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 말씀을 주셨고, 기록하게 하셨습니다(12-14).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당신께서 주시는 저주의 포도주 잔을 모든 주변 민족들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 잔을 유다와 예루살렘에 전할 때 사람들은 멸망과 놀램과 비웃음과 저주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또 애굽을 비롯한 주변 왕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마지막에는 세삭(바벨론)도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벨론을 통해서 다른 주변 나라를 심판하시고 마지막에 그들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잔을 마시기 거부하며 하나님이 내리실 심판에 저항하고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는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바벨론을 통해서 그들을 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인 유다도 심판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모든 나라도 멸할 것입니다(15-29). 이 모든 말을 예레미야는 전해야 합니다. 포도주 밟는 자 같이 흥겹게 노래하신다는 것은 심판이 그만큼 강력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줄 자도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인 목자들도 그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땅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30-38). 

 

하나님은 유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종으로 들어서 유다를 망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또한 바벨론도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심으로 망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70년 후에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심판이 주어집니다. 바벨론에게는 그런 약속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온 세상에 당신의 통치가 드러나고 확장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이 그 역할에 충실하지 않을 때 다른 백성을 통해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그 심판을 통해서 다시 회복을 주시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과 정의와 사랑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다스림과 정의와 사랑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맡겨진 일상의 사명과 복음 전파, 이웃 사랑의 사명을 회복하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12일 (화요일) 예레미야 24장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한 환상을 보게 하십니다. 그 때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왕 여고냐와 다른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포로로 잡아간 후였습니다. 그 환상에서 예레미야는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열매 두 광주리를 보게 됩니다. 그 둘의 품질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한 광주리에 있는 무화과는 극상품의 무화과였고, 다른 광주리의 무화과는 너무 품질이 좋지 않아서 버려야만 하는 상태였습니다(1-4). 곧이어 하나님께서는 이 환상의 의미를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항복하여 잡혀가는 사람들을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보셔서 바벨론에서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 땅에 심고 다시 뽑지 않겠다고 합니다. 또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호와심을 알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이며(창17:8), 출애굽 직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출19:6). 그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반대로 시드기야와 고관들과 같이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과 애굽으로 피한 자들은 나빠서 버려야하는 무화과와 같이 버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환난을 당하게 하시고 부끄러움과 수치와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하실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보내어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멸절에 이르기까지 행할 것입니다(5-10).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회개와 파멸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무시하고,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또 위기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애굽을 의지하고, 결코 망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을 돌이키고 율법을 행하라는 말씀을 무시해도 조상의 땅에서 쫓겨나지 않고 성전만 있으면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자들은 70년 뒤에 돌아오게되지만, 시드기야는 그 자녀가 눈에 앞에서 주는 것을 보고, 눈이 뽑혀 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떠나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을 때 순종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이전보다 더 든든하게 심겨서 뽑히지 않도록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은 자들입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옴으로, 궁극적으로 구원의 말씀을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심겨서 결코 뽑히지 않게 됨으로 성취됩니다.

교회는 좋은 무화과와 같은 자들입니다.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 입니다. 낯선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보살펴 주심을 믿고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낯선 곳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고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돌보심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불확실한 미래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간다면 우리를 돌보아야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박힌 우리를 결코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낯선 이땅에서 그분의 돌보심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11일 (월요일) 예레미야 23장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을 책망합니다. 목자는 백성의 지도자로 유대 백성의 왕과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들을 말씀으로 돌보는 목자이면서도 양들을 착취하고 말씀으로 바르게 돌보지 않음으로 흩어지게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친히 흩어진 양 떼의 남은 자들을 다시 우리로 모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벨론으로 잡혀간 남은 자들이 돌아 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님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며 하나님의 백성의 왕이 되고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며 구원과 평안을 누리게 만들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윗의 후손인 스룹바벨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던 이스라엘을 데리고 올 것을 예고하고, 궁극적으로 참된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사로잡혔던 하나님의 백성들을(성도, 교회) 구원하시는 사건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1-8). 

이어서 하나님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책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가고, 말씀하지 않은 것을 전하며,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듣지 않고 거짓 평안을 선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에서도 그들은 악을 행했습니다. 성적인 범죄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의 음행을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십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을 돌이키기보다 그들의 죄악을 더 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 예언자들의 말은 거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범죄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평안할 것이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그들은 범죄하는 백성들을 돌이켜 회개하도록 했어야 합니다. 또 그들은 서로 꿈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거짓 예언을 하고 결국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바알을 섬기게 했던 조상들의 죄를 범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했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거짓 선지자를 칠 것입니다(9-32). 이어서 하나님은 백성이나 선지자와 제사장이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고 예레미야에 물으면, 다시는 ‘엄중한 말씀’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엄중한 말씀’은 ‘무거운 짐, 경고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고 하면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자기의 욕심을 채워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된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을 책망하고 그들을 잊어버리고 영원한 치욕과 수치를 당하게 할 것입니다(33-40). 

 

하나님은 남유다의 최후를 말씀하시면서도 희망의 빛을 주십니다.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임이 다시 드러납니다. 스룹바벨과 예수님을 통해서 참으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회복을 주실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렇게 백성들이 죄를 짓게 만든 지도자들(왕, 선지자, 제사장)이 책망을 받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며 사리 사욕을 채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영적인 지도자들은 교회의 직분자들(목사, 장로, 집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을 돌보고 살피고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있고, 사리사욕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을 바르게 따를 수 있도록 이 직분을 교회에 세워 주셨습니다. 직분자들이 항상 본이 되고 바르게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하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 성경을 기준으로 세워져 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합시다. 또 세상에서 하나님의 직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으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가길 기도하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10일 (주일) 예레미야 22장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시 말씀을 주시며 유다 왕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왕과 백성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무죄한 죄의 피를 흘리지 않는다면 다윗의 왕조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집 (성전과 다윗의 왕조)이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돌이킨다면 심판은 하되 왕조는 이어지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그들이 불순종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때 분명히 그 성읍을 황폐하게 만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불순종과 우상숭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1-9). 

 

하나님은 살룸 왕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음으로 애굽에 잡혀 가서 결국 거기서 죽게 되어 약속의 땅에 묻히지도 못하는 불명예를 안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살룸 왕(여호아하스, 대상3:15)은 요시야의 아들로 3개월 간 악하게 통치했고 결국 애굽의 왕 바로느고에게 잡혀가 애굽에서 죽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 요시야는 하나님의 율법 책을 발견하여 개혁을 단행한 하나님이 보시기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들 살룸은 아버지가 행한대로 하지 않고 다시 우상숭배를 했고 탐욕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탈취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버지 요시야가 잔치를 줄이고 정의와 공의를 행할 때 오히려 그가 형통했다고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율법을 바르게 지켜갔을 때 형통했던 것입니다(10-16). 하지만 살룸은 탐욕과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애굽에서 죽게 만드십니다. 살룸을 이어 왕이 된 살룸의 형제 여호야김 역시 악한 통치로 인해 주민들에 의해죽게 될 것입니다(17-19).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게 되어 지도자들은 죽고 백성들은 결국 붙잡혀 갈 것입니다. 그 고통은 엄청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야김의아들 고니야(여호야긴) 왕과 그의 어머니도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대하36장). 비록 그가 고레스 왕 때 감옥에서 나와서 왕과 함께 지내지만 그가 사모하는 예루살렘 땅으로 돌아오지 못해 결국 깨진 그릇과 같이 회복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시드기야를끝으로 유다는 망합니다(20-30). 

 

하나님께 끝까지 불순종한 왕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쫓겨나 하나님 나라의 대리통치자로서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왕조의 약속은 순종으로 유지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어기면 징계를 통해서 끝까지 붙드실 것입니다. 그 징계도 받아들이지 않을 때 하나님은 최후의 수단으로 일시적으로 다윗의 왕조가 끊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 하나님은 징계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회개 없이 하나님의 복만 추구하는 것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참된 복을 주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혹 하나님의책망과 경고의 말씀을 들었을 때 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9일 (토요일) 예레미야 21장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벨론의 왕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공격을 합니다. 이에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보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탁하여 이 바벨론이 물러나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유다 백성들이 무기를 제대로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성안으로 모아들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3). 또 하나님은 큰 전염병을 보내어 사람과 짐승들이 죽을 것이고 살아 남은 자들은 바벨론 왕이 긍휼히 여기지 않고 죽일 것이라고 합니다(4-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과 성전을 떠나는 것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 있고, 성전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며 살아도 성전에서 제사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왕들도 그렇게 믿고 백성들에게 가르치며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런 생각을 버리고 바벨론에게 항복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평안할 것이라고 하는 거짓 예언을 뿌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의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십니다(8-10). 유다 왕은 정의롭게 판단해야 합니다. 아무도 견고한 예루살렘 성을 정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교만함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대적이 되셔서 그들을 치신다면 아무리 강한 성도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왕과 그 백성들의 행위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주변의 모든 수풀도 불이 타버릴 정도로 강력한 심판을 행할 것입니다(11-14).

 

때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기대와 예상과는 다른 것을 명령하십니다. 시드기야는 싸워서 이길 수 있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지만,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항복하는 것을 살 길로 주십니다.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항복하느냐, 아니면 내 생각대로 싸우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수없이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를 주셨고, 돌이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유다 왕과 백성들에게 피할 길을 주시지 않아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살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길을 주신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기대와는 다른 길이라도 말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방식이 우리의 기대와 예상과는 다른 부분을 만납니다. 그럴 때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길은 그럴 때에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상과 기대와 다른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8일 (금요일) 예레미야 20장

예레미야의 부정적인 예언의 말씀을 듣고 성전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를 맡은 제사장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잡아 채찍으로 때리고 감옥에 가두어 고랑을 채웁니다. 그리고 다음 날 풀어 줄 때 예레미야는 그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바스훌(평강)이라 부르지 않고 ‘마골밋사빕’ 곧 ‘사방의 두려움’으로 부르실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스훌은 거짓 평강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자기의 친구들이 죽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또 사로잡힌 자들이 바벨론에 잡혀가 그곳에서 죽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읍의 모든 귀한 것들이 탈취되어 바벨론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스훌과 바스훌의 가족들은 바벨론으로 잡혀 가서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평안할 것이라고 예언하던 바스훌과 그 가족들, 그 친구들은 결국 그가 거짓 예언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1-6). 예레미야의 예언이 옳았음을 뒤늦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혔습니다. 그를 하나님께서 이기셨습니다. 예레미야도 때로는 지치고 힘들었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위협하는 형제들에게 실망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생각해도 그 때마다 마음이 불타는 것 같아서 전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바른 예언을 하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고, 망하길 바랍니다. 관계도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그 답답함을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7-13). 심지어 예레미야는 자신의 생애도 한탄합니다. 그만큼 힘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욥기의 일부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욥과 같이 한탄은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고,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고 있습니다(14-18). 

 

이 땅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예레미야의 삶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바른 길을 걸으며 좁은 길로 가려고 하면 주변에서 다들 한마디씩 합니다. 심지어 불이익을 받기도 합니다. 왕따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을 겪을 때면 더이상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그 길을 가기 싫어 질 때도 있습니다.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교회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적당히 혹은 거짓 예언을 따라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마음에 가책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때로 한탄하면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기를 바라며 그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독려하십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를 거부하고, 어느 정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최선을 다해서 지키는 바른 그리스도인, 교회가 되기를 격려하십니다. 비록 그 길이 쉽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우리 편이 되십니다. 결국 우리가 옳았다는 것이 밝혀 질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말씀을 따라 사는 바른 그리스도인, 바른 교회로 세워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7일 (목요일) 예레미야 19장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그릇을 하나 사서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힌놈의 아들(Son of Hinnom)의 골짜기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바알에게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제단이 있는 곳입니다. ‘하시드 문’은 깨진 질그릇을 버리는 곳으로 ‘분문’과 같은 뜻입니다. 그곳에는 깨진 질그릇 뿐만 아니라 다른 쓰레기도 함께 있습니다. 그 근처에 바알의 제단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그들의 행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이 되면 그곳을 ‘도벳(불사르는 곳)’이 아니라 ‘죽음의 골짜기’로 만드실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 성은 포위가 되어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아들과 딸의 살을 먹게 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1-9). 이것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배반하여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내리시기로 하셨던 저주였습니다(신 28:53-57). 이런 일이 이미 북이스라엘이 망할 때 일어났었습니다(왕하6:28-30). 그것을 보고도 유다는 돌이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가 옹기장이에게 샀던 그릇을 백성의 지도자들이 보는 앞에서 깨뜨리라고 하십니다. 이 그릇은 이제 다시 붙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회복을 기대하기 힘들만큼 강렬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심판의 날에 도벳에 시체를 버릴 곳이 없을 만큼 죽은 자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며 성읍에도 죽은 자들이 가득 찰 것입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왕들과 백성들이 하늘의 만상, 태양과 달과 별들에게 제사했기 때문입니다. 성전도 더러워졌습니다. 예레미야는 도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백성들에게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예루살렘에 내리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심판의 원인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10-15). 

 

모든 죄의 근본적인 출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귀를 닫고 있으면 죄를 지어도 죄인 줄 모르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도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회복의 시작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영적인 침체와 무기력에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회복이 옵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 분명히 하나님은 영적인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며 영적인 회복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함과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6일 (수요일) 예레미야 18장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하였습니다. 이번에 하나님께서는 토기를 구워서 만드는 토기장이에게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예레미야가 가서 보니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터져 그것으로 다른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터졌다’것은 ‘망가졌다, 쓸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과 같이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민족이든 마음대로 하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같이 변덕스러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맺은 언약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언약의 복을 주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재앙을 돌이키는 분이십니다. 반대로 복을 주기로 했지만 언약을 버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복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에게 전해야 하는 말씀의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기로 하셨으나 돌이켜 그들의 생활 방식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름답게’ 하는 것은 외모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맞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기 때문에 그들이 살고 싶은 대로 살겠다고합니다(1-12).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깁니다. 그 우상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옛길’에서 넘어지게 만들고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도록 만듭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이 부르짖을 때 응답하지 않으시고 얼굴을 감추실 것입니다(13-17).  ‘옛길’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의미합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법을 떠나 인간 중심의 삶을 살도록 만들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해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말로 해하고 생명을 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하나님을 매우 경홀히 여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율법과 책략과 말씀이 그들에게서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전히 살 수 있다고 착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이러한 사실을 호소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18-23). 

 

하나님은 온 세상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주권적인 왕이십니다. 하지만 스스로 언약이라는 틀에 묶으시고 복과 저주를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회개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재앙을 내리실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그렇게 선지자를 해하려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거짓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는 싫어하고 거부하면서,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는 사역자들을 싫어하면서도 여전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옛길’인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앞세우지 않으며 마음과 의지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자 힘을 씁니다. 오늘 하루도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5일 (화요일) 예레미야 17장

유다 백성들의 죄는 철필로 그들의 마음 판과 제단에 새겨졌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 깊숙이 죄가 뿌리 내리고 있고, 또 우상 숭배의 죄가 제단에 새겨져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의 자녀도 부모를 본 받아 바알과 아세라(풍요를 상징하는 여신)를 섬깁니다(1-2). 미래 세대에게도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죄는 온 땅에 퍼져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의지하는 재산과 보물과 그들이 섬기는 산당이 노략을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에서 쫓아내 그들이 알지 못하는 나라를 섬기게 만드실 것입니다(3-4).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않고 사람으로 힘으로 삼고 의지하며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사막에 있는 떨기나무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은 복을 받아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서 열매를 맺으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5-8). 이는 시편 1편과 거의 유사한 구절입니다. 악인과 의인, 저주와 복이 대조됩니다. 심판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심히 부패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그 마음 깊은 곳도 살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과 복에는 한 치의 오류도 없습니다(9-11). 자고새는 꿩보다 작은 메추라기와 비슷한 새인데, 남의 알을 훔쳐서 키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후에 알에서 깨어난 새가 자라면 둥지를 떠나버립니다. 불의로 얻은 재물이 사라져 버림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재물과 사람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장해 주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자는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며 흙에 쓰여진 이름처럼 쉽게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쳐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공격 속에서도 신실하게 말씀을 전할 때 자신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를 기도하고 하나님의 재앙을 철저히 두려워합니다. 예레미야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심판 속에서도 살아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예레미야를 유다 백성에게 보냅니다. 왕과 백성들이 출입하는 문에 서서 왕들과 모든 백성들에게 안식일 바르게 지키라고 합니다. 안식일에 짐을 지고 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장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에 상업활동을 금하는 것은 그들이 물질과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을 금하는 표가 됩니다. 따라서 문맥적으로 볼 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이나 재물을 의지하는 않는다는 것의 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때 하나님은 다윗의 왕위를 굳건하게 세우시고 예루살렘 성은 영원히 있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가 지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때 그 성은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19-27).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과 사람과 재물을 의지하는 사람이 분명히 구별이 됩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사람과 재물의 복을 주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깁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태도를 외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때 회복을 약속하시고, 그렇지 않을 때 멸망하게 될 것을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다른 날과 다르게 보내는 것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일에 함께모여 예배하고, 선한 일을 행하며, 형제 자매들과 교제하면서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형식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섬기는 외적인 표현입니다. 요즘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상업적인 활동에 동조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주일을 미리 준비하고 예배와 이웃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소비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제외하고 가급적 상업적인 활동에 동조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람과 물질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여러 방식으로 드러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4일 (월요일) 예레미야 16장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유다 땅에서 아내나 자식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녀와 어머니와 아버지가 독한 병으로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묻어 주지 않으며, 칼과 기근에 망하여 그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네 가지 재앙이 기필코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당신의 평강과 인자와 사랑을 없애시기로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른과 아이들도 모두 결국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죽은 사람을 위해서 애곡할 사람이 없고 장례를 치를 자식도 없을 것입니다. 그 땅에 살아 남을 사람이 굉장히 적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7). 또 하나님은 지금 잔치를 베풀고 즐기는 곳에 예레미야는 참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즐거움이 끊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을 예레미야는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전할 때에도 백성들은 그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왜 그렇게 되는지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재앙의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범한 죄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악을 행했다고 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동안 수많은 선지자의 목소리를 무시했고, 심지어 죽이기도 했습니다. 악한 마음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수 백년간 그렇게 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주신 땅에서 유다 백성을 쫓아내시고 아주 낯선 곳(바벨론)으로 잡혀가서 알지 못하는 신을 억지로 섬기게 될 것입니다(8-1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재앙과 심판이 영원하지 않고 날이 이르면 그곳에서 인도하여 내실 것이라고 희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제 하나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 아니라 그곳에서(바벨론)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으로 부를 것입니다. 제2의 구원, 제2의 출애굽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14-15). 그전에 이르는 심판은 많은 어부가 물고기를 낚고, 포수가 사냥하는 것 같이 매우 강렬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땅을 더럽힌 것에 대한 징계는 매우 강력할 것입니다(16-17). 반면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힘과 요새와 피난처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으로 인해서 많은 민족들이 우상을 버리고 돌아 올 것임을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유다의 심판과 돌아옴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알릴 것입니다(18-21).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혹독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력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 심판을 선포할 때에도 그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짓 기쁨과 잔치에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쁨과 잔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우상이 주는 기쁨과 잔치로 즐거워하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 만큼 큰 죄악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오직 하나님만 즐거워하고, 그분 안에서 주신 것에 기뻐하며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분께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만 우리의 힘과 요새와 피난처로 삼아 힘을 얻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3일 (주일) 예레미야 15장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중재했던 모세와 사무엘이 당신 앞에서 중재할지라도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에게 향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들의 조상이 지은 죄보다 현재 이스라엘이 지은 죄가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남유다의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갈 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합적인 심판으로 유다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1-4). 하나님은 그전에 이미 여러 번 당신의 뜻을 돌이키셨기 때문에 더이상 뜻을 돌이키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화를 자초한 것은 돌이키지 않은 유다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 책임은 분명히 유다에게 있습니다. 태양과 같이 그 자식을 기뻐하던 여인들의 자녀들은 모두 그날에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겨우 살아남은 자들은 대적의 칼에 죽게 될 것입니다(5-9). 이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의 고독함과 고통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자신의 말을 듣고 돌이키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는 자에게 보복해 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을 위한 사역으로 고통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내적으로 기쁨을 누리지만 다른 사람들이 즐기는 것 같이 외적인 기쁨을 누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거부하고 외적인 기쁨만 추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잔치를 벌인 잔치에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를 지켜보는 예레미야는 거룩한 분노로 가득 차 있고 그 고통이 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거부하며 즐거워하는 자들을 보고 거룩한 분노를 느끼는 것입니다(10-18). 이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헛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전한다면 하나님의 입이 되어 백성들의 일부가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는 거짓 기쁨을 누리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럴때 하나님은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공격해도 함께하시고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 하십니다(19-21).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거짓된 기쁨을 쫓아 즐기는 자들을 보면서 거룩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때에거짓 기쁨을 쫓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지지 않는 현실을 보며 안타까움과 분노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로 되어가는 상황을 보면 거룩한 분노를 느끼고 그것에 동조하거나 함께 즐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부하고 거룩한 분노가 생깁니다. 

 

우리의 삶과 주변을 보았을 때 우리가 마땅히 분노를 해야 할 문화와 상황은 어떤 것이 있는 지 돌아봅시다. 그것에 동조하지 않고 거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공격 당할 지라도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그것을 당당하게 거부하며 그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의분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2일 (토요일) 예레미야 14장


하나님께서는 배역한 유다 백성들에게 가뭄을 내립니다. 가뭄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순종의 징계였습니다(신28:24). 부자들은 자신의 종을 보내어 물이 있는 곳을 찾도록 하지만 그것도 결국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 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들의 죄악 때문에 동물들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1-6).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자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를 합니다. 하지만 그 회개는 표면적인 것일 뿐 진정한 회개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상을 떠나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본질적인 부분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저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만 호소합니다(7-9). 그들은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고 돌이키지 않고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도 더이상 이 백성을 위해서 복을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의 외식적인 제사와 금식을 받지 않으시고 정하신 대로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징계하실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더욱 슬프게 만드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백성들에게 칼을 보지 못할 것이고, 기근도 없을 것이고, 전염병도 없이 확실한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전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적도 없는 거짓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료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이 없을 것이라고 예언하던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모두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10-16). 그런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심판하실 때 즐기면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방탕한 자녀를 징계하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행하십니다(17-18). 이제 백성들은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앞에서의 회개보다 더 발전한 회개입니다. 재난이 거듭될 수록 그들은 더욱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우상들보다 나으신 분이심을 인정합니다. 온 천지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획된 심판을 행할 것입니다. 이 또한 온전한 회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면한 위협만을 피하고자 피상적인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얼마든지 인정하지만 삶에서 하나님을 거부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죄악들은 그런 입술의 회개로만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삶의 회개 없이 참된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19-22).

 

우리도 때로 유다 백성과 같이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섬긴다고 하면서, 또 죄를 회개한다고 하면서 실제적인 삶을 돌이키고 변화된 삶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 지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하는 참된 고백과 삶의 변화입니다. 우리의 고백과 삶이 함께 변화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1일 (금요일) 예레미야 13장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세마포로 된 허리 띠를 사서 띠고 다니다가 유브라데 강가 바위 틈에 감추라고 하십니다. 본래 세마포로 된 띠는 제사장이 허리에 띠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그 띠를 띠고 다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동안 없어진 것도 보았을 것입니다. 몇 일후에 하나님은 그 감추었던 띠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찾아서 보니 썩어서 도저히 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행동들을 통해서 유다 백성들이 그 띠와 같이 썩어서 도저히 쓸 수 없을 정도로 부패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본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명예와 영광이 되도록 부르셨지만 그들이 듣지 않았습니다(1-11). 

하나님은 포도주가 가득한 가죽부대에 그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포도주가 가죽부대에 가득하다는 것은 보통 하나님의 축복이며 그 해 농사가 잘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그들은 농사가 잘 된 것이 바알과 아세라(이방인신들)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 풍성한 포도주에 취하여 서로 치고 싸우며 상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풍성함은그들에게 저주였습니다(12-14).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키길 원합니다. 그런  어두운 날이 오기 전에 회개하길 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양 떼가 사로 잡힐 때 선지자는 눈물로 통곡할 것입니다(15-17). 선지자는 왕과 왕후에게 먼저 그의 말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유다의 왕과 왕후는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해야 할 1차적인 책임 있는 사람입니다. ‘네겝의 성읍들’은 남쪽의 성읍들로 이집트를 의미합니다. 남유다는 이집트를 의지하겠지만 이집트도 바벨론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망할 것입니다. 북방에서 오는 바벨론 왕은 남유다가 의지하고 동맹을 맺은 나라를 부수고 오히려 그들로 유다를 압제하게 할 것입니다. 그 때 유다는 큰 고통을 당하게 되고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검불)같이 무기력하게 될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람(구스인)이 그 피부 색을, 표범이 반점을 변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도 가능하다고 보십니다. 그래서 악에 익숙한 유다도 변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선을 행하는 것, 곧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은 사실 구스인이 피부색을 변하게 하는 것에 비하면 쉬운 일입니다. 이렇게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우상숭배와 방탕한 생활을 다 보셨지만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고 마지막 심판을 내리시기 직전까지도 그들의 정화와 회개를 촉구하십니다(18-27).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는 풍성함은 복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물질의 풍성함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는데 주어진 것은 그것은 결국 우리를 해롭게 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하나님께 감사할 때, 우리 중심이 하나님께 있을 때 풍성함은 복이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악한 삶에서도 돌이키고 선을 행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회개하지 않은 때 가슴 아파하는 선지자의 모습은 참된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고 악을 행할 때 안타까워하시고 돌이키길 누구보다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은 떠난 부분이 있다면 돌이키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29일 (목요일) 예레미야 12장


오늘 말씀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하면서 악인의 형통함을 보게 되는 것은 왜 그런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1-2).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마음을 멀리 떠난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잘되고 형통합니다. 이런 현실에 예레미야는 마음이 답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잡아서 혼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까지”라는 표현은 시편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촉구하는 표현입니다(3-4). 하나님의 응답은 두 가지 비유로 주어집니다. 두 비유의 핵심은 이런 악인의 형통함은 앞으로 선지자가 당할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다 민족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의 형제들까지도 결국 그를 핍박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믿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형통함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닥칠 부조리와 모든 어려움 속에도 인내하고 견딜 힘을 주실 것입니다(5-6).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십니다. 대신에 어려움 속에서 견디게 하시고 악인의 최후는 멸망임을 이어지는 말씀으로 보여 주십니다(참고. 시73).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집(성전)을 버리고 내 소유(유다 백성)을 버리고 원수의 손에 넘기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대항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자(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가 그 포도원(유다백성)을 헐었고 짓밟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땅을 황무지가 되게 했습니다. 그 땅에서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이제는 황폐한 땅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그 조상들에게 그 땅을 주시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버릴 경우 생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언약적인 저주였습니다(7-13).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주변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 가운데 하나님은 마음 아파 하시며 탄식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심판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그 땅에서 뽑아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그 땅으로 다시 데리고 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주변 나라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세움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뽑아 멸하실 것입니다(14-17).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욕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되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험거리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결국은 멸망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은 결국 멸망하게 될 것임을 분명하게 오늘 말씀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힘을 주시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위로는 영원한 위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탄식하고 질문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없는 행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때로 감추시지만 분명하게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와 걱정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오직 하나님께 구하여 참된 위로와 힘을 얻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28일 (수요일) 예레미야11장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키라고 말씀합니다. 그 언약은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맺은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순종에는 복을, 불순종에는 저주를 당하겠다는 맹세로 세워진 언약입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기로 모두 맹세 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그 후손들도 언약을 잊고 하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언약대로 저주를 내리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은 쇠풀무와 같이 강력한 불에 고통을 당하는 백성을 건지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순종은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엄청난 축복과 하나님과 교제를 약속했습니다. 이 언약의 말씀을 전하라고 했을 때 선지자는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다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복을 다시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1-5). 이 언약을 외치며 지키라고 촉구해야 하는 일이 선지자의 임무로 주어집니다. 지금까지 남유다는 이 언약을 무시하며 마음이 완악하여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언약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언약적 저주를 부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정당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언약에 순종하여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촉구도 포함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적인 저주를 부으실 때 유다 백성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을 찾아가 기도해도 그 신은 절대로 그들을 구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죽은 나무와 은과 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6-13). 

심지어 하나님은 이제 더이상 이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의 고난의 부르짖음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 마음이 없는 제사로 제물을 드리지만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그들을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시지만 그들은 바알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모든 일을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예레미야가 제사장으로 섬기던 지역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원통함을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아뢰었고 하나님은 그에 응답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했던 아나돗 사람들에 대해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14-23).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말씀을 따라서 살고 그대로 행하도록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임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고 함께 그렇게 하자고 권면할 때 어려움을 겪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고 언젠가 우리의 용기와 힘듦도 알아 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동족 이스라엘에게 천국복음을 전했지만 그 동족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항상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할 때 닥치는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그분께 부르짖을 때 원수도 갚아 주실 것을 신뢰할 때 하나님은 위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실제로 원수를 갚아 주시기도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기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붙들고 때로는 하나님께 호소도 하면서 힘들지만 이 믿음의 길을 함께 끝까지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27일 (화요일) 예레미야 10장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상과 다른 분이신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여러 나라와 같이 우상을 섬기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이방인들의 삶의 양식과 우상을 섬기는 방식은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섬기는 우상은 기술공이 만든 것으로 걸어 다니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화나 복도 내릴 수 없는 죽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1-5). 이 말씀을 듣고 선지자는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만이 크시고 모든 이방의 왕들도 섬겨 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모두 무지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인이 정교하게 만든 하나의 피조물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살아 계시고 영원한 왕으로서 진노하십니다. 그 때 온 세상을 짓지 않은 이방 신들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망하는 것은 그것을 섬기는 자도 망한다는 것입니다(1-11).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땅을, 지혜로 세계를, 명철로 하늘을 펴시고 그분의 목소리에 물이 생기게 하실 뿐만 아니라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도록 하셔서비와 번개와 바람을 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온 세상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섭리 가운데 운행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만든 것을 섬김으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분깃이 되시는 하나님은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12-16). 이런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짐을 꾸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유다를 내던지실 것입니다. 그들은 괴롭게 하셔서 깨닫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에 선지자는 슬퍼합니다. 마치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이 고통 속에 있습니다. 장막이 무너졌지만 다시 세워줄 자녀들도 잡혀가서 세울 자가 다시 없을 것입니다. 목자들인 지도자들은 어리석어 하나님을 찾지 않아 양 떼가 흩어집니다. 북방에 오는 바벨론의 군대의 떠드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왔습니다. 그들은 결국 유다의 모든 성읍들을 파괴할 것입니다. 선지자는 마치 자신의 죄를 회개하듯이 공동체의 죄와 아픔과 심판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에게 내려 달라고 합니다(17-25). 

 

우리 하나님은 다른 모든 신들과 비교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온 세상을 만드시고 지금도 세상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믿고 예배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신을 섬기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분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남유다 백성은 그것을 저버림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그들을 위해서 중보합니다. 우리도 남유다처럼 때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것을 섬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중보하심으로 우리는 다시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모든 신들보다 뛰어난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도록 합시다. 다른 어떤 것, 어떤 사람이 우리의 우상이 되지 않도록 경계합시다. 혹시나 그랬다면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돌이켜 다시 하나님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26일 (월요일) 예레미야 9장

예레미야는 백성을 보며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은 모두 간음함으로 하나님을 배신하며 서로 속이고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악을 연속해서 저지르고 비방하며 거짓말을 일삼습니다(1-6).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니 이웃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심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7-9). 하나님은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예루살렘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드실 것입니다(10-11). 그들은 조상들의 잘못된 신앙을 전수 받아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하고 바알을 따랐습니다. 이런 경고를 들은 예루살렘 주민들은 곡하는 부녀를 불러야 합니다. 곡하는 부녀들은 직업적으로 초상 난 집에서 애곡하여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슬퍼하고 애곡해야 하는 상황인데로 그렇게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범죄하고 있는 유다 백성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곡하는 부녀를 통해라도 곡하고 애통해하며 심각하게 그 상황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부와 지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이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분임을 깨닫고 자랑하는 것입니다(12-24). 하나님은 당신의 심판의 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할례를 받은 백성이든 그렇지 않은 백성이든 심판하실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임을 상징하는 할례를 받은 유다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회개하지 않는다면 결국 믿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취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25-26).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살아간다면 비참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 무감각한 유다 백성들을 보게 됩니다. 거짓으로 이웃을 속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유다는 결국 비참한 결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경고를 줍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삶 속에서 하나님을 두려워지 않고, 그분의 말씀에 무감각하게 살며, 다른 사람에게 악하게 대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결말은 끔찍할 것입니다. 매일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고 반응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25일 (주일) 예레미야 8장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정하신 때에 바벨론 사람들이 와서 유다 왕들의 뼈와 지도자들의 뼈,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주민들의 뼈를 무덤에서 꺼내어 해와 달과 하늘의 많은 별들 아래에 펼쳐 놓을 것이라고 합니다. 해와 달과 하늘의 많은 별들을 유다 민족들이 섬겼던 이방신들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심판을 받는 원인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긴 것 때문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그것으로 망하게 되는것입니다(1-3).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누군가 떠나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돌아오기를 거절합니다. 그들은 정직하지 못하고 악을 행합니다. 심지어 하늘의 새도 정한 시기와 철새들도 올 때를 본능적으로 아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규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여전히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서 율법을 알기만 하는 것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을 스스로 속이고 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도 전혀 율법을 기록하면서 왜곡합니다. 백성들과 지도자들 모두 타락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심판을 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심판은 그들의 아내와 밭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침략과 약탈을 의미합니다. 모든 백성은 탐욕을 부리고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거짓을 행합니다. 백성들의 영혼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죄를 가볍게 여기고 평강을 말합니다. 심지어 그렇게 행할 때 양심의 가책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완전히 양심이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할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열매가 없는 것은 완전히 멸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 진노와 심판은 그 어떤 자들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기술과 속임수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와 같을 것입니다(4-17). 이런 사실을 선포해야 하는 선지자의 마음을 근심으로 가득해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왕이 그곳에 계시며 다 지켜보고 계시는데, 우상을 섬김으로 음행 한 백성입니다. 음행 하면서도 성전이 있으니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백성들의 상함으로 인해 자신도 아파합니다. 유향(일종의 진통제)과 의사로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치료제와 의사가 고칠 수 있는 상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는데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19-22). 

 

유다의 멸망은 선지자와 서기관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이 한 몫을 합니다. 그들의 타락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믿는 자들을 병들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영혼의 상처에 대해서 심각하게 여겨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거짓 위로를 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백성과 지도자들 모두 영혼에 병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께 돌아가고 그분께 고쳐 달라고 하는 방법 뿐입니다. 우리 모두 영혼에 병이 있습니다. 그 병을 고치는 방법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고 삶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교회의직분들이 모두 하나님께로 마음을 향하여 고침 받으며 말씀을 신뢰하며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24일 (토요일) 예레미야 7장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또 임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성전에 제사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들은 제사는 드리러오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삶의 모습이어떻하든지 그들의 땅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에 결코 망하지 않고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망하지 않는 길은 성전을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정의를 행하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들을 괴롭히는 일을 그치는 것입니다. 또 잘못하지 않은 사람의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고 다른 신을 쫓아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땅에 오래 머물게 될 것입니다(1-6).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꼭 그렇게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거짓말에 속아서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 맹세하고, 바알을 섬기고 다른 신을 따릅니다. 십계명을 철저히 어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전에 와서 구원을 얻었다고 스스로 확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거룩한 곳으로 지정하셨던 실로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고 합니다. 실로는 당시 북이스라엘의 영토에 속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망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남유다 백성에게 계속 예루살렘만 의지하면 똑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7-15). 

 

이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그 백성을 위해서 기도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행위가 참으로 악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온 가족이 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강한 진노와 분노를 남유다에 내리실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희생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제사 자체보다 하나님은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더 중요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을 등지고 배반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선지자 예레미야가 해줄 말은 심판의 말뿐입니다. 심지어 유다 백성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두기도 했습니다. 또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그들은 도벳 산당을 짓고 인신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금한 것입니다(레18:21).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이 이르면 이제 그곳은 유대 백성의 많은 시체로 채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에서 더이상 기쁨과 잔치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시겠다고 합니다(16-34).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그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맹신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들의 삶은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심지어 성전에 우상을 갖다 놓고도 그 성전이 그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스스로 속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예레미야의 말도 무시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준엄한 심판을 내리실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교회를 다닌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행하는 것에는 소홀히 하지 않습니까? 비록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내린 진노와 같은 진노를 예수님께 모두 쏟으셔서 우리에게는 내리지 않으신다고 할지라도, 또 예수님께서 율법을 모두 이루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새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그와 같이 사랑하는 율법을 지켜 나가길 원하십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서 얻은 말씀을 가지고 다시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매일 우리 자신을 살피면서 공적인 예배와 일상 속에서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23일 (금요일) 예레미야 6장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에게 닥칠 위기에 대해서 또 다른 생생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베냐민 족속은 예레미야가 제사장으로서 속해 있었던 지파와 지역입니다. 베냐민은 대체적으로 약하고 중요하지 않은 지파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닥쳐오는 재난을 가장 먼저 듣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나팔을 불고 깃발을 들어 북쪽에서 오는 큰 재앙과 파멸을 경고하도록 부름 받습니다(1). 하나님은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이 헐어지고 전쟁터와 폐허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2-5).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폐허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하나님의 훈계를 받고 돌이키면 아직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6-8). 이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심판을 행하시기 전에 예레미야에게 포도 따는 사람이 잎사귀를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포도송이를 찾듯이 부지런히 찾아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선지자가 최선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역할을 다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사역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거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욕으로 듣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경고의 말씀을 그런 백성들에게 부으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와 제사장들은 거짓을 행하여 그들의 상태를 보고도 평강하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결국 엎드러질 것이라고 경고해야 합니다(9-15). 그들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옛길과 선한길로 가라고 하는 말씀을 거부하고 파수꾼의 나팔 소리를 들으라고 하시지만 역시 거부합니다(16-17). 이제 예레미야는 그들이 당할 재앙을 선포합니다. 그들의 죄악된 생각과 행동과 거짓된 제사의 결과로 그 백성 앞에 장애물을 둘 것입니다. 그것에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18-21). 하나님은 북방의 한 민족(바벨론)을 불러서 활과 창으로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예루살렘 주민들을 칠 것입니다. ‘딸 시온’은 예루살렘 주민을 가르키며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통곡하며 큰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미리 무서운 재앙을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를 망대와 요새로 삼아 그들의 길을 미리 알리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예레미야는 은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불에 제련한 은이 결국 내버리게 된 것과 같은 결과를 겪게 됩니다. 말씀을 전파하며 노력을 했지만 결과가 처참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여전히 말씀을 무시하며 거부하고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22-30).

 

하나님은 심판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불쌍히 여기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여전히 돌이키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씀 사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부하고 악이 제거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거부한다면 결과는 한 가지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을 돌아오게 하는 최후의 수단이자 유일한 수단입니다(딤후 3:16).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결코 남유다 백성의 길로 가서는 안됩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도전을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경고와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듣고 읽으며 하나님과 더욱 깊이 교제하며 그분의 길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22일 (목요일) 예레미야 5장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남유다에게 진노를 쏟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참으로 단 한 사람도 정의와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했지만 그것은 거짓 맹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작은 징계로 그들을 돌이키려 하셨지만 그들은 아픈줄 모르고 얼굴을 더욱 굳게 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부했습니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안다고는 하면서도 그것을 멍에와 결박으로 여기고 따르길 거부했습니다. 결국 이런 그들의 허물과 죄악으로 인해 사나운 짐승과 같은 바벨론에 파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1-6). 뿐만 아니라 그 백성의 어린자녀들도 부모들을 본받아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고 음란한 행위를 하고 다른 이웃의 아내를 향해서도 음욕을 품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모두 십계명에 분명 금하는 것인데 모든 백성들이 어기고 있습니다. 이런 백성을 하나님은 그냥 용서할 수 없습니다(7-9).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벽에 붙어 자라는 포도나무 가지로 상징되는데, 이제 하나님은 바벨론 군사들에게 그 가지를 꺾어 버리라고 합니다. 더이상 하나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고 회개하지 않는 인생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단절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나라(바벨론)을 일으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화살통은 열린 무덤과 같아서 그 화살에 죽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유다가 의지하는 견고한 성들도 결국 바벨론의 군사력에 파멸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때에도 모두를 진멸하지는 않으시고 그들이 왜 그런 일을 당하였는지 남은 자들에게 알게 하시고 또 바벨론 땅으로 잡혀가 살게 하실 것입니다(10-19). 

 

예레미야는 이 모든 말씀을 유다에 공개적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이 백성들은 그들이 섬기는 우상과 같이 지각이 없고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하고,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하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백성에게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다의 한계를 정하시고 넘치지 못하도록 다스리시는 분이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셔서 농사가 될 수 있도록 자연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엉뚱한 신에게 감사하고 섬기는 백성에게도 선포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을 해하고 속임수로 번창하고 부자가 되어 살지고 윤택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서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의 소송을 공정하게 하지 않는 지도들에게도 전해야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벌할 수 밖에 없습니다(20-29). 백성들 뿐만 아니라 선지자도 거짓 예언을 하고 제사장도 자기 직분을 자기 유익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백성들도 그것을 좋게 여깁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남은 것은 파멸과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뿐임을 전해야 합니다(30-31).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방식을 멍에와 속박으로 여기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생활에서 불신 이방인들과 똑같은 삶의 방식으로 강압적으로 빼앗고 음행하고 다른 신을 섬깁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하는 것은 일종의 문화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문화와 관습,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서구 기독교 나라와 비슷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도 제 역할을 하지 않고 부와 권력을 쫓아서 거짓 예언과 판결을 행합니다. 이 판결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재판권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 무엇이 죄인지 판결할 수 있도록 기준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서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죄라고 하는 것을 죄가 아니라고 하고, 약한 자를 돌보는 의무를 잊고 화려함을 쫓아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네덜란드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멍에와 속박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이상 존귀하게 불리지도 않고 심지어 욕으로 사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교회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메이고 말씀을 기준을 삼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온 우주를 통치하시고,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먹고 살아 갈 수 있도록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와 삶의 양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메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21일 (수요일) 예레미야 4장

선지자는 계속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는 마음의 가죽을 베는 마음의 할례를 하는 것입니다. 다소 고통스럽지만 이방신을 끊어내고 하나님만 마음을 향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를 하지 않을 시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를 예고합니다(1-4). 나팔을 부는 것은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긴급하게 성 안으로 대피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북쪽에서 오는 침략자는 강력한 사자와 같이 유다에 있는 성읍들을 황폐하게 만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맹렬한 진노가 지속되어 무시무시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5-9). 이런 엄청난 심판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마음도 굉장히 괴롭고 슬픕니다(10). 이 심판은 악인과 의인을 구별하거나, 거룩하게 하기 위한 정도의 가벼운 책망이 아니라 유다가 멸망할 만큼 강력하여 유다의 운명을 결정짓는 심판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바벨론 제국을 통해서 이 일을 행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이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나라는 망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소망이 남아 있습니다. 이 소식을 두루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동시에 선지자는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거역하고 악한 일을 행한 것이 이 심판의 이유임을 분명히 합니다(11-18). 

이런 소식을 전하는 선지자의 탄식이 이어집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답답합니다. 이런 심판을 선포하는 선지자는 그 백성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 힘듭니다. 선을 행하는 데는 무지하고, 악을 행하는 데에는 지혜로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19-22).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유다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으로 인해서 유다는 황무지가 될 것이며 성읍은 모두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또 땅과 하늘, 산과 작은 산들, 인간과 새들, 들과 성읍들이 영향을 받을 만큼 그 심판은 강력하여 마치 땅이 공허하고 혼돈했던 창조 전과 같이 느껴질 정도일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확실히 정하셨기에 반드시 실행될 것입니다. 이 심판을 나름의 방식으로 피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모두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그 고통은 마치 처음 아기를 낳는 여인의 고통과 같을 것입니다(23-31).

 

하나님은 외적인 회개가 아니라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고 새롭게 하는 참된 회개를 원하십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어떤 것 보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선을 행하는데 지혜롭기를 원하십니다(롬16:19).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참된 회개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열망과 말씀을 따라 행하는 선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20일 (화요일) 예레미야 3장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을 섬기다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오면 용서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계속해서 이방신을 섬기며 음행을 하며 그 땅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적인 징계로 비를 주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1-3). 비록 그들이 회개를 하며 하나님을 다시 찾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회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4-5). 남유다의 이런 모습은 북이스라엘의 악행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100년전에 이미 북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로 멸망 당했습니다. 남유다는 이것을 다 보았습니다. 또 요시야 왕 때에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보다 더 의롭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남유다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서 역사적인 교훈 뿐만 아니라 요시야 왕의 개혁도 경험을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패망한 북이스라엘 대해서 외치라고 하는 것은 북이스라엘에게 이 말을 했다면 들었을 것이라고 간전접으로 유다에게 더 귀를 기울여 들으라는 촉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들의 죄를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방법입니다(6-18). 하나님은 여전히 아버지와 남편 같은 마음으로 그 백성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기 싫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배신한 백성들이라도 어떻게 하든지 자녀들 가운데 두시려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족속들은 남편을 속이고 떠난 아내와 같이 행동했습니다. 회개하는 척하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배역한 자식들이 기다리시고 배역함을 고치려고 하십니다(19-22). 그들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돌아와 회개하고 그들이 섬기던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 참으로 헛된 것임을 고백하고 부끄러워하며 하나님께 범죄했음을 인정할 때 하나님은 받아 주십니다(23-25).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악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 받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 대해서 숨고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첫 인간 아담도 범죄하였을 때 그랬습니다. 하지만 두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죄의 댓가를 치루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범죄하였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며 회개하고 나아가면 받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더욱 더 깊은 교제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뉘우치고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향할 때 다시 받아 주십니다. 우리를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이키고 날마다 회개함으로 더욱 깊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19일 (월요일) 예레미야 2장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이전 역사를 돌아보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고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던 때를 신혼이라고 표현하고 첫 소산물, 곧 하나님의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혼의 사랑을 이스라엘은 버리고 음란하게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을 책망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불의를 행한 적도 없고 신실하게 그들에게 대했는데,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으십니다. 그들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했지만 그들은 그곳을 더럽혔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율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백성들이 무익한 것을 따르도록 했습니다(1-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싸우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이방인들도 하지 않는 배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하늘이 놀랄 만한 일이며 떨고 두려워할 일입니다. 그들은 참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릴 뿐만 아니라 스스로 우물을 파는 죄악을 범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버릴 뿐만 아니라 다른 신을 섬겼다는 말입니다(9-13). 유다는 하나님을 떠남으로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보다는 놉(애굽 남쪽)과 다바네스(애굽 북쪽)를 의지했으나 애굽이 배신했습니다. 시홀은 ‘흙탕물’이라는 뜻으로 애굽에 흐리는 나일강을 의미합니다.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시 애굽에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배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돌아가기를 포기했습니다. 그것이 곧 그들의 고통과 악의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14-19).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을 멍에처럼 생각하고 그들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식과 순종을 결박으로 생각하여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20).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귀한 포도나무로 대우하고 심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이방인과 같은 삶을 살아 이방인 포도나무가 되었습니다. 그 죄악은 많은 비누로도 씻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아주 의도적으로 이방인을 적극적으로 섬기고 사랑하고 따라갔습니다(21-24). 그들은 나무로 만든 우상을 향해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고 참된 아버지이자 신랑이신 하나님께 등을 완전히 돌렸습니다. 환란 당할 때 그 나무에게 도우라고 요청하지만 결국 도움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에게 지속적으로 선지자들을 보내어 경고하였지만 그들을 선지자를 죽이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삶속에서 불의를 행하였지만 뻔뻔하게 무죄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의지하는 애굽과 앗수르가 모두 바벨론에게 패하게 하심으로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25-37). 

 

이스라엘 백성, 지금 남유다는 하나님을 철저히 버리고 배신하였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강대국을 의지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이방인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방식을 멍에로 여기고 버렸습니다. 그러한 삶의 결과는 수치와 심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거부하는 자들의 운명은 결국 수치와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 것을 선택합니까? 세상적인 방식으로 사는 것을 선택합니까? 오늘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의 참된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의 요구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18일 (주일) 예레미야 1장

예레미야는 격동의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형제 나라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게 망했고, 앗수르는 바벨론에게 패하였고 바벨론은 강력한 나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나라 남유다도 이미 바벨론에게 세 차례 포위공격을 당해 다니엘과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의 마지막 왕들과 함께 나라가 완전히 망하는 것도 경험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남유다 백성의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임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의 출신과 활동한 시기를 정확하게 언급합니다. 남유다 마지막 다섯 왕 요시야, 여호아하스, 야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가 다스리는 동안 대략 53년을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이는 선지자의 글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활동의 배경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는 아나돗의 제사장 출신입니다. 아나돗은 솔로몬을 지지하지 않고 아도니야를 지지한 제사장들이 쫓겨나 활동하던 지역입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제사장들이 제대로 제사를 드리지 않고 타락했을 때 변두리 지역에 있는 제사장 출신 선지자가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1-3).

예레미야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처음에 그는 모세처럼말을 잘 할 줄 모른다고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택하였고, 명령하는 것을 두려움 없이 말하라고 격려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약속의 확증으로 그분의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고 당신의 말씀을 넣어 주셨음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말을 통해서 여러 나라의 흥망성쇠를 예언할 것입니다(4-10). 예레미야의 말을 듣는 나라는 살고 거부하는 나라는 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레미야는 두 가지 환상을 보게 됩니다. 첫번째로는 살구나무를 봅니다. 살구나무는 반드시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반드시 지킬 것임을 보여줍니다(11-12). 그 다음으로 북에서부터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봅니다. 끓는 가마는 하나님의 극렬한 심판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이 땅의 모든 주민에게 부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북방 민족들(바벨론)을 불러서 예루살렘을 칠 것을 예언합니다. 왜냐하면 남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며 절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노를 내리시겠다는 말씀을 전하라고 예레미야에게 말씀합니다.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공격하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13-20). 많은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 평안을 말하기 때문에 편하게 살지만,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는 참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할 때는 참된 선지자는 공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말씀을 온전히 따를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지켜 주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을 두려워해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은혜가 더욱 크게 다가 옵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겁게 듣고 또 담대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17일 (토요일) 이사야 66장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약속하는 장소였고 제사가 있던 곳입니다. 하지만 성전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보장하거나 제사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보장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삶이 어떠하던지 성전이 있으니 하나님이 계시고, 제사를 드리니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 어디에나 임재하시고 그들의 삶을 보신다고 합니다.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시고 보시면서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통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들을 돌보신다고 합니다. 반면에 가장 비싼 제물인 소와 양을 제물로 드리면서 아무런 통회함 없이 우상을 섬기고 가증한 것(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무서워하는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십니다(1-4).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떠는 경건한 자들은 형식적인 예배만 하는 악인들에게 미움을 당하며 쫓겨남을 당할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원수에게 보복하실 것입니다(5-6).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키는 자들은 해산하고 고통을 당하기 전에 아기를 낳는, 출산을 잘 하는 여인과 같이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여인으로 묘사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경건한 교회를 의미합니다. 또 예루살렘은 아이를 잘 낳아 번성하는 여인과 같이 믿는 자들이 지속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도 예루살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젖을 빠는 아이와 같이 만족감과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황폐했던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듯 위로를 얻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기뻐하게될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 더하게 될 것입니다(7-14).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을 통해서 아이러니하게도 회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불 수레를 타시고 오셔서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스스로 거룩하게 되려고 이방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노력한 자들을 책망하고 심판하실 것입니다(15-17). 또 한편으로는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서 레위인과 제사장을 삼으실 것입니다. 이는 더이상이 구원이 민족적인 바탕에 놓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들만 택했다고 믿는 민족주의자들, 선민사상에 큰 충격을 주는 표현입니다. 구약 시대도 이미 하나님께서는 민족적인 배경이 아니라 믿음으로 모든 민족에게 구원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하나님께 나오는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영원한 것같이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머물 것이며 하나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하지만 패역한 자들은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18-24). 

 

이것이 이사야서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심판함으로 하나님은 회복을 가져다 주십니다. 그것은 자동적인 회복이 아니라 선지자의 말을 믿고 떨며 바른 예배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회복이며 그것은 다른 이방민족도 포함합니다. 다른 조건이 필요 없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면됩니다. 반대로 겉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척 하면서 마음으로 이방민족을 섬기며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유대인이라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예배의 태도와 마음을 살펴보고 마음을 모아 삶 속에서도 바른 예배자로, 하나님의 백성을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또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2월 16일 (금요일) 이사야 65장

이사야 선지자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묻지도 않은 나라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 백성은 옳은 길을 걸어가지 않는 패역한 백성들, 하나님의 노를 부르는 백성입니다. 또 그들은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부정한 음식인 돼지고기를 먹고 가증한 것들을 그릇에 담아 먹는 백성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거룩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코와 연기와 불과 같이 괴롭게하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백성들에게 진노를 내리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멸망하도록 만들지는 않으시고 하나님의 종들을 남겨 두십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입고 그분을 성실하게 따른 자들은 회복과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갓’과 ‘므니’와 같은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은 다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1-12). 그 결과 이런 우상숭배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주리고, 목마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종,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먹을 것을 먹고, 마시고, 기뻐할 것입니다. 이들은 기쁨으로 노래할 것이지만, 하나님을 거부한 자들은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남긴 업적과 명성은 저주거리가 될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은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복을 찾는 자들은 진리의 하나님께 나아 오라고 초청하십니다(13-16).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곳은 이전 것은 기억되지 않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기뻐하는 곳입니다. 다시는 우는 소리도 없고 저주 받은 소리도 없으며 재난도 없어서 모두의 생명이 긴 곳입니다. 생명이 길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와 복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온전하게 임하는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부르기 전에 응답하고 말이 마치기 전에 들으시는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다시는 적대감이 없는 평화의 나라입니다(17-25).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배역한 백성들에게 응답하십니다. 하지만 심판을 통해서 배역한 자들에게 징계를 내리시며 동시에 그 가운데 신실하게 남은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끝까지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내리십니다. 이제 인간들은 극명하게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자신의 업적과 명성을 위해서 살다가 저주를 받은 사람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참된 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최후의 날에 인류는 이렇게 명확하게 나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와 보호와 복이 충만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누리며 살 것인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가운데 수치를 당하며 영원한 삶을 살 것인지는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좌우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과 학교와 직장이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받게 되면, 하나님만이 주인이 되시고,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살아가면 그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의 미리 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가정과 학교와 교회와 직장을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와 보호와 평화 가운데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시키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15일 (목요일) 이사야 64장

선지자는 어제 말씀에 이어서 계속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속히 개입해 주셔서 하신 약속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 하늘을 가르고 이땅에 오셔서 불이 잘 붙는 마른 지푸라기를 태우듯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민족들이 떨게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1-2).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이전에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미 강력하게 임하시고 역사하셨던 적이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과 같이 자기를 앙망하는 자들을 위해서 행하신 신을 본적도 들은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3-4). 기도에 확실한 근거와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자신의 형편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는 자들과 주를 기억하는 자들을 선대하시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진노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을 자격이 없는 자들임을 고백합니다. 그들의 죄악으로 생명과 복과 은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셨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시는 것은 가장 큰 저주이며 재앙입니다(5-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이시며 주인이심을 잊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들이며, 진흙으로 지어 매우 연약한 자들임을 아시고 긍휼히 여겨 주셔서 너무 분노하지 마시고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의 성읍이 모두 황폐하게 된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겨 주셔서 잠잠히 가만히 계시지 마시고 개입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7-12). 

 

오늘 선지자의 기도를 통해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는 행위입니다. 기도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옛적에 행하신 구원과 약속의 말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참된 해결책임을 확신하는 가운데 드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연히 얻을 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럴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지은 바가 되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시오니 간섭해 달라고 겸손하게 아뢰는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붙들고 살고 있다는 징표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날마다 아침 일찍 기도하시므로 하나님을 붙들고 아버지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고 의지하며 살고 있음을 온 생애 걸쳐서 보여주셨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분을 붙들고 살아가며 그분의 긍휼하심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매일매일 기도를 잊지 말고 짧은 시간이라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그분을 간절히 찾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14일 (수요일) 이사야 63장


선지자는 에돔(에서의 후손으로 붉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민족)사람과 같이 붉은 의복을 걸치고 오는 한 분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옷은 붉을 뿐만 아니라 화려하고, 그 옷을 입은 분은 권능과 공의를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1). ‘보스라’는 에돔의 수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에돔 사람과 같이 불은 옷을 입은 분께 왜 옷이 붉으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홀로 포도주 틀을 밟는 것 같이 만민을 밟아 그 피가 튀어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만민을 심판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심판으로 공의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생생한 그림 언어로 보여줍니다(2-6). 선지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원수이자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인 다른 민족들을 멸하신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참으로 자기의 백성(소유)이라고 하시고, 거짓을 하지 않는 자녀로 여기시고 구원자가 되시며, 그들의 모든 환란에 동참하시고, 그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근심하게 하여, 잠시 그들을 징계하셨지만, 백성들이 출애굽을 생각하면서 이전에 그들에게 행하신 구원을 되새기고, 그분께서 함께하실 때의 기쁨을 되새기면서 하나님의 돌아오심을 사모합니다(7-14).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께서 굽어 살피시고 끊어진 자비와 사랑을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자기들의 마음을 거칠게 만든 것 처럼 말하지만(17), 사실은 거친 마음으로 내버려 두신 것에 대해서 다시 부드럽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시라고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16-19).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선지자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심판자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등장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원수이자 이스라엘의 원수인 다른 나라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이 고난 당할 때 함께 고난 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당신의 백성이기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십니다. 선지자는 바로 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와 같은 몸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체험하신 예수님의 오심과 그분을 통한 온전한 구원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사탄의 속박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피를 흘리시고, 참된 에돔과 같이 온 몸이 피범벅이 되신 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원수를 물리치시고 죄와 사망에서 그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선지자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최종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실 만큼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함께하시며 언제나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분을 사모하며 회복을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다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하심을 묵상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큰 구원의 사역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매순간 성령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기도하고 그분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13일 (화요일) 이사야 62장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을 주실 때까지 말씀을 전하고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의 공의와 영광을 보고 돌아올 때까지, 또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손의 아름다운 왕관으로 다시 설 때까지 쉬지 않겠다고 합니다(1-3). 그 회복은 완전하여서 다시는 예루살렘이 버림 받은자처럼, 황무지처럼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헵시바(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와 쁄라(결혼한 여인)로 불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이 남편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4-5). 선지자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예루살렘이 남편을 기억하도록 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백성들도 하나님으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그들을 기억하시도록 쉬지 말라고 독려합니다(6-7).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붙들고, 그것을 이행하시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다시는 그 원수들에게 예루살렘의 양식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은 다시는 다른 나라에 정복 당하여 망하게 되는 날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8-9). 나아가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문에서 백성이 올 길을 닦고 만민을 위하여 깃발을 들어야 합니다. 그 깃발을 보고 사람들은 모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 끝까지 구원과 상급과 보응이 예루살렘에 임하였다고 선포하십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보고 거룩한 백성, 여호와께 구속하신 자, 찾은 바 된 자, 버림받지 않은 성읍이라고 부를 것입니다(10-12). 완전한 회복과 영광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이방 민족에게 칭찬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실 때까지 주어진 사역을 쉬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이루실 때까지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쉬지 못하시도록 하라고 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존하라는 것입니다. 

참된 선지자이자 참된 백성으로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협의한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실 때까지 자신의 사명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이루실 때까지 맡겨진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 운명에 앞날을 맡기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에도 말씀을 통한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셨고, 최종적인 교회의 영광을 계시록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이 말씀을 믿고 쉬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며, 말씀을 선포하고, 실천하고, 기도하며, 선교하며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상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또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실 완전한 회복과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지속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행하시도록 기도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12일 (월요일) 이사야 61장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 주셔서 선지자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와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고,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도록 하십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희년은 7년이 7번째되는 해 입니다. 그 날에는 종 되었던 자들이 돌아가고, 돈이 없어서 팔았던 땅도 돌려 받는 날이 바로 희년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단의 손에서 건져 주시는 날에 성취가 됩니다(1-3, 참고. 눅 4:18-21).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년과 같이 회복의 날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와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고 황폐한 도시를 재건 할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어 하나님과 이방 나라를 중보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수치와 능욕이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변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그런 날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원수에게 하나님께서 되갚아 주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또 그날에 하나님의 백성의 자손들이 모든 민족들에게 여호와께 복을 받은 족속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구원을 선포하게 하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모든 나라가 선지자의 선포로 인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노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4-11). 

 

오늘 말씀은 가깝게는 포로 귀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십니다. 그분은 참된 선지자로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셔서 눈먼 자를 보게 하고, 병을 낫게 하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으로 죄와 죽음의 포로가 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믿고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고, 제사장 나라로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오는 모든 슬픔을 구원의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삶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회복의 삶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슬픔과 애통을 기쁨과 찬송의 옷으로 입혀 주신 삼위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며 그분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또 그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는 제사장 나라로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11일 (주일) 이사야 60장

이스라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할 때 죄를 용서하시고 회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그들이 빛을 내야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빛이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빛을 드러내시며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들은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 빛을 보고 이방 왕들도 그들에게 나아 올 것입니다(1-3). 그리고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임하여 있는 빛을 보고 이방인들이 올 때 각기 예물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누릴 영광과 화려함과 풍성함을 보여줍니다. 많은 나라들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부러워하며 그들도 함께 거하길 원합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섬기고자 예물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4-9).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에 진노하셨지만 이제는 회복을 주시고, 성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이방민족들이 그들에게 나아오며 심지어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끌고 옵니다. 이 왕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왕입니다. 그 왕을 포로로 잡아 바침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항복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 나라는 파멸 될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나무 재료인 레바논의 나무로 하나님께서 그분이 거하실 성전을 지으시고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또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민족의 후손들이 그들에게 복종하고 여호와께서 다스리는 성읍이 참으로 이스라엘임을 고백할 것입니다(10-14). 이전에 하나님께 징계를 당할 때는 이런 영광을 누리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복을 주실 때 엄청난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온 이방 나라가보고 경험하고 이스라엘 안에 다시는 황폐함이 없을 것입니다. 놋 대신 금, 철 대신 은, 나무 대신 놋을 사용할 정도로 부강하고 풍성한 나라로 세워지고, 평화와 공의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너무나 강력하여 해와 달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은 영광스럽고 강대한 나라로 회복될 것입니다(15-22). 

 

오늘 말씀은 가깝게는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귀환과 성전 재건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말하는 영광스러움과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풍성하고 빛나는 나라는 이 세상의 마지막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내다보고 있습니다(계22:5). 이 땅에서 교회는 그 사이를 살아갑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영광스러움과 화려함, 풍성함 자체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분의 영광스러움에서 오는 풍성함과 화려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그들과 함께 임재하실 때, 이방나라들도 그 영광스러움을 보고 찾아옵니다. 

 

오늘날 교회의 회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임재 하시고, 그분의 영광스러움을 드러낼 때 교회의 영광이 드러나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돌아오게 됩니다. 교회의 회복은 건물의 화려함이나 예배의 화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 달려있습니다. 영적인 침체의 회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계 회복, 임재의 회복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미워하고 회개하며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며 그분의 임재와 영광을 간절히 사모할 때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어 빛을 발하도록 기도하고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10일 (토요일) 이사야 59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대국의 압제에서 구원하지 못하시고 계신 이유는 그분이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들의 손에는 피, 손가락에는 죄악을, 입술에는 거짓말, 혀는 악한 말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공의대로 재판을 하지도 않고, 우상에게 그들의 삶을 맡기며 살아갑니다(1-4). 그들은 마치 독사의 독과 같이 강력한 파괴력과 치명적인 죄악을 행하고 악행과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데에는 신속하게 행동 합니다. 그들은 평강이 없고 황폐와 파멸과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들고 있습니다(5-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나라의 침공에 넘기시고 포로가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선지자는 ‘우리’라고 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의와 공의가 멀고, 구원을 바라지만 먼 이유를 고백합니다. 선지자는 그들의 허물이 심히 많고 죄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속였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9-15). 이렇게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살피십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을 베푸시고 공의를 옷 입으시고 구원을 투구로 삼으시고 되갚아 주심을 속옷으로 입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하나님의 원수에게 보복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주변 나라들은 보게 되고 그분의 영광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언약을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와 그 후손에게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16-21). 이 약속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주심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요14:26).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그 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다시 하나님과 가깝게 지낼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아온다면 그는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지만 완전히 죄가 없어지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가능합니다. 때문에 이 땅에서는 여전히 우리 가운데 죄악의 쓴 뿌리가 남아 있고 날마다 죄를 멀리하며 살아가야 하는 성화의 삶을 삽니다. 비록 신자 안에서 죄악이 하나님과 관계를 완전히 끊어 놓을 수 없지만, 여전히 하나님과 친밀감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죄를 미워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며 회개하고 말씀과 성령으로 행하며 거룩하게 살아갈때 하나님과 더 친밀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행하며 죄로부터 날마다 멀어지고, 하나님과 더욱 더 깊은 친밀한 교제를 이 땅에서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9일 (금요일) 이사야 58장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목소리를 높여 이스라엘의 죄악을 깨닫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같이 보이고, 공의를 행하는 것 같이 보이고,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 같이 보이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적인 삶과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하나님은 금식을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지 않으시자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온갖 일을 시킵니다. 금식하고 안식해야 하는 날에 다른 사람에게는 일을 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금식하면서 말로 다른 사람과 다투고 주먹으로 칩니다. 종교적 금식은 하지만 실제 삶은 폭언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의 금식은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께 겸손하게 그들의 기도가 닿기 위한 간절함과 상한 심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머리를 숙이고 베옷만 입고 흉내만 내는 그런 금식이었습니다(1-5). 

 

이어서 하나님은 당신이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폭력과 부당한 억압을 받는 자들을 풀어주고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고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며 집이 없는 자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도와 주는 것입니다. 금식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입니다. 종교적인 형식만 지켰다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금식을 명하신 이유와 의도를 살펴서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참된 금식을 행할 때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복을 주시고 부를 때 응답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6-9). 이것은 당시에 율법을 지키는 것과 그 정신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 속에서 행할 때 하나님은 빛과 같이 빛나는 삶과 물댄 동산과 같이 영혼에 만족감을 주시고 풍성함을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삶을 돌이키면 그 자녀들이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울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10-12). 이런 삶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날에 ‘오락’을 금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모든 일’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과 그분의 유익을 추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온전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책임지신다고 약속하시고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13-14). 안식일에 모든 일을 쉬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주한 일상의 일을 잠시 중단하고 하나님과 교제에 집중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그들의 일에 달린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형식주의적인 신앙과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삶을 비판합니다. 오늘날도 이런 형식주의와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적당한 겉모양만 내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준이 아니라 자기의 기준과 생각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기준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은 거부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항상 말씀에 비추어 신앙생활을 점검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이것을 ‘계시(말씀)의존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단지 형식을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도 안되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살펴야 합니다. 한 예로, 주일을 특별한 날로 여기고 그날을 귀히 여기며 나의 일을 쉼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인이심을 예배와 교제를 통해서 고백해야 합니다. 주일은 우리의 일을 그치고 예배와 이웃을 돌아봄으로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확인하고 고백하는 날입니다. 구약 안식일의 의도는 주일에도 이어집니다. 

 

우리 삶 가운데 있는 형식주의적인 신앙과 자기가 기준이 되는 신앙의 양식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신앙과 삶의 기준을 맞춥시다. 그래서 바른신앙과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항상 인도하시고 그분이 주시는 즐거움과 풍성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8일 (목요일) 이사야 57장

앞의 말씀에 이어서 악인과 의인의 대조가 이어집니다. 비록 의인과 진실한 자들이 악인들보다 먼저 죽고 마음에 두는 사람이 없지만, 이들은 모두 평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의인의 죽음이 허망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보여줍니다. 의인들은  참된 안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1-2). 

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들은 모두 우상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당시 우상을 섬기는 것은 이방 제사장과 성적인 접촉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상수리 나무, 푸른 나무에 있는 신당에서 음행을 저지르고 심지어 자녀도 제물로 바치는 악행을 하는 것 모두 우상숭배에 포함이 됩니다. 악인들은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전제(포도주를 부어드리는 제사)와 예물을 가지고 우상에게 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두어야 하고 어린 양의 피를 출애굽 때 발랐던 문과 문설주에 우상의 표를 두었습니다. 또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한 기름을 몰렉(아이를 제물로 받는 신)에게 바치기도 합니다. 아주 열심히 그렇게 우상을 섬겼습니다(3-10).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두려워했기에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그렇게 섬기는지 물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을 탓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침묵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는데, 하나님께 핑계를 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려울 때 의지하는 우상들이 결국 헛된 것임을 보여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존귀한 분이시며 영원한 계시며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 곧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영을 다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끊임 없이 노하지 않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이스라엘 자손을 치셨지만 회개할 때 고치시고 다시 회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를 거절하고 악행을 계속하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평강을 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11-21). 

 

본래 우리는 평강을 얻지 못할 악인들이었습니다. 우리의 깊은 본성은 항상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인으로서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셨고, 하나님만 온전히 섬기셨으며 또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온전히 믿고 지키셨고, 약속한 모든 복과 유익을 얻으셔서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상한 심령을 주시고,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을 주시고, 의인으로 살고자 하는 굳은 의지도 성령을 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에서 약속한 복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얻으셔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헛된 우상을 버리고 상한 심령과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따르도록 독려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며, 악인의 잘됨을 부러워하기 보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회복과 평강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7일 (수요일) 이사야 56장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로 돌아온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지 말해줍니다. 그들은 공의와 의를 행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바로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한 날로 모든 백성과 피조물이 쉬어야 합니다. 여기서 쉬는 것은 일상을 정돈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안식일은 우리의 생명이 우리가 하는 일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하며 일을 쉬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굳게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에게 복을 약속하십니다(1-2).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께 나아와 이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 그리고 남성으로서 기능을 잃은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 돌아와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식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어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방인과 고자는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지만, 새로운 시대, 회복의 시대에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 메시야가 오는 때에는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이 성전으로 나아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입니다(3-8). 

다른 한 편, 이스라엘의 신실하지 못한 지도자들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들의 모든 짐승들은 모든 민족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공격하라고 초청합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들이 술에 취하고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마치 벙어리와 같이 백성에게 말씀으로 경고하지 않고, 파수꾼도 위험을 경고하고 알리지 않습니다. 그들을 게을러서 잠만 자고 이익만 챙기는 자들입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을 당하게 되지만 앞에서 말한 것 같이 여전히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은 회복과 복을 얻을 것입니다(9-12). 

 

오늘 말씀은 안식일을 강조합니다. 비록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않고 주일로 지키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안식일은 정의와 의를 행하는 날입니다. 1차적으로 예배의 날이며, 이웃과 주변을 돌아보는 날입니다. 예배와 구제의 날이 바로 주일입니다. 이 날을 바르게 지킬 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기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또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새로운 소망을 준다는 것을 봅니다. 남성으로서 기능을 할 수 없는 자들에게 자식들보다 더 나은 기념물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만족감과 기쁨으로 채우시는 분입니다. 

 

오늘 하루도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족감과 기쁨으로 살아갑시다. 그리고 주일에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6일 (화요일) 이사야 55장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말씀하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나아오라고 백성들을 초청하십니다. 목마른 자들은 누구나 물로 나와서 마시되 값 없이 돈 없이 사서 먹으면 됩니다. 값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면 됩니다. 사람들은 참된 양식이 아닌 것을 돈 주고 삽니다. 돈을 주고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을 구입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참된 평안과 만족감과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참된 만족감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나아올 때, 그리고 말씀에 순종할 때 영혼이 살 수 있게 됩니다(1-3).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을 듣고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언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그 언약을 통해서 다윗에게 약속한 영원한 왕조의 약속이 성취 될 때, 곧 메시야를 보내어 주시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을 알지 못하던 백성들도 복음을 듣고 그들에게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4-5).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만날 만할 때, 곧 하나님께서 회복을약속하시고 선지자를 통해서 부를 때 그분을 찾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말씀을 들은 바로 지금입니다. 그냥 돌아가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회복을 주실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에는 그것이 불합리해 보이고, 또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잘못한 자들도, 도저히 용서받지 못한 죄를 범한 사람도 용서하시고 받아 주십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이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으로 평안히 나아가며 인도함을 받으며 가시나무가 잣나무로, 찔레가 화석류(종말론적 회복을 상징하는 나무)로 대체될 것입니다(6-13).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회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할 때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말씀을 듣고, 읽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회복으로 부르십니다. 또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누구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돌이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과 회복의 때는 언제든지 말씀을 듣는 바로 지금입니다. 갈급함과 목마름을 느끼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하나님은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회복을 주십니다. 이 회복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값없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값어치가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한 값을 지불하였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이것은 값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 모두의 회복을 약속하며 새로운 회복을 약속하시는 말씀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읽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회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갈증을 말씀으로 해소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5일 (월요일) 이사야 54장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을 여인, 아내에 비유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출산하지 못하며 과부가 되어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과 같이 어려운 상황 속에 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더 많은 자녀를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막터를 넓히라고 합니다. 삶의 거처를 확장함으로 번영을 예고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그 자손들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이 사람이 살 곳이 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영토의 확장과 번영 뿐만 아니라 신약시대 복음이 세계에 퍼져 나갈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1-3). 젊었을 때의 수치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심판 당하고 포로로 잡혀갔던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수치와 치욕이 잊혀질 만큼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회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친히 다시 그들의 남편이 되어 주시고, 구속자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잠시 버림 받았다가 근심하고 있던 중에 다시 남편의 부름을 받는 아내와 같이 잠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지만, 영원히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 것입니다. 그분의 진노는 잠깐이지만 그분의 긍휼은 영원할 것이라고 합니다. 노아의 홍수로 인류를 잠시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이 세상을 다시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것 같이 긍휼이 진노보다 더 클 것입니다(4-10). 그들에게 각종 보석으로 다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풍요를 약속하시는 것이라기보다 회복될 이스라엘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을 치려고 만든 모든 무기들, 그것을 만드는 장인들도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쓸모 없도록 만드실 것입니다(11-17).

 

하나님의 진노는 잠깐이지만 긍휼은 영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징계하시기도 하시지만, 그 기간은 매우 짧을 것이며 긍휼하심과 돌보심은 영원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잠시였으나 십자가의 공로와 효력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다시 받아 주십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며 매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억하고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은 영원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어려움 속에서 위로와 힘을 얻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4일(주일) 이사야 53장


오늘 말씀은 이사야서 가운데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가장 두드러지는 말씀 중 하나 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본문에서 고난을 당하는 자가 선지자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사야는 본문에서 말하는 고난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분은 여호와의 참된 종 예수님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온전히 하나님께서 전한 것을 믿으셨고 그분의 능력이 그분에게 나타났으며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자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겉모습은 흠모할 것이 없이 지극히 평범하셨습니다(1-2). 메시야의 모습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는 것 같이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또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질고’란 괴로운 슬픔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질고와 슬픔은 우리를 대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심판을 당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분의 찔림은 우리의 때문이고 상처로 상하게 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분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분의 상함 때문에 우리를 고침을 받았습니다. 양과 같이 각기 제 길로 가기를 좋아하는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그분께 담당 시키셨습니다(3-6).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 가운데 한 마디도 거절하지 않고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이 묵묵히 그길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 때문에 곤욕과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강포(폭력)를 행하지 않으셨고, 거짓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강도와 함께 범죄자 취급을 당하셨습니다(7-9).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뜻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마치셨습니다. 속건제물은 하나님과 이웃에게 잘못했을 때 갚는 제사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씨)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완전하며 충분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되며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실 것입니다(10-12). 

 

오늘 말씀은 누구나 읽으면 예수님께서 이루셨다는 것을 알고 그분이 바로 그 하나님의 종, 메시야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던 분이시며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죽으실 이유가 없지만 저와 여러분의 죄값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고난을 늘 생각하며 감사하고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그 은혜에 감사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3일 (토요일) 이사야 52장

계속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독려하고 계십니다. 힘을 내어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옷은 장차 회복될 이스라엘의 영광과 주권을 의미합니다. 다시 일어나고 묶인 목줄을 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회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아무런 댓가도 없이, 그들이 딱히 한 일이 없이, 이유없이 잡힌 자가 풀려나는 것 같이 이스라엘은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게 된 것은 그들이 독립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은혜로 풀려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잡아 두는 사람들에 의해서 당신의 이름이 더럽혀 지는 것을 들으셨고, 당신의 정한 기한이 다 되어 풀려나게 한 것입니다(1-6).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는 유다의 포로 귀환 소식을 전하는 자입니다. 평화와 복된 좋은 소식은 구원과하나님의 통치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좋은 소식은 단지 해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파수꾼들은 이 소식에 기뻐하며 서로 노래합니다. 황폐함을 경험했던 모든 백성들도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노래의 재료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강한 능력으로 구원을 행하신 것입니다(7-10). 이제 백성들은 포로된 곳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돌아오는 여정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종인 이스라엘의 모습은 아무 보잘 것 없지만 지극히 존귀하게 되고 다른 왕들이 입을 손으로 막을 만큼 놀라게 할 것입니다(11-15).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반드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구원을 기뻐하고 찬송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지금의 모습은 보잘 것 없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이실 것입니다. 이는 참된 이스라엘, 참된 하나님의 종인 예수님을 사역을 내다보기도 합니다. 그분은 보잘 것 없이 마구간에서 나셨고 죽으실 때도 힘없이 죽으셨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분은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을 예언하시고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지극히 존귀하게 된 자들입니다. 우리를 포로로 잡고 있으며 종으로 부리던 사탄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의 삶은 사단의 나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나라로 가는 여정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항상 앞서가시고 함께 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초라해 보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존귀하게 보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 된 곳에서 나와 참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또 우리를 괴롭히는 죄를 거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복된 소식을 주변에 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2일 (금요일) 이사야 51장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의를 따르며 하나님을 찾아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과 이전의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풍성함을 회복시켜 주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1-3).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의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던 세력들은 사라지고 하루살이 같이 죽게 될 것입니다(4-6).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적들의 비방에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옷을 좀벌레가 먹는 것 같이 없어질 것이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영원히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당신의 율법을 마음에 두고 지키는 자에게 구원을 베풀고 버리는 자에게 패망을 주시는 것입니다(7-8). 이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일어나 속히 그 약속을 행하시도록 간구합니다. ‘여호와의 팔’은 그분의 능력과 권세를 상징합니다. 그 능력과 권세로 말씀하신 것을 속히 행하시도록 간구합니다. 그분은 옛적에 홍해를 말리시고 라합으로 상징되는 애굽을, 용으로 상징되는 앗수르를 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구원을 경험한 자들의 탄식은 사라지고 기뻐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9-11). 이에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백성을 격려합니다. 하늘을 지으시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들의 포로 생활은 끝이 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을 구원할 분은 하나님이심을 깨우쳐 주십니다(12-16). 비록 지금은 하나님의 손에서 진노의 잔을 마셔서 벌 받는 중이지만 결국 그들은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큰 잔을 다 마셨다는 것은 진노의 시간이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징벌하셔서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하셨지만 이제 정하신 때가 끝났기에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쟁과 식량 난으로 괴롭게 하셨지만 이제 다시 고치실 것입니다. 대를 이을 자가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태였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그 큰 진노의 잔을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다시 거두시고 그들을 괴롭히던 자들에게 주실 것입니다(17-2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을 기억하셔서 그에게 복을 주신 것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를 통해 정화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이중성을 지닙니다. 죄를 제거하고 다시 회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참으로 강렬합니다. 참된 이스라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당하심으로 진노와 저주는 끝이 나고 회복을 주십니다. 죄에 대한 진노와 저주 없이 하나님의 공의는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심으로 당신의 저주를 쏟으셨고, 죄에 대한 분노를 쏟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마음에 두고 다 지키지 못할 때에도 여전히 회복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진노와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마음에 두고 의를 행해야 하는 것은 감사의 표현이요,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우리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 대속의 은혜를 기억하시고 합당하게 반응하며 감사함으로 계명을 지켜 나가고, 넘어질 때 상한 심령으로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회복과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1일 (목요일) 이사야 50장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과 이혼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 보낼 수 있었습니다(사실 이것은 이혼한 여인이 당하게 되는 수치와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신명기24장 1-4절 참고)).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혼 증서를 써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보낸 적도 없다는 것, 관계를 끊으려고 한 적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이 싫어서 떠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편이 집에 들어와서 불러도 집에 없는 것 같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죄악을 더 사랑하여 떠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속하고자 하십니다(1-3). 그들은 마치 다른 남자가 좋아서 떠난 여인이지만, 남편은 여전히 그들을 기다리고 강한 능력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강제로 그렇게 하시지 않고 그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타이르십니다. 선지자에게 학자들의 혀, 곧 잘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도록 말씀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심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내어주고, 수치와 어려움과 모욕을 당하여도 참을 수 있도록 도우심으로 그렇게 하시고 강한 부싯돌과 같이 강한 의지와 신념을 주셔서 그렇게 하십니다(4-7).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자를 격려하시고 의롭다고 해주며 다른 사람의 정죄를 이기도록 하십니다(8-9). 그리고 이제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선택하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을 의지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모독하고 횃불을 피워 놓고 우상을 섬기며, 그길을 지나가면 결국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10-11).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종이 부른 노래로, 일차적으로 이 종은 역시 이사야 선지자를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 참된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분은 학자들의 입과 같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늘 귀를 기울여 순종하셨고, 채찍을 맞으시고 뺨을 맞으실 때에도 내어 주셨습니다. 굳은 심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결국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참된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선포하셨고, 백성들을 모으십니다. 또 백성을 초청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하시지 않으시고 지속적으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구원으로 부르십니다. 말씀으로 문을 두드리시고 귀에 들려주십니다. 이미 구원을 얻은 백성으로서 우리도 학자들의 혀와 듣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굳은 심지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의 말씀 사역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잘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어려움 가운데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순종의 삶으로 그분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30일 (화요일) 이사야 48장

오늘 말씀은 고레스가 ‘하나님의 종’으로 등장하는 마지막 장이면서 49장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여호와의 종’ 곧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시작되는 장입니다. 앞 장에서 바벨론의 교만에 대해 책망하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집,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책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말로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죄악 가운데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전부터 미리 예언하신 것을 행하셨을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지자를 통해서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미래의 일, 은비한 일(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일)을 행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 오래 참으시고 고난을 통해서 그들을 연단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유다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기 시절 동안 겪게 될 어려움을 의미합니다. 그 기간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연단이 되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1-11). 

다시 하나님은 12절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불리는 고레스를 통해서 바벨론이 망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십니다. 16절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나’는 선지자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 일을 예언하시고, 최종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메시야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누군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성령이 함께하시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내어 주어시고 그분을 주인으로 고백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을 주셔서 우리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힌 것은 그들의 구속자이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아 생기게된 일이라는 점을 되새겨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제 그들을 바벨론에서 구원하여서 다시 구원을 경험하도록 하시고 이전에 조상들이 광야에서 물을 먹이신 것 같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택함을 받고 세워진 종, 고레스를 통해서 바벨론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전한 영적인 구원, 죄와 사망에서의 구원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장차 오실 메시야, 49장부터 예언될 메시야는 참된 구원을 가져다 주는 종으로 묘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참된 구원 역사를 이루신 참된 메시야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통해서 바벨론의 포로로 고난받고 있던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 같이, 참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사망의 고난에서 고통 받던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구원하신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위대한 구속자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은밀하고 비밀한 일을 기억하며 어려운 삶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힘든 현실 속에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29일 (월요일) 이사야 47장

오늘 말씀은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처녀 딸 바벨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곱고 아름다운 시절, 곧 강대국으로서 전성기를 보냈던 시절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강하던 바벨론도 순식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더이상 곱고 아름답다고 부를 수 없을 것이고, 여종과 같이 맷돌을 갈고, 도망하는 여인이 수치를 무릎 쓰고 신체의 일부를 드러내며 강을 건너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1-3). 선지자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어 바벨론에서 건져내실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바벨론이 여러 왕국의 여주인과 같은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4-5). 바벨론이 망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죄악 때문에 바벨론에 넘겨주었는데, 바벨론이 교만하여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학대했기 때문입니다(6-7).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않고 그들의 강력함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녀를 잃지 않고 과부로도 지내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전쟁에서 지지 않을 것이며, 다른 나라의 정복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식간에 그런 바벨론이 망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갑자기 바벨론은 과부가 되고 자녀를 잃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교만하여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에 의지했고 스스로 하나님보다 높였습니다.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바벨론은 무너질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이 의지하던 지식과 지혜와 주술과 주문(오늘날의 천문학과 수학과 과학에 속함)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동맹을 맺어 온 주변 나라의 군사력들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들은 마른 풀이 순식간에 타 없어지는 것과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8-15). 

 

바벨론은 하나님 앞에 교만했습니다. 자신들의 군사적인 힘과 학문적인 탁월함으로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절대로 다른 나라에게 패망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했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의해서 순식간에 망할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그 날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지혜와 과학은 그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구원을 의지하는 사람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학문과 과학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그것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학문과 군사력과 과학 지식을 순식간에 초개와 같이 태우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어떤 다른 것보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다스리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학문과 과학 지식은 우리가 의지해야 항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할 도구일 뿐입니다. 오늘 하루도 쉽게 없어질 인간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기도하며 그분에서만 온갖 좋은 것을 찾고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28일 (주일) 이사야 46장

오늘 말씀에서 ‘벨’은 바벨론의 신 ‘마르둑’의 히브리식 이름으로 바람과 푹풍을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느보’는 벨의 아들로서 학문의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벨이 엎드러지고 느보가 구부러졌다는 것은 바벨론이 망했다는 뜻입니다. 그 신들은 모두 짐승에게 업혀 이동했습니다(1-2). 그런 신을 섬겼던 바벨론은 아무런 힘 없이 망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업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들을 창조하고 구속한 분으로서 업혀 지내는 다른 우상들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한 백성을 태어날 때부터 노년때까지 업으시고 안으시고 보호하시고 붙드시는 분이십니다(3-7). 이런 하나님과 우상은 비교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하나님이시고 홀로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참된 하나님을 버리고 패역한 자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을 기억하고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더이상 망설이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분은 시작부터 이미 마지막을 알고 계시고 모든 것은 다스리시는분이십니다.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고레스 왕을 의미)을 부르시고 당신의 뜻을 위해서 열방의 왕들을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곧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공의와 구원을 당신의 백성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구원에 반응하여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8-13).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의 계획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이미 창세 전부터 계획된 것을 때가 차매 이루셨고, 그 구원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교회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업으시고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놓치지 않으시고 노년이 될 때까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붙드십니다. 성도의 견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붙드셔서 견디고 인내하게 하시며 어려움 속에서도 피할 길을 내시며, 현실 속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끝까지 구원을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27일 (토요일) 이사야 45장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불러 세우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름을 부어 고레스를 세웠다고 합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맡기신 특별한 일을 위해서 세워진 자라는 뜻입니다. 주로 왕, 선지자, 제사장들이 기름을 부어 세워졌습니다. 고레스는 비록 이방인 왕이지만 하나님의 종으로서 세워집니다. 그가 세계를 정복하러 나서고 또 승리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계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1-3).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부른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4). 비록 그 사실을 고레스를 모르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사야를 통해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참으로 하나님께서 온 열방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5-7). 이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의와 의가 다시 실행이 되는 나라로 회복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재의 상황을 보며 도저히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께 따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8-10).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의해 사로잡힌 백성들이 아무런 댓가도 지불하지 않고 풀려나게 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11-13).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애굽과 구스와 스바의 사람들도 이 구원의 일을 보고 하나님께 속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실제로 말씀하신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이방민족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다른 우상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은 영원히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14-17). 그분은 사람들이 우상으로 만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 외에 다른 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신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창조주로 여기는 어리석은 행위의 산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섭리가운데 실행하심으로 하나님만이 살아 계신 참된 분이심을 매순간 증명하시는 분이십니다(18-19). 때문에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을 미리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나아와야 합니다. 다른 신은 없습니다. 오직 그분 만이 공의와 구원을 이루시는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분을 거부하고 화를 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분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18-2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온 세상을 붙들고 계시고, 세상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돌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를 결코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역사 속에서 강대국이 그저 그 힘으로 정복을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 역사를 통해서 교회를 돌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매순간 당신의 교회를 역사 속에서  돌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기바랍니다. 역사의 한 순간도 하나님은 우리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자는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와 사건 자체보다 그것 넘어 계시며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26일 (금요일) 이사야 44장

43장과 같은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오늘 말씀에서도 계속 됩니다. 그분은 야곱,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창조주이심을 선언하십니다. ‘종’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로 하나님께 속했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은 그들을 만드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여수룬’은 ‘의로운자, 올곧은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들을 의로운 자로 여겨 주심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의롭게’ 여기신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회복을 주셔서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시고, 황폐한 땅에 강을 내시고, 풀이 자라게 하신다는 약속은 풍성한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실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확신할 것입니다(1-5). 하나님은 당신께서 온 우주의 시작과 끝이 되심을 선포하심으로 유일무이한 분이심으로 드러내십니다. 다른 우상들은 다 사람들이 그들의 기술력을 가지고 임의적으로 만든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는 자들은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상은 스스로를 위해서 만든 위안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무의 절반을 뗄감으로 쓰고 그 나머지로 사람의 모양으로 형상을 만들어 자신의 신이라고 믿고 섬기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고발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은 분별력이 없고 허망 것에 속아서 헛된 것을 섬길 뿐입니다(6-2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야곱을 기억하시고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의 죄를 없이 하셨고 구원하셨으니 이제 그분께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일은 온 하늘과 땅이 기뻐 노래할 제목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분으로서 다른 우상 숭배자들의 지혜를 없이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황폐한 곳을 회복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 일을 고레스를 목자로 세워 행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21-28). 이 약속의 말씀은 175년후에 태어날 고레스가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보내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했을 때 이루어 졌음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시며, 황폐하고 메마른 광야와 같은 백성들의 상황도 순식간에 회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그 백성을 창조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시며 회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그분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시고 지으시고 부르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신음과 황폐한 상황과 아픔을 아시고 돌보시는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지으시고 부르시고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 하나님께 어려움을 아뢰고 그분의 간섭하심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25일 (목요일) 이사야 43장

오늘 말씀도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 회복의 원동력은 이스라엘의 어떤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명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시고 그분의 것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건 없이 이미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을 택하셨고, 그 후손들인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복을 주시고, 물 가운데서도, 불에서도 건지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친히 그들의 구원자가 되셔서 그들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다른 민족들보다 더 사랑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흩어진 백성들을 북쪽과 남쪽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으실 것입니다.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된 이스라엘을 불러 그 구원의 사역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1-7). 그들은 지금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만이 참된 신임을 듣게하고 보여주어 그분을 전하는 증인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하신 분이십니다. 열방이 섬기는 모든 신은 우상일 뿐입니다. 그분이 행하시려 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8-13). 이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출애굽때 홍해를 가르시고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그와 같은 일을 새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예전 일은 단지 기억 속에만 담아 두는 것이 아니라(18), 현실이 되기를 기대하게 하십니다. 홍해를 갈라 마른 땅으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반대로 마른 땅(사막)에 물길을 내시어 백성을 구원합니다. 그 백성들을 위한 물을 다른 들짐승(이방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음)도 함께 유익을 누리게 될것입니다. 구원을 경험할 백성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19-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시고 다시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제사를 제대로 드리지 않고 있으며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죄악으로 하나님은 더욱 마음 아파하시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들이 출애굽이라는 큰 구원을 경험한 것을 잊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므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중에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다시 하나님께서 앞에서 말한 모든 구원의 계획을 들었으니 제대로 반응할 차례입니다(22-2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과 사랑으로 인해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중에서도 때가 되어 구원과 회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인간의 어떠함이 그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사랑이 구원과 회복의 동력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송함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교회를 지명하여 부르시고 그 구원을 이끌어 가십니다. 교회는 구원의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사랑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그분의 놀라운 사랑을 묵상하고 찬송하며 보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24일 (수요일) 이사야 42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종을 보내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종’은 일차적으로는 고레스 왕과 고레스 왕을 통해서 회복될 이스라엘,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 메시야 곧 예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복을 주시고,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다른 나라들이 복을 받는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죄와 사망의 포로 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정의를 베푸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 사역을 미리 말씀하시고 또 그것을 시행하심으로 영광을 얻으실 것입니다(1-9). 그렇게 구원을 얻는 자들은 찬송을 부릅니다. 그들은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것은 구원에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바다에 있는자들과 촌락있는 자들, 산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눈 먼 자들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것이기에 노래합니다. 계층이나 신분에 상관 없이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크게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10-17).

그러나 현재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종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특권을 누리지도 못하고 그 책임도 알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고 존귀하게 만들고자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여 이방민족에게 탈취를 당하고 도망하여 숨어 있는 형편입니다(18-22). 이에 선지자는 그 상황을 직시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회복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호소합니다(23-25).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종으로 있던 우리를 하나님의 종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사역으로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 합당하십니다. 우리 또한 감사로 새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또한 우리도 이방의 빛으로 세워졌습니다. 오늘 하루도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또 이방의 빛으로 다른 사람에게 말과 행실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23일 (화요일) 이사야 41장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강대국이 힘을 키우고 이웃나라들을 정복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 강대국을 보고 다른 나라들은 스스로 우상을 만들고 그들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1-7). 이에 하나님은 재판을 통해서 그들의 잘못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종이며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그런 길을 걷지 않도록 권면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결코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대국의 위협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붙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8-10).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고, 그들을 괴롭게 하던 나라들은 수치와 욕을 당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절에 ‘버러지같은 야곱’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을 비하하는 말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처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말합니다. 버러지와 같은 처참한 상황에 있지만, 다시 강한 나라로 만드실 것입니다. 곡식을 터는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써 산들도 부술 만큼 강력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속자가 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 나라 자체가 강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누구와 함께 있고, 누가 그들을 도우시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을 괴롭히던 강한 나라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11-16).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이 목이 마를 때에 메마른 산에 강을 내고, 골짜기 가운데 샘을 내어서라도 그들에게 응답하시며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심을 확실히 약속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 많은 열매 맺는 나무들이 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확실히 돌보심을 깨닫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17-20). 

 

또 하나님께서는 우상들에게 소송을 거십니다. 그들에게 참된 신임을 입증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결코 우상들은 그런 존재들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만든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상을 의지하고 택한 사람들은 스스로 속이는 가증한 자들입니다(21-2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된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세우시고 그가 북방에서 와서 이스라엘에 회복을 줄 것임을 미리 예언하심으로 증명하십니다. 이 사람은 고레스 왕을 의미합니다. 고레스 왕(바벨론을 무너뜨린페르시아 제국의 왕, 하나님의 택한 자로 묘사됨)은 바벨론에 사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고 정착하여 살 수 있도록 한 왕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미리 알려 주심으로 우상과 달리 당신께서 참된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십니다(25-29). 

 

오늘 말씀에서 황폐하고 아무런 소망이 없어 보이는 남 유다의 상황이 회복되는 핵심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함께하심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신들, 우상들과 달리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돌보시겠다는 약속은 참된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에게서 완전하게 성취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과 돌보심과 구원을 약속하셨듯이, 하나님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으로 함께하셔서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황폐한 상황 속에서, 어려움 속에서 부르짖을 때 응답하십니다. 삶의 위기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잊지 않는 것이고, 그분께서 도와 주시겠다는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도우시며 참된 회복을 가장 정확한 때에 주실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그분을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22일 (월요일) 이사야 40장


오늘 말씀 이후부터 이사야서는 예루살렘의 회복, 이스라엘의 회복에 큰 초점을 둡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라는 선언으로 오늘 말씀을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때(포로기간)가 끝이 났기 때문입니다(1-2).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맞이 할 준비를 해야합니다. 그분이 오실 길을 예비해야 합니다. 이 말은 실제로 길을 닦으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 그분의 임재와 그분이 주시는 회복을 사모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3-5). 외치는 자는 백성들이 마음을 준비 하도록, 그리고 인생은 풀과 같이 연약하고 없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을 신뢰하도록 해야 합니다(6-8). 쉽게  말라 버릴 인간에게 소망을 두면 안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또 이 말씀을 전하는 자는 두려워 하지 말고 이 복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목자와 같이 양떼를 품으시고 회복을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외쳐야 합니다(9-11). 누구도 하나님과 비교 될 수 없고, 누구도 하나님께 어떤 훈수도 둘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완전하시고 위대하시고 능력이 한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앞에서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도 한 방울 물과 같습니다. 또 레바논의 울창하고 큰 숲도 하나님의 집에 땔감도 안됩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크십니다. 그분은 다른 어떤 우상과도 비교불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아무리 강력한 권력자도 하나님 앞에서는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진 자들, 하나님께서 입김 한번 부시면 다 날라갈 자들일 뿐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회복을 약속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12-26).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포기하셨다고 자포 자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순간도 그들을 잊지 않으셨고, 항상 그들에게 힘을 주시며 그분을 앙망하는 자들에게 새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27-31).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보다 훨씬 더 크시고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을 마음 깊이 기다리며 사모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시고 회복을 주십니다. 그분은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를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분을 사모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회복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21일 (주일) 이사야 39장

히스기야가 병에서 나았다는 소문을 듣고 먼 곳에 있던 바벨론 왕이 사절단과 글과 예물을 보냅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그 사절단을 보고 기뻐하며 그들을 자신의 보물 창고와 무기고를 열어 보여줍니다. 이는 히스기야가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낫게 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1-2). 이에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에게 나아가 묻습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으며,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냐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모든 보물과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날이 이르면 히스기야가 보여준 왕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바베론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의 후손들, 곧 왕족들이 사로 잡혀 바벨론의 왕궁의 신하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3-7).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벨론 왕이 보낸 ‘글’에 힌트가 있습니다. 바벨론 왕은 그 글을 통해서 히스기야의 병문안 뿐만 아니라 바벨론과 가깝게 지내는 조약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던 히스기야가 이제는 다른 나라를 의지하고자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책망한 것입니다. 8절의 히스기야의 반응은 냉소적으로 볼 수 있고, 혹은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자신의 시대에는 강함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히스기야의 부족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는데 바빴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우리가 잘 되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기 보다 우리를 자랑하는데 바쁩니다. 힘들 때 하나님을 의지하다가 잘 되면 금새 하나님을 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일입니다. 병이 나았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약속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위기를 지날때 중요한 것은 힘든 상황, 위기, 어려움이 지났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왕으로서 그런 실수와 부족함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한치도 실수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시고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우리의 실수와 부족함을 감추어 주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실수와 부족함 속에서 예수님을 의지하여 다시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께서 우리를 돌보심을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20일 (토요일) 이사야 38장

앗수르 왕 물러간 후에 히스기야는 병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어 히스기야가 그의 죽음을 준비하고 그의 왕위가 평화롭게 잘 이어 질 수 있도록 합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에 대고 울면서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히스기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사야에게 다시 돌아가서 히스기야의 기도와 눈물을 보았다고 전하고 15년을 더 살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그 성을 산헤립의 죽음 후에도 계속 이어질 앗수르의 위협에서도 건지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확실히 지키신다는 징조로 아하스가 만든 해시계가 뒤로 십 도 물러가게 되는 것을 볼 것이라고 전합니다(1-8).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가 병든것을 고쳐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참된 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노래를 지어 부릅니다. 그가 죽을 병에 걸려 하나님을 예배할 기회가 없었고, 이에 절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고 하나님께 나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더니 살려주셨다고 합니다. 죽은 자는 하나님을 예배하러 성전에 가지 못하지만, 자기는 다시 살아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전에 올라가 구원을 노래한다고 합니다(9-20). 이사야는 무화과를 가져다가 종처(종기나 나병의 환부)에 붙이면 나을 것이라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성전에 다시 올라갈 징조가 무엇인지 이사야에게 묻습니다(21-22). 그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해시계가 뒤로 십 도 물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어제 본문과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분이시고 다른 신들과 전혀 다른 분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히스기야 개인에게 생긴 질병을 고쳐 주시기를 기도한 것에 응답하신 하나님으로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아플 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6절 말씀과 같이 이 고침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온 하나님의 백성을 앞으로 계속될 앗수르 왕의 위협에서 건지실 것이니 하나님만 신뢰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강대국의 위협은 지속될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지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온 백성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늘날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 계속되는 세상의 위협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만 신뢰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확실한 징조를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보내 주셨고,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고, 부활, 승천 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우신다는 가장 확실한 징조가 됩니다. 가장 아끼는 아들을 이미 주신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롬8:32). 뿐만 아니라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계십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어려움과 세상의 위협 속에서도 우리를 위해 아드님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소망을 두고 기도합시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우리의 문제에 간섭해 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월 19일 (금요일) 이사야 37장

 유다 왕 히스기야가 랍사게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습니다. 슬픔과 애통함과 겸손함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는 성전으로 가고 고위 관리들을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으니 그를 견책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고 이사야에게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1-4). 이것은 히스기야가 유다 백성에게 닥친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사야는 놀라운 말씀을 신하들에게 들려줍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를 멸하는 소문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5-7). 

한편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랍사게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본대가 주둔하고 있던 블레셋 라기스를 떠났다는 말을 듣고 왕에게로 돌아갑니다. 그 때 앗수르 왕은 라기스에서 가까운 립나(블레셋의 도시)를 치고 있던 왕과 합류 합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은 이집트의 군대를 이끄는 구스인 디르하가가 앗수르와 싸우러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앗수르 왕의 입장에서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군사력과 군수품을 얻는 것이 더 급해졌습니다. 이에 다시 신하들을 예루살렘에 다시 보내어 하나님을 신뢰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모든 나라의 신들에게 어떻게 앗수르 왕이 행했는지 돌아 보라고 합니다.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 살고 있는 에덴 족속들을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그들의 신을 의지 했지만 결국 다 망했다고 합니다(8-13).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왕의 신하들에게서 그 편지를 받고 다시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그편지를 펴 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은 그룹 사이에 계신 분이라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룹은 천사의 한 종류입니다. 하나님은 천상적인 존재의 찬송을 받고 그들을 종으로 부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성전에 임재해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 지성소에 있는 법궤입니다. 그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고백하듯이 하늘과 땅의 유일한 분이시고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하는 다른 우상과 달리 귀 기울여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고백하며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렇게해서 하나님께서 만군의 하나님이심을 모두가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14-20). 하나님은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을 이사야를 통해서 주십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기도한 것을 알고 계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그 하나님을 조롱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을 책망하시며 그의 군사력을 믿고 하나님을 조롱했음을 지적하십니다. 앗수르 왕이 다른 나라를 치고 승리를 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하나님께 대해서 분노하고 오만하게 행한 앗수르 왕의 코에 갈고리를 꿰어 다시 오던 길로 돌려 보낼 것이라고 합니다(21-29). 이사야는 그 징조로 포위된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밭에서 난 것을 먹고 다시 심고 거두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남은 자들, 곧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 맺는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그것을 이룰 것이라고 합니다

(30-35). 그분의 열심은 전능한 능력입니다. 이 말씀 후에 정말로 하나님의 천사가 앗수르 군대가 주둔 하고 있는 곳에 가서 칩니다. 십 팔만 오천명이 자다가 죽게 됩니다. 이에 산헤립은 앗수르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그의 신에게 경배할 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36-38). 우상에게 경배할 때 죽은 것은 그 우상이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우상과 달리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또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이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하지만 기도하면 무조건 들어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요청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향하고 그분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살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열심으로 그 기도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18일 (목요일) 이사야 36장

오늘 말씀은 이사야서 중심부에 있으면서 앞에서 보았던 아하스가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는 것과 대조적으로(사7장)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역사적인 장면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들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실제로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은 유다의 많은 도시들을 쳐서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그리고 그의 군대 장관 랍사게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항복을 요구합니다. 당시 유다의 서열 2위에 해당하는 엘리아 김과 그 밑에 있는 서기관 셉나, 그리고 사관 요아가 랍사게를 맞이 합니다. 랍사게는 대왕 앗수르 왕이라고 하면서 왕의 말을 전합니다. 내용은 그에게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애굽을 의지한다고 해도 상한 갈대와 같이 부러져 손만 다치게 할 뿐이라고 합니다. 또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히스기야 왕이 말한다면, 이렇게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이 하나님께서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랬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히스기야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사용 하셔서 북 이스라엘을 치셨지만, 유다를 쳐서 예루살렘을 정복하도록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1-10).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아람어로 말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유다 언어로 그것을 듣고 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더 크게 유다 언어로 말합니다. 랍사게는 포위가 오래 되었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대변과 소변을 먹게 될 것이라고 백성에게 위협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를 믿지 말라고 합니다. 결코 앗수르 왕에게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하자고 말할지라도 듣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의 신들 중에서 앗수르의 왕의 손에서 건진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도 결코 그 백성을 건질 수 없을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소리칩니다(11-20). 이에 히스기야의 신하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원통함의 표현인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가서 랍사게의 말을 전합니다(21-22). 

 

유다 백성들은 실제적인 위협 가운데 있습니다. 굉장히 불리한 가운데 있고 심지어 랍사게가 한 말은 다 현실적으로 매우 사실적이고 논리적이기도 합니다. 다른 신들은 모두 앗수르 왕이 이끄는 군대에서 그 백성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랍사게의 말은 오늘날에도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인 어려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신들과 똑같이 무능한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세상의 방법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그치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세상은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며 말합니다. 이런 위협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제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과 달리 살아 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면초가의 순간에도 우리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굳게 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17일 (수요일) 이사야 35장


어제 말씀에서 심판과 무서운 언어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했다면, 오늘 말씀에서는 밝은 언어들과 희망에 찬 언어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후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회복을 주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한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나게 되고, 레바논의 기름진 땅과 풍성한 숲과 같이 회복될 것입니다. 또 과수원을 의미하는 갈멜과 평야 지대를 가리키는 사론의 회복은 풍요로움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사역을 통해서 그분의 풍성함과 영광과 아름다움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2). 이 구원의 메시지는 약한 손을 강하게, 떨리는 무릎을 굳게, 겁내는 자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하나님께서 보복하시는 날에 그들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되게 구원을 베푸시는 때에 맹인이 보게 되고,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되고, 저는 자는 걷게 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광야에서 물이 나고,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되고, 늑대가 눕던 황무지 같은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나는 회복의 땅이 될 것이 때문이라고 합니다(3-7). 이것은 당시에 죄와 저주의 현상으로 부정하게 여겨지던 사람들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한 대로가 있어서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들 만이 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사나운 짐승도 없고 노래하며 시온으로 가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8-10). 

 

이 회복의 때는 역사적으로 앗수르의 위협을 받던 유다 백성의 절망적인 상황이 극적으로 바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말씀은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억압하고 있는 사탄을 물리치시고 건져 주실 구원의 날을 내다봅니다.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눈 먼 자, 저는 자, 귀머거리 들을 고치셔서 당신께서 오늘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죄와 사망의 증상이 병을 치료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말씀은 마지막 날에 새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기쁨으로 모일 날을 내다 봅니다. 그 때에는 오직 구원 받은 성도들만 거룩한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 새 예루살렘으로 나아가고 그 곳에서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이 세상을 살면서 회복된 날을 누리고 이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손을 강하게 하고 힘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황무지와 같이 메마른 우리 영혼을 기름진 땅으로 회복하셨다는 것과 우리를 거룩한 길로 걷게 하신다는 사실이 우리를 회복케합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용기를 내시고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를 영원한 기쁨의 안식으로 인도하실 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16일 (화요일) 이사야 34장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대적한 모든 나라를 향해 진노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던 백성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진노가 얼마나 강렬한 지, 하늘이 접히고 하늘의 만상, 곧 해와 달과 별들이 포도나무 잎이 떨어지듯이 떨어질 것입니다(1-4). 이것은 주로 해와 달과 별로 비유되는 지도자들과 권세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5절에 등장하는 에돔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민족들과 세력의 대표를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칼은 에돔의 수도 보스라에도 미칩니다. 보스라는 고지대에 있는 도시로 난공불락의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곳을 치셔서 큰 살육이 있을 것입니다. 이 살육은 희생제사의 장면과 연결시킵니다. 희생제사를 위해 제물을 잡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섬뜩합니다. 왜냐하면 본래 죄 지은 본인이 동물의 섬뜩한 죽음과 같은 죽음을 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희생 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이런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에돔의 시냇물은 모두 기름으로 변하여 마시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곳에 불이 붙어 꺼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티끌은 화약의 주원료인 유황이 되어서 함께 뜨거운 불을 영원히 만들어 내어 완전히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지나는 사람은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6-10). 주로 황무지에 서식하는 당아새와 고슴도치와 부엉이와 까마귀만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곳을 다시 재건하려고 시도를 할지라도 결국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고, 성벽은 버려져 엉겅퀴가 자라 늑대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뿐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11-15). 

16절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대로 빠진 것이 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의도하신대로 그대로 될 것입니다. 제비를 뽑고 손으로 줄을 띠어 땅을 나누어 주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7). 

 

하나님은 온 역사를 주관하시며 모든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시고 그분의 기준에 따라 심판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시 강대국이던 앗수르나 이집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십니다. 이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거절하고 강대국을 의지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대국들도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날에 이 둘 모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바베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예언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세상 끝날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심판대 앞에서 모든 자들을 세우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던 자들과 자신이나 다른 것을 의지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때 어려움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던 자들을 위로하시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모든 세력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우리를 회복시키고 위로해 주시고 인정해 주실 하나님을 소망합시다. 그래서 이 땅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소망을 두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15일 (월요일) 이사야 33장

계속해서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구원에 관해 말씀합니다. 학대하고 속이는 강대국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분명히 화가 내릴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선지자는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합니다(1-3). 선지자는 ‘우리’라고 하면서 그가 속한 공동체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간구하고, 하나님께서 일어 나실 때 적들은 놀라 소동을 벌이며 흩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던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정의와 공의가 시온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4-5). 예루살렘의 지속적인 평안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때문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보배입니다(6). 어려운 날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할 때 하나님은 평안과 기쁨과 풍성함을 허락하십니다. 

비록 그 상황은 상당히 불리해 보일지 모릅니다. 용사들을 성문 밖에 소리치고 있으며 평화의 조약도 깨어졌고, 다른 나라들은 이미 그 나라에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어나십니다. 그분은 지극히 높으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7-10).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강대국은 지푸라기와 같이 무너지고, 쉽게 불에 살라 질 것입니다. 먼 데 있는 강력한 나라의 주민들과 하나님을 떠난 시온의 죄인들은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역사를 듣고 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타는 불과 같이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공의롭게 행하며, 정직하게 말하며, 억지로 빼앗은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뇌물을 받지 않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곧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높은 곳에 거하고 견고한 바위가 그들의 요새가 될 것입니다(7-16). 이어 새로운 왕이 등장하는데, 이는 심판의 시대가 끝나고 구원의 새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17). 예루살렘에 대해서 악한 계획을 꾸미던 자들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말이 어려운 백성은 앗수르 사람을 의미합니다. 앗수르의 강력한 통치로 예루살렘에 군대가 주둔하며 세금을 바치도록 공세를 계량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 사람들은 다시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영원히 그 백성과 함께 거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왕이 되셔서 다스리는 나라가 세워지고 병력을 싣고 나르던 배도 필요 없어 집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홀로 전쟁을 수행하시고, 전리품을 거두도록 하십니다. 그 때에는 아무리 힘이 없고 연약한 다리 저는 자라고 할지라도 전리품을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17-24).

 

이 일은 가깝게는 예루살렘을 둘러 진치고 협박했던 앗수르 왕의 병력이 하루 아침에 송장이 된 일을 가리킵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서 죄와 죽음을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정복하시고 하늘에서 다스리고 계심을 내다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새 예루살렘에서 참된 성전과 왕이 되시는 것을 내다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붙들고 계시며, 참된 왕으로서 그의 백성인 우리가 죄와 사망의 종 노릇하지 않으시도록 보호하시고 계십니다. 때로 죄와 죽음, 불안한 미래와 슬픔과 어려움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하나님을 신실하게 붙드는 자에게 참된 위로와 평안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일생을 눈 앞에 있는 어려움이 아니라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용기를 얻고 소망을 가지고 이겨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1월 14일 (주일) 이사야 32장

오늘 말씀에서는 한 왕이 와서 공의로 유다를 다스릴 것을 예언합니다. 그 왕은 공의로 다스리기에 그를 섬기는 고위 관리들도 정의를 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왕과 관리들은 백성들의 피난처가 될 것입니다. 눈이 있어서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던 자들이 이제 모든 것을 제대로 보고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조급한 자들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말이 어눌한 사람도 제대로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이 왕이 다스리기 전과 완전히 다른 상황입니다. 백성들이 제대로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선지자가 제대로 보고, 관리들은 지식으로 다스리는 제대로 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또 어리석은 자를 지혜 있다고 하지 않고 제대로 된 공정한 재판이 진행되며 악한 자들은 악한 일을, 존귀한 자들은 존귀한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1-8). 이에 안일한 여자들로 비유되는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경고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경고에도 염려 없이 살아가는 자들은 일 년 뒤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낸 것 같이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온갖 좋은 것들은 결국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풍성한 곡식과 포도를 내던 밭과 포도원은 가시와 찔레가 나고 잔치로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던 성읍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궁전은 폐하게 되고 인구가 많던 성읍이 적막하게 되고 예루살렘 성전 남쪽에 있는 언덕인 오벨은 들짐승이 굴을 파고 사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늘에서 영이 부어지는 것입니다(9-15). 하나님의 영이 황폐했던 곳을 아름답고 생명력이 풍성한 곳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정의와 공의가 그 땅에 실행되고 화평과 평안, 안전이 예루살렘에 임할 것입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울창한 숲은 하나님이 보낸 우박에 상하고 파괴될 것입니다. 외부로부터 위협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소와 나귀를 평안 가운데 기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16-20).

 

본문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왕은 하나님을 의지했던 히스기야 왕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공의와 정의로 판단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원수 사탄과 그의 나라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이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은 지금도 죄와 죽음으로 황폐한 삶을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을 모으십니다. 또 성령님은 신자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며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시고 황폐한 영혼을 소생케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우둔한 자와 미련한 자와 보지 못하는 자를 제대로 보게 하시고 지혜롭게 하십니다. 왕으로서 예수님은 여전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고 다스리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황폐하고 낙심 될 때 그 문제는 다른 것을 의지함으로 해결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셔야 해결이 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 회복과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회복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회복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주시고 마음을 풍족하게 하시며, 우리의 삶을 더욱 거룩하게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아멘.


1월 13일 (토요일) 이사야 31장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애굽에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갑니다. 그들은 자신보다 강해 보이고 군사력이 강력한 나라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1).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고 악행하는 자들을 치실 것입니다. 애굽도 하나님의 손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2-3). 하나님은 강한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물고 있을 때 많은 목자들에 둘러 쌓여 있어도 놀라지 않고 도망하지 않는 것 같이 강한 의지와 능력으로 반드시 애굽과 앗수르와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예루살렘을 보호하신다고 합니다. 새가 날개를 치며 그 새끼를 보호 하는 것 같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선지자는 그들이 배반한 하나님, 심히 거역했던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4-6). 하나님께서 정한 날에 그들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섬기던 금, 은 우상을 던져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앗수르는 칼에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칼 때문입니다.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망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우연이 아닙니다. 군인들은 사로 잡혀 강제노역을 하고, 앗수르의 반석, 곧 왕은 두려워 도망하고 고위 공직자들은 예루살렘의 깃발이신 하나님을 보고 도망할 것입니다(출17:15). 여호와의 불과 풀무는 성전과 제단으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킵니다(7-9).  

 

오늘 말씀에서 이사야는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그들이 심히 거역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합니다. 이전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진노의 자녀로 살았지만,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살길 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과 사람, 현실적인 대안을 하나님보다 우선할 때, 그래서 우리의 소망과 위로를 그것에 둘 때 우리는 실망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의지했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만 사랑하고 그분께만 소망을 두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참된 평안과 위로와 하나님의 해결책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1월 12일 (금요일) 이사야 30장

오늘 말씀에서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 더욱 분명하게 선포됩니다. 유다는 참된 아버지이신 하나님를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는 계획을 꾸미는 패역한 자식들로 불립니다. 비록 유다가 강대국인 애굽(이집트)를 의지하지만 결국 그 이집트를 의지한 것이 그들의 수치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이 유다를 돕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5). 6절에 나오는 ‘네겝의 짐승’은 ‘남쪽의 짐승’이라는 뜻으로 애굽으로 보화와 짐을 나귀에 싣고 가는 유다의 지도자를 상징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이 다시 애굽으로 어렵게 광야를 지나 도움을 구하러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국 도움을 받지 못하고 도움이 무익하게 될 것입니다(6-7). 그들은 애굽을 의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견자(이상이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는 자, 선지자와 같은 역할을 함)와 선지자의 말을 거부함으로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나라를 무너뜨릴 것입니다(8-14). 그들은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고 신뢰해야 했지만 빠른 말을 타고 도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쫓는 자들이 더 빨라서 그들을 따라잡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 공격하면 천 사람이 도망하고, 다섯 명이 공격하면 모두가 달아날 만큼 비교가 안되게 강력한 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남은 자는 위태 위태하게 홀로 산 위에 꽂혀 있는 깃발과 같을 것입니다(15-1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백성들도 불쌍히 여기셔서 기다리십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기다리시고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 자리에 일어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거부하던 백성들 조차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은혜와 긍휼로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이 됩니다. 비록 최소한의 음식과 물 밖에 없지만 하나님과 관계만큼은 회복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스승(성령 하나님) 때문에 그 스승이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그들의 우상을 몰아냅니다(18-22). 하나님은 또한 물질적으로 다시 풍성하게 하시고 심판 후에 폐허 된 곳에서 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상처를 싸매시고 고치시는 날이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그날은 매우 밝은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은 1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치시고 망하게 하심으로 잡혀간 백성들과 앗수르에 억압 당한 백성들이 회복되는 날입니다(23-33). 동시에 궁극적으로 그 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의 모든 날이며, 다시 오셔서 완성될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멀리 떠난 백성들을 기다리시고 고쳐주시고 회복을 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입니다. 십자가에 성자 하나님을 죄인들을 대신해 못박혀 죽게 하심으로 이전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싸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고치시고, 싸매시고, 회복을 주시고, 은혜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서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날마다 우리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 받고 고침 받고 하나님만 신뢰함으로 참되게 회복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11일 (목요일) 이사야 29장

오늘 말씀에서 등장하는 ‘아리엘’은 ‘하나님의 제단’이라는 뜻으로 제단이 있는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제물이 제단에서 불타듯이 불타버릴 예루살렘을 에언하고 있습니다(1-4). 하지만 아리엘을 치는 무리는 더 강하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말씀 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에 대해서 주변 강대국을 통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강대국이 교만하여 역시 하나님을 섬기지 않기에 그들 또한 심판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는 강대국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겠으나 그들 또한 망하게 될 것이기에 그 승리는 마치 꿈에서 먹고 마신 것이 깨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허망할 것입니다(5-8). 

 

유다가 망하게 되는 이유는 맹인도 아니고 취하지도 않은 그들의 영적, 정치적 지도자들이 맹인과 취한 자와 같이 보지 못하고 비틀거려 제대로 된 말씀을 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계시가 봉인된 책과 같이 읽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셔도 듣지 않고, 그들이 좋을 대로 해석하고 또 때로는 거짓 선지자들이 말하는 좋은 말만 들은 것을 의미합니다(9-12. 참고 렘26:8).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백성들은 입으로만 하나님을 공경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는 드리지만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들 것입니다(9-14).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 계획(주변 나라들과 동맹)을 하나님 몰래 하려고 하는 지도자들을 책망합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보다 그들의 계획과 주변 나라를 의지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이었습니다. 만들어진 물건이 감히 만든 사람의 능력이 자신의 능력보다 못하다고 여긴 것과 같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전능하신 창조주의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지금 황폐한 레바논이 기름진 밭이 되고, 나중에 숲이 될 것이고 귀머거리도 하나님의 말씀의 책을 듣고 맹인도 읽게 될 것입니다. 겸손한 자가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이 더하고 가난한 자가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율법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오만한 자가 없어지고 죄악의 기회를 보던 자들도 사라질 것입니다. 이들은 재판을 정직하게 하지 않은 악한 자들입니다(15-21). 아브라함을 구원하시고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고 백성을 삼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 야곱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회복된 야곱은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마음이 흐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도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22-24).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날’이 되면 이 모든 말씀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것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심판과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심판을 통해서 오만한 지도자들과 악한 자들을 정리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지도자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몰래 계획을 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실패할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했던 애굽은 배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계획은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굳건하게 섭니다. 입술은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배는 드리고 말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지만, 위기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자신의 계획을 앞세웠습니다. 현실적인 대안을 가장 먼저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막상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에 대해 계획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고려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묻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뜻을 살필 때, 하나님께서는 황폐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며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 앞에 쉽지 않아 보이는 일이 있을 때, 우리 생각과 계획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그분을 의지합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과 기도로 인도함을 받으며 담대하게 한 걸음 한 걸음 헤쳐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10일 (수요일) 이사야 28장

오늘 말씀은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에 대한 경고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다름 아니라 지도자들입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입니다. 그들은 교만하여 어려울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강대국을 의지했습니다. 그들은 부와 권력을 가지고 오만과 사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지만 결국 그들의 화려한 면류관은 하나님께서 정한 날이 되면 살짝만 흔들면 떨어지는 처음 익은 무화과 열매와 같을 것입니다(1-4). 하나님은 그날에 남은 자들로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쓰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재판장이 되어서 잘못되게 판결하는 지도자들을 책망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의 방편인 환상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경고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술에 취해 반복적인 말을 하며 예언하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흉내내며 조롱하는 말을 합니다. 또 그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앗수르인들의 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앗수르 사람들에 의해 망할 것임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더듬는 입술과 다른 나라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이사야를 통해서 곤비한 자들에게 안식을 주면 그들도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5-13). 

 

남유다도 북이스라엘과 같이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오만하면 망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에 그들이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약속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하나님께 신실할 때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이 악하게 살아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험하는 돌을 둘 것입니다. 그 돌로 시험하여 약속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믿지 않는 자는 넘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정의와 공의(율법 준수)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무사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유다 백성은 아침마다 죽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애굽의 도움은 짧은 침대와 이불같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14-20). 유다가 살 길은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돌아가서 그분의 자비로움에 호소하는 것 뿐입니다. 오만함을 버리고 성실하게 언약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21-22). 

씨를 뿌리기 위해서 땅을 가는 사람은 땅을 다 갈면 씨를 뿌려야 합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윗의 영원한 보좌를 주신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삶을 통해서 다른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그들을 부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되게 언약을 이해해고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농사법대로 농사를 하여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 같이 구원 받은 백성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삶의 법으로 살아가는 것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23-29).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싫어하면서 천국은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단지 개인의 구원만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한 것임을 자주 잊습니다. 구원을 얻은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삷의 방식이 따라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구원 얻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의 요구대로 살아가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9일 (화요일) 이사야 27장

오늘 말씀은 포도원의 새 노래입니다. 5장에서 부른 포도원의 노래가 이스라엘의 심판에 관한 것이라면, 오늘 말씀은 회복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전설의 용으로 불리는 리워야단을 하나님께서 치실 것입니다. 리워야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대적인 세력이나 강대국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포도원의 주인이 되어 가꾸십니다. 포도원에 있는 가시와 질레는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강대국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강대국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심판하셨지만, 하나님을 반역하는 강대국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아무도 이제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강대국도 하나님과 화친을 하든지 대적하여 망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은 뿌리가 굳어져 튼튼하게 자랄 것입니다(1-6). 비록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치시지만, 그 치는 것은 이스라엘을 공격한 이방 민족들을 치시는 것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훈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아끼시며 적당하게 견책하십니다. 이 견책은 잠시 땅이 황폐하게 되고 이방 민족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견책을 통해서 그들은 그들이 섬기던 우상이 무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반면 심판의 도구로 사용했던 앗수르는 하나님을 아는 지각이 없고, 그분을 거부하기에 하나님도 더 이상 앗수르를 옹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곳곳에서 다시 불러모으시고 나팔을 불 때 애굽과 앗수르로 쫓겨났던 하나님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다시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7-13). 

 

본문에서 말하는 ‘그 날’은 가깝게는 앗수르가 망하는 날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는 날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십자가의 날과 옛 뱀, 리워야단을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마지막 날을 뜻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오늘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계20:2).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모으실 것입니다. 온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당신의 백성을 포도원과 같이 돌보시고 때로 적당히 견책하시며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그 견책이 가혹하지 않고 긍휼로 행하십니다. 그렇게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며 새 노래를 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어떠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심을 기억하고 흔들리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8일 (월요일) 이사야 26장

오늘 말씀은 구원의 날에 유다가 부를 승리의 노래입니다. 그 날에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줄 성읍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성읍에는 믿음을 확고하게 붙드는 나라만이 들어옵니다.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평강으로 인도하십니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붙들며 사는 것이 참된 길입니다. 정직하신 하나님께서 정직한 백성을 돌보십니다(1-7). 신실하신 하나님은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시는 분이심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노래가 이어집니다. 주님을 사모하여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악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만 누리려고 하지 하나님을 알고 배우고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배우고 그분께만 소망을 두는 백성들과 대조가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신실한 백성을 위한 열정을 볼 때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그 백성은 구원하시고 주의 대적은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이전에는 다른 신을 의지하였지만, 그 신들의 무능함을 보고 돌이켜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분의 이름만 부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은 더 큰 영광을 얻으십니다. 이 백성들은 환란 중에 있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비록 그들은 임신하고 아기를 낳지 못하는, 실망스럽고 허무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죽은 것 같은, 폐허가 된 이스라엘 땅과 백성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회복을 주실 것을 노래합니다(8-19).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과 심판을 통해 겪게 된 고통스러운 순간들은 결국 지나 갈 것입니다. 잠깐이면 지나갑니다.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는 앗수르 사람들을 모두 치신 후에 잠깐 후면 다시 회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는 심지가 곧은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을 확고하게 붙드는 백성들을 반드시 평강으로 인도하시고 회복을 주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기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허무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응답하시고 평강을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붙들어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이 주시는 평강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7일 (주일) 이사야 25장

오늘 말씀에서 선지자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말씀하신 것 같이 행하심이 노래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열방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강대국을 망하게 하심으로 심판 가운데 있던 유다와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또한 강대국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드시며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빈궁한 자들의 피난처가 되시고 가난한 자의 요새와 뜨거운 태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실 것입니다(1-5). 하나님께서는 ‘이 산’ 곧 예루살렘에서 모든 사람을 위해 잔치를 베푸실 것이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입니다.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며 수치를 제하여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6-8).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날에는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끝까지 신뢰하고 따른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9). 그분을 인내하며 기다린 백성에게 분명하게 구원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 할 것입니다. 반면에 교만하여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던 모압과 같은 자들은 그들의 뛰어난 기술과 능력을 가지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누르실 것입니다. 또 높은 성벽과 같이 자기를 방어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성벽을 무너뜨릴 것입니다(9-12). 

 

열방의 강한 나라의 압제를 받던 이스라엘이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이는 1차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포로 귀환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사탄의 권세에서 건지시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분이 바로 오늘 말씀을 성취하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진정으로 사망을 영원히 멸하셨습니다. 구원 받은 백성은 마땅히 그 구원을 즐거워하며 기뻐하고 그분이차려 주시는 잔치를 소망으로 기다립니다. 성찬은 이 소망을 반드시 실현된다는 보여주는 약속의 보증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고 성찬에 믿음으로 참여하여 천국 잔치를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정하신 뜻을 반드시 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며 믿음의 길을 완주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6일 (토요일) 이사야 24장

23장까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을 예언했다면 24장에서 27장까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회복이 더욱 자세하게 예언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 완전히 황폐하게 될 것임이 예언됩니다. 그 땅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셨던 땅입니다. 이렇게 그 땅이 황폐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과 맺은 영원한 언약을 파기 했기 때문입니다(1-5). 때문에 언약적인 저주가 이스라엘 땅에 내려지는 것입니다. 포도의 수확이 없이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그치며 더이상 잔치의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곳에는 이제 앗수르인들이 거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일은 복잡한 국제적인 정세 속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통제아래 일어나고 있습니다(6-13).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떠나서 흩어져 동방(앗수르)로 잡혀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앗수르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망하게 되고 앗수르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앗수르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기뻐 노래할 것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노래할수 없습니다. 여전히 이사야가 있는 예루살렘에는 배신자들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앗수르 군대가 주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다시 임하여 하나님께서 그가 정하신 날에 높은 데에서(예루살렘) 높은 군대(앗수르)를 멸하심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14-23).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치시고, 이스라엘을 배신한 장로들 앞에서 친히 왕이 되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이에 언약적인 저주가 임합니다. 그 저주의 결과로 땅은 황폐해지고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에 주둔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하시고 이스라엘의 왕 되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언약적인 저주를 내리신 것에도 잘 드러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언약적 저주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정화하고 다시 회복하게 하십니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 벌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회복케 하시고 죄를 미워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언약적인 저주와 심판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지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훈계와 교훈과 거룩한 삶을 위한 징계를 때때로 주십니다. 때로 하나님의 징계로 느껴지는 것이 있을 때 회개하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약속에 신실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5일 (금요일) 이사야 23장

오늘 말씀은 두로에 관한 경고입니다(1). 두로는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로, 무역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바벨론이 메소포타미아 동부지역의 무역 경제 대국이라면, 두로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달한 서부지역의 무역 경제 대국이었습니다. 시돈도 두로보다 조금 북쪽에 위치한 도시로 두로보다는 작지만 역시 무역이 발달하고 무역상이 번성하던 곳입니다. 다시스(남부 스페인으로 추정)는 지중해 서쪽의 지역으로 두로와 교역했습니다. 서쪽의 문물을 다시스의 배들이 두로로 싣고 오면 두로에서 지금의 중동지역 내륙으로 들어오는 아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두로는 이집트의 곡물을 수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두로도 패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두로가 망하면 이집트의 풍성한 곡물들의 수출로가 막히게 됩니다. 때문에 오늘 말씀에서 ‘아들과 딸을 생산하지 못하고 양육하지 못하는 자 같이’된다고 합니다. 많은 곡식이 있지만 팔지 못하기 때문에 최악의 상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6). 두로는 기쁨의 성이라고 불릴 만큼 부요했습니다. 자기의 영향력을 해상 무역으로 먼 곳까지 뻗었습니다(7). 또 당시에 두로는 주변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고 식민지를 개척해서 왕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오늘 말씀에서 두로를 ‘면류관을 씌우던 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두로를 망하게 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8-9). 그 이유는 그들의 교만함입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부요함과 명예에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스를 두로의 손에서 벗어나 더 번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두로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시돈도 함께 망할 것입니다(10-12). 하지만 동시에 애굽에 대한 예언과 같이 두로가 회복될 날도 있을 것입니다. 심판의 때가 지나면 하나님은 두로의 옛 영광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칠십 년 동안 잊혀졌던 두로는 이 칠십 년이 차면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로는 다시 교만하게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무역을 통해서 다시 교만하여지고 우상 숭배를 할 것입니다. 70년의 기한이 두로에게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두로를 70년 뒤에 잠시 회복시킨 이유는 바로 성전 재건 때문입니다. 무너진 성전을 건축할 때 두로를 통해서 좋은 백향목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스3:7).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 두로를 잠깐 회복시키셨습니다. 

 

두로의 무역과 부요함은 주변 나라의 부러움을 샀을 것입니다. 중동 서부지역에 가장 번성하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로가 망하는 이유는 바로 그 번성함에서 오는 교만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합니다. 교만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순탄할 때 우리는 겸손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를 주시는 이유는 그것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부요함도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결국 당신의 나라의 유익을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요함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바르게 사용하며 그 어떤 것에도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어떤 것에도 교만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4일 (목요일) 이사야 22장

오늘 말씀은 ‘환상의 골짜기’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여기서 '환상의 골짜기'는 유다는 의미합니다. 4절에 ‘내 딸’이라는 표현과 8절에 ‘유다’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유다를 환상의 골짜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유다가 환상, 곧 하나님의 이상(계시)를 가지고 있지만 제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1절은 그렇게 소란하고 떠드는 성이 결국 망하게 될 것임을 경고합니다. 패망의 근본적인 원인은 전쟁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들이 망할 때 하나님은 심히 마음이 아프지만, 자신을 위로를 하려고 힘쓰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르고 계셨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백성에게 내리는 만군의 여호와께로 오는 징계였습니다(1-5). 그날에 엘람과 기르 사람으로 구성된 바벨론이 완전히 무장하고 골짜기에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병거를 가지고 오고 마병은 성문에서 정렬될 것입니다. 유다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이 하나 둘 무너질 때에 유다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됩니다(8). 그 때에야 병기로 모으고 성벽을 보수하려고 하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고, 옛적부터 경영하신 분을 공경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기를 뒤늦게 인식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벽을 재건하고 군사력을 다시 확인하여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군사적 유리한 위치와 군사력을 의지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그 날에 통곡하고 애곡하며 굵은 베를 띠고 회개하고 애통하라고 하셨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은 희망이 없으니 먹고 마시고 내일 죽자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용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9-14). 자신의 가진 것을 의지하는 것과 자포자기하는 것 모두 하나님을 의지하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에 국고와 왕궁을 맡은 셉나가 중심에 있습니다. 국고를 맡았다는 것은 당시에 왕 다음에 서열 2위에 해당합니다. 셉나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위한 묘실을 파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사용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셉나를 결박하여 힘쎈 장사 같이 세게 던지시겠다고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위기의 때에 자신의 명예와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이용한 셉나를 주인의 집에 수치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권력을 빼앗으시고 직위를 내려 놓게 하심으로 그가 원하던 영광은 수치로 바뀔 것입니다. 셉나 대신에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세우고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의 상징인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 위에 두겠다고 합니다. 왕의 최측근에서 막대한 임무를 맡기십니다. 그는 단단한 곳에 박힌 못과 같이 견고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심판의 날, 곧 바벨론이 오는 날에는 그도 삭은 못과 같이 되어 그를 의지하던 모든 집안 사람들도 화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15-25).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을 할 것을 우리에게 교훈 합니다. 유다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잔치와 즐거운 일에 마음을 빼앗겨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 것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우리가 좋아하는 일과 즐거워하는 일에 마음이 빼앗겨 말씀에 민감히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는지 돌아봅시다.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지 돌아봅시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분이 하나님이신지 돌아봅시다.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기쁨으로 누리면서 동시에 말씀에 항상 민감하게 반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3일 (수요일) 이사야 21장


오늘 말씀은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입니다. 여기서 해변 광야는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는 바벨론에 대한 혹독한 하나님의 심판을 묵시로 보았고 이제 그것을 기록합니다. 엘람과 메대는 바벨론과 때로는 동맹국으로, 때로는 적국으로 맞서기도 했던 나라입니다. 결국 이 두 나라를 중심으로 바벨론은 패망하여 바벨론이 만든 탄식 소리를 그치게 할 것입니다(1-2). 당시 유다 사람들은 앗수르와 맞서서 바벨론을 의지하고 바벨론이 그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바벨론도 패망하게 될 것을 미리 이사야는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패망할 뿐만 아니라 바벨론이 결국 유다를 망하게 할 것임을 보기에 고통스럽고 마음이 어지럽고 떨림이 됩니다. 바벨론은 파수꾼을 세워 두기만 하고 잔치를 베풀고 교만한 가운데 있다가 패망할 것입니다(3-5). 결국 파수꾼은 바벨론의 패망을 알리게 됩니다. 바벨론이 망하게 된 것을 전하는 것이 파수꾼의 의무가 될 것입니다. 특히 바벨론과 함께 그들이 섬기던 우상도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섬기던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조각한 신상들은 다 부셔졌습니다. 이렇게 바벨론의 패망을 알림으로 그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전하는 것은 파수꾼인 이사야의 사명이었습니다(3-10). 

이어서 두마에 관한 경고가 나오는데, 두마는 에돔을 의미합니다. 에돔을 표현하는 ‘세일’이 같은 구절에 나오기 때문에 두마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어도 이 예언이 에돔을 향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에돔은 이사야에게 “밤이 어떻게 되었냐”고 묻습니다. 전쟁과 패망의 위기 속에 있는 그들의 현실을 의미합니다. 선지자의 대답은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고 합니다. 곧 위기가 끝나지만 또 다시 어둠이 찾아 올 것이라고 합니다. 앗수르가 망하여 잠시 아침을 맞이하겠지만, 다시 바벨론이 그들을 괴롭히고 망하게 할 것입니다(11-12). 

또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도 나옵니다. 드단은 무역으로 부를 축척한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피해서 도망한 사람들에게 물과 음식을 공급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게달의 영광이 일년 안에 망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게달은 아라비아의 부유하고 힘 있는 베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그들은 강한 궁수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강한 궁수를 의지하고 피난민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1년 안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것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하면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강조합니다(13-17).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온 나라와 정세를 다스리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나라에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메시지는 한 가지 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온 세상의 주관자이시니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부의 축척과 방어할 수 있는 힘이나 군사력이 있다고해서 그것들이 스스로를 지켜준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참된 안전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하나님을 전할 파수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세상에 경종을 울려야 할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만 두고 그분의 통치를 이웃에게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2일 (화요일) 이사야 20장


오늘 말씀에서는 앞 장에서 언급된 구스와 애굽에 대한 심판이 역사적을 실현 될 것을 더욱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사야는 예언의 역사적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 정확한 연대를 기록합니다. 블레셋의 성읍 아스돗이 앗수르 왕 사르곤에게 반기를 들어 배반 했습니다. 이에 앗수르 왕은 군대장관 다르단을 보내어 블레셋을 완전히 패망케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벌거벗은 몸과 맨 발로 3년 동안 유다를 돌아다닐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행위 계시입니다. 선지자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사야가 벌거벗어 돌아다니는 행위는 애굽과 구스도 결국 앗수르에게 패망하여 이렇게 벌거벗은 채로 포로로 잡혀 갈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1-4). 그리고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자(유다)가 구스와 애굽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벌거벗은 몸으로 다니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이렇게 구스와 애굽이 망하게 되는 날 해변의 주민들, 곧 지중해를 끼고 있는 이스라엘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도 스스로 피할 수 없게 될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3년 동안 이사야를 통해서 미리 알려 주셨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5-6). 

 

하나님께서는 벗은 이사야를 통해서 그 계획의 확실성을 보여주십니다. 또 행위 계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도록 경고하시고 책망하시고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계획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도 확실합니다. 회개할 때 용서 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 하십니다.

 

날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만 의지할 때 우리는 삶 속에서 참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을 기억하고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1일 (월요일) 이사야 19장


오늘 말씀은 이집트에 관한 예언입니다. 먼저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을 치실 것입니다. 애굽은 여러 신을 섬기던 다신교 국가입니다. 곳곳에 우상이 있고 신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애굽을 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안에서 내전이 일어나게 하시고 또 외부로부터 공격이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을 의지할 것입니다(1-3). 끝내 하나님은 애굽 왕을 잔인한 주인으로 묘사되는 앗수르 왕 에살핫돈에게 넘길 것입니다(4). 애굽은 예로부터 바다와 나일 강을 끼고 있는 매우 풍족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는 바닷물이 없어지고 강물이 마르고 갈대와 부들(갈대의 일종)이 시들 것입니다. 강을 끼고 푸른 초장과 곡식 밭이 없어지고 물고기를 잡으며 먹고 살던 어부가 탄식할 것입니다. 그물을 치는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풍요로움, 우상이 주고 있다고 여겼던 모든 풍요로움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5-10). 그 원인은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입니다. 소안은 고대 애굽의 초기 수도였고, 놉은 최초의 통일 이집트의 수도였습니다. 그곳에서 현자들, 왕의 조언자들이 제시한 우상숭배의 방법은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현자들이 제시하는 것마다 이루어지지 않으며 끝내 그들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계획이었습니다(11-17). 이는 애굽나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신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사람이 만든 우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애굽의 패망 후에 하나님을 섬기고 회복되는 메시지를 함께 주십니다. 18절에서 애굽은 이미 가나안의 언어(이스라엘의 언어)를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섬기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기로 한 다섯 도시(높, 믹돌, 다바네스, 바드로스, 장망성. 참고 예레미야 44:1)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하나는 배반을 하여 멸망의 성읍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에 애굽의 중앙에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여호와께서 부르짖고 그들에게 응답하여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들을 건지시고 보호하시며 앗수르와 애굽, 그리고 이스라엘 모두에게 세계 가운데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실 것입니다(18-25).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대적이었던 이집트와 앗수르도 복의 통로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열방은 심판하시지만, 그 심판을 통해서 신앙을 고백하는 성읍들을 세우시고 복의 통로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 일은 유다에 있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선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전하지 않으면 모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도저히 믿을 것 같이 않아 보이는 사람도 복음으로 변화시켜 복의 통로가 되게 만드십니다. 그 일은 먼저 믿은 자가 복의 통로가 되어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납니다. 올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모두가 복의 통로가 되길 바랍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 동료, 친구들에게 복음을 말과 삶으로 전하기 바랍니다. 도저히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도 말씀으로 변화시키시고 당신의 백성을 삼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한 해를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31일 (주일) 이사야 18장

오늘 말씀은 구스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스는 나일 강 상류, 혹은 나일 강 건너편에 있던 이집트의 이웃나라입니다. 그곳은 곤충이 많아 곤충의 날개치는 소리가 매우 컸던 곳입니다. 또 갈대로 만든 배를 통해서 강을 따라 왕성하게 무역을 하던 민족이었습니다(1-2). 그래서 곤충 날개처럼 소리를 낸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누비아 왕국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오늘날 수단입니다. 이들은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으로 알려진 이집트로 사절단을 보내어 그들과 동맹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동맹에 유다도 가입시키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라고 합니다.  이 일은 히스기야 왕이 다스릴 때 일어났습니다(왕하18:7). 히스기야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앗수르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앗수르의 위협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그들의 군사력을 의지하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당시 구스는 이집트를 지배할 만큼 강력한 왕국이었지만 하나님은 결국 전쟁의 군대를 모으는 깃발을 산 위에서 세우시고 열방을 심판하는 전쟁의 날을 준비하십니다(3). 이스라엘을 둘러싼 열방의 전쟁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용히 그들의 행위를 지켜본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4).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속적으로 위협이 되었던 강력한 나라들을 치시고 결국 열방들이 예물을 가지고 시온 산에 나아오도록 만드실 것입니다(5-7). 강대국에 대한 심판은 그들에게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인지 보여주시는 계시의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와 구스를 포함하는 세상의 모든 강한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유다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을 알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복잡한 동맹 관계에 의존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위기 가운데 올바른 처신입니다. 강력하게 부상하던 구스와 이집트도 결국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인 예루살렘으로 조공을 바치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적인 의미에서 복음이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을 내다 봅니다. 마침내 복음으로 정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 모든 민족과 나라들은 하나님께 나올 수 있고, 복음에 설득되어 그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는 이미 하나님의 것입니다. 최후의 날에 모든 열방과 민족과 방언들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올 것입니다. 그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진정한 피난처와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과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교회를 복음으로 변화시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30일 (토요일) 이사야 17장

다메섹(다마스쿠스)은 아람(시리아)의 수도이며 북 이스라엘 위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다메섹에 관한 경고입니다. 배경은 점점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앗수르에 대항하여 아람과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있던 상황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지리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아람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아람의 수도)과 에브라임(북이스라엘의 강력한 지파)이 함께 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메섹과 이스라엘의 성읍들은 무너질 것입니다(1-3). 이를 통해서 아람과 이스라엘은 옛 영광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추수 때에 남은 이삭도 싹 다 주어간 것 같이 남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4-5).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서 겨우 남은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나무가지 끝에 달린 몇 안되는 열매와 같이 위태위태하게, 하지만 그대로 그 나무에 붙어 있을 것입니다. 앗수르가 침공하여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남은 사람들은 아세라와 바알(태양신)을 섬기는 것에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6-8). 앗수르가 침공하는 그 날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했는데, 그들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잊고 자기들이 기뻐하는 나무를 심었고, 심지어 이방인들이 섬기는 나무, 곧 나무로 만든 우상을 섬기고 이방 문화들을 즐긴 것입니다. 그 결과 나무를 잘 심어서 잘 가꾸려고 해도 결국 근심과 슬픔의 날이 이를 것이고 농작물도 없어질 것입니다(9-11). 하나님이 없는 열심은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을 것입니다. 

 

12-14절은 열방에 관한 경고입니다. 열방(all nations)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향해 반기를 듭니다. 그들은 소리치며 바다 파도가 치는 소리 같이 소동을 일으키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꾸짖으시고 그들은 멀리 도망하게 되는 것이 겨가 바람에 날리는 것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저녁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지만 다음 날 아침에 그 공포는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는 자들이 받을 몫(댓가)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것을 빼앗은 사람들의 결과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저항하는 사람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극명하게 대조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신뢰하지 않고 살아갈 때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남은 자들이 있고,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십니다. 우리 삶의 상황은 하나님이 아닌 돈이나, 지위, 관계, 지식 등 다른 것을 의지하도록 지속적으로 유혹합니다. 이런것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할 도구들이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에 목적이나 의지할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의지할 때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이 원하는 선택을 할 때, 때로 어리석어 보이나 결국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서 도우시며, 둘러싸고 있는 위협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열방을 다스리시고 그분의 백성을 붙드시는 우리 하나님만을 붙들고 많은 도전들 속에서도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아멘. 


12월 29일 (금요일) 이사야 16장

모압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해 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회복으로 초청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모압이 회복될 수 있는 방법은 ‘이 땅(유다)’의 왕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는 것입니다. 양들은 유다 왕에게 드리는 조공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릴 제사의 제물을 의미합니다. 모압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에게 가서 그 공동체에 속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지금 모압의 여인들은 가장 남쪽 지역인 아르논 나루에서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찾는 어린 새와 같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여 모압의 지도자들은 공의를 베풀고 나중에 그들에게로 피하는 자들에게 똑같이 피난처의 장소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압의 입장에서 유다는 그들과 똑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고, 하나님의 심판을 똑같이 유다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별로 희망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언젠가 회복이 되고 재건이 될 것입니다.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께서 세우실 왕을 통해서 새롭게 세워질 것입니다(1-5). 오늘날로 따지면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믿지 않은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똑같이 어려움을 당한다고 그들의 결말이 세상과 똑같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어려움을 당하고 힘이 없어 보이고, 별 볼일 없어 보일 때에도 이 땅의 유일한 희망은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신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모압이 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교만하고 심히 교만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것을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6). 그 결말이 너무 뻔하기 때문에 선지자는 애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건포도 떡은 당시 모압의 특산품이자 우상에게 바치는 제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더이상이 포도를 수확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우상에게 바칠 제물도 없어질 것입니다. 최고의 포도 수확을 자랑하던 곳도 황폐하여 이전에 누렸던 수확의 즐거움이 열국의 침략으로 없어질 것입니다. 모압의 대표적인 부유한 지역 십마, 헤스본, 야셀, 엘르알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그들의 신의 산당에 찾아가 피곤하도록 봉사하고 기도할지라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경고를 하셨고 이제 삼 년 안에 선지자 이사야가 전한 메시지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망하기 전에 이렇게 미리 경고와 초청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것은 그들이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용서하심을 암시하고 있습니다(7-14). 

 

이 땅의 교회가 아무리 약해 보이고,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고, 그 공동체 안으로 돌아옴을 통해서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이자 예수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로 불러 모으심으로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혼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편하고, 교회 공동체 속에 부조리와 불합리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으며, 교회를 다녀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삶의 형편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교회로 지속적으로 부르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말씀을 기록하여 놓으시고,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은 결국 심판 당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주일 예배를 통해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세상에 지속적으로 경고와 초청과 회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회복을 경험합시다. 또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초청에 응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주변에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28일 (목요일) 이사야 15장


오늘 말씀에서는 모압에 관한 심판을 선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큰 딸의 후손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친척 민족입니다. 지리적으로도 가깝습니다. 하지만 출애굽 때 모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대적이었고, 그들이 멸망하기를 바랬습니다. 그 일로 모압은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본문은 아하스 왕이 죽은 후에 히스기야 왕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모압의 알과 길은 모압의 중요한 도시의 이름입니다. 그 두 중요한 도시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망하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1). 또 디본, 느보, 메드바 등도 중요한 도시인데 그곳에서 통곡하며 머리카락을 밀고 수염을 깎고 굵은 베를 입은 사람들니 많아 질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슬픈 현실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른 도시에서도 용사들은 저항의 의지를 잃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친척과 같은 모압이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 마음이 부르짖습니다. 모압 피난민들은 남쪽 도시들(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로 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 피난을 갑니다. 물이 말라 식물도 없고 그들의 곡하는 소리는 끝이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피난하는 사람들과 그 남은 모압 사람들을 향한 심판을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2-9). 

 

모압도 바벨론과 같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심판은 매우 강렬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의 안타까운 마음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과 애통하는 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심판을 내리실 때 즐거워하면서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압의 우상 숭배와 악행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모압이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모압은 그들의 신 그모스에게 달려갔습니다. 이에 마음이 그들을 향해서 부르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반드시 용서해 주시는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는 더욱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받아 주시고, 징계하시지만 언제든지 회개할 때 징계를 거두시는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온 세상을 다스리며,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 때문에 고통을 당할 때조차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27일 (수요일) 이사야 14장

계속해서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시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의 안전과 미래를 약속하십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옛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맺은 언약에 신실하게 행하십니다. 바벨론의 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슬픔과 수고와 고역에서 놓임 받게 하시고, 그들을 압제하던 바벨론에 대해서 조롱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악한 바벨론 왕을 심판하셨습니다. 바벨론 왕은 이전에 자기가 물리친 왕들과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그의 영광은 죽음을 상징하는 깊은 땅(스올)에까지 떨어질 것입니다(1-11). 바벨론 왕은 아침에 밝은 계명성, 곧 가장 빛나는 별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고대에는 신적인 위치를 가진 사람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바벨론 왕이 하나님과 같이 자신을 높였지만, 결국 사망의 구덩이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 바벨론 나라와 왕의 최후를 본 사람들은 그 나라와 왕의 악행을 기억하고 아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스리던 모든 나라의 왕들은 편안히 잠자리에 들 것입니다. 반면에 바벨론 왕은 죽음의 자리에 누워 벌레가 그 시체를 먹게 될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회복이 될 것이지만 바벨론은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12-20). 뿐만 아니라 바벨론 왕은 그 나라를 파멸로 이끌었고, 행악자로 여겨져 그 후손은 잊혀 질 것입니다. 미래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빗자루질 하듯이 싹싹 쓸어 바벨론 나라와 왕에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바벨론을 통해서 앗수르를 치셔서 북 이스라엘의 압제를 풀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메데-바사(페르시아)를 통해서 바벨론을 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에서 완전히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21-27). 이 말씀은 아하스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 받은 계시로서 역사적 사실입니다(28).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민족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앗수르 왕(디글랏빌레셋)이 죽었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입니다. 뱀이 죽을 때 독을 뱉고 죽듯이, 디글랏 빌레셋의 아들 산헤립이 더 강하게 블레셋을 공격하여 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남유다는 동맹을 요청해 오는 블레셋 사신들에게 동맹을 해서 안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실 것입니다. 유다는 블레셋이나 주변 강대국과 동맹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을 듣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피하면 안전과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남유다 백성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다른 열방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열방을 통해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잘 생각하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블레셋과의 동맹은 당장은 도움이 되는 것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블레셋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앗수르와 바벨론과 같이 강대국을 막대기로 사용하셔서 패역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시고 정화하시고 다시 회복하시는 것이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남은 자들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방식이 일을 해결하고 기회를 주는 것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배치되는 것이라면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고 조금 더 타협하면 일이 잘 풀릴 것 같고 잘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잘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현실에 타협하여 좋은 결과를 얻기보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참된 회복을 주실 것 입니다. 아멘. 


12월 26일 (화요일) 이사야 13장

오늘 말씀부터 23장까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다른 나라들에게 관한 심판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오늘의 말씀은 강대국 바벨론에게 전하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날’에 바벨론에 대항해서 군대를 일으켜 바벨론과 거룩한 전쟁을 치르실 것입니다. 민둥산 위에 세워진 깃발은 멀리서도 잘 보이기 때문에 많은 병사를 모을 수 있습니다. 이 깃발을 보고 오는 자들은 거룩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기뻐하는 용사들입니다. 그 수는 엄청나게 많을 것입니다(1-5).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오면 바벨론은 애곡해야 합니다. 전능하다고 자만한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치시고 멸망이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괴로움과 놀라움과 슬픔에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별과 달로 묘사된 지도자들은 힘없이 무너질 것이고 교만하고 강포한 자를 아주 낮추실 것입니다. 그 진노가 너무 강력하며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지 못하게 되어 사람이 매우 적게 남을 지경이 될 것입니다. 하늘과 땅도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기 어려워 흔들리고 진동할 것입니다. 그 날에 이리 저리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는 사람들도 결국은 창과 칼에 죽게 되고 매우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6-16).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죄인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바벨론은 이렇게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메데-바사(페르시아) 사람들을 일으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할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잔인하여 뇌물을 받지도 않고 아이들과 부녀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잔인한 민족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이는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였을 때 했던 행동과 매우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앗수르와 바벨론이 교만하여 졌을 때 하나님은 또 다른 강대국을 통해서 그들을 심판하심으로 열방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강력했고 풍요로웠던 바벨론은 순식간에 망하게 되어 폐허가 되어 소돔과 고모라가 완전히 없어진 것 같이 되어 들짐승만 있는 곳이 될 것입니다(17-22). 

 

하나님의 열방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믿는 자들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이 교회와 저와 여러분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열방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바벨론은 한 나라이면서 성경에서는 지속적으로 교회를 괴롭히는 영적인 사탄의 나라로 묘사됩니다(계14:8). 하나님은 그 역사 속에서 강력했던 바벨론 제국을 페르시아 제국을 통해서 멸하신 것 같이 영적인 사탄의 제국 바벨도 멸하셨고, 마지막 날에 완전히 멸할 것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에 때로 악한 세력이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넘어지게도 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기도 하고 악한 일이 여전히 생깁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제국을 완전히 멸할 것이고, 악인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열방을 다스리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2월 25일 (월요일) 이사야 12장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베푸실 구원과 회복의 날에 백성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날에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과 회복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고 백성들을 돌보심에 감사하며 찬송할 것입니다(1-2). 하나님께서 그들의 힘과 노래와 구원이 되심을 즐겁게 찬양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날에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3). 기쁨으로 물을 길러 마음껏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물을 마음껏 길러 온다는 것은 안전과 평화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나아가 그날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복을 누리며 다른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함께 찬송하자고 초청하고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4). 그분을 찬양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분께서 지극히 아름다운 일, 곧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놀랍고 은혜로운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5). 이것은 몇몇 특정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모든 시온의 주민들, 곧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는 모든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6).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원과 회복을 주셨을 때 그것을 누리는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반응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감사하고, 그분을찬송하고, 기뻐하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 일은 특정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해야 하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함께 모여 감사하고 찬송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반복적으로 듣는 것이 예배입니다. 세상 속에서 구원과 회복의 극히 아름다운일을 하신 분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구원의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모든 성도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매일매일 우리를 위해 지극히 아름다운 구원과 회복을 이루시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고 그분의 공로로 얻은 구원으로 인하여 늘 감사하며 찬송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24일 (주일) 이사야 11장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앗수르를 심판하셔서 황폐하게 하시겠다는 말씀 후에 그 가운데 희망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이새의 줄기는 다윗 집안을 말합니다. 그 가문에서 한 가지가 납니다. 희망이 싹틉니다. 그리고 결실을 맺습니다. 이는 다윗을 통해서 한 다스리는 자가 올 것임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의 위에 성령이 임하셔서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고 재판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도 알고 정의롭게 할 것 입니다. 그래서 억울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게 할 것입니다. 그는 말씀으로 악인을 심판하고 공의와 성실로 허리를 두를 것입니다(1-5). 결과적으로 그 왕은 황폐했던 땅에 평화와 정의의 나라를 세울 것입니다. 그래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놀며 더 이상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메시야가 가지고 올 궁극적인 천국을 내다봅니다. 가깝게는 약소국(유다)이 강대국(앗수르)에 짓밟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서로 싸우지 않는 아름다운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평강의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고 전쟁이 없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성전에서 흘러나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6-9). 

뿐만 아니라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그 왕이 만민의 깃발이 되어 세상 모든 민족을 당신께로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또 그날에 사로잡혀 간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세상 각처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게 하던 자들은 이제 없습니다. 또 백성들이 돌아올 때 그들을 가로 막는 물을 가르실 것입니다. 옛적에 홍해와 요단강을 말리신 것 같이 유프라테스 강을 일곱 갈래로 나누셔서 신을 신고 건널 수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앗수르로 잡혀간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실 것입니다(10-16). 현재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통해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심판의 말씀은 그들의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말씀을 전함과 동시에 유다가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할 때 어떤 평화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폐허 속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나라이며 정의와 평화의 왕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미 다윗의 자손,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나라를 맛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분을 믿는 공동체 안에서 그분이 주시는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미움과 다툼과 질투가 사라지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온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 나라는 완성될 것이기지만, 이 땅에서 교회가 그 나라의 샘플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함께 우리 주님께서 가지고 오신 평화를 우리 가정과 교회에서 드러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23일 (토요일) 이사야 10장

유다 백성들은 불의한 법령과 불의한 말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법을 만들었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버리고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단하고 과부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벌하시는 날을 주실 것이고 그들은 도망할 곳도 피할 곳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살아가는 백성에게 내리는 형벌이었습니다(1-4).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통해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앗수르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스스로를 인식하지 않고 교만하여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고 멸절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왕은 스스로 왕들 중의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갈로와 갈그미스, 다마스커스, 그리고 북이스라엘도 정복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하나의 패배한 신으로 취급했습니다. 자신의 신과 이스라엘 신과의 대결에서 자신의 신이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5-11).

이에 하나님은 그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주실 것입니다. 앗수르가 이렇게 강하게 되어 이스라엘을 정복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의 도구로서 그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이에 하나님은 분명하게 유다를 심판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과 교만한 눈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앗수르 왕은 자신의 능력과 힘과 권세를 자랑했고, 스스로 그것을 해냈다고 교만합니다(12-14).

이는 마치 도끼가 그것을 쓰는 사람보다 낫다고 자랑하고, 톱이 켜는 자보다 자신이 낫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앗수르를 살찐 자가 말라지는 것 같이 그의 부귀영화가 불에 살라지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의 울창하던 숲에 나무가 몇 그루 남지 않아 아이라도 셀 수 있을 만큼 망하게 만들 것입니다(15-19). 

반면에 이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할 것입니다. 남은 자들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자는 파멸될 것입니다(20-23). 

이는 앗수르가 더 큰 제국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되는 것과 포로로 잡혀 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세월 후에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현재 위협에 겁내지 말라고 유다 백성들을 격려합니다. 오래지 않아 진노를 그치고 앗수르를 망하게 하시며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지속되는 앗수르의 위협 속에서 남 유다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강력한 위력으로 앗수르를 멸망 시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쇠 도끼(바벨론)로 앗수르를 망하게 하실 것입니다(24-34). 유다가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강대국 사이에서 하나님은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하나님과 강대국을 의지하며 망하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엄중한 심판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심판이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현실의 위기와 위협은 강력하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습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도구로 북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를 정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앗수르가 교만할 때 하나님은 앗수르도 치실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주관자가 강대국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남 유다의 운명은 강대국의 패권에 달려 있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우상 숭배와 율법을 버리며 살아가는 삶을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삶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불확실한 미래와 삶은 세계의 경제와 우리의 스펙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다른 삶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며 그분을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22일 (금요일) 이사야 9장

오늘 말씀에서는 회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북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으로 침공을 당하면 항상 제일 먼저 공격을 당하던 곳입니다. 갈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도 침략을 당해서 때로는 이방인들이 많이 거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곳에 다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고 흑암 속에서 아무런 희망이 없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빛을 주고 노예 생활로 고통 받던 모든 상황을 회복하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전쟁이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땅에 평화를 가져다 줄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기의 어깨에는 강력한 능력이 있고, 놀라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기는 다윗의 왕좌와 그 나라를 다시 굳게 세우고 영원히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룰 것입니다(1-7). 이 아기는 궁극적으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 말씀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아기로 오셨고, 아들로 오셨고,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으며, 갈릴리에서 사셨고, 흑암에 빛을 비추셨고, 영원히 망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이런 희망의 말씀 후에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북 이스라엘에게 경고의 메시지가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교만하여 벽돌이 무너졌지만 더 좋은 것으로 쌓고, 뽕나무가 찍혔지만,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무시하며 스스로 회복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불순종과 말씀에 대한 무시로 인해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앗수르에 망하게 하십니다. 아람과 이집트도 북 이스라엘을 돕지 못하도록 하여서 결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지라도 하나님의 진노가 돌아서지 않고 여전히 펴져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심판을 받고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장로와 존귀한 자와 거짓 선지자를 모두 멸망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백성을 제대로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은 매우 강력하여 심지어 서로를 잡아 먹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진노는 여전히 식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경고의 말씀을 많이 보내셨고, 이스라엘은 완악하게 끝까지 그것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듣지 않는 북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때문입니다(8-21).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평강의 왕을 보내셔서 회복을 주시고자 합니다. 강력한 심판을 예언하시며 오히려 그렇게라도 백성들이 돌이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만군의 하나님의 여호와를 의지하면 얼마든지 평강의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고,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반면 교사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막지 않으십니다. 못 믿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믿지 않고 거부하며 평강의 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놀라운 흑암에서 빛을, 참된 평화를 주십니다. 평강의 왕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주변에 믿지 않는 부모와 형제, 친구, 동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복음을 전파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2월 21일 (목요일) 이사야 8장

여호와께서는 다시 이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이사야에게 철판에 흔히 쓰는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쓰라고 하십니다. 이는 ‘약탈이 빨리 온다’는 뜻입니다. 또 이사야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로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모두 이전에 말씀하신 다메섹(아람의 수도)과 사마리아(북이스라엘의 수도)가 앗수르에게 노략될 것을 확증하는 표였습니다(1-4). 동시에 계속해서 남 유다 왕과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동일한 운명이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유다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라야의 아들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실로아는 예루살렘에 있는 샘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는 유다를 의미합니다. 유다 왕 아하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유다 땅을 생각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지하고 아람과 북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왕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지하는 아하스 왕에게 강한 물살과 같은 앗수르를 이용하여 유다에게 큰 해를 입히실 것입니다(5-7). 아하스가 의지하던 앗수르에게 도리어 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역사적인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의지하면 다시 날개를 펴서 보호하시며 함께하신다고 말합니다(8). 때문에 아무리 강한 나라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더라도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유다 왕과 백성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9-10). 

이어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강력하게 권면하고 격려하십니다. 유다 백성과 같이 하나님을 버리고 강대국을 의지하는 삶을 따라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반역자로 몰려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두려워 해야 할 분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성소, 거룩한 장소, 감히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그런 곳이 되어주시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강대국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백성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시고 함정과 올무가 되실 것입니다(11-15).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말씀을 거둡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무시하는 백성들에게 증거의 말씀을 싸매고 율법을 봉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감추십니다. 이것은 최고의 형벌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얼굴을 가린 하나님을 여전히 바라봅니다. 이제는 오직 선지자와 그의 아들들(이름의 의미)만이 유일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유다 백성들은 어떤 사람이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고 하면 마땅히 그것이 아니라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라야한다고 말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으면 망한다고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길을 버리고 이방인들이 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에 희망도 생명도 없고 흑암과 고통과 환란 뿐일 것입니다(16-22).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백성들에게 배신자라고 낙인 찍혀도 결코 그 길을 따르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또 백성들에게 말씀을 거두시고 유일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선지자와 그 아들들만 남겨 놓으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을 비방하며 고리타분하다고 낙인을 찍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금만 타협하면 편하게 살 수 있기에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삶을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아무런 대안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무작정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현실적으로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이 현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누구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거룩하게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의지하라고 하십니다. 기도하고 기다리며 신뢰하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극히 소수처럼 보일 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사야와 그 아들들만 남아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이 나 자신 밖에 없는 것 같이 느껴질 때에도,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신실하게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20일 (수요일) 이사야 7장

오늘 말씀은 시간 상 1-5장 이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뉘져 있었고,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북 이스라엘 왕 베가가 아람과 동맹하여 남 유다를 공격 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아람(지금의 시리아)은 강대국 중 하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하스 왕과 백성들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1-2). 하나님은 이사야와 그의 아들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을 왕에게 보내어  아람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가 강해 보지만 연기나는 부지깽이(타버린 나무) 같이 힘없이 망할 것이라고 용기를 줍니다. 그들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만 신뢰하라고 하십니다(3-9) . 그리고 이것이 확실한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징조를 구하라고 아하스 왕에게 말씀합니다. 징조는 그것이 확실할 것이라는 보증입니다. 하지만 왕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말은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의 표현입니다(12절).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열왕기하 16장 7절 이후를 보면 아하스는 오히려 당시 강대국인 앗수르를 의지합니다. 이사야는 그런 왕을 책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그 징조는 처녀(혹은 여인)가 아기를 낳을 것인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일컬어 지는 것입니다. 가장 가깝게는 하나님께 신실했던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를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 문자 그대로 처녀를 통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이름과 같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임을 보여주는 징조입니다. 히스기야가 장성하기 전에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망할 것이라고 말씀 하시는데, 실제로 두 나라는 애굽 군대(애굽의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앗수르의 군대)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13-17).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던 아하스 왕도 징계하실것입니다. ‘세 내어 온 삭도’는 ‘빌린 면도칼’이라는 뜻으로 아하스가 성전의 보화를 꺼내 바쳐서 도움을 요청한 앗수르의 군대가 결국 유다 왕과 백성들의 머리를 밀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도와주다가 결국 앗수르 군대가 아하스를 치게 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대하28:20). 이것도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은 아하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계입니다. 결국 유다는 큰 어려움을 겪고 유다 땅 일부가 빼앗기고 황폐하게 될 입니다(20-25).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버리고 강대국을 의지하던 아하스는 처음에는 잘 되는 듯 했으나 결국 망했습니다. 모든 나라는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처녀의 몸에서 나게 하셨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셨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분만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위기 속에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합니까? 우리가 의지할 분은 모든 세계를 다스리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일생 동안 겪는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만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19일 (화요일) 이사야 6장

오늘 말씀은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을 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웃시야는 다윗과 솔로몬 이래로 남유다를 부강하게 세운 능력 있는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말년에는 교만하여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는 제단에 향을 피우려다가 하다가 문둥병에 걸려 다시는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못하고 별장에서 다스리다가 죽었던 왕입니다. 그 때 웃시야 왕과 같이 유다 백성들도 부유함만을 추구하고 교만하여 결국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불러 보내십니다. 이사야는 다른 유다 백성과 달랐습니다. 그는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부정한 백성들 가운데 있으면서 거룩하시고 능력이 무한하신 유다의 참된 왕, 만군의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유다의 참된 왕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와 백성이 어떤 자들인지도 알았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자신이 서 있기 때문에 망하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스랍 중에 하나를 보내어 제단에서 숯을 집어 이사야의 입술에 갖다 데도록 하셔서 그의 죄를 씻으시고 회복을 주십니다(1-7).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누구를 유다에 보낼까 고민하시는 음성입니다. 이에 이사야는 자신이 가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좋은 말씀이 아니라 경고와 심판의 말씀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돌아와서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한정 그렇게 하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기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고 그 땅을 황폐하게 하실 때까지 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과정을 통해서 모두 없애지 않고 그루터기를 남겨두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루터기는 거룩한 자들입니다(8-13). 이 그루터기들을 통해서 다시 새로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묵상할 때 그분의 영광과 우리의 죄악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를 아는 지식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될 수록 우리는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으시지 않으면 안될 만큼 우리의 죄악은 큽니다. 망하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사해 주셨습니다. 피 묻은 숯과 같이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회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살아갑니다. 그 사명은 우리의 각자의 삶 속에서 말씀대로 살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에 걸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비참함을 묵상합시다. 그리고 베풀어 주신 구원에 감사하며,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18일 (월요일) 이사야 5장

오늘 말씀은 일종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슬픔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포도원의 주인과 같이 땅을 두루 파서 돌을 제거하고 별로 좋지 않은 밭을 좋은 밭으로 만들어 포도 나무 중에서 가장 좋은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중에 망대와 술틀도 마련하여 최고의 포도주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포도 열매를 맺도록 기대합니다. 그런데 결국 맺게 된 것은 가장 좋지 않은 질의 들포도를 맺었습니다(1-2). 이 짧은 노래를 부른 후 이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백성들을 부르며 한번 판단해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포도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좋은 밭에, 좋은 나무를 심었고, 망대를 세워 다른 짐승이 못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들포도를 맺은 것이 누구의 잘못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답은 뻔합니다. 최고급 나무 스스로 들포도를 낸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런 불순종하는 유다에 백성에게 심판을 예언하십니다. 포도원의 울타리를 걷고, 담을 헐어 짐승들에게 밟히게 하여 황폐하게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그 밭에는 쓸 곳이 없는 잡초가 자랄 것입니다. 이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의미하고 포도 나무는 유다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였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행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포학했고, 율법을 버리고 이웃의 모든 것을 취하여 자신의 집과 땅을 넓히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일반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집들을 없애고 땅의 소산물이 급격하게 줄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집과 땅을 넓히고 스스로 즐겁게 하는 유흥에는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3-12). 이제 그들은 다른 적국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들의 고위 관리들은 굶게 될 것이고 백성은 목이 마를 것입니다. 그들의 교만은 낮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받고 고위 관리들의 억압을 받던 사람들이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정의로운 분이심을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13-17). 뿐만 아니라 거짓으로 예언하고 백성들을 죄악으로 이끄는 종교 지도자들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을 자기들에게 알려준다고 생각하면서 거짓을 일삼고 선을 악하다고 하고 어둠을 빛이라고 하며 쓴 것을 달다고 단 것은 쓰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심판을 말씀 하시는데, 잘 될 것이라고 말하며 거짓으로 백성을 가르칩니다. 또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없는 삶을 사는 사람, 술에 취해 있는 사람,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사람 모두 재앙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치시고 더 치시려고 준비하실 것입니다(13-25). 하나님은 심판의 도구 삼으신 이방 나라에게 전쟁에서 쓰는 깃발을 높이 들어 진격을 명하실 것입니다. 이방 나라들은 강력하여 피곤하여 넘어지는 사람도 없고 허리 띠는 풀리지 않고, 신발도 풀리지 않고 화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겨져 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병거도 강력합니다. 그들의 외침도 강력합니다. 이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유다에 어둠이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26-30).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모든 것을 해 주셨습니다. 좋은 환경을 주셨고, 그들을 사랑하며 다른 나라가 공격하지 못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울타리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그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의 방식인 율법을 지키고 정의를 베풀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극상품 포도와 같은 삶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런 삶의 방식을 버리고 이방 나라들과 같이 약육강식의 삶의 방식을 살고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이 이방 나라들의 공격을 받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때문임을 다시금 일깨우기 위해서 이방 나라들을 심판의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평안하게 살고 어려움이 없이 지내고 무엇보다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과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십니다. 모든 좋은 것을 먼저 주셨습니다. 구원을 주셨습니다. 구원 받은 백성으로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으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연약한 사람을 섬기고, 정의를 실천하며,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저와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17일 (주일) 이사야 4장

어제 말씀과 이어서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날에는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들고 스스로 떡을 먹을 테니 다만 당신의 이름으로만 불리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전쟁 후에 예루살렘 성이 망하고 그곳에 거하는 남자가 적어서 여러 여인이 호적에 등록시켜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여인들이 남자의 호적에 등록되어 있지 않으면 수치와 모욕감을 당하고 또 성적으로 학대를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이지 않아도 되니 그 이름으로만 살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1).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 후에는 예루살렘은 황폐하게 되고 무질서하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하지만 2절부터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여호와의 싹’은 폐허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보여줍니다. 그 싹은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며 그것으로 새로운 시작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싹이 피난하고 돌아온 자들을 위하여 음식을 제공하여 생명을 줄 것입니다(2). 이 싹은 황폐한 이스라엘을 회복한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또 그 날에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들은 거룩한 백성들이라고 칭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과 소멸의 영으로 죄악을 제거하고 더러움을 씻겨 깨끗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3-4). 이 예루살렘성도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성령으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된 백성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고 늘 동행하셨던 하나님을 구름과 빛 기둥으로 보여주셨던 것 같이 그 날에는 성전이 있는 시온 산과 모인 백성들 위에 항상 함께 있을 것입니다. 또 초막이 있어서 그늘이 되고 비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될 것입니다(5-6). 이것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초막을 치시며(요1:14),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성령으로 영원히 함께하시는 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마1:23). 

 

오늘 말씀은 앞에서 말한 심판의 말씀들과 하나님의 심판이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고 멸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는 것을 보게 합니다. 그 일은 궁극적으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이루실 것임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 날’은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의 모든 날들을 의미하며 마지막으로 심판하러 오실 날을 바라보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회복과 거룩함을 위한 심판은 일어났고,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은 더러움과 죄를 씻음 받고 정결한 자들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함께하시고, 피하는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십자가의 심판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의 정체성을 기억합시다. 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바라보며 주님을 피난처로 삼아 살아가는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16일 (토요일) 이사야 3장


어제 말씀에 이어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결국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하는 모든 것을 꺾어버리겠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유다는  양식, 물, 용사, 전사, 재판관, (거짓)선지자, 복술자(점치는 사람), 장로, 오십부장, 귀인, 모사(전략가), 정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기술자들) 등을의지 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강력한 군사력과 전략, 그리고 발달한 기술들에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우상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갔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골라서 전했고, 우상들을 하나님과 함께 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에게 문명적이고 종교적인 풍성함을 주는 모든 것들을 없애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신에 소년들을 그들의 관리로 삼도록 만들겠다고 합니다. 이는 모든 어른들이 전쟁에서 죽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 나라는 바르게 세워질 수 없습니다. 사회 질서는 엉망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외투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나라의 일을 맡길 만큼 경제적으로 엉망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것도 거부함으로써 도저히 희망이 없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1-7). 이는 모두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의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계속되는 경고들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의인에게는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릴 것입니다(8-12).

하나님은 변론하시고 심판하시기 위해서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먼저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포도원(유다 백성)들을 율법으로 다스리지 않고 착취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을 율법을 가지고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력을 자신의 배를 채우고 착취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가장 먼저 심판하십니다. 그 다음에 백성들(시온의 딸들)을 심판하실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늘인 목과 정을 통하는 눈으로 아기작거려 걸으며 음행 했기때문입니다. 이는 비유로서 우상을 섬긴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남자(우상)를 유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 스스로 치장하는 모든 것을 치워버리고 결국 전쟁에서 망하게 하고 성전이 무너지게 될 것임을 경고합니다(13-2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거짓된 영광을 추구하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다른 사람을 의지할 때 의지하는 것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께로 돌이키길 원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많은 것을 맡긴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지도자는 오늘날 교회의 직분자(목사, 장로, 집사)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주신 영적인 권위를 함부로 사용하거나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영적인 지도자들을 엄격하게 다루실 것이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며 빼앗고 우상 숭배자들과 다름없이 살아가며,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백성을 돌이키고 싶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말을 해도 도저히 말을 듣지 않고, 아무리 기다려도 변화되지 않을 때 회초리를 드는 것과 같습니다. 

 

다행히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이런 진노는 이미 예수님께서 짊어지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유다와 같은 심판은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우리가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신뢰하며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15일(금요일) 이사야 2장

이사야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말일’은 ‘마지막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심판하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1차적으로 그날은 회복의 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전으로 모이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배웁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서로 그곳으로 가자고 격려합니다(1-3). 그곳에서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면, 백성들은 그 길로 행할 것입니다. 여기서 '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전쟁 무기인 칼과 창으로 삽과 낫을 만들어 농사 짓는데 사용합니다(4). 다른 열방들이 이스라엘을 더이상 괴롭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야곱의 족속, 유다 민족에게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고 독려합니다. 그들이 버림 받은 이유를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인과 손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신도 섬깁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은금이 무한하고 전쟁에 필요한 말과 병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우상이 함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돈과 권력이 있습니다. 대신에 우상을 섬겨야 합니다. 유다는 그런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면서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 같이 참된 평화는 우상이 주는 돈과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없는 돈과 힘은 결국 우상 숭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날에는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참된 삶을 추구할 수 있다고 스스로 높아진 사람들이 굴복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상들도 하루 아침에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참된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난 것일 뿐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만든 모든 우상은 창피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날에 우상을 섬기던 자들은 수치와 멸시와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5-22). 

 

'여호와의 날'은 선지서 가운데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선지자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개입하셔서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은 구원하는 날을 예언합니다. 당장의 현실은 정반대일지라도 언젠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회개하지 않는 남 유다를 망하게 하심으로 그렇게 드러내셨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던 자들은 그날에 모두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던 자들은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가서 나중에 다시 회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날에 모든 인류를 심판하실 날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주를 믿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며 그 방식대로 살며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며 돈과 권력을 우상으로 삼아 살아온 사람들은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돈과 권력은 우상이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고 여기며 살아가면 우상이 주는 돈과 권력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람이나 돈이나 권력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의지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돈, 권력, 시간, 건강 뿐만 아니라 가족 등도 하나님께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서 말씀에 비추어 건전하고 바른 곳에 사용하고 돌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14일 (목요일) 이사야 1장

오늘부터 이어지는 성경은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선지자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남유다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유다왕 웃시야(약BC790-739),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약BC730-686)에 이르기까지 대략 5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특히 아하스 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망했습니다(약BC 722).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유다에 전합니다. 그 시작에서 이사야는 하늘과 땅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불러서 유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남유다 백성들의 죄악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소와 나귀도 그 주인을 아는데, 유다 백성들은 그 주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범죄한 나라이며, 행악의 종자, 부패한 자식에 비유됩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1-4). 문제는 그들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더욱 패역해 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진노로 그들은 황폐한 땅을 경험하고 있고, 이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지하며 우상을 섬기던 북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남유다 백성들입니다. 그들도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지만 그것을 가벼이 여기고 있습니다(5-9).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제사 할 수 있는 성전이 있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제 그런 제사와 제물들은 지겹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한 제사를 드리지만 동시에 악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3).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많이 기도 해도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14).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행을 배우고 정의를 행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고 고아를 위하여 억울함을 풀어주고, 과부들의 말을 변호하는 것입니다(16-17). 한 마디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제사만 드리면서 삶은 전혀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유다 백성들에게 서로 옳고 그름을 따져보자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단지 제사의 외형만 지키며 하나님의 심판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서로 한 번 따져보자고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깨닫게 하시고, 그들이 정말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으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죄악을 깨닫고 회개할 때 용서하시고 피와 같이 붉은 죄를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항상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복되기를 바라는 정화와 회복의 말씀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시 순종하면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거절하면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18-20). 하나님은 신실하고 정의와 공의가 충만했던 백성들의 부패함을 안타까워 하십니다(21-23). 그러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은 유다를 다시 깨끗하게 하시고 회복해 주시길 원하십니다(24-26). 그러나 끝까지 이런 심판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다른 신을 상수리 나무에서 섬기는 자들은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강한자도 그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27-31).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심판의 말씀을 유다에 전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멸망이 아니라 회복의 약속이 있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이 많으신 분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나아오고 삶을 돌이킬 때 받아 주십니다. 피와 같이 붉은 죄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외식하는 자, 겉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고 다른 것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실제적이고 무시무시합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과연 우리의 예배가 삶을 변화시키는지 아니면 예배 따로 삶 따로 그렇게 살아가는지 되돌아 봅시다. 후자라면 우리의 삶을 돌이켜 긍휼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13일 (수요일) 아가 8장

오늘 말씀에서 신부는 공개적으로 남편과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말합니다. 차라리 오빠였다면 공개적으로 함께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흉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가족 외에 남녀가 공개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랑과 신부의 사랑이 너무 커서 공개적으로 자랑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을 아쉬워하는 것입니다(1-3). 그래서 더욱 남편이 잠시 자기와 머무르는 현재의 상황이 더 지속 될 수 있도록 남편을 깨우지 말라고 부탁합니다(4). 신부는 신랑의 사랑을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그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 오는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신부입니다. 어머니가 낳은 곳에서 남편과 사랑을 나누며 새로운 생명을 얻은 신부가 열정을 다해서 남편을 다시 만나러 옵니다. 그리고 불타는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자신을 더욱 품어 주기를 남편에게 부탁합니다. 신부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불같이 뜨겁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 강렬하여서 많은 물로도 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 가치가 있어서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그 사랑과 바꾸려고 할지라도 결국 수치만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값으로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뜨거운 사랑을 가진 누이를 걱정하는 오라비들의 말이 이어집니다. 유방은 신체적인 일부를 가리켜서 아직 시집갈 나이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할 수도 있지만, 일종의 비유로서 아직까지 동생이 여러가지 면에서 시집 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가슴은 생명력과 풍성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은 망대’와 ‘백향목 판자’를 세우겠다는 말은 물질적인 도움을 주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인이 결혼할 수 있는 물질적인 준비가 풍성하게 되어있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만으로는 안되고, 다른 무엇이 더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분을 사랑하는데, 그 사랑을 위해서 물질적인 것이나 다른 어떤 것이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부는 남편 솔로몬을 잘 압니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돈을 요구하고 물질적인 것을 요구하지만, 신부에게는 그런 것이 아니라 신부 자체에 관심이있다는 것입니다. 13-14절에서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의 목소리를 들려주기를 부탁하고 신부는 노루처럼 빨리 자신에게 달려 올 것을 말합니다. 서로가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사랑의 노래는 끝이 납니다. 

 

아가서의 여인의 사랑은 고대 세계에서는 어색합니다. 왜냐하면 여인이 이렇게 드러내 놓고 사랑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인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그것을 아쉬워 합니다. 더 공개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나누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음에 안타까워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부 교회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먼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받아서 그분을 사랑하는 교회의 사랑은 뜨거워야 합니다. 또 사랑 외에 다른 어떤 것을 더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고 우리의 자체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나, 열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의 행위보다 어디에서 비롯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그분을 향한 사랑에 푹 젖어서 뜨거운 사랑과 열정으로 받은 것을 다시 돌려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롬5:8). 오늘 하루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그 사랑의 가치를 알고 뜨거운 마음으로 다시 돌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12일 (화요일) 아가 7장

남편은 다시 신부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 노래합니다. 남편의 눈을 통해서 아내의 신체의 각 부분에 대한 묘사는 세련되고 아름답고 고상하고 품위가있습니다. 참된 부부관계 속에서 남편은 아내의 이런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칭송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바른 관계 아래서만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발에서부터 다리, 배, 가슴, 목, 머리 등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1-5).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의 고귀함과 가치와 아름다움을 문학적인 비유를 총 동원해서 칭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정도입니다(6). 그녀가 키가 종려나무 같다는것은 마르고 곧게 뻗은 것을 상징합니다. 이 말은 그녀가 신체적으로 마른 체형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곧다는 것이고 열매를맺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회의 올곧음과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은 신부는 아기를 낳고 기르기 위한 젖이 있고, 자녀를 올곧게 양육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신자들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남편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교회는 신자들에게 말씀의 젖을 공급하고 양육하여 생명력 있는 교회로 세워집니다. 

그리스도의 이런 칭송과 사랑의 노래에 신부인 교회는 반응합니다(10-13). 그녀는 그런 남편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는 것을분명히 압니다. 교회는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알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는 아내가 그 남편과 함께 사랑을나누고 싶어하듯 교회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고, 성적인 욕망이 강력하듯이 그분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그 남편에게 속하여 있다는 것에 좋아하고 메이길 원합니다. 그분께 속하여 있다는 것은 곧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분의 사랑에 대한 당연한 반응으로서 그분의 사랑을 갈망하고 즐깁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알고 느끼고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귀히 여기시는그분의 사랑에 반응하며 예수님께서 속한 자로서 즐거워하고 거룩한 신부로 종려나무와 같이 올곧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11일 (월요일) 아가 6장

예루살렘의 딸들은 여인을 어여쁜 자라고 부르면서 함께 그 사랑하는 자를 찾자고 합니다. 남편을 향한 신부의 사랑이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있는 것입니다. 결국 신부는 그 남편을 예루살렘의 딸들과 함께 발견했습니다. 그분은 양 떼를 먹이고 있습니다. 본인의 의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으로서 백성을 돌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는 그렇게 성실하게 백성을 돌보는 왕인 남편에게 속하였고, 남편도 신부에게 속해 있습니다(1-3). 

이제 왕의 독백이 이어집니다. 역시 그 아내를 칭송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말들이 이어집니다. 디르사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예루살렘은 남 유다의 수도입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온 나라에서 최고이라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남편은 다시 반하고, 머리털도 너무 아름답고, 이도 고르고 이쁘게 있고, 뺨은 불그스름합니다. 그녀의 외모는 어느 하나 흠 잡을 것이 없습니다. 비록 많은 후궁들이 있지만 왕의 마음은 오직 한 여인에게만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사랑을 듬뿍 받은 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여인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완벽에 가까운 여인입니다.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깃발을 세운 군대와 같이 당당합니다. 아름다운 외모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지키는 그런 신부입니다(4-10). 왕은 다른 일을 하러 갔다 가도 그녀에 대한 생각과 그리움으로 그녀를 찾게 될 정도로 사랑합니다(11-12). 그래서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지금 어떤 이유로 잠시 자기를 떠나게 된 신부가 다시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는 모습이 그려집니다(13). ‘마하나임’이라는 지명이 주로 정치적 망명자들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왕이 뜻하지 않게 왕을 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교회를 향한 칭송과 찬사가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부인 교회의 아름다움을 칭송합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고 그분을 만나고 싶어 하는 교회는 주님을 만나게 되고 칭송을 듣게 됩니다. 그 칭송은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의 노래입니다. 주님이 먼저 이렇게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안아 주시기에, 그에 대한 반응으로 자연스럽게 교회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노래합니다. 아가서는 주님의 관점에서 우리를 얼마나 아름답게 여겨 주시고, 어여쁘게 여겨 주시는 지 보게 합니다. 여기에 우리는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은혜입니다. 또 주님을 향한 교회의 사랑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 은혜를 누리고 감사의 찬송으로 화답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10일 (주일) 아가 5장

왕은 아내를 매우 자랑하고 그녀를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합니다(1). 이제 곧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동산에 들어와 자신의 아내가 될 것임을 많은 사람에게 알립니다. 왕은 사랑하는 자를 보기 위해서 그녀가 밤에 비몽사몽하고 있을 때 찾아 갔습니다. 머리털에 밤이슬이 가득하였다는 것은 밤이 깊을 때 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깊은 어둠을 뚫고 온 것입니다. 결혼의 마지막 절차만을 남기고 그녀를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입니다. 여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문을 열었을 때 왕은 이미 떠나고 난 뒤였습니다. 왕의 방문에 아내는 당황하여 아무것도 못하던 사이에 왕이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2-6). 뒤늦게 아내는 왕을 찾아서 성 밖으로 나가 찾아다니다가 파수꾼들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외투(겉옷)을 빼앗기기까지 합니다(7). 이제는 예루살렘 딸들을 통한 소문을 이용하여 왕이 다시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합니다(8). 예루살렘 딸들은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묻습니다(9). 그를 찾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여인에게 그 왕이 어떻게 생겼는지 묘사합니다. 피부색과 머리, 머리털, 눈, 뺨, 입술, 손, 다리 등 신체의 탁월함을 묘사합니다. 그분은 전형적으로 건장한 남자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사랑할 만한 분임을 보여줍니다(10-15). 

 

우리는 사랑하는 분이 문을 두드릴 때 문을 열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이 그분에게 보여주기에 부끄럽다거나 너무 보잘 것이없다고 우물쭈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기뻐하시기에 문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두려움으로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그대로 사랑하시는 분임을 기억하고 항상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드리며 그분과 함께 거하시기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12월 9일 (토요일) 아가 4장

오늘 말씀은 다소 민망한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표현들은 사실 부부 관계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며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아내의 아름다움에 대한 칭송과 감탄과 애정의 표현들인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내의 몸을 응시하며 아름다움을 칭송합니다. 이는 마치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벗었지만 부끄러움이 없었다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부 관계에서 서로 모든 것을 다 드러내어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아무것도 그들 사이를 방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1-5).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부 사이의 성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 남용하고 오용할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이 오염되고 변형되어 죄가 되고 흐트러지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솔로몬이 아내를 향한 노래는 그 아내가 흠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 그녀에게 흠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볼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 누이”라는 표현은 실제로 형제 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기 보다는 애칭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신부의 뜨거운 사랑을 노래합니다. 7절의 레바논은 6절에서 나오는 ‘유향(레바나)’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솔로몬은 아내의 아름다운 향기를 노래하며 언어유희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내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6-11). 나아가 아내의 외적인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의 풍성함을 과일 나무로 비유합니다. 이 아름다움과 풍성함은 오직 남편에게만 허락되기에 잠근 동산이고 덮은 우물, 봉한 샘으로 표현이 됩니다(12-15). 그녀의 향기가 동네에 퍼져서 그녀를 자랑하고 그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그려집니다(16). 

 

오늘 말씀은 통해서 그리스도과 신부인 교회의 관계를 묘사합니다. 그 관계는 정말로 그 어떤 것도 둘의 하나됨을 방해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또한 주님은 마치 교회를 흠이 없는 자들과 같이 사랑스럽게 여기고, 그 사랑을 노래하는 관계입니다. 이 둘이 하나가 되고 서로의 사랑을 노래하고 칭찬하는 그런 관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노예로 여기지 않으시고 순전한 신부로 여기십니다. 동시에 우리가 그분에게만 우리의 몸과 마음을 허락하길 원하십니다. 다른 것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빼앗기길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올바른 반응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8일 (금요일) 아가 3장

오늘 말씀도 여인이 간절히 님을 찾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밤 중에 일어나보니 사랑하는 님이 없어진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어두운 밤에 여인으로서는 큰 용기를 내어 사랑하는 님을 찾아 나섭니다. 대로와 골목길 모두 찾아보았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에게도 물어보았지만 그들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들을 보내고 이제 여인은 사랑하는 님을 만났습니다. 여인은 그를 보자마자 자신의 어머니의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곳에서 여인은 사랑하는 님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 친구들에게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노래합니다(1-5). 여인은 남편을 갈급하게 찾고, 끈질기게 찾아냅니다. 그분이 없이는 안되는 것이 같이 찾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발견했을 때 어머니의 방으로 인도한 것은 그곳에서 님과 함께 다시 태어남을 상징합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육체적으로 낳아 준 곳에서, 말하지면 영적으로 님과 함께 다시 태어나 영원히 님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솔로몬 왕이 남편으로서 결혼식에 나아오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몰약과 유향과 향품으로 향기를 풍기며 온다는 것은 그분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답고 위엄을 갖추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그가 용사들의 호위를 받아서 오는 것은 그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의 가마 또한 멋집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가마의 무늬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런 왕과 결혼하는 여인이 주인공입니다. 예루살렘 딸들은 결혼하는 여인을 부러워 할 것입니다(6-11).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된다는 것은 상당히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던 왕과 여인은 이제 결혼을 통해서 부부가 되어서 서로에게 신실한 것을 약속합니다. 끊어질 수 없는 관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그 결혼식은 어떤 세기의 결혼식보다 아름답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이런 부부 관계로 묘사됩니다(엡5:32).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부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신랑이 되시며, 그분은 참된 왕이십니다. 그분의 능력으로 교회를 사랑 가운데 돌보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간절히 찾고 그분만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만을 갈구해야 하며, 그분과 함께 새로운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그분은 영광스러운 왕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부부 관계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적으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갈망하며 필사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보호와 사랑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갈구하고, 그분을 필사적으로 찾고, 매순간 우리가 주님의 신부임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 보화와 기쁨과 즐거움과 충만함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7일 (목요일) 아가 2장

오늘 말씀은 사랑하는 왕, 자신의 님과 함께하고 싶은 여인의 소망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1-7절은 누가 말하는 것인지 헷갈리는데, 이 구절들은 여인의 소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샤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화라는 표현은 자신이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다고 사랑하는 왕이 여겨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그렇게 말해 주기를 바라는 말입니다. 왕의 부름을 받기를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는 많은 여인들은 가시나무와 같이 보이고, 자신은 백합화처럼 보셔서 자기를 불러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왕의 사랑을 받으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와 함께 잔치집을 다니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왕과 함께하는 여정 가운데 힘이 들 때면, 왕은 그녀에게 건포도와 사과로 힘을 북돋아줍니다. 그런 사랑을 너무 갈급하게 원하기에 병이 생길 지경입니다(5). 또 그 왕이 사랑스럽게 품어 주시고 안아주실 때 기운을 얻게 됩니다. 그 사랑이 끝나지 않도록 왕이 원하기 전까지 방해하지 말라고 다른 소녀들에게 경고를 합니다(7). 

드디어 여인은 왕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왕은 그녀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말합니다. 이제 겨울도 지났고 비도 그쳤습니다. 그들의 만남을 방해하는 시련들은 사라졌습니다. 왕도 그녀를 애타게 찾습니다. 얼굴이라도 잠깐 보여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치 바위 틈 은밀한 곳에 있는 비둘기처럼 그녀는 지금 나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왕과 여인은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작은 여우들을 잡으라고 합니다. 그들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방해꾼도 많아집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에게 속하여 있다는 것은 결코 막지 못합니다(16). 왕은 양을 돌보고 있습니다. 백성을 돌보는 일을 하고 다시 돌아와 자신과 함께 사랑을 나누기를 원합니다(17). 

 

우리의 왕이시고 신랑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사모하며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때로 힘들고 지칠 때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을 갈망하여 그분과 함께 일어나 걸어가길 원하고,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을 갈망하기를 바라십니다. 

또 힘들고 지칠 때 그분의 사랑을 더욱 사모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용기의 말씀과 사랑을 경험하길 원하십니다. 주님만을 사랑하고 어려움 가운데 그분이 공급하시는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어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는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6일 (수요일) 아가 1장

아가서는 얼핏 보면 남여 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로망스 영화와 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아가서는 남녀의 사랑에 빗대어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우리, 바로 교회의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가서에서 특징적인 것은 이 둘의 사랑이 말씀 후반부로 갈수록 시련을 겪지만 성숙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시작입니다. 그 시작은 왕을 향한 여자의 사랑의 노래입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왕인 남편의 사랑을 갈망하고 바라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존댓말과 반말을 구별해 놓지 않아서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헷갈리기 쉽습니다. 2,3절에서 화자는 여인입니다. “네”는 “당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우리 말로는 자연스럽습니다. 사랑하는 분의 입술과 향기, 사랑을 갈망하고 그리워 합니다. 빨리 왕의 부름을 받아 그분께 나아가고 싶어하는 갈망이 4절의 내용입니다. 이 여인은 피부가 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여인들에게 놀림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 자신의 피부가 검어도 그분은 자신을 사랑해준다는 것을 노래합니다. 자신의 피부가 검은 것은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한 흔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비난과 조롱거리가 아닙니다. 이 여인은 사랑하는 분이 어디에서 일을 하고 쉬는지 알아 그분과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7). 

그리고 합창단의 노래가 이어집니다. 합창단은 이 여인이 아름답다고 표현하고 양 떼를 따라가면 양떼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8). 

이어서 남편의 노래가 이어집니다. 그녀는 파라오의 마차를 끄는 말과 같이 위풍당당하게 남편을 찾습니다. 동시에 그 모습은 매우 아름다운 여인으로 남편은 그런 여인에게 더 아름다운 장신구를 달아주고 싶어합니다.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이면서 동시에 죄와 싸우는 전투적인 것을 묘사하는듯 합니다(9-11). 이제 이 둘은 만나서 서로의 사랑을 만끽하며 교제를 누립니다. 서로를 향해 사랑을 노래하고 표현합니다(12-17).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가 얼마나 그분의 사랑을 갈구해야 하는지 교훈 해 줍니다. 교회는 피부가 검은 여인과 같이 사람들이 보기에 겉보기에는 큰 매력이 없어 보입니다. 죄인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수도 많이 하고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 외부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기도 하고, 내부적으로 서로에게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저와 여러분, 교회 조차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그리스도를 더욱 갈망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당당하게 죄와 싸우고, 그리스도께 순결한 신부로 서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로서, 신랑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묵상하시고, 동시에 예수님을 사모하며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 그 사랑을 노래하고 표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5일 (화요일) 전도서 12장

전도자는 오늘 말씀에서 젊을 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어려서부터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즐거운 삶을 누리라고 권면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 그만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참되게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적기 때문입니다. 해와 빛과 달과 같이 빛나는 젊음이 지나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보다 젊어서부터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1-2). 3-7절까지 말씀은 늙고 힘없는 노년을 신체부위를 비유하며 말합니다. 집은 몸이고, 지키는자는 손과 발, 맷돌질은 이와 잇몸, 창들로 내다 보는 자는 눈을 의미합니다. 몸의 기운이 없어진 후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만끽하며 누리는데 한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밤에 잠자는 것도 어렵고 힘듭니다. 죽음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살구 나무 꽃은 흰머리를 상징합니다. 건강한 정욕도 없어져 생명력이 없어지는 노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흙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께로 영혼이 돌아가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다시 한번 권면합니다(7). 그렇지 않으면 헛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 후에 우리 영혼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전도자와 지혜자는 많은 연구를 통해서 지혜를 다음 세대에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과 잘 박힌 못과 같이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말입니다. 스스로 많은 지식과 학문을 구하며 진리를 찾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12). 전도서의 결론으로서 인생은 헛되고, 미래에 대해 알 수 없고, 부조리와 불의로 가득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보고 계시고, 결국 선악을 판단하실 것입니다(13-14). 전도서도 지혜서로서 잠언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말해 줍니다. 

 

모든 인간들은 그들을 만드신 창조주를 기억하고 그분을 인정하고 경외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인생은 허무하고 무의미합니다. 아무리 건강과 지식과 부와 명예를 가졌더라도 모든 것은 헛됩니다. 반대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이미 의미 있는 삶을 살고,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부와 명예와 지식과 건강을 겸손함으로 즐기며 누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두려워하며, 사랑하기에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누리며 평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4일 (월요일) 전도서 11장

오늘 말씀에서 전도자는 젊은이에게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떡을 물 위에 던지고 여러 날 후에 찾는다는 것은 일종의 해운 사업과 관련 있습니다. 떡을 물 위에 던진다는 것은 일종의 투자입니다. 이는 떡을 한 동안 먹지 못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가치 있는 일에 도전 해 보라는 말입니다. 일곱이나 여덟에게 몫을 나누어 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은 오직 젊을 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2). 삶의 불확실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수동적인 자세로 젊은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고, 쓰러진 나무는 그대로있는 것처럼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어떤 결과는 분명히 주어집니다. 그것이 실패이든 성공이든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취하라고 합니다(3). 반대로 바람의 방향을 살피면서 씨 뿌리는 것을 차일 피일 미루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일이 어떻게 될지는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런 진리가 회의주의로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든 해 볼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4-6). 삶은 빛과 같이 아름답고 즐거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즐거움은 쾌락과 유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내는데 있습니다. 동시에 어두운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은 그 때를 즐거워하며 모든 일을 기쁨과 즐거움을 하되 하나님이 모든 일에 훗날 심판하실 것이라는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젊은 시절을 보내야 합니다. 심판은 잘한 것에 칭찬하고, 잘못한 것에 책망하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젊음만 즐기고 유흥만으로 보내는 삶은 결국 헛될 것이기에 그 아름다운 시기를 정말 아름답게 보내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전도자인 솔로몬의 노년에 비하면 우리 모두는 청년의 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두렵지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희망을 가지고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알 수 없는 미래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불안을 기대로 바꾸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실 일을 기대할 때 희망으로 바뀝니다. 어떤 것을 하든지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며 삶을 허비하지 않고, 즐거움과 감사로 매일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3일 (주일) 전도서 10장

오늘 말씀에서 전도자는 우매함이 지혜와 같은 좋은 것들을 망하게 하는 것에 대해 교훈을 줍니다.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할 만큼 악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 같이 지혜와 영광이 훌륭하지만 작은 우매함이 때로 그 지혜를 가립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기에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매한 자는 길을 갈 때, 어떤 것을 선택할 때 우매한 표가 납니다. 한 예로 왕이 분노할 때 자리를 뜨면 의심과 분노를 받기에 떠나면 안됩니다. 지혜자는 조용히 자리를 지켜 용서받지만 우매한 자는 자리를 떠나 화를 당합니다(1-4). 또 전도자는 자신의 삶 속에서 본 주권자와 관련된 재앙을 말합니다. 우매한 자가 주권을 얻고 귀한 자들이 앉아야 할 자리에 없음을 본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반란으로 종이 주인이 되고 주인이 종이 된 것도 말합니다. 우매한 사람이 힘을 얻게 되었을 때 겪게 되는 환란입니다(5-7). 8-11절은 예측할 수 없는 사고가 생길 수 있으며, 또 뱀을 잘 다루는 주술사도 뱀에게 물리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첨단 기술이 우리를 위해서 많은 것을 주고, 삶은 윤택하게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때로 사람을 해치거나 악하게 작용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양면을 다 알고 지혜롭게 사용합니다. 

다시 전도자는 우매한 자와 지혜로운 자를 비교합니다. 지혜자의 말은 긍정적인 효과를 내고 다른 사람에게 은혜롭게 들립니다. 하지만 우매자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는 커녕 자기를 삼킵니다. 말로써 자기에게 해를 끼친다는 말입니다. 또 우매한 자가 미래의 일을 말하고, 많이 말한다는 것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경솔하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매자가 하는 일은 결국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직 피로함만 더할 뿐입니다. 그들은 아주 기본적인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12-15). 왕이 미성숙하고 대신들이 책임 없이 방탕하게 즐기기만 하는 나라에 화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왕이 어려서부터 교육을 잘 받고 대신들은 술에 취하지 않고 강건함을 위해 먹고 힘을 키우는 나라는 복이 있습니다(16-17). 대신들이 게으르게 행하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잔치만 즐기면 나라는 망합니다. 또 왕에 대해서 항상 불만을 품고 있는 나라는 좋게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에 대한 불만을 함부로 표출하면 결국 왕이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18-20). 주권자들과 위정자들을 겸손하게 대해야 함을 교훈 합니다. 

 

오늘 말씀은 지혜자와 우매자의 대조가 뚜렷합니다. 이 둘은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지혜자의 길은 인생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은 감사함으로 즐깁니다. 우매한 자는 알 수 없는 미래도 확신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며 교만함 가운데 인생을 즐깁니다. 원하는 대로 반란도 일으킵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명백합니다. 오늘 하루도 지혜자의 길을 걸으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우리에게 주신 것의 양면을 잘 생각하면서 유익하게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2일 (토요일) 전도서 9장

오늘 말씀에서 전도자는 자신의 연구와 삶을 돌아보면서 결국 모든 인간이 가게 되는 죽음의 결말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의인이든 악인이든, 지혜자이든 우매한 자들이든, 맹세하는 사람이든 그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든 간에 모두 같은 결말,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3). 그리고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하면서 삶이 죽음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자아의식이 있지만 죽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그런 가능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면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는 식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죽음 이후에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삶이 낫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하면, 우리가 살아서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가지지 않고서, 죽은 후에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삶은 죽음보다 낫습니다. 삶에는 미움과 사랑과 시기의 감정이 있지만, 죽음 앞에서는 이 감정도 없어집니다. 그러면서 지혜자는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즐겁게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 속에는 하나님과 관계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쾌락을 즐기라는 교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를 아시고 일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날들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일들을 힘을 대해 하고 지금 아니면 안되는 것 같이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로 몫을 감당하라고 하는 것입니다(4-10). 이것이 진정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즐겨라)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고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 자들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로 누리며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전도자는 때와 시기를 알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급하게 자신의 상황을 판단하고 좌절하지 말고 고난 가운데 부르짖고 인내해야 합니다(11-12). 또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실망과 허무함에 굴복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도시를 위기에서 구한 가난한 지혜자는 잊혀집니다. 삶은 항상 옳은 일을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수고를 늘 알아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조용한 지혜의 말이 시끄러운 우매한 자의 말보다 낫기에 결국에는 우리의 지혜로운 삶과 행동은 공동체를 이롭게 할 것입니다(13-18).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기쁨으로 즐기고 감사함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과 가정과 자녀와 직장과 건강과 여러가지 은사와 능력들을 감사함으로 사용하고 삶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1일 (금요일) 전도서 8장

오늘 말씀에서 전도자는 참된 지혜자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사실 역사상 딱 두 명이었습니다. 모세가 그런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얼굴 뿐만 아니라 온 몸을 광채가 나신 참된 지혜자이십니다(1). 사실상 인간들 중에서 참된 지혜자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서 지혜자는 왕 앞에서 행하는 사람에게 신중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취할 합당한 태도에 관한 조언입니다. 왕 앞에서 겸손해야하는 이유는 그에게 권위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왕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왕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은 불행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2-5). 무슨 일이든지 적당한 때와 판단이 있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은 그때를 잘 판단하여 조언을 합니다(6). 하지만 그 역시 어느 누구도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바람을 주관하지 못하고, 죽는 날도 자신이 결정이 하지 못하며, 전쟁할 때에 제대로 제어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7-8). 이는 모든 인간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사실 인간 왕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무한하시고, 전능하십니다. 

전도자는 계속해서 인생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를 보고 허망함을 표현합니다. 세상의 일을 잘 살펴보니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일이 있습니다(9). 그런데 그렇게 다른 사람을 억압하면서 부와 명예를 축적해 온 사람도 결국 잊혀집니다. 다른 사람을 억압하면서 살아온 그의 삶도 헛됩니다(10). 또 악한 사람을 제대로 징벌하지 못하여 악을 행하는 일이 빈번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장수하는 일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도 잘되고 장수 합니다. 겉보기에는 죄인들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나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인들은 장수하지 못하고 그림자와 같이 없어질 것입니다(11-13). 현실에서 악인들이 오래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정의의 심판의 날은 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그림자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또다른 부조리는 악인들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게 되는 아이러니 한 상황도 있습니다. 반대로 의인의 행위대로 취급 받는 악인들이 있습니다. 이런 부조리한 삶은 허무합니다. 때문에 희락을 즐기고 주어진 오늘을 즐겁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14-15). 이것은 쾌락만을 추구하는쾌락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부조리 속에서도 하루하루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쁨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지혜자는 자신이 최선을 대해서 지혜를 찾기 위해서 밤낮으로 노력을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의 결론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아무리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다시 한번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겸손하게 나아가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16-17).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부조리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억울한 일도 당하게 되고, 의인이 악인 취급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이유 없이 미워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도 생깁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인생 속에서 확실한 한가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결국 그림자와 같이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께 기억되고 잘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우리의 삶 속에서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매일의 삶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30일 (목요일) 전도서 7장

오늘 말씀에서 전도자는 전반적으로 ‘~보다 낫다’는 형식을 빌어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는 것은 좋은 평판을 받는 것이 귀한 기름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즉 명예를 얻는 것이 재물보다 낫다는 말입니다(1).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는 것은 삶보다 죽음이 낫다고 하는 6장의 생각이 이어지는데 죽음은 고생의 날이 끝나지만, 출생은 고생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2).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슬픔을 당하면 대체적으로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기 때문입니다(3). 그래서 지혜자는 초상집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우매자는 잔치집에만 기웃거리며 희락만 즐기고 죽음 후의 삶을 준비하지 않습니다(4). 지혜로운 사람의 쓴 충고가 우매한 사람의 칭송보다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칭송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5-6). 탐욕과 뇌물은 지혜와 명철한 사람을 굽게 만듭니다(7).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탐욕과 뇌물을 멀리합니다. ‘일의 끝’은 어떤 사업의 끝을 의미할 수도있고, 삶의 끝을 의미할수 있습니다. 전자로 이해하면 일을 마무리 하는 것이 시작보다 낫다는 의미이고, 후자로 이해하면 앞에서 말한 것과 일맥 상통하게 죽음이 삶보다 낫다는 의미입니다(8). 성급하게 화를 내는 것도 지혜자 답지 않은 행동이며 과거의 화려함과 성공만 생각하며 지내는 것도 지혜롭지 못한 생각입니다(9-10). 지혜는 금과 은보다 귀하기 때문에 그것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1-12). 한편, 지혜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좋은 날과 나쁜날을 주셨기 때문에 좋은 날에 감사하고, 슬픈 날에는 삶을 되돌아 보라고 합니다. 미래의 일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매일의 삶이 좋은 날이든, 슬픈날이든 우리 삶에 유익하게 살아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자 자신도 삶을 돌아 봤을 때, 이해하기 힘든 일이 생긴다는 것을 봅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고 악인도 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어중간하게 살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선한 삶을 살았다는 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인간을 지나치게 의지하지 않고, 그렇다고 악한 길로 가서도 안됩니다.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도, 또 선한 일을 행하면서도 그것의 한계를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의로운 자라도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약점과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지나치게 의존하면 결국 실망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 보아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3-22). 

사람은 아무리 지혜가 있다고 해도 한계가 뚜렷합니다. 참된 지혜는 인간이 쉽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 마음 깊은 곳도 통달하시고(고전2:10), 인간의 악함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도록 하십니다. 지혜자가 참으로 소유하고 싶었던 참 지혜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29). 인간의 죄와 불순종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갈라 놓았습니다. 이것을 해결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참된 지식, 복된 소식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드문데 우리가 그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그 깨달음은 성경에 기록되어 많은 사람이 깨닫도록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가져야 하는 지혜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또 우리가 싸워하는 지식이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것입니다. 때로 성공을 위해서 예수님을 뒤로 제쳐 놓는 것들입니다. 진정한 삶의 참된 의미를 십자가에서 찾고 하나님이 주신 오늘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삶을 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참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29일 (수요일) 전도서 6장


오늘 말씀에서도 재물에 대한 교훈이 이어집니다. 인생의 불행한 일 중에 하나는 어떤 사람이 원하는 모든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아서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누리게 되는 일입니다(1-2).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부를 주시고 많은 것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것도 누리게 하지 아니하시면 헛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실 물질적 부요에만 치우치지 말 것을 은연 중에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누리는 것은 행복이지만, 그렇다고 주시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시는 것에 감사하면서 겸손하게 누릴 수 있는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누리는 것을 주실 수도 있고, 취하실 수도 있는 절대적인 분이심을 전제에 두고 있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물질적인 부요에 마음을 두고 때로 누리지 못하게 되는 인생을 보면서 오히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천년의 두 배를 산다 해도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간다면 막 태어나 죽은 아기가 나은 인생을 살았다고 봅니다(3-6). 물질적인 부요를 통해 삶의 가치를 매기고 만족을 누려는 인간적인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습니다(7). 인간의 삶은 끊임이 없는 굶주림, 곧 갈망, 배고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으로 특징지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삶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지혜자와 그것이 없는 어리석은 자와의 차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별로 없습니다. 마음으로 원하고 상상하는 것을 이루고 소유하게 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사실 그것도 결국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 같습니다(8-9).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것을 받고 싶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더 많은 부를 허락해 주시면 더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그것도 헛되다고 합니다. 현실에서 약간의 편리함과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부가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주시기 바라기 보다, 주신 것에 감사하고 참된 만족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하고 누려야 합니다. 

이어서 전도자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다시 상기 시킵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다스림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동물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그가 동물을 다스리고 보호하고 지켜준다는 의미입니다. 아담의 이름을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을 다스리는 더 강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논쟁하는 사람은 유익이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가 있고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스스로 얼마나 더 약한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심지어 인간은 무엇이 자신에게 유익한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도 못하는 불확실한 미래 가운데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렇게 약한 자들임을 인정할 때 결국 강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고, 미래의 불안함을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10-11).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낄 때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연약하고 무의미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강함과 유의미한 삶을 주시기 위해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새로운 힘을 주시고, 미래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실 것입니다. 물질에 소망을 두지 말고, 우리의 몸도 영혼도 신실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우리의 유일한 위로를 붙들고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28일 (화요일) 전도서 5장

오늘 말씀 1-7절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조심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특히 발과 말을 삼가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의식과 행위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집은 성전이고, 성전에는 제사하러 옵니다. 하지만 제물을 드리는 것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말씀 드린 것은 꼭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근하시다고 함부로 대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서원을 갚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보답을 하는 행위인데, 그렇게 하겠다고 해놓고 나중에 마음이 바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갑작스러운 일로 상황이 바뀌어 지키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는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의도적으로 마음을 바꾼다면 그것은 어리석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중하고 우리의 꿈을 이루는 것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전도자는 가르칩니다.

 

8-9절도 비슷한 맥락에서 가장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살피시고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왕이든 신하이든 땅에서 소산물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을 사랑하는 것은 헛됩니다. 재물의 풍요로움은 결코 인간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나아가 재물이 많아지면 그것으로 인해 걱정과 생각도 많아 지기 때문에 잠도 못 자게 됩니다. 또 인간의 욕심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도록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재물들은 재난을 당할 때 없어지고, 심지어 열심히 모은 것도 자식에게 물러 줄 수도 없는 상황도 생깁니다. 우리는 벌거벗은 채 이 세상에 왔고, 결국 빈손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썩어 업없어질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수고와 근심과 분노에 대한 처방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현재의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심에 감사하고(18), 제 몫을 받아 누리고 즐기는 것입니다(19).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즐긴다는 것은 만족과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자리가 있고,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때로 직장에서 관계적인 어려움과 일적인 어려움, 혹은 노동의 강도에 비해서 수고의 대가가 적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을 주심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즐기며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27일 (월요일) 전도서 4장

전도자는 이제 이 땅에 있는 학대에 대해서 말합니다. 학대 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위로자가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합니다.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은 힘과 권력이 있지만 학대 받는 자들은 권력자들에게서 구원해 줄 위로자가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학대를 당하는 일이 없는 이미 죽은 자들이 지금 살아 있는 자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그것보다 아직 태어나지 않아 그런 경험도 없는 자가 더 복되다고 말합니다(1-3). 또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수고와 모든 뛰어난 기술이오히려 이웃에게 시기가 나게 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도 헛되다고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익히고 열심을 내어 살아도 이웃이 그것을 질투하여 관계가 틀어지고 결국 홀로 남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매한 사람이 게을러서 팔짱을 낀 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성공을 너무 몰두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손 가득 바람과 같은 성공을 잡기 위해서 수고 하는 것보다 한 손의 것만 가지고 평온한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4-6). 

전도자는 또 한가지 허무한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후손과 형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고한 것을 나눌 자도 없고 넘어졌을 때 일으켜 줄 동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고 합니다. 혼자만을 위해서 성공의 길을 달라가는 것의 허무함을 의미합니다(7-12). 하나님은 사람을 홀로 살아가도록 지으시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도자는 권력의 헛됨을 말합니다. 권세는 일시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 없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보다 가난하지만 지혜를 갖고 살아가는 젊은이가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지혜로운 자가 지위에 나아가기 때문입니다(13-16). 

 

오늘 말씀은 인간의 온갖 노력과 성취는 경쟁과 시기에 불과 하고 그 수고의 결과가 아무런 유익이 없게 되는 인생의 덧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개인주의적 인생의 외로움과 고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인생이 각광을 받습니다. 홀로 삶을 즐기는 것을 권장합니다.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개인적인 삶의 허무함을 지적하고 공동체적 삶의 중요성을 부각합니다. 사람은 그 옆에 누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학대 당하는 자들의 참된 위로자가 되시고, 넘어진 인생을 일으켜 세워줄 친구가 되시며,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독하고 허무한 삶에 참된 의미를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외롭고 허무한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참된 위로자와 친구와 지혜로운 왕이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외로운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26일 (주일) 전도서 3장

오늘 말씀은 ‘때’에 대해서 말합니다. 전도자는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때에 맞춰서 계획을 세우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따라서 삶은 운행이 됩니다. 그래서 내 계획이 때로는 잘 받고, 때로는 어긋나기도 합니다. 우리의 계획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것입니다. 사람들이 애를 쓰며 수고를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덕분이지 우연히, 혹은 자연스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은 지으셨고, 세상 만물을 때에 따라서 운영하시면서 아름답게 하셨습니다(11).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는 것은 모든 것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손길로 보살피심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영원’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며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죄는 그런 교제를 사모하는 마음을 왜곡하여 다른 것을 사모하게 만들어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이 문제를 해결하게 위해서 오셨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바르게 작동하기 위해서 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작과 끝, 곧 모든 것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셔서 그분과 매순간 교제하며 한 걸음 한 걸음을 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허무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의미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며 즐거움을 누리고, 여호와를 경외해야 합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그것에 따른 기쁨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 곧 은혜이기 때문입니다(12-13). 단지 인간이 수고하는 것은 허무하게 끝이 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영원하고 완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영원하시고 완전하심 가운데 일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그분을 경외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지 단지 그분의 위대함을 자랑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의 수고를 우리의 것으로 여기면 허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알고 그렇게 고백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그 수고는 영원하게 됩니다. 

이어서 전도자는 가장 공평해야 할 재판과 법의 집행도 악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사람이 만든 법과 질서에 의지하는 사람도 결국 완전함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법도 불완전합니다. 사회적인 약속 조차도 사실은 잘 지키지 않습니다. 인간과 동물이 가장 구별되는 점으로 법과 상호적인 약속에 신실함을 주장했던 사람들과 달리 인간과 동물이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전도자의 관점입니다. 왜냐하면 동물이나 인간이나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그 죽음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17-22). 때문에 인간은 현재의 죽음을 이기는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이시고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열매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때가 차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성경대로 고난 받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셔서 허무하고 의미 없는 인생을 의미있는 인생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의 일과 학업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함으로 허무한 삶이 아니라 참된 의미가 있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25일 (토요일) 전도서 2장


하나님이 없는 삶이 허무하다는 전도자의 발언은 계속됩니다. 그는 인생의 즐거움도 헛되다고 합니다. 인생의 참된 기쁨을 얻기 위해서 전도자는 마음을 즐겁게 해 보기로 합니다(1). 하지만 웃음과 희락도 결국에 헛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2). 세상에서 웃기고 재미있다는 것을 다 해본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적당히 술을 즐기면서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지혜를 추구할 수 있을지 생각했고, 그렇게 하면서 스스로를 위해서 집도 짓고 포도원과 과수원도 가꾸는 큰 프로젝트도 진행했습니다. 그것은 성공적이어서 이전의 모든 왕들보다 더 부를 축적했고 성적인 즐거움도 마음껏 누렸습니다. 왕으로서 아주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었고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스스로 노력하여 정당하게 누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10). 그리고 나서 자신의 성취를 돌아보면서 생각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렇게 자신의 손으로이룬 성공과 성취가 모두 바람을 잡는 것 같이 다 헛되고 무익하다고 합니다(11). 그렇게 능력이 있고 성공하는 사람의 삶과 무능력하고 성취한 것이 없는 인생을 비교해 볼 때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이 땅에서 큽니다. 하지만 그 둘 모두가 당하는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성공의 비법을 앎)를 가지고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영원히 기억되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 입니다. 왕은 우매한 사람이 당하는 일을 자신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자신이 성공을 위해 살아온 모든 삶이 헛된 것 같이 느껴져서 인생의 허무함을 토로합니다(5-17). 자신이 수고하여 쌓아 놓은 모든 것들이 자신의 아들이나 미래 세대에 전달 될 때에 만약 그 사람이 지혜가 있는 사람이면 잘 유지하고 발전시킬 것이지만, 우매한 사람이면 헛된 성공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허무함과 실망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지혜(삶의 비법)와지식(학문)과 재주(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수고하여 얻은 모든 것을 결국 수고하지 않은 자에게 넘겨주고 삶을 떠나야 하니 헛된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이 땅에서 수고하고 마음에 애쓰는 것이 결국 슬픔만 남게 됩니다. 평생 수고하고, 밤잠을 설치며 마음을 쓰며 이룬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18-23). 삶의 진정한 의미는 수고를 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한탄한 후에 전도자는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립니다. 결국 사람이 먹고 마시고 성공을 위해서 달려가는 것도 하나님께로 나와야 참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24). 왕보다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왕도 결국에는 다 해보니 하나님에게서 의미를 찾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만이 참된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십니다. 하지만 죄인들에게는 수고하게 하시지만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고 이 땅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허무한 것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과 성공을 맛본 전도자는 우리에게 그것의 허무함을 알려줍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진정한 가치가 있으려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인정하고 이 땅에서 수고의 열매를 맺음으로 참된 수고와 성공적인 삶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24일 (금요일) 전도서 1장


전도서는 잠언과 마찬가지로 인생에 관한 교훈을 줍니다. 전도자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전도서를 시작합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그 끝이 허무하다고 합니다. 열심히 수고하여 이룬 것이 결국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2). 세대와 세대는 오고 가고, 해는 뜨고 지고, 바람은 이리저리 붑니다. 물은 물길을 따라 흐릅니다. 그 가운데 정작 진정한 삶의 의미는 없습니다. 내가 잘되고 잘못됨에 세상이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해 아래서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새롭게 보이는 것도 모두 이전에 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되는 것도 없습니다. 이전에 무엇인가 큰 업적을 이루어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잊혀집니다(3-11). 얼핏 보면 전도서의 시작이 인생의 덧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적인 견해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도서는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적인 인생관을 가지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11절에서 허무하고 덧없는 인생에서 가장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해와 바람, 물 등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그저 자연만 바라보고 그것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삶에 대한 허무함과 덧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발견한 새로운 어떤 것도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발견한 것 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런 희망을 둘 수 없고, 오직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다고 고백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왕으로 부러울 것이 없던 사람이었고, 마음을 다해 온갖 세상의 지혜를 동원하여 연구하고 깊이 인생을 살펴본 결과 인간은 지혜가 부족하고 비참한 존재이며 그 어떤 희망도 스스로는 발견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12-14). 삶의 의미를 자연과학에 찾은 것입니다. 하지만 탐구를 하면 할 수록 그것이 오히려 번뇌를 가져다 주고, 지식이 자신에게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해주지 못해 허무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15-18). 

 

인간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고대의 왕은 단지 혈통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엄청난 공부와 학문을 겸비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왕도 결국 인생 자체로 의미를 발견할 수 없어서 허무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 없이 인간의 탐구와 지식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사람들의 결말을 보여줍니다. 바로 허무함입니다. 인간에게서 참된 지혜와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로 존엄하지만, 인간 자체만으로 참된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와 비참함을 인정하는 것이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는 첫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삶의 의미가 되심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11월 23일 (목요일) 잠언 31장


오늘 말씀은 르무엘 왕이 자신의 어머니께서 자기 교훈하기 위해서 들려준 잠언을 기록한 것입니다(1). 르무엘 왕은 이방인 왕이지만 그의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물려 받은 왕인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왕의 어머니가 교훈 한 것은 크게 보면 술과 여자입니다. 귀하게 얻은 아들에게 가장 먼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여자를 차지하고 성적인 만족을 누리는데 사용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왕을 멸하는 전쟁에만 마음이 빼앗기지 말라고 합니다(3). 그리고 나서 술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는 것이 왕에게는 옳지 않다고 합니다. 술을 의존하게 되면 올바로 정세를 파악하여 바른 판단을 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재판을 바르게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4-5). 독주와 포도주가 필요한 사람은 육체적으로 고통이 너무 심하여 진통제로써 쓸 필요가있는 사람에게 유용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실 때, 포도주를 거부하셨던 것은 십자가의 고통을 온전히 우리를 위해서 당하시기 위한것이었습니다. 독주와 포도주는 일종의 치료제나 고통을 일시적으로 덜기 위해서 사용된 것입니다. 때문에 술을 멀리하고 바른 판단을 내리고 왕적인 권한으로 늘 말 못하는 자와 고독한 자를 대변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7-9).

 

이어지는 10절에서 31절은 르무엘의 어머니의 잠언이기 보다 잠언 전체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잠언의 결론은 ‘현숙한 아내’ 곧 지혜로운 아내(여자)에 대한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이런 지혜로운 여인을 찾는 것은 비싼 진주를 찾은 것 보다 훨씬 더 값어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여인과 결혼한 남편은 그녀를 신뢰하고 그녀는 남편에게 선을 행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지런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 가정에서 필요를 채우고 집안의 종들과 자녀들에게 주어진 일을 할수 있도록 적절하게 배분하여 줍니다(15). 또 밭의 일을 살펴 보고 포도원도 가꾸고 장사가 잘 되는 날이면 그날은 늦게까지 영업을 하기로 합니다(16-19). 경제적인 안목과 능력도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돕는 일도 잊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집안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집안 사람들 모두 이중으로 되어 있는 옷을 입고 있어서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자신을 위해서도 아름다운 이불을 만들고 옷도 적절하게 잘 입습니다(20-22). 그녀의 남편은 그 지역에서 다른 장로들과 함께 다스리는 일을 잘 감당하여 좋은 평판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경제적인 활동도 여전히 이어갑니다(23-24). 그녀는 능력과 존귀함으로 옷을 입은 사람과 같고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며, 지혜의 말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인애의 율법을 가르치고 집안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싫어하며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고 남편에게는 칭송을 받습니다(25-31). 그 칭송은 외모가 아닌 그녀의 여호와를 경외함, 곧 지혜입니다(30).

 

오늘 말씀에서 ‘현숙한 여인’은 원더우먼이 아닙니다. 돈을 잘 벌고 유능한 여성도 아닙니다. 그녀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성입니다. 곧 지혜의 여성이고, 지혜가 의인화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여성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덕목입니다. 남성과 여성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영역에서 성실하게 임해야 함을 교훈 해 줍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 현숙한 여인과 같이 지혜로운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22일 (수요일) 잠언 30 장

오늘 말씀은 아굴의 잠언입니다. 아굴은 구약에서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인생에서 깨달음을 후대에전해져야 할 만큼 유익하기에 기록되었습니다. 1절은 해석이 어려운데, 학자들은 ‘이디엘’과 ‘우갈’을 인명으로 해석하느냐, 의미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뜻이달라진다고 합니다. 인명으로 해석하면 아굴의 아들들로 이해되는 이디엘과 우갈에게 주는 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미로 해석하면, “나는 피곤합니다, 오 하나님, 나는 완전히 지쳤습니다.”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둘 다 가능한 해석입니다. 여하튼 아굴이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은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능력을 먼저 고백하는 것입니다(1-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기 때문에 자신은 사람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지금까지 그는 자기 중심의 본능을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아굴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기 전에 얼마나 무지한 삶을 살았는지 고백하는 것입니다(3-4). 그후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순수하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하는 자를 붙드심을 고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말씀에자신의 생각을 더하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것입니다(5-6). 아굴은 처음에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믿은 사람으로보여집니다. 그가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깨닫고 드린 기도를 이어서 소개합니다. 

 

아굴은 하나님이나 사람을 속이지 않고, 극단적인 가난이나 부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님이나 사람을 속이는 것은 악인의 삶의 특징입니다. 또 너무 많은 부는 교만에 빠지게 하며, 하나님을 무시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너무 부하게도 만들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반대로 너무 가난하게 되는 것은극한의 가난 때문에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너무 가난하지는 않게 해 달라고 합니다. 어쨌거나 하나님께 바르게 서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어서 인간관계에 관련된 비정상적인 경우에 관한 잠언을 줍니다. 종을 주인에게 거짓말로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종은 하나님께 아뢰고 결국 하나님께서 거짓으로 알린 사람에게 갚으실 것입니다(10). 아무리 종이라도 그를 비방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주인에게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을 넘어 저주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부모님을 저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돌로 쳐 죽일 수도 있는 아주 중한 죄입니다(11). 그런 자들이 또 모여서 ‘무리’를 형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그 사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 스스로는 깨끗한 척하고 높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미련함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이 있습니다(12). 눈이 높다는 표현은 외적인 거만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해서 하나님도 무시합니다(13). 앞니는 폭력과 권력을 상징합니다.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괴롭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폭력과 권력으로 약자들을 괴롭히는 악한 무리들을 의미합니다(14). 

 

15-16절은 피를 빨아 먹는 거머리와 같이 만족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의인화하는데, 음부는 끊임없이 생명을 삼키는 존재를 의인화 한 것이고, 여성이 잉태하려는 강한 욕구를 의인화하고,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불입니다. 음부와 불은 파멸적인 욕구이며 태와 땅은 생명의 요구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삶은 살고자 하는욕구와 죽이고자 하는 욕구로 가득 차 있는데, 참된 생명을 향한 욕구로 향하기를 교훈하는 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부모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녀에 내릴 언약적인 저주에 대해 말한 후(18), 인생의 불가사의를 서넛 말하면서 우리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 채워져 있으며,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21-23), 작고 미약하지만 지혜로운 것들도 존재하고(24-28), 강한 존재들이 있음을 말합니다(29-31). 이처럼 세상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항상 겸손하고 악을 멀리하기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 잠언은 인간 관계와 사회, 그리고 자연에서 우리가 겪는 경험들을 중심으로 지혜자의 삶을 교훈합니다. 항상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하라고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라고 교훈을 줍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무지함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21일 (화요일) 잠언 29장

오늘 말씀은 악한 자와 지혜로운(의로운) 자의 대조가 주를 이룹니다. 악한 자는 아무리 책망을 받아도 교정이 안되는 사람으로 그런 사람들은 갑자기 패망할 것입니다. 또 이런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합니다. 하지만 많은 의로운 사람이 권세를 잡으면 즐거워합니다(1-2). 지혜를 사랑하는 자녀는 부모에게 큰 즐거움이 되고 위안이 됩니다. 하지만 자녀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쫓지 않고 세상의 것을 쫓아 살고, 성적인 범죄와 사치하며 지내면 재물을 잃게 됩니다. 때문에 부모님은 자녀에게 재물이 아니라 지혜를 물려주어야 함을 교훈합니다(3).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해야지 뇌물을 억지로 내게하며 다스리는 나라는 망합니다(4). 단지 달콤한 말로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은 진정으로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앞에 그물을 놓는 것입니다(5). 마찬가지로 스스로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쳐놓은 그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의인은 욕심이나 부끄러움이 없으므로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6). 의인은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고 헤아립니다. 가난한 자들도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그들 편에 서고 그들을 돕고 마음을 나눕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악인은 그런 지식이 없습니다(7). 거만한 자는 공동체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슬기로운 자는 공동체에서 분쟁의 상황에서 분노를 잠재워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8). 예수님께서 참된 슬기로운 자로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우리 사이에 분노를 잠재우신 분이십니다.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의 싸움은 끝이 없습니다. 미련한 자는 지혜로운 자가 웃으면 웃는다고, 화내면 화낸다고 시비를 걸기 때문입니다(9). 마찬가지로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도 항상 자신과 달리 온전하게 사는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에게 위협적입니다(10). 이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대결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될 것임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자신의 분을 다 드러내는 사람은 어리석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억제 합니다. 자기 절제입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입니다. 결국 성령께서 우리를 더 지혜롭게 만들어 가십니다. 

거짓말을 좋아하는 통치자가 다스리면 그 신하들은 자연스럽게 다 악하게 됩니다(12). 빈부 격차가 심하여도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신다는 것은 그들에게 모두 일반적인 은총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또 당장에 심판하지 않으시지만, 결국 심판하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13). 왕이 가난한 자에게 귀를 기울여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나라는 든든히 서 갑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4). 자녀를 바르게 책망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반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결국 부모를 욕보일 것입니다(15). 우리의 자녀들은 가만히 두어도 될 만큼 선하지 않습니다. 자녀들도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할 죄인들입니다. 말씀을 따라서 책망하고 교훈 하는 것은 부모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딤후3:16). 의인들은 악인의 망함을 결국 보게 될 것입니다(16). 자녀를 바르게 징계하면 바르게 성장하여 평안과 기쁨을 부모에게 줄 것입니다(17).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강이 해이해져 백성들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인내하는 자는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18). 악한 종은 징계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하지 않습니다(19). 말을 성급하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지 보여주는 잠언입니다(20). 자신의 신분과 지위의 한계를 명확히 알도록 교훈 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21).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쉽게 분노하고 싸움으로 이어짐을 경고하는 잠언입니다(22). 교만한 사람은 결국 낮아지고, 겸손하면 높아질 것입니다(23). 가장 겸손하고 낮은 분은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한 없이 낮아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빌 2:6-9). 

도둑질 하는 것과 자기 영혼을 미워하는 것을 연결하는 것은 도둑질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물질적인 욕심으로 채우고자 하는 행위로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은 필요 이상의 물질적인 욕심으로 나 자신을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책정하려는 사람은 도둑과 짝하는 것이며 자신의 영혼을 미워하는 것이기에 경계해야 하겠습니다(24). 사람을 두려워하며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올무에 걸리게 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견고한 반석과 같이 마음이 안정되고 안전합니다(25). 왕이나 통치자의 힘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많지만, 사람의 일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법적인 힘을 빌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이루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늘 인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26). 불의와 의가 항상 대치될 것임을 말하는 잠언입니다(27).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늘 겸손하고, 분노하지 않고,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고, 자신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무엇보다 참된 의로운 분이시고 겸손한 분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20일 (월요일) 잠언 28장

오늘 말씀은 율법을 강조하는 잠언이 반복됩니다. 사실 잠언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과 그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과 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율법을 따르지 않으며 사는 자를 악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그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결핍을 느낍니다. 하지만 의인은 담대합니다(1). 악한 나라는 권력자가 힘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으나 명철과 지식이 있는 사람 덕분에 세워져 갑니다(2).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격언은 그 만큼 사회가 율법에 떠난 것임을 보여줍니다. 율법은 최소한의 가난한 자들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규칙을 정해 놓았는데, 그것이 작동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곡식을 남기지 않는 폭우와 같이 잔인한 사회가 되지 않도록 율법을 준수해야 합니다(3). 그러면 정의가 바르게 서게 될 것입니다(4).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악인을 대적합니다(5). 가난해도 율법을 지키며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 부유하면서 율법을 어기는 사람보다 낫고, 그는 또한 지혜로운 아들로서 아비에게 자랑이 됩니다(6-7). 과도한 이자를 받는 것도 율법이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과도한 이자로 부를 축적한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그것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줄 것입니다(8).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증거로서 율법을 행하기를 노력하지 않으면서 기도만 드리는 것은 가증한 것입니다(9).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여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자기 함정에 빠질 것입니다(10).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부자와 자신을 살피는 가난한 자를 비교 대조합니다. 누가 더 바른 삶을 사는 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압니다(11). 의인이 많은 사회는 영광을 얻게 되지만 악인이 많은 사회는 불의를 참지 못해 사람들은 숨어버립니다(12). 항상 율법을 준수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복이 있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은 재앙에 빠집니다(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한 길을 갈수 없습니다. 하지만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아 용서받고 형통한 삶을 살 것입니다(14). 가난한 백성을 억압하는 관리는 부르짖는 사자와 같이 잔인한 사람입니다. 이 또한 율법으로 금하는 것으로 그런 관리는 지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15). 무지한 치리자는 15절의 악한 관리와 의미상 같습니다. 탐욕과 무지로 가득한 치리자는 폭력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치시기에 명이 짧아 집니다. 하지만 탐욕을 멀리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장수하게 됩니다(16).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곧 포악하고 살인한 사람은 결국 적절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지만 성실하게 행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17-18). 또 성실하게 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은 풍족하게 될 것이지만 방탕하게 허비하는 사람은 일확천금을 꿈꾸지만 결국 궁핍하게 됩니다(19). 하나님께서 주신 직장과 학교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학업하는 것은 모든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덕목입니다. 20, 22절도 마찬가지 교훈을 줍니다. 

율법에 입각하지 않고 개인적인 친분이나 뇌물로 재판을 굽게하는 것은 지혜자의 길이 아닙니다(21). 상대방을 율법에 따라서 바르게 충고하는 것은 아첨하는 사람보다 더 사랑을 받습니다(23). 부모님의 것이라고 해서 그것을 도둑질하는 것, 곧 유산을 탐내어 억지로 빼앗거나 술수를 부리는 것은 결국 5계명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때문에 멸망 받는 자와 같은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24). 이렇게 욕심을 부리고 계명을 어기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지만 여호와를 의지하며 계명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풍족하게 될 것입니다(25). 자기의 마음을 믿는 것보다 율법을 따라서 지혜롭게 행하는 사람이 구원을 얻습니다(26). 마찬가지로 율법의 정신을 따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게 됩니다(27).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28절은 12절과 의미상 같습니다. 

 

오늘 하루도 율법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지키는 지혜로운 자의 길을 걸어갑시다. 실패할 때마다 우리 삶 속에서 부족한 것을 예수님께 아뢰며 다시 일어나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 지혜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19일 (주일) 잠언 27장

오늘 잠언은 겸손함과 친구에 관한 내용이 반복됩니다. 우리는 미래의 일을 미리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겸손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2절에서 칭찬이라는 말도 ‘자랑’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미련한 자의 분노가 돌과 모레 보다 무겁다는 것은 사람을 괴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분노의 바탕은 주로 투기와 질투이고, 그것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않는 겸손하지 않은 데서 비롯됩니다(3-4). 시기와 질투를 버리고 분냄은 성령의 열매와는 반대되는 육체적인 일로 시기와 질투 가운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합니다(갈5:20-23). 때문에 교회 안에서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을 성령의 열매 맺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말로써 상대방을 꾸짖고 책망하는 것은 드러나지 않고 사랑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사랑의 표시는 항상 상대방에게 좋은 것만 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 꾸짖음과 책망(면책)도 포함이 됩니다(5).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종종 책망하시고 꾸짖기도 하셨습니다(막8:33). 때문에 참된 친구는 다소 마음이 아프지만 책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원수가 호의를 표하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6). 사람에게 모든 것이 좋고 나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 질 수 있습니다(7).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나는 것이 늘 좋은 것은 아닙니다(8). 친구의 충성된 권면은 맛있는 음식 향기처럼 아름답습니다(9). 나아가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는 멀리 있는 가족보다 나은 친척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참된 친구는 세대를 넘어 맺어질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서로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10). 

11절은 독자에게 다시 한번 무엇보다 지혜를 얻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지혜를 얻고 살아가는 아들은 참된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런 아들(자녀, 제자들)은 재앙을 보면 피하고 경제적인 부분에서 자기 처신을 잘 하기에 큰 걱정을 끼치지 않습니다. 또 경우에 맞는 행동으로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상대방의 상황을 살피며 행동합니다(12-14). 비오는 날에 떨어지는 물방울, 바람을 제어하는 것, 기름을 오른 손으로 움키는 것은 모두 어쩔 방법이 없다는 공통된뜻이있습니다(15-16). 고대에 철보다 단단한 금속은 없었기 때문에 철은 철로 연단했습니다. 그와 같이 친구 사이는 서로 어려움과 즐거움을 함께하며 돈독해진다는 뜻입니다(17). 정성껏 가꾼 나무에서 열매를 얻는 것과 같이 주인을 정성껏 섬기는 사람은 주인으로 부터 합당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18). 좋은 친구란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비추는 존재로 서로에 대해서 알게 합니다(19).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의미하는 잠언입니다(20).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사람은 칭찬을 통해서 더욱 단련이 됩니다(21). 미련한 자가 얼마나 그 미련함을 벗어나기가 어려운지 알려주는 잠언입니다(22). 23-27절은 다른 요령을 피우거나 대박을 꿈꾸지 말고 주어진 양 떼와 소 떼를 잘 돌봄으로 정당한 이익을 취하라는 교훈입니다. 부지런히 주어진 일을 잘감당할 때 적당한 부도 함께 오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마음을 두고 재산을 불리기 위해서 편법과 거짓을 일삼는 것을 금지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정당하게 얻은 소득을 기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삼으셨습니다(요15:14-15). 그분이 먼저 참된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서로에게 참된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요삼1:15). 세상에서 말하는 친구가 아니라 말씀에서 말하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겸손하게 행하며, 예수님의 친구로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참된 친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18일 (토요일) 잠언 26장

오늘 말씀 1-12절까지의 주제는 미련한 자입니다. 미련한 자는 어리석은 사람을 말하는데, 특히 하나님과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미련한 생각과 행동을 멀리하라는 잠언입니다. 

미련한 자가 영예를 누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영광을 누리게 되는 사회는 비정상적이며 파멸을 초래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1). 미련한 자의 이유 없는 저주는 효력이 없어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2). 미련한 자에게는 영광이 아니라 ‘매질’이 어울립니다. 그는 나귀와 말과 같이 매질을 당하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고 완고하기 때문입니다(3). 이런 미련한 자의 말을 따라 하지 말고, 그것을 인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지혜로운 줄 알기 때문입니다(4-5). 미련한 자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6). 또 미련한 자의 잠언(경험, 관찰, 지혜)은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술 취해 비틀 거리 다가 들고 있던 가시나무에 자기가 찔리거나 다른 사람을 찌르는 것과 같이 위험한 것이기에 멀리해야 합니다(7,9). 미련한 자에게 영예(권력이나 힘)을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살상무기) 같이 수많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권력과 힘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8).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 장인이 아무리 뛰어나도 조수로 미련한 자가 들어오면 일을 망치게 됩니다(10). 미련한 자는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듯이 실수와 죄를 반복하고 스스로 지혜롭게 여겨 고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11-12). 

 

미련한 자와 비슷하게 게으른 자는 온갖 핑계를 대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하지 않으며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기만 하고, 심지어 눈 앞에 있는 것도 집어 먹기 싫어합니다. 이런 자는 미련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게으른 삶을 살면서 스스로는 일곱 지혜자보다 지혜롭게 여기기 때문입니다(13-16). 가장 미련하고 게으른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지헤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부지런히 살아도 영적으로는 게으른 자입니다. 

 

17-28절은 사회의 문제가 되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와 같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이웃을 속이고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하고 피해자를 조롱하는 사람이 당시에도 있었던 것입니다(17-19). 말쟁이는 중상모략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근거가 없는 말로 남을 헐뜯어 명예에 손상을 입히는 것을 중상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공동체를 이간질시켜 다툼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숯불 위에 숯을 더하고 타는 나무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이미 싸우고 있는 마당에 더 싸우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대개 중상모략은 두 편이 사이가 좋지 않은데, 한 편에서 근거가 없는 말로 남을 헐뜯습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미련한 자는 그런 상황을 좋아하고 싸움이 더 커지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또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말은 온유하게 하는 사람은 빛깔은 화려하지만 싸구려인 불순물이 썩인 은과 같습니다. 그것은 위선이며 우리의 원수 사탄이 하는 수법입니다. 결국 마음의 미움과 악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20-26).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속이는 부드러운 말이 아니라 비록 말과 표현은 서툴지 몰라도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하기 위해서 함정을 파고 돌을 굴리는 사람과 거짓말로 남을 속이는 사람은 결국 자기가 그것에 당하게 될 것입니다(27-28).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해하지 않고 속이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미련한 자와 같은 행동을 단 하나도 하지 않으신 참된 지혜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길을 걸어오라고 명하시고 격려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본 것 같이 나에게 미련한 자의 모습은 없는지 살피고 서로에게 진실되며 참된 지혜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17일 (금요일) 잠언 25장

오늘 말씀도 솔로몬의 잠언 모음집입니다. 25장에서 29장까지 잠언은 히스기야 때에 앗수르의 위협 속에서 백성들이 기억하면서 살아야 할 솔로몬의 잠언들을 신하들을 통해서 필사한 것들 입니다(1). 그래서 처음 부분에 왕과 관련된 잠언이 등장하고 왕에 관한 교훈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왕의 영광은 구분이 됩니다. 하나님은 감추어진 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없고, 신비롭게 세상을 운영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분이 세운 왕은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질서(과학적인 법칙)을 드러내는 일을 지원하고 활동하여 영광을 누립니다(2).  지혜로운 신하는 이런 왕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3). 또 왕은 마치 은을 연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은을 얻듯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악한 신하는 제거되면 왕위는 더욱 굳건하게 섭니다(4-5). 신하들은 겸손하여 자신을 높이지 않아야 합니다(6). 높은 체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면 결국 망신을 당할 것입니다(7). 또 신하는 급하게 서둘러 싸움에 휘말리지 않아야 합니다(8). 뿐만 아니라 신하로서 다른 사람과 다툼이 있을 때에 그 다툼에 관한 것에만 시비를 가려야지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다툼을 넘어 신의를 지키지 못하는 큰 죄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옳더라도 책망과 나쁜 평판이 따라다닐 것입니다(9-10). 오히려 우리는 경우에 합당한 말만 하여 서로를 세워주고 보호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럴 때 최고의 사과가 최고급은 쟁반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관계가 최고의 관계가 될 것입니다(11). 슬기로운 책망은 그것을 들을 때 고급 귀고리와 같이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합니다(12). 왕에게 충성된 신하는 마치 아주 더운 날 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 더위를 식혀주고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는 얼음물 같습니다(13). 반대로 왕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거짓으로 부풀려 말하는 자는 악한 신하로서 그런 사람은 비없는 구름과 바람 같아서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사람입니다(14)

이어서 오래 참음과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교훈과 남의 집에 자주 다니는 것에 대한 교훈이 나오는데, 모두 행위의 절제와 관련이 있습니다(15-17). 또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는 교훈이 나옵니다. 그것은 곧 사람이 죽이는 몽둥이나 칼과 화살과 같이 거짓된 증거로 그 이웃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18). 또 힘든 시기에 진실하지 못한 자를 의지하는 것은 부러진 이와  탈구된 다리와 같아서 오히려 넘어지기만 할 것입니다(19). 마음이 상한 사람을 옆에 두고 자신이 기분이 좋다고 노래하는 것은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고  더욱더 춥게 만들고 아프게 만드는 부적절한 행동으로 지혜자와 거리가 먼 행동입니다(20). 21절에서 원수는 18-20절에서 나타난 거짓증거하고 마음의 상처를 주는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도 인간으로서 최소한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할 때 그를 도와야 합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고 하셨습니다(눅6:35). 그렇게 하는 것이 핀 숯을 원수의 머리에 올려 놓는 것으로 제대로 복수하는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선으로 악을 갚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복수입니다(21-22). 이스라엘에서 북풍은 비를 몰고 오지 않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로 이웃을 비난하고 헐뜯는 사람은 이웃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23). 오랫동안 기다리던 소식을 듣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임을 말하는 잠언 후에(24),  의인이 악인에게 굴복하는 것은 샘물이 더러워지는 것 같이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입니다(25). 또 꿀을 많이 먹으며 토하게 되는 것 같이 자기의 영광만을 추구하며 사는 자는 결국 헛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26-28). 

 

오늘 잠언에서 처럼 우리 모두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께 충성되고 그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종들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또 우리의 삶 속에서 잠언 말씀에 비추어 지혜롭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면 점검하여 참된 지혜자로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16일 (목요일) 잠언 24장

오늘 잠언은 악인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와 교제하지 말라는 권면으로 시작합니다(1-2). 악인이 잘된다고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결말을 생각하고그들을 더 멀리해야 합니다. 반면에 지혜(하나님을 경외함)로 집을 바르게 세우고, 명철로 굳게 하는 사람은 그 집이 온갖 아름다운 것으로 풍성하게 됩니다. 악이 아니라 지혜가 집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지혜 있는 자는 점점 강해 집니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자들과 함께 논의하며 전략을 세우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을 삶을 허비하지 않고 지혜롭게 계획을 세우고 그분을 경외하며 일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3-6). 참된 생산성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에게 이런 지혜는 너무 멀리 있는 것 같기에 가지지 못합니다. 따라서 공개적인 토론이 열리는 성문에서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지략이 많음과 대조가 됩니다(7). 

8-9절은 내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악한 생각과 거만한 생각은 미련한 것이고 결국 사람들에게 미움을 얻게 됩니다. 10-12절은 부조리와 억울한 상황을보고 자신이 힘이 없다고 여기고 그냥 지나치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불의를 직면했을 때 비겁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13-14절에서 지혜는 꿀송이와 같이 달콤하고 유익하여 마치 어린 아이가 사탕을 원하고 단것을 좋아하듯이 지혜를 구하고 찾기에 갈급해야 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지혜를 얻으면 밝은 미래가 있고 참된 소망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얻은 자에게 주는 영생과 소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악인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습니다. 때문에 결코 악인은 의인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의인은 원수가 넘어진다고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또 1절에서 본 것 같이 지혜자는 악인이 잘 되는 것으로 분을 내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인은 결국 등불이 꺼지는 것과 같이 순식간에 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그가 세우신 왕을 두려워하며 악한 길로 가지 않을 것을 권면 합니다(15-22).

23절부터 지혜로운 자의 말씀이 추가로 이어집니다. 재판할 때 아는 사람이라고 공정하지 않게 판단하는 것과 악인을 옳다고 하는 자는 백성의 원성을 사게 됩니다. 오히려 악인을 견책하고 공의를 세우는 왕이나 재판관은 기쁨을 얻고 복을 받습니다(23-25). 또 올바르고 정직한 대답은 신뢰감과 친밀감(입맞춤)을 줍니다(26). 27절은 집을 세우는데, 곧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데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127편은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으시면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경제적인 준비에 초점을 두지만 경제적인 준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는 가정에 대한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28-29절은 원수를 갚을 악할 생각으로 재판에서 증인으로 서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악할 말로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지막으로 30-34절은 게으름에 대한 권면으로 지혜자는 게으른 자의 포도원과 밭이 형편없이 약탈 당하기 쉽게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포도원과 밭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가꾸고 재배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땅한 의무를 하지 않는 것이 게으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녀로서,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부모로서 등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을 성실하게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잠언의 말씀들을 기억하면서 어리석고 악한 자가 아니라 지혜롭고 슬기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15일 (수요일) 잠언 23장

오늘 말씀 1-8절은 관원과의 식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관원’은 정부의 고위 관리입니다. 그는 손님을 초대하여 식사를 베풀 때 일반적으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합니다. 순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음식에만 정신이 팔려서 음식에만 집중하고 관리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큰 화를 당할 수 있습니다. 4절의 말씀에서 부자가 되는 것과 연결되는 것을 볼 때 관원과 결탁하여 어떤 경제적인 이익을 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렇게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왜냐하면 재물은 허무하고 순식간에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목숨을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관원의 악한 의도를 알게 되면 먹은 음식이 역겨워지고 칭찬의 말들이 헛된 것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9절은 미련한 자에게 아무리 지혜로운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미련한 자처럼 지혜의 말을 무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지혜의 말씀을 말해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은 미련한 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옛 지계석과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는 것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박탈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추수할 때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밭의 양 끝에 있는 곡식은 남겨 두었습니다. 지계석은 조상들에게 받은 것으로 그것을 옮긴다는 것은 다른 가난한 사람의 밭을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자들의 호소를 듣고 하나님은 갚으십니다(10-11). 지혜자는 훈계와 지혜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12). 자녀를 극도로 감싸며 훈계하지 않는 것도 지혜로운 행동은 아닙니다. 훈계해야 할 때는 엄하게 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영원한 죽음에서 건지고 악한 길에서 건질 수 있게 됩니다(13-14). 자녀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지혜롭고, 말이 늘 정직하다면 그것은 부모의 큰 기쁨이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그의 미래를 책임져 주십니다(15-19). 지혜자는 술과 고기를 즐기는 사람들과 멀리해야 합니다.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허비하는 것이기에 게으른 자와 같이 취급됩니다. 결국 영적, 육적으로 가난해 질 것입니다(20-21). 부모님을 공경하는 길은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쫓고 지혜와 훈계와 명철을 귀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믿는 부모는 가장 즐겁습니다(22-25). 반대로 부모를 근심하게 하는 자는 지혜에 마음을 두지 않고 지혜의 길을 즐거워하지 않고 음녀의 길로 행하는 자입니다. 세상의 정욕을 쫓아서 살아가는 자입니다(26-28). 이어서 지혜자는 술에 대한 교훈을 짧은 격언으로 묶인 잠언에서 이례적으로 하나의 주제로 아주 길게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술은 재앙, 근심, 분쟁, 원망, 까닭 없는 상처, 충혈된 눈의 원인입니다(29-30). 술은 마음의 병과 육체의 병을 가지고 옵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의 백성에게 그것을 쳐다보지도 말라고 합니다. 결국 술은 지혜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독사의 독과 같이 치명적인 악한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마음을 흐리게 하여 결국 지혜의 길에게 멀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에 강력하게 금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술을 즐기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보다 술을 더 의지하게될 것입니다(35). 

 

참된 진리와 지혜를 쫓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다른 사람들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잠언에서 실제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말씀을 묵상하시고 우리 삶에서 어떤 부분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할지 생각해보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14일 (화요일) 잠언 22장

오늘 잠언에서는 재물과 가난, 부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22:1, 2, 4, 7, 9, 16등). 그러면서 재물이나 금전적인 이익보다 명예(이름)와 은총(호감)을 얻기를 더 택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명예와 은총은 하나님께서 얻게 하도록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이름을 내고 명예와 부를 쫓으려 합니다(바벨성을 지은 사람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이름을 내게 해 주심을 바라봅니다(아브라함). 따라서 지혜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예와 은총을 쫓아 갑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부자라고해서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고(2), 어리석은 자와 같이 악을 따라가지 않습니다(3). 오히려 겸손하게 여호와를 경외하며 하나님께 상을 얻습니다(4). 패역자의 길은 가시와 올무가 있기에 지혜로운 자는 그런 자들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5). 때문에 마땅히 피할 길과 가야할 길을 어릴 때부터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때로 징계하며 양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6,15). 부자와 채권자가 가난한 자와 빚진 자를 주관한다고 하는 것은 빚지는 일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입니다(7). 악인은 악을 뿌려 악을 거두지만 선한 눈(마음)으로 가난한 자를 돕는 사람은 복으로 거둘 것입니다(8-9). 거만한 자는 다툼을 일으켜 공동체에서 쫓겨나야 하지만,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는 존귀하게 여김을 받게 됩니다(10-11). 여호와의 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을 지키지만, 사악한 사람의 말은 패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2).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는 게으르고 온갖 핑계를 대며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하지 않습니다(13). 14절은 1-9장에서 말한 음녀의 유혹, 죄의 유혹을 멀리해야 함을 교훈 합니다. 이익을 위해서 가난한 자와 부자에게 뇌물을 주는 사람은 오히려 가난해질 것입니다(16).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서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부터는 다시 한번 지혜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촉구합니다. 지혜를 마음에 지키며 말로 실천하는 것은 우리 삶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것이 결국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신뢰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7-21). 그리고 나서 다시 약한 자에게서 빼앗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신원을 들으시고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22-23). 또 화를 자주 내는 사람과 사귀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본받아 같이 화를 자주 내고 결국 그것이 영혼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24-25).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보증을 서지 말라고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 만큼 다른 사람을 도와 주어야지 자신의 경제적인 능력 넘어서 돕기 위해서 보증을 서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6-27). 옛 지계석은 조상들이 정해준 땅의 경계를 의미합니다.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땅과 유산을 잘 관리하여 팔리지 않게 하라는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질 일에 능숙 해야 하고 그렇게 될 때  천한 자 앞에서 서지 않을 것입니다(28-2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과 성공 자체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와 성공(명예)이 아니라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을 하나님과 나와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고, 관리하며, 물질적으로 연약한사람을 돕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지혜로운 자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추구해야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13일 (월요일) 잠언 21장

오늘 잠언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씀이 비교적 자주 나옵니다. 역시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이 저변에 놓여 있습니다. 왕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이지만 여호와 앞에서 보통 인간과 같습니다. 아무리 큰 힘을 가진 왕이라도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1).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감찰하시기에 자기가 보기에 정직하여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할 수 있습니다(2). 공의와 정의의 실현은 왕의 임무였습니다. 왕은 겉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공의와 정의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3). 때문에 교만함과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것, 악인의 강포,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을 싫어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만한 자를 벌을 받게 하여 정의를 실현할 때 어리석은 자들도 지혜를 얻게 됩니다(4-11). 마음이 편한 움막에 사는 것이 다투는 아내와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은 가정에서 다툼이 없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9,19). 의로우신 하나님은 정의를 베푸시고 악인을 벌하십니다. 이와 같이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도 가난한 자들에게 공의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난한 자들은 곧 믿음의 형제들입니다(12-13). 뇌물은 정의를 굽게 하지만, 화를 그치게 하기 위한 선물은 유익합니다. 정의가 올바르게 시행되고 적용될때 의인들에게는 이익이지만 죄인들에게는 패망이 됩니다(14-15). 인생의 참된 슬기로운 길(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16). 게으름과 잔치를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궁핍이 그들을 찾아 올 것입니다(17). 18절은 사악하고 경건하지 못한자의 끝은 역시 파멸임을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지혜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사치와 향락으로 낭비하지 않지만 어리석은 자는 다 탕진합니다(20). 다시 공의와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데 공의과 인자(헤세드, 언약적 신실함)를 따라서 사는 사람은 생명과 영광을 얻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입니다. 22절은 전쟁의 맥락에서 원수와 싸울 때 그 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공략합니다. 믿음의 싸움에서도 우리는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으로 공략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항상 말을 조심하고 서로에게 상냥하고 예의 바르게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23-24). 게으른 자가 욕심을 부리면 결국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이나 불법적인 일로 눈을 돌리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의인은 정직하게 일을 하고 그것을 나누는 것에 기쁨을 누립니다(25-26). 악인은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을 속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악한 자가 악한 의도로 드리는 제물을 결국 하나님께서 징벌로 갚으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거짓 증인도 결국 그것이 탄로가 나 큰 수치와 징벌을 받을 것입니다(27-28). 악인 은 그 얼굴이 두꺼워서 부끄러운지 모르지만, 의인은 자기의 행동을 삼가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 갑니다(29).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지혜와 명철로도 당해낼 수 없는 높은 분이시라는 것과 결국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는 분이심을 교훈합니다(30-31). 

 

때문에 우리의 삶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향하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악인에 대한 억울함과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행위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매일의 삶을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12일 (주일) 잠언 20장

오늘 말씀에서는 술에 관한 잠언이 나옵니다. 술은 사람은 거만하게 만들고, 떠들게 만들기에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과 거리가 멉니다(1). 왕은 권력을 바르게 사용해야 하며, 신하들도 왕을 함부로 대하여 화를 자초하지 말아야 합니다(2). 미련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다툼을 피합니다. 또 지혜로운 자는 게으름을 멀리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려 상대방을 배려합니다(3-5). 많은 사람이 스스로 신실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한 길을 걸어야 하며, 그럴 때 후손들이 복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에 신실할 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6-7). 이렇게 의를 베푸는 왕에 대한 잠언이 이어지는데, 왕은 재판을 통해서 의를 회복시키고 악을 제거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권력을 주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인정하는 자만이 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8-9). 공정하지 않은 경제활동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10). 어린 아이도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정직함을 드러내는데,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이 행동으로 정직함이 드러내야 합니다(1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셨기 때문에 눈과 귀를 통해서 여호와의 뜻을 찾는데 사용해야 합니다(12). 역시 게으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잠언입니다(13). 물건을 살때의 마음과 소유한 후의 입장이 다르기에 항상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14). 금과 은보다 중요하고 값어치 있는 것은 바로 지혜로운 말을 하는 것입니다(15).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기 때문에 보증을 했을 때는 옷이나 몸으로 담보를 잡아야 하며(하지만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주어야 합니다), 속이고 취한 이득은 반드시 탈이 나고, 바른 조언을 듣고 행하라는 잠언이 이어집니다(16-18). 이는 모두 상업과 거래에 관한 잠언으로 정직함과 사람의 간사함을 알고 지혜롭게 대처하기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어리석은 자와 부모에게 말로 함부로 말하는 자에 대해서 말하는 데, 공동체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신뢰이며 부모에 대한 존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남의 약점이 비밀을 퍼뜨리는 사람과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모두 (가족)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기에 지혜로운 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19-20). 또 지혜로운 자는 쉽게 얻은 것으로 자랑하지 않고(21)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며(22), 정직한 저울을 사용하고(23), 알 수 없는 미래도 하나님께 맡깁니다(24). 뿐만 아니라 함부로 하나님께 서원하지 않습니다(25).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제대로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살피시는 줄 알고 인자와 진리로 행합니다. 그러면 그의 왕좌는 견고해 질 것입니다(26-28). 젊은 자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늙은 자는 자신의 백발(지혜와 경험)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29). 지혜로운 부모는 징계를 바르게 사용하여 악함이 자녀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신중하게 단속 합니다(30). 

 

예수님을 닮은 우리는 다양한 삶 속에서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 같이 술을 멀리하고, 정직하며, 속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우리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과 공동체를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11일 (토요일) 잠언 19장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거짓으로 재산을 모으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1). 미런한 사람은 올바른 지식이 없이 어떤 것을 바라고 성급하게 나아가 실수하기 쉬운데(2), 실수하거나 잘못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3). 이런 삶은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피해야 합니다. 4, 6, 7절은 재물과 친구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돈이 많으면 친구가 많지만 가난하면 친구와 가족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의 친구이셨고, 야고보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약1:27). 우리가 가난할 때 사람들은 우리 곁을 떠나지만, 주님은 여전히 함께 하십니다. 5, 7절은 거짓 증언에 대한 잠언으로 거짓 증인은 결국 망할 것임을 교훈합니다. 8절에서 말하는 ‘지혜’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명철을 지킬 줄 아는 자는 궁극적으로 ‘복’(토브, 선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사치를 하는 것과 종이 지도자들을 다스리는 것(왕이 됨)은 적절하지 않습니다(10). 이것은 신분에 관한것이라기 보다는 미련한 종, 지혜가 없는 종이 왕이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11-12절에서 왕에 대한 잠언이 나옵니다. 지혜로운 왕은 노하기를 더디하고 허물을 용서하고 은택을 베풀어야 합니다. 

미련한 아들은 아버지에게 폐를 끼치고 남편과 다투고 존중하지 않는 아내는 지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이 남편과 가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반대로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집안을 세우고 부지런하며 가사를 잘 돌봅니다(13-15). 또 계명을 지키는 자는 영혼을 지키는 자이지만 자기의 행실을 절제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는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계명에 따라서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을 하나님께 빌려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결국 갚아 주실 것입니다. 자녀들이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서 계명에 따라서 자녀를 징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감정이 앞서서 죽일 마음까지 들게 되면 안됩니다(16-18). 화를 심하게 내어서 사고를 치는 사람은 구해주지 말라는 것은 그것을 확실하게 다스리도록 책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화를 심하게 내는 것이 습관화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19). 지혜자의 말을 듣고 권면을 받으면 지혜로운 자가 될 것입니다. 그 지혜의 핵심은 역시 하나님의 뜻만이 완전히 서게 된다는 것을 알고(21) 인자를 사랑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22-23). 

다시 게으름에 대한 잠언이 이어지는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게으르지 않고 최선을 다합니다(24). 또 거만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며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짓된 말을 하지 않으며 살아갑니다(25-29). 

 

오늘도 참된 지혜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가정에서 서로를 잘 돌보고, 거짓말하지 않고, 부모님을 공경하며, 자식들을 바르게 말씀으로 징계하며, 부지런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10일 (금요일) 잠언 18장

오늘 말씀에서도 미련한 자의 말에 대한 주제가 이어집니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공동체를 생각하기 보다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보다 자기 생각만 드러내는 미련한 사람입니다(1-2). 악한 자를 따라다니는 것은 멸시와 능욕이지만 명철한 자의 말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합니다(3-4). 물은 생명의 근원으로 계속해서 생명력을 공급한다는 뜻입니다. 재판에서 부당하게 판결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보시기 선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대해야 합니다(5). 하지만 미련한 자는 항상 말로 다툼을 일으키고 그 말로써 자신의 삶과 생명의 그물이 되어 스스로 갇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합니다. 비록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것이 맛있는 음식과 같이 거부하기 힘들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거부합니다(6-8). 이어서 게으름에 대한 경고의 잠언이 나온데, 게으름은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힘들게 만드는 미련한 자의 행동입니다(9).

지혜자는 여호와께서 가장 안전한 곳임을 알고 그곳으로 달려가 피합니다(10). 하지만 미련한 자와 게으른 자는 안전하게 피할 곳이 없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재물을 피난처로 삼습니다(11). 그래서 부자는 재물이라는 견고한 성에 살면서 자신의 성벽을 굳게 믿지만 그것은 교만이며 멸망의 선봉입니다. 반대로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12). 

이어지는 잠언은 갈등과 다툼에 대한 지혜의 말씀입니다(13-21). 다른 사람의 사정을 듣기 전에 화부터 내거나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은 미련하여 갈등을 일으킵니다(13). 그런 갈등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면 병에서 낫는 것보다 회복이 더 어렵습니다(14). 몸이 아픈 것은 마음을 굳게 먹고 이겨내면 되지만, 마음이 무너지면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지혜자입니다. 또 지혜자는 마음과 귀를 열어 배우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믿음도 귀로 들음으로 나며,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겸손한 자세이기 때문에 지혜자로서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15). 선물은 뇌물과 달리 자신의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적절하게 잘 표현하는 사람은 중요한 사람에게 인도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적절하게 잘 표현해야 합니다(16). 또 바르게 판단을 하려면 항상 양쪽의 말을 잘 듣고 성급한 판단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분쟁에는 항상 양 편의 잘잘못이 있습니다. 때로 분쟁이 해결되지 않을 때는 공정하게 제비를 뽑아 분쟁을 해결하는 방식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제비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17-18). 가장 좋은 것은 아예 다툼이 생기지 않도록 서로 양보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손해 보는 것이 교회 안에서 다투는 것보다 낫습니다(고전6:7). 가까운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화해하기가 심히 어렵기 때문에 가까운 사이일 수록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지 않도록 서로에게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19). 20-21절은 말의 힘을 강조합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말을 신중하게 사용하도록 권면합니다. 이어서 아내(남편)는 하나님의 축복임을 기억하도록 권면하고(22), 가난한 자의 요청에 냉담하게 반응하는 부자에 대한 부정적인 잠언이 이어 집니다(23). 그리고 마지막으로 많은 친구는 해를 끼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친구와 놀기만 좋아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함께 하는 친구라면 해가 됩니다. 하지만 진정한 친구는 사귐의 정도가 깊고, 함께 생명의 길, 지혜자의 길로 가기 때문에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람입니다(24).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성도의 무리와 함께 거하면서 자기만의 생각을 고집하며 다툼을 일으키는 것보다 서로에게 경청하고 서로 배우며 항상 세워주는 말로 진정한 친구가 되는 우리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에도 지혜자로서 공정하게 판단하고 겸손하게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9일 (목요일) 잠언 17장

오늘 잠언은 무엇이 더 나은 삶인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재물이 많아 다투는 가정보다 가난하여 먹을 것이 변변치 않지만 화목한 가정이 더 낫습니다(1). 또 하나님을 신뢰하는 훌륭한 능력과 성품이 갖춘 종이 부끄러운 아들보다 낫습니다(2). 그러면 그의 능력으로 종에서 해방되고 아들과 같이 대접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분이 그렇게 변화했습니다. 금과 은이 뜨거운 불로 단련이 되듯이 하나님은 여러 역경을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을 단련하여 더 깨끗하게 만드십니다(3, 욥23:10). 이어지는 말씀에서 말에 관한 잠언도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거짓말과(4),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피하고 말을 절제합니다(7,27-8). 악한 자들은 악을 기뻐하고 뇌물을 사용하며 가난 한 자를 조롱하며, 친구를 이간질합니다(9). 하지만 지혜자는 가난한자를 긍휼히 여기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고(9), 한 마디 말을 귀히 여기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13). 결국 악한 자는 하나님께 반역만 꾀하니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11). 손자와 자식이 부모와 조부모의 면류관과 영화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자 선물입니다(6). 믿음의 대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 말씀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특히 싸움이라는 것은 둑에서 물이 조금씩 새는 것 같이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되어서 둑이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더 큰 다툼이 일어나기 전에 작은 다툼에서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14). 지혜로운 사람은 사소한 것에서도 다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사과하고 서로 양보하고 절제하고 인내하는 마음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가까운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게 하는 큰 문제 중의 하는 돈의 문제입니다(18). 잠언은 보증을 서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말하며 어려운 사람을 물질로 돕는 것에는 긍정적으로 장려합니다. 이 말은 보증을 설 때 반드시 돌려 받겠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은 금하지만, 되돌려 받을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 그냥 준다는 생각으로 보증을 서거나 돈을 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서 우리 자녀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미련한 자로 자란다면 근심이 끝이 없을 것이라는 잠언도 있습니다(21,25). 자녀들로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결국 근심이 끝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혜자들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확실히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가정이 화목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작은 다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말과 행동에서 있어서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물질로 다른 사람을 도우며, 신앙의 대가 이어지도록 자녀들에게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밖에 다른 삶의 지혜들이 오늘 말씀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두며, 그것을 기초로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것에 가치를 두며 지혜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8일 (수요일) 잠언 16장

오늘 말씀에서는 앞의 잠언보다 비교적 더 자주 ‘여호와’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며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임을 말해줍니다. 특별히 오늘 잠언은 마음의 경영과 사람의 계획을 말하고 그것을 이루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인간의 모든 계획과 시도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보여줍니다(1-4,9). 심지어 악인들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악에서 떠나 지혜로운 삶을 살아갑니다(5-6). 또 우리의 길이 여호와께 바르게 서 있다면 원수와도 화해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웃과의 관계도 영향을 줍니다. 또 재물의 문제도 앞에서 보았듯이 정당하게 적은 소득을 얻는 것이 많은 소득을 불법으로 얻는 것보다 낫다고 하면서 일맥상통한 지혜의 말씀을 줍니다. 10-15절은 지혜로운 왕에 대한 잠언이 나오는데, 왕은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며 공평하게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왕은 도덕적으로도 악을 행하지 않고(12) 진실을 말하는 자들을 기뻐하고(13) 자신의 왕권을 신중하게 사용하기 위해, 그리고 억울하게 죽음에 처한 자를 살리기 위해서 사용해야 되는데 그것에는 역시 지혜가 필요합니다. 16-30절은 다시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조로 교훈을 줍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교만하고 거만한 마음으로 살아가며 악한 계획을 세우고, 다른 사람을 이간질하며, 이웃을 좋지 않는 길로 인도하고 악한 일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패망과 넘어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겸손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생명을 얻게 됩니다. 자기가 보기에 옳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또 지혜자는 선한 말을 하여 다른 사람을 세우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가 계획한 모든 것이 헛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우리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지혜로운 자와 같이 악을 미워하고 공의를 사랑하고, 좋은 말로 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보기가 심히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천국의 원리가 아니라 세상의 원리가 더 잘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혜자가 되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일과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생명의 길을 걷고,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위로와 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7일 (화요일) 잠언 15장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자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도 이어집니다. 지혜로운 자는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해서 부드럽게 대답하며 유익한 말로 대답합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과격한 말로 싸움을 일으킵니다. 지혜로운 자의 말과 행동 저변에는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지혜자는 결국 온순한 말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키지만 악한 말을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1-4). 또 지혜자는 부모의 훈계를 감사하게 받으며 재물을 바르게 사용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도 듣지 않고 재물을 선한 길이 아니라 악한 길로 사용하기에 결국 그 소득이 고통을 줄 뿐입니다(5-7). 

악인의 제사와 길(생활방식)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지만, 정직한 자의 기도는 들으십니다. 또 공의를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그분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8-9). 

다음으로 마음의 문제를 다룹니다. 지혜자는 무엇보다 마음을 지킵니다. 왜냐하면 사망의 깊은 골짜기, 죽음을 상징하는 깊은 스올과 아바돈이 아무리 깊더라도 하나님은 보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 마음이 지혜로 향해야 하고 마음의 참된 즐거움을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10-15). 그 마음의 즐거움은 재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16).

또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 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는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서로 사랑하는 가정과 교회가, 가진 것이 많고 싸우는 가정과 교회보다 낫다는 것을 의미합니다(17). 서로 사랑하는 가정과 교회는 화를 쉽게 내지 않고 화를 내기를 더디 하며 함께 생명길을 걸어갑니다. 또 지혜로운 자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삶을 살며 부모님을 공경하며 부질없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명한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받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시의적절한 말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늘 생명의 길로 걸으며 교만하지 않고 악한 꾀를 부리지않고 선한 말을 하고 더러운 이득을 취하지 않고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 말합니다(18-28). 하나님은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의인은 훈계를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기 때문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지혜의 훈계를 따르고 겸손한 삶을 살아갑니다(29-33).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세워주며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는 지혜자의 길로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6일 (월요일) 잠언 14장

오늘 말씀도 여러 격언들이 통일된 주제 없이 열거된 것 같이  보이지만 13장 마찬가지로 다양한 일상생활의 삶의 지혜를 통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잠언의 주제를 저변에 깔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1절이 핵심 구절로 지혜는 집을 세우지만 어리석음은 집을 무너뜨린다는 주제로 통일된 이야기를 전체 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집을 세우는 지혜로운 사람은 바른 길을 걸으며 여호와를 경외하고 바른 말로 자기를 지키고 보호합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교만하여 자신의 집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입으로 매를 자청합니다(1-3).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지만 소를 통해서 얻는 것이 많다는 말은 눈앞에 보이는 조그만 이를 탐내어 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지혜의 말을 듣지 않고 잠깐의 편안함을 위해서 악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신실하고 명철을 구하지만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고 싶어도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를 얻지 못합니다(5-6). 8-15절에서는 지혜있는 사람은 사리를 분별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자신이 어느 길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사망의 길로 달려가고 죄를 가볍게(심상히) 여기기 때문에 속건제도 우습게 여깁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지만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또 지혜자는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분별하고 어느 환경에 있든지 생명의 길을 걷기 때문에 흥할 수 밖에 없습니다. 16절-24절에서는 지혜로운 자는 악을 피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대조하면서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분별하여 악을 멀리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악을 추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러지고 불의한 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러질 것입니다. 또 이웃이 부요하다고 굽실거리고 가난하다고 업신여기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의 길을 행하는 자이기 때문에 소외받고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며 그들과 아픔을 같이 하는 지혜로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 주십니다. 그 결과로 인자와 진리가 임할 것입니다.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또 지혜로운 자의 재물과 악인의 재물이 비교가 되는데, 같은 재물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재물로서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축복이 되는 반면에 악인의 재물은 미련한 것이 됩니다. 또 지혜로운 자는 귀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24-27).

 

28절에서 35절은 지혜로운 왕의 다스림을 설명하는데 결국 여호와를 경외하는 왕은 소유한 백성이 많을 것이고 생명이 약속 되지만, 어리석은 왕이 통치하는 백성의 수는 줄고 패망만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왕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왕이시기에 우리는 생명이 약속되어 있고 모든 성품에서 온유하시고 완전하신 분을 닮아 우리가 다스리는 모든 곳에서 지혜로운 왕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 학교, 직장 모든 영역에서 지혜로운 왕과 같이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며 지혜로운 왕이자 슬기로운 백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5일 (주일) 잠언 13장

오늘 말씀에서도 지혜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비교가 이어집니다. 얼핏 보면 주제의 통일성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이 보이지만, 여전히 오늘 말씀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주제를 저변에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은 지혜자의 언행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부모님의 훈계를 듣고 자신의 행동을 고치며 말을 고치고 부지런하며 거짓말을 미워합니다. 선하고 진실된 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악인은 거짓말 뿐만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부끄러운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함으로 결국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의 생명을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케 합니다. 

7-11절은 지혜자의 재물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이 허세를 부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가난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부자인 사람이 있습니다. 허세를 부리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한 삶을 살라는 충고입니다. 재물이 많다고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니며 가난하다고 모두가 다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재물이 근심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든 부하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지혜롭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만은 자신의 것을 위장한 것이기 때문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더 많은 재물을 끌어 모으기 원합니다. 그래서 다툼이 일어 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의하게 모은 재물은 결국 금방사라지게 됩니다. 반면에 정직하게 노동의 댓가를 지불하고 모은 재산은 더디지만 늘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자는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12-19절은 지혜자의 생명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합니다. 소망을 이루는 것은 생명나무라고 합니다. 간절히 필요하고 구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큰 기쁨을 누립니다. 잠언에서 생명나무는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갈 때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은 결코 상을 얻지 못하지만 계명을 두려워하며 지키는 자들에게 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역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말입니다.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은혜가 주어지고 존귀와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20-25절은 더 구체적인 보상이 언급됩니다. 지혜자를 따라서 살면 지혜를 얻고 선한 보응이 있으며, 산업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며, 부지런히 경작하며, 자녀들을 바르게 훈육하며 악에서 떠나게 합니다. 또 굶주리지 결코 않게 될 것입니다. 

 

지혜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원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가운데 모든 일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또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겸허하게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녀들을 말씀으로 바르게 양육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우리 삶 속에서 살아 내어야 할 덕목들입니다. 우리 자신이나 시대정신이 우리 말과 행동과 생각의 기준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우리의 중심이며, 그런 삶은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줍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고 일터와 학교에서 지혜자의 길을 걸으시고, 가정에서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지혜로운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4일 (토요일) 잠언 12장

오늘 말씀에서도 어제와 비슷한 잠언이 이어집니다. 1절에서 '훈계'는 징계와 같은 뜻인데, 이 절의 첫머리는 기꺼이 자신을 바로잡아 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2-3절은 의인의 뿌리가 튼튼하여 굳건하게 서있는 나무에 비교됩니다. 또 악인(미련한 자)과 의인(지혜로운 자)을 대조하면서 행동과 말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은 말을 통해서 생명을 살리고 의를 나타내며 다른 사람에 힘이 되는 반면에 미련한 사람은 칼로 찌름 같은 상처를 주고 거짓을 증언으로 공의가 바르게 서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이 되지만 거짓말은 언젠가 들통이 나게 된다고 합니다(7-19).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진실된 말과 행동을 기뻐하시고, 거짓 입술은 미워하십니다(22). 

 

오늘 말씀에서 또 반복되면서 대조를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겸손과 부지런함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생각이 정직하고(5),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15), 자신의 지식을 감추지만(23),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행위가 바른 줄 알고 고치려 하지 않고, 미련한 것을 알지도 못한채 마구 자신의 지식을 드러 내어 미련한 것을 전하게 됩니다(23). 지혜롭고 부지런한 사람은 부지런히 자신의 삶을 정돈하고 움직이며 자기의 밭도 갈고(11) 사냥한 것을 굽지만(27,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 게으른 사람은 방탕한 것을 따르며 사냥한 것도 굽지 않아 주리게 되는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정직하고 겸손하며 말로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부지런한 것입니다. 부지런하다는 것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꼭 모든 일에 성공을 이루거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공을 추구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아니라 적어도 주어진 일을 게으르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정직, 겸손, 말로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것, 부지런함은 지속적으로 나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며,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때문에 이 일을 위해서도 성령의 도우심이 꼭 필요합니다. 기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오늘 하루도 겸손하게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로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세우며,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가정과 직장과 학교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3일 (금요일) 잠언 11장

오늘 말씀은 인간의 삶의 그릇된 면과 그 결과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바른 삶을 권장하는 것입니다. 장사(사업)에 있어서 부정직과 패망, 교만, 사특한(간사하고 악함)자가 행한 패역, 허망한 부, 악한 욕망, 악인의 갑작스러운 망함, 파괴적인 말, 의와 악이 공공 생활에 미치는 영향, 험담, 보증의 위험, 소원과 성취, 인내의 잃음, 무법함과 보복 등입니다. 이런 삶들은 우리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하며 헛된 욕망을 쫓아서 사는 삶을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말에 있어서 늘 다른 사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지혜로운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재물관은 항상 그것이 우리의 삶을 좌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고 그것이 결코 우리의 삶을 지배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재물을 통해서 항상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제하는 것은 풍족하게 되며 자기도 윤택하게 됩니다. ‘윤택’이라는 말은 목말라서 죽어가는 삶이 갈증이 해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한 물질적인 고통을 받는 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줌으로 그 사람도 갈증이 해결될 뿐만 아니라 주는 사람도 동일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25). 16절에서 ‘유덕한 여인’은 ‘은혜로운 여자’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비롭고 근면 성실한 여인을 말합니다. 그런 여인들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얻습니다. 또 17절에 ‘인자한 자’는 언약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하나님 자신에게 성실하게 자비를 베푸신 것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오늘 잠언에서 주목할 것은 역시 의인의 삶과 악인의 삶의 대조입니다(3, 6, 7, 8, 9, 10, 11, 18, 21, 23, 27 절 등). 의인도 반드시 그 행동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되는데, 악인은 더욱 그렇지 않겠느냐고 잠언은 마칩니다(31). 의인과 악인들 모두 지상에서 보응을 받게 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악인의 길을 버리고 의인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의인의 길을 가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잘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시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의인의 길을 걸으며 혹 악한 길로 같을 때에도 얼른 돌이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지혜의 삶, 의인의 삶을 살아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2일 (목요일) 잠언 10장

잠언 1-9장은 솔로몬의 ‘훈계’의 잠언을 담고 있다면 10장부터 22장 16절까지는 솔로몬의 ‘금언’ 혹은 ‘격언’입니다. 훈계는 일정한 대상과 구체적인 상황과 문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로 ‘너’라고 말하거나 ‘아들들아’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금언과 격언은 삶에서 얻은 지혜로 특별한 대상이 없이 일반적으로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지혜를 담은 어구들’로 속담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기억하기 쉽도록 간단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구체적인 맥락이 없고 일반적으로 적용이 가능합니다. 또 대부분 직설적인 격언이 있지만 더러는 속담도 있기 때문에 표면적인 문장을 넘어서는 해석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잠언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데 힘을 주는 '좋은 말' 정도로 생각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잠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잠언에 있는 격언은 우리의 신앙이 실제적이기 때문에 마음에 새기고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여 변화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여러가지 격언들이 등장합니다. 이 격언들의 특징은 ‘대조’입니다. "A는 00이나 B는 00이다"는 식입니다. 분명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단호하게 흑과 백으로 나누어야 하는 면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지혜로운 아들로 아버지의 기쁨이 될 것인가, 미련 자로 어머니에게 근심을 끼치는 아들이 될 것인가?," "무익한 불의의 재물을 쌓을 것인가? 아니면 죽음에서 건져주는 공의로운 삶을 살 것인가?", "하나님께서 주리지 않도록 해 주시는 의인의 삶을 살 것인가? 악한 욕심을 따라 살 것인가?" 등 입니다. 대부분의 문구들은 그대로  받아 들이면 됩니다.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만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10절에서 ‘눈짓하는 자’라는 것은 교묘한 속임수나 잔꾀를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길을 굽게 하는” 행동에 속합니다. 15절에서 부자의 재물과 가난한 자의 궁핍을 비교한 것은 도덕적인 가치 평가가 아니라 세상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잠언 18장 11절은 여호와의 이름이 강한 망대라고 분명히 말함으로 부자가 재물을 과신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지적해 줍니다. 그래서 16절에서 비슷한 맥락의 격언이 나옵니다. 22절에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며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한다”는 것은 참된 복은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임을 말해 줌과 동시에 우리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그것은 앞에서 말한 의로운 삶(1-9장)과 뒤에서 이어지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경외하며(27절) 주어진 우리의 삶을 성실하고 부지런한 삶을 살 때 근심이 없는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풍성함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잠언의 말씀들을 마음에 두시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선한 것과 좋은 것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켜나가시고 의인의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풍성함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1월 1일 (수요일) 잠언 9장

오늘 말씀에서도 지혜는 어리석은 자들을 자신에게로 초대합니다. 지혜가 자기의 집을 짓고 낙성식에 초대합니다. 잔치에 초대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자신의 초대에 응답하여 어리석은 자들이 지혜가 주는 참된 음식(빵)을 먹고, 참된 음료를 먹으며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고 명철의 길로 행하라고 합니다(1-6). 예수님께서도 잔치 초대의 비유를 사용하셨고 스스로 참된 양식과 음료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1-14, 요6:55). 이어지는 구절에서 거만한 자는 지혜의 책망을 받아 들이지 않지만 지혜로운 자는 책망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더 슬기로워지고 의로워지고 학식이 더하여 질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며 거룩하신 이를 깊이 아는 것이 명철(슬기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초청에 나아가는 첫 걸음을 하나님과 내적인 관계를 맺는 것임을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초청에 나아가는 첫 걸음은 그분을 받아들임으로 그분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런 연합으로 인해서 생명의 날이 많아 집니다. 지혜로운 자들은 거만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지혜를 추구합니다(7-12). 이제 지혜와 대비되는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외칩니다. 그녀는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불러서 죄악 된 길로 인도합니다. 도둑질한 물이 더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며 그것을 좋게 생각합니다. 잔치의 떡과 포도주, 그리고 생명을 주는 지혜로운 여인과 달리 미려한 여인은 사람들에게 훔친 물과 떡을 줍니다. 이런 물과 떡으로 유혹하여 어리석은 자들을 꾀고 결국 죽음의 길로 인도합니다(13-18). 

 

오늘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지혜와 미련한 여인이 모두 어리석은 자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무엇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 찬치에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사탄도 그의 나라에 초청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둘 중의 하나의 초청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을 따라서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 지혜의 근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않는 것이 미련한 여인의 초청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초청을 받는 것입니다. 두 길의 결과는 분명합니다. 성경은 중립적인 지역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초대하셨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바랍니다. 또 아직 지혜의 초청에 응답하지 않고 있는 우리 가족과 친구들, 동료를 위해서 기도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하나님의 초청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31일 (화요일) 잠언 8장

오늘 말씀에서 다시 지혜가 인격화 되어서 나옵니다. 앞에서 죄나 유혹이 인격화 되어 음녀로 묘사된 것과 대조가 됩니다. 지혜는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자들은 명철하고, 미련한 자들은 마음을 밝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 자들은 지혜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지혜는 가장 선하는 것을 말하며 악을 미워하고 의로운 것을 말하고 좋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말은 많은 금이나 은, 진주보다 더 낫습니다(1-11). 왜 더 나은지 이어서 설명합니다. 지혜는 명철과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게 해 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곧 지혜로움은 악을 미워하며 교만하고 악한 행실을 미워합니다. 또 지혜는 좋은 계략과 바른 판단력을 하게 해주며 사물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지혜로 지도자들은 바르게 판단하고 공의롭게 다스리며, 재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12-16). 지혜가 이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입니다. 이런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이 지혜의 사랑을 받고, 지혜를 간절히 찾는 자들이 지혜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또 지혜는 부귀와 영화와 명예도 가져다 줍니다(17-21). 그런데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온 자이며 모든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세움을 받아 창조의 사역을 함께 했던 존재입니다. 그 지혜로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기준과 경계를 정하셨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셨습니다(22-31). 그래서 이 지혜에서 나오는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자들은 복을 받고 생명을 얻고 하나님께 은총을 얻게 됩니다. 반면에 이 지혜의 말씀을 무시하고 잃는 자들은 영혼을 해롭게 하고 지혜를 미워하는 자들은 영원한 사망을 초래 합니다(32-36).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지혜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동시에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과 병행이 됩니다(골1:15-16, 요1:1-18, 눅11:49). 이 말은 신약의 저자들이 예수님을 잠언에서 말하는 참된 지혜이라고 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인화된 지혜는 어떤 원리나 힘이 아니라 신적인 본질을 인격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인간적인 지혜나 원리나 힘도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이 존재는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했던 신적인 존재로서 성육신 전의 성자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이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얻을 것이며, 간절히 찾는 자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에게 참된 부귀영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누리는 부귀 영화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부귀영화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은 계명을 지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장).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을 참되게 찾고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삶은 참된 기준을 예수님으로 세우고 악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버리는 자들입니다. 우리 평생에 참된 지혜 이신 우리 예수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아 인격적인 교제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0월 30일 (월요일) 잠언 7장

오늘 말씀에서도 솔로몬은 후세대들에게 아들이라고 부르며, 자기의 말을 지키고 계명을 간직하라고 합니다. 계명과 법은 지혜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마치 여동생같이, 명철을 가족같이 소중하게 여기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그 지혜가 음녀에게 빠지지 않게 지켜 줄 것이라고 합니다(1-5). 이어서 지혜를 버리고 음녀를 따라가는 어리석은 자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음녀를 찾아가고 음녀는 그를 맞이합니다. 그녀는 시시때때로 이런 어리석은 자를 기다립니다. 그녀는 남편이 있지만,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여러 말로 어리석은 자를 유혹합니다. 어리석은 젊은이는 그 유혹에 넘어가 음녀를 따라갑니다. 그 모습이 마치 소가 도수장에 끌려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러 가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6-23). 그래서 솔로몬은 이 잠언을 듣는 모든 후세대에게 이 어리석은 자의 길을 가지 말고 마음이 음녀의 길로 향하지 않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음녀는 결국 많은 사람을 상하게 하고 엎드려 지게 만들고 많은 사람을 죽음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녀의 집은 깊은 무덤과도 같습니다(24-27). 

 

이것은 단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는 남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다른 어떤 것의 유혹에 넘어가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묘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혜이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자들입니다. 지혜의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유혹이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여 그 유혹을 뿌리치고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과 함께 진리의 길로 끝까지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29일 (주일) 잠언 6장

오늘 말씀은 ‘보증’에 대한 문제를 다룹니다. 이웃을 위하여 담보를 하고 타인을 위하여 보증을 했다면 그것이 속히 끝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섣부른 보증이나 담보로 헤어나올 수 없는 경제적인 위기를 초래해서는 안됩니다. 보증이나 담보는 확실치 않은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제관을 보여줍니다. 누군가에게 경제적인 약속을 했다면 그것은 분명히 지켜야 하며, 또 그것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면 겸손하게 이웃에게 말해야합니다(1-5).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으로 과도한 빚이나 담보나 보증은 삼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남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또 이어지는 말씀과 같이 매사에 부지런하며 감시하는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6-11). 오늘 말씀은 지혜로운 자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경제적인 부분도 하나님의 지도를 받으며 이웃에 대해서 성실하게 대하며 살아갑니다. 

이어서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불량하고 악한 자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불량하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회에 주어진 율법과 규칙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말과 눈과 손과 마음으로 범죄하고 항상 다툼을 일으키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재앙이 닥치면 살길이 없게 됩니다(12-15). 또 솔로몬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나열합니다. 교만한 눈, 거짓된 혀, 무죄자의 피를 흘리는 손, 악한 계획을 세우는 마음, 악을 즐겁게 행하는 발, 거짓 증인과 형제 사이를 이간질 하는 사람 등 입니다. 앞에서 불량하고 악한 자들이 하는 짓과 유사합니다. 이런 죄악을 피하기 위해서 항상 하나님의 법을 떠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길로 인도하고 등불로서 생명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지니고 살아간다면 끔직한 결과를 초래하는 음녀와 악한 여인에게 빠지 않게 됩니다(16-35).

 

오늘 말씀은 매우 실제적인 교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주인이 되시기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원리로 세워 지기 원하십니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항상 정직하여 담보와 보증이 필요 없도록 해야 하며, 불가피하게 해야 할 때는 반드시 지키며 속히 담보와 보증이 끝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부지런하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기억하고 교만과 거짓과 이간질에서 멀리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은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우리 평생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28일 (토요일) 잠언 5장


오늘 말씀은 음행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잠언에서 음녀는 지혜와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며 지혜를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음행을 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음행은 성적인 범죄를 넘어 이방신을 섬기는 방식 중의 하였기 때문에 우상숭배와 긴밀히 연결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시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는 결혼 밖에서 음행이 공공연하게 성행했습니다. 솔로몬은 잠언을 읽는 모든 후 세대에게 음행이 비록 주변에 성행하고 유혹이 강하지만 그런 길을 가지 않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음행의 결과는 참으로 쓰고 결국 죽음으로 이끌 것이며 앞에서 말한 생명 길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1-6). 그래서 솔로몬은 음녀와 음행을 멀리하고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면서 그 피해에 대해서 말합니다(7-8). 음행은 평생 쌓아 온 명예를 잃게 만들고, 평생 수고한 재물을 잃게 만듭니다. 또 몸과 육체가 쇠약해 질 것입니다. 그런 후에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9-14). 때문에 솔로몬은 젊어서 취한 아내와만 성적인 쾌락을 즐기라고 권면합니다. 그녀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하며, 항상 그녀의 사랑만 갈망하라고 합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음행에 빠지지 않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으 보고 계신다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은밀하게 짓는 죄도 다 보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결혼 관계 안에서 성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 아무리 그렇게 살아도 문제가 없다고 해도,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면 거부하는 것입니다. 음녀의 유혹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결혼 밖의 성생활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심지어 먼저 성적인 관계를 맺어보고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며, 사랑하는 사이라면 얼마든지 결혼 전에도 성적인 관계를 누려도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의 결말은 오늘 본문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네덜란드 사회와 한국 사회가 이런 결말로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은 건강한 성적인 관계가 결혼 관계 안에서 서로를 즐거워하며 서로의 품을 항상 족한 줄 앎에서 온다고 말씀해 줍니다. 결혼 관계에 있는 분들은 하나님 안에서 서로만을 사랑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또 오늘 본문을 영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품만 족할 줄 알고 다른 세상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인식합시다. 이것은 결혼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든 아니든 모두에게 적용이 됩니다. 우리 마음을 다른 것에 두지 말고 항상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께만 우리 마음을 두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멘. 

10월 27일 (금요일) 잠언 4장

오늘 말씀에서도 3장과 비슷한 잠언이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솔로몬이 ‘아들들(여러 제자들 혹은자녀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 또한 아들로서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지혜에 대해서 배웠다고 합니다. 그 부모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얻고 명철을 얻을 것을 가르쳤고, 그 지혜를 버리지 않고 지혜를 사랑하면 그가 솔로몬을 지켜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혜를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그 지혜를 매우 가치 있게 여기고 품고 살아가면 그 지혜가 그를 높여주고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1-9). 지혜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단히 지혜를 사랑하고 높이고 귀히 여기며 품고 자기 모든 것을 팔아서 얻어야 할 것입니다. 지혜를 한 번 얻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지속적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서 그분을 사랑하고 귀히 모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이어서 솔로몬은 믿음의 자녀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기를 권면합니다. 훈계의 목적은 악한 길에서 떠나 아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11-13). 악인의 길에서 미련 없이 돌아서라고 권면합니다. 악인들의 행위를 보면 강도와 폭력을 일삼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기며, 빼앗은 것으로 배를 채우고, 술이 주는 즐거움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14-17). 반면에 의인의 길은 밝고 빛이 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과 사귐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요한1서 1: 7). 악인의 길은 어둠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무지한 가운데 살아갑니다(18-19). 

또 솔로몬은 아들에게 다시 한번 새로운 교훈을 주는데, 무엇보다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생명을 주고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말들을 지켜야 하고, 눈으로 좋지 않은 것을 보는 것에서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과 행동들이 모두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직한 길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악한 것을 보고, 듣고, 악한 길을 가는 것은 결국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악한 길은 외부의 유혹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행동을 조심하지 않고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도 지혜를 사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부모로부터 배웠습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이 가장 큰 지혜이며 명철이라는 진리가 잘 전해지도록 함께 본이 되도록 노력하고 기도합시다. 또 우리 삶 가운데 예수님을 힘을 다해 찾고 귀히 여기며 사랑하는 지 돌아보고 우리의 마음을 지켜 생명의 길로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26일 (목요일) 잠언 3장

오늘 말씀에서도 이 잠언을 듣는 사람들을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아버지와 같이 교훈을 주는 자기의 법을 잊지 말고 마음으로 명령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장수하고 평강이 더할 것이라고 합니다. 1절에서 12절은 같은 구조를 따릅니다. “…하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명령과 주어질 복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인자와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살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귀히 여김을 받고,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분을 매순간 인정하면 길을 지도해 주시고,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난다면, 건강하게 될 것이고 또 재물과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면 창고가 가득하고 포도즙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 그것이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하는 것이 하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단지 명령을 잘 지키면 복을 준다는 하나의 공식이 아니라 무엇보다 삶의 태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육체적, 물질적인 복들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단지 영적인 측면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바꿉니다. 내가 얻는 재물이 나의 지혜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할 때, 그 재물이 우리에게 우상이 되지 않고 복이 됩니다.

이어서 솔로몬은 지혜를 얻는 것이 모든 것을 얻는 것보다 귀한 일임을 말합니다. 지혜는 금, 은, 진주보다 귀하고 기쁨과 평화와 생명력 있는 삶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도 그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이 지혜를 얻고 간직하는데 힘을 쏟으라고 합니다. 그 지혜는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으로이끌 것입니다(13-26). 우리의 삶이 무기력하다면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을 추구하고 붙들며 그분에게서 오는 생명력과 기쁨을 공급받고있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또한 지혜로운 삶은 하나님과 관계에만 몰두하지 않고 이웃에게 그 관계를 확대합니다.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27-28), 까닭 없이 다른 사람을 해하지 않고(29-30), 포악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으며(31), 정직하여 하나님과 함께 계획하면서 살아갑니다(32, 교통=계획하다, 세우다). 그 결과 악인의 집은 여호와의 저주가, 의인의 집에는 복을 얻습니다. 그리고 거만한 자를 하나님이 비웃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얻되, 미련한 자가높은 지위에 오른 것(영달함)은 결국 수치가 되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33-35). 

 

잠언의 말씀은 매우 실제적이고 실생활에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참된 지혜를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삶의 태도와 생각과 방식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25일 (수요일) 잠언 2장

솔로몬은 이 교훈을 듣는 사람을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전하는 말과 계명은 하나님의 율법에 기초한 것입니다. 귀에 지혜를 두고 마음에 명철을 두라고 합니다. 명철은 모든 일을 지혜롭게 잘 처리 하거나 분별력 있게 좋은 판단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지혜와 명철을 얻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라고 합니다. 은이나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부지런히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경외하기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지혜와 명철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1-6). 또 그렇게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지혜를 찾으려고 부단히 수고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방패가 되어 주시며 보호하여 주셔서 선한 길을 알게 하시고 지혜와 지식으로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7-9). 또 지혜는 악한 길에서 떠나게 해주고 음녀와 이방 계집, 곧 이방의 풍습을 따라서 결혼 관계를 벗어나 무분별하게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과 멀어지게 해줍니다. 그런 성적인 관계는 당시 종교와 밀접하게 관계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언약을 깨뜨리게 됩니다. 그 결국은 죽음이며 죄악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길에서 멀어지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지혜는 적극적으로 선한 자의 길로 가도록 해주며 의인의 길로 가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찾고 구하며 따라가는 정직한 자는 땅을 얻게 되고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게 됩니다(10-22). 

 

오늘 본문에서 의인화된 지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혜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으심, 부활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죄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땅(천국, 새하늘과 새땅)을 유업으로 얻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참된 지혜자이신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실제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악한 길을 떠나 옳은 길로 인도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을 부지런히 찾아야 합니다. 은과 귀한 보물을 찾듯이 찾아야 합니다. 수고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찾고 추구하는 강한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과 결혼 밖에서 성적인 욕망을 추구하고 쫓아가는 욕망은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우리의 욕망의 잘못된 표출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향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까? 

매일매일 우리에게 참된 생명과 기쁨과 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을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찾으시는 저와 여러분이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24일(화요일) 잠언 1장

잠언은 쉽게 말해 격언, 속담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에게 격언과 속담은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경험에서 나온 삶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잠언도 솔로몬을 비롯한 여러 신앙의 선배들의 잠언으로 삶의 지혜가 많이 녹아 있습니다. 일반적인 격언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잠언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며,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에 관한 책입니다. 때문에 잠언은 단지 인생의 지혜 모음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실제로 잠언에서 의인화된 지혜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고전1:30). 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 어떻게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실제적인 삶의 지침이기도 합니다. 1장부터 9장까지 잠언의 서론입니다. 

 

오늘 말씀 1절에서 6절이 바로 잠언의 목적을 말해 줍니다. 지혜와 명철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지혜롭고 공의로우며 정의롭고 정직하게 행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 기초는 무엇이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근본입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인생의 많은 경험과 지혜와 지식이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비의 훈계와 어머니의 법은 일반적인 부모의 가르침이 아니라 율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믿음의 부모들의 훈계입니다(7-9).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악한 자의 꾀임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유 없이 금전적인 유익을 위해서 피를 흘리는 일을 싫어하고 거부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으며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사람은 결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 중 열번째 계명을 어기는 죄악입니다. 그 결말은 결국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10-19).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 여기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부를 얻는다고 하더라고 결국 그 결말은 좋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들은 그런 삶을 부러워하지도 추구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지혜의 소리를 들으며 지혜의 책망을 듣고 지혜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지혜를 거부하면 결국 재앙을 만나게 되며 근심과 슬픔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제서야 지혜를 찾으면 너무 늦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지혜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 안에 참된 평안과 안전이 있습니다(20-33).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의 방식,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지혜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참된 지혜와 행복과 평안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의 방법과 규칙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참된 지혜자들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시편 해설은 수요시편기도회 항목에 올리고 있습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10월 23일 (월요일) 욥기 42장

욥은 하나님의 엄청난 질문 공세를 받은 후 그것에 답할 능력과 지혜가 없을 깨닫고 하나님께 최종적인 대답과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은 욥의 고난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당신의 의로움 가운데 행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식에 대해서 사람이 우리가 함부로 평가하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욥의 의로움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욥은 이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합니다(1-6).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에게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이 당신께 대하여 말한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십니다. 세 친구가 자신들의 좁은 인과응보의 원리 속에서 하나님을 가두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도 용서 받을 길을 알려주십니다. 바로 욥의 중보를 통해서 입니다(7-9). 욥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싫을 수도 있지만, 욥은 그들을 위해서 마치 예전에 그의 아들을 위해서 했던 것 같이 그를 비방하던 친구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욥을 기쁘게 받으셨고 친구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또 욥이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욥의 곤경에서 돌이키시고 욥에게 모든 소유보다 두 배를 더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다시 얻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을 평안히 마친 후에 자녀들과 손자 사대까지 보고 죽었습니다(10-17). 이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 평안히 복된 죽음을 맞이 했다는 뜻입니다.

 

욥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현실에서는 복잡하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불의하심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결국에는 의인이 복을 받고,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제자리를 잡고 이전보다 더욱 나은 상황이 됩니다. 욥을 비난했던 친구들은 욥이 많은 부분에서 그들보다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욥은 그들을 위해서 제사하고 기도하므로 용서했으며 하나님은 욥이 잃은 모든 것을 보상해 주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이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욥기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당하게 되는 수많은 어려움과 부조리와 고난의 상황에 답을 제시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함부로 하나님을 내 생각에 가두고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생의 마지막까지 우리의 억울함을 갚아 주실 주님을 의지하고 끝까지 의를 행하며 믿음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10월 22일 (주일) 욥기 41장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리워야단을 소재로 욥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십니다. 리워야단은 고대 근동 신화에서 나오는 강력한 괴물을 말하는데, 학자들은 이것이 사실 악어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또 성경에서는 용과 더불어 악한 세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사27:1). 큰 악어는 사람이 절대 낚시로 잡을 수 없을 뿐만아니라 매우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잡기도 힘들어서 그것을 사고 팔 수도 없으며 그것을 길들여 애완용이나 소와 낙타 같이 실생활에 도움이 되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 가죽은 매우 두꺼워서 창이나 화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리워야단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 피조물에게도 두려움으로 대항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대항하며 하나님이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하나님께 피해를 입었다고 보상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1-11).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것을 잃었다고 보상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신을 귀히 보시고 갚아 주시는 것은 당연히 하셔야 하는 보상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입니다. 

또 리워야단은 튼튼한 가죽, 뾰족한 이, 견고한 비늘과 숨소리, 단단한 목과 배를 가지고 엄청난 위엄을 풍기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도망치게 됩니다. 또 그것이 물 밑에서 숨을 쉴 때는 물이 끊는 것 같고, 그것이 헤엄칠 때는 많은 물거품을 만든다고 합니다. 이 모든 외적인 묘사는 리워야단이 매우 위협적인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또 그런 위풍당당함 때문에 교만한 자들의 왕으로 묘사됩니다(12-34). 하지만 인간에게 이렇게 위협적인 존재라도 결국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악한 일들과 사단들 조차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교정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악도 제어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1-2장으로 돌아 옵니다. 리워야단과 같이 강력한 힘을 가진 사탄도 하나님께허락을 구하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합니다. 욥은 자신의 이유 없는 고난에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판단했습니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그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며 잘못하신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는 눈에는 뭔가 잘못된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은 사실 모든 상황을 제어하고 계십니다. 불의와 전쟁이 이 땅에 일어나는 것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시기 위해 일시적으로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악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허용하시는 것 뿐입니다. 리워야단과 같은 존재가 우리를 위협하고 괴롭힐수 있지만 하나님은 리워야단도 통치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고난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고난보다 크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나와 교회를 위협하고 힘들게 만드는 상황, 사람, 세력보다 우리 하나님이 훨씬 크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끝까지 붙들고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21일 (토요일) 욥기 40장

하나님의 엄청난 창조의 지혜와 섭리에 대해 듣고 욥은 겸손해집니다. 하나님은 욥이 자신의 큰 고난으로 하나님의 공의도 의심했던 것을 교정하십니다. 트집잡는 자, 전능자와 다투려하는 자는 하나님께 대해 소송을 제기했던 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1-4). 계속해서 하나님은 욥에게 질문 하시고 답변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욥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욥이 깨달은 바를 듣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물 일반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이제는 ‘베헤못’이라는 동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앞에서 창조의 이치를 말씀하셨다면 이제 당신의 공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8절). 그래서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과 같은 영광과 위엄, 능력, 존귀를 가지고 있는지 질문하고(9-10) 또 하나님처럼 모든 교만한 자들과 악인을 발견하여 심판할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11-14).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불의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또 자신의 무고한 고난 하나로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지 물으시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억울한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 전체를 평가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당시에 가장 위대한 짐승으로 여겨지던 베헤못(위대한 짐승이라는 뜻으로 하마로 볼 수 있음)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분으로 말씀하십니다(15-24). 베헤못은 아주 뛰어난 피조물로 여겨지고 평가를 받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고 하나님이 그것을 통제하십니다. 또 인간들은 그것을 통제할 수 없지만(24절) 하나님께서는 통제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들이겠습니까? 하나님음 그들을 통제하고 다스리십니다. 여기서 통제한다는 것은 노예처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중에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어려운 상황과 나의 억울함과 아픔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고 그 고통이 너무 크다고 느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심을 잊지 맙시다. 또 우리 삶 속에서 우리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하마와 같은 존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녀의 문제, 취업의 문제, 가족의 문제 등은 우리 힘과 능력과 지혜로 통제할 수 없는 사람과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것을 통제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과 그 상황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어떤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그분께 기도하며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20일 (금요일) 욥기 39장

하나님께서는 욥이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계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연 세계를 운행하시는 섭리와 지혜를 말씀한 후에 동물의 세계를 주관하시는 섭리와 지혜를 말씀하십니다. 번개나 천둥은 인간과 너무 동떨어져 모른다면, 그러면 인간과 가까이 있는 동물에 대해서는 어떤 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절한 기간 동안 동물이 새끼를 배게하신 후에 낳게도 하시고(1-12), 척박한 땅에 사는 들소(들나귀)에게 야성과 자유를 주신 분이십니다. 또 타조에게는 빠르게 달릴 수 있는 힘은 주셨지만 새끼를 잘 돌볼 지혜를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13-18). 말에게는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용맹함과 힘을 주셨고(19-25) 매나 독수리가 높이 날면서 먹이를 찾거나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에 살며 새끼들도 먹이가 있는 곳을 알만큼 감각이 발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26-30). 이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리기가 어렵고 너무 복잡하며 다양하지만 또한 조화롭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어떨까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의 세계는 더 복잡할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벌을 벋는 사람이 있고, 의로운 고난을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반역하는 악인들도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사회학이 발달하는 것은 결국 자연 세계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단순히 인과응보의 원리로는 설명할 수 없이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앙인은 이런 복잡한 자연과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단순한 인과응보의 원리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오묘하신 손길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오늘 하루도 나와 우리 가정, 교회와 우리 사회와 온 우주를 통치하시고 다스리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또 잘되고 무사할 때 찬송하며 감사하고, 잘 안되고 힘들 때 기도하며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19일 (목요일) 욥기 38장


욥의 고소에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시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 엘리후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욥의 고소에 응답하셔서 직접 변호하십니다. 이 자체로 하나님께서는 욥을 보고 계셨고 그의 불평과 고소를 듣고 계셨고, 또 엘리후와 친구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욥의 잘못도 하나님은 바로 잡으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욥이 결코 알 수 없고 답을 할 수 없는 창조의 섭리에 관한 질문들을 하십니다. 욥은 사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 지혜에 대해서 자신의 지혜로 판단했었습니다(9:5-13, 10:8-14 등). 실제로 욥은 하나님이 질문하시면 답하겠다고 당당하게 말도 했었습니다(13:44). 그래서 당당하게 말해 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욥은 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욥에게 나타나신 것은 욥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을 뵙기를 원했던 욥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시기 위해서 오신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환란 때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관심이 많으시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어서 욥에게 하나님은 엄청난 질문 공세를 부으시면서 욥의 지혜와 지식의 한계를 지적하십니다. 심지어 극한의 고통 속에서 죽음에 대해서 말했을 때에도 욥은 사실 죽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삶을 빨리 포기하고 죽음을 바라보기 보다 자신의 지혜와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섭리와 의로운 통치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우리도 때로 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움으로 하나님의 존재 조차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 앞에서 억울함과 불의와 기도의 묵묵부답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하나님과 그분의 섭리를 부정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까지 믿음으로 인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적절할 때에 응답하시고 간섭하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도록 기도하며 교회와 이 세상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날마다 가까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18일 (수요일) 욥기 37장


엘리후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변호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과 그것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번개를 치게하시고, 천둥을 치게 하시고, 눈을 내리게 하시고, 큰 비와 작은 비를 내리게 하십니다. 또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신다는 말(7절)은 모든 사람의 손을 멈추게 한다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많은 비와 번개와 천둥은 사람들이 하는 많은 일들을 중단 시킵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미약하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운 바람과 찬 바람도 불게 하셔서 물이 얼게 하시며, 비구름을 통해서 사람들을 징벌하거나, 땅에 물을 공급하셔서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1-13). 그리고 그는 38장 이후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질문들과 유사한 질문들을 욥에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작음을 알고 하나님의 사역을 깊이 생각하도록 도전합니다(14-18). 만약 이런 창조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 그냥 입을 다물고 앞에서 제기한 하나님에 대해서 소송을 철회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19-20). 하나님께 그렇게 도전하고 질문하는 것을 멈추라고 합니다(21-24). 

 

역시 엘리후의 말은 어느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함은 모든 자연 속에서 발견되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하나님께 질문하지 못하고 그저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는 우리의 상황과 공의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습니다. 또 이해할 수 없는 일 때문에 고통당하고 마음이 무너질 때 하나님께 부르짖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녀가 아버지께 하소연을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우리와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부조리와 악한 일들을 볼 때 하나님께 탄식하고 가슴 치며 부르짖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깊은 교제 가운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늘 하나님께 답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17일 (화요일) 욥기 36장

엘리후는 계속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변호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먼 데서(곧 하나님이 계신 곳,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 얻은 것이기 때문에 확실한 지식이며 그것으로 하나님이 의로우심을 확실히 보여주겠다고 합니다(1-4). 그는 전능하시고 완벽하신 하나님은 항상 의인은 보호하시고 악인은 심판하는 분이라고 합니다(5-7). 하지만 아삽의 시(시편 73편)와 여러 우리 상황들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런 분이시지만, 당신의 놀라운 계획 안에서 때로 악인을 내버려두셔서 잘 되게 하실 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의로운 욥도 고난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환란을 주시는 이유는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허물과 죄를 깨닫게 하신다고 봅니다(8-15). 이 말도 일부는 맞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교훈을 얻고 죄악에서 돌이키게도 하십니다. 하지만 모든 고난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징계라는 매우 단순한 생각으로 나의 상황과 다른 사람의 상황을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혹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하시면 회개하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지만 동시에 단순한 교정의 목적을 넘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크신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한 고난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엘리후는 욥에게 직접적인 충고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분의 정의로운 심판을 기억하고 악에 치우치지 말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16-23). 또 창조 세계를 그렇게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높으심을 인정하고 번개와 천둥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위엄을 인정하라고 합니다(24-33). 엘리후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지혜를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물론 이런 묘사는 그 자체로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놀라운 능력과 위엄을 지금 욥을 심판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엘리후는 이런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위엄과 지혜 때문에 자신도 그분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해야 옳았습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크심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겸손하게 그분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거룩하게 두려워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게 되고 겸손하게 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그분의 크심을 알며 바르게 경배하합시다. 또 겸손하게 우리와 다른 사람의 상황을 살피며 바르게 위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16일 (월요일) 욥기 35장


오늘 말씀은 엘리후의 세번째 연설로 인간의 의와 불의가 하나님께 미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은 초월성을 가지고 계신다는 논지입니다. 엘리후는 지속적으로 욥이 하나님보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반박합니다. 욥은 자신이 의롭게 살아왔던 것을 하나님께서 정당하지 않게 대하신다고 봅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욥이 범죄를 해도 또 의롭게 살아도 하나님께 아무런 도움이나 해를 끼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늘의 구름이 높음 같이 인간과 무한히 떨어져 계신 하나님은 욥에게서 아무것도 영향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욥이 의롭게 살았다고 말을 했지만, 사실은 그 정도의 의로움 누구나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1-8). 하지만 이것은 옳은 주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2장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욥의 의로운 삶을 하나님은 보고 계셨고, 사탄에게 자랑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와 무한히 멀리 계신 초월적인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 늘 관심을 가지시고 살피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욥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욥의 교만함과 가식적인 부르짖음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12-14). 겉으로 하나님을 찾는 척 하지만 사실은 교훈과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진실되게 찾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하물며 욥은 하나님을 법정으로 소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시고 옳은 자신에게 공의를 행하여 주시기를 강하게 말했습니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실리가 없다고 엘리후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큰 벌을 받기 전에 이제 그만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15-16). 

 

우리는 엘리후의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생각으로 고통 받는 자에게 더 큰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만 강조함으로 그분의 보살피심과 인도하심과 간섭하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또 우리가 순종할 때 기뻐하시고 불순종할 때 가슴 아파 하시는 것을 무시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욥의 부르짖음과 고발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그분은 초월한 분이시지만 당신의 백성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간섭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래 성자 하나님은 우리와 질적으로 다른 분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친히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를 완전히 이해하시고 우리와 성령으로 동행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시지만, 또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영원히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15일 (주일) 욥기 34장

오늘 말씀에는 엘리후의 두번째 연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상은 지혜 있는 자들(욥의 세 친구들)과 욥 입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귀에 거슬린 욥의 주장을 반박하며 하나님을 변호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욥의 말을 평가해 보자고 합니다(1-4). 엘리후는 지속적으로 욥이 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욥의 고난이 그의 악행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징계인데도 욥은 계속 하나님께 그 책임을 돌린다고 비난합니다. 욥에 대한 비난의 근거로 엘리후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성품과 전지전능한 통치를 가지고 옵니다. 하나님은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잘못하지 않은 욥을 벌할리가 없다고 봅니다(10-15). 또 하나님은 아무런 편견없이 사람을 다스리는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실수가 없으시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으로 심판하시고 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심판은 틀림이 없고, 굳이 재판을 열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옳고 그름을 따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정의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욥이 하나님께 재판을 하자고 따지는 것 자체가 문제이고 빨리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기 때문입니다(16-30). 하지만 이런 심판도 결국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함으로 빛을 그들에게 주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욥이 빨리 회개하여 하나님께 회복을 얻으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엘리후의 이런 말은 일반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의롭고 참으로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 될 때는 매우 복잡하고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뛰어 넘는 방식으로 이루어 집니다. 또한 그분의 전지전능함 역시 악인을 판결하고 찾아내어 심판하는 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 전지전능한 능력을 구원을 위해서 한 없이 나약해 지는데 사용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통치는 의롭고 그분이 전지전능하신다는 명제는 명확하지만 그것이 역사 가운데 실현될 때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과 악이 하나님의 심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의 단순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우리 지식과 이해의 한계를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시에 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를 잘 분별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말씀을 붙들고 치열하게 기도하며 고민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잘 이해하고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14일 (토요일) 욥기 33장

엘리후는 욥에게 직접 말하기 시작합니다. 엘리후는 먼저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한 것들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엘리후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되다고 말하고 또 자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영으로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1-4). 또 그는 앞에서 욥이 말한 것을 요약적으로 인용하면서(특히 9:11-22, 13:17-28) 욥을 반박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죄도 없는 자신을 대적으로 여겨서 고통을 주시고 계시다고 주장했는데,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시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5-12). 하지만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절대적인 의로움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상응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의롭다고 주장한 것입니다(7:12, 13:26). 엘리후는 욥의 말을 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엘리후는 욥이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꿈이나 이상 혹은 고난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13-30).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한 욥에게 욥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를 하면 회복을 주신다는 것도 빼놓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엘리후의 말이 옳다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욥에게 질병과 엄청난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욥의 회개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이 당하는 고통은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엘리후의 지혜도 여전히 한계가 있었습니다. 욥기의 독자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엘리후도 앞의 세 친구들처럼 욥의 고난에 대해 자신 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하지만 욥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동정입니다. 고난의 원인은 다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정죄하기 보다는 서로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서로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서 주실 회복을 함께 기도하며 걸어가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13일 (금요일) 욥기 32장

욥의 강력한 무죄 변론 후에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오늘 말씀은 37장까지 이어질 엘리후의 연설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 중에서 가장 어렸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다가 욥의 의로움에 대한 주장과 이에 대해 세 친구들이 반박하지 못하자 자신의 주장을 내세웁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지혜롭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지혜는 전능자의 호흡(하나님의 영)이 주시기 때문에 자신도 한마디 하겠다고 합니다(1-10). 이런 모습은 엘리후가 어느정도 지혜로우며 연장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리후의 불만은 욥의 말을 세 친구들이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신이 나선다고 합니다(11-14). 엘리후의 관심은 고난 당하는 욥의 고통을 헤아리기 보다는 어떻게 세 친구들이 욥을 꺾는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 친구들이 대답하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 자신이 대답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욥이 자신의 고난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이 전에 세 친구들이 말한 것과는 별개로 자신은 편견 없이 욥의 고난에 대해서 말하겠다고 합니다(15-22). 

 

이후에 이어지는 말을 보면 엘리후는 확실히 앞의 세 친구들보다는 욥을 동정하고 진리에 가까운 말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엘리후는 자신의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욥의 말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해명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하나님만이 아실 만한 것들도 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한 답을 당장에 다 찾을 수 없을 수 있습니다.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섣불리 나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판단하기 보다 나의의상황에 인내하고 다른 사람을 동정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겸손하게 내 말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며 절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좁은 지혜로 나와 남에게 일어난 일을 쉽게 판단할 위험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보다 겸손히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함께 아픔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항상 겸손하게 하나님께 맡기며 인내하고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12일(목요일) 욥기 31장

욥은 말을 계속 이어 갑니다. 오늘 말씀은 욥의 최종변론과 같은 장입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자신이 악을 행한 댓가가 아님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주장합니다. 오히려 욥은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 진술을 합니다. 욥은 성적인 정욕(1-4)과 사업상의 속임(5-8), 간통, 종들의 권리와 인격을 무시하지 않고, 약자들에게 대한 몰인정과 무시를 행하지 않으며(16-23), 재물을 탐하거나 의존하지 않고(24-25), 우상 숭배나 미신에 빠지지 않았으며(26-27, 손에 입을 맞추는것은 예배의 행위였음), 원수의 불행을 기뻐하지 않고(29-30), 나그네를 소홀히 대접하지 않고(31-32), 위선의 죄를 행하지 않으며(33-34), 토지와 관련된 불의를 행하지 않는(38-40, 남의 밭을 강탈하거나 일한 삶들의 임금을 착취한 죄) 등 당시 만연했던 악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불의함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다는 주장이 완전히 틀렸음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욥이 이런 죄들을 멀리한 것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가 우선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불의한 행동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거룩한 두려움이 있고, 그것을 항상 다른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종이 주인의 소유로 생각되던 당시에 욥은 그들 또한 하나님이 지은 바임을 인정합니다.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다른 사람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순전함에 대한 증거들입니다. 

 

욥은 과거에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는지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은 당연히 하나님께 벌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욥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정결하고 의롭게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관점과 기준으로 살아갔습니다. 그에게는 항상 하나님이 기준이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행동을 생각하실 지 생각하며 행동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와 이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태도를 결정했습니다.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 왔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같은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며 다른 사람을 대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정결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며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11일 (수요일) 욥기 30장


욥은 예전의 삶을 회상한 후에 그것과 완전히 다른 현재의 상황에 탄식합니다. 자신의 의로운 믿음과 삶에도 불구하고 그는 합당하지 않은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자신 보다 어린 자들과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부랑자들 조차에게도 욥은 수치와 모욕을 당합니다. 거할 고토(땅)조차 없이 유랑하는 자들에게도 수치와 모욕을 당할 만큼 욥은 더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1-10). 욥은 이렇게 된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늘어진 활 시위와 같이 욥을 힘이 없게 만드시고 조롱을 받게하시고 공격을 받도록 하시지만 도와주지 않으신다고 한탄합니다(11-15). 뿐만 아니라 욥은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진흙 가운데 던지시고 먼지와 재와 같이 여기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매우 잔혹하신 분이심을 토로합니다. 너무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이셔서 자신에게 예비되어 있는 것은 죽음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을 도우며 나름대로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에 합당한 결과가 혹독한 고난과 아픔과 환란이라고 하나님께 한탄합니다(16-31). 

 

욥은 끊임없이 닥쳐오는 고난 가운데 서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는 삶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고난과 어려움이 왔습니다. 욥이 행한 의만큼 자신에게 전혀 돌아오지 않는 불공정하고 부조리한 상황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도 자신의 편이 없고, 심지어 하나님 조차도 자신의 기도와 한탄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욥의 모습은 비참하고 패배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가장 비천한 사람에게 조차도 조롱을 받는 지경입니다. 인생의 나락 중에서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욥의 이러한 모습은 백성들을 위해서 의를 행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패배자의 모습과 비참한 모습으로 지나가던 사람에게 조롱을 당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가장 존귀한 분의 모습이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 입니다. 비록 지금은 패배자의 모습과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사탄에게 승리를 거두실 것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의 모습이 실패와 고난과 패배자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한 의만큼 보상을 못 받고 있어도, 억울한 일 당해도, 아무도 내 편이 없는 것 같은 그 순간에도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보시고 계시고, 헤아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을 들어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계속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이 우리를 회복하실 것을 믿고 굳건하게 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10일 (화요일) 욥기 29장

욥은 자신의 지난 날을 회상합니다. 이런 회상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욥의 의로움과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이 욥을 보호하시고 모든 것이 밝던 시절이었습니다. 원기가 왕성했고 하나님께서 그의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1-4). 젊은 자녀들과 종들이 그를 둘러 있었습니다. 이는 행복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던 것을 보여줍니다(5-6). 성문은 재판을 하는 장소였으며,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만이 성문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수 이었습니다. 회의 때나 길거리에서 의롭지 못한 젊은이들은 숨고 말소리를 낮추었습니다. 또 다른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욥 앞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했습니다. 그만큼 존경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그의 판단과 지혜가 옳기 때문에 그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습니다(7-10). 욥이 누렸던 지위와 명예는 우연이 아니라 그가 행했던 의로운 행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빈민과 고아, 과부를 도와주었고, 의로움과 정의로움으로 옷을 삼고 살았습니다. 맹인들에게 눈이 되어주고, 저는 사람에게 발이 되어주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가 되며 모르는 사람의 억울한 일에 법적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반면에 불의한 사람에게는 자비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자신의 날이 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1-17). 이런 욥의 행동은 욥이 악을 행했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친구들의 말을 충분히 반박하고도 남습니다. 21절에서 25절은 마을에서 열리는 회의 장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욥의 지혜롭고 공평한 판결을 사람들은 좋아했고 공경했습니다. 아무도 억울하지 않게 지혜롭게 판결했기 때문에 원망이나 미움을 살 이유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욥을 마치 왕과 같이 대우하였습니다(18-25).

 

욥의 이전의 삶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삶이었습니다. 그는 신앙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사는데 관심이 있는 이기적인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신앙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이룬 성공과 부귀영화를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좋은 것들을 믿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공정하게 심판하시고, 약하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신 것 같이 그러한 삶을 욥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려고 하고 예수님을 닮아서 바른 판단을 하고 의와 정의를 행하려고 할 때 어려움도 닥치게 됩니다. 때로는 열심히 잘 믿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잘 믿었을 때에 축복을 느낄 때가 많이 그립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낙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아직 욥도 몇 차례 한탄을 하게 되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올곧게 살아온 욥에게 마침내 응답을 주셔서 그를 다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말씀대로의 삶이 허무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 그래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 끝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며 옳다고 인정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의 길을 끝까지 함께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0월 9일 (월요일) 욥기 28장

오늘 말씀은 누가 한 말인지 분명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의 말이든지 이 말은 매우 분명하고 확실한 화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은과 금, 철, 동, 음식, 광석, 청옥, 사금, 물 등 매우 귀한 것이 어디에 있는지 다 찾을 수 있고 어떻게 발견하는지 알 수 있는데, 지혜(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는 어디에서 얻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지혜는 근본적으로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거나 어디에 감추어져 있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명철을 찾아서 두루 다니며 깊은 곳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금이나 은으로 살 수 없고, 아무리 귀한 것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지혜와 명철입니다. 결론은 지혜와 명철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지혜로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 지혜는 단순히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고 자연을 연구하는 것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지혜를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고 연구하는 것에서 지혜를 찾으려고 했지만 그렇게는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친구들보다 욥이 지혜에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하고 있고, 그분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참된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현실 한 가운데서 실제적인 하나님의 이해를 추구하며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단순한 교리적 고백이 아닌 현실의 삶 속에서 겪게 되는 치열한 삶의 무게 속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며 그럴 때 참된 지혜가 얻어지는 것이라고 본문에서 말해 줍니다. 그 과정 속에서 괴롭고 힘들지만 결국 긴 터널 끝에서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삶의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참된 지혜자들로서 삶의 무게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8일 (주일) 욥기 27장

욥은 계속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욥은 자신의 의를 빼앗으시고 자신의 영혼을 괴롭히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보증자로 삼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독특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싫어버린 바 된 상황이지만 자신의 결백 주장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합니다. 자신의 호흡에도 하나님의 숨결이 있다고 합니다. 욥은 불의와 거짓을 말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결백을 하나님께 인정 받고자 합니다. 동시에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했던 친구들의 견해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1-5). 처음과 달리 욥은 친구들이 자신에게 원수와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의로운 자신을 불의하다고 보기 때문에 악인들과 같습니다. 의인인 자신이 고난을 받음으로 친구들이 의인과 같이 보이는 현실이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환란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욥은 친구들에게 가르쳐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의로운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을 보고도 그들은 여전히 인과응보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 친구들이 무익한 사람들이 되었다고 책망합니다(6-12). 이제 욥은 악인들의 운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이 받을 하나님의 분깃은 자손들이 번성해도 칼에 죽을 것이며, 후손들은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전염병에 걸리고, 재산을 쌓아 놓고 있어도 죄없는 의로운 자가 차지하며 악인 세운 집은 임시로 거할 장소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아끼지 않으시고 던져 버리시며 사람들은 그런 결말을 보고 잘되었다고 박수치며 조롱할 것입니다(13-23). 욥의 이런 발언은 앞에서 친구들이 한 말과 비슷하게 흉내를 내면서 분명한 차이점을 드러냅니다. 친구들은 악인의 멸망에 초점을 두지만 욥은 의인의 구원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욥은 결국 악인의 삶과 의인의 삶이 역전될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물질을 의지한 자들은 망하고, 망해 보였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회복될 뿐만 아니라 악인이 누리던 것을 누리게 됩니다.

 

욥은 여전히 하나님과 자신을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벌할 뿐만 아니라 의인을 구원하시고 삶의 역전을 이루시는 분임을 굳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만 물리치는 분이 아니라 동시에 의인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욥도 결국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 받고 회복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세상에서 겪는 모든 불의와 악인들의 잘 됨을 보고 시험이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결국 악인의 삶과 의인의 삶을  역전시킬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실 이미 우리는 이런 역전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인과 같이 살던 우리의 옛 삶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고, 의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인의 흥왕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누리던 모든 부귀 영화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실 새 하늘과 새 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악인을 부러워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길 바랍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삶이 역전되지 않는다면 영원한 형벌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다시 오셔서 우리의 삶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긴밀하게 연결지어 생각하고 악인의 길이 아니라 의인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7일 (토요일) 욥기 26장

오늘 말씀부터 욥과 친구들의 세번째 논쟁 주기에서 욥의 마지막 대답이 길게 이어집니다. 욥은 빌닷의 말을 마치 끊고 약간 비꼬듯이 그의 말을 시작합니다. 빌닷의 말이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도 대화를 하면 할 수록 답답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빌닷이 말하고 있는 것은 엘리바스의 말을 따라서 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고 평가합니다(1-4). 빌닷이 큰 지식을 지혜 없는 자인 욥에게 가르치는 것 같이 말하지만 결국 그 큰 지식은 엘리바스에게 들은 이야기이며 또 누구나 아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정작 지혜로운 자는 욥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더 큰 지혜를 습득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욥도 그의 친구들과 같이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영광에 대해서 말합니다. 욥이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의 모습은 욥의 일상과 동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그것을 붙들고 계시며 악한 세력(라합과 날랜 뱀은 같은 것을 지칭함.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적하던 혼돈의 세력을 상징했음)을 무찌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주무르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초월적인 분이시면서도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고, 보름달을 가리시고, 빛과 어둠인 낮과 밤을 주관하시며,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와 입김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물리치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동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온 세상을 운행하시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욥이 경험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앞에서 빌닷이 하나님이 주권과 위엄을 가지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는 초월적이고 알 수 없는 분이라는 생각과 차이가 있습니다. 욥은 빌닷의 이해를 교정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욥도 인간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동일하게 인정합니다(5-14). 그분의 큰 권능과 위엄으로 행하시는 섭리는 때로 우리 인간들에게 감추어져서 알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우리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의 크신 계획 가운데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신뢰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과 위기가 우리 앞에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지켜보던 제자들처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눈 앞에 펼쳐질 때 절망할수 있고,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일 후에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찾아 오십니다. 그 때 제자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해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언젠가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날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호소하되 인내하며 그분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6일 (금요일) 욥기 25장

욥의 말을 듣고 수아 사람 빌닷이 짧게 답합니다. 빌닷에게 있어서 역시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입니다. 이는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발입니다. 빌닷은 하나님께서 주권과 위엄을 가지고 저 높은 곳에서 평화를 베푼다고 합니다. 이런 말에는 하나님께서 이런 낮은 땅에는 오실 수 없는분 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능력과 힘을 상징하는 군대는 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고 높으셔서 그분을 감히 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빛에서 숨을 수 없는 미약한 존재들입니다(1-3).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결코 의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서는 아무도 깨끗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밝은 달과 별의 빛도 마치 비치지 않는 것 같이 소용이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하물며 구더기와 벌레와 같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4-6). 

 

빌닷의 이런 말은 역시 어느정도는 맞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고, 어떤 인간도 감히 하나님 앞에 서서 의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빌닷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지만, 스스로를 낮추셔서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빌닷의 주장 대로라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또 오늘 말씀에서 ‘여자에게서 난 자’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여자의 후손을 암시하고 또 궁극적으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내다봅니다. 빌닷의 말이 옳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죄 없이 탄생하셨다는 것이 거짓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상상 이상으로구원의 사역을 이끌어 가십니다. 빌닷은 일관되게 조상들의 지혜와 하나님의 초월성만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와 같이 되신 분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무 초월적이라 우리의 삶에는 간섭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리와 같이 단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우리와 함께 하시는 내재성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도저히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분이시지만, 스스로 낮추셔서 우리와 함께하길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측면과 우리와 함께하시는 측면을 균형 있게 이해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바르게 섬기고 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동행함을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5일 (목요일) 욥기 24장

어제 말씀에 이어서 욥은 말을 이어갑니다. 욥은 오늘 말씀에서 친구들과 같이 이 땅에서 악인들의 악행을 고발합니다. 악인들에 의해서 가난한 자들은 학대를 받고 비참한 삶을 살아갑니다. 욥의 이런 고발은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지 의문을 들게 합니다. 왜 당장 악인들을 심판 하지 않는지 의문을 들게 합니다. 가난한 자들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실제로 그들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현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하나님은 악인에 대하 심판의 날을 정해 놓지 않으신 것 같이 전혀 간섭하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악행을 행하면서도 잘 먹고 잘사는 모습을볼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겨우 의지하는 것도 빼앗고 심지어 죽이기도 합니다. 또 간음과 강도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는 것 같고 잘 사는 것 같이 보입니다. 

욥은 이렇게 주장함으로 세상에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을 때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욥이 붙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인들을 심판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욥은 자신의 고난이 인과응보의 원리에 얼마든지 맞지 않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의 옳음을 인정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욥이 그 때를 알 수 없고, 감추어져 있지만 그것을 소망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도 인과응보의 원리는 반드시 적용되지 않습니다. 항상 착한 사람이 잘되고 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더 잘되는 것도 봅니다. 또 부조리도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짓밟고,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으며 부를 축적하고 그런 사람을 존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은 것 같이 보여서 그런 삶의 방식으로 살고 싶은 마음도 신자 안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편법과 불법을 적당히 행하면서 부와 명예를 축적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세상은 반드시 인과응보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심판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때와 시는 알지 못하지만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것과 오셔서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은 압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칙은 인과응보의 원리도 아니고 부조리에 편승하는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 날 다시 오실 그분의 때에 바르게 서기 위해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원칙입니다. 오늘 하루도 복잡하고 부조리가 있는 삶 속에서 우리의 삶을 심판하시고 평가하실주님을 바라보며 어렵더라도 바른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4일 (수요일) 욥기 23장

엘리바스의 말을 듣고 욥은 대답합니다. 욥과 친구들의 논쟁은 몇 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욥은 지난 날 처럼 오늘도 마음에 근심이 있는 것은 그가 당하고 있는 재난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욥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런 고통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욥은 일관되게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엘리바스가 이해하는 하나님은 욥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이지만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라고 신뢰하고 있습니다(1-6). 하나님 앞에서 그는 변론할 기회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놓아 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욥은 아무리 하나님께 부르짖고 찾아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을 것 같이 느껴집니다.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분명히 일하고 계시지만 그분을 만날 수 없고 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 같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그 시간은 길었습니다(7-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놓지 않았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느낄 수 없고 그분 앞에 갈 수 없는 것 같이 느끼는 그 순간에도 그분이 욥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분이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과 같이 나올 것이라고합니다. ‘단련’은 원래 금속을 시험, 조사할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자신을 철저히 조사하면 결국은 욥이 정금처럼 의롭다는 것과 순결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발견하게 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욥이 이렇게 확실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명령을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당신을 알려주신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10-13). 욥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한 계획을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뢰는 변함이 없습니다. 욥은 사실 자기에게 닥친 어두운 상황보다 하나님을 찾는데 응답이 없다는 것에 더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합니다(17). 

 

욥이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붙들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을 신뢰하고 말씀을 따라서 살았던 삶입니다. 비록 욥의 상황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도 응답을 하지 않으시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그를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다는 것이 자랑의 근거가 될 수 없지만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 주는 귀한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전히 사실이라고,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신뢰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린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붙들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온전히 살아가신 예수님께서 이루신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살아 갈 때 우리를 정금과 같이 순결하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분은 우리의 가는 길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절망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다시 회복을 주실 때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0월 3일 (화요일) 욥기 22장


오늘 말씀에서 엘리바스가 다시 말을 합니다. 세번 째 논쟁의 주기가 펼쳐집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깨끗하다고 주장을 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께는 전혀 득이 되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함 때문에 욥을 책망하실 리가 없다고 보고 욥이 분명히 악한 일을 했을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엘리바스의 관점에서 큰 고난은 큰 죄를 전제로하기 때문에 욥의 큰 고난에는 분명히 욥의 큰 죄악이 원인이라고 봅니다. 6절부터 9절까지 말씀은 엘리바스가 욥이 지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죄들을 열거한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그렇게 생각하는 유일한 근거는 욥의 고난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끔찍한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1-11). 이어서 엘리바스는 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에 불평을 가지고 있는 욥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다고 주장합니다. 또 심지어 악인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욥을 비난합니다. 그가 악인의 길을 걷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엘리바스가 말한 죄를 지은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바스는 해결책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합니다. 욥이 다시 복을 받고 회복되는 길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전능자에게로 돌이키고 불의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또 금을 마음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거만한 자를 누르시고 겸손한 자를 도와 주신다고 합니다(12-30). 하지만 역시 욥은 마음을 재물에 둔 적이 없습니다. 독자들은 이미 그가 재물과 심지어 자식을 잃었을 때에도 범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엘리바스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우리의 삶과 동떨어지고 세상이 돌아가는 시스템으로만 존재하는 하나님입니다. 역시 이신론적인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이해에서 구원을 위한 노력은 절대적이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하심의 자리는 없습니다. 기적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구원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하고 늘 불안하고, 강제적이고, 차가운 신앙생활만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욥에게 하나님은 자신이 교통할 수 있고,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을 묻고 설명을 요구할 수 있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욥은 엘리바스가 추정하는 어떤 악도 이웃에게 범하지 않았지만 이런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에 어서 속히 자신의 삶에 간섭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께서 그분 안에서 완전히 인격적인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거나 우리의 예상과 다르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떨어진 하나의 원리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통하심을 말씀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누리며 우리의 상황에 깊숙이 들어오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기도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0월 2일 (월요일) 욥기 21장


욥은 소발의 말에 대해 두번째 대답을 이어 갑니다. 먼저 욥은 자신을 동정하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말을 잘 듣고 그 후에야 자신을 조롱하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욥의 대답의 핵심은 악인이 장수하고 세력도 강한 것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후손도 일시적으로 잘 되는 것 같이 보이고, 악인의 집도 흥왕하는 것 같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심지어 악인의 소유는 날마다 늘어가고 잔치와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발의 말과 같이 악인의 그런 행복한 날도 일시적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악인들은 그럴 때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멀리하고 더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과 확실히 다른 점입니다. 욥 자신은 악인과 같이 산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악인과 같이 하나님을 끝까지 대적한 적도 없다는 점을 친구들에게 제시합니다(1-16).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이유로 악인들도 오랜 기간 동안 내버려 두셔서 재앙을 받지 않는 것 같이, 평안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이어서 지적합니다. 또 어떤 사람(악인이든 의인이든)은 평생에 평안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원리로 그분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욥과 하나님과의 논쟁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제한된 지식을 강요하면서 욥을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있던 것입니다. 욥은 결국 개인의 도덕성과 그가 죽는 시기에는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또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악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그 길을 걸으며 악인은 죽어서도 영예를 누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이로써 욥은 인과응보의 원리가 반드시 옳지는 않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원리를 중심으로 자신을 정죄하고 회개하라고 하는 친구들의 태도와 위로는 헛되고 거짓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17-34). 

 

오늘 말씀에서 욥이 악인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는 그가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을 멀리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해서 고난을 당하실 때 오히려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려운 일 당할 때 하나님을 더 원망하고 저주하며 멀어지지만, 믿는 사람들은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나아가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입니다. 세상은 인과응보의 원리도 설명 될 수 없고, 우리의 고난도 때로 원인이 불분명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붙들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믿지 않는 사람이 조롱할지라도 그것에 너무 마음을 두지 말고 인과응보의 원리를 뛰어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붙들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월 1일 (주일) 욥기 20장


욥의 말에 이어서 소발이 두 번째 주장을 펼칩니다. 소발은 욥의 말을 듣고 모욕을 느끼고 급한 마음으로 악인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소발이 말하는 근거가 되는 슬기로운 마음은 ‘이해’ 혹은 ‘지혜’와 같은 말입니다. 소발은 조상들의 지혜와 자신의 지혜와 통찰을 가지고 욥을 평가합니다. 역시그 원리는 인과응보입니다(1-3). 소발은 욥이 이미 알고 있을 세상의 이치가 되는 인과응보를 가지고 악인의 교만한 모습에 대해서 말합니다. 악인들이 비록잠시 동안은 번영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자신만 파멸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들도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거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얻었던 재물도 모두 잃게 된다고 합니다. 악인인 욥은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전에 잠시 동안 욥이 번성한 것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장정이 죽어 흙에 묻힐 것 같이 욥도 지금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4-11). 악인은 악행이 그 입에는 다나 속에는 쓰게 되는 것을 모르고 악한행동을 계속합니다. 그 결말이 얼마나 쓰게 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단 음식을 먹었지만 그것이 뱃속에서 독사의 독과 같이 쓰게 되고 치명적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많이 모았어도 결국 하나님께서 그것을 토하게 만드시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누리지 못하고)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리며 타인의 집을 강제로 빼앗은 악인의 운명이라고 합니다(12-19). 분명히 욥은 숨기고 있지만 이런 짓을 했을 것이라고 소발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악인은 마음에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행복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풍족하게 되어 누리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악인을 치실 것이고 위기를 벗어나면 더 큰 위기를 겪게 할 것입니다(20-25). 그에게는 큰 어둠이 준비되어 있고, 그의 죄악이 반드시 밝혀지게 되어 땅이 그를 대적하고 농사도 망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결국 악인은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26-29). 

 

소발도 역시 욥을 악인으로 규정하는 데에 집중 합니다. 욥이 스스로가 악인임을 인정하도록 위협적으로 악인의 운명에 대해 전개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욥을 오히려 더 절망하게 만들 뿐입니다. 욥이 누리던 것은 악행의 결과가 아니라 성실함과 신실함의 결과였음을 독자들을 모두 압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역시 욥이 당하는 고난을 설명해 내지 못합니다. 악인이 아니라도 악인과 같은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지혜 자체는 옳습니다. 그러나 심판 받는 사람이 모두 악인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의인이지만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세상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은혜의 방식으로역사합니다. 복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도 세상의 관점으로 다 이해 되지 않습니다. 귀한 시간과 물질을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고,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모두가 즐기는 주일에 예배하는 것을 가장 귀히 여기고 성도들과 교제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어리석고 이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당연한 시선을 기쁘게 여기서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30일 (토요일) 욥기 19장

욥은 빌닷의 말을 듣고 분노하면서 말합니다. 친구들이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분노합니다. 친구들은 계속해서 욥에게 죄가 있다고 하면서 회개를 요구합니다. 마치 고소하는 사람들을 같습니다. 하지만 욥은 여전히 자신이 하나님께 고난을 받고 있다고 호소합니다(1-6). 하지만 욥의 상황은 녹록치 않습니다. 하나님께 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을 대적하시는 분으로 서 있습니다. 욥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헐고 계신다고 표현합니다(7-12). 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친구들도 자신을 다 멀리하고 심지어 종들도 자신을 멸시하고 무시를 합니다. 누구나 보기에 욥의 날은 얼마 남지 않았고, 모든 것이 끝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욥의 죽음을 기다리는 비참한 상황인 것입니다. 이런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친구들에게 호소합니다. 계속해서 힘든 자신을 더 힘들게 하는 친구들에게 이제는 좀 자신의 편을 들어 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자신을 쳤다는 것입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위로하기는 커녕 하나님과 같이 자신을 치고 있다고 호소합니다(13-21). 욥은 자신의 말을 철과 납으로 돌에 새겨 놓기 원합니다.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함입니다. 살아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지 못하면 죽어서라도 풀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욥은 자신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그가 오시면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속자는 ‘고엘’입니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자, 기업을 무를 자, 종된 사람을 구속해 주는 사람을 뜻 합니다. 욥에게 있어서 고엘은 자신이 죽은 후에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사람입니다. 결국 그분이 오시면 욥의 억울함을 알아봐 주시고, 그 고통의 원인이 욥이 아님을 입증하고, 욥에게 있다고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틀렸다고 하고 하면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할 것입니다. 

 

욥은 여전히 희망을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그는 고엘을 찾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자신을 힘들게 하고 대적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엘이 되실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38-42장에서 폭풍우 가운데 임하시고, 욥을 책망하시지만 동시에 편을 드시고, 다른 친구들에게는 욥에게 제물을 가지고 가서 제사를 드리도록 하면서 욥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고엘은 또한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욥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죄 가운데 고난을 당하는자들의 구속자로 오신 예수님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분은 이 땅 위에서 서서 욥과 같은 억울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다시 오셔서 예수님 때문에 당한 억울한 고난을 겪은 그의 백성들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억울함을 아시고 참된 대속자가 되셔서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갈 때 겪게 되는 불편과 억울함과 손해도 다 보고 계십니다. 고통과 억울함 속에서 그것을 다 보고 계시고 결국 억울함을 다 풀어 주실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맞추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9월 29일 (금요일) 욥기 18장

욥의 말을 듣고 빌닷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빌닷의 논쟁 대상은 욥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입니다. 인과응보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빌닷은 친구들이 욥을 아직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욥에게 대해서는 여전히 인과응보의 원리가 자기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정한 자연적인 규칙 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반박합니다. 그래서 욥은 단지 울분(분노)를 터뜨리고 자신을 찢는 사람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욥이 원인과 결과의 원리로 구성된 자연 만물이 욥에 의해서 뒤집히겠냐고 반박합니다. 땅이 버림받고 바위가 옮겨지지 않는다는 말은 욥이 인과응보의 원리가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틀렸다는 말입니다. 틀림없이 뭔가 잘못한 것 죄가 있어서 형벌을 받고 있다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욥의 주장은 자연과 만물을 이루고 있는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 일이라는 것입니다(1-4). 이어서 빌닷은 이 인과응보의 원리에 의해서 정해져 있는 악인의 운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악한 자는 반드시 패망합니다. 이런 악인의 운명을 말함으로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빛과 등불, 활기는 희망의 이미지 입니다. 악인은 이런 밝고 희망에 찬 운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인은 결국 덫에 걸리고, 꾀에 스스로 빠지고 올가미에 걸려들고 함정에 빠지고 질병이 그의 피부에 번지고 의지하던 것들이 장막에서 뽑히게 됩니다. 욥의 상황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행위가 자연적인 필연성에 방식에 따라서 악인의 행동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의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집이 그렇다고 결론을 내립니다(5-21).  

 

빌닷은 여전히 인과응보의 원리로 욥의 상황을 이해합니다. 사실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 한 사람 때문에 그런 세상의 원리를 뒤집지 않는다는 것이 빌닷의 말의 핵심입니다. 반대로 욥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신에게 악인 받아야 하는 화를 내리고 있다고 하나님께 불평한 적이 있습니다. 빌닷의 관점에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욥의 상황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빌닷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과응보의 원리에 순응하지 않으려고 하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 같이 보이는 욥에게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부었습니다. 빌닷은 욥의 상황을 봤을 때 그가 범죄한 것이 확실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욥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빌닷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 규칙에 메이셔야 하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들고 자연적인 규칙에 의해서만 돌아가도록 놓고 구경만하고 계시는 분으로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분으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욥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욥의 하나님은 언제든지 자신의 삶에 개입하셔서 원인과 결과의 자연 법칙을 때로는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을 지금도 붙드시고 날마다 개입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을 단지 자연법칙에 따라 흘러가도록 두시지 않고 한 걸음 한걸음 인도하시고 붙드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고, 원하실 때 자연법칙을 거슬러 놀라운 일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동행함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28일 (목요일) 욥기 17장

욥은 기운 많이 쇠약해진 가운데 16장에 이어서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위로하기보다 아픈 말로 힘들게 합니다(1-2). 욥이 하나님께 담보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담보물은 어떤 일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겠다는 표현입니다. 욥은 자신이 유죄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책임을 지시고 내놓을 담보물을 욥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친히 보증인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죄함을 알고 계신 분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지만 동시에 하나님만이 욥이 정직하고 죄가 없음을 증언해 주실 수 있는 결정적인 증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결백함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합니다(3-5). 욥은 다시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친구들(사람들)은 욥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그가 죄가 있어서 고난을 받지만 무죄하다고 주장한다고 모욕합니다. 욥은 시력도 점점 나빠지고, 몸은 더 쇠약해 갑니다. 그는 그림자와 같이 허무한 삶을 경험합니다. 정직한 자들은 욥이 당하는 일을 보고 놀라야 하고 경건하지 못한 자에게 분을 내고 의인의 길을 꾸준히 가고 힘을 점점 얻어야 하지만, 욥의 친구들 중에는 그런 정직한 지혜자가 없습니다(6-10). 이제 욥은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자신의 삶을 지나갔고, 그의 계획, 마음의 원하는 것들 모두 다 끊어져 죽기 직전에 있습니다. 삶을 놓고 싶은 마음 뿐임을 보여줍니다. 그에게는 무덤과 몸이 썩으면 생기는 구더기가 자신의 가까운 가족과 느껴질 정도 죽음이 가까이 있고 희망과 소망이 없다고 스스로 삶의 희망을 놓고 있습니다. 그만큼 욥의 고통은 날이 갈 수록 심해지고 있는 것입니다(11-16). 그러나 여전히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을 붙들고 있습니다.

 

욥과 같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삶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더이상 우리 삶에 역사하지 않으시고, 일정한 규칙만 정해 놓고 그것이 돌아가게 하심으로 세상을 유지하는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악한 일들도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 일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일도 당신의 영광과 우리를 훈련시키고 더 가까이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때로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악의 원인자는 아니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우리 직장, 우리 자녀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탄식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습니다. 욥은 끊임 없이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이해하며 좋은 일에 감사하고, 힘든 일에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하며 삶의 목적과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27일 (수요일) 욥기 16장

욥은 엘리바스의 말에 대답합니다. 욥은 친구들의 위로가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라는 말은 모순입니다. 위로자는 위로는 주어야 하는데, 친구들의 위로는 오히려 욥에게 재난과 근심을 더하게 할 뿐입니다. 욥도 얼마든지 그들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욥이 친구들의 입장이라면 오히려 위로를 해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1-5). 욥은 말을 해도, 또 말을 하지 않아도 근심과 아픔이 줄지 않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6). 욥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피곤하게 하고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고, 그를 시들게 하고, 찢으시고, 그의 병든 모습 때문에 그를 죄인으로 취급하신다는 증거로 삼으십니다. 나아가 마치 사냥하는 맹수나 동물을 화살로 잡는 사냥꾼처럼 욥에게 대적하신다고 합니다(7-14). 욥은 화살이 자신의 심장을 뚫는 것 같은 고통과 절망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회생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라고 자신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슬픔과 애통을 상징하는 베옷이 자신의 피부와 하나가 된 것 같고, 명예와 힘을 상징하는 뿔에 먼지가 가득합니다. 얼굴은 매일 울어서 퉁퉁 부어 있고, 눈꺼풀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있습니다(15-16). 이런 욥의 자기 묘사는 얼마나 그 고통이 크고 아픈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욥의 손에는 포악이 없고 기도는 정결하다고 합니다(17).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이제 자신의 탄식을 하늘을 향해서 합니다. 땅이 내 피를 가리지 말라는 것은 의인 아벨의 피가 땅에 흘렸을 때 땅이 호소하였던 것을 하나님이 들으셨던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창4:10). 결국 욥의 억울함과 의로움에 대한 증인과 중보자가 되실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하나님 사이와 친구 사이를 중재하시고 판단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증인과 변호사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분도 되십니다. 그리고 왜  그분께서  의로운 자기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게 해 주실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무죄함을 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7-21). 자신의 날이 얼마남지 않았기 때문에 속히 증거해 주시길 요청합니다(22).  

 

사람들의 위로는 욥의 친구들 처럼 고난의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위로는 때로 우리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려움만 더할 뿐입니다. 혹은 상대방의 입장을 잘 헤아리고 우리에게 위로를 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위로는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참된 위로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난과 아픔과 슬픔과 애통함 등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직접 몸으로 경험한 분이셔서 우리를 참으로 동정하시는 분이십니다(히4:15). 욥이 찾는 중보자는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심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증인과 중보자로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동정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악을 덮으셔서 당신께서 얻으신 의로움을 나누어 주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로하시는 참된 위로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아갑니다. 또 참된 위로를 받은 자들로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서로 깊이 위로하고 동정하며 참된 위로자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26일 (화요일) 욥기 15장


오늘 말씀부터 21장까지 욥과 친구들의 두번째 논쟁 사이클이 시작됩니다. 이번에도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먼저 말을 합니다. 이전에 욥이 한 말들을 가지고 욥이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지혜롭지 못하다고 책망합니다(1-6).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을 충분하게 존중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별히 욥이 하나님께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고 있다고 호소한 부분에서 욥이 잘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또 욥보다 친구들이 훨씬 더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욥보다 삶의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입니다(7-11). 엘리바스는 직접적으로 욥이 하나님께 불만을 표출한 것을 책망하고 사람들 중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지적합니다(12-16).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에서 욥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에게 그것을 인정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엘리바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전통적인 지혜에서 가르치는 악인의 운명은 환란과 역경인데, 그 원인은 악인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대적하고 교만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악인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지 못하고 무모한 행동을 하면서 하나님을 대항해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자신이 가진 부와 힘을 믿고 하나님께 대항합니다. 하지만 그런 번영도 오래가지 않아서 황폐하게 되고 재산과 소유를 잃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라져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17-35). 욥은 고통의 원인이 자신을 출생하게 하신 하나님께 있다고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3:10). 하지만 엘리바스는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스스로가 잉태하고 낳은 악행의 결과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하나님에 대해서 강하게 말한 욥에게 책망한 것은 일면 타당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칠게 말을 해도 될 만큼 만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욥이 하나님께 탄식하며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중에 질문하고 나아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왜 자신을 버리시냐고 성부 하나님께 탄식하며 물으셨습니다. 엘리바스는 여전히 인과응보의 원리를 기반한 전통적 지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의 강한 어투는 깊은 고통과 역경에서 나오는 깊은 탄식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삶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풀리지 않은 어려움을 만날 때 우리의 삶을 살피며 하나님께 탄식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무조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모두 우리 죄 때문이라고 회개하라고 하고 고통과 고난을 무시한 채 무조건 감사와 찬양으로 응답하라는 요구는 맹목적인 신앙으로 이끌 위험이 있습니다. 바른 회개는 덮어놓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통해서 무엇이 죄인지 확인하고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지 알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삶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하고, 말씀을 기반으로 현실을 고민하며 성찰하고 하나님의 뜻과 의도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러나오는 확실한 지식과 신뢰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을 말씀에 비추면서 하나님께 고민을 털어놓고 때로는 씨름하며 그분을 굳게 붙들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9월 25일 (월요일) 욥기 14장

욥은 어제 말씀에 이어서 계속해서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욥은 자신의 상태가 시들면 없어질 꽃과 금새 사라질 그림자와 같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무 자신에게 지나치게 주목하지 마시고 엄격하게 재판하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서 완벽한 의를 찾으려고 하신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내버려 두시길 소망합니다(1-6). 나무는 찍히고 베어도 다시 자라지만 인생은 한 번 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치시고 죽게 하시면 다시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7-12). 하지만 욥은 만약 그렇게 해서라도, 죽어서라도 하나님을 뵐 수 있고 자신을 부르신다면 자기가 응답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만큼 욥은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아뢰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속히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16절은 “그러면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더라도 나의 죄는 감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욥의 죄를 주머니 넣어 감추시고 죄악을 싸매어 주시는 것입니다(13-17). 하지만 앞에서 말한 이런 희망을 모두 깨뜨려 버리는 것이 현재의 고통과 고난입니다. 현재 욥은 큰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가 당하고 있는 고통이 너무 커서 정말 그 희망 조차도 소용이 없는 것 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원히 이기시고 계신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육체적 고통과 영적인 고난이 너무 심하기 때문 입니다(18-22). 

 

욥은 자신의 큰 고통 때문에 한편으로 낙관적인 미래를 희망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염세적인 태도도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엄청난 고난의 순간과 고독한 순간에도,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 같은 영적인 고통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자신의 고통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일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복잡합니다. 때로 너무 힘들어서 모든 것을 놓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쏟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께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비록 흔들릴지리도 항상 하나님을 향해 서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24일 (주일) 욥기 13장


욥은 친구들의 의견에 대해서 좀더 직접적으로 반박합니다. 욥은 그 친구들보다 지혜가 적지 않았습니다. 욥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욥은 친구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한답시고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고발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친구들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1-11). 하나님의 정당함을 변호하기 위해서 범죄하지 않은 욥을 고발하고 죄가 있다고 주장하는 친구들은 마치 금방 무너질 흙으로 만든 성과 같은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말을 아끼고 하지 않는 것이 욥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12-14). 욥은 하나님께서 차라리 자기를 죽이러 오셔서 만날 수 있다면, 자기의 억울함과 행위를 하나님께 아뢰어 자신의 순전함을 알리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신의 순전함을 하나님께 알리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뒤에 하나님의 판결을 받게 되면 그것이 구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은 정말로 범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끝까지 자신의 순전함에 근거해 무죄를 주장할 것입니다(15-19).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후에 욥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손을 대고 계시는 지금의 고난을 물리쳐 주시고, 또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지 마시도록 요청합니다. 또 정말로 자신의 죄가 있다면 깨닫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만약 자신이 알지 못하는 죄 때문에 얼굴을 가리시고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라면 알게 해달라고 합니다. 욥은 하루 빨리 마치 자신을 대적과 같이 대하시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자 합니다. 욥은 자신의 삶이 좀먹은 옷 처럼 허무하고 쓸모없는 삶이 되었다고 호소합니다(20-28). 

 

욥의 친구들은 전통과 지혜를 통해서 욥의 상황에 적용하고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고 그 상황을 설명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자신들이 경험하지 않은 고통을 겪는 욥에게 섣불리 적용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변호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지혜와 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지혜를 그들은 몰랐습니다. 반면에 욥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과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정말로 자신의 죄로 그런 고난을 당한다면 하나님이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부서질 것 같은 자신에게 아주 강하게 밀어 붙이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원망도 솔직하게 말씀드립니다. 오늘날 신자들도 삶에서 다양한 경험을 합니다. 때로는 일반적인 원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 고난도 겪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상황도 경험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섣불리 상황을 판단하고 조언을 하기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변호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셔서 모두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신뢰함으로 참된 지혜자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23일 (토요일) 욥기 12장


소발의 말에 이어 욥이 대답을 합니다. 욥의 대답은 14장까지 이어집니다. 주된 내용은 친구들에 대한 냉소와 분노,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간청과 탄식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욥은 친구들의 말에 반박합니다. 사실 욥의 친구들이 말한 것들과 그들의 생각은 욥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친구들이 제시한 법적인 인과응보의 원리와 지혜에 관한 말은 욥에게 어떤 지혜와 유익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2-3). 욥의 답답함은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적용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깊은 교제 가운데 살던 자기가 이제는 친구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직접적으로 조롱하지는 않지만 그의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친구들의 말이 결국 그를 조롱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도 의인에게 고난을 주고 계시는 상황입니다(4-6). 이에 욥은 짐승들과 새들과 땅과 물고기 등 모든 피조물도 의인에게 고난을 주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지혜가 있다고 하는 친구들이 알지 못한다고 그들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7-12). 그리고 욥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고난을 통해서 보게 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파괴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인생의 모사(충고자)와 왕과 귀인들, 제사장들, 권력이 있는 자들, 심지어 민족들의 지혜와 능력을 초월합니다. 욥이 고난을 통해서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과 같이 인과응보의 원리에 메이지도 않고 선조의 지혜에도 메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욥에게도 여전히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의 선한 통치에 기여하게 되는 지, 자신에게 어떻게 유익이 되는지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에게 여전히 고난의 이유와 목적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깊고 오묘하다고 욥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의 당연한 이치도 뛰어넘습니다. 해도 멈추고, 바다를 육지로 만들기도 하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십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육체의 부활은 인간의 지혜로는 알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정점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사신 교회인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와 능력을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오늘도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자들입니다. 때로 삶의 깊은 웅덩이와 말하기 힘든 고민과 걱정과 불안으로 살아갈 때도 있지만, 그때도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와 능력을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지혜와 능력보다 뛰어난 우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붙드십니다. 이 사실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바랍니다. 

 


9월 22일 (금요일) 욥기 11장


욥의 말에 이어서 나아마 사람 소발이 반박합니다. 욥은 지금까지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했고,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에게 벌을 주신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소발은 하나님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전에 엘리바스와 빌닷 보다 소발은 더욱 더 확신에 찬 어투로 직접적으로 욥이 숨기는 죄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소발은 하나님의 지혜로우심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도 찾아내시는 오묘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욥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죄가 없어 보여도 결국 죄를 찾아 내신다고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욥이 지은 죄에 대해 일부를 잊으셔서 욥이 지은 죄에 비해 더 적은 벌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1-6). 욥이 아무리 자신의 무죄를 주장해도 결국 하나님의 지혜는 욥이 죄인임을 알고 계신다고 주장합니다(7). 8-9절에 언급되는 하늘, 스올(지하), 땅, 바다는 인간이 살고 있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이 공간에 하나님은 두루 다니며 숨은 죄인을 찾아 내시고 재판하시면 아무도 숨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욥을 마치 고집이 센 들나귀 같이 지각 없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때문에 소발은 욥에게 다른 친구들의 의견과 같이 회개 할 때 주실 복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리고 회개하고 죄악과 불의를 버리라고 충고합니다. 그렇게 하면 삶이 낮과 같이 빛나고 안전하고 평안히 쉬며 많은 사람이 은혜를 구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13-20). 사실 이런 복은 이미 욥이 1장에서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욥이 의로운 사람임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소발은 하나님의 지혜에 의존하여 욥을 책망합니다. 일반적으로 세 친구의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욥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지혜는 소발의 생각보다 큽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오묘함은 죄를 찾아내고 고소할 뿐만 아니라 죄를 용서하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의 정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소발도 하나님의 지혜를 자신의 생각대로 가둡니다. 소발의 입장에서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라면,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하실 거야”라는 말을 할 때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을 벗어나 우리의 생각대로 예수님과 하나님을 가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또 때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궁금증을 다 해결해 주기 위한 책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이신 예수님에 관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십니다. 때문에 우리의 기대와 상상을 넘어 우리에게 역사하시고 붙드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21일 (목요일) 욥기 10장

9장에서 욥이 하나님과 논쟁이나 재판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탄식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사는 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더라도 불평을 호소합니다. 욥은 이제 하나님께 이렇게 희망도 없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마지막 삶은 좀 평안히 놓아 두시라고 호소합니다. 욥의 내면은 매우 복잡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괴롭게 하시고, 또 자신의 소리를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은 느낌에도 계속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호소하고 있습니다(1). 그리고 왜 이렇게 자신을 괴롭게 하시는 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2). 분명히 자신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인데 이렇게 고난을 주셔서 힘들게 하시는 것은 곧 악인을 선호하는 것과 같다고 불평합니다(3). 이것은 마치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그럴 수 없고 호소합니다(4).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시고 입히시고 돌보셔서 생명과 은혜를 주셨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하나님의 과녁으로 여기고 끝을 알 수 없는 고난을 주시는 지 불평하고 있습니다(5-13). 욥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벌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의로운데도 이렇게 하시는 것을 보고 절망과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께 호소하려고 머리를 들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자신을 꺾으십니다(14-16).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들을 바꾼다는 것은 매일 매일 새로운 아픔과 고통이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17). 그러니 차라리 자신을 태어나지 않게 하시고, 죽게 버려두시면 좋을 것이라고 하나님께 탄식합니다.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고도 이 알 수 없는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평입니다. 욥이 느끼기에 이제 자신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은 날 동안이라도 평안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18-22).

 

오늘 말씀에서 욥의 절망은 무한한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의 대조에서 출발합니다. 유한한 인간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왜 악인과 의인을 같이 취급하시는 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의로운 자기에게 이렇게 고난을 내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호소하는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욥이 죽기 직전에 잠시라고 평안히 죽을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속에서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작은 은혜라도 베풀어 달라는 간구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인과응보의 원리를 뛰어 넘으시는 분이십니다. 욥은 그것을 인정하고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고난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욥은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하나님이 버린 것 같이 느끼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욥에게는 감추어져 있지만 우리는 압니다. 

 

우리도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절망과 어려움에 대한 답을 쉽게 찾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답이 없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버린 것 같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실제로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때는 하나님께 우리가 가진 감정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털어놓고 따지고 호소하되 동시에 하나님의 일을 기대해야 할 때입니다. 다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붙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20일 (수요일) 욥기 9장


욥기 9장과 10장은 빌닷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이 대답은 법정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입니다. 마치 욥이 법정에서 자신의 억울함과 무죄함을 호소하는 것 같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상대로 소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가장 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운행하실 때 어느 인간도 하나님께 왜 그렇게 하시냐고 물을 수 없습니다(1-12). 하나님의 진노는 또한 너무 강렬해서 신화적 괴물로 묘사된 라합(사탄)과 그를 따르는 자들도 굴복합니다. 하물며 욥은 그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호소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 욥의 입장에서 그런 하나님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나님께 호소를 해도 듣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자신을 치시고 계시고, 까닭 없이 고난을 주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답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은 고난 속에서 의로운 자신도 이렇게 고통 속에 두신다면 하나님은 온전한 자와 악한 자를 멸망시키는 분이시고 무죄한 자의 절망에도 무관심한 분이라고 봅니다(13-24). 이는 고통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탄식을 보여줍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고통의 원인 미스테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고,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끝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이어서 욥은 자신의 무죄 입증을 노력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을 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몸을 씻었다는 말은 무죄를 입증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를 개천에 빠지게 하십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아직은 욥의 무죄함을 입증하는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욥의 무죄함을 직접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25-31, 42장). 욥은 자신의 무죄 변호가 하나님 앞에서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욥에게 고난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욥의 상대는 하나님이십니다. 욥과 하나님 사이에는 판결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법정인 싸움에서 나중에 하나님은 욥이 옳다는 것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이미 독자들은 이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욥을 인정해서 주실 것을 압니다(32-35). 

 

오늘 말씀에서 인과응보의 원리가 자신의 상황에서는 적용되지 않음을 입증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기에게 고난을 주시고, 하나님은 무죄한 자의 절망도 비웃으시고 온전한 자와 악한 자를 모두 멸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도 있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욥도 틀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호소와 자신의 음성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시고 보고 계셨습니다. 고난 가운데 의로운 자기에 고난을 주시고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느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환란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를 다 듣고 보고 계십니다. 때로 그 응답은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고 원하는 방식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적절할 때에, 적절한 방식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신음을 듣고 응답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어려움 가운데 인내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19일 (화요일) 욥기 8장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저주하고 자신의 삶이 미약하니 어서 거두어 가시기를 소원할 때, 이 말을 들은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의 말을 책망합니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다는 것은 하나님께 너무 심한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빌닷은 모든 잘못을 욥에게 돌립니다. 그리고 그 관점도 역시 인과응보의 원리입니다. 빌닷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오로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죄인을 벌하시고 의인에게 상을 주시는 흑백의 하나님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욥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틀림 없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에게 주어지는 충고도 다시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고 청결하고 정직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너무 처참하지만 결국 창대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1-7).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선조들의 지혜와 전통입니다(8-10). 여기서 선조들의 지혜는 일반적인 원리와 이치를 포함하고 또 신앙의 선조들의 삶을 통해서 터득한 지혜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지혜 자체는 소중한 것이고 일반적으로 옳습니다. ‘왕골’은 파피루스인데 질퍽한 진흙에서 자랍니다. 갈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땅이 마르면 금방 파피루스와 갈대는 말라 죽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이며 누구나 알고 있는 지식이자 지혜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도 다 이와 같다고 빌닷은 충고합니다. 욥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결국 욥이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잊고 그분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이 의지하는 것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을 붙든다면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다시 회복이 될 것이라고 충고 합니다(11-22). 

 

빌닷의 이런 주장은 일반적으로는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빌닷은 잘못은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틀에 가두어 놓고, 삶의 일반적인 원칙과 지혜에 가두어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욥의 상황을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평가하는 잘못된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일반적인 원리로 설명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조상들의 지혜, 오늘날로 따지면 경험과 학문적인 연구들이 항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로 우리는 십자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잘못이 없으신 예수님은 죽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욥의 고난도 인과응보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들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하고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때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빌닷의 잘못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하나님과 그분의 계획과 일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독자는 단번에 빌닷의 원리에 욥이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욥은 악한 일로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긴다고 하나님께서 꼭 벌주시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아무 일이 없다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또 우리와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설명이 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원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절대화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살피며 어려운 일당할 때 하나님께 호소하고, 즐거울 때 감사하고 찬송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18일 (월요일) 욥기 7장

이제 욥은 하나님을 향해서 말합니다.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을 욥은 압니다. 하지만 욥은 벌써 몇달 째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통으로 밤에 잠도 이루지도 못합니다(1-4). 그의 살은 극심한 피부병으로 벌레가 생기고 흙처럼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습니다. 욥의 삶은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고 완전히 취약함에 버려져 있습니다. 그 고통의 날은 베틀의 북( 재봉틀에 딸린 부속품으로 날실의 틈으로 빠르게 왔다가 갔다 하며 씨실을 풀어주는 쇠통)과 같이 덧없이 빠르게 가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삶의 덧없음, 삶의 희망과 의욕이 없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행복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무너져 있는 자신의 삶을 욥은 탄식하며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욥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음에 내버려 두시기를 소망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마치 신을 대항한 바다 괴물과 같이 하나님을 대항한 자로서 자신을 취급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적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럴 가치도 없는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대적하시는 것으로 느끼고 쉴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 탄식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그냥 자신이 죽도록 내버려 달라고 요청합니다(15-16). 또 욥은 인간을 중요한 위치로 높이신 것이 인간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징계하시고 단련하시는 것이 오히려 큰 고난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17-18). 이 말은 설사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이고 단련 시키는 것이라고 해도 너무 버겁고 견디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자신의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죄가 사소하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과 같이 아주 하찮은 존재가 이제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설사 범죄하였다고 해도 곧 죽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할 가치도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욥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이제 하나님께 얼마 남지 않는 자신의 날들에 고통이 없도록 내버려 달라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께 자신을 내버려 달라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서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고난으로 인해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평가를 절하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끝내 욥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비록 일시적으로는 스스로를 평가 절하할지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의 가치가 하나님 앞에서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을 당신의 계획과 통제 속에서 허락하실 때, 우리의 가치는 그대로 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이며, 그분의 보물입니다. 비록 고통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가치가 떨어진 것 같이 여겨질 때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 고난과 어려움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가치는 바꾸어 놓지 못합니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호소하며, 끝내 회복해 주실 하나님을 붙들고 놓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17일 (주일) 욥기 6장

욥은 엘리바스의 말에 응답 합니다. 욥은 엘리바스의 문제 해결 방식에 실망했습니다. 비록 욥도 자신이 경솔하게 자신의 생애를 저주했다고 생각했지만, 욥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고난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끊어내 버리셨다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 고난을 통해서 느끼는 감정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궁극적인 원인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 자신의 삶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모든 것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상황도 사실상 그런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욥은 차라리 하나님의 손에 죽기를 원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고통을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자신의 억울함과 고통의원인을 아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여전히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다는 뜻입니다(10). 그럼에도 여전히 욥이 지쳐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11-13). 이어서 욥은 낙심한 자가 전능자를 저버려도 친구들은 위로를 해야 하는데 자신의 친구는 그렇지 못함에 대해서 책망과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속에서 욥은 그의 친구들의 위로와 도움을 기대했지만, 그런 것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18절에 ‘대상’은 ‘개울들’로 번역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물 길은 그 본류에서 벗어나 사막으로 들어가면 당연히 마릅니다. 데마라는 지역은  무역으로 유명했는데, 상인들이 오아시스를 보고 갔다가 실망하고 낙심하는 것을 욥이 친구들에게 위로를 바랬다가 실망한 것으로 표현합니다. 욥이 그들에게 바란 것은 참된 동정입니다(14-23). 또 친구들이 자신의 논리를 위해서 친구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는 모습은 마치 고아와 친구를 파는 것과 같다고 책망합니다(27).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의로움에 있어서 자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논쟁하고자 합니다(28-30). 

 

엘리바스와 달리 욥은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책도 하나님께 있다고 봅니다. 비록 욥은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려는 부족한 모습은 있지만, 결국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욥은 자신을 향해 회개하라고 했던 엘리바스의 말도 반박합니다. 욥은 회개 대신에 탄식을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했기 때문입니다. 욥은 여전히 해결책을 하나님께 찾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욥의 고난의 원인은 미스테리이지만, 하나님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욥의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사람들은 해결책을 줄 수 없습니다. 위로를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삶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일편단심 하나님만 신뢰는 저와 여러분이되시기 바랍니다. 또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할 때 먼저 그 사람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며 살펴주고 해결책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잊지 않도록 참된 위로를 할 줄 아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16일 (토요일) 욥기 5장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은 이어집니다. 여전히 인과응보의 방식의 욥의 고난을 이해합니다. 그는 불의한 욥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1). 하나님께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재앙이 더욱 심해 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2-7). 그러면서 빨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의지하라고 합니다. 독자들은  이미 욥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분명히 욥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이런 일이 닥쳤습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공의와 상황을 역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학과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지혜로운 자도 우둔할 뿐입니다. 이런 말들 속에는 욥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척하며 교만했다는 것을 암시가 있습니다. 게다가 엘리바스는 하나님께 받는 징계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17). 그분은 일곱 가지 환란 곧 모든 환란에서 건지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회개하면 모든 재앙이 미치지 않고 온갖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18-26). 

 

엘리바스의 말은 틀린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생각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는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철저히 주고 받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언약 안에서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닙니다. 언약에서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주시고 이후에 은혜로서 언약적 주고 받음과 축복이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바스의 말 속에서 욥은 고난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회개해야하고, 하나님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조건부 축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조건부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택하셨고 먼저 은혜를 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엘리바스는 철저히 고난의 책임을 욥에게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바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신학은 자신의 이해 속에 갇힌 하나님입니다. 욥의 고난은 분명히 엘리바스가 가지고 있는 신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러해야 하는 분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십니다.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때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딘 것은 우리의 순종의 부족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때로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 넘으시는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위해서 그렇게 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쉽게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곤난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덜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욥은 본인의 불순종으로 당하는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욥은 분명히 또 다른 가르침을 배우겠지만(39:37), 그 원인은 욥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인과응보의 원리가 아니라 먼저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고난 가운데 인내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인내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15일 (금요일) 욥기 4장

이제부터 욥과 욥의 친구들과 대화와 논쟁이 37장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욥의 생애 탄식에 대해 일주일 동안 침묵을 지키며 함께 슬퍼하던 친구 중의 한 명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가장 먼저 말을 합니다. 당시에 데만이라는 지역은 지혜로 유명했으며 엘리바스는 친구들 중 제일 연장자였습니다. 그는 먼저 조심스럽게 욥의 생애 저주에 관한 말을 듣고 위로의 말을 전하려 합니다(2). 또 욥이 이전에 얼마나 성실하게 사람들을 훈계하고 손이 늘어진 자들을 잘 위로 했었는지에 말하며 하나님께서 그런 그의 참된 경건을 위해서 회복을 주실 것이라고 격려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의 자랑이기 때문에 회복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3-6). 하지만 엘리바스는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서 욥의 고난을 이해합니다. 무죄한 자는 결코 고난을 받지 않고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악한 자들은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7-11). 이러한 잣대로 욥의 상황을 이해하면 욥의 자녀들은 모두 악하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 한 것이 됩니다. 때문에 인과응보의 잣대로 욥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자신이 경험한 환상으로 욥에게 말합니다. 엘리바스에게 계시된 가르침은 경건한 자들이라할지라도 완전하지는 않고, 완벽한 의인은 없기에 욥의 신앙이 대단하지만 결국 욥에게 어느정도 불의가 있었을 것이고, 완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12-21). 이것은 일종의 자신의 신학적인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엘리바스의 신학적인 지식이나 경험이 옳다면 욥은 자신의 약간의 불의함 때문에 너무나 큰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 또한 맞지 않는 말입니다. 게다가 욥은 하나님 앞에서 당시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온유하고 정직하고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앞으로의 대화를 통해서 욥의 상황은 결코 인과응보의 원칙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더 자세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자신의 생애를 저주하는 욥에게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 위로를 합니다. 하지만 그의 위로는 욥의 상황을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인과응보의 원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욥기의 독자는 욥이 완전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난을 받습니다. 그것은 또한 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아직은 감추어져 있다는 것도 압니다. 예수님의 고난도 당시 사람들에게 그분이 신성모독을 하여 죽게 되었다고 생각되었고, 무엇인가 잘못하여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으셨고, 잘못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추어진 구원의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재해를 스스로 겪고 또 주위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위로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하는 위험을 피해야 합니다. 함께 겸손하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단지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찾고 매달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함께 겸손하게 어려움을 당한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위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9월 14일 (목요일) 욥기 3장

오늘 말씀은 욥이 자신의 생애를 저주하는 장면입니다. 앞에서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을 견디던 욥은 이제 자신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자신을 태어나게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고대 신비 속에 있던 큰 동물 리워야단(혹은 악어로 번역됨)을 깨워서 자신이 나던 밤을 없앴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리워야단이 달이 삼키면 어둠이 영원히 지속되고 낮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태어나는 생일을 전체적으로 어둠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저주합니다(1-10).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환난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의 삶을 저주합니다(11-14). 그렇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은 차라리 나지 않거나 아니면 태어나자마자 죽었더라면 이런 환란을 겪지 않고 그저 쉼을 누리며 평안히 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죽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고 죽음 이후의 삶이 오히려 더 평안을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5-22). 욥은 하나님께서 삶을 주셨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이런 고난을 겪게 되고 음식도 즐겁지 않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신음 소리가 지속되고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오직 불안만이 자기와 함께 있다고 탄식합니다(23-26). 

 

욥의 이러한 원망과 생애의 저주는 그가 얼마나 평범한 사람이지 보여줍니다. 또한 그의 고통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보여줍니다. 욥의 고난의 시기는 상당히길었습니다. 친구들이 그 소식을 듣고 오는 시간이 상당시간 걸렸을 것입니다. 또 친구들이 와서 일주일 동안 그와 함께 있을 때에도 여전히 그는 고난 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지속되고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욥은 자신의 생애를 저주한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환난 속에서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정직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죽고 싶은 마음을 누구나 들게 됩니다. 죽음만이 해결을 해 줄 수 있는 것 같고, 그런 삶을 주신 하나님께 원망도 하게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난과 고통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솔직한 마음을 토로하는 것이 믿음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솔직한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서 있고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서 만나는 문제를 대할 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우리의 마음을 쏟으며 묵묵부답의 기간이 길어질때에도 하나님을 더욱 붙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13일 (수요일) 욥기 2장

다시 이야기는 천상의 회의로 옮겨집니다. 다시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주의하여 보았는지 묻습니다. 사탄의 말대로 되지 않고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은것을 사탄은 다 보았습니다. 사탄은 시험의 강도가 낮았다고 불평합니다. “가죽으로 가죽을 대신한다”는 것은 당시 물물 거래를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한다는 뜻의 상업 용어였습니다. 욥이 당한 것은 욥이 고백한대로 욥이 생존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큰 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이다시 취했으니 욥이 범죄하지 않은 것이라고 사탄은 말합니다. 이에 사탄은 욥이 더 큰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을 향하여 욕할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욥의 뼈와 살을 치는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태어난 유일한 육체를 친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도 허락하십니다. 대신 욥의 생명을 해하는 것은 금하십니다(1-6). 이제 시험과 고난의 강도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사탄이 욥을 처서 온 몸에 종기가 납니다. 이 종기는 일종의 악성 피부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가렵고 보기에도 흉해지는 병입니다. 욥도 매우 고통스러워 옹기 조각으로 피부를 긁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처참한 모습을 보고 하나 밖에 없는 가족인 아내도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사실 욥과 아내는 자신들에게 왜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고 열심히 일해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어떻게 보면 가장 완벽한 삶을 누리던 욥에게 하루 아침에 닥친 이 알 수 없는 고난을 함께 겪고 있는 아내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녀는 아픈 욥을 위해서 간호하며 생계를 위해 필사적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욥과 함께 그녀가 겪은 고통도 보통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욥이 섬기던 그 하나님은 욥과 자신의 고난의 시기에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말이 어리석은 여인의 말과 같다고 합니다. 욥은 욥과 가족에게 모든 복을 주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고난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다시 욥은 입술로 범죄하지 않습니다(7-10). 이제 욥이 겪은 말할 수 없은 어려움을 듣고 믿음의 친구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전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욥과 그의 상황에 할말을 잃었고 함께 일주일 동안 통곡할 뿐입니다(11-13). 이들은 욥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던 친구들로서 위로하기 위해 온 사람들 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여전히 천상의 회의를 통해서 독자들인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정해 준 경계 안에서 욥을 시험해야 했습니다. 욥은 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모든 행복과 불행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욥과 같은 의인도 고난을 받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 있을 때에도 어려운 일은 우리에게 닥칠 수 있습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은 닥칠 수 있습니다. 왜 그런 고난이 오는지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고난도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으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고난과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를 넘어 우리에게 닥치는 없음을 신뢰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12일 (화요일) 욥기 1장

욥기는 처음 부분과 마지막 결론 부분을 제외하고는 긴 시로 된 책입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겪은 고난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악의 존재와 그 넘어에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서나 시가서로 분류됩니다. 욥기의 주제는 의인도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이신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받으셨음을 미리 보여주는 책입니다. 동시에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버려두지만 결국 응답하시고 회복을 주신다는 위로와 인내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욥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합니다. 그는 우스라는 땅에서 살았던 실존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잘 키우고 자녀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하던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1-5). 어느 날 천상에서 천사들이 모였는데, 그 중에 사탄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을 두루 보고 온 사탄에게 욥을 보았는지 묻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자랑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은 없다고 하나님께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사탄은 욥이 이유 없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9). 인과응보의 원칙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욥을 평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주신 소유물과 자녀들을 거둔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모든 소유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줍니다. 대신에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합니다(10-12).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욕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욥이 가지고 있던 소와 나귀 떼는 스바 사람에게 빼앗기게 되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양들과 종들을 잃었고, 갈대아 사람들이 와서 낙타와 종들을 잃었고, 큰 바람으로 인해 큰 아들의 집에서 함께 먹던 모든 자녀들이 죽게 됩니다. 강도와 천재지변으로 재산과 자녀들을 모두 잃게 된 것입니다(13-19).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밉니다. 참담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멈추지지 않고 주신 자도 여호와이시고,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모든 일에도 욥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20-22). 

 

오늘 말씀에서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신다는 보여줍니다. 비록 사탄이 욥을 치지만, 하나님께서 허용한 만큼만 칠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욥에게 닥친 고난은 여전히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었습니다. 또 욥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로움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은 참으로 의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여전히 통제하신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를 돌아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경외하고 있는지 되새겨 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11일 (월요일) 에스더 10장

오늘 본문은 아하수에로 왕의 위엄과 통치의 대단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조공을 받았다는 것을 언급합니다(1). 그만큼 왕의 나라가 든든히 세워져 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나라의 왕에게 모르드개는 존귀하게 여김을 받았고, 크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모르드개의 지위가 이전의 하만보다 훨씬 높아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 모르드개가 유다 백성들에게 크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백성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고 동족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2-3). 그리고 그 내용이 역사 책에 기록되었다고 언급함으로 이 모든 이야기를 허구나 상상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밝혀 줍니다. 에스더서는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모르드개의 모습은 참된 평화를 당신의 백성에게 가져다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르드개가 가져다 준 평화는 일시적이지만 우리 주님께서 가져다 주신 평화는 영원하고 참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 주신 분이십니다. 백성들이 평화를 가져다 준 모르드개를 사랑하고 존경하였듯이 우리는 참된 모르드개이신 예수님을 더욱 존경하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가져다 주시고 모든 선한 것들을 주시는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존경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10일 (주일) 에스더 9장

오늘 말씀은 실제로 하만이 제비 뽑아 유다인을 죽이기로 정한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줍니다. 그날은 본래 유대인들의 죽음의 날이었지만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날과 원수를 갚는 날로 바꾸셨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다스리는 모든 지방의 유다인들은 그들을 공격하고자 하는사람들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 함께 모이고 무력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날에 각 지방의 고위 공무원들은 제국의 2인자가 된 모르드개를 두려워하여 유다인을 도왔습니다(1-3). 모르드개는 제국에서 세력을 얻어 더욱 지위가 굳게 된 반면 하만과 그 집은 완전히 망합니다. 그날 수산 성에서 500명이죽었고 하만의 죽은 아들들의 이름이 언급 됩니다. 그러나 그날 유다인들은 원수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유다인들이 무분별하고 잔인하게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재산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또 사울이 재산을 탐하여 아멜렉을 진멸하는 것을 못한 것과 대비가 됩니다. 유다인들은 재산을 탈취할 권리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사울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4-10). 수산 성에서는 에스더의 요청으로 다음 날 까지 공격하는 원수들에게 보복하는 일이 허락 되어 300명이 더 죽었습니다. 제국 온 지역에서 칠만 오천 명의 대적들이 죽었습니다. 이 또한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정당방위였음을 언급됩니다. 그 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국 내에게 핍박과 미움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음 날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쉬고(안식)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 했습니다. 죽음의 날에서 벗어나 오히려 그 날이 원수를 갚는 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모르드개는 이 일을 기록하고 앞으로 아달월 14일과 15일을 절기로 지킬 것을 공포합니다. 앞으로 그날을 대적에서 벗어나 평안함을 얻은 것을 기념하여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예물을 주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절기로 정합니다. 그날은 제비 뽑아(부르) 얻은 날이었기 때문에 부림절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이 조서를 모든 유대인들에게 내려 부림절을 지킬 수 있도록 하고 책에 기록합니다(20-32). 

 

하나님께서는 죽음과 슬픔의 날을 기쁨과 즐거움과 잔치의 날로 바꾸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부림절을 지킵니다. 우리도 원수 사탄의 손에서 죽음과 슬픔의 날을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의 핏 값으로 사셔서 죽음과 슬픔의 날을 기쁨과 즐거움과 잔치의 날로 바꾸셨습니다. 에스더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에 원수 마귀와 그에게 속한 자는 최후의 심판을 받고 우리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누리게 될 것이며 그 날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우리를 핍박과 여러 어려움 속에서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때문에 에스더서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다시 오실 잔치의 날을 고대하며 고난을 이기며, 기쁨으로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9월 9일 (토요일) 에스더 8장

하만은 최후를 맞이했고 그 날 왕은 에스더에게 하만의 집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에스더는 하만의 열 아들을 죽이도록 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원수인 아말렉의 후손이 사라졌습니다. 또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관계를 알게 된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의 자리를 모르드개에게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위기가 모두 지난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 하만을 통해서 내려진 조서가 남았기 때문입니다. 한번 내려진 조서는 취소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조서를 무력화 할수 있는 다른 조서를 내리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왕은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조서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권한을 주고 반지로 도장을 찍으라고 합니다. 이 조서 역시 취소할 수 없는 효력을 지닙니다. 이에 왕의 서기관들이 모여 모르드개가 불러 주는 대로 조서를 씁니다. 그 내용은 하만이 유대인들을 죽이기로 한 날에 유대인들도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이고 그들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무력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1-11). 이전의 조서와는 달리 유다인들에게 방어하고 반격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기 때문에 함부로 공격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유대인들도 공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명령은 아하수에로가 다스리는 온 땅에 전달되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이제 굵은 베옷이 아니라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금으로 만든 관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왕국의 2인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모르드개를 보고 온 수산 성이 기뻐합니다.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는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유대인이 되고자 했습니다(15-17). 그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심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어하는 자들도 있고, 단지 모르드개를 두려워하여 그렇게 하고자 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며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너무 잔인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는 보복의 대상을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로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앙심을 품고 있던 모든 사람을 보복할 수 있는 날이 아니라 하만의 조서를 따라서 유다인을 치려고 하는 하만에게 속한 자에게 보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다인을 치지 않는다면 전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싸움은 하나님의 백성과 사탄에 속한 자들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싸움은 실제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 구원 사역에 동참하도록 하시고 싸움을 직접 감당하도록 하십니다. 사탄과 세상은 분명히 교회를 공격하고 넘어지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대신에 폭력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악의 영들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신갑주와 말씀의 검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엡 6:12). 이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문화, 철학, 물질 등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으로 살도록 끊임 없이 도전해 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속적인 생각과 문화를 거부하며 싸움을 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통해서 때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여러 모습으로 걸어오는 싸움을 당당하게 맞서고 말씀으로 싸워 이시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8일 (금요일) 에스더 7장


에스더가 베푼 두 번째 잔치에 왕과 하만이 참석합니다. 그 자리에서 왕은 다시 한 번 에스더의 소원을 묻습니다. 이번에 에스더는 그 소원을 말합니다. ‘왕후’ 에스더라고 반복적으로 말함으로써 에스더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힘입어 겸손하게 왕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왕 앞에서 은혜를 입고 왕이 좋게 여긴다면 자신의 생명을 돌려 주시고, 자신의 민족도 자신에게 달라고 합니다. 에스더와 그 민족이 원수의 손에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왕은 자기도 모르게 하만의 손에 에스더와 유다 민족을 은 만 달란드에 판 것입니다. 에스더는 만약 노예로 팔렸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노예로 팔렸으면 그래도 왕에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4). 하지만 죽기 위해 팔렸기 때문에 왕에게 큰 손해입니다. 그 말을 듣고 왕은 그 원수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에스더는 그 대적과 원수는 바로 악한 하만이라고 말합니다. 하만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왕은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자가 그런 악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서 잔치 자리를 나갑니다. 하만은 그 때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합니다. 그 모습을 왕이 돌아와서 보고 자기 앞에서 왕후와 가까이 있는 것을 구실로 하만에게 벌을 내립니다(8). 하나님께서 딱 그 장면을 보게 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왕에게는 좀 더 확실한 하만을 벌할 구실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유다 민족을 판 일에 왕도 허락을 했고 조서를 내리는 인장도 찍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일로 하만을 벌할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 그런 장면을 볼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제 곁에 있던 다른 신하가 하만이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준비한 나무가 있다고 알려줍니다. 모르드개가 부상이 되고 하만은 자신이 모르드개를 달고자 했던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하며 몰락 하게 됩니다(10).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을 죽이려고 꾀했던 원수 하만은 이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돈과 명예와 자식, 그리고 권력을 다 가지고 있던 원수 하만은 사라졌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 같이 보이던 모르드개가 부각이 됩니다. 아직 왕의 조서를 통해서 내려진 바꿀 수 없는 명령이 남아있긴 하지만 모르드개의 목숨은 이렇게 보존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강력한 사단과 그의 세력으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아무것도, 아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5). 이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또 하만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그 삶 자체가 악한 자의 삶이면 그 가진 것이 모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에스더는 자신의 지위를 자신 뿐만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에 유익하게 사용하고 죽이는 곳이 아니라 살리는 곳에 사용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거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웃을 섬기기 위해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붙드시고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또 공동체와 사회의 유익을 위해서 가진 것을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7일 (목요일) 에스더 6장

오늘 말씀에서부터 하만의 몰락이 시작됩니다. 왕은 에스더의 잔치에 다녀온 날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또 그 날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높은 나무에 달기로 작정한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날 왕에게 잠이 들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밤에 왕은 궁중 일기를 읽으며 모르드개의 공로에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얼마나 절묘한 타이밍입니까! 그리고 모르드개의 공에 보상을 하기 위해서 밖에 다른 신하가 있는지 묻습니다. 마침 하만이 뜰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왕에게 허락을 구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왕은 하만을 불러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의견을 묻습니다. 역시 왕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습니다. 하만은 그 존귀하게 될 자가 자신이라고 확신하고 왕과 버금가는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고 답합니다. 왕관을 씌우는 것은 실제로 왕관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타는 말에 씌우는 관을 말합니다. 하만은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에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 그에게 왕복을 입히고 말을 태워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외치며 왕이 존귀하게 한 자를 모두에게 보여주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1-9). 이에 왕은 하만에게 명하여 그가 말한대로 성문에 있는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라고 합니다. 대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모르드개를 죽이고자 허락을 받으러 갔다가 모르드개를 지극히 높여야 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하만은 그가 취하고자 했던 영광을 모르드개가 취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하만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하만은 번뇌하며 머리를 싸고 집으로 돌아 갑니다. 이것은 극한 슬픔과 수치의 표현입니다. 사실상 베옷을 입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상황이 역전이 되었습니다. 집에서 아내 세스라의 태도와 친구들에게 자신의 불운을 말했을 때 이전과 반대로 말합니다. 모르드개가 정말 유다 족속이라면 결코 그를 이기지 못하고 반드시 엎드러질 것이라고 거의 예언 수준의 말을 합니다. 이는 앞으로 전개될 사건의 복선이기도 합니다. 말도 마치기 전에 그는 에스더의 잔치에 가게 됩니다(10-14).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아직 정리 되어야 상황이 더 있지만, 오늘 말씀에서부터 완전히 분위기가 바뀝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일하심이 아주 극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6장은 우연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이진 않는 손이 붙드심을 압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교회는 세상 속에서 힘도 없고 패배한 것 처럼 보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삶의 무게와 여러 어려움 속에서 절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교회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섭리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붙드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간섭과 역사하심을 깨닫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6일 (수요일) 에스더 5장

금식 기한이 끝난 삼일 째에 왕후 에스더는 위험을 무릎쓰고 왕에게 나아갑니다. 그녀는 왕후의 옷을 입고 갑니다. 왕 앞에서 공식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지만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다행히 왕은 궁 안 뜰에 서 있는 에스더를 보았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금 지팡이를 내밀어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게다가 에스더에게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심지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합니다. 이는 완전히 에스더를 신뢰하고 그녀에게 약속한 것을 반드시 주겠다는 왕의 다짐이었습니다. 에스더는 바로 구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먼저 왕을 위한 잔치를 베풀었으니 하만과 함께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왕은 하만을 급하게 불렀고, 함께 왕비 에스더가 베푸는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전에 잔치에서 왕비는 그 자리를 잃었지만, 이번 잔치에서는 왕후의 자리가 더욱 굳건하게 됩니다. 왕의 사랑을 듬뿍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왕은 그 자리에서 에스더에게 다시 한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말하라고 합니다. 에스더는 내일 다시 왕을 위한 잔치를 베풀 것이니 다시 한번 하만과 함께 오라고 합니다. 그 때 말해 주겠다고 합니다(1-8). 바로 필요한 것을 말할 수도 있는데 에스더는 한 번 더 잔치를 벌입니다. 왜냐하면 왕이 더욱 더 에스더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하고, 또 그 말을 듣고 즉시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까지 왕의 모습을 보면 어떤 결정에 있어서 매우 수동적인 모습으로 항상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에스더가 요청하는 데에는 왕의 큰 결단이 있어야 했습니다. 왕은 역시 에스더가 원하는데로 다음날 잔치에 오기로 합니다. 

한편 하만은 그날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왕과 왕후의 잔치에 자신만 초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기분 좋은 것도 성문을 나가면서 모르드개를 보았을 때 미움과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친구들과 아내를 불러 자신의 부와 자녀가 많은 것과 자기가 얼마나 높은 대우를 받는지 자랑합니다(9-12). 하만은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모르드개를 보았을 때 그 모든 것이 부질없어 보였다고 합니다. 이에 그의 아내와 친구들은 모르드개를 죽이기고 매달기 위해 높이 23미터나 되는 나무를 세우고 잔치에 갔다가 오라고 합니다. 모르드개는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명하여 나무를 세웁니다(13-14). 자기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를 어떻게 처단하는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에스더의 모습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준비하고 결단하며 나아갈 때 동시에 철저하기 준비도 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스더는 기도만하고 그냥 왕에게 나가지 않고, 왕후의 의복을 입고, 왕이 더욱 자신의 간청에 긍정적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잔치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준비를 성실히 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서 왕이 왕후에게 호의를 베풀도록 하셨습니다. 

또 이유 없이 모르드개만 보면 죽이려고 하는 하만의 모습은 마치 원수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 이유 없이 넘어지게 하고 미워하는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에스더 저변에 ‘원수와 하나님의 백성의 대결’라는 주제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원수 사이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한 위험 속에 있는 교회를 그냥 두고 보시지 않으시고 구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사탄은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많은 부와 힘으로 교회를 위협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 하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동시에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상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삶 속에서 마주치는 원수의 공격에 넘어지지 않고, 혹 넘어졌더라도 다시 일어나 같은 유혹과 공격을 거부함으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5일 (화요일) 에스더 4장

왕의 공문이 온 도시에 전해 진 것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 대성통곡합니다. 이는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굷은 베옷은 깊은 슬픔이나 절망 혹은 애도를 할 때 입는 옷입니다. 그런 옷을 입고 궁내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모르드개 문 앞에 있었습니다(1-3). 이 이야기를 들은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걱정이 되어 굵은 베 옷을 벗기고 다른 옷을 전해 주기 위해 사람을 보냅니다. 굵은 베옷을 입고 궁정 대문에 서 있으면 잘못하면 왕의 미움을 살 수도 있기에 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내시 하닥을 불러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물어보라고 합니다. 하닥은 모르드개에게서 하만이 꾸미는 일을 듣습니다. 은의 정확한 액수도 말함으로써 헛소문이 아니라 틀림 없는 사실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왕이 내린 초서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전해 주면서 왕에게 나아가 유대 민족을 위해서 간절히 구하라고 합니다(4-8). 처음에 에스더는 그 제안을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왕이 먼저 부르기 전에 왕에게 나아가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으로 간주되어 목숨도 위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는 다시 에스더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에스더가 왕에게 구하지 않고 잠잠하면 유다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에스더와 그 집안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왕후가 된 것이 바로 이 일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인지 어떻게 알겠냐고 합니다. 이에 에스더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한 후에 수산 성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을 모아 삼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자신도 그렇게 한 후에 왕에게 나아가고 혹 죽게 되면 죽을 것이라고 답합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요청대로 수산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모으고 삼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합니다(9-17).

 

원수 하만의 공격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바벨론에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실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그들은 어쩌면 믿음에 있어서 탁월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이유로 약속의 땅으로 가지 않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사탄이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도 공격할 때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바로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해서 였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만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지만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다른 길로 유대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스더 또한 죽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고자 기도하고 준비합니다. 에스더는 계속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자신과 모르드개만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지위를 공동체를 위해서 사용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더의 그런 결단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라도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길로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와 의지를 존중하십니다. 자발적으로 기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기 원하십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그것을 거부할 때 또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과 즐거움, 복을 놓치게 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며 적극적으로 우리의 것을 공동체를 위해서 사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4일 (월요일) 에스더 3장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은 아각 사람 함무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게 됩니다. 아각 사람은 이스라엘의 원수였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했었던 아멜렉 족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진멸하라고 했지만 사울이 살려 주었던 족속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가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모르드개는 그에게 결코 절할 수 없었고 자신이 유다인임을 밝힙니다. 하만은 그런 모르드개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결국 하만은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다민족 전체를 진멸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진멸하려는 날을 제비 뽑아(히.부르) 택했습니다. 하만은 자신의 신에게 신탁을 통해 제비를 뽑아 하나님의 백성을 진멸할 날짜를 뽑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만은 합법적으로 유대인들을 멸절하기 위해서 왕에게도 허락을 얻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법이 다른 법들과 달라 왕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모함한 것입니다(8). 그래서 유대인 남녀노소 모두 진멸하고 그 재산을 빼앗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왕의 이름으로 된 공문이 온 지역으로 전달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수산 성의 유대인들에게 큰 위기가 닥칩니다. 

 

오늘 말씀은 영적인 측면에서 볼때 하나님의 나라 백성과 그들을 대적하는 사단의 백성이 맞서는 상황입니다. 이 싸움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싸움입니다. 아벨과 가인, 아브라함과 주변국, 이스라엘과 가나안 민족 등입니다. 지금도 이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사탄과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하셨지만, 전투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끊임 없이 사탄의 잔당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원수들은 호시탐탐 하나님의 백성을 가능하면 넘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원수는 우리를 공격하고 위기 속에 넣으려 합니다. 오늘 하루도 깨어서 사단의 공격을 방어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3일 (주일) 에스더 2장

왕후를 폐위한 한 후 그 자리를 대신할 왕비를 선발하는 일종의 대회가 열렸습니다. 전국 각 지방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들을 모아 그 중에 가장 뛰어난 여인을 후궁으로 들이고자 합니다(1-4). 수산이라는 도시에 유대인 중에서 베냐민 지파 기스의 증손 모르드개는 그의 사촌 동생 에스더와 함께 살았습니다. 모르드개는 사울과 관련된 집안 사람이었습니다. 부모가 없는 에스더에게 아버지 역할을 모르드개가 했습니다. 에스더는 후궁 후보를 뽑는 관리의 눈에 들어 후궁 후보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에는 유대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조언대로 유대인인 것을 숨깁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안부를 살피며 에스더의 보호자 역할을 합니다(5-11). 이제 왕의 선택만이 남았기 때문에 1년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쳐 후보들은 차례로 갑니다. 만약 왕이 기뻐하지 않으면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에스더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나아갈 때 필요한 모든 것을 요청해서 받을 수 있었지만 내시 헤게가 정한 기본적인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스러웠습니다. 왕도 에스더를 보고 왕후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고 잔치를 열고 모든 지방의 세금을 면제하고 큰 상을 줍니다(12-18). 에스더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꾸미지 않은 것은 귀찮아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고 외면적인 것보다 내면적인 것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왕비가 정해진 후에도 왕은 후궁들을 위해서 여인들을 모았습니다(19). 에스더의 왕비 자리도 늘 위협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르드개가 대궐에 앉아 있을 때 아주 우연히, 하지만 섭리에 의해서 문을 지키는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반역을 꾸미는 것을 듣고 에스더에게 말하고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이 일을 왕에게 알려줍니다. 조사해본 결과 사실로 밝혀져 두 사람을 나무에 답니다(19-23). 모르드개가 성문에 있었다는 것은 바벨론에서 다른 유대인들보다 높은 지위와 어느정도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일로 에스더의 왕후 자리는 더 견고해지고 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늦었지만 모르드개의 이 일로 가장 적절한 시기에 보상을 받으며 원수에게 수치를 갚게 될 것입니다(6장).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지 보게 됩니다. 우리 눈에 일상적이고 우연처럼 보이는 수많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백성의 유익을 위해 운행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 앞에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임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해야 하면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흘리는 땀과 수고를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어떨 때는 도무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신뢰하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택을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매일의 반복적인 일상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날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월 2일 (토요일) 에스더 1장

에스더서는 독특한 성경입니다. 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느헤미야와 같이 탁월한 영적인 지도자를 통해서 개혁되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에스더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1차 포로귀환 때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없어서, 또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사는 것이 익숙해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땅에 남아있는 백성들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어떻게 역사 속에서 오묘하게 지켜 가시는지 보여줍니다.

이 성경 이야기는 아하수에로 왕(크세르크세스, 4대 페르시아 왕)의 잔치로시작합니다. 아하수에로는 자신의 업적과 위대함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구스, 지금의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127개의 도시를 다스리던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왕입니다. 그는 그 술자리에서 온갖 귀한 잔들과 술들을 베풀었고, 후에 취해서 왕비를 불러내 사람들에게 왕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1-8). 하지만 왕비가 이를 거절합니다. 자신의 큰 능력과 업적을 자랑하는 자리에서 큰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이에 왕의 최측근들이자 왕궁의 역사와 예법을 잘 아는 신하들을 불러 어떻게 이 일을 처리할 지 의논합니다. 그 중에 므무간이라는 사람이 말하길, 왕비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당시 남자를 중심으로 세워진 가정에서 남성들이 무시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왕후를 폐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후의 자리에 다른 여인을 앉혀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이에 왕은 자신의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존경해야 함을 조서로 내리고 왕후도 폐위합니다(9-22).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통해서 왕후의 자리가 비도록 하시고 결국 그 자리에 유다 여인 에스더를 앉히시려고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왕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고, 자신의 힘을 자랑하지만, 오늘 본문은 사실 등장하지 않으시고도 자신의 위엄과 능력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보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아하수에로 왕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때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숨어 계시는 것 같습니다. 또 멀리 계신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보이고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보이지 않으시지만 분명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31일 (목요일) 느헤미야 12장

오늘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26절까지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 돌아온 1차로 포로 귀환 백성들 중 제사장과 레위 족속의 계보와 2차, 3차로 귀환한 에스라와 느헤미야 때에 있었던 사람들의 계보입니다. 1차 포로귀환부터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있을 때까지 있었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차 귀환자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2, 3차 귀환자들은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리고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여 예배와 삶을 개혁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예배를 주관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음을 족보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1-26). 교회의 개혁와 회복은 한 세대에서 끊어지면 안됩니다. 지속적으로 다음 세대까지 이어져야 하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두번째 단락 27절에서 47절까지는 성벽을 완성하고 봉헌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성벽은 완성 되었고, 기쁘게 하나님께 바치는 성대한 완공식이 거행됩니다. 한참 전에 성벽이 완성은 되었지만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인구가 적어서 봉헌식을 못했습니다. 이제 봉헌식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인구가 성벽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각 처에 흩어져 있던 레위 사람들을 모읍니다. 노래하던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에서 나아옵니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 가기 위해서 예루살렘 근처에 살고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몸을 정결하게 씻고, 백성들도 몸을 씻어 거룩한 예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춥니다. 행사를 주관하는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성벽 위에 올라가게 하고 지도자들과 찬송하는 자들의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두 무리가 만나도록 합니다. 그리고 온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남녀노소 모두 즐거워하고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큰 기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의 소리가 예루살렘을 넘어 멀리까지 들렸습니다(27-43). 사람들이 기쁨으로 제사를 드리고 그 제물 중에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성전 창고에 두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노래하는 자들이 지속적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제사를 회복했습니다(44-47). 

 

오랜 회복의 과정이 이제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이 과정은 모두 하나님의 율법책, 곧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둔 내적인 개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둔 개혁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때 내적인 어려움과 외적인 공격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개혁과 회복이 끝내 큰 기쁨과 즐거움을 만들어 냅니다.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 당하던 성벽은 수많은 백성이 올라가도 될 만큼 견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를 개혁하고 우리의 삶을 개혁하고 회복하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 아닙니다. 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따릅니다. 그럼에도 그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고 말씀으로 개혁하고 회복되는 삶을 살 때, 기쁨으로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장차 주어질 기쁨을 생각하시고 십자가와 부끄러움을 참으셨습니다(히12:2). 우리 모두 장차주어질 기쁨을 바라보며 말씀으로 우리 삶을 개혁하는 것을 지속해 나가기 바랍니다. 나아가 이런 개혁과 회복이 우리 세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 다음 세대에게 본이 되고 그들을 위해서 격려하며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30일 (수요일) 느헤미야 11장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거주할 사람들의 명단을 제공합니다. 우선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야 했고, 나머지 백성들을 중에서 10분의 1만 제비 뽑아 예루살렘에 거주할 사람을 정하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이주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터전에서 옮겨 와야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여기에 본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주하기 원하는 자들 중에서 제비를 뽑기 통해서 이주를 하게 된 자들은 백성들의 축복을 받습니다(1-3). 이들은 이제 예루살렘에 살면서 인구를 증가시키고, 예루살렘 지역과 성을 지키는 막대한 임무를 갖게 됩니다. 나머지 백성들은 기존에 살던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무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4). 4절 이하는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의 목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유다 지파 베레스 자손과 베냐민 지파 살루의 자손들입니다. 이어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된 제사장들의 명단과 레위 사람들의 명단들, 그리고 성 문지기들, 노래하는 자들, 그리고 마을과 주변 동네들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목록을 서술합니다(4-36). 이 사람들은 모두 성전을 유지하고 지키며 제사를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또 각 지역 성읍에서 거주하게 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언약을 새롭게 하고 헌신을 다짐하며 실제적으로 변화를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성 안과 성 바깥 각 성읍에 살면서 그곳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지속적으로 제사가 있도록 살아야 하고, 각 성읍에서 지속적으로 언약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는 점진적으로 백성들을 통해서 회복되고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회개와 언약 갱신입니다. 

 

지금 이 일은 예배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배를 중심으로 새롭게 된 백성들이 각자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배 마지막 삼위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다가오는 일주일의 삶을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확장하는 삶으로 살기 위해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백성에게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예배를 통해, 개인 경건을 통해 받은 말씀을 가지고 매일의 삶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학교, 직장, 가정, 클럽 등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죄와 불법을 멀리하고, 세상 문화를 거부하여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29일 (화요일) 느헤미야 10장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고 이 언약을 확실하게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확증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도장을 찍어 언약 기록문을 봉했습니다. 1-27절까지 문서에 이름을 기록한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이것은 반드시 지켜야하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지운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느헤미야를 비롯한 이름을 기록한 지도자들은 자신의 결단과 헌신을 견고하게 한 것입니다(1-27). 이 명단들을 보면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고 가르칠 때 함께 했던 자들도 대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지도자들로서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부르짖던 자들입니다(참고.9:4-5). 그 외에 나머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또 이방인들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사람들도 명단에 이름이 적힌 자들과 함께 율법을 지키기로 맹세합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통혼을 금지하고, 안식일에 매매하지 않으며, 7년 안식년 마다 땅을 안식하게 하며 빚을 탕감하겠다고 맹세합니다. 또 스스로 각자의 일년 수입의 3분의 1일을 여호와의 전에서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속죄제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제물과 물품을 살 수 있도록 합니다. 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백성들이 제비를 뽑아 순번을 정하여 가문대로 나무를 바치기로 합니다. 이를 통해서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합니다. 또 토지에서 나오는 추수의 첫 곡식과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고 맏아들을 비롯한 처음 난 것을 대신하여 율법에 기록된 대로 속전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익은 밀가루와 거제물과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에게 제공하고 성전의 여러 방에 두어 지속적으로 제사와 성전을 유지 보수하는데 사용하도록 합니다. 나아가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주고 레위인들은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바쳐 역시 성전을 유지 보수하는데 함께 동역하도록 합니다. 이를 통해서 성전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고 그곳에서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언약적인 관계가 지속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28-39).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과 새롭게 된 언약 관계에 모든 백성들이 참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비록 공식적으로 서명한 사람들은 지도자들이었지만 나머지 백성들도 이 언약관계에 신실하게 반응합니다. 특히 언약 백성으로서 삶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두면서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가지고 옵니다. 통혼을 금하고, 안식일에 경제활동을 스스로 거부하고, 안식년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제사가 지속되게 하기 위해 성전이 유지 보수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헌신합니다. 여기에는 아무도 예외가 되지 않았고, 기준은 확실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말씀에서 요구하는 대로 살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요구하는 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으로 굳게 다짐하고실천하길 원하십니다. 오늘 그동안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마음 먹은 것이 있다는 실천하는 날이 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28일 (월요일) 느헤미야 9장

절기가 끝난 7월 24일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여 금식하고 슬픔과 겸손을 나타내는 베옷을 입고 하루 종일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실제적인 삶 속에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합니다. 그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던 죄는 다름 아닌 이방민족들과 결탁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들을 비롯한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는 혼합 주의 신앙으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책(모세오경)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깨닫게 하여 찬송하게 하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했기 때문에 회개합니다(1-6).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책은 그들의 조상들이 왜 먼 바벨론 땅으로 잡혀 갔는지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언약적인 심판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셨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조상들의 죄와 자신들의 죄악들을 회개합니다. 이어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새롭게 갱신합니다. 이미 조상들은 그 언약을 어김으로 징계를 받았으나 귀환한 백성들은 다시 그 언약을 새롭게 하여 다시 그 언약을 지키겠다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7-38).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돌아 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그들을 비추고 회개하며 삶에 실질적인 변화와 헌신을 다짐합니다. 이미 조상들이 어긴 언약이지만 다시 한 번 그 언약을 새롭게 하고 그 언약에 신실하게 살아가겠다고 견고한 언약을 세웁니다. 율법을 통해서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하지만 언약적 심판을 내리신 하나님을 이해하고 다시 한번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을 붙들고 회개하며 나아갑니다. 이처럼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과 삶의 변화를 촉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고 회개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실제적으로 변화되는 삶을 살겠다는 굳은 결심입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 삶에서 죄를 찾아 없애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평가하는 일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그들이 처한 상황, 역사, 문화 모두 말씀을 비추어 살폈고, 그것을 백성들의 삶에 적용하여 실제적인 변화를 촉구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 모든 순간과 궤적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피고 평가하며 실제적인 변화를 하나님께 드러내며 말씀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27일 (주일) 느헤미야 8장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제 성전도 있고 성벽도 있습니다. 백성들도 있습니다. 이제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성벽을 재건하도록 하신 것은 결국 예배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달력으로 칠월은 아주 중요한 달입니다. 왜냐하면 그 달에 많은 절기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절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스라엘 달력으로 7월 1일에 백성들은 모였습니다. 매월 첫날도 절기 중 하나입니다.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는 모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어주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을 다 나왔습니다. 그 중에 아빠 엄마 손잡고 나온 어린아이들도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점심때까지 율법책을 읽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에스라 양 옆에는 백성의 지도자들이 섰습니다. 율법책을 펼 때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었습니다(1-5). 율법을 읽을 때 잘 이해 되지 않는 부분들은 주변에 있던 레위인들에게 물어서 그 의미를 깨닫게 했습니다. 그 내용 밝히고 해석하여 들려주었을 때 백성들은 깨닫고 울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삶을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얼마나 자신들의 삶이 율법을 떠나 있는지 깨닫게 됨을 애통하고 상한 심령으로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은 그들을 독려하고 위로합니다. 오늘은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죄악을 슬퍼하기 보다, 그것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다시 받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즐거움을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비참을 깨달은 사람이 용서와 자비를 경험할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6-12). 다음 날에 백성들의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율법의 말씀을 더욱 더 밝히 알고자 에스라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때가 초막절로 지켜야 될 절기임을 알게 됩니다. 이에 그들은 백성들과 함께 초막절을 지킵니다. 백성들은 모두 초막을 짓고 그곳에 거하며 하나님께 주신 곡식에 대해 감사하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일주일동안 이 절기를 지킵니다(13-18).

 

예배는 기쁨과 즐거움이 회복되는 자리입니다. 예배에 신나는 음악과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목사의 말들 때문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죄와 비참을 알고, 그 비참함에서 구원받은 그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오는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가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고 목사가 말씀을 밝혀 알려줄 때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고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배와 개인적인 말씀 묵상 생활 가운데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린적이 언제인지 기억하시나요?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가 돈독해 진 경험이 있으신가요? 예배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시는 주일과 복된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26일 (토요일) 느헤미야 7장

방해하는 세력의 끈질긴 유혹과 공격에도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성벽을 완성했습니다. 문짝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사람들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남은 과업이 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을 관리하고 그곳에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인구를 늘리는 것입니다. 이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뛰어난 두 사람을 세워 다스리게 합니다. 그리고 아직 원수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성문은 해가 있을 때만 열고 닫도록 하고 파수꾼을 세워 항상 경계하도록 합니다(1-4).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백성들을 모아 예루살렘에 등록 하도록 합니다. 문제는 에스라와 느헤미야 동시대의 사람들의 신분은 보장이 되는데,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전에 온 사람들의 신분은 보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에 거주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금까지 그곳에 거주했다는 것이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번 기회에 원수들이 슬며시 자신들의 사람을 끼워 넣어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 있도록 만들고, 그들을 통해서 또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느헤미야는 1차 귀환자들의 명부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 명부를 기준으로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5-73). 이제 완성된 성전과 성벽에서 1차 포로 귀환 시대의 백성과 후손들, 그리고 새롭게 온 2, 3차 포로 귀환자들이 함께 거주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벽을 완성한 후에 그것으로 만족하고 안주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더 굳건하게 세우기 위한 노력들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벽 안으로 백성들이 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일을 기존의 백성과 최근에돌아온 백성들이 함께 해 나갑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과 보호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이 땅의 기관으로서 끊임없이 당대의 과제를 찾고 함께 힘을 모아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네덜란드와 아인트호벤 지역에서도 동일합니다. 우리 교회에 기존에 있던 성도들과 새로 정착하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고 새롭게 예수님을 믿게 된 백성들이 함께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와 보호가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갈 것인지 함께 고민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잘 해온 것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25일 (금요일) 느헤미야 6장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성벽 재건이 거의 완성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제 성문의 문짝만 달면 됩니다. 성벽 건축을 방해하던 세력들은 이제 작전을 바꿉니다. 바로 느헤미야를 없애는 것입니다. 산발랏과 게셈은 사람을 보내어 느헤미야를 만나 평화적으로 회담을 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느헤미야를 없애기 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네 번이나 거절합니다. 다섯번 째에는 방해꾼은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공개 편지를 보냅니다. 성벽을 건축하는 것이 결국 아닥사스다 왕을 배반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반역을 의도한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느헤미야 뿐만 아니라 성벽 건축에 가담한 모든 자들이 반역 혐의로 큰 어려움을 처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동요하여 분열을 일으키고 성문을 다는 마지막 일을 못하게 끝까지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여 방해를 물리칩니다(1-9). 이 일 후에 느헤미야는 집에서 두문분출 있는 스마야에게 갑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나가지 않는 것이 두문분출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스마야는 느헤미야를 걱정하는 척 하면서 암살을 피하기 위해서 성전 외소로 가서 그곳에 숨자고 합니다. 그곳은 제사장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 안전한 곳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숨는다면 율법을 어겨야 합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그것을 거절합니다. 알고 보니 그것 또한 스마야가 뇌물을 받고 느헤미야를 모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으로 예언하며 느헤미야를 해하려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방해 공작에도 결국 성벽은 52일만에 완성됩니다. 이제 대적들이 떱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방해 속에서도 완성하도록 도우셨다는 것을 그들이 다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비야는 이후에도 시시때때로 혈연 관계과 동맹 관계를 이용해 내부적인 어려움을 일으키려고 노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특별히 지도자인 느헤미야가 표적이 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해 꾼들이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를 공격하고 넘어지게 하는 것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방해꾼들은 목숨도 위협하고, 모함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목숨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도 어기라고 유혹을 하기도 합니다. 또 거짓 선지자들의 계략도 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 모든 어려움과 시험과 유혹 속에서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의이런 모습은 예수님께서 셀수 없는 공격과 유혹과 시험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모습의 그림자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이러한 공격은 먼저 예수님께서 모두 겪으신 것이고 교회 지도자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겪을 수 있는 방해꾼들의 공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셨고 원수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을 물리쳤습니다. 교회가 당하는 방해와 공격은 이미 승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교회의 싸움은 이미 얻은 승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병사임을 싸움을 통해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더라도 또 싸울 수 있고 또 싸울 수 있고 승리를 얻을 때까지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이루신 승리에 참여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고 공격하고 유혹하는 모든 죄와 세력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저항하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넘어져도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승리를 얻을 때까지 끝까지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교회의 직분자들이 이런 싸움의 최전선에서 본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우리가 됩시다. 아멘. 


8월 24일 (목요일) 느헤미야 5장

외부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벽은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내부적인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포로로 귀환한 귀족들과 지방의 지도자들이 흉년 가운데 과도하게 빌려준 돈과 곡식에 대한 이자를 백성들에게 요구했습니다. 또 갚지 못할 때 자녀를 종으로 파는 일이 생깁니다. 이에 성벽 공사의 과업이 위기를 맞습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모두 모아 공개적으로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습니다. 느헤미야와 다른 지도자들은 돌아와서이방인에게 노예로 팔려간 유대인들을 다시 찾아오는데 힘썼는데, 그들은 형제를 서로 사고 파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에서 금지하고 있던 것입니다(레25:39-42). 이에 느헤미야는 귀족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동료들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받은 것을 돌려주자고 합니다. 이에귀족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이 맹세를 확증하기 위해서 느헤미야는 제사장을 불러 맹세하게 하고 또 어길 경우에는 옷이 먼지에서 떨어지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에서 떨어져 빈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백성들은 증인들로서 아멘이라고 합니다(1-13).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는 그곳의 총독으로서 정치적인 지위와 임무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총독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그곳의 총독으로 있는 동안 백성들에게 받던 세금을 받지 않기로 합니다. 이전에 총독은 그렇게 하여 백성들에게 많은 양의 세금을 요구했지만,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을 보좌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제공되던 식사도 본인이 부담합니다. 그렇게 백성들에게 부담되던 짐을 덜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한 일을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14-18). 이는 느헤미야의 신실성과 그 동기가 오직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로서 백성을 위한 헌신임을 증명합니다. 자신의 유익보다 백성의 유익을 생각하고 심지어 자신의 사비를 털어 과업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당하게 되는 어려움은 외부에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내부에서도 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고 형제보다 본인의 이익만 추구할 때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위기를 공개적인 책망으로 바로잡고, 자신도 본을 보입니다. 지도자들을 포함한 성도들이 서로 간에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할 때 교회는 바르게 설 수 없습니다. 특별히 경제적인 수준이나 배경을 가지고 서로를 대해서는 안됩니다. 율법은 형제를 특별하게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잠시 종으로 섬길 때에도 그를 노예처럼 대하지 말고 형제로 대하라고 합니다. 신자들 사이에 경제적인 관점으로 우위를 점하거나 우월한 의식을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경제적인 부와 사회의 지위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모두 형제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경제적인 가치로 사람을 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부를 가진 자들이 천국에 들어오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딤전6:10). 경제적인 가치와 이익을 추구함이 형제 사랑함을 넘어설 때 교회에는 위기가 찾아옵니다. 돈은 느헤미야와 같이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성벽 공사가 그들의 경제적인 부담이 원인이 되어 중단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녹을 받지 않고 마땅히 자신의 부를 사용했습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형제와 자매로 대하며, 돈이나 경제적인 배경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동역자로서 서로를 대하는 우리가 됩시다. 나아가 형제 자매를 위해서 경제적인 이익을 포기할 줄 알고,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주신 것을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23일 (수요일) 느헤미야 4장

성문과 성벽이 하나 둘 완성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원수들은 더욱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돌아 온 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폄훼합니다. 그 일을 반역으로 매도하고 그 일의 대한 가치를 평가절하합니다(1-3). 이런 외부의 위협에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벽을 재건해 나갑니다(4-6). 이제 원수들은 외부적으로 위협의 수위를 높여 군사적인 행동을 통해서 유다 백성들의 일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군사적으로 방어 태세를 가집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마음이 약해진 사람들도 생깁니다. 외부적인 방해와 위협에 결국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깁니다(11-12). 특히 예루살렘 밖에서 원수들의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와서 열 번이나 자기들에게 와야 한다고 위협을 심각하게 생각하며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중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 그리고 다른백성들로부터 구별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성벽 뒤에서 백성들을 무장시키고 백성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원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고 용기와 격려를 북돋아 줍니다(13-14). 이에 백성들은 용기를 내어 각각의 일을 합니다.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군사적으로 방어를 준비합니다. 또 짐을 옮기는 자들은 한 손에는 창이나 방패를 가지고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는 공격에 항상 대비했습니다. 그리고 나팔부는 자는 느헤미야 옆에 서 있었습니다. 나팔은 일종의 군사 신호이며 또 공사 구간이 넓기 때문에 나팔을 불면 일제히 모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15-20). 또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항상 파수꾼으로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때 외부적인 도전은 항상 있습니다. 원수 사탄은 그냥 두고 보고 있지 않습니다. 공격을 합니다. 이상한 소문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흔들고, 때로는 실제적으로 어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어갑니다. 마음이 약하여지게 만들고 남들과 다르게 구별되어 말씀으로 살아가는 일을 폄훼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공격에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 느헤미야가 이미 원수들의 계획을 알고 백성들에게 대비하게 한 것 같이, 느헤미야보다 위대하신 우리의 지도자 주 예수님께서 이를 이미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눅21:36, 골4:2, 살전5:6). 사탄은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습니다(벧전5:8). 우리 모두 외부의 공격을 기억하고 이 시대의 깨어있는 하나님의 백성, 교회가 되어 외부의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대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22일 (화요일) 느헤미야 3장

느헤미야가 성벽 건축의 계획을 말하고 백성들을 독려하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먼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양문을 건축하고 문짝을 달고 성벽을 함메아 망대에서 하나넬 망대까지 정하여 건축합니다. 이곳으로 제물인 양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이 성문을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이 재건하는 것은 그들의 직무에 대한 책임과 잘 어울립니다.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구역을 분담하여 성문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합니다. 재건의 내용을 보면 성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문들이있고, 그 문들을 중심으로 성벽을 이어서 세워간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협조하지 않는 귀족들도 있었습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은 협력하여 성벽과 문들을 세워갑니다. ‘어문’은 물고기와 관련된 문으로 두로 지방 사람들이 잡은 물고기를 팔려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문으로 이해됩니다. ‘옛문’의 위치와 정확한 기능은 알려지 있지 않습니다. 다양한 직업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성벽의 구역을 맡아서 계속해서 만들어갑니다(6-12). 특히 12절에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살룸이 그의 딸까지 동원하여 함께 성벽을 지어갑니다. 여성들도 성벽을 재건하는데 함께 할 수있었던 것입니다. 골짜기 문과 분문은 문 밖에 ‘힌놈의 골짜기(예전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음. 참고 대하 28:3)’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주로 분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하는 각종 쓰레기와 오물을 반출하고, 제사 후에 생긴 찌꺼기 같은 것들도 버렸습니다. 샘문은 그 근처에 실로암 샘물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마문은 말들이 왕궁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동쪽으로 나 있는 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벽과 성문을 지어가는 것을 보면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모든 백성들이 골고루 역할을 맞아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구역을 할당 받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대제사장와 제사장(종교지도자), 권력인(정치가), 장사꾼(사업가), 금장색(기술인), 자기의 방만 있는 사람(자기 집도 없는 세입자), 여성 등 입니다. 두번째로는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집 앞에 가까운 곳의 성벽을 맡아서 재건했다는 것입니다(23-32). 온 가족이 함께 참여했고, 수시로 성벽 건축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벽을 건축하는 일은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분량대로 참여하면서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역사였습니다. 비록 많은 면에서 달랐지만, 성문과 성벽을 재건함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도록 하고, 다른 백성들과 구별되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회복되고자 하는 것에는 한 마음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같은 원리가 적용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풍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시려고, 또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서 각자에게 은혜의 분량대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섬김의 목표에 있어서는 같은 마음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나아가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가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회복되도록 하심으로 다른 백성들과 구별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하나됨 입니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한 마음으로 우리 가정과 교회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21일 (월요일) 느헤미야 2장

느헤미야는 왕의 술을 맡은 관원장이 되었습니다. 왕에게 드릴 포도주에 독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왕의 목숨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직책이기 때문에 매우 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로 느헤미야를 보내었습니다. 어느 날 술을 따를 때 느헤미야의 얼굴에 근심이 있는 것을 왕이 보고 이유를 묻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고통 당하는 동족과 황폐하게 된  조상들의 성읍과 불탄 성문 때문이라고 아룁니다. 그러자 왕은 어떻게 해주길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습니다. 왕이 그 근심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냐고 묻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마음으로 기도한 후 왕이 원하시면 자기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서 성(벽)을 완성하고 돌아 올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만큼 왕이 느헤미야를 신뢰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인도하셨다는 증거였습니다(1-6). 느헤미야는 돌아올 날짜를 정하였고, 또 그 땅을 총괄 통치하는 총독에게 보낼 편지를 가지고 모든 길에서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또 왕의 나무를 감독하는 자에게 성전의 문과 성곽과 자신이 거할 집을 위해서 목재를 쓸 수 있도록 제공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렇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드디어 느헤미야는 조상들의 성읍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던 산발랏과 도비야가 높은 관직의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도우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근심했습니다(7-10). 느헤미야는 삼일을 쉰 후에 밤 중에 나가 비밀리에 현 상황을 살펴보게 됩니다. 아직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인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시찰을 통해서 들었던 이야기가 사실임을 확인하고 참으로 성문은 불이 탔고 성벽이 허물어 진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사명이 더욱 확고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황폐하며 도저히 회복이 불능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만큼 원수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처음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기 위해 왔는지 백성의 지도자들에게는 숨겼다가 나중에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도우셨는지 그리고 왕이 자신에게 한 말을 전하고 함께 성벽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고 독려합니다. 그 때 모두 힘을 내어 함께 성벽을 건축하려고 마음을 모읍니다. 그러자 원수들인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게셈이 이 일을 듣고 정치적으로 모함을 합니다(19). 하지만 느헤미야가 나서서 물리적인 대항이 아니라 적군들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들에게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일을 방해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나라가 완성된 후에 그들이 누릴 특혜가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고 담담하게 하나님께 맡기며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적의 방해에도 하나님께 그 대적들을 맡기고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따라서 나아갑니다. 

 

무너진 성문과 성벽을 건축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와 보호를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성문은 율법으로 재판하는 곳이었고, 율법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소였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논의하던 장소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도시, 예루살렘이 다스려지도록 하는 핵심적인 장소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문과 성벽을 재건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교회도 동일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또 영적으로 백성들을 말씀으로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사명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사명을 이루셨고, 이 사명을 교회를 통해서 이어지도록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세우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받은 사명을 기억하고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곳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대적들의 방해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끝까지 이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20일 (주일) 느헤미야 1장


느헤미야서는 에스라서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성전의 완성과 삶의 개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면, 성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안에서 보호와 안전을 누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그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서는 포로로 잡혀간 곳에서 예루살렘의 형편을 형제에게서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성전이  허물어졌고, 성문이 불에 탔다고 합니다. 그리고남은 백성들이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백성을 보호하는 성벽이 없었기 때문에 대적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릅니다. 이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울며 금식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에스라처럼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깁니다. 그 죄를 율법에 따라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를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께서 그 징계로서 세상 여러 나라로 흩으셨다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동시에 그는 언약에 근거하여 회복을 기도합니다. 이전에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과 같이 징계를 주셨지만, 만일 하나님께 돌아가 계명을 지켜 행하면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다시 부르신다는 약속입니다(4-9). 그러면서 이 백성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임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이는 출애굽 때 모세가 백성이 범죄하였을 때 했던 중보기도와 유사합니다(출32:11). 느헤미야는 백성의 지도자인 2의 모세로서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예루살렘을 다시 모아 달라는 것이고 자신도 은혜를 입어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 때 왕의 술은 맡은 높은 관직에 올라 왕에게 말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10-11). 

 

느헤미야는 포로기 2,3세대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본적도 없는 유대인 2세 혹은 3세입니다. 페르시아에서 태어나 자라 페르시아 문화가 더 익숙하고 페르시아 종교에 더 익숙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조상들이 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는지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시대적 사명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벽을 재건해서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내며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그 신앙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주신 시대적인 사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와 우리 시대의 자녀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특히 네덜란드라는 낯설고 세속화로 얼룩진 사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의 정체성과 신앙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과 씨름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19일 (토요일) 에스라 10장

에스라가 성전 앞에서 통곡하며 죄를 회개하고 있을 때 많은 백성들도 함께 통곡합니다. 이 통곡에 남녀노소 많은 무리가 모인 것입니다. 에스라의 회개의 통곡이 온 이스라엘의 회개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 중에서 스가냐는 절망하고 있는 에스라에게 회개의 기회가 아직도 있다고 말하면서 이방 여인과 결혼한 자들이 여인과 자녀들을 모두 내보도록 약속하고 내보내자고 합니다. 이 일에 에스라가 책임을 지고 함께 회개 운동을 행하자고 한 것입니다(1-4). 회개 운동을 통해서 실질적인 삶의 변화를 촉구한 것입니다. 당시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많은 경제적인 유익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방 민족과 교류하면서 물건을 사고 파는데 아주 유리했습니다. 물론 그러는 가운데 그들의 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이 되었습니다. 이런 실제적인 손해를 기꺼이 포기하는실제적인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스라가 일어나 백성들에게 이렇게 하겠다고 맹세하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맹세합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금식하며 성전의 골방에서 기도하고 나와 백성들을다시 모읍니다. 삼 일의 기간을 주어 모이지 않는 자는 재산을 몰수 하고 공동체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공동체의 죄가 심각했고, 지금의 회개는중대한 사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삼 일 후에 이제 백성들은 성전의 마당에 모였고 에스라는 그들에게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은 것에 대해 책망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이방인 아내와 자녀는 내보내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내보내는 것이지 무조건 다 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신을 섬기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한다면 얼마든지 이스라엘 안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일정기간을 정하여 각 마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와서 이방인 아내와 결혼 자들을 신고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몇몇 지도자들과 레위 사람은 그 일을 반대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도록 모두 동의하여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로 합니다. 이후 구절들은 제사장의 무리와 레위 사람들, 성전에서노래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먼저 회개하고 자진 신고한 자들의 명단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이름들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 명단들은 그들의결단이 확고하며 또 정말로 회개의 열매로 아내와 자녀들을 내보낸 것을 평가 받을 수 있도록 했을 것입니다(18-44).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과 회개의 열매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자들에게 진노하시는 분이 맞습니다. 에스라도 그것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관계에서 배신한 죄를 분명히 알고 하나님의 진노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십니다. 회개는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에스라서가 이방 여인과 자녀를 내 보내기로 약속한 자들의 명단으로 끝이 난다는 것은 그들의 결단이 참으로 진실되고 실천이었다는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은 불신 남편을 버리거나 아내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개에는 참된 열매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인 답지 못한 삶으로 유혹하고 죄를 짓게 만드는 것들을 단호하게 끊는 것이 참된 회개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과 가정, 공동체를 개혁하고회복하는 길은 참된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의 시작은 에스라 한 사람의 통곡이었습니다. 또 이 회복의 길에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부합니다. 하지만 참되게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된 사람들은 함께 회복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많은 어려움과 외로움과 실질적인 손해 속에서도 회복의 길, 개혁의 길, 참된 회개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오늘 나를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참된 회개의 열매로 날마다 개혁되어가는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가 되도록 결단하고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18일(금요일) 에스라 9장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제사를 드린 후 백성들의 영적인 현 주소를 보게 됩니다. 신실한 지도자들이 에스라에게 나아와 예루살렘으로 50년 정도 먼저 돌아와 있던 백성들이 주변 나라의 사람들과 통혼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통혼은 결국 우상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그러한 일에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행했습니다. 에스라는 이에 기가 막혀 그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앉았습니다. 이런 행동들은 극심한 좌절감과 수치와 분노 등 복잡한 심경을 표현합니다(1-3). 이런 에스라의 행동을 보고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에스라에게 나아옵니다.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에스라는 하나님께 회개를 하기 시작합니다. 에스라는 율법을 깊이 연구하는 학자이자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깊이 회개합니다. 에스라의 회개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전에 조상들에게 이 땅을 주실 때도 이전에 그 땅에 거주하던 백성들의 죄악이 심각하여 그 땅을 빼앗아 조상들에게 준 것임을 고백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나고 싸움을 잘해서 마땅히 얻은 땅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 조상들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도 잊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 주변 나라의 신들을 섬겨 하나님이 심판했는데, 그때 하나님은 백성을 긍휼히 여겨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고 얼마를 남기셔서 포로 잡히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남은 백성들이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짓고 회복케 하시는 은혜와 복을 주셨는데 또 똑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이제 에스라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완전히 멸절하신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을 배신했다는 관계적인 측면에서 통혼의 죄를 이해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4-15).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우선 말씀에 탁월한 에스라는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죄를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계명과 율법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자세와 행동입니다. 지금 백성의 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가져 할 마음과 삶의 자세를 버린 것입니다. 죄는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 자체가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롭고 자비롭게 구원해 주셨는지 알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감사와 기쁨으로 지키는 것이 본질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배신한 것입니다. 두번째로, 에스라는 사실 이 죄와 상관이 없지만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한탄하고 가슴 아파하며 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인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것의 그림자 입니다. 

 

요즘 하나님과 관계는 어떻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신실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공동체의 죄와 연약함을 나의 죄와 연함으로 여기고 우리 공동체를 더욱 사랑하고 위해서 애통하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17일 (목요일) 에스라 8장

오늘 말씀에서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함께 올라 온 백성들의 목록을 기록합니다. 2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모두 12지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특별히 레위 지파와 관련된 이름들이 눈에 띕니다. 이는 레위인들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처음에 레위인들은 함께 적극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5절 이하의 구절을 보면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출발하기 전에 바벨론에서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서 백성을 모아 출발하려고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으고 보니 레위인이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하고 족장들을 불러 레위인들을 찾아 하나님의 성전을 섬길 자들을 모으도록 했습니다. 레위인들은 제사장에 비해서 자신들의 직무의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꼭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그들을 독려하고 그들의 본래의 직무를 감당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도우셔서 그들은 설득이 되었고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던 것입니다(15-20). 이제 그들은 출발에 앞서 길을 가는 도중에 만날 위험을 하나님을 맡깁니다. 이전에 왕이 보병을 내어 주려고 했지만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께 향하는 백성들을 친히 지킬 것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했을 때 정말로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출발하기 전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기구를 채우는 일을 위해서 제사장들 중에서 지도자들을 세웁니다. 그들에게 금과 은, 그리고 놋 그릇을 지키도록 명령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그 그릇들을 잘 보존해야 합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도우셔서 대적들과 매복한 자들, 방해꾼과 강도들로 부터 그들을 지켜주셨고,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입니다. 삼일 동안 쉰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 금 은 놋 그릇을 채웠고, 그것을 예루살렘에서 레위인들 중에서 지도자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요사밧과 노아댜가 그 모든 것을 세고 무게를 달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돌아 온 백성들은 많은 제물로 새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고 왕의 조서를 그곳의 정치적 책임자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에스라의 포로 귀환에서 중요한 것은 레위인들이 대거 귀환했다는 것이고 성전에 기구를 채웠다는 것입니다. 1차 귀환에서 제사장들이 많이 귀환했습니다. 2차 귀환이 에스라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때 레위인은 소극적이었습니다. 성전이 건축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제사가 회복되려면 제사장의 역할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제사장들이 혼자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레위인들의 도움이 있어야 하고 성전이 유지가 되려면 관리하는 레위인들도 필요합니다. 당시 레위인들은 회복되어 가고 개혁되어가는 공동체서 자신들의 직무를 너무 초라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개혁과 회복은 모든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의 회복은 직분자의 독려를 통해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교회를 개혁하고 회복에 참여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도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성도가 교회의 회복을 위해서 마음을 모으고 부족한 것들을 채우며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때 교회는 더욱 건강해 집니다. 각자에게 있는 은사를 따라 함께 우리 교회와 가정을 건강한 공동체로 세워가는데 역할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16일 (수요일) 에스라 7장

오늘 말씀에서부터 에스라서 말씀의 후반부가 시작이 됩니다. 학자겸 제사장 에스라가 등장합니다. 이제 1차 포로 귀환을 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성전이 완공되고 2차 귀환에 에스라를 중심으로 백성들을 개혁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에스라는 바사(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때 생존했던 인물로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임을 본문은 밝힙니다(1-5). 에스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모세에게 주신 율법책(모세오경)에 대한 전문가였습니다. 율법에 대한 전문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할 때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왕에게 구하는 것을 다 얻는 자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왕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 내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일반적인 유익을 이방인들도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이에 왕도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필요한 것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에 사용합니다. 그는 편안하게 왕궁에 있지 않고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대로 행하며 포로로 귀환한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로 다짐합니다(6-10). 

아닥사스다는 에스라의 요청대로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했고 조서를 내려 다른 백성들과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또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고 왕과 자문관들의 예물과 다른 도성에서 얻을 은금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필요한 모든 것을 궁중의 창고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에 있는 창고지기에게도 명령하여 에스라가 필요한 것을 엄청난 양으로 내어 주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 느디님 백성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로 백성들을 판결하는 권한도 주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큰 벌을 내리겠다고 말합니다(11-26). 이 조서를 손에 받은 에스라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도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찬송한 후에 함께한 사람들과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27-28).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가 포로 귀환 공동체로 향하게 되면서 포로 귀환자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하게 될 것입니다. 첫번째 포로로 귀환 백성들이 돌아간지 5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완성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지만 그 경험은 삶의 개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회복을 향한 여정은 하나님의 임재를 한 번 경험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이 삶의 회복과 개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 전문가를 보내어 삶의 개혁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율법을 연구하며 지키고 그것을 가르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에스라 자신이 먼저 말씀을 연구하고 실천한 후에 가르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먼저 그것을 실천하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며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안에서 먼저 개혁이 일어날 수 있도록 말씀을 읽고, 실천하는 우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녀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15일 (화요일) 에스라 6장

하나님의 성전 재건을 방해하던 세력들이 보낸 편지를 받고 다리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조사를 합니다. 그 조사를 통해서 고레스 왕이 실제로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도록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성전을 지을 위치와 규모를 지정하고 그에 대한 모든 재료를 왕실이 감당하도록 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1-5). 이에 다리오는 대적하는 세력들에게 성전 건축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합니다.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대적하는 세력들이 주관하고 있는 지역의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내어 성전 건축이 멈추지 않도록 하라는 조서를 내립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드릴 제물도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의 요구대로 내어 주어 왕과 왕자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만약 이 명령을 변경하면 큰 벌을 내리겠다는 엄중한 경고도 함께 줍니다. 이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그대로 준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6-13). 유다 사람의 장로들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권면을 따라서 성전을 건축하기를 계속하였고, 마침내 성전은 완성이 됩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완성된 연도를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이 모든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임을 확증합니다. 

또 성전이 완성되고 봉헌식의 기록을 남깁니다. 이 봉헌식을 통해서 드디어 제대로 된 제사를 성전에서 드릴 수 있었고, 그 제사를 통해서 백성들의 죄가 씻음 받는 속죄제가 드려질 수 있었고,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회복되어 앞으로 그들의 직무를 성전에서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기록들은 예배가 회복되었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이 완성되어 이제 하나님께서 예전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실 것이라는 큰 기대와 회복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에스라서 저자는 이 모든 일이 역사적인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시고, 앗수르 왕의 마음을 이스라엘에게로 돌려 성전 건축하는 손을 도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리오는 앗수르와 바벨론을 이어 당시 중동을 지배하던 바사(페르시아) 왕이었지만 앗수르가 바벨론으로 이어지고 바벨론 제국은 또한 바사로 이어지기 때문에 큰 범주로 표현한 것입니다. 큰 범주로 표현 함으로 앗수르, 바벨론, 바사 제국의 왕들 역시 하나님의 도구이며 하나님의 통제와 다스림 아래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회복을 위해서 힘을 내어 나아갈 때 가만히 계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백성들을 도우십니다. 때로는 그 동안 회복에 걸림돌이 되었던 방해를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회복을 도우시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방해하기 위해서 보낸 편지가 오히려 성전 재건을 위한 큰 도움이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말씀과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고 힘을 쓸 때 하나님은 도우시고 끝내 회복을 주시며, 당신의 임재에 대한 감격을 회복시키십니다. 그 회복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힘을 다해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말씀의 자리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바랍니다. 아멘. 


8월 14일 (월요일) 에스라 5장

대적들의 방해로 성전 공사는 14년 동안 중단 되었습니다. 처음에 큰 감격으로 성전 건축을 시작했던 백성들도 그 동안 성전 공사에 대한 열정도 많이 식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하나님의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백성들을 다시 독려하고 지도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독려합니다(1-2). 이제 그동안 중단 되었던 성전 재건과 회복이 다시 시작됩니다. 선지자들도 함께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전과 같은 방해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방해를 합니다. 대적들은 누구의 허락을 받아 성전을 짓는지 묻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들의 이름을 다 알려주고 공사를 진행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그들이 공사를 막지 못합니다(3-5). 대적들은 다시 당시의 왕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에 고레스 왕의 명령에 따라 합당하게 성전을 짓고 있고 그 일을 맡은 관리와 백성의 지도자들의 명단 넘겨 줌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합니다. 지도자들의 대답을 보면 그들의 신적 역사관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나라가 망한 것이 조상들이 하나님을 노엽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건축을 멈추어 하나님을 다시 노엽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고레스가 합법적으로 공사를 지시했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대적들은 그것들이 사실인지 왕에게 확인해 보도록 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내려 달라고 합니다(6-17). 

 

오랫동안 대적들의 방해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게으름으로 성전 재건은 멈추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을 독려하시므로 다시 성전 공사를 시작하도록 하십니다. 다시 백성들이 용기를 내어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대적들의 위협도 이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오히려 이 일은 공식적으로 성전 공사를 시작하고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도록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도 성전을 재건하고 회복하는 일, 우리의 몸을 거룩한 전으로 세워가야 하지만 때로 방해가 있을 수 있고 그것으로 일시동안 영적인 슬럼프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문제들을 해결하시고 회복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일어나도록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독려 하십니다. 용기를 내어 다시 거룩한 성전을 재건하는데 힘을 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13일 (주일) 에스라 4장

오늘 말씀은 성전 재건을 시작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곳에 있던 이방 백성들이 방해하는 장면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성전 재건에 함께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스룹바벨을 거부했습니다(1-4). 그들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성전 건축에 진심으로 참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방해하기 위해서 참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성전 공사가 더이상 진행되지 못하게 막았고, 또 아닥사스다가 왕이 되었을 때 상소를 올려 성벽이 재건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방해를 했습니다. 고레스와 아닥사스다는 무려 60년 넘게 차이가 납니다. 이 방해꾼들의 방해는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넘어서 성벽을 재건하는 것에도 나아갑니다. 에스라서 저자는 비록 연대기적으로 많은 차이가 아니지만 성전과 성벽을 짓는 것을 방해하는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성전을 짓는데 방해를 받았습니다. 성전 건축의 방해는 고레스 왕부터 다리오 왕 2년 재위때까지  이어집니다. 대략 14년동안 성전을 짓는 것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닥사스다 왕이 다스리던 시기는 약 56년 뒤입니다. 그 때는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성벽을 재건하던 시기였습니다. 성전과 성벽이 지어질 약 70년의 시간 동안 지속적인 방해를 했기 때문에 함께 묶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부터 16절까지는 성벽이 완공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들의 방해는 지속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고발의 내용은 거짓이고 영적인 일을 정치적인 공작으로 해석한 결과였습니다. 아닥사스다는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의 패역함과 강력했던 과거를 이유로 고발을 받아들여 공사를 중단시켰습니다(17-22). 이로 인해 결국 회복을 향한 걸음은 잠시 멈추었습니다(23-24).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걸어가는 회복의 길에 방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방해는 오늘 말씀에서 처럼 외부적일 수도 있고 학개서 말씀과 같이 내부적일 수도 있습니다(학1:1-6). 중요한 것은 그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춤할 수 있지만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회복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외부적으로 바쁨과 예기치 못한 일 등으로 방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 내적으로 게으름과 빠른 만족감으로 방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의 말과 평가 일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중요한 것은 잠시 주춤할지도 지속적으로 회복과 개혁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많은 방해 속에서도 여전히 영적인 회복을 위해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12일 (토요일) 에스라3장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에서 6절까지 말씀은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 온 후 7개월이 지나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 제단을 봉헌하고 정기적인 제사 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가장 먼저 제사를 회복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살고 있던 이방 백성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그들로부터 보호를 요청했을 것입니다. 제단을 세우고 일곱째 달에 있는 초막절을 지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두번째 추수를 기념하는 절기이고 완성을 의미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동안 지켜지지 못했던 초막절을 다시 지키고, 율법에 따라 매월 첫째 날 드려야 하는 번제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려야 하는 번제와 절기 때 마다 지켜야 하는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하지만 본래 성전에 있는 번제단에서 드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전하게 회복되었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성전은 여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성전의 기초를 놓은 말씀입니다. 2년이 동안 성전 없이 제사를 드렸스빈다. 이제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성전 재건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20세 이상인 모든 레위사람들을 세워 성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될 수 있도록 감독관으로 세웁니다. 주변에 건축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서 사람을 고용했고(7), 본격적인 성전 건축을 위해서 기초를 놓습니다. 건축 자재를 위해서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을 언급하는 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그들을 통해서 자재를 받은 것과 평행이 됩니다. 스룹바벨은 제2의 솔로몬 처럼 성전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또 솔로몬이 둘째달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던 것 같이 스룹바벨도 둘째달에 성전 공사를 시작합니다. 의도적으로 솔로몬이 지은 성전과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의 기초가 놓일 때 제사장들이 예복을 갖추고 아삽 자손들이 제금을 들고 다윗의 시편 중에 성전에 관한 시편을 부르는 것도 솔로몬 성전에서 늘 있었던 찬양과 연속성을 두는 것입니다. 성전의 기초가 놓일 때 그 규모가 솔로몬 성전과 비교했을 때 너무 작고 볼품이 없어서 솔로몬 성전을 생전에 본 노인들은 슬퍼 울었고, 젊은 세대는 찬송하고 기뻐하며 외쳤습니다. 하지만 기쁨의 소리가 슬픔의 소리를 감싸 안았습니다. 새 성전은 이전 성전에 비해 비록 초라하고 작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이 재건되어 이스라엘의 회복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작된 회복이 점차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땅이 회복되고 제단이 회복되고, 절기가 회복되고, 성전의 기초가 놓여짐으로 성전의 회복을 향해 나아갑니다. 비록 이전의 성전에 비하면 작지만 황폐한 상황에서 성전의 기초가 놓아지는 것 자체가 엄청난 희망과 회복을 예견합니다. 이런 제사의 회복들은 돌아온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록 더디지만 한 걸음 한 걸음 회복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런 회복의 길은 이미 있던 다른 백성들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고, 또 비록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런 제사와 성전의 기초를 놓는 일은 레위인을 감독하에 하나님의 율법에 기초해 진행되기 때문에 율법을 모르는 밖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무가치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백성은 회복의 길을 묵묵히 갔습니다. 예배의 형식을 하나 둘 갖추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성전의 기초를 놓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기쁨의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성수하고, 식사 전에 기도하고, 시간을 내어 말씀과 기도에 힘쓰며, 예배시 형식을 갖추는 것 등의 모습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보면 건조한 형식주의나 가치 없는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그 가치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압니다. 이 모든 것들은 속이 텅 빈 형식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기쁨과 회복의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회복의 시작은 그런 기초적인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삶 속에서 이런 회복의 길을 하나 둘씩 붙잡으며 묵묵히 회복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11일 (금요일) 에스라 2장

오늘 말씀은 긴 족보를 보여줍니다. 바로 바벨론으로 유배를 간 사람들 중에서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이름들입니다. 이런 이름의 목록들은 우리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절에서 언급된 이름들 중에 스룹바벨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예수아는 도착 후 대제사장 역할을 맡을 여호수아입니다. 느헤미야는 성경 느헤미야에 나오는 느헤미야가 아니라 그보다 앞선  지도자의 이름입니다. 이 셋을 중심으로 지도자들의 이름(11명 혹은 12명, 이스라엘 12지파을 상징함)을 기록하고 이어서 ‘…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함께 나온 숫자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1-35). 지도자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해 놓음으로 이 사건이 실제 사건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또 바벨론에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번성하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확실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책임이 있는 자들임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이어서 본문은 제사장의 명부도 기록해 둡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명확하게 레위인들에게만 허락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36-42). 또 느디님 사람들은 이전에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속임으로 이스라엘로 편입된 기브온 족속으로서 성전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족보도 정확하게 구분하여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43-54). 솔로몬의 신하들의 목록은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에 복종한 사람들로 대부분 이방 민족입니다. 그들은 솔로몬 시대 이후로 이스라엘에 편입되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살아온 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55-58). 이 명부 들에서 확인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 있는 대제사장이 세워지기 전까지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의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59-63). 온 회중의 합계를 기록하고 종들과 말과 노새와 낙타와 노새의 숫자도 기록해 줍니다. 이들 돌아온 자들의 재산의 규모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마치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와 같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조상들과 같이 그들이 가지고 나온 재물들을 성전을 건축하는데 사용하기 위해 힘이 자라는대로 금고에 들입니다(64-69). 마지막으로 그들은 다시 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땅을 분배 받은 곳에 살게 됩니다(70). 

 

오늘 말씀에서 이들의 귀환은 성전 재건에 있음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그들의 헌신도 보게 됩니다. 이 지루해 보이는 목록은 단지 옛날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이 다시 세우고자 하는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의 회복입니다. 황폐한 땅에 백성들이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과 민족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전이 없는 것입니다. 땅과 민족과 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핵심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을 회복 하고, 다윗과 세운 영원한 왕조에 대한 언약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언약을 갱신하면서 이스라엘을 새롭게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재건할 성전은 장차 올 참된 성전이 되시는 예수님의 그림자이며, 그의 몸이 되는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의 관계의 회복과 임재의 회복이 교회에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혁하고 재건하는 1차적인 책임은 사회나 국가나 불신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이름의 목록은 그리스도인들, 저와 여러분의 목록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임재를 회복하고 교회를 개혁하고 나를 개혁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1차적인 사명입니다. 성전의 재건은 힘이 자라는대로 우리의 것을 내려 놓을때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영적인 성전 재건을 위해서 사용할 때 이루어집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고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인 우리 자신을 재건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10일 (목요일) 에스라 1장

역대하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다를 갈대아인의 손에 넘기시고 성전은 불타고 성벽이 헐려지지만 70년 뒤에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으로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회복되는 것을 간략하게 묘사함으로 끝이 났습니다. 

에스라서는 70년 뒤에 이스라엘 백성이 고레스의 명령에 따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7년 마다 안식년으로 땅을 안식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는 땅이 주는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땅을 쉬게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년째에 3년치 소출을 약속하셨습니다(레25:20-21). 하지만 이 안식년은 490년 동안 지켜졌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한꺼번에 70년을 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잡혀간 그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을 에스겔서가 보여줍니다. 이제 포로로 잡혀간 그곳에서 그 70년이 채워졌고,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필두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들의 가장 우선적인 임무는 성전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포로 귀환은 크게 3차례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1차 포로 귀환 때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학개, 스가랴가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성전을 완성합니다. 2차 포로 귀환 때는 에스라가 삶을 개혁합니다. 그리고 3차 귀환 때는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성벽을 재건합니다. 이것이 포로기 이후의 대략의 배경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귀환의 시작입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무찌르고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정책을 폈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종교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에스라는 그것을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는 것이라고 합니다(스1:1). 이것이 중요한 포로기 후의 신학적 주제입니다. 열강의 싸움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레스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행동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자신에게 세상 모든 나라를 주셨으니 그분이 참 하나님이고 그를 섬기고자 하는 자들을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1:2-4). 고레스가 실제로 하나님을 믿었는지 아니면 종교적인 관용책의 일종으로 이렇게 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신 것은 분명합니다(사44:28, 45:1). 

고레스의 명령으로 유다와 베냐민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 은 그릇과 금과 물품과 짐승과 보물과 예물을 기쁘게 내어놓습니다. 고레스도 이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가지고 온 성전의 그릇을 꺼내어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주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합니다(5-11). 

 

이제 본격적으로 포로 귀환이 이루어지고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하시고,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대로 70년이 지나자 백성들에게 회복을 주셨습니다. 포로기 생활 중에도 그 백성들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 이제 그 백성들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방 왕 고레스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이방인 왕도 사용하시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은 역사적인 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일어난 것임을 본문은 말해 줍니다.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섭리 속에서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향한 약속을 섭리 가운데 이루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9일 (수요일) 역대하 36장


백성을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다스리고 개혁한 요시야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호아하스가 왕이 된 지 3개월 만에 애굽 왕에 의해서 왕위가 폐위되고 이집트로 끌려가고 맙니다. 그리고 유다는 전쟁에서 패한 댓가로 벌금을 내게 됩니다. 애굽 왕은 여호아하스를 붙잡아가면서 그의 형제 중에서 엘리아김을 왕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도 여호야김으로 고칩니다. 여호야김은 11년 동안 다스렸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합니다. 유다 말기에 왕들이 모두 같은 길을 갑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벌을 주셨습니다. 이에 여호야김은 바벨론으로 잡혀 갑니다. 또 느부갓네살은 성전의 기구들을 가지고 자신이 섬기는 신의 산당에 둡니다. 당시의 관점으로 보면 느부갓네살이 섬기는 신이 유다가 섬기는 신을 이긴 것으로 전리품으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여호야김은 바벨론을 붙잡혀가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 그는 8살에 왕이 되어 석달 10일 동안 다스리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9-10). 그래서 어린 그도 바벨론으로 잡혀갑니다. 바벨론 왕은 여호야긴의 삼촌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습니다. 시드기야도 여호와 하나님께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비롯하며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했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비웃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습니다. 끝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여호와의 진노가 미치게 만듭니다(11-16).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갈대아, 곧 바벨론 사람들에게 넘기십니다. 결국 주전 586년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됩니다(17-21). 이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 황폐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70년을 지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서 예언이었습니다(렘25:11-12, 29:10). 이 말은 70년 뒤에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70년이 지난 후에 바벨론을 바사(페르시아)에 망하게 하시고, 바사의 초대 왕 고레스를 통해서 다시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22-23). 

 

정치적으로 오늘 말씀을 보면 중동의 한 나라가 주변 나라에 정복당한 이야기 정도로 밖에 읽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자신을 떠나는 백성을 심판을 통해서 부르셨고, 끝내 응답지 않자 포로로 잡혀가도록 하심으로 일정시간 보낸 후에 다시 돌아오도록 하시는 심판과 회복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한 분이십니다. 당신의 언약대로 언약을 어긴 백성에게 징계를 하십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선지자를 보내고, 여러 메시지를 줍니다. 끝내 거부할 때에는 심판을 통해서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 긍휼을 베푸시고, 회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조를 영원히 세우시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그 약속은 결국 예수님으로 인해서 성취됩니다.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은 가장 하나님께 신실한 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백성을 멸망으로 이끈 왕들과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께 완전히 신실한 왕으로서 백성을 멸망에서 구원과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실패를 회복하시고 당신의 언약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실패 때문에 내리셔야 할 심판을 예수님께 내리셨고,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회복과 의와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심판과 회복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자들 답게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신실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반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와 다스림이 회복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성전인 우리를 세워가는 일입니다. 이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8일 (화요일) 역대하 35장

요시야는 율법에 근거하여 유월절 절기를 지킵니다. 요시야는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직분을 맡기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궤를 성전에 제대로 모시고 순서를 정하여 섬기며 유월절을 기념 하도록 합니다. 히스기야 때에 유월절을 지킨 적이 있지만 사정상 본래 지켜야하는 첫째달이 아니라 둘째 달에 지켰습니다. 이는 예외적으로 준비할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시야는 이제 정확하게 지켜야할 날짜에 유월절을 지킵니다. 그는 다윗과 솔로몬 이후에 처음으로 유월절을 정확하게 지킨 왕으로 기록 됩니다. 요시야는 히스기야처럼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만 마리와 숫소 삼천 마리를 내어 유월절을 지키도록 합니다. 다른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도 많은 제물을 내어 놓습니다. 이런 헌신들로 유월절과 무교절이 칠 일 동안 지켜집니다(1-19). 요시야는 율법책을 근거로 유다를 개혁하고 그 개혁이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도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본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하나인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포로귀환 후에 그들은 한 민족으로 다시 재건될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고 유다를 개혁한 후에 이집트 왕 느고가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서 유다를 지나야 했습니다. 당시 정세는 앗수르가 약해지고 바벨론이 강해지던 시기였습니다. 이집트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가서 앗수르를 도우려 했습니다. 이에 유다를 그냥 지나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느고가 요시야에게 했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어쨌든 요시야는 느고가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시야는 느고를 맞섰고, 결국 그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지만 죽고 맙니다. 요시야는 선한 왕이었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 왕이기 때문에 죽은 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한 슬픈 노래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애가를 지어 불렀다는 것은 오랫동안 그를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훌륭한 왕으로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20-27). 

 

오늘 말씀에서 요시야는 히스기야보다 유월절을 더 정확하게 지키고 더 나아간 개혁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히스기야도 남유다를 개혁한 왕이었지만 요시야는 여호와의 율법대로 더 철저하게 개혁한 왕으로 평가 할 수 있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 나가야 합니다. 그 중심에 유월절 절기를 지킨 것이 있습니다. 비록 히스기야 때에는 사정이 있었고 그 유월절도 하나님께서 받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유월절이 온전하게 지켜졌다고 평가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역대기 저자는 요시야 때와 같이 유월절이 지켜진 적이 없었다고 평가합니다. 요시야는 히스기야보다 더 정확하게 유월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는 나아간 예배의 개혁을 의미합니다. 포로기 후에 돌아온 역대기 독자에게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욱 철저하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 비유를 통해서 그분의 나라는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마13:31-33). 이런 확장은 숫자적인 확장 뿐만 아니라 질적인 확장과 성장을 포함합니다. 질적인 성장과 확장의 중심은 바로 예배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되어진 사람은 예배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주일을 중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되어진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말씀으로 더 개혁되어져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7일 (월요일) 역대하 34장

오늘 말씀은 요시야 왕의 개혁을 다루고 있습니다. 요시야 왕은 아버지 아몬과 달리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던 왕입니다. 특히 그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던 왕입니다. 그는 왕이 되어 바알의 제단들과 태양신의 제단들을 없앴습니다. 자신의 땅 유다 뿐만 아니라 이미 망해 황폐케 된 북이스라엘의 일부 지역에서도 우상을 타파했습니다(1-7). 나아가 아버지 때문에 훼손된 여호와의 성전을 회복합니다. 성전을 회복하면서 성전의 창고에 있던 문을 지키던 레위인들을 위한 헌금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돈을 성전을 수리하는 감독자들에게 넘겨 성전을 수리하게 했습니다(8-13).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는 도중 제사장 힐기야는 모세가 전한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율법 책을 율법 전문가 서기관 사반에게 주었고, 사반은 그것을 왕에게 나아가 읽어 줍니다. 그 율법 책의 내용을 듣고 요시야는 옷을 찢고 여러 관리들에게 나가서 선지자를 찾아서이 책에 대해서 물어보라고 합니다. 요시야는 북이스라엘이 이미 망한 이유와 조상들이 다른 이방 민족에게 공격을 당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언약적인 진노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요시야의 보냄을 받은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는 여선지자 훌다에게 그 율법책에 대해서 물었고, 요시야의 생각대로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음을 확인해 줍니다. 하지만 요시야 왕이 율법책을 읽고 통곡한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셔서 재앙을 요시야 때를 지나서 내리도록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에 요시야는 언약책을 모든 무리를 모아 읽어 줍니다. 그리고 언약에 신실하게 살아가자고 합니다. 모든 백성들은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기로 합니다. 이에 요시야가 사는 날 동안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않았습니다(14-33).

 

요시야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신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으로 다스리려고 했습니다. 율법책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통해서 현재의 상황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상황이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된 저주 때문임을 알고 더욱 유다와 이스라엘을 개혁합니다. 자신의 행동을 하나하나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반성하고 또 선지자를 통해서 확인합니다. 철저히 계시 의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왕이 그러한 삶을 살 때 온 백성이 함께 하나님의 길로 행하게 됩니다. 

요시야의 이런 말씀 의존적인 삶의 방식은 장차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삶의 방식의 그림자 입니다. 예수님은 완벽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고 삶을 완전하게 살아 내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벽하게 순종하고 의존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얻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얻으신 그의를 예수님을 믿을 때 받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도 계시 의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어 주십니다. 매일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반성하고 개혁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우리 주님을 닮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6일 (주일) 역대하 33장

히스기야가 죽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다 왕들 중에서 가장 오랜 세월동안 다스린 왕입니다. 그런데 그는 처음에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아버지 히스기야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고, 하늘의 모든 것들, 곧 해, 달, 별들을 섬기며, 아들을 불에 지나가게 했습니다. 나아가 여호와의 전에 자신이 만든 우상을 세웠습니다. 그 성전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옛적에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신실하여 율법을 신실하게 지킬 때 영원히 그곳에 거하시겠다고 하시고 또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언약을 세운 곳입니다. 그곳에 보란듯이 우상을 세운 것입니다(1-9).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므낫세와 백성에게 말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셔서 므낫세를 앗수르 군대에 의해서 사로잡혀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하십니다. 하지만 사로잡혀간 곳에서 므낫세는 하나님께 겸손하여 기도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유다로 돌아와 왕으로 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므낫세는 이제 지난 날의 실수를 돌이켜 이방신들과 여호와의 전의 우상을 다 제거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제단도 다시 수리하고 화목제와 감사제를 제단 위에서 드립니다. 이제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므낫세를 심판하시고 회개할 때 회복시켜 주신 것은 모두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드렸던 기도에 대한 약속을 행한 것입니다. 백성이 사로잡혀 가더라도 그곳에서 겸비하여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늘에서 들으시고 회복시켜 달라고 했습니다(왕상8:46-47).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셔서 므낫세를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므낫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아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 범죄하여 회개하지 않았고, 스스로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몬은 그의 신하에게 배신 당하여 반역으로 죽게 됩니다. 남 유다에서 반역으로 죽는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로 하나님의 큰 진노를 보여줍니다(21-25).

 

므낫세는 하나님이 보시기 큰 죄악을 행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셨을 때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습니다. 이후로 므낫세는 다른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왕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큰 죄악을 지었을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적군에게 사로잡혀가는 심판을 당했을 때에도 그곳에서 회개할 때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반면에 끝내 회개하지 않은 므낫세의 아들 아몬은 죽게 됩니다. 역대기 기자는 이 두 왕을 대조 시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어떤 죄악도 용서하시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강조하는것입니다. 동시에 회개하지 않는 자는 용서하지 않으시는 공의로운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회복된 포로 후 공동체에게 이런 원리는 완전하지 못한 공동체에서지속적으로 죄에 대한 경계와 회개가 있어야 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먼저 전한 메시지가 회개였습니다(막1:15).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고 회복을 약속하시며,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심판을 약속하십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어떤 죄도 회개할 때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5일 (토요일) 역대하 32장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던 왕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당대 강대국 중 하나인 앗수르의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히스기야는 다른 지도자들과 의논하여 성 밖의 물의 근원을 막으므로 앗수르(앗시리아) 군대에게 물을 공급하지 않기로 합니다. 또 방어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그리고 온 군대에 하나님께서 대신 싸우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1-8). 앗수르의 왕은 라기스를 치고 사신을 보내어 어떠한 신도 자기로부터 그 백성을 보호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에게 용기를 빼앗으려고 하나님을 다른 이방신들과 같은 존재로 말하고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합니다. 그 말은 마치 사실과 같이 들립니다. 참으로 앗수르는 다른 모든 나라를 물리치고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은 앗수르 왕이 섬기는 신 앞에서 패한 것 같이 보입니다. 유다를 지키는 여호와라는 신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모든 우상들과 다른 분이십니다. 모든 우상들은 사람이 만든 것이며 살아있지 않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들으시고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히스기야 왕이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의 모든 군대의 지도자들과 병사를 치셨습니다. 이에 앗수르 왕은 고국으로 돌아가 자기의 신에게 분향할 때 자기 아들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9-23).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 간구하여 낫게 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이 교만하여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회개하여 용서를 받습니다. 역대기 저자는 히스기야에게 있었던 막대한 부와 명예를 기록합니다. 히스기야는 죽어서도 왕들의 묘실 중에 가장 좋은 곳에 모셔집니다. 바벨론 사신들에게 교만하여 행한 것은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나감으로 히스기야의 긍정적인 측면을 더욱 강조합니다(24-33).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왕이 신실하게 나라를 세워갈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복을 주시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드린 기도와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온 백성이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그분께 신실하게 행하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말못하는 우상과 다른 분이십니다. 그분은 약속을 지키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강해 보이는 적이라도 하나님을 신뢰할 때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둘러싸고 신앙 생활을 방해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떠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를 주십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4일 (금요일) 역대하 31장

유월절을 지킨 백성들을 이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1). 회복된 예배와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하나 됨은 삶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백성들은 나가서 여러 우상들을 찍어 없애기 시작합니다. 이런 일은 남유다 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일부 지역에도 일어납니다. 이후에 히스기야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순번을 정하여 예배의 개혁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자신의 사비를 들여 매일 드리는 번제와 매월 첫째 날 드리는 번제와 절기에 쓰일 번제가 드려질 수 있도록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들에게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몫을 주어 생계를 책임지게 합니다. 백성들은 왕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다른 성읍에서도 모범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십일조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십일조는 매우 많아 제사장들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나머지는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방들에 저장 하여 책임자를 세우고 지속적으로 직무를 성실히 행하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습니다(11-19). 히스기야는 온 유다에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율법과 계명을 지켜 형통한 왕으로 평가를 받습니다(20-21). 

 

오늘 말씀에서는 참된 예배의 개혁과 예배를 중심으로 한 하나 됨이 삶의 현장에 적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킴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고 다시 개혁한 백성들은 삶 속에서 그들의 주변에 있던 우상들을 타파하고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 우상을 섬기는 삶의 현장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번 유월절을 회복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히스기야는 개혁이 지속될 수 있도록 번제물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고 제사장들이 섬길 순서를 정하고 또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직무를 행하도록 몫을 책임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예배를 통해서 회복된 삶은 그냥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서 회복된 하나님과 관계를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하고, 그것이 지속될 수 있도록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예배 잘 드리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하면 안됩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서 받은 은혜와 도전과 회복된 관계를 가지고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을 우리 각자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시작된 개혁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개혁의 영이십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께 순종하여 우리의 삶을 지속적으로 개혁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3일 (목요일) 역대하 30장

히스기야는 성전을 회복하고 이제는 유월절을 지킵니다. 유월절은 오랫동안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남 유다 왕국만 유월절을 지키려고 한것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 왕국에도 편지를 보내어 함께 지키자고 합니다. 하지만 제사장들이 부족하고 백성도 아직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했기 때문에 원래 지켜야 하는 달보다 한 달 늦게 지키고자 합니다. 또 북 왕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 시간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통해서 제사를 정상적인 위치에 올린 히스기야는 절기를 제자리로 돌려 놓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첫 유월절은 사정상 한 달 늦게 지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문제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또 히스기야가 북이스라엘도 초청한 것은 당시 앗수르에게 망하기 일보 직전인 북이스라엘에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일깨워주고,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한 민족임을 자각하는 기회였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조롱했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와서 유월절을 함께 지키게 됩니다(1-11). 비록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솔로몬 이후에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함께 유월절을 지키게 되는 아주 의미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킨 것은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히스기야 왕이 다스릴 때 밖에 없었습니다. 유월절은 성대하게 지켜졌고, 우상은 제거 되었으며, 제사가 드려짐으로 죄 용서가 일어났습니다. 북이스라엘 참여자들 가운데 먼 길을 오느라 부정하게 된 사람들도 유월절에 참여 할 수 있도록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예외적으로 용납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온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키고 다시 하나님의 한 선택된 백성으로서 언약을 갱신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레위인들을 격려했고, 온 무리가 함께 유월절을 이어서 시작되는 무교절을 지키고, 또 7일 동안 더 지키기로 결의하여 즐겁게 지킵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칠천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고, 지도자들도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만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 기쁨은 솔로몬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백성을 축복했고 그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습니다(12-27).

 

히스기야는 참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부족한 것도 있고 미쳐 준비하지 못했던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외적인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할 때 모두가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바른 예배의 회복을 통한 하나 됨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역대기의 독자인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함께 바른 예배를 중심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른 예배에는 많은 이들의 헌신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레위인들의 수고와 히스기야 왕의 수고와 백성들의 수고를 보십시오. 우리 모두가 바른 예배를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각자에게 주어진 수고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함께 바른 예배를 통해 하나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2일 (수요일) 역대하 29장

아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의 어버지와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자 성전을 거룩하게 하고 유월절을 지킵니다. 역대기 저자는 그가 다윗의 행위대로 행했다고 합니다. 다윗은 이상적인 왕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정직하게 섬기는 왕이 히스기야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로 인해서 엉망이 된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합니다. 그는 조상들의 문제와 왜 국가에 어려움이 왔는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아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적인 심판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1-9). 이에 자신은 그것을 바로 잡을 것임을 레위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를 들은 레위 사람들은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전을 성결하게 합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 들어가 모든 더러운 것들을 성전 뜰로 모으면 그들은 성전 밖 기드론 시내로 가져가서 버립니다. 이 일은 1월 1일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8일 동안 성결 작업 끝에 성전의 부속 건물인 낭실에 이르고 또 8일후에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는 작업을 마칩니다(10-17). 왕의 명령 대로 성전이 성결하게 되었습니다. 성전 기구들도 갖추어 졌습니다. 이에 히스기야 왕은 아침 일찍 성읍의 지도자들을 모으고 성전에 올라가서 온전한 숫자인 일곱을 채워 수송아지와 어린 양, 숫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사를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을 통해서 드립니다. 제사장은 피를 받아 단에 뿌림으로 속죄 합니다. 다시 거룩하게 제단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사하여 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전의 선지자들의 명령에 따라 두었던 찬양대를 회복시키고, 다윗의 시편과 아삽의 시편을 악기와 함께 부르며 제사를 드리고 경배합니다. 또 히스기야 왕은 백성을 위한 번제와 속죄제를 통해서 다시 제사를 드리게 되었으니 마땅히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감사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에 참여하도록 독려합니다(18-31).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제물을 가지고 왔고 그 제물의 양이 너무 많아 제사의 일을 제사장이 아닌 레위 족속이 돕게 됩니다. 이제 성전에는 번제와 화목제의 기름과 전제가 많아졌고, 성전에서 섬기는 일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히스기야가 긴 세월 동안 계획하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해서 예비하셨기 때문에 모든 일을 순조롭게 끝났고 이에 왕과 백성들이 함께 즐거워 할수 있었습니다(35-36). 

 

히스기야의 행동들을 보면 여러모로 솔로몬과 닮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나서 유월절을 지키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이 함께 그 제사에 자발적으로 제물을 가지고 섬긴 것 같이 히스기야도 그렇게 합니다. 역대기 저자는 히스기야를 제 2의 솔로몬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대기의 독자들은 그들의 윗 세대가 왜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오게 되었는지,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전 세대는 하나님과 언약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포로 잡혀갔고, 그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땅으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이제 가장 시급한 것은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림으로 언약에 신실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중심은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정결해야 제사를 제대로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는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히스기야의 성전 성결을 향한 열심은 단번에 자신을 드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성결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성결하게 유지하셔서 참된 거룩한 성전으로서 모든 사람을 위한 영 단번의 제사를 드림으로 백성을 속죄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성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덕분에 성결하게 되었음을 기억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성결을 향한 거룩한 욕망을 가지고 날마다 성결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월 1일 (화요일) 역대하 28장

요담을 이어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고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했습니다(1-2). 이스라엘 왕들의 길은 우상숭배의 길이었습니다.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주로 자녀들을 바치는 제사를 하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며, 산당과 모든 푸른 나무 앞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는 일들을 행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십니다. 전쟁에서 패배는 하나님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릴 때 하나님은 패배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언약에 신실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 이스라엘과 싸움에서도 패배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루에 용사 12만명이 죽었고, 아하스 왕의 아들과 고위 관리들도 죽음을 당합니다(3-7). 또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 오뎃을 통해서 포로들이 돌아오게 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도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벌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같은 이스라엘 민족끼리 서로 노예를 삼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북 이스라엘 군사는 그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에 에브라임 자손들 중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몇몇 지도자들이 일어나 포로를 데리고 오는 자들을 막고 포로들을 위해서 옷을 입히고 신을 신도록 하고 아픈 자를 치료해 주고, 걷기 어려운 사람들을 나귀에 태워 유다에게 돌려줍니다(8-15). 이런 일 후에도 아하스는 정신을 못 차리고 에돔과 블레셋이 쳐들어 왔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버리고 당시 부흥하던 세력인 앗수르를 의지합니다. 이 두 민족은 모두 앞에서 선왕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였을 때 정복하고 꼼짝도 못했던 민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께서도 이들을 통해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앗수르를 의지했지만 끝내 앗수르도 배신했습니다. 더 많은 재물을 성전 창고와 왕의 창고에 꺼내어 앗수르에게 바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하스는 힘들 때 더욱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친 다메섹의 신을 섬기며 그 신이 다메섹을 도운 것 같이 자신도 도와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그 신을 섬긴 것이 유다를 망하게 되는 원인 됩니다. 나아가 아하스는 성전의 기구들을 모아 부수고 성전을 닫았습니다. 성전을 닫고 구석구석 제단을 쌓아 어디서나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독려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았습니다. 결국 아하스도 죽어서 왕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명예를 얻게 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부한 왕입니다. 그의 아버지와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보이기 이방의 신들이 훨씬 더 좋아 보이고, 여러 신들을 섬기는 것이 훨씬 좋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역대기 저자는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떠날 수록 더 비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포로를 돌려 보냄으로 하나님께서 심판 중에도 긍휼을 베푸심을 경험했지만 정신을 못 차리고 더 심하게 하나님을 떠납니다. 힘들 때 더욱 하나님을 떠나 범죄합니다.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닥치고, 힘든 시기를 보낼 때, 그 때는 하나님을 떠나야 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돌아올 때입니다. 하나님을 떠난다고 늘 나쁜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늘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어려울 때 하나님을 더욱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곤고할 때 더욱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울 때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분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7월 31일 (월요일) 역대하 27장

웃시야가 죽고 요담이 왕이 되었습니다. 요담은 16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그 중에서 상당기간을 아버지가 한센병 때문에 통치하지 못했던 시기에 섭정을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병을 통해서 성전에서는 오직 레위인만이 봉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에는 출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성전을 윗문을 건축하고 오벨의 성벽을 증축했습니다. 건축을 많이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주신 복에 속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백성들이 부패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요담이 산당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담은 아버지와 달리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삽니다. 비록 완전하게 개혁을 하지 못하지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다고 평가를 받습니다. 이에 그는 점점 강하게 되었습니다. 암몬 자손들과 싸워 승리했고, 조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어 다윗의 성에 장사됩니다(1-9). 

 

역대기 저자는 요담의 행적을 아주 간략하게 기록합니다. 그가 완벽한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른 길을 걸었습니다. 부족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따르고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고,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버지 웃시야와 대조가 됩니다. 아버지의 삶을 반면교사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부족하지만 방향이 하나님을 항상 향하여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중심이 과연 하나님을 향하여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되돌아 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30일 (주일) 역대하 26장

유다 왕 아마샤를 이어 그의 아들 웃시야가 왕이 됩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됩니다. 아마도 처음 24년 동안은 아버지와 함께 섭정을 하고 그 후에 단독으로 통치를 했을 것입니다(왕하15:1, 왕하 14:23). 역대기 기자는 웃시야도 처음에는 그의 아버지를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겼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 스가랴가 살아 있을 동안에 하나님을 신실하게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형통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인 블레셋과 지속적으로 싸우고 승리하여 남쪽의 경계를 튼튼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웃시야 시대에 나라가 부강하여 암몬 사람들이 조공을 바치고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1-8). 예루살렘과 광야에 방어하기 위한 망대를 세우고 우물도 많이 파서 농사가 잘 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합니다(9-10). 또 웃시야에게는 충성스럽고 강력한 군대 지휘관과 그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웃시야는 군대가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무기도 고안해낼 사람들도 세웠습니다. 이렇게 웃시야는 군사, 농업, 외교 등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이를 기이한 도우심을 얻었다고 본문에서 표현합니다(11-15). 하지만 웃시야는 자신이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자 교만하여 성소의 향단에 불을 피우려고 합니다. 그것은 오직 레위인 중에서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일을 말리려는 제사장 아사랴와 함께 온 제사장들의 말도 무시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기도록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전염의 위험이 있고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어 성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땅 밖으로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이에 급하게 제사장들은 웃시야 왕을 성전에서 내 보낸 것입니다. 이후에 웃시야 왕은 죽을 때까지 나병을 앓고 있었고, 별궁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대신에 그의 아들 요담이 실질적으로 왕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결국 웃시야 왕도 나병 때문에 왕들의 무덤이 아니라 그 곁에 장사됩니다(16-23). 

 

웃시야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솔로몬 시대와 같이 남방으로 뻗어 나갔고, 주변 왕국에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한 군사적 힘을 가졌습니다. 나라를 번성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습니다. 제사장들에게만 허락된 일을 왕이라는 이유로 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이방나라와 구분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질서와 평화가 있는 곳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고전14:33). 또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합니다(고전14:40).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직분자들을 통해서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영향력이 크다고 함부로 교회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는 말씀에 따라서 성도들을 보살피고 권면하고 섬겨야 합니다. 누구도 주장하는 자세로 성도들을 대하면 안됩니다. 반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직분자들을 통해서 교회에 질서를 세우심을 기억하고, 직분자들에게 존경과 사랑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또 서로가 가진 은사를 질서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 안에 하나님의 질서가 세워지고, 교회가 건강해지고 든든히 세워집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함께 교회의 질서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29일 (토요일) 역대하 25장

요아스가 죽고 그의 아들 아마샤가 왕위를 이어 받습니다. 아마샤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지만 온전한 마음으로 하지는 않았다고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처리했지만, 그의 아들들에게는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율법을 따른 것입니다. 또 군대를 잘 정비하고 북이스라엘에게 용병을 사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금전적인 손해에도 불구하고 돌이킵니다(1-10). 이에 하나님께서 손해 본 것 보다 능히 많은 것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결국 그는 세일 자손과 싸움에서 승리를 얻었습니다. 동시에 아마샤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쫓지 않고 에돔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을 섬깁니다. 에돔을 치고 많은 노략물을 가지고 오면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겨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에돔의 부유함을 그 신이 가져다 주었다 생각하여 그 신을 섬기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마샤에게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 책망합니다. 하지만 아먀사는 그의 말을 듣기 싫어하여 그 말도 마치기 전에 거부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제 아마샤를 버리셨다고 말합니다. 이후 아마샤는 유다에 침략한 북이스라엘 용병에 대한 보복으로 북이스라엘을 칩니다.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속담을 이용하여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자고 말하지만 결국 서로 싸우게 되어 요아스가 승리하게 됩니다. 이에 요아스는 몇몇을 포로로 잡고 승리의 표시로 예루살렘 성벽을 400규빗을 허물고 성전과 왕궁 창고의 보물을 전리품으로 가지고 갑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역대기 저자는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뿐만 아니라 아마샤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후부터 무리가 그를 반역하여 결국 라기스까지 도망치지만 반역한 무리에 의해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게다가 왕실 무덤에 들어가지 못하고 유다 성읍에 장사됩니다(11-28).

 

유다 왕 아마샤는 처음에 하나님께 신실했고, 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여 에돔에게 승리하는 것을 경험했지만 이후에 에돔의 신들을 섬기는 악을 저지르고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는 악을 행하게 됩니다. 에돔의 부유함을 보고 하나님과 함께 에돔 신도 섬긴 것입니다. 당시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여러 신을 섬기는 것이 일반적이던 시대였습니다. 아마샤는 하나님도 섬기고 재산을 많이 주는 에돔의 신도 섬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버린 것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것도 섬기는 혼합주의적 우상숭배를 하나님은 단 한번도 인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순수한 신앙을 넘어 하나님도 섬기고 재물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려는 것입니다. 비단 재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시간, 건강, 자녀 등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 결국 우상이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사용하여 우상을 거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28일 (금요일) 역대하 24장

오늘 말씀에서 역대기 저자는 요아스의 통치를 두 시기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때 그를 따라 하나님을 섬긴 시기와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방백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버린 시기 입니다. 다윗의 왕조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요아스는 이제 아달랴를 몰아내고 말씀을 따라서 개혁 유다를 개혁합니다. 요아스가 두 아내를 맞이 한 것은 그를 통해 자녀들이 많아지고 다시 왕조가 일어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합니다. 왜냐하면 아달랴가 통치할 때에 아달랴의 아들들이 성전을 파괴하고 성물들을 바알들을 위해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요아스는 모세가 명령한 성전 세를 회복했지만 이 명을 받은 제사장들이 일을 더디게 했습니다. 이에 요아스는 한 궤를 전 밖에 두고 정한 세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독려하자 백성들은 기뻐하며 성전 보수에 함께 뜻을 모읍니다. 왕과 여호야다는 성전 세를 모아 감독자에게 주어 일꾼들을 고용하게 하고 노동에 대한 댓가를 주도록 합니다. 드디어 일이 진척이 있었습니다. 공사는 무사히 마쳤고, 남은 돈을 왕과 여호야다에게 가져오자 그것으로 성전 그릇을 비롯한 제사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합니다.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 왕은 매일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신실하게 행했습니다(1-16). 하지만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 왕은 유다 방백들의 말을 듣고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와 우상을 섬깁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를 내립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경고도 하시지만 요아스는 듣지 않고 심지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자 그를 죽이기까지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람 군대를 보내셔서 요아스를 치셔서 부상하여 죽게 합니다. 이때 온 아람 백성은 적었지만 수많은 이스라엘 군대를 이기게 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전쟁의 승리가 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게됩니다. 요아스는 죽은 후에 불명예스럽게 침상에서 반역으로 죽게 되고 나아가 왕의 묘실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18-27). 

 

오늘 말씀에서 여호야다의 죽음과 요아스의 죽음이 대조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야다는 비록 제사장이었지만 그는 왕처럼 왕들의 묘지에 묻히는 반면에 왕이었던 요아스는 왕의 묘실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불명예를 얻게 됩니다. 이는 여호야다는 대제사장이면서 일정 기간 동안 요아스가 어린 왕일 때 실질적인 왕의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그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요아스는 왕이었지만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왕의 역할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왕의 묘실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여호야다는 제사장으로서 왕을 바른 길로 인도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제사장의 또다른 역할이었습니다. 

 

여호야다는 참된 왕이자 제사장으로서 성전을 온전히 회복하실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자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시는 제사장이십니다. 여호야다는 성전 재건을 우물쭈물 했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거침없이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참된 성전인 당신의 몸을 온전히 십자가에서 내어 놓으셨고 일으킴을 받아 참된 성전을 재건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 가시는데 거침없이 행하십니다. 오직 우리의 순종만을 기다리십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 가실 수 있도록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27일 (목요일) 역대하 23장


아달랴 여왕이 유다를 다스린지 7년째에 제사장 여호야다는 숨겨 왔던 요아스를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셨던 언약을 신뢰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윗의 혈통이 없어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요아스가 살아 남았다는 것을 알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고자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들은 레위인들과 족장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읍니다. 성전에서 그들은 요아스와 언약을 맺고 그를 따르기로 합니다(1-3). 그리고 레위인들을 무장시켜 성전과 왕궁과 성문에 배치합니다.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만 성전에 출입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만 진행되어야 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요아스를 왕으로 세웁니다. 철저한 경계 속에서 율법을 낭독하고 기름을 부어 즉위식을 마칩니다. 율법을 낭독하는 것은 왕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다스려야 함을 보여줍니다. 백성들은 기뻐합니다. 하지만 아달랴는 이 환호성을 듣고 달려와 반역이라고 외칩니다. 그녀는 호위병들에 의해서 성전 밖으로 끌려나가 죽게 됩니다. 이는 성전에서는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는 율법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여호야다와 유다 백성들은 끊어진 줄 알았던 다윗의 혈통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즉시 언약을 갱신하고 백성들은 언약에 신실하고자 곳곳에 있는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우상을 깨뜨리고 바알 제사장을 죽입니다. 여호야다는 성전에 직원을 세워 레위 제사장의 직무를 율법에 따라서 회복합니다. 이에 백성들은 모두 즐거워합니다(12-21). 다윗의 왕조가 복권되었고, 예루살렘에 다시 평온이 찾아 왔습니다. 

 

여호야다는 요아스를 숨겨서 잘 키웠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용기를 내어 요아스를 사람들 앞에 세우고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왕위를 다시 세웁니다. 우리의 삶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개혁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당하고 필요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순간 우리 삶의 개혁은 바르게 될 수 없습니다. 두번째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에 대한 지식과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할 용기가 없다면 삶은 개혁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것을 실천할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매일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 용기를 가지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26일 (수요일) 역대하 22장

여호람이 죽자 유다 지도자들은 그의 막내 아들 여호아하스(아하시야)를 왕으로 세웁니다. 그는 유다 왕 중에 가장 짧은 기간 동안 섬긴 왕입니다(1년). 왕이 다스린 해가 짧은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보시기 악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는 오므리의 손녀였습니다. 오므리는 아합의 아버지입니다. 아합의 길로 행했다는 것은 탐욕과 우상 숭배의 대명사인 아합 왕과 그 후계자들의 길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악한 길로 했다는 것입니다. 아달랴는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그렇게 왕으로서 살도록 꾀었습니다. 조언을 했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북이스라엘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는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아람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전투에서 아합의 아들 요람이 다치자 그의 아들 아사랴를 보내어 병문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하시야는 요람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 때 마침 예후가 반역을 일으켜 아합의 왕조를 망하게 했습니다. 아하시야는 하필 그곳에 있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또 그의 형제들과 유다 지도자들도 요람을 방문하러 가다가 예후에게 죽임을 당합니다(1-9). 역대기 저자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기록합니다. 결국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유다에서 정권을 잡고 유다 집의 왕족들을 모두 죽입니다. 하지만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는 고모 여호사브앗의 도움과 고모부인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져 성전에서 생명을 부지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6년동안 고모와 고모부의 손에 길러집니다. 

 

다윗의 왕조의 아주 심각한 위기가 오늘 말씀에서 그려집니다. 다윗 왕의 후손들이 전부 죽임을 당하고 아합의 딸인 아달랴가 유다의 정권을 잡게 됩니다. 포로 귀환 후의 시기를 살고 있는 역대기의 저자와 독자들에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게 다가 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요아스를 살려 두셨고,역경 가운데서 왕의 후손이 보존되었고, 절대적인 위기 속에서도 왕위를 이을 자손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때와 마찬가지로 다윗 계열의 왕과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야적 인물에 대한 소망은 끊어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후손이 끊기지 않고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은 그들에게 소망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도저히 소망이 없어 보이는 그 순간에 보냄 받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서 우리를 회복시키는 분이십니다. 영적인 침체와 소망이 없는 것 같이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의 소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절망 속에서 우리의 참된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25일 (화요일) 역대하 21장


여호사밧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호람은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우선 여호람은 그의 형제들을 까닭 없이 죽였습니다. 여호사밧이 지혜롭게 다른 자녀들에게는 금과 은을 충분히 주어 왕을 반역하지 않고 형제들이 잘 지내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여호람은 세력을 얻은 후 형제들 중 몇명을 죽입니다. 뿐마 아니라 그는 북이스라엘 아합 가문과 결혼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렇게 악한 일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의 가문을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한 언약을 때문입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에돔이 배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주변 국가를 다스리고 평화롭게 하는 것은 언약적인 축복이고, 반대로 주변 국가들이 배신하고 공격하는 것은 언약적 저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할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람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범죄했고, 결국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셔서 그의 백성과 집안, 그리고 그의 건강에 심판할 것을 말씀합니다. 특별히 그는 창자에 병이 생겨 죽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블레셋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들을 보내셔서 여호람을 치게 합니다. 이 일로 여호람의 막내 아들 여호아하스만 남고 아들들과 아내들을 빼앗깁니다. 또 이 모든 일 후에 그의 창자에 병이 생겨 죽게 됩니다. 그가 죽은 후에 사람들은 그에게 분향하지 않습니다. 그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호람의 행동에 정확하게 반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제를 죽여 자신의 왕위를 곤고하게 하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에돔이 독립 하도록 하시고 그의 자녀들도 죽도록 하십니다. 이방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버리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는 애도하는 자 없이 죽고 왕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명예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잊은 자들을 위한 최후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심을 잊은 자에게 내려질 심판입니다. 스스로 영광을 취하고자 하나님을 떠난 자의 최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경고를 하셨지만 그 경고를 무시한 사람의 최후의 결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고집을 부릴 때는 심판을 행하시는 살아있는 분이십니다.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에 무디어지지 않고 신실하게 반응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24일 (월요일) 역대하20장


하나님을 신뢰하는 선한 왕 여호사밧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모압과 암몬과 마온 사람들이 연합하여 여호사밧을 치러 온 것입니다. 그 숫자들은 엄청났습니다. 여호사밧은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는 성전에서 엎드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온 유다도 그렇게 합니다. 여호사밧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철저히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 근거하여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언약의 하나님께 언약을 근거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에 왕을 비롯한 여자와 자녀와 어린이가 모두 참여합니다(1-13). 그때 하나님의 영이 아하시엘에 임하여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고, 그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유다 백성은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말씀입니다(출 14:13-14). 구원을 베푸실 때 쓰시던 표현입니다. 이에 백성들은 그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찬송합니다. 이제 백성들은 하나님을 말씀대로 행군하여 나갑니다. 그 때 여호사밧은 다시 한 번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여 세운 노래하는 자들이 노래하고 찬송하며 나아갑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연합군을 치십니다. 또 서로 싸우도록 만드십니다. 결국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며 전쟁을 친히 싸우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탈취물을 거두는데, 너무 많아서 사흘 동안에 걸쳐서 탈취물을 거둡니다. 그 골짜기를 브라가 골짜기, 곧 찬송의 골짜기라고 부릅니다. 여호사밧을 필두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행하신 일을 노래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변 나라들은 남유다를 두려하게 되었고, 다시 태평을 누리게 됩니다(14-30). 평강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샬롬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백성은 찬송합니다. 역대기 저자는 여호사밧을 아주 경건한 왕으로 평가를 합니다. 하지만 그도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산당을 없애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스라엘 왕과 가까이 하여 무역을 계획하지만 결국 이루지 못함을 이야기 함으로 여호사밧의 불완전함을 보여줍니다(31-37). 

 

위기 때에 누구를 의지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입술에 찬송이 있느냐 혹은 애곡이 있느냐가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그 입술에 찬송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노래가 끊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이 찬송을 모두 부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심을 경험하며 삽니다.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붙듭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날마다 그분을 향한 감사와 행하신 일을 찬송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23일 (주일) 역대하 19장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예후는 여호사밧이 아합을 도운 것과 북이스라엘을 도운 것에 대해서 책망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신실했던 것도 기억하신다고 합니다(1-3). 이후에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또 다시 개혁을 진행합니다. 남유다의 최남단인 브엘세바와 최북단인 에브라임 산지에 이르도록 백성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고 중요한 도시마다 재판장을 두어 공정하게 재판을 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재판관들이 재판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의도 없고, 치우침도 없고,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는 일도 없으시니 동일하게 그렇게 재판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재판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나아가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과 족장들 중에서 작은 송사들을 맡도록 합니다. 그들에게 진실과 성심을 다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권면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재판을 통해서 율법과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정확하게 가르치고 그것에 따라서 살도록 권함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것입니다. 또한 여호와를 섬기는 종교와 관련된 일을 대제사장에 맡기고, 행정에 속한 것을 담당하는 스바댜를 세우고, 레위 사람들은 관리로 삼아 남유다의 조직을 재정비합니다(4-11). 그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책망 받은 후에 더욱 더 유다를 개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백성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특별히 재판의 문제, 곧 법조계를 개혁합니다. 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모든 회중을 좌지우지하는 이방나라의 왕들과 다릅니다. 왕 또한 법조계를 개혁할 때 하나님의 율법의 아래 서 있습니다. 또 개혁의 목적은 자기에게 유리한 법조항을 만들거나 행정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며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사시고, 공의로 살고 재판하시는 참된 백성이자 재판장 이었습니다. 그분은 다시 오셔서 모든 사람의 삶을 또한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며 때로 책망하십니다. 그 책망은 단순한 징계가 아닌 더 나은 개혁된 삶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삶의 체계를 새롭게 하십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놓고 하나님을 향해 바른 삶을 살도록 개혁시켜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22일 (토요일) 역대하 18장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 여호사밧 왕에게 부귀와 영광을 주셨습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주신 부귀와 영광을 누리면서 북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결혼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2년 뒤에 여호사밧 왕이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로 갔을 때 아합 왕은 함께 힘을 모아 아람 나라에 속한 길르앗 라못을 치자고 제안합니다. 여호사밧도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자고 합니다. 아합 왕은 선지자 400명을 모았고 400명 모두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여호사밧은 물어볼 만한 다른 선지자가 없는지 묻습니다. 아합은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는 자신에 대해 항상 좋지 않은 것만 예언하여 자신이 싫어한다고 합니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미가야에게 물어보자고 합니다. 미가야는 처음에는 다른 선지자들처럼 긍정적으로 예언했지만, 나중에는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져 평안히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목자는 왕입니다. 왕이 없지만 오히려 백성들이 평안한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아합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1-22).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는 미가야의 뺨을 치며 미가야가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미기야는시드기야 선지자가 골방에 숨는 날에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왕은 미가야를 가두어 돌아 올 때까지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 즉 겨우 생존할 만큼의 최소한의 음식을 아주 질이 낮은 음식으로 주라고 합니다. 미가야는 결코 왕이 평안히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23-27). 결국 두 왕은 길르앗 라못을 치러갑니다. 아합 왕은 변장하고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것입니다. 아람 왕은 그의 병거 지휘관에게 오직 이스라엘 왕과만 싸우라고 명령합니다. 그들은 여호사밧을 이스라엘 왕인 줄 알고 추격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을 도우셔서 아람의 병거 지휘관들이 돌아가도록 하십니다. 이에 아합 왕의 변장술은 성공한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병사 한 사람이 무심코 당겨서 쏜 화살이 그에게 박히게 하시고 또 전쟁이 격렬하게 하셔서 결국 미가야의 예언이 옳다는 것을 보여줍니다(28-34).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귀와 영광을 누리는 여호사밧과 하나님을 선별적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아합 왕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역대기 저자는 여호사밧이 아합 가문과 결혼 한 것과 함께 미기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에 나간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19장에서 선지자 예후의 책망을 듣지만 여호사밧은 다시 하나님께 신실하게 행동합니다). 18장의 초점은 오히려 두 왕의 비교에 있습니다.

 

여호사밧의 행동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행한 연약함과 실수라고 한다면, 아합 왕은 아예 출발부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선지자들의 말만 듣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선지자를 학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신뢰하다가 넘어진 여호사밧의 길과 하나님을 아예 신뢰하지 않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듣는 아합의 길은 엄연히 다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넘어질 때가 실수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예 신뢰하지 않으면서 성경에서 듣고 싶은 말씀만 골라서 믿는 것은 사악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며 회개할 것이 있다면 돌이키고, 때로 듣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21일 (금요일) 역대하 17장

유다 왕 아사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그의 조상 다윗의 초기(밧세바와 범죄하기 전)의 길을 따랐다고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바알을 섬기지 않았고 북이스라엘이 행하던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신도 섬기는) 혼합주의와 스스로 만든 산당과 송아지에게 제사하는 길을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전심,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언약적인 복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의 나라를 강하게 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 복을 또한 언약 백성들이 누리게 되어 샬롬(평안)을 누리게 됩니다(1-6). 나아가 그는 방백들을(오늘날 도지사에 해당함) 여러 성읍에 세워 가르치게 하게 하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도 함께 하도록 하여 여호와의 율법책으로 가지고 온 유다에게 가르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온 백성이 지킬 수있도록 힘을 다해 백성들을 돌보는 것입니다(7-9). 이렇게 율법책을 가르쳐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이 알게 하고자 하고 자신이 참된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참으로 온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인정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주변 나라들이 여호사밧을 두려워하도록 만드셨고, 조공을 바치도록 해주셨습니다. 여호사밧은 점점 더 부강하여 견고한 요새들을 세우고 군사들도 잘 조직화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나라를 바르게 다스렸습니다(10-19). 

 

역대기 저자는 포로기 후에 돌아온 백성에게 이렇게 아사와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충성한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께 신실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고 보호와 회복을 주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자는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여호사밧은 온 백성이 율법을 알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에 기준이 되고 우리 삶으 구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의지한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실천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향하고 우리의 행동, 삶 또한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영광을 얻는 비결은 세상의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잘 배워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70인을 파송하시며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라고 하셨고(눅10:1-24), 또한 부활 후에 승천하실 때에도 제자들을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도록하라고 하셨습니다(마28:19-20).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모여서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일은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배우고 서로 지키도록 격려하며 기도하고 세상과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함께하시고 언제 어디서나 붙들어 주십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배우고, 따르는 삶을 살며 삼위 하나님의 복을 충만하게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20일 (목요일) 역대하 16장

오늘 말씀은 아사 왕의 통치 말년을 보여줍니다. 35년 동안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던 아사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36년째에 북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 라마를 건축했습니다. ‘라마’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8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그곳을 바아사는 요새화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유다로 가지 못하도록 막았을 뿐만 아니라 남 유다가 자유롭게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과 아람과 다른 나라들과 교역을 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에 아사 왕은 북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람에게 여호와의 성전 창고와 왕의 창고에 있던 은금을 보내 도움을 요청합니다. 아람 왕 벤하닷은 북이스라엘과 맺은 평화 협정을 깨고 북이스라엘 공격했고 바아사는 라마에 요새를 건축하는 것을 멈추고 돌아갔습니다. 아사 왕은 라마를 건축하던 재료들로 다른 성읍들을 세우는데 사용합니다(1-6). 하지만 아사가 이렇게 아람 왕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이에 선견자(선지자) 하나니는 그 잘못을 지적하고 하나님께서는 전심으로 주님을 찾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는 분이심을 되새겨줍니다. 이후에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샬롬이 깨어진다는 말입니다(7-10). 하지만 아사는 그 선견자를 옥에 가둡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발에 병이 생겼을 때에도 하나님 아닌 의원을 신뢰합니다. 여기서 의원은 아람 말로 ‘아사’입니다. 역대기 저자는 언어유희를 통해서 아사가 하나님이 아닌 결국 자신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사는 죽어 다윗의 성에 자기를 위해 준비한 곳에 장사됩니다(11-14).

 

아사는 하나님께 충성하던 왕이었지만 말년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의지하고 정치적인 동맹을 의지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샬롬을 이룬 것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는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을 이제 의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어 핍박했습니다.

 

과거에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얼마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했는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지금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언약의 공동체 구성원에게는 과거에 얼마나 잘했는지가 아니라 늘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오늘 하루도 새롭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고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19일 (수요일) 역대하 15장


하나님께서는 아사 왕에게 아사랴라는 선지자를 보내셔서 아사와 유다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잘 지켜 행하고, 그분을 만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버린다면 하나님도 그들을 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 잘해 주는 사람만 만나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언약적인 관계를 되새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애굽 왕과 싸움에서 승리한 이후에 다시 한 번 관계를 되짚어 줍니다. 또한 하나님을 떠났을 때 이스라엘의 상황을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개혁할 수 있도록 독려합니다. 아사는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개혁을 단행합니다. 아사가 하나님께 더욱 더 신실하게 행하자 유다와 베냐민 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지파 중에서도 돌아 오는 자들이 많아집니다. 아사는 온 백성을 모아 하나님께 칠백 마리의 소와 양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많은 양으로 제사를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7백은 온전함을 의미하는 숫자인 7의 100배를 의미합니다. 아주 온전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조상들의 하나님을 찾기로 언약을 맺습니다.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았을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께서도 온 유다를 만나 주시고 샬롬을 주셨습니다(1-15). 아사는 심지어 어머니라도 다른 우상을 섬기자 우상을 부수고 태후의 자리를 박탈할 정도로 단호하게 개혁을 시행합니다. 아사는 이후로 35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안하게 보냈습니다(16-19). 이는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할 때 주시겠다고 한 평안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선지자를 보내어 아사에게 메시지를 주십니다. 잘 하고 있는 아사에게 더욱 더 잘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느슨해지려고 하는 아사 왕의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종의 말씀에 아사 왕은 순종했고,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만나 주신다는 말씀이 참으로 사실임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을 때 하나님은 만나주시고 함께 하고자 원할 때 하나님은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고(요13:1),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21). 잘하고 있을 때 더 잘하고, 느슨해 지려고 할 때 다시 한 번 힘을 냅시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찾읍시다. 그러면 주님은 만나주십니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길 간절히 바랍시다. 그분은 동행하실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개혁해 나가며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18일 (화요일) 역대하 14장


아비야가 죽고 그의 아들 아사가 남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아사도 그의 아버지와 같이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며 선과 정의를 했습니다. 그는 성전 외에 제사를 드리던 곳을 없애고 돌이나 나무로 세운 우상인 주상을 깨드렸습니다. 남유다 왕국에서 하나님을 다른 방식으로 섬기고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다 사람들을 다스렸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평안, 곧 샬롬을 주셨습니다. 다른 나라와 싸움이 없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사는 성읍들을 건축합니다. 건축은 나라가 평화로울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그 평화를 누리며 나라를 더 견고하게 할 수 있게 하십니다. 또 아사는 군사들을 점검하고 강하게 했습니다(1-8).

얼마 후에 구스 사람 세라는 이집트의 새로운 왕조의 두번째 왕이 100만 대군과 오늘날 탱크라고 볼 수 있는 병거 300대를 가지고 유다를 치러 갑니다. 아사는 세라와 싸우러 가면서 자신의 군사력이나 군사의 정비됨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사의 기도를 들어 주셨고 승리를 주셨습니다(9-15). 아무리 강력해 보이는 세상 나라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사 왕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자신 보다 훨씬 강력한 군대를 무찔렀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 만약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적국과 싸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일을 돌보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대하6:34-35). 아사는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믿었습니다. 조상들의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당신의 말씀과 약속대로 하셨습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고 거대해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훗날 유대인 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의 총독은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께 끝까지 신실한 예수님은 결국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죄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런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교회에 동일한 승리를 주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강력하고 많아 보여도 하나님을 신실하는 교회와 성도를 무너뜨릴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세상 가운데 승리하며 살아가는 자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의지하며 온갖 고난 가운데 견디고 신앙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그런 자들입니다. 오늘 하루도 세상의 풍조와 유혹에도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승리하시고 세상이 감당치 못할 성도들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7월 17일 (월요일) 역대하 13장

르호보암을 이어 그의 아들 아비야가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은 북 왕국에서 18년째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있었습니다. 남 유다는 북 왕국과 싸우기 위해 용사 40만을 모았고, 북이스라엘은 용사 80만을 모았습니다. 싸움에 앞서 아비야는 긴 연설을 합니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은 남유다가 지키고 있고, 북이스라엘은 그것을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이 하나님이 세운 레위 제사장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직분을 주어 제사를 드리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따라 신실하게 섬기고 있는 유다의 편이 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유다와 대적해서 싸우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곧 조상들을 지켜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전쟁에 능했습니다. 남 유다를 포위했습니다. 남유다는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이대로 가면 패배할 것입니다. 그 때 유다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치셔서 결국 아비야와 유다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조상들의 하나님의 여호와를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18). 조상들의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은 그들이 만들어 낸 하나님 아니라 조상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언약을 맺으신 바로 그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로보암은 자기 나름대로 우상을 만들고, 제사장을 세워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조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만들어낸 하나님입니다. 아비야는 조상의 하나님을 의지했고, 역대기 저자는 아비야가 점점 강성하여졌음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 자체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한편은 조상들의 하나님을 하나님이 정해주신 방식에 맞게 섬기고, 다른 한편은 스스로 고안한 방식으로 섬깁니다. 군사적인 수로는 후자가 훨씬 많고 전략도 좋습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은 숫자로는 적고 전략도 약하지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 자들의 손을 들어 주십니다. 

포로기 후에 돌아온 백성에게 주는 메시지도 확실합니다. 조상들의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이 회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끊임없이 조상들의 하나님이 보내시고자 한 그 메시야가 바로 당신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별안간 새로운 것을 내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의지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만들어낸 방식으로 만들어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여로보암과 북이스라엘 처럼 그렇게 했을 때 군사들을 더 많이 모으고 전략을 잘 짤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아비야와 남유다의 손을 드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르게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와 저와 여러분의 삶도 때로 힘들고 버겁지만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계시된 방식으로 섬기고 성경의 원리를 따라서 사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비록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유별나 보이고 비웃음 거리가 될 수 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며 인내하시고 끝까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때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심과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16일 (주일) 역대하 12장

르호보암의 나라는 견고하게 되었고 세력이 강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그와 남 유다 백성이 제사장들과 함께 하나님을 바르게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르호보암은 자신의 나라가 강력하여지자 여호와의 율법을 버렸습니다. 이런 왕의 지도력 아래 온 백성도 하나님의 율법을 버립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이에 애굽 왕 시삭이 리비아와 숙과 구스와 연합하여 남유다를 쳤습니다. 많은 견고한 성읍들이 빼앗겼습니다(1-4).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왕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다행히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르보호암 왕은 심판을 받고 겸비했습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회개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고 유다를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솔로몬 시대에 부강함을 나타내던 금 방패를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성전에서 물건이 빼앗기는 것은 하나님께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은 르호보암과 유다가 돌이키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겸비했을 때 용서와 회복을 경험한 르호보암은 또 다시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래서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늘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르호보암은 평화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포로기 후에 돌아 온 역대기 저자와 독자들은 이렇게 옛 선조, 특히 르호보암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겸비하는 방법에 없다고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겸비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왕의 역할도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도 동일합니다. 새 언약 아래에서 우리도 하나님께 끝까지 신실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 속에서 당신의 나라를 더욱 굳건하게 세워 가십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할 수 없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늘 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우리의 왕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늘 삶을 돌아보며 겸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의 가정에서 책임 있는  왕같은 부모들로서 가정을 말씀 위에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15일 (토요일) 역대하 11장

르호보암은 군사들을 모아 여로보암을 위세한 다른 열 지파를 쳐서 자신의 통치 아래 두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서 이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고 합니다(1-4). 대신에 르호보암은 자신에게 주어진 나라를 굳건하게 세웁니다. 유다와 베냐민족속에게 속한 성들을 견고하게 방어합니다. 내적으로 아주 잘 다스린 것으로 평가가 됩니다(5-12). 뿐만 아니라 유다와 베냐민으로 구성된 남 유다에 레위족속 제사장들도 모두 나아옵니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이 레위 제사장들을 파직하고 스스로 만든 여러 산당과 일반인 제사장을 마음대로 세워 제사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하나님만을 섬기고 신실하면 나라가 견고할 것을 약속하셨지만, 왕이 되자마자 여로보암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고안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이를 본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마음을 굳게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레위인들을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남유다로 옵니다. 첫 삼 년 동안 그들을은 열심으로 르호보암을 도와 르호보암이 강해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삼 년 동안은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르호보암에게 언약의 축복인 자녀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또 르호보암도 지혜롭게 자녀들을 잘 다스려 후계자를 아비야로 정하고 다른 자녀들에게도 충분히 대우를 해 주어 반역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르호보암의 죄악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가 잠시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쫓아 바르게 예배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언약적인 복을 주심을 보았습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섬기는 악행을 합니다. 여로보암에게 속한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터전을 떠나는 심히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망명은 르호보암이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는데 큰 도움을 주어 유다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역대기가 기록된 시점은 성전을 향한 열정과 하나님께 원하시는 방식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열정을 지닌 사람들의 영향으로 온 백성이 회복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때문에 다윗과 솔로몬의 길을 향한 열심은 성전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고 온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이 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 주님은 성전을 향한 열심으로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요2:17). 또한 거룩한 성전으로서 거룩한 제물로 당신을 하나님께 드리시는 열심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헌신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윗과 솔로몬의 길,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그 길 자체이십니다. 그분의 자기 포기로 우리는 그분의 모든 것을 누립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신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는 오늘 무엇을 포기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할지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14일 (금요일) 역대하 10장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말년에 행한 우상숭배로 하나님은 이미 솔로몬의 군대 장관 중 하나인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 열 지파의 왕이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왕상11:40). 이것을 알고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사울이 다윗을 왕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알고 그를 죽이려고 했던 것 그대로 솔로몬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로 돌아와 백성들의 대표로 르호보암에게 이제 성전 건축과 왕궁건축을 비롯한 여러 강도 높은 노동에서 좀 쉴 수 있도록 요청했습니다. 성전과 왕궁의 건축을 하는 솔로몬의 사명이 끝이 났기 때문에 백성들을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솔로몬은 백성들이 건설 노동을 하도록 어떤 일을 시킨 것 같습니다. 르호보암은 백성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멍에를 가볍게 해주면 왕을 잘 섬길 것이라는 원로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젊은 친구들의 조언을 따릅니다. 오히려 더 강도 높게 그들을 대함으로 자신이 아버지도 더 위대한 왕임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결국 르호보암의 말을 들은 여로보암과 백성들은 르호보암을 섬기지 않기로 왕에게 대답합니다. 다윗의 집, 유다 지파만 돌보라고 말하면서 흩어집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열 지파)과 남 유다(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로 나라가 나뉘어 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드러지지 않지만, 열왕기서를 참고하면 이렇게 나라가 분열된 것이 솔로몬의 죄, 특히 그를 그릇된 길로 인도한 이방인 아내들의 우상숭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르호보암의 어리석음 입니다. 분명히 이 두 가지가 큰 요인이지만 역대기 저자는 열왕기와 달리 솔로몬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온전한 왕의 모습으로 두기 원합니다. 오히려 르호보암의 잘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잘못은 멍에를 더 무겁게 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왕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만했습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 다윗의 또 다른 자손이시며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요청에 겸손하게 답을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7-29)” 율법이 주는 정죄의 멍에와 인생의 멍에를 주님은 가볍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백성의 아픔과 고통을 아시는 겸손한 왕이십니다. 왜 그 멍에가 가볍습니까? 주님이 함께 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멍에는 주님이 주시는 새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쉽습니까? 성령께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삶의 고통과 죄의 멍에를 고백하고 내려 놓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가벼운 멍에를 함께 맵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을 사모하고 서로 사랑하고 용서 합시다. 주님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날마다 이 쉬운 짐을 주님과 함께, 서로가 함께 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13일(목요일) 역대하 9장

남부 아라비아에 위치한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스바는 당시 육상 무역의 중심지로서 금과 향품과 보석을 사고 파는 데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의 여왕이 자신의 충복들과 함께 많은 향품과 금과 보석을 가지고 와서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했습니다. 솔로몬은 스바 여왕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스바 여왕은 솔로몬이 가진 부귀와 영광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속한 사람들이 복되다고 칭송하며 솔로몬의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워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했기 때문입니다(1-8). 그리고 자신이 준비한 금과 향품과 보석을 솔로몬에게 주어 경의를 표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이에 솔로몬도 답례를 하고 필요한 것들을 챙겨줍니다. 

또 솔로몬은 주변국으로부터 조공으로 받은 세입금과 무역을 통해 얻은 금과 은이 너무 많았습니다. 솔로몬은 금으로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솔로몬의 부귀와 군사적 힘을 보여줍니다. 또 자신의 왕좌도 당시의 최고급 재료로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마시는 술잔도 모두 금으로 만들었고,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무역을 통한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9-21). 이는 솔로몬의 영향력이 먼 곳에도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모든 왕들보다 크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왕들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를 듣기 위해서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부분은 다시 한 번 솔로몬에게 있었던 지혜와 부와 영광을 보여줍니다. 이런 솔로몬 왕이지만 결국 모든 사람과 같이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솔로몬의 지혜와 지식과 부귀 영화는 실로 엄청났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의 모든 지혜와 지식과 부귀영화는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한 것의 성취이며 다윗과 맺은 언약의 성취입니다(대하1:7-12). 또한 열방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듣기 위해 와서 조공을 바치는 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미래의 메시아 시대의 희망과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사2:3, 시 72:10,15). 스바 여왕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혜로운 왕 덕분에 그의 백성이 복을 누리는 원리입니다. 솔로몬은 죽어서 그의 영광이 끝이 났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지혜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영원히 죽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부귀와 영광과 지혜는 영원합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우리가 가난과 번민과 어려움 속에서 살지만, 우리의 삶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왕의 다스림 속에서 그 풍족함과 영광을 맛보며 삽니다. 또 그분의 다시 오심을 통해서 그분이 나누어 주시는 형언할 수 없는 복과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왕이신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의 복된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의 가치를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으로 찾으시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룬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하나로 이미 복된 자들이고 온 열방이 부러워할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12일 (수요일) 역대하 8장

성전이 완성되고 하나님과 언약이 갱신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할 때 주시는 복으로서 솔로몬이 땅을 회복하고 더욱 강성하게 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솔로몬은 후람에게 일의 댓가로 땅과 성읍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후람은 그 땅을 무가치하게 여겨 솔로몬에게 다시 돌려주었습니다(왕상9:13). 아마도 솔로몬은 다른 방법으로 보상해 주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무가치해 보이는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할 만할 땅으로 개간하여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또 북쪽에 있는 하맛소바 땅을 점령하고 광야에 다드몰을 건축했다는 것은 무역을 위한 간선도로들을 확보했다는 뜻입니다. 윗 벧호른과 아랫 벧호른은 예루살렘과 해안 도로를 연결하는 주요 길입니다. 역시 육로 뿐만 아니라 바다길로도 무역을 활발하게 하고 방어를 철저하게 함으로 경제적, 군사적으로 부강하게 된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 국고성을 지은 것은 식량과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들을 두어야 할 만큼 풍족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앞으로 먹을 것이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미래를 보여줍니다(1-6). 

또 솔로몬은 그 땅에 남은(항복한) 가난안 족속 사람들로 노동을 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키는 않는데, 이것은 율법에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들의 역할을 구별한 것입니다. 이는 솔로몬이 자신의 권력을 앞세워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다스리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을 신실하게 지킬 때 주시는 언약적인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저자는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7-10/7:12-18).

 

나아가 경제적, 군사적으로 풍성함을 누리는 솔로몬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제단에서 모세의 명령에 따라 절기를 철저히 지키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절차에 따라서 바르게 섬길 수 있도록 감독하고 매일의 주어진 일들을 감당하도록 했습니다(11-16). 경제적, 군사적인 풍성함에만 몰두하지 않고 가장 본질적인 종교적인 일,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을 철저히 지킨 것입니다. 

또 후람과의 동업으로 배를 이용해 지금의 아프리카 지역으로 이해되는 오빌에서도 금을 많이 얻었다는 것은 당시 오랜 항해의 기술과 배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솔로몬은 육지 뿐만 아니라 해상과 선박 기술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7-18). 다방면으로 성전이 완성된 후에 솔로몬의 통치가 부강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단순히 이것은 솔로몬 개인의 능력의 탁월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다윗의 가르침을 따라서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세운 언야게 신실할 때 주어진 언약적인 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결코 자신의 경제적인 군사적인 부와 강력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경제적, 군사적인 부와 강력함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신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언약적인 복을 주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예배를 중심으로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제적이고 군사적인 부와 강력함을 보지 않고, 예배와 말씀을 희생하면서 부와 명예를 쫓습니다. 그럴 때 결코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적인 복과 풍성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예배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적인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언약적인 복은 1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골2:3)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금이나 은보다 귀한 것입니다. 금이나 은으로 살수 없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입니다. 동시에 2차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하며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갈 때 또한 이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적인 복으로서 부요함과 능력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와 하나님을 제쳐 두고 부와 능력을 먼저 추구할 때 주어진 부와 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닌 거짓 부와 힘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과 힘입니다.

우리가 먼저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배를 삶의 중심으로 두는 것입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약에 근거한 복과 힘을 주실 것입니다. 매일의 삶을 풍요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예배가 중심이 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11일 (화요일) 역대하 7장


솔로몬의 기도가 마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에 있던 번제물과 제물들을 살랐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과 같이 가득 차 제사장들이 감히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구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나올 때 그들을 인도하였던 하나님의 구름 기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성전에 충만하게 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며 백성들은 그 자리에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고 감사하며 그분의 인자하심을 찬송합니다. 인자하심은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언약에 근거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런 언약적인 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1-3). 이제 솔로몬은 많은 제물로 성전을 하나님께 바치는 낙성식을 진행합니다. 동시에 절기도 칠일 동안 지킵니다. 이스라엘 달력으로 7월 1일은 나팔절로 나팔을 불어 온 백성들을 불러 모아 함께 안식하는 절기 입니다. 7월 10일은 대속죄일로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피를 뿌려 온 백성의 죄를 씻기는 절기 입니다. 7월 15일부터 7일 동안은 초막절로 두번째 추수를 하는 수확의 절기입니다. 이 때 밭에 장막을 치고 곡식을 거두어 저장하며 감사하는 절기 입니다. 또 8일째는 안식일입니다. 성전 낙성식은 7월 8일에 온 백성이 모여 15일에 마치고 15일부터 시작된 초막절을 온 백성이 지키고 헤어졌기 때문에 23일에 끝나게 된 것입니다. 낙성식 중에 대속죄일 또한 지켜졌고 후에 초막절이 지켜집니다. 이런 절기들을 함께 지키기 위해서 솔로몬은 함께 백성이 모였을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낙성식을 진행했습니다. 성전의 목적은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이렇게 백성들이 함께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기도하는 특별한 장소로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모이는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백성들과 교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낙성식이 끝나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한 번 당신의 약속을 확증하십니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때에도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인 성전에서 하나님을 찾으면 용서해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또 솔로몬이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순종하면 하나님은 언약을 끝까지 지켜 왕위가 견고하게 되어 왕조가 영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1-18). 하지만 만약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어겨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경배한다면 성전도 버리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삼겠다고 말씀하십니다(19-22). 

 

성전은 완성되었고, 하나님도 그곳에 임재하십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과 그 대표자인 솔로몬에게 언약을 갱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모이고 회개할때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면 그 택한 성전도 무너 뜨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성전에서 거하시고 백성들 가운데 계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임재의 약속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신실해야 할 언약적 관계 속에서 약속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성전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보증한다고 생각하고 회개하지 않고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떠났고 이방인과 같은 삶을 살며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전이 불타는 일이 생겼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참된 성전이 되시는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그분 안에서 지금도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하지만 옛 백성, 옛 성전과 연속성이 있습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새 백성인 교회도 언약적 신실함에 반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은혜로 얻은 구원에 탈락되는 일이 없겠지만, 언약에 신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일이고, 그에 따른 징계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후의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언약적 신실함은 필수적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신실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10일 (월요일) 역대하 6장


성전은 완성되었고, 성전에서 드릴 제사의 기구도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도 지극히 거룩한 곳인 지성소에 모셔졌습니다. 성전에는 구름이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이를 본 솔로몬은 하나님께 백성을 대표하여 기도하고 백성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예전에 시내산에서 캄캄한 구름 넘어 계셨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죽는 일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거하십니다. 그것은 더 큰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성전의 완성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는 언약의 성취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지 않고 곁에서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더 큰 은혜의 징표였기 때문이었습니다(1-11). 성전은 이제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과 함께 거하십니다. 이제 솔로몬은 자신 만든 단상 위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한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도록 간구합니다. 그 언약은 영원히 다윗의 왕조가 지속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16-17). 나아가 솔로몬은 어떤 죄 가운데서도 회개하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를 통해서 성전의 기능이 드러납니다. 어제 예배시간에 들었듯이 성전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이고(12, 22), 죄를 회개하고(22,24), 인생의 길을 배우는 장소(27), 고통을 토로하는 곳(28), 이방인을 위해 기도하는 곳(33),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솔로몬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이 계신 곳은 여전히 하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같은 곳입니다. 

 

이와 같이 성전은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이며 동시에 그곳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중보적인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셨을 때 이런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고, 인생의 길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늘도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하신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된 성전이 되심을 기억하고, 늘 예수님에 관한 책인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고통을 토로하며, 인생의 길을 배우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각종 교회의 모임을 통해서 함께 모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7월 9일 (주일) 역대하 5장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완성되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전쟁을 통해서 얻은 노획물들을 성전의 창고에 들여 놓음으로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성전도 완성 되었고, 제사를 드릴 기구도 마련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의 가장 중요한 것이 아직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성전의 기구입니다. 솔로몬은 다윗이 다윗 성에 모시고 왔던 언약궤를 이제 성전으로 모시고 오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장로들과 각 지파의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전체 회중의 모임을 엽니다. 마치 승리하신 왕을 맞이하러 온 백성이 모이는 것 같습니다. 일곱 째 달에는 나팔절과 대속죄일 그리고 장막절이 있는 달입니다. 이 절기들은 온 회중이 모여 죄를 용서받고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제 이 절기들을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장로들의 지시로 레위인들은 법궤를 매고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솔로몬 왕과 백성들은 제사를 드립니다. 그 양이 어마어마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고 죄를 해결하며 완전한 헌신을 제사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나팔절과 대속죄일 절기의 참된 의미가 실현됩니다. 언약궤는 그룹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성전에 임하게 됩니다. 언약궤를 매기 위한 작대기가 너무 길어서 지성소에서 성소로 삐져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에계시지만 메이지 않으십니다. 궤 안에는 두 돌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넣어둔 것으로 하나님은 성전에서 말씀으로 다스리는 분이시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 기초해서 관계 맺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님의 성전에서의 임재를 기뻐하며 감사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초막절 절기의 참된 의미가 실현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에 당신의 임재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이는 시내산에사 율법을 주시고 언약을 맺을 때 나타나신 이미지와 매우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때문에 제사장들 조차도 하나님을 섬기는데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께서 성전과 모든 과정을 받으셨다는 증표였습니다.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성전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이 아닙니다. 성전이 거룩한 것은 그곳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 하시고 책망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 성전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성전 자체가 거룩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성전이 성전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성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의 지체로서 우리 또한 성령이 거하는 전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죄를 지적해 주시고, 하나님이 좋아시는 일을 하도록 항상 인도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참된 구원자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께서 항상 그 안에 계시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이 넘칩니다. 

더욱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며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또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8일 (토요일) 역대하 4장

성전은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사에 필요한 기구들이 있어야 합니다. 기구들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먼저 성전 뜰에 놓는 기구들을 언급하고, 성전 안 성소에 놓을 기구들을 설명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제단을 언급합니다. 제단은 제물을 올리고 불을 사르는 곳입니다. 크기는20규빗은 8미터 정도되고 높이는 10규빗은 4미터쯤 됩니다. 4미터로 높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계단식 제단으로 보여집니다. ‘바다’라고하는 것은 바다와 같이 많은 물을 의미합니다. 지름이 4미터쯤되고 삼천 밧 (대략 6만 6천리터)의 물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 아래서 동서남북을 보고 있는 소열두 마리는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또 이 바다에서 물을 퍼서 놋으로 만든 물두멍(큰 대야) 열개에 담아 다섯 개씩 오른쪽과 왼쪽에 두어 그 물로 제물을 씻고 제사장도 몸을 씻습니다(1-6). 그리고 성전 안에 놓은 금 등잔대와 상의 숫자와 위치를 말하는데, 각각 10개로 5개씩 성소 좌우편에 둡니다. 그러면 성전안은 밝게 빛나고 상 위에 금 대접 10개씩 놓이고 그 위에 항상 빵이 놓여 있을 것입니다. 이는 참된 빛이시고 생명의 근원과 양식을 항상 주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매 안식일마다 제사장들은 등과 떡을 교체해야 했습니다. 교체하면서 반복적, 규칙적으로 그 등대의 의미와 떡의 의미를 되새겨야 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놋과 금으로 무엇을 만들었는지 말해줍니다. 놋과 관련된 일은 모두 후람이 맡았습니다. 그는 솔로몬에게 약속한대로 맡은 직무를 잘 마쳤습니다. 제사 때 사용할 솥과 부삽(숱과 재를 버리기 위한 용도)과 대접을 만들었고, 또 성전 기둥의 장식(석류), 받침, 물두멍, 바다, 열두 마리 소, 솥, 부삽, 고기 갈고리, 그릇 등을 빛나는 놋을 만들었습니다. 이어서 솔로몬은 금으로 만든 것들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금 제단, 상들, 등잔대, 등잔, 꽃(장식), 불집게, 주발, 부젓가락, 숫가락, 불 옮기는 그릇, 그리고 성전 문입니다(11-22). 

 

오늘 말씀에서도 솔로몬과 후람은 브살렐과 오홀리압 처럼, 성전 기구를 맡아서 제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전은 완성되었고, 그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제사의 도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상상하면 그 성전이 얼마나 빛으로 충만할 것인지 짐작이 됩니다. 놋도 반짝반짝 빛을 내고, 금도 빛을 냅니다. 성전 안에서는 등잔대에서 나오는 빛으로 환하게 밝을 것입니다. 역시 이 모든 것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어둠을 밝히고 어둠을 이기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을 봅니다(계4:12-20). 그분은 성전의 주인이자 제사장이자 빛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거룩한 성에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등불이 되십니다(계21:23-24). 그분은 우리의 빛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우리 또한 빛으로 부르셨습니다(마5:14, 요8:12). 빛은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어둠을 물리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멀리하고 거부합시다. 또 우리 주위에 있는 어둠의 세력, 어둠의문화, 어둠의 생각들을 예수님의 빛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을 향한 능력과 문화, 생각들로 변화시켜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7일 (금요일) 역대하 3장

오늘 말씀에서 솔로몬이 드디어 성전 건축을 시작하는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그 동안에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지 4년 2개월 2일 만에 건축이 시작됩니다.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터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장소가 굉장히 강조가 됩니다. 모리아 산은 옛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갔던 곳입니다. 그리고 이삭 대신 한 어린 양이 죽은 장소입니다(창22:2). 동시에 그곳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나타난 오르난의 타작 마당입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자신과 백성을 대신하여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대상22:1). 성전은 대속의 은혜가 있는 장소가 될 것임을 그 세워지는 장소가 보여줍니다. 

한 규빗은 약 45센티 정도입니다. 그래서 길이가 약 24미터, 너비가 약 8미터 높이가 48미터쯤 된다고 환산할 수 있습니다. 성전 안은 순금으로 덮여 화려하고 웅장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스러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르와임 금은 붉은 색 금으로 고급 금을 의미합니다. 그룹들은 천사들 중에서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과 거룩을 호위하는 천사들입니다. 이 그룹들을 새겨 넣는 것은 성전 안의 성소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기 위한 곳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곳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궁전입니다. 나아가 지극히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는 육백 달란트로 입혔다고 합니다. 육백 달란트는 23톤정도가 되니 엄청난 양의 금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금이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많은 금보다 훨씬 존귀한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또 그룹들의 형상을 새겨 만들어 금으로 입히고 날개가 그 지성소 이 끝과 저 끝에 닿도록 했습니다. 마치 천사가 언약궤를 호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휘장문에도 그룹을 실로 새겨 넣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스러움과 그 무게를 느끼게 해줍니다(8-14). 그리고 성전 입구에는 큰 기둥 둘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야긴과 보아스로 불렀습니다. 야긴은 ‘그가 세울 것이다(혹은 그가 세운다)’라는 의미이고,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며 항상 기억해야 할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성전과 나라를 세우시고 그분께만 능력과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15-17).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그곳은 희생제사 없이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보좌는 죄악된 인간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오직 대속의 은혜, 대속의 피를 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바쳐야만 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의 희생제사들은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은 훗날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흘리실 대속의 피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동물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구속 받은 자들 만이 그룹으로 둘러 쌓여 계신 영광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제물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내다보며 효력이 있는 것이지 짐승의 피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당신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14:6). 이 말씀은 영광 받으실 것,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앞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또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당당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0:19).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아갑니다. 오늘 하루도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하고 감사하며 기쁨으로 담대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갑시다. 또 매일 기쁨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6일 (목요일) 역대하 2장

솔로몬은 본격적으로 성전을 짓기 위해서 일꾼들을 세우고 나무가 유명한 두로의 왕에게 사절을 보내어 이전에 다윗에게 백향목을 준 것 같이 자신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번에는 다윗의 궁전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성전을 구별하여 드리고 또 자신의 왕궁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1-4). 여호와의 이름으로 구별하여 드린다는 것은 그 성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특히 ‘이름’이라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는 그 사람의 성품이나 성격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데,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백성들에게 당신을 알려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고 어떤 분인지 백성에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또 그곳은 예배의 장소로 사용될 것입니다(5). 성전은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기술자와 레바논 나무를 후람으로부터 요청합니다. 일꾼들에게 솔로몬은 밀가루와 보리 각각 이만 고르(1고르는 220리터)와 포도주와 기름 각각 이만 밧(1밧은 약 22리터)를 약속합니다(6-10). 이에 두로왕 후람은 솔로몬에게 답장하여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윗에게 솔로몬과 같은 지혜로운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특별히 그 지혜로 성전을 건축하는 것과 연결시켜 말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하나님과 백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후람은 단 지파의 여자들에게서 난 재주 있고 총명한 사람들을 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는 단지파 출신의 뛰어난 기술자로 이전에 모세 때에 성막과 기구를 만든 오홀리압의 자손입니다(출35:34). 또 후람은 나무를 구체적으로 배로 실어서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욥바로 보내겠다고 합니다(11-16). 이렇게 성전을 위한 준비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게 됩니다. 17-18절은 2절에서 언급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는 이방 사람들임을 알려줍니다. 이방인들도 성전 공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허락 된 것입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모든 백성들이 함께 성전을 짓는 공사에 투입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본격적인 성전 건축을 위한 솔로몬의 준비를 보게 됩니다. 솔로몬은 유다 지파로서 성막과 기구를 만드는 일을 했던 브살렐과 같은 지파입니다. 또 후람이 보낸 기술자도 단지파 출신으로 오홀리압의 후손입니다. 솔로몬과 후람이 보낸 사람은 새로운 브살렐과 오홀리압으로서 성전을 건축합니다.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은 지혜있는 사람들로 묘사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진 지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거하실 곳을 짓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거하시기에 부족한 분이시지만, 성전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걸어 다니는 참된 성전이자 참된 성전의 건축가로서 하나님의 임재와 지혜 자체이셨고, 바울과 아볼로는 지혜로운 건축가(고전3:10)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성전을 건축했듯이 신약의 교회에서도 유대인과 이방인 함께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갑니다(엡2:22). 하늘의 하늘들도 거하기 부족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안에 장막을 치시고 내주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복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를 말씀으로 바르게 세워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자신과 가정과 교회를 지혜로운 건축자로서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5일 (수요일) 역대하 1장

역대상 말씀에 이어서 역대하1 장은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이어 받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역대하에서 중요한 내용은 성전 건축과 이어지는 왕들의 행적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과 함께 하시며 그의 왕위가 견고하게 하셨고, 그와 함께하시며 창대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창대하게 하셨다는 말은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강력해졌고, 또 사회적으로 평온한, 평화를 가지고 왔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강력한 힘과 능력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았기에 온 회중과 함께 하나님을 제사하러 기브온 산당으로 갑니다. 비록 언약궤는 이미 예루살렘에서 다윗이 마련한 천막에 있지만, 옛적에 모세가 지은 하나님의 회막과 놋 제단은 기브온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그곳에서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왕이지만 제물을 대충 준비하지 않고 힘이 닿는 대로 준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날 밤에 꿈에 나타나셨고, 솔로몬에게 무엇을 줄지 말하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버지 다윗과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는데, 왕으로서 재판을 바르게 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직무를 바르게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왕으로서 백성을 공평하게 판단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율법을 따라서 다스릴 수 있도록 능력을 달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지혜와 지식은 1차적으로 세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잠9:10).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셨고 구하지 않은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셨습니다(1-13). 또 솔로몬은 병거와 마병을 모아 병거성과 예루살렘에도 두어 군사력도 강하게 하였고 은금을 흔하게 하여 경제적으로도 부강한 나라가 되게 했습니다(14-17). 

 

오늘 말씀은 솔로몬이 얼마나 강한 나라를 세웠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근원은 솔로몬의 개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께서 맡은 직무를 감당할 지혜와 지식을 주시며 또 더불어 구하지 않은 부와 명예도 주신 것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다스리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말씀을 깨닫고 바르게 실천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구했습니다. 그 지혜로 백성을 잘 다스렸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지혜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참된 지혜 자체이십니다(고전1:24,30).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말씀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고, 맡겨진 사명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실천하는 지혜와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의 기준은 예수님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지혜와 참된 왕으로서 어떻게 성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감당했는지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순종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기에 매일 아침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맡겨주신 학교와 직장과 가정에서 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 날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맡겨주신 삶을 말씀을 통해서 비추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바른 길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4일 (화요일) 역대상 29장

어제 말씀에 이어서 오늘도 다윗 왕의 온 백성을 향한 연설이 이어집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아직 어린 솔로몬이 성전을 잘 지을 수 있도록 많은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나아가 다윗은 당연히 준비해야 하는 것을 넘어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기 때문에 자신의 사유한 금과 은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 드렸다고 합니다. 그 금과 은으로 성전 벽에 입히고 장인들의 손을 통해서 만들 것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합니다(1-5).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초청합니다. 그러자 가문의 지도자들과 지파의 지도자들, 군대 지도자들, 그리고 고위 공직자들이 모두 성전 공사를 위해서 많은 금과 은, 놋과 철 등을 바치고 또 보석을 가진 자들은 게르손 사람 여히엘에게 주어 성전 창고에 두도록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드렸습니다. 그러자 다윗 왕도 기뻐했습니다(6-9). 이어서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러면서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비록 자신과 백성과 그 지도자들이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보석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이 필요하시기 때문에 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모든 권력도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11). 나아가 다윗은 ‘우리’라고 하면서 자신과 모든 백성들이 감사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것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다시 드린 것 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드린 금과 은보다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한 마음을 기뻐하신다고 고백합니다. 무엇보다 다시 솔로몬이 이런 물질이 아니라 정성된 마음으로 율법에 순종하며 성전을 완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12-19). 이어서 다윗은 온 회중에게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송하도록 하고, 제사를 많은 제물과 함께 드립니다. 기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에 무리는 크게 기뻐하고 여호와 앞에서 먹고 마셨다고 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먹고 마셨다’는 표현은 출애굽기 24장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언약이 체결된 후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날 기쁨과 감사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언약이 또 다시 새롭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더 깊어 진 것입니다.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왕위에 올랐고 다윗은 이스라엘을 40년간 통치하고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아주 평온하게 인도하시고 평생에 함께하셨다는 증거였습니다. 이제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습니다(20-30).

 

오늘 말씀에서는 다윗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전 공사를 위한 공적인 준비에 더하여 개인적인 헌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돌려드리는 것 뿐이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위한 개인적인 헌신을 하게 됩니다. 이런 헌신의 동기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는 심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서 충만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저 주신 것을 돌려 드린다는 겸손하고 하나님을 의존하며 영광을 돌리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렇게 헌신할 때 모두에게 기쁨이 있었습니다. 

참된 왕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고, 목숨도 하나님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기쁘게 순종하시고 헌신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그분의 지체인 교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즐거이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주일의 헌금을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드립니까? 헌금은 사랑과 감사와 기쁨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습관적인 행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감찰하십니다. 하나님께 헌신할 때 자원하며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아 와서 주신 것을 돌려 드린다는 믿음의 고백이 담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공동체에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셨으니 우리도 마땅히 모두 드리는 심정으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매일의 삶 속에서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주신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을 위해 사용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3일 (월요일) 역대상 28장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자신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제 자신이 세운 모든 영적, 정치적 지도자들을 다 불러 다시 한 번 이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임을 연설합니다. 특별히 이 일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시고 또 다윗의 아들들 중에서 솔로몬을 택하여서 친히 주도하신 일임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성전 건축은 단순히 좋은 건물 하나를 짓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술적인 필요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지어가야 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때문에 다윗이 다시 한번 모든 백성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언약을 갱신하고 솔로몬에게 다시 한번 언약을 지켰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과 저주에 대해서 설명합니다(1-10). 또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성전의 설계도를 솔로몬에게 넘겨 줍니다. 성전의 크기와 높이와 구조와 길이는 인간의 임의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설계도를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에서 사용할 모든 기구의 디자인도 지정해 주셨습니다. 성전과 그 안에 있는 그 어떤 물건도 사람이 임의로 고안해 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감을 통해서 다윗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 곧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다윗이 선지자를 통해서 받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솔로몬을 격려합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솔로몬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대담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떤 일을 진행할 때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떠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신다는 신실한 약속 때문입니다(20-21).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와 인간의 준비와 순종의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맡기실 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로 진행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 편에서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대비를 해야 합니다. 크게는 우리의 구원에 적용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안해도 되느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기도와 성찬을 통해서 주신 은혜와 구원을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 또 우리에게 맡겨주신 모든 일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상의 직업과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매일의 삶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7월 2일 (주일) 역대상 27장

오늘 말씀은 23장부터 시작된 다윗이 제사장과 레위인들과 관리들을 재정비하고 임명하는 마지막 부분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가문의 지도자와 군대 지휘관의 숫자를 파악한 것이 돋보입니다. 각 반을 2만 4천명을 묶고 지휘관을 세워 일 년에 한 달씩 복무를 하고 다시 일상의 직업으로 돌아오는 식입니다(1-15). 레위 지파를 제외한 모든 20세 이상의 남자들이 반을 편성하여 복무를 하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각 이스라엘 지파별로도 지도자를 세웁니다. 갓과 아셀이 생략되고 아론이 포함이 됩니다. 아론을 따로 한 지파처럼 언급하는 것은 포로기 후의 사람들이 아론의 후손, 곧 대제사장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20세 이하의 자손들의 숫자는 조사하지 않았는데, 너무 많았기 때문이고, 수효 조사의 목적이 전쟁에 나갈 만한 군사를 파악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재정비하는 자료는 다윗이 이전에 요압을 시켜서 군사의 숫자를 파악하도록 한 일입니다. 그 때는 자신의 교만함으로 조사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마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 자료를 가지고 바르게 사용합니다(16-24). 하나님은 실수를 통해서도 바르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어서 다윗은 왕의 창고를 맡은 사람들도 세우고 왕에게 속한 밭과 포도원과 과수원과 기름 창고와 소 떼와 양 떼를 맡을 관리도 세웁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많은 승리로 세금을 거두지 않을 만큼 재산이 풍부했기 때문에 이렇게 관리를 세워 잘 관리하는 것은 다윗 개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유익한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와 양은 왕이 제사를 드릴 때 바쳐야 할 정해진 제물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잘 관리한 것입니다(25-31). 또 다윗은 주변에 모사(adviser)를 두어서 모든 일에 독단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항상 신실한 자들과 함께 논의하는 왕이었습니다. 요압에게는 왕의 군대의 장관을 맡겼습니다(32-34). 이렇게 다윗은 모든 종교적 행정적인 정비를 마쳤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삶에 대해서 잘 관리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성전이 완성된 후의 일을 미리 예상하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고 준비했습니다. 예배적인 측면에서 잘 관리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나라를 든든하게 세우기 위해서 내적으로 잘 정비했습니다. 비록 자신의 실수로 가슴 아픈 일이 있었지만 그것을 딛고 바르게 자료를 사용하여 잘 정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도 예배를 중심으로 일상의 삶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잘 준비하고 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새로운 예배를 드리고 새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성전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우리의 거룩한 일상으로도 이어집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 물질, 지식 등을 잘 정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고 예배에 그 중심이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 예배와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정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7월 1일 (토요일) 역대상26장

제사장들과 레위인 찬양대를 재편성하는 것에 이어, 성전의 문을 지킬 사람들과 성전의 창고를 맡을 사람들을 세웁니다. 그들 또한 레위인들이 중심이 됩니다. 성전 시대에서 레위인들이 해야 하는 일들이 더 다양해 졌습니다. 문지기들은 성전의 출입을 통제하고 성전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역시 아무 가문에서나 섬기는 것이 아니라 레위 가문 중에서 고라의 가문 레위인들을 중에서 구별하여 세웁니다. 그들 중 오벧에돔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의 아들들은 모두 지도자가 되었고 강력하고 용맹스러운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고라 자손 중 62명이 문지기로 섬깁니다. 또 다른 레위 지파인 므라리의 자손 중에서 일부도(13명)도 문지기의 책임자가 됩니다. 역시 그들의 직무와 직무 장소를 배정할 때 제비를 뽑아서 세워집니다. 제비를 뽑는 것은 임의로 지키고 싶은 문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셔서 보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기호에 따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질서를 세웁니다. 성전은 동서남북에 문이 있어서 제비를 뽑아 섬길 문을 정했습니다. 그 중에서 동쪽 문에 매일 6명의 레위인들이 지키고 북쪽과 남쪽 문에는 매일 4명씩, 딸려있는 창고는 2명씩 지킵니다. 그리고 서쪽 문에는 뜰이 딸려 있었기 때문에 큰 길에 4명과 뜰에 두 사람이 지킵니다. 이 일을 고라 자손과 므라리 자손의 문지기들이 해야 했습니다(1-19). 또 나머지 레위 사람들 중에서 몇몇과 게르손 자손들이 성전의 창고와 성물 창고를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전의 창고는 백성이 드린 십일조나 예물 혹은 제사를 드릴 때 쓰는 물건들을 보관하던 창고였고, 성물 창고는 전쟁을 통해서 얻은 노획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것을 보관한 창고를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할 자손 중에서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의 일을 다스리는 관직과 재판관이 되었고, 헤브론 자손 중에 하사뱌와 그의 동족들은 요단 서쪽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여호와의 모든 일과 왕을 섬기는 일을 맡았습니다. 또 헤브론 자손 중에서 여리야와 그 자손들은 요단강 건너 동쪽 지파들을 주관하며 하나님의 일과 왕의 일을 지도 했습니다(29-32).

 

다윗은 성전을 짓기 전에 성전이 세워진 후에 성전에서 사역할 사람들과 그들의 직무를 제비 뽑아 공정하고 질서 있게 재배치합니다.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이전과는 다른 역할과 직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미리 그것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혼돈이 없도록 합니다. 먼저 성전 안에서 일을 규정하고 다음에 성전 밖의 일도 레위인들의 활동 범위에 속하는 것을 규정해 줍니다. 이는 먼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를 중심으로 레위인들의 활동을 시작으로 성전 밖에까지 흘러가야 함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시대에 다양한 활동을 레위인들이 맡게 되지만 그 가운데 순서와 질서가 있습니다.

교회의 참된 왕이신 예수님께서도 교회에 직분자들을 선물로 주셔서 해야 할 일들을 규정해 주시므로 혼돈을 막고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셨습니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는 말씀으로 성도들을 돌보고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직무도 새시대에 다양하게 공동체 가운데 실천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차적으로 말씀과 심방과 구제가 예배 가운데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직분자들의 직무가 예배를 중심으로 우리 삶에 구석구석에 닿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직분자들과 교회가 함께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부여한 교회의 사명을 순서와 질서를 잘 기억하며 감당하길 바랍니다. 특별히 변화하는 시대에 말씀을 중심으로 다양한 종류의 성도들에게 다양하게 예배와 삶 구석구석까지 섬기는 길들을 공적 예배를 중심으로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30일 (금요일) 역대상 25장

다윗은 레위인과 제사장을 재정비한 다음 군대 지휘관들과 더불어 앞으로 성전에서 신령한 노래를 부를 사람들을 재정비합니다. 그들은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과 그 아들들이 중심이 됩니다 그들은 앞에서 본 제사장들의 반열과 같이 모두 24반열, 곧 순서에 따라서 섬깁니다. 아삽의 아들들이 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아삽의 지휘 아래 왕의 명령을 따라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두둔의 아들들은 여두둔의 지휘 아래 수금을 연주하며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헤만의 아들들은 나팔을 부는 자들입니다. 헤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왕의 선견자라고 불립니다. 이 사람들은 왕의 지휘 아래 순서를 따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이들은 성전에서 제금(심벌즈)과 비파(현악기)와 수금(하프)과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왕은 이들을 큰 자나 작은 자나 제비를 뽑아 섬기게 함으로 모두가 질서 있게 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찬양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1절에서 ‘신령한 노래’말의 본래의 뜻은 ‘예언하다’는 뜻입니다. 성전 찬양대의 노랫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성전 찬양대의 책임자 중 한 명인 헤만은 하나님의 선견자라고 합니다. 선견자는 미리 보는 자, 곧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입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전달하는 것과 동일한 기능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 찬양대의 찬양 인도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 다윗 왕의 지위 아래 있습니다(6). 또 앞에서 본 것 같이 제비 뽑아 순서 대로 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말은 성전 찬양대가 찬양 할 때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왕의 감독을 받으며 질서를 따라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또 큰 자나 작은 자가 모두 찬양에 참여합니다. 찬양은 모든 백성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찬양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특히 참된 왕이시고 새언약의 중보자이시며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된 구속 사역을 노래하는 말씀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 너무 높거나 복잡한 곡조보다는 단순한 곡조로 모두가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편 찬송은 이런 조건들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비록 현대적인 곡조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다소 어색하지만 한 두 번 불러보면 쉽게 따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모여 찬송할 때 시편 찬송을 부를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만 불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시편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련된 찬송을 우리 모두가 불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찬송을 부릅시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노래를 부르는 오늘 하루가 됩시다. 아멘. 


6월 29일 (목요일) 역대상 24장

23장에서 레위인들을 재정비했다면 오늘 말씀은 레위인들 중에서 아론의 직계 후손들, 아론계 제사장들의 재정비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론의 자손 중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불로 향을 사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이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남은 형제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들을 대신해서 제사장직을 맡게 되어 다윗 때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다윗 때에 엘르아살의 자손 사독과 이다말 자손 아히멜렉을 중심으로 일을 맡겼습니다. 하지만 엘르아살의 자손 중에 직무를 맡을 지도자들이 이다말의 자손들 보다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무를 맡는데 있어서 제비를 뽑아 직무를 맡게 합니다. 동등하게 어떤 사람은 성전의 일을 주관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일을 주관하는 자가 나옵니다. 여기서 ‘성전의 일을 주관하는 자와 하나님의 일을 주관하는 자’는 분명치 않은데 먼저는 대제사장이 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혹은 단순히 제사장으로서 하는 일에 대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1-5). 여하튼 숫자가 많은 것에 차등을 두지 않도록 가족 단위로 제비 뽑아 섬기는 순서를 정했습니다. 그 일을 서기관 스마야가 맡았습니다. 공정을 위해서 공개적으로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 순서가 7-18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순서대로 성전에 들어가서 각각 15일씩 섬깁니다. 이런 순서는 예수님 시대까지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아버지 스가랴도 이 순서(반열)를 따라 성전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눅1:5). 이들은 옛날 아론에게 주어진 직무, 곧 '그 자손들과 함게 구별되어 몸을 성결케 하여 영원토록 지극히 거룩한 자가되어 여호와 앞에 분향하며 섬기며 영원토록 그 이름을 밭들어 축복'하는 일입니다(대상23:13). 이 일을 행하는 것이 비록 아론은 죽었지만 그 직무가 지속되도록 함으로 그를 돕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입니다(19). 다윗은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서 재정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레위인들 중에서 아직 임무를 배정 받지 못한 남은 자들도 제비 뽑아 직무를 맡겨 차등이 없이 직무를 맡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20-31)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로 다윗은 임의로 직무를 재정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례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할 때 차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머리 숫가 많다고 혹은 능력에 따라서 많이 맡기고 능력이 없다고 조금 맡기지 않았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일이 집중되도록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사역도 마찬가지 원칙이 적용됩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세우신 규례, 말씀이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편리를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원리를 따라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또 모든 사람이 함께 서로를 섬기고 교회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섬김만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직분자들이 해야 하는 일은 성도들이 지닌 은사가 교회에서 적절하고 질서 있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바른 질서 가운데 모두가 서로를 섬기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6월 28일 (수요일) 역대상 23장

성전을 위해 준비했던 다윗은 이제 나이가 많아 늙었습니다. 다윗이 나이가 많아 늙었다는 말은 다른 믿음의 조상들과 같이 평안한 노년을 맞이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게 그를 붙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고 성전을 건축하고 난 뒤에 변화하게 될 레위인들의 역할을 재조정하기 위해 모든 지도자들과 레위인들과 제사장을 모읍니다. 성전이 세우지기 이전에는 성막에 하나님의 궤가 있었고, 또 백성과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동하게 될 때 언약궤와 제사의 도구들, 성막의 부분들을 각기 담당하던 레위인들이 있었습니다. 게르손 자손들은 성막을 구성하는 커튼과 덮개와 줄들을 설치, 해체, 이동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고핫 자손들은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궤와 성소에 있는 떡상과 등잔대와 제단들과 봉사를 위해쓰는 기구들과 커튼 등을 운반하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또 므라리 자손들은 성막을 지탱하는 판자와 기둥과 받침과 말뚝과 줄 등을 설치하고 운반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민3:21-37).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머물러 계실 것입니다. 이에 레위인들의 성막을 돌보는 책임이 끝이 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위인들의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레위인들이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의 감독하에 성전이 수많은 일들을 맡게 합니다(24-32). 그들은 제사장들을 도와 성전과 뜰과 골방에서 섬기며 모든 거룩한 물건들(물두멍, 떡상, 등잔대, 향단, 언약궤 등)을 정결하게 하고 제사를 위해 사용할 무교전병(발효되지 않은 반죽으로 만든 얇은 팬케익)을 굽는 일과 저울과 자로 무게와 길이를 측정하거나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며 찬송을 드리고 절기 마다 드리는 번제를 위해서 항상 돕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성전이 완공된 후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직무를 주어지는 것과 더불어 그 만큼 성전에서는 지속적이고 많은 제사가 드려질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죄 용서와 은혜의 역사가 끊임 없이 풍성하게 지속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제 성전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전보다 더욱 풍성하고 활발하게 백성과 교제하게 될 것입니다. 포로기 후의 백성들은 이러한 더욱 풍성한 하나님과 교제를 사모하며 성전을 재건하는데 마음을 보았을 것이고, 또 성전에 완성되고 나서는 더욱더 하나님을 사모하며 예배가 풍성할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완벽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주일 공예배를 통해서 한 백성으로서 풍성하게 삼위 하나님과 교제할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의 제사를 드립니다(롬12:1-2).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풍성하게 하나님과 교제를 누립시다. 매 주일 예배를 통해서 풍성한 교제를 누리기 위해서 사모하시며 예배합시다. 또 이 세상을 본 받지 말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의 제사를 매일 드리며 하나님과 더욱 자주 많이 교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6월 27일 (화요일) 역대상 22장

다윗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많은 준비를 합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이방 사람들에게 돌을 다듬는 일(석수)을 시켜 돌을 준비하고 못을 만들 철, 놋, 백향목을 시돈과 두로에 수입해서 준비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솔로몬을 불러 반드시 성전을 하나님의 명성과 영광에 맞게 웅장하게 건축할 것을 부탁합니다. 솔로몬은 온순한 사람(평화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선택한 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고 평화를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친히 아버지와 같이 보살펴 주시고 영원한 왕위가 이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전하여 주고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백성을 바르게 다스리고 율법을 잘 지키도록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지켰을 때 주시는 언약적인 복을 상기시켜 줍니다(13). 또한 두려워하지 말고 성전을 건축할 것과 왕으로서 바르게 통치할 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금 십만 달란트(약 400만 kg)과 은 백만 달란트(약4천만 kg)와 놋과 철은 셀 수 없을 만큼 준비하였고, 또 나무들도 준비를 많이 했지만 솔로몬에게 이에 더하여 준비하라고 합니다(14). 또 장인들도 적절하게 잘 배치하여 일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16). 뿐만 아니라 다윗은 다른 모든 지도자들에게도 솔로몬을 도우라고 부탁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평화를 주신 것은 단지 먹고 놀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힘을 다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성전 건축)을 위한 것임을 상시키겨 줍니다. 다윗은 이렇게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많은 물질적인 준비와 인적 준비를 하고 모든 관련된 사람들을 독려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정당한 성전 건축자인 솔로몬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당시에 어렸기 때문에 성전을 당장은 건설할 수 없지만, 다윗이 죽은 후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다윗은 준비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자신이 준비한 것 뿐만 아니라 솔로몬도 준비한 것에 더 하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기억하고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이 일을 이루라고 합니다. 역대기가 기록될 당시에는 사실은 화려한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후에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두번째 성전을 짓고 있거나 지은 후일 것입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의 타당성과 의미를 다시 상기시켜주고 성전 건축이 시급한 과제임을 온 백성이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혹은 성전이 재건된 후라면 솔로몬 성전은 아니지만 이미 지어진 성전을 통해서 솔로몬이 지은 성전과 같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또 지도자는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율법대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포로기 후 백성들은 성전 건축이라는 공동의 과업을 함께 수행할 때, 또 성전을 중심으로 모일 때 이스라엘의 통일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배웠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성전 건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참된 성전이자 왕이셨고, 또 그분의 지체들인 성도들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고전3:16, 6:19, 엡2:21). 성도들이 걸어 다니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 성전의 재료는 은과 금, 백향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또 신자들의 순정입니다. 말씀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이것은 항상 성도에게 시급한 과제입니다. 미루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동시에 이것은 많은 준비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로 성도들을 모으십니다. 서로가 함께 말씀에 순종하고 서로 돌보아주고 보듬어주며 서로가 죄로 부터 지켜주시고, 서로 기도하며 독려하므로 성전이 세워집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거룩한 성전임을 잊지 말고 순종함으로성전을 지속적으로 건축하고 또 서로 힘을 모아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며 성전을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26일 (월요일) 역대상 21장

오늘 말씀은 다윗이 지닌 군사의 숫자를 계수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큰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쟁의 승리가 군사력에 달려있다는 것을 신뢰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압도 이 일을 좋아하지 않아 레위와 베냐민의 숫자를 넣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마땅히 여기지 않으셔서 이스라엘을 치십니다. 다윗은 이제 그것을 뉘우칩니다(1-8). 하나님께서 책망하고 다윗이 뉘우치는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자주 하나님의 뜻을 묻던 선지자 갓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 일로 삼년 기근, 석달 동안 패배, 여호와의 칼 곧 전염병 중에서 어떤 벌을 내릴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다윗은 사람의 손에 빠지는 일보다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손에 빠지겠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에 전염병을 내려 칠만명이 죽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윗의 말대로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재앙을 거두십니다. 재앙을 내리던 하나님의 천사는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서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를 보았고 장로들과 함께 굵은 베를 입고 땅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니 자신과 자신의 집을 치시고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시길 간구합니다. 여호와의 천사는 갓에게 명령하여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제단을 쌓으라고 하고 다윗은 그대로 합니다. 다윗은 충분한 값을 치르고 타작 마당을 사서 그곳에 제단을 쌓습니다. 그곳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를 받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이에 재앙은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질 것입니다(18-22:1). 성전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위에 세워질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승리에 도취되어 잠시 어리석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 빠지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을 멈추시고 다윗에게 친히 성전이 세워질 곳을 알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징계하셨지만 긍휼을 베푸셨고, 성전을 어디에 세워야 할지 알려주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셔서 징계를 통해서 다윗을 회개하도록 하셨고, 이전에 성전을 지어 영원히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더 구체화하셨습니다. 다윗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사용하셨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더욱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죄에 빠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긍휼과 자비이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나아오는 자들에게 죄에 대한 징계를 내리실지언정, 그 가운데 자비를 베푸시고 버리지 않으시며 그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여전히 더욱 강하게 이끌어 가십니다. 징계는 죄에 대한 값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아버지의 훈계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손을 내밀어 끌어주고 붙드시고 더욱 자비하심을 보여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는 바울의 말은 그만큼 하나님의 죄 용서하시는 은혜가 큼을 보여줍니다. 넘어진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회개할 때 더욱 그 약속을 구체화시키시고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25일 (주일) 역대상 20장

오늘 말씀은 요압이 암몬을 완전히 정복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사무엘하 11장에서는 다윗이 이 때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음을 기록하고 있지만 역대기 기자는 생략합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다윗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승리를 통해서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하는 것에 더 초점을 줍니다. 기록하지 않아도 독자들은 이미 다윗의 허물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물 있는 다윗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 기자는 다시 한번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초점은 다윗의 공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과 함께한 용사들이 용맹스럽게 블레셋의 덩치가 큰 장군들을 죽인 것을 기록합니다. 이 전투로 승리의 공은 다윗이 가져가겠지만 결국 다윗은 혼자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 있던 용맹스럽고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있었던 것입니다(4-8). 비록 적들은 거인족으로 덩치도 크고 그 무기도 가공할 만한 무기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원수들로서 반드시 제압되어져야 할 적들입니다. 다윗의 용사들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가능했습니다. 다윗의 편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전재에 나아갈 때 승리를 주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여 적들과 싸워 이긴 것을 기록합니다. 비록 적들이 아무리 강해 보이고 강한 무기를 가졌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싸울 때 승리를 얻게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강하고 가공할 만한 무기로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 해올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며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에는 온갖 편리함과 안락함으로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만듭니다. 정말 강력하여 안 넘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에 더 관심을 가지며 물리쳐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24일 (토요일) 역대상 19장

오늘 말씀은 다윗이 암몬 자손들과 치른 전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을 때 다윗은 조문을 위해 사절단을 보냅니다. 하지만 하눈과 그의 참모들은 다윗의 호의를 왜곡하고 사절단들의 옷을 엉덩이가 들어나 보이게 자르고 수염도 잘라 돌려 보냅니다. 이것은 다윗에 대한 수치와 모욕이었습니다(1-5). 하지만 다윗은 먼저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인내합니다. 하지만 암몬 자손들은 다윗의 심기를 건드린 줄 알고 아직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아람나하라임과 아람마아가와 소바에 무기를 빌리고 마아가 왕과 군대를 용병으로 기용합니다(6-7). 암몬과 연합군이 메드바에 진을 치자 다윗도 요압과 온 군사들을 보내어 싸우게 합니다. 요압은 적진을 보고 무리 중에서 선발된 병사와 함께 아람을 대항하여 진을 치고 나머지 군사들은 동생 아비새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두 무리와 싸울 때 어느 한 쪽이 힘이 부치면 다른 한 쪽이 도와 주도록 합니다. 또 요압은 아우와 군사들을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백성과 성읍을 위해서 힘을 내자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 전쟁을 맡깁니다. 결국 요압은 아람 사람들을 물리쳤고, 후퇴하는 아람 사람들을 보고 암몬 자손들과 연합군도 후퇴하며 성읍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 있는 아람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에 하닷에셀의 군대사령관 소박이 지원군을 이끌고 진을 칩니다.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나아가 싸워 승리를 거둡니다. 하닷에셀은 이스라엘에게 패하였고 다윗과 평화의 관계를 맺고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기를 원치 않았습니다(8-19).

 

오늘 말씀은 또 다시 다윗의 업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승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다윗 뿐만 아니라 요압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울 때 승리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왕이기 때문에 그의 편이 되시고 승리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위한 싸움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를 주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게 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왕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고 살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실현되고 있습니다(눅 17:21). 또 우리의 삶 속에서 다스림에 순종하며 살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확장 됩니다. 이런 삶은 특정한 직분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약속이자 명령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우리를 통해서 우리 주변에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6월 23일 (금요일) 역대상 18장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은 후에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아냅니다. 블레셋은 사울의 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던 지중해 해변에 터를 두고 있던 민족이었습니다. 또 모압을 쳐서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던 소바도 쳐서 무찌르고 소바를 도우러 온 아람 사람들도 쳐서 이깁니다. 다윗은 소바의 군인들을 무장해제 시킵니다. 또 아람에는 수비대를 두어서 반역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전쟁을 통해서 얻은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이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1-8). 하맛 왕은 다윗이 원수인 소바 왕을 무찌르자 다윗에게 스스로 복종하며 조공을 바칩니다. 다윗은 그것도 하나님께 바칩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에돔도 물리칩니다. 다윗은 역시 에돔에도 수비대를 두어서 관리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도록 하셨습니다(9-13). 나아가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며 적절한 인재들을 잘 배치하여 내부적으로도 잘 다스립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바르게 백성을 섬기는 왕이었습니다. 그런 왕이 섬길 때 나라는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튼튼하게 세워져 갑니다. 

 

다윗의 승리의 비결은 그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이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어디로 가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보다 더 탁월하게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그래서 승리의 삶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순종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삶을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지만 실제적인 싸움은 다윗과 군사들이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윗보다 더욱 더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승리하는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6월 22일 (목요일) 역대상 17장

오늘 말씀은 사무엘하 7장과 거의 동일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궁도 완공하고 하나님의 궤를 장막으로 모시고 오는 것도 이미 완료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보다 위대하시고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신보다 못한 곳에 거하시고 계신다는 것에 큰 가책을 느꼈습니다. 이에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집(성전)을 지어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을 나단 선지자에게 물었더니 나단도 그것을 옳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당신을 위한 집을 짓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서 집(왕조)를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전은 그의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통해서 지어질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 중에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에는 부적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른 주변 나라로부터 구원하시고 평화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다윗은 그 일을 완수했습니다 (삼하7:1). 하지만 전쟁을 통해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하지 못합니다(대상28:3). 대신에 그의 아들인 평화의 왕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짓는 것 자체를 반대하신 것은 아닙니다. 단지 다윗이 성전을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히려 다윗에게 그의 자손들의 왕조가 끊어지지 않고 다윗의 자손을 통한 하나님의 왕국은 끊이지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1-15). ‘영원히’라는 말을 반복하시며 그 언약의 확실성과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그 약속을 황송하게 여겼지만 또한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지켜 주시도록 감사하며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 복을 영원히 누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16-27).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바벨론에서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왕조가 끊어진 것 같이 느꼈을 것입니다. 영원한 언약이 깨어진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약속의 땅으로 왔고 왕 같은 지도자도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다윗의 왕조를 이어갈 참된 왕을 기다립니다. 그분이 바로 메시야입니다. 다윗의 왕조를 이어가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회복시킬 바로 그 다윗의 후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분이시라고 증거를 합니다. 마태는 다윗의 왕조를 영원히 견고하게 할 다윗의 후손으로서 족보를 기록하고(마1:1) 그분이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눅2:4-7).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왕국을 영원히 통치할 참된 왕이십니다. 그분은 죄를 정복하시고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영원하고 끝이 없는 나라이며 저와 여러분은 그 나라의 영원한 백성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 나라에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시고 믿으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백성으로서, 자녀로서 축복과 보호와 다스림을 받으며 날마다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6월 21일 (수요일) 역대상 16장

성막을 완성하고 다윗은 그곳에 언약궤를 모셔오는데 성공합니다. 이에 감사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전적인 헌신을 의미하고 화목제는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고 화목하게 되어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제사입니다. 또 번제는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바치라고 하신 제사이기도 합니다. 이제 무너진 예배가 회복되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다윗은 감사와 전적인 헌신과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과 평화를 얻습니다. 그리고 온 백성에게 축복하고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므로 감사와 기쁨을 표현합니다(1-3). 나아가 다윗은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도록 아삽을 찬송의 지도자로 세웁니다. 다른 악기를 타는 자들도 세우고 나팔을 불어 기쁨을 표현하도록 합니다(4-6). 또 그 날에 다윗은 아삽과 그의 형제들을 예루살렘에 음악맡은 자들로 세웁니다. 그리고 오벧에돔과 그의 형제들을과 여두둔의 아들 오벧에돔과 형제들, 그리고 사독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에게 기브온 산당에서 번제를 드리고 율법을 가르치도록 세웁니다(37-43). 기브온 산당이 커서 성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그곳에서 더 많은 백성들이 제사를 그곳에서 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노래를 만들어 줍니다(7-36). 이 시는 세부적인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시편 96편(23-33절)과 동일합니다. 또 34절-36절은 시편106:1/ 107:1/ 118:1,29/136편에서 후렴구처럼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서 감사 찬송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찬송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언약에 신실함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찬송이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시편은 감사와 기쁨과 찬송와 탄식을 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주신 찬송가입니다. 자주 시편을 묵상하며 부르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참된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그리스도의 피로 당신의 새 백성 삼으신 은혜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늘 생각하고 감사하며 기쁨으로 그분을 예배하고 찬송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20일 (화요일) 역대상 15장

다윗은 자신의 성을 지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시 모시고 오기 위해서 준비를 합니다. 그는 장막을 준비했습니다. 또 왜 실패했는지 깨달았습니다.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1-2, 참조. 민3장). 이에 다윗은 레위지파의 모든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백성을 모읍니다. 다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오고자 합니다. 다윗은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레위인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질서있게 행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자신의 실패의 원인을 알았습니다(13-15). 뿐만 아니라 다윗은 레위의 지도자들에게 노래하는 자들을 세우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을 세웠습니다.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도 레위인들을 중에서 특별히 선별했던 것입니다. 예배의 일부를 맡은 자들을 아무나 뽑지 않았습니다(16-24). 왕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그의 일과 예배를 맡은 사람들의 역할과 권위가 구별되었습니다. 이제 다윗과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이 가서 여호와의 연약궤를 즐겁게 메고 옵니다. 하나님의 방식에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셔서 일이 순조롭게 진행이 됩니다. 

 

이에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수송아지와 숫양은 가장 고급의 제물입니다. 일곱 마리씩 바친 것은 완전하고 온전하게 바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7’이라는 숫자는 거룩함과 완전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온전한 감사의 제물을 마친 것입니다. 감사의 제목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그분을 섬길 때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원하신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에 기쁨이 넘쳐 이스라엘 온 무리는 인도자와 악기 연주에 맞춰 힘차게 찬송을 부릅니다(25-28). 하지만 이 예배에 함께 못하는 한 사람, 미갈이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왕답지 않은 모습을 보고 업신여겼습니다(29). 다윗은 하나님께서 참된 왕이시기 때문에 그 왕이 오시는 것에 기뻐했지만, 미갈의 왕은 다윗이었고, 그녀가 생각하는 왕은 백성을 근엄함으로 다스리는 이방적인 왕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가 석 달 동안 선한 일을 마음에 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실패한 것을 다시 회복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예배를 하나님의 방식으로 드리는데 실패한 다윗은 다시 말씀을 통해서 실패의 원인을 알고 바르게 섬기게 됩니다. 그럴 때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배를 섬기는 자들을 레위인들로만 구성합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제사와 관련된 모든 일을 레위인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모두 그것에 참여하고 함께 기쁨을 누립니다. 찬양은 온 회중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공적인 예배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성가대와 악기의 역할은 온 회중이 함께 감사와 기쁨을 표현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이지 성가대만 찬송하고 온 회중이 지켜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배의 참석자는 구경꾼이 아니라 주체자입니다. 단지 구경꾼으로 있는 사람이 미갈입니다. 예배에 함께 하지 않고 단지 지켜 보는 사람은 예배의 유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매주일 드리는 예배의 구경꾼이 되지 마시고 함께 모든 예배 순서에 참여합시다. 한 순서도 놓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힘을 다해 찬송하고 마음 모아 기도함으로 참여합시다. 그러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매주일 예배마다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19일 (월요일) 역대상 14장

오늘 말씀은 언약궤를 모시고 오는 것에 실패 한 후에 다윗의 번성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두로 왕 히람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다윗이 그만큼 두로 왕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역대기 저자도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았다는 것을 다윗도 알았고 그의 나라가 번성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또 아들들을 나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주로 대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누릴 자녀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기 저자는 이전에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에 섬겼던 블레셋이 다윗을 대적하러 나와 하나님께서 지시한대로 싸워 승리를 거뒀다는 기사를 기록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에 하나님은 다윗보다 앞서 싸우십니다. 결과적으로 다윗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지고 하나님께서는 주변 나라들이 다윗을 두려워 하도록 했습니다(8-17). 이것은 하나님께서 순종할 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언약의 복들이었습니다. 

 

언약궤를 모셔오는 일에 실패한 후에 다윗의 이런 모습을 다룸으로써 저자는 다시 한 번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 지 보여줍니다. 또 다윗의 중심은 온전히 하나님을 향했고, 그가 언약궤를 모셔오고자 하는 것이 바른 것임을 확증해 줍니다. 언약궤 운반의 첫번째 실패가 바로 온전히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임을 다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신실하다면 하나님께서 약속 하신 축복을 주십니다. 때로 우리의 상황이 그렇지 않게 느껴질 때 우리의 삶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하다면 어려운 상황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순종하는 자들을 고통 속에 영원히 두지 않으시고 건지시며 가장 적절할 때 역사하셔서 눈물을 닦으시고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아가며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6월 18일 (주일) 역대상 13장

오늘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시온 성으로 모시고 오고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지휘관들과 함께 의논했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온 회중을 모아 그것에 동의를 구합니다. 모든 회중은 그것을 좋게 여겼고 다윗은 온 회중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 올립니다. 온 회중을 이렇게 모았다는 것은 함께 예배하기 위해서 불러 모은 것입니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회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모든 성도들이 동의 한 것입니다. 다윗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고 가면서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가다가 기돈의 타작 마당에서 소들이 놀라서 뛰어 언약궤가 떨어질 뻔 했습니다. 그것을 잡으려고 했던 웃사는 언약궤를 잡자마자 그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 날에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고 오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임시로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둡니다.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십니다. 이것은 다윗이 언약궤를 모시고 와서 예배를 회복하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가장 먼저 참된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오려고 하는 바른 의도로 계획을 세웁니다. 사울의 시대동안 언약궤 앞에서 예배하지 못했던 온 회중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반드시 레위인 중에서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어야 합니다. 다윗은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당연한 것입니다. 누구도 언약궤에 손을 대어서는 안됩니다. 포로기 후에 돌아온 백성들은 다시 한 번 그 의도가 좋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예배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멋지고 화려한 예배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드렸는지 보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르게 드렸는지 더 관심있게 보십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예배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드리는 예배인지 말씀을 통해서 점검해야 합니다. 예배 순서 하나 하나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의식하며 참여해야 합니다. 오늘 주일 예배에 어떠한 마음으로 참여했는지 살펴 보고 예배의 회복에 한 마음으로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이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17일 (토요일) 역대상 12장

오늘 말씀은 시간 상으로는 11장 이전입니다. 사울이 살아 있을 때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다윗은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도 이미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셨다는 것을 알고 따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보여줍니다. 특히 사울과 같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서 다윗을 따른 자들을 가장 먼저 다룹니다. 물론 대다수의 베냐민 지파는 사울을 지지했습니다. 소수가 다윗을 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가 강조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혈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활을 잘 쏘고 자유자재로 물매를 던지는 싸움에 익숙한 자들입니다(1-7). 갓 지파의 일부도 다윗을 추종했습니다. 이들 또한 모두 용사로서 창과 방배를 익숙하게 쓰는 싸움에 익숙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윗 민병대의 지휘관들이 됩니다(8-15). 베냐민과 유다 자손들이 먼저 다윗이 숨어있는 요새에 나왔을 때 다윗은 그들에게 화평의 언약을 맺도록 합니다. 다윗 편에 선 베냐민과 유다 자손을 대표하여 아마새에게 성령이 임하여 다윗과 평화의 약속을 맺습니다. 이들이 다윗에게 나아온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 편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들을 받아들이고 역시 지휘관으로 삼았습니다(16-18). 또 시간이 흘러 다윗이 블레셋 가드 왕의 부하가 되어 사울과 전쟁하려고 할 때 므낫세 지파에서 다윗에게 돌아 온 자들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다른 블레셋 왕들의 반대로 사울과 싸우지 않고 다윗은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옵니다. 그 때 더 많은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돌아옵니다. 날마다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군대와 같은 큰 군대를 이룹니다(19-22).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헤브론에서 남쪽 지역의 왕이 된 다윗에게 여호와의 말씀대로 나라를 돌리려고 하는 모든 지파 출신의 사람들의 명단을 열거합니다. 유다, 시므온, 레위, 베냐민, 에브라임, 므낫세 반 지파, 잇사갈, 스불론, 납달리, 단, 아셀, 르우벤, 갓 모든 지파에서 싸움에 능한 장수들이 다윗에게 나아왔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자 왔고, 남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 한 마음으로 다윗을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에 온 이스라엘은 다윗을 왕으로 모시는데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즐기고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먼 곳에서 왔든 가까운 곳에서 왔든 음식과 소와 양을 많이 가지고 왔기 때문입니다. 한 마음으로 큰 잔치가 삼일 동안 열렸습니다(23-40). 

 

온 이스라엘의 마음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데 모아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 주인을 섬기는데 모아졌습니다. 그래서 큰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고, 온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 교회의 머리, 교회의 주님으로 주셨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데에 온 세상의 교회는 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향한 헌신과 서로를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한 주님을 섬긴다는 것에 마음이 모여야 합니다. 

교회는 매우 다양한 인종과 출신과 배경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묶는 것은 바로 한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는 비결은 한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마음을 모두 가지는 것입니다. 같은 주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양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 됨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주님을 섬기는데 한 마음이 되어 주님과 함께 즐거워하며 주님과 서로를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16일 (금요일) 역대상 11장

사울이 죽자 온 이스라엘은 당시 헤브론에 있던 다윗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을 왕으로 택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온 이스라엘과 함께 여부스로 가서 그 성을 쳐서 함락하고 그곳을 수도로 삼습니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 곧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점점 강해졌습니다(1-9).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지속적으로 그 땅의 주민들을 쫓아 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는 많은 용사들, 곧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역대기 저자는 다윗과 함께 이방 백성을 좇아내는 일에 함께 한 용사들을 기록합니다. 가장 먼저 소개 되는 사람이 학몬의 아들 야소브암입니다. 다윗과 함께 초창기에 함께 했던 30명 중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는 창을 사용하여 삼백명을 죽인 강한 용사였습니다. 도도와 엘르아살도 함께 했습니다.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밭을 지키기 위해서 다윗과 함께 싸웠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구원하셨습니다(10-14). 그들은 또한 블레셋과 싸울 때 다윗이 그의 고향인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마시고 싶어하자 적들을 뚫고 우물물을 떠 온 충성된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부어드립니다.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엄청난 헌신과 사랑을 보여줍니다(15-19). 이어서 나오는 우두머리들도 다윗을 지지하고 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이루어지는 다윗의 왕위를 열렬히 지지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름 자체보다는 이러한 명단들을 분명히 제시함으로 다윗의 왕권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일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20-47). 이는 다윗이 왕으로서 해야 할 직무의 성격도 보여줍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해서 이들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동역자로서 함께 하나님의 왕국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맡겨진 사명에 온 이스라엘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교회는 영웅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한 사람으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직분자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그 직분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단적으로 사람을 세우지 않으시고, 청중들의 의견을 투표를 통해서 반영합니다. 우리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서 투표를 통해 직분자를 세우시고, 임직하게 하셔서 온 교회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힘껏 도와 하나님의 다스림이 교회와 사회와 이 땅 전반에 미치도록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옆의 사람들을 동역자로 주셨습니다. 함께 힘을 북돋아주며 서로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받아주며 항상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교회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15일 (목요일) 역대상 10장

오늘 말씀은 초대 왕 사울 왕과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족보의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 본격적으로 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 합니다. 사울은 초대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는 길보아 산에서 전투 중에 죽게 되는데, 그의 죽음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을 모두 다룹니다. 특히 역대기 저자는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그의 온 집안이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1-6). 하지만 사실상 사울의 온 집안이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손자 므비보셋이 있기 때문입니다. 역대기 저자는 약간 과장 되게 온 집안이 함께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장은 사실상 사울의 집안에서 사울을 이어 왕이 될 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사울이 죽은 후에 어떻게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머리를 그들의 신인 다곤 신전에 달아 놨는지를 기록하여 그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줍니다. 다행히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사울의 시체와 아들들의 시체를 가지고 장사하고 일주일동안 금식합니다. 역대기 저자는 이러한 사울의 비참한 최후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않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이기로 하셨고 그의 나라를 다윗에게 주었다고 합니다(7-14). 이러한 일련의 평가들은 다시 한 번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지 않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불성실할 때 심판하신다는 것과 그 심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셔서 보살펴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또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이 많은 분이시기 때문에 사울이 실패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윗 왕을 준비시켜 나라가 유지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참된 왕 예수님을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붙드십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것은 하나님께 불성실할 경우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건 간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성실하게 순종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순종을 요청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말씀에 성실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6월 14일 (수요일) 역대상 9장

온 이스라엘이 그 족보대로 계수가 되었습니다. 2장에서 8장까지 조상들과 포로기 후에 돌아온 자들의 족보까지 대강을 살폈습니다. 오늘 말씀은 포로 생활 후 고향으로 돌아온 포로 귀환 공동체의 족보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로잡혀 간 것을 기록한 후에(1-2) 돌아와 예루살렘에 거주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선조들이 바벨론에 잡혀간 것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때문임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언급합니다(1). 하지만 그들은 돌아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그들의 범죄로 인해서 버린 것이 아닙니다. 돌아온 사람을 분명하게 기록하여 놓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포로 귀환기를 다루는 에스라와 느헤미야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에 돌아 왔을 때 그곳은 비어 있는 곳이 아니라 산발랏과 같은 이스라엘이 재건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방해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구별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이 거주한다고 밝히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에 온 이스라엘 지파가 살고 있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왜냐하면 포로기 전 유다와 베냐민은 남 유다 왕국을,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북 이스라엘 왕국을 대표했던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나뉘어져 있던 그들이 이제는 예루살렘에 함께 거하며 함께 민족과 성전을 재건하고 적들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숫자도 정확하게 956명으로 기록해 놓습니다. 

나아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족보도 정확하게 기록해 놓습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가 아니거나 이방인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족보에 기록되지 않은 제사장들을 부정하게 여겨 직무에서 배제했습니다(스2:62, 느7:64). 특히 오늘 말씀을 보면 이름만 기록하지 않고 정확하게 맡은 직무와 책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그 하위 종족별로 주어진 구역을 지키는 것과 주어진 직분과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맡은 직무와 책임을 다해야 했습니다(14-34).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되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어지는 기록에서는 이제 왕들의 족보에 따라서 역대 왕들에 대해 언급되기 시작합니다. 그 시작이 사울 왕입니다. 그 또한 이전에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하나님이 택한 왕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왕의 도시 예루살렘이 재건의 중심임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귀환한 포로 공동체의 중심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온 이스라엘의 중심이자 새 출발점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은 특권이자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그들이 맡은 직무에도 충성을 다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참된 성전에서 참된 왕을 모시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자 새 출발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터전과 사역의 터전은 세상이지만 교회는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중심이 되어야 하고 늘 새롭게 출발되는 새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그 어떤 것도 끊을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가 안전하듯이 주 예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우리는 안전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책임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에 성실하게 나아와야 하며 교회 안에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맡은 바 사명을 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를 믿는 사람들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나라와 교회는 더욱 새로워지고 더욱 강건해 집니다. 우리 평생에 주의 백성으로서 주어진 특권을 누리고 책임 또한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13일 (화요일) 역대상 8장

오늘 말씀은 베냐민의 두번째 족보 입니다. 앞에서(7:6-12) 간략하게 언급된 베냐민의 족보가 다시 등장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보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보충이 있느냐 하면 바로 이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족보에서 주목할 점은 베냐민의 후손들이 모압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입니다(8). 이는 다윗이 모압 여인 룻의 후손으로 나오게 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합니다. 뿐만 아니라 베냐민 자손의 브라아와 세마는 가드 주민들을 쫓아 냈다고 합니다. 가드는 블레셋의 한 지역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적이었습니다. 그들을 쫓아냈다는 것은 베냐민 지파의 강력함을 보여줍니다. 또 베냐민 자손들 중 예루살렘에서 거주하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은 본래 유다 지파의 땅입니다. 하지만 포로기 후에 돌아온 사람들 중에서 지도자들과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몇몇이 예루살렘에 제비 뽑아 머무르게 했는데 (느11:3), 그 때 남은 자들입니다(참고. 9:8). 그들은 백성들 중에서 10분의 1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재건하고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사울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사울은 기브온의 조상의 후손이었습니다. 기브온은 산악 지역으로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었습니다. 높은 곳에 세워진 마을이기 때문에 그곳에 큰 산당이 있었고 그곳에서 솔로몬이 유명한 일천 번제를 드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족보는 사울 이후에 13세대를 보여줍니다. 이는 포로 시대 초기입니다. 이런 사울 가문의 족보는 실패한 왕 사울의 자손들이라도 포로시대를 마감하고 다시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주역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은 베냐민 자손의 족보입니다. 특히 사울 왕의 족보가 강조가 됩니다. 이들은 더 이상 왕족이 아닙니다. 실패한 왕의 후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한 이스라엘의 한 구성원이 됩니다. 비록 실패한 왕의 후손들이지만 포로기 후에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이스라엘로 돌아온 믿음의 백성들입니다. 특히 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적으로부터 지키는데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과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가 중요 합니다. 누구의 후손인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재 자신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12일 (월요일) 역대상 7장

6월 11일 (주일) 역대상 6장

오늘 말씀은 레위의 족보입니다.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가 있는데, 그핫을 먼저 소개합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모세와 아론이 속한 종족이기 때문입니다. 또 아론의 자손들은 그의 뒤를 이어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어 섬겼습니다. 그 족보가 3절에서 15절까지 소개됩니다. 이어서 게르손의 자손들이 소개가 되는데, 그 지파에서도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의 중요성 때문에 그핫이 먼저 소개가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언약궤가 성전에 안전하게 안치 되기 전과 후에 찬송을 맡은 자도 소개가 됩니다. 성전에서 찬송을 맡은 사람들도 모두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만이 대표적인데 그핫의 후손으로 역시 사무엘의 후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헤만이 혼자서 그 일을 다 감당한 것은 아니고 그의 형제(친형제는 아님) 아삽와 에단이 그의 오른쪽과 왼쪽에 함께 있습니다. 아삽은 므라리의 후손으로 합창단의 악장이면서 언약궤 앞에서 제금을 켜는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또한 시편 중 열 두편을 작시했습니다(50,78-83편). 또 에단은 므라리 지파 출신으로 므라리는 성전에서 장막의 모든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48). 다시 짧게 아론의 후손, 곧 대제사장의 족보를 간단하게 소개됩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지만 분명하게 구별된 직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므라리에 속한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 장막의 모든 일을 맡았고, 헤만을 중심으로 아삽과 에단은 노래하는 일을 맡았고, 아론의 자손들, 곧 대제사장들은 번제단과 향단 위에 분향하며 지성소의 모든 일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일을 ‘계열대로(32)’ 곧 질서정연하게 했습니다. 

 

이어서 레위 지파가 분배 받은 성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54-81). 레위인들은 제사와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 따로 땅을 분배 받지 않고 각 지파에 들어가 성읍과 초원만 받습니다(수21:1-3). ‘사방 지계’라는 말은 레위 지파의 거처가 이스라엘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핫 자손 중에서 아론의 자손인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에게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는 도피성 헤브론을 비롯하여 13 성읍이 주어집니다. 나머지 그핫 자손에게는 므낫세 반 지파에서 10성읍이 주어지고, 또 게르손 자손에게는 잇사갈과 아셀과 납달리, 므낫세 반 지파에서 13 성읍이, 므라리 자손에게는 르우벤과 스불 지파 중에서 12 성읍이 주어집니다(54-65). 총합 48개의 성읍이 레위 자손들에게 주어집니다. 이어지는 66-81절은 이미 주어진 성읍의 보충 설명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레위 지파 자손들 중에서 그 역할과 직무가 다양했지만 질서 있게 유지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레위 지파에게 거주할 곳을 주기 위해서 모든 지파가 부담했던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포로기 후에 돌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처럼 이전에 레위 지파가 주어진 역할을 질서정연하게 잘 감당하여 제사가 바르게 진행되고, 또 그들의 생계를 모든 지파가 힘을 모아 분담했을 때 나라가 건실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제사를 회복하고 레위인들의 역할을 다시 적절하게 배분해야 한다는 과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참된 레위인이자 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머리 되심 아래에서 직분자들이 바른 질서 가운데 그리스도와 성도를 섬겨야 합니다. 또 모든 성도들은 직분자를 신뢰하며 함께 힘을 모아 예배에 참석하고 책임 있는 역할을 행해야 합니다. 이런 책임 있는 직무와 역할 수행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우리 교회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6월 10일 (토요일) 역대상 5장

오늘 말씀에서는 육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족보를 소개합니다. 르우벤은 장자였지만 야곱의 첩 빌하와 동침하여 장자의 명분을 잃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요셉 자손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유다 지파도 강력한 지파이지만 장자의 명분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요셉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를 가리킵니다. 르우벤의 족보에서 특이한 것은 브에라의 때에 그들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에게 사로잡혀갔다는 것입니다. 르우벤 자손들은 요단 동쪽에 거주하면서 동쪽으로 세력을 넓혔지만 결국 앗수르에게 패망하고 말았습니다(1-10)

이어서 등장하는 족보도 요단강 동편에 유업을 받은 갓의 족보입니다. 르우벤 맞으편에 살면서 그들은 유다왕 요담과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때까지명백을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부터 그들의 족보가 기록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 족보의 기록은 없었다고 합니다(11-17). 갓 지파는 르우벤과 므낫세반 지파와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정복하는 일을 잘 감당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요단 강 동편에서 기업을 받은 두 지파 반은 믿음의 싸움을 잘 싸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에 응답하셔서 승리를 주셨습니다(18-22). 므낫세 반 지파도 영역을 넓혀 나갔습니다(23-24). 하지만 이들은 결국 하나님께 범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겼습니다. 참된 남편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사랑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렛셋(불)에게 두 지파 반을 사로잡아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역대상이 쓰여지던 시기에도 그곳에서 머물고 있습니다(25-26). 

 

역대상 저자는 다시 한 번 왜 두 지파 반이 망하게 되었는지 상기 시켜줍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순종하고 의지했을 때 어떤 일이 생겼는지 보여주고 반대의 경우를 제시하여 대조하면서 보여줍니다. 이는 다시는 그러한 일을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정복한 것도 앗수르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사용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렇게 앗수르를 통해서 벌하시는 것도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셔서 그들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역대기를 기록할 때에는 이미 돌아온 시기 입니다. 이미 그렇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은 모든 열방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시며 그분을 다시 배신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인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우리를 사랑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맙시다. 오직 그분만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6월 9일 (금요일) 역대상 4장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다윗이 속해 있는 유다 지파의 족보가 이어집니다. ‘유다의 아들들’이라고 하면서 본문은 다윗을 제외한 나머지 가문에 대한 단편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갈미는 광야에서 모세를 대적했던 아간의 아버지입니다. 좋은 가문이지만 항상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혈통이 전부가 아니라 개인의 신앙도 중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특별히 역대기 저자는 유다 지파의 자손들을 소개하면서 다른 개인들은 간단하게 언급하면서 지나가는데, 9-10절에서 야베스에 관해서는 좀 더 상하게 소개합니다. 야베스는 귀중한 자(원어의 뜻은 ‘영광을 얻은자’임)였다고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 수고롭게 얻은 아들입니다. 하지만 역시 이 출생에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참으로 존귀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 자신의 지경, 곧 땅을 넓혀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손으로 자신을 도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들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넓혀 달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재산을 넓혀 달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그곳의 이방인들과 이방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언약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되찾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빼앗긴 땅으로 돌아온 포로 후기 백성들에게 야베스는 특별한 의미를 줍니다. 잃어버린 땅을 다시는 죄로 인하여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교훈을 주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족보를 설명하면서 그에 대해서 부연설명을 했던 것입니다(1-10). 

이어지는 구절들은 갈렙과 옷니엘에게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께 끝까지 신실했던 지도자 중 하나였고, 옷니엘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을 구원한 첫 사사였습니다(삿3:9). 그의 후손들은 공장(기술자, 목수, 석수 등)였다고 추가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후에 갈렙의 지손들에 대한 족보가 나오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 유다의 아들 셀라의 족보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특별히 세마포 짜는 일과 도자기를 굽는 일을 가업으로 했으며 왕의 후원을 받으며 일을 했다고 합니다(23). 이어서 야곱의 다른 아들 시므온의 족보가 나오는데, 시므온의 자손 중에서 시므이가 가장 잘 번성했고 다른 종족들은 번성을 못합니다. 이것은 시므온이 히위족의 세겜에서 행한 대학살에 대한 야곱의 저주 때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창34장, 49:5-7). 한 종족만 겨우 번성할수 있었습니다. 언급된 성읍들은 결국 유다 지파 안에서 분배 받은 성읍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힘을 가지고 목장을 차지하여 살고 있고 또 살아남은 이스라엘의 원수 아멜렉 사람을 치고 지금도 살고 있다고 언급합니다(24-43). 이는 포로기에 모두 끌러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때문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다시 돌아 왔을 때 그들을 지지해 준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11장에서는 언급된 성읍들 중에 일부 성읍에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예. 브엘세바와 몰라다, 시글락 등).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포로기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나라를 세우고 성전을 재건하는 일들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역대기 저자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약한 시므온 지파도 나름대로 믿음의 싸움을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약하다고 해서 약함을 핑계로 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싸움을 했고, 그것으로 얻은 땅에 살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야베스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하고, 시므온 지파와 같이 연약함을 핑계로 삼지 않고, 강한 유다 지파에 속해 있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나름대로의 믿음의 싸움을 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믿음의 싸움과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8일 (목요일) 역대상 3장

오늘 말씀은 다윗의 족보입니다. 앞에서 역대상 저자는 다윗까지의 족보를 언급했었습니다(2:9-17). 그리고 나서 유다 지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족보를 언급합니다. 이 족보에는 다윗에 대한 자세한 소개보다 그가 헤브론과 예루살렘에서 낳은 자녀들에게 초점이 있습니다. 다윗은 헤브론은 다윗이 초기 통치시기에 다스렸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암논, 다니엘(길르압), 압살롬, 아도니야, 스바댜, 이드르암 여섯 명의 아들과 다말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통치 후기에 전이스라엘을 다스리며 예루살렘에서 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 입할, 엘사마, 엘리벨렛, 노가, 네벡, 야비아, 엘리사마, 엘랴다, 엘리벨렛을 낳았습니다. “밧수아”아는 다름 아닌 밧세바의 다른 표현입니다(1-9). 이어서 이 아들들 중에서 솔로몬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이 아들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밝히는 것은 역대기 저자의 의도가 아닙니다. 저자는 다윗의 왕위 계승과 왕좌에 관심이 있습니다. 솔로몬에서부터 시드기야까지 대략적인 이야기는 우리가 앞에서 열왕기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족보는 그 다음도 말해 줍니다. 17절부터 사로잡혀 간 다음 다윗의 혈통에 대해서 설명해 줍니다. 그 중에서 스룹바벨은 바사왕 고레스가 유다인의 귀환을 허락했을 때 백성의 왕과 같은 지도자가 되어 백성을 인솔했던 인물입니다. 또 귀한 후 성전을 재건하는데 앞장 섰던 인물입니다. 나라는 망했지만 다윗의 보좌를 이어 왕적인 역할을 하던 인물은 나약하게 나마 있었던 것을 17-24절까지 보여줍니다. 일종의 희망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들에 언급된 이름들이 그것을 뒷받침해 줍니다. 므술람(회복된), 하나냐(여호와는 자비로우시다), 슬로밋(평강), 브르갸(여호와가 축복하셨다), 하사댜(여호와께서 사랑의 언약을 하셨다), 유삽헤셋(사랑의 언약이 돌아온다). 

 

오늘 말씀은 다윗의 족보를 보여줍니다. 이 족보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다윗과 약속하셨던 언약을 지키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회복시키셨고, 연약하게 나마 그 씨앗을 남겨두셨습니다. 이런 족보의 기술은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다시 그들을 회복시킬 다윗 왕과 같은 다윗의 후손을 기대하게 했을 것입니다. 얼마전까지 스룹바벨이 그런 역할을 이미 했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이 있었다는 것과 그 후손의 이름들로 희망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희망이 누구인지 분명히 압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참된 왕으로 오셨고, 우리의 희망이 되십니다. 죄 가운데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참된 소망이 되십니다. 그분은 죄를 씻어 주시며 그분의 통치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참된 왕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능력 많은 왕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절망이 찾아 올 때 능력 많으시고 참된 희망이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 모두 말씀드리고 의지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당신의 다스림을 더욱 드러내실 것입니다. 아멘. 


6월 7일 (수요일) 역대상 2장

오늘 말씀에서도 족보가 이어집니다. 복잡해 보이는 족보이지만 2장에는 이스라엘의 아들, 곧 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족보가 나옵니다. 12명의 아들을 맏이부터 언급하고, 그런 다음 가장 먼저 유다 지파의 족보가 나옵니다. 유다는 첫째가 아닙니다. 이것은 역시 다윗 왕의 족보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입니다. 그리고 헤스론은 세 아들, 곧 여라므엘과 람과 글루베(갈렙)를 낳았다고 하는데, 10절을 보면 또 람을 가장 먼저 언급합니다. 여라므엘이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10절부터는 명확하게 다윗의 직계 조상들만 다룹니다(11-17). 그리고나서 헤스론의 아들 글루배(갈렙)에 대한 족보가 나옵니다(18-24). 그 후에 맏아들 여라므엘의 족보가 나옵니다(25-41). 이어서 갈렙의 맏아들 메사의 족보가 나옵니다(42-49). 그리고 이어지는 족보에서 갈렙의 두번째 아내 에브라다를 통해서 낳은 자녀들의 족보가 이어집니다(50-55). 서기관 종족은 아론과 함께 백성의 종교적인 생활을 주관하던 훌의 자손들로 성막 봉사와 율법 교육들을 담당했습니다. 겐 종족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속했던 종족으로 이스라엘에 편입 되면서 유다 지파에 흡수되었습니다(삿1:16). 

 

이를 통해서는 알 수 있는 것은 이 족보들의 중심은 분명히 다윗 왕에게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족보에서는 아주 분명하고 단순하게 다윗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여라므엘과 갈렙의 족보는 매우 복잡하고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족보가 가장 분명한 기준으로서 세워지고 같은 지파의 사람을 시작으로 다른 모든 지파들이 모여들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심지어는 이방 민족도 유다 지파에 흡수되어 유다 지파 안에 들어 온 것을 보여줍니다. 자연 태생이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다윗의 깃발 안으로 들어옴으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족보에서 맏이가 아니라 둘째 셋째가 혹은 막내가 강조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타고난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가 먼저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아래로 모일 때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다윗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자 예수님 아래로 모일 때 참된 영적 이스라엘로 회복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 아래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들어와 있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6월 6일 (화요일) 역대상 1장

역대상하 성경은 연대기를 의미합니다. 역대상하는 포로 생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의 지도자들 중 누군가(아마도 에스라)에 의해서 쓰여졌습니다. 당연히 기록의 목적도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의 재건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고레스의 칙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함께 살며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 하신 이유와 심판 이후에 다시 하나님 앞에서 회복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상황은 이전과 좋아진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강대국이 이스라엘 주변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대기 저자는 포로로 잡혀 있다가 돌아온 백성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다시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 수 있도록 이 책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초반에는 족보를 통해서 그들의 정체성을 먼저 되짚어 줍니다. 이 족보는 아담부터 다윗 왕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열왕기와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 왕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보충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나아가 언젠가 이스라엘을 온전히 회복하게 할 메시야가 올 것임을 곳곳에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시작입니다. 이 책의 시작에서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어 내려오는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다른 열국들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31). 나아가 이 족보는 점점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스라엘)에 초점을 맞춥니다. 에서의 자손들의 족보가 언급되고(35-54) 이어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족보가 이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조상들에게 대해서 언급함으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바른 정체성을 갖도록 합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본래 한 민족이었다는 단일성을 회복하고 돌아온 백성들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이 족보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 족보들이 창세기를 요약한 것으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민족일 뿐만 아니라 온 열방을 하나님께서 다스린다는 것을 다시금 보여주고자 합니다. 역대기 저자는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됨과 정체성을 고취시킵니다. 

 

오늘날 교회 회복의 시작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교회와 성도 개인이 영적인 포로에서 돌아오는 회복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다시금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의 단일성과 정체성을 회복하여 교회가 다시금 하나가 되고 하나님께서 택한 복된 백성을 믿고 받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참된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로 불러 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백성임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 정체성을 잊지 않고 날마다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6월 11일 (주일) 역대상 6장

오늘 말씀은 레위의 족보입니다.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가 있는데, 그핫을 먼저 소개합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모세와 아론이 속한 종족이기 때문입니다. 또 아론의 자손들은 그의 뒤를 이어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어 섬겼습니다. 그 족보가 3절에서 15절까지 소개됩니다. 이어서 게르손의 자손들이 소개가 되는데, 그 지파에서도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의 중요성 때문에 그핫이 먼저 소개가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언약궤가 성전에 안전하게 안치 되기 전과 후에 찬송을 맡은 자도 소개가 됩니다. 성전에서 찬송을 맡은 사람들도 모두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만이 대표적인데 그핫의 후손으로 역시 사무엘의 후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헤만이 혼자서 그 일을 다 감당한 것은 아니고 그의 형제(친형제는 아님) 아삽와 에단이 그의 오른쪽과 왼쪽에 함께 있습니다. 아삽은 므라리의 후손으로 합창단의 악장이면서 언약궤 앞에서 제금을 켜는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또한 시편 중 열 두편을 작시했습니다(50,78-83편). 또 에단은 므라리 지파 출신으로 므라리는 성전에서 장막의 모든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48). 다시 짧게 아론의 후손, 곧 대제사장의 족보를 간단하게 소개됩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지만 분명하게 구별된 직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므라리에 속한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 장막의 모든 일을 맡았고, 헤만을 중심으로 아삽과 에단은 노래하는 일을 맡았고, 아론의 자손들, 곧 대제사장들은 번제단과 향단 위에 분향하며 지성소의 모든 일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일을 ‘계열대로(32)’ 곧 질서정연하게 했습니다. 

 

이어서 레위 지파가 분배 받은 성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54-81). 레위인들은 제사와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 따로 땅을 분배 받지 않고 각 지파에 들어가 성읍과 초원만 받습니다(수21:1-3). ‘사방 지계’라는 말은 레위 지파의 거처가 이스라엘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핫 자손 중에서 아론의 자손인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에게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는 도피성 헤브론을 비롯하여 13 성읍이 주어집니다. 나머지 그핫 자손에게는 므낫세 반 지파에서 10성읍이 주어지고, 또 게르손 자손에게는 잇사갈과 아셀과 납달리, 므낫세 반 지파에서 13 성읍이, 므라리 자손에게는 르우벤과 스불 지파 중에서 12 성읍이 주어집니다(54-65). 총합 48개의 성읍이 레위 자손들에게 주어집니다. 이어지는 66-81절은 이미 주어진 성읍의 보충 설명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레위 지파 자손들 중에서 그 역할과 직무가 다양했지만 질서 있게 유지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레위 지파에게 거주할 곳을 주기 위해서 모든 지파가 부담했던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포로기 후에 돌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처럼 이전에 레위 지파가 주어진 역할을 질서정연하게 잘 감당하여 제사가 바르게 진행되고, 또 그들의 생계를 모든 지파가 힘을 모아 분담했을 때 나라가 건실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제사를 회복하고 레위인들의 역할을 다시 적절하게 배분해야 한다는 과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참된 레위인이자 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머리 되심 아래에서 직분자들이 바른 질서 가운데 그리스도와 성도를 섬겨야 합니다. 또 모든 성도들은 직분자를 신뢰하며 함께 힘을 모아 예배에 참석하고 책임 있는 역할을 행해야 합니다. 이런 책임 있는 직무와 역할 수행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우리 교회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6월 10일 (토요일) 역대상 5장

오늘 말씀에서는 육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족보를 소개합니다. 르우벤은 장자였지만 야곱의 첩 빌하와 동침하여 장자의 명분을 잃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요셉 자손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유다 지파도 강력한 지파이지만 장자의 명분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요셉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를 가리킵니다. 르우벤의 족보에서 특이한 것은 브에라의 때에 그들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에게 사로잡혀갔다는 것입니다. 르우벤 자손들은 요단 동쪽에 거주하면서 동쪽으로 세력을 넓혔지만 결국 앗수르에게 패망하고 말았습니다(1-10)

이어서 등장하는 족보도 요단강 동편에 유업을 받은 갓의 족보입니다. 르우벤 맞으편에 살면서 그들은 유다왕 요담과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때까지명백을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부터 그들의 족보가 기록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 족보의 기록은 없었다고 합니다(11-17). 갓 지파는 르우벤과 므낫세반 지파와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정복하는 일을 잘 감당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요단 강 동편에서 기업을 받은 두 지파 반은 믿음의 싸움을 잘 싸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에 응답하셔서 승리를 주셨습니다(18-22). 므낫세 반 지파도 영역을 넓혀 나갔습니다(23-24). 하지만 이들은 결국 하나님께 범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겼습니다. 참된 남편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사랑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렛셋(불)에게 두 지파 반을 사로잡아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역대상이 쓰여지던 시기에도 그곳에서 머물고 있습니다(25-26). 

 

역대상 저자는 다시 한 번 왜 두 지파 반이 망하게 되었는지 상기 시켜줍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순종하고 의지했을 때 어떤 일이 생겼는지 보여주고 반대의 경우를 제시하여 대조하면서 보여줍니다. 이는 다시는 그러한 일을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정복한 것도 앗수르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사용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렇게 앗수르를 통해서 벌하시는 것도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셔서 그들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역대기를 기록할 때에는 이미 돌아온 시기 입니다. 이미 그렇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은 모든 열방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시며 그분을 다시 배신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인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우리를 사랑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맙시다. 오직 그분만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6월 5일 (월요일) 열왕기하 25장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벨론 왕을 배반했습니다. 그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그의 모든 군대를 모아 예루살렘을 거의 1년 6개월 동안 포위합니다. 성의 음식은 떨어졌고, 성벽도 무너졌습니다. 이에 시드기야는 남은 군대와 함께 도망을 치지만 결국 잡히게 됩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모두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도 뽑아 버리고 바벨론으로 잡아 갑니다. 아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1-7). 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그의 시위대장(경호실장) 느부사라단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것을 노략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느부사라단은 성전과 왕궁을 모두 불살랐고 모든 집도 불살랐습니다. 성중에 남은 귀족들은 사로잡아 가고 예루살렘에는 비천한 자들만 남겨두어 농부가 되도록 했습니다. 성전의 기구들 중 귀한 것은 다 바벨론으로 가지고 갑니다. 성전의 위엄과 영광을 보여주는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은 황폐하게 됩니다. 또 느부사라단은 성에 남은 대제사장과 부제사장, 장관의 서기관 등을 잡아 바벨론 왕에게 데리고 갑니다. 왕은 그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은 유대인 중에서 사반의 손자 그달리야를 남겨 두어 총독으로 예루살렘을 다스리도록 합니다. 그달리야는 바벨론에게 충성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일부 반 바벨론파 사람들 중 왕족인 이스마엘이 그달리야를 죽이고 이집트로 도망하게 됩니다. 

한편 바벨론에서는 새롭게 즉위한 에윌므로닥이 37년 만에 유다왕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나오게 하고 지위를 높이고 정부의 녹을 받아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과 같이 여겨주었습니다. 열왕기하 마지막 단락에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은 지금은 황폐하고 망한 유다이지만 다시 회복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한 줄기 빛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27-30).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속적으로 어기고 범죄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겠다고 말씀하신 성전도 불에 타고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도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황폐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고 희망의 빛을 남겨 두십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 긍휼이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심판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거룩하게 되고 새롭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바벨론에서 당신께 신실한 백성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눈에는 완전히 망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새롭게 당신의 백성을 회복시킬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들을 지금도 모으시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시며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4일 (주일) 열왕기하 24장

여호야김 왕 때에 삼 년 동안 유다는 바벨론 왕을 섬기다가 배반했습니다. 이에 바벨론 왕은 유다 주변의 나라들을 통해서 유다를 침략하여 치도록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바벨론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을 통해서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므낫세를 비롯한 왕과 유다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1-4). 여호야김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 그의 시대는 바벨론의 세력이 더욱 강하여 졌습니다. 이집트 왕에게 속한 모든 땅을 다 점령할 정도였습니다. 여호야긴도 비교적 어린 나이인 18세에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것은 그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마침내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항복한 여호야긴 왕과 그 어머니와 신복들을 잡아 바벨론의 포로로 데리고 갑니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고 성전의 금 그릇을 다 파괴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패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그것을 예언했었습니다(렘20:5). 또 모든 백성과 지도자와 용사와 기술자들을 데리고 가서 정복 전쟁과 나라 발전에 이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야긴 왕을 폐위 시키고 여호야긴의 삼촌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우고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꿉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도 끝내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벌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지 보여줍니다(10-20). 

 

오늘 말씀은 단순히 역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강대국에 의한 약소국의 패망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역사로 본다면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반역하고 언약을 파기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의 주관자로서 다른 주변 강대국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심판을 실제로 역사 속에서 하시는 분이십니다. 심판이 역사 실제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은 역사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아 죽으셨다는 것 역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하심도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책망하시고 때로는 격려하시며, 또 복을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일하심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우리 모든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성과 실제성을 믿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 바랍니다. 아멘. 


6월 3일 (토요일) 열왕기하 23장

요시야 왕은 결국 하나님께서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실 것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개혁을 진행해 나갑니다. 먼저 모든 장로들과 백성들을 모으고 율법책을 들려주고 언약을 다시 새롭게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고 언약을 실천하도록 주신 규칙입니다. 모든 백성들도 언약 갱신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유다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없앱니다. 그 우상이 얼마나 많은 지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우상들을 그동안 섬겼는지, 그 죄악이 얼마나 큰 지 보여줍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 안에까지 우상이 들어와 있습니다. 또 산당에서 제사한 제사장들이 더이상 성전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합니다(1-14). 뿐만 아니라 요시야는 자신의 개혁을 지금은 망한 북 이스라엘에 세워진 제단을 없애는데까지 나아갑니다. 이전에 여로보암이 세운 제단과 산당을 요시야가 헐고 그 산당을 불사르고 아세라 목상을 불사릅니다. 그 옆에는 여로보암이 제단을 만들 때 제단 위에 해골이 바쳐질 것이라고 예언한 선지자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의 예언이 성취됩니다(왕상 13:2). 요시야는 북 이스라엘의 산당을 다 제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왜 북 이스라엘이 망했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또 요시야는 유월절을 지키도록 합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은혜를 기념하고 감사하는 절기였는데, 오랫동안 지켜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월절을 회복함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가 회복됩니다. 이 모든 노력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모든 율법을 따라 돌이킨 왕은 없었다고 평가됩니다(24-25).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킨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유다의 멸망도 정하셨습니다(26-27). 요시야는 앗수르를 치러가는 애굽 왕과 싸우다가 결국 전사합니다.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았지만,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애굽 왕은 그에게 벌금을 내리고 애굽으로 잡아가고 여호아하스의 형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웁니다. 여호야김은 애굽에게 충성했고 11년간 통치하며 하나님께 악을 행합니다(28-37). 이는 유다의 어두운 미래를 예고합니다. 

 

요시야는 개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지 않으실 것임을 이미 여선지자 훌다를 통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개혁을 단행하되 아주 철저하게 개혁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말씀대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던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하니까 하고, 안주시면 안하고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이런 개혁으로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멸망이 요시야 때에 일어나지 않는 복을 주셨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변하고 우리의 삶을 개혁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면 벌을 내리지 않겠다거나 복을 주시겠다고 하는 보상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면서 날마다 죄를 멀리하고 변화 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말씀으로 변혁되는 마땅히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삶이 말씀으로 개혁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 때문이지 어떤 보상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말씀으로 변화하는 마땅한 일을 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거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2일 (금요일) 열왕기하 22장

아몬이 죽고 요시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8세에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께 신실한 왕이었습니다. 그가 다스린지 18년째 그가 26살이 되었을 때 서기관(율법학자) 사반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내어 성전의 부서진 곳을 재건하도록 합니다. 요시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에 성전은 등한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비용은 백성이 선전에 드린 은을 감독자의 손에 넘기고 그것을 다시 일꾼들에게 주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이전에 요아스가 성전을 복구하던 방식이었습니다(12장). 요시야는 역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동안 우상 숭배에 물들어 있었던 유다를 개혁하는 시작이었습니다(1-7). 그 때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신명기로 짐작되는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율법학자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그것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왕에게 돌아가 읽어 줍니다. 요시야 왕은 그 율법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조상들이 지은 죄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옷을 찢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백성과 유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선지자에게 물으러 신하들을 보냅니다. 당시에는 여선지자 훌다가 예루살렘 둘째 구역, 곧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왕에게 율법에 기록된 대로 과연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언약을 깨뜨리고 이방인들을 섬긴 유다를 심판할 것입니다. 하지만 요시야 왕은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기 때문에 요시야 왕 때에는 이 심판이 내리지 않고 그 후에 내릴 것임을 예언합니다(8-20). 개혁의 시작은 여호와의 성전을 보수하는 것에서 시작되었고, 그 기준은 율법 책이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시작되는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유다 백성들을 개혁한 것입니다. 그는 성전 보수공사로 시작했지만 율법책을 통해서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조상들이 얼마나 큰 죄를 하나님 앞에서 범했는지, 그 결과는 무엇인지 율법책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 개혁 후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삶을 살아간 사람은 심판 중에 남긴 자로서 살아남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이 됩니다. 우리의 삶도 개혁되어야 합니다. 성전을 보수하는 것은 성도들의 인격과 삶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도들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기 때문입니다(고전6:19). 우리를 우리의 육체를 우리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갈5:17). 우리 주 예수님은 세상 마지막 날에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간 사람들은 칭찬을 받고 육체를 따라서 살아간 사람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말씀으로 개혁시키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월 1일 (목요일) 열왕기하 21장

하나님을 의지하던 선한 왕 히스기야가 죽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할 뿐 아니라 백성이 농사를 잘 짓고 식수를 잘 얻을 수 있도록 공급해 주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들 므낫세는 아버지와 180도 달랐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없앤 산당들을 다시 세우고, 이스라엘 왕 아합이 섬기던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섬기며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의 신을 예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에 다른 제단들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나아가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우상도 섬기고, 남자 무당과 점치는 자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백성들도 악한 길로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이렇게 므낫세와 그의 꾐을 받은 유다의 범죄가 이전에 하나님께서 멸하라고 하셨던 여러 민족들보다 더 심했다고 평가됩니다(1-9).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당시에는 북이스라엘이 이미 패망한 상태입니다. 패망한 이유도 우상숭배와 회개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 기준을 유다에도 적용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릇을 씻어 뒤집어 놓는 것 같이 뒤집어 버릴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은 하나님의 백성 유다도 원수의 손에 넘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므낫세 왕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긴 것 뿐만 아니라 무죄한 자의 피도 많이 흘렸습니다. 왕으로서 바른 판단을 하지 않고 그가 가진 힘을 잘못 사용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기준에 모자라는 왕입니다. 또 그는 자신이 죽었을 때 선왕들의 묘를 확장해서 웅장한 묘를 만들어 그곳에 묻힙니다(10-18). 하나님을 전혀 섬기지 않은 왕으로 므낫세는 기억되고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하시기로 한 이유로 므낫세의 죄를 지적할 정도로 죽은 후에 불명예를 안게 됩니다(왕하23:26). 그의 아들 아몬도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아버지를 그대로 닮아서 우상을 섬기고 조상들의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는 신하들에게 살해를 당해 죽습니다. 신하들은 그의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삼게 됩니다(19-26).

 

므낫세는 55년 동안 통치한 왕입니다. 정치를 매우 잘 한 것입니다. 반란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강력한 통치와 앗수르를 비롯해서 다른 나라와 적절한 관계를 맺었을 것입니다. 내부적으로 다양한 종교를 허용해 줌으로 인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 아몬도 그런 아버지의 탁월함(?)을 보며 그대로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는 악한 왕입니다. 이 모든 것은 모세와 다윗과 맺은 언약을 모두 깨는 행위들이었지만 므낫세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래 집권한 것도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의 통치 말년에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하셔서 회개하도록 하십니다(대하33:12, 하지만 열왕기하에서는 이 내용을 넣지 않아 그의 악함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몬은 아버지의 회개를 보고도 다시 이방신을 섬기는 더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즉시로 심판을 받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기다린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크게 넘어져도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가 씻지 못하는 큰 죄는 없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을 때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혹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회개하고 매번 새롭게 시작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31일 (수요일) 열왕기하 20장

앗수르 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땅으로 돌아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온 땅의 왕들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히스기야는 어떻게 될까요? 앗수르 왕이 죽었을 때, 히스기야는 죽을 병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사야를 통해서 그것은 죽을 병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가 돌아가는 길에 다시 히스기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병을 낫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삼 일만에 성전에 올라가 예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15년의 수명을 연장해 주시고 자신과 다윗을 위해 이 성도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의 징표로 해시계가 뒤로 10도 물러나도록 하시는 기적도 베풀어 주십니다(1-11). 이 본문은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참으로 들으시고, 그분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점점 세력을 넓혀가던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사절단을 보내어 축하해 줍니다. 이 사절단에게 히스기야는 자신의 보물 창고의 모든 것과 가진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님을 높이기보다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며, 동시에 바벨론과 앞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겠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보다 신흥 강대국을 의지하겠다는 표현이기도했습니다. 이에 이사야는 히스기야를 책망합니다. 언젠가 이 바벨론이 왕궁의 모든 것과 조상들이 쌓아 둔 모든 것을 바벨론으로 가지고 가고, 왕의 아들 중에 누군가 바벨론 왕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 드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과 자녀들에게 좋지 않은 말씀이라도 그것이 선하다고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던 왕이었습니다. 또 자신에게 불리한 말씀도 선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때로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불편하고 내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른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어떠하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선하신 말씀입니다. 전체 성경의 내용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날마다 주님의 선하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30일 (화요일) 열왕기하 19장

신하들의 말을 들은 히스기야도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참담함과 답답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백성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해산할 힘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앗수르를 대항하여 일어났는데, 그 일을 완성하기에는 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랍사게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랍사게의 말을 다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 결과 앗수르 왕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7). 랍사게는 이스라엘에게 말한 후에 앗수르 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중에 왕이 립나에서 싸우고 있는 중임을 알게 됩니다. 디르하가는 구스 출신의 이집트의 왕입니다. 그가 앗수르 왕을 치러 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앗수르 왕은 랍사게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항복을 받아 내려고 합니다. 유다가 항복한다면 큰 전쟁 물자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랍라게는 전보다 더 강도를 높여서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의 손에 넘기지 않겠다는 말에 속지 말라고 합니다. 아무 신도 앗수르 왕을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펴 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홀로 참 된 하나님이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는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며 기도합니다. 다른 신들은 헛된 우상이기 때문에 앗수르를 막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 이심을 남유다를 구원하시는 것을 통해서 보여달라고 합니다(8-19). 이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 말씀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앗수르 왕에게 가지고 계신 메시지를 히스기야가 듣도록하십니다. 유다를 처녀 딸 시온이라고 부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애정 어린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을 비웃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비방하고 교만하게 행동하고 말을 한 앗수르는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앗수르가 다른 나라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태초부터 정하셨던 일이었습니다(25).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모든 우주를 다스리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모든 것을 꿰뚫고 계십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우상과 다른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앗수르를 무기력하게 돌려 보낼 것입니다. 이에 대한 증표로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에게 앗수르가 떠나고 예루살렘에서 나는 포도원을 심고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곡식과 과일이 심겨지고 거두어지는 것은 안전과 평화의 상징입니다. 또 나중에 하나님께서 유다의 잘못에 대해서 심판하실 때에도 남은 자가 있을 것이라고 미리 암시합니다. 결국 앗수르 왕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한 발의 화살도 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이루십니다. 밤에 천사를 보내셔서 앗수르 군인 십팔만 오천명을 치십니다. 앗수르 왕은 결국 나라도 돌아가 우상에게 경배할 때 부하에 의해 죽게 됩니다(29-37).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신입니다. 다른 신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헛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기도할 때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스기야는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에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또 본인도 산헤립의 협박 편지를 받았을 때 기도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그 기도를 들으신다는 기본적인 믿음의 표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더 잘 들으십니다. 왜냐하면 참된 선지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일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며 기도할 때 들으십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가 회복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5월 29일 (월요일) 열왕기하 18장

아하스를 이어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유다의 왕이 됩니다. 히스기야는 다른 왕들보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다윗의 길로 행하였다고 평가를 받는 왕입니다. 그는 유다에 있던 산당을 드디어 제거하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예루살렘에서만 예배하도록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섬기던 모세의 놋뱀을 부숩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인 양 우상화하여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놋 조각)’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놋 조각일 뿐이라고 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 아버지가 의지하던 앗수르와 동맹관계를 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원수인 블레셋을 치고 영토를 넓혔습니다. 영토를 넓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위기가 닥쳤을 때 흔들립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한 앗수르 군대가 4년 후에 남유다를 쳐서 많은 성읍들을 정복한 것입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앗수르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많은 은과 금을 성전에서 내어다가 주었습니다(1-16). 하지만 앗수르 왕은 약속을 깨고 대군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왔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신하들을 보내어 협상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조건적인 항복만 강요합니다. 앗수르의 전령 랍사게는 히브리말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합니다. 백성들이 히스기야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내분을 일으키려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으로 예루살렘을 치러 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구도 앗수르의 위대한 왕에게 저항해서 살아 남은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집트를 의지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히스기야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앗수르 왕은 히스기야가 애굽(이집트)을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항복하면 지금 사는 것과 같은 삶을 살게 해 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나라들도 자기의 신들을 의지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발언을 합니다(17-35). 이 모든 말을 들은 신하들과 백성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신하들은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이 모든 말을 히스기야 왕에게 전합니다(36-37).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 신실했지만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개혁을 단행하고 조상들 대대로 끊지 못하던 죄, 곧 여러 산당에서 제사하는 것을 멈추고 우상을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닥쳤습니다. 닥친 어려움에 앗수르 왕에게 은과 금도 바쳤습니다. 그런데 더 큰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무조건 다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직무와 의무를 다 할 때에라도 어려움은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신실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그 어려움을 온전히 당하도록 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 어려움 가운데 함께하시고 또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 내용이 19장에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핏값으로 주고 사신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영으로 함께하시고, 하늘에서 육체로 아버지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여전히 함께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27일 (토요일) 열왕기하 16장

남 유다에서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하스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달리 하나님 여호와께 정직히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당시 이방인들이 섬기던 몰렉 신을 섬기는 방식을 따라 아들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었습니다(레18:21). 뿐만 아니라 산당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1-4). 그는 강하기도 했습니다.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쳤지만, 아하스가 이깁니다. 하지만 아람의 세력이 강하여져서 유다 땅의 일부를 빼앗깁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남유다를 친 것은 당시 신흥 강력 대국 앗수르를 견제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오히려 앗수르에게 항복을 하고 속국이 되고자 성전과 왕궁 창고에 있는 은과 금을 바칩니다(7-8). 앗수르는 아하스 왕의 말을 듣고 아람(시리아)의 수도 다메섹(다마스쿠스)을 점령하고 아람 왕을 죽였습니다. 아하스는 다메섹에 온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갔다가 앗수르 왕이 섬기는 신의 제단을 보게 됩니다. 이에 제사장 우리야에게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보내고, 우리야는 아하스 왕이 예루살렘에 돌아오기 전에 그 제단을 완성해 놓습니다. 그리고 이제 앗수르 왕이 섬기는 신에게 제사를드립니다. 또 성전에 있던 놋 제단을 그 제단으로 대체합니다. 그것은 큰 제단이었습니다. 아하스는 이제 그 제단 위에서 번제와 소제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놋 제단은 하나님께 여쭐 때에만 쓰겠다고 합니다. 제사장은 왕의 말대로 합니다(9-15). 또 성전 기구에 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내어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16-20).  

 

오늘 말씀에서 아하스는 위기의 순간에 앗수르를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사야서에서 이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징표를 구하라고 했지만 그는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겠다고 합니다(사 7:11-12). 아하스는 오히려 앗수르가 그렇게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 그들의 신들 덕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상 때 부터 섬겨온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강한 신으로 보였고, 그를 섬기도록 합니다. 여호와하나님은 그저 모르는 것이 있을 때 물어보는 신입니다. 아하스는 자신이 보기에 복을 주는 것 같고, 강해 보이고, 필요해 보이는 신은 모두 섬겼습니다. 위기에서 건져만 준다면 어떤 신도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도움이 되는 모든 신을 섬깁니다. 더욱이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이 위기를 해결해 주었습니다.하지만 그것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었고, 앗수르도 나중에 더 큰 제국에 의해서 망할 것입니다. 인간적인 해결책은 당장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입니다. 사실 아하스가 겪는 모든 위기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분으로서 유다가 범죄에서 돌이키도록 징벌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그 징벌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죄악을 행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저 필요할 때만 찾는 신 정도로 섬기고, 일상에서는 온갖 신을 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좋다고 하는 것은 다 해봅니다. 점집도 다니고 오늘의 운세도 봅니다. 주일에 예배 대신에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세미나와 강연도 많이 다닙니다. 심지어 모든 종교가 구원을 준다고 생각하고 종교를 하나의 취향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시대 정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할 분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위기 때에 의지할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 뿐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고, 날마다 하나님만의지하며 그분께만 묻고, 그분만 섬기는 신실한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5월 26일 (금요일) 열왕기하 15장

유다왕 아사랴는 ‘웃시야’라고도 불리는 왕입니다. 아버지 아마샤의 행실을 따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을 행했지만, 역시 산당을 없애지 않음으로 백성들이 성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을 했습니다. 아사랴는 52년 동안 강력한 왕권과 유능한 나라 운영으로 유다를 강하게 했습니다. 그 때 그의 마음이교만하여 제사장들이 해야 하는 성전 안에 있는 향 피우는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말렸지만, 그대로 행하려고 할 때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겨 평생나병 환자로 살아야 했습니다(1-7,대하26:21-23). 아사랴가 통치한지 38년째에 북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죽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여전히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살룸을 통해 그를 죽게 하고 왕이 되게 하십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신대로 예후로부터 4대까지 예후 왕조가 이어지고 끝이 났습니다. 살룸의 반역은 오래가지 못하고 한 달 만에 끝이 났습니다. 므나헴이 살룸을 처단하고 왕이 되어 11년간 다스렸습니다. 그도 역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당시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던 앗수르 왕 불(디글랏 빌레셋 3세 기원전 745-727)을 보내어 일종의 경고를 하십니다. 므나헴이 은을 많이 주어 돌아가게 합니다. 므나헴이 죽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대신 왕이 됩니다. 그도 역시 아버지처럼 우상숭배의 죄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에 그 장관 베가가 반역하고 왕위를 찬탈하여 20년간 다스립니다. 그도 우상숭배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자 앗수르 왕이 다시 이스라엘을 쳐서 이스라엘에 속한 여러 성들을 쳐서 함락하고 사람들을 앗수르로 잡아 갑니다. 베가도 반역을 당하여 호세아에 죽임을 당합니다(17-31).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 될 것입니다.  남 유다도 웃시야가 죽고 그의 아들 요담이 왕이됩니다. 그도 대체적으로 바르게 하나님을 섬겼지만 역시 산당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그 후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유다의 왕이 됩니다(32-38). 

 

남유다는 웃시야가 긴 기간동안 통치한 반면에 북이스라엘은 예후 왕조 이후에 반역이 반복되어 왕이 바뀝니다. 이는 북이스라엘의 정세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보여주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율법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것으로 여겨지는 왕을 쉽게 배반하고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면서 이방나라를 그대로 답습하여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을 보여줍니다. 남 유다는 그래도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왕들이 산당을 없애지 않아 섬기는 방법에서 어느 정도 타협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는 죄가 있었다면, 남 유다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온전히 바르게 섬기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두 왕국 모두 세대를 거듭하며 끊어지지 않는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왕국이 직면하고 있던 영적인 상황입니다. 죄를 끊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 반복되고 여전히 끊지 못하는 죄가 없는지 살펴보고 회개함으로 회복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불신자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5월 25일 (목요일) 열왕기하 14장

13장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는 대적들을 치고 성읍을 되찾으며 번영의 시기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두 왕국은 일시적으로 강하여 졌습니다. 이런 강함은 오늘 말씀에서도 이어집니다. 유다 왕 아마샤는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께 대체적으로 충성했으나 역시 산당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모두 처단했지만, 율법대로 그 자식들은 없애지 않았습니다. 또 에돔의 소금 골짜기를 치고 에돔을 되찾았습니다(1-7). 이에 북이스라엘도 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상대가 되지 않으니 에돔을 친 것으로 만족하라고 합니다. 아마샤는 이를 거절했고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전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유다가 이스라엘에 패했습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벧세메스에서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 잡아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 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약 40규빗(약182미터)을 헙니다. 예루살렘의 방어를 아주 취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과 왕궁의 창고에 있던 금 은과 모든 각종 기구들을 가지고 갑니다. 또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데리고 갑니다(8-14). 북이스라엘 요아스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를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도 41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이스라엘의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사람으로서 여로보암 1세의 죄를 따라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떠나지 않았습니다(23-29). 남 유다도 아마샤가 반란군에 의해 죽고 그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됩니다. 아사랴도 번영을 누리고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복귀했습니다(22). 

 

이렇게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지만 번영을 누리는 것은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특히 선지자를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섬길 때 땅이 회복되는 언약적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은 폭풍전날에 고요한 밤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곧 북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손에 넘기실 것입니다. 번영이 곧 하나님의 복인 것만은 아닙니다. 최후의 통첩으로 번영을 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떠났을 때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데,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면 번영을 즐길 때가 아니라 회개해야 할 때임을 본문은 말해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의 삶을 점검해보는 귀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24일 (수요일) 열왕기하 13장

한편 이스라엘 왕 예후가 죽고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어 17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아람을 통해서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람 왕에게 이스라엘이 완전히 넘어가도록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여호아하스가 아람 왕에게 심하게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구원자(엘리사)를 주셨고,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자 이스라엘은 다시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하여 우상을 숭배합니다. 결국 아람 왕이 다시 와서 북 이스라엘에 치명적인 공격을 했고, 마병 오십과 병거 열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이스라엘 왕에게 남겨두지 않습니다. 소수의 군대만 남겨 놓은 것입니다. 여호아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요아스가 왕이 됩니다. 요아스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엘리사에게는 극진히 잘했습니다. 엘리사가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엘리사를 찾아와 눈물을 흘렸습니다. 엘리사는 죽기 전에 마지막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아스를 통해서 아람을 멸절하도록 칠 것입니다. 엘리사가 죽은 후에 이예언은 그대로 이루어 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요아스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신 결과였습니다. 엘리사의 시체에 죽은 시체가 닿자 다시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는 죽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며 생명을 줄 것입니다. 요아스는 결국 아람을 세번 쳐서 무찌르고 아버지 때에 빼앗겼던 성읍들을 다시 찾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던 왕이지만 징계로 인해 회개하였을 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을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멸절되지 않은 것도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기억하셔서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고도 다시 하나님을 버렸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아람을 다시 보내어 거의 진멸할 정도로 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를 절대로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다시 반복적으로 죄를 지었을 때는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긍휼과 은혜의 정점인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이름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은혜와 긍휼을 의지하여 죄를 회개하고 돌이킵시다. 그러면 반드시 구원을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5월 23일 (화요일) 열왕기하 12장

어린 왕 요아스는 유다에서 약 40년 동안 다스리게 됩니다. 그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산당을 없애지 않아서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이 제사하는 일은 막지 못했습니다(1-3). 그래도 요아스는 지속적으로 성전을 재건하고 수리를 통하여 백성들이 성전에서 바르게 제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시 성전은 건축된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곳곳에 보수할 곳이 생겼습니다. 아달랴가 통치하고 있을 때 아달랴의 아들들이 바알을 위하여 여호와의 성전을 약탈했던 것을 역대하 24장 7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등한시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요아스를 바로 잡으려고 합니다. 요아스는 성전을 유지 보수하기 위해 성전에게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모든 은, 각 사람의 몸값(레위인들을 위해 모든 처음 태어난남자 마다 부과되는 세금)으로 드리는 은, 자원하여 드리는 성전의 은을 모두 투입할 것을 명합니다. 그 만큼 성전의 상태가 심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각각 ‘아는 자’라고 번역된 말은 사실은 ‘수입’이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제사장의 수입도 성전의 보수 공사를 위해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23년이 지나도록 제사장들은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왕이 지나치게 제사장들에게 요구한 것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제사장들도 23년 동안 성전을 내버려 둔 것에 책임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왕은 다시 제사장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면서 대신에 성전 입구에 헌금함을 두어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전에 가지고 오는 헌금은 제사장이 그 곳에 넣어 성전의 재정을 맡은 자의 손에 넘기면 그가 직접 성전을 보수하는 자들에게 주는 방식을 취합니다. 제사장이 직접적으로 재정에 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그 은으로는 다른 성전의 기구를 만드는데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성전을 보수하는데에만 사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은을 일당으로 주는 것을 따로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일꾼들과 은을 주는 사람들이 성실하게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일을 믿고 맡긴 것입니다. 또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제사장들에게 돌려 줌으로 제사장들의 생활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성전을 위한 은과 제사장들을 위한 은을 확실히 구별한 것입니다(9-16).

하지만 요아스는 아람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쌌을 때 성전의 성물들과 왕궁의 금을 가져다가 아람 왕에게 주어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요아스는 부하들에게 배신 당하여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죽음은 사실 그가 말년에 하나님을 떠난 결과였습니다(대하24:24). 

 

오늘 말씀은 요아스의 개혁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는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바른 왕이었습니다. 성전을 제대로 보수하지 않는 제사장들을 책망하기까지 하는 어진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아람 왕에게 은과 금을 줌으로 현실에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큰 위기가 없을 때 그는 하나님께 신실했고, 스승인 여호야다의 잘못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쳤을 때 그는 하나님보다 현실적 해결책을 의지했습니다. 성전의 보수 공사는 결국 그 순수성이 잃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낡은 건물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온 유다가 무너진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 왕의 태도는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한계를 지닌 왕입니다.

우리의 참된 왕 예수님은 오히려 일생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복구된 성전이십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 또한 위기의 순간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계셔서 우리를 완벽히 복구된 성전이 되게 하십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평안할 때나 위기 때에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붙드셔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 성령께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22일 (월요일) 열왕기하 11장

북이스라엘에서 아합에게 속한 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한 명이 남아있습니다. 바로 남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입니다. 그녀는 아들이 죽은 소식을 듣고, 그의 아들의 아들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겨우 요아스만 살아남았습니다. 요아스는 성전에서 6년 동안 자라게 됩니다. 아달랴가 다스린지 칠 년 째가 되었을 때 제사장 여호야다가 왕자 요아스를 백부장들에게 보입니다. 그들 중 삼분의 일은 왕궁을 지키고, 삼분의 일은 성전을 지키고, 또 삼분의 일은 요아스를 지키도록 합니다. 안식일에 성전에 들어오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이 이제 마음을 모아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여호야다는 요아스를 왕으로 삼으면서 그에게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붓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왕을 세웁니다(1-12). 아달랴는 이 소리를 듣고 반역이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여호야다는 그녀를 성전에서 끌어내어 왕궁에서 죽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에서는 누구도 죽여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야다는 왕과 백성을 모아 여호와와 언약을 갱신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신실하고 유다 백성 또한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약속입니다. 또한 왕과 백성 사이에도 서로에게 신실할 것임을 언약을 통해 확증합니다. 언약을 새롭게함으로 남 유다는 개혁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약이 새롭게 된 백성들은 그 약속을 실현으로 옮깁니다. 온 백성이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그 신당을 헐고 바알의 제사장을 처단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관리들을 세워 아달랴가 다스리는 동안 무너진 성전을 보수하게 합니다. 요아스는 왕궁에 앉아 어린 왕(7세)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게 됩니다(13-21). 비록 그는 어린 왕이지만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유다에서 심판합니다. 그녀는 바알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또 유다를 다스린 유일한 여왕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여 유다의 왕조를 회복시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제대로 지켜서 왕을 세웁니다. 여호야다는 살아 있을 동안 요아스가 바르게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제사장의 존재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모른다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제대로 왕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참된 제사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사장으로서 율법의 참된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이가 어리나 많으나 하나님께 신실함에서 오는 반응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 새롭게 하신 계명을 우리 가정과 일터에서 실천하며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5월 21일 (주일) 열왕기하 10장


예후를 통한 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합의 아들들 70명이 아직 수도 사마리아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후는 먼저 아합의 아들들의 궁중 스승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 중에 왕을 세워 싸우자고 합니다. 스승들은 단번에 승산이 없음을 압니다. 이에 왕을 세우지 않고 예후가 시키는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예후는 그 편지를 받고 각자 맡은 왕자들을 죽이도록 답장을 보냅니다. 결국 아합의 모든 아들들은 스승들에 의해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예후는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아들들의 머리를 두 무더기로 쌓아 성문 어귀에 둡니다. 뿐만 아니라 예후는 아합에게 속한 모든 자들 중에 생존자를 하나도 남기지 않습니다. 이에 엘리야의 예언이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선언합니다(1-10). 이스르엘에서 아합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죽이고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예후는 양털 깎는 집에서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아합의 왕자들과 이세벨의 아들들과 동맹을 맺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에 예후는 그들을 사로잡아 죽입니다. 또 예후는 가는 길에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와 동맹을 맺습니다. 여호나답은 북이스라엘에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이에 예후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을 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바알을 섬기는 척 하면서 모든 바알 섬기는 자를 모읍니다. 그리고 바엘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혹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있는지 확인하고 자신의 경호부대와 지휘관들에게 명하여 바알을 섬기는 모든 자들을 심판합니다(11-24). 또 바알의 신당에 있는 성으로 가서 신당의 목상들을 모두 불로 태우고, 그 신당 자리를 화장실로 만듭니다. 이로써 바알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보여줍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예후에게 사대까지 왕조를 허락하십니다(여호아하스, 여호아스, 여로보암2세, 스가랴). 하지만 예후는 여로보암이 만든 금 송아지를 벧엘과 단에서 섬기도록 하는 것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자기의 방식으로 섬기는 것은 허용한 것입니다. 예후는 나름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겼지만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점점 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후를 통해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시고 아합 가문이 섬기던 바알을 파괴하셨습니다. 아합이 바알을 섬겼던 이유는 바알이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바알의 산당을 화장실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풍요로움은 결국은 허상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의 마지막은 결국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다. 예후는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예후도 하나님을 끝까지 바르게 섬기지는 않았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정리함으로 이스라엘이 비교적 바른 길로 가도록 했지만 예후는 완전하게 개혁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하나님을 위한 열심’은 거기 까지 였습니다. 인간의 열심은 항상 한계와 부족함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열심만이 완전합니다. 우리의 열심은 예수님께서 십지가를 통해 이루신 공로에 근거할 때에만 온전해집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은혜와 공로로 새롭게된 열심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로움을 누립시다. 또 하나님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섬기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20일 (토요일) 열왕기하 9장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을 세운 엘리사는 이제 그의 제자 중 하나를 보내어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유다 왕 여호사밧과 동명이인)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엘리사가 이루는 것입니다. 예후는 이스라엘 군대 장관 중 한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 아합의 가문을 완전히 멸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주는 명령이었습니다. 예후를 통해서 아합 가문을 심판하는 것입니다(1-10). 예후가 선지자의 제자에게 들은 말을 다른 장관에게 말하자 그들도 예후를 왕으로 삼습니다.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던 아합과 이세벨,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망할 것입니다. 마침 아합의 아들 요람 왕이 아람과 싸우다가 부상하여 이스르엘에 있을 때 예후가 병거를 타고 가서 그의 왕 요람을 칩니다. 요람의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많아 평안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요람은 반역을 눈치를 챕니다. 예후는 도망하는 요람의 등을 쏘아 심장을 뚫습니다. 그가 죽은 곳은 이세벨이 속여 빼앗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땅이었습니다. 예후는 이전에 그의 부하 빗갈과 함께 하나님께서 나중에 심판하실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 그대로 요람을 그 밭에 던져 둡니다. 이제 예후는 요람과 함께 있던 유다왕 아하시야도 죽입니다. 이어서 이스라엘로 이세벨에게로 갑니다. 이세벨은 자신의 왕을 죽이고 칠일 동안 왕이 되었던 시므리를 빗대어 예후를 표현합니다. 그것은 그의 왕위가 얼마가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였습니다. 예후는 성 높은 곳에 있던 이세벨 주위의 신하들에게 자신의 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이세벨을 던지라고 합니다. 그 중 몇몇이 반응을 하였고 이세벨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얼마 후에 이세벨의 장사하려고 사람을 보내었지만 이세벨은 몸은 없어지고 머리와 발과 손만 남았습니다. 이것은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해서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30-37).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예후를 통해서 하나님은 아합의 가문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일삼던 아합 가문에 지속적으로 경고의 말씀을 하시던 하나님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 심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또한 유다 왕국에서도 영향을 끼쳐서 결국 함께 우상을 따랐고 유다 왕도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신 말씀을 그대로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약속의 땅에서 풍성함은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을 때 하나님은 축복을 약속하셨고, 어겼을 때 심판을 약속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심판으로 지속적인 반란과 심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하라고 선포하시는 긍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또한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신실한 분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그저 심판만 하는 분이 아니라 항상 긍휼을 베푸는 신실한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언약에 신실한 우리 하나님을 기억하며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혹 실수했을 때에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돌이켜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적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5월 19일 (금요일) 열왕기하 8장


오늘 말씀에서 엘리사의 활약은 계속됩니다. 특별히 이전에 죽은 아들을 살려 준 여인에게 곧 임할 칠 년의 기근에 대해서 말해주며 다른 곳으로 피해 있으라고 합니다. 그 여인은 순종하여 칠 년 동안 블레셋의 땅에 있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그런데 자기의 땅이 왕의 소유가 된 것을 보고 왕을 찾아가 그 땅을 되찾기 위한 재판을 요청합니다. 마침 그 때 엘리사의 종 게하시와 왕이 엘리사가 한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말한 기적 중에서 여인의 아들을 살린이야기를 할 때 그 여인이 들어와 게하시는 바로 그 여인이 이 여인이라고 합니다. 왕은 여인에게 물었고 왕은 그 땅을 돌려줍니다(1-6).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미리 일을 다 처리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어서 엘리사가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갔을 때 마침 아람 왕 벤하닷이 병이 들었습니다. 벤하닷은 자신이 살 수 있을지(혹은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람에게 물으려 하사엘을 보냅니다. 하사엘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에 지친 엘리야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으로 삼으라고 했던 사람입니다(왕상19:15-17). 그는 장차 자신의 왕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쳐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될 사람이었습니다(왕하13장). 엘리사는 엘리야의 남은 사역을 이행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벤하닷이 병이 나을 것이지만 하사엘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의 말대로 하사엘의 그의 왕을 죽이고 아람의 왕이 됩니다. 이후에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이 왕이 된지 5년째 해에 유다에서는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섭정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여호사밧이 노년에 병을 들어서 왕의 역할을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16). 하나님께 비교적 신실했던 아버지와 달리는 여호람은 아합의 딸과 결혼하여 여호와 보시기 악(우상숭배)을 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에 유다를 심판 하시기를 즐겨하지 않으십니다.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 했을 때 역시 그 나라는 쇠퇴합니다. 에돔과 립나가 유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합니다. 유다 나라가 힘이 강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순종할 때 승리를 주셨던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모두 아합의 가문과 연관 되어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우상을 숭배함으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람 왕 하사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왕 요람에게 부상을 입히게 만드십니다(25-29). 

 

엘리사는 이 모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사엘을 통해서 끔찍한 일이 이스라엘에 일어날 것을 알았습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슬픈 일이었습니다. 결코 자신이 사랑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결국 이스라엘을 돌이키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이해하기 어렵고 눈물이 날 정도로 인정하기 싫고 받아들이기 싫은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런 말씀 조차도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정화하시고 유익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눈물과 간구로 하나님의 뜻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일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사랑하며 순종하여 우리를 향해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18일 (목요일) 열왕기하 7장

엘리사를 잡으러 온 사람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엘리사는 내일 이 맘때에 하나님께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물가가 안정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 상황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왕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한 장관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문을 내어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그가 그 상황을 보겠지만, 그것을 먹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일은 아주 미천한 자들을 통해서 성에 전해집니다. 바로 성밖에 거주하는 나병 환자들을 통해서 입니다. 나병환자들은 무리에서 격리 생활을 하기 때문에 성 밖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으로들어 가자니 굶어 죽고, 가만히 있어도 굶어 죽을 터이니 차라리 아람 군대로 가서 항복하자고 합니다. 혹시 그들이 살려주면 살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람 군대 진영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양식과 말과 나귀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군대 소리를 듣게 하셔서 그들이 도망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나병환자들이 사마리아 성에 알렸습니다. 처음에 왕은 그것이 함정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정탐꾼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함정이 아니라 정말로 아람 군대가 도망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에 사람들은 나가서 아람 군대 진영에 있던 먹을 것들과 옷과 말과 나귀와 갑옷 등 모든 것을 노략하여 왔습니다. 그러자 엘리사의 말대로 물가가 안정이 되어 싼 값에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의 말을 믿지 못했던 장관도 성문을 지키다가 백성들에게 밟혀 죽게 됩니다. 그는 그 상황을 보게 되었지만 누리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초점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인 장관과 왕에게 있습니다. 장관 뿐만 아니라 사실은 왕도 엘리사의 말을 회의적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엘리사를 죽이려고 했던 왕은 어쩌면 엘리사의 말을 듣고 정말 그렇게 되지 않으면 죽이려고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회의적인 믿음을 철저히 깨뜨리고 놀라운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코 말씀이 주는 풍성함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말이 안되는 것이 보여도 결국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말씀이 주는 풍성함에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17일 (수요일) 열왕기하 6장

엘리사의 제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좁아졌고, 제자들은 엘리사에게 요단으로 가서 나무로 집을 새로 짓자고 제안합니다. 엘리사는 허락했고, 제자들은 엘리사도 함께 하길 간청합니다.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나무를 베다가 만 쇠도끼가 물에 빠졌습니다. 당시에 쇠도끼는 매우 귀한것으로 그 제자도 빌린 것입니다. 빌린 것을 갚지 못하면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엘리사는 나무를 던져 쇠도끼가 떠오르게 하여 다시 찾아 줍니다(1-7). 물리학을 역행하는 기적입니다. 무거운 쇠는 절대로 저절로 물 위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엘리사는 다시 한번 위기에 처한 제자를 기적을 통해서 어려움에서 구해줍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군사적인 충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떠나지 않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서 아람을 사용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우상을 버리면 승리의 삶을 주실 것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람의 공격에도 엘리사는 미리 아람 군대의 작전을 알고 이스라엘을 몇 번 구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아람 왕은 처음에는 자기의 부하 중에서 스파이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엘리사가 모든 것을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주기 때문에 그 동안 전투에서 패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엘리사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가 머물고 있는 도단을 포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엘리사의 종은 크게 두려워 하지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적인 눈은 자신을 보호하는 하늘의 군대를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환에게도 영적인 눈을 뜨게 하여 그것을 보게 합니다. 아람 사람들이 엘리사를 치러 올 때 엘리사는 그들의 생명을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여 죽이기보다 그들의 생명을 아끼려고 눈을 임시로 멀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한 가운데로 데리고 옵니다. 적진의 중앙에 놓아 포위당하게 한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 군대를 치려고 하지만 엘리사는 오히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놓아주라고 합니다(8-23). 이는 예수님께서도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여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다 죽일 수 있었지만,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의 생명을 아끼신 것과 병행을 이룹니다. 하지만 후에 아람 군대는 그 은혜를 알지 깨닫지 못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습니다. 사마리아 성을 포위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자 성 안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물가가 엄청나게 올라갑니다. 뿐만 아니라 굶어 죽을 위기에 아들을 삶아 먹는 끔찍한 일이 생깁니다. 이에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과  엘리사를 원망하고 엘리사를 죽이고자 합니다(24-33). 왕은 엘리사가 아람 군대를 놓아 준 것은 기억하지만, 어떻게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지 잊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지속적으로 이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이 이적의 목적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를 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만을 섬기는 엘리사는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영적인 안목과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은 상황에 따라서 변하며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고자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그 백성을 돌보시고 아람 군대를 무찔러줄 것입니다. 백성을 이런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들이 우상숭배를 떠나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전에 여러 이적들에도 왕과 이스라엘이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그 긍휼의 정점입니다. 긍휼이 많은 하나님은 아들을 심판하여 많은 사람들을 돌이키도록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아들을 통해서 구원하신 긍휼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시다.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16일 (화요일) 열왕기하 5장

오늘 말씀은 북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자신의 나병(한센병)을 고침 받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아람은 예전에 비해 큰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이스라엘과 싸움에서 어린 소녀를 사로 잡았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전투 중에 아람이 승리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나아만의 아내를 섬기는 그 소녀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에게 그 주인이 간다면 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고, 그 말을 들은 나아만이 자신의 왕에게 말했습니다. 아람 왕은 편지를 이스라엘 왕에서 써서 나아만 장군을 고쳐주도록 합니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이 이것을 빌미로 전쟁의 구실을 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옷을 찢어 참담함과 분노를 표현합니다(1-7). 엘리사는 그 이야기를 들었고 나아만 장군을 자신에게로 보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 것을 알게 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나아만 뿐 아니라 이스라엘 왕을 향한 메시지였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로 갔고, 엘리사는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나아만은 자신의 기대와 다른 엘리사의 말에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의 종들이 나아만을 설득하여 한 번 해 보라고 합니다. 이에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담궜고 정말로 병이 나아 아기 피부와 같이 깨끗하여 졌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감사의 표로 예물을 주려고 하지만 엘리사는 거부합니다. 그리고 나아만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합니다. 다만 자신의 왕이 섬기는 림몬의 산당에서 왕이 자신의 팔을 의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굽히는 것은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엘리사는 평안히 가라고 했고 나아만은 떠나갑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당시 아람과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고, 더구나 아무런 댓가도 없이 아람의 군대의 장관 나아만의 병을 낫게 한 것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이에 그는 거짓을 꾸며 은 두 달란트와옷 두 벌을 받아 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사실을 엘리사가 알도록 하셨고 게하시에 지금은 병을 낫게 해준 댓가로 어떤 것도 받을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게하시에게 나아만 장군의 병이 들어 게하시가 나병환자가 되어 대대로 되물림 될 것이라고 합니다(8-27). 그 때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언약적인 저주를 받아 점점 쇠퇴해 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람과 전투에서 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었습니다(1). 

 

엘리사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방인인 나아만 장군이 낫게 되는 일은 슬픈 일입니다. 본 백성은 불순종하고 하나님과 멀어지는데 이방인인 나아만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가슴 아픈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물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구약 시대에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아만은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고 믿기로 합니다. 동시에 오늘 말씀에서 엘리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위기와 징계 가운데 있을 때 그것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이적들은 한결 같이 공동체의 유익을 지향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교회 공동체 구성원은 자신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 안의 문제가 있을 때 함께 마음 아파하며 내 일과 같이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선지자적인 공동체입니다. 게하시의 행동은 공동체가 어떻게 되든지 자신의 유익만 챙기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신앙 행태를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도 열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이 또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민족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으로 구속하십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참된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기적들도 당신의 교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만 챙기는 신앙은 결코 주님께서 가르친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날 공동체로 부름 받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게하시와 같은 태도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의 상황과 영적인 상태는 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공동체를 통해서 취할 수 있는 사회적, 인간적, 정신적 유익만을 추구하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항상 자신이 중심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 공동체의 일원들은 지속적으로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고 다른 구성원의 유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것이 엘리사와 주님께서 보여주신 선지자적 태도입니다. 오늘 하루도 공동체의 유익을 나의 유익 보다 앞세우며 공동체를 살피고 기도하며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15일 (월요일) 열왕기하 4장

오늘 말씀은 엘리사가 행한 여러 기적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아내 중 한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찾아 옵니다. 그의 남편은 죽었는데, 고리대금업자들이 와서 두 아들을 데려다가 종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 과부에게 기름 그릇을 최대한 많이 빌리라고 하고 과부가 갖고 있던 한 그릇에 담겨져 있던 기름이 빌린 그릇을 다 채우기까지 나오는 기적을 베풉니다. 이에 과부는 빚도 갚고 생활비로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1-7). 또 엘리사를 위해서 음식을 제공하고 작은 방도 제공한 부자 여인에게 엘리사는 자신과 게하시를 위해서 세심한 배려를 하는 그 여인에게 없는 것, 곧 아들을 갖게 해 줍니다. 처음에 그 여인은 엘리사가 속이는 줄 알았으나 참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기르고 있었습니다. 몇 년 뒤에 그 아들이 갑자기 죽게 됩니다. 부자 여인은 엘리사를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렸고, 엘리사는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 줍니다(8-37). 뿐만 아니라 엘리사는 길갈이라는 지역에 있는 선지자들의 제자들을 방문합니다. 엘리사와 제자들은 큰 솥을 걸고 국을 끓여 먹었는데, 그 풀 중에 독이 든 풀이 있어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사가 가루를 가져다가 솥에 넣고 퍼다가 주었는데, 독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떤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와서 보리떡 이십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먹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고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대로 하였고, 말씀대로 모두에게 나누어 주고도 남았습니다(38-44). 

 

오늘 말씀에서 기록된 엘리사의 일련의 기적들을 정리해 보면, 첫번째는 빚을 갚아 준 기적입니다. 둘째 기적은 죽은 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세번째와 네번째는 먹을 것을 주는 기적이라는 점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기적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과 매우 유사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적으로 통해서 당신께서 참된 생명을 주는 음식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엘리사가 행한 기적들과 예수님의 기적들은 자기 과시용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빚을 대신갚아 주는 것이 구속입니다. 죄의 빚을 주님은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 생명을 가져다가 주는 이적 중에서 이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이적을 동반합니다. 거창해 보이지 않을지라도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며 신자들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이적의 결과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고, 삶의 변화와 하나님과 관계 개선이라는 놀라운 이적이 일으키는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실천하며 날마다 이적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14일 (주일) 열왕기하 3장

유다 왕 여호사밧이 다스린지 18년째에 아합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여호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했지만, 그래도 그의 부모와 같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 아합이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숭배를 하게 하고 성전의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도록 한다는 면에서는 다름이 없었습니다(1-3). 모압은 양털을 조공으로 바침으로 북이스라엘을 섬기고 있었는데 여호람이 다스리던 때에 모압 왕이 독립을 시도합니다. 이에 여호람은 군대를 모으고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동맹을 요청합니다. 여호사밧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에돔 광야 길을 통과하여 모압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이에 에돔 왕도 함께 합세를 합니다. 세 나라 연합국은 모압을 치러 갑니다. 그런데 광야 길로 칠 일을 동안 갔을때 군사와 가축을 먹일 물이 없어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여호람 왕은 하나님께서 세 왕을 모압 왕의 손에 넘기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물어볼 사람을 찾습니다. 엘리사가 근처에 있었고 세 왕은 엘리사를 만나러 갑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여호람에게 아버지 아합이 섬기던 바알과 어머니 이세벨이 섬기던 아세라의 선지자들에게 가서 물어보지 왜 왔냐고 합니다. 여호람은 이렇게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인정하고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당시 개혁을 통해서 부패한 유다를 바로잡고자 했던 여호사밧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만나 주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경건한 여호사밧의 통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제 현악기를 탈 자를 불러 오라고 하고 현악기를 연주할 때 엘리사에게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15). 골짜기에 땅을 많이 파면 그곳에 물이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채워질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오히려 작은 일로 모압 사람도 전멸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아침에 물이 에돔에서 흘러나와 그 개천을 메웠습니다. 또 후에 이것을 피로 착각하고 방심한 채로 적진에 뛰어든 모압 군사는 크게 패합니다. 연합군은 모압의 여러 성읍들을 파괴하고 좋은 밭에 돌이 가득하게 만들고 좋은 나무도 베고 샘도 메웁니다. 이것은 그 땅을 사람이 살지 못할 땅으로 만들어 버리는 매우 무자비한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궁지에 몰린 모압 왕은 자신의 아들을 번제로 드리고 그 때 이스라엘에 큰 격노함이 있어 동맹국의 왕들과 군사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광야에서 개천을 많이 파면 하나님께서 물로 채우실 것이라는 말은 믿기 쉬운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 왕들은 그대로 하였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식으로 물과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승리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도를 넘어서 모압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순종하여 개천을 판 것은 잘한 행동이었으나 엘리사의 말대로 성읍을 헐고 좋은 나무를 베고 샘을 메우는 행동은 필요이상으로 잔인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성을 에워쌀 때 과실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했습니다(신20:19). 엘리사의 말은 그대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모압을 넘겨 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임한 격노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으로 그만하면 족하다는 의미였습니다. 모압 왕이 그모스 신에게 아들을 바치는 인신제사를 드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때로 단순하고 쉬운 말씀도 있지만, 때로는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필수 적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바르게 깨달아 바른 온전한 순종과 승리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5월 13일 (토요일) 열왕기하2장

오늘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십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길갈에 머물라고 하고 벧엘로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서 벧엘로 갑니다. 벧엘에 선지자의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리고 가실 것을 알고 엘리사에게도 알고 있느냐고 합니다. 엘리사는 알고 있으니 잠잠하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다시 여리고 갑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벧엘에 머물라고 하지만 다시 엘리사는 엘리야와 함께 합니다. 그곳에서도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에게 같은 질문을 했고 엘리사도 동일하게 대답합니다. 엘리야는 제자들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자기 겉옷을 벗어 요단 물이 가르고 엘리사와 함께 갑니다(1-8). 요단강을 건너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데리고 가시기 전에 엘리사에게 어떻게 할 지 구하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성령의 역사가 엘리야 보다 두배로 많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엘리사의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가 떠난 후에 엘리사가 맡아야 할 사역이 그만큼 성령의 큰 능력을 필요하다는 것을 엘리사가 알았기 때문에 이런 요구를 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엘리사가 보게 되면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길을 걷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데리고갑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말씀으로 지키는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 이 헤어짐에 엘리사는 무척 슬퍼합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예언대로 엘리사는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고, 엘리야를 이어 선지자 사역을 하게 됩니다. 엘리사는 옷을 찢으며 슬픔을 표현한 후 엘리야의 겉옷을 가집니다. 겉옷은 권위를 상징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권위를 이어 받은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갈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가장 먼저 정복하고 완전히 무너진 여리고에 갑니다. 그곳은 폐허와 죽음을상징했던 도시입니다. 아합 때에 재건되어 선지자의 제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곳의 제자들은 성령의 역사가 엘리사에게 물렀음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경배합니다(15). 하지만 선지자의 제자들은 그들 중 용감한 자 오십 명이 있으니 그들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아 보도록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처음에 엘리사는 거절하지만 결국 허락합니다. 삼일 동안 찾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엘리야는 확실히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재건된 여리고 성읍은 여전히 죽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물에 문제가 있어서 땅에서 나는 열매가 익지 못한 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물의 근원으로 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을 다시 고쳐 죽음이 없도록 합니다. 한편 엘리사는 벧엘로 가는 길에 어떤 젊은 청년들이 엘리사도 엘리야와 같이 하늘로 올라가보라며 조롱합니다. 이에 암곰 둘이 나와서 그들을 죽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가게 되고 엘리사는 그를 이어 선지자가 됩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을 알게 된 선지자의 제자들은 그것을염려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승천은 엘리사에게 갑절의 영감을 주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는 말씀의 능력으로 여리고 물을 회복하므로 토산이죽음을 이기고 생명(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말씀을 무시하고 승천을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엘리사는 말씀과 이적으로 여리고에 생명과 심판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승천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미리 보여 주는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의 이야기를들은 제자들은 걱정하고 염려하였지만, 승천하신 주님은 성령을 보내어 주셨고, 더 큰 능력으로 생명과 심판의 말씀을 제자들은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말씀과 심판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죽음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 여리고의 토산과 같은 자들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말씀을 끝까지 거절하고 조롱하는 자들은 죽음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무서운 심판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감사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여 함께 참된 생명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12일 (금요일) 열왕기하 1장

아합을 이어 왕이 된 아하시야는 여전히 아합과 같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블레셋에 속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자신이 나을지 물으러 자신의 종들을 보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엘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세붑에게 물으러가느냐고 책망합니다(1-4). 아하시야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세붑을 의지하기 때문에 병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엘리야는 아하시야의 종들에게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하시야는 엘리야를 잡으러 오십 명의 부하를 거느린 오십 부장을 보냅니다. 첫 오십 부장이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는 것은 일종의 조롱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자신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사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 두번 반복됩니다. 세번째 오십부장은 정말로 두려움을 가지고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생명을 귀히 보도록 부탁합니다. 이에 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왕에게 직접 가서 그가 바알세붑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라고 전하라고 합니다. 이에 엘리야는 왕에게 그렇게 전하였고, 그대로 됩니다(5-16). 아하시야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흥미롭게도 그가 왕이 되었을 때에는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된 후 2년째였습니다. 두 왕이 이름이 똑같습니다(17-18). 

 

 

우리가 의지하고 살아가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아하시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우상 바알세붑에게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요청하기 위해서 종들을 보냅니다. 당시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쇠퇴하고 주변 나라가 성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왕은 그의 나라가 약하여 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보다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신들은 우상일 뿐입니다. 참된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11일(목요일) 열왕기상 22장


아람과 이스라엘, 그리고 유다 사이에 전쟁이 없이 평안하게 3년 동안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합은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이에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러 가자고 합니다.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께 묻고 싶었습니다. 아합은 선지자 400명 쯤 모아 물었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그 성읍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사밧은 다른 선지자가 더 없는지 묻습니다. 아합은 늘 자신에 대해서 좋지 않은 것을 예언하는 선지자 미가야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에게 당연히 선지자는 좋은 소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사밧은 그에게도 물어보자고 합니다. 미가야는 처음에는 아합에게 성읍을 치러 가라고 하지만 나중에 제대로 대답하라고 왕이 말했습니다. 그 때 미가야는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산에 흩어져 있는 것 같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왕이 죽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들이 하는 예언은 거짓 예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다른 선지자들에게 보내어 거짓으로 예언하게 하고, 아합을 죽이려고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확신에 차 있던 그나아나의 아들 선지자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뺨을 치며 여호와의 영이 자기를 떠나서 미가야에게 말씀 하셨을리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자신의 소유처럼 말합니다. 미가야는 시드기야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날에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아합은 미가야를 왕자 요아스에게로 보내어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게 하라고 가둡니다. 

 

결국 아합과 여호사밧은 다수의 선지자의 말을 듣고 길르앗 라못을 치러 갔습니다. 아합은 그 전쟁에서 변장을 했지만, 무심코 쏜 화살에 맞아 죽음을 맞이합니다. 무심코 쏜 화살은 그를 일부러 죽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막 쏜 화살에 맞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시기로 작정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우연히 맞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우연히'라는 말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그는 자신의 병거에서 피흘리며 전장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그날 전쟁이 매우 결렬하여 나갈 수 없었고, 병거 위에서 죽었습니다. 그를 태운 병거가 이제 사마리아까지 와서 아합을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병거를 씻을 때에 병거에 고여 있던 아합의 피를 개들이 와서 핥아 먹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왕상21:19). 아합을 이어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아하시야도 어머니 이세벨과 같이 바알을 섬기고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습니다(51-53). 유다 왕 여호사밧은 상대적은 선한 왕이었지만 그래도 완전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 시대에 남아있던 우상 신전의 남자 창기들(남색하는 자)을 없앴지만 산당을 없애지는 않은 부족한 왕입니다(41-50).

 

오늘 말씀에서 두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아합은 그 전쟁에서 죽으므로 하나님께서 아합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그의 예언이 옳았습니다. 또 하나는 엘리야의 예언입니다. 아합이 죽은 피를 개들이 사마리아에서 핥아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나의 바램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아합이 죽는 상황들을 무신론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저 우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우연이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합은 자기 나름대로 말씀(미가야의 예언)을 부정하기 위해서 변장하는 방법을 고안하지만 그의 계획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의 삶을 우연에 맡기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섭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고자 하는 성도들을 아버지와 같은 손길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아버지와 같은 손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10일 (수요일) 열왕기상 21장

아합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왕으로서 마음대로 행하는 사건이 또 발생합니다. 바로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는 사건입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왕궁(왕의 겨울 별장)과 가까이 있었습니다. 이에 아합이 나봇에게 그 포도원을 자신에게 팔아 채소밭을 삼게 하라고 합니다. 나봇은 그 포도원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께로 분배 받은 땅으로 사고 팔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나봇의 말대로 하나님의 율법에서 금하는 것이었습니다(신명기 19:14). 이에 아합은 근심하고 답답하여(침울하여) 밥도 안 먹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합은 그래도 하나님께서 금하셨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줄 몰라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이세벨은 나봇을 모함에 빠뜨려 죽이고, 대신 왕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 사악한 여인입니다(1-6). 이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십니다. 하나님은 아합이 또 죽이고 빼앗은 것을 책망합니다. 왕으로서 자기 마음대로 백성들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세벨이 일을 꾸몄지만 그대로 받아들인 아합 역시 같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엘리야는 돌아 맞아 죽은 나봇의 피를 개가 핥아 먹은 것 같이 아합의 피도 개들이 핥아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식이 다 죽어 왕조가 끊긴 여로보암의 집과 같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어 이세벨에 대해서 저주를 하십니다. 이세벨은 죽으면 그 시체를 개들이 먹을 것입니다. 또 아합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의 시체는 개와 새가 먹게 될 것입니다. 아합은 이세벨의 꾀임에 빠져 온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를 하게 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7-27). 아합은 이 모든 말을 듣고 겸비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서 기가 죽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셔서 재앙을 그의 아들 시대에서야 내시겠다고 하십니다(28-29).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뺏거나 혹은 돈으로 사려고 하는 것은 작은 죄가 아닙니다. 가나안 이방인들의 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의 땅을 뺏거나 거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달랐습니다. 땅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자기 땅을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었고, 팔아서도 안되며, 혹 부득이 담보가 잡혔을 때에는 매 오십 년 마다 본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왕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자였고, 백성에게 이스라엘의 참된 왕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어야 하는 자입니다. 또 땅의 참된 주인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이로써 왕의 모습을 통해서 참된 평화를 가져다 주는 메시야적 사역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합은 이방인 왕의 모습을 쫓아 갔습니다. 섬기는 왕이 아니라 지배하는 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우상 숭배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불신자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왕으로서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참된 평화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왕이신 예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참된 왕의 방식으로 사셨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섬김과 그의 길을 생각하며 불신자와 같은 삶을 버리고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주님의 길, 말씀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5월 9일 (화요일) 열왕기상 20장

오늘 말씀은 아합과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에서 엘리야가 등장하지 않고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아람 왕 벤하닷은 그의 군대를 모아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둘러쌉니다. 아람은 다른 왕 32 명과 연합하였기 때문에 그 위세는 대단했을 것입니다. 먼저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 아람 왕은 메신저를 보냈습니다. 왕에게 속한 은과 금, 아내들과 자녀들을 넘기라고 합니다. 처음에 아합은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람 왕은 다시 메신저를 보내어 왕과 신하의 집을 하나하나 수색하여 마음에 드는 것은 다 가지겠다고 합니다. 아합 왕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다시 아람 왕은 그러면 사마리아의 부스러진것이 족하지 않게 될 것이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마리아를 멸망시키겠다는 협박입니다. 아합은 갑옷 입는 자가 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한다는 말은 갑옷을 입고 싸워 보기 전에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길고 짧은 것은 대어봐야 안다는 말입니다. 싸움의 의지입니다. 이에 아람 연합군과 이스라엘은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1-12). 그 때 한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큰 무리들을 아합의 손에 넘기심으로 당신께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겠다고 합니다.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앞세워 그렇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정오에 청년들은 앞서 나갔고 결국 아람을 무찌르게 됩니다. 그 선지자는 아합 왕에게 잘 정비하여 겨울 우기가 끝나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다시 올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아람에서는 그들이 왜 패배했는지 분석합니다. 결론은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인데 그들이 산에서 싸웠기 때문에 졌다는 것입니다. 당시 다신교 문화에서 생각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지 특정한 지역만 다스리는 제한적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해가 바뀌어 아람과 이스라엘이 평지에서 싸울때에도 승리를 주심으로 그것을 친히 나타내 보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아람 군인들이 숨은 성벽도 무너지게 함으로 이 싸움이 단지 이스라엘의 군사력으로 이긴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여호와 하나님, 조상들이 섬겼던 바로 그 하나님임을 드러내시고자 합니다(28). 

전쟁에서 패하여 숨은 왕과 신하들은 이스라엘 왕은 자비로운 왕임을 기억하고 그에게 용서를 빌자고 합니다. 아람 왕은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이스라엘 왕 앞으로 나아갑니다.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는 것은 큰 슬픔이나 비통함, 혹은 겸손과 참회를 표현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 아합은 그렇게 나아오는 아람 왕이 옛 성들을 돌려주겠다고 하자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아 줍니다(34). 이에 선지자는 동료를 통해 자신을 상하게 만들고 왕 앞에 나아가 행동과 이야기로 왕의 잘못을 책망합니다. 아합은 하나님께서 멸하기로 한 사람을 놓아 준 것입니다. 이에 아람 왕을 대신하여 아합의 생명을 찾겠다고 합니다(31-43). 여기서 멸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은 멸하라고 명령했다는 말입니다. 

 

아합은 전쟁에서 승리를 통해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왕이심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우상 숭배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친히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고, 또 그 일을 아합의 눈 앞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여 충분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아합은 끝내 그렇게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유익한 조건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경우는 없는지 되돌아봅시다. 다시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5월 8일 (월요일) 열왕기상 19장

아합은 궁으로 돌아가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어떻게 바알의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죽였는지 말했습니다. 이를 듣고 이세벨은 종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복수를 다짐합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을 피하여 유다 지파에 속한 브엘세바로 갑니다. 그곳에서 자기의 종을 머물게 하고 자신은 더 남쪽으로 내려가 호렙 산, 곧 모세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시내 산으로 갑니다. 하지만 그는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가다가 무척 지쳤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취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잠이 듭니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깨우며 먹을 것을 줍니다. 먹고 다시 잠이 듭니다. 다시 천사가 깨워 먹을 것을 줍니다. 이렇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것은 그가 가야할 길을 다 가지 못할까봐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마침내 시내 산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왜 그곳에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열심과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말씀드립니다.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유별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언약을 버리고 주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이제는 자신의 목숨도 찾는다고 합니다(1-9).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 전에 바알이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알았지만, 금새 잊고 이세벨을 중심으로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호렙 산에 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지나가십니다. 지나가시며 바람과 지진을 일으키시지만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 후에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왜 여기있냐고 묻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고, 오직 자신만 남았는데, 그들이 자신의 목숨도 찾는다고 이전과 똑같이 말합니다(14). 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돌아가서 다메섹에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으로 삼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를 삼으라고 합니다.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를 통해서 엘리야의 목숨을 건질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 신실한 백성 칠천명을 남길 것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홀로 남겨진 것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을 통해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들을 남기실 것입니다(15-18).  

엘리야는 쟁기를 끄는 열두 쌍(24마리)의 소와 함께 있는 엘리사를 만나 기름을 부어 자신을 이어 선지자가 되게 합니다. 그 이후에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다니며 수종을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에 지치고 닥친 두려움에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엘리야를 격려하시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광야에서 지쳐 포기할 뻔한 엘리야에게 물과 음식을 공급하십니다. 또 강함 바람과 지진과 불을 내시지만 그곳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심으로 없는 것 같이 느껴지게 하십니다. 하지만 그 후에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주님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오직 홀로 남은 것 같은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미 신실한 7천명을 남기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고 역서하시지 않은 것 같고 주님의 백성이 없는 것 같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시며, 역사하시고 백성을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때로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계시지 않는 것 같을 때에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시고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으로 위로와 힘을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7일 (주일) 열왕기상 18장

많은 날이 지난 후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아합에게로 보내시어 비를 주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아합의 관리 오바댜를 먼저 만납니다. 오바댜는 그의 주인 아합과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아합의 왕비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죽일 때 하나님의 선지자 백명을 오십 명씩 나누어 숨겨주고 물과 양식을 주었던 경건한 사람입니다(1-6). 하나님께서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런 경건한 자를 통해서 지켜 주셨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아합에게 가서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바댜는 이전에도 아합이 엘리야 선지자를 잡으려고 많은 도시를 찾았다가 못찾으면 그 도시 사람에게 그를 못 봤다는 목숨을 건 맹세를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를 보았다고 했다가 혹시 엘리야가 하나님에 의해서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자신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오바댜를 안심시키고 아합을 데리고 오도록 합니다(7-15). 

아합은 엘리야를 보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조롱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아합은 이것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엘리야가 바른 말씀을 전한 것 때문이 아니라 아합과 그의 아버지 오므리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백성들에게 우상을 숭배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가뭄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언약적인 심판이었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더욱 정확하게 참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보여줍니다. 그는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지 말고 참된 신을 택하여 섬기라고 합니다. 갈멜산은 비의 신인 바알에게 봉헌되었던 산입니다. 그곳에서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면 바알이 비를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삼 년 째 비가 없는 것을 바알의 선지자들은 나름대로 둘러댔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호와의 선지자, 특히 엘리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죽어야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이 갈멜에 모였습니다. 먼저 송아지 두 마리를 조각을 내어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내려주는 신이 참된 하나님이라고 믿자고 합니다. 모두 동의했습니다. 먼저 바알의 선지자들이 송아지를 나무에 놓고 바알 신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했습니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더 크게 바알을 불러 보라고 조롱합니다. 바알 신이기 때문에 졸거나 어디에 외출하거나 할 수 없지만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조롱하는 것입니다. 결국 바알의 선지자들이 그들의 규칙대로 자해까지 하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16-29). 

엘리야 차례가 되었을 때 백성들을 다 불러 모으고 가까이 나오도록 합니다. 엘리야는 가장 먼저 그동안 잊혀져서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아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세웁니다. 기근이 있을 동안 사람들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보다 바알에게 제사했던 것입니다. 열 두 지파의 수대로 돌을 취하여 제단을 수축합니다. 그리고 도랑을 만들고 송아지 위에 물을 흠뻑 붓습니다. 불을 감추어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어떤 현상도 그 제물을 태울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초자연적인 참 하나님의 개입만이 그 제물을 태울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저녁 소제를 드리는 시간에 맞추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야곱)의 언약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내용도 명확했습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과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임을 나타내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는 모세가 부름을 받을 때 알려주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 뿐만 아니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물까지도 증발시켰습니다. ‘번제물’이라고 표현된 것은 엘리야가 그동안 무너진 제사, 곧 예배를 회복시킨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백성들에게 그동안 백성을 속여온 거짓 신을 섬기게 만든 바알 선지자를 처단하도록 합니다(30-40). 그리고 엘리야는 비를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땅에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는 행동은 아주 겸손한 자세로 응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국 큰 비가 내렸고 엘리야는 성령의 능력을 입어 아합 왕의 마차 앞으로 달려갑니다(41-46). 

 

오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신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시라면 우리 또한 그분 만을 섬겨야지 헛된 다른 신을 섬기면 안됩니다. 다른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 우물쭈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는 참된 고백을 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온전히 살아가야 합니다. 그 시작은 우리 삶에서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와 가정 예배 그리고 삶의 예배를 회복하고 참된 하나님이신 삼위 하나님만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6일 (토요일) 열왕기상 17장

가장 악랄한 왕 아합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 한 사람인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통해서 엘리야의 말이 다시 있기 까지 수 년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않도록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기십니다. 그곳에서 시냇물을 마시게 하고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고기를 아침 저녁으로 가져다 주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자 그 시내 마저도 마릅니다(1-7). 하나님은 다시 엘리야를 시돈에 속한 사르밧의 한 과부의 집으로 보내십니다. 그곳 성문에 도착하자 마침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을 조금 달라고 합니다. 가뭄으로 시냇물까지 마르는 상황에서 물을 조금 가져다 달라는 것은 아주 큰 부탁입니다. 게다가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하는데, 엘리야는 더 무리한 부탁을 합니다. 떡도 달라고 합니다. 과부는 떡이 없고 가루만 조금 있는 데, 그것은 과부와 아들이 마지막 식사를 위한 것입니다. 그 과부도 가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것으로 먼저 작은 떡을만들어 자신에게 주고 그 다음에 과부와 아들을 위해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비를 내리기 전까지 그 통의 가루가 멈추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과부는 엘리야의 말을 믿고 그대로 했고, 정말로 말씀대로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8-16). 이 일 후에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과부는 엘리야를 원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그 아들을 달라고하여 자기 침상에 누이고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 위에 세 번 몸을 덮으니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그제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가 전하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임을 고백합니다(17-24).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어 말씀이 있기까지 다시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엘리야를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시고 일정기간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아합에게 가장 큰 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하도 듣지 않으니 아예 말씀을 감추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에게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과부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말씀을 거부하는 아합과 온 이스라엘은 먹을 것이 없지만, 말씀에 순종하는 과부와 엘리야에게는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과부는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찾게 되는, 생명을 얻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를 책임지시고 붙드십니다. 오늘 하루도 이 사실을 기억하며 참된 믿음을 보기 힘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5일 (금요일) 열왕기상 16장

바아사는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다윗의 길이 아닌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예후를 보내어 그에게 여로보암의 집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식 중 한 명이 왕위를 잠깐 이어 받지만 결국 아들들이 다 죽고 다른 사람이 왕위를 이어 받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아사에게 속한 사람들이 죽으면 그들의 시체를 장사해 주지도 않아 개와 새가 먹게 될 것입니다(1-4). 바아사가 죽고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부하 시므리를 통해서 살해를 당하게 하심으로 심판하십니다. 시므리가 대신하여 왕이 된 후 예후의 예언대로 시므리는 바아사에게 속한 모든 친구와 가족 중 남자를 모두 죽입니다(11-12). 바아사와 엘라의 우상숭배의 죄로 인해 끔찍한 최후를 맞이 합니다. 하지만 시므리의 통치는 단 칠일에 불과합니다. 군대의 다른 지휘관 오므리가 사람들을 모아서 시므리를 공격했고, 시므리는 성이 포위되자 성에 불을 질러 스스로 최후를 맞이 합니다(15-20). 시므리가 죽은 후에 오므리와 디브니가 왕위 쟁탈전을 벌이고 결국 오므리가 승리하여 왕이 됩니다. 그리고 오므리는 세멜에게서 성읍을 사고 그곳을 사마리아로 부르며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오므리보다 더 유명한 왕은 그의 아들 아합입니다. 무엇으로 유명하냐 하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기로 유명한 왕입니다. 아합은 다른 이스라엘 왕보다 더욱 여로보암의 악을 행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면서 심지어 그것을 가볍게 여깁니다. 뿐만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시돈 공주와 결혼하여 사마리아에 바알을 위한 신전을 만들고 아세라 상을 만듭니다(29-33).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왕인지 보여주는 결정적인 것은 그의 시대에 여리고를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여리고는 여호수아에 의해서 정복된 첫번째 성으로 누구든지 그 성을 재건하는 사람은 그 맏아들과 막내를 잃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히엘이 그 터를 쌓을 때 맏이를 잃었고 성문을 세울 때 막내를 잃었습니다(3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보내어 돌이키도록 긍휼을 베푸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의 지속적인 우상숭배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선지자를 보내어 경고하심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무시하며 사는 왕을 포기하지 않고 경고의 말씀을 주심으로 돌이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왕들은 돌이키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적인 저주를 당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끝이 없지만, 인간이 끝까지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은 그대로 임하게 됩니다. 경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훈계하실 때 하나님의 긍휼임을 기억하여 죄에서 돌이키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5월 4일 (목요일) 열왕기상 15장

르호보암을 이어 남 유다에서 아비얌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삼 년 동안 다스렸는데, 하나님께 정직하지 못한 왕이었습니다. 르호보암을 이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에 등불을 끄지는 않으십니다. 다시 말해 그 자손을 통해서 계속 왕이 나올 것입니다. 왕조는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취한 것 외에는 평생에 하나님께 신실했었습니다. 그의 길로 따르는 왕은 경건한 왕으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아비얌이 죽고 그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되었습니다. 아사는 그의 아버지보다 훨씬 훌륭한 왕입니다. 그는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습니다. 남색하는 자들(남성 창기)을 그 땅에서 쫓아내고 우상을 없앴습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가 아세라 상을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자 태후 자리도 폐위하고, 우상을 찍어 불살랐습니다. 그는 일평생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1-15). 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과 전쟁에서 위기에 몰리자 그는 성전에 남은 금과 은을 아람 왕에게 보내어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의 군대를 의지하는 행동이었습니다(대하16:7-10). 다윗과 마찬가지로 경건한 왕이지만 오점을 남기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41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한편 북왕국은 아사가 왕이 된 2년째 해에 여로보암이 죽고 그의 나답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아버지와 같은 길로 갔고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에 잇사갈 족속 바아사가 그를 배신하여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나답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바아사는 왕이 된 후 여로보암에게 속한 모든 아들들을 죽였습니다. 왕위를 찬탈한 것에 대해서 이후에 적통을 따지며 자신의 왕위에 대한 이견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왕상14:10). 바아사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24년간 다스립니다. 그는 여로보암의 아들들을 모두 죽여 그 혈통을 끊었지만, 그 역시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우상숭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23-34). 북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우상 숭배를 하게 되고 끊임 없이 반역이 일어나고 전쟁이 멈추지 않는 역사를 앞으로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이후의 열왕기서 이야기에서는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왕에 대한 이야기를 번갈아 가면서 소개하게 됩니다. 유다 왕 아사는 비록 완전하지는않지만 우상숭배를 없애고 유다 땅에서 남창을 없애는 개혁을 단행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중간에 넘어지고 부족함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우상숭배로부터 멀어지도록 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인도한 왕으로 평가 받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나답은 여로보암의 적통입니다. 바아사는 반역을 통해서 왕이 됩니다. 하지만 둘 다 우상숭배를 떠나지 않고 여전히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이끈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은 지속적으로 대조가 될 것입니다. 다윗의 부족한 길은 다윗의 자손이신 참된 왕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하십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단 한번도 실수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셨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길로 믿는 자들을 인도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믿는 자들은 연약함으로 넘어지기도 하지만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개혁하는 길을 걸어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3일 (수요일) 열왕기상 14장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의 말과 일을 듣고도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고 범죄를 계속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 아비야가 아픕니다. 여로보암은 아내에게 변장하여 자신에게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선지자 아히야를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 손에 떡과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당시 선지자를 만나러 갈 때 선지자를 위한 평범한 수준의 선물들이었습니다. 아히야는 노안으로 시력이 좋지 않았지만, 변장한 아내를 알아차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의 아들 중에서 오직 그 아들만 험한 일을 보지 않고 평안히 죽게 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여로보암이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워주신 것과 다윗 왕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또 우상을 숭배하고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가나안 족속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10-16). 교회가 세상을 본받아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을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16).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로보암의 아내가 집에 도착했을때 그 아이가 죽습니다. 여로보암은 2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죽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나답이 대신하여 왕이 됩니다.

한편, 남유다에서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17년 동안 다스렸는데 그가 다스리는 동안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가장 뛰어나게 악을 행합니다. 북이스라엘과 같이 그들도 우상을 숭배했고, 심지어 남성동성애가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시삭을 통해서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기도록 하십니다. 다시 한번 성전의 화려함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습니다. 르호보암도 죽어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비얌이 대신하여 왕이 됩니다(19-31). 유다와 이스라엘에 전쟁이 있고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않을 때 내리는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여로보암은 선지자에게 아내를 보내어 아들에 대한 좋은 예언을 기대했습니다. 좋은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해야 할 것은 아내를 선지자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무시하면서 다른 어떤 좋은 것을 하나님께 기대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르호보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둘 모두 하나님과 더불어 우상을 섬기고,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혼합종교를 통해서 예배의 타락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의 삶과 예배의 목적은 우리의 만족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지키며 예배할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예배의 목적입니다(고후10:5).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향해 높아진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5월 2일 (화요일) 열왕기상 13장

이제 하나님께서는 북왕국 여로보암을 책망하고 돌이키도록 하시기 위해 유다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보냅니다. 마침 벧엘에서 여로보암은 왕인데도 제사를 드리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해서 저주하는 것은 제단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이 만든 우상들과 이방적인 방식 모두에 향해서 저주하는 것입니다. 후에 요시야(여호사밧)이 사마리아와 벧엘의 우상과 산당을 부수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왕은 그런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라고 손을 뻗었고, 그 손이 마르게 됩니다. 그러자 왕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부탁하여 손이 다시 정상이 될 수 있도록 요청하였고, 정상이 되었습니다. 이에 왕은 하나님의 사람을 식사 자리에 초청하여 예물을 주려고 하지만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사람에게 벧엘에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1-10).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한편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을 통해서 유다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늙은 선지자는 그를 찾아 나섰고, 길에서 만났습니다. 늙은 선지자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을 자신의 집에 식사 초대를 합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의 초대를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하지만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천사가 자신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초청하라고 했다고 속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의 집에서 떡을 먹게 되고, 그때 진짜로 하나님의 말씀이 늙은 선지자에게 임하여 책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들의 묘에 함께 묻힐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그 말은 이루어졌습니다. 나귀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사자가 나와서 그를 물어 죽였습니다. 나귀를 먹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이 일이 하나님으로 인해 생긴 일임을 보여줍니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가져다가 자기 성읍으로 데리고 와 자기의 묘에 두고 슬피 웁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나중에 자신의 뼈를 하나님의 사람의 뼈에 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말한 것이 모두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11-32). 하지만 여로보암은 이 일 후에도 돌이키지 않고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며 원하는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아 결국 그 집이 망하게 됩니다(33-34).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을 돌이키기 위해서 유다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늙은 선지자의 이야기는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임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죽게 되는 이야기 입니다. 이것은 여로보암이 하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백성을 속여서 하나님의 백성을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것을 그의 죽음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 후에도 여로보암은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그 집안은 끊기게 될 것입니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은 여로보암 왕을 돌이키기 위한 확실한 징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죽음을 통해서 죄인인 여로보암을 구원하시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결국 거부한 것입니다. 

참된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실패하지만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목마름과 굶주림에서 승리하십니다(마4:2-4).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최고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거부하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참된 선지자이자 의인을 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살아갑시다. 또 우리 삶에 대해서 경고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돌이키는 거룩한 삶을 이어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1일 (월요일) 열왕기상 12장

솔로몬을 이어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하셨던 여로보암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백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여로보암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왕 르호보암에게 가서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 그리고 요새들을 건축하며 들인 백성의 노역을 감해 주기를 청합니다. 그렇게 하면 영원히 르호보암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합니다. 이에 르호보암은 삼 일 후에 다시 오면 답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 사이 늙은 조언자들에게 조언을 듣고, 젊은 조언자에게 조언을 들었습니다. 늙은 조언자들은 왕이 백성을 섬기며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면 영원히 그들이 왕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젊은 조언자들은 아버지 보다 더 강압적이고 억압적으로 그들에게 노역을 시키라고 합니다. 삼 일 후 르호보암은 젊은 조언자들의 조언을 따랐고, 결국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을 배반하고 여로보암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습니다(1-20). 오직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르호보암을 따릅니다. 나라가 나뉘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이 이루어 진 것 입니다. 르호보암을 따르는 유다와 베냐민이 나머지 지파와 싸워 무력으로 통일을 시키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를 통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21-24). 이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로보암은 북쪽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언제 백성들이 남쪽 유다로 내려갈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는 북쪽에도 금 송아지 둘을 벧엘(북이스라엘의 남쪽)과 단(북이스라엘의 북쪽)에 둡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사람들을 제사장을 삼고, 임의로 유다의 절기와 유사하게 절기를 정합니다. 북왕국 시작부터 여로보암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왕국을 주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라고 하셨지만 시작부터 불순종합니다(25-33).

 

솔로몬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허용하는 외교정책을 통해서 왕국을 유지했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라는 둘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11장에서 말씀하신 것들입니다. 여로보암에게 왕이 될 것을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을 때 분명히 조건이 있었습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견고한 집을 세워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왕상11:38). 하지만 여로보암은 그 출발에서부터 불순종을 저지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보다 유사 종교적 중심지를 북왕국에 만듭니다. 게다가 금송아지도 만듭니다. 여로보암은 종교적인 중심지를 북왕국에도 세움으로 백성의 마음이 남유다로 향하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보다 종교적인 만족감과 안정감을 주기 위해 가나안 족속들의 방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결국 온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는 길로 행하도록 만든 끔찍한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너무나도 쉽게 떠나고 맙니다. 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무엘의 교훈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거짓된 종교적 만족감과 안정감으로 백성에게 거짓 위로를 줍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종교생활을 하면서 느끼게 되는 거짓된 종교적 만족감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함에서 오는 참된 만족감을 누려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참된 만족감과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4월 30일 (주일) 열왕기상 11장

최고의 지혜와 부와 영광을 누리던 솔로몬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그에게 첩과 아내가 많았다는 것은 그가 외교력을 의지했다는 뜻이며, 그 아내들을 통해서 이방 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금지한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이집트의 신들과 아스다롯과 암몬 자손의 신인 밀곰(신의 이름)과 몰렉을 섬기고 모압의 신 그모스을 섬기게 됩니다. 특히 몰렉은 어린 아이를 바치는 인신제사를 드리던 가나안 땅에서 반드시 없애야 할 종교였습니다. 성전을 지은 바로 그 솔로몬이 이방 신을 위해 산당을 짓습니다(1-8). 이전에 두번이나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을 잊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 나라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약속한 영원한 왕조 때문에 열 지파 중 유다 지파는 솔로몬의 아들에게 주어 다윗에게 약속한 것은 깨어지지 않도록 합니다(9-13).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자 그의 강력한 힘은 점차 쇠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을 대적하게 하십니다. 또 소바 사람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을 대적하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탁월한 신하 중 한 명인 여로보암에게 나라의 열 지파를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여로보암에 미리 말씀하십니다. 여로보암에게도 솔로몬에게 한 동일한 약속을 하십니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율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다윗과 같이 대해 줄 것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이 사실을 알고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합니다(40). 마치 사울이 하나님께 선택 받은 다윗을 죽이려 한 것 같이 행동합니다. 사울의 그림자가 솔로몬에게서 보이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솔로몬은 결국 죽게 되었고, 아버지 다윗의 성에 장사됩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이어서 왕이 됩니다(41-43). 

 

솔로몬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이방신들도 섬기게 됩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부와 영광을 다른 신을 섬기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대로 솔로몬에게 행하십니다. 하지만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그에게 단번에 빼앗지 않으시고 그 아들에 시대에 나라를 빼앗을 것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나라를 잘 다스린 것은 그의 능력의 탁월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가 불순종하자 그의 지혜는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대적들이 일어나 솔로몬을 괴롭히자 무찌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인간 왕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함에 달려있습니다. 왕이 신실하게 순종한다면 복을 주십니다. 참된 왕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밀씀에 순종하여 모든 언약적 복을 얻으셔서 그 백성인 교회에 나누어 주십니다. 

오늘날 영적인 전투와 교회의 싸움도 지도자의 인간적인 능력이나 성도 개인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때 승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얻으신 모든 복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충만히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29일(토요일) 열왕기상 10장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와 부귀영화가 온 이스라엘을 넘어 주변 나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스바 여왕의 방문을 다루고 있는데, 스바는 지금의 예멘 지역입니다. 스바 여왕은 그곳에서 솔로몬의 지혜와 부에 대한 소문을 듣고 확인하러 왔습니다. 이는 정치적으로 강하게 된 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미래를 예상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방문입니다. 당연히 선물도 많이 가지고 옵니다. 스바 여왕은 준비한 모든 수수께끼를 내었고, 솔로몬은 그 중에 하나도 맞추지 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또 여왕은 성전과 음식과 사람들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솔로몬은 스바 여왕이 돌아갈 때 왕의 규례대로 선물을 줍니다(1-13). 이스라엘 내적으로도 사람들은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세금이 어마어마하게 거둬졌다는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외에 무역으로 벌어들인 금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금으로 방패도 많이 만들고 식기류도 금으로 만들고 상아로 왕좌도 만들어 금으로 입힙니다. 심지어 워낙 금이 많아 은을 귀하게 보지도 않았습니다(14-22).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시고 계십니다. 이런 소문은 주변의 많은 나라에 전해져 많은 나라의 왕들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와 부를 보기 위해 각종 예물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24). 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솔로몬에게 해 주시는 것과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을 때 그를 통치 아래 백성이 누리게 될 평화와 안정을 보여줍니다. 또 그러한 풍성함이 주변 나라에 하나님을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보여 줍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변 왕국들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와 부귀영화를 보기 위해서 먼 곳에서 찾아 옵니다. 스바 여왕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감탄을 합니다. 이것은 단지 솔로몬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온전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부를 사용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했다면 이런 나라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주변 나라들이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할 수 있었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끝내 실패합니다(11장). 하나님은 신실하시지만, 솔로몬은 끝까지 신실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온전히 신실한 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풍요로움과 평화를 주십니다(요14:27). 하나님께서 영원히 떠나지 않고 돌봄을 받는 자에게 솔로몬의 부귀 영화는 그분 앞에서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눅12:27). 교회는 솔로몬과 그 백성들이 누린 부귀 영화보다 훨씬 더 풍성한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지혜와 지식과 보화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골2:3). 모든 지혜와 부귀영화 보다 훨씬 귀한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이런 풍성함을 날마다 새롭게 발견합시다. 세상이 주는 공허한 부귀영화가 아니라 세상이 알지도 못하고 줄 수도 없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귀영화를 사모합시다.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분이 주시는 모든 것을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28일 (금요일) 열왕기상 9장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이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신 것과 같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대로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당신의 이름을 두시고 눈과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성전에서 기도하고 제사만 한다고 무조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왕과 백성이 다윗과 같이 마음을 다하여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계명과 율법과 모든 일을 순종하여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다면 왕조가 끊어지고, 성전도 버림 당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성전 자체가 약속과 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1-11). 언약에 신실함이 축복과 행복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성전과 왕궁의 공사가 마무리되고 솔로몬은 이전에 성전 공사와 관련한 비용을 양식으로 제공하는 것과 더불어 갈릴리 땅의 스무 성읍을 히람에게 120 달란트에 주기로 약속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성읍이 히람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20 달란트(1달란트는 40kg임)를 주고 샀습니다(11-14). 이후에 솔로몬은 나라를 국방력을 튼튼히 하고자 방어지와 국고성과 병거성들을 건축을 위해서 노역자들을 모읍니다. 그런데 그 모은 사람들 중에는 아모리, 헷, 브리스, 히위, 여부스 족속 중에서 남아 있는 사람에게 시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멸하라고 하신 가나안 족속들 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멸하지 않고 자신의 역군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20-21). 솔로몬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그들을 감독하는 사람으로 세웁니다. 이는 솔로몬이 완벽하지 않은 왕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년에 세 번씩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립니다. 이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솔로몬은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어 히람의 종들을 고용하여 항해를 통해서 금 420달란트를 얻습니다(26-28). 이는 솔로몬의 부와 명예가 점점 쌓이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고 계십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역시 완전한 왕이 아닙니다. 그에게도 부족함과 연약함이 보입니다.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국방을 정비하는 것은 왕으로서 바른 행동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제대로 드리는 것도 바른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은 가나안 백성을 멸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유용한대로 사용합니다. 솔로몬은 비교적 선하고 바른 왕이지만, 완전히 순종하는 왕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한 왕 예수 그리스도를 솔로몬의 부족함을 통해서 기대하게 됩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부와 명예와 지혜를 약속대로 솔로몬에게 주셨음을 봅니다. 이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순종함으로 주신 것을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왕위와 임재를 약속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 자체를 의지하거나 다른 신을 섬기면 언약적인 징벌이 닥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자체를 의지하지 않고, 주신 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27일 (목요일) 열왕기상 8장

솔로몬은 드디어 완성된 성전으로 하나님을 모셔옵니다. 언약궤를 다윗성에서부터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와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을 자기의 성으로 소집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궤와 회막과 성막 안의 모든 기구들을 메고 올라옵니다. 솔로몬과 회중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언약궤는 지성소 안 두 큰 천사의 날개 밑에 놓여집니다. 그 궤 안에는 두 돌 판이 있습니다. 본래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가 있어야 하지만 소실되었습니다. 제사장이 언약궤를 지성소에 놓고 나올 때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구름이 성전 안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성전을 가득히 채운 것입니다(1-11). 이것은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 백성들과 함께 거하실 집에 계십니다. 이것을 보고 솔로몬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캄캄한 데’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초월적으로 계실 수도 있는 분이시지만, 친히 성전에 임재하여 계십니다. 이어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출애굽에서부터 다윗에게 이르기까지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셨다고 고백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심을 고백합니다(12-21).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을 찬송한 후에 솔로몬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솔로몬은 손을 펴서 백성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계시기에 부족한데, 자신이 지은 이 성전에 거하신다는 것이 엄청난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백성이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한다면 들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27-30). 그리고 그곳에서 또한 의인과 악인을 재판하여 주시고(31-32),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시고(33-34), 하나님의 징계 중에서도 그들이 깨달아 돌이킨다면 용서해 주시고(35-40),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을 찾아 이 성전에서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41-43), 하나님이 원하시는 싸움을 나갈 때 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며(44-45), 심지어 범죄함 때문에 징벌로써 다른 적국의 땅에 잡혀 가더라도 그곳에서 이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돌이켜 다시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46-53). 그리고 솔로몬은 마지막으로 백성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떠나지 마시고, 버리지 마시고 온전히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주님의 계명과 명령을 지키고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도록 기도합니다(54-61). 마지막으로 솔로몬과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십 사일 동안 절기를 지킵니다(62-66). 이로써 성전 봉헌식이 마칩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은 단순히 성전이 완성된 것에 대한 축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동시에 이 땅에 계시면서 백성들과 함께 교제하며,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사의 축제였습니다.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고 제사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받아 주십니다.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그 분안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영원히 그 분 안에 있는 자들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이 성전이 미리 보여줍니다. 성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성전의 의미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참된 성전으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깊이 알게 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죄를 사하시며, 돌이킬 때 받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영원히 함께 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4월 26일 (수요일) 열왕기상 7장

솔로몬은 여호와의 성전 뿐만 아니라 레바논 나무로 왕궁도 짓습니다. 왕궁을 짓는데 13년이 걸립니다. 그 규모도 여호와의 성전보다 훨씬 큽니다(1-8). 왕궁 주위로 다른 집들도 짓습니다(9-12). 얼핏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왕궁을 성전보다 훨씬 크게 지음으로 자신의 부와 명예를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왕궁의 기능은 자신과 가족들이 살기 위한 집일 뿐만 아니라 재판하는 장소(7)로 사용되고 대규모의 백성을 모으는 회집 장소의 역할을 합니다. 또 그의 왕궁을 성전과 거의 맞닿게 짓고 왕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참된 왕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뿐만 아니라 부와 명예도 솔로몬은 하나님과 백성을 위해서 사용하는 모습을 왕궁 건설에서 보여줍니다. 

 

이후에 솔로몬은 두로에서 놋 대장장이 히람(5장의 왕과 동명이인)을 데리고 옵니다.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했다는 말은 당대 최고의 놋 전문가이자 기술자라는 말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두로 사람이고 어머니가 납달리 지파 출신인 혼혈이었습니다. 솔로몬은 그를 통해서 성전에 놋(청동)이 필요한 모든 부분을 맡겼습니다. 가장 먼저 놋 기둥 둘을 만들었습니다. 그 기둥의 꼭대기에는 여러 장식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기둥은 성전의 주랑(입구)에 세웁니다. 그 이름이 각각 ‘야긴(그가 세우신다)’ 와 ‘보아스(그에게 능력이 있다)’입니다. 성전을 세우신 분이 솔로몬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지으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성전을 능력 가운데 지키심을 상징하는 기둥입니다. 뿐만 아니라 놋으로 ‘바다(물을 받아 놓는 큰 대야, 물이 엄청 많아서 바다로 불림. 26절의 2천 밧은 약44000리터 임)’를 열 두 마리 소가 셋 씩 동서남북으로 바치는 형태로 만듭니다. 이 대야는 제사장들이 성결 의식과 제사를 위해서 필요한 물을 받아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제물을 씻을 때 사용하는 물을 담아 두는 물두멍을 담는 수레를 열 개를 만들고 물두멍을 얻고 북쪽과 남쪽에 각각 5개씩 둡니다(27-39). 바퀴가 있는 것은 바다에서 물을 퍼서 북쪽과 남쪽으로 가지고 갔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에 필요한 부삽과 대접들과 솥도 놋으로 만듭니다. 놋이 워낙 많이 들어가서 다 제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마지막으로 성전 안에 둘 성전 기구들, 곧 금으로 향단과 떡상과 등잔대, 대접과 불집게와 그릇, 또 지성소 문의 연결고리를 만듭니다. 이로써 모든 일이 마칩니다. 외형만 지어졌다고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안도 채워져야 합니다. 

 

이렇게 지어진 성전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 입구에 세워진 두 기둥의 이름의 의미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성전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은 유일하신 삼위의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나안 민족들은 항상 그 지역마다 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산당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래서 항상 언약궤가 있는 곳만 거룩한 장소이며 예배의 장소였습니다. 성전의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의 건축의 시작을 애굽에서 나온 지 480년만에 시작되었다고 굳이 언급했던 이유도 출애굽의 목적이 곧 유일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되새겨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구원의 목적이 예배임을 성전 건축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이제는 고정 된 한 장소에서 한 분 하나님을 섬깁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통해 가족 단위를 넘어 공동체로써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왕궁을 만들고 넉넉하게 제사 도구들을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백성들이 예배의 자리로 언제든지 나아 올 수 있도록 성전과 왕궁이 건축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백성들과 교제하시기 위해서 성전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와 부와명예는 백성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은 백성을 예배의 자리로 인도했던 왕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함께 예배로 이끄시는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한 분이면서 삼위로 계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매주 우리가 한 장소에서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우리가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백성임으로 확인하는 좋은 표가 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모여서 예배하시기 원하십니다. 한 하나님, 한 장소, 한 백성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매주일 함께 모여 공동체로 구원에 감사하며 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25일 (화요일) 열왕기상 6장

애굽에서 나온 지 480년이 흘렀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원수들은 대부분 정리되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성전 건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지을 재료도 마련되었고, 일꾼들도 준비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의 길이는 약 27미터(1규빗은 약 45.6cm), 너비는 약 9미터, 높이는 약 13.7미터 였습니다. 이제 성막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멋지고 견고한 하나님의 집이 만들어 집니다. 그 성전은 위로는 삼층 구조입니다. 다락방은 제사장과 레위인들 위한 장소입니다. 성전의 외부와 틀이 갖추어진 후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증하는 것은 성전 건물이 아니라 순종하는 태도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1-13). 

성전이 완성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솔로몬은 널 판을 가지고 지성소를 만듭니다. 이것은 공간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공간은 일반적인 곳(뜰), 거룩한 곳(성소), 아주 거룩한 곳(지성소)으로 구별이 됩니다. 성막과 같은 구분입니다. 내소(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두기 위함입니다(21-22). 또 내소에 그룹(천사의 한 종류) 둘을 만들고 네 날개가 이 끝에서 저 끝에 닿게 합니다. 그리고 그 밖에 외소(성소)의 사방 벽에는 천사와 올리브 나무와 핀 꽃 형상을 새겼습니다. 이는 에덴 동산과 같이 많은 나무들이 있고 그것으로 얻는 풍성함을 보여줍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천상의 세계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성전 안은 지상 낙원과 같은 공간입니다. 내소와 외소는 문으로 구별이 됩니다. 그 문에도 그룹과 감람나무와 핀 꽃을 새깁니다. 성전 안 사방이 모두 그렇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7년 동안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줍니다. 성막(텐트)은 이동식 하나님의 거처였다면, 성전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정착하시고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성전 내부는 하나님과 인간의 최초의 교제의 장소였던 에덴을 연상케 합니다. 새로운 에덴으로서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성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그 분안에서 깨어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이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첫번째 아담은 순종에 실패하여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게 했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만드시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사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새 성전이십니다. 매일의 삶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과 풍성함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24일 (월요일) 열왕기상 5장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왕으로 기름을 부음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두로 왕 히람은 사람을 보내어 축하합니다. 이전에 다윗 왕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솔로몬과도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성전 건축을 위한 벌목을 할 수 있도록 제안합니다. 솔로몬은 왜 다윗이 아닌 자신이 이 일을 맡았는 지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다윗은 전쟁을 통해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셨고, 자신이 그 일을 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시돈(페르키아)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짜가 아니라 그 댓가로 양식을 주겠다고 합니다(1-6). 히람은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솔로몬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백향목은 소나무와 비슷한 나무로 다루기가 쉽지만 고급나무입니다. 잣나무는 단단한 사이프러스 나무로 주로 기둥으로 사용하는 나무를 의미합니다. 이런 나무 재료들을 공급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대신에 양식을 솔로몬으로 받기로 합니다. 두로에는 이스라엘과 같은 평야지대가 없었기 때문에 밀과 기름이 수입에 의존했습니다. 둘의 계약은 이루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실제적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솔로몬은 전 국민 중에 삼 만명에게 의무적으로 노동을 부여합니다. 한 달을 일하고 두 달을 집에서 쉬는 일정입니다. 이 일의 담당자를 아도니람으로 세웁니다. 또 짐꾼도 칠 만명을 세웁니다. 또 산에서 돌을 뜨는 사람들(석공)도 팔만명을 세웁니다. 이들을 감독하는 관리가 삼천 삼백명입니다. 솔로몬은 크고 귀한 돌을 가지고 다듬어 성전의 기초석으로 사용하며 성전을 건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입니다(13-18). 

 

솔로몬이 시작한 성전 건축에는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고, 체계가 있습니다. 또 많은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문화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향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모든 문화의 주인이시며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문화에 대한 주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과 기술과 향유하는 문화들을 그리스도와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4월 23일 (주일) 열왕기상4장

본 장에서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신하들을 언급하는 것은 솔로몬의 영향력과 잘 조직된 정부를 보여줍니다. 그 중 몇몇은 왕이 된 후 정리된 사람도 있습니다. 서기관은 기록을 보관하고 서신을 준비하는 사람이고 사관은 공식적인 예전을 관장하는 의전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방관장의 두령은 식량 공급 체계를총괄적으로 관장하는 사람이며 ‘왕의 벗’은 왕의 가까운 조언자라는 뜻입니다(1-6). 또 솔로몬은 원활한 식량 공급을 위해서 열 두 지방 관장을 둡니다. 구체적인 지역과 이름을 밝히는 것은 이런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각 지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또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많아 졌고(20), 주변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아서 먹을 것이 풍성했다고 이야기 합니다(21).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하루 음식을 양을 보면 어마어마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사는 날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 전체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고 합니다(25).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성경에서 풍성함과 평안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그만큼 솔로몬 시대가 태평성대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성함과평안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잘 지킬 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지 국가적으로 정치를 잘해서 부유했다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 시대에하나님의 언약을 왕과 백성들이 잘 지켰다는 뜻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이렇게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던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서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넒은 마음, 곧 해박한 지식과 분별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솔로몬은 식물과 동물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으로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적 복을 누리도록 한 것입니다. 에단과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는 유다 지파의 자손들로 성전에서 노래하고 시편도 지은 사람들이었습니다(시88-89). 그들보다 솔로몬의 지혜가 훨씬 탁월했고 그의 소문은 이웃나라에게 퍼졌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에게 물려받은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그 제도와 관리들의 일부를 수용하면서 필요한 직위를 새롭게 편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을 중시하면서 자신이 맡은 나라가 하나님의 왕국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관리들을 말할 때 제사장을 먼저 언급되는 것을 보십시오(2). 그리고 자신에게주어진 지혜와 총명을 백성들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도록 했습니다. 우리의 참된 지혜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당신께서 얻으신 모든 구원의 풍성함을 당신의 백성인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2:3). 그분 안에는 은혜의 풍성함이 있습니다(엡1:7). 하나님께서 주어진 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개인적 삶과 우리가 사는 사회도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과 풍성함과 평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배를 통해서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와 지식과 은혜의 풍성함과 평안함을 누리시고 주변에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4월 22일 (토요일) 열왕기상 3장

오늘 말씀은 솔로몬의 달라진 위상으로 시작합니다. 애굽 왕 바로의 딸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은 외교적인 정책입니다. 당시 애굽은 모세의 시대에 비해서는 약해져 있었고, 이스라엘 왕국은 강해졌기 때문에 이런 외교적인 교류가 가능했습니다. 아직 성전이 공사 중에 있었기 때문에 바로의 딸은 일시적으로 다윗 성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산당에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전이 공사 중 이었기 때문에 임시적으로 그곳에 성막을 세운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곳에서 일천 번제(천번의 제사 혹은 천마리 희생 제물로 드린 제사)를 드리고 그곳에서 잡니다. 그리고 꿈을 꿉니다. 그 꿈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무엇을 줄지 구하라고 하십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아직 부족한 것이 많고 하나님의 백성은 많기 때문에 그들을 잘 돌볼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합니다. ‘듣는 마음’은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12)입니다. 하나님은 그 대답을 만족하셨고, 그가 구한 지혜 뿐만 아니라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과 장수를 주시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이 행함 같이 하나님의 길로 행하며 그분의 법도와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14). 이 또한 언약적인 복이었습니다. 솔로몬은 꿈에서 깨어 제사를 드리고 돌아갑니다.

 

그 후에 두 여인이 찾아와 솔로몬은 재판을 하게 됩니다. 왕에게 까지 나아와 재판을 한다는 것은 그 전에 장로들이 판단을 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문제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한 두 창기 중 한 사람이 자기 아들을 자다가 죽였는데, 몰래 아이를 바꿔치기를 한 사건입니다. 솔로몬은 칼을 가지고 와서 아기를 갈라 나누어 주라고 했고, 진짜 어머니는 그 아이에 대한 친권을 포기하면서 그 생명을 살리려고 합니다. 이에 솔로몬은 진짜 어머니에게 그 아기를 돌려줍니다. 이런 판결의 소식을 온 이스라엘 듣고 왕을 두려워하게 되고, 솔로몬의 마음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16-28).

 

오늘 말씀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이스라엘이 더욱 강하여 진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아직 성전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방점은 성전에 있습니다. 솔로몬의 통치가 견고해지는 이유가 성전을 건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솔로몬이 애굽과 동맹한 것은 외교적인 힘을 빌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연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것도 백성을 잘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성전을 건축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것은 일천 번제를 받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백성을 잘 다스리고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데 필요한 것을 구했기 때문에 기뻐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지혜는 솔로몬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야 백성을 제대로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솔로몬보다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로 바르게 인도 하시는 참된 지혜이십니다. 이에 바울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지혜이시라고 선언합니다(고전1:30).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 만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참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갑시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 하시는 지혜이심을 믿고,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과 교회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4월 21일 (금요일) 열왕기상 2장

다윗은 죽을 날이 가까이 오자 자신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먼저는 왕으로서 대장부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힘쎈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대장부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부터 다윗은 참된 대장부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고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1-4). 

이어 다윗은 솔로몬에게 자신이 이전에 정당하게 처리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라고 합니다. 바로 요압과 시므이를 처단하는 것입니다. 요압은 전쟁 중에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 평화 가운데 자신의 자리를 위해서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사실을 당시에 알지 못하고 후에 알았으며, 제대로 처단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 일을 솔로몬이 완성해 주기를 바랍니다. 시므이도 다윗이 비록 그를 용서하고 죽이지 않았지만, 그가 언제 반역을 꾀할지 모르기 때문에 적절하게 처리하라고 합니다(5-9). 그리고 다윗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다윗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10-12). 

다윗이 죽자 아도니야는 다윗에게 수발을 들던 아비삭을 솔로몬의 어머니에게 요구함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비록 아비삭이 다윗에게 수발을 들었고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지만 다윗에게 속한 여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솔로몬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녀를 요구한다는 것은 여전히 아도니야가 왕에 대한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솔로몬이 자신의 왕위에 관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에 솔로몬은 밧세바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역 죄와 같이 때문에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처단합니다. 아도니야를 시작으로 그를 지지했던 아비아달도 제사장 직분을 박탈하고 고향 아나돗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요압은 그 소문을 듣고 제단 뿔을 잡았습니다. 제단의 뿔을 잡는 것은 억울한 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죽을 죄를 짓지 않았는데, 누군가 죽이려고 할 때 제단의 뿔을 잡으면 누구도 건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살인한 자가 그 뿔을 잡으면 주님은 그를 제단에서 끌어내어 죽이라고하셨습니다(출21:14). 이에 솔로몬은 그를 끌어내 죽이라고 합니다. 시므이에게는 솔로몬이 다윗이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를 가택 연금을 시키고 벗어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삼년 후에 시므이의 종이 도망쳤고, 그를 쫓아 집을 벗어난 시므이는 결국 솔로몬과 약속을 어기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결국 솔로몬은 다윗이 말한 모든 것을 이룹니다. 이것은 왕으로서 행해야 할 일을 대장부로써 마땅히 행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모든 것을 율법 대로 행했고, 이에 그의 나라는 더욱 견고하게 됩니다. 평화의 왕 솔로몬은 외부로의 적들로부터 평온하게 된 땅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흔적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왕의 자녀들로서 대장부가 되어야 한다고 지금도 살아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여전히 우리안에 남은 죄악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해묵은 갈등과 반복되는 죄악을 대장부로서 담대하게 거부하고 정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4월 20일 (목요일) 열왕기상 1장

가장 왕 다운 왕,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던 다윗 왕은 이제 늙어 임종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자가 누구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왕조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입니다. 열왕기상하는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자들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이루어 가시는지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이제 누가 봐도 다윗은 늙었고, 죽을 날이 다되어 갑니다. 다윗이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아 신하들은 늙은 다윗을 시종 들고 왕이 침대에 누울 때 같이 누워 온기로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서 수넴 여인 아비삭을 데려다 줍니다. 아비삭은 다윗 왕을 시종들고다윗은 잠자리는 함께하지 않습니다(1-3). 그 때 다윗의 남은 아들 중 서열이 가장 높았던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합니다. 요압과 아비아달도 그와 함께합니다. 하지만 선지자 나단이 아도니야와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에 나단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밧세바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줌으로 솔로몬을 왕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나단도 이어서 동의합니다. 다윗은 솔로몬을 데리고 자신의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내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제사장 사독, 선지자 나단, 브나야, 그렛과 블렛 사람들이 왕의 말대로 솔로몬을 태우고 기혼에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나팔을 불어 온 백성에게 공포를 합니다. 그리고 솔로몬을 노새를 태워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온 이스라엘은 새 왕을 경배하며 즐거워합니다. 이 소리를 듣고 아도니야와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다윗 왕이 공식적으로 솔로몬에게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아도니야와 함께 한 사람들은 흩어졌고, 아도니야는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제단의 뿔(번제단의 네 모서리)을 잡고 솔로몬이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내려 오겠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그의 목숨을 살려 주었고, 집으로 돌려 보냅니다.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왕이 된 것을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 싸움에서 승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씨가 이미 이전부터 솔로몬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비록 아도니야는 착한 아들이었고, 서열 1순위였지만, 그는 적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던 자가 아니었음을 하나님이 정하신 기름부음의 과정을 무시하고 또 선지자가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볼 때 서열이 아도니야보다 낮았습니다. 압살롬과 같이 외적인 탁월함도 소개되지않습니다. 다윗이 그를 후계자로 삼은 것도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사랑하시고, 택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지 그의 인간적인 탁월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대상22:8-10). 선지자 나단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말한 것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왕은 인간적인 어떠함이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집니다. 이는 온 교회와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도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질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참된 왕은 하나님께 지명을 받아 보냄을 받으신 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동일한 방식으로 세상을 복음으로 다스리고 정복한 백성을 인간적 어떠함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떠함을 단 0.000001%도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오직 은혜로 택하시고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저 100%은혜입니다. 이렇게 온전한 은혜로 택함을 받은 우리는 100% 순종으로 보답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온전한 은혜에 감사하며, 순종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왕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19일 (수요일) 사무엘하 24장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하게 됩니다. 이 인구조사의 목적은 다윗 자신이 이룬 성과를 확인하고, 얼마나 많은 군대를 조직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라의 운영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불신앙의 행동이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백성을 자신이 이룬 것으로 생각하는 교만한 행동이었습니다. 악한 요압 조차도 그 일을 말렸지만 다윗은 고집대로 인구조사를 하도록 합니다. 결국 다윗은 인구를 조사한 후에 마음에 찔러 그것을 후회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깨달을 것입니다(10).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갓을 통해서 세 가지 벌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역병이 사흘 동안 백성을 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의 천사가 내려와 사흘 동안 점염병을 이스라엘에 내립니다. 죽은 자가 7만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죽지 않도록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16절의 ‘뉘우치사’라는 말은 ‘후회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잘못 하신 것을 돌이키시거나 실수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악을 심판하실 때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백성을 치는 천사가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이 있는 것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이 범죄한 것을 인정하면서, 이 백성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중보합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자신의 집을 치라고 말합니다(17). 그 날에 갓은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하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사서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향한기도를 다시 들으십니다.

 

이렇게 사무엘상하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사실 23장으로 끝이 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인구조사로 끝이 납니다.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절이 중요합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기 위해서 다윗을 격동 시켰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죄를 짓도록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꼬신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할 때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는 것이 목적이셨습니다. 심판 가운데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셔서 멸망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을 통해서 다윗은 심판 받는 백성을 위해서 자신과 자신의 집을 치시라고 말하며 중보자와 대속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사서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과백성들 사이에 다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성전이 세워질 것입니다. 따라서 사무엘상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서 백성을 중보하고 나아가 백성을 위해서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시고 참된 성전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것으로 마칩니다. 이 일은 가깝게는 솔로몬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서 백성을 중보 하지만, 예수님은 무죄하신 중에 백성을 위해서 중보하시고 대신 벌을 받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지금도 중보자로서 당신의 백성인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참된 성전으로서 우리 또한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도록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긍휼과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4월 18일 (화요일) 사무엘하 23장

오늘 말씀은 다윗의 마지막 말(1-7절)과 다윗과 함께 했던 용사들(8-39절)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은 일종의 운문(시)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들여 쓰기를 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래로 만들어 기억되기 쉽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아 세워진 왕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2절), 또 자신에게(3절) 말씀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왕으로 다스릴 때 자신의 생각대로 백성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다스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공의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백성을 다스렸습니다(3).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집(가문, 왕조)를 세워 주신 것에 대해서 기억하고 감사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의 모든 구원과 소원을 이루신 것을 찬양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악한 자들은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은 자신에 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말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서 인간적인 연약함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언약, 은혜 때문에 자신이 왕적인 직무를 감당할 수 있었다고 노래합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은 다윗이 왕적인 직무를 혼자서 다 감당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와 함께한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게 충성된 자들이었고, 심지어 왕의 소원을 위해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의 물을 길러 온 자들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땅에 쏟아 하나님께 드림으로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서 동역자들을 위험에 빠뜨린 것을 하나님 앞에서 후회 합니다. 왕으로서 자신을 위하여 그 권위와 힘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다른 민족들과 싸움에서 공을 세운 것은 단순히 한 나라를 위한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정복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과업을 함께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적인 직무를 제대로 감당한 가장 이상적인 왕이었습니다. 그는 오실 참된 왕,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그림자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왕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왕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에게 맡겨진 구원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사역이 승천 후에 이어지도록 제자들을 부르셨고, 훈련 시켰고, 함께 동거동락 하시며 지상 사역을 그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복음을 전파함으로 악의 세력이 자리 잡은 곳을 복음으로 정복해 갔습니다. 제자들은 죄와 사탄을 거부하는 백성들인 교회 공동체를 세웠고, 직분자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교회가 죄와 사탄을 거부하는 왕적인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왕적인 사역을 이어 받았습니다. 오늘 하루도 죄와 사탄과 싸우는 왕적인 사역을 잘 감당합시다. 특별히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 지체들과 직분자들, 곧 동역자들을 주셨습니다. 매일 왕적인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고, 또 함께 동역하는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함께 죄와 사탄을 정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17일 (월요일) 사무엘하 22장

오늘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이는 시편 18편에 거의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는 다윗의 말년이 아니라 다윗이 왕으로 세워진 초기에 쓰여진 시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헤브론에서 즉위했을 때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시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방패와 피할 바위가 되시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서 저자는 다윗이 나이가 많고, 죄악된 모습을 보여준 후인 23장에 이 찬송을 배치 했습니다. 이는 다윗이 인간적으로 나약할 때, 인생이 잘풀릴 때 뿐만 아니라 풀리지 않을 때, 하나님 앞에서 많은 실수를 한 후에도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여전히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인생의 내리막 길에도 여전히 반석이 되시고 요새가 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는 다윗과 그 후손에게 하나님께서 구원과 인자하심(신실함)을 주실 것이라는 예언적 확신으로 마무리 됩니다. 

 

이 예언적 확신은 정말로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주님은 삶의 가장 낮은 순간에도, 가장 높은 곳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주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피난처와 반석으로 의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힘으로 이 땅에서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도들도 인생의 정점이든 가장 낮은 순간이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반석과 피난처로 삼아 하루 하루의 삶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시고 반석과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 순간 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을 피난처로 삼아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16일 (주일) 사무엘하 21장


다윗이 다스리던 어느 시점에 삼 년 연속으로 기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서 삼 년 연속으로 기근이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표였습니다. 이에 왕은 하나님께 여쭤 보았고, 그 원인이 이전에 사울이 기브온 족속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1-2). 기브온은 여호수아 때에 비록 이스라엘을 속이기는 했지만, 여호수아와 언약을 맺음으로 언약 백성 안으로 들어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정당하게 이스라엘 안에서 거할 수있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어떻게 하면 여호와의 기업을 위해서 복을 빌겠느냐고 묻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학살했던 사울의 잘못을 물어 그의 자손 중에 일곱을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하나님 앞에서’ 목 매어 달겠다고 합니다. 이는 단지 사적인 복수심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에 다윗 왕은 므비보셋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 때문에 아끼고 다른 자손들을 내어줍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서 그들을 목매어 달았고 다윗은 후에 사울의 뼈와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에서 가져와 그들의 지파가 속해 있는 곳으로 가지고 와서 함께 장사를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십니다(3-14).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 왔을 때 늙은 다윗은 전쟁에 함께 나아갔지만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에 다른 부하들이 왕을 지키기 위해서 이제는 전쟁에 함께 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윗은 일부러 전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만큼 육체적으로 노쇠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는 다른 부하들이 블레셋을 무찌릅니다. 부하들은 다윗의 부하들로서 신실하게 행하였고, 전투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15-22).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사람들과 맺은 언약에 신실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기브온과 맺은 언약을 깨고 그들을 학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벼운 죄로 취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사울의 자손들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셨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므비보셋을 남깁니다. 또 다윗의 부하들은 언약 관계에 있는 다윗에게 신실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신실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는 하나님께 신실하고 서로에게 신실해야 합니다. 사울은 정당하게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지체(기브온)에게 자신의 열심으로 정당하지 않게 대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기브온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지체들의 하나님이시기도합니다. 언약 공동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맺었고,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다른 지체들과 연합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성도들의 관계는 언약적 관계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다른 성도들에게 맺은 언약에 신실한 저와 여러분이됩시다. 아멘. 


4월 15일 (토요일) 사무엘하 20장

다윗이 유다 족속을 선두로 귀환하였을 때 나머지 지파들은 유다 지파를 원망했습니다. 그 중에서 베냐민에 속한 불량배(불경건한 자)인 세바는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반역을 꾀합니다(1-2). 다윗은 후궁들을 잡아 별실에 두고 죽는 날까지 생과부로 지내게 합니다. 이들은 압살롬이 취한 후궁들로 그들과 다시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다윗으로서는 앞으로 왕정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다윗은 반역을 제압하기 위해 아마사에게 유다 사람을 모아 삼일 안에 오라고 지시했지만 지체되어 아비새에게 세바를 제압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후에 요압은 뒤늦게 세바를 제압하는데 합류한 아마사를 자신의 자리가 위협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죽입니다. 요압은 이전에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던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을 제거한 적이 있습니다(삼하3:30).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서 그의 시체를 처리하고, 아마사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들의 옷을 벗어 그 위에 덮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모두 요압을 따라 세바를 쫓습니다(12). 세바는 이스라엘 많은 곳을 도피하다가 아벨이라는 곳의 한 성읍에 들어갔고, 요압은 그 옆에 흙으로 성을 쌓아 성벽을 허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에 있는 많은 사람도 죽게 될 것입니다. 그 성에서 한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과 이야기합니다. 요압은 어머니와 같이 중요한 성읍을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세바를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고, 지혜로운 여인은 그의 머리를 내어 주는 것으로 성읍을 구했습니다(14-22). 반란은 제압되고 다윗은 관리들을 임명하고 조직을 정비합니다. 요압은 온 군대의 지휘관이 되고, 브나야는 직업 군인들의 지휘관이 됩니다. 그리고 아도람은 노역과 세금을 감독하는자, 여호사밧은 문서와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는 사관이 되고, 스와는 비서관이 되며, 사독과 아비아달은 종교적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 됩니다. 야일 사람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됩니다(23-26). 

 

오늘 말씀은 다윗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다시 왕좌를 되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왕권이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나라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세바의 반역이 있고, 요압이 아마사를 자신의 자리를 위해서 살해하는 일도 있습니다. 다윗의 왕국은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평화가 없는 불완전한 왕국입니다. 이러한 나라는 평화의 왕국을 더욱 바라보도록 만듭니다. 비록 솔로몬의 시대에 샬롬의 왕국이되지만, 그 역시 일시적이고 금새 무너집니다. 완전한 평화의 왕국은 참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은 초림으로 이 땅에 당신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이미 그 왕국은 교회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참된 평화의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교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평화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이 평화의 나라는 아직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재림으로 참된 평화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와 평안과 위로와 안전을 누리며 삽니다. 평강의 왕이신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평강을 누리며, 또 완성될 평강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14일 (금요일) 사무엘하 19장

다윗이 압살롬을 잃어 슬퍼한다는 소식은 금방 다윗의 온 군대에 퍼졌습니다. 이에 군대의 사기는 꺾였고, 그들의 승리가 마치 패배한 것 같이 여겨졌습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나아가 승리하여 돌아 온 백성을 제대로 맞이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윗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다윗은 승리하여 돌아온 군대를 맞이합니다(1-8). 이후에 압살롬을 기름부어 왕으로 삼았던 온 이스라엘은 다시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려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먼저 유다 지파를 통해서 돌아가려고 하고 또 압살롬의 군대지휘관 아마사를 요압을 이어 군대장관으로 삼을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흘립니다. 유다 지파는 이 소식을 듣고 다윗 왕을 모셔오는데 한 마음이 되어 요단 강까지 왕을 마중하러 갑니다.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저주했던 시므이도 베냐민 지파 천명과 함께 유다 지파와 나아오고 므비보셋의 종 시바도 그 아들들과 종들과 함께 왕을 맞이합니다. 시므이는 지난 날을 기억하지 말라고 사과를 합니다. 자신이 범죄한 줄 알기에 요셉 지파 중에서 제일 먼저 내려왔다고 합니다(20).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저주한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므이를 죽이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줍니다(22). 이미 다윗은 그가 저주할 때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자신을 회복시켜 주실 것임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회복을 주시는 기쁜 날에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도 왕을 맞이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왕이 돌아올 때까지 발을 꾸미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지 않았습니다. 므비보셋은 그의 종 시바의 중상모략으로 다윗을 따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으로 다윗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고자 발을 맵시 내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왕이 돌아왔으니 재산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전에 시바의 말만 듣고 그릇된 판단을 한 것입니다. 한편, 다윗은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왔던 바르실래에게도 은혜를 갚습니다. 드디어 왕은 요단을 건너 길갈에 도착했을 때,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아와 먼저 왕을 모셔 온 유다 지파를 원망합니다. 이에 유다 지파는 자신들이 왕과 같은 지파이며 이 일로 아무런 유익은 얻은 것도 없으니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여 온 이스라엘의 원망을 이깁니다(31-43).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정리하면서 왕으로 다시 회복되어 갑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도 용서하고 받아 줍니다. 특별히 시므이가 회개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다윗을 받아 주셨음을 암시합니다. 징계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회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끝이 있고, 그 가운데 긍휼과 은혜가 있었습니다. 또 다윗은 자신에게 은혜 베푼 자에게 은혜를 갚아 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다윗의 후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회개하는 자에게 자신의 보혈로 씻겨 주시고 용서를 주시며, 그에게 신실한 백성들에게 그분도 온 세상의 왕으로 오실 때 갚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회개하고 그분께 신실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13일 (목요일) 사무엘하 18장

이제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는 전쟁을 벌입니다. 다윗은 전쟁의 명수 답게 자신과 함께 한 군사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요압, 아비새 그리고 잇대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잘 정렬하여 전쟁에 나아가도록 합니다. 이렇게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한 번에 포위를 당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다윗도 함께 싸우러 나가려고 했지만, 다윗이 잡히거나 죽으면 다른 군사들의 싸움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고 함께 싸우러 나가지 않음으로 도움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군대 대장들과 지휘관을 모아 놓고 젊은 압살롬의 생명을 아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1-5). 압살롬은 왕이 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30살은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젊은 압살롬이라고 다윗이 부르는 것은 아버지로서 그를 아끼는 마음 때문임을 보여줍니다. 두 군대는 싸움을 벌였고, 결국 다윗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수풀에 걸려 죽은 자들이 칼에 죽은 자들보다 많았다는 것은 이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압살롬은 왕족이 타는 고급 말을 타고 큰 상수리 나무를 지날 때 그의 머리카락이 걸려 공중에 매달리게 됩니다(9). 압살롬을 돋보이게 만들던 머리카락이 이제 그에게 죽음을 가지고 옵니다. 먼저 요압의 부하가 그렇게 달려있는 압살롬을 보았지만 다윗의 부탁으로 어찌하지 못하고 요압에게 보고했습니다. 요압은 그의 부하와 함께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구덩이에 던지고 큰 돌을 쌓았습니다. 압살롬의 무덤과 자신이 살아있을 때 세운 비석이 비교가 되는 것은 압살롬이 왕으로서 세워질 그의 계획이 완전히 무너지게 됨을 보여줍니다.  

압살롬의 죽음을 아히마아스가 다윗에게 전하고자 했지만 요압은 그를 말리고 대신에 구스 사람을 보냅니다. 왜냐하면 왕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다윗 왕이 기뻐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히마아스는 거듭 요청했고 결국 구스 의사람보다 먼저 다윗에게 전쟁의 승리의 소식을 알립니다. 하지만 그는 압살롬의 소식을 모른다고 합니다. 이어 들어온 구스 사람은 압살롬의 죽음을 다윗에게 알렸고, 다윗은 마음이 심히 아파 웁니다(33). 다윗은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아버지로서 아들을 잃은 슬픔이 더 컸던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다윗의 모습은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일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대적하던 자를 심판하셨습니다. 더구나 그는 그의 이복 형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 승리를 주심에 주목하기 보다 자신의 아들을 잃은 것에만 너무 몰두했습니다.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기보다 압살롬의 죽음에 더 큰 마음을 쓰게 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부르면서 그를 대신해서 자신이 죽었어야 한다고 슬퍼합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그의 불평은 소용이 없는 불평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을 대신해서 자신이 죽어야 했다는 다윗의 흐느낌은 그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질 대속의 죽음을 예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죄인인 압살롬을 위해서 다윗은 대신 죽을 수 없지만, 그의 후손인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시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12일 (수요일) 사무엘하17장

압살롬에게 조언을 하던 아히도벨은 이제 다윗 왕을 제거할 수 있도록 압살롬에게 만 이천명을 택하여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가서 다윗 왕만 제거하고 다른 모든 자들도 압살롬에게 돌아오게 만들겠다고 합니다. 처음에 이 말을 들은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은 좋은 생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후새의 조언도 들어 보기로 합니다. 후새에게 아히도벨의 조언을 말한 후 어떻게 생각하지 압살롬이 묻습니다. 그런데 후새는 그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전쟁 경험이 많은 용사이기 때문에 백성들과 함께 있지 않을 수도 있고 만 이천명으로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패배하면 낙심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후새는 모든 군사를 다 모아  압살롬이 직접 전쟁을 진두 지휘를 하여 다윗과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이에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은 아히도벨의 계획보다 후새의 계획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후새의 계획을 따르도록 합니다(1-14). 사실 후새의 계획은 다윗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벌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살인하고 왕좌를 찬탈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시는 계획이었습니다. 후새는 궁 안에서 다윗의 편에 있는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이런 아히도벨의 계획과 자신의 계획을 전달하여 다윗이 그날 밤에 나루를 건너 피신하도록 합니다. 사독과 아비아달의 두 아들,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이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났고, 압살롬이 보낸 사람들에게 발각 될 뻔 하지만 결국 두 아들은 다윗에게 후새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획이 채택이 되지 않은 것을 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는 정세를 잘 살피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도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다윗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임을 미리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히도벨의 계획이 채택되지 않은 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드릴 기도의 응답 이었습니다(15:3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징계를 실행하시는 중에도 긍휼을 다윗에게 베풀고 계십니다. 

이제 다윗은 마하나임에 도착하고 압살롭도 온 군대를 모아 길르앗에 진을 치고 전쟁을 준비합니다. 다윗이 마하나임에 있을 때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나와 다윗과 함께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힘을 북돋아 줍니다(24-29).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범죄로 인해서 참으로 그 집 안에서 전쟁이 있고, 다윗의 후궁들이 대낮에 압살롬과 함께 동침하는 징계를 내리고 계셨지만, 아히도벨의 계획을 무산 시킴으로써 다윗의 목숨을 지키시고 그에게 약속하는 왕조를 이루시도록 모든 상황을 제어하고 계십니다. 다윗의 죄에 대한 죄를 징계하시면서 동시에 압살롬에 대한 죄도 징계하시고, 또 다윗에게 약속한 왕조도 지켜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당신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사람과 모든 상황을 통제하시며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모든 상황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약속하신 것을 모두 이루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상황이 아니라 상황을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4월 11월 (화요일) 사무엘하 16장

다윗과 일행들이 마루턱을 지나 피신하고 있을 때 므비모셋의 종 시바가 나와 다윗과 일행을 위해 먹을 것과 탈 것을 준비합니다. 다윗은 은혜 베풀었던 므비보셋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습니다. 시바는 예루살렘에서 다시 왕위를 찾으려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1-3). 사실 이것은 시바가 므비보셋을 속이고 모함하는 것이었습니다(삼하19:24-26). 다윗은 므비보셋의 재산을 모두 시바에게 줍니다. 시바는 만족합니다(4). 다윗 왕이 바후림에 있을 때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나와 다윗을 저주합니다. 시므이는 사울의 족속 중에 죽은 사람의 책임이 모두 다윗에게 있다고 저주합니다. 하나님이 세운 재판이나 지도자를 저주 하는 것은죄입니다(출22:28). 이에 다윗 옆에 있던 아비새가 시므이의 목을 베겠다고 하자 다윗은 그가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라고 하면서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사실 이렇게 압살롬에게 쫓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범한 죄의 징계로서 이미 말씀하신 것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칼이 그의 집을 떠나지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자신을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12). 

그 때에 압살롬과 일행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아히도벨도 함께 있습니다. 다윗이 보낸 후새도 그 때 압살롬에게 만세를 부르며 나아갑니다. 그리고 압살롬과 함께 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은 다윗을 위한 것이었습니다(15-19). 이제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묻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이 남겨둔 후궁들과 백성이 보는 앞에서 동침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곧 그가 다윗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였습니다(21-22). 그렇게 함으로써 압살롬을 지지하는 측근들과 백성들에게 더 큰 확신을 주었을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조언은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지혜가 있었고 또 효과가 있었습니다. 사실 아히도벨은 알지 못했지만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압살롬이 이렇게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의 일부였습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징계 중의 하나였습니다(삼하12:11). 

 

다윗은 결국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고 저주를 받게 됩니다. 또 자신의 후궁이 압살롬과 함께 대낮에 동침하는 상황을 겪게 됩니다. 이모든 것은 밧세바에 대한 죄의 징계와 암논에 대한 압살롬의 죄에 대해서 바르게 심판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다윗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시므이를 통해서 받는 조롱과 저주 또한 먼 훗날 그의 자손이신 예수님이 받으실 저주를 미리 보여주는 듯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조롱과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다윗과 같이 주님도 그 모든 상황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시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되갚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의 모습은 예수님이 어떠할 분이실지 미리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신뢰에 응답하셨고, 부활로 왕위를 주셨듯이, 다윗의 신뢰에도 응답하시고, 그에게 왕위를 돌려줍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이 말한대로 저주를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심지어 그분의 징계에 있는 상황 속에서도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억합시다. 십자가의 저주를 우리를 위한 복으로 바꾸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그분은 어떤 어려운 상황도 결국은 우리를 위한 선으로 바꾸십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회복을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10일 (월요일) 사무엘하 15장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범죄한 암논와 압살롬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자 백성들의 마음은 다윗을 점차 떠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압살롬이 왕께 재판을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 왕께서 재판할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는 말은 백성들의 마음이 더욱 압살롬에게도 향하게 만듭니다. 왕께서 해주지 않는 것은을 압살롬이 해주었기 때문입니다(1-6). 결국 민심은 다윗의 왕위 계승 1순위인 압살롬에게 향합니다. 4년 뒤에 압살롬은 다윗을 속이고 헤브론에서 반란을 계획을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서원한 것을 갚겠다 하여 다윗은 의심없이 압살롬을 보냅니다. 압살롬은 그곳에서 사람들을 보내어 헤브론에서 자기가 왕이 될 것임을 알립니다. 헤브론은 다윗이 처음 왕이 된 곳입니다. 그 중 일부는 어떤 일인지 알지 못했지만, 또 일부는 분명히 다윗에게로 돌아서서 압살롬의 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으로 다윗의 조언자 아히도벨입니다(7-12). 이제 전령이 압살롬의 반란 소식을 전하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급히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왕의 곁에는 이전에 사울을 피해 도망할 때부터 함께 했던 가드 사람들 600명과 최측근들, 그리고 제사장 사독과 그와 함께한 레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메고 다윗과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독에게 하나님의 궤를 도로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궤가 계신 곳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합니다(24-29).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가는 것과 제사장들이 함께 하는 것은 다윗에게 상당히 유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왕이 다윗이라는 사실은 압살롬의 반역에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언약궤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자신을 처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감람산에 올라가며 슬픔과 고통의 표인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그의 조언자 아히도벨이 배신한 것도 알게 됩니다. 이에 그를 대적할 만한 후새를 스파이로 예루살렘에 보냅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의 계략을 물리치도록 합니다.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의 아들은 연락책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30-37). 

 

오랜 후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도 감람산에 올랐습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분도 슬픔과 고통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책의 결과로 고통과 슬픔을 당하지만, 그의 후손 우리 주 예수님은 다른 이들을 위해서 고통과 슬픔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다시 주님이 계신 보좌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후에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듯이, 주님께서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므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다윗의 우유부단한 죄에 대한 처리는 결국 압살롬의 반역까지 불러옵니다. 왕으로서 역할을 때로 제대로 못했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신앙의 조상이지만 완벽한 하나님의 종은 아니었고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완벽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한치의 실수 없이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올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와 같은 완전한 사람으로서 인생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배신을 겪으신 분으로 인간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완전한 왕으로서 심판을 하실 주님을 바라보고, 또한 그분이 우리의 아픔도 아시는 분이심을 기억합시다. 그분은 죄를 단호하게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때 우리의 연약함을 위로하시고 동정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힘을 주십니다. 이 예수님을 날마다 모시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4월 9일 (주일) 사무엘하 14장

오늘 말씀에서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있는 줄 알고 드고아의 한 지혜로운 여인에게 상복을 입히고 왕 앞에 나아가 할 말을 전하게 합니다. 1절에서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압살롬을 데리고 오고 싶어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진노나 미움이 압살롬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앞의 해석을 따르면 요압의 행동들은 왕이 압살롬을 데리고 오고 싶어 하지만 (아마도 법적인 심판을 내리지 않아) 그렇게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됩니다. 후자를 따르면 요압이 여론을 읽고 다윗의 부정적인 마음을 돌리려는 것입니다. 

 

요압은 여인의 말을 통해서 다윗이 가상 재판에 스스로 모순이 생기도록 만듭니다. 여인의 이야기에서 핵심은 비록 형제를 죽인 자이지만, 그 마저 죽으면 그집안의 대가 끊기기 때문에 꼭 율법대로 죽여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말을 듣고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합니다. 이 상황은 사실은 다윗의 상황이었습니다. 왕이 심판을 하지 않고도 형을 죽인 압살롬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사람이 반드시 죽는 것과 쏟아진 물과 같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은 자이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면 된다는 것입니다(12-17). 

 

이에 다윗은 그 배후에 요압이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챕니다. 요압은 아마도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압살롬과 다윗 사이에 화해를 시도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다윗은 압살롬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24). 왕으로서 최소한의 정의를 지키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압살롬이 얼마나 외모적으로나 여론적으로 인기가 많았는지 보여줍니다. 또 그의 딸의 이름을 암논에게 강간 당한 다말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동생을 아꼈고, 또 그 일을 잊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이 아들과 딸을 낳은 것을 보여줌으로 예루살렘에서 그의 세력이 커져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27). 압살롬은 2년 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합니다. 이에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고,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어 다시 아버지를 설득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요압이 그 사람을 만나 주지 않습니다. 압살롬은 요압의 보리 밭을 태워 그를 자기에게 오게 합니다. 그리고 요압을 왕에게 보내 죄가 있으면 물으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자신이 암논을 죽인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혹은 이미 3년 동안 그 죄값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압이 왕께 나아가 전하자 다윗은 압살롬을 용서하고 화해의 입맞춤을 하게 됩니다(33). 다윗이 압살롬과 화해 함으로 결국 압살롬이 반역을 꾸밀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15장). 

 

오늘 말씀에서도 다윗이 왕으로서 자신의 직무를 정확하게 행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최소한의 벌을 내렸지만, 결국 제대로 죄인을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죄인 압살롬을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받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죄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죄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타협 하거나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삶 속에서 죄인 된 우리의 모습에 쉽게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봅시다. 왕 적인 제사장으로서 우리 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 바르게 판단하고 거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8일 (토요일) 사무엘하 13장


오늘 말씀은 평화로워 보이던 다윗의 가정에 끔찍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고, 2년 후에 그 여동생의 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다윗이 밧세바와의 범죄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성적인 범죄가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암논의 범죄는 다말을 강제로 취한 것이고, 그 후에 버린 것입니다. 다말이 ‘처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아직 암논과 약혼이나 결혼 관계를 맺지 않은 것입니다. 분명히 다말의 말대로 암논이 다윗에게 다말을 사랑하니 아내로 삼겠다고 했으면 다윗은 그것을 허락했을 것입니다. 또 암논이 하려고 하는 일이 그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어리석게’ 된다는 말은 이스라엘에서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들을 일컫던 용어였습니다. 이렇게 다말이 암논에게 분명히 잘못을 지적했지만 거부하고 끝내 범죄하게 됩니다. 게다가 성적인 만족감을 얻은 후에는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는 다말을 단지 성적인 대상으로만 여겼던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다말과 그의 집안을 모독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처녀를 강간을 경우에는 남자는 신부의 값을 지불하고 그 여인과 결혼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결코 남자는 겁탈한 여인을 버려서는 안됩니다(출22:16) 이에 다말은 그녀의 친오빠인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지내게 됩니다(1-19).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도 그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매우 진노했지만 그 후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이런 일을 제대로 처리해야 했습니다. 암논을 책망하고 다말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든지 아니면 그에 상당하는 신부의 값을 지불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결국 죄에 대한 다윗의 이런 안일한 태도는 2년 후에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더 큰 죄악으로 이어집니다. 양털을 깎는 날은 축제와 잔치의 날입니다. 그날에 다윗 왕을 초대하여 자연스럽게 그 아들들도 참석할 수 있도록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 다윗은 압살롬의 부탁을 거절했고 압살롬은 직접적으로 암논만큼은 참석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합니다. 다윗은 어느정도 이 일을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우유부단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결국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고 자신의 외가로 도망치게 됩니다. 다윗은 그의 아들로 슬퍼하고, 죽은 암논보다 도망한 압살롬에 대한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압살롬에게도 살인에 대한 죄책을 물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죄악 대한 바른 심판보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더 컸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자식의 죄에 대해서 계속해서 우유부단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왕으로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이는 그의 인간적인 연약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또 그만큼 자식들의 잘못에 대해서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처음에 암논에 대한 잘못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므로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됩니다. 죄에 대한 문제는 자주 비슷한 양상을 가집니다. 제대로 죄의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됩니다. 죄의 강력한 파괴력을 기억하고 단호하게 거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7일 (금요일) 사무엘하 12장


다윗이 범죄한 후 수개월이 지났습니다. 그 아들이 이미 태어 났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죄에 대해서 회개할 기간이 충분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어 범죄한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나단은 한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다윗이 바로 그 마땅히 죽을 자임을 지적해 줍니다(1-6).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죄를 짓는데 사용 한 것에 대해서 책망을 받습니다. 다윗은 뭔가 부족해서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이용해 부하를 죽게 만들고, 밧세바를 아내로 삼은 것을 책망합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아에게만 범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행위였고, 이에 하나님은 다윗이 칼로 우리아를 죽였으니 칼이 다윗의 집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백주 대낮에 다윗의 아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동침하게 될 것입니다(이 일은 압살롬의 반역 때에 일어납니다(삼하16:22). 다윗은 즉시 회개합니다(13). 여호와께 범죄한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여호와의 원수가 비방할 거리를 얻었기 때문에 그 낳은 아들은 죽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아이를 치셨고 칠 일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금식하고 엎드려 아이를 살려 달라고 했지만, 결국 그 아이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이가 죽은 후 다윗은 기운을 차리고 음식을 먹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14-23). 다윗은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징계가 너무 가혹하다고 하나님께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비하면 하나님께서 내리는 징계는 은혜로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데려가실 때에도 겸허하게 받아 들이고 다른 징계들도 겸허히 받아 들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또한 은혜를 더 주셔서 다윗이 밧세바를 위로하고 동침하여 낳은 아이를 사랑하시고, 직접 나단을 보내어 그 아이에게 ‘여디디야(여호와의 기쁨)’라는 별칭을 지어줍니다. 그 아이가 바로 솔로몬입니다(24-25). 죄의 문제가 해결 되었을 때, 요압은 다윗이 전쟁을 마무리하여 공로를 가지도록 다윗을 부릅니다. 다윗이 다시 왕으로서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나가서 암몬 자손의 성읍을 정복합니다(26-31). 이는 다윗이 다시 회복된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서 죄를 지적하셨을 때, 즉시 회개했습니다. 사울의 모습과 달랐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서 죄의 지적을 받을 때에회개보다는 끝까지 하나님을 자신의 권력을 위해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아주 무겁게 생각했고, 하나님은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가 받은 무거운 징계는 죄의 값이 아니라 성화를 위한 아버지의 회초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징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였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아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에게 회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해결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그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죄에 대한 심판과 저주를 우리를 대신해서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때문에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죄에 대한 심판과 저주, 영원한 죽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범죄하였을 때, 우리의 성품과 생활의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은 여전히 징계하십니다. 그것은 우리 죄의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죄를 미워하게 만드시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징계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고 우리가 그분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히12:5-11).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안에 있는 죄를 지적하시고 발견하게 하실 때, 즉시로 회개합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시기까지 나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회개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과 은혜를 깊이 경험하시고 우리의 삶이 변화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6일 (목요일) 사무엘하 11장

오늘 말씀은 다윗의 삶에서 가장 평안할 때 발생한 사건입니다. 다윗은 암몬 자손들을 멸하기 위해서 요압과 군대들을 보냅니다. 아마도 자신이 직접 가서 전쟁을 해야할 만큼 강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은 왕궁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저녁에 다윗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옥상에서 거닐다가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반하여 자신의 부하의 아내인 줄 알면서도 그녀를 왕궁으로 불러 동침합니다. “부정함을 깨끗하게 했다”는 말은 월경이 끝이 났다는 말이고 임신하게 되면 그 아이가 틀림없이 다윗의 아이 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과연 밧세바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다윗은 그 일을 조용히 덮기 위해서 전쟁에 나가 있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 특별 휴가를 줍니다. 하지만 우리아는 집으로 가서 아내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그의 주 요압과 왕의 부하들이 전쟁 중에 있는데 자기 혼자 아내와 자며 편안하게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11). 우리아는 아주 충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두번째로 우리아를 취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 보내려고 했지만 역시 우리아가 집으로 가지 않자 그의 손에 그를 전쟁 중에 죽게 만들라는 편지를 쥐어 주고 요압에게 돌려 보냅니다. 결국 요압은 다윗의 명령대로 우리아를 전쟁 중에 죽게 만듭니다(14-25). 우리아의 아내는 남편의 소식을 듣고 슬퍼합니다. 이 후 다윗은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 자신의 부인으로 맞아 들이고 아들을 얻게 됩니다. 이에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가장 평안한 순간에 음행을 행할 뿐 아니라 충직한 종을 죽게 만들고, 그 일을 꾸미기 위해서 몇 사람도 함께 죽게 만드는 큰 죄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하지만 이 죄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다윗이 하나님과 백성을 섬기는 왕으로 세워져 하나님께서 평안함을 주셨지만, 그 평안함을 남용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던 왕이 아니라 이방인적인 왕의 모습으로 일순간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 왕으로서의 직무를 태만하고 자신이 왕인 것 처럼 행동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신 특권을 남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왕 조차도 잠시이지만 완전한 왕이 아니라 죄인일 수 밖에 없음을 본문을 보여줍니다. 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윗보다 위대한 왕, 메시야를 기다리게 합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왕으로 무죄하셨고,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완전한 사람이면서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 구원을 주십니다. 이 예수님이 이 천년 전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자유의 특권을 악용하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왕이십니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여 왕적 직무를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4월 5일 (수요일) 사무엘하 10장


오늘 말씀에서는 암몬 자손의 왕이 죽은 것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다윗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그의 신하들을 보내며 그의 아버지(나하스)가 다윗에게 은총 베푼 것 같이 은혜를 베풀어 조문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은총’이라는 말은 헤세드입니다. 언약적인 신실함입니다. 이전에 다윗은 암몬을 쳐서 속국으로 삼았지만 나하스는 주인인 다윗에게 신실(충성)했고, 다윗도 속국의 군주인 나하스에게 신실(인자)했습니다. 조문은 서로에게 앞으로도 신실하자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하눈의 관리들은 다윗의 호의를 왜곡하고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수염 절반을 깎고 의복을 엉덩이가 보이게 짤라 다윗에게 돌려보냅니다. 엄청난 모욕과 조롱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곧 다윗에 대한 도전입니다(1-5). 이런 행동들은 다윗에게 분노를 사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암몬 사람들은 아람 사람들과 마아가 사람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다윗과 싸우려고 합니다. 다윗은 이를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어 싸우게 합니다. 요압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싸고자 합니다. 적들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암몬은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아람 사람들과 마아가 사람들은 뜰에 있었습니다. 요압은 한 부대로 아람 사람들을 맡고, 다른 부대를 동생 아비새에게 맡기며 암몬 사람들과 싸우도록 합니다. 만약 둘 중의 한 상대가 강하면 서로 돕자고 합니다. 그리고 요압은 무엇보다 하나님께 그 싸움을 맡깁니다(12). 그의 주인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전쟁을 맡깁니다. 요압이 백성들과 함께 싸우러 아람 연합군에게 나아갈 때, 아람 사람들은 도망합니다. 요압은 싸우지도 않고 승리하게 됩니다. 암몬 사람들은 아람 사람들이 도망한 것을 보고 성 안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합니다(14). 아람 연합군은 패한 후, 나중에 힘을 모아 이스라엘과 싸우고자 합니다. 다윗은 아람 연합군이 진을 쳤다고 소식을 듣고 출정하여 아람 병거 700대와 마병 4만을 죽이고 하닷에셀의 군사령관 소박을 죽임으로써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15-18). 결국 하닷에셀에게 속한 아람의 속국들은 다윗과 언약을 맺어 충성을 약속합니다. 이제 다윗의 영향력은 이스라엘 땅을 넘어 더북쪽에 있는 아람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언약이 주된 주제를 차지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지 않고 충성을 저버리는 자에게 다윗은 응징을 합니다. 이런 모습은 사실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규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속국으로 주인이신 왕에게 신실해야 합니다. 그렇게 신실하겠다고 말했고, 그 의무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언약적인 관계가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들과 관계에서 반영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시듯이 속국에게 다윗은 목숨을 걸고 지켜주고 보호합니다. 속국은 그런 이스라엘에게 충성을 다함으로 신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언약 관계를 깨뜨린 암몬 자손에게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승리는 이런 언약적인 관계에 충실할 때 하나님께서도 신실하게 반응하신 결과 입니다. 만일 다윗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버리고 언약을 어긴다면, 그들은 전재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될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교회(그리스도인들)와 맺으셨습니다. 이 언약은 다시 깨어지지 않는 언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언약을 깨지 않으십니다. 버리지 않으십니다. 대신 우리를 책망하고 징계하셔서 언약에 신실할 수 있도록 만드십니다. 이것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언약에 신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복과 승리를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돌이켜 회개하고 언약에 신실한 우리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승리의 삶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니다. 아멘. 


 

4월 4일 (화요일) 사무엘하 9장

다윗의 나라가 더욱 확장되고 안정을 찾아가는 중에 다윗은 혹시 사울의 집에 남은 자가 있는 지 알아 봅니다. 그는 요나단과 그의 자손을 돌보아 주기로 이미 약속을 했었습니다. 사울의 집에는 시바이라는 종이 남아있었고, 그를 통해서 사울의 집에 남은 자가 있는지 묻습니다. 시바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다리를 저는 자였습니다. 다윗 왕은 그를 불러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므비보셋은 다윗 왕 앞에서 두려움에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그를 안심시키며 그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려고 불렀다고 합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사울에게 속하였던 모든 밭을 돌려주고 므비보셋을 왕자들의 하나와 같이 다윗과 함께 식사를 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시바를 불러 므비보셋을 잘 보필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저자는 시바가 므비보셋보다 더 부호인것을 암시하듯이 시바에게 아들이 열다섯 명이며 종이 스무명이라고 언급합니다(10). 그리고 므비모셋의 아들은 미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시바의 아들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므비모셋의 아들의 이름을 밝히므로 더 존귀한 자임을 보여줍니다. 시바는 다윗이 명령한 대로 다 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후 므비보셋은 다윗의 아들 중 하나와 같이 예루살렘에 머뭅니다. 

 

다윗의 이러한 행동은 언약의 신실한 하나님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셨듯이 다윗도 자신과 요나단이 맺은 언약에 신실하게 행동합니다(삼상20:12-17). 다윗의 이런 행동은 므비보셋에게는 전적인 은혜입니다. 므비보셋이 말한대로 다윗 앞에서 죽은 개 같은 자기를 돌보아주는 다윗에게 깊은 감사를 합니다. 또 다리를 저는 것을 하나님의 저주로 여기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는 사울의 아들이지만 비천한 존재로 살 뻔 했습니다. 하지만 다읫의 은혜로 왕자와 같이 살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아 비참한 존재로 살 뻔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한 없는 은혜로운 보혈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므비보셋과 같이 죽은 개와 같은 우리를 주님께서 은혜로 건져 주셨습니다. 언약에 신실하게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 또 우리는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서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고 한 몸으로 살아가겠다고 세례를 통해서 하나남과 사람 앞에서 서약 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어 주신 언약에 감사하고 그 언약에 신실하고 서로에게 신실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월 3일(월요일) 사무엘하 8장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은 후 본문은 다윗의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치고(1), 모압(2), 소바(3-4), 아람(5-8), 암몬족속(12), 에돔 족속(13-14), 아말렉 족속(12)을 모두 정복하게 됩니다. 이 모든 족속들은 이스라엘이 이미 분배를 받은 땅에서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못하던 그런 족속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족속들을 모두 무찌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영토들을 회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복된 족속들은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됩니다. 또 다윗은 이렇게 정복하여 얻은 노략물들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립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누가 그 승리를 주셨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셨던 것입니다(6,14). 다윗은 자신의 힘과 자신의 능력으로 그런 일을 수행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승승 장구하는 것은 모든 원수를 벗어나 편히 쉬게 하고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계신 하나님 덕분입니다(7:11). 다윗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전쟁을 통해서 얻으셔야 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백성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적으로 그 공을 따라서 적절하게 관리들을 임명합니다(15-18). 다윗은 백성들에게 공정하게 그 몫을 돌려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실행하시고, 다윗은 자신의 성공이 하나님의 약속 덕분임을 알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전쟁의 공로를 돌려드립니다. 다윗은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분께 은금을 돌려 드리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또 내부적으로 정의와 공의를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인정하며 백성에게 정의를 행하는 왕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왕이었습니다. 이는 참된 왕으로서 백성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의 승리의 얻게 되시는 예수님을 반영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덕분에 누리는 구원의 삶과 평안에 대해서 감사하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임을 인정하며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4월 2일 (주일) 사무엘하 7장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적국들을 물리쳐 주시고 그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 때에 다윗이 보니 자기는 화려한 왕궁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는 초라한 텐트에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좋은 생각이라고 하며 그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에게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집을 세워주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가족입니다. 왕조를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고 한 곳을 정하여 거주하게 하고, 또 원수의 손에서 벗어나 안식을 주며 다윗이 죽으면 그의 자손을 세워 나라를 견고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 그 자손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집을 건축하고 하나님은 그의 나라의 왕위를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또 다윗과 자손에게 아버지와 같이 되어 죄를 범하면 매로 벌하겠지만 사울과 같이 왕의 자리는 빼앗지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10-15). 다윗의 집(가문)과 나라가 영원히 보전 될 것이라고 약속을 주십니다(16-17). 

이에 다윗은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큰 은혜에 감사하며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여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 것에 대해서 깊은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 없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18-29).

 

다윗은 하나님께 집을 지어드리려고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에게 집(왕조)을 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다윗과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왕조가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사실 이 약속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다윗을 이어 하나님의 성전을 짓게 될 후손은 가깝게는 솔로몬이지만, 궁극적으로 참된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참된 아버지가 되시고 그분은 참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왕위는 영원합니다. 그분의 나라도 영원합니다. 이제 다윗의 집은 영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자와 공주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잘못할 때 회초리를 드시지만, 구원의 자리를 빼앗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원한 신실한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4월 1일 (토요일) 사무엘하 6장


블레셋과의 전투 후에 다윗은 다시 군사를 모읍니다. 하지만 이 군사들은 싸우기 위한 군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기 위한 군사들입니다. 다윗은 바알레유다(기럇 여아림과 같은 곳)에서 언약궤를 보관하고 있던 아비나답의 집에서언약궤를 가지고 옵니다. 처음에는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옵니다.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수레를 몰고옵니다. 다윗과 온 족속은 온갖 악기로 연주하며 갑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실은 소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뛰어 그만 언약궤가 미끄러졌습니다. 웃사는 그것을 붙잡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잘못함으로 인해 죽게 하십니다(1-8). 본래 하나님의 언약궤는 아무나 만져서도 안되고 아무나 옮겨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옮기는 방법을 이미 알려주셨습니다(민4:15). 제사장들이 잘 싸 놓으면 그것을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어야 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새 수레에 싣고 오던 방식은 블레셋이 언약궤를 돌려 줄 때 했던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방식으로 궤를 옮기기 원하셨습니다. 다윗은 이 일이 있은 후 언약궤를 일단 오벧에돔의 집에 둡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에 다윗 다시 언약궤를 모시고 옵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메게 합니다. 그리고 이전의 죄에 대한 제사(아마도 속건제: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서 죄를 범했을 때 드리는 제사)를 드린 후에 온 힘을 다해 춤을 추면서 앞서 갑니다. 다윗이 베 에봇을 입은 것은 겸손의 표현과 동시에 참된 왕이신 하나님 앞에 예를 갖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성문에 들어 올 때 이렇게 천한 모습, 낮은 모습으로 춤을 추며 들어오는 다윗을 보고 미갈은 상당히 격조 낮게 평가했습니다(16). 드디어 다윗은 궤를 미리 준비한 성막 가운데 둡니다. 그리고 번제(완전히 태워드리는 제사로 전적인 헌신과 충성을 의미)와 화목제(하나님과 관계 회복을 감사하는 제사)를 드리고 온 백성에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 백성들에게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한 덩이씩 나누어 주어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17-19). 그리고 이 기쁜 날에 자기의 가족들에게 축복하기 위해서 들어올 때 미갈은 다윗 왕이 겸손한 옷을 입고 춤을 춘 것에 대해서 비하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고 그것보다 더 낮아 보일지라도 미갈에게는 높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20-21). 사울의 딸 미갈이 생각하는 왕은 백성 위에 군림하며 하나님 앞에서도 권위를 내세우는 왕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참 왕이 하나님이시고 자신은 단지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왕에 대한 미갈의 개념은 바로 아버지 사울이 가지고있던 왕의 개념입니다. 미갈에게 자녀가 없는 것은 이런 잘못된 왕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방식으로 섬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의도가 좋을지라도 그 과정과 방식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이방인들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방식으로 살고, 당신을 대해 주시길 원하십니다. 다윗은 처음에 여기에 실패 했지만 후에는 정정하여 하나님의 방식으로 궤를 모시고 왔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이런 겸손한 모습은 흠모할 것이 없어 보이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에 실패하거나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하나씩고쳐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모시고 있는 것은 없는지 날마다 우리를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살피며 부족한 것들을 발견하고 고쳐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31일 (금요일) 사무엘하 5장

이스보셋이 죽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나아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전에 말씀하셨던 것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그들의 왕으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습니다. 드디어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다스립니다.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예루살렘에서 33년을 다스리며 총 40년 6개월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릴 것입니다(1-5).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어떻게 다윗이 시온 성(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에서 다스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알려줍니다. 시온 성은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군사들은 다윗이 절대로 그 성을 정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성을 정복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성벽과 성벽 사이에 흙을 채운 ‘밀로’성벽을 만들어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6-10). 다윗은 그곳에서 40년동안 머물면서 처첩들을 더 두었고 아들과 딸들이 더 많이 태어납니다. 하지만 아들들의 이름만 기록합니다. 이는 다윗의 왕위 뿐만 아니라 왕조가 이어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솔로몬의 이름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을 볼 것이지만 미리 복선을 만들어 둔 것입니다(11-16). 신명기 17장 17절에서 왕은 아내를 많이 두어 마음이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성적인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왕이 아내와 첩을 두는 것은 정치적인 동맹과 긴밀히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외교력과 동맹 관계를 의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블레셋과의 전투 이야기에서 다윗인 비록 아내와 첩을 많이 두었지만 그것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큰 위협일 뿐만 아니라 이전에 아기스의 부하였기 때문에 일종의 반역 행위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다윗을 잡으러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 때 싸우는 다윗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 묻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전쟁을 임합니다.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 누구인지 다윗은 분명히 알고 있었고, 자신의 전쟁 경험과 군사력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순종합니다(17-25).

 

우리의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왕으로 모시고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식을 그 분의 말씀에 따라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승리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진정한 우리의 삶의 주와 왕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30일 (목요일) 사무엘하 4장

자신을 왕으로 세우고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보셋은 낙심하게 되고, 온 이스라엘도 놀라게 됩니다(1). 게다가 이스보셋은 그의 군대 지휘관 바아나와 레갑 형제에 의해 살해 당하고 맙니다.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왕을 죽여 앞으로 통일 왕국의 왕이 될 다윗에게 호감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이렇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왕으로서 이런 불의를 행한 자들을 심판합니다. 다윗은 의로운 왕으로서 불의를 통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자들을 통해서 왕의 자리를 추구하는 왕이 아님을 보여줍니다(2-12). 오늘 말씀 4절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죽음 바로 앞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넣어 둡니다. 므비보셋이 절름 발이라는 것을 밝히는 이유는 그가 실질적으로 백성을 위해서 싸울 수 없는 자임을 보여 주어 실질적으로 왕이될 수 없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울의 집에서 이제 더 이상 왕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집은 흥하고 사울의 집은 완전히약해졌습니다.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역사 가운데 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분을 신뢰하면서 사는 삶은 생각보다 길고 고달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고, 크고작은 실수와 잘못된 판단을 했지만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왕위의 공식적인 성취가 이제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에도 다윗은 인간적인 방식에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징계함으로 왕적인 사역을 합니다. 우리 주님도 왕으로서 최후의 날에 심판을 오차 없이 하실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을 정확하게 가려내시고심판하시고, 악인을 악인으로 의인은 의인으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닮은 왕적인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판단을 하는것은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인간적인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 사이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며, 하나님의 방식을추구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지, 아니면 나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하는지 우리 자신을 살피고 판단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길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29일 (수요일) 사무엘하 3장

오늘 말씀은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을 비교하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다윗의 집은 강하여 지고 사울의 집은 약하여 집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부인을 얻고 자식들을 많이 낳는 것은 사울의 집과 비교됩니다. 부인이 더 늘어난 것은 주변 지파들의 깊은 지지와 관계를 보여주고, 아들들이 더 태어난 것은 다윗의 왕위 뿐만 아니라 그 왕조가 견고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사울의 아들은 이스보셋만 남았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 밖에 없습니다(4:4). 뿐만 아니라 아브넬과 이스보셋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아브넬이 사울의 첩을 첩으로 맞이 한 것에 대해서 이스보셋이 항의한 것입니다. 이전 왕의 첩을 취한다는 것은 그가 곧 왕 위를 이어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일을 통해 아브넬은 온 이스라엘을 다시 다윗에게 돌려 주겠다고 합니다. 이스보셋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아브넬의 권력이 강했던 것입니다. 아브넬은 날이 갈수록 약해져 가는 왕국을 보면서 그 나라를 다윗에게 넘겨주어 통합된 나라에서 자신의 위치를 견고하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아브넬은 사실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력욕으로 사울의 아들을 데려다가 왕을 삼은 것입니다. 만약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다윗에게 넘겼다면 다윗은 이스보셋을 더욱 안전하게 지켜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과 약속했기 때문입니다(삼상24:21-22). 아브넬과 이스보셋 모두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셨음을 알고도 그들의 권력욕 때문에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 할 것입니다. 

아브넬은 다윗을 찾아와 언약을 맺고자 했고, 다윗은 미갈을 데리고 오는 조건으로 언약을 맺습니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로운 방법으로 두 나라를 통일하는데 합의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넬은 요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다윗은 요압이 자신의 동생 아사헬의 복수로 아브넬을 죽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슬퍼하며 노래를 지어 부릅니다(33-34). 이로써 모든 백성들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해서 다윗이 연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윗이 하는 일마다 기쁘게 생각했습니다(35-39).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다윗의 집은 번성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욕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아브넬은 결국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비록 자신의 나름대로 계획을 짜고 대책을 마련하더라도, 또 그것이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는 것이 보여도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그 결말은 좋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잠깐 시련을 당할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승리와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셨고 잠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부활로서 그의 의로움을 드러내시고 승리와 기쁨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우리를 삶에서 실천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28일 (화요일) 사무엘하 2장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은 하나님께 시글락을 떠나 유다의 한 성읍으로 가도 될지, 가면 어떤 성으로 가야할 지 여쭈어 봅니다. 하나님은 헤브론으로 가라고 하셨고, 그곳에서 함께 한 자들에게 성읍들을 나누어 주고 그곳에 머뭅니다. 유다 사람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그들의 왕으로 삼습니다. 또 다윗은 사울의 시신을 잘 수습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예우를 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복을 빌고 그들의 왕으로서 지키고 보호하여 선하게 갚아 주겠다고 합니다(1-7). 다윗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왕으로 본문에서 언급됩니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던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왕입니다. 

다음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운 왕이 아니라 인간이 세운 왕인 이스보셋이 등장합니다. 그는 전쟁에서 죽지 않은, 혹은 어떤 이유에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유일한 사울의 살아있는 아들이었습니다(대상8:33).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나머지 자파들의 왕으로 삼아 자신의 이권을 누렸습니다. 실질적인 통치자는 아브넬이었고 이스보셋은 명복상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따르는 유다 지파와 이스보셋을 따르는 나머지 지파 사이에는 전쟁이 있었습니다. 요압과 아브넬은 군대 장관으로서 백성들을 전쟁에서 쉽게 죽게 만드는 자들이었습니다(15-16). 두 나라의 싸움에서 결국 다윗을 따르는 유다 지파 군대가 승리를 거둡니다. 아브넬은 도망치는 중에 요압의 아우 아사헬을 죽입니다. 아브넬은 결국 요압에게 민족의 동일성을 언급하고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면서 더이상의 피흘림을 막자고 제안합니다. 요압은 아브넬이 휴전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그의 형제들을 쫓는 것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26-27). 아브넬은 마하나임으로 가고 요압과 그의 부하들은 아사헬을 베들레헴에 장사하고 밤새 걸어서 헤브론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다윗의 집(유다)과 사울의 집(이스라엘) 사이에 긴장은 지속되었습니다(3:1).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과 이스보셋(사울의 집)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넬과 이스보셋은 한번도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 다윗의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하는 것으로 점점 인간의 왕국은 약하여지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왕국은 확장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은 다윗의 집이 결국 온 이스라엘을 통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다윗을 통해서 온 이스라엘에까지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다윗을 통해서 점점 확장되는 것이 앞으로 펼쳐질 사무엘하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 그리스도인들, 곧 교회를 통해서 드러내시기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드러내며 살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집니다. 오늘 하루도 이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확장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됩시다. 아멘. 


3월 27일 (월요일) 사무엘하 1장

사무엘하 말씀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듣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다윗이 남쪽에서 아말렉 사람들로부터 시글락을 구원하고 삼일 뒤에 한 아멜렉 청년이 다윗에게 옵니다. 공교롭게도 아멜렉 사람을 치고 난 후에 아멜렉 사람이 옵니다. 그는 다윗에게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줍니다. 다윗이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묻자 자신이 전쟁터에 있을 때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울이 자신을 불렀고, 죽여 달라고 부탁해서 그렇게 했다고 대답합니다(1-10). 그 청년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한 것을 보고, 그리고 사울이 죽은 것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다윗이 앉을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죽인 사실과 사울의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다윗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윗이 그를 반겨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다윗은 함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사울과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이 칼에 죽은 것 때문에 저녁 때까지 슬퍼 울며 금식했습니다(11-12). 다윗은 자신의 왕 자리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의 패배와 기름 부음 받은 왕이 죽은 것을 기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아멜렉 청년을 죽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였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16). 그리고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위해서 슬픈 노래를 지어 부르고 유다 족속에서 외워 부르게 합니다. 놀랍게도 그 노래에서 다윗은 사울에 대한 어떠한 원망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울과 요나단을 칭송하며, 특히 요나단을 자신의 형(제)이라고 부르며 형제로서 서로를 향한 사랑이 남여 간의 사랑보다 더했다고 표현합니다. 요나단과 다윗은 깊은 성도의 교제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울의 왕조가 완전히 끝이 나고 다윗에게로 초점이 옮겨 집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죽인 아멜렉 청년을 심판합니다. 또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슬퍼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던 악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된다는 것보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 왕이 죽게 되었다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의 패배를 더 슬퍼합니다. 이것 역시 참된 왕의 모습입니다. 참된 왕으로서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을 심판하는 분이십니다. 또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걱정하시는 분이시며 당신의 백성과 깊은 교제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그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하루가 됩시다. 아멘.


3월 26일 (주일) 사무엘상 31장


다윗이 남쪽에서 백성을 구하는 사이, 사울은 북쪽에서 블레셋과 전쟁을 치릅니다. 그 과정에서 사울의 아들들과 그의 병기 든 자는 죽음을 맞이했고, 사울도 활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1-3). 이에 자기의 무기 든 자에게 자기를 죽이라고 합니다.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을 모욕하고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기 든 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윗과 같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자기 칼 위에 엎드립니다. 이를 보고 무기 든 자도 그 옆에서 함께 목숨을 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시체를 보고 목을 베고, 갑옷을 벗깁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신당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그것을 보냅니다. 고대 근동에서 나라끼리 전쟁은 곧 그들이 섬기는 신들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왕의 옷을 그들이 섬기는 신 아스다롯의 집(신전)에 둡니다. 그리고 원수의 왕 사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아 모욕합니다. 이를 들은 길르앗 야베스 용사들이 밤새도록 달려가 그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를 지내줍니다(2-13). 그들이 이전에 사울에 의해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은 것입니다(11:1-9).

 

사무엘상 말씀은 사울의 아들들과 그의 죽음으로 마무리 됩니다. 이는 사울의 왕조가 완전히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완고했던 사울을 하나님께서 결국 버리셨습니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이스라엘의 많은 땅들이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불순종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큰 해악을 끼친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적국에게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사울에게 은혜를 갚는 행동을 함으로 그가 한때는 하나님의 선한 왕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사무엘상은 마무리됩니다. 

 

사무엘상 마지막 부분은 결국 하나님이 택한 왕이 누구인지 보여줍니다. 순종한 다윗은 남쪽에서 백성을 구원하고 불순종한 사울은 북쪽에서 패배를 당하고 백성을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함께하시고 사울과 함께하지 않으심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그림자 왕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으로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며 모든 구원의 유익을 나누어 주시는 참된 왕이십니다. 사울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과 백성을 이용하지만, 우리 주님은 백성을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주시는 참 된 하나님의 택한 왕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참된 왕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25일 (토요일) 사무엘상 30장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싸움터에서 돌려 보내어진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성읍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멜렉 사람들이 시글락과 다른 블레셋 사람들의 일부 땅과 유다 성읍의 일부를 침략하고 남자와 여자와 전리품을 모두 가지고 갔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대치 중으로 군사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각 도시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전쟁에 나갔기 때문에 취약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아멜렉 사람들은 도시들을 침략하여 탈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들과 부인이 잡혀간 것을 알게 된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을 원망하여 돌로 치려고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 가운데 다윗은 마음이 다급했습니다. 이전에 사울도 똑같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28:15).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내어 하나님께 에봇을 통해 여쭈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고, 다윗과 600명의 용사들은 아멜렉을 추격했습니다. 추격하는 도중에 지쳐서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이백명은 그곳에 남겨두었습니다(1-10). 사람의 많고 적음에 승리가 달려있지 않음을 다윗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들에서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던 애굽 종을 만나 치료해 줍니다. 결국 그 애굽 사람을 통해서 아말렉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곳의 위치를 파악했고, 새벽에 그들을 습격하여 이틀날 저물 때까지 쳐 승리를 거둡니다. 또 아멜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다시 찾고 두 아내도 구원했습니다(11-20). 그리고 돌아 오는 길에 피곤하여 함께 가지 못한 200명과 합류합니다. 400명 중의 어떤 불량배들(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200명에게는 도로 찾은 전리품을 돌려주지 말고 아내와 자녀들만 돌려주자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싸움에 승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들도 함께 전리품을 나눌 것이라고 하고 그것이 일종의 전통이 됩니다(21-25). 뿐만 아니라 다윗은 다시 얻은 전리품들을 유다의 장로들에게 돌려줍니다. 모두 피해를 입은 지역들일 것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다윗은 사울과 대조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여 승리합니다. 또한 그가 얻은 승리를 가지고 자신의 것으로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누어 줍니다. 심지어 받을 자격이 없어 보이는 자들에게도 줍니다. 전쟁에 참여했지만, 지쳐서 싸우지 못한 자들에게도, 아예 참여하지도 않은 유다 성읍에게도 승리의 전리품을 나누어 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백성들을 은혜로 돌보는 왕입니다. 이 모습 역시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서 얻으신 승리의 전리품,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김과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자격 없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로 나누어 주십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구원과 모든 것에 감사하며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24일 (금요일) 사무엘상 29장

오늘 말씀은 28장 1-2절에서 언급 했던 다윗의 위기가 해결되는 사건입니다. 28장을 통해서 완전히 통제불능인 사울의 모습을 비춰준 후에 어떻게 다윗이 자신의 민족을 공격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가 이스라엘과 대치하여 있었을 때 블레셋 각 지방을 대표하는 자들이 수백, 수천 씩 인솔하여 정렬하고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도 아기스를 따라 행군했습니다(1-2). 그런데 다윗과 일행들을 본 블레셋 사람들의 지도자들이 그들은 전쟁에 함께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전쟁 중에 그들이 배반하여 그들의 본래 왕인 사울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기스는 다윗의 허물을 망명한 후부터 볼 수 없었다고 변호하지만, 지도자들은 오히려 그에게 화를 냈습니다(3-5). 할 수 없이 아기스는 다윗에게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런 아기스에게 다윗은 오히려 자신의 왕을 위해서 싸우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진짜로 다윗이 이스라엘과 싸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기스와 대화하면서 ‘주’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가리키는 대상을 애매하게 표현합니다. ‘나의 주’라는 표현은 사울 혹은 아기스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8). 아기스도 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자신을 지칭할 수도 있지만, 사실 사울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10). 독자들은 본문을 읽을 때 이중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방백들이 한 걱정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기스가 다시 한 번 다윗을 설득하고 결국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6-11).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이스라엘과 싸우지 못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거하면서 이스라엘의 원수들과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기름을 부어 세운 왕이 그 백성을 죽이지 못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만약 다윗이 이날 블레셋 편에서 싸웠다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을 통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 사울을 대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 대적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인도하십니다. 오히려 다음 장에서 보여 주듯이, 위기에 처한 백성을 구원하시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 가운데 심지어 악한 자들을 통해서도 뜻을 이루십니다. 바울을 천부장의 출세욕을 통해서 구원하신 것 같이, 본디오 빌라도의 불의한 판결을 통해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셨던 것 같이 역사를 온전히 주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을 결국에 이루시기 위해서 오늘도 일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위해서 섭리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 다시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23일 (목요일) 사무엘상 28장

아기스를 속이고 있던 다윗에게 위기가 닥치는 것으로 오늘 본문은 시작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싸우려고 하고 이에 다윗은 아기스의 부하로서 자신의 민족, 하나님의 백성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될지 궁금증을 남기고 저자는 사울에게 관심을 돌립니다(1-2).

사무엘은 죽었고 사울은 이전에 이미 모든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 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입니다(레19:31, 신18:11).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진을 쳤을 때 사무엘도 죽었고, 하나님께서 꿈이나 우림과 둠밈으로도 응답하지 않으셔서 사울은 답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숨은 뜻을 알고자 하나님께서 밝히 명하신 뜻을 어깁니다. 바로 신접한 자를 찾아가 물어보는 것입니다(3-7). 사울은 변장하여 숨어 있는 신접한 자가 있는 곳을 찾아 갑니다. 신접한 자는 사무엘을 보고 사울인 것을 알아차립니다. 신접한 여인은 사무엘처럼 되어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고 이전에 어떤 일 때문에 사울을 버렸는지 다 말합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이 패할 것임을 알려줍니다(8-19). 사울은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집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먹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강하게 권하여 그에게 음식을 먹게 하고 기운을 차려 돌아갑니다(20-25). 

 

오늘 말씀에서 영적으로 완전히 분별력을 잃은 사울 왕을 보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시적으로 정확하게 금하신 것을 통해서 숨은 뜻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지 않으신 것은 일종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몇 번이나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왕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신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의 일련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하는 것이 모두 자신의 유익과 필요에 위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끝까지 순종하지 않자 하나님은 말씀과 계시를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다시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응답해 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신접한 자를 찾아 사무엘을 불러 올리는 것은 그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정점을 보여줍니다. 비록 그 영이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맞추지만, 진짜 사무엘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독자들은 사울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압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했습니다. 진짜 사무엘의 영이었다면 회개하고 정신 차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사울 만큼 회개할 기회가 많이 주어진 인물은 성경에 흔치도 않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끝까지 하나님을 이용만 하려고 했고, 끝내는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행하여 악한 영에게 속았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도 이적과 기사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도 그런일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지 그렇지 않은지 시험하는 것입니다(신13:1-5). 사울은 이 신명기 말씀(구전이든 기록된 것이든)에 관심도 없었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은 없고, 순종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의 결말이 어떠할지 오늘 본문에서 잘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다윗의 모습과 대조가 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22일 (수요일) 사무엘상 27장

다윗은 사울의 약속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사울이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는 블레셋으로 망명을 합니다(1). 분명히 그것은 옳은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왕위를 약속하셨기 때문에 결코 사울의 손에 넘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동시에 이런 망명은 그만큼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서 도망하던 시간들이 그에게는 버거운 것임을 보여줍니다. 4절은 다윗의 생각이 옳았음을 보여줍니다. 사울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지속적으로 다윗을 수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블레셋으로 다윗이 망명한 것을 알고 찾기를 그쳤습니다(1-4). 다윗은 아기스에게 호의를 입어 한동안 아기스의 왕궁에 머물다가 다른 성읍을 달라고 하여 시글락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1년 4개월을 지냅니다(5-6). 시글락은 본래 유다에게 속한 땅으로 당시에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땅이었습니다. 또 다윗은 그술과 기르스와 아멜렉을 치고 그곳의 남녀를 남겨두지 않습니다. 다만 아기스 왕을 위하여 전리품은 가지고 옵니다. 아기스가 어디를 치고 왔느냐고 물으면 다윗은 유다 지역의 일부를 치고 왔다고 합니다. 사실 다윗이 진멸한 족속과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과 성읍이었습니다(수13:2,13). 하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인해서 여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아멜렉은 사울의 불순종으로 진멸하지 못한 땅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러한 땅들을 블레셋에 있으면서 정복했던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블레셋으로 간 것과 아기스를 속이는 것에는 다윗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서도 다윗은 왕적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단이 결과를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다윗의 행동들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적 부족함과 연약함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일하시고, 다윗이 왕위를 얻을때 그것이 다윗이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불완전함은 결국 완전한 어떤 분이 왕으로 오셔야 함을 암시 합니다. 

 

온전하신 예수님과 달리 인간 지도자들은 항상 이런 부족함과 연약함이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우리 부모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연약한 모습 속에서도 일하십니다. 때문에 그들의 인간적인 부족함과 연약성에 대해서는 인내를 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 연약한 인간으로서 지도자와 부모들은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직분자들은 그들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말씀으로 세우는데 힘써야 합니다. 부모들도 자녀를 말씀으로 키우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나의 모든 손아래 사람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본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통해 참된 왕을 드러내는 작은 왕으로서의 삶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남은 죄와 싸우것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우리의 인간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21일 (화요일) 사무엘상 26장

오늘 말씀은 24장과 매우 유사한 이야기입니다. 십이라는 곳의 사람들이 와서 사울에게 다윗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사울은 이 이야기를 듣고 삼천 명의 병사들과 함께 다윗을 찾으러 십 광야로 옵니다. 다윗은 사울이 온 것을 정탐꾼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군대장 아브넬과 병사들과 함께 광야 앞 산 길 가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있는 곳으로 몰래 아비새와 함께 잠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잠들게 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다윗과 아비새가 그들의 진영에 들어온 줄 몰랐습니다(12). 사울은 머리 위에 자기의 창을 꽂아 놓고 물병도 근처에 두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비새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잠들어 있는 사울을 죽이도록 허락을 구하지만 다윗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치는 것은 큰 죄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망하게 하실 것이나 자신의 손을 들어 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대신에 자신의 무죄함과 정당함을 입증해 줄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옵니다(1-12). 그리고 건너편으로 가서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부릅니다. 아브넬은 자신을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지켜야 하는 본분을 지키지 못한 아브넬과 군사들이 마땅히 죽을 자들이라고 책망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기름을 부은 왕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울은 비록 하나님께 버림 받았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과 함께하고 있는 그 누구보다 사울을 아끼고 존경하는 신실한 종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은 목소리를 듣고 다윗을 부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무죄한 자신을 왜 쫓는 지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만약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명하신 일이라면 기꺼이 죽겠지만, 그것이 사람들 때문이라면 그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잠시 피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사울의 주변 사람들이 다윗을 지속적으로 모함하며 이스라엘 땅에 머물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19). 사울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신을 또 다시 살려준 다윗에게 다시는 해하려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생명을 아낀 것을 보시고 자신의 생명도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구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22-24). 이것은 사울에게 자신을 안전하게 보내라는 뜻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복을 빌고 각자 자기 길로 갑니다(25).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그의 군대를 모두 잠들게 하심으로 다윗의 잠입을 도우셨습니다. 역시 아비새는 자기의 생각대로 상황을 해석하지만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또 다윗은 왕의 생명을 아끼고 보호함으로써 그가 가장 신실한 종임을 증명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자 사울의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는 신실한 종입니다. 이런 모습은 가장 신실한 종 우리 예수님을 미리 보여줍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닌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한 종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분의 완전한 순종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은 백성은 서로에게 종이 되어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과 서로를 아끼며 사랑으로 종 노릇 해야 합니다(갈5:13). 하나님과 서로에게 신실한 종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3월 20일 (월요일) 사무엘상 25장

본문은 사무엘의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사무엘은 왕을 세우는 본인의 사명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이제 바란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다윗과 일행은 큰 양 떼를 지켜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양떼는 큰 부자인 나발이라는 사람의 양떼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 나발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양털을 깎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추수를 하듯이 양들의 털로 큰 수입을 올리게 되는 날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소리를 듣고 부하 열 명을 나발에게로 보내어 이전에 도움을 준 것에 대해서 은혜를 입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다윗과 부하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고, 또 심지어는 그들의 양떼를 강제로 빼앗을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보호해 주었다고 하면서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2-8). 하지만 나발은 이런 요청을 거부합니다. 다윗을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난 종으로 생각합니다. 나발은 분명히 다윗이 누구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정당한 요청을 ‘은혜’로 부르면서 호의를 베풀어 주기를 원하는 다윗의 부하를 조롱하고 돌려 보냈습니다. 다윗은 그 이야기를 듣고 선을 악으로 갚은 나발에게 정당한 댓가를 치르게 합니다. 이런 모습은 불의한 자를 심판하는 다윗의 왕적 역할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다윗은 나발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도 죽이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의 행동을 막으시기 위해서 아비가일을 사용하십니다. 하인에게 다윗의 부하들이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비가일은 급하게 먹을 것을 준비하여 다윗을 맞이하러 갑니다. 뿐만 아니라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세우고 다윗을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8-31). 다윗도 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이 죄를 짓지 않도록 아비가일을 통해서 막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32-35). 나발은 하나님께서 처리하십니다. 졸지에 아비가일은 나발의 재산을 물려 받은 과부가 되었습니다. 재산이 많은 과부는 불량배들의 타켓이 됩니다. 남편이 없으면 보호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다윗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보호해 줍니다. 다윗은 비록 두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그 속에서도 과부를 지켜 주기 위한 왕의 모습은 남아 있습니다. 사울은 미갈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과부 취급을 합니다(36-44). 

 

다윗은 비록 자신의 잘못된 마음으로 행동할 때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왕의 일을 행하는 다윗을 범죄하지 않도록 지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훗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다윗은 같은 민족을 해한 적이 없는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인간적인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왕적 역할을 합니다. 이런 다윗의 왕적 사역은 참된 왕이신 예수님의 모습의 그림자입니다. 참된 왕이신 예수님은 공정하게 판단하시고 우리의 참된 남편이 되어 주셔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주님의 신부임을 기억하고 참된 남편의 보호를 받고 산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또한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19일 (주일) 사무엘상 24장

블레셋의 침입을 막은 후 사울은 어떤 사람이 다윗의 위치를 알려주자 다시 다윗을 쫓습니다. 사울은 선별하여 뽑은 삼천 명의 군사와 함께 다윗이 있는 엔게디 광야로 갑니다. 그 때 사울은 배가 아파서 한 굴에 볼일을 보러 들어 갑니다. 그런데 그곳은 다윗과 일행이 숨어 있던 곳이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고 사울을 죽이자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의 일부만 자릅니다. 그것은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표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겉옷은 왕의 명예와 영광을 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행동 조차도 다윗은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사울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기 때문에 절대로 죽여서는 안된다고 명령합니다(1-7). 사울이 나가고 일정한 거리를 확인한 다윗은 일행과 함께 나와서 사울의 뒤에 대고 소리칩니다. 다윗은 사울을 주와 왕으로 부르며 절합니다. 존경과 충성을 담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주변에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하고 있다는 간신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왕을 자신에게 넘겼지만 자신은 주군인 사울을 해치지 않았다고 하며 증거로 벤 옷자락을 보여줍니다. 또 사울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친근함과 악의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해할 권리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럴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또 자신은 왕 앞에서 그저 개나 벼룩과 같이 하찮은 존재일 뿐이라고 합니다. 자신은 추호도 왕을 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셔서 건져 주시길 바란다고 합니다(8-15). 

이에 사울은 다윗의 말을 듣고 그를 아들이라고 부르며 자신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다윗을 자신 보다 의롭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윗에게 넘겨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 사울은 앞으로 다윗이 왕이 되면 자신의 집에 후손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맹세하라고 합니다. 다윗은 그렇게 맹세하였고 사울은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16-22). 

 

다윗의 부하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만 보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도록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의 생각은 사울이 23장에서 했던 것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테스트였습니다. 그 시험에서 다윗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보다는 사울 왕이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왕이라는 사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를 하나님께서 좋으실 대로 처리하도록 맡겼습니다. 스스로 왕이 되려하지 않았고 스스로 영광을 취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실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은 스스로 영광을 취하라고 유혹한 사탄을 이기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을 취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탄의 유혹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사람들에게 십자가 없이 영광을 취하라는 것이었습니다(마4:5-6). 주님은 그런 방식으로 영광을 얻기를 거부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의 방식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주님의 백성인 교회도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18일 (토요일) 사무엘상 23장

어느 날 다윗에게 사람들이 와서 블레셋 접경에 있는 그일라(유다 지파에 속한 성읍)에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와 타작하고 있는 곡식을 뺏았고 있다고 알려줍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칠지 하나님께 여쭤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치라고 하시고 그일라를 구원할 것이라고 합니다(1-2). 다윗이 하나님께 여쭙는 것은 직통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비아달이 가지 온 에봇을 통해서 였습니다(6). 에봇에는 우림과 둠밈이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 알 수 있었습니다(민27:21).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정하신 것이 었습니다. 다윗은 두 번을 하나님께 확인하고 블레셋을 치러 가서 그일라 주민을 구원합니다(3-5). 사울 왕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다윗이 그일라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때,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기에게 넘겨 주셨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해하려고 하는 음모를 듣고 다시 에봇을 가지고 오라고 하여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사울은 다윗 뿐만 아니라 그일라 성읍의 사람들을 멸하려고 까지합니다. 다윗은 사울이 내려 올 것과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을 배신할 것인지 묻습니다. 하나님은 그럴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다윗과 600명의 사람들은 그일라를 떠납니다(6-13). 

사울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여쭙고 행동하는 다윗의 모습과 대조가 됩니다. 사울은 자기 마음에 좋을 대로 생각했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살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죽이려는 사울과 자신 때문에 죽게 될 그일라 사람들을 위해서 그곳을 피하는 다윗의 모습은 확실히 누가 진정한 왕인지 보여줍니다. 

 

다윗은 사울이 쉽게 찾을 수 없는 광야로 도망갑니다. 광야에는 바위로 된 굴이 곳곳에 있어서 숨어서 지내는 것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형의 유리함이 다윗을 숨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주시지 않으셨다고 합니다(14). 하나님이 인정한 왕은 다윗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울과 달리 요나단은 다윗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다윗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힘을 주었습니다(15-16). 

 

한 편 십 사람들은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주려고 합니다. 그들은 사울에게 가서 다윗이 있는 위치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 잡힐 위기에 처합니다. 그 때 누군가 사울에게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 왔으니 급히 오라고  합니다. 이에 사울은 다윗 쫓는 것을 그치고 돌아갑니다(19-29).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살폈고, 사울은 자신의 방식과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신지 확실히 보여줍니다. 둘 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고 생각했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으로 하나님께 묻고 행한 다윗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사울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예배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대로, 혹은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행동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사울과 같은 모습을 지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과정 속에 격려하고 위로하는 동료도 있고, 위기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자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17일 (금요일) 사무엘상 22장

다윗은 아기스 앞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합니다. 아둘람은 베들레헴 남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입니다. 그 곳에서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 나아옵니다. 이런 사람이 이스라엘에 생기는 것은 율법이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고, 왕이 제대로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제 사백 명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사울이 다스리는 사회에서 율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물질적, 사회적으로 고통 당하던 자들이 다윗이 다스리는 곳으로 온 것입니다(1-2). 또 다윗은 부모와 가족들을 모압 왕에게 부탁합니다. 다윗의 증조모인 룻이 모압 사람이었기 때문에 모압 왕도 호의적으로 다윗의 부모를 보호 줍니다. 같은 민족인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데, 다른 민족인 모압은 다윗을 돕습니다. 그 때 선지자 갓은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유다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순종하여 유다 땅으로 들어갑니다(3-5)

이제 장면은 사울의 궁으로 바뀝니다. 사울은 자신의 동족인 베냐민 족속이 자신을 속이고 다윗을 변호한다고 하면서 책망합니다. 그러나 에돔 사람 도엑이나서서 다윗이 이전에 놉 땅에서 아히멜렉에게 이르렀고, 그곳에서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서 하나님께 물었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아히멜렉을 불러 추궁합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은 왕의 충신이자 사위로서 당연히 사울 왕과 좋은 관계인 줄 알고 그렇게 했다고 변호합니다. 사울은 아히멜렉을 죽이고자 호위병에게 죽이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호위병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세워진 제사장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에 에돔 사람 도엑이 대신해서 아히멜렉과 그 가족들과 놉 땅의 제사장 85명을 죽이고 놉 땅을 초토화시킵니다(6-19). 더 이상 사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행히 아히멜렉의 아들 중 아비아달이 살아 남아 다윗에게로 갑니다. 다윗은 그렇게 된 것이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그를 맞이하며 안전을 보장해 줍니다(20-23). 

 

다윗은 오늘 말씀에서 약하고 환난 당한 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비공식적이지만 왕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이런 모습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방황하고 억눌린 죄인들의 참된 피난처가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환란 당하고, 갚지 못할 죄의 댓가를 빚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의 피난처이십니다. 그분께로 나아가면 우리를 받아 주시고 지켜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주님께로 나아가 우리의 모든 괴로움과  어려움, 우리의 죄로 얻은 무거운 짐들을 내려 놓고 참된 평안을 누리는 하루가 됩시다. 아멘. 


3월 16일 (목요일) 사무엘상 21장

다윗은 요나단과 헤어진 후 놉 땅으로 갑니다. 놉 땅은 당시 성막이 머물던 곳이었고 그곳에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아히멜렉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간 것이었습니다(22:10). 다윗은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묻고 싶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사울이 자기에게 비밀 의무를 주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먹을 것과 칼을 요구합니다. 제사장은 부정하지만 않으면 성소에서 물려낸 떡을 주겠다고 합니다(성소의 떡은 일주일에 한 번 바꿨음). 다윗이 자기의 병사가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아서 부정하지 않다고 합니다(1-6). 이 모든 장면을 옅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에돔 사람 도엑입니다. 그는 사울의 신하였고, 사울의 소유물인 양들을 지키는 사람들의 대장이었습니다. 사울의 충실한 종이었습니다. 그는 후에 하나님의 제사장들도 사울을 위해 죽이는 극악무도한 사람입니다(22:18).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창이나 칼을 찾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다윗이 죽인 골리앗의 칼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날에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블레셋의 한 지역인 가드의 왕 아기스에게 갑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을 죽여야 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합니다. 다윗은 그 말을 듣고 미친 척 하여 겨우 목숨을 건집니다(10-15). 

 

다윗은 라마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지킨다는 것을 알았지만, 결국 그곳을 떠나 도피생활을 이어갑니다. 다윗이 직면한 죽음의 두려움이 그만큼 위협적이고 실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윗의 인간적인 연약함을 보여줍니다. 아히멜렉을 속이고, 아기스를 속이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부름 받았고 주님의 약속도 확실했지만 사울과 같이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사울은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는 것과 반대로 다윗은 이런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점점 하나님께 가까워집니다. 실패와 연약 속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찾는 것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며 점점 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15일 (수요일) 사무엘상 20장

다윗은 사울의 계속되는 위협에 라마 나욧을 떠나 요나단을 만납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서로 언약의 친구입니다. 믿음안에서 참된 하나 됨을 누리던 친구입니다. 그에게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고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요나단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다윗을 도와 줄지 묻습니다. 다윗은 초하루(매월 첫날에 지키는 절기. 민10:10)에 본래는 왕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해야 하지만 삼일 동안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왕이 자신의 행방을 물을 때 자신이 베들레헴 자기의 집에서 매년제를 드리러 갔다고 요나단이 말하고 여기에 대해서 왕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알려 달라고 합니다. 왕이 만약 좋다고 하면 왕은 다윗에 대한 질투와 시기가 없어진 것이고, 만약 화를 내면 여전히 다윗을 죽이려고 결심한 줄로 알 것이라고 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아버지의 의향을 살펴서 알려 주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께서 다윗이 왕이 되게 하였을 때 자신과 자신의 집에 언약에 신실한 사랑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다시 다윗과 약속을 맺습니다(1-16). 구체적으로 암호를 확인하고 다윗은 들로 숨고, 요나단은 사울에게 갑니다. 초하루에 다윗의 자리는 비었습니다. 처음에 사울은 다윗이 정결의식법에 따라서 어떤 이유에서 부정하게 되어 오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정결예식 후 하루가 지나면 정결하게 됨). 하지만 그 다음 날에도 보이지 않자 요나단에게 묻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베들레헴으로 가족들과 제사하기 위해서 가야 된다고 해서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사울은 요나단에게 화를 냅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요나단도 죽이려고 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무죄한 다윗을 죽이려고 결심한 것을 보고 심히 화를 내며 그 자리를 떠납니다(17-34). 다음날 아침에 요나단은 다윗과 약속된 곳에서 약속된 구호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결심한 것을 알려줍니다. 요나단은 약속에 신실하게 다윗을 대하였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세 번 절하며 존경과 감사의 표현을 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보내며 축복하고 하나님께서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 계시며 미래에도 두 가문(후손들) 사이에 하나님께서 계시길 원하며 서로 헤어집니다(35-42). 이것은 요나단과 다윗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사울을 피해 도망자 신세가 된 다윗에게 요나단은 더할 나위 없는 위로와 격려를 주었습니다. 둘은 언약으로 맺어진 참된 친구, 성도였습니다. 둘 사이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언약에 기반한 성도의 참된 교제는 둘이서 하는 교제가 아니라 셋이서 하는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교제입니다. 다윗이 평안히 갈 수 있는 것과 요나단이 평안히 보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둘 사이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과의 교제가 이 언약 안에 있는 교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관계보다 더 친밀하고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교제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되게 하셨습니다(엡2:14). 오늘 우리의 기도에서 서로의 관계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고 하나 됨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14일 (화요일) 사무엘상 19장

오늘 말씀에서 사울은 더욱 악해져 갑니다. 이전에는 직접 다윗을 죽이지 않고 블레셋을 통해서 죽이려고 했다면, 이제부터는 직접 죽이려고 나섭니다. 더욱 대담하게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하였지만, 다행히 요나단의 변호와 중재로 명령을 거둡니다. 하지만 다시 전쟁이 있고 다윗이 블레셋 사람과 싸워서 크게 승리하였을 때 자신의 입지를 두려워한 사울은 다윗을 다시 죽이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은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활동하도록 허락한 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시면 사람은 사울과 같이 악한 영의 사로 잡혀 살게 되어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또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은 다윗의 집에 병사들을 보내지만 미갈의 도움으로 다윗은 피하게 됩니다. 사울은 다윗을 도망치도록 도운 미갈을 책망합니다(8-17). 다윗은 사무엘에게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울이 자신에게 행한 일을 말합니다. 당분간 다윗은 사무엘과 함께 머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은 감히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에게 전령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전령들이 사무엘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자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을 합니다. 세 번을 전령을 보내지만 동일하게 성령이 임하여 예언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울이 스스로 갔을 때에도 성령이 임하여 예언을 합니다. 여기서 성령이 임하여 예언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의미로 예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울에게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사울이 하루 동안 벗은 몸으로 누워 있게 되는 마지막 구절은 사울이 아마도 입고 있었을 왕복을 벗기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고, 사울에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사울의 횡포와 위협에 결국 사무엘에게 도망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에게도 도망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으로 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하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으로 다윗을 지켜 주시고 위협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자를 하나님은 지켜 주십니다. 세상의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말씀으로 나아가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위로와 또한 간섭하심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13일 (월요일) 사무엘상 18장

오늘 말씀은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두려워 하지만 하지만 사울을 제외한 요나단과 미갈, 백성들, 사울의 신하들은 다윗을 사랑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요나단은 이전에 사울에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17:32-39),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성 간에 느끼는 사랑이 아니라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에게서 느끼는 일치감입니다. 성도 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다윗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고 자기가 왕자로서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다윗에게 줍니다(1-4). 다윗은 승승장구하였고, 결정적으로 사울은 백성들이 다윗의 업적을 자신의 업적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을 보고 다윗에게 질투심을느끼고 이후로는 어떻게 다윗을 제거할지 기회를 노립니다(5-9). 하지만 그렇게 할 수록 사울은 더욱 악령에 시달립니다. 더 영적인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앞에서 이전과 같이 하프를 연주하여 낫게 해 주려는 다윗을 보고 창을 던져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은 두 번이나 그것을 피했습니다. 실수가 아니라 확실히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후로 다윗은 더욱 지혜롭게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를 두려워 하지만 온 백성은 그를 더욱 사랑합니다. 사울은 결국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을 통해서 죽이고자 첫째 딸을 아내로 주는 조건으로 블레셋 사람과 싸우라고 합니다. 다윗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을 큰 일로 여겨 거부합니다. 이후에 사울의 다른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여 그를 남편으로 삼고자 합니다. 조건으로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를 사울은 요구합니다. 다윗을 죽이기 위한 계획이었지만, 다윗은 블레셋 사람이 이 백명을 죽이고 포피 숫자를 맞춰 왕에게 줌으로 왕의 사위가 됩니다(10-27). 사울은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고 알았고 미갈도 그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더더욱 다윗을 두려워하며 다윗의 대적이 되고 다윗은 더욱 귀하게 됩니다(28-30).

 

오늘 말씀에서 사울의 몰락과 다윗의 흥왕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다윗은 모든 면에서 사울을 능가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지속적으로 그 흥왕함이 다윗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가 성공을 거두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에게 없지만 다윗에게는 있는 그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대적에게 승리를 거두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비록 힘겨운 시간이 다가올지라도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기억하여 우리 삶에서 순종할때 우리도 우리 대적인 원수 마귀와 죄와 싸워 이기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12일 (주일) 사무엘상17장

오늘 말씀은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입니다. 다윗이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각인이 되는 사건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진을 쳤고, 이에 이스라엘도 블레셋을 막기 위해 진을 치고 서로 대치 중입니다. 그 때 블레셋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 곧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전투의욕을 고취시키는 싸움꾼 골리앗이 나옵니다. 그는 키가 280cm-290cm가 되는 거구입니다. 또 완전히 무장을 하여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이 생겼습니다. 그런 사람이 1대 1 대결을 신청을 하면서 이스라엘 군대에 모욕감을 줍니다(1-11). 그 때 다윗은 전쟁터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형들은 이스라엘 군대에 속하여 골리앗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대치 상태가 40일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12-16). 이새는 전쟁터에 나간 형들의 안부를 다윗에게 확인하고 오라고 보냅니다. 다윗은 그렇게 전쟁터에 형들의 안부를 확인하러 갑니다. 그 때 마침 골리앗이 나와서 전과 같이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말을 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골리앗을 두려워하며 도망쳤습니다(24). 하지만 다윗에게 골리앗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 블레셋 사람’,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26). 그래서 골리앗과 싸우려고 합니다. 큰형 엘리압은 그러한 다윗의 행동을 철없는 행동으로 여기고 책망하지만 다윗은 진지했습니다. 사울은 그렇게 말하는 다윗에 대해서 들었고, 그를 불러 처음에는 타일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자기가 양을 칠 때 잡은 곰과 사자와 같이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냇가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 목자들이 쓰는 주머니에 넣고 물매를 가지고 골리앗에게 갑니다. 골리앗은 다윗의 앳된 모습을 보고 조롱하며 그들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합니다. 이에 다윗은 구원이 칼과 단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께 달렸음을 말하며 골리앗에게 달려가면서 물매를 돌려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시켰고, 골리앗의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벱니다. 이것을 본 블레셋 사람들은 도망을 쳤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을 쫓아 냈습니다. 사울은 뒤늦게 다윗의 출신을 물었고, 군대 장관 아브넬은 다윗이 베들레헴 출신 이새의 아들인 것을 알게 됩니다(27-58).

 

오늘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단순히 불리한 싸움에서 승리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목자로서 보여집니다. 사용한 무기도 양을 돌볼 때 쓰던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양을 사자와 곰에게서 지켰듯이 블레셋에게서 하나님의 양떼인 이스라엘을 구원해 냅니다. 다윗의 행동은 이스라엘 양떼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자들에게 참으로 구원은 칼과 단창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에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백성을 돌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백성을 돌보고 구원하는 왕입니다. 또한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나신 참된 목자이시며 왕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주님은 칼과 단창이 아니라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사단에게서 지키시는 참된 왕이십니다. 다윗은 이런 예수님을 구약에서 미리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참된 목자이자 참된 왕이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이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저와 여러분이 됩니다. 아멘.  


3월 11일 (토요일) 사무엘상 16장

오늘 말씀에서부터 사실상 사무엘상하의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점으로 이야기는 사울의 점진적인 패망과 다윗의 점진적인 흥왕이 드러납니다. 그 시작이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는 오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하나님을 떠나 버림 받은 것에 마음 아파하고 실망하고 있는 사무엘에게 다른 자를 왕으로 세우므로 위로를 주십니다. 그는 이새의 막내 아들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처음에 이새의 장남 엘리압을 보고 왕으로서 그의 외적인 모습을 보고 적합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지, 정, 의를 포함한 인간 내면)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압은 비록 왕으로서 외모는 출중했지만, 그 중심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는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아들들이 모두 여기에있는지 물었고, 막내는 양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사무엘은 가서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다윗의 용모는 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애띤 모습이었습니다(12).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바로 그가 선택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후로 다윗은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고 합니다(1-13). 반면에 사울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지배합니다.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 활동하는 악한 영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을 적극적으로 보내셔서 사울을 괴롭힌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겪게 되는 무서운 결과입니다. 사울이 괴로움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신하들은 그에게 일종의 음악 치료를 권합니다. 마침 하프 연주를 잘하는 다윗을 알고 있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프 연주 뿐만아니라 용기와 무술과 말도 잘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는 표가 나는 사람이었습니다(18). 이에 사울은 다윗을 자기의 궁으로 들이고 곁에 둡니다(21-23).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반복은 ‘본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아들들 중에 한 왕을 ‘보셨습니다.’ 이 말은 준비한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은 엘리압의 외모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울의 소년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는 것과 다윗의 용기와 무용과 구변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외적인 것을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렇다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다른 사람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 된 왕 예수님을 준비하여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윗보다 더 완벽하게 중심이 하나님을 향했고,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그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드러내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마22:37). 오늘 하루도 우리의 중심(생각과 말과 행동과 의지)이 하나님을 향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변화된 외적인 삶을 다른 이들이 볼 수 있게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10일 (금요일) 사무엘상 15장

오늘 말씀에서 그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왕에게 왔습니다.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멜렉 족속을 치고, 그들을 진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진멸’하라고 하는 것은 여리고 성에서와 같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는 준엄한 심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진멸하라는 하나님은 말씀을 어깁니다. 사울과 백성들은 왕을 사로잡고, 가장 좋은 양과 소를 남기고 좋은 않은 것만 진멸했습니다. ‘즐겨하지 않았다’는 것(9)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기뻐하지 않고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1-9). 하나님은 이것을 다 보고 계셨고, 사울이 ‘돌이켜’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원어의 뜻은  ‘슬퍼하다’ ‘불쌍히 여기다’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잘못된 길로 가고있는 사울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 말씀을 하나님께 들었고, 자신을 위해서 길갈에서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고 돌아오는 사울을 만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모두 행했다고 합니다(13). 사무엘이 남겨 온 소와 양들을 보면서 묻자, 그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남겼다고 합니다. 왕으로서 백성이 잘못했다면 바르게 잡아야 하는데, 그는 최소한 직무를 유기한 것입니다. 이에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를 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탈취하는 것에 급급하여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19). 그러자 사울은 다른 것 다했는데, 제사를 위해서 제물을 남긴 것이라고 반박합니다(20). 사울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사무엘의 말대로 사울은 지금 거역하고, 완고하여 죄를 지적하는 선지자에게 도리어 화를 내고 있습니다. 결국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왕을 버리십니다.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끝까지 백성을 핑계를 대고 자신의 왕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만 합니다. 그의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라 그의 자리를 잃을 까봐 염려에서 오는 일시적인 후회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사무엘은 왕의 요청을 들어 줍니다. 비록 사울의 왕권은 당분간 지속 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시길 원한 그러한 참된 왕으로는 남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보게 될 것이지만, 사울은 이러한 왕권을 유지함으로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질 것입니다. 사무엘은 아멜렉 왕을 죽임으로 사울이 순종하지 않은 하나님의 일을 마무리합니다. 사무엘은 그런 사울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사울을 보지 않았습니다(35).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범죄하여 하나님과 멀어질 때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실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오늘 사울이 범죄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셨는데, 여전히 그의 완악함 때문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섬기고 순종할 때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위배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좋은 것을 드리는 것보다 그분께 순종하는 것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약간 어기고 대단한 어떤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보다, 작은 것이라도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작은 것이라도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해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9일 (목요일) 사무엘상 14장


오늘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23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요나단을 통해서 구원을 베푸시는 장면입니다. 요나단은 블레셋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나단은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의 무기를 든 자(일종의 부관)에게 할례 받지 못한 자에게 건너가자고 합니다. 이것은 요나단의 젊은 객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면 능히 그 싸움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에 찬 행동이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6). 알고 있을뿐만 아니라 행동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중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증거를 살피며 나아갔습니다(1-12). 결국 요나단은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반나절 갈이 땅’은 소 한 쌍이 반나절 동안 땅을 갈 수 있는 면적으로 당시에 면적을 계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약 2제곱킬로미터 넓이의 땅 정도 된다고 합니다(13). 그런데 그 땅에 큰 떨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의 떨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단과 함께 하셔서 승리를 주신 것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15). 사울의 파수꾼은 블레셋 진영에서 이런 소란을 보고 사울에게 보고하고 요나단이 나갔음을 알게 됩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그 앞에서 제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했으나 소동이 더욱 심해지자 묻기를 그치고 블레셋 진영으로 군사들을 데리고 갑니다. 적진에 들어가 보니 블레셋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사람들이 합쳐 블레셋을 치고 전세가 바뀐 것을 보자 도망하여 숨었던 자들도 나와 전쟁을 도왔고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16-23). 

이어지는 장면은 사울의 리더십이 갈등을 야기하는 장면입니다(24-52). 사울은 그 싸움 때 맹세하여 자기와 모든 군사가 블레셋과 싸우는 동안 저녁까지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요나단은 그것을 듣지 못했고 야생 꿀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백성들은 싸움 중에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결국 탈취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끌어다가 피째 먹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에 사울은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 제사하고 동물들을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사울은 하나님께서 그제서야 물어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시고 그 이유가 누군가 죄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울은 그 죄가 요나단에게서라도 발견되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요나단이 왕의 맹세를 듣지 못하고 꿀을 먹었음이 밝혀 집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요나단이 하나님과 동역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으니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목숨을 구해줍니다(24-46). 사울은 이후에도 왕으로서 싸움을 감당했고 블레셋과 싸움이 수시로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싸움 잘하는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47-52). 

 

오늘 말씀에서 사울과 요나단은 대조가 됩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움을 시작하고 행동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필요할 때만 찾고 임의로 원칙을 정하여 오히려 싸움을 불리하게 이끌고, 백성들이 범죄하게 만들고, 요나단을 죽일 뻔합니다. 왕으로서 싸움을 잘 감당하지만, 왕으로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중심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52절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군사적인 힘과 인간적인 힘을 의지하는것을 보여줍니다. 군사들을 모으고 싸움을 잘하는 사람을 모으는 것 자체는 왕으로서 싸움을 잘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요나단과 같이 싸움의 승패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순종함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인간적 준비가 필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에 우리의 삶의 성공과 실패가 달려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공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은 인간적 준비를 잘 하되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되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잃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8일 (수요일) 사무엘상 13장

사울이 왕으로서 통치한지 2년에 상비군 삼천 명을 두어 이스라엘을 지키도록 합니다. 그 중의 이 천 명은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자기와 함께 있도록 배치합니다. 그리고 천 명은 그의 아들 요나단과 함께 둡니다. 그러다가 요나단 어떤 이유에서 게바에 있는 블레셋 수비대를 칩니다(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병거 삼만과 마병 육천, 백성은 해변의 모래와 같이 모입니다(4). 사울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길갈로 모읍니다. 아마도 사무엘은 칠일 안에 가겠다고 이미 사울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블레셋 군대를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고, 사무엘이 말했던 일주일이 거의 끝나 갔습니다. 사울은 흩어지는 군대를 보고 마음이 급해져 사므엘을 기다리지 않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도착하여 사울이 제사한 것을 보고 아주 강하게 책망합니다. 책망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왕에게 명하신 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13). 하나님께서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할 일의 경계를 정해 주셨고, 제사를 주관하는 것은 받드시 제사장이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이방인 왕과 가장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 왕들은 왕이자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자신의 왕을신과 그들을 연결시켜주는 신적인 존재로 인식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일을 구분함으로 왕이라도 제사장을 통해서 제사를 드리고 선지자의 말씀을 복종하여 하나님께서 참된 왕임을 인정하도록 정하셨습니다. 사울은 이것을 알고도 백성들이 떠나가자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를 통해서 자신의 통치권을 유지하는데 사용하는 아주 중한 범죄였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하고, 왕조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자를 찾아 그 자리를 줄 것이라고 합니다(14). 블레셋은 여전히 이스라엘에 마주하여 진을 치고 세 대로 나누어 중요한 곳에 배치 되었습니다(16-18). 또한 이스라엘의 무장 상태는 형편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철공을 두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무기는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 밖에 없었습니다(19-23).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사울의 상황과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인내해야 하는데, 나의 어떤 것이 잃어지고 손해를 보게 될 때 조마조마해지고 말씀의 경계를 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분되도록 정하신 것들을 넘고 믿지 않는 자들과 같아 지고 싶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서 말씀의 경계를 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말씀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경계를 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비록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손해를 보는 상황 속에서도 말씀을 지켜 냄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7일 (화요일) 사무엘상 12장

사무엘은 백성을 길갈에 모아 놓고 언약을 갱신하는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먼저 사무엘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백성들 가운데 섬겼는데, 혹여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거나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혹은 뇌물을 받거나 한 일이 있다면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 앞에서 말하면 그것을 갚겠다고 합니다(1-3). 백성들은 사무엘 그런 적이 없다고 하자 그것을 하나님과 왕 앞에서 확증합니다(4-5). 왕의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판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왕 앞에서 이렇게 사무엘은 백성에게 대해서 지금까지 책망할 것이 없음이 확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공의롭게 그 백성을 대하셨는지 애굽에서 나올 때 부터 시작해서 광야 생활,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 왔을 때에도 사사들을 통해서 구원한 사실을 통해서 말합니다(6-12). 그러면서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 같은 왕이 구한 것은 하나님께 죄악 된 것임을 말합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번개와 비가 오지 않는 밀 추수 시기에 번개와 비를 내리게 하십니다. 이에 백성들은 하나님과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 합니다(13-18). 백성들은 그들이 왕을 구한 것을 회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준에 합한 왕과 제도를 세우심으로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셨으니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데서 떠나지 말라고 사무엘은 권면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그 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들에게 징계하실 것임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을 때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구원하셨는지 말한 후에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하나님을 떠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두려워한 것 같이, 사무엘도 두려워합니다. 모세와 같이 사무엘도 백성을 위해서 중보의 사역을 합니다. 다시 한번 모세와 맺었던 언약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기억하며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과 긴밀히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백성을 택하시고,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통해서 백성은 그 택하심에 반응하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면서 순종하며 은혜와 복을 누리고, 어길 때는 언약적인 징계를 받는다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그저 믿으면 복 받고 천국에 간다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죄에 대한 진지한 회개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사무엘은 죄를 먼저 지적하고 회개를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위로의 말을 합니다(20).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에 걸맞게 하나님만 섬기면서 살라고 합니다. 복음은 죄를 들추어 내고 그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으니 은혜에 감사하며 샇라고 합니다. 복음은 이렇게 총체적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그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격려를 누리며 또 삶 속에서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3월 6일 (월요일) 사무엘상 11장

나하스를 필두로 암몬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라는 이스라엘 지역에 진을 칩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먼저 나하스에게 조약을 맺자고 합니다. 그러면 나하스를 섬기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하스는 오른쪽 눈을 다 빼야 조약을 맺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온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야베스 장로들은 일주일 동안 여유를 주고, 그 동안 구원자를 찾지 못하면 나하스가 말한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나하스는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너그러움을 보여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전령들은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도착해서 사정을 말했고, 기브아 사람들은 소리 높여 웁니다. 왜냐하면 길르앗 야베스 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마침 소를 몰고 오던 사울은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거룩한 분노를 일으키게 합니다. 사울은 소를 조각내어 전령의 손에 주고 이스라엘 각 지역으로 보내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않으면 그들의 소도 조각날 것이라고 합니다(1-7). 이를 통해 하나님은 큰 두려움을 백성들에게 주시고 33만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사람 같이 베섹에 모이게 됩니다. 모인 사람들이 전령들을 통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다음 날 해가 더울 때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고 합니다. 사울은 백성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새벽 암몬 사람들을 쳤고,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자손들을 쳐서 무찌릅니다(8-11). 이에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이전에 사울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데려다가 죽이겠다고 합니다. 사울은 구원을 주신 날에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반대합니다. 사무엘은 백성을 길갈로 모아 나라를 새롭게(갱신) 하자고 하고 그곳에서 사울이 왕이 된 것을 다시 확인을 합니다. 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온 백성은 크게 기뻐합니다(12-15). 이제 사무엘을 백성들에게 긴 설교를 통해 언약을 다시 갱신하는 마지막 임무를 할 것입니다(12장). 

 

사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대행자로서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사무엘과 함께 함으로 자신이 왕으로 부름 받았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순종하는 자로 서 있습니다. 또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을 죽이자 했을 때 그들을 보호하는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왕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왕입니다. 적어도 이때까지 사울은 참된 왕이신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잘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저와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벧전2:9). 왕적인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멘. 

 


3월 5일 (주일) 사무엘상 10장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으셨음을 사울에게 알려줍니다(1).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확증할 증거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말해 줍니다. 이런 일을 겪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확신하여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2-8). 이일은 그대로 일어나게 되며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그에게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된 새 사람으로 만듭니다(9). 사울이 예언하게 되는 것은 이전에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일종의 표징이 되어, 그에게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 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같은 왕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영에 사로잡힌 왕을 원하시기 때문에 그에게 하나님의영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여전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씩 모으고, 그 중에서 제비를 뽑아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이 사울임을 공식적으로 보여주려고 할 때 사울은 숨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로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율법을 책에 기록하여 성소에 두었습니다(신17:18). 다른 모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들(용사들)과 함께 있었고, 일부 불량배들(사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울의 모습에 멸시하였지만 사울은 침묵했습니다(27).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울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택했다고 이적을 통해서 증명해 주셨고, 사무엘을 통해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울의 모습은 어떤 사람에게는 신뢰감을 주지 못합니다. 여전히 인간적으로 볼 때 엉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습은 그래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원수 마귀와 싸우는 왕으로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택에 의구심을 가지고 자신이 없어 합니다. 인간적 연약함이 남아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도 인간적으로 연약한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치 않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스스로의 연약함 때문에 주눅들거나 다른 사람의 연약함 때문에 시험에 들지 말고 오히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왕으로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죄와 마귀와의 싸움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4일 (토요일) 사무엘상 9장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세워지게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기스라고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의 아들로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외모는 준수했다고 합니다. 힘이 있어 보이고 외모가 출중했습니다. 어느 날 사울의 아버지에게 속한 나귀가 없어졌고, 기스는 그것을 사울에게 찾아 오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나귀를 찾기 위해서 베냐민 사람의 땅을 다 찾아 보았지만 찾지 못하고 숩 땅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가 속한 땅으로 사무엘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냥 돌아가자고 했지만 사울의 사환은 그곳에 하나님의 선견자(선지자)가 있음을 알고 그에게 가서 길을 알려 달고하자고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줄 예물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환에게 하루 일당으로 받은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습니다. 사환은 이것을드리자고 합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사무엘 만나러 갑니다. 하나님은 이미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이 찾고 있는 왕이 찾아 올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두 사람은 사무엘을 만나게 되었고,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울의 반응을 보십시오. 자신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지 말합니다. 그의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 중에 가장 작고 그의 가족 또한 미약하다고 합니다(20).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서 베냐민의 완악함으로 그 지파가 거의 전멸 할 뻔 한 것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말씀에서 사울은 사환 보다 덜 지혜로워 보이고, 사환보다 더 가진 것이 없는주인의 아들로 묘사됩니다. 겉은 멀쩡한데 어딘가 부족해 보입니다. 백성들은 강력한 왕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가장 미약한 지파에서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어딘가 부족하고 엉성해 보이며 스스로를 작게 여기는 사울을 택하신 것입니다(참조. 삼상15:17). 사무엘은 제사 후에 제사장의 몫으로 주어진 넓적 다리를 사울을 위해서 주고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에 동틀 때쯤 성읍으로 가서 기름을 부을 준비를 합니다(27-10:1).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이스라엘이 구하는 왕을 주실 때 연약한 자를 세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가장 연약해 보이시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은 그분을 하나님은 온 세상의 구원자와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자를 사랑하시고 그를 통해서 당신의 강함을 드려내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힘이 센 사람이 아니라 연약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고 스스로를 작게 여기는 자가 다스리는 자가 됩니다. 연약한 우리이지만 겸손히 주님 앞에 순종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아멘. 


3월 3일 (금요일) 사무엘상 8장


사무엘은 늙었고 그의 아들들 중에서는 그를 이어 이스라엘을 바르게 다스릴 만한 아들이 없었습니다. 모두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기 때문입니다(1-3).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하는 왕은 하나님께서 택하실 왕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왕 같은 왕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행동은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는 사무엘에게 그런 백성의 부탁을 듣되 그들이 구하는 왕이 어떤 일을 백성에게 할 것인지 경고하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사무엘은 이방인들이 세운 왕과 같은 왕은 어떠할 것인지 알려줍니다(10-18). 그것은 한 마디로 백성을 속박하고 억압하며 폭력으로 다스리고 좋은 것을 빼앗는 그러한 왕이 될 것이라고 경고해 줍니다. 그 왕의 억압으로 고통 받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이런 왕을 세우기를 원하는지 되묻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 듣기를 그런 왕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들어주라고 하시며 사무엘은 백성들을 집으로 돌려 보냅니다(19-22).

 

사실 이스라엘의 상황은 사사 시대를 끝낼 왕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왕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원한 왕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것과 같은 왕입니다. 신명기 17장 15절에서 이미 모세는 왕을 세울 때 어떤 기준으로 세워야 하는지 알려줬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원한 왕은 이방인들과 같은 왕입니다. 당시 이방인들 왕은 반신반인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는 왕이었습니다. 백성들을 그저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면 되는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으로 잘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왕은 그런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백성들을 당신을 버렸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다스리는 왕보다 단지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고 물질적 풍요와 평안함을 주는 왕을 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왕을 세워 주시고 또 불순종하는 왕을 폐위시켜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드러내실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우리의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월 2일 (목요일) 사무엘상 7장

기럇여아림에 여호와의 궤가 20년 간 머무는 동안 온 이스라엘 족속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1). 사모했다는 말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입니다. 이제 드디어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은 정말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 하나님께 돌아오려거든 실제적인 변화와 회개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다름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옆에 나란히 섬기던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족속들이 그동안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면서 옆에서 나란히 우상을 함께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긴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사무엘의 말대로 했고, 사무엘은 온 백성을 미스바로 모아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회개합니다(5-6). 이스라엘 족속들이 모여 있다는 말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려고 모인 줄 알고 그들도 군사들을 모아 이스라엘을 치러 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구원을 여호와 하나님께 찾았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하나님은 응답하셨고, 번개를 내리셔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습니다. 승리한 후에 사무엘은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고 그곳 이름을 에벤에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고 감사의 고백합니다(12). 사무엘이 있는 동안 하나님은 블레셋을 당신의 강한 손을 막으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빼앗겼던블레셋 지역도 되찾게 되었습니다. 영토의 회복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이스라엘의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사무엘이 사는 동안이스라엘 주요 지역을 두루 다니며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이 다스림은 자신이 권위를 가지고 백성을 억압하고 통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말씀에 순종하도록 가르침으로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격적으로 회복되고 회개하는 중심에 서 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백성들에게 촉구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철저한 회개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것을 내포합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긴 이유는 유목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운 농경 사회를 접하게 됩니다.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농경 사회를 경험하고 있는 이방인들이 섬기던 그 신이 새로운 환경에 필요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신도 섬겼습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이 이렇습니다. 하나님만으로 부족하고 무엇인가 더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촉구한 회개와 예배 회복 운동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우리 삶의 모든 환경 속에서, 환경이 어떠하든지 해결을 가진 분으로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만을 모든 상황 속에서 섬기십니까? 특정한 상황에서만 섬기고, 다른 상황에서는 어떤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가장 기본적으로 회개와 예배의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하나님과 나란히 섬겼던 그 무엇이 있다면 버리고 회개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오로지 하나님만 신뢰하고 예배하겠다는 결단으로 나아가는 하루가 됩시다. 아멘


3월 1일 (수요일) 사무엘상 6장

7개월 동안 블레셋의 도시들을 돌며 그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제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블레셋 지도자들은 당시 다른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어떻게 언약궤를 돌려 보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3).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법칙에 맞는 바른 조언입니다. 하나님의 성물을 부지 중에 더럽혔다면 속건제를 드려야 합니다(레5:15). 그런데 그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블레셋 도시들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의 숫자대로(17-18)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 수레를 이용하여 법궤를 옮겨야 한다고 합니다. 당시 최고의 방식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최고급 차량 중에서 새 것에 실어서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예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젖이 나는 어미 소가 끌고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젖이 나는 어미 소는 송아지를 찾기 때문에 정상적이라면 멍에를 지고 제대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간다면 그것은 신적인 개입이 있는 것이고, 게다가 블레셋에 있는 병들이 없어진다면 모든 것이 분명히 이스라엘의 신이 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연히 병이 생긴 것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드디어 블레셋 사람들은 젖이 나는 어미 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싣고 금 독종과 금 쥐를 실은 상자를 함께 실어 보냅니다(10-11). 그런데 정말로 젖이 나는 어미소가 곧 바로 길을 따라 가장 가까운 이스라엘 지역 벧세메스로 향하여 갔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궤를 보고 기뻐 하였습니다. 벧세메스의 레위인은 그것을 보고 번제를 드리고 일단 그 궤와 상자를 큰 돌 위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도 여호와의 궤를 열어 보아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그러자 그 궤를 다시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보냅니다. 여호와의 궤는 이제 그곳에서 20년 동안 있게 될 것입니다(7:2).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승리하신 분으로 이스라엘에 돌아옵니다. 금 독종과 금 쥐는 하나님의 전리품입니다. 비록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돌려 보내는 방식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언약궤가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처음에 그 언약궤를 기쁘게 받았지만, 곧 언약궤를 일종의 호기심으로 열어보았을 때 재앙이 닥쳤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민4:5-6).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돌아 온 것은 기뻐하였으나, 진정으로 언약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 언약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임재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호기심으로 법궤를 열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 헸습니다. 그들은 그 언약궤와 함께 오셔서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잊은 것입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이 당신 정한 법대로 그분을 대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그분은 우리의 자상한 아버지이시지만 함부로 대해도 되는 분은 아닙니다. 마땅한 공경과 존경함으로 그분을 대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 하루도 자상하시지만 또한 존귀하시고 높으신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사랑과 공경을 드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28일 (화요일) 사무엘상 5장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 사람들은 전리품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 신전에 둡니다. 고대근동에서 전쟁은 단지 두 나라와의 싸움이 아니라 두 나라가 섬기는 신들의 싸움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승리를 준 다곤 신에게 하나님의 언약궤를 바친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다곤 신상의 목과 손을 잘라 그것이 단지 신상에 불과함을 보여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언약궤가 있는 지역에 전염병이 돌게 하셔서 아스돗이라는 지역을 초토화시키십니다. 아스돗 사람들과 다른 블레셋 사람들은 다른 블레셋 지역인 가드로 옮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서도 심한 피부병이 일어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가드 사람들은 다시 언약궤를 에그론으로 옮깁니다. 에그론 사람들은 이미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이 심한 역병과 피부병에 걸리는 것을 보고 자기들에게 가져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에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이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기로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은 이스라엘을 떠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전쟁을 치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치십니다. 이스라엘의 패배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들보다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백성들 없이도 영광을 받으시고, 승리를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그저 제사만 드려주면 복을 주는 그러한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 언약은 항상 순종을 전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언약을 어기고 살아도 제사만 드리면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에 옳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인격적이고 언약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여긴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찾아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약속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당신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당신의 영광과 은혜를 누리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은혜이며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오늘 하루도 스스로 일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당신의 언약 안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교제하시며, 마치 우리가 없으면 안되시는 것 같이 우리를 여기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며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27일 (월요일) 사무엘상 4장


오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처음에 4천명이 전쟁에서 패배로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패배한 이유를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기구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언약궤를 가지고 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옵니다. 하지만 결과는 이전보다 더 큰 패배를 겪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고 언약궤도 빼앗깁니다(1-11). 언약궤를 가지고 오는 일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번도 사무엘이나 엘리에게 묻지 않고 스스로 결정합니다. 전쟁에서 패배는 언약궤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부재였습니다. 백성들은 단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언약궤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 보다,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기 보다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시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에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말은 많이 있지만, 정작 하나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무엘은 7장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결과는 참혹한 패배입니다.

 

전쟁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 엘리도 언약궤가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는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언약궤를 빼앗겨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갔다고 하여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습니다(12-22).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비느하스의 아내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리품으로 언약궤를 가지고 갑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배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 보여줍니다. 1절에서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퍼졌다고 했는데, 백성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는 하나님의 말씀에 듣고 순종하며 살아갈 때 바르게 세워집니다. 또 오늘 말씀은 엘리와 그 아들들이 한 날에 죽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매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성경을 통하여 잘 듣고 순종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그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26일 (주일) 사무엘상 3장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선지자로 부르십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엘리의 눈은 점점 어두워졌다고 합니다. 엘리의 육체적인 눈 뿐만 아니라 영적인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자고 있던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사무엘은그 음성이 엘리의 음성인 줄 알고 엘리에게 달려갑니다. 이는 그 음성이 마치 사람이 말하듯이 흐릿하지 않고 분명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적으로 듣지 못한 사무엘은 당연히 헷갈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번 째로사무엘을 자신에게 왔을 때 여호와께서 아이 사무엘을 부른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가 보여야 할 반응은 “여호와여 말씀하시옵소서종이 듣겠나이다”입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은 귀로 듣는 말 뿐만 아니라 순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첫번째 계시는 사무엘에게는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엘리의 집을 심판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12). 그의 아들의 죄악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대처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미하나님께서도 엘리에게 말씀하셨던 것이었지만, 사무엘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이 되어서도 엘리에게 먼저 그 이상에 대해서 말을 하지 못했던것입니다. 하지만 엘리가 숨기지 말라고 했을 때 사무엘은 그것을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않고 말했습니다. 이미 엘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은 자랄 수록 더욱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를 선지자로서 부르셨다는 것이 확증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과 함께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으로 자신을실로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실 것입니다. 

 

사무엘 당시에도 백성들은 제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은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활동은 분주하게 일어났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말씀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곳곳에 많은 집회와 예배가 일어나지만 그런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선포와 고민과 순종이 얼마나 많은지는 의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사무엘을 부르셨고,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돌보셨습니다.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말씀을 맡은 직분자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하신 말씀을 자세히 연구하여 조금도 숨김없이 온 성도에게 말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성도들은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태도로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온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음을 삶속에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배의 말씀을 통해서, 또 개인적인말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내시는 것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25일 (토요일) 사무엘상2장


한나는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한나의 기도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약한 자를 통해서 역사하시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높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히 부셔질 것이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게는 힘을 주시고 기름부음을 받는 자(메시야)의 뿔(권세, 힘을 상징)을 높인다고 합니다(1-11). 이것은 왕이 없던 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우실 왕에 대한 예언이자 메시야를 향한 예언을 포함하는 엄청난기도였습니다. 이 기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이 사무엘서와 성경 전체의 핵심을 이룹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당시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쁘다고 합니다. 행실이 나쁘다는 말은 불경건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행위를 보면 철저히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으로 역할을 하지만, 제물을 자기들 마음대로 백성들에게 갈취하여 제사를 업신여깁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경건한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이 취해야 할 제물의 부위를 정해 주셨습니다(레7:34, 10:14).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제물이 하나님께 바쳐지기 전에 자신의 것을 챙겼습니다. 바르게 먼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에 제사장의 몫을 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억지로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12-17,22). 하지만 사무엘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은 제사장들이입는 세마포 에봇을 입고 어려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한나를 돌보셔서 더 많은 자녀들을 주셨습니다. 엘리의 집은 범죄로 쇠약해지는 반면에 한나의 집은 은혜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한나에게 축복한 엘리는 자신의 아들들이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망하지만, 아들들은 그것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버린 것을 보여줍니다. 반대로 사무엘은 자랄수록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좋은평판)을 얻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엘리의 집에서 제사장이 끊어지고 궁핍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충실한 제사장을 세우겠다고 합니다. 충실한 제사장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대로 행하고, 그를 이어서 자손들이 제사장이 되는 견고한 집(가문)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27-36). 이는 엘리 집으로 상징되는 사사시대가 저물고 사무엘의 집안으로 상징되는 왕정시대가 열릴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세울 제사장은 1차적으로 사무엘이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참된 제사장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참된 제사장 예수님이 세우실 견고한 집(가문)은 다름 아닌 저와 여러분인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 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신 예수님 앞에서 바른 제사장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대로 행하며,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롬12:1-2). 하나님 앞에서 참된 제사장으로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24일 (금요일) 사무엘상 1장


사무엘상 말씀은 에브라임 산지 출신의 한 제사장과 그 가정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에브라임 산지의 레위인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는 사사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책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사무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상하 전체를 보면 사무엘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 다윗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왕이 없으므로 자기 마음대로 행하던 시기를 끝낼 하나님께서 세우실 왕이 세워지는 이야기입니다. 그 일을 맡은 사람이 바로 마지막 사사, 사무엘입니다. 

1장은 사무엘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엘가나는 제사장으로서 두 아내를 데리고 있었던 정상적이지는 않은 제사장입니다. 두 아내 중에 브닌나라는 아내는 출산하여 자식이 있고, 다른 아내 한나는 아이가 없어 브닌나에게 놀림과 굴욕을 당합니다. 하지만 한나가 이렇게 자식이 없는 원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5).  그들은 매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러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 때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서원했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그를 평생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합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나실인으로 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처음에 통곡하다가 나중에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했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이던 엘리는 그것을 보고 취한 줄 알고 책망합니다. 하지만 한나가 하나님께 심정을 통한 것 뿐이라고 합니다. ‘심정을 통한 것’은 “목숨을 쏟아 놓는다”는 뜻입니다. 마음과 뜻을 다해 간절히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엘리는 한나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구한 것을 허락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한나가 엘리에게 은혜를 입기를 원한다는말(18)은 방금 한 엘리의 말이 이루어지길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한나를 생각하시고 아이를 주십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자신이 “구하였다”고하면서 이름을 ‘사무엘(하나님이 들으신다)’이라고 짓습니다. 하나님께 구하였더니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젖을 뗄 때까지 데리고 있다가 젖뗀 후에 엘리에게가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신 것 같이 자신도 하나님께 약속을 지켜 그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서 여호와께 경배합니다(21-28). 

 

사무엘상 1장은 한나라는 불임 여성의 믿음과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회복을 주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 이상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아들을 구한 한나의 행동은 후에 사무엘에게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브닌나에게는 아들이 있지만, 한나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에는 왕들이 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없습니다. 엘가나는 한나에게 열 명의 아들보다 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열 명의 왕들보다도 귀합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왕을 구할 때 하나님은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왕은 반드시 평생을 하나님께 드려진 자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버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왕은 1차적으로 다윗이고 궁극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가 구할 때 주신 참된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왕은 우리에게 먼저 당신의 전부를 주시고,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온전한 사랑과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온전한 마음을 드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23일 (목요일) 룻기 4장


나오미의 말대로 보아스는 이 일을 이루기까지 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오늘날 재판소라고 볼 수 있는 성문으로 올라가서 자신보다 가까운 기업 무를 자를 기다린 보아스는 마침내 그를 만납니다. 그리고 재판장들인 장로들을 모읍니다. 그리고 그 ‘아무개’에게 기업무를 자가 되라고 합니다. 처음에 그는 하겠다고 하지만 보아스가 그 의무를 자세히 알려주자 그는 거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업무를 자가 되면 죽은 자의 기업을 대신 사서 자신의 기업과 합치고, 죽은 자의 이름으로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1-6). 그래서 더 가까운 기업 무를 자는 자신의 신을 벗어 보아스에게 줍니다. 이것은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온전히 보아스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장로들과 모든 백성들을 향해서 이제 자신이 죽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것(구속)에 증인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보아스는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구속)하여 아내로 맞이 하여 죽은 자의 이름으로 기업을 세우고 그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합니다(7-10). 여기서 ‘사다’라는 어감이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는데, 이것은 대신 갚아 주는 ‘구속하다’라는 말입니다. 이에 성문에 있는 장로들과 백성들은 룻을 축복하며 그녀가 이스라엘의 집을 세우고 유명하게 되며 그녀가 낳은 아들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이 되길 원한다고 합니다. 보아스와 룻은 결혼하였고 여호와께서 임신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축복하며 그 아이가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이며 노년의 봉양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오벳입니다. 그는 다윗 왕의 할아버지입니다(11-22). 참된 왕이 없어 방황하던 이스라엘을 위해서 참된 왕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룻기에서 만납니다. 

 

엘리멜렉과 그 가족의 모습은 사사시대를 대변해 줍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의 삶은 피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 백성을 받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참된 왕이 없어 방황하는 자들에게 참된 왕을 통해서 회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 참된 왕은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우리의 생명의 회복자이며 인생의 봉양자가 되십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룻기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새생명을 주신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 우리를 봉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니다. 아멘. 


2월 22일 (수요일) 룻기 3장

어느 날 나오미는 룻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남편을 맞이할 계획을 말합니다. 바로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 계획은 이렇습니다. 보아스가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부르고 그 곡식 단 근처에서 잘 때, 룻이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그의 발치의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눕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아스가 룻이 해야 할 일을 알려 줄 것이라고 합니다. 룻은 그대로 하겠다고 합니다(1-5). 얼핏 보면 이것은 룻이 보아스를 유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룻과 보아스의 대화를 보면 룻이 이렇게 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자리에 누워 룻을 발견하였을 때 룻은 자신을 밝히면서 당신의 옷자락으로 자신을 덮어 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옷으로 번역된 말은 2장 12절에 나오는 ‘날개’와 같은 단어입니다. 주님의 날개로 피하여 온룻이 보아스의 날개로 자신을 덮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부에게 피난처는 무엇입니까? 바로 결혼하여 자신을 지켜줄 남편을 얻는 것입니다. 보아스에게 자신을 덮어 달라고 하는 것은 바로 결혼해 남편이 되어 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룻이 이렇게 보아스에게 결혼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청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보아스는 룻의 ‘기업무를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룻의 요청을 듣고 보아스는 젊은 청년과 결혼하지 않고 자신을 찾아와 청혼 한 것을 칭찬합니다. 이것 또한 단지 늙은 보아스에게 왔기 때문에 보아스가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칭찬한 이유는 룻이 자신의 회복을 인간적인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동일하게 자신도 율법에 따라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 가까운 친척이 있기 때문에 그가 기업무를 자가 되어 룻에게 아들을 낳고 사회적인 보호와 회복을 주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하겠다고 약속합니다(1-13). 새벽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룻은 집으로 돌아갑니다. 보아스는 역시나 룻을 그냥 보내지 않고 시어머니와 먹을 양식을 주어 보냅니다. 보리를 여섯 번 준 것(일곱에 하나가 모자라는 숫자는 미완성을 의미함)은 최종적으로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쉬지 않겠다는 일종의 신호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나오미에게 보아스와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을 듣고 보아스가 이 일을 성취하기까지 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14-18). 

 

룻기의 이야기는 이처럼 율법에 신실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복된 삶을 사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당시 사사기 시대에는 이런 율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자신의 회복을 하나님의 율법에서 찾고, 또율법대로 요청하는 이방 여인 룻에게 그 율법대로 시행하려는 보아스가 있습니다. 참된 평안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서 찾고 있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당당하게 나의 보호처가 되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오늘날도 이 원리는 같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당당하게 원하는 것을 자신을 위해 하라고 독려하며, 많은 삶들이 그렇게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참된 행복과 안전과 회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따라 참된 행복과 회복을 누리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21일 (화요일) 룻기 2장

오늘 말씀은 처음으로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룻기의 저자는 먼저 보아스에 대한 정보를 줍니다. 그는 죽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그 지역에서 재력이 상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룻은 어머니와 자신을 위해서 추수 중인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워 오겠다고 합니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갔습니다(1-3). 가난한 과부가 추수 중인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은 사사들이 다스리던 어두운 때에 율법에 명시된 과부들의 권리였습니다. 룻은 이 율법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마침 보아스가 그 밭에 와서 종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길 원한다는 인사를 하고 종들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길 원한다는 인사를 합니다. 이 또한 당시 사사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특별한 인사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그녀가 모압 여인이기 때문에 생김새가 약간 달랐을 것입니다. 종들 중에 책임자를 불러 그녀에 대해 물었고, 그 책임자는 룻이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이며, 아침부터 지금까지 잠시 쉰 것 외에 부지런히 줍고 있다고 일러 줍니다(4-7). 이에 보아스는 룻을 딸이라고 부르며 다른 곳에서 이삭을 줍지 말고 보아스의 밭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합니다. 동시에 일을 하는 젊은 남자들에게는 룻을 건들지 말라고 미리 말해 두었다고 합니다. 또 목이 마르면 다른 종들과 같이 소년들이 길러 온 물을 마시라고 합니다. 이런 배려는 보아스가 전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입니다. 보아스는 단지 율법에 적힌 대로만 그녀는 두면 됩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에게 단지 율법에 적힌 대로 행함을 넘어서 자기 집에 속한 사람과 같이 대해 주었습니다. 나아가 룻이 자기의 부모와 고국을 떠나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것을 보아스가 알고 있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그녀에게 온전한 상을 주시기 원한다고 합니다. 룻은 이에 감사를 표현합니다. 보아스의 호의는 점심 시간에도 이어집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종들과 자신을 위한 떡을 함께 먹고, 퍽퍽한 빵을 부드럽게 해 주는 초에 찍어 먹게 합니다. 그리고 볶은 곡식도 줍니다. 유대인들은 본래 이방인들과 교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을 완전히 이스라엘 백성 중의 하나로 여겨 자연스럽게 함께 교제합니다. 뿐만 아니라 보아스는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곡식 단에서 룻이 이삭을 주울 때 책망하지 말고 일부러 흘려서 쉽게 이삭을 모을 수 있도록 배려해줍니다. 이것은 과부를 불쌍히 여기는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8-16). 

이삭 줍기를 마쳤을 때 룻은 보리 한 에바(대략 15kg)를 주웠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오미에게 가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 줍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친척 중의 하나이며, 기업을 무를 자(고엘, 구속자)가 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이제 다른 곳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고엘은 사람이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 형제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대신하여 고인의 아내와 결혼하여 죽은 형제의 가문을 이어주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룻은 보리와 밀 추수가 마칠 때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습니다(17-23).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는 단지 로맨스 이야기가 아닙니다. 둘의 만남 이야기에서 율법이 지켜지고 있고, 특별히 보아스가 룻에게 한 행동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백성이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사사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대로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율법에 신실하고 주님의 날개 아래 피하러 온 룻을 보살피는 보아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고 완성하셨으며,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여 나아온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지키시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온 사람에게 우리 주 예수님은 단지 호의를 베풀 뿐만 아니라 당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보살피십니다. 이런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20일 (월요일) 룻기 1장

룻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를 배경하고 있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사사기는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룻기는 다윗 왕의 탄생으로 끝이나는 왕이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그 시대상을 대표하듯, 하나님께서 주신 땅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들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과 함께 그곳을 떠납니다. 그리고 모압 땅에 정착을 하고 그곳 여인들과 자식들을 결혼 시킵니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통혼입니다. 엘리멜렉은 그 땅에 도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 죽었고, 십년 뒤 쯤에는 아들들도 죽었습니다(1-5). 졸지에 과부 셋이 남았습니다. 그 때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 가고자 모압 지방을 떠납니다. 하지만 모압 여인인 두 며느리는 그들의 백성에게로 돌려 보내고자 합니다. 자기 민족에게 돌아와 새로운 결혼을 통해서 평안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한 며느리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자기의 민족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룻이라는 며느리는 끝까지 시어미니 나오미를 쫓아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을 것이라고 합니다(6-18). 풍족하게 나갔던 나오미가 빈 손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은 놀라서 수근 거립니다. 이에 나오미는 자신이 풍족하게 나갔지만 여호와께서 비어 돌아오게 만드셨고 징벌하셨기 때문에 나오미라는 이름보다는 괴로움을 뜻하는 ‘마라’라는 이름 더 잘 어울린다고 합니다. 그 때는 보리 추수가 시작될 쯤 이었습니다(19-22). 

 

룻기 1장은 풍족하게 떠난 엘리멜렉의 가족이 텅 비게 되는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신과 민족을 버리고 시어머니의 백성과 신을 택한 룻의 모습이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룻의 결단은 자신의 민족에서 새롭게 남편을 얻어 평안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낯선 민족에게서 그 일원이 되어 살겠다는 엄청난 결단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지만, 시어머니의 백성과 그 신을 섬기겠다는 다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을 때 사람들은 시어머니에게 빈정거렸습니다. 하지만 룻은 그것을 보고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이런 좋지 않은 모습을 보고 실망하며 떠나지만, 룻은 그런 모습에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교회 안에 있습니다.

또 나오미 자신이 텅 비어 돌아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녀가 떠날 때 남편과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비어 돌아 온 것은 재산이 아니라 남편과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룻과 함께 있습니다. 완전히 비어 온 것이 아니라 이방인 며느리가 함께 있습니다. 이 며느리를 통해서 결국 다시 채워질 것입니다. 엘리멜렉이 약속의 땅을 떠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는 것이고, 언약 백성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 아들을 이방 여인과 결혼 시켰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온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회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 떠나 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우리에게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교회의 실망적인 모습에 좌절하지 않고 인내하며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떠난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19일 (주일) 사사기 21장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베냐민을 친 후에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께 원망하는 장면입니다. 백성들은 벧엘에 모여 웁니다. 그런데 우는 이유가 이제 이스라엘의 한 지파가 끊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음 날 아침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1-3). 번제와 화목제는 감사의 제사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감사가 아닌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베냐민을 치라고 하셨지 그들을 ‘진멸(헤렘)’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진멸한 것은 순전히 그들의 판단이었습니다. 진멸하는 것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는 것으로 이방 민족을 칠 때 하나님이 명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베냐민 지파에게 자기들의 아들을 주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스스로 맹세한 까닭이었습니다. 이 맹세 또한 그들 스스로 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보시면, 먼저는 함께 싸우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징벌함으로 그곳의 남자와 결혼한 여자, 그리고 아이들을 죽임으로 베냐민 지파가 결혼할 딸들을 아내로 얻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자신들의 맹세 때문에 동족을 또 죽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그래도 모자라는 인원은 베냐민 자손들이 실로의 여자들(이방민족)이 축제 때 춤을 추러 나오면 납치해라는 것입니다. 혹시 실로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자신들이 해결한다는 식입니다(22). 그리고 나서 각 지파들을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사건을 기록하면서 사사기 저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고 평가하며 사사기를 끝이 납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이야기들은 사사들에게 관한 이야기 후에 사사 시대가 얼마나 어둡고 부패한 시기였는 지를 보여 주려고 합니다. 마지막 이야기에서 온 백성의 장로들이 모여 함께 논의한 결과들 조차도 결국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회 전반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제사와 하나님을 섬기는 형식은 남아 있지만 그 속이 비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것보다 자신들의 생각을 의지하던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 상을 통해서 사사기는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 참된 왕(다윗, 예수님)을 소망하도록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도록 하는 책입니다. 주님은 사사 시대와 같은 우리의 삶에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우리 삶을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 때 어둠의 시대는 끝이 납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의 중심을 우리 주 예수님께 놓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18일 (토요일) 사사기 20장

에브라임 산지의 레위인이 자신의 죽은 첩을 열 두 조각을 내어 각 지파 별로 보낸 것은 열 두 지파를 모이게 하기에 충분히 끔찍했습니다. 레위인으로부터 이러한 끔찍한 일을 벌인 이유에 대해서 묻자 레위인은 그가 베냐민 지파에게 속한 기브아에서 당한 일을 말해 줍니다(1-7). 베냐민 지파를 제외 한 사십만 명의이스라엘 군사들이 모였고, 그 중의 10퍼센트는 양식을 준비하게 하고 온 무리가 베냐민을 징계하기로 합니다. 사사기 저자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8-11). 아이러니하게도 온 백성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 같은 민족에 대한 보복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은 베냐민 온 지파에게 악을 행한 기브아 사람들을 내어 놓아 악을 제거하라고 하지만, 베냐민 지파는 그것을 거부하고 전쟁 준비를 합니다. 지파 전체가 악을 두둔하며 징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이스라엘 안에서 내전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서로를 크게 살육하는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백성을 모으고 베냐민과 전쟁을 하기로 다 정하고 이스라엘은 그제서야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먼저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유다가 먼저 올라갔다는 말이 없습니다. 결과는 패배였습니다. 하나님께 물었지만 그대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울며하나님께 베냐민을 쳐야 되는지 물었을 때 하나님은 치라고 합니다. 다음 날에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을 치러 나아가지만, 결국 또 패하고 맙니다. 그리고 다시 온 백성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릅니다. 그들은 울며,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과 함께 묻습니다(28). 하나님은 이제 반드시 베냐민을 넘겨 주시겠다고 하고 베냐민 지파를 쳐서 승리를 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승리는 사사기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승리를 기록한 부분입니다. 특이한 점은 사사가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이 모여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그 승리는 이방 민족들과 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 싸움에서 언급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사사기 저자는 이러한 싸움과 하나 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들도 결국 자기의 소견대로 행하고, 자신들의 합의 후에 하나님을 부적절하게 소환하고 물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이 모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을 준비하고 그제서야 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응답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의 패배는 지도자들의 행위가 적절치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 번의 패배는 불순종과 더불어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할 때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세 번째 응답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제사,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 온전한 탄식, 그리고 대제사장과 더불어 바른 예배가 드려졌을 때 승리를 얻게 됩니다. 비록 그 승리가 이방 족속을 약속의 땅에서 몰아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쟁에서 승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것에 달려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 확인합니다. 사사기 시대가 그토록 어두운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바른 예배 없이도 마음대로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다는 각자의 소견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용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월 17일 (금요일) 사사기 19장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에 생긴 또 다른 사회상을 보여줍니다. 레위인과 그 첩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에브라임 산지의 깊은 곳에서 사는 레위인에게 첩이 있다는 당혹스러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레위인들은 백성의 어른으로서 성적으로 정결해야 했습니다(레21:1-7). 레위인의 첩이 행음을 했고 아버지에게 가 있습니다. 레위인은 좋게 타일러 그 첩을 다시 데리고 옵니다. 이런 모습은 그래도 종교적 지도자로서 최소한의 너그러움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어서 종교적 지도자가 그의 장인과 함께 5일 동안 술에 흠뻑 젖어 즐기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이러니입니다. 그리고 5일 후에 장인의 간청을 뿌리치고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 갑니다. 종은 여부스에서 머무르자고 합니다. 유다 지파 자손들이 그곳을 분배 받았지만 아직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곳은 이스라엘 자손의 지역이 아니었습니다(수15:68). 여부스는 다윗의 때에 가서야 정복되어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대상11:4-9). 레위인은 그래도 같은 이스라엘 민족인 베냐민 자손들이 살고 있는 기브아나 라마에 가서 밤을 지내자고 합니다(12). 그런데 기브아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그들을 집으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밤이 되면 급격하게 기온이 떨어지기 때문에 해가 지고 밖에 사람이 있으면 집으로 들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족속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레위인과 같은 고향 출신인 한 노인이 그들을 맞이하여 집에서 자도록 합니다. 그런데 밖에서 그 성의 불량배(불법을 행하는 무리)들이 그 남자를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그와 성적인 관계를 맺겠다고 합니다(22). 노인은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확실히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고 평소에 알고 지내던 자였던 것입니다. 노인은 그들에게 그런 악을 행하지 말라고 설득하면서 처녀인 자기의 두 딸과 첩을 통해 좋을 대로 하고, 이 남자와는 그런 망령된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레위인은 그 첩을 그들에게 끌어내어 주었고, 그들은 그녀를 밤새도록 성적으로 능욕하고 놓아주었지만 집에서 죽었습니다. 아침에 첩을 본 레위인은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일어나라, 가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첩이 죽은 것을 알고 시체를 가지고 고향 에브라임 산지로 돌아와 시체를 열 두 조각으로 나누어 각 지파에게 보냅니다(23-30). 레위인이 마치 제물을 나누 듯이 조각내어 보낸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에 경고와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왕이 없는 시기에 이스라엘 사회가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 얼마나 죄에 무감각해졌는지 보게 합니다. 개인과 지파를 넘어 이제는 부패한 사회상을 보여줍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 나그네를 돌아보는 긍휼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불량배가 판을 칩니다. 그들은 성적으로 무감각하고 긍휼이 없으며 율법을 지키는 일에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을 찾아온 무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 지도자인 레위인은 첩을 데리고 삽니다. 또 능욕당한 자신의 첩에 대해서 자비와 긍휼이 없습니다. 노인은 큰 악을 막기 위해서 작은 악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총체적으로 이스라엘은 도덕적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한 사회상과 시대상을 보여줍니다. 

 

오늘날도 많은 부분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에서 물러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신자의 도덕적 삶에 기준이 되는 십계명을 버린 지 오래 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십계명을 가르치기에 부담을 느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적인 기준과 경건성과 도덕성의 기준, 다른 사람과 관계에 있어서 배려하고 긍휼을 베풀고 사랑하는 기준이 세상보다 그리스도인들이 낫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참된 왕이 계시지만 정작 삶 속에서 그 왕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분의 백성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지도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은 과연 사사기의 시대와 얼마나 다르며, 얼마나 다르고자 애통해하며 회개하고 더 바른 기준을 따르고자 합니까?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의 기준을 바르게 잡는 하루가 됩시다. 아멘.


2월 16일 (목요일) 사사기 18장

오늘 말씀은 왕이 없었던 시대상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미가는 자기 스스로 제사장을 사유화하고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며 우상을 섬기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것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런 동일한 모습이 단 지파의 모습에서 보여집니다. 1절에서 단 지파가 땅을 분배 받지 못했다고 번역이 된 것은 오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호수아는 단 지파에게 땅을 분배해 주었기 때문입니다(수19:40). 분배를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분배 받은 땅을 제대로 차지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모리 자손에게 번번히 패배하여 고립되었기 때문입니다(삿1:34). 히브리어 번역도 “땅을 얻지 못했다“고 번역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제 단 자손은 대표 5인을 파송하여 정복할 만한 땅을 살피러 갑니다. 그리고 우연치 않게 미가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서 레위 청년의 음성을 듣고 자기들의 가는 길이 형통할 지 묻습니다. 그 청년은 그럴 것이라고 합니다(2-6). 다섯 사람들은 라이스라는 성읍을 발견합니다. 그곳은 부족함이 없어 보이던 지역이었습니다. 또 그곳 사람들은 아무런 염려 없이 평화로움 가운데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그곳은 다른 지역 사람들과 교류(동맹)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섯 사람들은 단 지파에게 가서 그곳을 점령하자고 합니다(7-10). 이에 단 지파 중에서600명이 무장을 하고 치러 가는 길에 미가의 집을 지나게 됩니다. 이전에 정탐한 다섯 명은 그 집에 들어가 미가의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빼앗아 나옵니다. 그리고 그 집의 제사장을 자기 지파의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그 제사장도 그것을 기쁘게 여깁니다. 또 그곳의 어린 아이들과 가축과 물건을 취해서 갑니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것입니다. 미가와 이웃들이 그 소유들을 찾으러 따라 왔지만 무력으로 협박하는 단 지파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 옵니다(25). 이제 단 지파는 미가가 만든 우상들과 제사장과 함께 라이스를 쳐서 정복하고 성읍을 불살라 정복합니다. 결국 단지파 사람들은 그곳의 이름을 ‘단’이라고 붙이고 그곳에 정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단 지파를 위해서 새긴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미가 집의 제사장의 이름을 밝히는데 놀랍게도 모세의 자손이었다고 합니다. 사사기 저자는 단 지파에 있는 신상과 하나님의 집이 실로 있다는 것을 대조하면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30-31). 

 

단 지파의 행동들은 미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을 한 개인과 가정을 넘어 지파적으로 확대된 것을 보여줍니다. 단 지파가 라이스를 치는 행동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물어보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 속에서 자신들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싸우러 갈 때 미가의 새긴 우상과 제사장을 동행하게 함으로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 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분배 받는 곳에서 아모리 자손들과 싸워서 그들을 몰아내기 보다 분배 받은 곳이 아닌 가나안 북쪽 끝의 라이스를 정복한 것입니다. 그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단 지파는 결과적으로 그들이 살아갈 터전을 얻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의 방식은 버렸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했겠지만(10),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지파는 집단적 기회주의자들이고, 그 삶의 방식에서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지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 하나님을 이용하는자들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와 같은 모습은 없는 되돌아보고 회개할 것이 있다면 회개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에 우리 삶의 중심을 두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15일 (수요일) 사사기 17장

삼손을 마지막으로 사사기에서 사사들의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17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첫번째 에피소드가 미가와 그 집의 제사장 이야기 입니다. 도둑질로 시작된 개인 제사장이 18장에서 단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미가는 어머니의 은 천 백을 훔쳤습니다. 이것은 제 오계명과 팔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은을 돌려 준 것을 칭찬하며 그것으로 우상으로 만들어 그에게 다시 돌려줍니다. 악한 일에 상을 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행위로 생각했습니다. 미가도 또한 그것을 집에 모시며, 대제사장만이 입을 수 있는 옷으로 절대로 개인을 위해서 만들면 안되는 에봇도 만듭니다. 또 당시에 집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드라빔도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깁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한 아들을 세워 개인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1-6). 이후에 유다 지파에 속한 한 레위인이 유다 지파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고(혹은 버리고) 베들레헴을 떠나 에브라임 지파가 살고 있는 미가의 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미가는 그의 출신을 묻고 레위인임을 알자 그를 개인 제사장을 세우고 많은 금전적 보상을 약속합니다. 미가는 그 레위인을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하고 제사장으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에게 복을 더할 것이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속적으로 어기면서도 자기의 소견에 옳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는 자기에 복을 더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7-13).

 

이것은 당시 사사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 정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고 삶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기에 옳은 대로 행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을 사유화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성경의 이야기에만 일어난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비슷한 상황 그대로 있었습니다. 사제들은 귀족들의 사유화된 제사장으로서 활동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보다 단순히 자신에게 봉급을 주는 귀족들의 일에 종교적 위로와 당위성만 제공할 뿐이었습니다. 귀족들은 그런 사제들에게 죄를 수시로 용서 받았다는 거짓에 취해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어겼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중세시대만큼은 눈에 띄게는 아니지만 우리의 소견에 옳은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없을까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별로 관심이 없으면서 주일 예배 참석으로서 위안을 삼고 있는 사람들은 없을까요? 사사기의 후반부는 백성들이 왕이 없으므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왕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나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살고자 노력하고 부족하고 연약한 것을 끊임없이 그분께 아뢰며 점점 더 그분의 원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삶속에서 사사시대와 같은 악순환을 끊고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모시고 참된 복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14일 (화요일) 사사기 16장

오늘 말씀에서 삼손은 앞 장들보다 더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정욕에 이끌려 가사에 있는 창기에게 갔고,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죽이려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삼손을 위험에서 구하시고, 삼손을 통해서 가사를 심판하십니다. 왜냐하면 삼손이 성문과 문의 기둥들을 뽑아서 먼 산 위에 올려 놓있다는 것은 그 성이 완전히 위험에 노출 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가사는 성문을 복원하는 동안 힘을 잃게 된 것입니다(1-3).

삼손은 다시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여인을 통해서 적국인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어 그것을 없애려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지도자들은 이 여인에게 많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들릴라는 실행에 옮깁니다. 삼손은 세 번 들릴라에게 거짓으로 힘의 근원을 알려주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자신의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삼손의 힘의 근원은 머리카락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삼손의 힘의 근원은 그가 여러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실인이되어 하나님께 구별된 자라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자르면 나실인으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기간이 끝난 것이 되어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18). 삼손의힘의 근원을 알게 된 들릴라는 삼손의 머리카락 일곱 가닥을 잘랐고, 블레셋 사람들의 지도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줍니다. 결국 힘을 완전히 잃은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눈이 뽑히고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됩니다. 그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은 삼손이 다시 거룩하게 구별된 나실인으로 역할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줍니다. 삼손을 잡은 블레셋 사람들은 이렇게 된 것이 그들이 섬기는 다곤 신이 덕분이라 생각하고 다곤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잔치를 벌립니다. 그 잔치에 삼손을 불러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기둥 옆에 있던 삼손은 하나님께 다시 부르짖어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그 건물을 바치고 있는 기둥과 함께 엎드러져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 때 죽은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 생전에 죽인 사람들 보다 많았습니다. 삼손의 가족이 삼손이장사를 했다는 기록과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다는 기록으로 삼손에 대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19-31).

 

삼손은 나실인과 사사로서 부족했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의 근원인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무효가 되게하는 것을 알려주어 스스로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그것은 다곤 신의 승리로 치부되었고, 하나님의 명예가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마지막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그를 회복시키시고 사사와 구원자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명예도 회복하셨습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나실인으로서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삶이 힘의 근원입니다. 

삼손은 여러 면에서 부족한 인물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되었지만 때로 그런 삶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참된 사사이신 예수님은 완벽하게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 거룩한 삶으로 얻으신 의를 믿는 자에게 나누어 주시고, 동일하게 거룩한 삶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살아가도록 성령을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성령의 전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감으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능력의 삶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됩시다. 아멘.  


2 월 13일 (월요일) 사사기 15장

 얼마 후에 삼손은 염소 새끼를 가지고 자신의 아내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장인은 이미 그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장인이 볼 때 지난 번 일로 삼손이 그 아내를 미워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장인이 아내의 동생을 다시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을 칩니다. 이번에는 지난 번과 달리 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1-3).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를 사로 잡아 두 마리의 꼬리에 횃불을 달고 밀이 무르익은 곳을 뛰어 다니게 합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곡식과 포도원과 올리브 나무가 불에 타 큰 손실을 입습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장인과 딸에게 책임을 물어 불로 태워 죽입니다. 삼손은 다시 이것을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습니다. 그리고 에담 바위 틈에 숨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블레셋 사람들은 더 큰 군대를 모아 유다에 진을 칩니다. 놀란 유다 사람들이 블레셋에게 왜 공격하느냐고 묻고, 삼손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삼손을 넘겨 주기로 합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잡혀줍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치러 올 때에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나귀의 새 턱뼈로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천 명을 죽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큰 구원을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하지만 삼손은 힘든 싸움으로 목이 말라 죽을 지경에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샘물을 터져 나오게 하셔서 삼손에게 구원을 베풉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했지만, 자신도 목마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였습니다. 블레셋이 지배하는 동안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 동안 지냈습니다(14-20).

 

삼손에게는 분명히 부정적으로 평가 되어야 할 부분이 있지만, 틈을 보아 블레셋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한 사사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의 복수심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이스라엘 전체는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삼손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에게서 지키십니다. 삼손은 무자비하게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동족에게 잡혀주지만, 원수에게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이런 모습은 참된 사사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사역을 위해서 동족에게 스스로 잡혀 주시지만 능력이 없거나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원수 사탄에게는 강력한 능력으로 그들의 세력을 잠잠하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삼손처럼 구원이 필요한 분은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전적으로 구원을 주시는 왕이십니다. 그분은 부르짖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죄와 어려움에서 구원하여 주시도록 부르짖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12일 (주일) 사사기 14장

오늘 말씀은 사사 삼손의 본격적인 활동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딤나에 내려가 한 여인을 보고 반하여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부모에게 말합니다. 딤나는 블레셋 지역으로 블레셋은 당시에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말렸지만 삼손은 그녀가 그의 눈에 들었다고 합니다. 자기의 소견으로 볼 때 좋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삼손이 틈을 노려 블레셋을 치려고 했던 계획 중 하나였습니다(1-4). 이후에 삼손은 부모와 함께 내려가다가 젊은 사자가 자기를 향해 오는 것을 보고 찢어 죽였지만, 그 때 부모는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삼손을 강하게 했지만 그것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다시 딤나 여인을 맞이 하기 위해 가는 중에 이전에 찢어 죽인 사자의 몸에서 꿀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먹었습니다(5-9). 사실은 나실인으로서 시체를 가까이하면 안되지만 삼손은 나실인의 법을 어깁니다. 그것도 부모에게는 숨깁니다. 뿐만 아니라 삼손이 딤나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곳 사람들이 삼십 명을 데리고 와서 친구로 삼도록 합니다. 삼손은 수수께끼를 냅니다. 그것은 삼손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칠일 동안의 시간이 주어졌고, 사흘 동안 삼십명의 친구들은 문제를 풀 수 없었습니다. 이에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여 삼손에게 답을 알아냈고, 그것을 아내에게 전달받았습니다. 그리고답을 맞췄습니다. 삼손은 약속한 대로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블레셋의 다른 지역인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을 치고 노략하여 수수께끼를 푼자에게 줍니다. 그곳을 칠 때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했습니다(10-20). 하나님께서 삼손이 블레셋을 칠 때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삼손은 사역은 양면성이 존재합니다. 삼손은 사사로서 블레셋을 치기 위해서 자신의 결혼을 이용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으로서 해서는 안될 행동들도 하게 됩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을 틈을 타서 치게 되지만, 자신이 약속한 옷을 주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하는 모습을 봅니다. 삼손의 이런 양면의 모습은 삼손의 이야기에서 반복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그런 부족함과 신중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셔서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가십니다. 비록 인간적인 연약성이 두드러지지만 그것도 사용하셔서 그를 사용합니다. 백성이 부르짖기 전에 준비하신 사사이지만,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완전한 구속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다른 인간 사사들과 구원자들은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항상 부족함이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완벽하지 않은 사사를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일에 우리의 연약성이 두드러지지만 사용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연약함 마저도 사용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멘. 


2월 11일 (토요일) 사사기 13장

13장에서 처음으로 평화의 기간보다 이방 민족이 다스린 기간이 더 길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이 더욱 심각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부터 특별한 사사 삼손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삼손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께 구별된 사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적적인 임신으로 출생한 사사입니다. 삼손의 어머니는 불임이었지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임신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면 하나님께 구별된 나실인으로 평생 동안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고 머리를 깎으면 안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을 거룩하게 드리는 나실인의 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민6:1-21). 하나님의 사자는 그 아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고 합니다. 삼손의 어머니는 그를 하나님의 선지자(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1-7).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다시 한번 여호와께 기도하여 그 사자를 만나게 해서 어떻게 그 아이에게 행할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 이 부부는 불임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났고, 남편을 불러 왔습니다. 다시 한번 부부는 어떻게 아이에게 행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여인에게 말한 것을 잘 지키라고 합니다. 마노아는 그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사자는 제사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노아는 그에게 이름을 묻고 그 이름이 ‘기묘자(기이하고 놀라운 분)’라고 알려줍니다. 마노아가 번제와 소제를 드릴 때 바위에서 불꽃이 쏟아 올라 하늘로 올라갈 때 그 사자도 함께 올라가는 광경을 부부가 목격합니다(8-20). 이렇게 놀라운 일을 보고 마노아는 하나님을 뵈어서 죽을 것이라고 하지만 아내는 만약 죽이시려면 제사도 받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에게 그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더 나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이 아들을 낳아 삼손이라 이름했습니다. 그 뜻은 ‘작은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이가 자랄수록 복을 주셨고 하나님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21-25). 

 

오늘 말씀에서는 앞부분과 달리 백성들이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통해서 탄생하게 한 사사입니다. 백성들이 부르짖기 전에 하나님께서 삼손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또 그 기적이 실제로 이루어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특이하게도 오늘 말씀은 삼손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내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삼손은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를 ‘시작’하는 사사입니다. 그렇다면 완성하는 사사는 누구 일까요? 구원을 완성하는 사사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삼손과 같이 나실인(나사렛인)이라고 일컬어지시고, 성령에 의해 광야로 내몰리신 분으로 궁극적으로 구원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사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부르짖기 전에 준비하셨고 보내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삼손은 ‘작은 태양’이지만, 예수님은 ‘공의로운 태양’이시고 태양보다 강한 빛이십니다(말4:2; 계21:23).

하나님은 블레셋보다 훨씬 더 악하고 강한 사탄에게 고통당하고 있던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우리가 부르짖기 전에 준비하셨고 보내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됩시다. 아멘. 


2월 10일 (금요일) 사사기 12장

입다는 기드온과 유사하게 에브라임 지파와 갈등을 겪게 됩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입다가 암몬 족속과의 전장에서 자기들을 부르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집니다. 아마도 전리품을 받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기드온은 비슷한 태도에 에브라임 지파가 큰 업적을 남긴 것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불만을 식혔지만, 입다는 다른 대응을 합니다. 길르앗 지도자들과 암몬 왕, 심지어 하나님과 협상을 벌인 입다이지만, 에브라임 지파에게는 외교적 협상이 아니라 전쟁을 선포합니다. 입다는 에브라임과 전쟁을 벌여 요단 나루터를 장악하고 서편으로 후퇴하려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발음을 테스트하여 4만 2천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같은 민족을 죽입니다. 입다는 사사이지만 여전히 앞선 사사들과 비교했을 때 더 악한 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입다의 재위 기간은 6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1-7). 또 평안을 누렸다는 표현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점점 더 악해지는 모습을 대표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후에 일어나는 사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입산은 사사로서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두고 있었고, 아들들을 위해서 밖에서 여자를 데려오고 딸을 밖으로 시집 보냅니다. 이것은 외교적으로 다른 민족들과 결혼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결혼 동맹을 통해서 평화를 유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과 통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칠 년 동안만 이스라엘 다스리고 장사되었습니다(8-10). 입산을 이어 엘론 십년 동안 다스렸는데, 그에 대해서는 어떤 상세한 기록도 하지 않습니다(11-12). 압돈은 아들 사십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나귀를 탔다는 기록만 남깁니다(13-15). 이것은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지만 평안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입다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종족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과 입산이 이방인과의 결혼을 평화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것, 그리고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압돈 등은 사사들이 비록 이방인들의 압제와 고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지만 여전히 완전하지 못한 구원자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모두 참된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다스린 시간도 제한적입니디. 이전 사사들에 비해 덜 탁월합니다. 이런 사사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줌으로 사사기의 저자는 지속적으로 완전한 왕을 기다리게 합니다. 온전한 왕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이방과 타협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가지고 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평화를 가지고 오는 왕입니다. 또한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않고 권력과 부를 모으지 않는 왕입니다. 바로 이 온전한 왕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사사들의 인간적 악과 연약함을 통해서 우리는 완전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며 평안을 주시는 참된 사사이십니다. 그분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에게 참된 평화가 찾아 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주 예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하루가 됩시다. 아멘. 

2월 9일 (목요일) 사사기 11장

여호와 하나님은 백성들이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께만 호소하는 모습에 근심하셨습니다(10:16).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과연 이스라엘 가운데 사사를 세워 구원하실 것인가?”라는 기대와 의문을 가지고 11장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결국 길르앗 사람 입다를 세웁니다. 그런데 입다의 성장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첩(창녀)의 자식이었고, 형제들은 그를 형제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길르앗을 떠나 돕 땅에 거주하였고, 그곳에서 잡류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오늘날로 치면 용병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입니다(1-3).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위협하자 기르앗의 지도자들은 비록 용병들의 우두머리지만 싸움을 잘하는 입다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만약 암몬 자손들과 싸워 이기면 길르앗 모든 주민들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입다는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여 길르앗의 장관(지휘관)이 됩니다(4-11). 입다는 비록 잡류들의 우두머리였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고, 하나님을 어느정도 믿고 있었고 협상에 능했습니다. 암몬 자손의 왕에게 평화의 사신을 보내는 것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과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 바로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땅이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암몬 자손들이 이스라엘을 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불법적으로 암몬 땅과 에돔 땅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입다는 불법적으로 취한 것이 아니라 시혼 왕과 같이 암몬과 에돔 사람들이 먼저 이스라엘의 평화 제안을 거절했고, 공격을 받아 그 땅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것에 대한 책임은 암몬과 에돔에게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라고 입다는 신학적인 해석까지 합니다. 당시에는 아주 보편적이고 정상적으로 땅을 차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이미 삼 백년 전에 일어난 일로 지금에 와서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공격하는 것을 정당하지 않다고 외교적으로 먼저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암몬은 그것을 거부했고 결국 전쟁을 하게 됩니다(12-28). 하나님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여 백성들을 모아 전쟁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입다는 만약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시면 전쟁에서 돌아 올 때 가장 먼저 자신에게 나아오는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승리를 주셨고, 입다의 무남독녀가 그를 맞이 합니다. 입다는 결국 그 딸을 번제로 드리게 됩니다(34-40). 

 

입다는 이스라엘 대한 바른 역사와 지식,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지만, 전쟁을 앞에 두고 서원을 통해 하나님과 협상을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입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넘어 무언가를 더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서원의 내용은 충격적이게도 너무나도 이교적입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한 일로 보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근심하셨기 때문이지 입다의 서원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입다는 자신의 생각대로 딸에게 행합니다. 그 딸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예입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어느정도 성경을 알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이 마음에 계시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을 포기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협상을 하려는 자세로 신앙생활을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기 보다 우리의 나름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것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없는지 돌아 봅시다. 그래서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8일 (수요일) 사사기 10장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돌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이 말은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모습과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구체적인 업적이 소개되고 있지 않지만, 앞에서 길게 다루어진 아비멜렉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줍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였고, 장사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아비멜렉은 장사되었다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 받은 자였습니다(1-2).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됩니다.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있는 지명으로 주요 지파가 있는 서편이 아닌 동편에서도 사사가 세워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아들 삼십명이 나귀를 나고 삼십 성읍을 다스리는 것은 당시에 부강했던 통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야엘이 사사로 다스릴 때 이스라엘은 평온하고 부강했던 것입니다(3-5). 야엘이 죽고 나서 이스라엘은 다시 범죄합니다. 그런데 그 범죄의 정도가 더 심해 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언급하는 이방신들의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이전에는 바알과 아세라, 아스다롯 정도였다면, 이제는 그것들에 더해서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 블레셋의 신들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6).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바로 사사를 세우셔서 구원하셨는데,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에게 부르짖으라고 책망하시며 거절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에 이스라엘이 다시 부르짖고, 자기들에게 있는 우상들을 제할 때 하나님은 이로 인해 근심하셨다고 합니다(7-16). 마침 그 때에 암몬 사람들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을 공격할 준비를 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사사 없이 싸움을 해야 하는 위기에 빠집니다(17-18).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항상 해야 하는 일이며, 어려움이 올 때에만 잠깐의 도피책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잘못된 것을 구할 때 거절하시는 분이시고, 근심하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줍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같은 메시지가 적용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힘들 때 부르고 의지하고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만 찾는 것이 아니라 평온한 중에도 하나님을 부르고 의지하며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악한 삶으로 인해 우리의 요청을 거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기다리시고 회개할 때 근심하시며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이런 인격적인 하나님을 기억하고 늘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7일 (화요일) 사사기 9장

기브온은 아내가 많아 아들들이 70명 있었습니다. 그리고 첩에서 태어난 아비멜렉도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세겜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은을 얻고 그것으로 용병들을 사서 70명의 형제들을 한 장소에서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1-6). 불법적이고 폭력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담이라는 아들이 70명이 죽임을 당할 때 살아 남았습니다. 요담은 나무 우화를 통해서 세겜 사람들이 무가치하고 거칠고 폭력적인 가시나무와 같이 보호처를 자처하는 아비멜렉에 의해 결국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7-15). 또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것이 옳지 않은 행동임을 말합니다. 이전에 기브온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그 자녀들을 모두 죽인 자를 왕으로 삼아 기브온의 집에 선하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일은 여룹바알(기드온)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고,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이 싸우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숨습니다(16-21). 

결국 아비멜렉이 다스린지 삼 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악한 영을 보내시어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신하여 아비멜렉을 배반하게 하십니다. 세겜 사람들에게 인기를 모은 에벳의 아들 가알이 아비멜렉을 모욕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비멜렉의 신복 스불은 아비멜렉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매복하였다가 가알과 싸우라고 알려줍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가알을 물리쳤습니다. 이 일을 들은 세겜 사람들은 엘브릿 신전의 요새에 숨었고 아비멜렉은 그곳에 불을 질러 사람들을 죽입니다(46-49). 이어서 아비멜렉은 데베스에서 승리하고 그곳의 망대(작은 성)에 불을 지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은 망대 위에서 어떤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을 맞고 두개골이 깨어져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인에게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아비멜렉은 옆에 있던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했고, 무기를 든 청년이 쳐서 죽게됩니다. 아비멜렉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각 처소로 돌아가게 됩니다. 누구도 아비멜렉을 장사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 행한 악행을 갚아 주신 것입니다(50-57). 

 

오늘 말씀은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아비멜렉과 그의 삶과 죽음을 보여줍니다.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 형제 70명을 죽입니다. 또 그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량 학살을 서슴없이 합니다. 아비멜렉의 죽음에서 머리가 깨어져 죽는 것은 스스로 머리가 되고자 했던 그의 꿈이 완전히 깨어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또 자기의 무기드는 종에게 수치스런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죽여달라고 하난 것은 버린 받은 왕 사울의 죽음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자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아비멜렉이 수치스런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은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악을 행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 악행에 대해서 징벌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가 아니지만 사사기에서 길게 다루어지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가 아니라 스스로 사사가 되려고 악을 행한 사람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악한 영을 보내어 그 계획이 무너지게 합니다. 악한 영을 보낸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삶의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국 아비멜렉과 같이 하나님께서 버려 두시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지 않고 우리 삶의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6월 (월요일) 사사기 8장

에브라임 사람들은 미디안과 싸울 때 왜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냐고 기드온과 다툽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에게 손에 넘겨 주셨다는 것을 높게 평가함으로써 에브라임 지파의 노여움을 풀어줍니다(1-3). 이어서 기드온과 삼백 명이 여전히 미디안의 두 왕 세나와 살문나를 쫓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와 삼백 용사는 지쳐있습니다. 므낫세 지파에 속한 숙곳에 이르러 그곳 사람들에게 떡을 요청했지만 세나와 살문나를 기드온과 삼백명이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숙곳 사람들은 그 요청을 거부합니다. 브누엘에서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이에 기드온은 승리한 후에 돌아갈 때 숙곳과 브누엘을 무자비하게 들가시와 찔레로 칩니다. 그것은 아주 고통스럽게 죽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나와 살문나를 추격한 것은 기드온의 복수심도 한 몫 한 것으로 나옵니다(18-19). 그 승리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삼고 그 집안을 왕족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스릴것이라고 하면서 거부합니다(22-23). 그런데 기드온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을 요구하여 에봇을 만듭니다. 비록 기드온이 좋은 의도로 이 에봇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은 결국 이 에봇을 ‘음란하게’ 위합니다. 이 말은 우상숭배 하듯이 이 에봇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에봇은 기드온과 그 집에 걸림돌이 됩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부름 받을 때 아버지의 바알의 산당을 허물었던 것과 반대로 자신의 제단을 만드는 것이 됩니다. 에봇은 애초에 아무나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는 기드온은 아내를 많이 두어 왕처럼 행세합니다. 또 그의 첩에서 얻은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 곧 ‘내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자신을 왕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러니를 통해서 기드온의 이야기는 여전히 불완전한 사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이 살아 있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평화가 있었습니다(21-32).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습니다. 바알브릿은 ‘언약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언약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언약의 주인으로 삼은 것입니다. 

 

사사 기드온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길을 따라 영적인 지도자로서 성공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기의 형제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자신의 방식으로 복수하며 에봇을 만들어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하도록 만드는 실패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말로는 왕이 되기를 거부했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왕과 같이 행동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인간 지도자는 항상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사사이시고 참된 왕이신 메시야를 갈망하도록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사사이며 왕으로서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보존하시고 결코 실패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이 확실한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구원을 주신 바로 그분이 확실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실패가 없으신 예수님을 신뢰함으로 흔들리지 않는 구원에 감사하며 평안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5일 (주일) 사사기 7장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오자 여룹바알이라 불리는 기드온이 백성을 모아 싸우기 위해 진을 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드온을 따르는 자들이 너무 많다고 하시며 무서워 떨고 있는 사람들을 돌려 보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만 이천명이 떠나고 만 명이 남았습니다(1-3). 그런데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들이 많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물가에서 물을 먹는 자세를 가지고 돌아갈 자와 남을 자를 시험하신다고 하십니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사람을 돌려 보내고 물을 손으로 움키고 핥아 먹은 삼백 명의 사람들을 남깁니다(4-8). 하나님은 이렇게 군대의 규모를 줄임으로서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실 것임을 말씀합니다. 두려워 떠는 자들은 돌아갔지만, 한 명 더 있습니다. 바로 기드온입니다.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부라와 함께 미디안 진영으로 내려가 보라고 하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미디안 장병의 꿈과 해석을 통해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수 많은 미디안과 아멜렉과 동방 사람들을 기드온에게 넘겨주셨다는 것을 듣게 하십니다(9-14). “보리 떡 한 덩어리”는 약한 자의 음식으로 나약한 기드온과 삼백명을 통해서 대적을 무찌를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제서야 기드온은 믿음과 용기를 얻어 삼백명을 세 부대로 나누고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고 나팔을 불며 그 항아리를 상대편 진영 가운데서 깨뜨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라고 외치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그대로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의 군인들이 서로 같은 편끼리 싸우게 하셔서 결국 도망치게 합니다.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 사람들이 합세하여 미디안 사람들을 쫓고, 또 에브라임 지파에게는 수로를 점령하게 합니다. 결국 미디안의 두 족장 오렙과 스엡을 물리치게 됩니다(15-25).

 

하나님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기드온에게 병력을 줄이게 하심으로 전쟁의 승패는 병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십니다. 또 여전히 두려워하는 기드온에게 용기를 주셔서 싸움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죄와 사망으로부터 승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의 지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잊은 채 마치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 같이 죄와 싸움을 포기하고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예수님께서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주심으로 믿음과 용기를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이미 얻은 승리를 기억하고 죄가 우리를 지배하려고 할 때 우리가 은혜의 지배에 있음을 기억하고 물리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혹 넘어져도 그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죄를 미워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4일 (토요일) 사사기 6장


오늘 말씀은 사사 기드온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다시 범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칠 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이스라엘을 두셨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사람들은 추수할 때만 되면 이스라엘에 와서 추수한 곡식과 열매를 빼앗아가고 가축들도 빼앗아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축을 함께 데리고 와서 풀도 다 먹어 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농사가 풍년이어도 먹을 것이 이스라엘에 남지 않게 되어 궁핍해졌습니다(1-6). 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보내어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임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7-10). 그리고 긍휼이 많은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셔서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기드온의 모습을 보면 참 겁도 많고 약한 자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몰래 포도주 틀에서 곡식을 탈곡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큰 용사’라고 부르며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그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서 영영 그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천사는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시니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합니다. 기드온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은 너무 약하다고 합니다. 천사는 다시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줍니다. 그래도 기드온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염소 새끼와 무교병을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고 한 뒤 불이 바위에서 나와 태우는 이적을 보여줍니다. 그제서야 기드온은 그가 하나님의 사자인 것과 그가 한 말들을 믿게 됩니다(11-24).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가지고 있는 칠 년 된 둘째 수소(두 마리 수소라는 뜻)를 끌어 나오고, 또 그의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그것으로 산 꼭대기로 올라가 찍은아세라 목상을 가지고 번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이에 기드온은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무서워 낮에는 못하고 밤에 행합니다(25-27). 

아침이 되어 사람들은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고 아세라 목상이 찍힌 것을 보고 범인을 물색하여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요아스에게 달려가 아들을 내어 놓으라고 하지만 요아스는 바알이 정말 신이라면 바알이 자신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아들의 이름을 바알이 다투는 자, 바알과 싸우는 자라는 뜻으로 “여룹바알”이라고 부릅니다(28-32). 그 때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러 왔고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여 사람들을 모아 싸울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양털 뭉치로 하나님께 다시 표적을 구하고 응답을 받게 됩니다(33-40).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모습들은 그가 얼마나 믿음이 약한 사람인지 보여줍니다. 또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하긴 하지만 밤에 하는 연약한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용기가 없고 연약한 기드온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앞으로 7-8장에서 기드온의 이야기에서 기드온이 점점 믿음이 강하여 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약하고 용기가 없고 연약한 기드온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건지심으로 그들의 구원이 인간의 강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한 순종으로 구원을 이루셨지 강력한 힘으로 구원을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의 순종에서 오는 것이지 우리의 강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믿음이지만 작은 것에서 순종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또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점점 더 자라게 합니다. 작은 믿음, 연약한 믿음이지만 오늘 하루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이 땅에 역사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2월 3일 (금요일) 사사기 5장

오늘 말씀은 4장에서 일어난 일을 드보라가 주도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내용입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노래를 부르는 주어는 여성 단수로 드보라입니다. 그리고 바락이 보조적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드보라의 노래에는 4장에서의 내용이 보충됩니다. 전쟁에 참여한 자들이 4장에서는 1만명이라고 했는데 5장에서는 4만명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납달리와 스불론 지파 1만명이 전쟁을 시작했지만 나중에 에브라임과 베냐민, 므낫세, 잇사갈이 함께 싸운 것입니다(14,18). 또 함께 싸우지 않은 르우벤, 갓, 단, 아셀 지파를 책망하는 내용도 나옵니다(15-17). 또 4장에서는 시스라의 어머니가 그를 기다리는 장면을 말하지 않지만 5장에서는 시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 내용들을 노래합니다. 이 시는 크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2-11), 이스라엘 지파의 헌신과 헌신 하지 않음(12-18), 그 싸움의 결과(19-31)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드보라는 백성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 하였음을 강조하고 있고, 그 헌신을 통해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합니다. 또 시스라의 어머니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헛된 희망과 소망 가운데 있지만 결국은 망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31).

 

믿음의 싸움을 삶 속에서 싸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헌신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고, 그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고 승리와 평화를 주십니다. 그러나 주저하고 그러한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은 책망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은 헛된 희망과 소망을 살다가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있게 돋음 같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힘들지만 믿음의 싸움을 위해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삶은 해가 힘있게 돋는 것 같이 빛날 것입니다. 아멘.  


 


2월 2일 (목요일) 사사기 4장

오늘 말씀은 에훗이 죽은 후의 상황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사이에 삼갈이 있었지만 사사기 저자는 에훗이 가져온 팔십년 동안의 평온한 기간 뒤에 이스라엘다시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다른 사사를 세우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스라엘이 또 다시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왕 야빈에게 넘깁니다(1-2). 야빈 왕은 당시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인 철 병거 900대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솔하는 군대 장관은 시스라입니다. 가나안 왕 야빈이 20년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히자 하나님은 여선지자 드보라를 세웁니다. 그녀는 이미 사사로서 재판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만난 사사들과 달리 스스로 전쟁을 치르지 않고 납달리 지파의 바락을 통해서 전쟁을 수행합니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하나님께서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무찌르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전쟁에서 영광은 한 여인이 얻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3-10). 바락이 사람을 모아서 다볼 산에 오르자 시스라가 철병거 900대를 가지고 옵니다. 드보라는 바락을 보내며 하나님께서 시스라를 넘겨 줄 것이라고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락 보다 먼저 가셔서 전쟁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하셔서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시스라는 병거에서 내려서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으로 도망칩니다. 당시에 겐 사람은 모세의 장인 호밥(사실은 장인이 아니라 처남임)의 자손들입니다. 그들은 하솔을 중심으로 한 가나안의 왕 야빈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헤벨의 아내 야엘은 처음에 시스라를 맞이하지만 결국 그가 잠들었을 때 시스라를 죽임으로 전쟁에서 승리자로 등장합니다(11-22). 군대 장관 시스라가 죽고 병거도 잃은 야빈은 진멸 당하게 됩니다(23-24).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는 것은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여성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승리를 가져다 주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철 병거를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락의 손에 붙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해 보이는 적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승리할 수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여성들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교회에 여성 직분을 허용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이방인 여인 야엘이 시스라를 없애고 영광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 여성직분을 주장하는 것은 이방인 여성을 교회의 직분자로 세우자는것과 같습니다. 분문은 오히려 교회가 약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선지자와 심지어 이방 여인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지키시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사실을 기억하시고 오늘 하루도 우리를 위해서 싸우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월 1일 (수요일) 사사기 3장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이방 민족들을 남겨 둔 이유를 가르쳐 주면서 시작합니다(1).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전쟁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을 싸우지 않고 안주하려는 세대에게 삶의 주변에 원수들을 남겨두셔서 전쟁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남은 민족은 블레셋의 다섯 군주와 가나안 족속, 시돈 족속, 히위 족속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삶 속에서 영적인 싸움을 통해서 순종의 열매를 맺는지 시험하십니다(2-4).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과 싸우기 보다 타협하는 삶을 택합니다. 그들은 새롭게 접하는 농경 사회(원래 가축을 치는 자들이었음)에 새로운 삶의 방식에 필요해 보이는 바알들(지역마다 바알신이 있었음)과 아세라들을 섬깁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농경 사회에서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신들로 이방인들이 섬기던 신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신을 섬깁니다(5-7). 이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셔서 그 땅에 남겨두신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에게 넘기시는 심판을 하십니다. 팔 년동안 고통을 당하던 백성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사사 옷니엘을 세워서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옷니엘은 갈렙의 사위이면서 그나마 여호수아의 영향을 받은 자였습니다. 옷니엘이 살아 있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평안을 누립니다(8-10). 

그러나 옷니엘이 죽자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께 범죄하게 되고 여호와께서는 모압 왕 에글론에게 이스라엘을 넘깁니다. 18년 동안 고통을 당하던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고 다시 하나님은 왼손 잡이 에훗을 사사로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에훗은 양날로 된 칼을 가지고 에글론에게 갑니다. 흥미롭게도 양날 된 칼이라는 표현은 직역하면 “두 개의 입을 가진 칼”이라는 뜻입니다. 에훗이 에글론에게 전한 하나님의 명령은 다른 아닌 “두 개의 입을 가진 칼”이었습니다. 두 입을 가진 칼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했던 것입니다(히 4:12). 칼로 에글론을 찔렀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 명령으로 심판을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에훗이 칼을 잘 찔러서 에글론 왕을 무찌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에글론을 에훗에게 넘기셨습니다. 에훗은 사람들을 모아 모압 사람들을 쳐서 만 명을 죽이고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80년 동안 평온을 누리게 됩니다(11-30). 에훗 후에 삼갈이라는 사사가 간략하게 소개가 됩니다. 삼갈이라는 사사는 원시적인 무기로 블레셋 사람을 육백 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31). 역시 하나님이 행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본문은 사사들의 활동이 일종의 영웅적인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셔서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사기에서 반복되는 배반-> 심판-> 부르짖음->구원->배반 의 패턴 속에서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그래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삶이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서 영적인 싸움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승리를 주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사들보다 탁월하신 참된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고 우리 주변에 있는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부수고, 시대의 정신을 거부하며 믿음의 싸움을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바랍니다. 아멘. 


1월 31일 (화요일) 사사기 2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남은 민족들과 적당히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섬기는 신들을 따를 때 하나님의 사자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와 백성들을 책망합니다. 길갈은 하나님의 회막이 있는 곳으로 당시의 중앙 성소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보김으로 올라와서 말씀을 전한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며 가까이 하지 않고 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으며 우상의 제단을 헐지 않고 이방 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남은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의 신들이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1-5). 백성들은 울었지만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그와 함께했던 2세대들은 하나님의 큰 일을 보았고 경험하고 하나님을 섬겼지만, 그 후세대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고, 그분이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습니다(6-10).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여 바알을 섬깁니다. 바알은 ‘주,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바알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 땅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배신 행위에 진노하셔서 대적의 손에 넘깁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전쟁에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였습니다(11-15).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을 여기셔서 사사들을 세워 그들이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않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며 조상의 바른 길을 속히 떠납니다. 신앙이 세속화가 되고, 불신앙이 되는 것은 순식간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면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은 사사를 통해서 구원하십니다. 하지만 사사가 죽으면 금방 또 하나님을 떠나고 더 악해지는 것이 반복됩니다(16-19). 그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는 것은 그들이 회개해서가 아니라 백성이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긍휼이 많으신 성품 때문입니다. 비록 사사들이 승리를 가져다 주지만 한정적이고 일시적입니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사사들이 지역적으로 승리를 가져다 주지만 가장 궁극적인 원수인 이스라엘 스스로에서는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변 민족들을 남겨 두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어긴 것을 상기하고, 하나님의 도를 지켜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단번에 땅의 모든 잔당들을 완전히 주시지 않고 각 지파와 가족에게 남겨두신 것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의 싸움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20-23).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우리를 단번에 의롭다고 하시지만, 여전히 믿음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싸우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성화의 삶이 우리에게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번에 완전함을 주시지 않은 것은 믿음으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 안의 죄와 싸우는 거룩한 싸움을 함으로 하나님과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의 싸움을 싸우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싸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붙드십니다. 또한 우리가 믿음의 싸움의 하지 않고 신앙을 우리 후대에게 잘 물려주지 않는다면, 우리 다음 세대는 속히 하나님을 떠날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제거하고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또 우리 다음 세대와 함께 믿음의 싸움해 나감으로 신앙의 대가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 믿음의 싸움을 잘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30일 (월요일) 사사기 1장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사기는 사사들의 이야기입니다.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이 온 민족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지도자가 아니라 지역적으로 일어나 백성을 구원하는 지도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여호수아 이후로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것이 내리막길입니다. 사사기 1장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 백성들은 가나안의 남은 잔당들과 싸움을 잘 감당하는 것으로 시작해 실패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자손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물어보고 전쟁을 수행합니다. 유다 지파와 시므온은 서로 협력하여 잔당들을 이겨낸 이야기로 시작합니다(1-7). 이것은 가나안의 남쪽 지파인 유다와 시므온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성실하게 정복의 임무를 잘 감당한 것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유다는 가장활발하게 정복 전쟁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 비결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19). 그러나 한계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골짜기 주민들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어지는 북쪽 지파의 정복 이야기는 더 퇴보합니다.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요셉 가문인므낫세도 정복 전쟁을 잘 감당하지만 역시 몇몇 지역들에서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합니다(22-26). 그리 에브라임도 게셀에게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스불론도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좇아내지 못합니다. 아셀도 시돈과 악고와 알랍과 악십 등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납달리도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단 자손은 오히려 아모리 족속에게 고립을 당합니다. 나중에 요셉 가문의 힘이 강하여 졌을 때 비로소 아모리 족속에게 노역을 시킵니다(27-36).

오늘 말씀을 유심히 보면 유다 지파는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북쪽을 다른 지파들은 “쫓아내지 아니하였다(18)”라고 합니다. 유다 지파는 그들을 쫓아내는데 힘이 없어서 못했지만 다른 지파들은 일부러 쫓아내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다’고 합니다. 북쪽 지파들은 충분히 그들을쫓아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점차 이스라엘 지파가 정복과정을 통해서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호수아의 부재는 유다 지파는 한계를 보여주고, 나머지 지파는 타락과 타협과 쇠퇴를 보여주면서 사사기는 시작합니다. 사사기는 이런 상황을 해결한 참된여호수아, 참된 왕을 기다리는 책입니다. 결국 참된 여호수아이시고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떠나서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 예수님을 멀리하고 떠나게 되면 결국 우리는 타락하고 쇠퇴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참된 여호수아이시고 왕이신 예수님을 붙들고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타락하지 않고 쇠퇴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29일 (주일) 여호수아 24장


여호수아는 모든 지파와 백성의 지도자들을 다 같이 세겜에 모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과 어떻게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광야에서 인도하셨는지 되새겨줍니다. 그 내용을 보면 본래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던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주시고 언약을 맺으셔서 당신의 백성을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 앞서 행하시며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을 물리쳐 주시고 그들에게 수고하지 않은 땅과 건설하지 않은 성읍에 거주하며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원과 감람원(올리브)의 열매를 먹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순전히 은혜로 이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1-13). 이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온전함(흠없음)과 진실함(참되고 충성됨)으로 그분을 섬겨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조상들이 섬기던 이방 신들을 모두 치워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도록 촉구합니다. 심지어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들의 눈에 좋지 않게 보이거든 다른 섬길 자를 택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자신과 그의 집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길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15). 이 말은 강력한 결단과 자발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강하게 촉구하는 말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을 이루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시고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가나안 족속을 모두 물리치시고 약속의 땅을 주심으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보다 더 좋은 신은 없으니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여호와 하나님만 참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합니다(16-18). 

여호수아는 다시 한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언급합니다. 그분은 거룩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방식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다시 한 번 약속합니다. 여호수아는 이방 신들을 치워버리고 마음을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합니다. 그러니 백성은 그분을 청종하겠다고 합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언약을 갱신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례와 법도, 곧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여호수아는 그 언약의 증표로 큰 돌을 세웁니다(19-28). 여호수아는 이제 자신의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는 모세의 종으로 시작했지만 그의 전생애를 통해 이제는 ‘여호와의 종’라고 불리며 딤낫 세라에 장사됩니다. 여호수아는 참된 여호와의 종이신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했고, 그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동안 백성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의 죽음도 기록함으로써 출애굽 2세대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보여주며 여호수아서는 막을 내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호수아의 생의 마지막시기에 다시 한 번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며 하나님과 언약을 새롭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언약 갱신에서 여호수아는 다시 한 번 백성들에게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확인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언약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다짐하는 언약을 갱신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다시 한번 나와 나의 집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하나님만이 신실하시고 당신의 약속을 지키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1월 28일 (토요일) 여호수아 23장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고, 안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백성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늙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모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여호수아도 이제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그 유언은 다름 아니라 가나안의 주요 족속들을 멸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남아 있는 이방인들 (우상숭배자들)도 그들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1-5).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을 내어 싸우라고 말하지 않고 무엇보다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고 합니다(6). 이것이 남은 땅을 차지하는 비결입니다. 단지 율법을 잘 지키면 땅을 준다는 조건부 약속이 아닙니다. 율법을 다 지켜 행한다는 말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절대적으로 우선시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깨지 말고 그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가까이하고(8) 그분 만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말입니다(11). 만약 하나님을 떠나 다른 우상을 섬기는 삶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 명령한 모든 언약적인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12-13). 여호수아는 다시 한번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분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모두 이루어졌다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들에게 언약적인 저주가 임할 것임을 되새겨 줍니다(14-16).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악과 싸우고 세상과 싸움에서 승리의 비결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내려 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월 27일 (금요일) 여호수아 22장


요단 서쪽의 땅이 분배되고 안식이 찾아 왔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요단 동쪽에 이미 기업을 받은 지파들의 군사들을 집으로 돌려 보냅니다. 그들은 모세와의 약속대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하나님께서 나머지 지파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까지 함께 했습니다(1-6). 여호수아는 또한 므낫세 반 지파에게 그들에게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고 가나안 땅에서 얻은 많은 전리품들을 주며 요단 동쪽의 형제들과 나누라고 합니다(7-9). 이것은 여호수아가 그들을 요단 서쪽의 다른 지파들과 같이 수고하고 그에 마땅한 몫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배제하지 않고 백성의 하나됨을 유지합니다.

이어서 우리는 요단 동편의 지파들이 요단 강가에 제단을 만드는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서편의 일곱 지파 반은 그것을 두 지파 반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서편의 지도자들과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함께 가서 실상을 조사합니다.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실로 모여 싸울 준비를 합니다. 만약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이 하나님을 떠나고 반역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그들의 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아간의 사건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기에 심각한 사안입니다. 하지만 두 지파 반의 의도는 그 제단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제단은 실로에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미래에 요단 강 동편과 서편의 지역적인 구분으로 인해 서편 지파의 후손들이 동편의 후손들에게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기업이 아니라고 여길 것을 대비해 만든 것입니다(21-29). 큰 제단은 있지만 그곳에 제사를 드리지 않으므로 동편의 지파 자손들 역시 서편에 있는 중앙 성소(지금은 실로)에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게 하고자 만든 일종의 증거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제사장 비느하스와 그와 함께 실상을 조사하러 온 서편 지파의 지도자들은 좋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들이 범죄하지 않았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다시 말해 그들이 한 백성임을 확인합니다. 비느하스와 지도자들이 실로에 돌아와 그것을 보고하였을 때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금 한 백성임을 확인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30-34). 양쪽 지역 사람들의 오해는 해결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를 분열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보게 합니다. 첫번째는 교회의 축복과 기쁨 속에서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을 동쪽 지파도 함께 누리며 전쟁에서 얻은 것을 온 백성이 함께 누리도록 했습니다. 두 지파 반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두번째로는 오해입니다. 비느하스와 지도자들이 진상을 확인하지 않고 전쟁을 치렀다면 백성들은 불필요한 싸움과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먼저 진상을 확인했고, 그것이 오해임이 밝혀졌습니다. 처음에는 동쪽 지파가 하나님을 떠나는 모습처럼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제단을 만들어 온 이스라엘을 위태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저변에는 하나님께 신실하고 또 교회의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도를 알게 되었을 때 오해는 해소되었고, 교회는 하나 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를 분열하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유익을 함께 누리고 누구도 배제 되지 않도록 함으로 우리는 단일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 간의 대화와 권면, 그리고 직분자들의 심방을 통해서 소통하고 불필요한 오해를 제거함으로 교회의 단일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날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한 백성임을 기억하고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나누고 누리며, 불필요한 오해가 서로를 갈라 놓지 않도록 깊은 교제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월 26일 (목요일) 여호수아 21장

모든 지파가 땅을 분배 받고 여호수아까지 땅을 분배 받았습니다. 이제 레위 사람들의 족장들이 그들의 몫을 분배 받기 위해 나아왔습니다. 그것은 이미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명령 따라서 그들이 분배 받고 정복한 땅 중에서 목초지가 있는 성읍을 제비뽑아 그핫(고핫) 자손과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레위 자손들에게는 농사 지을 땅이 아니라 그들이 몫으로 받은 양들과 가축을 키울 곳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1-3). 그핫 자손은 아론의 자손들과 나머지 자손들로 나뉘어집니다.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들로서 그들 중에 대제사장이 나옵니다. 그들을 위해서 열 세 성읍을, 그리고 그 나머지를 위해서 열 성읍을 받게 됩니다(4-5). 게르손 자손들은 열 세 성읍을 받게 됩니다(6). 그리고 므라리 자손들은 동쪽을 포함하여 열 두 성읍을 받게 됩니다(7). 이어서 어떤 성읍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유다지파에서는 갈렙이 정복한 아주 상징적인 성읍 헤브론과 그 목초지입니다. 그 곳의 밭과 촌락들은 갈렙의 소유로 남아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레위인들은 성읍과 목초지에 살고 그 주변 밭과 촌락들은 그대로 본래의 소유 가족이 살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인들과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레위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땅도 제비 뽑아 분배됩니다. 레위 지파가 원하거나 다른 지파들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비를 통해서 주시는 성읍을 주고 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목록들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으므로 레위인들에 대한 책임을 강조합니다. 뿐만 아니라 레위인들에게 준 성읍 중에 도피성들이 포함되어 있어서(21, 27, 38) 레위인들이 그 성읍에 거주하여 실수로 살인자를 보호하고 재판하는 일의 중심에 있게 됨을 보게됩니다(13-42). 하나님의 말씀대로 레위인들에게 성읍과 목초지를 주고 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은 안식을 주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성취됩니다(43-45).

 

하나님께서 주신 땅 중에서 레위 지파의 몫까지 받았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받은 땅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레위인들에게 줌으로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서 누구도 소외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땅을 주셨습니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구석구석에서 함께 살아갑니다. 그들은 주어진 땅에 살면서 순번이 오면 중앙 성소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고,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면서 율법을 가르치며 바른 삶을 살도록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참된 레위인으로서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에서 우리와 함께 거주하시며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된 안식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목회자를 통해서 오늘도 성도들이 바른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회중을 통해서 주시는 몫으로 자족하며 감사하며 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도피성으로 피해 오는 자들을 잘 보호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교회를 중심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며 살아갑시다. 특히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함께 동역 하는 저와 여러분이됩시다. 아멘.  


1월 25일 (수요일) 여호수아 20장

모든 지파들에게 땅이 분배되어진 후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도피성을 지정하라고 명령하십니다(1-2). 이것은 이미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게 만든 사람이 피의 보복자를 피해 숨을 피난처입니다. 그곳은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에 장로들에게 의해서 선택되어야 했습니다. 일단 도피성으로 들어오면 그곳 사람들은 그 살인자를 보복자에게 내어주어서는 안됩니다. 그 후에 도피성으로 들어온 그 살인자는 재판을 받기까지 혹은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철저히보호가 됩니다(3-6). 재판 후에 혹은 재사장이 죽은 후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에 요단 동편에서 세 곳과 서편에서 세 곳이 도피성으로 지정이 됩니다(7-9).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도피성으로 죽을 힘을 다해 달려 가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보복자에게 죽습니다. 또 도피성에 가서도 그냥 있으면 안됩니다. 그곳에서 재판을 기다려야 하고 또 대제사장이 죽기 전까지 그곳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재판을 하고 누군가가 대신 죽게 되는 요소는 우리 구원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도피성 제도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셔서 하나님의재판에서 우리가 무죄 방면하게 된다는 복음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을 미워함으로 알게 모르게 살인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희망은 도피성 안에서 대제사장이 죽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행히 마지막 시대의 유일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도피성으로 나와 우리에게 주신 본래 고향인 천국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참된 도피성으로서 죄인들의 피난처가 되시고, 참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셔서 우리를 참된 본향으로 인도하시는 주 예수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됩시다. 아멘. 


1월 24일 (화요일) 여호수아 19장

우물쭈물하던 일곱 지파에서 선출된 21명의 대표들은 땅을 둘러보고 책에 기록하여 하나님 앞에서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 받습니다. 첫번째로 베냐민이 나아와 분배를 받았고(18장), 다음으로 시므온 지파가 나아와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뽑은 지역은 이미 유다 지파가 뽑은 지역 가운데 얻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자손의 분깃이 그들에게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1-9). 이렇게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분배 받은 기업 중에서 분깃을 받아 영토를 보면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에 둘러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분배하신 이유는 시므온 지파가 사실 가장 약한 지파이기 때문입니다. 시므온 지파는 바알브올 사건으로 인해서 매우 약해져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25:14) 가장 강력한 지파 중에도 유다의 여유 있는 분깃을 받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스불론 지파가 분배를 받습니다(10-16). 그런데 그들이 분배 받은 땅들은 그렇게 좋은 땅이 아닙니다. 스불론 지파가 받은 땅은 울퉁불퉁한 산지와 거칠고 척박한 땅입니다. 하지만 스불론 지파는 그것에 대해서 불평을 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 나름대로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특별히 그들은 이후 사사시대에 드보라를 도와 그 지역을 구원하는데 앞장 서기도 합니다(삿5:18). 다음으로 잇사갈 자손이 제비 뽑아 분배 받습니다(17-23). 특히 이르스엘이라는 곳은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큰 길로 비옥하지만 전쟁과 약탈이 빈번했던 곳입니다. 좋은 점이 있지만 또한 어려움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아셀 자손의 지파가 땅을 분배 받습니다(24-31). 아셀 자손이 받은 지역들을 보면 견고한 성읍도 있고, 두로와 시돈 지역입니다. 무역이 발달하면서 동시에 다른 문화와 신들이 쉽게 들어올 수있는 지역입니다. 다음으로 납달리 지파가 받은 땅은 특히 견고한 성읍들이 많습니다(32-39). 하지만 동시에 정복하기만 한다면 그 견고한 성읍에 거하게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단 자손들의 땅은 가나안 북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경계를 점점 더 북쪽으로 넓혀갔습니다(40-48). 이미 앞에서 여호수아는 땅이 좁으면 스스로 개척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들의 확장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단 지파는 용맹하게 땅을 넓힌 것입니다. 다른 지파들이 다 분배 받은 후 이제 여호수아 자신의 땅을 분배 받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받은 땅 중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받습니다. 그 땅은 그렇게 좋은 땅이 아닙니다. 성읍도 없어서 만들어서 거해야 했습니다. 가장 수고를 많이 한 지도였지만 여호수아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곳을 받아서 거합니다. 이로써 분배가 마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들을 보면 환경이 매우 다양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한가지 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는 것입니다. 또 분배의 완성은 지도자인 여호수아도 분배를 받음으로 완성됩니다. 지도자와 모든 백성들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백성들만 믿음의 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지도자만 믿음의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믿음의 싸움을 하고 함께 각자 주어진 다양한 환경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거주를 시작한 방식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다양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과 순종의 영역을 개척하여 넓혀가고 약한 자들을 보듬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월 23일 (월요일) 여호수아 18장


유다와 요셉 지파에게 땅이 분배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일곱 지파는 땅을 분배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땅을 분배 받고 잔당들을 처리하는 것을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입니다(1-2). 이에 여호수아는 나머지 일곱 지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정복하러 가는 것을 더이상지체하지 말고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여 땅을 두루 다니며 그 땅을 그려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해 주겠다고 합니다(3-6). 역시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 받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언급합니다(7). 다른 지파가 제사를 드리는 그 제물 중 일부가 레위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일곱 지파 사람들이 일어나 땅을 그려 옵니다. 제일 먼저 베냐민 지파가 땅을 분배 받습니다. 베냐민은 야곱의 아들들 중 막내 였습니다(8-10). 역시 혈육의 순서가 아니라 믿음의 순서로 분배 받습니다. 베냐민은 유다와 요셉 자손의 중간을 제비 뽑아 분배 받았습니다(11-20). 정확하게 그 동서남북의 경계를 설정하여 다른 지파의 몫에 침범하지 않도록 합니다. 그리고 베냐민 자손이 받은 기업들의 목록을 기록합니다(21-28).

 

오늘 말씀에서 여호수아는 일곱 지파들이 망설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을 속히 소유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책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부분의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치게 하셨고,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히 강력한 남은 족속들도 무찌를 수 있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갈렙과 같은 모범적인 사례를 통해서 정말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땅을 제비 뽑아 분배 받고 정복하기를 주저하고 망설이는 일곱 지파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격려하고 남은 땅을 분배 받도록 합니다. 망설임과 주저함의 주된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수많은 걱정과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동일한 일을 행하셨고, 동일한 약속과 격려를 주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사탄은 굴복하였고, 그 잔당들이 남아서 우리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주저하지 말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격려하십니다. 이미 얻은 승리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누리라고 하십니다. 이 싸움의 승리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거나 신앙의 연륜이 짧거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을 신뢰하며 행동하는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아직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며 주저하는 부분이 있다면 담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의 싸움을 싸워 승리하고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22일 (주일) 여호수아 17장

오늘 말씀에서는 요셉의 자손 중 장자 므낫세의 반 지파가 땅을 분배 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가족대로 여호수아는 땅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동편의 땅을 제외하고 요단강 서편에서 열 분 깃을 받는데, 그들의 가족대로, 2절에서 열거된 사람들 중 헬렉을 제외하고 4 분깃과 헬렉 자손 중 슬로브핫의 딸들 6분깃 이렇게 열 분깃이 분배가 됩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요단 동편에서 이미 모세에게 그 분깃을 받기로 허락되었습니다(민27:7). 하지만 므낫세 지파 자손들은 처음에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의 무능이나 약함을 말하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후에 요셉 자손은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그들이 분배 받은 것이 그들의 현규모와 앞으로 늘어날 규모에 비해 작다고 불평합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스스로 땅을 개척하여 그들의 영토를 넓힐 것을 말합니다(15). 하지만 그들은 살림에 올라가서 개척하려고 하니 그 산지가 넉넉하지도 않고 분배 받은 지역의 골짜기(산과 산 사이에 있는 평지)와 산 위에 있는 족속들이 모두 철병거(오늘날로 말하면 탱크)가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던 불신앙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도전적인 대답을 줍니다. 그들이 크고도 축복 받은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큰 권능을 가지고 있고 큰 잠재력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그들이 용기를 내고 힘을 내어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움을 한다면 그들이 아무리 강할 지라도 능히 그들을 쫓아내고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17-18).

 

신앙의 성숙과 성장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리고 땅을 분배 받아 정복해야 한다면, 동일한 은혜를 바탕으로 우리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싸움과 영적 성장을 위한 열심 없이 그저 받은 땅이 적다고, 은혜가 적다고 불평해서는 영적인 성장과 승리하는 삶을 경험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여호수아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상대가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질것 같은 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능히 이길 수 있다고 격려와 도전을 주십니다. 충분히 우리는 강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함께 하시고 예수님께서 이미 원수의 우두머리 사탄을 무너뜨렸으며 우리의 참된 지도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 격려와 도전을 받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영적인 성장과 영적인 싸움을 싸우며 승리를 얻읍시다. 아멘. 


 


1월 21일 (토요일) 여호수아 16장

유다 지파 다음으로 요셉 자손들이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 받습니다. 분배 받는 내용이 16, 17장에 나뉘어 기록되었습니다. 먼저 전체적으로 요셉 자손이 분배 받은 지역을 언급한 후 에브라임과 므낫세(반)지파의 경계를 상세하게 소개 합니다. 언급된 지역들을 보면 두 지파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분배 받습니다. 에브라임이 더 남쪽을 분배 받았다면 므낫세 지파가 더 북쪽지역을 분배 받았습니다. 2절에 나오는 아렉 족속은 이스라엘에 호의적이어서 다윗 때까지 함께거주했고, 다윗에게도 충성했던 족속이었습니다(삼하15:21-37).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잘 보면 므낫세가 형이었지만 요단 서쪽 땅에서 에브라임이 먼저 분배를 받습니다. 요단 동편 땅과 서편 땅은 그 의미에서 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은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땅을 분배 받을 때 동생인 에브라임이 먼저 제비 뽑아 분배 받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므낫세 반 지파가 동쪽에 땅을 분배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야곱이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어 축복을 주었던 것과 관련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차자였지만 장자인 므낫세 보다 더 강해지고 더 복을 받을것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 자파의 땅 분배의 이야기는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어제와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의 아들들의 순서대로 땅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갈렙과 같이 믿음을 가지고 전진하는 자들에게 먼저 땅이 분배되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요셉의 자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낳은 순서가 아니라 약속과 믿음의 행동을 하는 순으로 땅이 주어집니다. 육체적인 어떠함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정복하는 순으로 분배됩니다. 오늘 말씀은 저와 여러분에게 혈과 육의 어떠함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기를 촉구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육신의 자랑, 육신의 연약함을 넘어 믿음의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행동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월 20일 (금요일) 여호수아 15장

유다 지파를 시작으로 이제 본격적인 땅의 분배가 제비 뽑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유다 지파가 제비 뽑기를 통해서 얻은 땅들의 동서남북의 경계를 설명하는 구절이 나오고 예외적으로 얻은 헤브론, 드빌, 네게브가 갈렙의 족속에게 속하게 됩니다. 1절-13절까지 큰 경계를 말한 후 20절 이후 부터는 구체적으로어떤 족속들의 땅을 가족 별로 분배 받게 되었는지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14절-19절에 갈렙이 헤브론을 정복한 이야기와 더 올라가 드빌 지역을 점령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주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갈렙을 중심으로 유다 자손들은 분배 받은 땅에서 남은 잔당들을 무찌를 것입니다. 갈렙은 여전히 모범적인 사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드빌 지역을 정복할 때에는 다른 이들을 독려하기 위해서 정복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을 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상을 주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드빌을 정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충성된 자라는 표였습니다. 그런 사람을 사위로 맞이하여 가족으로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옷니엘도 그냥 드빌을 정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옷니엘이 정복한 드빌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2세대 중 잔당을 처음으로 정복한 지역입니다. 옷니엘은 출애굽 2세대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처음으로 해 낸 동일한 믿음과 충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또 오늘 말씀을 보면 유다 자손들이 그 가족의 수대로 받은 기업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록한 이유는 후에 이스라엘 지파 안에서서로 분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지파의 가족 별로 주신 그들의 고유한 영역과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른 가족들에게 준 땅이 더 좋아 보일 수도 있고, 더 좋지 않게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땅의 잔당들은 처리하기 쉬워 보이고, 또 어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기록해 놓고, 우리 가족과 지파가 살고 있는 땅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곳임을 기억하고 고유한사명을 생각할 때 이런 불평은 극복되고 같은 민족 안에서 싸움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 고유한 영역과 사명을 주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과 상황을 다를지 몰라도 그곳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고 충성할 때 그곳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상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19일 (목요일) 여호수아 14장

본격적인 땅의 분배가 오늘 말씀에서 시작이 됩니다. 땅을 분배하기 위해서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이 함께 분배를 합니다. 분배하는 원칙은 “가족의 수를 따라”입니다. 분배의 방법은 제비를 뽑아 나누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제비를 뽑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의 족장들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 제비를 뽑아서 나누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정복한 땅을 분배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비 뽑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욕심이나 이기적인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에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5).

 

그리고 이어서 유명한 일화인 갈렙이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6-12). 유다가 먼저 나아와서 제비를 뽑습니다. 그런데 지파의 족장으로 분배에 참여한 갈렙이 먼저 여호수아에게 이전에 정탐꾼으로 이 땅에 왔을 때를 언급합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강한 아낙자손들과 견고한 성읍들을 보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히 그들을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적들을 보고 백성들의 마음을 약하게 했습니다. 이제 45년이 지난 후 갈렙은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호수아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들어왔고, 그 때 갈렙이 밟는 모든 땅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모세가 약속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곳인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합니다. 산 위에있는 성은 정복하기 아주 어렵습니다. 하지만 갈렙은 그 산지를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 받는 상황에서 다른 지파들이 가장 분배 받기 싫어하고 정복하기 두려워했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렙은 그런 땅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어떻게 해야 남은 성들을 정복할 수 있는 지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충성했을 때입니다. 여호수아는 갈렙의 요청을 허락하고 축복했습니다. 결국 갈렙은 강력한 아낙 후손들이 거주하던 강력한 성 헤브론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14-15). 

 

제비를 통해서 땅을 분배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살아야 함을 보여준다면, 갈렙의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계획을 세우고 요청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기꺼이 들어 주시고 허락 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충성되는 삶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계획하고 최선을 다해서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약속에 근거한 헌신 및 계획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을 따라서 살아가며 말씀에 근거한 계획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며 나아갑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축복의 삶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충성하는 삶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월 18일 (수요일) 여호수아 13장

앞에서 얻은 땅의 큰 경계와 무찌른 왕을 정리한 후에 이제 여호수아는 본격적으로 땅을 지파에게 분배해 줍니다. 이 분배와 정복에 관한 이야기는 14장에서 19장까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싸우는 전쟁은 끝났지만 이제 각 지파는 분배 받은 땅으로 가서 각 지파마다 남은 잔당들과 싸우고 분배 받은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들을 하나님께서 쫓아낼 것이니 땅을 분배하라고 하십니다(1-7). 그들을 쫓아내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땅을 분배하는 것입니다. 먼저 여호수아는 이미 정복한 요단 강 서쪽에 관해 말합니다. 이미 분배를 받았지만 므낫세 반 지파와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는 여전히 그곳에 그술 족속과 아마갓 족속을 어떤 이유에서인지 쫓아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 족속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말대로 레위인들에게는 땅을 분배하지 않았습니다. 레위인들의 기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물이 될 것입니다. 이전에 요단강 서쪽에서 모세는 르우벤 자손과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하여 주었고 그들은 그 분배 받은 땅의 대부분을 정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점술사 브올의 아들 발람도 죽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점술사라고 불립니다. 모세가 땅을 분배의 원칙에 대해서 15절에 말하고 있는데, 그 분배의 원칙은 “그들의 가족에 따라서”입니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약육강식"의 원칙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에 따라서, 다시 말해 가족이 많으면 많이, 적으면 적게 받게 됩니다. 필요에 따라서 분배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가족이 많은 만큼 많은 땅에 있는 잔당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필요에 의해서 책임을 가지고 분배를 받는 것입니다. 또 레위인들은 그들의 직무로 인해서 기업 대신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8-33). 

 

이전에 모세에 의해서 땅을 받은 지파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여 여호수아는 확실히 모세가 말하고 행했던 그대로 행하고 있고, 모세와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정복 전쟁과 분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모세와 함께한 것 같이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하게 임재 합니다. 정복한 땅을 분배하는 원리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분배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분배받은 땅을 정복하고 정착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약육강식과 같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방식,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과 순종, 그리고 책임감으로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서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우리 삶의 영역을 정복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월 17일 (화요일) 여호수아 12장


여호수아를 통한 정복 전쟁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1장에서 11장까지 이스라엘에게 패한 나라의 왕들과 그들이 다스리던 지역을 요약해서 보여줍니다. 1-6절은 여호수아 전에 모세에 의해서 정복된 왕들과 그들이 다스리던 지역을 요약해서 말해줍니다. 그 지역은 요단 동편입니다. 그곳에 므낫세 반 지파와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가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24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넌 후에 요단 강 서편에서 얻은 땅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서쪽에서 무찌른 왕은 모두 31명입니다. 요단강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건넌 것을 비롯하여 이 많은 왕들과 그들의 가진 압도적인 무기들과 숫자들을 보면 이스라엘이 그들을 무찌른 것이 기적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목록들을 제시하는 이유는 그들이 얻은 땅과 경계를 분명하게 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들이 이런 왕들을 무찌를 수 있었는지 되새기기 위함 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왕들을 무찌를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위해서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패배한 왕들에게는 없지만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분께 순종할 때 승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명단에 기브온이 없다는 것은 진멸된 왕들이 그런 결과를 얻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해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명단은 아직 가나안 땅에 정복해야 할 왕들과 땅이 남아 있음을 암시합니다. 모든 땅과 모든 왕이 정복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함께 싸우는 전쟁이 그쳤을 뿐, 아직 각 지파별로 분배 받은 땅에서 싸워야 할 잔당들이 남아 있습니다(13장1절-7절).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과 자손과 복이 성취되어 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백성들의 전투를 통해서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백성들을 통해서 승리를 주시고 약속이  성취되도록 하십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전쟁들을 승리로 이끈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승리의 영광과 복종 가운데 앞으로 남아 있는 새로운 임무도 그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얻은 땅에서 남아있는 잔당들을 정리하면서 정착해야 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만찬가지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단에게 완전히 승리하셨고, 복과 의를 약속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승리를 바탕으로 우리 삶 속에 있는 죄의 잔당들을 몰아내고 주님과 동행하는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안에 있는 잔당들을 몰아내고 승리하며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약속을 이루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월 16일 (월요일) 여호수아 11장

아모리의 다섯 왕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하솔 왕 야빈이 듣고 또 연합을 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합니다. 가나안 동서남북 족속이 셀 수도 없는 큰 군대를 모집하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습니다(1-5).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격려를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넘겨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호수아는 군사를 이끌고 그들의 주둔지를 습격하여 그들을 격파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여호수아에게 넘기셨기 때문입니다(6-9). 그들 중 우두머리인 하솔 왕을 잡아 죽이고 모든 사람을 칼로 쳐서 진멸하여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명령한 것이었습니다(민33:5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셨고,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셨으며,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0-15).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들을 정복하게 되었고, 기브온 족속을 제외한 모든 민족들은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시고 이스라엘과 기브온 족속은 택하셨습니다. 옛적에 정탐꾼들이 두려워했던 거인 족속 아낙 사람들을 여호수아가 멸절시켰습니다. 이전에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대로 그들은 참으로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되었습니다. 아낙 자손들은 이제 이스라엘이 정복한 땅에는 살지 않고 블레셋 지역인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게 됩니다(21-23). 여호수아는 이렇게 정복 전쟁의 의무를 마무리 합니다.  

 

야솔 왕과 연합군은 강력한 군대였습니다. 심지어 지금으로 따지면 탱크와 전차처럼 강력한 말과 병거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거인 민족인 아낙 자손들도 이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군대와 무기와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 승리의 비결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전하고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전한 것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그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싸움 순간 순간 마다 모세가 명한 것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행했습니다. 세상의 강력함 앞에서 세상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한 것을 기억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않은 것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며 전쟁에서 승리한 것 같이 참된 여호수아이신 예수님(히. 예슈아, 여호수아)은 순종함으로 승리하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고 우리 또한 거룩한 싸움에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 평생에 날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하며 세상의 강력함을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15일 (주일) 여호수아 10장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들(예루살렘, 헤브론, 야르뭇, 라기스, 에글론)이 강한 기브온 족속이 이스라엘과 조약을 맺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브온을 치러 옵니다(1-5). 기브온 사람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군사를 모아 도우러 가고,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에게 승리를 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연합군을 물리칩니다. 그 과정에서 태양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기적도 일어납니다. 또 도망하던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박을 내리셔서 심판하십니다. 우박에 죽은 자가 이스라엘의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습니다. 이렇게 승리를 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셨기 때문입니다(6-14). 야살의 책은 이스라엘 역사에 중요한 일들을 기록해 놓은 책으로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소실된 책입니다. 여호수아가 길갈로 돌아갔을 때 어떤 사람이 도망한 다섯 왕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게 되었고, 다시 출군하여 왕들이 숨어 있는 굴을 지키게 한 후 남은 자들을 치러 갑니다. 모든 이스라엘 군사는 왕들이 숨어 있는 막게다 진영으로 무사히 돌아와 왕들을 굴에서 끌어내어 죽이고 나무에 해가 질 때까지 달았다가 끌어내어 굴에 던지고 입구를 막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대적해서 맞서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15-27). 그 후에 여호수아와 군사들은 막게다를 취하여 진멸합니다. 또 립나와 라기스도 쳐서 진멸합니다. 라기스를 도우러 온 게살 왕도 쳐서 이기고 에글론도 진멸합니다. 또 헤브론도 쳐서 진멸합니다. 드빌도 그렇게 합니다. 연합한 다섯 왕이 다스리던 모든 지역을 진멸하여 하나님께 바칩니다(28-39).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말씀을 신실하게 시행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셨기 때문에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고 길갈 진영으로 돌아 옵니다(40-43).

 

여호수아서의 전투는 우리의 영적인 전투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국가와 종교가 하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전쟁은 단지 민족들 간의 전투가 아니라 실제적인 전투이자 영적인 전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싸울 때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전투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실 때 승리를 얻습니다. 참된 여호수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사탄과 싸워 이기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서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전투에 우리가 참여 하도록 우리를 설득하고 순종을 요구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영적인 전투에 참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와 싸우고 승리를 누리시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14일 (토요일) 여호수아 9장

여리고와 아이성이 차례로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은 서둘러 동맹을 결성하여 싸우려고 합니다(1-2). 여리고성과 아이성은 크고 강한 성이었기 때문에 그 성들이 이스라엘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다른 족속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동맹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에게 항복한 민족이 바로 기브온 족속입니다. 그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지 여리고와 아이성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진멸하는 것을 보고 그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꾀를 내어 그들이 가나안에 거하는 족속이 아니라 멀리 있는 족속인 것처럼 꾸며 동맹을 제안합니다. 여기서 ‘꾀’라는 말은 성경에서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이중적 의미의 말입니다. 기브온 편에서는 지혜롭게 행한 것이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 기록자는 기브온의 행동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2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 외에 다른 먼 지역을 칠 때에는 먼저 평화를 제안하라고 하셨습니다. 먼 지역에서 먼저 동맹을 제안하여 왔으니 여호수아와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것을 받아 들였습니다(3-15).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습니다. 그들과 조약을 맺고 삼일 후에 그들이 이스라엘이 진멸해야 할 민족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백성들이 지도자들을 원망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들을 살리도록 합니다. 아마도 그 맹세는 그들도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어려움을 당할 때 돕고,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에게 이스라엘을 속인 댓가로 그들은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기브온 족속은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20장에서 말씀하신 것을 제대로 시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이야기와 여호수아는 그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종이되어 섬겨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들은 제사 때 사용될 물과나무를 패는 일종의 국가 노예로서 이스라엘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집니다(16-27). 

 

가나안의 모든 족속은 이미 모세의 말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기브온은 듣고 두려워 하나님께 항복하지만, 다른 족속들은 저항합니다. 항복한 자들은 살지만 저항한 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할 것입니다. 우리도 기브온과 같은 죽을 운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항복하여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종이 아니라 자녀들로 새 신분을 얻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구원에 감사하며 날마다 하나님께 항복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월 13일 (금요일) 여호수아 8장

아이성에서 첫 패배를 맛본 이스라엘은 그들 가운데 있던 죄악을 없애고 다시금 아이성 정복에 나섭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첫 패배로 절망에 빠진 여호수아에게 다시 용기를 주시며 온 백성이 다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이의 왕과 백성과 성읍과 땅을 모두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겠다고 하십니다(1) 다만, 아이성의 사람들은 진멸하고 전리품은 가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투에서 군사 중을 일부를 아이 성 뒤에 매복시켜 두라고 하십니다(2).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용사 3만을 따로 뽑아 밤에 매복 시켰고 나머지 군사들을 아이성을 치러 올라가며 가짜로 패한 척 하여 유인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추가로 오천 명을 매복시켜 놓습니다(3-12).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함께 자고 그들과 함께 전쟁을 치릅니다. 밤에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골짜기로 갑니다. 골짜기는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넓은 들판을 의미합니다. 주로 전투를 그곳에서 벌였습니다. 골짜기로 여호수아와 군대가 있는 것을 보고 아이성 왕이 성에서 급하게 나와 이스라엘을 칩니다. 급하게 나온다고 성문도 열어 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거짓으로 도망을 칩니다(13-17).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손에 있는 단창을 들고 아이성을 가리키라고 하고 여호수아는 순종합니다. 그러자 성읍 뒤쪽에 있던 매복병들이 일어나 성읍을 치고 성읍에 불을 놓습니다. 그 연기를 보고 쫓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아이 왕과 백성들과 싸웁니다. 결국 아이성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멸을 당하게 되고 아이 왕은 생포됩니다(18-23). 그리고 성읍의 모든 백성들도 진멸을 당하고 전리품은 이스라엘의 것이 됩니다. 생포되었던 아이 왕도 죽음을 당하고 나무에 달았다가 해지기 전에 나무에서 내려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곳에 큰 무더기를 쌓습니다(24-27). 그 때에 여호수아는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고 그곳에 큰 돌비를 세워 율법을 새기고 하나님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온 이스라엘과 백성의 지도자들과 객들을 모아 언약궤를 모시고 백성의 절반은  에발 산에, 나머지 절반은 그리심 산에 세우고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의 모든 율법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 없이 낭독합니다(28-35). 이것은 모세가 요단 강 저편에서 시작했던 언약 갱신식에서 요청한 것이었습니다(민27:2-8, 31:9). 하나님의 백성들은 공개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심을 그분의 율법을 듣고 순종함으로 나타내야 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단락에서 역시 전쟁의 승리는 탁월한 전략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실패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다시 회복시켜 승리를 주셨고, 패배에서 승리를 경험한 여호수아는 그것을 백성의 힘이나 자신의 지도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모세가 요단강 저편에서 명령했던 것을 행하여 공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언약을 다시 갱신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회복시키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반응은 바로 언약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승리를 주신 분께 예배하고 감사하며 공적으로 율법을 듣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일 예배의 핵심이고, 승리와 회복을 얻는 자의 반응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며 회복을 경험합시다. 그리고 감사로써 예배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심을 율법을 듣고 순종함으로 인정하고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월 12일 (목요일) 여호수아 7장

여리고에서 탈취한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간은 그것을 가졌습니다(1). 이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그 진노의 결과는 여리고 성보다 작은 아이성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는 것입니다. 아간의 죄로 36명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2-6). 여호수아는 전쟁에서 패배의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패배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족속에게 넘겨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누군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물건을 도둑질하여 감추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물건을 온전히 ‘헤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7-12).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명령 하신 대로 백성들을 모아 온전히 바친 물건을 없애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제비를 뽑아 그 물건을 숨긴 사람과 물건을 불태워야 합니다. 이에 백성들을 모아 제비를 뽑자 유다 자손이 뽑혔고 몇 번의 제비를 뽑아 결국 아간이 그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간에게 죄를 추궁하자 자백했습니다. 그의 자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범죄했지만 그 죄를 자백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증거들도 그의 장막에서 발견되었습니다(13-23). 여호수아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간과 그의 모든 물건들을 가지고 골짜기로 가서 그곳에서 그와 물건들을 돌로 치고 불로 살랐습니다. 그곳 이름을 아골(고통, 괴로움)의 골짜기로 불렸습니다(24-26). 

 

  이스라엘의 패배는 그들의 전투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거룩함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않은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아간의 범죄로 36명이 죽게 되었고, 온 공동체는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의 거룩성이 위협을 받았습니다. 아간은 제비가 뽑히는 과정 중에 회개할 기회가 있었지만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죄를 숨기려 했습니다. 결국 아간의 죄가 밝혀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처분대로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그쳤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스럽고 괴로움으로 아간을 처벌했습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의 공동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간의 범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성을 위협했던 것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우겨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시간, 건강, 물질, 가족 등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참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우리의 거룩성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쉽게 우리 자신을 죄에 내어주지 말고, 혹 마음에 죄에 대한 죄책이 있다면 회개합시다.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합시다. 그렇지 않았던 우리의 삶을 돌아킵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월 11일 (수요일) 여호수아 6장 

할례를 마치고 유월절을 지키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크고 견고한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듣고 무서워 성문을 완전히 닫고 방어를 준비합니다(1). 그들은 견고한 그들의 성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미 여리고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겼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불고 백성들을 언약궤를 따르며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하루 한바퀴씩 6일동안 돌라고 합니다.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 돌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라고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외치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합니다(2-5).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대로 합니다(7-16). 그리고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성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뜻입니다. 전리품을 하나도 챙기지 않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첫번째 정복한 성으로서 항상 처음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또 이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기 위하여 진멸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 완전히 멀리하기 위함 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처럼 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것을 진멸, 곧 ‘헤렘’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 기생 라합과 그 가족들은 이미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 헤렘에서 건져집니다(17-25). 여리고를 진멸하고 나서 여호수아는 이 여리고 성을 다시 세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자식들이 죽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소문은 온 가나안 땅에 퍼집니다(26-27). 

 

첫 전투에서 그들의 견고한 성을 의지하던 여리고 사람들은 진멸되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순종한 이스라엘은 승리하였습니다. 그 방식이 전혀 이해되지 않을 때에도 순종함으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첫 성인 여리고 성을 ‘헤렘’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구별하여 온전히 바치라고 했습니다. 이는 가나안의 신을 따르는 자들을 완전히 멸하고 이스라엘의 가나안화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승리를 얻고 가나안 사람처럼 되는 것을 막게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다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말씀에 순종할때 하나님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를 주시고 세속화되는 것을 막게 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우리 안에 여전히 가나안화 되어가는 부분들은 없는 지 살피고 진멸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월 10일 (화요일) 여호수아 5장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말리시고 그 백성들을 요단강 서쪽으로 건너게 하셨다는 소식은 그 주변에 살고 있던 족속들 뿐만 아니라 해변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가나안 민족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빠졌습니다(1). 이런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변 나라들을 공포에 빠뜨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광야 생활 동안 태어나 할례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합니다(2-8). 본격적인 정복 전쟁에 앞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동시에 할례를 행함으로 앞으로의 전쟁이 그들에게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적진을 바로 앞에서 두고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입니다. 왜냐하면 할례를 하고 나면 적어도 몇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성인이 된 사람들은 전쟁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할례를 요구하셨고, 여호수아는 이런 상황들을 다 알지만 믿음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할례는 또한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한 표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여 광야에서 죽게 만들었다고 비웃은 애굽 인들의 조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 할례를 행한 가나안 땅(길갈)에서, 곧 약속의 땅에서의 첫번째 유월절을 지키고 그곳에서 난 음식을 먹게 됩니다. 약속의 땅에서 얻은 음식을 먹게 되었을 때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던 만나는 멈추게 되었습니다(9-12). 

그 후에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여리고 가까이 갔을 때에 여호수아는 어떤 사람이 자기 앞에 칼을 들고 마주 선 것을 보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자신들을 위하는지 아니면 적을 위하는지 묻습니다. 그 사람의 대답은 둘 다 아니라고 합니다. 대신 그는 그가 누구인지 알려줍니다. 그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경배합니다. 그 군대 대장은 여호수아가 선 곳이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신발을 벗으라고 하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합니다(13-15). 이 군대 대장은 하늘의 군대를 거느리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혹은 선재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사람의 경배를 받지 않으며, 천사가 있는 곳을 거룩한 곳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을 거룩한 곳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선 곳이 거룩했던 이유는 그곳에서 떨기나무에 임재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함께 하심을 이렇게 보여 주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에 불리해 보이고, 자살행위처럼 보이는 할례를 행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가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강함이 아니라 정체성을 거룩하게지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달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은 이미 적군들이 공격하지 못하도록 공포 속에 밀어넣어 두셨습니다. 또 그렇게 순종하였을 때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의 싸움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이고 그분의 백성, 그분의 군대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월 9일 (월요일) 여호수아 4장

모든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를 마쳤습니다(1). 하나님은 이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미리 각 지파마다 한 사람 씩 구별하여 세운 것 같이요단 강의 돌들을 가지고 올라오도록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표징(기념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가시며 이전에 애굽에서 나올때 홍해를 가르신 것 같이 요단강을 가르신 것을 기념하는 비석들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것은 다음 세대,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용 목적이 강합니다. 훗날 그자녀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어른들은 그것의 의미를 전해 주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요단 강의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고 그 끊어진 요단 강가운데 있던 돌을 가지고 만든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2-8). 오늘날로 따지면 자녀들을 위해서 교육하는 교리문답의 역할을 이 돌들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모두 건너고 돌을 가지고 기념비를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요단 동편에 자리 잡았던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 그리고 갓 지파 사람들은 약속대로 자녀와 아내를 동편에 두고 모든 사람들 보다 앞서서 그 강을 건넜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백성들은 모세를 두려워 하는 것 같이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9-14). 이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언약궤를 메고 있는 제사장들에게 요단 밖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제사장들의 발이 육지에 닿자마자 다시 물이 흘렀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요단 강이 마른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길갈에서 진을 치게 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열 두 돌을 취하여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의 의미와 목적을 전합니다(19-24).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세운 기념비의 목적은 교육적인 목적과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것입니다. ‘경외’는 거룩한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생기는 두려운 마음입니다. 오늘날은 교리문답과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교리문답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을 전하고, 성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구원의 사역을 기억하고 보고 만지고 먹게 하셔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또 성찬을 행할 때 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아멘. 


1월 14일 (토요일) 여호수아 9장

여리고와 아이성이 차례로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은 서둘러 동맹을 결성하여 싸우려고 합니다(1-2). 여리고성과 아이성은 크고 강한 성이었기 때문에 그 성들이 이스라엘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다른 족속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동맹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에게 항복한 민족이 바로 기브온 족속입니다. 그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지 여리고와 아이성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진멸하는 것을 보고 그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꾀를 내어 그들이 가나안에 거하는 족속이 아니라 멀리 있는 족속인 것처럼 꾸며 동맹을 제안합니다. 여기서 ‘꾀’라는 말은 성경에서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이중적 의미의 말입니다. 기브온 편에서는 지혜롭게 행한 것이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 기록자는 기브온의 행동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2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 외에 다른 먼 지역을 칠 때에는 먼저 평화를 제안하라고 하셨습니다. 먼 지역에서 먼저 동맹을 제안하여 왔으니 여호수아와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것을 받아 들였습니다(3-15).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습니다. 그들과 조약을 맺고 삼일 후에 그들이 이스라엘이 진멸해야 할 민족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백성들이 지도자들을 원망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들을 살리도록 합니다. 아마도 그 맹세는 그들도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어려움을 당할 때 돕고,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에게 이스라엘을 속인 댓가로 그들은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기브온 족속은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20장에서 말씀하신 것을 제대로 시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이야기와 여호수아는 그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종이되어 섬겨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들은 제사 때 사용될 물과나무를 패는 일종의 국가 노예로서 이스라엘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집니다(16-27). 

 

가나안의 모든 족속은 이미 모세의 말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기브온은 듣고 두려워 하나님께 항복하지만, 다른 족속들은 저항합니다. 항복한 자들은 살지만 저항한 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할 것입니다. 우리도 기브온과 같은 죽을 운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항복하여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종이 아니라 자녀들로 새 신분을 얻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구원에 감사하며 날마다 하나님께 항복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4월 14일 (금요일) 사무엘하 19장


다윗이 압살롬을 잃어 슬퍼한다는 소식은 금방 다윗의 온 군대에 퍼졌습니다. 이에 군대의 사기는 꺾였고, 그들의 승리가 마치 패배한 것 같이 여겨졌습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나아가 승리하여 돌아 온 백성을 제대로 맞이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윗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다윗은 승리하여 돌아온 군대를 맞이합니다(1-8). 이후에 압살롬을 기름부어 왕으로 삼았던 온 이스라엘은 다시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려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먼저 유다 지파를 통해서 돌아가려고 하고 또 압살롬의 군대지휘관 아마사를 요압을 이어 군대장관으로 삼을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흘립니다. 유다 지파는 이 소식을 듣고 다윗 왕을 모셔오는데 한 마음이 되어 요단 강까지 왕을 마중하러 갑니다.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저주했던 시므이도 베냐민 지파 천명과 함께 유다 지파와 나아오고 므비보셋의 종 시바도 그 아들들과 종들과 함께 왕을 맞이합니다. 시므이는 지난 날을 기억하지 말라고 사과를 합니다. 자신이 범죄한 줄 알기에 요셉 지파 중에서 제일 먼저 내려왔다고 합니다(20).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저주한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므이를 죽이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줍니다(22). 이미 다윗은 그가 저주할 때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자신을 회복시켜 주실 것임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회복을 주시는 기쁜 날에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도 왕을 맞이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왕이 돌아올 때까지 발을 꾸미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지 않았습니다. 므비보셋은 그의 종 시바의 중상모략으로 다윗을 따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으로 다윗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고자 발을 맵시 내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왕이 돌아왔으니 재산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전에 시바의 말만 듣고 그릇된 판단을 한 것입니다. 한편, 다윗은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왔던 바르실래에게도 은혜를 갚습니다. 드디어 왕은 요단을 건너 길갈에 도착했을 때,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아와 먼저 왕을 모셔 온 유다 지파를 원망합니다. 이에 유다 지파는 자신들이 왕과 같은 지파이며 이 일로 아무런 유익은 얻은 것도 없으니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여 온 이스라엘의 원망을 이깁니다(31-43).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정리하면서 왕으로 다시 회복되어 갑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도 용서하고 받아 줍니다. 특별히 시므이가 회개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다윗을 받아 주셨음을 암시합니다. 징계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회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끝이 있고, 그 가운데 긍휼과 은혜가 있었습니다. 또 다윗은 자신에게 은혜 베푼 자에게 은혜를 갚아 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다윗의 후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회개하는 자에게 자신의 보혈로 씻겨 주시고 용서를 주시며, 그에게 신실한 백성들에게 그분도 온 세상의 왕으로 오실 때 갚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회개하고 그분께 신실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5월 3일 (수요일) 열왕기상 14장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의 말과 일을 듣고도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고 범죄를 계속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 아비야가 아픕니다. 여로보암은 아내에게 변장하여 자신에게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선지자 아히야를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 손에 떡과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당시 선지자를 만나러 갈 때 선지자를 위한 평범한 수준의 선물들이었습니다. 아히야는 노안으로 시력이 좋지 않았지만, 변장한 아내를 알아차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의 아들 중에서 오직 그 아들만 험한 일을 보지 않고 평안히 죽게 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여로보암이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워주신 것과 다윗 왕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또 우상을 숭배하고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가나안 족속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10-16). 교회가 세상을 본받아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을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16).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로보암의 아내가 집에 도착했을때 그 아이가 죽습니다. 여로보암은 2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죽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나답이 대신하여 왕이 됩니다.

한편, 남유다에서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17년 동안 다스렸는데 그가 다스리는 동안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가장 뛰어나게 악을 행합니다. 북이스라엘과 같이 그들도 우상을 숭배했고, 심지어 남성동성애가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시삭을 통해서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기도록 하십니다. 다시 한번 성전의 화려함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습니다. 르호보암도 죽어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비얌이 대신하여 왕이 됩니다(19-31). 유다와 이스라엘에 전쟁이 있고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않을 때 내리는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여로보암은 선지자에게 아내를 보내어 아들에 대한 좋은 예언을 기대했습니다. 좋은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해야 할 것은 아내를 선지자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무시하면서 다른 어떤 좋은 것을 하나님께 기대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르호보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둘 모두 하나님과 더불어 우상을 섬기고,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혼합종교를 통해서 예배의 타락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의 삶과 예배의 목적은 우리의 만족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지키며 예배할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예배의 목적입니다(고후10:5).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향해 높아진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5월 28일 (주일) 열왕기하 17장

이스라엘에서는 호세아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9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덜했습니다. 앗수르왕이 공격했을 때 조공을 바쳐 종이 되기로 했지만 나중에 배반하여 결국 감옥에 갇히고 결국 수도 사마리아도 함락 되어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북이스라엘이 결국 멸망한 것입니다(1-6). 이어지는 구절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법들을 버리고 이방인들과 같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번 선지자와 선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과 유다에 보냈지만 그들이 거부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과 조상들이 세운 언약을 깨뜨렸다고 합니다(7-18). 북이스라엘이 망했고, 이제 남 유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다도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북이스라엘의 길로 행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도 얼마 후에 멸망하게 하실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1세가 시작부터 백성들을 우상숭배의 죄로 몰아 갔습니다. 왕의 책임을 크게 강조합니다. 이제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는 앗수르 사람들이 거주합니다. 하지만 그들 또한 하나님을 섬기지 않자 치십니다. 이에 왕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아는 사람을 보냅니다. 그는 벧엘에 머물며 사람들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지 가르쳤습니다(28). 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자신이 고향에서 섬기던 신을 각자 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도 섬겼습니다. 혼합신앙이 사마리아를 점령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풍습은 대대로 이어졌습니다(29-41). 

 

오늘 말씀에서 열왕기하 저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여로보암 왕이 행한 우상숭배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는 자신의 인기나 권력 유지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수 있도록 목사는 설교하고 권면하며, 장로는 심방을 통해 점검하고, 집사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결핍을 채웁니다. 직분자들이 바른 역할을 수행하고 그대로 살고, 성도들은 직분자들의 역할을 진지하게 받을 때 교회는 든든히 세워집니다. 더불어 가정에서 부모님들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정의 직분자는 믿는 부모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 자녀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는 것이 믿는 부모의 1차적인 사명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사마리아에 혼합주의가 주를 이루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혼합주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이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 분명한 지침이 됩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신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언급했듯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위험도 종교적 혼합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신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던 왕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당대 강대국 중 하나인 앗수르의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히스기야는 다른 지도자들과 의논하여 성 밖의 물의 근원을 막으므로 앗수르(앗시리아) 군대에게 물을 공급하지 않기로 합니다. 또 방어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그리고 온 군대에 하나님께서 대신 싸우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1-8). 앗수르의 왕은 라기스를 치고 사신을 보내어 어떠한 신도 자기로부터 그 백성을 보호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에게 용기를 빼앗으려고 하나님을 다른 이방신들과 같은 존재로 말하고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합니다. 그 말은 마치 사실과 같이 들립니다. 참으로 앗수르는 다른 모든 나라를 물리치고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은 앗수르 왕이 섬기는 신 앞에서 패한 것 같이 보입니다. 유다를 지키는 여호와라는 신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모든 우상들과 다른 분이십니다. 모든 우상들은 사람이 만든 것이며 살아있지 않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들으시고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히스기야 왕이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의 모든 군대의 지도자들과 병사를 치셨습니다. 이에 앗수르 왕은 고국으로 돌아가 자기의 신에게 분향할 때 자기 아들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9-23).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 간구하여 낫게 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이 교만하여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회개하여 용서를 받습니다. 역대기 저자는 히스기야에게 있었던 막대한 부와 명예를 기록합니다. 히스기야는 죽어서도 왕들의 묘실 중에 가장 좋은 곳에 모셔집니다. 바벨론 사신들에게 교만하여 행한 것은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나감으로 히스기야의 긍정적인 측면을 더욱 강조합니다(24-33).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왕이 신실하게 나라를 세워갈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복을 주시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드린 기도와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온 백성이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그분께 신실하게 행하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말못하는 우상과 다른 분이십니다. 그분은 약속을 지키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강해 보이는 적이라도 하나님을 신뢰할 때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둘러싸고 신앙 생활을 방해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떠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를 주십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2월 31일 (주일) 이사야 18장

오늘 말씀은 구스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스는 나일 강 상류, 혹은 나일 강 건너편에 있던 이집트의 이웃나라입니다. 그곳은 곤충이 많아 곤충의 날개치는 소리가 매우 컸던 곳입니다. 또 갈대로 만든 배를 통해서 강을 따라 왕성하게 무역을 하던 민족이었습니다(1-2). 그래서 곤충 날개처럼 소리를 낸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누비아 왕국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오늘날 수단입니다. 이들은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으로 알려진 이집트로 사절단을 보내어 그들과 동맹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동맹에 유다도 가입시키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라고 합니다.  이 일은 히스기야 왕이 다스릴 때 일어났습니다(왕하18:7). 히스기야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앗수르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앗수르의 위협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그들의 군사력을 의지하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당시 구스는 이집트를 지배할 만큼 강력한 왕국이었지만 하나님은 결국 전쟁의 군대를 모으는 깃발을 산 위에서 세우시고 열방을 심판하는 전쟁의 날을 준비하십니다(3). 이스라엘을 둘러싼 열방의 전쟁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용히 그들의 행위를 지켜본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4).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속적으로 위협이 되었던 강력한 나라들을 치시고 결국 열방들이 예물을 가지고 시온 산에 나아오도록 만드실 것입니다(5-7). 강대국에 대한 심판은 그들에게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인지 보여주시는 계시의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와 구스를 포함하는 세상의 모든 강한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유다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을 알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복잡한 동맹 관계에 의존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위기 가운데 올바른 처신입니다. 강력하게 부상하던 구스와 이집트도 결국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인 예루살렘으로 조공을 바치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적인 의미에서 복음이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을 내다 봅니다. 마침내 복음으로 정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 모든 민족과 나라들은 하나님께 나올 수 있고, 복음에 설득되어 그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는 이미 하나님의 것입니다. 최후의 날에 모든 열방과 민족과 방언들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올 것입니다. 그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진정한 피난처와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과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교회를 복음으로 변화시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