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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6장은 창세기 전체에서 이삭을 주인공으로 전개 되는 유일한 장입니다. 그리고 시간 상으로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입니다. 아브라함이 경험한 것과 유사하게 이삭도 흉년을 경험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애굽에 내려가기 전에 나타나셔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머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하고 복을 주고 그 땅을 이삭과 그 자손에게 주시고 그 자녀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질 것이었습니다(1-6).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의 갱신이며 재확인이었습니다. 이삭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에 머뭅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7-8). 이러한 행동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부족한 이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땅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그랄 땅의 왕이 이삭이 리브가를 포옹한 것을 보고 그를 불러 책망합니다. 아비멜렉은 그 백성들에게 명하여 아무도 이삭과 리브가를 건들지 못하게 합니다(9-11). 이는 아브라함과 이전에 맺은 약속을 지키는 그랄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이삭은 그 땅에서 백배의 소출을 내고 큰 부자가 됩니다. 이에 그곳 사람들은 시기를 하고 그곳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이삭은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머물며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파고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 대로 부릅니다. 이삭의 종들이 샘의 근원을 얻었을 때 그랄의 목자들이 와서 그것을 빼앗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싯나’는 ‘대적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과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 그랄의 목자들은 이삭을 대적했습니다. 그런 위협과 대적 속에 있는 이삭에서 나타나셔서 다시 약속을 확인시켜 주십니다(24). 이삭은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후에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과 함께 이삭에게 와서 계약을 맺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조약을 맺어서 자기들을 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삭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그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풂으로서 그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샘을 얻었기 때문에 그 샘의 이름을 브엘세바, 맹세의 우물이라고 짓습니다(26-33). 이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언약의 자손으로서이삭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34-35절은 이삭이 이야기가 마무리가 되면서 동시에 이어지는 27장과 28장의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로 넘어가는준비로서 제시 되고 있습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과 달리 가나안 땅에서 아내를 찾습니다. 이는 에서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야속을 무시하면서 사는 사람인지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삭의 모습은 아브라함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흉년을 피해 간 곳에서 자신의 거짓말로 그곳 사람을 위험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부를 얻고,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약속을 확인해 주실 때 그분을 예배하고, 그런 그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아비멜렉이 보고 와서 그와 조약을 맺습니다. 이러한 이삭의 모습은 아브라함이 저지른 동일한 실수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로서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확장하고 갱신하고 세워가심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삭의 부족한 믿음과 연약함을 넘어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삭의 순종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복을 우리의 부족함을 넘어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오늘도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시는 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6장 34절-35절에서는 에서가 헷 족속과 결혼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불신 결혼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근심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위해서 그 곳의 여자들과 결혼 시키지 않고 자신의 친족 중에서 결혼 대상을 찾은 것과 대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관계 없는 삶을 살고,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살고자 하는 삶의 양식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27장에서 펼쳐진 장자의 축복에 대한 에서와 야곱의 쟁탈전에서 왜야곱이 승리할 수 밖에 없는지 보여줍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늙어 눈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죽기전에 장자 에서에게 장자의 복을 내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리브가가 알게 되었고, 리브가는 야곱이 그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이미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창25:23). 오늘 말씀은 리브가가 그것을 의식해서 이렇게 했다고 볼 수도 있고, 단지 야곱에 대한 그녀의 편애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둘 중에 어떤 견해를 택하든 중요한 것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 이 복에 대한 쟁탈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하신 약속의 확인과 성취와 확장이었습니다(27:27-29). 야곱은 이 복을 받을 장자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서가 그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 그것을 야곱에게 팔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삭이 에서를 장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야곱이 이삭과 에서를 속인 것은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삭은 야곱에게 장자가 받아야 할 모든 복을 주었습니다.
뒤늦게 야곱이 자신의 복을 가로챈 것을 알게 된 에서는 크게 통곡하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동생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30-41). 이러한 마음은 4장에서 보았던 가인의 마음, 곧 뱀의 후손의 마음입니다. 리브가는 그러한 생각을 알게 되었고 야곱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내는 계획을 세웁니다(42-46). 만약 야곱이 죽게 된다면 이삭이 야곱에게 준 복은 산산조각 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도 이루어질 수 없게 됩니다. 리브가의 조치로 야곱은 라반의 딸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번성하게 되어 열 두 아들을 낳습니다. 이는 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복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실현하는 그릇이 됩니다.
에서의 삶의 방식은 이방인의 삶의 방식, 가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에서는 그러한 삶의 방식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장자의 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삶은 불신자와 같은 삶을 살면서 천국만 가길 원하는 오늘날 잘못된 신자들의 모습과 병행이 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그러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에 항상 관심이 있었고 그 언약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 자체를 믿고 추구할 때 그 언약 안에 포함된 언약적 복이 임하는 것이지 복 자체만 바라는 것을 바른 신앙의 자세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복에만 관심이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읽고,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한 복을 이 땅에서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삭은 야곱에게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 땅이 아닌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아내를 찾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삭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손과 땅과 복의 약속이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야곱은 부모님의 말씀대로 그의 외삼촌이 있는 밧단아람을 향하여 갑니다(1-5). 이삭이 야곱의 장자권을 비로소 인정한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이런 모습을 본 에서는 자신이 가나안 여인과 결혼한 것이 잘못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자신의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과 결혼을 합니다. 이런 에서의 모습은 어느정도 자신의 삶을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지만 해결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마엘도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과 관계를 맺으며 부모님을 만족시키고자 했던 그의 노력도 결국 헛되게 됩니다(6-9). 에서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이 아닌 자기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는 것일 뿐 하나님께 인정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해가 져서 한 곳에 돌을 베게 삼아 누워서 잡니다. 그 때 야곱은 꿈에서 계단 같이 생긴 사닥다리가 그 땅 위에 있고 하늘에까지 닿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 곧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 내리락 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계단 끝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당신께서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밝혀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누운 그 땅을 야곱과 그 자손에게 주고 야곱의 자손이 땅의 티끌과 같이 되어 서, 동, 북, 남쪽으로 뻗어 나가고 모든 족속이 야곱과 그의 자손을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과 늘 함께 하며 어디로 가든지 지켜 주시고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이루실 때까지 야곱을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0-14). 이것은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장면입니다. 장차 야곱의 후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그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이 다 통일(하나가)되게 하실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엡1:10).
야곱은 잠에서 깨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며 경외심을 가집니다.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여기고 그곳에 제단을 쌓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리고 젊지 않은 야곱(당시 약76세)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무사히 다시 그곳으로 돌아와 약속의 땅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어떤 조건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시면 자신도 신실하겠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리브가를 구하기 위해서 밧단아람으로 향하던 아브라함의 종은 낙타와 많은 것을 가지고 갔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밧단아람으로 향하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극도로 험하고 어려운 길을가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타나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야곱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 주신다면 자신도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야곱과 일종의 구두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야곱을 이미 택하셨고, 보이지 않게 그를 인도하시다가 때가 되어 그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를 직접 찾아와 주셔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찾아오셔서 함께 해 주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장소입니다. 그곳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약속을 미리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곳은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야곱이 극도의 어려움과 두려움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곳입니다. 우리가 극한의 어려움과 두려움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임마누엘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늘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벧엘의 하나님을 날마다 의지하며 많은 두려움과 어려움 속에서도 늘 함께 하시며 여전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야곱은 벧엘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목자들을 만나게 됩니다(1-3). 야곱은 그들에게 어디에서 왔는 지 물었고, 하란에서 왔다고 하자 라반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목자들은 라반의 딸 라헬이 양 떼를 몰고 온다고 알려줍니다(4-9). 야곱은 라헬을 보자마자 달려가 라헬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일 수있도록 우물에서 돌을 옮겨 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라반의 조카이며 리브가의 아들임을 알려줍니다. 라헬은 아버지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고 라반은 조카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입맞추고(반가움의 인사) 집으로 인도하여 들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라반의 집에서 일합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일한 것에 대한 값을 정하라고 했을 때 야곱은 그 삯으로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합니다. 라헬의 언니 레아는 시력이 약했고 라헬이 더 곱고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시력이 약했다는 것은 눈에 어떤 병이 있어서 외적으로 볼품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칠년 동안 삼촌 라반을 섬겼고 드디어 약속한 날이 되어 라헬과 결혼하여 합방을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라헬이 아닌 레아를 라반이 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삼촌에게 그것을 따지자 그곳 풍습에서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결혼하지 않는다며 칠일 동안 더 일하면 라헬을 주겠다고 하며 또 칠년을 더 일하라고 합니다. 속임수의 달인인 야곱이 라반에게 속은 것입니다(21-30). 야곱은 졸지에 두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당연히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레아가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함을 보시고 레아의 태를 여셔서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31). 레아를 통해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가 태어나게 됩니다(32-35).
오늘 말씀에서의 핵심 내용은 그동안 속임수로 살아왔던 야곱이 라반을 통해서 속게 되는 것과 야곱의 결혼을 통해서 야곱의 자녀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인간의 악함과 속임수, 질투와 시기 등이 섞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야곱은 속아서 레아와 결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라반의 속임수는 그 자체로 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악함조차도 야곱에게 자녀가 많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는 것으로 바꾸십니다. 또 하나님께서 야곱의 사랑을 받던 라헬이 아니라 덜 사랑 받고 외모적으로 볼품 없는 레아를 통해서 먼저 자녀를 낳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때 볼품 없고 약한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라반에게 속게 함으로 야곱을 연단 시키시고, 레아와 라헬의 경쟁심과 시기심을 통해서도 자녀가 많게 하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 심지어는 잘못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 역사하시고 당신의 약속을 지켜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악함을 연약함으로 정당화해서는 안됩니다. 일부러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역사하길 바래서도 안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연약함 마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지 연약함을 핑계삼아 악함을 정당화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의 연약한 모습에 실망할 때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성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악함과 연약함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말에나 일에나 늘 실수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약함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죄악을 참되게 회개하고, 그것을 넘어 역사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라헬과 레아의 자식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로 얼룩져 있습니다. 현대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보기 힘든 말씀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첩을 두는 것은 큰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자식을 얻기 위해 첩을 두는 일은 관용되던 시대였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을 볼 때에는 이 사건들의 초점이 후손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시기심을 통해서 자식이 많아지게 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고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약속하신 자녀를 인간적인 관점이나 아름다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랑을 덜 받던 레아의 태를 여시고, 라헬의 태를 닫으셨습니다. 하지만 라헬은 자신의 종 빌하를 첩으로 주어 합법적인 자식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빌하를 통해서 단과 납달리를 낳습니다. 이에 레아도 자신의 종 실바를 첩으로 주어 갓과 아셀을 낳게 합니다. 이후에 라헬은 레아의 아들인 르우벤이 가지고 온 합환채를 먹기 위해서 레아에게 남편을 양보합니다. 레아는 다시 잇사갈과 스불론과 딸 디나를 낳게 됩니다(20). 오랜후에 라헬의 기도는 응답되어 요셉을 낳게 됩니다. 이렇게 야곱에게 아들만 11명이 됩니다. 야곱의 가정이 비록 시기와 사랑에 대한 욕심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들의 태를 여시고 자손들을 있게 하시고 야곱의 후손들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와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들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조상들이 될 것인데,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교회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요셉을 낳은 후 야곱은 이제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현재 야곱의 상태를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야곱에게 자손을 주셨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땅에 대한 약속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 약속을 이루고자 그 땅을 떠나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라반은 야곱을 붙잡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더 일을 하도록 합니다. 야곱은 꾀를 냅니다. 이번에는 야곱이 라반을 속입니다. 양과 염소 중에 점있는 것과 아롱진 것, 다시 말하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어서 값을 제대로 못 받는 것을 자신이 가지겠다고 합니다(32-33). 그래서 라반은 문제가 있는 양과 염소를 자기 아들들에게 시켜서 야곱에게 주고 정상적인 양과 염소 떼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습니다(34-36). 그러면 얼룩무늬나 점이 있는 양이나 염소는 태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게 되기에 라반에게 훨씬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야곱은 남은 라반의 양떼를 치면서 양과 염소가 물을 마시며 짝짓기를 할 때 양이나 염소의 눈 앞에 있는 색깔에 영향을 받아 새끼에게 얼룩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는 데 필요한 부를 야곱이 얻도록 하시는 간섭이었습니다(37-43). 이렇게 많아진 부 때문에 라반과 그 아들들은 이제 야곱이 자기의 고향,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땅으로 가도록 허락해 줄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게 야곱에게 당신께서 하신 약속을 지켜 나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으로 많은 자녀들을 주셨습니다. 또 그 약속을 위해서 야곱에게 큰 부를 주시기도 합니다. 야곱의 부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에게 하신 약속을 지켜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때로는 인식하고 때로는 인식하지 못할 때도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는 데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재물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신 복을 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재물의 복을 사용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야곱에 대한 라반과 라반의 아들들의 태도가 변했습니다. 야곱이 점점 더 부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시기심을 느낀 것입니다. 그 때 그 동안 보이지 않게 야곱을 인도해 오시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제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1-3). 이에 야곱은 레아와 라헬을 불러서 이제 라반을 떠날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다시 라반이 자신을 속이고 아내와 자식들을 빼앗을까 염려하여 몰래 아내와 자녀들과 자신의 가축들을 데리고 떠납니다. 그 때 라헬은 라반의 집의 수호신인 드라빔을 야곱 몰래 훔쳐서 갑니다. 당시에 드라빔은 종종 그 집안의 재산권이나 집에서의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따라서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몰래 가지고 나온 것은 야곱이 더 이상 라반의 종이 아니라 라반의 재산의 일부를 정당하게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17-20).
삼일 후에 라반은 야곱이 도망친 사실을 발견하고 추격하여 일주일만에 야곱이 있는 곳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이미 라반이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아무런 책임도 추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라반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지만 드라빔을 가지고 간 것을 추궁합니다. 야곱은 라헬이 훔친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라반이 찾아서 그 드라빔이 나오는 사람은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라반은 라헬의 낙타 안장에 숨긴 드라빔을 찾지 못했고 오히려 야곱의 책망을 받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충실하게 했지만 라반은 그렇지 못했던 지난 세월을 말하고 이에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하나님께서 지난 밤에 라반을 책망했음을 말합니다. 이에 라반은 야곱과 언약을 맺고 그곳의 돌을 무더기로 쌓아 서로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야곱은 다른 아내를 두지 않을 맹세의 증거로 삼습니다(21-54). 만약 언약을 어기면 비록 서로 떨어져 있지만 하나님께서 둘 사이를 심판하시기로 합니다. 라반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자녀들과 손자들을 축복하고 보냅니다(55).
오늘 말씀에서 주인공은 라반, 야곱, 라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서 야곱에게 다시 약속을 기억하게 하시고, 가라고 명하시고, 라반의 위협을 제거하시는지, 또 둘 사이의 언약의 증인과 심판자가 되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 안에서 약속한 모든 복들과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오늘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또 하나님께 신실하게 응답하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닥치는 위협들도 미리 제거하시거나 그분의 철저한 통제 아래 두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도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에 순종합시다. 어려움 속에서 여전히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그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멘.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납니다. 그 수가 많아서 야곱은 그곳을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으로 ‘마하나임’이라 부릅니다(1-2). 그리고 야곱은 에서가 사는 에돔 땅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종을 보내어 형에게 동생인 야곱이 왔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야곱은 에서를 ‘주’라고 부르고 자신을 ‘종’이라고 부르며 아주 낮춥니다. 야곱은 에서가 오래 전의 일로 자신에게 보복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마침 종은 에서가 400명의 남자와 함께 오고 있다고 보고를 합니다. 야곱은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온다고 생각했습니다(3-6). 야곱은 꾀를 내어 자신과 함께 있는 가축과 사람들을 두 그룹을 나눕니다. 에서가 와서 한 편을 치면 다른 한편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함 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자신이 이렇게 많은 재물과 가족을 얻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에서의 손에서 건져 달라고 합니다. 야곱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을 가는 길에 있으며, 또 조상에게 그자손을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시겠다는 언약에 근거해서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7-12). 자신의 꾀와 방식으로 살던 야곱이 이제 한 층 더 성숙한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서에게 줄 예물을 준비하여 여전히 자신의 꾀에 의지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에서를 위한 예물을 준비하고 자신의 가축과 가족들을 다 얍복 강을 건넌 후에 야곱이 홀로 남았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치열하게 몸싸움(씨름, 레슬링)을 벌입니다. 그는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칩니다. 그래도 야곱은 그 사람을 놓지 않았습니다. 날이 새려고 하자 그 사람이 이제 그만 자기를 가게 하라고 합니다. 아마도 해가 뜨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어 야곱이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보호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이 자신에게 축복을 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묻습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뒤꿈치를 잡다’, ‘속이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제 속이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혹은 ‘하나님께서 싸운다’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알려주는 대신 축복해 줍니다. 야곱은 그제서야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 이라는 뜻의 ‘브니엘’이라고 부릅니다(24-32). 하나님께서 야곱과 씨름하시고 힘의 근원인 허벅지 관절을 치신 것은 여전히 남아 있는 그의 혈기와 자신의 꾀를 의지하고 살아가지 못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힘으로, 심지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것과 같을 정도로 힘을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허벅지 관절을 치시고, 해가 뜨기 전에 가셔서 자신을 보존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으로써 그에게 약속된 축복을 받도록 하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싸워 이기는 육체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육체의 힘을 치시고 하나님만 바라도록 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리는 이름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육체의 힘과 노력을 의지하기보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루가 됩시다. 아멘.
에서가 400명의 장정들과 함께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고 야곱은 그의 자식들을 각각의 어머니에게 맡깁니다. 두 종의 자녀, 레아와 그의 자녀, 라헬과 요셉 순으로 자녀들을 배치합니다. 에서가 공격하면 라헬과 요셉이 가장 안전할 수 있도록 취한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허리를 일곱 번 굽히며 종으로서 에서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나아갔을 때 에서는 야곱에게 나아와 안고 목을 어긋 맞추며 입맞추고 웁니다(1-4). 에서는 야곱을 반갑게 맞이 했습니다. 에서는 야곱과 함께 있는 여인과 자녀들이 누구인지 물어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을 주어 은혜로 주신 아내와 자녀들이라고 합니다(5). 이어서 종들과 레아와 라헬과 자녀들이 나아와 에서에게 절합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오면서 자신이 본 떼들이 어떤 의미인지 묻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에서에게 보낸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보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뵙는 것 같고 형도 자신을 기뻐하기 때문에 주는 선물이라고 합니다. 에서는 거절하지만 야곱이 강권하자 받습니다. 야곱이 에서에서 보낸 선물은 이후에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를 가리킬 때 쓰던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소제). 그것은 향기로운 냄새로서 화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얍복 강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야곱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복을 에서에게도 일정부분 되돌려 줍니다. 야곱의 선물을 받고 에서는 야곱에게 함께 떠나자고 하지만 야곱은 자식들과 양 떼와 소 떼가 지쳤기 때문에 당장 떠날 수 없다고 합니다. 대신에 에서가 먼저 가면 천천히 따라가겠다고 정중하게 거절합니다(12-13). 야곱이 에서의 호의를 거절한 이유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인데 에서가 있는 곳은 가나안 땅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언젠가 세일로 가서 에서를 만나겠다고 말한 후 각자의 길로 갑니다.
야곱은 숙곳(오두막)이라는 곳에 이르러 우릿간(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상당 시간 머물고 세겜으로 갑니다. 야곱은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의한 지역인 세겜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정착을 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처럼 그 장막 친 곳을 돈으로 삽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곳의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짓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부르시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신 것을 경험하고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셨고 지속적으로 만나 주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후 자신의 힘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 온 것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변화 시킬 뿐만 아니라 에서까지도 통제하셔서 야곱과 화해를 이루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우리의 관계만 회복시키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관계도 회복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잊지 않았습니다. 관계를 위해서 가야할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과 이웃과 관계를 잘 맺어 나가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관계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소홀히 않기를 바랍니다. 또 은혜의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세겜에 머무는 야곱은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을 잊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긴 했으나 그 넓은 곳이 종착지 아니라 벧엘로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야곱과 가족들은 세겜 땅에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디나는 그곳의 여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습니다. 그곳의 생활과 문화에 점점 동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아직 야곱의 가족들은 여전히 다른 신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35:2). 그런 가정에 큰 화가 생겼습니다. 디나가 세겜의 딸들을 보러 갔다가 세겜 족속의 족장 세겜이 강제로 디나를 취했습니다. 그런 후에 세겜은 디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 그녀를 아내로 삼고자 합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올때까지 침묵하고 야곱의 아들들이 돌아와서 이 말을 듣고 분노합니다(7). 그것은 디나와 이스라엘, 곧 야곱에게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세겜과 디나를 결혼을 시키고 앞으로도 서로 통혼하며 그 땅의 주민과 같이 살아갈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세겜은 디나만 아내로 주면뭐든지 다 하겠다고 합니다(8-12). 야곱과 아들들은 세겜 족속들의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으면 그렇게 하겠다고 속여서 대답합니다. 하몰과 세겜은 결혼 이야기를 숨기고 그 주민들을 속여 할례만 받으면 야곱과 야곱의 가족들의 제물이 모두 그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그 주민들이 좋게 여기고 모두 할례를 받습니다(18-24). 그들이 할례를 받고 아파서 아직 힘을 쓰지 못할 때 디나의 오빠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차고 나가서 세겜 족속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제물들을 전리품으로 취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디나를 데리고 나옵니다(25-29). 야곱은 이 말은 듣고 두 아들을 책망합니다. 오히려더 큰 어려움에 야곱과 가족들이 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그러면 그들이 디나를 창녀 취급을 하는 것이 옳으냐고 되묻고 34장은 마무리 됩니다. 야곱의 말처럼 그 아들들의 행동들로 야곱과 그 가족들은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학자들은 창세기 34장은 성경에서 가장은 지저분한 장이라고 말합니다. 강간, 복수, 비겁함, 비열함, 잔인함, 속임수, 살육이 모두 다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악한 면이 강조가 됩니다. 하지만 야곱의 부족함과 자녀들의 폭력성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켜 가십니다. 야곱의 가족들에게서 죄악 된 삶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조금씩 고쳐 가시면서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 악하여 때로 이런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까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또 우리 스스로를 볼 때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족하고 악한 나를 받아 주시고 약속을 이루어 가실까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 된 삶 속에서도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또 우리의 부족한 삶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고쳐 가시며 우리를 향한 약속을 이루십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죄악이 가득한 세상과 나 자신에 실망하지 말고 그분의 신실함을 믿고 나아갑시다. 감사함으로 결국 당신의 언약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야곱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에게 이전에 당신과 하신 약속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벧엘로 가서 그곳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합니다(1). 야곱은 즉시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가족들에게 벧엘로 올라가 자신을 환란 날에 건지신 하나님께 예배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합니다. 가족들은 야곱의 말에 순종합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이제 가나안 땅의 신들도 섬기는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기는 백성으로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 벧엘에서 뵈었던 하나님, 그리고 라반의 집에서 세겜까지 그리고 다시 벧엘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 그 때 함께 하시고 지켜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한번 앞으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겠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부르셨습니다(11).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주십니다. 그를 통해서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와 왕들이 나올 것이고 또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야곱과 그 자녀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2-13). 야곱은 그곳에 기둥을 쌓고 전제물과 기름을 부어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14-15).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셨고, 앞으로도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한편 야곱과 가족들이 이삭에게로 돌아가는 길에 라헬이 해산과 동시에 죽고 맙니다. 라헬은 아들을 낳다가 죽기 직전에 그 아들을 베노니(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르지만 야곱은 그 아들은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이라고 짓습니다. 오른손은 영예로운 지위를 의미합니다. 라헬은 베들레헴 길에 장사를 지내게 됩니다. 야곱은 라헬을 위해서 비석을 세우고 후대까지 전해 집니다. 가장 사랑받았지만 가장 먼저 야곱의 곁을 떠납니다. 야곱과 일행들은 다시 길을 떠나고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르우벤이 야곱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야곱은 그것을 들었지만 침묵합니다(22). 르우벤이 왜그렇게 했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 일을 잊지 않고 말년에 자녀들에게 복을 베풀 때 이것이 르우벤이 장자로서의 권리를 다 누리지 못하는이유로 제시합니다(49:3). 이어서 야곱의 자녀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야곱의 아들 열 둘의 이름을 정렬하면서 그가 번성한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이후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로 갑니다. 이삭은 나이 180세까지 생존하여 있다가 죽어 에서와 야곱의 손에 장사됩니다(27-29). 창세기 25장부터 35장까지는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약속을 이루시는 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그들의 의심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루셨습니다. 특히 야곱이 무사히 다시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그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이 지켜지는 것을 봅니다. 그 과정은 평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야곱의 여정 가운데 늘 평탄하고 기쁨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기쁨과 슬픔과 속임과 속음, 고난과 인내와 위로가 늘 공존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야곱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축소판처럼 보여집니다. 신앙의 여정 속에서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자신의 힘과 계략을 의지하던 야곱의 예전의 모습과 같이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야곱의 그런 부분들 마저도 하나님은 고치셔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저와 여러분들도 우여곡절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부족한 것들을 고치시며 꼭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며 예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7장에서 시작되는 야곱의 족보에 앞서 이삭의 장자로서 에서의 족보가 먼저 언급이 됩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에서가 자발적으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난다는 것입니다(6-7). 여전히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그는 가나안 족속의 여인과 결혼하여 가나안 족속들과 유대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에서는 약속의 땅을 떠나 스스로 영구적으로 거할 장소를 택하여 갑니다. 이로써 에서의 후손들은 하나 같이 그 지역의 종교와 문화에 혼합되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언약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에서의 자손들인 에돔 족속들의 관계를 보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배격하고 공격하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족보를 통해서 에서가 큰 나라와 민족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신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에서는 야곱보다 먼저 자신의 소유지를 갖고 있었고, 먼저 커지게 됩니다. 아직 야곱은 자신의 소유지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분명히 야곱보다 커져 갑니다. 하나님은 이전에 리브가의 뱃속에 두 국민, 곧 두 민족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5:23). 지금은 에서가 강성하고 커져가지만 언젠가 에서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때에 성취가 됩니다. 에돔 족속의 영광이 한 때는 더 큰 것 같지만 하나님은 리브가와 야곱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십니다. 야곱은 그 약속을 믿고 아버지 이삭이 거주하던 땅에 지속적으로 거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언약 안에 머무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에서의 족보를 통해서 오히려 야곱에게 하신 약속이 반드시 지켜질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비록 그 기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말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사실을 믿고 때로 어려움을 겪겠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 안에 머물며,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 부터 창세기의 마지막 장까지 유명한 요셉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은 단순히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의 자손들에 관한 족보라는 사실입니다(2). 요셉은 야곱이 사랑하던 라헬에게서 낳은 자식입니다. 아마도 베냐민은 그 때 너무 어리거나 태어나지 않아서 이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다른 형들보다 더 사랑하여 채색 옷을 지어서 입혔습니다. 야곱의 편애는 다른 형제들과 요셉 사이에게 불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또 요셉은 아버지에게 형들의 잘못을 고하여 형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을 형제들과 아버지에게 말하여 미움을 사게 됩니다(3-11). 그 꿈은 다름 아니라 형들과 부모가 그를 섬기게 될 것임을 뜻하는 꿈이었습니다. 어느 날 야곱은 요셉에게 들에 가서 아버지의 양떼를 치고 있는 형들에게 가서 그들이 잘 있는지 보고 오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잘 있다’는 것은 ‘샬롬(평화)’입니다. 평화를 아버지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보냄 받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에 말씀에 순종하여 형들을 보러 갑니다. 멀리서 채색옷(다양한 색깔로 수놓여진 소매와 발끝이 가려지는 긴옷. 왕족, 고관, 귀족의 고급의 의복)을 입은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형제들은 ‘꿈꾸는 자’가 온다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그를 죽이고자 합니다. 다행히 장자 르우벤이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살리기 위해서 죽이는 대신 구덩이에 넣자고 했습니다. 르우벤은 나중에 그를 건져 아버지께로 돌려 보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르우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다가 앞장서서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합니다. 결국 요셉은 은 이십에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18-28). 평화의 소식을 가지고 오기 위해 보냄을 받은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서 은 이십에 팔리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그림자를 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평화를 가지고 오시기 위해서 오셨지만 형제인 가룟 유다에 의해 은 이십에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팔리십니다. 요셉이 이후에 참된 평화를 야곱의 집에 가지고 오는 것 같이 예수님도 팔리셨지만 샬롬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뒤늦게 요셉이 팔려간 것을 알게 된 르우벤은 한탄하지만 결국 다른 형제들과 함께 요셉이 죽은 것을 위장하여 아버지에게 그렇게 알립니다. 이로써 야곱은 심한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한편 요셉은 이집트 파라오의 경호 대장 보디발의 종으로 다시 팔리게 됩니다 (29-36).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자신의 동생을 죽인 가인의 영이 야곱의 집에 머물고 있음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집안에 팔려간 요셉을 통해서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은 구약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교회에도 죄의 성향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을 초월하여 평화를 가지고 오십니다. 우리 안에도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예수님 안에서우리 죄악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성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주시고 형제 자매와 평화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죄성을 십자가 못박고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죄성을 거스르고 하나님과 이웃과 화평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앞 장에서 시작된 야곱의 족보에 관한 이야기는 요셉을 중심으로 전개가 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요셉의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고 유다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며느리 다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통해서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왕들이 나오도록 작정하셨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도 이 유다 혈통을 통해서 오십니다. 하지만 그런 영광은 유다의 인간적인 탁월함에 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임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드러나 유다의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해서는 안될 일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그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에 내려가 그곳의 여인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 엘, 오난, 셀라를 낳았습니다. 이 세 아들 중에 첫째인 엘은 아버지와 같이 가나안 여인 다말을 아내로 삼습니다. 하지만 엘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십니다(1-7). 엘이 아들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유다는 형의 가문을 세우기 위해서 형수와 결혼하여 대를 잇도록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행동이었습니다(신25:5-10). 하지만 오난은 그 자녀가 자신의 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형의 대를 이을 것이기 때문에 불의한 행동을 함으로 씨를 가질 수 없게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또한 악할 행동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난 역시 죽이십니다(9-10). 유다는 이렇게 되는 일을 보고 막내 셀라가 성인 될 때까지 다말에게 친정에서 지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셀라가 성인 되었음에도 다말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불의한 행동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는 위로를 받고 친구에게 갔을 때 그곳은 마침 다말이 살던 곳과 가까웠습니다. 이에 다말은 양털을 깎는 축제의 시기에 변장하고 유다를 유혹합니다. 유다는 다말이 매춘부인지 알고 염소 새끼를 약속하고그 약속의 증표로 도장과 끈과 (소유인의 이름이 새겨진)지팡이를 보증물로 줍니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이방신을 섬기는 방식 중의 하나가 이방인 성전에서 매춘부와 관계 갖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나안 풍습에서 이런 관계는 일반적이었습니다. 유다가 완전히 이방인의 삶의 형태로 살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일로 다말은 임신을 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유다는 다말을 불 사르라고 합니다. 다말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의 주인으로 말미암아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유다에게 보여줍니다. 유다는 자신의 위선을 인정하고 다말이 자기보다 옳다고 합니다. 다말은 죽은 남편의 가장 가까운 친족에 의해서 아이를 가질 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과부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정당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도덕적 기준으로 다말의 행동을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그녀의 행동은 옳았기 때문입니다. 다말의 행위로 인해 유다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말은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 중 베레스를 통해서 다윗 왕이 태어나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오십니다. 다말의 행동은 이스라엘의 왕과 메시야를 준비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현대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말도 안되는 행동이었지만 성경은 다말에 대해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말은 잘못된 유다의 행동을 바로 잡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도록 한 믿음의 사람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거의 끊어질 뻔한 유다 지파의 이야기를 요셉 사이에 넣음으로 앞으로 야곱의 가족 모두에게 닥칠 기근의 위험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그 위험도 하나님께서는 이방 여인 다말을 통해서 극복하도록 하신 것 같이, 요셉을 통해서 극복될 것임을 미리 보여줍니다. 또 유다의 성적으로 타락한 모습은 보디발의 아내의 성적인 유혹을 거부한 요셉과 대조가 됩니다.
유다는 불의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인 다말의 행동은 옳았습니다. 비록 가나안 여인이지만 다말은 '씨'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가나안 여인이지만 결혼으로 언약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 유다와 그 아들들보다 옳았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와 그 아들들의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다말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을 이어가십니다. 인간의 불의함에도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요셉의 형제의 불의함에도 요셉을 통해서 약속을 이어가시는 하나님을 앞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의로움 때문에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의하지만 의로우신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전적인 은혜로 얻은 구원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불의함과 죄와 연약함과 부족함을 볼 때마다, 예수님으로 의로워진 우리를 기억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다시 요셉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갔지만,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요셉의 주인인 보디발도 요셉이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집안의 모든 일을 맡깁니다(1-6절).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오는 성적인 유혹을 이겨내는 모습은 앞장의 유다의 모습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유혹을 거절당한 보디발의 아내는, 오히려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누명을 씌웁니다(7-18절). 요셉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의로운 행동으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감옥에서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셨고, 그에게 인자를 더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간수장의 눈에 들게 되었고(21절), 간수장은 요셉에게 옥중 죄수들을 맡기고, 모든 사무도 맡겼습니다. 간수장은 요셉을 매우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맡긴 일을 따로 살펴보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23절).
형통한 삶은 상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하나님은 늘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요셉은 여러 어려운 상황을 겪었지만, 상황이 요셉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을 이끄셨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일할 때에도, 유혹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고, 그것이 요셉을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는, 요셉이 “어찌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절)라며 하나님 앞에서 죄 짓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요셉의 삶을 이끄신 분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형통함이란 어려운 상황이 없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힘든 일들이 있을지라도, 그 모든 것을 선하게 풀어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 진정한 형통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됩시다. 비록 상황이 녹록지 않더라도, 그 가운데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형통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아멘.
보디발의 감옥에서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십니다. 간수장은 요셉에게 감옥에서 일을 맡겼습니다. 파라오의 경호실장이었던 보디발의 감옥에는 파라오의신변과 관련된 범죄자가 들어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 파라오의 빵을 굽는 것을 담당하는 관원과 포도주를 담당하는 관원이 함께 감옥에 잡혀 왔습니다. 보디발은 이 둘을 요셉에게 맡깁니다(1-4). 이 두 사람이 감옥에 온 지 여러 날이 지난 후 두 사람 모두 꿈을 꾸게 됩니다. 두 사람의 안색을 보고 요셉은 무슨 일인지 물어봅니다(7). 두 사람은 꿈을 꾸었지만 그것의 의미를 알 수 없다고 합니다(8). 요셉은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말해 보라고 합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받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로 온 것으로 돌립니다. 성경에서 꿈은 종종 앞으로 일어날 일이나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먼저 술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꿈을 말했습니다. 그것을 듣고 요셉은 그 꿈을 해석하여 앞으로 술 맡은 관원장에게 일어날 일을 말해 줍니다. 그는 삼일 후에 다시 그 관직을 회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잘 되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합니다(8-14). 순간적으로 요셉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 아니라 인간의 손에 맡깁니다. 떡 굽는 관원장도 자신을 꿈을 알려줍니다.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은 삼일 후에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16-19). 삼일 후에 요셉이 각자의 꿈을 해석 한 대로 되었습니다(20-22). 하지만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었습니다(23).
요셉은 오늘 말씀에서 ‘꿈꾸는 자’에서 ‘꿈을 해석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특별한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꿈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역사를 운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술 맡은 관원장에게 맡기는 실수를 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를 운행하시는 것임을 믿고 고백하지만, 순간적으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기대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사람이 그것을 잊게 하심으로 바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할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할 때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8절은 바로(파라오)가 꿈을 꾸는 것과 그것을 해석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는 최강의 나라였고 그 나라의 점술가들과 지혜로운 사람들은 최고의 학문과 지혜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의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는 세상 제국의 무능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심을 보여줍니다.
그 때 마침 술 맡은 관원장이 이전에 요셉이 자신의 꿈을 해석해 주었고, 그 해석대로 되었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만 이년 동안 꿈을 해석하는 요셉은 기억에서 잊혀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애굽에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나이가 삼십 세 였기 때문에 요셉이 그 나이가 되어 애굽에서 관직을 맡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듣고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칠년 동안 풍년을 주시고 그 다음 칠년 동안은 흉년을 주실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에 요셉은 지혜로운 사람을 세워서 지금부터 수확의 20프로를 저장해 두라고 일러줍니다(9-36).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서 당신의 계획을 보여주셨고, 요셉을 통해서 그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이런 해석에서 이전과 같이 여전히 하나님이 중심에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해석과 해결 방안을 들은 바로는 그 일을 요셉에게 맡기고 높은 지위를 주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37-45). 요셉의 이름은 이제 ‘생명’이라는 뜻의 ‘사브낫바네아’로 일컬어 집니다. 온 생명이 요셉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온 애굽을 살피고 대안을 세웁니다. 동시에 요셉의 자손이 태어나게 되는데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이둘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요셉 지파로서 두 몫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제 칠년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흉년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애굽 뿐만 아니라 온 땅이 기근이 왔습니다. 하지만 미리 대비한 애굽에는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양식을 사러 애굽으로 옵니다(46-57).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요셉의 지위가 감옥에서 총리가 되었다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요셉의 순종을 통해서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야곱의 집을 돌보실 계획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요셉을 애굽에 보내고, 고생을 하게 하셨지만 자녀를 통해서 위로하시고, 궁극적으로 야곱의 자손들이 지속적으로 번성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것에 있습니다. 요셉이 존귀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는 데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요셉의 세속적인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형제들을 기근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고난과 높아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교회를 구원하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당신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또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사역에 참여시키십니다. 왜 우리를 우리 각자의 자리로 보내셨는지 생각하고,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살아갑시다. 우리 각자의 상황과 자리에서, 우리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여러 관계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이룰 수 있을 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아멘.
바로의 꿈대로 기근은 온 이집트와 주변 지역을 덮쳤습니다. 가나안과 같은 주변 지역들이 기근 때마다 곡창 지대였던 애굽의 도움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야곱도 아들들에게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가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베냐민을 제외한 형들 10명만 보냅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동생인 베냐민도 요셉과 같이 잃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베냐민은 야곱에게 사랑했던 라헬의 유일한 아들로 여겨졌습니다(1-4).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갔을 때 형들은 그곳에서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납니다. 하지만 요셉만 그들을 알아볼 뿐 형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요셉이 17세쯤 팔리고 30세에 총리가 되고 풍년 7년이 지나 흉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2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또 요셉이 완전히 이집트 사람처럼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과 자기 사이에 통역관을 세워 이집트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요셉은 자신이 어렸을 때 꾼 꿈을 기억해 냅니다(9). 형들은 곡식의 단이 자기의 단에 절했던 것과 하늘의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37:9). 이에 요셉은 베냐민과 아버지와 부인들도 와야 한다는 것을 깨닫았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형들을 스파이로 몰아 그들이 가족 이야기를 하게 하고, 그것을 입증할 증거로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형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이전에 요셉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갚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21-22). 한글 성경에는 21절에 “아, 그랬구나”라는 말이 생략되었습니다. 형들은 자신들의 옛 행위를 회개하고 후회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요셉은 웁니다. 요셉은 시므온을 제외한 다른 형제들은 이제 곡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돈도 받지 않습니다.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야곱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지 않기로합니다(38).
형제들은 이전에 자신들의 죄를 되돌아 보면서, 애굽에서 겪게 된 일련의 일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갚으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전의 죄를 회개하고 후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런 모습을 요셉 앞에서 보게 하심으로 요셉을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고난 가운데 있게 하셨지만 결국 형들에게 받은 아픔을 치유하셨고, 요셉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인 야곱의 가족들을 보호하십니다. 이런 요셉의 모습은 같은 민족과 제자들에게 배반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상처와 아픔으로 당신의 교회를 먹이시고 보호하심을 보여줍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도 고난 가운데있게 하고 어려움을 겪게 하시고 아픔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그 아픔을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해 주시고 교회인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상처받고 어려움을 당할 때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의 참된 위로자를 바라보며 참된 위안을 얻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애굽에서 가지고 온 곡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다시 애굽으로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유다는 애굽의 총리가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베냐민을 꼭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합니다. 야곱은 여전히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주저합니다. 유다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베냐민을 기필코 살아서 데리고 오겠다고 합니다. 야곱은 양식이 모두 떨어져 이대로 있으면 야곱의 가정의 모든 사람들이 위험에 처해질 수 있기 때문에 허락합니다. 대신에 총리에게 바칠 그 땅의 특산물과 이전에 가지고 온 돈과 그 두 배를 챙겨가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총리를 통해서 그 아들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잃게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합니다(1-15). 요셉을 파는데 앞장 섰던 유다는 이제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요셉은 형제들과 베냐민이 온 것을 보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준비시킵니다. 형제들은 식사 준비로 분주한 모습과 낯선 곳으로 인도 되는 것을 보고 지난 번에 돈을 가지고 간 것을 빌미로 잡아 노예로 삼으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먼저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지난 번에 양식을 사고 돌아 가는길에 보니 돈이 자루에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일부러 돈을 주지 않고 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청지기는 그들과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돈을 돌려준 것이고 그들의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16-23). 참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그들에게 넣어 준 것입니다. 또 양식 값은 이미 요셉이 지불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시므온을 감옥에서 나오도록 하고, 형제들에게 발을 씻도록 물을 줍니다. 이것은 당시에 손님이 왔을 때 대접을 하던 기본 자세 였습니다. 음식을 요셉의 집에서 먹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 형제들은 서둘러 예물을 준비합니다. 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요셉이 집으로 왔습니다. 형제들을 일제히 요셉에게 엎드려 절합니다(26). 요셉의 꿈이 성취되던 순간이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보자마자 아버지의 안부를 묻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보고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축복합니다. 야곱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14). 요셉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가 울고 다시 얼굴을 씻고나와 음식을 차리라고 합니다(30). 요셉은 자기와 애굽 사람들과 그 형제들의 상이 섞이지 않도록 합니다. 애굽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과 같이 먹으면 부정하게 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앉을 때 나이 순대로 앉게 하고 막내인 베냐민에게는 음식을 다섯 배 더 많이 주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30-35). 더 많은 사랑을 받은 베냐민에게 형제들은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꾼 꿈을 하나씩 이루고 계십니다. 기근을 통해서 야곱의 아들들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도 허사가 되기 때문입니다(창35:9-15).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서 야곱의 기도도 신실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요셉이 형제들을 먹이고 잔치를 베푸는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약속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우리 영혼의 양식과 육의 양식을 풍성하게 주십니다. 이 신실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섬김을 기억하고 오늘도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요셉은 형제들과 만찬을 한 후에 자신이 쓰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으라고 그의 집 청지기에 명합니다(1). 그리고 멀어지기 전에 종을 보내어 형제들 중에 누군가 요셉의 은잔을 훔쳐 갔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청지기는 그대로 했고, 요셉의 형제들은 그들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그 잔이 나오는 자는 죽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가 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베냐민을 잡아 두고 이전과 같이 동생을 넘기는 죄를 지을 것인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잔이 나왔을 때 형제들 모두가 옷을 찢고 각자 짐을 다시 싣고 요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갑니다(2-13). 옷을 찢는 것은 큰 슬픔이나 참담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제 형제들은 요셉 앞에 서게 됩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책망합니다. 여기서 유다가 전면에 나서서 형제들을 변호합니다. 유다는 그 잔이 발견된 베냐민과 함께 형제 모두가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요셉은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잔이 발견된 베냐민만 종으로 삼고 나머지 형제들은 아버지에게로 돌려 보내겠다고 합니다.
이에 유다는 과거 요셉의 이야기를 합니다. 베냐민의 형인 요셉이 이전에 있었지만 죽었고, 라헬이 남긴 아들이 베냐민 뿐이기 때문에 아버지 야곱이 그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한다고 합니다(20). 그리고 베냐민을 어떤 과정을 통해서 애굽에 데리고 올 수 있었는지 말합니다. 아버지야곱이 베냐민을 너무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지 야곱이 결국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유다는 자신이 아버지에게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그 아이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베냐민을 대신해서 자신이 종이 되게 해 주고 베냐민을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에게로 보내 달라고 합니다(32-34). 요셉은 일부러 형제들에게 자신이 팔아 넘길 때의 비슷한 상황을 연출해서 형제들이 과연 어떻게 하는 지 봅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그 때와 달리 동생을 지키려고 합니다. 특히 유다는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유다는 요셉을 팔았던 장본인이었습니다(창37:26). 하지만 이제는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 놓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변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순간입니다.
동생을 대신하여 종이 되기를 스스로 원한 유다의 모습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는 ‘대속’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의 그림자로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은 이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자들이 아니라 목숨을 구해 주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은 형제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과거의 모습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더 예수님을 닮아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형들의 변화된 모습을 확인한 요셉은 그 마음에서 나오는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주위에 있던 종들을 물러나게 합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울며 자신이 요셉이라는 것을 밝히며 형제들이 과거에 자신을 팔았던 일 때문에 근심하고 탄식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으로 5년 동안 더 극심한 흉년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약속의 백성인 야곱과 그 아들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먼저 애굽으로 요셉을 보낸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1-8).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 이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에게 이미 이방의 객이 되서 400년 동안 종노릇하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이루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창15장 13절).
그래서 요셉은 두려워하지 말고 아버지와 가족들이 다 애굽으로 와서 흉년을 대비하라고 합니다. 요셉이 큰 소리로 울고, 형제들도 다 웁니다.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와 그 신하들이 다 기뻐합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아버지와 가족을 다 데리고 이집트로 와서 살라고 합니다. 좋은 땅도 주겠다고 합니다. 요셉은 수레를 주어 아버지와 가족들을 편하게 모시고 오도록 합니다(16-20). 바로의 말대로 요셉이 형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에서 먹을 양식도 주고, 또 각 자 한 벌씩 옷을 줍니다.
그런데 베냐민에게는 옷 다섯 벌을 주고 은 삼백을 줍니다. 요셉의 옷을 부러워 했던 형제들이 요셉에게 옷을 다 받습니다. 베냐민은 더 많은 옷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혹여나 형제들이 가는 길에 다투지 말라고 합니다. 돌아가는 길에 이전에 요셉을 판 것에 대한 책임 때문에 다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변화되었지만 여전히 또 다시 범죄할 수 있기 때문에 요셉은 형들에게 당부합니다. 드디어 형제들은 요셉이 준 수레에 양식을 싣고, 요셉이 준 옷을 가지고 기쁜 소식을 가지고 야곱에게로 돌아옵니다. 야곱은 요셉이 살아 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말과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 다시 기운을 냅니다. 요셉을 죽기 전에 보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미리 애굽에 보내셔서 그 백성을 돌보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비록 요셉 본인에게는 큰 어려움과 고난의 세월이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형들 뿐만 아니라 요셉도 더욱 성숙해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꿈을 통해서 하실 일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보다 앞서 우리를 돌보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인 꿈을 통해 그것을 깨닫고 인내했습니다. 때로는 그 과정이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의 시간 뒤에 그 고난을 넘어서는 기쁨이 있게 하십니다. 나아가 더 큰 계획으로 다른 사람들도 유익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도 어려운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그 고난을 넘어서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야곱은 가나안을 떠나 가족과 모든 소유를 이끌고 애굽을 향해 갑니다. 애굽으로 가는 길에 그는 브엘세바에서,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하며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곳에서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의 아들 요셉이 그의 눈을 감겨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4절). 하나님은 이 약속들을 신실하게 이루십니다. 야곱이 죽은 후, 그의 시신은 애굽이 아닌, 아브라함이 구입한 가나안의 가족 묘지인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기 때문입니다(50:13).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고, 요셉이 보낸 수레에 가족들을 태워 애굽으로 본격적으로 이동합니다. 이후 애굽에 함께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이 아들들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소개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야곱을 통해 열두 아들이 태어났고, 그 열두 아들을 중심으로 야곱의 가족 수는 총 70명이 되었습니다. 이는 완전수를 상징하는 7의 열 배로,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온전히 이루어 가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침내 야곱은 애굽에서 요셉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야곱은 요셉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을 다시 만났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제들과 아버지에게, 바로 앞에 서게 되면 자신들의 생업이 목축업이라고 말하라고 당부합니다. 이는 애굽 사람들이 목축을 천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들을 따로 떨어진 고센 땅에 거주하게 하려는 요셉의 계획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살게 하시지만, 애굽 사람들과 뒤섞여 동화되기를 원하지 않으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역시 세상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시고, 때로는 세속 정부의 보호 아래 살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가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곳이지,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교회가 복음을 전하며 믿음의 자녀들을 길러내야 할 사명의 자리이지, 우리가 세속의 가치에 물들어 살아갈 곳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기억합시다. 이 세상 한가운데서도 세속적인 가치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요셉은 파라오(바로) 앞에 나아가 아버지와 형들이 양과 소와 염소를 데리고 애굽으로 와서 고센 땅에 머무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형들 중에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여줍니다. 바로는 그들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알려준 대로 조상 대대로 목자라고 하며 고센 땅에 머물도록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1-4). 바로는 요셉에게 고센 땅에 거주하도록 허락하고 형제들 중에서 능력 있는 자는 바로의 가축을 돌보는 일을 맡기라고 합니다(5-6). 또 요셉이 야곱을 파라오 앞에 세우자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하고 바로는 그의 나이를 묻습니다. 자신의 나이는 백 삼십 살로 조상들의 연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아직 가나안 땅을 주시기 전이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옵니다(5-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는 것은 단순한 인사를 넘어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 야곱에게 주신 복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27:29). 그 약속이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기근이 더욱 심하여 질 때 요셉은 애굽과 가나안 사람들에게 곡식을 팔아 돈을 다 모아 바로에게 주었습니다. 또 돈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땅과 몸을 팔아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로의 녹을 받는 이방인 제사장의 땅을 제외한 애굽의 모든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됩니다. 그렇다고 요셉이 폭력적이고 비 인간적인 방식으로 땅을 바로에게 준 것이 바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토지법을 만들어 모든 토지를 국유화 하되 씨앗을 사람들에게 주고 농사를 짓게 하여 땅의 소산의 80%는 농작인이 가지고 20%를 세금으로 내도록 하였습니다. 그 법이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까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26). 한편, 이스라엘 족속은 고센 땅에서 거주하면서 목축업을 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였습니다. 야곱은 애굽에 십 칠년을 머물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죽을 날 가까운 줄 알고 요셉을 불러 자신을 애굽에 장사하지 말고 가나안 땅에 있는 조상들의 묘지에 장사하라고 유언을 하고 요셉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27-31).
오늘 말씀을 보면 야곱과 그 자식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파라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바로가 야곱과 그 자식들에게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을 하였고, 바로는 요셉을 통해서 식량위기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위기가 오히려 온 백성과 토지를 소유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실 뿐만 아니라 애굽과 바로도 돌보시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돌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이웃과 세상을 돌보십니다. 교회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통해서 위기 속에 있는 세상을 살려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동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을 보살피신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세상을 보살피신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야곱이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립니다. 야곱은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병은 그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말을 듣고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야곱에게 나아갑니다. 이스라엘(본문은 일부러 야곱대신 이스라엘로 씀, 언약을 강조함)은 요셉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침상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루스(벧엘)에서 만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셨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으며 또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말해줍니다(1-4). 또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자신의 아들들과 같이 여겨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함께 온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손도 보게 하셨다며 하나님을 높입니다. 요셉은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쪽에, 에브라임을 왼쪽에 둡니다. 므낫세가 장남이고 에브라임이 차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른 손을 에브라임에게, 왼손은 므낫세에게 올립니다. 먼저 요셉에게 축복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날 때부터 돌보시고 기르시고, 모든 환란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서 요셉과 두 자녀에게 복을 주시고 야곱의 이름과 조상들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아 하나님과 동일한 언약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번성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15-16). 하지만 두 아들에게 축복할 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손을 엇갈리게 얹은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의 손을 옮겨 오른손을 장자 므낫세에게 얹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야곱은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야곱은 육체의 눈이 어두워졌지만 영적인 눈은 밝았습니다.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이 더 강성해 질 것이고,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게 되는 천국의 원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요셉과 두 자녀에게 에브라임과 므낫세 같게 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에브라임을 앞세웠습니다. 또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자신은 죽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손들과 함께 계셔서 언젠가는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요셉과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한 후에 이제 각 자손에게 예언적인 축복을 할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곧 하나님의 품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비록 그의 육체의 눈은 어두워졌지만 영적인 눈은 밝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끝까지 기억하고 있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자녀들에게 그것을 전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들이 자녀들을 통해서 성취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기도이자 약속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남은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살아왔던 것과 그분을 신뢰하면서 살았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복을 자녀들에게 전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 다음 세대에게 동일한 은혜와 복을 주시도록 날마다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요셉과 두 아들을 축복한 후에 야곱은 나머지 자녀들이 이후에 당할 일들을 말합니다. 르우벤은 장자이지만 이전에 아버지의 첩과 동침한 일 때문에 장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 시므온과 레위도 이전에 디나의 일로 세겜 사람들을 무참히 죽인 일 때문에 장자의 복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34장). 장자의 복은 요셉이 받아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기업을 더 받게 될 것이라고 야곱이 말했습니다(참조. 역대상5장1-2절). 장자의 복은 요셉이 받지만 왕은 유다 족속을 통해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유다는 형제의 찬송이 되며, 규(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기를 ‘실로(평화, 안식을 주는 사람)’가 오시기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실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와 안식을 주시는 유다의 지파의 사자 예수님을 의미합니다(계5:5). 유다 족속을 통해서 왕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궁극적으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가 이런 복을 받은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과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족속을 선택하셔서 왕을 세우시고 궁극적으로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보내시기로 정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을 통해서 11-12절에서 말하는 풍성함을 나누어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야곱의 예언대로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게 되었고, 단지파에서는 강력한 사사 삼손이 나왔고, 요셉 지파는 가나안 땅에서 비옥한 땅에 살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말한 모든 풍성함에 대한 예언들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또 베냐민에게 한 약속도 사사기 20장 21절에서 이루어집니다. 야곱은 약속대로 행하시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고 있었습니다(1-27).
그리고 야곱은 이제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자신이 죽으면 가나안 땅에 있는 선조들의 무덤에 장사하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야곱은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갑니다(33).
본문은 야곱이 죽기 전에 자녀들에게 한 예언과 축복이 이루어짐으로 인간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예언과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장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과 자신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실 것을 굳게 믿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선택으로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죽을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고집이 세고, 속이기를 잘하는 사람, 야곱을 나그네 세월을 통해서 연단하시고 깎으시고 다듬어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유다의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영원한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부족하고 연약한 백성을 다듬고 연단하시고 때로는 책망하시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알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부르셔서 믿음을 더하여 주십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고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아멘.
야곱이 죽자 요셉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릅니다. 야곱을 위해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애곡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왕이 죽으면 칠십이 일 동안 애곡했습니다(1–3). 애굽 사람들이 칠십 일 동안 애곡했다는 것은 그만큼 요셉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고 요셉은 야곱의 유언대로 그를 가나안에 장사하기 위해 바로에게 말합니다. 바로는 애굽의 많은 신하들과 병거와 기병들을 요셉과 함께 가나안으로 보냅니다. 최고의 예우를 해 주는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유언대로 가나안 땅 마므레에 장사하였습니다.
그 후에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복수를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요셉이 지난 날에 자신을 팔았던 것을 복수할까 봐 걱정합니다. 이에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살아 있을 때에 요셉에게 형제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라고 요셉에게 말했다고 합니다(17). 요셉은 그 말을 듣고 웁니다. 그리고 형들을 위로하며 안심시킵니다. 그렇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형들이 악한 일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악한 일을 선하게 바꾸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간곡한 말로 위로했습니다(21). 오히려 요셉은 그 형제들에게 출애굽 때가 되면 자신의 뼈도 함께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형제들에게 말함으로 형제들과 그 자녀들이 요셉의 부탁을 잊지 않도록 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언젠가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것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지키시는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높은 관직에 있으나 애굽이 이스라엘의 종착지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창세기가 끝이 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당신께서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관계를 맺으십니다. 또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택한 자들을 이끄시고 친히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지속적으로 배반하지만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심지어 그들의 악한 행동도 선한 것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에 약속한 것들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그 백성을 언약에 따라 보호하시는 분이시며, 백성들의 실수와 죄악조차도 선하게 바꾸셔서 끝내 당신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이끄시는 긍휼이 많으시고 신실하신 분입니다. 또 창세기가 요셉의 마지막 말로 끝나는데, 이는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하나님을 소망하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언약을 지키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도 선하게 바꾸시며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앞으로도 언약을 이루어 가실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그분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자는 복이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영원한 언약 안에 약속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출애굽기는 “이집트를 나가는 이야기”란 뜻입니다. 출애굽기는 창세기에서 본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확장되어 지는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예고합니다.
야곱의 아들들과 자손들,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을 포함해서 칠십명이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생육하고 번성하여 애굽 온 땅에 가득했습니다(1-4).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알지 못하던 왕이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바로(왕)와 그 신하들은 점점 불어나 많아진 이스라엘을 두려워합니다. 애굽이 다른 나라와 전쟁할 때 혹시 그들이 이집트의 편을 들지 않고 적국의 편을 든다면 충분히 위협적일 만큼 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와 신하들은 꾀를 내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심한 노동을 시켜 국고성(곡식이나 무기를 저장하는 창고)과 라암셋(도시)을 짓도록 합니다. 그동안 목축업을 대대로 이어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노동은 아주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학대를 받을 수록 번성합니다(12).
이에 애굽 왕은 히브리인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불러 아기가 나올 때 남자 아이면 죽이고 여자 아이면 살려 두라고 합니다. 남자 아이는 커서 애굽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죽이려고 했고 아기가 나올 때 그만 죽게 되었다고 말하면 아무도 모릅니다. 이 두 사람은 아마도 산파 중에서도 다른 산파들도 관리를 하던 높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애굽 왕은 이 두 사람에게 이렇게 명하면 다른 산파들에게도 그런 명령을 전해서 바로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조용히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십브라와 부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당시 최고 권력자보다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를 살렸습니다. 그리고 바로의 책망에 히브리 사람들은 애굽 사람과 달라서 산파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낳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19). 이것은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은 해도 된다고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히브리 사람들이 번성하는것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바로 왕보다 당신을 더욱 두려워한 히브리 산파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습니다. 조용히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을 막는 것에 실패한 바로 왕은 이제 드러내놓고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아들이 태어나면 나일 강에 버리고 딸은 살려 두라고 합니다(22).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데 더욱 완강하게 막아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의 첫 장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 보게 됩니다. 약속대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많아졌습니다. 바로의 방해에도 하나님의 언약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점점 더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바로와 하나님을 두려워한 히브리 산파들은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약속 이루십니다. 산파들은 그런 통로가 되어 하나님께서 흥왕하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귀히 여기고, 두려워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 언약이 성취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모세가 태어나고 자라다가 결국 애굽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당시 애굽의 왕, 바로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나일강에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사탄의 계략이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겨 키웠습니다. 하지만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를 만들고 그 안에 모세를 넣어 나일강 갈대 사이에 놓았습니다. 마침 그때,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러 강에 왔다가 상자 속에 있는 아기를 발견했고, 모세를 불쌍히 여겨 키우기로 했습니다(1-10절). 죽을 수밖에 없던 모세가 살아나게 된 모습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의 억압 속에서 죽을 운명에 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구해 내실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자라며 애굽의 교육과 지식을 배웠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가 보모로 있으면서 모세를 돌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덕분에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인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다음 날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말리려 했지만, 그들 중 한 명이 "어제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일 셈이냐?"고 따졌습니다. 모세는 아무도 자기가 한 일을 모를 줄 알았지만, 이미 소문이 퍼졌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바로도 그 사실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했고, 모세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11-15절). 이처럼 모세는 자기 백성을 돕고자 했지만 오히려 동족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훗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같은 유대인들에게 거절당한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도망쳤고, 어느 날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 미디안의 제사장의 일곱 딸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자, 모세는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불의에 맞서 바른 일을 한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집에 머물게 되었고,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고,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게르솜’은 ‘추방', '도망'이라는 뜻으로, 애굽을 떠나 다른 땅에서 자식을 얻게 된 상황을 표현한 이름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약 40년 후),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더 심해졌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23-25절). 이 말씀은 이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모세를 통해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의 탄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의 시작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모세가 바로의 딸에게 건짐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모세는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백성을 도우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애굽 사람을 죽인 일도 그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 이후, 하나님은 미디안에서 오랜 시간을 통해 모세를 훈련시키시고,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쓰시려는 준비를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계획은 실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위기 속에 있는 자신의 백성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계획이 실패하고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끝까지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통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고, 응답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죄의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건져 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계획 가운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인내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모세는 한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미디안 지역에서 오랜 세월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을 치다가 호렙 산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나무에 불은 붙었지만 타지 않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1-3). 모세는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갑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모세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그의 이름을 두 번 부릅니다. 모세는 응답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라고 합니다(4-5).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모세에게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밝히시고,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가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겠다고 하십니다(6-10). 모세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께서 반드시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고 끝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어 이 산(호렙산, 시내산)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합니다(12).
이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보낸 하나님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고 답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은 어떤 종류의 하나님, 어떤 신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야훼, 여호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가집니다. 처음부터 계신 분이라는 영원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냥 ‘계신 분’이라는 뜻으로 무소부재를 나타낼 수도 있고, 그의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신 분으로 이해 될 수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생각하면 ‘스스로 있는 자(여호와, 야훼)’라는 말씀은 영원부터 계시며 당신의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계셨고, 지금도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이름은 모세와 이스라엘, 온 교회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모세가 그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었고, 이제때가 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한다고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면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삼일 길을 가도록 허락을 구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로를 강한 손을 치기 전에 바로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 주십니다(20). 한번 듣지 않는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게 하여 빈손으로 나가지 않고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여 나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21-22).
오늘 말씀에서 모세는 새로운 사명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거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와 반드시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알려 주심으로 모세에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사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직장 생활, 학업, 가정 생활 모두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지만 때로 그 사명을 감당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신뢰할 만한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사명을 감당하고 우리의 삶을 감당할 수 있도록 반드시 함께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신뢰함으로 사명자의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들이 믿을 것이라고 확신을 주었지만 모세는 여전히 의심하고 염려합니다. 이번에는 혹시 백성들을 자신을 믿지 않고 거짓말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나님께 묻습니다(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세에게 그가 가지고 있던 목자의 지팡이를 가지고 뱀이 되게 하십니다. 모세는그 뱀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손을 품에 넣고 빼니 나병이 걸리게 하시고, 다시 품에 넣었다가 빼니 낫게 하시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이런 기적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두 표적도 믿지 않으면 나일 강 물을 퍼서 땅에 쏟으면 그것이 피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라고 하십니다(2-9). 이 모든 표적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자신이 말을 잘 못한다는 핑계로 다른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라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노를 발하시며 말 잘하는 모세의 형 아론이 모세의 입이 되고 모세는 아론에게 마치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팡이를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10-17). 다른 설화나 영웅의 이야기와 달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이야기에서 그들을 이끌어내는 모세의 모습은 강력하고 리더십이 있는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의 강한 능력이나 비범한 힘으로 그 백성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염없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약한 자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이끄시는 능력 있으신 분이십니다.
이제 모세는 끝내 순종합니다. 그리고 장인 이드로에게 가서 애굽에 있는 형제들을 살피러 가겠다고 한 후 애굽을 향해 갑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에서 모세를 만나 다시 애굽으로 가라고 격려 하시며 이스라엘이 당신의 장자라고 격려 해 주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이기에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바로의 장자를 치겠다고 경고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바로가 끝까지 하나님을 대항 것임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후 모세가 길을 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시면서 거의 죽게 하십니다. 그 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돌칼을 가지고 가서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모세에게 피남편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모세는 할례를 받았지만 그 아들(아마도 둘째)이 할례를 받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자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놓아주었습니다(18-26). 이렇게 하신 것은 모세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는데 할례 하지 않은 아들이 있다면 그의 사명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안일하게 생각했던 부분을 다시 고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아론에게 나타나셔서 광야에서 그의 동생 모세를 만나게 하시고 기적을 통해 장로들이 모세를 믿도록 하십니다(3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의 사역을 위해서 모세를 선택하여 선지자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 선지자는 우리와 다름이 없이 연약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적을 보여주시고 때로 화를 내시며 또 그에게 필요한 사람을 붙여 주셔서 당신의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시는 일은 대단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능력이 있으신 분이셨지만 자신을 철저히 낮추시고 순종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부르심에 순종할 때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힘을 주시고, 필요한 사람을 채워 주셔서 구원의 은혜를 우리 주변에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우리를 통해서 우리 가정과 직장과 학교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아멘.
이제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내보내어 절기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고 말합니다.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며 알지도 못하는 신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겠냐고 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더 구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히브리인의 하나님이고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닥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바로는 오히려 강제 노역을 계속하라고 합니다(1-5). 모세와 아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게을러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힘들게 노역을 감당하게 합니다. 원래 벽돌을 만들 때에는 짚을 제공해 주었지만, 이제는그 짚을 각자 주어서 벽돌을 만들되 하루 생산량이 동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생산량은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로의 감독관들은 이스라엘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리며 줄어든 벽돌의 생산량을 채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기록원들은 바로에게 나아가 호소하지만 바로는 그들이 게을러서 하나님을 섬기자는 소리나 한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기록원들은 바로가 그들에게 화가 나서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임을 알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20-22). 백성의 이런 반응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지체하시는 것에 대해 호소합니다(23).
앞 장에서 구원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것을 들었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바로는 오히려 그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출애굽은 사탄의 종에서, 죄의 종에서 해방되는 구원 사건입니다. 구원의 말씀이 선포되어 종에서 해방이 되려고 할 때 사탄은 가만히 있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더욱 힘들게 함으로 출애굽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바로는 지금 사탄의 수하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붙잡고 더 힘들게 만들고 하나님의 종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효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보다 바로를 더 두려워하는 자들 입니다. 그들의 기대와 다르게 바로가 반응하자 하나님의 선지자를 원망합니다. 당장의 어려움 때문에 구원의 약속을 잊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얻고, 구원을 얻은 자 답게 살고자 할 때에 사탄도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탄의 힘도 무력하게 하셔서 결국 우리를 구원의 완성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늦어지는 기도 응답과 하나님의 반응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나요? 나의 생각과는 다른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식어버리지는 않나요? 사탄은 바로 그런 우리의 마음을 이용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시탄의 유혹과 시험에도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붙들고 인내하며 결국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이끄실 하나님을 따라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바로에게 열 재앙을 내리기에 앞서 다시 한 번 모세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 말씀해 주시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족보를 기록합니다(1-2). 하나님은 먼저 모세에게 자기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분은 언약에 실실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나아가 모세에게는 그 조상들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로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낼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계실 것이라는 이름입니다. 모세는 조상들보다 더 많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1-8). 하나님은 당신을 많이 드러내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계시의 진전은 예수님에게서 완성이 됩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고 그 관계가 더 깊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신을 심판하고 그 백성을이끌어내실 것을 모세와 아론은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모세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본질을 더욱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낼 것이라고 백성에게 전하지만 그들은 마음의 상함과 고된 노역으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9).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모세를 바로 왕에게 보내어 이스라엘을 내보내게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백성들의 부정적인 반응 때문에 그렇게 하기를 주저합니다(10-12). 백성들의 불신과 자신의 능력 부족을 염려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길 주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끝내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 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것입니다(13).
이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족보가 나옵니다(14-27). 장자와 차자인 르우벤과 시므온의 족보는 간략하게 쓰지만, 레위의 자손은 비교적 자세히 기록합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레위의 정당한 지파의 자손들이며, 앞으로 레위 자손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중요한 역할들을 감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모세는 주저하고 있습니다(28-30)
모세는 방금 바로와 자신의 동족에게 거부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이방인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실패한 그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을 더 깊이 드러낼 것임을 약속하시고 더 용기를 주시며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때로 우리도 우리의 사명이 실패한 자리에서 주저 앉고 싶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다시 우리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와 격려인 성경 말씀으로 말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통해서 실패한 그곳에서 일으켜 세워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 삶을 살아가고 다시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갑시다. 아멘
모세는 다시 자신이 말을 잘 못한다는 것을 불평합니다. 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의 앞에서 신과 같이 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또 아론에게는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아론에게 전달하면 아론은 바로에게 대언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심판을 다 받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애굽의 주민들은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1-7).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만드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로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말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행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라오(바로) 앞에 가서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지면 뱀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는 그대로 했습니다. 하지만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것을 따라서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뱀이 요술사의 뱀을 삼킵니다. 뱀은 당시에 이집트를 상징하는 동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집트를 심판하실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8-13). 그럼에도 바로는 마음이 완악하여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보내십니다. 모세와 아론은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내보내어 광야에서 섬기게 하라고 하셨지만 바로가 듣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는 애굽의 젖줄기와 같은 나일 강이 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 모든 물고기가 죽고 또 애굽의 물들과 강들과 운하와 연못과 모든 호수에 있는 물이 피로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행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14-21). 하지만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을 보고 바로는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역사로 보지 않고 단지 인간의 한 요술 행위 정도로만 본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막고 있습니다. 바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지 않고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고 칠일이 지납니다(20-25).
바로가 궁극적으로 막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예배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단지 바로와 애굽 사람들의 횡포에서의 노예 해방이 아니라 예배임을잘 보여줍니다. 구원의 목적은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바로는 예배자를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통해서 당신께서 실제로 역사하시고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른 신과는 전혀 다른 분이심을 보여주시기 시작합니다. 요술사들이 재앙을 모방한 것은 그들의 능력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무능한지 보여줍니다. 그들은 재앙을 모방할 것이 아니라 핏물이 다시 정상적인 물로 변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재앙에 재앙을 더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의 능력은 결코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일 강물을 피로 만든 것은 애굽 사람들의 풍요와 생명을 가져다 주는 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피로 만드시면서, 그리고 다른 물들도 피로 변하게 하심으로서 생명의 근원이 강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바로와 같이 완악하게 하지 않으시고 애굽과 같은 죄와 사망에서 건지셨습니다. 그래서 참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목적이 아닙니다.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곧 예배입니다. 우리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나일 강이 피로 변하는 심판 후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모세를 부르셔서 바로에게 보내십니다. 만약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개구리를 바로에게 보내어 온 애굽에 개구리가 가득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본문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바로는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아론에게 명하여 지팡이를 내밀어 개구리가 나일 강에서 올라오도록 했던 것입니다(1-7절). 그래서 다시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개구리를 없애 주면 백성을 보내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언제 그렇게 되면 좋을지 때를 택하라고 합니다. 이는 개구리가 없어지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인 것을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는 “내일” 개구리를 없애 달라고 했고,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여 개구리를 애굽 땅에서 물러가 나일 강에만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지에 있던 개구리를 죽게 하십니다. 그 흔적이 남도록 하신 것입니다. 개구리가 없어져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자, 바로는 다시 마음을 (스스로) 완악하게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않습니다(8-15절).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론이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쳐서 다 이가 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그대로 하자, 티끌이 이가 되어 온 애굽을 덮었습니다. 요술사들이 따라 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요술사들은 이 재앙부터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이 요술사들은 바로를 설득하여 “이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라고 말합니다(19절). 그럼에도 바로는 그 마음을 계속 완악하게 합니다. 얼마나 바로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에 하나님은 다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십니다.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리 떼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21절). 그래서 온 애굽 땅에 파리가 있을 것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고센 땅에는 파리가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아닌 백성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파리 떼가 온 애굽을 덮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애굽 안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를 미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바로는 한 발 물러나 “그러면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제사하라”고 하며, 파리 떼를 없애 달라고 요청합니다. 모세는 다음 날 하나님께 간구하여 파리 떼가 없어지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바로는 그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않습니다(22-32절). 예배는 장소와 형식을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해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구리 재앙부터는 하나님께서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십니다. 개구리는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애굽 사람들이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구리는 하나님이다스리시는 피조물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개구리들이 죽어 악취를 풍기게 함으로서 개구리는 신이 아니라 동물에 불과함을 보여주십니다. 그 다음으로 먼지가 이(혹은 모기 번역 될 수도 있음)로 변하게 하는 재앙 통해서 하나님은 대지의 신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파리(혹은 작은 딱정벌레)는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돋는 해를 주관하는 신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별 하실 뿐만 아니라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을 심판하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재앙을 받은 바로는 조금씩 뒤로 양보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되 애굽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고 또 조금만 가서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완전한 애굽과의 단절이 아니라 적당히 애굽에 있으면서 적당히 타협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절충주의적인 제안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적당하고 편하게 하나님을 섬기라는 제안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적당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그분이 원하시대로 예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통해서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시며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적당히 예배를 받으실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섬겨야 할 위대한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 적당히,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격으로 바르게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로의 백성과 구별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의 백성을 보내지 않는 바로에게 또 다른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번에는 바로의 말, 나귀, 낙타, 소, 양 등의 가축들에게 심판으로 돌림병이 퍼지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셔서 그들의 가축들에는 돌림병이 생기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결국 애굽의 가축들은 전염병으로 죽었지만, 이스라엘의 가축들은 하나도 죽지 않았습니다(1–6절). 그럼에도 바로는 마음이 완강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지 않았습니다(7절). 이에 하나님은 다시 더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화덕의 재 두 움큼을 가져오게 하시고, 모세가 바로의 눈앞에서 그것을 하늘로 날리자, 그 재가 애굽 온 땅의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붙어 악성 종기가 생기게 됩니다(8–11절). 하지만 바로는 여전히 마음이 완악하여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더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무거운 우박이 애굽 온 땅에 내리게 하십니다. 이는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청난 무게의 우박이었습니다. 이 우박으로 인해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동물들은 모두 우박에 맞아 죽고, 식물들도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고 짐승들을 집 안으로 들여놓은 사람들의 가축은 살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짐승들은 모두 우박에 맞아 죽었습니다(12–22절).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땅에는 우박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에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치게 해달라고 부탁하며, 이제 그 백성을 보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밀과 쌀보리가 아직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마음이 완악해져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않습니다(35절).
하나님께서 가축들을 치신 이유는,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이 가축의 얼굴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염병과 악성 종기, 우박으로 그들의 신들이 실제로는 아무 능력도 없는 거짓 신임을 드러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전염병, 종기, 우박이 내리지 않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참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심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참된 능력이 되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참된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모든 재앙들의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참된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게 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하기 위함입니다(1-2). 모세와 아론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시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 둘을 파라오 앞에 다시 보내십니다.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을 보내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이번에는 책망과 촉구를 함께 합니다. 만일 보내지 않으면 이번에는 메뚜기 떼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메뚜기를 통해서 우박을 맞지 않고 남은 식물들을 모두 먹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바로의 신하들을 바로를 설득합니다. 하지만 바로는 누구누구를 보내야 하는지 모세와 아론에게 묻습니다. 모세는 남녀노소 모두와 짐승들도 가지고 가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남녀노소 모두가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짐승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모든 짐승을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바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장정들만 나가라고 합니다(9-12). 적당한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메뚜기 떼를 보내어 심판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타협안 거부입니다. 메뚜기 떼들은 우박에 상하지 않은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어 치웠습니다. 이에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다시 불러 이 메뚜기 떼들이 사라지게 하여 죽음이 떠나가게 하라고 합니다. 메뚜기 떼가 온갖 풀을 먹어 없애는 것이 곧 애굽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강한 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메뚜기의 재앙이 없어지고 바로는 다시 마음이 완악해 집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보내지 않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흑암을 애굽에 내립니다. 해와 달이 빛이 잃어 애굽 온 지역이 어두웠습니다. 이집트의 최고의 신인 태양의 신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바로는 모세를 불러서 여호와를 섬기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사람들만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보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다시 보게 되면 죽이겠다고 합니다. 모세도 이제는 다시 바로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한 번은 더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는 궁지에 몰리자 모세와 타협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되 장정들만 가라고 합니다. 나중에는 짐승들은 놔두고 나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있어서 타협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참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모세는 결코 타협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고 감사하며 그분을찬송하는 자리입니다. 여기에 한 치의 양보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배는 남녀노소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드려야 하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양과소를 가지고 드려야 합니다. 예배의 대상과 방법 모두 타협할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보여줍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 예배에 있어서 이 말씀에 충실히 따르고자 합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에 성경 곳곳에 드러난 예배의 방식을 따라 예배하고자 합니다. 처음에 이런 태도가 적응하기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땅한 노력입니다. 우리는 성도 개인으로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고 살아야 합니다. 또한 무엇보다 공적 예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휴가철 어디에 있든지 주일 예배에 타협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공적 예배와 삶의 예배에서 충만하게 드러내시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앞의 모든 재앙들과 같이 마지막 재앙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1). 하나님은 이 재앙 후에야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각기 자기의 이집트 이웃들에게 패물을 요구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상해 보입니다. 다 망하게 생긴 이집트 사람들에게 너무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당한 요구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동안 애굽 사람들에게 종노릇을 하였고, 그들이 해방될 때 그 삯을 요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도 그 값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 모세를 위대하게 보이게 하셨습니다(2-3). 이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행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마지막 재앙의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합니다. 애굽에 있는 사람이나 짐승의 모든 첫 태생이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재앙과 달리 하나님께서 직접 애굽 가운데로 들어오신다고 하십니다(4). 애굽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5-6).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과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백성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바로의 온 신하들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제발 떠나 달라고 할 때 이스라엘은 떠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기 때문에 바로는 모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5-10).
하나님은 이 심판을 통해서 애굽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장자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최종적으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애굽 백성과 구별하십니다. 이러한 구별은 다음 장에서 볼 수 있듯이 유월절을 통해서 보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별되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구별될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죽기 때문에 생기는 구별입니다. 본래는 애굽 백성과 똑같이 장자가 죽어야 했지만, 유월절 어린 양이 대신 죽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신 구속의 은혜,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보혈로 얻은 구원에 감사하며 다른 이들과 구별되게 사는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모든 장자를 치시는 재앙을 내시기 전에 모세와 아론에게 이 재앙이 내린 날을 새로운 해의 첫 달로 정하라고 하십니다(1-2). 그리고 그 달 십사일에 어린양을 잡고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여 먹으라고 합니다. 만약 식구가 양을 먹기에 적으면 이웃과 함께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의 피를 문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고기를 쓴 나물과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같이 먹되 고기는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3-9). 그리고 먹을 때에는 허리에 띠를 띠고 신발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합니다(11). 애굽에서 탈출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금방이라도 나갈 수 있게 준비를 하고 먹으라는 말씀입니다. 사탄에게 잡혔다가 벗어나는 사람은 느긋하게 사탄에서 빠져 나올 사람이 없습니다. 급하게 금방이라도 나갈 수 있는 절박성과 긴급성을 가지고 유월절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은 애굽 전체를 다니시면서 문설주에 피를 바르지 않은 집 곳곳 마다 장자를 치십니다. 하지만 피가 있는 집은 넘어갑니다(pass-over). 그래서 유월절(담을 넘어간다는 뜻)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이 날은 그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대로 지켜야할 절기가 됩니다. 매년 첫 달은 14일 부터 21일까지 일주일 동안 무교병을 먹고 14일과 21일은 성회를 열어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날 이스트가 들어간 빵(유교병)을 먹는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각 집에서 유교병을 두어서도 안됩니다(15-20). 이에 모세는 장로를 불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전합니다(21). 이스라엘 백성도 그대로 합니다(28). 밤 중에 하나님께서 멸하는 자를 보내셔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십니다. 그래서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울부짖습니다. 이제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하나님을 섬기러 떠나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할 때 그것을 애굽 사람들이 줍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430년동안 애굽에서 종 노릇했고 이제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41). 이 밤은 앞으로 대대로 기념되고 기억될 것입니다. 이 절기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잠깐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거류민과 다른 나라 품꾼을 제외한 할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본토인과 타국인, 이방인도 할례만 받으면 적용됩니다. 누구나 할례를 받으면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이 하는 말을 다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장자들은 죽지 않았고, 종 되었던 땅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이 영원히 기억하길 원하셨습니다. 순전히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장자 대신 어린양을 잡아 피를 문에 바름으로 죽음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또 그 양 고기를 먹음으로 애굽을 나갈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처음 난 것은 이후에 나는 모든 것을 대표합니다. 처음 난 것을 치신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것과 애굽 사람이 가장 큰 신으로 여기던 파라오의 장자를 침으로 파라오 또한 인간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과 그들의 목숨이 이미 죽어야 할 목숨이었지만 어린양이 대신 죽음으로 얻게 된 새생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 유월절 어린양은 우리를 대신해서 죄값을 치르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줍니다. 그분의 대속적인 죽음 때문에 우리가 새 생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본래 우리는 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우리 삶 가운데 있는죄에서 속히 벗어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애굽에서 나온 직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백성을 약속의 땅, 곧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그들은 이 출애굽의 날을 기억하여 처음 태어난 짐승은 모두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고, 사람은 대속(다른 동물로 대신함)해야 하며, 무교절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무교절은 누룩(이스트)이 없는 빵을 먹는 절기입니다. 이것은 출애굽의 긴급함을 상징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함으로 그들이 “거룩하게 구별”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에서는 누룩이 죄와 흠을 상징합니다(고전 5:6). 그들은 죄의 종이었던 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이제는 우상 숭배가 만연한 가나안 땅에서 제사와 삶의 방식을 통해 거룩한 삶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정해진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며, 출애굽의 날을 매년 기념하여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생활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녀들과 주변 나라 앞에서 구별된 삶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일상 속에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출 13:16). 한편, 애굽에서 나온 직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인 블레셋 사람의 땅을 지나게 하지 않으시고,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다. 만일 그들이 블레셋과 싸우게 되면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돌아가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출 13:17). 당시 그들은 믿음의 싸움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미숙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믿음의 훈련을 받은 후에야 믿음의 싸움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400여 년 전 요셉의 유언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출애굽이 자신의 능력이나 지도력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임을 알고 있었기에, 요셉의 유언대로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옵니다(출 13:19).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앞서 인도하시며, 그 기둥이 떠나지 않도록 하십니다(출 13:20–22).
죄의 종이었던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가시적으로 나타내고 외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바로 첫 태생을 제물로 바치고 절기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주일에 예배드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태생을 하나님께 바치고 대속하는 제도는, 맏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구속의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거룩한 삶의 가장 기본은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통해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배를 기점으로 한 주간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패턴이며, 구원받은 자의 구별된 삶의 방식입니다. 이렇게 구별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 앞서 행하시며, 약속의 땅(곧 구원과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맞게 믿음의 싸움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남은 한 주간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한 후, 공예배에서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기념하며 새로워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 바닷가에 진을 치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광야에 갇힌 것처럼 보여, 바로가 그들을 잡으러 오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위험한 위치에 진을 치게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그곳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들은 바로는 모든 병거를 이끌고 그들을 추격합니다. 종으로 부리던 이스라엘을 다시 붙잡아 종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1–5절).
하지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내버려 두심으로써, 애굽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실 계획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애굽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애굽 군대는 금세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치고 있는 바닷가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이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여호와께 부르짖고,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차라리 애굽에서 종으로 사는 것이 낫겠다”고 불평합니다(12절).
이에 모세는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볼 것을 명령합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14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손을 들어 홍해를 가르라고 명하십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구름기둥이 이스라엘 진영 뒤로 옮겨가 애굽 군대를 막고,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사람들을 구별하십니다. 애굽 쪽에는 흑암이 있었고, 이스라엘 쪽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구름기둥이 막고 있었기에 애굽 군대는 이스라엘 진영으로 넘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 사이, 하나님께서는 밤새도록 강한 동풍을 불게 하셔서 바다를 말리시고, 좌우에 물이 벽처럼 서게 하셨습니다(21절).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따라 홍해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애굽 군대는 그들을 뒤쫓아 바다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새벽녘에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시고, 그 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손을 바다 위로 내밀라고 하시자, 바다가 다시 흘러 애굽 군대를 모두 덮어버렸습니다. 결국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는 홍해에서 전멸당했습니다(28절). 이처럼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능력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호와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습니다(31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홍해를 가르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의 종에서 건져내신 백성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을 끝까지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 삶을 막다른 골목으로 이끄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하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거룩한 여호와이십니다. 우리의 앞에 영적인 장애물, 혹은 인생의 홍해가 가로막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홍해를 마른 땅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신앙의 장애물이나 어려움 앞에서 절망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을 기대합시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홍해에서 구원을 받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그 노래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께서 방금 그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애굽의 군대에게서 건지셨고, 회개하지 않은 애굽의 군대는 바다에 잠기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힘이시고, 노래이시며, 구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1–2절). 그분은 강한 용사이시며, 권능과 영광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만물을 다스리시고 원수를 물리치시는 분이시며, 거룩하시고 찬송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인자하신 분이시며, 그 통치는 영원무궁하십니다(3–18절). 이 노래를 듣고 아론의 누이 미리암과 모든 여인들이 소고를 들고 춤추며 화답합니다(19–21절).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노래를 부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은 쓴 물 때문에 금세 원망하기 시작합니다(22–24절).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곳에 있는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쓴 물이 달게 변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례와 규례를 정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잘 지키면 쓴 물이 단물로 바뀐 것처럼, 치료하시는 여호와로 그들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5–27절). 이처럼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신실하신 하나님께, 우리도 신실함으로 응답하라는 하나님의 마땅한 요구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부른 이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직접 경험한 자들이 부른 구원받은 신자들의 노래입니다. 바로 광야교회(행 7:38)의 노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 곧 교회가 불러야 할 찬송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찬송은 모세와 여인들뿐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자연스럽게 배워 함께 부르는 공동체적인 찬송이었습니다.이처럼 구원을 경험하고 찬송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게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교회의 찬송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을 넘어, 책임 있는 순종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지키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감사하며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치료하시는 여호와가 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묵상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고백하며, 책임 있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광야에서 생활이 두 달 반이 지났습니다(1). 백성들은 다시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고기와 떡을 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3). 그 때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께서 아침에는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시고, 저녁에는 고기를 주어 먹이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그들에게 양식을 주심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할 때 구름 가운데 임재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함을 들었고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전합니다(4-12).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이스라엘 사람들 주변으로 와서 그것을 잡아 먹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에는 만나라는 음식을 주셔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전에 알지 못하던 음식이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양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양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을 따라야 했습니다. 매일 먹을 만큼만 가지고 거두어 가야 했습니다. 그것이 한 오멜씩 입니다. 그리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됩니다. 매일매일 그들은 만나를 거두러 나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6일째에는 그 다음 날 양식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그 다음 날은 안식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으로 안식일을 즐깁니다. 신기하게도 안식일을 위해서 저장한 것들은 냄새도 나지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13-29).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 만나 한 항아리를 대대로 보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는지 기억하도록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이 만나를 먹으며 지냈습니다(30-36).
만나와 메추라기는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불만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피는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광야 생활 가운데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배우도록 하신 하나의 수업이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 곧 일용할 양식인 만나를 거두러 날마다 나가야 했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수업이었습니다.
나아가 만나는 예수님께서 주실 참된 생명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만나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보존하던 이 만나와 달리 예수님은 영원한 만나로서 주님의 몸을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6:50-51). 이 말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성찬에 참여하여 주님의 몸과 피를 마심으로 그분과 교제해야 함 의미하면서 동시에 신령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먹어야 산다는 말입니다(고전10:3). 하나님께서 보내어주신 분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오늘 하루도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은혜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는 저와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르비딤에 장막을 치고 머무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물이 없었습니다(1).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모세와 다툽니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이끌고 계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주 잊고 원망하고 하나님의 사람과 다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줍니다. 이번에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하나님이 서있는 반석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물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그대로 행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2-7). ‘맛사’는 ‘시험하다’라는 의미이고, ‘므리바’는‘다투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다투고 하나님께서 자기들 가운데 함께 계시는지 시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 사건 후에 아멜렉이라는 족속이 이스라엘 민족을 먼저 공격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첫 싸움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멜렉은 물이 없던 지역에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그곳에 진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고 급습했던 것 같습니다. 아멜렉이 쳐들어 오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택하여 아멜렉과 싸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 꼭대기에 서서 손을 들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다’라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는 군대의 지도자입니다. 전쟁을 하는데 지팡이를 들고 손을 드는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것은 그 전쟁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손이 피곤하여 내려오면 전세가 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모세와 함께 산 꼭대기로 올라갔던 아론과 훌은 돌을 가지고 와서 놓고 모세를 앚히고 그의 두 팔이 내려 오지 않도록 바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고, 결국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군대는 아멜렉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싸움을 기념하여 책에 기록하고 앞으로 지도자가 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마음에 새기도록 합니다. 모세는 제단을 쌓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고부르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대대로 이스라엘의 원수 아멜렉과 싸울 것입니다(8-16). 이 싸움을 사울에게 맡겼지만 사울은 실패합니다(삼상15장).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강한 불평과 원망에도 불구하고 반석에서 물을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반석을 예수님이시라고 합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온 것은 예수님께서 참된 생명수를 주시는 것의 그림자입니다(고전10:4).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신 것은 교회가 예수님께서 주실 생명수를 마시고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은혜로운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생명의 물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은 후에 싸우게 될 영적인 싸움에서도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님(새 여호수아)의 그림자인 여호수아를 통해서 승리를 얻게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중보와 아론, 훌의 도움은 그 전쟁이 인간의 강함과 전략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원수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영적인 싸움은 우리 자신을 의지할 때 실패하지만, 승리하신 예수님을 붙들고 의지할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인 싸움의 연속입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은 예수님을 신뢰하며 행하는 것, 곧 순종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위해서 생명수를 주시고 승리를 주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며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찾아 옵니다. 이드로는 이전에 모세가 돌려 보낸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데리고 함께 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이고 둘째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셨다”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장인과 아내와 아들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가 반갑게 맞이 합니다(1-7). 모세는 이드로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는지 다 이야기 합니다.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드로는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신들보다 큰 신이심을 고백합니다. 이에 이드로는 하나님께 번제와 희생제물들을 드리고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함께 여호와 앞에서 떡을 먹습니다. 이전에는 이방인 제사장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이드로는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의 역할은 백성을 재판함으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16). 하지만 그 재판하는 일을 모세 혼자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드로가 보기에 그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백성과 모세 모두가 지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14). 그래서 이드로는 백성들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고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들을 세워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 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큰 일만 모세가 재판하고 작은 일은 세운 사람들을 통해서 해결하도록 제안합니다. 하지만 이드로는 단순히 이런 방식이 옳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단서를 붙입니다. 모세는 장인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합니다(24). 모세가 그대로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드로는 자기의 땅으로 돌아갑니다(27).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러 동역자들을 세우게 하심으로 교회에서 한 사람에게 역할이 집중되어 지치는 일이 없도록 허락해 주심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다스리는 직분자들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하시기 원하십니다.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의 기준은 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생활에서 흠이 없는 자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일맥상통합니다. 직분자가 아닌 성도들도 자신이 가진 은사로 교회를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맡겨진다면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직분자는 더욱 엄격한 기준을 하나님은 요구하시며, 기본적으로 경건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이 요구됩니다. 넓게 보아 성도들 모두가 세상에서는 직분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도들 모두가 세상의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과 십부장들입니다.
오늘 하루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른 판단을 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바른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바른 길을 가르쳐주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나아가 우리 교회의 직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판단을 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교회를 세워가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아멘.
애굽에서 나온 지 삼 개월이 지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광야에 진을 칩니다(1). 그곳은 하나님의 산이라고 불리는 시내산 (호렙산)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산으로 모세를 부르셔서 모세를 중보자로 세워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체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는지,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애굽 사람들에게서 구원하셨는지 말씀하십니다. 또 온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언약을 지키면 모든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2-6). ‘소유’라는 말은 보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고, 그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가면 하나님의 보물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많은 백성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제사장 나라, 거룩하게 구별되는 백성이 되는 특권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모세가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8). 하나님께서는 구름 가운데서 음성을 들리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믿도록 하시고 중보자인 모세를 신뢰하도록 하십니다(9). 두 당사자가 구두로 승인하였기 때문에 언약 체결식을 준비합니다. 백성들은 성결하게 하여 그들의 옷을 빱니다. 그것은 마치 신부가 신랑과 첫날 밤을 보낼 때 단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스스로 먼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께서 오시길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산에 경계를 정해 놓고 백성들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셋째 날 아침에 하나님께서 시내 산 위에서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으로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말씀하시고 이제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다른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경계를 넘어 오지 못하도록 합니다(2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구원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 언약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에 조상들과 맺은 언약의 확증이고 확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족장들 개인과 언약을 맺었지만,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신부를 맞이 하듯이 언약식을 준비하셨고, 실행하셨습니다. 이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소유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참된 모세로서 언약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하나님의 소유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나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벧전 2:9). 또한 예수님께서는 참된 모세로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드러내시고 그의 말을 듣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교회는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의 보물이며, 거룩한 백성이며, 제사장 나라입니다. 새로운 언약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신부로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그분께 거룩하고 신실하길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거룩한 삶을 통해서 말씀에 신실하게 반응함으로 주님의 거룩한 신부이고 보물임을 기억하며 거룩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언약을 증거하는 돌판, 곧 십계명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20장 22절에서 23장 33절까지 이어지는 ‘언약의 책’의 서두입니다. 이 십계명의 시작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던 분인지 먼저 밝힙니다. 이것은 십계명이 단순히 이행해야 할 계약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또 먼저 종 되었던 집인 이집트에서 건져 내신 후에 주심으로 이 십계명이 구원받은 후에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할 의무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십계명의 서문을 통해서 율법은 은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주시는 열 가지 계명은 우리가 다양한 영역 속에서 살아가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신실하게 반응하고 섬겨야 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의 백성들과 같이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되고, 자기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모양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도 안되고, 안식일을 기억해서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부모를 하나님과 같이 공격해야 하고,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대하면 안됩니다. 또 성적인 생활도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를 통해서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힘이 강하다고 함부로 빼앗아 자기 것을 삼는 도적질도 금지 되고, 거짓 증언을 통해서 이웃을 곤란하게 해서도 안됩니다. 또 이웃의 아내와 종과 물건들을 탐하는 마음을 가져도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물이자,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로 살아가는 생활 방식을 규정해 주는 것입니다(1-17).
이렇게 산 위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 당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기를 구합니다. 모세는 그들을 안심시키며, 하나님께서 임하신 것은 그들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함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위함이라고 합니다(18-21). 또한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상을 만들지 않아야 할 구체적인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그들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시로 흙으로 제단을 쌓아 하나님께 제사를 해야 했고, 돌을 깎아서 제단을 만들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 또한 당시 신들에게 최고의 인간의 기술로 만든 제단을 만들어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뛰어난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십니다(22-26).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들은 십계명을 감사함으로 지키고 애씁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은혜로 아무런 조건 없이 구원해 주셨습니다. 구원 받은 자는 십계명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의 체계를 구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지키지 못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며 회개하고, 성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신앙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최고의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작게라도 순종하길 바라십니다. 단지 우리의 삶의 기준을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씀으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돌을 잘 깎아서 좋은 제단을 만들어 섬기고, 좋은 계단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작은 한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감사함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하루가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십계명의 구체적인 적용을 상황에 맞게 보여줍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히브리 종에 대한 규정입니다(1-2).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너무가난하여 종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산다면 6년 동안은 종으로 부리되 칠년 째에는 자유롭게 놓아 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 종이 결혼을 했고 자식도 있다면 아내와 자식들도 함께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혹시 그 종에게 아내를 준 것이 주인이라면 그 아내와 자식은 두고 홀로 나아야 합니다. 만약 종이 그 주인과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여 떠나지 않는다면 그 집에서 죽을 때까지 종신종으로 살 것입니다(3-6). 또 어떤 사람이 딸을 아내로 삼기 위해서 여종으로 팔았다면칠년이 지나도 나오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인이 그 여종을 기뻐하지 않아 잠자리를 가지지 않고 아내로서 대우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보낼수 있지만 이방인에게는 안됩니다. 또 만약에 여종을 아들에게 준다면 그 여종을 딸과 같이 대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주인이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고해도 이 여종에게 음식과 옷과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만약 이 셋을 모두 하지 않는다면 여종을 돈을 내지 않고도 그 주인을 떠날 수 있습니다(7-11).
이어서 폭력에 관한 법률이 나옵니다. 사람을 쳐죽인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일부러 죽인 경우가 아니라면 한 곳을 정하여 그곳으로 도망하여살 수 있도록 합니다.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반드시 죽음의 벌을 받아야 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도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또 사람을 납치하고 판 사람도 사형에 해당됩니다. 심지어 자기의 부모님을 저주하는 사람도 사형에 해당이 됩니다. 상해를 입힌 사람은 반드시 배상을 하고 완치 될 때까지 돌보아주거나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남종과 여종이라도 즉사하도록 때리면 벌을 면치 못합니다. 임신한 여인을 쳐서 비해를 입혔으면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을 발로 갚아야 합니다. 이 말은 최대한 입니다. 눈이 다쳤으면 눈만 다치게 하는 정도로 그쳐야지 더 심하게 가해자에게 갚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남종과 여종에게도 같은 원칙입니다. 또 주인이 종을 때려서 이가 빠지면 그 댓가로 종에게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12-28).
뿐만 아니라 기르는 가축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경우에도 법률을 정해 놨습니다. 소가 사람을 죽이면 그 소도 죽어야 합니다. 만약 소가 사람을 들이 받는 버릇이 있는 것을 알고도 단속하지 않아 소가 다른 사람을 죽게 만들면 소와 그 주인도 죽어야 합니다.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속죄금을 그 주인에게 주고, 소는 죽여야 합니다. 또 사람들이 구덩이를 얼어 두거나 구덩이 파고 덮지 않아 사람이 가축이 빠지면 구덩이 주인이 보상을 해 주어야 하고 혹시 죽었으면 죽은 것은 가질 수 있습니다. 소끼리 싸워서 둘 중에 하나가 죽으면 받은 소와 죽은 소를 팔아 다 반반씩 나누어 가집니다. 하지만 소가 받는 버릇이 있는 줄 알고도 주인이 단속하지 않아서 소가 죽었으면 소로 갚아주고 죽은 것은 가해자가 가질 수 있습니다(29-36). 이스라엘 사회에서 재산을 가진 주인은 책임있는 모습이 요구됩니다.
이런 구체적인 규정들은 오늘날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법률들의 정신과 원리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이 법들은 우선 가난이나 경제적인 궁핍 등의 이유로 종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 종들은 7년 뒤면 다시 자유민이 되어 신분을 회복하고 금방 이웃이 될 수 있는 종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안에서 종들은 잠재적인 형제이기 때문에 비록 가난하여 현재는 종으로 살지만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또 여종도 마찬가지로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기준을 제시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저주하고 때리면 하나님께 저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거운 형벌을 내립니다. 생명을 멸시하는 자들도 엄격하게 처벌합니다.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 입은 것 이상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규정으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산과 소유에 대해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피해를 주었다면 정당하게 배상하는 책임있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이웃을 내 자신이 같이 사랑하며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계속해서 십계명의 구체적인 실천으로써 말씀이 이어집니다. 먼저 오늘 말씀은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의 구체적인 실천에 대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1-15). 이 계명들에 대한 실천을 보면 단순히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이웃의 재산을 보호하고, 손해를 입혔을 때 책임 있는 배상을 하며, 사람의 생명은 도둑이라고 할지라도 존중하는 삶의 태도를 요청합니다.
이어서 성적인 윤리와 종교 윤리와 관련한 법들을 말씀합니다. 사람이 약혼 하지 않은 처녀를 꾀어서 동침했다면 반드시 그녀의 부모에게 여자의 경제력 손실로 생길 손해금을 납폐금으로 주고 그녀를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해도 남자는 납폐금을 주어야 합니다. 또 무당은 살려 두지 말라고 하고 짐승과 행음하는 자도 반드시 죽여야고,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하는 자들은 멸해야 합니다(18-20). 이 세 구절들은 1계명과 7계명을 동시 어기는 것들입니다. 이스라엘 주변국에는 동물 숭배나 풍요 제사에 성적인 관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이방인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괴롭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도 나그네였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 고아와 과부의 탄식을 듣고 분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안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이 탄압받은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 중에 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 줄 때 이자를 받지말고 빚을 갚기를 독촉하는 채권자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옷을 전당 잡아 돈을 빌려 줬을 때는 해가 져 추워지기 전에 옷을 돌려 주라고 합니다. 돈을 못받는 한이 있어도 그 사람이 얼어 죽도록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27). 돈보다 사람이 우선입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은 재판장과 지도자를 모독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주신 각종 계명과 법규들을 무시함으로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모독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음 난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합니다(28-31).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1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구체적인 상황에서 풀어서 설명해 주시고,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야 할지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오늘날의 교회)은 자신의 정체성을 일상의 삶의 규칙들과 법칙을 통해서 드러냅니다. 구별되는 라이프-스타일입니다.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의 백성인지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요구하시는 라이프 스타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내어 훔치지 않고, 훔쳤다면 상응하는 벌을 받고 손해를 배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우상으로 삼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다른 사람에게 입힌 피해를 반드시 갚아주며, 하나님과 세우신 지도자들을 공경하고,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지 않습니다. 십계명은 그리스도인의 구별되는 라이프 스타일을 위한 기준과 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불신자와는 다른 우리의 삶의 스타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것을 증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십계명의 바른 실천으로서 1절-9절은 사회 정의와 복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가짜 뉴스를 퍼뜨리지 말고, 위증하지 말고, 가난하다고 혹은 부자라고 판단을 기울게 하는 것, 이방인 차별, 뇌물을 받아 진실을 왜곡하는 등은 9계명의 실천입니다(1-3,6-9). 뿐만 아니라 원수의 길 잃은 짐승을 그냥 두지 말고 반드시 찾아 주며, 원수의 나귀가 짐을 지고 가다가 넘어지면 그냥 지나가지 말고 일으켜 세워주라고 합니다(4-5). 이는 모두 이웃의 명예를 지켜주는 일에 속합니다.
이어서 각종 절기들에 관한 규정이 나옵니다(10-19). 우선 안식년이 나옵니다. 6년 동안 땅에 씨를 뿌리고 소산을 거두어도 되지만 일곱째 해에는 땅이 쉴 수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수확물을 먹도록 해야 하며, 남은 것들도 들짐승이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안식년에땅을 묵혀 둠으로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을 억제하며 동시에 땅의 생산력을 회복시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곱째 해에는 뭘 먹고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여섯번째 해에 세배의 소출 주셔서 먹게 하실 것입니다(레25:21).
다음으로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6일동안 일을 하되 7일째는 쉬라고 합니다.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짐승과 종들도 쉬도록 해야 합니다. 당시에 주변 나라는 짐승과 종에게 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쉼은 오로지 주인과 신에게만 허락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이방신들과는 다르게 사람들에게쉼을 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날은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을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쉼은 하나님과 교제를 의미합니다.
이어서 절기들을 지키라고 합니다. 무교절을 지킴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맥추절(첫 열매를 거두는 시기)과 수장절(곡식을 저장하는 시기)을 통해서 애굽에서 건질 뿐만 아니라 먹을 것을 주셔서 친히 먹이시고 입히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번의 큰 절기에 남자는 반드시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께 보여야 합니다. 또 이 절기를 지킬 때에는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 넣은 빵과함께 드려서는 안되고 하나님께 바친 제물을 다음 날까지 두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땅에서 처음 난 열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여호와의 전에 바침으로써 농산물의 수확을 가능케 하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또 가나안 종교에서 흔히 행해지는 새끼 염소를 어미의 젖으로 삶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19). 이것은 잔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짐승의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 합니다. 안식년, 안식일, 절기에 관한 규정은 1계명에서 4계명에 해당됩니다.
‘언약의 책’을 마무리 하면서 하나님은 앞으로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 가운데 당신의 사자(천사나 지도자)를 먼저 보내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앞에서 말씀한 법과 규례를 지킬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수에게 원수가 되어 주셔서 능히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가나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무찔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따라서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신들을 섬겨서도 안되고 그들의 행위를 본 받아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한꺼번에 가나안 백성들을 물리치면 들짐승이 많아져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에 1년 동안 조금씩 그들을 쫓아 내실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그들의 신들과 언약을 맺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신들을 섬기게 되면 그것이 이스라엘에게는 올무가 되어 도리어 해롭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1,2 계명과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어떻게 그 언약에 신실하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언약 관계의 기본입니다. 하나님 역시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 관계에 신실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과 법 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신실하셔서 다양한 복과 구원의 은총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신실한 백성으로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다양한 복과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아멘.
20장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시내산에서 부르시고, 당신의 소유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백성들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로 칠십 인과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를 함께 산으로 올라 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모세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도록 하십니다(1-2). 백성들의 대표로서 장로와 앞으로 주어질제사에 대한 규례를 행할 제사장들을 오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을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그 말씀을 다지키겠다고 응답하였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산 아래에서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전체를 상징하는 열 두 기둥을 세워 그곳에서 소(가장 비싸고 귀한 제물)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뒤 소의 피를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백성들에게 기록한 언약서를 읽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다 지키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모세는 여러 양푼에 담은 피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뿌립니다. 그러면서 이 피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에 대하여 그들과 세운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4-8).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제 공식적으로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이 언약을 어기는 자는 피를 흘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며 왜 자신의 피를 새언약의 피라고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하나님과 새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열 두 제자들과 언약을 체결하시고, 언약을 보증하시고, 튼튼하게 세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피로 체결한 다음에 그들을 대표하는 칠십 장로와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 먹고 마시고 함께 잔치를 했습니다(9-11). 하나님과 친히 교제하셨던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산으로 올라 오도록 하시고 백성들을 가르칠 율법과 계명을 기록한 돌 판을 주시려고 합니다. 이에 모세는 여호수아와 함께 산으로 올라 갔고 장로들에게 명하여 무슨 일이 생기면 아론과 훌에게 나아가라고 합니다. 모세는여호수아와 함께 산으로 올라 갔고, 사십일 동안 모세는 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며 율법과 계명을 받았습니다(12-18).
언약을 체결하고 언약식을 거행한 후에 모세와 아론의 두 아들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 70인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만났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신 것은 우리가 주일에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며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교제(사귐)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를 더 높은 곳에 불러서 본격적으로 언약을 이행하시며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과 교제하기 위한 규칙과 거하실 집, 곧 성막에 관한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종으로 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먹고 마시며 교제하기 위함 입니다. 이것이 당시 가나안 땅의 신과 다른 점입니다. 가나안 땅의 신들은 인간들을 부리기 위해서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교제하기 위해서 만드셨고, 이스라엘과 그 교제를 회복하며 온 인류와 교제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교회)과 맺으시고 교제하시기 원하십니다. 예배는 이 교제의 현장이며 우리가 평소에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이 교제를 일상으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우리 삶속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다시 회복하고 더 깊은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주님과 늘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나아가 이 교제를 다른 이에게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멘.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실 성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모든 재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애굽에서 가지고 온 예물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금, 은, 놋, 청색, 자색, 홍색 실과 염소 털, 숫양의 가죽, 해달의 가죽, 조각목, 등유, 향품, 호마노와 보석 등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소와 거룩한 텐트(성막)를 만드는 데 사용 될 것입니다. 그 장소와 그 안에 놓은 기구들을 모세 마음대로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지어야 합니다(1-9).
증거궤는 율법을 기록한 돌 판을 보관할 상자인데, 먼저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서리에 각각 긴 작대기를 꽂아 운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성막에 둘 때는 그 작대기를 꽂아 둔 채로 두어야 합니다. 그 상자를 덮는 뚜껑도 만들어야 하는데, 바로 속죄소입니다. 속죄소는 다른 말로 ‘시은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이 법궤 뚜껑도 금으로 만들되 쳐서 그 양 끝에 그룹(천사의 종류 중 하나) 둘을 쳐서 한 덩이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룹의 모양도 날개를 펴서 날개로 속죄소를 덮고 그 얼굴이 속죄소를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모세와 만나고 두 그룹 사이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모든 일을 알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10-22). 또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어 성소에 두어야 하는데, 그것 또한 순금으로 둘러 싸고, 금 테를 둘러야 합니다. 그 상을 위해서도 금 고리 넷을 만들어 운반하기 위해서 금으로 싼 막대기를 꽂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위에 항상 진설병(하나님 얼굴 앞에 두는 떡이라는 뜻으로 삶의 축복에 대한 감사를 상징함)을 두어야 합니다. 또 등잔대를 만들어 성소에두어야 하는데, 금으로 쳐서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지성소를 밝혀 주기 위한 빛으로써 항상 켜 두어야 하는 등불을 놓는 것입니다. 등잔대에는 총 일곱개의 가지가 나와서 일곱 등잔을 둘 수 있었습니다. 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한 불 집게와 불 똥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기구를 순금 한 달란드(약40kg) 가지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양식대로 만들어야 합니다(23-4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성막과 그 안에 놓을 기구들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다는 가시적인 표였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가운데 함께 동고동락하며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규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정하신 방법으로 만나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교제할 장소로서 텐트를 만드셨습니다. 그 안에 있는 시은좌에서 모세를 만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이었습니다. 등대는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항상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진설병을 두는 상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먹이실 것을 상징했습니다.
이 성막과 성막 안의 성물들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텐트를 치다)’ 우리가 그의 영광 곧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합니다(요1:14). 예수님은 참된 성막,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살아 있는 성막으로서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성막 안에 있는 시은좌에서 모세를 만나 주시듯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지금도 우리를 만나 주시고, 늘 함께 행하십니다. 더 이상 손으로 지은 장막이 아니라 참된 장막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참된 등대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서 어둠 속에서 우리를 인도 하시고, 참된 양식으로서 오늘도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실 뿐만 아니라 영생하는 양식인 당신의 몸과 피를 주셔서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로 위로를 얻고 힘을 내어 살아갑시다. 또 하나님과 교제함이 최고의 기쁨이 되는 하루 되도록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의 설계도를 말씀하십니다. 먼저 휘장(커튼) 열 폭을 만들되 그 휘장에 하나님의 근위대와 같은 천사 케루빕(그룹)을 가늘게 꼰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를 놓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길이와 넓이로 휘장에 고(loop)를 만들고, 금 갈고리로 그 고를 연결해 한 텐트가 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막을 덮는 휘장을 염소 털로 열 한 개를 만들고 다섯 폭을 연결하고 여섯 번 째 폭 절반은 성막 전면에 접어서 안으로 들이라고 합니다. 안에 있는 성막과 마찬가지로 하나로 연결을 합니다. 그러면 성막은 두겹 텐트가 됩니다. 안 텐트는 스물 여덟 규빗, 바깥 텐트는 서른 규빗으로 밖의 막이 안을 완전히 덮습니다. 그리고 밖 텐트는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어 완전히 빛이 차단되고 비도 새지 않을 것입니다(1-14).
이제 조각목(아카시아 나무)로 이 천막을 세울 널판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널판들이 서로 연결 될 수 있도록 촉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널판 밑에 은 받침도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널판을 땅에 고정하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북쪽과 남쪽은 널판 스무개, 성막 뒤편인 서쪽은 널판 여섯 개를 세우고 두개는 양 끝에 두 겹으로 세웁니다. 직사각형 형태를 갖춥니다. 동쪽이 입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성막 뒤쪽에 있는 여덟 개에 은 받힘을 열여섯을 놓습니다. 그리고 조각목으로 나무 띠를 만들어 성막 널 판을 통과시켜 고정시킵니다. 그 띠는 금으로 씌웁니다(15-26).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섬세하고 정확하게 모세에게 알려주셔서 성막을 세우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께 받은 대로 성막을 세우기 원하셨습니다(30). 이렇게 큰텐트가 만들어진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휘장(커튼)을 만들되 그룹을 수놓아 금 갈고리를 네 기둥 위에 늘어뜨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만들어진 직사각형의 성막 안에 다는 커튼으로 그 안 쪽에 증거궤(법궤, 언약궤)과 그 뚜껑 역할을 하는 속죄소를 놓습니다. 성막 안의 공간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법궤가 있는 안쪽을 지성소(지극히 거룩한 장소), 바깥 쪽을 성소(거룩한 장소)로 부릅니다. 그리고 휘장 바깥쪽, 곧 성소의 북쪽에 상을 놓고 남쪽에 등잔대를 놓아 서로 마주 보도록 합니다. 또 휘장을 수놓아 성막 문(커튼)을 만들고 그것을 세우기 위해서 기둥 다섯을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고 금을 싸고 갈고리도 금으로 만들어 놋으로 다섯개의 받침을 만듭니다(31-38). 이로써 성막의 설계도는 완성되었습니다.
성막의 설계를 보면 하나님께서 마치 왕의 접대실을 설계하신 것 같습니다. 지성소 안에 있는 하나님은 왕으로서 보좌인 언약궤에 앉아 계시고, 그 주변으로 그룹들이 경호대 같이 있습니다. 그룹들은 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가장 가까이서 하나님을 모시는 천사들입니다. 그 밖은 밝은 빛이 있고, 향에서 피워지는 향이 왕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 옆에 상은 왕과 손님이 누릴 음식처럼 보입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커튼이 쳐 있어서 두 장소가 확실히 구별 되었습니다. 지성소에는 아무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이스라엘 백성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이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나누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길을 내셔서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는 길을 내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담대하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성막을 짓게 하심으로 당신께서 친히 함께 하십니다.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은 세세하게 어떻게 성막을 지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양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세심하게 살피시고 인도하신다는 것과 동시에 그들 가운데 계시지만 거룩한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세심하게 우리를 살피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으로, 예수님을 덕분에 그분의 영광과 거룩함과 위엄 가운데 나아 갈 수 있게 되었음을 잊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높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께 날마다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이어 모세에게 제단을 만들 설계도를 말씀해 주십니다. 제단은 조각목으로 네모 반듯하게 1.5미터 정도 높이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네 모퉁이에 뿔을 만들고 제단을 놋으로 쌉니다. 또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 불을 옮기는 그릇도 함께 놋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놋으로 그물을 만들어 제단 네 모퉁이에 놋 고리를 만들고 그것을 제단 뿔에 걸도록 합니다. 그래서 그 위에 불로 태우고 남은 제물의 고기와 재들이 떨어지도록 합니다(1-8). 또 제단을 위해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둘러 쌉니다. 역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 주신대로 기술자를 통해 만들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성막 뜰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제단은 성막 안이 아니라 바깥, 곧 이 성막의 뜰에 놓일 것입니다. 성막 뜰은 남쪽, 북쪽이 백 규빗(약40미터), 서쪽, 동쪽이 오십 규빗(약20미터) 정도 되는 직사형으로 만듭니다. 문은 동쪽으로 나 있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둥을 세우고 아래에 놋으로 받침을 하고 기둥의 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만듭니다. 뜰 문을 위해서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놓아 약 8미터 정도의 커튼을 둡니다. 그리고 그 기둥과 스무개와 그 받침을 놋을 만듭니다. 뜰 주위 모든 기둥의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으로 만들고, 받침은 놋으로 만듭니다. 세마포 커튼의 높이는 2미터정도 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 쓰는 모든 기구와 그 말뚝과 틀의 포장 말뚝을 다 놋으로 만들도록 하고 또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으로 등불을 밝혀 아론과 그 후손들이 항상 여호와의 등불을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게 합니다(9-21).
제단은 성막 뜰에서 유대인들이 제사장을 통해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드리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단을 만들라고 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야 함을 보여줍니다. 성막의 뜰 안에서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은 자신을 위해 제물을 잡고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제물을받아 제단에 올려 제사를 드립니다. 성막 뜰은 제물이 항상 잡히는 장소이고, 그곳에 있는 제단은 항상 죄인을 대신해서 죄를 짊어진 동물이 태워지는 곳입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고,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히9:22). 이는 우리 죄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죄를 짊어지시고 제물로 십자가 제단에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그분 앞에 나아오도록 하십니다. 항상 성막 안에 등불이 꺼지지 않듯 우리를 늘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하십니다. 매일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항상 등불과 같이 우리를 비추시고 계신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빛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비추실 때 회개합시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살 길을 여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제사장이 입어야 할 옷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제사장의 옷은 아무나, 아무렇 게나 지어서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이 정한 양식대로 옷을 짓고 오직 아론과 그 아들들만 입어야 했습니다. 아론을 위한 옷은 흉패, 에봇,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입니다. 옷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할 실은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입니다(1-5). 이것들로 먼저 정교하게 에봇을 짜서 입어야 합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옷 중의 하나로 어깨 끈과 허리띠로 메는 앞치마처럼 생겼습니다. 호마노는 붉은 빛을 내는 수정돌입니다. 그 호마노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이름을 새겨 넣고, 금테를 두른 후 에봇의 양 어깨 끈에 하나씩 붙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대표하여 양 어깨에 메고 제사를 드린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6-12).
그리고 판결 흉패를 만들어야 하는데, 판결 흉패는 에봇에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정사각형 모양입니다. 그곳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각 줄 마다 다른 보석을물립니다.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고,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입니다.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 넷째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다 금테에 물립니다. 그리고 각 돌에 한 지파의 이름을 새겨 넣습니다. 이 판결 흉패에 금 사슬과 고리를 만들고 청색 끈을 이용하여 에봇과 떨어지지 않게 연결합니다. 제사장은 가슴에 이스라엘 지파를 품고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 이름들이 하나님께 영원히 기억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흉패와 에봇 사이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돌을 넣어 둡니다.
에봇 받침 겉옷은 전부 청색으로 두 어깨 사이에 구멍을 내어 입되 갑옷 깃 같이 깃을 짜서 찌어지지 않게 합니다. 그 옷 끝에는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를 수놓고 금 방울을 간격을 두어 번갈아 가면서 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움직일 때 마다 소리를 내어 성막으로 들어갈 때 죽지 않도록 합니다. 이제 순금으로 패를 만드는데, 이것은 관위에 붙이는 패입니다. 그 패에 ‘여호와께 성결(거룩)’이라고 새기고 제사장이 쓰는 머리관 앞에 이것을 늘 붙이고 있으면서 제사장은 이스라엘 자손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먼저 성결해야 함을 늘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제물을 받으신다고 합니다(36-38).
아론의 아들들을 위한 옷은 속옷과 띠와 관입니다. 이것으로 그들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합니다. 직분의 영광스러움을 보여줍니다. 아론이 대제사장의 옷을 입었다면, 아들들은 제사장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또 대제사장과 제사장은 속 바지를 입어 그 하체를 가려야 했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대제사장과 제사장으로서 이 옷을 입고 섬겨야만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않게 될 것입니다(43).
제사장들의 옷은 그냥 옷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에게 아름다움과 영광을 주며, 그 옷을 통해서 자신의 직무가 무엇인지,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하는지, 누구 앞에서서 일을 감당하게 하는지 알게 해 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 옷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은 이 옷을 통해서 백성을 위해서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짊어지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위한 옷으로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참된 제사장의 옷인 그리스도로 옷 입은 제사장들입니다(갈3:17). 제사장들처럼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입니다. 이 옷의 영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고, 날마다 거룩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이제 산에서 내려가면 제사는 모세가 아니라 그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임식을 통해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린 수소와 흠 없는 숫양 둘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떡과 기름을 섞은 무교과자와 무교 전병을 모두 고운 가루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것들을 한 광주리 담아 송아지와 양들과 함께 제단으로 가서 아론과 그 아들들을 물로 씻기고, 아론에게 대제사장을 위해서 지은 옷을, 아들들에게는 제사장을 위해 지은 옷을 입히고 관을 씌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송아지를 회막(성막) 앞으로 끌고 와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송아지에게 안수합니다. 안수를 통해서 아론과 그 아들들의 그들의 송아지에게 죄가 전가됩니다. 모세는 그 수송아지를 회막 앞에서 잡아 그 피를손가락으로 찍어 제단 네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제단 밑에 쏟고 내장에 덮인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사르고 나머지 고기와 가죽과 똥은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있는 밖에 버리라고 합니다. 이 제사는 아론과 그 아들들의 죄를 용서 받는 속죄 제사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으로 섬기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거룩해 져야 했습니다(1-14).
다음으로 양을 가져다 완전히 태우는 제사인 번제로 드립니다. 번제는 그들의 완전하고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완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해야 합니다. 또 그 숫양의 피를 가져다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발가락에 바르고, 제단 주위에 뿌립니다. 또 제단 위의 피와 관유를 가지고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림으로 그들과 그들의 옷이 거룩하게 됩니다. 그 양의 나머지는 제사를 드린 모세의 몫이 됩니다(14-27).
또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바구니에서 떡 하나와 기름 바른 무교병과 무교 전병을 주어 흔들어 드리는 제사(요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모세는 아론의 위임식의 숫양의 가슴을 흔들어 요제로 드리고, 가슴과 넓적다리를 구별하여 가집니다. 이렇게 앞으로 제사장들의 몫이 어떤 것이 될지 몸소 보여줍니다(28). 아론이 죽은 후에는 아론의 자손들 중에 위임되어 대제사장 직분은 지속될 것입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자신들이 받은 분깃을 삶아 떡과 함께 성막 앞, 곧 하나님 앞에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 음식은 거룩하기 때문에 아무나 먹을 수 없고, 먹고 남은 것을 불살라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모세는 위임식을 일주일 동안 거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수송아지로 속죄제를 드리며 제단에 기름을 부어 항상 제단이 거룩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제단을 거룩하게 하면, 거룩한 제단이 되어 그것에 닿는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이 제단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매일 양 두 마리를 아침 저녁으로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매일 드리는 '상번제'입니다. 그냥 양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곡식을 함께 드림으로(소제), 기름을 부어 드리는 제사(전제)를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항상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백성들을 만나고 모세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거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마다 백성들은 자신의 대신해 죽은 동물을 통해서 죄의 심각성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룩한 분이시며, 거룩한 분이 그들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 인도해 낸 줄 알게 될 것입니다(44-46).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과 제사장들의 옷과 여러가지 제사법을 알려주신 이유는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과 교제하기 위함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통해서 그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오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방편도 친히 알려주십니다. 제사장들도 먼저 자신의 죄를 위해서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 자체로서 얼마나 제사장들도 불완전했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참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드리시고 완전한 번제와 화목제물로서 전적으로 헌신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가져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주님과 깊은 교제를누립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신 것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함입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셔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루가 됩시다. 아멘.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향할 단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그것을 금으로 싸라고 하십니다. 분향단은 넓이와 길이 한 규빛(약50cm)으로 정사각형 모양으로 높이는 1미터 정도 됩니다. 언약궤와 같이 양 쪽에 금 고리 둘을 만들고 제단을 메는 채를 꿰어 이동할 수 있도록 합니다. 제단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커튼 바로 앞에 두고 아론이 아침과 저녁에 등불을 켤 때 함께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살라 등불이 꺼지지 않듯이 향도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향단 위에 다른 향을 살라서도 안되고 성막 안뜰에 있는 제단처럼 제물을 태워도 안됩니다. 향단은 오로지 향을 사르기 위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향단을 속죄하여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1-10).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숫자를 조사할 때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그 생명의 속전을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속전’이라는 말은 ‘가리다’, ‘대신 사다’라는 뜻으로 죄를 가려주시고 그들을 대신 사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자라고 더 하지도 말고, 가난하다고 덜하지도 말고 모두가 반세겔을 내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성소(성막)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감당했습니다. 그 비용이 크지 않았지만 내지 않을 때는 엄청난 징계가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구원에 감사하며 성막을 유지하는데 한 마음으로 기여를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11-16).
이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물두멍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물두멍은 성전 안뜰에 놋으로 된 큰 대야입니다. 이것은 회막과 제단 사이에 위치하면서 아론과 그아들들이 손과 발을 씻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주어진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필요한 준비를 적절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볼 수 있습니다(17-21).
또 하나님은 모세에게 향단에서 살라야 할 관유와 향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관유를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관유를 만들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관유는 거룩하기 때문에 함부로 사람이 사용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지정한 용도 외에 사용하기 위해서 이것을 만들어서도 안됩니다. 이것을 함부로 만드는 사람은 백성중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이어서 향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만들고, 소금을 쳐서 거룩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그 향 얼마를 갈아서 회막 안 증거궤 앞, 곧 향단에 두어야 합니다. 매일 향단에서 그것을 살라 향기로운 냄새가 늘 성막에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이 향단의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고 계시록에서 말합니다(계5:8).
향단과 물두멍, 관유, 향품은 모두 제사에 필요하고 또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 위해서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거룩하게 섬김 받길 원하십니다. 거룩하게 섬김을 받기 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구별되는 방법으로 섬김을 받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향단의 향이 지속적으로 피어나는 것은 성도들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면서 말씀대로 행하는 것과 기도가 항상 함께 가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딤전4:5). 오늘 하루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말씀과 기도로 나아가며 날마다 거룩한 자들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금까지 말씀한 것들을 만들 사람도 지명하여 세우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브살렐입니다(1-2).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이해력과 통찰력)과 지식(신학적 지식)과 여러가지 재주(실제로 만들 수 있는 능력)를 주셔서 정교한 일을 연구(구체적인 것들은 연구함)하여 금과 은과 놋을 다듬고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3-5). 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보조자 오홀리압(하나님의 장막)이라는 사람을 세워주시고 또 여러 지혜로운 자들과 함께 회막과 증거궤와 속죄소, 회막의 모든 기구, 상과 기구와 순금 등잔대와 모든 기구 그리고 분향단, 번제단, 물두멍, 그 받침,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옷을 만들고 관유와 성소의 향을 모세가 명령 받은 대로 만들도록 합니다(6-11). 모세는 명을 받아 설계도를 들었다면 그것을 실제로 만드는 것은 브살렐을 중심으로 오홀리압, 그리고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따라서 각자의 은사와 그 분량에 따라서 섬기게 하십니다. 누구도 홀로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교회의 직분자를 역할에 따라 두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하나하나 우리를 기계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원리를 기초로 지혜와 통찰력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따라서 교회의 일에는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앞에서 말한 성막과 제사 도구들은 1차적으로 안식일(예배의 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안식일’이라고 부르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과 맺은 언약을 기억해야 합니다.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문자적으로 완전히 쉬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에 쉬는 것은 이스라엘의 삶이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유의미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에 쉼으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실제적인 삶의 패턴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을 어기는 것은 언약을 깨는 것이고 죽음이 그 벌이 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안식일에 쉬면서 백성과 교제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하여 그 교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안식일은 주일로 지킵니다. 주일은 안식일과 동일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새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입니다. 그 중심에 언약을 다시 확인하고 갱신하는 주일 공예배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친히 임명하시는 것을 봅니다. 교회의 직분자는 하나님이 부르셔서 세우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지혜와 통찰력과 각자의 은사가 필요함을 배웁니다. 또한 정교한 일, 모든 상세한 일들과 구체적인 실천에 있어서는 고민하고 연구하여 행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봅니다. 교회의 직분자와 성도들은 교회를 이러한 원리로 세워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지혜와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도들의 각자의 은사가 잘 발휘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직분자들이 늘 성령 충만하여 지혜로운 자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에 정하신 방식으로 하나님과 예배가운데 교제하는 것임을 봅니다. 참된 ‘쉼’은 하나님과 교제에서 옵니다. 매 주일 예배가 참된 쉼이 되도록 사모하며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멘.
모세가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두 돌 판을 받았을 때, 산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아론에게 찾아와 그들을 위하여 그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내라고 합니다. 모세가 40일동안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백성들을 판단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리더였지만, 그도 역시 백성들의 요청에 금을 모아 금 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다음 날을 절기로 정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1-6).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모세에게 속히 내려가라고 하시며 백성들이 부패하여 그들에게 명령한 길에서 속히 떠났다고 하십니다. 얼마 전에 하나님의 법대로 살겠다고 맹세하여 언약을 체결했던 백성들은 모세가 언약의 돌 판을 받으러 간 사이에 그 언약을 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2계명(하나님의 형상을 만듦)과 3계명(망령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과 4계명(절기에는 항상 안식일이 시작하는데, 절기를 마음대로 정함)을 동시에 어긴 것입니다. 어떤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은 이방신들을 섬기는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섬김을 받으심으로 이방신과 구별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방신과 같이 그들의 하나님을 취급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려고 하지만 모세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당신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켜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십니다(9-13).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두 증거판을 두 손에 가지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진 가까이에 가서 백성들이 송아지와 춤 추는 것을 보고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립니다. 이것은 단지 모세가 화가 나서 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이 깨어졌기 때문에 돌을 던져 깨뜨린 것입니다. 모세는 그들의 송아지를 불살라 부수고 가루로 만들어 그들로 마시게 합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죄를 마심으로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습니다. 그 우상은 갈아 마셔도 될 만큼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아론에게 물었지만 아론은 백성들에게 그 책임을 돌립니다. 여기서 백성의 중보자인 모세와 모세를 대언하는 아론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하지만 아론의 이러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아론을 세우십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아론은 대제사장의 일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옳지 않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중보 했음에도 그 일에 대한 징계 또한 내립니다. 모세는 진 문에서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을 불렀는데, 레위 지파가 나왔습니다. 그들에게 각자 허리에 칼을 차고 각 사람이 형제와 친구와 자기 이웃을 치라고 합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모세의 명대로 합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개인적인 관계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관계를 포기할 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레위인이 삼천명이 죽인 것에 대해서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인들은 상당한 부담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만큼금 송아지를 섬긴 이스라엘의 백성의 죄가 심각했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체(남자만 약 60만명)가 멸망할 심판에서 상당한 축소된 숫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섬기는 것에 대한 죄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치 후에 중보자 모세는 하나님께 다시 올라가 중보를 합니다. 모세는 슬퍼하며 그들을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용서하지 않으시려면 자신을 생명 책에서 지워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걸어 백성을 중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생명 책에서 지우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이라고 하시며 백성들에게 내려가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사자를 보내어 인도하시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세의 중보를 듣지 않으시고 백성을 치실 것이라고 합니다(35). 이것은 다음 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33:3).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으면서도 기쁨과 즐거움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때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레위 지파들이 행한 일처럼 괴롭고 힘든 일인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모세와 같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우리의 죄와 실수와 부족함을 채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하지 않은 것을 하거나, 명령하신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는 지 생각해 보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어 우리의 신앙생활을 바로 잡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앞에서 말한 징벌을 내리십니다(32:34-35).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은 것도 징벌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행한 은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들은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백성들은 그들을 단장하지 않음으로 스스로 낮추고 슬퍼합니다(4). 하나님은 그들에게 장신구를 모두 떼어내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심으로 다시 한번 긍휼을 베푸실 준비를 하십니다. 모세는 이제 회막을 이스라엘 진 밖에 치고 하나님을 만나며 계속해서 백성을 위해서 중보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을 찾고 만나고자 하는 자들은 진 바깥 회막으로 나가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 갈 때까지 바라보았습니다(8). 백성들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 기둥이 회막에 내려 회막 문에 섰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백성들을 위해서 모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보면서 백성들은 예배했습니다. 여기서 예배했다는 말은 엎드려 경배했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친밀하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수아는 회막에 남아 회막에 사람들이 함부로 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11).
이어지는 단락에서 모세는 더 깊이 중보자로서 역할을 수행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의 앞서 보내겠다고 약속하는 자를 알려주지 않으셨다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해 주시라는 간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4절에서 “내가 친히 함께 가리라”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면 백성들을 그 땅으로 보내지 마시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삶을 아무리 좋은 땅에서 살아도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15). 주님이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근거였습니다(16).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를들으시고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다시 한번 모세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름으로도 그를 ‘안다’라고 표현하십니다. ‘안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관계적으로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자신에게 보여달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를 바위 틈에 숨기시고 당신의 영광, 곧 하나님의 모든 선한 것, 은혜롭고 거룩한 성품으로 채워진 영광을 지나게 하심으로 모세에게 영광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아니라 본성을 둘러 싸고 있는 영광의 광채를 보여 주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증하신 것입니다(17-23).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백성의 삶은 아무리 좋은 곳에서 산다고 해도 무의미 합니다. 주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마1:23). 또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히1:3). 모세의 중보로 순전히 은혜로 그럴 자격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임재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예수님의 중보로 순전히 은혜로 그럴 자격이 없는 교회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모세에게 하신 약속보다 더 강력하게 성령으로 아예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오늘도 순전히 은혜와 긍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 복된 삶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삶에 감사하며 즐거움이 넘치기 바랍니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겸비하는 모습과 모세의 중보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언약을 다시 세우시기 위해서 모세를 부르시며 돌판 둘을 다시 처음과 같이 다듬어 만들어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대신에 아무도 모세와 함께 산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모세는 두 돌 판을 만들어 다시 하나님의 산, 시내 산에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셔서 모세와 함께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그 이름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시라고 알려주십니다. 여기서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심을 모세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용서하실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제사의 제물을 통해서 그들을 새롭게 하고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1-9).
하나님은 계속해서 언약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 말씀해 주십니다. 그들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어서도 안되고, 그 신을 섬겨서도 안되고, 그들과 결혼을 해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그 땅의 우상들을 모두 찍어서 버려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기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결혼한 남편이신부에게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듯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언약의 남편으로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도록 합니다. 또 그들은 무교절(유월절)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애굽에 인도하여 낸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예배입니다. 또 첫 생명은 다 주님의 것이기에 대속을 해야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6일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은 안식일로 지켜야 합니다. 칠칠절(첫 열매를 거두는 시기), 수장절(곡식을 저장하는 절기)을 통해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반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기록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다시 언약을 맺었음을 확증하고 처음과 동일하게 사십일 주야를 산에서 보냈습니다(18-28).
이렇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다시 갱신하셨을 때, 모세의 얼굴에는 빛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에게 감히 가까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다시 그들을 불러 모아 여호와 하나님께서 산 위에서 하신 말씀을 다 전했습니다(29-35).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깨어진 언약을 다시 세우시며, 출애굽기19-23장까지 말씀한 ‘언약의 책’의 내용을 간추려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대해서 길게 말씀 하시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과 말씀하신 대로 섬길 것을 강조하십니다. 언약 갱신의 핵심은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민족과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했습니다. 율법을 백성에게 전해 준 중보자로서 모세에게 주어진 직분의 영광스러움을 보여줍니다. 백성을 위해서 그 영광을 감춘 것은 모세의 겸손함을 보여줍니다. 이 직분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셨고, 예수님은 모세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을 비춥니다. 예수님은 그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교회에 직분자를 세우셨습니다(고후3:3:13-18, 엡4:10-11). 직분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기 위해서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고, 모든 성도는 세상의 직분자입니다. 모든 성도는 예배를 통해서 언약을 갱신하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예배한 후,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통해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 많은 죄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를 통해서 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에게 영광의 빛을 예배를 통해서 비추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셔서 우리의 죄와 부족함에도 다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또 매 주일 삼위 하나님을 예배할 때 예수님 안에서 깨어진 언약이 새롭게 갱신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 때 하나님의 참된 은혜와 자비와 영광을 경험하시고, 그분의 영광을 반사하는 삶을 일상에서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는 중에 금송아지 사건으로 멀어졌던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회복된 후에 모세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성막과 여러 제사 기구들을 만듭니다. 그전에 먼저 안식일을 지키면서 일하라 말씀이 나옵니다(참고. 31:12-18). 이전에 “여호와의 안식”이라고 하면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강조했다면, 이스라엘 백성 편에서 ‘너희를 위한’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거룩한 쉼을 통해서 일에 너무 치이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성막과 기구들과 또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재료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억지로가 아니라 마음에 원하는 자들이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이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가 만들어 지기 위함 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고후 9:7). 또 백성들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들은 와서 회막과 기구들과 제사장 옷을 만드는데 함께 하도록 합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 중 마음에 감동이 된 사람들, 곧 기쁜 마음과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사람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옵니다. 남녀가 모두 자신의 팔찌와 귀고리 등 장식품을 빼어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전에는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과 제사에 필요한 도구들을 만드는데 사용됩니다. 이전에는 그릇되게 사용되던 물질들이 이제 바르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슬기로운 여인들’은 실을 빼고 가는 베실을 만들며, 염소 털로 실을 뽑아 함께 했습니다. 또 족장들은 같은 보석을 가지고 오고 등불과 향을 만드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가지고 왔습니다(28). 모두가 각자가 가진 분량과 은사대로 여호와께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원하여 예물을 드렸습니다. 이제 성막과 제사 기구들과 제사장 의복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브살렐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조수 오홀리압, 그리고 백성들의 수고로 만들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여 여러가지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홀리압은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들이 체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게 하셔서 그들이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고안하게 할 것입니다(30-35).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마다 각자의 은사와 분량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일로 각자 성막을 짓는 일에 조금씩 기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에 많은 이들이 자발적인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길 원하십니다. 바울은 다른 교회를 돕는 일에 고린도 교회에게 각각 마음에 정한대로 헌금을 하되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일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 곧 바른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 봉사는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자는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하시고 따로 책임을 맡긴 것 같이 이 일에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일은 직분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분자들의 가르침 아래 모든 성도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감당하며 해 나가야 합니다. 자원하는 마음과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예배를 중심으로 주어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브살렐과 오홀리압, 그리고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지혜와 생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 지혜와 총명을 사용하여 명령하신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1). 모세는 이제 백성들의 재료를 다 전해 줍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계속 가지고 왔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짓고도 남을 더 많은 재료가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그것을 알렸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제 그만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2-7). 우리가 생각하기에 많이 가지고 오면 가지고 온 만큼 그것을 가지고 더 크고 더 좋게 만들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마음에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짓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남은 재료가 돌려보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는 데서 멈출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제 마음에 지혜로운 자들이 출애굽기 26장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성막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8절에서 38절까지를 26장과 비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설계대로 정확하게 일치하게 만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6장과 비교할 때 몇몇 사소한 생략은 있지만 단어가 거의 일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그대로 정확하게 브살렐이 감독자로 감독하고 있고 그것을 따라서 지혜로운 자들이 행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은 반복해서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지혜로운 자들이 하나님의 성막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정확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정성이나 열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나타나납니다. 때로 우리의 열심이 지나쳐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좋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성과 열정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면 옳은 열심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정과 정성이 말씀에 근거하는지 살펴봅시다. 예배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임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브살렐은 언약궤를 만듭니다. 성막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규격에 정확하게 맞게 만듭니다(출25: 10-14). 언약궤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 판을 담아 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소의 기구들을 모두 조각목을 기본으로 금을 씌우라고 하신 것은, 조각목은 아카시아나무로 광야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가볍고 견고하며 잘 썩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브살렐은 조각목으로 성소에 둘 떡 상을 만듭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게 만듭니다(출25:23-29). 정말로 지혜롭고 여호와의 영이 충만한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멋진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지키는 사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브살렐은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듭니다. 등잔대에 살구꽃 형상을 넣은 것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살구꽃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깨어 있음’을 뜻하는 말과 유사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항상 깨어 이스라엘을 바라보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브살렐은 조각목으로 분향할 제단, 곧 분향단을 만들었는데, 역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만들었습니다(출30:1-5). 또 자세하게 소개 되진 않았지만, 거룩한 관유와 향품도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브살렐은 자신의 일을 충실하게 해 나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고, 지혜로, 그리고 그가 가진 기술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을 만들면서 브살렐은 그 의미를 하나하나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의미를 넘어, 완성은 보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성물들이 가리키는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거하시는 예수님을 알고(요1:14), 등잔대 사이를 거니시며 세상의 참된 빛이신 예수님을 알고(계 1:13), 우리를 항상 지켜 보시는 예수님을 압니다(행7:56). 또 우리는 주님께서 차려 주시는 참된 생명의 떡 상을 성찬을 통해 봅니다. 나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셔서 그분의 피로 우리로 하나님께서 계신 지성소로 나아가도록 하신 예수님을 압니다(눅23:45, 히7: 25). 그래서 우리는 이 성막과 제사 기구의 의미와 그것을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이루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묵상하며 감사하는 하루가 됩시다. 그분은 오늘도 휘장을 지나 하나님께로 저와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등불같이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이제 브살렐은 번제단을 만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출애굽기27장 1-8절의 말씀 이외의 정보는 없습니다. 역시 말씀 그대로 한 것입니다(1-7). 하지만 이어지는 물두멍을 만든 이야기는 비교적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으면서, 놋의 출처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합니다(8). 그 놋을 회막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인들이 자신의 외모를 위해서 사용하던 것을 하나님의 제사의 도구에 사용하도록 기꺼이 내어놓은 것입니다. 이 여인들인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출애굽기 저자가 이것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여인들의 특별한 헌신으로 물두멍이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성막의 뜰을 만드는 이야기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것 외에 다른 정보는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만들었습니다(9-20).
이제 모세는 증거막을 위해서 레위 사람이 쓴 재료의 항목을 아론의 아들 이다말이 계산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여호와의 성막을 만드는데 들어간모든 물품의 항목을 기록하고, 특히 은이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씩 남자를 대속하기 위해서 드려진 것임을 기록합니다. 또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도 정확히 기록합니다. 금, 은, 놋의 사용처를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예물의 양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그것이 하나도 다른 곳에 쓰이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또 실제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에서 멀어질 수록 값이 싼 금속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21-31).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이 얼마나 컸고, 그 헌신의 결과로 하나님의 성막이 지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바친 예물의 값어치만 생각해서는 안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을 자체를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성인 남자들이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드림으로 충분한 성막을 지을 수 있는 많은 은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또 여인들의 놋을 통해서 물두멍이 완성될 수 있음을 봅니다. 교회의 일은 몇몇 사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크고 작은 헌신으로 세워집니다. 교회를 세우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시고, 그들의 물질과 헌신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물질을 사용하는 것과 관리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해야 함을 보게 됩니다.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나와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은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앞에서 성막과 기구들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만들어 졌습니다(출28장).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었더라”라는 말이 1, 5, 7, 21, 26, 27, 31절에 반복되면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그대로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다른 돕는 사람들이 행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절에서 31절까지 거룩한 옷을 만드는 것에 대한 말씀에서 강조되는 것은 이 옷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된 것이고 그것을 모세가 받아 전했을 때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실현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성막과, 제사 기구들, 그리고 제사장의 옷이 완성되었습니다. 32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브살렐이 감독하고 오홀리압이 그의 조수로 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장막과 그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릴제사의 기구와, 제사장의 옷을 만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에서 드리는 예배의 도구들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고안해 낸 것이며, 그들에게 그 고안하신 것을 할 수 있도록 제공하시고, 지혜와 영을 부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모세가 그것을 모두 검토해 보았을 때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축복합니다. 이제 예배를 위한 준비가 끝났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예배와 그 준비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람의 고안이 아니라주님의 명령에 따라 예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드리는 예배를 준비할 때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가 진행될 때마음과 생각이 예배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일상의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약속한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는지 확인하고 축복을 준 것 같이 우리 주님도 심판의 날에우리의 삶의 열매를 보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지 확인하시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일상의 예배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무엇보다 주일 예배를 잘 준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충만하게 누리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아멘.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고 증거궤와 상과 등잔대와 금 향단과 번제단, 물두멍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그것에 관유를 발라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만, “첫째달 초하루에”라는 새로운 정보가 추가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만 2년이 되는 첫 날입니다(17절).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인 시간과 각 기구들의 위치를 다시 말씀해 주시면서, 그것들을 만들 때 뿐만 아니라 배치하고 사용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도록 요구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데리고 회막 문으로 가서 물로 씻기고 그들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고 합니다. 기름을 바름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기름을 부음을 받아 거룩하게 대제사장과 제사장으로 구별되어 평생을 섬겨야 합니다. 백성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다 행한 것 같이, 모세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정확하게 행합니다(16).
이어지는 단락에서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확하게 성막을 세우고, 기구들을 배치하고,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어 세우고, 기구들에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했는지 보여줍니다(16-33). 이렇게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행하였을 때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구름과 영광이 너무 충만하고 압도적이어서 모세조차도 회막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하나님께서 성막이 완성되기를 간절히 기다리셨다가, 완성이 되자마자 그 위에 내려오신 듯한 느낌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오홀리압과 브살렐과 모세가 당신의 말씀대로 하나하나 해나갈 때, 그것을 보시면서 완성을 기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목이 곧은 백성과 함께 광야의 여정을 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것을 성막이 완성될 때 실행하셨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구름 가운데 있는 불로서 성막에 임재하심을 보여주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성령을 보내셔서 아예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함께 하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순종과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구별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도 그 말씀대로 섬기기 원하십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구별되게 예배합시다.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순종과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출애굽기는 모세를 통해 브살렐과 오홀리압, 그리고 백성들 성막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들고 배치하였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 위에 임하는 것으로 끝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 교제하시기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교제하기 위해서 먼저 그들의 죄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레위기는 그들의 죄를 어떻게 해결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지 말씀합니다. 백성들은 제사를 통해서, 그리고 삶을 통해서 거룩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제사들을 정하신 것들은 결국 참된 제사장과 제물이 되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그리고(혹은 그때에)”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출애굽기와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보여줍니다. 회막에 임재하신 하나님은 모세를 회막을 부르시고 어떻게 백성들이 불로 완전히 태우는 제사(번제)를 드려야 할지 말씀해 주십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동물을 제단에서 태우는 제사를 하려면 먼저 가축 중에서 가지고 와야 합니다. 들에서 잡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집에서 키우던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가지고 와야합니다(2). 그리고 그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아프지도 않고, 흠도 없는 온전한 제물이어야 합니다. 그 가축을 가지고 오면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이 그 가축의 머리에 안수를 함으로 자신의 죄를 전가 혹은 자신과 동일시 하여, 그 사람이 제물을 잡습니다(5절, 제사장이 잡는 것이 아님). 그러면 제사장들이 와서 피를 가져다 회막 문 앞에 제단 사방에 뿌리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나무를 놓습니다. 그리고 각 뜬 것의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에 전부를 불사릅니다. 양이나 염소로 번제를 드릴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를 태웁니다. 또 새의 번제의 방법도 나오는데, 산 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드립니다. 새를 제물로 드리는 것은 특별히 아주 가난 사람을 위한 것으로 비둘기는 양이나 염소에 비해 값이 싼 가축이었기 때문입니다. 새를 제물로 드릴 때에도 하나님은 그것을 소나 양으로 드린 것과 동일하게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17). 완전히 태우는 제사인 번제를 통해서 하나님은 백성들의 완전한 헌신을 요구하시고, 특별히 제단 주위에 피 흘림을 통해서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피흘림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대로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는”것입니다(히9:22). 따라서 번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완전한 헌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온전히 자신으로 드린것을 미리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게 해주시고, 죄의 댓가는 받드시 피흘림을 동반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전적이고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전적인 헌신을 이루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피도 흘리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살아갑시다. 또 죄를 미워하고,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길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제사 가운데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인 소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곡식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곡식을 빻아 먼저 가루로 만들어 기름과 유향을 함께 제사장에게 가지고 갑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모든 유향을 제단 위에서 불로 태웁니다. 불로 태우기 때문에 ‘화제’입니다. 그리고 소제물의 남은 것은 제사장이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가지고 온 사람이 다시 취할 수 없습니다(1-3).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표현합니다. 또 가루가 아니라 화덕에 구운 것으로도 예물을 바칠 수 있었는데, 다만 누룩을 넣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다르고 가루로 드리는 소제와 방법은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냄비로 만든 것으로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소제물에 누룩과 꿀을 넣지 않고 소금을 치는 것입니다(11-13). 누룩과 꿀은 부패를 유발하기 때문에 죄와 부정을 상징합니다. 또 당시 다른 신에게 제사할 때 흔히 쓰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을 넣어야 합니다. 소금은 지속성과 부패를 방지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소금 언약은 이 언약이 변질되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곡식의 첫 수확물을 하나님께 소제로 드림으로서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했습니다.
소제는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리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그 중의 일부를 구별하여 다시 돌려 드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소금을 통해서 그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늘 신실하게 변함 없이 살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마 5:13). 세상에서 짠맛을 잃지 않고, 변함 없이 하나님의 언약 관계에서 살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세상에서 짠 맛을 잃지 않고 썩어져 가는 곳을 되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은 자발적인 제사의 하나로 화목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화목제의 본래 뜻은 “온전하다, 끝내다”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적대감을끝내고 평화와 연합을 회복하는 것이 화목제의 목적입니다. 관계의 회복을 위한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흠 없는 수소, 암소, 암양, 숫양, 숫염소, 암염소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제물을 회막 앞에 가지고 와서 제물에 안수하고 본인이 잡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제물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두 콩팥과 간에 덮인 꺼풀과 함께 태웁니다. 이 화목제의 구체적인 의미는 7장에 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3장에서는 어떻게 화목제를 드려야 하는 지 방법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배의 방법은 중요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특별히 ‘두 콩팥’을 드리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콩팥’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의 장소가 있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콩팥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든 생각과 마음을 주님께 바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생각과 마음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순종을 상징합니다. 우리 주님의 자발적인 순종으로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된 관계를 종식 시킨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되셨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받으실 만한 제물로 아버지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려야 어버지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가지고 오시기 위해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께 감사하여 하나님과 화목 된 관계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다해 예수님이 하신 일에 감사하며 우리의 마음을 마음껏 드립시다.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 말씀 읽기로 마음껏 나아가 교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4-5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는 제사는 자발적인 제사가 아니라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반드시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제사라고 해서 ‘속죄제’라고 부릅니다. 속죄제는 5장에서 나오는 ‘속건제’와 다른데, 속죄제는 고의나 알지 못하고 죄를 지었을 때 용서를 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다른 사람 또는 여호와께 속한 것(십일조나 제사 제물)을 알지 못한 채 취하여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를 살펴 보면 제사장이 그 제물을 받아서 기름과 내장은 태우고, 그 피를 뿌리고, 고기는 진영 밖에서 사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대상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른 제물을 요구하시고, 피를 뿌리는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죄를 지은 사람이 제사장이나 회중 전체이면 반드시 수송아지로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가장 비싸고 큰 제물입니다. 또 소의 피를 성소 안에 있는 휘장에 일곱 번 뿌리고 성소 안에 있는 향단에도 바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제단 아래에 쏟아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나머지 반면에 족장이 속죄제를 드릴 때는 숫염소를 드리고 피는 제단 뿔에 바릅니다. 또 평민의 한 사람이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암염소를 드리고 피는 제단 뿔에 바릅니다. 그리고 평민들이 제사를 드릴 때는 어린 양으로도 드릴 수 있는데, 암컷으로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죄제를 통해서 알면서도 지은 죄이든, 알지 못하고 지은 죄이든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죄를 사함 받도록 하십니다. 어떤 범죄이든 하나님께 마땅히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제사 후 고기를 제사장이 먹지만 속죄제의 고기는 진영 밖에서 불 살라 죄가 언제나 회중 안으로 들어 오지 못하도록 멀리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속죄제를 드리는 대상에 따라서 제물을 다르게 하고 피를 다른 위치에 뿌리는 것은 그만큼 제사장이나 회중 전체가 짓는 죄가 신자 개인이 짓는 죄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부르지만, 그 죄가 미치는 영향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짓는 죄는 백성이 지은 죄보다 공동체에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지성소 바로 앞 휘장에 피를 뿌려 거룩하게 하는 것은 제사장과 회중 전체의 죄가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 바로 앞까지 닿아 그 곳에 피를 뿌려 속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이나 회중 전체가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에 더 큰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고 죄를 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는 죄의 잔재가 남아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죄를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하여 씻음을 받고, 그 죄를 멀리하고, 우리를 죄로부터 지키도록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죄를 멀리하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지은 죄를 회개합시다. 또 국가의 지도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 그리고 가정의 부모들이 더욱 죄를 멀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아멘.
앞 장에 이어서 5장 초반부는 속죄제를 다룹니다. 그런데 죄의 성격이 좀 다릅니다. 4장에서 실수로 혹은 모르고 명령을 적극적으로 어긴 것에 대해서 속죄를 했다면, 5장에서 속죄를 해야 하는 죄는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입니다. 총 세 가지 경우를 다루는데, 먼저는 다른 사람의 저주 소리를 들었음에도 증인의 역할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부정한 것들의 사체에 닿아 부정하게 되었는데 깨닫지 못하다가 나중에 깨닫게 되었을 때 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그 맹세를 실행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속죄하여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어긴 것도 죄이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는 것, 모르고 한 것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으로 바쳐야 합니다. 만약 그가 가난하여 양을 살 수 있는 형편이 안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 비둘기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서 한 마리는 속죄제로, 한 마리는 번제로 드려야 합니다. 혹시 그가 너무 가난하여 비둘기 조차도 살 수 없다면곡식으로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보통 곡식 제사(소제)와 달리 속죄제로서 곡식을 바칠 때는 기름을 섞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죄로 인해 얻은 허물을 용서 받아야 합니다(1-13).
14절부터는 속건제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 거룩한 물건들, 곧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과 여러 성소의 기구들, 십일조, 제사장의 몫으로 주어지는 고기 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5절에서 범죄 했다는 말은 “믿음을 배반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지 않거나 감추거나 성별 된 것에 침해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배반한 것으로 속건제를 드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떤 고기가 하나님께 바쳐진 것임을 알지 못하고 먹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때 그는 흠 없는 숫양을 바치고, 자신도 모르게 먹은 것의 20프로 더해서 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물을 혼자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 숫양의 가치를 제사장이 정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알지 못한 채 어겨도 허물이 있어 벌을 당합니다. 때문에 제사장이 지정한 가치에 따라서 흠 없은 숫양을 속건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갚음이 되고 이웃에게 갚음이 되었습니다(한글 번역 “그가 여호와께 참으로 잘못을 저질렀음이니라”는 “그는 분명하게 여호와께 갚아 주었다.”로 번역 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드려진 속건제로 하나님께 갚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으로 했기 때문이지 범죄자가 하나님께 실제로 배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재산을 알 지 못한 채 취하거나 범했을 때 드렸습니다. 무지함이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모르고 짓는 죄도 하나님 앞에서 죄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속건제물이십니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취한 것도 용서하시기 위해 피 흘리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범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죄가 없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알지 못하고 범한 것도 분명히 죄이고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죄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로 속건제를 규정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죄 뿐만 아니라 미쳐 깨닫지도 못하는 죄도 용서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한 만족이 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알지도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죄도 예수님 때문에 용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게 되었을 때는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 건강, 물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 시간을 내어 기도하고 말씀을 읽는 것이고 주님께 일정 부분 헌신하는 것이고, 주일에 드리는 헌금과 십일조 등으로 표현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것을 우리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것을 훔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고 있다면 우리의 속건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또 모세에게 어떤 경우에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것을 훔친 것이 아니라 이웃의 것을 훔쳤을 경우에 어떻게 해야하는지 보여줍니다.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그 사실을 부인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그 사실을 부인하고 줍지 않았다고 거짓 맹세했으나 나중에 그것이 사실로 밝혀지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죄인은 감추거나 훔친 물건을 주인에게 20퍼센트를 더 보상하여 돌려 주고 모세가 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에 흠이 없는 것을 속건제로 드려야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1-7).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웃을 속이고 이웃의 것을 훔치는 죄는 단지 이웃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심을 알려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한 계명을 어기면 그것을 명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결이 됩니다.
1장부터 6장 7절까지 백성들을 중심으로 제사에 대해 설명을 하셨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제 아론과 그의 자손, 곧 제사장을 중심으로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 지 알려주십니다. 제사장은 번제를 아침과 저녁으로 드리며 제단에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합니다. 또 벌거벗고 제사하는 다른 이방 제사장들과 달리, 항상 속 바지를 입고 제사장의 의복을 입고 제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를 버리러 진영 밖으로 나갈 때는 제사장의 옷 말고 다른 옷을 입고 정한곳에 버리러 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이 소제를 드릴 때에는 고운 가운 한 움큼과 기름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함께 태워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나머지는 아론과 자손들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룩을 넣지 않고, 거룩한 회막 뜰 안에서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사장들의 소득이 되었고, 그것은 구별되어 거룩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먹는 사람도 거룩해야 먹을 수 있습니다. 또 아론을 이어 대제사장이 될 아론의 자손도 그날에 여호와께 소제로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 절반은 아침에, 절반은 저녁에 드리고 그것을 기름으로 반죽하여 철판에 굽고, 기름에 적셔 썰어서 소제로 여호와께 드리되 그 남은 것은 먹을 수 없었고 완전히 불에 태워야 했습니다(15-23). 이어서 속죄제의 제물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속죄제의 제물 중 일부는 제사장이 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기를 삶은 토기는 깨야 하고, 유기에 삶았으면 그릇을 닦고 물에 씻어야 했습니다. 또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죄한 고기는 먹을 수 없고 태워야 했습니다(24-30). 항상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형제와 자매들과의 관계가 항상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의 형제 자매에게 행한 잘못은 곧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용서와 사과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과 이웃 앞에서 하는 것이 동시에 가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말씀에서 제사의 지침을 통해서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의무)과 먹을 수 있는 것(권리)을 말합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통해서 나오는 곡식과 고기의 일부를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에 따라서 취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동시에 제사장에게 속한 고기가 어떤 것이라도 남게 되면 소각해야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제사장이 항상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으로부터 구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희생 제물로부터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도 하나님이 매일 채워 주시는 양식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부를 축적할 수 있지만 그 부요함을 의지하기 보다 하루하루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공급하심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매일매일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갑시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의무(감사와 예배)를 다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6장에 이어서 제사장을 중심으로 속건제를 드리는 규칙에 대해서 오늘 말씀은 시작합니다. 기본적으로 속건제는 속죄제와 드리는 규칙은 같습니다(7). 다만 피를 성소의 휘장에 뿌리는 것이 차이가 있습니다. 속죄제와 마찬가지로 제단에서 태우지 않은 속건제 고기는 제사장이 가집니다. 또 하나 추가로 언급되는 것은 번제물의 가죽을 제사장이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소제물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화덕에 구운 소제물과 냄비에나 철판에서 만든 소제물은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에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 외의 소제물, 곧 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은 모든 아론의 자손들이 균등하게 분배를 합니다(10). 제사장들 안에서도 균등한 분배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어서 화목제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화목제의 종류가 언급되는데, 먼저 감사제(12)가 있습니다. 감사제는 바치는 자의 사랑과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드립니다. 서원제(16)는 서원을 할 때 만들어지는 약속이 응답될 때 드리는 화목제입니다. 또 하나는 스스로 원해서 기쁨으로 드리는 자원(낙헌)제입니다. 이것은 한 가족이나 혈족이 하나님 앞에서 축하할 일이나 기념할 만할 일이 있을 때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입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은 그날에 다 먹어야 하지만, 서원제와 자원제로 드리는 화목제사의 제물은 이튿날까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 규칙을 어기고 셋째 날에도 그 고기를 먹게 되면 그 제사 자체가 무효가 되고 죄를 짊어지게 됩니다(18). 화목제의 특징은 제사를 드린 후에 고기는 빨리 먹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또 그 고기는 제사장 뿐만 아니라 제사를 드리러 온 가족과 사람들 가운데 부정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을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시체를 만졌거나, 몸에 전염시키는 피부병이 있거나, 출산하진 얼마 되지 않았거나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먹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제물의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름과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이 지켜야 할 규칙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화목제는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지고 와야지 종을 시키거나 다른 사람이 가지고 오게 해서는 안됩니다(30).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기름과 가슴 부분을 가지고 와서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것을 흔들어 하나님께 바치고 기름을 불 사르고, 또 그 오른쪽 뒷다리를 가지고 가면 제사장은 그것을 들어서 하나님께 바친 후 그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이 오른 쪽 뒷다리는 제사장이 자기의 소득으로 삼아 가집니다. 화목제물 중에서 흔들어 바친 가슴 부분 고기와 들어서 바친 고기를 제사장의 소득으로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합의에 의해서 정해 진 것이 아니라 아론과 그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날에 세운 것임으로 함부로 변경할 수 없는 제사장들의 영원한 소득이 됩니다(35-36). 또 앞에서 언급된 모든 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언급함으로 7장이 마무리 됩니다.
화목제는 감사와 기쁨과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들과 기쁨을 나누는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에서 제사장의 몫이 적지 않게 언급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규례는 제사장들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알게 하셨는데, 모든 백성들이 모든 제사장이 자신들의 제물에서 그 몫을 취하는 것을 기뻐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약에서 바울도 사역자들이 마땅히 취할 수 있는 몫을 언급합니다(고전9:7-14). 복음 사역에 신실하게 삶을 헌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물을 감사히, 그리고 명예롭게 받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사례는 월급이 아니라 목사의 봉사에 대한 회중의 감사의 표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기쁨과 감사로, 몫을 받는 제사장은 그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하고, 감사와 기쁨을 예배 가운데 표현해야 합니다. 찬송과 헌금은 그 성격이 같습니다. 감사와 기쁨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목제물로서 죽으심을 기뻐하고 감사함을 찬송과 예물로 표현 합시다. 날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대제사장과 제사장 위임식을 거행하도록 하십니다. 이를 위해 제사장 의복과 거룩한 기름인 관유와 속죄제를 위한 수송아지와 위임식을 위한 숫양 두 마리(번제를 위해 한 마리, 위임식을 위해 한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를 가지고 모든 백성을 회막에 모으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을 따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에 있는 물두멍에서 씻긴 후 아론에게 대제사장 옷을 입히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그 띠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적힌 패를 붙입니다(1-9).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아론에게 행합니다. 이어서 거룩한 기름(관유)를 가지고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들(분향단, 떡상, 촛대)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회막 뜰에 있는 모든 기구(물두멍, 번제단과 그 받침 등)에 발라 거룩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아 론의 머리에 관유를 부어 대제사장으로서 거룩하게 구별합니다. 또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속옷을 입히고 띠를 띠우고 관을 씌웁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명하신 그대로 하였습니다(10-13).
또 모세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해서 제사를 집례합니다. 먼저, 속죄제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여 그들의
죄를 전가, 혹은 그들과 수송아지를 동일시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수송아지를 잡습니다. 그 피를 제단 네 모퉁이에 바르고 나머지는 제단 밑에 쏟습니다.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을 제단 위에 불사르고 나머지 가죽과 고기와 배설물은 진영 밖에서 불살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제사를 행합니다. 이어서 양과 숫양으로도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피를 아론과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직분에 나아가기 전에 그들의 죄를 먼저 해결하고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모세는 거룩한 기름과 제단 위에 있는 피를 가지고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려 그 옷도 거룩하고 고기의 나머지 부분과 무교병 광주리에서 남은 떡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날에 먹도록 하고 나머지는 불사르라고 합니다. 이 위임식을 일주일 동안 행하되, 위임식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것을 지키며 회막을 나가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아론과 그 아들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지만 여호와 앞에서 죽음을 면할 것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대로 행합니다(36).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모든 위임식이 끝난 후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옷을 먼저 입고 위임식을 한 후 그 피로 거룩하게 구별되어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옷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거룩한 직분에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기름부음은 거룩하게 구별된 그들에게 그 직무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그에 합당한 능력을 주실 것을 상징합니다. 제사장으로 세워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 제사장들이 제물의 피가 아니면 하나님께 설 수 없듯, 예수님의 피를 의지 하지 않는 자는 기본적으로 어떤 직분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고, 피 뿌림을 받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거룩한 나라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벧전2:9).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행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과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이런 신자들 가운데 교회의 직분자로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 회중을 통해서 직분자를 부르시고 세우실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지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 직무를 감당하는 능력과 힘을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7일간의 제사장 위임식 마지막 날이 지났습니다. 그 후 첫날인 여덟째 날에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또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타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1-4). 이제는 모세가 아니라 제사장이 본격적으로 활동합니다. 지난 7일 동안 거룩하게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직무를 하기 전에도 역시 자신을 위해서 먼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5-7). 아론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도 아론을 도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립니다(8-11). 한번 거룩하게 구별 된 것으로 끝이 아니라 제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죄를 용서받으며 그 거룩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론은 온 백성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역시 '규례대로' 모세가 명령한 대로 정확하게 행합니다(12-21). 아론과 제사장과 장로와 모든 백성을 위한 속죄제, 번제, 소제, 화목제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졌습니다. 아론이 모든 백성을 위해 축복함으로 백성을 위한 제사가 완료됩니다. 이에 모세와 아론은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그리고 다시 백성을 축복합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태웁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 자손들과 장로들과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위한 제사를 받으셨다는 표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론이 그대로 했을 때, 그리고 백성도 그 말씀 그 대로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하나님께서 예배를 명령에 따라서 했을 때 그 예배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 백성을 축복하셨고,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 하신 대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예배 가운데 드러내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매 주일의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전심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아멘.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의 직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그 날에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지않은 다른 불로 제단에서 제물을 태우려고 하자 그 불이 나답과 아비후를 살랐습니다(1-2). 이것은 단순한 사고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단 불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제사를 집례하지 않은 제사장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당신을 섬기는 제사장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거룩하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욱 더 드러내시는 행위였습니다. 아론은 침묵으로 하나님의 옳으심을 인정합니다(3). 나답과 아비후는 타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옷은 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5). 모세는 아론의 남은 아들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을 슬퍼하기 보다 나답과 아비후의 직무를 계속하게 함으로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 미침을 면하게 하라고 합니다. 죽은 자를 슬퍼하고 애통하는 일은 백성이 할 것이라고 합니다(6).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여 더 큰 화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독주와 포도주를 금하는 말씀을 아론에게 하십니다. 아마도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진 않은 불을 드린 원인이 포도주나 독주와관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석가들은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시고 분별력을 잃은 상태에서 여호와께서 명하신 불을 드렸다고 봅니다. 제사장들은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제사를 하고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쳐야 합니다(11). 그리고 그날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아론은 제사장이 먹어야 할 몫을 먹지 않고 태웠습니다. 모세가 그것을 알고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아론은 자신이 속죄제를 드리고 번제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죽었는데, 자신이 이 속죄제물마저 먹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론이 지극히 거룩한 것을 먹을 자격이 없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모세는 그 대답을 좋게 여겼습니다(20).
하나님께서는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함과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예배를 거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대로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면서 스스로 더욱 더 순종하고 거룩하게 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제사장들은 거룩한 것들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늘 바른 분별력을 가지 하나님께서 주신 규칙에 맞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고 제사의 규례를 잘 기억하고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술을 금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직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에서 직분자들의 자격 중 하나로 ‘술에 인박히지 않으며(딤전 3:3, 8)’가 있습니다. 직분자는 말씀을 바르게 판단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 스스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예배를 말씀을 따라 잘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더욱 거룩하게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직분자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들로서 더욱 경건하고 거룩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협력합시다. 또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스러움을 드러내시고, 항상 말씀을 따라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참된 제사장들로서 살아가는 하루가 됩시다. 아멘.
하나님은 이제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별된 백성으로서 일상의 삶에서 지켜야 할 규칙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구속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그 생활의 방식에서도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방 민족들과는 달라야 했습니다. 기본 원리는 정한 것(영:clean/네: rein)과 부정한 것(영: unclean. 네: Onrein)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11장은 동물과 관련해 어떤 것이 부정하고 정한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을 하는 짐승(예를 들어, 소)은 먹을 수 있지만, 굽은 갈라졌지만 되새김을 하지 않은 동물(낙타, 토끼), 혹은 되새김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은 동물(돼지)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1-8). 또 물고기 중에서도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고등어, 갈치)은 먹을 수 있지만,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메기, 미꾸라지 류)은 먹을 수 없습니다(9-12). 또 새 종류에서도 독수리, 매, 타조, 올빼미 등은 먹을 수 없습니다(13-19). 곤충들 중에서는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는 곤충은 다 혐오하되, 메뚜기와 같이 뒷다리로 뛰어 다니는 것은 먹을 수 있었습니다. 부정한 짐승과 새와 곤충들의 시체를 만지거나 닿으면 그 사람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하루 동안 정결 예식을 해야 했습니다. 또 길 짐승 중에서 부정한 것은 두더지, 악어, 도마뱀 종류입니다. 그리고 뱀과 같이 땅에서 기는 것을 다 부정합니다. 이런 것에 닿은 옷과 나무 그릇도 물에 담그고 하루동안 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흐르는 물이나 고인 웅덩이에 그것의 사체가 있으면 부정하여 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심지 않은 씨에 묻었을 때에도 부정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물에 닿았는데, 그 상태에서 사체가 닿으면 부정해 집니다. 다시 한번 땅에 기어다니는 짐승과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은 부정하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이런 것들로 자신을더럽히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당신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몸을 거룩하게 하고, 거룩을 유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44-45). 거룩은구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이렇게 생활의 규칙 가운데 음식을 가려서 먹는 것을 통해서도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당부하십니다. 이런다른 생활 규칙이 곧 그들의 거룩과 연결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연결됩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런 규례를 그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부정한 것을 정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기록된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며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원리를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고 일하길 원하십니다.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가 거룩하길 원하십니다.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기 원하십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해, 자신의 성공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세상사람들과 다른 삶의 목적과 방식으로 살기 원하십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인이 해산을 하고 난 뒤의 정결 규례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먹는 것에 대한 규례 다음으로 자녀를 낳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이 먹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지켜야 할 규례가 있었습니다. 여인이 아기를 낳고 나면 피를 흘리게 되기 때문에 부정하게 됩니다. 이는 더럽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칠일 동안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팔일 째에 아이를 데리고 가서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의 표피를 베는 것으로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33일이 지나야 여인은 부정하게 되는 기간이 지나정결하게 됩니다. 총 40일동안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40일이 차면 번제와 속죄제를 위해서 양과 비둘기를 드려야 합니다. 또 딸을 낳았을 때에는 그 기간이 두배 입니다. 그래서 14일간 부정하고 80일동안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는 정하게 되는 기간을 채울 뿐만 아니라 쉼을 주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자녀를 낳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태어날 때 그들이 또한 죄인인을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가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해야 할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또 산모는 몸에서 유출이 있는 부정한 상태에서 정하게 되기 위해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여자 아이를 낳았을 때 더 길게 집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성경에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학자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 때 당시에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 출혈이 더 길게 나오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여자아이들은 이후에 그들이 월경으로 인해서 부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여자아이들을 남자아이들보다 열등하게 여긴 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산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특별히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씀하신 ‘여자의 자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게 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출산은 인류의 지속성을 보장하고 언젠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바라는 소망의 행위였습니다. 때문에 출산 자체가 부정한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출산 후의 출혈이 부정한 것임을 본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번제를 바치는 것은 모든 자녀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전적인 헌신을 의미하고, 속죄제는 자녀들을 죄성의 오염으로부터 지키겠다는 열망과 경건을 보여줍니다. 또 산모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그 부정함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허락하신 것은 언약의 자녀로 양육하기 위함 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자식들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며 섬기던 신에게 제물로바치던 이방 민족들과 전혀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우리에게 자녀를 주셨고, 또 주실 것에 기대하며 자녀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구속이 필요한 존재로,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을 하는 존재로, 언약의 자녀로 양육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자녀들을 바라보는 관점도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에 따라서 바르게 가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나병을 진단하고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나병’은 흔히 ‘한센병(문둥병)’만을 의미하지 않고, 악성 피부 전염병을 모두 포괄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묘사되는 병의 증상과 진단은 의학적인 목적이 아니라 제사법적인 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판단하고 진단하는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피부에 나는 병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피고 그것이 전염력을 지닌 악성 피부병인지 판단하고 격리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것은 부정한 것, 곧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전염력을 가지지 않은 단순한 피부병일 경우에는 정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12-13). 만약에 전염력이 있는 피부병이 나았다면 사람을 보내어 제사장을 오라고 해서 자신의 병을 보아 진단하도록 합니다. 그들은 진영 밖에서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제사장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제사장을 불러야 합니다. 제사장이 진찰하여 나았다면 그를 정하다고 선언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증상이 있다면 일주일을 더 격리하고 판단해야 했고, 만약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여전히 부정하다고 하고 격리합니다. 또 화상 때문에 생긴 피부염도 살펴 보아 퍼지지 않으면 정하다고 선언하고, 퍼진다면 부정하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피부에 털이 있는 곳의 모근에서 발생할 수 있는 피부염도 언급합니다. 옴도 일종의 피부병으로 취급했습니다. 제사장은 증상이 있는 사람을 일주일간 격리를 시키고 이후에 그것이 전염력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살피고 피부에 퍼진다면 부정하다고 하여 진영 밖으로 보내고 전염되지 않는다면 그를 정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후에도 피부에 퍼지면 부정하다고 하고 격리시켜야 합니다. 또 일반적인 탈모증으로 인한 대머리는 정하지만, 악성 피부병으로 인해서 머리가 벗겨진 경우에는 부정하다고 선언하고 진영 밖에서 살아야 합니다.
또 사람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입는 옷에도 악성 곰팡이나 사상균이 번식하는 것도 제사장이 조사를 합니다. 만약 옷에 악성 곰팡이나 사상균이 있다면 제사장이 부정하다고 선언하고 옷을 빨고 그 부분을 찢거나 심한 경우에는 불태워야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제사장은 악성 피부병과 옷의 균들을 진단하고 판단하여 공동체를 보호했습니다.
몸에 이런 악성 피부병들이 생기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 그 자체로 공동체에 병이 퍼질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하게 취급되었고 나을 때까지 격리해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그 병에 노출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살피고 공동체를 보호하고 그 사람을 격리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몇몇 악성 피부병(한센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진단만 할 뿐이지만 참된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그들을 낫게 하시고 정하다고 하셔서 공동체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병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죄의 현상이었습니다. 주님은 죄의 현상인 병을 고치심으로 죽음과 죄를 정복하신 분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외 되었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교제를 회복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악성 전염병과 같은 죄들을 멀리하고 예수님께서 회복하신 참된 교제를 주님과 형제 자매들과 누리며 서로를 향한 회복된 사랑으로 격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이 병이 낫고 다시 공동체로 돌아오기 위한 규례를 말씀합니다. 역시 제사장이 그 병이 나았는지 확인을 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그를 진영 밖에서 만나서 관찰을 하고 병이 나은 것이 맞으면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정결하게 될 사람은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박하나무의 일종인 우슬초 풀을 가지고 옵니다. 제사장은 그 사람에게 흐르는 물(생수)을 담은 질그릇에서 새 한 마리를 잡고 다른 한 마리는 죽은 새의 피를 찍어 날려보냅니다. 또 제사장은 그 사람에게 피가 섞인 물을 우슬초에 찍어 뿌립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 사람이 죽음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줍니다. 또 그 나은 사람은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몸을 씻고 자기의 장막 밖에서 칠일 간 더 머물고 칠일 째에 되는 날에 모든 털을 밀어 확실히 병이 나았는지 다시 확인합니다. 그리고 팔일 째에 하나님께 정결하게 되는 제사를 드립니다. 번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 모두 드립니다. 특별히 그 사람에게 마치 제사장이 구별하여 세워질 때와 같이 제물의 피를 그의 오른 쪽 귓부리와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릅니다. 또 기름도 취하여 같은 부위에 바릅니다. 이렇게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치유된 그 사람의 부정함이 완전히 없어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그 사람이 공동체 안으로 완전히 받아 들여지는 것을 크게 축복하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그 제사는 병이 나은 사람의 형편에 따라서 속죄제와 번제는 새로대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건제는 반드시 어린 양으로 드려서 피와 기름을 오른쪽 귀와 손가락과 발가락에 발라야 했습니다(1-32). 그러기 위해서온 가족이 힘을 모아 제물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집에서 발생할 수 있는 나병 색점에 대한 규례를 말씀합니다. 흙으로 만든 집 벽에 발생할 수 있는 악성 균을 말합니다. 이것은 번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집 주인은 집안의 물건들을 다 치우고 제사장을 집으로 오게 하여 그 색점을 살피도록 합니다. 그 색점이 푸르고 붉은 무늬가 있고, 벽보다 우묵하면 제사장은 그 집에서 나와 일주일 동안 집을 폐쇄하였다가 일주일 후에 다시 살펴 그것이 벽에 퍼졌으면 그 부분을 파내어 성 밖에 있는 곳에 버리고, 다른 돌과 흙으로 바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색점이 발생했다면 제사장이 다시 살피고 만약에 집에 그 색점이 퍼진 것이 맞다면 그 집을 헐고 그 돌과 재목과 흙을 성 밖에 버리고 그 집에 있었던 사람은 하루 동안 부정하고, 그 집에서 잠을 잔 사람은 몸을 씻고 옷도 빨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색점이 퍼지지 않았다면 그 집을 정하다고 선언하고 그 집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새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흐르는 물에서 잡아 그 피와 물이 섞인 것을 집에 뿌리고 다른 한 마리는 놓아줍니다(33-53). 이것이 나병(악성피부병)에 걸린 사람과 균에 오염된 옷과 집에 대한 규례입니다.
이러한 규례들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은 우리의 몸과 옷과 집도 우리의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악성 피부병으로 인해서 공동체로부터 격리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옷을 좀이 먹거나 곰팡이가 생겼다고 찢고 버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집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위협적인 질병에 직면할 때,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격리 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치를 당하는 사람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아서 돌아와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질 때 각종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공동체와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온 공동체도 즐거워합니다. 결국 이 명령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손해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하기를 당연하게 여기는 주변 나라와 달라야 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나 아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유출이 있는 사람에 관한 규례를 말합니다. 몸(생식기)에서 피나 액체가 나오게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것은 생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고, 병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생식기에서 어떤 것이 흘러 나오게 된다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 곧 정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에 부정하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더럽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 법적인 관점에서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부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부정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부정하게 된 사람이 앉은 자리에 정한 사람이 앉게 되거나 그 사람의 침이나 분비물을 맞게 되면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 몸에 부딪히거나 만진 사람도 부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정결의식을 해야 했습니다(7). 그의 옷을 빨고 몸을 깨끗하게 씻고 하루 동안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유출병이 있던 사람이 낫게 되었다면 증상이 없어진 후 칠일 후에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자신의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팔일 째 되던 날에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 주고 한 마리는 속죄제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로 드려 속죄를 해야 합니다. 여기서 속죄를 드리는 이유는 병 자체가 죄의 현상으로 그 사람이 그 죄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께 다시 나아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어서 병 뿐만 아니라 생식기에서 자연적인 현상으로 정액이 배출이 되거나 성관계를 통해서 정액이 배출 될 때에도 몸에서 어떤 유출이 있었기 때문에 부정한 것으로 간주 됩니다. 그런 사람은 몸을 씻고, 정액이 묻은 옷가지와 가죽옷은 부정하게 되어 물로 세탁하고, 하루 후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입을 수 있게 됩니다. 남녀가 관계를 통해서 정액이 배출 되었다면 남녀 모두 부정하게 되어 둘 다 몸을 씻고 하루가 지나야 정결해 집니다. 이로써 부부간의 관계도 그들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약시대에는 여성의 생리현상도 부정하게 여겨졌습니다. 일주일 동안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다른 사람과 접촉을 삼가도록 했습니다. 일주일의 기간 동안 만약 다른 사람이 그가 앉은 곳에 앉게 되면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빨고 몸을 씻는 정결 예식을 행해야 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19-24). 만일 피의 유출이 생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여러 날을 가는 부인병이라면 그 부인병이 나을 동안 부정하게 됩니다. 그 유출이 그치면 일주일 후에 산비둘기 새끼 두 마리나, 집 비둘기 새끼 두 마리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림으로 정결하게 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25-30). 이런 법을 두신 이유가 31절에서 33절에 나오는데, 유출(병)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막을 더럽히지 않고, 그로 인해 그들이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속이고 거룩한 척하며 성소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것까지도 알고 계시고, 정결하게 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은밀한 아픔과 죄도 알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은 자신의 은밀한 병과 아픔을 주님께 가지고 나아가 믿음으로 그분을 만졌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치료해 주시고,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은밀한 곳에서도 계시고, 우리를 보고 계시고, 정결하기 원하시고, 다스리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은밀한 영역에서도 거룩하기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모든 곳에서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우리 삶의 모든 곳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아론의 두 아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향을 피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10장)을 상기하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속죄소)가 있는 지성소(지극히 거룩한 장소)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되고 일년에 한 번 모든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들어갑니다(3-4). 흔히 이 날을 ‘대속죄일’이라고 부릅니다(참고. 레 23:27-33). 그날에 대제사장인 아론은 대제사장의 옷을 온전히 갖추고, 자신을 위해서 먼저 수송아지로 속죄제를 드리고, 숫양으로 번제물을 가지고 오고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속죄제물을 위해 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숫양 한 마리를 가지고 옵니다. 그 후 아론은 먼저 자기와 자기집안을 위해서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또 모든 회중을 위해서 두 염소 중에서 제비 뽑아 한 마리는 속죄제로, 한 마리는 아사셀 염소로 구별합니다. ‘아사셀 염소’는 죄의 짐을 지고 광야로 떠나는 염소입니다(5-10).
아론은 자기와 자기의 가족을 위한 속죄제로 수송아지를 드릴 때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서 분향단에서 불을 가져다가 가져 온 향품을 태워 향기로운 냄새를 피웁니다. 그러면 성막 안은 연기가 가득해 집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백성들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지성소로 들어가 언약궤 위에 있는 속죄소에 피를 일곱 번 뿌립니다. 백성을 위한 염소의 피도 동일하게 뿌립니다. 또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번제단의 뿔에 바르고 땅 위에 일곱 번 뿌려 거룩하게 합니다. 이는 백성의 죄가 하나님의 바로 앞에까지 이를 정도로 많고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사셀로 구별된 염소의 머리에 아론은 그의 두손으로 안수합니다. 이는 온 백성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혹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고, 정해 진 사람은 진영 밖으로 그 염소를 끌고 나가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광야에 염소를 두고 옵니다(11-21). 여기서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땅과 구별되는 땅으로 사탄과 죄의 지배를 받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모든 백성의 죄를 짊어진 염소를 그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또 백성의 죄가 멀리 떠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거룩하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으로 모든 백성을 위한 제사가 끝이 납니다. 그 후에 대제사장은 몸을 씻고 다시 대제사장의 의복을 갖추고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립니다. 광야로 염소를 보낸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그의 몸을 씻은 후에 진영에 들어가고, 짐승의 가죽과 고기와 똥도 진영 밖으로 보낸 자도 그의 옷을 빨고 몸을 씻은 후 진영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22-34). 이렇게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은 모든 백성을위한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이 날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정결하게 되는 안식일의 중의 안식일이며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완전한 대속죄일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참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모든 백성을 위한 속죄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아사셀 염소로서 하나님께 버림 당하여 모든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당하셨습니다. 그분의 사역으로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하늘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여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1-12절은,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라고 말씀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는 용서 받았고,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에 날마다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날마다 이런 우리의 특권을 사용하여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갑시다. 또한 날마다 죄를 멀리하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아론과 그 자녀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짐승(소, 양, 염소)을 도살하는 규칙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을 잡을 때에도 이방 사람들이 하는 것과 달리 하나님 앞에서 잡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화목제물로 바친 제물의 고기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다루어 지는 것은 제물을 잡는 장소입니다(5). 들판에서 제물을 잡는 행위는 당시 이방인들이 하던 관행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동물의 피를 들판에서 흘림으로 추수할 양이 많아질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제사장이 피를 제단에 쏟아야 했으며 그 기름을 살라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도록 한 후에 고기를 먹일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풍요로움은 땅의 신이 아니라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곳에서 잡으면 그 피를 흘린 댓가를 치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속죄제의 피를 뿌리는 것은 대신 희생된 생명을 의미합니다. 본래 제사를 지내려는 사람이 죽어야 하지만 희생제물이 생명을 내어놓은 것입니다(1-9).
또 사냥을 통해서 짐승을 잡게 되었을 때에도 그 짐승을 피 째 먹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든 그들과 함께 거하는 이방인이든 사냥한 짐승이나 새의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자연사한 것이나 다른 짐승에게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을 때에는 그 피를 땅에 쏟지 않았기 때문에, 먹은 후에는 그의 옷을 빨고 그 몸을 씻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의 댓가는 죽음입니다. 생명을 취했기 때문에 다른 생명으로 대속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피째 먹는 것은 그 짐승의 생명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짐승을 먹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과 달라야 했습니다(10-16).
이것은 이스라엘이 지켜야 하는 ‘영원한 규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영원한 규례’는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고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인들도 지켜야 될 규례’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제사에서 짐승의 피는 예수님께서 흘리실 피의 예고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하고 최종적인 희생제물로서 당신의 피를 흘려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구약의 제사의 피흘림은 예수님의 최종적인 희생의 그림자입니다. 그분의 죽으심 때문에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모든 자들이 구원을 얻습니다.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죽은 행실과 양심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힘을 줍니다(히9:14). 또 우리는 예수님의 이 보혈을 성찬에서 마심으로 예수님의 죽음이 주는 모든 유익을 누리고 주님과 연합이 됩니다. 그 연합은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며 예수님께서 피흘림으로 얻으신 영생의 약속과 최후의 부활에 동참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줍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새 생명을 얻어 먹는 것과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입니다(고전10:31). 이것이 영원한 규례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기억합시다. 그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고, 참된 생명을 주셨습니다. 새생명을 얻는 자로서 먹고 마시는 것에서도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지금까지 제사(예배)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일상 생활에서도 이방인들과 달라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성과 관련해서 말씀 하시는데, 본격적으로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당신께서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먼저 말씀합니다. 그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먼저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떠나 온 이집트의 풍속(문화)이나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 땅 사람들의 문화를 따라서 살아서는 안되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1-3).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법과 규칙을 지켜야합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표현은 의지적인 노력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바르게 지키면 생명을 약속하십니다(4-5). 하나님께서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가까운 가족끼리 성적인 관계를 금지하고 계십니다(6-20). 또 자녀를 몰렉 신에게 바치지 말며(21), 남자가 여자와 성적인 관계를 맺듯이 성적인 관계를 맺지 말라고 하십니다(22). 뿐만 아니라 짐승과 성적인 관계를 맺지말라고 합니다(23), 또 동성간의 성적인 관계도 금하십니다(22). 이러한 잘못된 성적인 관계는 차마 입에도 담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을 당시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23).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벌을 주어 그 땅에서 그들을 쫓아내시는 이유입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땅이 더러워졌다는 것은 그런 죄가 굉장히 성행했다는 말입니다. 가나안 백성들은 땅의 신, 나무의 신, 다산의 신 등을 섬기면서 그 신들을 만족시키고 풍요로움을 보장 받으려고 이런 일들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짓을 통해서 풍요로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순종함으로 풍요로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와 같은 일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끊어짐을 당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 올바른 성적인 가치관을 가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 세속의 기준과 법으로 성적인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서 세워야 합니다. 여성들은 남성의 성적인 욕망의 무차별적인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부부 중 한 명을 더럽히는 것은 다른 한 명의 명예를 더럽히고, 부부가 사이에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동물과 성적인 관계를 금지하는 법은 당시에 점술이나 마술 행위의 참여하는 일부로서 행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미래의 필요들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성애는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께서 금지하시던 것입니다. 물론 동성애자들을 모두 죄인 취급하며, 혐오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행위가 옳다고 말해서도 안됩니다.
오늘날 사회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오늘 말씀에서 언급한 모든 성적인 행위를 허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잘못된 성행위를 거부해야 합니다. 성은 부부 사이에만 허락된 신성한 것이며 성적인 영역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법을 통해서 다스림을 받기 원하십니다. 성적으로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행하는 것은 단지 성에 관한 신념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를 섬기고 있고, 누구에게 속하였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혹시 예전에는 몰라서 바른 성적인 가치관을 가지지 못하고 실수한 것 있다면 회개하고 지금 부터라도 바른 성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 바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듣도록 모세를 통해서 또 다른 삶의 규칙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십계명을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을 경외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긴밀히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님을 통해서 당신의 권위로 자녀들을 돌보도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1-4). 화목제물은 반드시 이튿날 안에 먹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이웃과 화해를 이루는 제물이기 때문에 공동체와 함께 먹어야 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일상의 삶은 긴밀히 연결되어있습니다(5-8). 나아가 이스라엘은 추수할 때에도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면 안되고, 떨어진 이삭도 다시 주어서는 안됩니다. 또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서는 안되고, 떨어진 포도알도 주워서는 안됩니다.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해서 버려 두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 줍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입니다(9-10).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함으로 가난한 이웃에 대한 도리를 다하고 풍요할 때 찾아올 수 있는 탐욕의 유혹을 뿌리치도록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거짓 맹세하지 말고, 서로 속이지 말라는 아홉 번째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말고 품꾼의 삯을 제때 주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없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14). 또재판할 때 공정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이웃의 피로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웃을 미워하지 말고 권면하고 견책해야 합니다. 그렇게함으로 이웃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자신을 사랑함과 같이 해야 합니다(18). 이것을 명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반복하여 알려 줌으로 이러한 실천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해서는 안되고, 밭이 두 종류의 씨앗을 뿌려서도 안됩니다. 또 두 재료로 만든 옷도 입어서는 안됩니다(19). 이런 행동은 더 많은 소출과 이익을 위해서는 뭐든지 하든 이방인들의 정신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해방되지 못한 여성 노예라도 성적으로 함부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죄가 되어 속건제를 통해서 용서를 받아야 할 죄로 취급됩니다.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지어 얻는 열매는 3년 동안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4년째 되는 열매는 거룩해 집니다. 하지만 먼저 하나님께 드려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5년째 되는 열매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수있습니다. 이러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첫 4년 동안 먹을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숨어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짐승을 잡아서 먹되 피를 먹어서는 안됩니다. 머리 가를 둥글게 깎는 것과 수염을 끝을 손상하는 것, 죽은 자를 위해서 문신은 하는 것, 딸을 창녀로 만드는 것, 신접한 자를 믿는 것은 모두 이방의 종교적인 관습과 긴밀히 연결된 것입니다. 이런 것에 현혹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보여야 합니다. 종교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노인을 공경하고, 함께 생활하는 거류민을 학대하지 말고, 재판이나 무게를 잴 때 속이거나불공정하게 하지 말고 공정하게 행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을 드러내 보여야 했습니다(23-37).
하나님께서 주신 규칙은 한 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예배에서 드러나고, 이웃 사랑은 우리의 삶의 예배에서 드러납니다. 이 둘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한 셋트 입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그분의 계명을 지킬때, 우리는 이웃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배와 일상의 삶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한 사람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이웃에 대해서 비방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바른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들임을 기억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본문에서는 하나님은 앞에서 말씀한 것들 중에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식을 몰렉 신에게 바치는 사람이 이에 해당됩니다. 그런 사람은 친척과 이웃이 먼저 돌로 쳐야 합니다.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땅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 지방 사람들(친척과 이웃)이 그것을 보고도 돌로 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지방 사람들에게도 진노하십니다(1-4). 또 점이나 굿을 통해서 미래를 예언하는 자들을 따르는 자도 죽음에 해당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부모님을 저주하고 욕하는 자도 해당됩니다. 또한 부부 관계 외에 성적인 관계를 갖는 사람과 가까운 가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사람도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5-14). 나아가 짐승과 관계를 갖는 남여 모두도 사형에 해당합니다(15-21). 하나님은 이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땅이 그들을 토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전에 살던 민족들의 풍습이었습니다(22-23).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싫어하시고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에서 살아갈 때에 그곳의 생활을 본받지 않아야 합니다. 새로운 환경이지만, 그곳에서 살던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감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삶 속에서 드러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먹는 것과 입는 것과 성생활, 종교 생활, 가정 생활 모두 하나님의 법으로 무장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감으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해야 했습니다(26).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 가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에게 사형을 명하신 것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고, 또 과해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그대로 적용할 수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조금도 가볍게 여기면 안됩니다. 이것은 단지 문화적, 시대적 차이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오늘날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죄를 많은 순간 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죽지 않고 회개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지 문화적 차이때문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이런 죄를 짓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 죄에 머물러 있다면 거룩한 삶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또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영적으로 일시적인 죽음을 그 사람에게 교회의 권징(출교)을 통해서 주게 됩니다. 이로써 얼마나 심각한 죄를 지었는지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게 합니다. 구약에서 가족과 주민이 먼저 돌로 쳐 죽이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서로를 위한 권면과 권징으로 영적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세상사람들과 구별되게 삽시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 서로 독려하며 권면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라헬과 레아의 자식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로 얼룩져 있습니다. 현대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보기 힘든 말씀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첩을 두는 것은 큰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자식을 얻기 위해 첩을 두는 일은 관용되던 시대였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을 볼 때에는 이 사건들의 초점이 후손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시기심을 통해서 자식이 많아지게 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고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약속하신 자녀를 인간적인 관점이나 아름다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랑을 덜 받던 레아의 태를 여시고, 라헬의 태를 닫으셨습니다. 하지만 라헬은 자신의 종 빌하를 첩으로 주어 합법적인 자식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빌하를 통해서 단과 납달리를 낳습니다. 이에 레아도 자신의 종 실바를 첩으로 주어 갓과 아셀을 낳게 합니다. 이후에 라헬은 레아의 아들인 르우벤이 가지고 온 합환채를 먹기 위해서 레아에게 남편을 양보합니다. 레아는 다시 잇사갈과 스불론과 딸 디나를 낳게 됩니다(20). 오랜후에 라헬의 기도는 응답되어 요셉을 낳게 됩니다. 이렇게 야곱에게 아들만 11명이 됩니다. 야곱의 가정이 비록 시기와 사랑에 대한 욕심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들의 태를 여시고 자손들을 있게 하시고 야곱의 후손들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와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들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조상들이 될 것인데,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교회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요셉을 낳은 후 야곱은 이제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현재 야곱의 상태를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야곱에게 자손을 주셨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땅에 대한 약속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 약속을 이루고자 그 땅을 떠나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라반은 야곱을 붙잡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더 일을 하도록 합니다. 야곱은 꾀를 냅니다. 이번에는 야곱이 라반을 속입니다. 양과 염소 중에 점있는 것과 아롱진 것, 다시 말하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어서 값을 제대로 못 받는 것을 자신이 가지겠다고 합니다(32-33). 그래서 라반은 문제가 있는 양과 염소를 자기 아들들에게 시켜서 야곱에게 주고 정상적인 양과 염소 떼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습니다(34-36). 그러면 얼룩무늬나 점이 있는 양이나 염소는 태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게 되기에 라반에게 훨씬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야곱은 남은 라반의 양떼를 치면서 양과 염소가 물을 마시며 짝짓기를 할 때 양이나 염소의 눈 앞에 있는 색깔에 영향을 받아 새끼에게 얼룩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는 데 필요한 부를 야곱이 얻도록 하시는 간섭이었습니다(37-43). 이렇게 많아진 부 때문에 라반과 그 아들들은 이제 야곱이 자기의 고향,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땅으로 가도록 허락해 줄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게 야곱에게 당신께서 하신 약속을 지켜 나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으로 많은 자녀들을 주셨습니다. 또 그 약속을 위해서 야곱에게 큰 부를 주시기도 합니다. 야곱의 부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에게 하신 약속을 지켜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때로는 인식하고 때로는 인식하지 못할 때도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는 데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재물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신 복을 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재물의 복을 사용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야곱은 벧엘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목자들을 만나게 됩니다(1-3). 야곱은 그들에게 어디에서 왔는 지 물었고, 하란에서 왔다고 하자 라반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목자들은 라반의 딸 라헬이 양 떼를 몰고 온다고 알려줍니다(4-9). 야곱은 라헬을 보자마자 달려가 라헬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일 수있도록 우물에서 돌을 옮겨 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라반의 조카이며 리브가의 아들임을 알려줍니다. 라헬은 아버지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고 라반은 조카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입맞추고(반가움의 인사) 집으로 인도하여 들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라반의 집에서 일합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일한 것에 대한 값을 정하라고 했을 때 야곱은 그 삯으로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합니다. 라헬의 언니 레아는 시력이 약했고 라헬이 더 곱고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시력이 약했다는 것은 눈에 어떤 병이 있어서 외적으로 볼품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칠년 동안 삼촌 라반을 섬겼고 드디어 약속한 날이 되어 라헬과 결혼하여 합방을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라헬이 아닌 레아를 라반이 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삼촌에게 그것을 따지자 그곳 풍습에서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결혼하지 않는다며 칠일 동안 더 일하면 라헬을 주겠다고 하며 또 칠년을 더 일하라고 합니다. 속임수의 달인인 야곱이 라반에게 속은 것입니다(21-30). 야곱은 졸지에 두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당연히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레아가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함을 보시고 레아의 태를 여셔서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31). 레아를 통해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가 태어나게 됩니다(32-35).
오늘 말씀에서의 핵심 내용은 그동안 속임수로 살아왔던 야곱이 라반을 통해서 속게 되는 것과 야곱의 결혼을 통해서 야곱의 자녀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인간의 악함과 속임수, 질투와 시기 등이 섞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야곱은 속아서 레아와 결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라반의 속임수는 그 자체로 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악함조차도 야곱에게 자녀가 많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는 것으로 바꾸십니다. 또 하나님께서 야곱의 사랑을 받던 라헬이 아니라 덜 사랑 받고 외모적으로 볼품 없는 레아를 통해서 먼저 자녀를 낳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때 볼품 없고 약한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라반에게 속게 함으로 야곱을 연단 시키시고, 레아와 라헬의 경쟁심과 시기심을 통해서도 자녀가 많게 하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 심지어는 잘못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 역사하시고 당신의 약속을 지켜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악함을 연약함으로 정당화해서는 안됩니다. 일부러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역사하길 바래서도 안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연약함 마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지 연약함을 핑계삼아 악함을 정당화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의 연약한 모습에 실망할 때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성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악함과 연약함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말에나 일에나 늘 실수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약함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죄악을 참되게 회개하고, 그것을 넘어 역사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이삭은 야곱에게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 땅이 아닌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아내를 찾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삭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손과 땅과 복의 약속이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야곱은 부모님의 말씀대로 그의 외삼촌이 있는 밧단아람을 향하여 갑니다(1-5). 이삭이 야곱의 장자권을 비로소 인정한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이런 모습을 본 에서는 자신이 가나안 여인과 결혼한 것이 잘못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자신의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과 결혼을 합니다. 이런 에서의 모습은 어느정도 자신의 삶을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지만 해결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마엘도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과 관계를 맺으며 부모님을 만족시키고자 했던 그의 노력도 결국 헛되게 됩니다(6-9). 에서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이 아닌 자기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는 것일 뿐 하나님께 인정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해가 져서 한 곳에 돌을 베게 삼아 누워서 잡니다. 그 때 야곱은 꿈에서 계단 같이 생긴 사닥다리가 그 땅 위에 있고 하늘에까지 닿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 곧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 내리락 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계단 끝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당신께서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밝혀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누운 그 땅을 야곱과 그 자손에게 주고 야곱의 자손이 땅의 티끌과 같이 되어 서, 동, 북, 남쪽으로 뻗어 나가고 모든 족속이 야곱과 그의 자손을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과 늘 함께 하며 어디로 가든지 지켜 주시고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이루실 때까지 야곱을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0-14). 이것은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장면입니다. 장차 야곱의 후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그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이 다 통일(하나가)되게 하실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엡1:10).
야곱은 잠에서 깨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며 경외심을 가집니다.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여기고 그곳에 제단을 쌓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리고 젊지 않은 야곱(당시 약76세)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무사히 다시 그곳으로 돌아와 약속의 땅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어떤 조건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시면 자신도 신실하겠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리브가를 구하기 위해서 밧단아람으로 향하던 아브라함의 종은 낙타와 많은 것을 가지고 갔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밧단아람으로 향하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극도로 험하고 어려운 길을가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타나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야곱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 주신다면 자신도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야곱과 일종의 구두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야곱을 이미 택하셨고, 보이지 않게 그를 인도하시다가 때가 되어 그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를 직접 찾아와 주셔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찾아오셔서 함께 해 주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장소입니다. 그곳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약속을 미리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곳은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야곱이 극도의 어려움과 두려움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곳입니다. 우리가 극한의 어려움과 두려움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임마누엘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늘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벧엘의 하나님을 날마다 의지하며 많은 두려움과 어려움 속에서도 늘 함께 하시며 여전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6장 34절-35절에서는 에서가 헷 족속과 결혼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불신 결혼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근심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위해서 그 곳의 여자들과 결혼 시키지 않고 자신의 친족 중에서 결혼 대상을 찾은 것과 대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관계 없는 삶을 살고,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살고자 하는 삶의 양식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27장에서 펼쳐진 장자의 축복에 대한 에서와 야곱의 쟁탈전에서 왜야곱이 승리할 수 밖에 없는지 보여줍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늙어 눈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죽기전에 장자 에서에게 장자의 복을 내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리브가가 알게 되었고, 리브가는 야곱이 그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이미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창25:23). 오늘 말씀은 리브가가 그것을 의식해서 이렇게 했다고 볼 수도 있고, 단지 야곱에 대한 그녀의 편애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둘 중에 어떤 견해를 택하든 중요한 것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 이 복에 대한 쟁탈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하신 약속의 확인과 성취와 확장이었습니다(27:27-29). 야곱은 이 복을 받을 장자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서가 그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 그것을 야곱에게 팔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삭이 에서를 장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야곱이 이삭과 에서를 속인 것은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삭은 야곱에게 장자가 받아야 할 모든 복을 주었습니다.
뒤늦게 야곱이 자신의 복을 가로챈 것을 알게 된 에서는 크게 통곡하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동생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30-41). 이러한 마음은 4장에서 보았던 가인의 마음, 곧 뱀의 후손의 마음입니다. 리브가는 그러한 생각을 알게 되었고 야곱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내는 계획을 세웁니다(42-46). 만약 야곱이 죽게 된다면 이삭이 야곱에게 준 복은 산산조각 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도 이루어질 수 없게 됩니다. 리브가의 조치로 야곱은 라반의 딸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번성하게 되어 열 두 아들을 낳습니다. 이는 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복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실현하는 그릇이 됩니다.
에서의 삶의 방식은 이방인의 삶의 방식, 가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에서는 그러한 삶의 방식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장자의 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삶은 불신자와 같은 삶을 살면서 천국만 가길 원하는 오늘날 잘못된 신자들의 모습과 병행이 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그러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에 항상 관심이 있었고 그 언약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 자체를 믿고 추구할 때 그 언약 안에 포함된 언약적 복이 임하는 것이지 복 자체만 바라는 것을 바른 신앙의 자세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복에만 관심이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읽고,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한 복을 이 땅에서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창세기 26장은 창세기 전체에서 이삭을 주인공으로 전개 되는 유일한 장입니다. 그리고 시간 상으로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입니다. 아브라함이 경험한 것과 유사하게 이삭도 흉년을 경험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애굽에 내려가기 전에 나타나셔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머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하고 복을 주고 그 땅을 이삭과 그 자손에게 주시고 그 자녀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질 것이었습니다(1-6).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의 갱신이며 재확인이었습니다. 이삭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에 머뭅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7-8). 이러한 행동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부족한 이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땅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그랄 땅의 왕이 이삭이 리브가를 포옹한 것을 보고 그를 불러 책망합니다. 아비멜렉은 그 백성들에게 명하여 아무도 이삭과 리브가를 건들지 못하게 합니다(9-11). 이는 아브라함과 이전에 맺은 약속을 지키는 그랄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이삭은 그 땅에서 백배의 소출을 내고 큰 부자가 됩니다. 이에 그곳 사람들은 시기를 하고 그곳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이삭은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머물며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파고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 대로 부릅니다. 이삭의 종들이 샘의 근원을 얻었을 때 그랄의 목자들이 와서 그것을 빼앗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싯나’는 ‘대적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과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 그랄의 목자들은 이삭을 대적했습니다. 그런 위협과 대적 속에 있는 이삭에서 나타나셔서 다시 약속을 확인시켜 주십니다(24). 이삭은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후에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과 함께 이삭에게 와서 계약을 맺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조약을 맺어서 자기들을 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삭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그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풂으로서 그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샘을 얻었기 때문에 그 샘의 이름을 브엘세바, 맹세의 우물이라고 짓습니다(26-33). 이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언약의 자손으로서이삭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34-35절은 이삭이 이야기가 마무리가 되면서 동시에 이어지는 27장과 28장의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로 넘어가는준비로서 제시 되고 있습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과 달리 가나안 땅에서 아내를 찾습니다. 이는 에서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야속을 무시하면서 사는 사람인지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삭의 모습은 아브라함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흉년을 피해 간 곳에서 자신의 거짓말로 그곳 사람을 위험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부를 얻고,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약속을 확인해 주실 때 그분을 예배하고, 그런 그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아비멜렉이 보고 와서 그와 조약을 맺습니다. 이러한 이삭의 모습은 아브라함이 저지른 동일한 실수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로서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확장하고 갱신하고 세워가심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삭의 부족한 믿음과 연약함을 넘어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삭의 순종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복을 우리의 부족함을 넘어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오늘도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시는 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아브라함은 후처를 맞이 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시간 상 이삭이 리브가를 맞이 하기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두라는 ‘첩’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얻은 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첩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다른 민족들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서자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기 전에 이미 모든 재산의 소유권을 이삭에게 주었고, 다른 자녀들에게도 재산을 일정부분 나누어 주고 이삭을 떠나 동쪽 땅으로 가서 살도록 했습니다(1-6). 비록 자신의 불신앙으로 다른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들에게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이삭과 그 후손에게 주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다른 아들들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간접적으로 누리지만, 언약적인 축복은 오직 이삭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기력이 다하여 죽습니다. 그리고 이삭과 이스마엘이 막벨라 굴에 사라와 함께 묻습니다. 이스마엘이 다른 아들들 보다 아브라함에게 더 가깝게 있었기 때문에 이삭과 함께 장례를 치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에게 복을 주시고 이삭은 브엘라헤로이 근처에 거합니다(11).
아브라함의 죽음 후에 창세기 저자 모세는 이스마엘의 족보에 대해서 말합니다(12-18).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하신 약속이 분명히 실현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아들들을 모두 열 두 지도자가 되어 많은 종족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큰 은총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17:20). 이스마엘의 족보를 통해서 언약의 후손이 아닌 자에게도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이는 언약의 후손인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어떻게 지키시는지 기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삭의 족보 이야기가 나머지 창세기에서 펼쳐집니다.
이삭의 이야기는 리브가의 불임에 대해 이삭이 간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간구를 들으시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결혼 후 20년 간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삭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은 리브가를 임신하게 하셨고, 쌍둥이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이 자연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로 번성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임신한 후 뱃속에서 부터 쌍둥이는 싸우기 시작합니다. 때문에 리브가가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묻습니다(22). 하나님은 리브가의 뱃속에 두 민족이 있고 그 두 민족이 나뉘어 질 것인데 큰 자가 어린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이 후 야곱과 에서가 출생합니다. 에서는 먼저 태어나서 장자가 되었고, 야곱은 그 뒤에 태어나 동생이 되었습니다. 둘은 성장하여 에서는 사냥꾼이 되고 야곱은 장막에 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에서를 더 좋아했고, 어머니는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장자로서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에서와 그렇지 못한 야곱이 비교가 됩니다. 그러나 에서는 자신의 장자의 권리(가문을 계승하고 두배의 유산을 받을 권리)를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릴 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자신이 굶으면서까지 가지고 장자권을 갖고 싶어 합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가지고 싶어 했던 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맺은 언약을 계승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장자권은 단지 한 세대가 아니라 대대로 영원한 하늘의 생명을 물려 줄 수 있는 특권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후처들에서 태어난 후손들의 번성은 앞으로 이삭을 통해서도 분명히 당신의 말씀을 이루실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에서와 야곱의 탄생을 통해서 그 약속이 실현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서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장자의 권리를 가볍게 여기며 팥죽 한 그릇에 팔았습니다. 그것은 에서가 신령한 것을 땅의 썩어져 가는 것과 바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약속하신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권리와 특권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때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위해서 우리에게 아주 힘든 상황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그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기억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며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부르며 그의 행동을 본받지 말라고 교훈 합니다. 힘들고 어려움이 올 때에도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