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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하던 일곱 지파에서 선출된 21명의 대표들은 땅을 둘러보고 책에 기록하여 제비를 뽑습니다. 첫번째로 베냐민이 나아와 분배를 받았고, 다음으로 시므온 지파가 나아와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뽑은 지역은 이미 유다 지파가 뽑은 지역 가운데 얻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자손의 분깃이 그들에게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1-9). 이렇게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가 분배 받은 기업 중에서 분깃을 받은 영토를 보면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에 둘러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분배하신 이유는 시므온 지파가 사실 가장 약한 지파이기 때문입니다. 시므온 지파는 바알브올 사건으로 인해서 매우 약해져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25:14). 가장 강력한 지파 중에도 여유 있는 분깃을 받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스불론 지파가 분배를 받습니다(10-16). 그런데 그들이 분배 받은 땅들은 그렇게 좋지 않은 땅입니다. 스불론 지파가 받은 땅은 울퉁불퉁한 산지와 거치고 척박한 땅이지만 그것에 대해서 불평을 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여 나름대로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특별히 이후에 그들은 사사시대에 드보라를 도와 그 지역을 구원하는데 앞장 서기도 합니다(삿5:18). 다음으로 잇사갈 자손이 제비 뽑아 분배 받습니다(17-23). 특히 이스르엘이라는 곳은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큰 길로 비옥하지만 전쟁과 약탈이 빈번했던 곳입니다. 좋은 점이 있지만 또한 어려움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아셀 자손의 지파가 땅을 분배 받습니다(24-31). 아셀 자손이 받은 지역들을 보면 견고한 성읍도 있고, 두로와 시돈 지역입니다. 무역이 발달하면서 동시에 다른 문화와 신들이 쉽게 들어올 수 있는 지역입니다. 다음으로 납달리 지파가 받은 땅은 특히 견고한 성읍들이 많습니다(32-39). 하지만 동시에 정복하기만 한다면 그 견고한 성읍에 거하게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단 자손들의 땅은 가나안 북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경계를 점점 더 북쪽으로 넓혀갔습니다(40-48). 이미 앞에서 여호수아는 땅이 좁으면 스스로 개척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들의 확장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단 지파는 용맹하게 땅을 넓힌 것입니다. 다른 지파들이 다 분배 받은 후 이제 여호수아 자신의 땅을 분배 받습니다. 백성들이 받은 땅 중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받습니다. 그 땅은 그렇게 좋은 땅이 아닙니다. 성읍도 없어서 만들어서 거해야 했습니다. 가장 수고를 많이 한 지도자였지만 여호수아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곳을 받아서 거합니다. 이로써 분배가 마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들을 보면 환경이 매우 다양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한 가지 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는 것입니다. 또 분배의 완성은 지도자인 여호수아도 분배를 받음으로 완성됩니다. 지도자와 모든 백성들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백성들만 믿음의 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지도자만 믿음의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믿음의 싸움을 하고 함께 각자 주어진 다양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거주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다양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과 순종의 영역을 개척하여 넓혀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유다와 요셉 지파에게 땅이 분배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일곱 지파는 땅을 분배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땅을 분배 받고 잔당들을 처리하는 것을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입니다(1-2). 이에 여호수아는 나머지 일곱 지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정복하러 가는 것을 더이상 지체하지 말고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여 땅을 두루 다니며 그 땅을 그려 오라고 합니다. 또 그것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해 주겠다고 합니다(3-6). 역시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 받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언급합니다(7). 다른 지파가 제사를 드리는 그 제물 중 일부가 레위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일곱 지파 사람들이 일어나 땅을 그려 옵니다. 제일 먼저 베냐민 지파가 땅을 분배 받습니다. 베냐민은 야곱의 아들들 중 막내 였습니다(8-10). 역시 혈육의 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순서로 분배 받습니다. 베냐민은 유다와 요셉 자손의 중간을 제비 뽑아 분배 받았습니다(11-20). 정확하게 그 동서남북의 경계를 설정하여 다른 지파의 몫에 침범하지 않도록 합니다. 그리고 베냐민 자손이 받은 기업들의 목록을 기록합니다(21-28).
오늘 말씀에서 여호수아는 일곱 지파들이 망설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을 속히 소유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책망합니다. 믿음의 싸움을 미루고 있는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부분의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치게 하셨고,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히 강력한 남은 족속들도 무찌를 수 있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렙과 같은 모범적인 사례를 통해서 정말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땅을 제비 뽑아 분배 받고 정복하기를 주저하고 망설이는 일곱 지파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격려하고 남은 땅을 분배 받도록 합니다. 망설임과 주저함의 주된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수많은 걱정과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동일한 일을 행하셨고, 동일한 약속과 격려를 주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사탄은 굴복하였습니다. 최후 심판의날까지 그 잔당들이 남아서 우리를 위협하지만 이미 승리는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승리를 취하라고 예수님은 오늘도 격려하십니다(딤전6:12). 이미 얻은 승리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누리라고 하십니다. 이 싸움의 승리는 신앙의 연륜이 짧거나 긴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을 신뢰하며 행동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아직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며 주저하는 부분이 있다면 담대하게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날마다 믿음의 싸움을 싸워 승리하고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요셉의 자손 중 장자 므낫세 반 지파가 땅을 분배 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가족대로 여호수아는 땅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므낫세 반지파에게는 동편의 땅을 제외하고 요단강 서편에서 열 분 깃을 받는데, 2절에서 열거된 사람들 중 헬렉을 제외하고 4 분깃과 헬렉 자손 중 슬로브핫의 딸들 6분깃 이렇게 열 분 깃이 분배가 됩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요단 동편에서 이미 모세에게 그 분깃을 받기로 허락되었습니다(민27:7). 하지만 므낫세 지파 자손들은 처음에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의 무능이나 약함을 말하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신앙의 연약함을 보여줍니다.
이후에 요셉 자손은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그들이 분배 받은 것이 그들의 현재 규모와 앞으로 늘어날 규모에 비해 작다고 불평합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스스로 땅을 개척하여 그들의 영토를 넓히라고 합니다(15). 믿음의 전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을 차지하라는 격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살림에 올라가서 개척하려고 하니 그 산지가 넉넉하지도 않고 분배 받은 지역의 골짜기(산과 산 사이에 있는 평지)와 산 위에 있는 족속들이 모두 철병거(오늘날로 말하면 탱크)가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는 도전적인 대답을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크고 축복 받은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큰 권능을 가지고 있고 큰 잠재력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이 용기를 내고 힘을 내어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의 싸움을 한다면 상대가
유다 지파 다음으로 요셉 자손들이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 받습니다. 분배 받는 내용이 16, 17장에 나뉘어 기록되었습니다. 먼저 전체적으로 요셉 자손이 분배 받은 지역을 언급한 후 에브라임과 므낫세(반)지파의 경계를 상세하게 소개 합니다. 언급된 지역들을 보면 두 지파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분배 받습니다. 에브라임이 더 남쪽을 분배 받았다면 므낫세 지파가 더 북쪽지역을 분배 받았습니다. 2절에 나오는 아렉 족속은 이스라엘에 호의적이어서 다윗 때까지 함께 거주했고, 다윗에게도 충성했던 족속이었습니다(삼하15:21-37).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잘 보면 므낫세가 형이었지만 요단 서쪽 땅에서 에브라임이 먼저 분배를 받습니다. 요단 동편 땅과 서편 땅은 그 의미에서 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은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을 분배 받을 때 동생인 에브라임이 먼저 제비 뽑아 분배 받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므낫세 반 지파가 동쪽에 땅을 분배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야곱이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어 축복을 주었던 것과 관련 있습니다(창48:19). 에브라임은 차자였지만 장자인 므낫세 보다 더 강해지고 더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 자파의 땅 분배의 이야기는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어제와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의 아들들의 순서대로 땅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갈렙과 같이 믿음을 가지고 전진하는 자들에게 먼저 땅이 분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자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낳은 순서가 아니라 약속과 믿음의 행동을 하는 순으로 땅이 주어집니다. 육체적인 어떠함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정복하는 순으로 분배됩니다. 오늘 말씀은 저와 여러분에게 혈과 육의 어떠함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기를 촉구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육신의 자랑, 육신의 연약함을 넘어 믿음의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행동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유다 지파를 시작으로 이제 본격적인 땅의 분배가 제비 뽑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유다 지파가 제비 뽑기를 통해서 얻은 땅들의 동서남북의 경계를 설명하는 구절이 나오고 예외적으로 얻은 헤브론, 드빌, 네게브가 갈렙의 족속에게 속하게 됩니다. 1절-13절까지 큰 경계를 말한 후 20절 이후 부터는 구체적으로 어떤 족속들의 땅을 가족 별로 분배 받게 되었는지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14절-19절에 갈렙이 헤브론을 정복한 이야기와 더 올라가 드빌지역을 점령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주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갈렙을 중심으로 유다 자손들은 분배 받은 땅에서 남은 잔당들을 무찌를 것입니다. 갈렙은 여전히 모범적인 사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드빌 지역을 정복할 때에는 다른 이들을 독려하기 위해서 정복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을 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상을 주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드빌을 정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충성된 자라는 표였습니다. 그런 사람을 사위로 맞이하여 가족으로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옷니엘도 그냥 드빌을 정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옷니엘이 정복한 드빌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2세대 중 잔당을 처음으로 정복한 지역입니다. 옷니엘은 출애굽 2세대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처음으로 해 낸 동일한 믿음과 충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또 오늘 말씀을 보면 유다 자손들이 그 가족의 수대로 받은 기업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록한 이유는 후에 이스라엘 지파 안에서 서로 분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지파의 가족 별로 주신 그들의 고유한 영역과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른 가족들에게 준 땅이 더 좋아 보일 수도 있고, 더 좋지 않게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땅의 잔당들은 처리하기 쉬워 보이고, 또 어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기록해 놓고, 우리 가족과 지파가 살고 있는 땅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곳임을 기억하고 고유한 사명을 생각할 때 이런 불평은 극복되고 같은 민족 안에서 싸움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 고유한 영역과 사명을 주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과 상황을 다를지 몰라도 그곳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환경과 상황 속에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고 충성할 때 그곳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상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본격적인 땅의 분배가 오늘 말씀에서 시작이 됩니다. 땅을 분배하기 위해서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이 함께 분배를 합니다. 분배하는 원칙은 “가족의 수를 따라”입니다. 분배의 방법은 제비를 뽑아 나누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제비를 뽑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스라엘 각 지파의 족장들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 제비를 뽑아서 나누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정복한 땅을 분배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제비 뽑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욕심이나 이기적인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에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5).
그리고 이어서 갈렙이 헤브론 산지를 달라는 장면이 나옵니다(6-12). 제비를 뽑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유다가 먼저 나아와서 제비를 뽑습니다. 그런데 지파의 족장으로 분배에 참여한 갈렙이 먼저 여호수아에게 이전에 정탐꾼으로 이 땅에 왔을 때를 언급합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강한 아낙 자손들과 견고한 성읍들을 보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히 그들을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적들을 보고 백성들의 마음을 약하게 했습니다. 45년이 지난 후 갈렙은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호수아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들어왔고, 그 때 갈렙이 밟는 모든 땅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모세가 약속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곳인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합니다. 산위에 있는 성은 정복하기 아주 어렵습니다. 하지만 갈렙은 그 산지를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 받는 상황에서 많은 족속들이 가장 분배 받기 싫어하고 두려워했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렙은 그런 땅을 자기에게 달라고
앞에서 얻은 땅의 큰 경계와 무찌른 왕을 정리한 후에 이제 여호수아는 본격적으로 땅을 각 지파에게 분배해 줍니다. 이 분배와 정복에 관한 이야기는 14장에서 19장까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싸우는 전쟁은 끝났지만 이제 각 지파는 분배 받은 땅으로 가서 각 지파마다 남은 잔당들과 싸우고 분배받은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들을 하나님께서 쫓아낼 것이니 땅을 분배하라고 하십니다(1-7). 그들을 쫓아내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땅을 분배하는 것입니다. 먼저 여호수아는 이미 정복한 요단 강 서쪽에 관해 말합니다. 이미 분배를 받았지만 므낫세 반 지파와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는 여전히 그곳에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을 어떤 이유에서 인지 쫓아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 족속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말대로 레위인들에게는 땅을 분배하지 않았습니다. 레위인들의 기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물이 될 것입니다. 이전에 요단강 서쪽에서 모세는 르우벤 자손과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하여 주었고 그들은 그 분배받은 땅의 대부분을 정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점술사 브올의 아들 발람도 죽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하나님과참된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점술사라고 불립니다. 모세가 땅 분배의 원칙을 대해서 15절에 말하고 있는데, 그 분배의 원칙은 “그들의 가족에 따라서”입니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약육강식의 원칙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에 따라서, 다시 말해 가족이 많으면 많이, 적으면 적게 받게 됩니다. 필요에따라서 분배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가족이 많은 만큼 많은 땅에 있는 잔당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필요에 의해서 책임을 가지고 분배를 받는 것입니다.또 레위인들은 그들의 직무로 인해서 기업 대신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8-33).
오늘 말씀은 이전에 모세에 의해서 땅을 받은 지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여호수아가 확실히 모세가 말하고 행했던 그대로 행하고 있고, 모세와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정복 전쟁과 분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모세와 함께한 것 같이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하게 임재 합니다. 정복한 땅을 분배하는 원리도 같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한 정복 전쟁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1장에서 11장까지 이스라엘에게 패한 나라의 왕들과 그들이 다스리던 지역을 요약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1-6절은 여호수아 전에 모세에 의해서 정복된 왕들과 그들이 다스리던 지역을 요약해서 말해줍니다. 그 지역은 요단 동편입니다. 그곳에 므낫세 반 지파와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가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24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넌 후에 요단 강 서편
아모리의 다섯 왕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하솔 왕 야빈이 듣고 또 연합을 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합니다. 가나안 동서남북 족속이 셀 수도 없는 큰 군대를 모집하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습니다(1-5).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격려를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넘겨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호수아는 군사를 이끌고 그들의 주둔지를 습격하여 그들을 격파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여호수아에게 넘기셨기 때문입니다(6-9). 그들 중 우두머리인 하솔 왕을 잡아 죽이고 모든 사람을 칼로 쳐서 진멸하여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명령한 것이었습니다(민33:5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명하셨고,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셨으며,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0-15).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들을 정복하게 되었고, 기브온 족속을 제외한 모든 민족들은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시고 이스라엘과 기브온 족속은 택하셨습니다. 옛적에 정탐꾼들이 두려워했던 거인 아낙 사람들을 여호수아가 멸절시켰습니다. 이전에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대로 그들은 참으로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되었습니다. 아낙 자손들은 아제 이스라엘이 정복한 땅에는 살지 않고 블레셋 지역인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게 됩니다(21-23). 여호수아는 이렇게 정복 전쟁의 의무를 마무리 합니다.
야솔 왕과 연합군은 강력한 군대였습니다. 심지어 지금으로 따지면 탱크와 전차처럼 강력한 말과 병거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거인 민족인 아낙 자손들도 모두 물리쳤다고 합니다. 무기와 체격에서 훨씬 강력한 군대를 이스라엘은 물리쳤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군대와 무기와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 승리의 비결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전하고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전한 것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그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싸움 순간순간 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명령한 것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행했습니다. 세상의 강력함 앞에서 세상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한 것을 기억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않은 것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성화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는 완벽하게 모든 것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점점 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성화의 힘도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며 전쟁에서 승리한 것 같이 참된 여호수아이신 예수님(히. 예슈아, 여호수아)은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함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승리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순종의 마음을 주셔서 성화의 싸움에 초청하십니다. 우리 평생에 날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하며 세상의 강력함을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들(예루살렘, 헤브론, 야르뭇, 라기스, 에글론)은 기브온 족속이 이스라엘과 조약을 맺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합하여 기브온을 치러 옵니다(1-5). 기브온 사람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군사를 모아 돕고자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에게 승리를 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연합군을 물리칩니다. 그 과정에서 태양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전무후무한 기적도 일어납니다. 또 도망하던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박을 내리셔서 심판하십니다. 우박에 죽은 자가 이스라엘의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습니다. 이렇게 승리를 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셨기 때문입니다(6-14). 야살의 책은 이스라엘 역사에 중요한 일들을 기록해 놓은 책으로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소실된 책입니다. 여호수아가 길갈로 돌아갔을 때 어떤 사람이 도망한 다섯 왕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게 되었고, 다시 출군하여 왕들이 숨어 있는 굴을 지키게 한 후 남은 자들을 치러 갑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대적해서 맞서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15-27). 그 후에 여호수아와 군사들은 막게다를 취하여 진멸합니다. 또 립나와 라기스도 쳐서 진멸합니다. 라기스를 도으러 온 게살 왕도 쳐서 이기고 에글론도 진멸합니다. 또 헤브론도 쳐서 진멸합니다. 드빌도 그렇게 합니다. 연합한 다섯 왕이 다스리던 모든지역을 진멸하여 하나님께 바칩니다(28-39). 이런 사건들은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말씀을 신실하게 시행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수아는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셨기 때문에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고 길갈 진영으로 돌아 옵니다(40-43).
여호수아서의 전투는 우리의 영적인 전투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국가와 종교가 하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전쟁은 단지 민족들 간의 전투가 아니라 실제적인 전투이자 영적인 전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싸울 때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전투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기 때문에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사탄과 싸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강력한 무기인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서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전투에서 우리가 참여
여리고와 아이성이 차례로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은 서둘러 동맹을 결성합니다(1-2). 여리고성과 아이성은 크고 강한 성이었기 때문에 그 성들이 이스라엘에게 패했다는 소식은 다른 족속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동맹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에게 항복한 민족이 바로 기브온 족속입니다. 그들은 꾀를 내어 그들이 가나안에 거하는 족속이 아니라 멀리 있는 족속인 것처럼 꾸며 동맹을 제안합니다. 여기서 ‘꾀’라는 말은 성경에서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이중적 의미의 말입니다. 기브온 편에서는 지혜롭게 행한 것이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 기록자는 기브온의 행동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2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족속 외에 다른 먼 지역을 칠 때에는 먼저 평화를 제안하라고 하셨습니다. 먼 지역에서 먼저 동맹을 제안하여 왔으니 여호수아와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것을 받아 들였습니다(3-15).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습니다. 그들과 조약을 맺고 삼일 후에 그들이 이스라엘이 진멸해야 할 민족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백성들이 지도자들을 원망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들을 살리도록 합니다. 아마도 그 맹세는 그들도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어려움을 당할 때 돕고,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에게 이스라엘을 속인 댓가로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기브온 족속은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20장에서 말씀하신 것을 제대로 시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브온 족속은 항복하면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 섬겨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들은 제사 때 사용될 물과 나무를 패는 국가 노예로서 이스라엘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집니다(16-27). 그렇게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힘든 직무를 맡긴 했지만, 멸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가나안의 모든 족속은 이미 모세의 말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기브온은 듣고 두려워 하나님께 항복하지만, 다른 족속들은 저항합니다. 항복한 자들은 살지만 저항한 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합니다. 복음의 전파는 항상 순종과 불순종의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도 기브온과 같은 죽을 운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항복하여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항복하는 것이 좋지 않아 보일 때가 있지만, 결국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을 위한 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구원에 감사하며 날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아이성에서 첫 패배를 맛본 이스라엘은 그들 가운데 있던 죄악을 없애고 다시금 아이성 정복에 나섭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에게 필승전략을 알려주십니다. 첫 패배로 절망에 빠진 여호수아에게 다시 용기를 주시며 이번에는 온 백성이 다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이의 왕과 백성과 성읍과 땅을 모두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겠다고 하십니다(1) 다만, 아이성의 사람들은 진멸하고 전리품은 가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투에서 군사 중을 일부를 아이 성 뒤에 매복시켜 두라고 하십니다(2).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용사 3만을 따로 뽑아 밤에 매복 시켰고 나머지 군사들을 아이성을 치러 올라가며 가짜로 패한 척 하여 유인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추가로 오천 명을 매복시켜 놓습니다(3-12).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함께 자고 그들과 함께 전쟁을 치릅니다. 밤에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골짜기로 갑니다. 골짜기는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넓은 들판을 의미합니다. 주로 그곳에서전투를 벌였습니다. 골짜기로 여호수아와 군대가 있는 것을 보고 아이성 왕이 성에서 급하게 나와 이스라엘을 칩니다. 급하게 나온다고 성 문도 열어 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거짓으로 도망을 칩니다(13-17).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손에 있는 단창을 들고 아이성을 가리키라고 하고 여호수아는 순종합니다. 그러자 성읍 뒤쪽에 있던 매복병들이 성읍을 치고 성읍에 불을 놓습니다. 그 연기를 보고 쫓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아이 왕과 백성들과 싸웁니다. 결국 아이성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멸을 당하게 되고 아이 왕은 생포됩니다(18-23). 그리고 전리품은 이스라엘의 것이 됩니다. 생포되었던 아이 왕도 죽음을 당하고 나무에 달렸다가 해지기 전에 나무에서 내려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곳에 큰 무더기를 쌓습니다(24-27). 그 때에 여호수아는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고 그곳에 큰 돌 비를 세워 율법을 새기고 하나님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녀노소 온 이스라엘과 백성의 지도자들과 객들을 모아 언약궤를 모시고 백성의 절반은 에발 산에, 나머지 절반은 그리심 산에 세우고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의 율법의 모든 말씀을 하나도 빠짐이 낭독합니다(28-35). 이것은 모세가 가장 저편에서 시작했던 언약 갱신식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습니다(민27:2-8, 31:9). 하나님의 백성들은 공개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심을 그분의 율법을 듣고 순종함으로 나타내야 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단락에서 전쟁의 승리는 역시 탁월한 전략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실패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다시 회복시켜 승리를 주셨고, 패배에서 승리를 경험한 여호수아는 그것을 백성의 힘이나 자신의 지도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모세가 요단강 저편에서 명령했던 것을 행하여 공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언약을 다시 갱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실패와 회복의 반복은 신앙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패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회개할 때 회복시키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반응은 바로 언약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승리를 주신 분께 예배하고 감사하며 공적으로 율법을 듣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일 예배의 핵심이고, 승리와 회복을 얻은 자의 반응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며 회복을 경험합시다. 그리고 감사로써 자녀들과 함께 예배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심을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인정하고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여리고에서 탈취한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간은 그것을 가졌습니다(1). 이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에 진노하셨습니다. 그 진노의 결과는 여리고 성보다 작은 아이 성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는 것입니다. 아간의 죄로 36명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2-6). 여호수아는 전쟁에서 패배의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패배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족속에게 넘겨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누군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물건을 도둑질하여 감추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물건을 온전히 ‘헤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7-12).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명령 하신 대로 백성들을 모아 온전히 바친 물건을 없애 거룩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 방법도 정확히 알려주셨습니다. 제비를 뽑아 그 물건을 숨긴 사람과 물건을 불태워야 합니다. 백성들을 모아 제비를 뽑자 유다 자손이 뽑혔고 몇 번의 제비를 뽑아 결국 아간이 그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간에게 죄를 추궁하자 자백했습니다. 그의 자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범죄했지만그 죄를 자백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증거들도 그의 장막에서 발견되었습니다(13-23). 여호수아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간과 그의 모든 물건들을 가지고 골짜기로 가서 그곳에서 그와 물건들을 돌로 치고 불로 살랐습니다. 그곳 이름을 아골(고통, 괴로움)의 골짜기로 불렸습니다(24-26).
이스라엘의 패배는 그들의 전투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거룩함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않은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아간의 범죄로 36명이 죽게 되었고, 온 공동체는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죄로 공동체의 거룩성이 위협을 받았습니다. 아간은 제비가 뽑히는 과정 중에 회개할 기회가 있었지만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죄를 숨기려 했습니다. 결국 아간의 죄가 밝혀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처분대로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그쳤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스럽고 괴로움으로 아간을 처벌했습니다. 이것은 구약 교회의 권징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도 공동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간의 범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성을 위협했던 것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나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도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필요할 경우에 교회는 권징을 시행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우겨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시간, 건강, 물질, 가족 등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참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우리의 거룩성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쉽게 우리 자신을 죄에 내어주지 말고, 혹 마음에 죄에 대한 죄책이 있다면 회개합시다.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할례를 마치고 유월절을 지키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크고 견고한 성 여리고가 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듣고 무서워 성문을 완전히 닫고 방어를 준비합니다(1). 이는 하나님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들은 견고한 그들의 성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미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겼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불고 백성들을 언약궤를 따르며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하루 한 바퀴씩 돌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 돌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라고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외치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합니다(2-5). 이것은 약속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대로 합니다(7-16). 이것은 순종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성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뜻입니다. 전리품을 하나도 챙기지 않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첫번째 정복한 성으로서 항상 처음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또 이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기 위하여 진멸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를 완전히 멀리하기 위함 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처럼 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것을 진멸, 곧 ‘헤렘’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 기생 라합과 그 가족들은 이미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 헤렘에서 건져집니다(17-25). 여리고를 진멸하고 나서 여호수아는 이 여리고 성을 다시 세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자식들이 죽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소문은 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말리시고 그 백성들을 요단강 서쪽으로 건너게 하셨다는 소식은 그 주변에 살고 있던 족속들 뿐만 아니라 해변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가나안 민족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빠졌습니다(1). 이런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변 나라들을 공포에 빠뜨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광야 생활 동안 태어나 할례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합니다(2-8). 본격적인 정복 전쟁에 앞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표였습니다. 동시에 할례를 행함으로 앞으로의 전쟁이 그들에게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적진을 바로 앞에서 두고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할례를 하고 나면 적어도 몇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성인이 된 사람들은 전쟁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할례를 요구하셨고,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이런 상황들을 다 알지만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할례는 또한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한 표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여 광야에서 죽게 만들었다고 비웃은 애굽인들의 조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 할례를 행한 곳(길갈에서)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서의 첫번째 유월절을 지키고 그곳에서 난 음식을 먹게 됩니다. 약속의 땅에서 얻은 음식을 먹게 되었을 때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던 만나는 멈추게 되었습니다(9-12).
그 후에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여리고 가까이 갔을 때에 여호수아는 어떤 사람이 자기 앞에 칼을 들고 마주 선 것을 보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자신들을 위하는지 아니면 적을 위하는지 묻습니다. 그 사람의 대답은 둘 다 아니라고 합니다. 대신 그는 그가 여호와의 군대 대장임을 알려줍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경배합니다. 그 군대대장은 여호수아가 선 곳이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신발을 벗으라고 하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합니다(13-15). 이 군대 대장은 하늘의 군대를 거느리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혹은 선재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사람의 경배를 받지 않으며, 천사가 있는 곳을 거룩한 곳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을 거룩한 곳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선 곳이 거룩했던 이유는 그곳에서 떨기나무에 임재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모세와 동일하게 함께 계셨음을 이렇게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호수아는 전쟁에 불리해 보이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할례를 행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가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강함이 아니라 정체성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달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은 이미 적군들이 공격하지 못하도록 공포 속에밀어 넣어 두셨습니다. 또 그렇게 순종하였을 때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의싸움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이고 그분의 백성, 그분의 군대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합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조금은 두렵고 어렵지만 순종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 부분에 순종하여 봅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모든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를 마쳤습니다(1). 하나님은 이전에 말씀하신 대로 각 지파마다 한 사람 씩 구별하여 세운 것 같이 요단 강의 돌들을 가지고 올라 오도록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표징(기념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가시며 이전에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가르신 것 같이 요단강을 가르신 것을 기념하는 비석들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것은 다음 세대,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용 목적이 강합니다. 훗날 그 자녀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어른들은 그것의 의미를 전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요단강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고 그 끊어진 요단강 가운데 있던 돌을 가지고 만든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2-8). 오늘날로 따지면 자녀들을 위해서 교육하는 교리문답의 역할을 이 돌들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요단 동편에 자리 잡았던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 그리고 갓 지파 사람들은 약속대로 자녀와 아내를 동편에 두고 모든 사람들 보다 앞서서 그 강을 건너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서 백성들은 모세를 두려워 하는 것 같이 여호수아를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9-14). 여호수아를 존중하고 지도자로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언약궤를 메고 있는 제사장들에게 요단 밖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제사장들의 발이 육지에 닿자마자 다시 물이 흘렀습니다. 이것은 요단강이 마른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길갈에서 진을 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열 두 돌을 취하여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의 의미와 목적을 전합니다(19-24). 이 모든 과정을 자세히 보면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세운 기념비의 목적은 교육적인 목적과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교리문답과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경험합니다. 교리문답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을 전하고, 성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구원의 사역을 기억하고 보게 하셔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합니다. 또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지도자를 존중하고 따라야 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참된 여호수아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자녀들에게 전하는 우리가 됩시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무엇보다 성찬을 행할 때 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아멘.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두루 다니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이동하면 모두 일어나 그 뒤를 따르라고 명령합니다(1-3). 여호와 하나님의 뒤를 따라 그분의 인도를 따라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온 백성이 그 궤를 다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보지 못한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앞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먼저 요단강을 건너라고 합니다(4-6).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자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따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온 이스라엘에서 그를 크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계셨던 것 같이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말씀해 주십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요단 물가에 도착하면 그곳에 언약궤를 메고 먼저 요단에 들어 서라고 합니다. 그러면 강물이 멈춰 설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물리쳐 주시겠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7-10). 그리고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 씩 열 두 명을 택하여 마른 요단 강의 돌을 가지고 올라와 쌓는 임무를 맡깁니다(11-13). 이제 백성들은 요단을 건너려 준비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앞서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 때에는 곡식을 거두는 시기로서 물이 요단에 넘치는 시기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요단강의 얕은 곳으로 건넜다는 주장하는데, 그것은 터무니 없는것임을 오늘 본문에서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정말로 여호수아의 말 대로 요단 강이 멈춰 섰습니다. 그 멀리 있는 아담 성읍에 쌓이고 바다 쪽의 물길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이 다 건널 때까지 요단 강 가운데 마른 땅에 서 있었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으로 건너게 되었습니다(14-17). 이것은 분명히 홍해를 마르게 하셨던 동일한 하나님이 모세와 같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는 증거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분임을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인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분의 인도함을받아 홍해의 기적에 버금가는 요단강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의 인도자로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신뢰하며 나아갈 때 놀라운 일들이 우리에게 펼쳐질 것입니다. 약
여호수아는 본격적으로 정복 전쟁에 나서기 전에 정탐꾼들을 보냅니다. 이것은 군사 작전 전에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두 정탐꾼은 여리고 성(도시국가)의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갑니다. 그것을 어떤 사람이 보고 왕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왕은 정탐꾼들을 잡으러 사람을 보냅니다(1-3). 라합은 정탐꾼을 숨기고 그들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정탐꾼들이 이미 성을 나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4-8).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긴 이유는 여리고 성의 온 백성들이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마르게 하신 것과 요단 강 동편에 있는 강력한 두 왕 시혼과 옥을 진멸한(헤렘, 완전히 없앰) 일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듣고 이미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라합은 이어서 당시에는 아주 특수한 고백, 즉 이스라엘의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의 유일하신 하나님(신)이라고 고백합니다(9-11). 이것은 다른 모든 신들을 부정하고 하나님만을 참된 하나님으로 받아 들이는 믿음의고백입니다. 여러 신을 섬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환경 속에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서 라합이 왕의 부하들을 속이고 거짓말을 한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라합의 거짓말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에 대해 듣고 고백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라합의 행동이 믿음의 행동이었다고 강조합니다(히11: 31). 또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여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녹였다는것입니다. 그것은 전쟁을 앞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앞서 역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후에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에 자기와 가족들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정탐꾼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12-14). 그리고 정탐꾼들은 이제 창문으로 탈출합니다. 그리고 라합에게 자신들을 내려 보낸 이 붉은 줄을 창문에 메어 그 집이 라합의 집인지 알 수 있도록 합니다. 여리고 성이 정복당할 때 그 집 안에 가족들이 있다면 모두 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집 밖에 있다가 죽게 된다면 정탐꾼들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안된다고 약속합니다(15-21). 이제 정탐꾼들은 여호수아에게 겪은 일을 모두 보고하고 여호와께서 그 성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고 확신을 하게 됩니다(22-24).
라합은 불신자였지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분을 믿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기적적인 역사를 경험하지 않고, 오직 말씀을 전해 들음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줄 것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들음으로 생겨납니다. 무엇보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에서 일하시는 살아 계시고 유일하시고 참된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우리보다 먼저 행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을 하루 하루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을 듣고, 읽고, 연구하며 우리 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모세의 종이었던 여호수아는 이제 하나님의 종이 되어 백성을 인도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임무가 여호수아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임무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가 백성을 이끌어 약속한 땅을 정복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에게 평생에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1-9). 하나님은 새로운 사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할 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10-11). 특히 여호수아는 이미 요단강 동편 땅을 차지한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절반 지파에게 가족들을 그곳에 두고 요단을 건너 함께 싸워야 할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두 지파 반에게 안식을 주신 것 같이 나머지 지파에게도 안식을 줄 때까지 함께 싸워야 함을 명령합니다(12-15). 그러자 두 지파 반은 여호수아의 명령을 모두 행할 것이고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여호수아에게도 순종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여호수아를 격려합니다(16-18).
모세를 이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목자 없는 양같이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 백성을 돌보시고 약속하신 땅과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세대는 바뀌고 새로운 리더십이 세워졌지만 승리의 원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가나안 땅 정복 전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시고, 백성들도 여호수아를 모세와 같이 여기겠다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참된 여호수아(예수님의 이름과 같음)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과 백성에게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참된 여호수아이신 예수님은 직분자들을 세워 교회를 돌보십니다. 직분자들은 하나님의 종들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교인들을 보살피고 믿음의 싸움을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말씀에 충실함으로 교회의 성도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성도들은 그런 직분자들이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고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은혜가 더욱 더 충만하게 교회에 임하게 됩니다.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교회의 직분자들을 위해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모두 좋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루 하루가 됩시다. 아멘.
백성을 축복한 모세는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느보 산에 올라가 가나안 온 땅을 내려다 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지역은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질 모든 땅을 입니다(1-4). 하지만 실제로 지형적으로 느보 산에서 모든 지역들은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여 주신 것은 단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모세에게 그 모든 땅을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제 모세는 모압 땅에서 죽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의 무덤은 알 수 없습니다(5-6). 일부러 모세가 죽었을 때 무덤에 기념비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행적은 돌에 새겨져 기억될 것보다 더 오래, 영원히 기억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죽을 때 120세였고 눈이 흐리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늙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이 다해서 죽었음을 암시합니다(7). 모세가 죽은 후에 사람들은 30일 동안 애곡 하였습니다(8).
모세의 죽음에 관한 후에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한 이야기를 합니다. 시간 상으로는 먼저 일어난 일이지만 여호수아에게 지도권을 이양하는이야기를 마지막에 두어서 여호수아서와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했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안수를 한 것은 모세가 자신과 여호수아를 동일시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신적 권위가 여호수아에게 이양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9). 하지만 여호수아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는 아주 특별하게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도록 부르셨고 직접 교제한 자이기 때문입니다(10-12). 이런 모세의 탁월함은 모세보다 탁월한 선지자이신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가장 위대한 것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새 백성인 교회도 때로는 육신의 눈을 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약속하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나아갑시다. 또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사명자의 삶임을 기억합시다. 그 사명은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일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녀, 아내, 가정, 직장, 이웃, 여러 역할 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입니다. 영적인 측면에서는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이루어 가며 복음을 전하고 성령으로 성장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참된 선지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것을 지키며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의 생명이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상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죽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을 합니다. 먼저 모세는 모든 지파에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부터 광야 생활 동안 그 백성 가운데 항상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위해 일하신 분이시고 백성을 사랑하는 분이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음을 말합니다(1-5). ‘일만 성도’는 수많은 천군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이며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그 말씀으로 그들을 다스리심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모세는 각 지파별로 축복을 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장자인 르우벤에게는 그 지파가 끊어지지 않고 수가 적지 않도록 축복합니다(6). 야곱은 르우벤지파가 탁월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모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 남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서 유다에게는 대적을 쳐서 승리하는 축복을 선포합니다(7). 레위에게는 제사장적인 직무와 관련하여 잘 감당하고 그럴 때 그의 손의 일을 받으시고 그 일을 방해하는 부패하고 타락한 세력을 없애 달라고 축복합니다(8-11). 막내 베냐민에게는 보호와 안전의 축복을 줍니다(12). 요셉 지파(에브라임, 므낫세)에게는 농사가 잘 되고, 목축도 잘 되게 하는 축복을 줍니다. 그들이 거한 곳은 실제로 물이 풍부한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생인 에브라임이 더 크게 복을 누릴 것입니다(13-17). 스불론과 잇사갈은 의로운 제사를 드리며 바닷가 쪽에 위치한 지파로서 해상 무역을 통해서 큰 번영을 누릴 것을 예언합니다(18-19). 갓은 암사자와 같이 강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광대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지파가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여호와의 공의와 법도를 행하기 때문입니다(20-21). 단은 힘있는 젊은 사자로서 묘사됩니다(22). 납달리 지파에게는 은혜가 풍성하고 복이 가득하여 그에게 분배 된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23). 마지막으로 아셀은 다른 지파들 보다 더욱 기름진 땅을 분배 받아 번영하게 될 것을 축복합니다(24-25). 이어서 모세는 온 이스라엘을 다시 ‘여수룬’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도우시며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참으로 행복한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전하여 주며 축복을 마칩니다(26-29).
곧 죽음을 맞이할 모세의 축복은 그의 인간적인 한계, 곧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탁월한 인간 지도자도 결국 죽습니다. 동시에 죽지 않으시고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보시고 사랑하신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모세는 많은 다양한 복을 각 지파에게 약속했습니다. 이 모든 축복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모여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지파를 대표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모든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지체가 된다는 것은 이 모든 축복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죽었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셔서 성령으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돌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은 모두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같이 얻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래의 행복과 안전과 풍성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늘 우리 자신과 자녀들에게 “00아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29절 말씀을 들려줍시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평생을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백성들이 기억해야 할 핵심 내용을 노래로 지어 들려주고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교훈은 채소에 비와 같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1-2). 모세는 먼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분은 위엄을 받으시기 합당하시고, 반석이시고, 하신 일이 정의롭고 진실하며 거짓이 없고 공의로우십니다(3-4). 자신을 만드신 이런 분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옳지 않고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행동입니다(5-6). 때문에 항상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시고, 부르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셨던 것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친히 입히시고 먹이시고 품에 안으시고 돌보셨습니다(7-14). 하지만 여수룬(온전하다는 뜻,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은 그들이 풍부할 때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겨 하나님의 진노와 질투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얼굴을 돌리고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심히 커서 땅의 가장 깊숙한 곳인 스올에까지 미친다고 표현합니다. 그 결과 주리게 되고 약해지고 질병에 걸리고 전쟁으로 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을 아주 멸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원수가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자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5-27). 모세는 그 백성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임을 강조합니다. 계속해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혜 없음을 노래합니다. 그들에게 지혜가 있었다면 반석(안전과 피난처를 상징)이신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소산물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바칠 때 그 신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환란 때에 그들을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통해서 그것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28-39).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시며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살아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을 대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베푸시는하나님이십니다(40-43). 이 노래의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 율법을 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도록하기 위함입니다(44-46). 비록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고 헛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47). 이 노래를 지은 그날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느보 산에서 가나안 땅을 보게 하고 그곳에서 죽게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48-52).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성품과 이스라엘의 성품이 확연히 대조가 되며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지만 백성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느 것 하나 하나님과 비슷한 면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셨고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분노하셨지만 그들을 요단강 앞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라고 모세는 노래를 지어 부르도록 했습니다. 이 노래 중 일부가 시편에도 있습니다(시 18:31; 78:58; 106:37; 10:13; 50:22 등). 그리고 예수님은 참된 모세로서 46절과 매우 유사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하셨습니다(마28:19-20).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명령입니다. 이것은 잊지 말아야 할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과 우리의 성품을 아는 것, 하나님과 우리가 얼마나 다른 지를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스스로 말씀을 지키고, 우리 자녀와 이웃에게 이 하나님을 전합시다. 그리고 그분을 끝까지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이제 나이가 많고 기력이 쇠하여 갑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미 요단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모세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자신의 리더십을 여호수아에게 넘기려 합니다. 이에 모세는 여호수아를 불러 그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격려합니다. 비록 그의 직무가 힘들고 무겁고 두렵고 떨리는 것이지만 마음을 단단히 하라고 합니다(1-8). 그리고 모세는 신명기에서 언급한 계명들을 기록하여 레위 자손들과 장로들에게 주어 매 안식년 초막절에 모든 이스라엘 남녀노소에게 낭독하여 들려 주고 기억하여 지키도록 하라고 당부 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도록 합니다(9-13). 그 후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죽을 기한이 찼고 여호수아와 함께 당신께 나아오라고 하십니다(14).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떠나고 맺은 언약을 깨뜨릴 것임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그들이 노래를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해 주십니다(19). 그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지켜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심판을 받게 될 때 심판을 받는 근거로서 사용될 것입니다(20-21).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난을 당하고 심판을 당할 때 그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어긴 것 때문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노래는 결국 회개를 이끌어낼 것입니다. 모세가 이 노래를 써서 그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공식적으로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강하고 담대 하라고 용기를 불어 넣어 주시며 항상 함께 하겠다고 약속을 주십니다(22-23). 이제 모세는 율법을 기록하여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증거가 되게 하고 각 지파의 지도자들에게 다시 한번 율법의 말씀을 들려줍니다(24-30).
모세는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 하면서 끝까지 백성들을 생각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도록 신신당부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록되고 노래로 불려질 것입니다. 신앙의 대가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율법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신앙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기 위해서 모든 세대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서 노래로 말씀을 배우고 외워야 합니다. 앞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물려줄 수 있도록 본이 됨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의 대는 이어집니다.
각 가정에서 말씀을 읽고, 말씀을 가사로 한 찬송을 부르고, 암송하며 신앙 교육에 힘을 쏟을 때 신앙의 대가 바르게 이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정과 개인에게 격려를 주시며 함께 하시겠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개인의 신앙을 바르게 세우고, 가정의 자녀와 동생들에게 신앙의 본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모세는 혹시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과 법도를 어겨 언약적 저주로 다른 나라에 잡혀 가게 되는 경우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모세는 참으로 백성들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어쩌면 그럴 것이라고 미리 예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그런 일이 있을 경우에는 사로 잡혀 간그 나라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흩어져 있던지 그 백성을 다시 모으실 것이라고 합니다(1-4). 다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셔서 조상들 보다 더 번성하게 만들어 주시고 그 마음에 할례를 향하여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5-6).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찾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모든 일에 복을 주시고 자식과 가축과 토지의 생산물을 많게 하실 것입니다. 언약적 복이 임할 것입니다(7-10). 모세가 백성들에게 주는 명령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아니고 하늘 위에나 바다 넘어 있어서 알기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계명은 모세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해하기 어렵거나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쉽지는 않지만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11-14).
이제 모세는 ‘보라’라고 하면서 백성들에게 더욱 분명하게 그들 앞에 생명과 복과 사망과 저주를 택하도록 두었다고 합니다. 모세는 생명을 택하라고 다시 한 번 백성들을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15-18). 생명의 길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고 죽음의 길은 그분을 떠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제 하늘과 땅을 언약의 증인으로 세웁니다. 하늘과 땅은 항상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을 사랑하여 생명의 길을 택하라고 권면하므로 모세는 언약 갱신식을 마칩니다(19-20).
오늘 말씀은 언약에 충성하라는 호소를 아주 이성적이고 생동력 있는 말과 함께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우리의 길에 실질적인 유익을 주고 불순종은 파멸을 가져다 준다고 확실하게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삶은 억압적 삶이 아니라 참된 자유와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 때 우리는 영원한 죽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길이 비록 즐겁고 편할지라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시며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씀을 버리고 넓고 편안한 길로 갈 때 우리는 말씀을 따라 좁고 어려운 길로 갑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살면 편하지만, 말씀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되면 거부하기 위해서 힘든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우리 앞에 두 길이 있습니다. 한 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길이지만, 험합니다. 다른 한 길은 편하지만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생명의 길로 갑시다. 혹시 다른 길로 걷고 있다면 다시 좁은 길, 생명의 길로 돌아 올 수 있고, 그럴 때 하나님은 복과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예수님과 함께 좁은 길을 걸어 생명과 복의 길로 다 걸어갑시다. 아멘.
모세는 시내산(호렙산)에서 맺은 언약과 그 갱신인 모압에서 맺은 언약 갱신을 다시 정리하여 줍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모아 그 조상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그들이 어렸을 때 경험한 출애굽과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돌보셨다는 것을 되새겨 줍니다. 또 그들에게 요단강 동편 족속인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어떻게 이기게 하셔서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셨는지 기억하도록 합니다(1-8). 이것이 그들에게 명령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이유입니다(9). 그리고 이렇게 모세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과 남자와 여자와 객들과 자녀들을 모은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언약에 참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약속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10-12). 언약에는 예외가 없이 모두가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결과는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13). 그리고 이 언약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와 집에 머물러 있는 손님들과 또 부득이한 이유로 잠시 출타 중이어서 언약 갱신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몸은 함께 하지 못하지만 이 언약에 동참하고 이 언약을 통해서 주어지는 복과 저주에 아멘으로 화답한 자들입니다(14-15).
이 언약에 동침하는 자들은 언약을 준수하는데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길 때 언약적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주의 말을 듣고도 그렇게 행할 때, 본인은 괜찮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그런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이 책에 기록된 저주를 반드시 내리신다고 엄히 경고합니다(18-21). 그리고 무시무시한 저주를 당할 때 주변 나라들이 보고 어찌하여 이 나라가 망했는지 묻고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서 하나님께서 진노와 심판을 내리셨기 때문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22-28). 수치와 조롱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29절에서 말하는 감추어진 일이 하나님께 속했으나 드러난 일은 우리와 자손들에게 속했다고 하는 말은 비록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율법에 모두가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하게 주신 계명을 지키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드러난 계시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주셔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그 말씀을 지켜야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새 백성, 교회인 저와 여러분과도 예수님 안에서 맺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새 언약의 자녀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율법을 어김으로 받아야 할 영원한 저주를 예수님께 다 받으셨지만 여전히 자녀들을 훈계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드러난 뜻을 행하지 않을 때 여전히 진노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드러나서 우리와 자녀들에게 주어진 말씀을 지켜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모세는 언약 갱신식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실신하게 잘 지켰을 때에 받을 복과 지키지 않았을 때 받을 저주에 대해서 말합니다. 축복의 요약은 11절에나옵니다. 자손과 가축의 증가와 땅의 소출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서부터 약속하셨던 약속의 성취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은 백성들에게 앞에서 말한 모든 명령과 법들을 신실하게 지키기를 당부하며 언약 갱신식을 진행합니다(1). 모세 자신은 요단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장로들과 함께 이스라엘이 머물고 있는 세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모세가 없더라도 요단 강을 건너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밟자마자 가장 먼저 큰 돌을 쌓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른 후 이 명령들을 새겨 넣고 언약식을 마무리해야 합니다(2-4). 이것은 모세가 처음에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의 두 돌 판과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돌로 제단을 만들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5-8). 그들이 예배하러 모일 때마다 희생 제사를 드리며 모세가 전해여 준 신명기의 내용들을 보고 읽고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돌 위에 새겨진 글들은 레위 제사장들에 의하여 노래로 불려지고 예배자들도 그것을 기억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보존되고 기억되고 행하여 지도록 한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모세가 레위 제사장들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계명을 신실하게 지키라고 부탁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니 백성으로서 그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9-10). 이것 역시 시내산에서 그 앞 세대가 맺은 언약과 정확히 일치하는 패턴입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 지파는 백성을 축복하기 위해서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해 에발 산에 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레위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간략하게 십계명을 요약한 것을 읽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들을 때마다 백성들은 아멘(참되다, 진실하다, 동의하다.)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을 보면 이 계명을 어길 경우에는 저주를, 지킬 경우에는 복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12-26). 그 내용들은 다름 아닌 십계명을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신실하게 명령을 지킬 경우에는 축복을, 어길 경우에는 저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을 돌에 새겨 십계명에 요약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그 후손들에게도 동일하게 좀 더 구체적으로 십계명을 풀어 말씀하시고 그것을 지킬 것임을 맹세하는 ‘아멘’을 통해서 언약은 다시 갱신될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매 주일의 예배는 이 언약의 갱신식과 비슷합니다. 매 주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말씀을 듣고 언약의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며 그분의 백성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씀을 듣고 그렇게 살겠다고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 화답은 또한 매일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우리 자신들과 자녀들이 기억하여 지키도록 노력하고 있는지 되돌아 봅시다. 그리고 부족함이 느껴지고 실패할 때마다 언약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일어나 다시 말씀을 붙드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들어가서 얻을 첫 수확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법에 관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 수확물의 원천이시고 참 소유자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1-3). 하지만 단지 그 수확물을 드리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수확물을 가지고 중앙 성소로 가서 제사장에게 내려 놓고 제사장이 그 제물을 제단에 올려 놓을 때 하나님의 하신 일을 읊조립니다(4-10).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조상들과 언약을 맺었고 애굽에서 어떻게 자신들을 구원하셨는지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송영(doxology)’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분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와 송영과 함께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또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하나님께 돌려 드림과 동시에 레위인과 객과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즐깁니다(11).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때 가져야할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삼 년의 십일조에 대해서 말합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은 매년 십일조를 드리는데, 삼 년 째의 십일조는 그 성읍의 레위인들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그들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십일조는 다른 것을 위해서 사용한 적이 없이 순전히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한 것이었다고 고백하고 하나님께 복을 구합니다(12-15). 그런데 그 복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복입니다. 자기에게 복을 달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에 복을 달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예배자가 살고 있는 성읍입니다. 성읍의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데 공동체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생활이 힘든 자들, 특별히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람들에게 교회는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도와야 합니다.
이러한 명령들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16). 말로만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17). 그렇게 할 때 하나님도 신실하게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보배롭게 여겨 주시고 모든 민족 중에서 뛰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찬송과 명예와 영광으로 삼을 것입니다(18-19). 이것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의 약속이었습니다. 언약은 서로서로에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모세는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출애굽 2세대들에게 재확인하고 갱신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나머지 신명기에서 언약을 갱신하는 내용들이 이어집니다.
오늘 말씀은 십일조와 삼 년의 십일조에 관련된 법을 언급하고 앞서 말한 모든 법들을 신실하게 지키라는 권면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큰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아 갈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찬송과 영광으로 삼으시고, 보물과 같이 여겨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를 그런 사람들로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런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잊지 않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와 고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도 다양한 상황에서 적용되는 법이 소개됩니다. 재판장들은 공정하게 판단을 하되 악인에게 태형을 내릴 때에는 최대 40대까지만 때리도록해야 합니다. 그 이상으로 때리는 것은 형제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죄인으로 벌을 받지만 그들도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중은 받아야 합니다. 벌을 내리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벌을 내릴 때 긍휼과 사랑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1-3). 곡식 떠는 소에게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은 소에게 일은 시키면서 먹지 못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4). 이 또한 동물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어서 만일 한 형제가 중에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나 형이 대신 죽은 자의 아내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대를 이을 수 있게 하는 제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 형제가 그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경우에는 죽은 자의 아내가 성문 장로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리고 그 형제의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고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지 아니하는 자에게 이같이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5-10). 이렇게 형제 중 죽은 자의 가문을 잇게 하는 것은 상속 재산을 죽은 자의 집에 머무르게 할 뿐만 아니라 과부가 빈곤하게 되지 않도록 하고 여자의 후손(창3:15)을 통해서 메시야를 기다리게 하는 긍휼의 법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제도를 통해서 룻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이어서 이스라엘 두 사람이 싸우는데 그 중 한 사람의 아내가 다른 남자의 생식기를 손으로 잡을 경우에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11-12). 이 말씀은 아내가 남편들 간의 싸움에 간섭할 때 다른 남자의 생식 능력을 잃게 만들 만큼 피해를 입힌 경우를 가정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실제로 구약 성경 어디에도 실제로 일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을 하거나 상대에게 입힌 피해에 큰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상징적인 해석은 쉽게 말해 이스라엘을 아내로 보고 남편인 여호와가 영적 전쟁을 싸우는 상황을 가정합니다. 그럴 때 그 영적인 싸움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우리가 간섭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싸움에 우리가 무엇인가 도움을 준다는 것은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그 전쟁에서 우리의 이익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이 보일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여성의 팔을 자르는 것이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의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법에서도 다른 사람에 대한 긍휼을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후자의 해석이 전체 맥락과 더 잘 어울립니다.
또 하나님은 공정하지 않은 추를 사용하는 것을 가증하게 여기십니다(13-16). 다른 사람을 속여 이익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그것은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긍휼을 베풀지 말아야 할 족속이 있는데, 바로 아멜렉 족속입니다(17-19). 이것은 정의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연약했던 이스라엘을 무참히 공격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민족으로 하나님은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큰 주제는 긍휼과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의를 행하는 가운데서도 긍휼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의와 긍휼은 항상 같이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법의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에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의로우셨지만 항상 긍휼을 베푸는 분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저와 여러분의 죄 값을 치러 정의를 세우시고, 죄인들을 긍휼히 여겨 구원해 주셨습니다. 구원의 은혜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도 삶 속에서 항상 정의와 긍휼을 베풀며 살아갑시다. 단, 아말렉과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의 원리는 단호하게 대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여러가지 상황에서의 법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는 이혼에 관련된 법입니다. ‘수치스러운 일’은 이혼을 한 만큼 심각한 귀책이 아내 편에 있는 경우입니다. 그 때에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 이혼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혼증서만 써주면 남편이 마음대로 이혼을 할 수 있다고 여기면 안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 때문에 이혼 증서를 써 주어 이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지만 본래를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9:7-9). 이혼한 여인은 다른 남자와 재혼 할 수 있지만, 재혼 후에 다시 이혼하여 본 남편에게는 돌아 갈 수 없습니다(1-4). 이것은 이혼이 오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5절에서는 결혼 유지에 관한 법이 나옵니다. 새로 아내를 맞이한 자는 군대 징집에서 일년 간 면제가 되어 아내를 즐겁게 해주어야 합니다(5). 6절은 생활에 필수적인 것을 전당잡지 못하도록 하여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납치와 유괴와 인신매매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입니다(7). 나병 환자에게는 레위 제사장들이 가르치는 대로 힘써 지켜 행해야 합니다(8-9). 그렇게 함으로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전당(물건을 맡고 돈을 빌리는 것)을 잡을 때에는 잡는 사람중심이 아니라 빌리는 사람이 주는 것으로 전당을 잡아야 합니다(10-11). 혹 그가 가난한 사람이면 받은 담보물 조차도 그날 돌려 주어야 합니다. 아마도그 담보물이 밤에 덮고 자는 겉옷일 것입니다. 겉옷은 밤에 덮고 자는 이불과 같은 용도도 있기 때문에 밤에 덮지 못하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자에게 꾸어 줄 때는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12-13). 또 가난한 품꾼에게는 그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이든 아니든 학대하지 말고 당일 삯을 주고 다음 날로 미루지 말라고 합니다. 해가 지기 전에 삯을 받아 바로 상점에서 가족을 위해서 먹을 것을 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 굶어야합니다. 품꾼은 늘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써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몇일을 굶다가 일하러 오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과 가족에게 하루 더 굶는 것은 정말로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만약 하루 더 미루어 품꾼이 하나님께 호소하면 그것은 주인의 죄가 될 것입니다(14-15). 민형사상 범죄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지우되 가족에게 연대 책임을 묻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진 후에(하나님을 향한 죄는 공동체의 연대 책임이 있음) 약한 자들의 재판을 억울하게 하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들을 위해서 곡식과 포도원 포도를 남겨 두어야 할 법들을 말씀합니다(16-22).
이런 법들은 기초는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애굽에서 객과 고아와 과부들과 같이 지내다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역시 구원의 은혜와 감사가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보살피는 동기의 기초입니다.
다양한 법들을 지켜 나가고 부적절한 행동을 막는 것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세번 ‘기억하라’(9, 18,22절)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전의 우리의 모습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다가 구원을 받아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세상과는 다른 기준과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고, 이혼이 쉬운 세상에서 그것을 거부합시다. 무조건 많이 가지는 것이 덕인 세상에서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의 축복을 누립시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동기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임을 기억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법이 주어집니다. 당시에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개념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남자의 고환과 음경이 잘린 자와 사생아는 들어오지 못한다고 합니다(1-2). 사실 이 둘은 당시에 이방인들의 제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제사 가운데 거세한 사람이 제사장으로 있었고, 사생아는 이방신에게 바쳐진 아이를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은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화평을 거부하고 저주하려고 한 모압과 암몬도 영원히 들어올 수 없습니다(3-6). 이는 복음을 거부하며 저주는 사람들이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에돔과 애굽은 아직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3 세대 후에는 총회에 들어 올 수 있었습니다(7-9).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거룩함을 유지하고 거룩함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하러 갈 때에 그들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정한 자들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부정하게 된 자들은 정결 의식을 한 후에 함께 싸울 수 있습니다. 정결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진영 밖으로 나가 변을 보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군사력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거룩함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10-14). 또 거룩함은 제의적으로 정결함을 유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임을 주인으로부터 압제 당하는 종을 보호하라는 명령과 창기를 없게 하고 그 번 돈도 하나님께 가지고 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에서 보여줍니다(15-18). 그것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입니다. 여기서 창기는 역시 이방인 제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가증합니다.
이어서 형제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은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고리 대금업을 의미합니다. 돈을 빌려줄 때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빌려주어야 합니다. 고대 근동법에서는 이자를 20%에서 50%까지 받도록 규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형제의 어려움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의 착취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타국민은 주로 여행객으로 생계 유지로 인해 돈을 빌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자를 받는 것이 허용이 되는 것입니다(19-20). 또한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은 속히 이행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입으로 다짐하고 자원한 예물은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이 때문에 반드시 속히 이행해야 합니다(21-23). 그리고 이웃의 추수 하지 않은 곡식을 먹되 낫을 대지 말고 포도원에서 포도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가난한 자와 약한 자가 언제든지 공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낫을 대고 그릇에 담는 것은 허기를 채우는 것을 넘어 이웃의 것을 훔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24-25).
이처럼 제의적 거룩함은 일상적 거룩함인 경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의적인 것을 잘 지키는 것은 일상에서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측면이있습니다. 이 둘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배와 일상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거룩하게 행하는 것은 가난한 이웃을 향한 긍휼과신의를 지키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특별히 주변에 외롭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잘 살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생활을 행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이어서 모세는 형제의 잃어버린 것을 찾아 주는 법에 관해 말합니다. 만약 어떤 양이나 소가 길 잃은 것을 보면 반드시 그 주인을 찾아 주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형제’라고 되어 있는데 출애굽기 23장 4절에서는 ‘원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형제라는 표현에서 이스라엘 모든 족속을 의미하며 비록 그가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짐승들과 물건들을 반드시 찾아 주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짐승이 넘어졌을 때에도 도와 주라고 합니다(1-4). 그리고 이성의 옷을 입는 것을 금합니다. 이것은 당시 이방인들의 풍습이었고 우상숭배와 연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 가증하다”는 표현이 주로 우상숭배에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창조질서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5). 새의 둥지에서 어미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볼 때는 어미는 두고 새끼나 알만 취하도록 합니다(6-7).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필요를 위해서 자연에 있는 것을 취할때에도 항상 자비로운 마음과 법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8절에서 집을 지을 때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는 사상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도원에 두 종류의 씨앗을 뿌려서는 안되고 소와 나귀를 함께 멍에 지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양털과 베실을 섞어서 짠 옷을 입어서는 안됩니다. 또 옷 끝에 술(땋은 장식)을 만들어서도 안된다고 합니다(8-12). 왜 이런 명령을 하셨는지 본문에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어렵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혼합은 거룩과 반대되는 말로 거룩한 삶을 위해서 그렇게 명령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당시에 가나안 거주민들이 이렇게 밭에 두 종류의 씨를 뿌려 최대한의 추수를 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 명령 자체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고 합니다. 모두 가능하고 건전한 해석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 땅의 백성과는 다른 삶의 태도와 기준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혼인 관계에서 잘못된 행동이나 법을 다룹니다. 어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고 그를 미워하여 성적인 흠으로 아내를 모독했을 경우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는 그 성읍 장로들은 그 남편에게 벌로 때리고 은 오십 세겔을 벌금으로 장인에게 주도록하고 그 아내를 평생에 버릴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비방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성읍 사람들이 그 여자를 돌로 쳐죽이도록 합니다. 그 밖의 결혼 밖에서 성적인 범죄를 한 사람들은 모두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처녀를 강간한 경우는 남자가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를 아내로 삼아 평생버리지 못합니다. 또 계모와 아들의 결혼도 금하고 있습니다(13-30). 물론 오늘날 교회안에서 성적인 죄를 범했다고 해서 죽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즘 세대가 다 그렇다고 너무 가볍게 넘겨서는 안됩니다. 결혼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적인 죄들을 무겁게 취급해야 합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그런 사람들을 아주 단호하게 벌하라고 했습니다(고전5-7장).
오늘 말씀에서 앞의 규칙들(1-12절)은 어길 경우의 벌에 대해서 명시되어 있지 않은 반면에 혼인 관계에서 잘못된 행동이나 범죄를 다루는 13-30절의 율법들은 사형을 포함하여 분명하고 엄한 처벌이 따른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성적인 죄를 진지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당시 이방인들은 성적인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고 원하는 대로 성적인 쾌락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제사를 중심으로 간음이 성행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결혼 관계안에서 성적인 기쁨을 허락하신다고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문제는 항상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오늘날 세대와는 다르게 살아가는 우리와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살인 당한 사람만 있고 살인자를 찾지 못한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살인자에 의해 흘려진 피는 반드시 갚아져야 하기 때문에 살인자를 처벌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그럴 때에는 그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그 성읍에서 아직 다른 용도로 사용된 적이 없는 암송아지를 잡아 아직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않은 골짜기로 송아지를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목을 꺾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들과 같이 가서 판결 선언을 해 주어야 합니다(1-5).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은 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그들이 죽은 사람의 피를 흘리지 않았고, 살인자를 보지도 못했다고 하나님께 맹세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무죄한 피를 머물러 두지 않도록 간구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용서를 받게 됩니다(6-9). 그러나 그러한 용서는 이런 의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다음으로 모세는 가정과 관련된 법을 말해 줍니다. 먼저 전쟁 포로 중에서(가나안 일곱 족속이 아닌 다른 족속 중) 여인을 아내로 삼고자 할 경우의 법을 말합니다. 손톱을 깎고 머리를 미는 것은 부정하게 된 사람이 정결하게 되는 의식 중의 하나입니다. 이방여인은 부정하기 때문에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해야 이스라엘 사람들과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아내는 이방사람들이 하는 것 같이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후에 그 여인이 싫어 졌다면 마음대로 가게 할 수는 있지만 결코 돈을 받고 종처럼 팔아서는 안됩니다(10-14). 또 모세는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어서 한 쪽을 사랑하고 다른쪽을 미워할 때에 미움 받는 여인의 아들이 장자일 경우에는 사랑하는 쪽의 아들에게 장자의 명분을 넘기지 말고 반드시 미움 받는 여인의 아들이 장자로서 두 몫을 받도록 합니다(15-17). 가족 안에서 다룰 문제와 관련해서 또 다른 이슈는 만약에 어떤 아들이 부모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징계를 하여도 듣지 않을 경우입니다. 그 때에는 부모가 그 자녀를 성문에 데리고 가서 장로들에게 이 자식이 패역하여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방탕하여 술에 잠긴 자라고 말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입니다. 그러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그런 죄가 억제 될 것입니다(18-21). 또 사형을 당했을 때 죄인을 나무에 달아 밤새 전시하는 관습을 금지합니다. 이것은 당시에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금지하십니다. 해가 지기 전에는 시체를 내려 장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땅이 더럽혀 질 것입니다(22-23).
오늘 말씀에서 1-9절은 미해결된 살인 사건에 대해서 10절에서23절은 가정과 관련된 법들입니다. 미해결된 살인 사건에서 피 값을 누군가는 치러야 하기 때문에 암송아지가 죽게 되고 가까운 성읍 장로들과 재판관이 이런 의식을 진행함으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이 의식은 정말로 목격자도 없고 그 성읍 중에서는 살인자가 없음을 맹세하는 의식이었습니다. 후에 발견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미해결된 살인 사건에서 공동의 책임을 가지는 것입니다. 또 가정과 관련된 법에서도 이방인 아내를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정해준 규칙에 따라서 취하도록 합니다. 또 편애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정해준 법적인 권리를 거스르지 않아야 합니다. 부모에게 반역하는 패역한 자녀에 대해서 엄중한 벌을 내리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부모님에 대해서 이방인들과는 다른 차원의 존경과 사랑을 가져야함을 일깨워줍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사회적인 문제와 가정의 문제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법을 잘 실행하여야 함을 보여 줍니다. 때때로 우리는 가정에 관련된 문제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정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배우자를 선택하고 자녀들을 다스리기 원하십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정을 다스리는 원리가 되고 실천하는 우리가 됩시다. 자녀들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잘못을 지적할 때 겸손히 받아들이고 인정합시다. 또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어긋나게 행동할 때 단호하게 지적하고 교정될 수 있도록 바르게 지도하는 부모들이 됩시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군과 싸우러 갈 때에도 이방인들과 다른 마음과 방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적군의 군사력을 보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1).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을 알려주고 상기시켜 주는 사람은 제사장입니다(2). 전쟁을 하러 갈 때 제사장이 함께 갑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독려하고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나 사람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도록 합니다(3-4). 전쟁의 책임자들은 전쟁을 하러 나아온 사람들 중 새 집을 건축하고 그곳에 살아보지 못한 사람,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사람, 여자와 약혼하고 결혼을 아직 못한 사람, 두려워서 떠는 사람들은 이 전쟁에서 면제를 시켜야 했습니다(5-9). 이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는 실질적으로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앞의 세 사유는 하나님께서 순종할 때 주시겠다고 약속한 축복의 일부로 싸움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먼저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할 때 그 전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고 합니다. 만약 받아 들이면 조공을 바치고 이스라엘을 섬기도록 하라고 합니다(10-11). 이것은 속국에게 어떤 폭력적인 방식으로 지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속국을 잘 돌보겠다는 약속을 확증하는 의미에서 조공을 받습니다. 실제로 기브온 족속과 평화의 조약을 맺은 후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기브온 족속이 위험에 처했을 때 가서 구원해 줍니다(수6). 하나님은 가나안의 민족들을 치기 전에 먼저 이렇게 평화의 조약을 제안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거부하고 싸우고자 할 때에는 먼 족속일 경우 그성읍 에워싸고 쳐서 남자 어른은 살려 두지 말고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과 가축들은 살려서 취하고 만약 그 족속이 우상 숭배를 심하게 하는 헷,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 족속일 경우에는 호흡이 있는 모든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헤렘’ 곧 진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12-18). 이 ‘헤렘’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서 원수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전한 승리를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전쟁은 악한 것이지만, 구약성경에서 정복전쟁은 악의 세력(우상)에 대항하는 거룩한 싸움이었습니다.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은 그곳을 지배하는 우상들과 악의 세력과의 거룩한 백성들의 싸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 이스라엘은 성읍의 항복을 압박하기 위해서 성읍 주변의 과실 나무를 치는 행위도 금지가 됩니다. 그것은 성읍의 사람들이 굶주리게 만들어 항복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방인들이 쉽게 쓰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을 금하시고 오히려 그 나무들이 후에 이스라엘의 음식물이 될 것이기에 보호하라고 말씀하십니다(19-20).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을 수행할 때에도 이방인들과 달라야 했습니다. 무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전쟁의 승리를 좌우하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먼저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허약하여 주변 사람들을 낙심하게 하는 자는 이 거룩한 전쟁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또 그들은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빼앗는 이방민족과는 달리 그들은 먼저 평화를 제안합니다. 평화를 거절할 때는 그들을 전멸함으로써 그들이 살 땅에서 악을 완전히 제거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한 영적인 전쟁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려고 세상에 저항하고 악의 세력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전투를 합니다.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과 시험과 영적인 침체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싸움이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누리고 또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속적으로 깨닫게 해 주는 분이 참된 제사장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과 더불어 이러한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성령님은 영적 싸움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을 하나씩 진멸하기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세상 속에서 영적인 싸움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악한 것을 대항하고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진멸하며 승리의 삶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도피성에 관한 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요단강 동편에서 셋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넌 후에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므로 정복했을 때 그 곳에서도 셋을 구별해야 합니다. 구별된 성읍은 구역으로 나뉘어져 접근성이 좋아야 하고 길도 잘 닦여 있어야 합니다(1-3). 모든 살인자는 우선 도피성으로 가야합니다. 하지만 도피성으로 갔다고 다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을 고의로 죽이지 않은 자만 살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나무를 하다가실수로 도끼가 빠져 다른 사람을 죽게 했을 때입니다. 이렇게 부주의로 사람의 생명을 잃게 했을 때에는 도피성으로 피하면 생명을 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원한을 품어 그를 기다리다가(계획적으로) 죽였을 때에는 살인이 일어난 성읍의 장로들이 도피성으로 피한 자를 다시 데리고와서 보복자의 손(가족)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살인 죄에 대해서 엄하게 다스리므로 무죄하게 피를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하고 죄를 억제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벌을 내리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여 공동체 가운데 죄를 제거함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복을얻습니다(4-13).
14절은 미래에 땅을 차지하고 분배한 후에 그리고 여러 세대 후에 후손들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정해준 기업의 땅, 곧농사를 짓는 땅 중에 이웃에게 해당된 구역을 빼앗아 지계표(돌이나 막대로 표시됨)를 옮겨서 안됩니다. 이것은 이웃의 가난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것으로 아주 심각한 죄악으로 취급됩니다.
15-21절은 증언에 관한 법을 다룹니다. 모든 악에 대해서 재판장이 판단할 때 한 사람의 증인으로는 판결하지 말고 적어도 둘 혹은 셋의 증언으로 판단하라고 합니다. 혹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재판장은 철저히 조사하고 거짓 증언한 것이 판명되면 그 거짓 증언으로 모함한 대로 거짓 증언한 사람에게 그대로 갚아 주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거짓 증언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생명을 해하기 위해 거짓을 꾸며 모함했다면 생명으로, 상해를 입히려고 했다면 그대로 갚아주어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역시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을 실제적인 삶에서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야 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어떤 사람이 죽도록 밉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나의 것을 챙기고 싶고,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면서까지 내가 이익을 보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은 오히려 그렇게 할 때 더 나은 삶, 편안한 삶, 부귀영화를 가져다 주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그러한 방식을 거부하며 그러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며 살기를 오늘 말씀은 도전합니다. 또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바른 삶의 방식을 물러주도록 합니다. 오늘 하루도 살인(미움)과 도둑질(빼앗음)과 거짓증거(이웃의 명예를 더럽힘)를 거부하며 우리 안에 악을 제하며 성화의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혹 넘어지더라도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싸우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제사장에 관한 법과 선지자에 관한 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받은 기업, 곧 땅이 없을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레위인은 제사의 제물 중 일부를 자신의 몫으로 받고 백성이 처음 거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처음 깎은 양털을 가지게 됩니다(1-4). 그렇게 몫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지방 성읍에서 섬기는 레위인들은 중앙 성소(언약궤가 머무는 장막)가 있는 곳에서도 동일하게 섬길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매년 세 절기에 이스라엘 남자는 중앙 성소에 가서 제물을 드리고 가족들과 가난한 이웃들과 레위인이 함께 즐거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물을 가지고 중앙 성소로 갈 때 지방에서 섬기던 레위인들 중 중앙 성소에 있게 되면 본래 중앙 성소에서 봉사하던 레위인과 동일하게 제사할 수 있고, 몫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5-8).
이어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자녀를 제물로 바치거나 점쟁이나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를 용납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점을 보러 다니는 것은 심각한 죄입니다(최근 통계에서 기독교인 중 30퍼센트가 점보러 가는 것을 괜찮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예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거짓 신이나 방법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이방인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초월적인 방법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중에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지는 말씀으로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야 합니다. 이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고, 선지자가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기의 말을 하거나 다른 신의 이름으로 말하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참된 선지자의 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9-22).
오늘 말씀도 제사장과 선지자가 관련된 법을 통해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들과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의 기업이 되셔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먹을 것을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제물 가운데서 가지도록 하십니다. 백성을 통해서 레위인의 기업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제물의 정해진 일부를 가지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그들의 의무를 다했을 때 주어지는 정당한 그들의 권리였습니다. 오늘날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가 하는 일 때문에 그의 기본적인 생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목사가 예배를 준비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심방하고,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성도들을 양육하는 것을 지속될 수 있도록 목사의 생활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지 목회자가 가난해서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 선지자에 관한 법을 통해서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각종 방법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세워서 말씀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와 이후 선지자들, 궁극적으로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히1:1). 그리고 그 아들은 사도들을 통해서 그리고 사도들은 교회의 직분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직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고 말씀에 비추어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항상 직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교회가 세워가도록 기도하고 직분자를 통한 하나님의 섬김을 잘 받아야 합니다. 예배를 바르게 드리고 심방을 잘 받는 것이 하나님의 섬김을 받는 것의 가장 기본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교회의 직분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함께 성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6장 마지막 부분에 이어 흠 있는 짐승을 제물로 바치지 말라는 권면을 한 후에 우상숭배자에 관해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다루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철저하게 조사한 후 그것이 사실이라면 두 세 사람의 증언에 기반하여 그 사람을 돌로 쳐죽여야 했습니다. 그 만큼 우상 숭배의 죄는 무거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는 것이고, 그 벌은 죽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1-7). 백성들 가운데 세워진 재판관들과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종교적인 측면에서 판결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내용은 쌍방폭행에 관한 것, 그리고 서로 고소하는 문제 가운데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지역 지도자들과 재판관들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 있는 레위인과 재판장에게 물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 지 가르쳐 줄 것이라고 합니다. 지역 재판관들은 그들이 가르쳐 준 대로 판결을 하면 됩니다. 그 판결을 뒤집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혹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의 판결을 듣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을 죽이라고 합니다. 그 판결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지기 때문에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댓가는 죽음입니다(8-13). 또 그 땅에서 최고의 재판관이자 지도자인 왕을 세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들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택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그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나올 것입니다. 왕은 군대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는 안되고, 군사력을 증가하기 위해서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해서도 안됩니다. 또 왕은 아내를 많이 두어 외교력을 의지 하거나 다른 신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쌓아 두어서도 안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의 생각대로 다스리는 이방인 왕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왕은 율법의 등사본을 곁에 두어서 항상 하나님의 율법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이 되고 견고한 왕조가 세워질 것입니다(14-20).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교회가 거룩함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우상숭배의 죄에 대해서 얼마나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동시에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얼마나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교회에서 사람을 돌로 쳐 죽이지는 않지만 회개하지 않고 우상 숭배하는 사람에게는 영적인 죽음을 선고하는 권징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에도 아주 신중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교회 안에서 죄가 퍼지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에는 상위 법정에 요청할 수 있는데, 오늘날로 따지면 노회와 총회에 질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로와 목사가 모인 당회와 노회, 총회에서 결정하는 것은 그것이 말씀에 명백하게 어긋나지 않은 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정의롭고 지혜롭게 영적인 문제를 판단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 최고의 재판관이자 지도자인 왕이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스리며 하나님께 순종했듯이 왕 같은 제사장들인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가장으로서, 사장으로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공직자로서, 직장인으로서 모두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가정과 직장과 학교, 교회로 세워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어진 곳에서 말씀의 다스림을 잘 받고, 또 말씀으로 섬기고 다스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6장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해마다 지켜야 할 세 가지 주요 절기들을 설명합니다. 유월절(무교절), 칠칠절, 그리고 장막절입니다. 이 역시 다른 이방민족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세 절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매년 기억해야 합니다. 유월절 다음날부터 무교절이 이어집니다. 그 때에는 발효되지 않은 반죽으로 만든 빵을 구워 먹음으로 애굽 땅에서 빠져 나올 때 종되었던 땅에서 나오게 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의 떡’은 죄의 종에서 벗어나 거룩하게 사는 삶이 만만치 않음을 의미합니다(1-8). 유월절 후 칠일을 일곱 번 곱한 날이 칠칠절입니다. 그 날은 또 추수를 하는 시기입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아와 힘이 닿는 대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온 가족과 레위인과 손님과 고아와 과부들이 함께 추수를 감사하며 구원을 베푸시고 첫 열매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합니다(9-12). 그리고 추수를 마치고 열매와 곡식을 거둔 후에는 초막절을 지켜야 합니다. 초막절은 40년간 광야 생활에 보호해 주신 것을 회상하며 약속의 땅에서 곡식과 열매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절기입니다. 칠 일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텐트)안에서 거하면서 모든 가족과 종과 레위인과 손님과 성에 거하는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든 열매와 곡식과 모든 일에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3-15). 이 세 절기를 이스라엘 남자들은 반드시 지키되 빈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드리야 합니다(16-17).
하나님은 또한 각 성에서 각 지파에 따라서 재판장들과 지도자를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다른 나라의 지도자와 재판관들과 달리 공의로 재판해야 할 것입니다(18-20).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위해서 혹은 자기를 위해서 어떤 형상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21-22).
구원받은 백성의 삶은 이방 민족과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와 주신 땅에서 얻은 것에 대한 감사로 지키는 절기가 강조가 됩니다. 특히 이 절기를 지키면서 가족들 뿐만 아니라 레위인과 손님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의 제사는 가난한 이웃을 향한 동정과 사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예배의 관습은 오로지 그 신과 제사를 드리는 사람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큰 세 절기를 지킴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표현일 뿐 아니라 이웃을 향한 사랑의 표현하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매 주일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와 날마다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서 받은 은혜로 이웃을 사랑할 때 큰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매 주일의 예배를 통해서 함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을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십일조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운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매 칠년 마다 안식년을 지켜야 합니다. 그 해에는 형제에게 빌려준 모든 것에 대해서 더이상 책임을 묻지 않고 빚을 탕감해 주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방인에게는 독촉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 되었던 자들로써 하나님께서 모든 빚을 탕감해 주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빚을 받아야 하는 채권자에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어려운 명령에도 순종할 때 개인에게는 복을 주시고, 온 나라에는 가난한 자가 없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1-5). 구속의 은혜가 그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더 풍성하게 되고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6).
일곱째 해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난한 형제에 대해서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반드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심지어 일곱째 해가 다가왔다고 해도 넉넉하게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어야 합니다(8-9).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복을 약속하십니다(10). 가난한 자들은 항상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방식과는 너무 다릅니다. 세상의 방식은 항상 빚진 자가 의무를 가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빚을 내줄 자도 넉넉히 빚을 내어줄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어서 종에 대해서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 말합니다. 가난하여 종이 된 이스라엘 사람(형제 자매)이 육 년 동안 주인을 섬긴 후 그 주인은 종들을 자유롭게 놓아 주어야 했습니다. 그 때에도 빈손으로 놓아주어서는 안되고 어느정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복을 생각하면서 그 만큼 주어야 했습니다(14). 그 때 마음의 동기는 역시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입니다(15). 만약 종이 주인과 그 가족을 사랑하여 평생 종이 되겠다고 하면 그 종의 귀를 문에 대고 뚫어서 그 집안의 종으로 섬기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6-18).
뿐만 아니라 양과 소의 첫 태생은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매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 앞에서 온 가족이 먹어야 했습니다(19-20). 혹 첫 태생이 흠이 있는 것이면 하나님께 바치지 못하고 대신 그 사람의 성에서 정한 자나 부정한 자와 나누어 먹되 피는 먹지 않도록 하셨습니다(21-23). 처음으로 태어난 양과소를 바치는 것은 이스라엘의 첫 태생이 살아 남은 유월절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들은 처음 것을 드림으로 그들이 받은 구원을 기억하고,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회적인 제도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다른 백성과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그 저번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가 있고 복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자유시장경제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본문에서 요구하는 것들은 터무니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경제관에 있어서도 다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자유시장경제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항상 손을 펴고 있어야 합니다. 사회,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가 우리의 경제관을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매일의 경제 활동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를 생각하며 생산과 소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해 봅시다. 그래서 경제관에서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고 약속된 복을 누리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아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상기시키며 죽은 자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해하지 말고 머리털을 밀지 말라고 합니다(1-2). 당시에는사람이 죽으면 애도하기 위해서 몸의 일부를 칼로 베고 머리털을 미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 이방신들이 자신들에게 응답하게 하는 방법으로 몸을 칼로상하게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인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기업입니다. 여기서 기업이라는 말은 ‘보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위해서 몸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어서 모세는 백성들의 먹는 문제를 다룹니다. 그들은 정결한 짐승과 새는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는 부정한 것은 먹을 수없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되새김을 하면서 굽이 갈라진 짐승들입니다. 둘 중의 하나만 하는 동물은 먹을 수 없습니다. 물고기도 마찬가지고 새도 마찬가지고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먹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3-21). 이렇게 먹을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여 먹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른 백성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그리고 3년 마다 십일조를 바침으로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땅히 매년 하나님이 계신 성소로 가서 농사로 얻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로 제사를 드리고 먹어야 합니다. 만약 성소가 너무 멀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가지고 가기 힘들면 돈을 가지고 성소 근처에서 원하는 제물을 사서 드리고 레위인과 자기의 가족들과 함께 먹도록 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의 일부를 구별하여 드림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는 방법이자 가난한 자들을 돕는 방편이었습니다. 매3년째는 십일조를 성읍의 곳간에 저축하여 그 성의 레위인들과 가난한 자들이 굶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2-29). 1, 2년의 십일조의 일부는 레위인이, 일부는 그 가족들이, 3년째에 바쳐지는 십일조는 레위인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사용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은 약육강식의 사회로 대변되는 이방 나라와 구별되는 삶의 형태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이상 구약의 음식법과 제사법은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몸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원리는 변함이 없이 적용이 됩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며 거룩하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식으로 사용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고전6:19). 또 음식도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딤전4:4-5). 구약 음식법은 없어졌지만, 매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감사함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음식을 대하는 자세에서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식사 전에 혹은 후에 기도로 감사하는 것은 이것을 표현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 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과 고백이며, 목회자의 생활과 교회의 운영과 교회 안과 밖의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한 수단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산다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며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우길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여러가지 방식으로 세상 속에서 살지만, 다른 삶의 방식을 실천해 봅시다. 세상 가운데 구별되는 백성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범사에 주시는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모세는 우상숭배에 대한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말합니다. 만일 어떤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이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다른 신을 섬기자고 할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그들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당신을 사랑하는지, 다른 신들을 섬기는지 시험하기위한 것입니다. 그런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생기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그를 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도록 유혹하는 자들을 단호하게 대하여 그들 가운데 악을 제거해야 했습니다(1-5). 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 중에서도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지 말고, 애석하게 생각하지 말고 돌로 쳐죽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그런 악행을 못하게 해야 합니다(6-11). 개인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한 성읍에서 어떤 사람이 일어나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다른 신들을 섬겨 그 성읍 사람들이 모두 우상숭배를 하게 되었을 때 다른 성읍 사람들은 그 성읍 사람들을 진멸하고 그들의 물건들을 모두 태워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성읍에 임하게 되는 상황을 막아야 합니다(12-17).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신실하게 행할 때 번성하게될 것입니다(18).
오늘 말씀은 우상숭배를 얼마나 철저하게 배격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선지자나 신접하여 신통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유혹할 때에도, 심지어 가족들과친구들도 우상숭배를 하고, 우상숭배를 하도록 유혹한다면 돌로 쳐죽이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는 그만큼 무서운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적이 실제로 일어나는지는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사단도 이적을 일으킵니다. 그 죄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정면으로 파기하고 대적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하는 것이 너무 잔인해 보이고 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그런 죄를 지은 사람에게 돌로 쳐죽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죄를 단호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단에 빠지거나, 다른 종교로 회유하여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영적인 단절, 출교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죽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내리는 형벌은 영원한 죽음밖에 없습니다.
이단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우리 삶 속에서 우상숭배를 하는 부분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부분이 없는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단호하게 그것을 끊어냅시다. 이적과 기사를 쫓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실한 백성이 됩시다. 오늘 하루도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되는 모든 우상들을 끊어버리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앞에서 모세는 과거를 회상하며 일반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켜야 되는지 설교하기 시작 합니다. 먼저 제사에 관한 법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을 정복한 뒤에 그들이 섬겼던 신들의 제단을 부수고 우상을 부수라고 합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을 섬긴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섬기기 편한 장소와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곳에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식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분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5). 그곳에서 각종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제물을 먹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온 가족들이 즐거워해야 합니다(6-7). 비록 이전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지라도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이방 족속들을 하나님께서 무찌르게 해 주셨을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택하신 그곳에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8-14). 대신에 단지 고기를 먹고 싶어서 동물을 잡을 때에는 굳이 하나님 앞에서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릴 때에만 주로 고기를 먹을 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제사 후에 먹는 고기와 평소에 먹을 고기를 구분하여 먹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피만 먹지 않는다면 고기도 잡아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사로 바친 고기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택한 곳에서 먹고 그것을 가족과 레위인과 함께먹음으로 레위인의 생계를 지원해야 했습니다(15-19).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을 먹게 되면 동물의 생명을 취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피와 고기를 구분하십니다. 피를 먹지 않음으로 동물의 생명 또한 존중하도록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짐승을 피째 먹던 이방인의 풍습과 구별되었습니다. 제물의 피는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 취할 수 있습니다(27). 제사에 관한 규칙과 그와 관련된 고기를 먹는 문제를 잘 지킨다면 백성들은 영원히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28). 이렇게 규칙을 정하신 것은 이방민족이 그들의 신을 섬기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의 자식도 불살라 제물로 드리던 풍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9-31). 하나님은 당신께서 명하신 제사 방법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32).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노력과 정성과 간절함이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예배를 받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종교나 예배, TV프로그램, 심리학과 커뮤니케이션 방법 등을 탐구하여 유익하면 예배에 도입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방식으로 섬기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섬길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의 신들을 섬기는 이방 민족들은 자신의 가장 귀한 자식을 드릴 정도로 정성과 열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식을 바치는 것을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부모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가장 귀한 것을 드린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방식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불편한 방식입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각자의 자리에서 제사를 드리면 편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백성들이 정해진 장소에서 정하신 방식으로 제사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보다 의미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외에 무엇을 더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말씀에 기초해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예배입니다(규정적 원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공적예배를 드리며 말씀에 순종함으로 삶의 예배를 잘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일을 상기 시키면서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이 주신 책임과 의무, 법과 규칙과 명령을 항상 지키라고 합니다(1). 지금 출애굽 2세대들의 자녀들은 출애굽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들을 구원하셨는지 전혀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강한 능력으로 애굽 군대를 물리치시고 그 조상들을 구원했는지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 생활때 있었던 반역의 사건도 그들이 직접 보았기 때문에 그것도 자녀들에게 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해야 했습니다(2-6). 자신들만 지킬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들은 강성해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을 차지할 것이고, 그곳에서 오래오래 평안히 살 것입니다. 그들이 들어갈 땅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땅이 항상 비옥하도록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하게 내려 주셔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게 될 것 입니다(7-15). 이른 비와 늦은 비는 곡식을 자라게 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비입니다. 비가 적절한 때에 오지 않으면 새싹이 마르거나 혹은 너무 많이 오면 떠내려 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고 절하면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게 하셔서 그곳에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16-17).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생사가 달린 일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하는 말을 명심하고 항상 잊지 않도록 손목에 메어 기호를 삼고 이마에 붙여 표를 삼아야 합니다. 또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수시로 가르쳐야 합니다. 모세가 전해준 말을 기록하여 집 문에 오가면서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18-20). 똑같이 하라는 아니라 말씀을 자녀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출애굽 2세대들이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은 땅을 차지하는 복을 주시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주를 약속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 것인가 아니면 다른 신을 섬기며 살 것이냐의 문제, 곧 삶의 방식의 문제입니다(21-25). 복과 저주 둘 중의 하나 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가르쳐주어 지키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31-32).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복을, 불순종은 저주를 약속하십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순종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불순종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제사를 통해서 용서받고 다시 순종을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은 장치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저주 가운데 있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셔서 그분에게 대신 저주를 내리시고, 아들의 순종을 우리의 순종으로 여기셔서 복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천국을 약속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우리도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고 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또 자녀들에게 그것을 부단히 가르쳐야 합니다. 함께 예배함으로 바른 예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읽고 자녀와 함께 성경을 읽고 가정마다 부모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표현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복을 생각하면서, 그분이 행하신 일을 스스로 기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함께 말씀을 나누는 저와 여러분이시기 바랍니다. 아멘.
모세는 시내산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합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처음 십계명의 두 돌 판이 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통해서 두번째 두 돌판을 깎아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 돌을 언약궤 속에 두게 하심으로 깨어진 언약을 회복시켜 주셨음을 말합니다(1-5). 이후에 아론은 죽어 조상에게로 돌아갔고 그 아들 엘르아살이 아론을 이어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아론의 자손들을 돕게 하고 성막을 옮기는 직무를 주셨습니다. 이런 레위 지파에게는 하나님께서 따로 땅을 주시지 않고 당신께서 친히 기업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모든 일에 성실하게 행하였고, 백성의 인도자이자 중보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섬겼습니다(6-11). 이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은이나 금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사랑하여 그 계명을 지키고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을 택하시고, 그들과 맺은 언약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바람직한 반응은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전심을 다해 섬기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신이시고, 주인이시고, 크고 능력이 있으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나그네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압제를 받고 살아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가나안 땅을 차지할 백성들도 나그네를 잘 돌보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만 섬기며 의지해야 합니다(12-2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이되시며, 그들을 위해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셔서 번성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22-2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 분의 말씀을 행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우리의 본성을 거슬러야 하는 괴롭고 힘든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예전의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삶,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그래서 참된 행복을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있는 강한 족속을 강렬한 불과 같이 이스라엘 보다 앞서 가셔서 앞에서 엎드려지게 하고 그 땅에서 쫓아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는 것은 이스라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들의 악함과 거역함 때문이며, 이스라엘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한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1-5).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은 백성,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얼마나 완악한 자들인지 기억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불성실하여 언약이 깨어졌고 전멸할 뻔 했지만 모세의 중보와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6-21). 뿐만 아니라 다베라(백성이하나님을 원망하여 여호와의 불이 이스라엘 끝을 사름, 민11:3), 맛사(물이 없어서 원망하던 이스라엘, 출17:7), 기브롯 핫다아와(고기를 먹게해 달라고욕심을 부리며 원망하여 벌받았던 곳, 민 11:31-32)와 가데스 바네아(열두정탐꾼 중 열명이 반대함)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하여 진노를 일으켰습니다(22-24). 항상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던 백성이었습니다(23-25). 지금의 출애굽 2세대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이전의 1세대들의 이런 완악함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그들의 자손들에게 땅을 주고, 복을 주어 많아지게 하겠다는 약속 때문에 그들을 용서하여 지금까지 왔다는 것을 기억 해야 합니다(25-29).
‘기억하라’는 주제가 계속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과거에 출애굽 1세대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완악했는지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기억하라고 했다면 오늘 말씀에서는 지금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있는 2세대들의 부모세대가 얼마나 완악했는지 기억하라고 합니다. 또 그들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그들을 위해서 중보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긍휼히 여기셨는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기억하면서 출애굽2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로움 때문에 다른 민족들을 쫓아내시는 것이 아님을 알고, 하나님의 언약의 성실하심 때문에 그들에게 땅을 주신다는 것을 인정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악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적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오직 예수님의 중보와 하나님의 긍휼하심, 언약에 신실하심이 우리 구원의 근거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교만하지 않고, 이전의 악함을 돌이켜 감사함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겪은 광야의 생활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들의 부모 세대와 그들이 겪은 광야의 생활은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정의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낮추시고, 시험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육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영적인 음식을 먹어야 사람은 참되게 살 수 있습니다(1-4).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징계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하듯 사랑의 매였습니다(5). 그 매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고,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땅은 참으로 풍요로운 땅이며 먹어서 배부르고 풍족한 땅입니다(6-9).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10).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모든 것이 만족스럽게 되었을 때에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때문에 모세는 다시 한 번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마음이 교만하여 져서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광야의 삶에서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신 하나님을 잊고 스스로 그 모든 것들을 얻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다른 신을 섬기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잊게되면 결국 다른 족속들과 같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11-20).
오늘 말씀에서 모세는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모세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의 땅을 차지하고 나서 평안할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에게서 건지셨다는 것과 광야에서 그들을 낮추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어떠한 분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시고 언약에 신실하시며 그 백성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잊지 않은 것은 결국 일상의 삶과 연관됩니다. 매일 먹는 식사를 통해서 그 식사만으로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기억하여 하나님을 기억해야합니다. 식사기도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좋은 도구가 됩니다. 또 일상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주셨고, 그들에게 그 일과 땅과 먹을 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서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오늘 하루도 저와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정하며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에서 그 땅의 백성들을 쫓아내게 하실 때, 가나안 족속들과 어떤 관계도 맺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스라엘로 우상숭배를 하도록 만들어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1-4).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에서 모든 우상을 깨뜨리고 불살라야 합니다. 단호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성민)이기 때문입니다(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외적인 조건을 보시지 않고 선택하셨습니다(6-7).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택하셨고 크신 능력으로 바로의 손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8). 하나님은 하나님께 신실하여 그 계명을 지키고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 곧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9-11). 다시 한 번 모세는 하나님께 신실할 때 어떤 복을 받게 되는지 설명하고 다른 신을 섬기게 될 때 결국 그 신들이 걸림돌이 될 것임을 말합니다(12-17).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강함을 보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함께 하시고, 애굽 사람들에게 행한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18). 사실 당시 애굽은 제국이었고, 가나안 땅의 족속들은 도시국가였습니다. 애굽이 훨씬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강력한 애굽에서 행하신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하나님의 능력을 이스라엘을 경험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가나안 땅의 민족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앞서 왕벌(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민족들을 멸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그들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19-21).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은 단번에 그 백성들 모두를 없애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천천히 하나님께서는 멸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한 번에 정복하게 되면 그 땅이 오랫동안 황폐하게 되어 들짐승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조금씩 점진적으로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들을 진멸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족속이든 그들의 신상을 불살라야 합니다. 그것의 은이나 금으로 씌운 것 때문에 가지고 와서는 안됩니다(22-26).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분의 사랑하심이 구원의 근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마땅히 다른 신을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승리를 보장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킬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점진적으로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이유입니다. 그 사랑을 알고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은 당신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21). 또 구원받은 후의 삶은 점진적으로 거룩해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과 더욱 깊이 교제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거룩해지는 삶의 여정을 살게 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하루가 됩시다. 또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날마다 거룩해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모세는 다시 한번 서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 규례, 법도를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배우고 또 차지할 땅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1-3). 이것을 주신 의도도 명확하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언급합니다. 이어서 모세는 온 이스라엘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라고 명합니다. 가장 먼저 그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가나안 땅에서 기본적으로 여러 신을 섬기는 종교적 풍습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다른 신은 없다는 선언은 이방신들과 하나님을 구별하며, 이방인들과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는 방식입니다. 그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다름 아니라 전인격적인 사랑입니다(4-5). 이방인들은 이방신을 노여워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 제사를 하고, 그 법을 지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것은 전인격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뜻만, 힘만, 마음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제사와 삶의 동기와 의지와 실천을 모두 보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후손들에게 교육할 의무도 있습니다(6-9).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건축하지 않은성읍을 차지하게 하시고, 그들이 파지 않은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고, 또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나무의 열매를 차지하게 하셔서 그들을 먹이실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경외하며 섬겨야 할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겨서는 절대 안됩니다. 이는 바른 예배의 대상과 방법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보고만 계시는 죽은 신이 아닙니다. 살아 있지만 무능한 신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분을 내시는 살아 계신 분입니다(10-15). 백성들은 ‘맛사’(므리바)에서처럼 하나님을 ‘낫사’(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의심하고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명령과 법도를 잘 지킬 때 하나님은 모든 대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승패가 순종에 달려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자녀들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먼저 말하고(21-23), 그 구원에 대한 감사와 마땅한 반응으로써 모든 규례를 지켜야 하고, 또 지킬 때 약속하신 복을 주시고 의롭게 됨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가르쳐 줍니다(24-25).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 구원에 감사하면서 사는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배은망덕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이 시대에 우리 교회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의 온 마음, 의지, 힘, 감정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자녀들에게 구원의 은혜에 기초한 삶을 사는 바른 신앙의 삶을 물려주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모세는 5장에서 그의 두번째 설교를 시작합니다. 앞에서 1-4장이 첫번째 설교로서 과거에 대한 회상이 주를 이룬다면, 두번째 설교에서는 그 과거에 대한회상이 현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모세는 1절에서 하나님의 법과 규례를 듣고, 배우고,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맺은 언약을 상기합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자들은 그 때에 어린 아이였거나, 태어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은 그들의 조상들과만 맺은 것이 아니라 그들과 맺은 것이라고 하다고 모세는 말하고 있습니다(1-3). 십계명의 내용의 거의 같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신앙의 내용이 바뀌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단일한 법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4-21). 세월이 지나도 믿음의 내용은 바뀌지 않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과업은 새로운 법, 믿음의 내용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법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것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자신의 역할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를 잇는 중보자로서 백성들의 수령에 의해 세워졌으며, 하나님께 인준받은 것임을 상기시켜줍니다(22-27). 이것은 그의 설교의 권위를 더해 줍니다. 모세는 일반 사람이 아니라 중보자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두려워하고 모세의 말을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항상 그렇게 당신을 경외함으로 복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받아 이스라엘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도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28-31).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면 복을 받을 것입니다(32-33).
오늘 말씀의 핵심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역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 출애굽 2세대들에게 그 조상들에게 주신 법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어떤 법을 주신 것이 아님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의 십계명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한 명의 중보자가 존재합니다. 모세는 오실 참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과거의 신앙이 오늘날 자신의 신앙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새로운 어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해준 신앙의 내용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하나이고, 중보자도 한 분이시고, 삶의 방식도 하나입니다. 오늘 하루도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역사가 되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저와 여러분을 위한 명령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고 주님께서 결코 우리를 홀로 버려 두지 않는다는 그 약속이 저와 여러분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고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마지막으로 모세의 회상이 이어집니다. 모세는 회상의 목적이 다름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임을 말한 후 바알브올(민25장)사건을 언급합니다(1-4). 바알브올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자들이 결국 멸망 당한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담하지 않은 자들이 지금 생존하여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또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지금 그 백성들에게 하신 일을 기억하면서 그와 같은 신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분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합니다. 이렇게 모세가 말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우상숭배의 유혹을 이기 못 할 것임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거의 확신을 가지고 그들이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1계명과 2계명을 풀어서 설명해 줍니다. 남자, 여자, 짐승, 새, 물고기, 해, 달, 별 등 열거된 형상들은 실제로 당시에 사용되던 우상이었습니다(5-28).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고, 소멸시키는 불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우상을 섬기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그렇다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땅에서 하나님을 찾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29). 혹 우상 숭배를 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시며 언약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30-31).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행하셨는지 항상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모세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지켜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합니다(32-39).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다면 그들이 얻은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게 될 것입니다(40). 이 말들을 한 후에 모세는 요단강 동편에서 부지 중에 살인자들이 피하는 도피성을 구체적으로 지정합니다(41-49).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위해서 어떤 분이시며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이 순종의 바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이스라엘을 옳아 매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백성들의 당연한 감사와 반응으로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정적이고, 질투하심으로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지더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시 받아 주시는 자비로우시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기 때문에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구원을 이미 얻은 자들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생각할 때 감사하며 그분의 말씀과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선한 반응이 나옵니다. 혹 넘어지고 실패하고 죄를 짓을 때에도 주님께 돌아오면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과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묵상합시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그 말씀에서 요구하시는 것들을 지켜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바산의 왕 시혼을 물리쳤던 것을 회상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산의 왕 옥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1-4). 이스라엘이 바산 왕에게서 취한 성들은 모두 강한 성읍들이었습니다(5-8).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 동쪽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쳐서 차지하게 된 땅과 성읍들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빼앗은 땅이 얼마나 넓은 땅인지, 그리고 빼앗은 땅의 왕과 백성들이 결코 약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10-11).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강력한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에게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땅들을 므낫세 반지파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나누어 가지게 된 경계를 소개합니다. 요단강 동편에 땅을 차지한 두 지파와 반 지파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모세는 요단강 건너 편에서도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나머지 지파에게 땅을 주실 것임을 확신하도록 합니다(12-17). 그리고 두 지파 반에게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실 때까지 다른 지파와 함께 싸우고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도록 명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뿐만아니라 자신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될 여호수아에게 요단 이쪽에서 행하신 하나님께서 저쪽에서도 동일하게 행하시고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울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18-22). 모세는 다시 한 번 자신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가나안 땅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23-29).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싸우시는 분이심을 봅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원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로 행하시는 분이심을 보게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았던 므리바 사건(민20:12) 때문에 약속에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끝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록합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해줍니다. 바로 여호수아를 담대하게 하여 자기를 이어 백성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모세의 기도를 들어 주실 수 있고 그럴 능력도 있는 분이시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다른 일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고,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보다 여호수아를 담대하고 강하게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대로 하지 않으실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그분의 전능함도 의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르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갑니다. 혹 때로 나의 원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그분은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이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계속해서 모세는 지난 날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 가운데 에돔의 땅은 이스라엘에게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땅은 에서에게 준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심하여 에서의 자손들에게 양식을 사먹고 물도 그들에게 사서 마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십년 동안 부족함이 없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라고 합니다(1-6). 모세와 백성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모압을 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땅은 롯과 그 자손에게 준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씀대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고 명하셨는데, 그 시내를 건너게 된 시기가 벌써 광야 생활을 한 지 38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 때에출애굽 1세대들은 이미 다 죽었습니다(7-15). 그 후 암몬 땅도 이스라엘이 지나게 되는데, 그곳도 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땅도 역시 롯의 자손에게 준땅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과 유사하게 모압과 암몬 족속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주시고 그 땅에 살던 원주민들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16-23). 그 후에 만나게 되는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십니다. 또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소문으로 주변 국가들이 두려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4-25). 사실 모세는 먼저 시혼에게 평화의 말을 전했지만, 헤스본 왕 시혼은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백성과 싸우길 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로써 하나님께서 시혼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를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에 모세에게 명하여 그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헤스본 왕 시혼은 이스라엘에게 패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모든 사람들을 진멸했습니다(26-35). 모세는 회상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넘겨 주신 땅만 정복했고, 오직 하나님께서 가기를 금하는 곳에는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회상합니다(36-37).
지금 이스라엘 백성 앞에 놓여있는 땅은 결국 하나님께서 주실 땅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모세가 다시 백성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만 백성들은 칠 수 있고, 주시지 않는 땅은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정복 전쟁을 하게 될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이 중요한 원리를 다시 한 번 기억하도록 합니다. 땅을 차지하는 비결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주시기로 한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상급을 주십니다. 그것은 천국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천국에 못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땅을 상급으로 주십니다. 이 ‘땅’은 물리적인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과 간섭함을 받으며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되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경계를 정해줍니다. 오늘 하루도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심을 경험합시다. 최후에 받게 될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경계를 지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는 만큼만 나아가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신명기는 가나안 땅을 건너기 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한번 하나님의 명령을 해설해 주면서 잘 지키라고 부탁하는 말들을 기록한 것입니다(1). 먼저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호렙 산(시내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 겨우 11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이었음을 상기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사십년 11개월 후에 그곳에 다시 왔습니다. 지금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죽인 후 약속의 땅에 대한 성취가 임박한 때입니다. 이제 이 율법을 출애굽 2세대에게 들려주며 약속의 땅에서도 언약을 잘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2-5). 옛날에 조상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 정탐꾼의 말을 듣고 불신앙을 가진 것 같이 되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그 사건으로 당시 하나님을 굳게 믿었던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하나님께 하신 말씀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보다 항상 앞서 가시며 40년의 시간 동안 그 백성을 광야의 길에서 인도해 오셨습니다(6-46).
모세는 지난 날을 회상하며 온 회중에게 들려줍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모세는 일부러 지난 날의 회상을 모든백성에게 들려줌으로 과거에서 배우도록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보다 앞서 행하시고 그 백성을 자식과 같이 품으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께대한 신뢰를 져버릴 때 그 백성을 벌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조상들이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가 바로 정탐꾼 사건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한 것 때문임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이제 출애굽 2세대들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곧 들어가서 정복하고 그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정복 전쟁 과정 중에도, 그리고 그곳에서 정착할 때도 그들은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뢰하는 자들과 함께하시는 분이시며, 불신하는 자들에게는 엄한 분이심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신실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영적 이스라엘로서 동일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 보다 앞서서 우리 길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신할 때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중보 덕분에 영원히 버리시지는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신실하고 그분을 신뢰할 때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것을 마무리 짓도록 하셨습니다. 동쪽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가 차지하고, 나머지 아홉 지파 반은 가나안 땅 정복을 통해서 분배 받은 땅을 차지하는 것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에게 줄 성읍도 말씀하심으로 사실상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확증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문제가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땅을 물려받게 된 슬로브핫의 딸들의 경우입니다. 그 딸들이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가게 될 경우, 딸들의 땅이 다른 지파에게 소속되게 되어 실제적으로 므낫세 지파의 땅이 줄어들게 된다는 것입니다(1-4). 그것은 합당한 문제 제기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딸들 중에서 남자 형제가 없어서 아버지의 기업을 받게 된 딸들은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갈 수 없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지파에게 준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도록 합니다. 그렇게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도록 합니다(5-9).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 말씀을 순종하여 자기의 삼촌의 아들들과 결혼하여 기업이 나뉘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10-12). 당시에 가까운 친척과 결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민수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여리고 맞은편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신명기 역시 그곳에서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권면하는 말을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27장 1-11절에서 본 슬로브핫의 딸이 땅을 상속 받는 것에 대한 보충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이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각 지파에게 주신 약속의 기업, 땅을 한 지파에서 다른 지파로 옮겨질 수 없다는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소유로써 그 문제의 해결도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이스라엘은 관리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각 가족과 지파에게 그 크고 작음에 따라 나누어 주신 것은 다른 지파에 양도할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다는 원리를 민수기 마지막 장에서 보여줍니다. 혹 너무 가난하게 되어 땅을 저당 잡을 때에도 희년이 되면 돌려주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백성들 같이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살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천국의 원리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주신 땅을 잘 관리하는 청지기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땅을 빼앗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부요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준 은사와 역량에 따라서 청지기로서 자신의 재산과 지식과 재능을 관리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길 원하십니다. 그러한 천국의 원리가 바르게 작동되는 곳이 교회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재산이 많다고,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재능이 많다고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더 낮게 여기거나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은사와 분량 따라 주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탐하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이 곧 우리 공동체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각자에 주신 것들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며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천국의 원리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이 받은 기업 중에서 레위인들에게 성읍과 뜰을 주어 레위인들의 삶을 책임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총 48성읍을 주라고 구체적으로 정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48 성읍 중에서 6성읍(요단강 동편에서 셋, 가나안 땅에 셋)을 고의로 살인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도피성으로 삼으라고 합니다(1-8).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피의 복수자로부터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성읍을 의미합니다. 그곳에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 보호됩니다. 재판 후에 그 사람이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것으로 밝혀지면 자신의 생명으로 반드시 그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16-21). 반면에 그 사람이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고 판명되면 도피성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성읍에서 나가 다시 자신의 성읍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경우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피의 값을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대신 치른 것으로 보고 피의 복수자는 그 사람에게 복수를 할 수 없게 됩니다(22-28). 하지만 만약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그 성읍을 나오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도 그 피의 복수자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살인 죄에 대해서 증인은 반드시 두 사람 이상으로 확증되어야 했습니다(30). 고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돈으로 그 죄를 갚을 수 없고 반드시 피를 흘림으로 갚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땅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큰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하나님도 거하시기 때문입니다(31-34).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지파에게 주시는 땅 가운데 레위인에게 돌아가야 할 성읍과 뜰, 그리고 도피성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레위인들에게 48성읍을 주는 것은 단순히 레위인을 돕는 개념이 아닙니다. 레위인의 성읍을 곳곳에 둠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의 공동체로, 거룩한 공동체로 그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 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파별로 흩어져서 살기 때문에 회막과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레위인들이 흩어져서 각 지파 속에서 살아가게 하심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레위인들의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을 따라 재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레위인의 48성읍 중 6성읍을 구별하여 도피성을 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함 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땅에서는 누군가 살인을 당하여 피를 흘리고 그것을 용인한다면 그 땅은 더러워집니다. 하나님께서명령 하신 대로 살인자를 처리하지 않으면 정결함과 거룩함이 오염되어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없게 만듭니다. 따라서 살인자에 대한 처리는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을 주는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처리해야 합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실수로 사람을 죽인자에게는 살 길을 도피성을 통해 주십니다. 그 도피성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고의로 살인하지 않은 자를 위한 곳입니다(15). 누구든지 고의로 살인하지 않은 자는 그곳을 피할 수 있습니다. 살인 당한 자의 피는 대제사장이 대신 흘림으로 갚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도피성은 예수님께서 날마다 마음으로 살인하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피를 흘려 주신 대속의 은혜를 예표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레위인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시고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비출 때 우리의 죄악을 보게 됩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참된 대제사장이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게 하시고 당신의 이름 안에서 회개하는 자를 당신의 피로 씻어 주시고 정결하게 해 주십니다. 이 예수님을 보내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 자신을 말씀에 순종함으로 거룩하게 보존합시다. 또 우리 삶 속에서 날마다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하여 날마다 거룩 하여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복 해야 하는 땅의 동서남북 경계를 정해 주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아가기 전에 마치 군사 작전을 계획 하듯이 정복해야 하는 땅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친히 말씀하여 주십니다(1-12). 그 땅은 하나님께서 아홉 지파 반에게 주시는 땅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이미 요단강 동쪽에서 그들의 땅을 받았습니다(13-15). 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령하여 각 지파마다 땅을 나누기 위한 지휘관을 한 사람씩 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 지파의 갈렙을 비롯하여 각 지파의 지휘관들을 세우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을 정복하는데 앞장 서서 각 지파를 지휘할 자들입니다(16-29).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스라엘이 땅을 정복 하기 전에 그들에게 먼저 주시고자 하는 땅을 보여주시고, 또 그 경계를 정해 주시는 것이 오늘 말씀의 주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경계를 정해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할 땅,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 땅이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을 받는다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땅을 정복하는 싸움을 싸워야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쟁은 무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하는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한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마지막에 모든 백성은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소망은 추상적인 어떤 것을 바라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부터 구원하시기를 계획하시고 인도하셨던 것 같이, 그리고 앞으로 가나안 땅의 점령과 정착의 계획을 가지시고 계셨던 것 같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삶과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계획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우리의 몫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 갈 때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 통해서 가나안 땅에 구현되었듯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실현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우리 삶과 주변의 실제적인 변화를 가지고 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계획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겪은 여정에 대해서 요약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 33장은 34장에서 시작되는 가나안 땅 분배에 관한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일종의 회상입니다. 앞으로의 전쟁을 위해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되새기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 그런 여정이 단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되새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본문 말씀은 ‘떠나다’, ‘진치다’가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출발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온 여정은 중간 중간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군대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진치고 떠나는 삶을 반복해 왔다는 것입니다. 또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을 지켜 주셨다는 것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잘못해서 죽은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고 단순하게 떠나고 진을 친 이야기에 초점을 두고 다루고 있습니다(1-50). 출애굽 1세대들은 신실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셨고, 당신의 약속을 이루셔서 가나안 땅 바로 앞까지 이스라엘 데리고 오셨습니다. 이제 출애굽 2세대들은 이제 그 땅을 취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이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33장의 나머지 부분은 이 미래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맞은 편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거든 그 땅의 주민을 다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주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소유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문의 크기에 따라서 많고 적은 땅을 나누어 가지게 될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곳에 들어가서 원주민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그들이 결국 이스라엘에게 눈에 가시와 같이 되고 옆구리의 가시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내리기로 한 진노를 이스라엘에게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본문은마칩니다(51-56).
가나안 땅 바로 앞에서 출애굽 2세대들은 그런 신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돌아보고, 미래의 사명에 헌신할 준비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돌이켜 보았을 때 우리의 신실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이를 통해 과거에 신실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도 동일하게 역사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신뢰하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에도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합시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지파의 일부가 요단 강을 건너지 않고, 요단 강 동쪽 땅을 차지하겠다고 모세에게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가축을 아주 많이 갖고 있는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의 일부가 살기에 아주 좋은 목초지였기 때문입니다(1-5). 모세는 이런 요청을 처음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 땅을 앞두고 비슷하게 그 땅을 정복하러 가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또 다시 광야에서 방황을 해야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6-15). 하지만 그들은 이전의 세대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가까이 나와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룩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들의 상황에 가나안 땅 동쪽이 더 좋기 때문에 선택한 것 뿐이라고 설득합니다. 그래서 동쪽 땅을 주어 살게 한다면,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가나안 땅에서 싸워야 하는 전쟁을 함께 수행하고, 여호와께서 그 원수를 다 쫓아 낼 때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합니다(16-19). 모세는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땅이 그들의 소유가 될 것임을 허락합니다. 하지만 이미 자기들의 땅을 차지했고, 생활을 안정되었다고 함께 싸우지 않으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청대로 요단 동쪽 땅을 그들에게 허락해줍니다(20-27). 모세는 여호수아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을 불러서 이 일을 확증해 줍니다. 만일 이들이 건너가 그들과 함께 싸우면 기르앗 땅, 곧 요단 동쪽 땅이 그들의 것이 될 것이지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땅을 소유할 수 없고, 가나안 땅 중에서 자신의 땅을 차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반드시 그들과 함께 싸우러 가겠다고 다짐합니다. 모세는 마침내 요단 동쪽 땅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가 되게 합니다(28-32). 모세는 그 지역과 경계를 분명하게 기록하며 남깁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땅에 있는 민족을 몰아내고 차지합니다(33-42).
이렇게 갓, 르우벤, 므낫세 반(절반, 일부) 지파가 요단 강 동편에 정착하는 것은 장차 이스라엘 온 지파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것을 예표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마침내 이루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갓 자손,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자신들이 몫이 생긴 것에 만족하고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함께 지속적으로 정복 전쟁에 참여해야 합니다. 가나안 전쟁은 모든 백성이 빠짐 없이 동참해야 합니다. 구경꾼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영적 군대가 되어야 합니다.
두 지파 반의 상황은 마치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구원을 얻은 신자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언약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모든 신자는 지속적으로 영적인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 싸움을 싸우는 전투하는 백성, 거룩한 군대입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에 순종하며 우리 삶 가운데 사탄이 차지하고 있는 곳을 영적인 싸움을 통해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령하여 미디안에게 원수를 갚으라고 합니다. 그 후에 모세는 죽을 것입니다(1-2). 원수를 갚으라는 말은 복수나 분풀이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전쟁을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디안은 이스라엘을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지도록 유혹하여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표현하는 정당한 방법이었습니다. 모세는 각 지파에 천 명씩 뽑아 거룩한 전쟁을 치르게 합니다. 이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영육 간에 타락하도록 만든 발람도 죽게 됩니다. 하지만 전쟁에 참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가지 실수를 합니다. 바로 미디안의 부녀들과 그 아이들을 사로잡아 온 것입니다. 모세는 이에 대해 진노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전에 바알브올의 사건, 곧 미디안 여인들이 우상을 숭배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함께 숭배하는 일을 겪고도 미디안 여인을 사로잡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에 모세는 남자 아이와 결혼을 한 여자를 모두 죽이고 오직 여자 아이만 살려 두라고 합니다(13-16). 남자 아이들은 잠재적인 적군이기에 살려 두어서는 안되고 결혼을 한 여인들은 이미 바알브올에 가담하여 영적으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살려두어서는 안되었습니다. 다만 아직 바알브올에 가담하지 않아 남자를 알지 못하는 미디안 소녀들은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하길 원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오늘 말씀은 전쟁에 참여하여 시체를 만짐으로 부정하게 된 용사들을 진영 밖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게 하여 정결의식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전리품을 나누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한 사람도 죽지 않는 놀라운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49). 정결 의식을 거친 후에 승리로 얻은 전리품은 정확하게 계수되어 반은 전쟁에 참여한 사람에게, 반은 회중에게 돌립니다(26-27). 또 군인들은 자신이 얻은 전리품의 오백 분의 일(0.2%)을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어 여호와께 드립니다. 또 백성들도 오십 분의 일(2%)을 레위인들에게 주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또 군인들은 자신들 중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동시에 전쟁 중에 피 흘린 것을 속죄하기 위해서 예물을 가지고 옵니다. 모세와 엘르아살은 그것을 받아 회막에 드려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을 삼았습니다(50-54).
오늘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 사람들을 진멸하고 승리로 돌아온 장소가 약속의 땅 바로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38년 전에 정탐꾼을 보낸 곳과 지리적인 위치는 다르지만, 그들의 상황은 같습니다. 출애굽 1세대가 약속의 땅을 점령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지 못하고 실패한 그곳에서 2세대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전쟁에 나아가 한 사람도 죽지 않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미디안에 대한 승리는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싸우게 될 전쟁의 맛보기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에 가까운 승리를 하게 됩니다.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는 표현을 볼 때 일반적으로 전쟁을 통해서 그들이 승리를 한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됩니다.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여리고 성 전투처럼 특별한 방법으로 승리를 했을 것입니다. 또 전쟁 후에도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일부를 구별하여 바침으로 그 승리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 삶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전에 실패했던 곳이라도 바로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다시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했던 그곳에서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승리를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모세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백성들이 서원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서원을 하거나, 어떤것을 결심하고 서약했으면 그가 말한대로 다 행해야 합니다. ‘서원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어떤 것을 드리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헌신을 의미한다면, ‘결심하고 서약’하는 것은 어떤 것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일종의 절제의 헌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둘 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이루어 주신다면 어떻게 하겠다든가, 하지 않겠다든가 하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된 마음에서 하는 것입니다(1-2). 하지만 이런 서원도 질서가 있습니다. 만약 결혼하지 않은 딸이 서원할 때는 그의 아버지가 듣고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허용한다면 그 결심과 서약은 유효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 서약을 듣고 허락하지 않으면 그 서약은 무효가 되고 지키지 못해도 하나님께 용서를 받습니다(3-5). 또 만약 결혼한 어떤 여인이 서원 할 때 경솔하게 말하였다면 남편 된 사람이 그것을 듣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남편이 듣고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경솔한 서원은 무효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 여자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6-8). 하지만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의 서원이나 서약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한편 결혼 후에 아내가 서원을 할때 남편이 듣고 그것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고 금하지 않으면 그 서원은 효력을 가져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남편이 듣고 무효하게 하면 그 아내의 서약은 무효가 되어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만약 남편이 듣고 한 참 있다가 나중에 반대하게 되면 그 죄를 남편이 책임지게 됩니다. 본인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남편은 자녀와 아내의 서원을 지키게 할 수도 있고, 무효가 되게 할 수도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구약 시대에 가정에서 재산권이나 제사를 드릴 제물이 아버지와 남편에게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또 서원을 이룰 때 반드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 제사를 아버지와 남편을 통해서만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자식이나 아내가 서원 했을 때 그것을 이행하는 실제적인 책임은 남편과 아버지가 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식이나 아내가 여러 상황을 형편을 살피지 못하고 경솔하게 서원할 때 그것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나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다고 서원했을 때, 남편 엘가나는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한나가 그 서원을 이룰 수 있도록 허락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섣부른 서약이나 서원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안전 장치를 가정에서 남편과 아버지에게 주신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함부로 서원하고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깨뜨리는 심각한 죄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서원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서원을 다시 확인하고 제대로 지킬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하는 것이 가장에게 주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서원이나 서약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큰 벌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남편과 가장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모든 서원과 서약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신 것은 신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또 우리의 신앙 생활이 바르게 되고 있는지 참된 남편이신 예수님께서 세워 주신 직분자를 통해서 확인되어야 합니다. 직분자는 교인의 삶을 감시하고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버지가 딸과 아내의 서원을 살피고 너무 과하거나 잘못된 것이면 취소해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과 같이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가정에서도 우리는 부모가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 미래에 그런부모가 될 수 있도록 잘 준비되어야 합니다. 또 교회 안에서 어른으로서 다른 자녀들을 신앙으로 바르게 인도할 의무가 모든 성도에게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교회와 가정에서 우리 자녀들과 미래 세대의 신앙이 바르게 설 수 있도록 우리의 맡겨진 의무를 다합시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삶으로 모범을 보입시다. 또 심방이 곧 시작이 됩니다. 심방을 통해서 직분자들이 이런 역할 잘 감당하도록 기도하고 협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절기와 바쳐야 할 제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달의 첫 날은 월삭이면서 동시에 나팔절입니다. 그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매월 첫날에 드리는 제물 외에(6)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일곱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로 드리고, 소제로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수송아지와 함께 드릴 때는 십분의 삼을, 숫양에는 십분의 이를, 어린 양과 함께 드릴 때는 각 마리당 십 분의 일 에바로 드립니다. 또 속죄제를 위해서 숫염소를 드립니다(1-6).
이어서 일곱째 날 십일에는 장막절로 백성들이 함께 모여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심령을 괴롭게 하여) 나팔절에 드린 것과 동일하게 소제를 곁들인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 그리고 역시 숫염소를 속죄제로 드립니다(8-11). 이 날은 대속죄일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날이었습니다. 일곱째날 열 다섯째 날에도 성회로 백성들이 모여 안식하며 칠일 동안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이 절기는 초막절(장막절)입니다. 이 날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장막 가운데 살았던 생활에 대해 회상하고 또 약속의 땅에서 얻은 추수에 감사하며 기뻐하던 절기였습니다(이스라엘은 추수를 칠칠절에 한번, 초막절에 한번 두 번 합니다.) 이 절기는 총 칠일을 장막에서 생활하며 보내는데, 첫날은 번제로 수송아지 열세 마리와 숫양 두 마리, 일 년 된 숫양 열네 마리를 소제와 함께 드립니다. 그리고 상번제와 속죄제로 숫염소 한 마리를 드립니다. 둘째날은 수송아지 열두 마리와 숫양 두 마리와 숫양 열네 마리를 역시 소제와 전제와 함께 드립니다. 역시 매일 드리는 상번제와 속죄제로 염소 한 마리를 드립니다. 셋째날에서 일곱째날까지 수송아지만 한 마리씩 줄고 동일하게 제물을 드립니다. 그리고 여덟째 날에는 큰 성회를 열어 번제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일년 되고 흠 없는 숫양 일곱 마리를 소제와 전제와 함께 드립니다. 또 속죄제로 염소 한 마리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은 장막절에 다른 제사도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제사가 장막절 제사로 대체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절기의 제사를 별도로 정확하게 지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 모든 것을백성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12-40).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확하게 지켜야할 절기와 제사의 제물의 양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어제 말씀처럼 이스라엘의 삶이 매일, 매주, 매월, 매년의 절기와 제사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이 예배이며, 삶 전체가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어야함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매일의 삶과 절기들을 통해서 번제와 소제, 전제, 속죄제가 끊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의 삶을 감싸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번제가 상징하는 헌신과 소제와 전제가 상징하는 감사와 찬양, 그리고 속죄제가 상징하는 회개가 이스라엘의 삶을 꽉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와 헌신과 찬송과 회개가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드려야 할 제사와 절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매일 일년 된 흠 없는 숫양을 아침 저녁으로 고운 가운십분의 일 에바의 소제와 함께 번제로 드려야 합니다(1-8). 이것을 매일 ‘항상 드리는 번제’라고 해서 상번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절기 때 하나님께 드려야하는 제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안식일에는 상번제 외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고운 가루와 포도주를 부어서 제사를 드리는 전제도 함께 드려야 합니다(9). 이로써 안식일이 다른 날과 구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초하루(혹은 ‘월삭’)이라고 불리는 매월 첫 날에는 수송아지 두 마리와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일곱 마리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고 매 수송아지에는 고운 가루 십 분의 삼에 기름 섞은 소제와 양 한 마리에는고운 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매 어린 양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을 기름 섞은 소제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또 전제로 수송아지 한 마리를드릴 때 마다 그래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외에 숫염소 한 마리도 속죄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합니다(10-15). 이어서 유대인 달력으로 1월 14일에 지키는 유월절과 바로 이어 15일 부터 이어지는 무교절에는 무교병을 먹고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를 각각 소제를 섞어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숫 염소로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역시 상번제 외에 그것들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칠일 동안 동일한 제사를 반복하면서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거룩한 모임으로 모이고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되었습니다(16-25). 이어서 칠칠절에 드릴 제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칠칠절은 처음 익은 열매를 추수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오순절)입니다. 첫 열매는 앞으로 있을 열매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그 날에 드리는 소제는 첫곡식으로 드리는 새 소제입니다. 이 절기에도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또소제로 각 송아지를 드릴 때 마다 십분의 삼 에바를, 양을 드릴 때에는 십분의 일을 소제로 드립니다. 또 속죄를 위해서 숫염소 한 마리를 드립니다. 이것은 모두 상번제 외에 추가적으로 드리는 제물들입니다(26-31).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한다는 것은 단지 일주일에 한 번 예배하는 그런 삶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을 믿고 마음을 다해 그분을 섬긴다는 것은 인생의 사이클이 온전하게 하나님께 맞춰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달리 말하면 매일, 매주, 매달, 매년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비워 두는 것입니다. 365일 교회에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맞추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때 이스라엘은 땅을 분할하여 차지하고, 여호수아라는 직분자를 따라서 온 이스라엘은 일상을 살면서 성막에서 항상 피어오르는 상번제의 연기를 보고 살게 될 것입니다. 또 안식일, 초하루, 칠칠절 등과 같은 절기 때마다 함께 정기적으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다시 한 번 그들의 죄를 속죄하고 교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사이클을 구성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매일 제물을 드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고 절기 마다 제사를 드리지 않지만, 일상 속에서 매일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상번제의 연기가 보고 삽니다. 매 주일의 예배 속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속죄하고 다른 성도들과 교제합니다. 매일, 매순간을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씁니다. 삶 자체를 하나님을 위해 삽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이고 예수 믿고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오늘 하루도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 초점이 온전히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모세에게 나아와 땅을 요구하는 장면입니다. 슬로브핫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자로서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문제는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상속자가 없이 죽은 것입니다. 땅을 분배할 때 각 가정에서 남자가 그 몫을 받았는데, 슬로브핫의 다섯 딸은 몫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에 그 다섯 딸들은 재산 상속에 대한 권리를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딸들이 받을 수 있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이름, 즉 가문이 딸들을 통해서도 유지 될 수 있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딸들의 요구가 옳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선례가 되어 아들이 없을 때에는 딸들도 아버지의 땅을 물려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딸이 없을 때는 어버지 편에서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주도록 하는 규칙을 세웁니다. 이런 규칙은 비록 싸움에 참여하지 못해 몫을 얻을 수 없는 여인이라도 므낫세 종족 중에서 하나님이 주신 몫을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또 인간이 하나의 청지기로서 그 땅을 소유하며 궁극적인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해 줍니다(1-11). 하나님은 이처럼 세심하게 그 백성들을 돌보셨습니다.
땅의 분배와 관련된 단락이 끝이 나고 모세의 죽음 예고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안타깝지만, 므리바 사건으로 아론과 마찬가지로 모세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땅을 볼 수 있도록 아바림(느보 산) 산에 올라가라고 합니다(12-14). 그런데 모세의 관심은 그 땅을 보는 것 보다 자신이 죽고 나서 목자 없는 양 같이 될 회중을 걱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성령이그 안에 머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대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여호수아를 새우고 그에게 안수하여 모세에게 있던 존귀를 여호수아에게 돌려 온 회중이 여호수아에 복종할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하십니다(12-20).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고 여호수아를 엘르아살 앞에 세우고 엘르아살은 하나님의 뜻을 살필 때 쓰는 우림과 둠밈을 가지고 그를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확증하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시키는대로 모두 행하였고, 여호수아를 자신을 잇는 지도자로 세웁니다(21-23). 하나님은 그 백성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버지의 몫을 이어받는 문제와 지도권이 이어받는 이야기로 구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아들 없이 죽은 슬로브핫의 몫을 넘겨 받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자들의 권리도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이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참된 목자로서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소유할 백성들의 권리를 모세를 후계자인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실 것입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과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교회가 가진 권리를 보장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하늘 왕국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참된 목자로서 양을 돌보시고 지켜 주십니다. 이런 주님이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세심하게 돌보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천국 소망에 대한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바알브올의 일로 생긴 전염병이 끝난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총수를 조사하라고 합니다. 1장에서와 마찬가지로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만한 자들이 그 대상입니다(1-4). 르우벤 자손들은 합이 사만 삼천칠백 삼십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의 후손 중 발루의 가문에 속한 자들 중에 느무엘과 다단과 아비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회중 가운데서 부름을 받은 자들인데, 그들이 바로 고라와 함께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다가 죽은 자들이었습니다(5-10). 회중 가운데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세움을 받은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도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않도록 긍휼을 베푸셨습니다(11). 시므온 자손에서 납달리 자손까지 모두 계수 되었습니다. 중간중간 언급되는 자손들은 족보의 진정성을 보여줍니다. 그 총수는 육십만 천칠백 삼십 명입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뼈아픈 숫자입니다. 처음 계수 했던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보다 적은 수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숫자보다 훨씬 더 많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으로 심판을 받아 줄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라 자손과 다단과 아비람의 불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14700명과 250명이(16:49), 물이 없고 만나를싫어하는 염병으로 수 많은 사람이(21:6), 바로 앞에서 본 바알브올 사건으로 24000명이(25:9)이었습니다. 또 자연사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어든 군대의 규모는 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군대로서 여전히 다음 세대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이 조차도 없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앞두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땅을 나눠 주라고 합니다. 땅을 차지하는 기준은 가족의 숫자가 많으면 많은 만큼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각 지파별로 땅 안에서 제비 뽑아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52-56). 이어서 레위 지파의 족보와 1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레위 지파의 숫자의 모든 남자는 이만 삼천명입니다. 그들은 차지할 기업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대의 총수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시내 광야에서 계수 되었던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마무리 됩니다(63-65).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하나님의 군대로서 이스라엘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땅을 정복하는 준비로서 땅을 나누도록 명령을받습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정복을 하고 나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땅을 먼저 나누고 나서 정복하러 가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땅을 정복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 땅을 주실 것을 신뢰하며 승리를 얻는 믿음의 전쟁임을 암시합니다. 그것을 여호수아와 갈렙만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언급함으로 더욱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신뢰한 자만이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주님의 군대로서 이 세상과 사탄과 싸울 때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나아가야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죄를 정복합시다. 우리 삶 속에서 믿음으로 정복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살펴봅시다. 아직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의 마음과 삶이 있는지 살펴보고 믿음으로 그곳을 정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싯딤에 머물면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데 함께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바알을 숭배하는것은 육체적인 관계도 포함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알브올(브올 지역에서 섬기던 바알)에감당한 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백성이 지도자급에 있는 자들입니다(1-5).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큰 죄악이기 때문에그 벌 또한 아주 강력합니다. 바알브올에 가담한 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듣고 회막 문에서 온 백성이 울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는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그것을 보고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창을 들고 그 남자를 따라가 남자와 함께 온 여인을 죽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전염병이 멈추게 됩니다(6-9). 어떻게 보면 잔인해 보이고 인정머리 없는 것 같이 보이는 비느하스의 행동에 하나님은 긍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그 남자와 여자를 죽임으로써 온 회중이 멸망할 뻔 한 것을 구해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비느하스와 그 자손들은 대대로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민수기 저자는 죽임을 당한 남자와 여자의 신상을 말해 줍니다. 놀랍게도 그 남자는 시므온 조상의 가문 중 한 지도자 입니다. 죽임 당한 여자도 미디안 백성의 높은 사람의 딸이었습니다(12-15).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로 이끌었던 미디안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독특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다른 민족에게 먼저 화평을 전하고 그 화평을 거부하고 먼저 공격해 올 때 그들을 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을 먼저 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압인들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빠지게 만든 주범이라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16-18). 그들은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알브올에 참여하여 죽임 당한 자들이 평민이 아니라 지도자급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영적인 간음과육적인 간음에 빠지게 만드는데 앞장 서는 사람들이 백성의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영적인 전투에서 가장 앞자리에 있는 자들이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진것입니다.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는 그런 영적인 위기를 간파하고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온 자를 창으로 죽였습니다. 죽임 당한 자가 백성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확신을 필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그 일을 했습니다. 이런 열심이 백성을 멸망으로 가는 길에서 건져냈습니다. 올바른 하나님의 열심은 공동체를 살립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은 교회를 위기에 빠뜨립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올바른 열심은 말씀에 근거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은 어떤 말씀에 기반하고 있습니까? 어떤 열심으로 하나님과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교회를 섬겨야 할까요? 먼저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말씀에 기반한 거룩한 열심으로 공동체를 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발락은 발람을 다른 높은 곳에 세워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발람은 주술이 아니라 온전한 정신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합니다.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복주시는 것을 친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그 백성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 받게 될 것임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1-9). 발락은 역시 화를 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 번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완전히 변해 발람에게 위협을 하고 심지어 발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발람은 도망 가지 않고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발락의 백성에게 어떻게 행할 것인지 예언합니다. 그 예언의 핵심은 먼 훗날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고 한 규(통치자의 지팡이)가 이스라엘에서 나와서 모압과 셋의 자손들(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살아가는 모든 백성을 통칭함)을 다 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별’은 자주 지도자나 통치자를 상징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거부했던 에돔 족속은 이스라엘의 유산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남은 가나안 민족들도 그 통치자에 의해서 정복될 것이라고 합니다. 앗수르가 용맹을 떨칠 것이지만 다른나라에 의해서 멸망할 것임을 예언합니다. 발람과 발락은 이제 헤어져서 각자 갈 길을 갑니다(10-25).
발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하신 말씀과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과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끝내 발람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을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의해서 반드시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약속하실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약속의 땅으로 행진하는 이스라엘은 끝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한 선하신 계획은 원수의 어떤 방해도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이 예언은 ‘한 별, ‘한 규’로서 가깝게는 다윗 왕이 실제로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정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원수 사단의 나라를 쳐부수신 예수님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원수인 사단과 죄와 사망을 십자가로 정복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생명과 기쁨과 함께하심, 임마누엘을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과 계획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약속 때문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은 진행중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고 기억하고 현실 속에서 기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발람은 발락에게 일곱 제단을 쌓고 수송아지와 숫양 각각 일곱 마리를 준비하고 그 곁에 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발람을 만나 주시면 그것을 말하겠다고 합니다(1-3).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발락에게 돌아가서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 말을 전하라고 합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않은 자를 저주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꾸짖지 않은 백성을 꾸짖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 이스라엘이 이렇게 많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말합니다(4-10). 당연히 발락은 발람에게 화를 냅니다. 원수인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발람을 데리고 왔는데, 오히려 축복했기 때문입니다(11-12). 이제 발락은 발람을 이스라엘 끝에 있는 백성들만 보이는 곳으로 데려가 그 끝에 있는 자들이라도 저주하라고 합니다(13-14). 발람은 또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일곱 수송아지와 숫양을 준비하고 발락에게 그 곁에 머물러 있으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발락의 곁에는 모압의 고관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발람에게 말씀하십니다(13-17). 발람은 발락에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거짓말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후회가 없으시다고 하며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실행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한 축복이 말 뿐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확증을 주십니다(18-20).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반역의 보지 않으신다는 말은 용서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제나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강력한 힘이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주술로도 이스라엘 백성을 해할 수 없고 오히려 모든 주술도 파괴할 만큼의 강력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21-25). 자신의 적군인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축복하는 발람에게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발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할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에 마지막으로 발락은 발람을 브올 산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를 요청합니다(26-30).
오늘 말씀에서 발람은 이스라엘을 축복합니다. 그것은 발락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발락은 발람을 원망하지만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말함으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기뻐하심을 증거합니다. 이스라엘은 강력한 군대입니다. 그렇게 강력한 군대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어떠함이나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 입니다. 이스라엘은 반역과 허물을 가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용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뜨리지 않는 한 어떤 저주도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습니다.
만찬가지로 새 언약 안에 있는 새 이스라엘인 교회에게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저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회에게 좋은 일만 생긴다거나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 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축복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무찔렀다는 소식이 가나안 땅에 퍼졌습니다. 이에 모압의 왕 발락은 미디안과 연합하여 마술의 힘을 빌려 자신 보다 많고 강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여 전투에서 승리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당시 아주 유명했던 발람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발람이 저주를 하면 저주를 받고 복을 빌면 복을 받게 된다는 소문이 약 650km 떨어진 모압에도 날 정도였습니다. 미디안의 높은 사람들과 모압의 높은 사람들은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발람에게 갑니다. 미디안의 장로들과 모압의 장로들의 부탁은 그저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내려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쉽게 무찌를 수 있도록하는 것입니다. 그 댓가로 엄청난 부를 약속합니다. 발람은 처음에 그 청을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그들에게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후 두번째로 더 높은 사람들이 와서 부탁할 때는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더하시길 바랍니다(19). 하나님은 발람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발람의 물질로 가득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곧 바로 그 다음 날 아침에 발람의 나귀 앞에 천사를 세우시고, 발람을 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나귀는 그것을 보고 가지 못했지만, 발람은 그 천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발람은 평소와 달리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발람의 발이 담에 짓눌리자 화를 내며 나귀를 지팡이로 때렸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나귀가 말을 할 수 있도록 하셨고, 나귀는 본래 그런 습관이 없지만 그렇게 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주님의 천사가 발람을 치려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21-30). 나귀와 대조적으로 발람은 영적인 눈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재물에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발람의 길은 사악했습니다(32). 나귀가 오히려 발람보다 나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발람에게 그 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대신에 발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만 해야 했습니다. 발락은 발람을 극진히 대접하였고, 다음날 이스라엘 전체가 보이는 산 위의 바알을 제사하는 곳에 섰습니다(38-41).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발람은 독특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참 선지자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발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사실 저주와 복은 발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 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이었습니다(창12:3).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을 통해서 오히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말한 복을 받을 자들임을 증거할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약속 때문에 복을 받을 자들입니다. 정작 발람은 이 백성도 아니고 이 복의 대상도 아닙니다. 발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발람은 그 복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지만, 복음에 자신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럴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노력 하지만 정작 교회가 다른 것에 마음이 빼앗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한 것들(복음)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결국 발람과 같은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며 자신 또한 그 복음과 말씀의 대상임을 분명히 믿고 의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다른 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우리가 전하고, 알고 있는 복음과 말씀의 대상이 바로 나 자신임을 기억합시다. 말씀에 나타난 복음과 약속과 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것임을 믿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광야의 행진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 아랏 왕이 이스라엘을 쳐서 몇 사람을 사로 잡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넘겨주신다면 그들을 멸하겠다고 마음을 모아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하나님은 그 백성을 이스라엘 손에 넘겨 주었습니다(1-3).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백성들은 또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하며 애굽을 그리워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만나에 불평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많은 백성들이 죽게 됩니다. 본래 광야에는 뱀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동안 뱀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그 손을 거두셨고 불뱀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입니다. 이에 백성들은 자신들이 범죄하였음을 모세에게 말하고모세는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자는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그렇게 하였고, 정말로 그것을 본 자들은 다 살았습니다(4-9). 그 후에 광야의 행진은 순탄하게 진행이 됩니다(10-13).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며 만나는 다른 민족들에게 먼저 평화를 제안합니다. 하지만 가나안 민족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공격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을 무찌릅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불평하기 전에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물을 공급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모리 왕 시혼을 무찌르고, 견고한 성 헤스본도 정복합니다. 또 야셀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도 무찌릅니다. 높은 산 위에 있는 바산의 왕 옥도 무찌릅니다(14-35). 바산을 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땅을 넘겨 주시겠다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놋 뱀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승리하는 법을 배우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놋 뱀을 달아 그것을 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 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오늘 말씀을 들려주시며 당신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심으로 죽어가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요3:14-15). 놋 뱀을 쳐다 본 사람들이 다 살아난 것 같이,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시적이지만 승리를 가져다 준 것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승천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누리는 비결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복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날마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미리암의 죽음을 언급한 후에 백성들의 불만을 다시 기록합니다. 백성들은 물이 없는 것 때문에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위에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바위를 두 번 쳤습니다. 이렇게 바위를 두 번 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본문은 구체적으로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말씀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백성의 불만에 화가 났고, 그 바위를 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쨌든 그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며 하나님의 거룩을 가로막는 행위였습니다(12).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직후에 모세와 아론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벌이 너무 가혹해 보입니다. 아론과 모세가 결국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1-13). 하나님과 가까이하며 더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지도자로서 더 큰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백성을 인도합니다. 처음에 백성들은 에돔 땅을 평화롭게 지나가려고 하지만 거부당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돌아서 호르 산에 도착합니다(14-21).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의 불순종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시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용하셔서 백성을 광야에서 이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모세도 방금 들은 슬픈 말씀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끝까지 감당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데까지 모세와 아론은 그들의 직무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호르산 위에서 엘르아살에게 아론의 대제사장을 옷을 입히라고 합니다.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대로 순종했고, 아론도 호르산에서 죽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직무는 이제 엘르아살이 맡을 것입니다. 백성은 아론을 위해서 30일 동안 애곡합니다.
완벽해 보이던 모세와 아론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와 아론에게 맡긴 바 직무를 다하도록 했습니다.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지도자에게 엄격한 순종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통하여 여전히 대제사장 직무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은 죽고 또 실수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을 돌보십니다. 인간중보자는 항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중보자는 완전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참된 인간이시고 참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영원한 중보자로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영원히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교회 지도자의 실수와 잘못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저기서 듣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을 부르고 계시며 돌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여전히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인간 지도자의 실패와 부족함을 보고 실망하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바라보며 살아갑시다. 교회의 지도자와 직분자들은 하나님께서 엄중한 잣대로 그들을 보신다는 기억하고 더욱 더 온전히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잊지 않고 전심으로 섬기는 직분자와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죽은 시체를 만진 자들에 대한 부정을 어떻게 깨끗하게 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본문 앞 부분(14-17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죽었습니다. 또 뒤에서는 미리암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 앞 뒤로 죽음이라는 주제가 감싸고 있습니다. 죽음은 정상적인 사태가 아니라 부정한 사태입니다. 때문에 시체를 만지는 자는 부정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 부정한 상태를 정하게 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서 나아 올 수 있는 지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제사장이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아직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붉은 암송아지를 데리고 진영 밖으로 나가서 그 소를 잡고 피를 찍어 회막 방향을 향해 일곱 번 피를 뿌린 후 그 송아지를 불사릅니다. 동시에 제사장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송아지를 사르고 있는 불에 던집니다. 그런 다음 다 타고 남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부정을 씻는 물을 위해서 간직합니다(1-9). 이 일에 연관된 모든 사람은 부정해졌기 때문에 정결의식을 행하여야 합니다. 사람의 시체를 만진자는 일주일 동안 부정해 지는데, 셋째 날과 일곱 째 날에 이 부정을 씻는 물을 자신에게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차고 나면 정결해 집니다. 이 물을 뿌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일주일을 채워도 여전히 부정합니다(13).
또 어떤 사람이 자신이 살고 있는 텐트 안에서 죽게 되면 그곳은 부정한 곳이 되기 때문에 뚜껑을 덮어 놓지 않은 모든 그릇이 부정함에 영향을 받아 부정하게 됩니다. 그 때 정결한 사람이 깨끗하게 하는 물을 우슬초에 찍어서 시체를 만진 사람과 부정하게 된 그릇에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뿌림으로 정결하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 물을 뿌린 그 사람은 자신의 옷을 빨고 몸을 씻고 그날이 지나 저녁이 되면(이스라엘 하루의 시작은 저녁이므로) 정결하게 되어 정상적인 상태가 되어 일상 생활이 가능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만약 물을 뿌리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끊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영구적인 이스라엘의 규칙이 될 것입니다(16-20). 이는 죽음이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정결하게 하는 규례를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제사장과 레위인의 위치와 그들의 사역의 필수성과 독특성을 재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수많은 시체를 만진 자들이 다시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되려면 제사장의 수고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정결의식을 행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죽음은 계속 이스라엘 삶 속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죽음은 부정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결의식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부정함의 원천인 죄와 죽음을 정복하신 분으로 정결의식을 뛰어 넘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보혈을 믿는 자는 거룩하게 됩니다. 여전히 죽음이 우리 앞에 있지만, 그것은 치명적이지 않습니다. 시체를 만진 자들이 정결하게 물과 정결의식을 통해서 다시 정결하게 될 수 있듯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의 구원사역 때문에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가볍게 생각해서도 안되지만, 죽음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겠지만, 죽음을 넘어 우리에게 영생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이 땅에서 죄를 그치고 거룩하게 되어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관문과도 같습니다. 우리 가까이 있는 죽음을 기억하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정결한 삶을 살아 갑시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아멘.
두려움에 휩싸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아론의 자손들과 레위인들을 세워 백성과 성소에 대한 죄를 감당하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제사장들을 통해서 그들의 수고와 봉사로 죄를 감당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백성들의 죄가 자손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1-5). 제사장들의 수고와 레위인들의 보조로 백성들은 담대하게 그들의 제물을 가지고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공포에 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위로는 그들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운 제사장(중보자)의 수고를 통해서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은 모세를 통해서 아론에게 말씀하시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직접 말씀하심으로 아론과 그 자손들의 제사장직을 강조하고 계십니다(1).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제사장들이 마땅히 받을 수 있는 거제물과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 곧 십일조에 관해 말씀합니다. 또 거제물과 요제물은 대제사장의 몫이 됩니다(11). 또 제일 좋은 곡식과 기름과 포도주를 하나님께 바침으로 그것이 아론의 몫이 됩니다. 사람의 첫 태생과 짐승의 첫태생이 모두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 아론의 몫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론은 기업과 분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기업이 되셔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실제로는 아론의 몫이 됩니다. 또 레위인들도 몫과 분깃이 없는데, 이스라엘이 바치는 십일조가 그들의 몫이 됩니다(21-24). 뿐만 아니라 레위인들도 받은 십일조 중에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그것은 역시 아론의 몫이 됩니다. 십일조 중의 십일조는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아론의 몫이 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회막 봉사에 대한 제사장들의 보수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월급으로 여기지 않고, 아주 존귀한 것, 거룩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25-3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질서를 세우고 그들의 죄를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감당할 수 있도록 합니다. 제사장을 통해서, 그리고 레위인들의 도움으로 제사에 대한 질서를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를 당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제사장들에게 선물이고,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우리의 선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주님과 회복될 수 있도록 직분자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그들의 몫이 되어 주셔서 선물들이 지속적으로 그 백성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선물이 계속해서 그들 가운데 있도록 십일조를 통해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곧 그들 스스로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헌금과 십일조(헌금)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됩니다. 회중의 헌신을 통해서 목회자의 생활이 보장되고, 목회자는 사례를 거룩하고 아름답게 여기며 그의 사역을 통해서 회중이 영적으로 풍성해 지도록 합니다. 또 교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부분에 지출을 합니다. 때문에 성도의 의무와 목회자의 의무는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도와 직분자들이 함께 의무를 충실하게 감당하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예수님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아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의 직분에 불만을 가졌을 때 하나님은 백성을 전염병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 각 대표를 뽑아 그들의 지팡이 하나씩 가지고 그 위에 이름을 쓰도록 합니다. 레위 지파를 대표해서는 아론의 이름을 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열 두 지팡이를 하나님께서 백성을 만나는 장소인 회막(장막) 안에 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 백성이 원망하는 소리를 그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1-6). 모세는 그 말을 전하였고, 백성들을 각 지파 별로 대표를 뽑아 각 지파별로 지팡이 가지고 와서 그 위에 이름을 쓰고 회막에 두었습니다. 다음 날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다른 지팡이는 그대로 있는데, 레위 지파를 대표하여 이름을 썼던 아론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심지어 살구(아몬드)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살구’ 열매는 경성하고 깨어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레위 지파가 바로 성전에서 늘 깨어 하나님 앞에서 직무를 행하는 자들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모든 지팡이를 가지고 나가 백성들에게 보여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다시 성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안에 넣어 보관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대대로 제사장에게 반역한 자들, 곧 하나님께 반역한 자들에 대한 표입니다. 이로써 온 백성들 자자손손이 다시는 하나님께 원망하여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10).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그대로 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그들이 함부로 성소에 나아갈 때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아론과 그의 후손들을 세우셨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12-13).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지팡이를 통해서 당신께서 아론과 그 자손들을 거룩하게 세우셨고, 독특한 지위와 책임을 맡기셨다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또 그것을 지속적으로 잊지 않도록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보관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질서를 깨뜨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도전인지 이스라엘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직분자로서 그분을 거부할 때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을 받습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교회 안에서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때로 이 질서가 우리가 보기에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불평등한 것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보다 지혜로운 척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지혜로운 분이시고, 우리를 우리 자신 보다 사랑하시는 분이시기에 바른 질서를 통해서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런 분이 교회를 올바른 질서를 통해서 다스립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40)”는 바울의 교훈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또 교회의 직분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도들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섬김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직분자들이 늘 깨어 하나님 앞에서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질서를 잘 유지하고 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교회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백성 중에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이 여론을 형성하여 무리를 지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합니다. 대적하던 무리 중 레위 지파 고핫의 손자의 고라의 불만은 레위 족속으로서 아론의 자손들만 제사장이 되고 자신들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10). 그들이 보기에 같은 레위 족속으로서 자신들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회막을 섬기는 것이 초라하고 작아 보였고, 제사장의 일은 크게 보였습니다. 르우벤 지파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의 불만은 모세의 리더십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모세가 혼자 모든 결정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을 불렀을 때에도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기업도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졌습니다(12-14).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못하는 것이 그들의 불신앙이 아니라 모세의 리더십의 부족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을 주시지 않는 것은 열 정탐꾼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원망한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무죄함을 하나님께 말씀드린 후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의 말을 듣고 불만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향로에 향을 피우고 내일 온 회중에게 나아오라고 합니다. 다음 날에 고라가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려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회중에게 벌을 내리려고 하십니다. 하지만 모세와 아론은 특정한 사람이 범죄한 것으로 모든 회중을 벌하지 말라고 중보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사방에서 떠나라고 합니다(20-24). 모세가 다단과 아비람에게로 갔을 때 이스라엘 장로들이 함께 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장막을 떠나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멸시했다면 땅이 갈라져서 그들이 산채로 땅에 삼켜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마치자마자 땅이 갈라져 그 가족들과 재산을 삼켰습니다. 또 함께 반역을 꾀했던 250명의 리더들도 들고 있던 향로에서 불이 나와 죽었습니다(25-35). 그들을 사른 향로는 거룩하게 되었으므로 모아서 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것은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닥치게 되는 어마어마한 벌이 내린다는 것의 하나의 표식이 될 것입니다. 아론의 자손이 아닌 다른 사람은 여호와 앞에 분향하러 가까이 나아가서는 안되고 고라와 그 무리와 같이반역을 꾀할 때 무시무시한 결과가 닥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가 됩니다(36-40).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하고 불만을 가지는 것이 무서운 일임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오히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백성을 죽였다며 원망을 합니다(41-42). 결국 하나님은 전염병으로 백성을 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가져다가 백성 가운데 서도록 하여 속죄하므로 전염병은 멈추게 됩니다. 백성의불만에도불구하고모세와아론은중보자와대제사장으로서그들의직무를행하여백성을지킵니다(43-50).
신약 성경은 모든 성도가 제사장들이라고 합니다(벧전 2:9). 그러나 모두가 교회 안에서 직분자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설교할 수 있고 장로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도록 하는 목사와 성도들을 돌보도록 장로를 세우셨습니다. 또 여러 교회의 행정적인 일을 위해서 집사를 회중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직분자로서 교회에 직분자를 선물로 주셨습니다(엡4:7-13). 이런 직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섬길 때 그리스도의 몸은 세워지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직분자들을 통해서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또 직분자는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겸손하고 성실하게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직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직분자에 대한 경멸은 결국 회중에 대한 진노로 돌아옵니다. 그만큼 직분을 받은 사람은 거룩한 부담을 가지고 섬겨야 하고 회중은 직분자를 존경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천으로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풍성한 분분량에까지 자라가기를 원합니다. 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천으로 우리 교회에 반듯하게 세워져 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백성들이 모세를 향한 불평을 다루는 장들 사이(13장-18장)에 끼여 있습니다. 이 장은 레위기처럼 제사에 관한 법을 말해 줌을 전체적으로 흐름을 끊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이렇게 끊어지는 맥락에 배치한 것도 모세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자신을 비방했던 백성들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라고 하며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록함으로, 그들의 불평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자손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1-2). 징계를 하셨지만, 징계가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들을 징계를 통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15장에서 제사를 언급할 때는 속죄제가 아니라 자원제, 곧 감사제와 찬양제를 먼저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속에 땅에 들어갔을 때에는 지금의 어른들의 모습과 달리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3-22). 그 후에 속죄제에 언급합니다. 하지만 속죄제도 부지중에 지은 죄와 고의로 지은 죄에 대해서 다르게 취급합니다. 부지 중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속죄제를 통해서 대속하면 사함을 받게 됩니다(28). 하지만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여호와를 비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30-31). 그 한 예로 안식일에 나무를 한 사람을 제시해 줍니다. 안식일은 온전히 일을 쉬어야 하지만 나무를 하러 간 사람은 회중이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이라고 명령하십니다(32-36).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기억하고 지키도록 이스라엘 사람의 의복 귀에 술(여러 가닥의 장식 실)을 달아 거룩한 백성임 인식하고 계명을 지키고 살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37-41). 이것은 계명을 기억하고 지키기 위해 일상 속에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징계를 하시지만 긍휼을 베푸시어 광야 생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 갈 것이고, 그곳에서 어떻게 감사하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말씀해 주십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과 풍성한 먹을 거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고의로 어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또 계명을 기억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죄에서 구원을 의미하기도 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구원을 얻은 오늘날 교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과 날마다 채워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고의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물론 고의로 죄를 지었을 때에 죽어 마땅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의적인 죄와 부지중에 지은 죄의 형벌을 모두 받으셔서 죽지 않지만 죽을 만큼 괴로워하고 죄를 미워하며 회개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 계명을 힘써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구원은 한 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이후의 새로운 삶을 살아내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구원 받은 후에 죄로 넘어지고 쓰러져도 우리가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들어왔고 완성된 천국에 갈 것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땅에서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죄에 넘어지더라도 예수님 덕분에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함께 구원받은 백성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온 회중은 너무나 강해 보이는 가나안 땅 사람들과 강한 성읍을 이길 수 없다는 다수파의 의견에 동조합니다. 나아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아닌 다른 지휘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까지 말합니다(1-4).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구원 받기 이전의삶, 옛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다시 사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반역과 죄악입니다. 그러자 모세와 아론은 온 회중에 질타와 불평을 들음으로 엎드려 있고, 이 모습을 본 여호수아와 갈렙은 참담하여 그들의 옷을 찢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한번 정탐한 땅은 아름다운 땅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것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이 그들의 힘과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신뢰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백성을 설득하고자 했습니다(5-9). 그러나 온 회중은 그 말을 듣고 돌로 그들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이 회막에서 모든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게 전염병을 내려 그들을 멸하고 새로운 백성을 모세가 이룰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범죄한 자들의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그렇게 행하시지 않기를 요청합니다.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하며 백성들을 중보합니다 (13-19).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를 듣고 그들을 용서하시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따른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들어갈 것입니다(20-24).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두려워했던 자들을 피해 광야길로 들어가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한 이스라엘 백성 중 20세 이상의 계수된 자들은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대신에 그들의 자손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싫어하고 원망했던 자들은모두 광야에서 40년 간(땅을 정탐한 40일을 년 수로 바꾸심)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정탐한 자들 중 다수파는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었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생존하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때 그들은 통곡하며 골짜기로 올라가 싸우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하나님께서 원하시던 것이 아니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셨지만 그들은 고집대로 행하여 결국 패배하고 맙니다(26-45).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멸하지 않으시고 모세의 중보로 용서하시지만, 그들의 불신앙에 대한 벌은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실 땅에 대해 평가절하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해야 하는 징계를 받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기 보다는 자신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광야 생활을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전쟁을 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조차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광야생활은 고달프겠지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사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는 전쟁은 반드시 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렵고 고달프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우리 앞에 펼쳐진 어떤 강한 적과 어려움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바란 광야 진을 치고 있고 각 지파 중에서 한 사람씩 뽑아서 보냅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 이름들을 다 열거합니다(1-16). 모세는 어떻게 그 땅을 정탐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중점적으로 보고 와야하는 지 알려 줍니다. 그 땅의 거민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얼마나 많은 지, 그리고 그 땅은 좋은지 나쁜지, 또 지형은 어떤 지, 또 토양은 비옥한지 메마른지 등을 정탐하고 오라고 합니다. 또 그 때가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기 때문에 그 땅의 과일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17-20). 이에 열 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 두 정탐꾼들은 그 땅을 정탐하러 갔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정탐 루트를 상세히 기록합니다(21-24). 이로써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거합니다. 정탐꾼들은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보고 합니다. 보고의 내용은 그 당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데, 문제는 그 땅의 백성들이 매우 강력하고, 그 성읍을 견고하여 심히 크다고 보고합니다. 특히 노아 때부터 악명 높았던 거인 족속인 네피림의 후손들이 그곳에 살고 있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아멜렉 민족도 그 땅 남쪽에 거하고 있다고 보고합니다(25-29). 이 말을 듣고 웅성웅성하던 백성들을 진정시키며 갈렙이 올라가서 그 땅을 치자고 말합니다. 그러면 능히 이길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함께 정탐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보다 강하기 때문에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불평은 땅을 악평하며 객관적인 사실도 왜곡시킵니다. 그리고 결코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32-33).다수파는 현실 앞에서 객관적인 상황도 왜곡시키며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불평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강해 보이는 적들에 실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소수파인 갈렙과 여호수아는 상황에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신뢰하며 그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땅을 보고 사람들을 보고 오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얼마나 강한 지, 그 땅이 얼마나 좋은 지 미리 보고, 그들의 힘으로 그들을 이길수 없다는 것을 먼저 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싸울 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 이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전투하는 삶으로 그 앞에 닥칠 어려움과 현실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삶 속에서 닥치는어려움은 실제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실제로 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믿음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상황을 조정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상황보다 크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우리의 생각보다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상황에서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드는 굳은 신뢰입니다.
녹록치 않은 우리의 삶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어려움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않는 우리가 됩시다. 그리하여 상황에 함몰되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 아버지를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와 격려와 공급하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1장에서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했다면, 12장에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난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미리암이 주도를 하고 아론이 함께 가담합니다. 비난의 핵심은 모세가 구스(에티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도 모세 만큼이나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리더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왜 구스 여인을 아내로 삼았는지 본문은 말해주지 않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 문제 삼지 않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모세를 ‘온유한 자’라고 소개하는데(3), 이것은 단지 모세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구스 여인을 취한 행동도 하나님께 의존하여 그렇게 했다는 암시입니다. 민족과 관계 없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미리암, 그리고 아론을 회막으로 부르시고 미리암과 아론을 책망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시지만 모세에게는 특별히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합니다(8). 이 말은 모세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보여줍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곧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워진 자입니다.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비난하는 미리암에게 하나님은 징계를 내리십니다. 이에 아론은 모세에게 중보를 부탁하였고,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하면서도 단순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미리암의 병이 바로 낫게 하지 않으시고, 칠일 동안 진영 밖으로 쫓겨나 머무는 부끄러움을 당한 후에 다시 들어오게 합니다(9-15). 모세를 비난한 잘못을 결코 가볍게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미리암이 돌아 온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을 떠나 바란 광야에 진을 칩니다. 이는 온 백성이 미리암이 징계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징계 받은 미리암이 다시 공동체로 들어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 공동체도 징계를 받은 자를 볼 때, 동일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또 범죄한 자가 다시 공동체 안으로 다시 들어 올 수 있도록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세우신 중보자였습니다. 때문에 모세를 비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앞 장에서 70인의 장로를 세워 모세와 같은 영이 부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세와 장로들이 똑같은 책임과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독특한 책임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의 중보자는 유일하고 독특한 것입니다. 모세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인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중보자이듯이 모세도 백성의 유일한 중보자였습니다. 모세를 비난하고 거부하는 자가 벌을 당하듯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욱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친구, 가족, 민족들의 무시와 조롱에도 참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이제는 교회에 직분자들을 세우셔서 다스리십니다. 직분자들은 성도들과 동등하지만 독특한 권위와 책임이 주어집니다. 직분자들은 독특한 권위와 책임을 무겁게 가져야 합니다. 그들을 부당하게 비난하는 것은 그들을 세우신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직분자들이 말씀을 따라서 그들의 일을 행할 때 협력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또 그들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아주 조심스럽게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미리암이 모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비난한 것과 같이 됩니다. 우리를 위해서 참된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고, 또 예수님께서 직분자들을 통해서 우리를 섬기심에 감사하며 함께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듣고 하나님은 진영의 끝에 불을 붙도록 하심으로 진노하십니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부르짖었습니다. 다행히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불이 꺼졌습니다(1-2). 이스라엘은 그 일을 기억하여 그곳 이름을 다베라라고 불렀습니다(3).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애굽 땅과 그곳에서 먹을 수 있던 것들을 그리워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만나는 너무 초라해 보였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영향을 받아 함께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애굽을 그리워하면서 각기 장막에서 울기까지 했던 것입니다(10). 하나님께서 이것에 진노했을 뿐만 아니라 모세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백성의 태도에 속이 타 들어가 심지어 자신이 맡은 직무를 벗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이 불순종의 백성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너무 버거웠습니다(11-12). 책임이 너무 무거워서 홀로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70인의 장로를 세워 모세의 일을 분담시킴으로 모세의 부담을 덜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모세와 같이 성령을 부어 주셔서 직무를 감당하도록 해주십니다(18). 또 하나님은 고기를 달라는 백성의 불평에 그들이 고기를 지겹게 먹게 해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모세는 그 말씀을 믿고,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성령에 감동이 된 사람들은 예언했습니다. 부름을 받았지만 나가지 않은 두 사람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예언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어떤 아이의 보고를 듣고 그 두 사람이 예언하는 것을 금하여 달라고 모세에게 요청했지만, 모세는 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져서 선지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순절의 성취를 내다보는것이었습니다(19-29).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그림자)로서 백성을 중보하고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도록 메추라기 떼를 진영으로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탐욕스럽게 그 고기를 먹음으로 결국하나님의 선물이 심판의 수단이 됩니다. 탐욕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와 하나님을 향한 불신을 보고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의 “기브롯 핫다아와”로 짓습니다(30-35).
고기를 요구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백성들의 버거운 요청에 모세는 직무를 포기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70 명의 장로를 세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보내심으로 이스라엘의 불평을 잠재우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탐욕스럽게 그 고기를 대함으로 스스로 재앙을 초래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또 하나님을 불신했던 것을 회개하지 않고 그저 그 고기에 정신이 팔렸던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오히려 심판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것에 어떤 자세로 나아갑니까? 주님이 주신 축복 자체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탐욕스럽게 그 축복만 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에게 주신 것 자체에만 몰두하여 탐욕을 부린다면 주님의 축복이 오히려 심판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주신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합시다. 또 우리 모두에게 주신 성령님을 의지하고 우리 안에 불평과 원망보다 감사와 찬송과 자족함으로 채워지도록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말씀에 순종하고 전파함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선지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은 나팔을 만들어 신호를 삼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신호는 회중을 소집하거나 진영의 출발을 알리는 용도입니다(1-2). 나팔을 두개 다 불 때는 회중이 회막 앞으로 모이는 신호입니다. 하나만 불 때는 천부장 된 지휘관만 모이는 신호 입니다. 또 크게 불 때에는 동쪽의 진영이 행진하고두 번째로 크게 불 때에는 남쪽 진영이 움직이는 신호입니다(3-6). 그 나팔을 부는 역할은 아론의 자손들인 제사장들이 합니다. 회중을 모으고 진영을 움직일 때 외에도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도 나팔을 크게 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그 백성을 기억하여 그 대적들에게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7-10). 이것은 일종의 약속의 표였습니다. 또 나팔을 불어야 할 때가 있는데, 초하루를 포함한 절기 때입니다. 그 나팔을 불 때 주님이 또 그 백성을 기억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둘째 달에 두 번째 유월절이 끝나자 구름이 성막에서 오르고 이스라엘 자손은 시내 광야에서 바란 광야로 처음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동할 때 앞에서 보았던 것 같이 유다 지파가 먼저 움직이고 각 지파의 지도자들의 인도에 따라서 일사 분란 하게 움직였습니다(14-28). 이것으로 본격적인 광야의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모세는 자신과 함께 하던 장인(혹은 처남)에게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머물러 있으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장인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모세는 다시 한 번 광야의 지리를 잘 아는 장인이 그 백성과 함께 있으면서 도움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산인 시내산을 떠나서 삼일 동안 광야 길을 갔습니다. 낮에는 성막 위에 구름 기둥이 올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며 그들에게 그늘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언약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는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말했고, 궤가 쉴 때에는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35-36).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 백성을 앞서 가며그 대적을 치시고, 또 이스라엘 가운데 계심을 지속적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은 나팔을 만들어 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방법입니다. 은 나팔을 불 때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시도록 기억하게 합니다. 따라서 은 나팔은 구름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을 이끄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청각적인 표입니다. 그것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들으시고 이끄신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팔 소리는 이러한 믿음을 촉구하는 표입니다.
본격적인 행진이 시작되었을 때 모세는 호밥이 길을 안내해 주길 바라지만 실제로 인도하는 것은 구름입니다. 그렇다고 호밥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말은 아닙니다. 광야 길을 잘 알고 있어서 안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지식과 지혜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본문은 강조합니다. 또한 모든 것이 앞에서 말씀 했던 것 대로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백성보다 앞서 가시며 그들과 함께 가심을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수동적으로 행동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인도하심 아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진하는 것이 광야 행진에서 핵심입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도 광야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행진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따라 계획을 짜고, 부지런히, 서로 도우며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을 따라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 한 이후에 2년 째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1). 유월절은 매년 첫째 달 14일에 지킵니다. 그 때,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고 오느라 부정하게 되어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생깁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할 지 물어 봅니다(5-8).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부득이하게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한 달 뒤에 유월절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 하십니다(9-13). 일종의 두번째 유월절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정결하기도 하고, 여행 중도 아니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백성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고의적으로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심판 하십니다. 이것은 부득이하게 첫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입니다. 이는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고 있는 타국인도 지키길 원한다면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합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앞으로 있을 본격적인 광야의 행진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공적으로 기억하고 지키며, 하나님과 광야에서 인도함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기본적인 삶의 양식입니다.
성막이 완성된 날에 구름이 성막을 덮었고, 밤에는 불 모양으로 아침까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움직이면 자기의 텐트를 걷어 구름을 따라 갔습니다. 레위 족속들은 성막을 걷어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구름이 멈추는 곳에서 그들은 진을 치고 성막을 다시 폈습니다. 그 구름이 몇 일, 몇 달, 몇년이라도 그곳에 머무르면 그 곳에 진을 치고 행진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구름을 따라 그들은 진을 쳤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서 직임을 지켰습니다(15-23).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을 앞서 가시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지키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부득이하게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마련하신 두번째 유월절에 대해서 봅니다. 그만큼 모든 백성이 유월절을 지키기 원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 번째 유월절 때문에 본 유월절을 경시할 수 있었습니다. 충분히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는데, 하지 않고 두번째 유월절을 지키려는 자들은 백성 가운데 끊어질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두 번째 유월절은 정말 부득이하게 첫번째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예배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공적으로 기억하며 반복해서 모이는 것이 예배입니다. 인터넷 예배는 정말 부득이하게 현장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인터넷 예배가 현장 예배를 대체하는 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현장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인터넷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부정하지 않고, 여행 중도 아닌데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사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계시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구름 기둥이 언제든지 떠날 때 따라서 움직이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 백성들은 더 있고 싶을 때에도 구름이 움직이면 떠나야 했습니다. 반대로 어떤 곳에서는 빨리 벗어나고 싶은데, 구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머물어 있어야 했습니다. 구름과 불 기둥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였고, 임재의 가시적인 표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가지고있고, 임재의 가시적인 표인 성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말씀이 가라고 할 때 가고, 서라고 할 때 서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고, 또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에서 명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믿음의 삶입니다. 날마다 말씀과 성례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성실하게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아론에게 어떻게 등불을 켜야 할 지 말씀하십니다. 금 등잔대는 금으로 쳐서 만든 것으로 성막 안 지성소 앞에 위치하고 있습니다(1-4).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레위인을 데려다 정결하게 하라고 합니다. 앞에서 언급된 레위 족속 중 특별한 임무로 부름을 받은 게르손, 므라리, 고핫 자손을 제외한 나머지 레위 족속들을 의미합니다. 레위인들을 회막 앞으로 나오게 하여 속죄의 물을 뿌리고,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고 옷을 빨게 합니다(7).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가져오게 하고, 속죄제물을 위해서 수송아지 한 마리를 가지고 오도록 합니다. 그 후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도 나아오게 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레위인에게 안수하도록 합니다(10).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레위인을 바치는 제물로 가지고 온 제물에 레위인이 수송아지들의 머리에 안수하도록 하여 속죄제와 번제물로 드림으로 속죄합니다. 레위인을 위해서 흔들어 드리는 제사(요제)를 통해서 그들을 구별하여 회막의 봉사를 하도록 합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은 모든 초태생들을 치셨고, 이스라엘에게는 사람의 초태생을 대신하여 레위인을 취하십니다(16-18). 첫 태생은 이후에 태어날 모든 생명의 대표입니다. 초태생을 치신 것은 사실상 모든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태생을 대신하여 레위인을 취하신 것도 모든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또한 레위인의 봉사는 모든 이스라엘의 봉사를 대표합니다. 레위인들은 아론과 그 자손들, 곧 제사장들과는 구별되면서 동시에 백성들과도 구별됩니다. 이스라엘이 마땅히 제사장을 도와야 하지만, 그 일을 레위인들이 대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합니다. 또 하나님은 레위인들의 봉사의 시기를 25세에서 50세로 정해 주시고, 50세 이후에는 쉬어 봉사를 하지 않지만, 돕는 일은 계속하도록 합니다(21-26).
레위인들은 제사장들과 달리 기름부음이나 특별한 의복을 받지 않습니다. 레위인들은 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위치하면서 제사장의 직무를 돕는 직무를 맡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안에서 봉사의 직무는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거룩한 사역에 종사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적절하게 준비가 되고 자기들의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 구별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맡은 직무는 다르고, 그 중요도도 다르지만, 동일하게 준비되고 책임을 다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직분자가 있고 여러 모양으로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비록 직분자는 회중의 선출을 위해서 세워지고 교회의 공적인 책임과 직무가 있고, 다른 봉사자들은 임명되거나 자발적으로 봉사하지만 동일하게 준비 됨과 책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또 직분자와 여러 봉사자들의 섬김으로 교회가 세워지지만 모든 성도들이 교회 공동체를 말씀으로 세우기 위해서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는 직분자와 모든 봉사자들을 감사함으로 협력하고 도웁시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기쁨으로 봉사하는 우리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성막이 완성된 날에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계수의 책임을 맡은 우두머리들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성막을 섬기는데 필요한 수레 여섯과 소 열 둘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것을 받아 각기 맡은 임무에 맞게 쓸 수 있도록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게르손 자손에게 수레 둘과 소 네 마리, 그리고 므라리 자손에게 수레 넷과 소 여덟을 주고,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않았습니다. 고핫 자손들은 반드시 성물을 어깨에 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1-8). 그 다음에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이 드린 예물은 예배에 사용될 제물과 기구들 입니다. 그들은 소제의 제물을 은 쟁반과 은 바리(그릇)에, 그리고 금 그릇에 향을 채웠습니다. 또 번제물을 위해 숫소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 일 년 어린 숫양 한 마리를, 속죄제를 위해 숫염소 한 마리, 화목제물을 위해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년 된 어린 양 다섯 마리를 한 지파 씩, 12일 동안 동일한 숫자로 드렸습니다(10-83). 앞에서 나실인의 법은 전체에 해당되는 헌신에 관해서 말씀했다면 오늘 말씀은 지도자들의 헌신을 보여주고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으로 성막이 완성되어 성별 되는 날부터 12 일 동안 풍성함과 기쁜 날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모든 지파의 우두머리가 동일한 수준으로 함께 헌신했음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헌신이 무엇을 위한 헌신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도자들 중에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모두 예배에 헌신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백성들을 계수하고, 각 지파를 대표하여 발언을 하기도 하지만, 성막이 완성된 그 기쁜 날에 그들의 헌신의 방향들이 모두 예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헌신의 방향은 예배로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교회의 직분자가 기본적으로 예배를 위한 직분이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교회 안에서 다른 봉사도 중요하지만 그 봉사도 모두 예배를 향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인 교회는 모두 예배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은사와 헌신이 예배를 향하고, 예배를 온전히 세워가는 공동체가 되도록 함께 헌신하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나실인의 규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실인은 남자와 여자 모두 할 수 있는 것으로 일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성별하여 헌신하기로 서원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술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자제하고, 서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머리를 자르는 것을 금하고, 모든 죽은 시체에 접근하는 것을 금합니다(1-8). 혹 그들이 이 세 개의 헌신에 대해서 의도하지 않게 위반 하였을 때에는 그것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치뤄야 했습니다. 그들은 일곱째 날에머리 털을 밀고 몸을 씻고, 여덟째 날에 산 비둘기나 집 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문에 와서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하나를 속죄제물로 드리고 다른 하나를 번제물로 드려서 서원 중에 시체를 만지게 된 죄를 용서 받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나실인의 서원의 기간을 정하고 일 년 된 숫양을 속건제로 드립니다. 그러면 다시 나실인의 서원이 시작되고, 시체와의 접촉한 죄를 용서 받습니다. 그 서원한 날이 다 차면 서원한 사람은 하나님께 헌물로 번제물로 일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한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립니다(13-18). 그리고 그날에 비로소 머리카락을 자릅니다. 자른 머리카락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두고 삶은 숫양의 어깨 고기와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하나와 과자 하나를 제사장에 받아 들고 흔듭니다. 또 흔든 가슴과 넓적 다리는 거룩한 것으로 제사장의 몫이 되었습니다. 20절에서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서원이 완성되었고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도 그들이 생각하기에 좋은 방식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어서 제사장의 축복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축복은 아론과 그 자손들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세 번 반복되는 것은 참으로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확실성과 그 복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축복이 나실인의 서원 뒤에 이어서 나온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하나님의 축복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실인의 서원은 남녀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릴 수 있는 헌신의 기회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누구도 자발적인 헌신에 배제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헌신하는 것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과 방식을 따라야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말씀을 따라서 헌신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나실인의 서원은 참된 나실인으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헌신함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것을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를 드심으로 보여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심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헌신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기본적인 헌신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가 중요합니다. 또 주일 예배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진행되어야 하고, 그러한 올바른 헌신으로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예배 마지막에 오늘 말씀으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헌신을 즐거워하는 하루가 됩시다. 또 오는 주일 예배도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의 예배가 되도록 사모하여 기다리고,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4절은 회막에서 부정한 사람들은 반드시 진영 밖에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5-10절은 도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반드시 갚아 주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또 이웃에게 지은 죄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 말씀합니다. 때문에 그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반드시 이웃에게 손해를 끼친 것의 20퍼센트를 더하여 갚아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부부 간의 신뢰가 깨어졌을 때 그것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서 드리는 ‘의심의 소제’를 소개합니다. 의심의 소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와 달리 향을 함께 드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남편이 아내의 외도를 확신하지만 그 증거가 없을 때 그는 아내와 함께 제사장에게 가서 의심의 소제를 드릴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 여인을 제단 앞에 세우고(16) 흙으로 빚어서 만든 그릇에 거룩한 물을 담고, 성막 바닥의 티끌을 물에 넣고, 여인에게 머리를 풀게 하고, 물이든 그릇을 들고 있게 합니다. 그리고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동침하여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를 받지 않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면 허벅지가 마르고 배가 부풀어 오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여자는 ‘아멘, 아멘’ 이라고 말함으로 맹세를 하게 합니다(17-22). 그리고 제사장이 저주의 말을 작은 종이에 써서 그 물에 넣습니다. 그런 다음 여인에게서 소제물(곡식제물)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서(제단 앞에서) 흔들고 제단 위에서 불사른 다음에 여인에게 그 물을 마시게 합니다(23-26). 이후에 만약 정말로 남편의 믿음을 져버리고 다른 남자와 동침한 일이 있다면 그 배가 부르고, 허벅지가 마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서 저줏 거리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그 여인은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임신하게 될 것입니다 (27-31).
오늘 말씀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구성하고 있는 각 단락이 서로 별 상관이 없는 것이 보입니다. 하지만 유심히 보면 세 단락 모두 공통적으로 거룩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것을 말한 후에 성막을 섬길 일꾼에 대해서 말하고, 이제 여호와 하나님을 그 가운데 모시고 살아가는 백성들이 부정한 상태에 있다면 진영 밖으로 나가 부정한 상태가 해결될 때까지 진영을 거룩하게 유지합니다. 이것은 제의적 관점에서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또 이웃과의 관계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서로 신뢰하고 죄를 멀리하고 또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그것을 갚아 줌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하는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배와 일상의 삶에서 모두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한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함이 요구되었듯, 새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거룩함이 요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일하게 제의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거룩한 분이셨습니다. 신약 성경은 온전히 거룩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자들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합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 사도는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 것을 거룩함이라고 표현합니다(벧전3:15). 또 바울 사도도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롬12:1). 주 예수를 믿는 우리는 모두 거룩하게 되었고, 거룩해 가야 합니다(성화).
오늘 하루도 우리가 예수를 주로 삼아 거룩하여 진 자들이고,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고 사는 자들로서 불신자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레위 족속(게르손, 고핫, 므라리)을 계수하라고 했습니다. 대상은 1개월 이상 된 남자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레위 족속 중에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30세부터 50세까지 남자를 계수하라고 명령하십니다(1-3). 고핫 자손은 진영이 전진할 때 아론 자손들이 먼저 들어가서 휘장을 걷어 증거궤를 덮고, 그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채를 꿰어 놓으면 그것을 어깨에 메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등잔대와 진설병을 놓은 상도 마찬가지로 먼저 아론의 자손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것들을 싸고 덮으면 채를 꿰어 두면 그것을 어깨에 메고 들고 가는 역할을 맡았습니다(4-15). 그리고 등유와 태우는 향과 소제물, 관유, 장막 전체와 성소와 모든 기구를 맡은 엘르아살의 지도를 받습니다(16).
그들은 레위인들 중에서 끊어져서는 안되는 귀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아론의 자손들 보다 먼저 들어가 덮이지 않은 것을 만지는 것은 금지 하셨습니다(17-20). 이어서 게르손 자손도 직무에 나아갈 수 있는 삼십 세부터 오십 세까지 계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게르손 자손들은 성막의 휘장들과 회막과 그 덮개과 그위 해달 가죽 덮개와 회막 휘장 문을 메어야 합니다. 또 뜰의 휘장과 성막과 제단 사방에 있는 휘장 문과 그것을 매는 줄과 그것에필요한 모든 기구를 메는 일을 아론의 자손 이다말의 감독을 받으며 수행해야 합니다(21-28). 또 므라리 자손도 계수를 해야 하는 데, 그들은 장막의 널판과 그 띠들과 기둥들과 받침들과 뜰 둘레의 기둥들, 그리고 말뚝들, 그것을 매는 줄, 그것에 필요한 모든 기구를 메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이다말이 그들이 메야 할 것을 지정해 주어야 했습니다(29-33). 이렇게 하나님이 명령했을 때, 모세와 아론은 그대로 행합니다. 고핫 자손 중 직무에 나아갈 자들은 2750명, 게르손 자손들은 2630명, 므라리 자손은 3200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십부터 오십 세까지 회막 봉사와 메는 일에 참여하여 일할 모든 자들은 8580명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명하신 대로 그들을 바르게 계수 하였습니다(46-49).
회막을 섬기는 봉사는 참으로 귀한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레위 자손들을 중심으로 고핫 자손과 므라리 자손과 게르손 자손이 각자가맡을 일을 하나님께서 정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넘어 아론의 자손들이 덮개로 덮기 전에 성소에 들어가거나 지성물을 만져서는 안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도 삼십세에서 오십 세로 정해 주셨습니다. 적어도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는 그 일을 위해 준비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에 역할과 질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만큼의 준비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서른 살에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을 만족 시키셨습니다(눅3:23). 그동안 주님은 공적인 사역을 위해서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레위인으로서 참된 성막인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메어 옮겨 주셨습니다. 요한 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장막을 치다)…”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하루도, 이번 한 주도, 우리 평생에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셔서 우리에게 의를 나눠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든 함께 하심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레위 족속을 계수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싸움에 나갈 자’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에 앞에서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회막을 섬기는 자들로서 또한 계수가 됩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의 숫자는 20세가 아니라 생후 1개월된 남자 아이를 기준으로 계수하게 됩니다. 그들은 나중에 성막에서 봉사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모세가 레위 지파의 대표격이기 때문에 아론의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옵니다. 아론은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을 낳았고 그들은 제사장들로서 구별되어 봉사했습니다. 하지만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레10장). 때문에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아론과 함께 제사장 직무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은 아론의 지휘 아래 아론을 도와 회막의 모든 기구를 지키는 직임을 수행하도록 합니다. 또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택하셔서 이스라엘 전체의 장자를 대속하게 하도록 했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모든 애굽 사람의 첫 아들이 죽었는데,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와 짐승의 첫 새끼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첫 태생(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함)이 거룩(하나님의 것)하게 되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구원 받은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예배). 그 첫 태생을 대신하여 레위 지파가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처음 난 남자들이 레위인들보다 273명이 더 많았기 때문에 그 나머지 자손을 대신하여 속전이 지불되어야 했던 것입니다(45-51). 레위 지파 중에서도 게르손 자손들은 성막 뒤에 서쪽에 진을 치고 성막과 장막과 그 덮개와 회막 문과 뜰의 휘장과 제단 사방에 있는 줄을 담당합니다. 고핫 자손들은 성막 남쪽에 진을 치고 증거궤와 상과 등잔대와 제단들과 성소에서 봉사하는데 쓰는 모든 기구들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므라리 족속은 성막 북쪽에 진을 치고 성막의 널 판과 그 띠와 그 기둥과 받침과 모든 기구와 그것에 쓰는 것과 기둥과 받침과 말뚝과 줄을 감당합니다. 또 성막 동쪽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성소의 직무를 행하고 외인이 무단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지키는 임무를 받았습니다(14-37).
하나님과 함께하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광야 생활의 핵심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막이 항상 진 가운데 위치합니다. 레위인들의 직무는 그 성막 주변에 머물며 ‘이스라엘 직무를 위하여’ 직무를 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자들이 종신토록 하나님의 성막에서 섬겨야 마땅하지만 일상의 생활을 해야 하니 그것을 레위인들이 대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백성들은 자신들을 대신해 봉사하는 레위인들을 존중하고 생계를 책임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직분자를 비롯하여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수고를 대신하는 자들이기에 마땅히 그 수고에 칭찬받고,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또 오늘 말씀은 특별히 교회 안에서의 모든 봉사는 중심인 성막을 향해 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방식으로 섬기지만 그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하고 싶고 필요한 일로 보여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하기 싫고 힘든 일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요구한다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다양한 모든 봉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함께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지파가 진을 칠 때와 행진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합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이동을 멈추고 진을 칠 때 모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모양을 보면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진을 치는데, 동쪽 해 돋는 곳에서 유다 지파의 깃발 아래로 진을 칠 지파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로 합이 십팔만 육천 사백명입니다. 이들이 가장 먼저 전쟁에서 앞서 나가는 지파입니다. 그리고 남쪽에는 르우벤 지파의 깃 발을 중심으로,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로 총 십오만 천사백오십 명입니다. 그들은 두번째로 전쟁에서 나아갑니다. 서쪽에는 에브라임 군대의 깃발을 중심으로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로 십만 팔천 백명입니다. 그들은 세번째로 전쟁에 나아갑니다. 마지막으로 북쪽에는 단 지파의 깃발을 중심으로 단, 아셀, 납달리 지파가 진을 치고 네번째로 전쟁에 나아갑니다(1-32). 역시 레위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성막 주변에 둘러서 진을 치고 섬깁니다. 백성달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전한 말씀으로 그대로 다 준행했습니다(33-34).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행진하는 것을 보면 질서정연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영의 모습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성막을 주변으로 진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진도 성막이 이동하면 그것을 따라서 갑니다(민10:11-28). 이것은 당시 왕들과 신하들이 전쟁에 나갔을 때 취하던 모습과 유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런 진영의 형태를 명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되새겨 주십니다. 또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서 성막을 중심으로, 곧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따라서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삶의 가장자리가 아닌 중심에 모시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을 우리 마음의 가운데 모시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민수기는 첫 장에서 백성의 숫자를 세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은 이 책의 이름을 ‘민수기’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도“Numbers”로 표기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은 ‘광야에서’가 책의 제목입니다. 실제로 이 모든 제목은 이 책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숫자를 세어 보라고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군대로서 행진을 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지 2년이 지났습니다. 둘째 해 둘 째 달 첫날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여 각 가문(각 지파별로)에 따라서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의 숫자를 세어 보라고 하십니다(1-2). 그리고 그 숫자를 세는 데에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에서 우두머리 한 사람씩 함께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들을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3-16). 모세와 아론은 그 지명된 사람들과 함께 백성의 숫자를 세었습니다. 그 숫자는 모두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명이었습니다(17-46). 하지만 레위 족속은 계수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막과 관련된 일의 책임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레위 족속은 성막을 둘러서 자기들의 진을 쳐야 했습니다. 백성과 하나님이 계신 성막 사이를 둘러 진을 침으로 회중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53-54).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의 숫자를 세라고 한 것은 본격적인 전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싸움에 나갈 자’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싸움의 승패는 그 숫자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지키는 것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군대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친히 중보자로 세우셨고, 레위인을 성막을 위한 봉사 지파로 부르셨고, 각 지파의 우두머리를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싸움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 안에도 일반 전투와 같이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지만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가 맡은 곳에서 하나님께 성실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그 백성들이 영적인 싸움을 싸우도록 백성들 안에서 질서를 세우십니다. 그 질서는 직분자들을 통해서 말씀(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신 것입니다(엡4:11-13). 주님의 교회는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이 세우신 질서인 직분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직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오늘날 영적인 싸움의 승패도 말씀과 질서에 순종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질서에 순종함으로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성장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레위기를 정리하면서 언약적 축복과 저주를 말한 후에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언급합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대한 맹세입니다. 제사와 서원, 혹은 기도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혹은 중간에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다면 지키되 혹 지키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줌으로써 하나님께 제사하고 서원할 때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해서는 안됨을 알려줍니다. 사람들은 종종 기쁜 마음에 대담하게 약속했다가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께 한 약속조차도 후회하고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결정한 사람이나 자식을 회막 봉사를 위해서 서원할 때입니다. 대표적으로 사무엘과 같이 부모가 그렇게 하기로 했을 때에는 정해진 지불을 성소에 기부하여 그 서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1-8). 그 금액은 연령과 성별과 형편에 따라서 달랐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도 부자와 동일하게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사람들은 짐승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 곧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됩니다. 정결한 짐승은 다른 것으로 바꿀 수는 있지만, 부정한 짐승은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고, 제사장이 그 값을 결정해야 합니다. 부정한 짐승은 희생으로 드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서원한 것을 무르려고 하면 값의 20페센트를 더한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또 집을 헌신하기로 해놓고 그것을 무를 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기업의 밭의 일부를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모세가 다음 희년을 계산하여 값을 정하고, 다음 희년까지 하나님께 구별된 땅으로 사용됩니다. 무르려면 그 값의 20퍼센트를 더해서 지불하여야 합니다. 희년에는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16-25).
인간과 짐승의 첫 태생은 하나님의 것이기 모두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첫 태생으로는 하나님께 서원할 수 없습니다. 부정한 짐승의 첫 태생은 그 짐승 가격의 20퍼센트를 더하여 지불함으로써 그것의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만약 짐승을 무를 수 없다면 팔아야 했습니다(26-27). 그리고 여호와의 성물로서 땅의 곡식이나 열매의 십 분의 일은 여호와께 드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헌정물’로 불립니다. 곡식과 열매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곡식과 열매의 정해진 값의 20퍼센트를 더하여 하나님께 드리면 그 곡식과 열매를 자기의 것으로 둘 수 있었습니다. 또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도 드려야 했는데,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는 열 번 째 마다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건강하고 좋은 소나 양이 지나갈 수도 있지만, 약한 소나 양이 열번째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이든 약한 것이든 구분하지 말고 열번째의 짐승을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28-33). 소나 양의 십일조는 거룩하기 때문에(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무를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모든 것(1장-27장)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이었습니다.
서원은 기본적으로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의 표현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감사와 헌신을 찬송과 기도와 헌금(헌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때문에 서원은 전적으로 자발적입니다. 하지만 그 서원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기 때문에 반드시 그 서원을 이루도록 해야 하고, 지키 못했을 때는 20퍼센트를 더하여 물러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함을 보여줍니다. 서원을 지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한나가 그러했고, 시편의 기자를 그러했습니다(61편 5-6절). 바울은 자신의 서원한 것을 이루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머리를 깎음으로 자신도 서원을 이행했습니다(행18:18).
그리스도 안에서 서원 제도는 더이상 구속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의 표현으로 하나님께 서원하고 헌신하며,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 그 서원을 하나님께서 이루셨을 때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드리는 것은 신앙 생활에 유익합니다. 찬송과 기도와 헌금, 헌물, 삶의 헌신과 결단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의 자발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과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와 삶의 결단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많이 표현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구약을 통틀어서 가장 감동적이면서 가장 무서운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1장-25장까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지 법과 규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법과 원칙을 충실하게 따를 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대해주시고, 반대로 그것을 배반할 때 어떻게 하실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1-13절은 이 규칙들을 성실하게 잘 지켰을 때 주실 축복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만들지 않고, 하나님을 성실하게 섬기며, 이 규칙들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철을 따라 비를 주시고, 농작물이 풍성하게 해 주시고, 땅에 평화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는 짐승도 없게 해 주시고, 원수를 쫓아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친히 돌보아 주시고, 번성하게 하고 크게 해주시고, 그들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행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교제하시고, 함께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1-13). 반면에 하나님을 말씀을 듣지 않고, 이 규칙들을 버리고 이방인들과 같이 살아갈 때 하나님은 언약을 배반한 것으로 여기고 놀라운 재앙을 내리시고, 병으로 생명이 쇠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씨 뿌린 것을 다른 나라가 쳐들어와서 거두어 갈 것이고, 대적들에게 패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해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말씀을 청종하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을 내리셔서 각종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시고 들짐승이 많아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역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더 강한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더 큰재앙을 내려 심지어 자식을 잡아 먹게 되는 극한의 상황이 되기까지 만드십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가 예루살렘을 에워싸서 성에 양식이 없어서 일어나게 되는 끔찍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제사를 거부하시고, 다른 민족에게 넘기셔서 흩어지게 만들 것이라고 합니다(14-40).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깨닫게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형벌을 기쁘게 받고 회개할 때 하나님은 다시 언약을 기억하시고 땅이 쉬게 만드신 후에 다시 그들을 회복하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41-45).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유심히 보면 복은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시고 벌은 점차적으로 강하게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폭군이 아니라 신실한 아버지이심을 보여줍니다. 형벌을 점차적으로 강하게 하시므로 백성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것입니다. 선지서들은 이 말씀을 풀어서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모든 형벌을 다 받은 후에 돌아옵니다. 결국 형벌을 통해서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벌하셨지만 결국 돌아오게 하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모든 축복과 저주가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축복을 믿는 자에게 주셨고, 우리의 모든 저주와 심판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축복과 생명이 있지만, 그분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저주와 심판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영원한 축복과 생명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저주와 심판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빛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고, 마지막 날에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계22:2).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과 축복에 감사하며, 더욱 신실한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레위기 25장은 ‘땅의 쉼(안식)’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땅의 안식년을 말씀하십니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쉬듯, 년(Year)에도 적용이 되어, 6년 동안 땅을 열심히 사용하여 농사를 짓고 열매를 거두고, 7째 해에는 땅이 쉬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안식년이 7번이 되면 희년 입니다. 따라서 희년은 50년 마다 한번 씩 옵니다. 그 해의 7월 14일 곧, 대 속죄일에는 그 해를 나팔을 불어 희년으로 선포합니다(1-9). 그 해는 땅의 안식년일 뿐만 아니라 자유를 공포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종으로 팔렸던 모든 사람들이 풀려나 자유를 찾게 되어 모두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날입니다. 그 해에는 밭에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있지만 다시 씨를 뿌려 새롭게 경작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희년에는 다른 사람에게 산 밭을 돌려주어야 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땅을 사고 팔 때 그 값을 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희년이 많이 남았으면 값이 비싸고 짧게 남았으면 가격이 쌉니다. 희년이 되면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10-19). 하나님은 안식년과 희년에 씨를 뿌리지 못하면 그 다음 해에 먹을 것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백성에게 6년째의 소출을 3년 동안 먹을 만큼 충분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지킬 때 먹고 사는 것을 책임지십니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땅을 영구적으로 사고 팔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형제가 너무 가난하여 땅을 팔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면 시간이 지난 후에 형제가 그 판 땅을 다시 사거나 당사자가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계산에서 다시 사야 했습니다. 하지만 형제도 가난하고 본인도 지속적으로 가난하여 다시 땅을 살 수 없다면, 희년에는 다시 자기의 땅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비교적 안전하고 부유한 성 안에 있는 집은 희년에도 돌려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성 밖에 있는 일반 사람들의 집은 희년에 돌려 보내야 합니다. 레위 족속의 집은 팔 수도 있고, 무를 수도 있습니다. 또 마찬가지로 희년에는 돌려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레위 족속의 들판은 팔 수 없습니다(34).
또 형제들 가운데 가난하게 되어 자신의 집과 밭을 팔고 심지어 자신의 몸도 팔아 종이 된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이 부리게 된다면, 그를 종과 같이 부리지말고, 이자나 이익을 목적으로 양식과 돈을 빌려주지 말고, 희년 때까지 존중해 주라고 하십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에서 구원한 백성이기에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때문에 다시 이스라엘 밖의 사람에게 종으로 팔아서는 안됩니다. 단, 이스라엘 안에서 머물고 있는 이방인에게는 팔수 있습니다. 물론 희년에는 이 사람과 그 가족들이 자유롭게 될 수 있었습니다(35-55).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자유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에 희년을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땅의 안식년 제도와 희년 제도는 오늘날의 상식을 넘어서는 법입니다. 희년은 경제적인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인과 달라야 함을 보여주는 제도였습니다. 희년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땅과 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아야 했습니다.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신 이유는 그들의 끊임없는 파종과 추수 행위를 중단시킴으로써 그들이 더욱 많은 것을 축적하려는 인간적인 욕망을 절제하고 자유 하며, 그들의 필요를 누가 채우시는 지 고백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희년이 당신의 오심으로 완성되셨다고 선포하셨습니다(눅4:18).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로 인한 빚을 갚아 주시고 죄의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심을 자주 말씀하셨고, 재물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4, 6: 33). 예수님의 보혈로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자들은 경제적인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참된 자유 함을 누립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경제 의식을 가지고 물질에 메이지 않고 감사와 자유 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 안에 있는 등잔대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명령하십니다. 대제사장인 아론이 그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아론은 그 불이 꺼지지 않게 항상 정리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불을 태우는 기름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공급 해야 합니다(1-4). 지속적으로 등불을 켜는 것은 빛의 근원이시고 모든 어둠을 밝히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항상 등불과 같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이어서 등잔대 맞은 편에 있는 떡상 위의 떡도 항상 두 줄로 한 줄에 여섯 씩 놓고 유향도 각 줄에 두고 안식일 마다 진열해야 했습니다(5-9). 일주일 뒤에 이 떡은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친 것을 하나님은 다시 제사장들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이 떡을 먹음으로써 열 두 지파의 모든 구성원들이 여호와와 식탁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이어서 어떤 사건을 소개해주는데, 혼혈인으로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던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다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일이 생겼습니다(10-11). 사람들은 그것이 십계명의 세번 째 조항을 어긴 것을 깨닫고 그를 가두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단호하게 모세를 통해서 그 저주를 들은 사람들을 시작으로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하십니다(14). 그 만큼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하신 분이지만, 그만큼 크고 두려운 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 사람을 쳐 죽인 사람도 반드시 죽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동일한 처분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는 것도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상해나 재산의 손해를 입혔으면 반드시 동일하게 갚아 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것이 자연스러운 당시 세계의 원리로는 이해할 수 없던 것입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회중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습니다(17-23).
예수님께서는 참된 등잔 빛과 떡으로 세상을 비추시고, 생명을 나누어 주시며, 교회를 당신의 식탁(성찬)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동일하게 갚지 말고 손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오른편 빰을 치면 반대편도 돌려 대라고 하심으로 그대로 갚지 말고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시며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며 세상 가운데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들임을 기억하고 율법을 완성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고, 동일하게 다른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백성으로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이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기고,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세상의 빛으로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대대로 지켜야 할 절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모든 절기들은 모든 백성들이 모여 지켜야 할 공동체적 거룩한 모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절기들을 ‘여호와의’ 절기라고 말씀하시며 그 절기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가장 먼저 말씀하신 절기는 안식일입니다. 6일동안은 온 힘을 다해 일을 하고, 일곱째 날은 쉬는 안식일입니다. 이 쉼은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입니다. 유월절은 이집트에서 나온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 다음 날부터 무교절이 이어집니다. 이 절기 첫날에 무교병을 먹고 일주일동안 지키게 됩니다. 오순절(칠칠절)은 유월절로부터 7주가 지나고 오십 일째 되는 날입니다. 나팔절은 제 칠월(대락 10월달 쯤)의 첫날입니다. 이 달에는 초막절( 15일)뿐만 아니라 대 속죄일(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모든 백성의 죄를 대속해 주는 절기로 칠월의 14일)도 있는 달입니다. 나팔 소리는 여호와의 거룩함을 상기시키고 심판의 신호가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나팔 불 때 심판하러 오십니다(계 11:15-16). 초막절(장막절)은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생활 했던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 절기는 일주일동안 계속되었고, 열매를 다 거두고 큰 기쁨이 충만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장막절은 유대인들의 모든 절기 가운데 가장 큰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모든 절기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기쁨으로 감사의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또 이러한 절기를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내셨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절기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신 사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매주 안식일을 통해서, 특정한 달의 특정한 기간과 날들의 절기를 지키면서 과거 하나님의 구원에 반복적으로 감사하고 현재 추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기 위한 삶의 시간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절기를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 마지막 날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광야 생활 때에 물이 부족했던 이스라엘에게 물을 주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하고 풍성한 추수에 필요한 많은 비와 물을 주시는 분, 구원의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드러내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무교절 주간의 첫날에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완성하셨습니다. 부활 후 50일이 지난 오순절에는 성령이 강림하셔서 교회는 성령의 능력과 기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날인 안식일은 구원의 기쁨과 감사를 경험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선포하고 다시 확인하고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구원의 행위를 매주 선포하고 기념할 때마다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감격은 커져갑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절기를 완성하신 것을 오늘날은 매주일 선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은 구원 받은 사람들의 삶의 시간표입니다. 일주일의 시작인 주일에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반복적으로 기억하고 감사하며 구원 받은 백성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일주일의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은 역사의 시작자와 종결자가 되시는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이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오심을 기다립니다. 이처럼 주일을 바르게 지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기쁨과 감사와 감격하며 예배의 날로 지키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도 역시 아론과 그의 자손인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우선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성물 가운데 제단에 올리지않기 때문에 가볍게 취급될 가능성이 있는 거제와 요제물을 거룩하게 취급하라고 합니다. 또 자신의 몸이 부정하면서도 성물에 가까이 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제명되는 무서운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악성피부병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부정하게 되면 병이 낫고 정결 의식을 마쳐 다시 정하게 될 때 까지 제사장도 성물의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또 짧은 기간 동안 부정하게 되었을 때에도 정결 의식을 하여 정하게 될때까지 성물을 먹지 못합니다(1-8). 제사(예배)의 어떤 순서도 가볍게 여겨질 수 없고, 제사장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제사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책임과 행동이 요구됩니다. 제사장들은 그렇게 함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했습니다(9).
제사장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성물을 먹을 수 없지만, 제사장이 산 노예들과 제사장의 집안에 들어온 후 태어난 자녀들은 제사장에게 준 성물을 먹을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집안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딸은 성물을 먹을 수 있지만 아론 족속이 아닌 족속으로 시집을 가게 되면 배제가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자식이 없이 돌아오게 되면 다시 성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제사장이 먹는 성물을 먹어서는 안되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흠이 있는 것을 드려서는 안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흠이 있는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갓 태어난 새끼들은 7일이 넘을 때까지는 어미로부터 취할 수 없고, 새끼와 어미를 함께 잡아서도 안됩니다(10-30).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설명 되어 있지 않지만 학자들은 다산을 위해 마술적 관행들에 뿌리 박고 있던 어떤 이교의 관습을 따라하지 못하도록 하셨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런 법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해서 거룩하고, 부주의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속되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시기원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제물을 받으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자가 불완전한 예물로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을 생각하지 않고 드리는 것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제물의 온전한 희생은 완전하신 예수님을 예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점도 없고 흠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동시에 베드로 사도는 교회에게도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벧후3:14). 점과 흠이없으신 예수님을 닮아 성도는 자신을 거룩한 제물로 흠과 점이 없도록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와 삶이 흠과점이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길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십니다(1). 그들은 백성들 가운데 죽은 자를 만짐으로 부정하게 되는 일을 피하여 자신의 직무에 영향을주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단, 그의 직계가족에 대해서는 장례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2-3). 또 머리털을 깎아서 대머리 같게 하지 않도록 하고 또 살을베어 슬픔을 나타내어서도 안됩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슬픔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아내도 구별되게 구해야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거룩함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제사장의 딸이 창녀가 되어 자신을 속되게 하면 아버지의 명예와 거룩함을 위협하기 때문에 그 딸을 불태워 죽여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먼저 돌로 쳐서 죽이고, 그 시신을 불태워 부정함을 정결하게 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만큼 제사장은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과 가정을 잘 돌보아야 했습니다(4-8).
관유를 부음 받아 세워진 대제사장은 가족과 친척의 죽음에 애도할 수 없었습니다. 성소에서 나가 그 성소를 더럽혀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회중 전체의 유익을 위한 일과 하나님을 위한 직무가 가족에 대한 책임을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대제사장은 반드시 처녀와 결혼을 해야 했고, 이혼 여인이나 과부와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자손도 나중에 대제사장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단에서 섬기기 위한 아론의 후손들의 육체도 온전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신체의 불완전성은 기능적인 면에서도 제사장의 직분을 온전히 수행하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불완전함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사장이 누릴 수 있는 몫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신체에 장애가 있는 제사장 자손들은 가난한 상태로 전락하거나 어쩔 수 없이 다른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 않도록 거룩한 것과 가장 거룩한 것으로 분류되는 화목제, 속죄제, 소제의 제물들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회막 안과 제단 근처에만 가지 못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지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면전에서 섬기며, 백성과 하나님을 중재할 뿐만 아니라 율법을 가르치고, 여러가지 종교적인 판단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거룩한 삶을 유지하도록 여러가지 제한이 있었습니다. 애도의 대상에 대한 제한, 아내의 기준에 대한 제한, 직무를 위한 신체적 제한 등 입니다. 신체적 온전함은 그의 사역의 온전함과 상응합니다. 장애를 가진 자들을 차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거룩함과 제한은 결국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절대적인 도덕적 거룩함을 유지하셨고, 그 거룩함과 의를 당신의 교회에 나누어 주십니다. 교회의 머리로서 예수님은 교회가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비록 그의 신부이며 제사장인 교회는 이 땅에서 온전하지 못하지만 마지막 날에 순결하고 흠 없게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거룩해 져 가는 성화의 길을 걸어갑니다. 따라서 거룩함과 구별된 삶은 목사나 사역자만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나라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에 주어진 의무입니다. 물론 목사나 사역자는 다른 성도들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적 기준과 거룩함의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목사나 사역자만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잘못된 생각입니다. 모든 성도는 세상의 제사장으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해야 하고, 더 높은 도덕적 정결함과 거룩함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세상으로 보내시고, 그곳에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임하도록 하신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신부와 제사장으로서 오늘 하루도 거룩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본문에서는 하나님은 앞에서 말씀한 것들 중에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식을 몰렉 신에게 바치는 사람이 이에 해당됩니다. 그런 사람은 친척과 이웃이 먼저 돌로 쳐야 합니다.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땅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 지방 사람들(친척과 이웃)이 그것을 보고도 돌로 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지방 사람들에게도 진노하십니다(1-4). 또 점이나 굿을 통해서 미래를 예언하는 자들을 따르는 자도 죽음에 해당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부모님을 저주하고 욕하는 자도 해당됩니다. 또한 부부 관계 외에 성적인 관계를 갖는 사람과 가까운 가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사람도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5-14). 나아가 짐승과 관계를 갖는 남여 모두도 사형에 해당합니다(15-21). 하나님은 이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땅이 그들을 토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전에 살던 민족들의 풍습이었습니다(22-23).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싫어하시고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에서 살아갈 때에 그곳의 생활을 본받지 않아야 합니다. 새로운 환경이지만, 그곳에서 살던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감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삶 속에서 드러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먹는 것과 입는 것과 성생활, 종교 생활, 가정 생활 모두 하나님의 법으로 무장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감으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해야 했습니다(26).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 가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에게 사형을 명하신 것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고, 또 과해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그대로 적용할 수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조금도 가볍게 여기면 안됩니다. 이것은 단지 문화적, 시대적 차이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오늘날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죄를 많은 순간 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죽지 않고 회개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지 문화적 차이때문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이런 죄를 짓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 죄에 머물러 있다면 거룩한 삶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또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영적으로 일시적인 죽음을 그 사람에게 교회의 권징(출교)을 통해서 주게 됩니다. 이로써 얼마나 심각한 죄를 지었는지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게 합니다. 구약에서 가족과 주민이 먼저 돌로 쳐 죽이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서로를 위한 권면과 권징으로 영적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세상사람들과 구별되게 삽시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 서로 독려하며 권면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