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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운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매 칠년 마다 안식년을 지켜야 합니다. 그 해에는 형제에게 빌려준 모든 것에 대해서 더이상 책임을 묻지 않고 빚을 탕감해 주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방인에게는 독촉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 되었던 자들로써 하나님께서 모든 빚을 탕감해 주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빚을 받아야 하는 채권자에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어려운 명령에도 순종할 때 개인에게는 복을 주시고, 온 나라에는 가난한 자가 없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1-5). 구속의 은혜가 그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더 풍성하게 되고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6).
일곱째 해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난한 형제에 대해서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반드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심지어 일곱째 해가 다가왔다고 해도 넉넉하게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어야 합니다(8-9).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복을 약속하십니다(10). 가난한 자들은 항상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방식과는 너무 다릅니다. 세상의 방식은 항상 빚진 자가 의무를 가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빚을 내줄 자도 넉넉히 빚을 내어줄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어서 종에 대해서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 말합니다. 가난하여 종이 된 이스라엘 사람(형제 자매)이 육 년 동안 주인을 섬긴 후 그 주인은 종들을 자유롭게 놓아 주어야 했습니다. 그 때에도 빈손으로 놓아주어서는 안되고 어느정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복을 생각하면서 그 만큼 주어야 했습니다(14). 그 때 마음의 동기는 역시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입니다(15). 만약 종이 주인과 그 가족을 사랑하여 평생 종이 되겠다고 하면 그 종의 귀를 문에 대고 뚫어서 그 집안의 종으로 섬기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6-18).
뿐만 아니라 양과 소의 첫 태생은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매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 앞에서 온 가족이 먹어야 했습니다(19-20). 혹 첫 태생이 흠이 있는 것이면 하나님께 바치지 못하고 대신 그 사람의 성에서 정한 자나 부정한 자와 나누어 먹되 피는 먹지 않도록 하셨습니다(21-23). 처음으로 태어난 양과소를 바치는 것은 이스라엘의 첫 태생이 살아 남은 유월절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들은 처음 것을 드림으로 그들이 받은 구원을 기억하고,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회적인 제도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다른 백성과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그 저번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가 있고 복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자유시장경제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본문에서 요구하는 것들은 터무니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경제관에 있어서도 다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자유시장경제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항상 손을 펴고 있어야 합니다. 사회,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가 우리의 경제관을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매일의 경제 활동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를 생각하며 생산과 소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해 봅시다. 그래서 경제관에서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고 약속된 복을 누리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아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상기시키며 죽은 자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해하지 말고 머리털을 밀지 말라고 합니다(1-2). 당시에는사람이 죽으면 애도하기 위해서 몸의 일부를 칼로 베고 머리털을 미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 이방신들이 자신들에게 응답하게 하는 방법으로 몸을 칼로상하게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인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기업입니다. 여기서 기업이라는 말은 ‘보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위해서 몸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어서 모세는 백성들의 먹는 문제를 다룹니다. 그들은 정결한 짐승과 새는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는 부정한 것은 먹을 수없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되새김을 하면서 굽이 갈라진 짐승들입니다. 둘 중의 하나만 하는 동물은 먹을 수 없습니다. 물고기도 마찬가지고 새도 마찬가지고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먹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3-21). 이렇게 먹을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여 먹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른 백성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그리고 3년 마다 십일조를 바침으로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땅히 매년 하나님이 계신 성소로 가서 농사로 얻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로 제사를 드리고 먹어야 합니다. 만약 성소가 너무 멀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가지고 가기 힘들면 돈을 가지고 성소 근처에서 원하는 제물을 사서 드리고 레위인과 자기의 가족들과 함께 먹도록 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의 일부를 구별하여 드림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는 방법이자 가난한 자들을 돕는 방편이었습니다. 매3년째는 십일조를 성읍의 곳간에 저축하여 그 성의 레위인들과 가난한 자들이 굶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2-29). 1, 2년의 십일조의 일부는 레위인이, 일부는 그 가족들이, 3년째에 바쳐지는 십일조는 레위인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사용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은 약육강식의 사회로 대변되는 이방 나라와 구별되는 삶의 형태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이상 구약의 음식법과 제사법은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몸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원리는 변함이 없이 적용이 됩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며 거룩하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식으로 사용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고전6:19). 또 음식도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딤전4:4-5). 구약 음식법은 없어졌지만, 매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감사함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음식을 대하는 자세에서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식사 전에 혹은 후에 기도로 감사하는 것은 이것을 표현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 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과 고백이며, 목회자의 생활과 교회의 운영과 교회 안과 밖의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한 수단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산다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며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우길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여러가지 방식으로 세상 속에서 살지만, 다른 삶의 방식을 실천해 봅시다. 세상 가운데 구별되는 백성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범사에 주시는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모세는 우상숭배에 대한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말합니다. 만일 어떤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이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다른 신을 섬기자고 할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그들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당신을 사랑하는지, 다른 신들을 섬기는지 시험하기위한 것입니다. 그런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생기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그를 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도록 유혹하는 자들을 단호하게 대하여 그들 가운데 악을 제거해야 했습니다(1-5). 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 중에서도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지 말고, 애석하게 생각하지 말고 돌로 쳐죽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그런 악행을 못하게 해야 합니다(6-11). 개인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한 성읍에서 어떤 사람이 일어나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다른 신들을 섬겨 그 성읍 사람들이 모두 우상숭배를 하게 되었을 때 다른 성읍 사람들은 그 성읍 사람들을 진멸하고 그들의 물건들을 모두 태워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성읍에 임하게 되는 상황을 막아야 합니다(12-17).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신실하게 행할 때 번성하게될 것입니다(18).
오늘 말씀은 우상숭배를 얼마나 철저하게 배격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선지자나 신접하여 신통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유혹할 때에도, 심지어 가족들과친구들도 우상숭배를 하고, 우상숭배를 하도록 유혹한다면 돌로 쳐죽이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는 그만큼 무서운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적이 실제로 일어나는지는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사단도 이적을 일으킵니다. 그 죄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정면으로 파기하고 대적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하는 것이 너무 잔인해 보이고 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그런 죄를 지은 사람에게 돌로 쳐죽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죄를 단호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단에 빠지거나, 다른 종교로 회유하여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영적인 단절, 출교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죽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내리는 형벌은 영원한 죽음밖에 없습니다.
이단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우리 삶 속에서 우상숭배를 하는 부분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부분이 없는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단호하게 그것을 끊어냅시다. 이적과 기사를 쫓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실한 백성이 됩시다. 오늘 하루도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되는 모든 우상들을 끊어버리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앞에서 모세는 과거를 회상하며 일반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켜야 되는지 설교하기 시작 합니다. 먼저 제사에 관한 법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을 정복한 뒤에 그들이 섬겼던 신들의 제단을 부수고 우상을 부수라고 합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을 섬긴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섬기기 편한 장소와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곳에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식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분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5). 그곳에서 각종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제물을 먹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온 가족들이 즐거워해야 합니다(6-7). 비록 이전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지라도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이방 족속들을 하나님께서 무찌르게 해 주셨을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택하신 그곳에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8-14). 대신에 단지 고기를 먹고 싶어서 동물을 잡을 때에는 굳이 하나님 앞에서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릴 때에만 주로 고기를 먹을 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제사 후에 먹는 고기와 평소에 먹을 고기를 구분하여 먹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피만 먹지 않는다면 고기도 잡아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사로 바친 고기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택한 곳에서 먹고 그것을 가족과 레위인과 함께먹음으로 레위인의 생계를 지원해야 했습니다(15-19).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을 먹게 되면 동물의 생명을 취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피와 고기를 구분하십니다. 피를 먹지 않음으로 동물의 생명 또한 존중하도록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짐승을 피째 먹던 이방인의 풍습과 구별되었습니다. 제물의 피는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 취할 수 있습니다(27). 제사에 관한 규칙과 그와 관련된 고기를 먹는 문제를 잘 지킨다면 백성들은 영원히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28). 이렇게 규칙을 정하신 것은 이방민족이 그들의 신을 섬기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의 자식도 불살라 제물로 드리던 풍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9-31). 하나님은 당신께서 명하신 제사 방법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32).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노력과 정성과 간절함이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예배를 받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종교나 예배, TV프로그램, 심리학과 커뮤니케이션 방법 등을 탐구하여 유익하면 예배에 도입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방식으로 섬기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섬길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의 신들을 섬기는 이방 민족들은 자신의 가장 귀한 자식을 드릴 정도로 정성과 열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식을 바치는 것을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부모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가장 귀한 것을 드린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방식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불편한 방식입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각자의 자리에서 제사를 드리면 편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백성들이 정해진 장소에서 정하신 방식으로 제사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보다 의미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외에 무엇을 더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말씀에 기초해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예배입니다(규정적 원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공적예배를 드리며 말씀에 순종함으로 삶의 예배를 잘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일을 상기 시키면서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이 주신 책임과 의무, 법과 규칙과 명령을 항상 지키라고 합니다(1). 지금 출애굽 2세대들의 자녀들은 출애굽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들을 구원하셨는지 전혀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강한 능력으로 애굽 군대를 물리치시고 그 조상들을 구원했는지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 생활때 있었던 반역의 사건도 그들이 직접 보았기 때문에 그것도 자녀들에게 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해야 했습니다(2-6). 자신들만 지킬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들은 강성해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을 차지할 것이고, 그곳에서 오래오래 평안히 살 것입니다. 그들이 들어갈 땅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땅이 항상 비옥하도록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하게 내려 주셔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게 될 것 입니다(7-15). 이른 비와 늦은 비는 곡식을 자라게 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비입니다. 비가 적절한 때에 오지 않으면 새싹이 마르거나 혹은 너무 많이 오면 떠내려 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고 절하면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게 하셔서 그곳에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16-17).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생사가 달린 일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하는 말을 명심하고 항상 잊지 않도록 손목에 메어 기호를 삼고 이마에 붙여 표를 삼아야 합니다. 또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수시로 가르쳐야 합니다. 모세가 전해준 말을 기록하여 집 문에 오가면서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18-20). 똑같이 하라는 아니라 말씀을 자녀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출애굽 2세대들이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은 땅을 차지하는 복을 주시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주를 약속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 것인가 아니면 다른 신을 섬기며 살 것이냐의 문제, 곧 삶의 방식의 문제입니다(21-25). 복과 저주 둘 중의 하나 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가르쳐주어 지키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31-32).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복을, 불순종은 저주를 약속하십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순종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불순종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제사를 통해서 용서받고 다시 순종을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은 장치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저주 가운데 있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셔서 그분에게 대신 저주를 내리시고, 아들의 순종을 우리의 순종으로 여기셔서 복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천국을 약속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우리도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고 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또 자녀들에게 그것을 부단히 가르쳐야 합니다. 함께 예배함으로 바른 예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읽고 자녀와 함께 성경을 읽고 가정마다 부모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표현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복을 생각하면서, 그분이 행하신 일을 스스로 기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함께 말씀을 나누는 저와 여러분이시기 바랍니다. 아멘.
모세는 시내산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합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처음 십계명의 두 돌 판이 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통해서 두번째 두 돌판을 깎아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 돌을 언약궤 속에 두게 하심으로 깨어진 언약을 회복시켜 주셨음을 말합니다(1-5). 이후에 아론은 죽어 조상에게로 돌아갔고 그 아들 엘르아살이 아론을 이어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아론의 자손들을 돕게 하고 성막을 옮기는 직무를 주셨습니다. 이런 레위 지파에게는 하나님께서 따로 땅을 주시지 않고 당신께서 친히 기업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모든 일에 성실하게 행하였고, 백성의 인도자이자 중보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섬겼습니다(6-11). 이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은이나 금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사랑하여 그 계명을 지키고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을 택하시고, 그들과 맺은 언약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바람직한 반응은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전심을 다해 섬기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신이시고, 주인이시고, 크고 능력이 있으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나그네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압제를 받고 살아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가나안 땅을 차지할 백성들도 나그네를 잘 돌보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만 섬기며 의지해야 합니다(12-2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이되시며, 그들을 위해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셔서 번성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22-2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 분의 말씀을 행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우리의 본성을 거슬러야 하는 괴롭고 힘든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예전의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삶,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그래서 참된 행복을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있는 강한 족속을 강렬한 불과 같이 이스라엘 보다 앞서 가셔서 앞에서 엎드려지게 하고 그 땅에서 쫓아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는 것은 이스라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들의 악함과 거역함 때문이며, 이스라엘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한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1-5).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은 백성,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얼마나 완악한 자들인지 기억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불성실하여 언약이 깨어졌고 전멸할 뻔 했지만 모세의 중보와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6-21). 뿐만 아니라 다베라(백성이하나님을 원망하여 여호와의 불이 이스라엘 끝을 사름, 민11:3), 맛사(물이 없어서 원망하던 이스라엘, 출17:7), 기브롯 핫다아와(고기를 먹게해 달라고욕심을 부리며 원망하여 벌받았던 곳, 민 11:31-32)와 가데스 바네아(열두정탐꾼 중 열명이 반대함)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하여 진노를 일으켰습니다(22-24). 항상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던 백성이었습니다(23-25). 지금의 출애굽 2세대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이전의 1세대들의 이런 완악함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그들의 자손들에게 땅을 주고, 복을 주어 많아지게 하겠다는 약속 때문에 그들을 용서하여 지금까지 왔다는 것을 기억 해야 합니다(25-29).
‘기억하라’는 주제가 계속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과거에 출애굽 1세대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완악했는지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기억하라고 했다면 오늘 말씀에서는 지금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있는 2세대들의 부모세대가 얼마나 완악했는지 기억하라고 합니다. 또 그들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그들을 위해서 중보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긍휼히 여기셨는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기억하면서 출애굽2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로움 때문에 다른 민족들을 쫓아내시는 것이 아님을 알고, 하나님의 언약의 성실하심 때문에 그들에게 땅을 주신다는 것을 인정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악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적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오직 예수님의 중보와 하나님의 긍휼하심, 언약에 신실하심이 우리 구원의 근거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교만하지 않고, 이전의 악함을 돌이켜 감사함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겪은 광야의 생활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들의 부모 세대와 그들이 겪은 광야의 생활은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정의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낮추시고, 시험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육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영적인 음식을 먹어야 사람은 참되게 살 수 있습니다(1-4).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징계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하듯 사랑의 매였습니다(5). 그 매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고,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땅은 참으로 풍요로운 땅이며 먹어서 배부르고 풍족한 땅입니다(6-9).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10).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모든 것이 만족스럽게 되었을 때에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때문에 모세는 다시 한 번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마음이 교만하여 져서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광야의 삶에서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신 하나님을 잊고 스스로 그 모든 것들을 얻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다른 신을 섬기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잊게되면 결국 다른 족속들과 같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11-20).
오늘 말씀에서 모세는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모세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의 땅을 차지하고 나서 평안할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에게서 건지셨다는 것과 광야에서 그들을 낮추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어떠한 분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시고 언약에 신실하시며 그 백성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잊지 않은 것은 결국 일상의 삶과 연관됩니다. 매일 먹는 식사를 통해서 그 식사만으로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기억하여 하나님을 기억해야합니다. 식사기도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좋은 도구가 됩니다. 또 일상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주셨고, 그들에게 그 일과 땅과 먹을 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서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오늘 하루도 저와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정하며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에서 그 땅의 백성들을 쫓아내게 하실 때, 가나안 족속들과 어떤 관계도 맺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스라엘로 우상숭배를 하도록 만들어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1-4).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에서 모든 우상을 깨뜨리고 불살라야 합니다. 단호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성민)이기 때문입니다(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외적인 조건을 보시지 않고 선택하셨습니다(6-7).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택하셨고 크신 능력으로 바로의 손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8). 하나님은 하나님께 신실하여 그 계명을 지키고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 곧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9-11). 다시 한 번 모세는 하나님께 신실할 때 어떤 복을 받게 되는지 설명하고 다른 신을 섬기게 될 때 결국 그 신들이 걸림돌이 될 것임을 말합니다(12-17).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강함을 보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함께 하시고, 애굽 사람들에게 행한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18). 사실 당시 애굽은 제국이었고, 가나안 땅의 족속들은 도시국가였습니다. 애굽이 훨씬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강력한 애굽에서 행하신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하나님의 능력을 이스라엘을 경험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가나안 땅의 민족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앞서 왕벌(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민족들을 멸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그들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19-21).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은 단번에 그 백성들 모두를 없애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천천히 하나님께서는 멸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한 번에 정복하게 되면 그 땅이 오랫동안 황폐하게 되어 들짐승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조금씩 점진적으로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들을 진멸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족속이든 그들의 신상을 불살라야 합니다. 그것의 은이나 금으로 씌운 것 때문에 가지고 와서는 안됩니다(22-26).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분의 사랑하심이 구원의 근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마땅히 다른 신을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승리를 보장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킬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점진적으로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이유입니다. 그 사랑을 알고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은 당신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21). 또 구원받은 후의 삶은 점진적으로 거룩해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과 더욱 깊이 교제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거룩해지는 삶의 여정을 살게 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하루가 됩시다. 또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날마다 거룩해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모세는 다시 한번 서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 규례, 법도를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배우고 또 차지할 땅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1-3). 이것을 주신 의도도 명확하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언급합니다. 이어서 모세는 온 이스라엘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라고 명합니다. 가장 먼저 그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가나안 땅에서 기본적으로 여러 신을 섬기는 종교적 풍습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다른 신은 없다는 선언은 이방신들과 하나님을 구별하며, 이방인들과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는 방식입니다. 그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다름 아니라 전인격적인 사랑입니다(4-5). 이방인들은 이방신을 노여워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 제사를 하고, 그 법을 지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것은 전인격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뜻만, 힘만, 마음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제사와 삶의 동기와 의지와 실천을 모두 보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후손들에게 교육할 의무도 있습니다(6-9).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건축하지 않은성읍을 차지하게 하시고, 그들이 파지 않은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고, 또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나무의 열매를 차지하게 하셔서 그들을 먹이실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경외하며 섬겨야 할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겨서는 절대 안됩니다. 이는 바른 예배의 대상과 방법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보고만 계시는 죽은 신이 아닙니다. 살아 있지만 무능한 신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분을 내시는 살아 계신 분입니다(10-15). 백성들은 ‘맛사’(므리바)에서처럼 하나님을 ‘낫사’(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의심하고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명령과 법도를 잘 지킬 때 하나님은 모든 대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승패가 순종에 달려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자녀들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먼저 말하고(21-23), 그 구원에 대한 감사와 마땅한 반응으로써 모든 규례를 지켜야 하고, 또 지킬 때 약속하신 복을 주시고 의롭게 됨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가르쳐 줍니다(24-25).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 구원에 감사하면서 사는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배은망덕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이 시대에 우리 교회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의 온 마음, 의지, 힘, 감정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자녀들에게 구원의 은혜에 기초한 삶을 사는 바른 신앙의 삶을 물려주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모세는 5장에서 그의 두번째 설교를 시작합니다. 앞에서 1-4장이 첫번째 설교로서 과거에 대한 회상이 주를 이룬다면, 두번째 설교에서는 그 과거에 대한회상이 현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모세는 1절에서 하나님의 법과 규례를 듣고, 배우고,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맺은 언약을 상기합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자들은 그 때에 어린 아이였거나, 태어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은 그들의 조상들과만 맺은 것이 아니라 그들과 맺은 것이라고 하다고 모세는 말하고 있습니다(1-3). 십계명의 내용의 거의 같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신앙의 내용이 바뀌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단일한 법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4-21). 세월이 지나도 믿음의 내용은 바뀌지 않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과업은 새로운 법, 믿음의 내용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법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것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자신의 역할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를 잇는 중보자로서 백성들의 수령에 의해 세워졌으며, 하나님께 인준받은 것임을 상기시켜줍니다(22-27). 이것은 그의 설교의 권위를 더해 줍니다. 모세는 일반 사람이 아니라 중보자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두려워하고 모세의 말을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항상 그렇게 당신을 경외함으로 복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받아 이스라엘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도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28-31).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면 복을 받을 것입니다(32-33).
오늘 말씀의 핵심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역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 출애굽 2세대들에게 그 조상들에게 주신 법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어떤 법을 주신 것이 아님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의 십계명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한 명의 중보자가 존재합니다. 모세는 오실 참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과거의 신앙이 오늘날 자신의 신앙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새로운 어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해준 신앙의 내용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하나이고, 중보자도 한 분이시고, 삶의 방식도 하나입니다. 오늘 하루도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역사가 되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저와 여러분을 위한 명령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고 주님께서 결코 우리를 홀로 버려 두지 않는다는 그 약속이 저와 여러분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고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마지막으로 모세의 회상이 이어집니다. 모세는 회상의 목적이 다름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임을 말한 후 바알브올(민25장)사건을 언급합니다(1-4). 바알브올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자들이 결국 멸망 당한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담하지 않은 자들이 지금 생존하여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또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지금 그 백성들에게 하신 일을 기억하면서 그와 같은 신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분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합니다. 이렇게 모세가 말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우상숭배의 유혹을 이기 못 할 것임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거의 확신을 가지고 그들이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1계명과 2계명을 풀어서 설명해 줍니다. 남자, 여자, 짐승, 새, 물고기, 해, 달, 별 등 열거된 형상들은 실제로 당시에 사용되던 우상이었습니다(5-28).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고, 소멸시키는 불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우상을 섬기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그렇다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땅에서 하나님을 찾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29). 혹 우상 숭배를 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시며 언약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30-31).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행하셨는지 항상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모세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지켜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합니다(32-39).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다면 그들이 얻은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게 될 것입니다(40). 이 말들을 한 후에 모세는 요단강 동편에서 부지 중에 살인자들이 피하는 도피성을 구체적으로 지정합니다(41-49).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위해서 어떤 분이시며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이 순종의 바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이스라엘을 옳아 매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백성들의 당연한 감사와 반응으로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정적이고, 질투하심으로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지더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시 받아 주시는 자비로우시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기 때문에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구원을 이미 얻은 자들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생각할 때 감사하며 그분의 말씀과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선한 반응이 나옵니다. 혹 넘어지고 실패하고 죄를 짓을 때에도 주님께 돌아오면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과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묵상합시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그 말씀에서 요구하시는 것들을 지켜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바산의 왕 시혼을 물리쳤던 것을 회상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산의 왕 옥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1-4). 이스라엘이 바산 왕에게서 취한 성들은 모두 강한 성읍들이었습니다(5-8).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 동쪽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쳐서 차지하게 된 땅과 성읍들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빼앗은 땅이 얼마나 넓은 땅인지, 그리고 빼앗은 땅의 왕과 백성들이 결코 약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10-11).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강력한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에게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땅들을 므낫세 반지파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나누어 가지게 된 경계를 소개합니다. 요단강 동편에 땅을 차지한 두 지파와 반 지파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모세는 요단강 건너 편에서도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나머지 지파에게 땅을 주실 것임을 확신하도록 합니다(12-17). 그리고 두 지파 반에게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실 때까지 다른 지파와 함께 싸우고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도록 명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뿐만아니라 자신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될 여호수아에게 요단 이쪽에서 행하신 하나님께서 저쪽에서도 동일하게 행하시고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울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18-22). 모세는 다시 한 번 자신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가나안 땅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23-29).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싸우시는 분이심을 봅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원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로 행하시는 분이심을 보게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았던 므리바 사건(민20:12) 때문에 약속에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끝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록합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해줍니다. 바로 여호수아를 담대하게 하여 자기를 이어 백성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모세의 기도를 들어 주실 수 있고 그럴 능력도 있는 분이시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다른 일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고,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보다 여호수아를 담대하고 강하게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대로 하지 않으실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그분의 전능함도 의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르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갑니다. 혹 때로 나의 원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그분은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이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계속해서 모세는 지난 날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 가운데 에돔의 땅은 이스라엘에게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땅은 에서에게 준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심하여 에서의 자손들에게 양식을 사먹고 물도 그들에게 사서 마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십년 동안 부족함이 없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라고 합니다(1-6). 모세와 백성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모압을 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땅은 롯과 그 자손에게 준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씀대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고 명하셨는데, 그 시내를 건너게 된 시기가 벌써 광야 생활을 한 지 38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 때에출애굽 1세대들은 이미 다 죽었습니다(7-15). 그 후 암몬 땅도 이스라엘이 지나게 되는데, 그곳도 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땅도 역시 롯의 자손에게 준땅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과 유사하게 모압과 암몬 족속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주시고 그 땅에 살던 원주민들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16-23). 그 후에 만나게 되는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십니다. 또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소문으로 주변 국가들이 두려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4-25). 사실 모세는 먼저 시혼에게 평화의 말을 전했지만, 헤스본 왕 시혼은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백성과 싸우길 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로써 하나님께서 시혼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를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에 모세에게 명하여 그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헤스본 왕 시혼은 이스라엘에게 패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모든 사람들을 진멸했습니다(26-35). 모세는 회상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넘겨 주신 땅만 정복했고, 오직 하나님께서 가기를 금하는 곳에는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회상합니다(36-37).
지금 이스라엘 백성 앞에 놓여있는 땅은 결국 하나님께서 주실 땅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모세가 다시 백성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만 백성들은 칠 수 있고, 주시지 않는 땅은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정복 전쟁을 하게 될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이 중요한 원리를 다시 한 번 기억하도록 합니다. 땅을 차지하는 비결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주시기로 한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상급을 주십니다. 그것은 천국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천국에 못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땅을 상급으로 주십니다. 이 ‘땅’은 물리적인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과 간섭함을 받으며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되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경계를 정해줍니다. 오늘 하루도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심을 경험합시다. 최후에 받게 될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경계를 지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는 만큼만 나아가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신명기는 가나안 땅을 건너기 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한번 하나님의 명령을 해설해 주면서 잘 지키라고 부탁하는 말들을 기록한 것입니다(1). 먼저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호렙 산(시내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 겨우 11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이었음을 상기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사십년 11개월 후에 그곳에 다시 왔습니다. 지금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죽인 후 약속의 땅에 대한 성취가 임박한 때입니다. 이제 이 율법을 출애굽 2세대에게 들려주며 약속의 땅에서도 언약을 잘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2-5). 옛날에 조상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 정탐꾼의 말을 듣고 불신앙을 가진 것 같이 되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그 사건으로 당시 하나님을 굳게 믿었던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하나님께 하신 말씀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보다 항상 앞서 가시며 40년의 시간 동안 그 백성을 광야의 길에서 인도해 오셨습니다(6-46).
모세는 지난 날을 회상하며 온 회중에게 들려줍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모세는 일부러 지난 날의 회상을 모든백성에게 들려줌으로 과거에서 배우도록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보다 앞서 행하시고 그 백성을 자식과 같이 품으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께대한 신뢰를 져버릴 때 그 백성을 벌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조상들이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가 바로 정탐꾼 사건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한 것 때문임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이제 출애굽 2세대들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곧 들어가서 정복하고 그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정복 전쟁 과정 중에도, 그리고 그곳에서 정착할 때도 그들은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뢰하는 자들과 함께하시는 분이시며, 불신하는 자들에게는 엄한 분이심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신실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영적 이스라엘로서 동일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 보다 앞서서 우리 길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신할 때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중보 덕분에 영원히 버리시지는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신실하고 그분을 신뢰할 때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것을 마무리 짓도록 하셨습니다. 동쪽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가 차지하고, 나머지 아홉 지파 반은 가나안 땅 정복을 통해서 분배 받은 땅을 차지하는 것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에게 줄 성읍도 말씀하심으로 사실상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확증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문제가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땅을 물려받게 된 슬로브핫의 딸들의 경우입니다. 그 딸들이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가게 될 경우, 딸들의 땅이 다른 지파에게 소속되게 되어 실제적으로 므낫세 지파의 땅이 줄어들게 된다는 것입니다(1-4). 그것은 합당한 문제 제기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딸들 중에서 남자 형제가 없어서 아버지의 기업을 받게 된 딸들은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갈 수 없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지파에게 준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도록 합니다. 그렇게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도록 합니다(5-9).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 말씀을 순종하여 자기의 삼촌의 아들들과 결혼하여 기업이 나뉘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10-12). 당시에 가까운 친척과 결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민수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여리고 맞은편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신명기 역시 그곳에서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권면하는 말을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27장 1-11절에서 본 슬로브핫의 딸이 땅을 상속 받는 것에 대한 보충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이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각 지파에게 주신 약속의 기업, 땅을 한 지파에서 다른 지파로 옮겨질 수 없다는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소유로써 그 문제의 해결도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이스라엘은 관리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각 가족과 지파에게 그 크고 작음에 따라 나누어 주신 것은 다른 지파에 양도할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다는 원리를 민수기 마지막 장에서 보여줍니다. 혹 너무 가난하게 되어 땅을 저당 잡을 때에도 희년이 되면 돌려주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백성들 같이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살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천국의 원리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주신 땅을 잘 관리하는 청지기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땅을 빼앗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부요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준 은사와 역량에 따라서 청지기로서 자신의 재산과 지식과 재능을 관리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길 원하십니다. 그러한 천국의 원리가 바르게 작동되는 곳이 교회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재산이 많다고,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재능이 많다고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더 낮게 여기거나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은사와 분량 따라 주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탐하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이 곧 우리 공동체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각자에 주신 것들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며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천국의 원리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이 받은 기업 중에서 레위인들에게 성읍과 뜰을 주어 레위인들의 삶을 책임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총 48성읍을 주라고 구체적으로 정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48 성읍 중에서 6성읍(요단강 동편에서 셋, 가나안 땅에 셋)을 고의로 살인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도피성으로 삼으라고 합니다(1-8).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피의 복수자로부터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성읍을 의미합니다. 그곳에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 보호됩니다. 재판 후에 그 사람이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것으로 밝혀지면 자신의 생명으로 반드시 그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16-21). 반면에 그 사람이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고 판명되면 도피성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성읍에서 나가 다시 자신의 성읍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경우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피의 값을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대신 치른 것으로 보고 피의 복수자는 그 사람에게 복수를 할 수 없게 됩니다(22-28). 하지만 만약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그 성읍을 나오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도 그 피의 복수자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살인 죄에 대해서 증인은 반드시 두 사람 이상으로 확증되어야 했습니다(30). 고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돈으로 그 죄를 갚을 수 없고 반드시 피를 흘림으로 갚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땅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큰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하나님도 거하시기 때문입니다(31-34).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지파에게 주시는 땅 가운데 레위인에게 돌아가야 할 성읍과 뜰, 그리고 도피성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레위인들에게 48성읍을 주는 것은 단순히 레위인을 돕는 개념이 아닙니다. 레위인의 성읍을 곳곳에 둠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의 공동체로, 거룩한 공동체로 그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 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파별로 흩어져서 살기 때문에 회막과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레위인들이 흩어져서 각 지파 속에서 살아가게 하심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레위인들의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을 따라 재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레위인의 48성읍 중 6성읍을 구별하여 도피성을 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함 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땅에서는 누군가 살인을 당하여 피를 흘리고 그것을 용인한다면 그 땅은 더러워집니다. 하나님께서명령 하신 대로 살인자를 처리하지 않으면 정결함과 거룩함이 오염되어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없게 만듭니다. 따라서 살인자에 대한 처리는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을 주는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처리해야 합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실수로 사람을 죽인자에게는 살 길을 도피성을 통해 주십니다. 그 도피성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고의로 살인하지 않은 자를 위한 곳입니다(15). 누구든지 고의로 살인하지 않은 자는 그곳을 피할 수 있습니다. 살인 당한 자의 피는 대제사장이 대신 흘림으로 갚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도피성은 예수님께서 날마다 마음으로 살인하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피를 흘려 주신 대속의 은혜를 예표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레위인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시고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비출 때 우리의 죄악을 보게 됩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참된 대제사장이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게 하시고 당신의 이름 안에서 회개하는 자를 당신의 피로 씻어 주시고 정결하게 해 주십니다. 이 예수님을 보내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 자신을 말씀에 순종함으로 거룩하게 보존합시다. 또 우리 삶 속에서 날마다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하여 날마다 거룩 하여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복 해야 하는 땅의 동서남북 경계를 정해 주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아가기 전에 마치 군사 작전을 계획 하듯이 정복해야 하는 땅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친히 말씀하여 주십니다(1-12). 그 땅은 하나님께서 아홉 지파 반에게 주시는 땅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이미 요단강 동쪽에서 그들의 땅을 받았습니다(13-15). 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령하여 각 지파마다 땅을 나누기 위한 지휘관을 한 사람씩 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 지파의 갈렙을 비롯하여 각 지파의 지휘관들을 세우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을 정복하는데 앞장 서서 각 지파를 지휘할 자들입니다(16-29).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스라엘이 땅을 정복 하기 전에 그들에게 먼저 주시고자 하는 땅을 보여주시고, 또 그 경계를 정해 주시는 것이 오늘 말씀의 주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경계를 정해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할 땅,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 땅이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을 받는다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땅을 정복하는 싸움을 싸워야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쟁은 무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하는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한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마지막에 모든 백성은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소망은 추상적인 어떤 것을 바라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부터 구원하시기를 계획하시고 인도하셨던 것 같이, 그리고 앞으로 가나안 땅의 점령과 정착의 계획을 가지시고 계셨던 것 같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삶과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계획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우리의 몫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 갈 때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 통해서 가나안 땅에 구현되었듯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실현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우리 삶과 주변의 실제적인 변화를 가지고 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계획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겪은 여정에 대해서 요약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 33장은 34장에서 시작되는 가나안 땅 분배에 관한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일종의 회상입니다. 앞으로의 전쟁을 위해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되새기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 그런 여정이 단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되새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본문 말씀은 ‘떠나다’, ‘진치다’가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출발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온 여정은 중간 중간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군대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진치고 떠나는 삶을 반복해 왔다는 것입니다. 또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을 지켜 주셨다는 것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잘못해서 죽은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고 단순하게 떠나고 진을 친 이야기에 초점을 두고 다루고 있습니다(1-50). 출애굽 1세대들은 신실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셨고, 당신의 약속을 이루셔서 가나안 땅 바로 앞까지 이스라엘 데리고 오셨습니다. 이제 출애굽 2세대들은 이제 그 땅을 취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이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33장의 나머지 부분은 이 미래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맞은 편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거든 그 땅의 주민을 다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주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소유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문의 크기에 따라서 많고 적은 땅을 나누어 가지게 될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곳에 들어가서 원주민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그들이 결국 이스라엘에게 눈에 가시와 같이 되고 옆구리의 가시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내리기로 한 진노를 이스라엘에게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본문은마칩니다(51-56).
가나안 땅 바로 앞에서 출애굽 2세대들은 그런 신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돌아보고, 미래의 사명에 헌신할 준비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돌이켜 보았을 때 우리의 신실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이를 통해 과거에 신실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도 동일하게 역사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신뢰하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에도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합시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지파의 일부가 요단 강을 건너지 않고, 요단 강 동쪽 땅을 차지하겠다고 모세에게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가축을 아주 많이 갖고 있는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의 일부가 살기에 아주 좋은 목초지였기 때문입니다(1-5). 모세는 이런 요청을 처음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 땅을 앞두고 비슷하게 그 땅을 정복하러 가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또 다시 광야에서 방황을 해야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6-15). 하지만 그들은 이전의 세대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가까이 나와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룩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들의 상황에 가나안 땅 동쪽이 더 좋기 때문에 선택한 것 뿐이라고 설득합니다. 그래서 동쪽 땅을 주어 살게 한다면,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가나안 땅에서 싸워야 하는 전쟁을 함께 수행하고, 여호와께서 그 원수를 다 쫓아 낼 때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합니다(16-19). 모세는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땅이 그들의 소유가 될 것임을 허락합니다. 하지만 이미 자기들의 땅을 차지했고, 생활을 안정되었다고 함께 싸우지 않으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청대로 요단 동쪽 땅을 그들에게 허락해줍니다(20-27). 모세는 여호수아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을 불러서 이 일을 확증해 줍니다. 만일 이들이 건너가 그들과 함께 싸우면 기르앗 땅, 곧 요단 동쪽 땅이 그들의 것이 될 것이지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땅을 소유할 수 없고, 가나안 땅 중에서 자신의 땅을 차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반드시 그들과 함께 싸우러 가겠다고 다짐합니다. 모세는 마침내 요단 동쪽 땅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가 되게 합니다(28-32). 모세는 그 지역과 경계를 분명하게 기록하며 남깁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땅에 있는 민족을 몰아내고 차지합니다(33-42).
이렇게 갓, 르우벤, 므낫세 반(절반, 일부) 지파가 요단 강 동편에 정착하는 것은 장차 이스라엘 온 지파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것을 예표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마침내 이루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갓 자손,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자신들이 몫이 생긴 것에 만족하고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함께 지속적으로 정복 전쟁에 참여해야 합니다. 가나안 전쟁은 모든 백성이 빠짐 없이 동참해야 합니다. 구경꾼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영적 군대가 되어야 합니다.
두 지파 반의 상황은 마치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구원을 얻은 신자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언약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모든 신자는 지속적으로 영적인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 싸움을 싸우는 전투하는 백성, 거룩한 군대입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에 순종하며 우리 삶 가운데 사탄이 차지하고 있는 곳을 영적인 싸움을 통해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령하여 미디안에게 원수를 갚으라고 합니다. 그 후에 모세는 죽을 것입니다(1-2). 원수를 갚으라는 말은 복수나 분풀이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전쟁을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디안은 이스라엘을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지도록 유혹하여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표현하는 정당한 방법이었습니다. 모세는 각 지파에 천 명씩 뽑아 거룩한 전쟁을 치르게 합니다. 이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영육 간에 타락하도록 만든 발람도 죽게 됩니다. 하지만 전쟁에 참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가지 실수를 합니다. 바로 미디안의 부녀들과 그 아이들을 사로잡아 온 것입니다. 모세는 이에 대해 진노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전에 바알브올의 사건, 곧 미디안 여인들이 우상을 숭배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함께 숭배하는 일을 겪고도 미디안 여인을 사로잡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에 모세는 남자 아이와 결혼을 한 여자를 모두 죽이고 오직 여자 아이만 살려 두라고 합니다(13-16). 남자 아이들은 잠재적인 적군이기에 살려 두어서는 안되고 결혼을 한 여인들은 이미 바알브올에 가담하여 영적으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살려두어서는 안되었습니다. 다만 아직 바알브올에 가담하지 않아 남자를 알지 못하는 미디안 소녀들은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하길 원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오늘 말씀은 전쟁에 참여하여 시체를 만짐으로 부정하게 된 용사들을 진영 밖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게 하여 정결의식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전리품을 나누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한 사람도 죽지 않는 놀라운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49). 정결 의식을 거친 후에 승리로 얻은 전리품은 정확하게 계수되어 반은 전쟁에 참여한 사람에게, 반은 회중에게 돌립니다(26-27). 또 군인들은 자신이 얻은 전리품의 오백 분의 일(0.2%)을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어 여호와께 드립니다. 또 백성들도 오십 분의 일(2%)을 레위인들에게 주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또 군인들은 자신들 중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동시에 전쟁 중에 피 흘린 것을 속죄하기 위해서 예물을 가지고 옵니다. 모세와 엘르아살은 그것을 받아 회막에 드려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을 삼았습니다(50-54).
오늘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 사람들을 진멸하고 승리로 돌아온 장소가 약속의 땅 바로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38년 전에 정탐꾼을 보낸 곳과 지리적인 위치는 다르지만, 그들의 상황은 같습니다. 출애굽 1세대가 약속의 땅을 점령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지 못하고 실패한 그곳에서 2세대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전쟁에 나아가 한 사람도 죽지 않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미디안에 대한 승리는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싸우게 될 전쟁의 맛보기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에 가까운 승리를 하게 됩니다.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는 표현을 볼 때 일반적으로 전쟁을 통해서 그들이 승리를 한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됩니다.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여리고 성 전투처럼 특별한 방법으로 승리를 했을 것입니다. 또 전쟁 후에도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일부를 구별하여 바침으로 그 승리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 삶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전에 실패했던 곳이라도 바로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다시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했던 그곳에서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승리를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모세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백성들이 서원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서원을 하거나, 어떤것을 결심하고 서약했으면 그가 말한대로 다 행해야 합니다. ‘서원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어떤 것을 드리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헌신을 의미한다면, ‘결심하고 서약’하는 것은 어떤 것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일종의 절제의 헌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둘 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이루어 주신다면 어떻게 하겠다든가, 하지 않겠다든가 하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된 마음에서 하는 것입니다(1-2). 하지만 이런 서원도 질서가 있습니다. 만약 결혼하지 않은 딸이 서원할 때는 그의 아버지가 듣고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허용한다면 그 결심과 서약은 유효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 서약을 듣고 허락하지 않으면 그 서약은 무효가 되고 지키지 못해도 하나님께 용서를 받습니다(3-5). 또 만약 결혼한 어떤 여인이 서원 할 때 경솔하게 말하였다면 남편 된 사람이 그것을 듣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남편이 듣고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경솔한 서원은 무효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 여자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6-8). 하지만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의 서원이나 서약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한편 결혼 후에 아내가 서원을 할때 남편이 듣고 그것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고 금하지 않으면 그 서원은 효력을 가져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남편이 듣고 무효하게 하면 그 아내의 서약은 무효가 되어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만약 남편이 듣고 한 참 있다가 나중에 반대하게 되면 그 죄를 남편이 책임지게 됩니다. 본인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남편은 자녀와 아내의 서원을 지키게 할 수도 있고, 무효가 되게 할 수도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구약 시대에 가정에서 재산권이나 제사를 드릴 제물이 아버지와 남편에게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또 서원을 이룰 때 반드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 제사를 아버지와 남편을 통해서만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자식이나 아내가 서원 했을 때 그것을 이행하는 실제적인 책임은 남편과 아버지가 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식이나 아내가 여러 상황을 형편을 살피지 못하고 경솔하게 서원할 때 그것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나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다고 서원했을 때, 남편 엘가나는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한나가 그 서원을 이룰 수 있도록 허락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섣부른 서약이나 서원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안전 장치를 가정에서 남편과 아버지에게 주신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함부로 서원하고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깨뜨리는 심각한 죄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서원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서원을 다시 확인하고 제대로 지킬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하는 것이 가장에게 주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서원이나 서약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큰 벌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남편과 가장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모든 서원과 서약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신 것은 신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또 우리의 신앙 생활이 바르게 되고 있는지 참된 남편이신 예수님께서 세워 주신 직분자를 통해서 확인되어야 합니다. 직분자는 교인의 삶을 감시하고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버지가 딸과 아내의 서원을 살피고 너무 과하거나 잘못된 것이면 취소해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과 같이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가정에서도 우리는 부모가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 미래에 그런부모가 될 수 있도록 잘 준비되어야 합니다. 또 교회 안에서 어른으로서 다른 자녀들을 신앙으로 바르게 인도할 의무가 모든 성도에게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교회와 가정에서 우리 자녀들과 미래 세대의 신앙이 바르게 설 수 있도록 우리의 맡겨진 의무를 다합시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삶으로 모범을 보입시다. 또 심방이 곧 시작이 됩니다. 심방을 통해서 직분자들이 이런 역할 잘 감당하도록 기도하고 협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절기와 바쳐야 할 제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달의 첫 날은 월삭이면서 동시에 나팔절입니다. 그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매월 첫날에 드리는 제물 외에(6)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일곱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로 드리고, 소제로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수송아지와 함께 드릴 때는 십분의 삼을, 숫양에는 십분의 이를, 어린 양과 함께 드릴 때는 각 마리당 십 분의 일 에바로 드립니다. 또 속죄제를 위해서 숫염소를 드립니다(1-6).
이어서 일곱째 날 십일에는 장막절로 백성들이 함께 모여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심령을 괴롭게 하여) 나팔절에 드린 것과 동일하게 소제를 곁들인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 그리고 역시 숫염소를 속죄제로 드립니다(8-11). 이 날은 대속죄일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날이었습니다. 일곱째날 열 다섯째 날에도 성회로 백성들이 모여 안식하며 칠일 동안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이 절기는 초막절(장막절)입니다. 이 날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장막 가운데 살았던 생활에 대해 회상하고 또 약속의 땅에서 얻은 추수에 감사하며 기뻐하던 절기였습니다(이스라엘은 추수를 칠칠절에 한번, 초막절에 한번 두 번 합니다.) 이 절기는 총 칠일을 장막에서 생활하며 보내는데, 첫날은 번제로 수송아지 열세 마리와 숫양 두 마리, 일 년 된 숫양 열네 마리를 소제와 함께 드립니다. 그리고 상번제와 속죄제로 숫염소 한 마리를 드립니다. 둘째날은 수송아지 열두 마리와 숫양 두 마리와 숫양 열네 마리를 역시 소제와 전제와 함께 드립니다. 역시 매일 드리는 상번제와 속죄제로 염소 한 마리를 드립니다. 셋째날에서 일곱째날까지 수송아지만 한 마리씩 줄고 동일하게 제물을 드립니다. 그리고 여덟째 날에는 큰 성회를 열어 번제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일년 되고 흠 없는 숫양 일곱 마리를 소제와 전제와 함께 드립니다. 또 속죄제로 염소 한 마리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은 장막절에 다른 제사도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제사가 장막절 제사로 대체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절기의 제사를 별도로 정확하게 지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 모든 것을백성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12-40).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확하게 지켜야할 절기와 제사의 제물의 양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어제 말씀처럼 이스라엘의 삶이 매일, 매주, 매월, 매년의 절기와 제사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이 예배이며, 삶 전체가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어야함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매일의 삶과 절기들을 통해서 번제와 소제, 전제, 속죄제가 끊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의 삶을 감싸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번제가 상징하는 헌신과 소제와 전제가 상징하는 감사와 찬양, 그리고 속죄제가 상징하는 회개가 이스라엘의 삶을 꽉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와 헌신과 찬송과 회개가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드려야 할 제사와 절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매일 일년 된 흠 없는 숫양을 아침 저녁으로 고운 가운십분의 일 에바의 소제와 함께 번제로 드려야 합니다(1-8). 이것을 매일 ‘항상 드리는 번제’라고 해서 상번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절기 때 하나님께 드려야하는 제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안식일에는 상번제 외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고운 가루와 포도주를 부어서 제사를 드리는 전제도 함께 드려야 합니다(9). 이로써 안식일이 다른 날과 구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초하루(혹은 ‘월삭’)이라고 불리는 매월 첫 날에는 수송아지 두 마리와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일곱 마리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고 매 수송아지에는 고운 가루 십 분의 삼에 기름 섞은 소제와 양 한 마리에는고운 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매 어린 양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을 기름 섞은 소제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또 전제로 수송아지 한 마리를드릴 때 마다 그래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외에 숫염소 한 마리도 속죄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합니다(10-15). 이어서 유대인 달력으로 1월 14일에 지키는 유월절과 바로 이어 15일 부터 이어지는 무교절에는 무교병을 먹고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를 각각 소제를 섞어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숫 염소로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역시 상번제 외에 그것들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칠일 동안 동일한 제사를 반복하면서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거룩한 모임으로 모이고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되었습니다(16-25). 이어서 칠칠절에 드릴 제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칠칠절은 처음 익은 열매를 추수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오순절)입니다. 첫 열매는 앞으로 있을 열매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그 날에 드리는 소제는 첫곡식으로 드리는 새 소제입니다. 이 절기에도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또소제로 각 송아지를 드릴 때 마다 십분의 삼 에바를, 양을 드릴 때에는 십분의 일을 소제로 드립니다. 또 속죄를 위해서 숫염소 한 마리를 드립니다. 이것은 모두 상번제 외에 추가적으로 드리는 제물들입니다(26-31).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한다는 것은 단지 일주일에 한 번 예배하는 그런 삶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을 믿고 마음을 다해 그분을 섬긴다는 것은 인생의 사이클이 온전하게 하나님께 맞춰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달리 말하면 매일, 매주, 매달, 매년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비워 두는 것입니다. 365일 교회에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맞추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때 이스라엘은 땅을 분할하여 차지하고, 여호수아라는 직분자를 따라서 온 이스라엘은 일상을 살면서 성막에서 항상 피어오르는 상번제의 연기를 보고 살게 될 것입니다. 또 안식일, 초하루, 칠칠절 등과 같은 절기 때마다 함께 정기적으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다시 한 번 그들의 죄를 속죄하고 교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사이클을 구성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매일 제물을 드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고 절기 마다 제사를 드리지 않지만, 일상 속에서 매일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상번제의 연기가 보고 삽니다. 매 주일의 예배 속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속죄하고 다른 성도들과 교제합니다. 매일, 매순간을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씁니다. 삶 자체를 하나님을 위해 삽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이고 예수 믿고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오늘 하루도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 초점이 온전히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모세에게 나아와 땅을 요구하는 장면입니다. 슬로브핫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자로서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문제는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상속자가 없이 죽은 것입니다. 땅을 분배할 때 각 가정에서 남자가 그 몫을 받았는데, 슬로브핫의 다섯 딸은 몫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에 그 다섯 딸들은 재산 상속에 대한 권리를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딸들이 받을 수 있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이름, 즉 가문이 딸들을 통해서도 유지 될 수 있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딸들의 요구가 옳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선례가 되어 아들이 없을 때에는 딸들도 아버지의 땅을 물려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딸이 없을 때는 어버지 편에서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주도록 하는 규칙을 세웁니다. 이런 규칙은 비록 싸움에 참여하지 못해 몫을 얻을 수 없는 여인이라도 므낫세 종족 중에서 하나님이 주신 몫을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또 인간이 하나의 청지기로서 그 땅을 소유하며 궁극적인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해 줍니다(1-11). 하나님은 이처럼 세심하게 그 백성들을 돌보셨습니다.
땅의 분배와 관련된 단락이 끝이 나고 모세의 죽음 예고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안타깝지만, 므리바 사건으로 아론과 마찬가지로 모세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땅을 볼 수 있도록 아바림(느보 산) 산에 올라가라고 합니다(12-14). 그런데 모세의 관심은 그 땅을 보는 것 보다 자신이 죽고 나서 목자 없는 양 같이 될 회중을 걱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성령이그 안에 머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대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여호수아를 새우고 그에게 안수하여 모세에게 있던 존귀를 여호수아에게 돌려 온 회중이 여호수아에 복종할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하십니다(12-20).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고 여호수아를 엘르아살 앞에 세우고 엘르아살은 하나님의 뜻을 살필 때 쓰는 우림과 둠밈을 가지고 그를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확증하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시키는대로 모두 행하였고, 여호수아를 자신을 잇는 지도자로 세웁니다(21-23). 하나님은 그 백성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버지의 몫을 이어받는 문제와 지도권이 이어받는 이야기로 구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아들 없이 죽은 슬로브핫의 몫을 넘겨 받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자들의 권리도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이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참된 목자로서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소유할 백성들의 권리를 모세를 후계자인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실 것입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과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교회가 가진 권리를 보장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하늘 왕국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참된 목자로서 양을 돌보시고 지켜 주십니다. 이런 주님이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세심하게 돌보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천국 소망에 대한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바알브올의 일로 생긴 전염병이 끝난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총수를 조사하라고 합니다. 1장에서와 마찬가지로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만한 자들이 그 대상입니다(1-4). 르우벤 자손들은 합이 사만 삼천칠백 삼십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의 후손 중 발루의 가문에 속한 자들 중에 느무엘과 다단과 아비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회중 가운데서 부름을 받은 자들인데, 그들이 바로 고라와 함께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다가 죽은 자들이었습니다(5-10). 회중 가운데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세움을 받은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도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않도록 긍휼을 베푸셨습니다(11). 시므온 자손에서 납달리 자손까지 모두 계수 되었습니다. 중간중간 언급되는 자손들은 족보의 진정성을 보여줍니다. 그 총수는 육십만 천칠백 삼십 명입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뼈아픈 숫자입니다. 처음 계수 했던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보다 적은 수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숫자보다 훨씬 더 많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으로 심판을 받아 줄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라 자손과 다단과 아비람의 불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14700명과 250명이(16:49), 물이 없고 만나를싫어하는 염병으로 수 많은 사람이(21:6), 바로 앞에서 본 바알브올 사건으로 24000명이(25:9)이었습니다. 또 자연사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어든 군대의 규모는 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군대로서 여전히 다음 세대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이 조차도 없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앞두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땅을 나눠 주라고 합니다. 땅을 차지하는 기준은 가족의 숫자가 많으면 많은 만큼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각 지파별로 땅 안에서 제비 뽑아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52-56). 이어서 레위 지파의 족보와 1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레위 지파의 숫자의 모든 남자는 이만 삼천명입니다. 그들은 차지할 기업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대의 총수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시내 광야에서 계수 되었던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마무리 됩니다(63-65).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하나님의 군대로서 이스라엘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땅을 정복하는 준비로서 땅을 나누도록 명령을받습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정복을 하고 나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땅을 먼저 나누고 나서 정복하러 가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땅을 정복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 땅을 주실 것을 신뢰하며 승리를 얻는 믿음의 전쟁임을 암시합니다. 그것을 여호수아와 갈렙만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언급함으로 더욱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신뢰한 자만이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주님의 군대로서 이 세상과 사탄과 싸울 때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나아가야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죄를 정복합시다. 우리 삶 속에서 믿음으로 정복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살펴봅시다. 아직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의 마음과 삶이 있는지 살펴보고 믿음으로 그곳을 정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싯딤에 머물면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데 함께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바알을 숭배하는것은 육체적인 관계도 포함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알브올(브올 지역에서 섬기던 바알)에감당한 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백성이 지도자급에 있는 자들입니다(1-5).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큰 죄악이기 때문에그 벌 또한 아주 강력합니다. 바알브올에 가담한 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듣고 회막 문에서 온 백성이 울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는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그것을 보고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창을 들고 그 남자를 따라가 남자와 함께 온 여인을 죽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전염병이 멈추게 됩니다(6-9). 어떻게 보면 잔인해 보이고 인정머리 없는 것 같이 보이는 비느하스의 행동에 하나님은 긍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그 남자와 여자를 죽임으로써 온 회중이 멸망할 뻔 한 것을 구해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비느하스와 그 자손들은 대대로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민수기 저자는 죽임을 당한 남자와 여자의 신상을 말해 줍니다. 놀랍게도 그 남자는 시므온 조상의 가문 중 한 지도자 입니다. 죽임 당한 여자도 미디안 백성의 높은 사람의 딸이었습니다(12-15).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로 이끌었던 미디안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독특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다른 민족에게 먼저 화평을 전하고 그 화평을 거부하고 먼저 공격해 올 때 그들을 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을 먼저 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압인들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빠지게 만든 주범이라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16-18). 그들은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알브올에 참여하여 죽임 당한 자들이 평민이 아니라 지도자급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영적인 간음과육적인 간음에 빠지게 만드는데 앞장 서는 사람들이 백성의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영적인 전투에서 가장 앞자리에 있는 자들이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진것입니다.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는 그런 영적인 위기를 간파하고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온 자를 창으로 죽였습니다. 죽임 당한 자가 백성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확신을 필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그 일을 했습니다. 이런 열심이 백성을 멸망으로 가는 길에서 건져냈습니다. 올바른 하나님의 열심은 공동체를 살립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은 교회를 위기에 빠뜨립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올바른 열심은 말씀에 근거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은 어떤 말씀에 기반하고 있습니까? 어떤 열심으로 하나님과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교회를 섬겨야 할까요? 먼저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말씀에 기반한 거룩한 열심으로 공동체를 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발락은 발람을 다른 높은 곳에 세워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발람은 주술이 아니라 온전한 정신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합니다.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복주시는 것을 친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그 백성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 받게 될 것임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1-9). 발락은 역시 화를 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 번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완전히 변해 발람에게 위협을 하고 심지어 발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발람은 도망 가지 않고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발락의 백성에게 어떻게 행할 것인지 예언합니다. 그 예언의 핵심은 먼 훗날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고 한 규(통치자의 지팡이)가 이스라엘에서 나와서 모압과 셋의 자손들(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살아가는 모든 백성을 통칭함)을 다 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별’은 자주 지도자나 통치자를 상징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거부했던 에돔 족속은 이스라엘의 유산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남은 가나안 민족들도 그 통치자에 의해서 정복될 것이라고 합니다. 앗수르가 용맹을 떨칠 것이지만 다른나라에 의해서 멸망할 것임을 예언합니다. 발람과 발락은 이제 헤어져서 각자 갈 길을 갑니다(10-25).
발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하신 말씀과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과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끝내 발람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을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의해서 반드시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약속하실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약속의 땅으로 행진하는 이스라엘은 끝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한 선하신 계획은 원수의 어떤 방해도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이 예언은 ‘한 별, ‘한 규’로서 가깝게는 다윗 왕이 실제로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정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원수 사단의 나라를 쳐부수신 예수님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원수인 사단과 죄와 사망을 십자가로 정복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생명과 기쁨과 함께하심, 임마누엘을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과 계획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약속 때문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은 진행중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고 기억하고 현실 속에서 기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발람은 발락에게 일곱 제단을 쌓고 수송아지와 숫양 각각 일곱 마리를 준비하고 그 곁에 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발람을 만나 주시면 그것을 말하겠다고 합니다(1-3).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발락에게 돌아가서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 말을 전하라고 합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않은 자를 저주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꾸짖지 않은 백성을 꾸짖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 이스라엘이 이렇게 많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말합니다(4-10). 당연히 발락은 발람에게 화를 냅니다. 원수인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발람을 데리고 왔는데, 오히려 축복했기 때문입니다(11-12). 이제 발락은 발람을 이스라엘 끝에 있는 백성들만 보이는 곳으로 데려가 그 끝에 있는 자들이라도 저주하라고 합니다(13-14). 발람은 또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일곱 수송아지와 숫양을 준비하고 발락에게 그 곁에 머물러 있으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발락의 곁에는 모압의 고관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발람에게 말씀하십니다(13-17). 발람은 발락에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거짓말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후회가 없으시다고 하며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실행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한 축복이 말 뿐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확증을 주십니다(18-20).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반역의 보지 않으신다는 말은 용서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제나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강력한 힘이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주술로도 이스라엘 백성을 해할 수 없고 오히려 모든 주술도 파괴할 만큼의 강력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21-25). 자신의 적군인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축복하는 발람에게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발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할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에 마지막으로 발락은 발람을 브올 산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를 요청합니다(26-30).
오늘 말씀에서 발람은 이스라엘을 축복합니다. 그것은 발락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발락은 발람을 원망하지만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말함으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기뻐하심을 증거합니다. 이스라엘은 강력한 군대입니다. 그렇게 강력한 군대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어떠함이나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 입니다. 이스라엘은 반역과 허물을 가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용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뜨리지 않는 한 어떤 저주도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습니다.
만찬가지로 새 언약 안에 있는 새 이스라엘인 교회에게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저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회에게 좋은 일만 생긴다거나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 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축복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무찔렀다는 소식이 가나안 땅에 퍼졌습니다. 이에 모압의 왕 발락은 미디안과 연합하여 마술의 힘을 빌려 자신 보다 많고 강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여 전투에서 승리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당시 아주 유명했던 발람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발람이 저주를 하면 저주를 받고 복을 빌면 복을 받게 된다는 소문이 약 650km 떨어진 모압에도 날 정도였습니다. 미디안의 높은 사람들과 모압의 높은 사람들은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발람에게 갑니다. 미디안의 장로들과 모압의 장로들의 부탁은 그저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내려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쉽게 무찌를 수 있도록하는 것입니다. 그 댓가로 엄청난 부를 약속합니다. 발람은 처음에 그 청을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그들에게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후 두번째로 더 높은 사람들이 와서 부탁할 때는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더하시길 바랍니다(19). 하나님은 발람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발람의 물질로 가득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곧 바로 그 다음 날 아침에 발람의 나귀 앞에 천사를 세우시고, 발람을 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나귀는 그것을 보고 가지 못했지만, 발람은 그 천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발람은 평소와 달리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발람의 발이 담에 짓눌리자 화를 내며 나귀를 지팡이로 때렸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나귀가 말을 할 수 있도록 하셨고, 나귀는 본래 그런 습관이 없지만 그렇게 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주님의 천사가 발람을 치려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21-30). 나귀와 대조적으로 발람은 영적인 눈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재물에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발람의 길은 사악했습니다(32). 나귀가 오히려 발람보다 나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발람에게 그 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대신에 발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만 해야 했습니다. 발락은 발람을 극진히 대접하였고, 다음날 이스라엘 전체가 보이는 산 위의 바알을 제사하는 곳에 섰습니다(38-41).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발람은 독특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참 선지자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발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사실 저주와 복은 발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 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이었습니다(창12:3).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을 통해서 오히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말한 복을 받을 자들임을 증거할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약속 때문에 복을 받을 자들입니다. 정작 발람은 이 백성도 아니고 이 복의 대상도 아닙니다. 발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발람은 그 복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지만, 복음에 자신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럴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노력 하지만 정작 교회가 다른 것에 마음이 빼앗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한 것들(복음)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결국 발람과 같은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며 자신 또한 그 복음과 말씀의 대상임을 분명히 믿고 의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다른 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우리가 전하고, 알고 있는 복음과 말씀의 대상이 바로 나 자신임을 기억합시다. 말씀에 나타난 복음과 약속과 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것임을 믿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광야의 행진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 아랏 왕이 이스라엘을 쳐서 몇 사람을 사로 잡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넘겨주신다면 그들을 멸하겠다고 마음을 모아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하나님은 그 백성을 이스라엘 손에 넘겨 주었습니다(1-3).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백성들은 또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하며 애굽을 그리워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만나에 불평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많은 백성들이 죽게 됩니다. 본래 광야에는 뱀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동안 뱀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그 손을 거두셨고 불뱀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입니다. 이에 백성들은 자신들이 범죄하였음을 모세에게 말하고모세는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자는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그렇게 하였고, 정말로 그것을 본 자들은 다 살았습니다(4-9). 그 후에 광야의 행진은 순탄하게 진행이 됩니다(10-13).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며 만나는 다른 민족들에게 먼저 평화를 제안합니다. 하지만 가나안 민족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공격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을 무찌릅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불평하기 전에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물을 공급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모리 왕 시혼을 무찌르고, 견고한 성 헤스본도 정복합니다. 또 야셀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도 무찌릅니다. 높은 산 위에 있는 바산의 왕 옥도 무찌릅니다(14-35). 바산을 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땅을 넘겨 주시겠다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놋 뱀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승리하는 법을 배우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놋 뱀을 달아 그것을 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 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오늘 말씀을 들려주시며 당신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심으로 죽어가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요3:14-15). 놋 뱀을 쳐다 본 사람들이 다 살아난 것 같이,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시적이지만 승리를 가져다 준 것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승천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누리는 비결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복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날마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미리암의 죽음을 언급한 후에 백성들의 불만을 다시 기록합니다. 백성들은 물이 없는 것 때문에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위에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바위를 두 번 쳤습니다. 이렇게 바위를 두 번 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본문은 구체적으로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말씀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백성의 불만에 화가 났고, 그 바위를 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쨌든 그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며 하나님의 거룩을 가로막는 행위였습니다(12).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직후에 모세와 아론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벌이 너무 가혹해 보입니다. 아론과 모세가 결국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1-13). 하나님과 가까이하며 더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지도자로서 더 큰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백성을 인도합니다. 처음에 백성들은 에돔 땅을 평화롭게 지나가려고 하지만 거부당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돌아서 호르 산에 도착합니다(14-21).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의 불순종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시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용하셔서 백성을 광야에서 이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모세도 방금 들은 슬픈 말씀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끝까지 감당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데까지 모세와 아론은 그들의 직무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호르산 위에서 엘르아살에게 아론의 대제사장을 옷을 입히라고 합니다.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대로 순종했고, 아론도 호르산에서 죽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직무는 이제 엘르아살이 맡을 것입니다. 백성은 아론을 위해서 30일 동안 애곡합니다.
완벽해 보이던 모세와 아론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와 아론에게 맡긴 바 직무를 다하도록 했습니다.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지도자에게 엄격한 순종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통하여 여전히 대제사장 직무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은 죽고 또 실수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을 돌보십니다. 인간중보자는 항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중보자는 완전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참된 인간이시고 참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영원한 중보자로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영원히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교회 지도자의 실수와 잘못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저기서 듣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을 부르고 계시며 돌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여전히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인간 지도자의 실패와 부족함을 보고 실망하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바라보며 살아갑시다. 교회의 지도자와 직분자들은 하나님께서 엄중한 잣대로 그들을 보신다는 기억하고 더욱 더 온전히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잊지 않고 전심으로 섬기는 직분자와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죽은 시체를 만진 자들에 대한 부정을 어떻게 깨끗하게 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본문 앞 부분(14-17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죽었습니다. 또 뒤에서는 미리암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 앞 뒤로 죽음이라는 주제가 감싸고 있습니다. 죽음은 정상적인 사태가 아니라 부정한 사태입니다. 때문에 시체를 만지는 자는 부정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 부정한 상태를 정하게 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서 나아 올 수 있는 지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제사장이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아직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붉은 암송아지를 데리고 진영 밖으로 나가서 그 소를 잡고 피를 찍어 회막 방향을 향해 일곱 번 피를 뿌린 후 그 송아지를 불사릅니다. 동시에 제사장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송아지를 사르고 있는 불에 던집니다. 그런 다음 다 타고 남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부정을 씻는 물을 위해서 간직합니다(1-9). 이 일에 연관된 모든 사람은 부정해졌기 때문에 정결의식을 행하여야 합니다. 사람의 시체를 만진자는 일주일 동안 부정해 지는데, 셋째 날과 일곱 째 날에 이 부정을 씻는 물을 자신에게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차고 나면 정결해 집니다. 이 물을 뿌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일주일을 채워도 여전히 부정합니다(13).
또 어떤 사람이 자신이 살고 있는 텐트 안에서 죽게 되면 그곳은 부정한 곳이 되기 때문에 뚜껑을 덮어 놓지 않은 모든 그릇이 부정함에 영향을 받아 부정하게 됩니다. 그 때 정결한 사람이 깨끗하게 하는 물을 우슬초에 찍어서 시체를 만진 사람과 부정하게 된 그릇에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뿌림으로 정결하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 물을 뿌린 그 사람은 자신의 옷을 빨고 몸을 씻고 그날이 지나 저녁이 되면(이스라엘 하루의 시작은 저녁이므로) 정결하게 되어 정상적인 상태가 되어 일상 생활이 가능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만약 물을 뿌리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끊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영구적인 이스라엘의 규칙이 될 것입니다(16-20). 이는 죽음이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정결하게 하는 규례를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제사장과 레위인의 위치와 그들의 사역의 필수성과 독특성을 재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수많은 시체를 만진 자들이 다시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되려면 제사장의 수고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정결의식을 행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죽음은 계속 이스라엘 삶 속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죽음은 부정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결의식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부정함의 원천인 죄와 죽음을 정복하신 분으로 정결의식을 뛰어 넘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보혈을 믿는 자는 거룩하게 됩니다. 여전히 죽음이 우리 앞에 있지만, 그것은 치명적이지 않습니다. 시체를 만진 자들이 정결하게 물과 정결의식을 통해서 다시 정결하게 될 수 있듯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의 구원사역 때문에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가볍게 생각해서도 안되지만, 죽음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겠지만, 죽음을 넘어 우리에게 영생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이 땅에서 죄를 그치고 거룩하게 되어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관문과도 같습니다. 우리 가까이 있는 죽음을 기억하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정결한 삶을 살아 갑시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아멘.
두려움에 휩싸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아론의 자손들과 레위인들을 세워 백성과 성소에 대한 죄를 감당하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제사장들을 통해서 그들의 수고와 봉사로 죄를 감당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백성들의 죄가 자손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1-5). 제사장들의 수고와 레위인들의 보조로 백성들은 담대하게 그들의 제물을 가지고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공포에 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위로는 그들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운 제사장(중보자)의 수고를 통해서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은 모세를 통해서 아론에게 말씀하시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직접 말씀하심으로 아론과 그 자손들의 제사장직을 강조하고 계십니다(1).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제사장들이 마땅히 받을 수 있는 거제물과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 곧 십일조에 관해 말씀합니다. 또 거제물과 요제물은 대제사장의 몫이 됩니다(11). 또 제일 좋은 곡식과 기름과 포도주를 하나님께 바침으로 그것이 아론의 몫이 됩니다. 사람의 첫 태생과 짐승의 첫태생이 모두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 아론의 몫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론은 기업과 분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기업이 되셔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실제로는 아론의 몫이 됩니다. 또 레위인들도 몫과 분깃이 없는데, 이스라엘이 바치는 십일조가 그들의 몫이 됩니다(21-24). 뿐만 아니라 레위인들도 받은 십일조 중에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그것은 역시 아론의 몫이 됩니다. 십일조 중의 십일조는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아론의 몫이 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회막 봉사에 대한 제사장들의 보수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월급으로 여기지 않고, 아주 존귀한 것, 거룩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25-3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질서를 세우고 그들의 죄를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감당할 수 있도록 합니다. 제사장을 통해서, 그리고 레위인들의 도움으로 제사에 대한 질서를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를 당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제사장들에게 선물이고,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우리의 선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주님과 회복될 수 있도록 직분자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그들의 몫이 되어 주셔서 선물들이 지속적으로 그 백성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선물이 계속해서 그들 가운데 있도록 십일조를 통해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곧 그들 스스로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헌금과 십일조(헌금)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됩니다. 회중의 헌신을 통해서 목회자의 생활이 보장되고, 목회자는 사례를 거룩하고 아름답게 여기며 그의 사역을 통해서 회중이 영적으로 풍성해 지도록 합니다. 또 교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부분에 지출을 합니다. 때문에 성도의 의무와 목회자의 의무는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도와 직분자들이 함께 의무를 충실하게 감당하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예수님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아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의 직분에 불만을 가졌을 때 하나님은 백성을 전염병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 각 대표를 뽑아 그들의 지팡이 하나씩 가지고 그 위에 이름을 쓰도록 합니다. 레위 지파를 대표해서는 아론의 이름을 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열 두 지팡이를 하나님께서 백성을 만나는 장소인 회막(장막) 안에 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 백성이 원망하는 소리를 그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1-6). 모세는 그 말을 전하였고, 백성들을 각 지파 별로 대표를 뽑아 각 지파별로 지팡이 가지고 와서 그 위에 이름을 쓰고 회막에 두었습니다. 다음 날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다른 지팡이는 그대로 있는데, 레위 지파를 대표하여 이름을 썼던 아론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심지어 살구(아몬드)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살구’ 열매는 경성하고 깨어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레위 지파가 바로 성전에서 늘 깨어 하나님 앞에서 직무를 행하는 자들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모든 지팡이를 가지고 나가 백성들에게 보여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다시 성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안에 넣어 보관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대대로 제사장에게 반역한 자들, 곧 하나님께 반역한 자들에 대한 표입니다. 이로써 온 백성들 자자손손이 다시는 하나님께 원망하여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10).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그대로 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그들이 함부로 성소에 나아갈 때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아론과 그의 후손들을 세우셨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12-13).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지팡이를 통해서 당신께서 아론과 그 자손들을 거룩하게 세우셨고, 독특한 지위와 책임을 맡기셨다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또 그것을 지속적으로 잊지 않도록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보관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질서를 깨뜨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도전인지 이스라엘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직분자로서 그분을 거부할 때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을 받습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교회 안에서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때로 이 질서가 우리가 보기에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불평등한 것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보다 지혜로운 척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지혜로운 분이시고, 우리를 우리 자신 보다 사랑하시는 분이시기에 바른 질서를 통해서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런 분이 교회를 올바른 질서를 통해서 다스립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40)”는 바울의 교훈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또 교회의 직분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도들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섬김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직분자들이 늘 깨어 하나님 앞에서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질서를 잘 유지하고 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교회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백성 중에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이 여론을 형성하여 무리를 지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합니다. 대적하던 무리 중 레위 지파 고핫의 손자의 고라의 불만은 레위 족속으로서 아론의 자손들만 제사장이 되고 자신들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10). 그들이 보기에 같은 레위 족속으로서 자신들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회막을 섬기는 것이 초라하고 작아 보였고, 제사장의 일은 크게 보였습니다. 르우벤 지파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의 불만은 모세의 리더십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모세가 혼자 모든 결정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을 불렀을 때에도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기업도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졌습니다(12-14).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못하는 것이 그들의 불신앙이 아니라 모세의 리더십의 부족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을 주시지 않는 것은 열 정탐꾼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원망한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무죄함을 하나님께 말씀드린 후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의 말을 듣고 불만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향로에 향을 피우고 내일 온 회중에게 나아오라고 합니다. 다음 날에 고라가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려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회중에게 벌을 내리려고 하십니다. 하지만 모세와 아론은 특정한 사람이 범죄한 것으로 모든 회중을 벌하지 말라고 중보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사방에서 떠나라고 합니다(20-24). 모세가 다단과 아비람에게로 갔을 때 이스라엘 장로들이 함께 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장막을 떠나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멸시했다면 땅이 갈라져서 그들이 산채로 땅에 삼켜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마치자마자 땅이 갈라져 그 가족들과 재산을 삼켰습니다. 또 함께 반역을 꾀했던 250명의 리더들도 들고 있던 향로에서 불이 나와 죽었습니다(25-35). 그들을 사른 향로는 거룩하게 되었으므로 모아서 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것은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닥치게 되는 어마어마한 벌이 내린다는 것의 하나의 표식이 될 것입니다. 아론의 자손이 아닌 다른 사람은 여호와 앞에 분향하러 가까이 나아가서는 안되고 고라와 그 무리와 같이반역을 꾀할 때 무시무시한 결과가 닥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가 됩니다(36-40).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하고 불만을 가지는 것이 무서운 일임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오히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백성을 죽였다며 원망을 합니다(41-42). 결국 하나님은 전염병으로 백성을 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가져다가 백성 가운데 서도록 하여 속죄하므로 전염병은 멈추게 됩니다. 백성의불만에도불구하고모세와아론은중보자와대제사장으로서그들의직무를행하여백성을지킵니다(43-50).
신약 성경은 모든 성도가 제사장들이라고 합니다(벧전 2:9). 그러나 모두가 교회 안에서 직분자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설교할 수 있고 장로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도록 하는 목사와 성도들을 돌보도록 장로를 세우셨습니다. 또 여러 교회의 행정적인 일을 위해서 집사를 회중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직분자로서 교회에 직분자를 선물로 주셨습니다(엡4:7-13). 이런 직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섬길 때 그리스도의 몸은 세워지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직분자들을 통해서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또 직분자는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겸손하고 성실하게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직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직분자에 대한 경멸은 결국 회중에 대한 진노로 돌아옵니다. 그만큼 직분을 받은 사람은 거룩한 부담을 가지고 섬겨야 하고 회중은 직분자를 존경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천으로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풍성한 분분량에까지 자라가기를 원합니다. 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천으로 우리 교회에 반듯하게 세워져 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백성들이 모세를 향한 불평을 다루는 장들 사이(13장-18장)에 끼여 있습니다. 이 장은 레위기처럼 제사에 관한 법을 말해 줌을 전체적으로 흐름을 끊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이렇게 끊어지는 맥락에 배치한 것도 모세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자신을 비방했던 백성들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라고 하며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록함으로, 그들의 불평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자손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1-2). 징계를 하셨지만, 징계가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들을 징계를 통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15장에서 제사를 언급할 때는 속죄제가 아니라 자원제, 곧 감사제와 찬양제를 먼저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속에 땅에 들어갔을 때에는 지금의 어른들의 모습과 달리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3-22). 그 후에 속죄제에 언급합니다. 하지만 속죄제도 부지중에 지은 죄와 고의로 지은 죄에 대해서 다르게 취급합니다. 부지 중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속죄제를 통해서 대속하면 사함을 받게 됩니다(28). 하지만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여호와를 비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30-31). 그 한 예로 안식일에 나무를 한 사람을 제시해 줍니다. 안식일은 온전히 일을 쉬어야 하지만 나무를 하러 간 사람은 회중이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이라고 명령하십니다(32-36).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기억하고 지키도록 이스라엘 사람의 의복 귀에 술(여러 가닥의 장식 실)을 달아 거룩한 백성임 인식하고 계명을 지키고 살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37-41). 이것은 계명을 기억하고 지키기 위해 일상 속에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징계를 하시지만 긍휼을 베푸시어 광야 생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 갈 것이고, 그곳에서 어떻게 감사하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말씀해 주십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과 풍성한 먹을 거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고의로 어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또 계명을 기억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죄에서 구원을 의미하기도 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구원을 얻은 오늘날 교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과 날마다 채워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고의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물론 고의로 죄를 지었을 때에 죽어 마땅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의적인 죄와 부지중에 지은 죄의 형벌을 모두 받으셔서 죽지 않지만 죽을 만큼 괴로워하고 죄를 미워하며 회개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 계명을 힘써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구원은 한 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이후의 새로운 삶을 살아내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구원 받은 후에 죄로 넘어지고 쓰러져도 우리가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들어왔고 완성된 천국에 갈 것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땅에서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죄에 넘어지더라도 예수님 덕분에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함께 구원받은 백성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온 회중은 너무나 강해 보이는 가나안 땅 사람들과 강한 성읍을 이길 수 없다는 다수파의 의견에 동조합니다. 나아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아닌 다른 지휘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까지 말합니다(1-4).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구원 받기 이전의삶, 옛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다시 사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반역과 죄악입니다. 그러자 모세와 아론은 온 회중에 질타와 불평을 들음으로 엎드려 있고, 이 모습을 본 여호수아와 갈렙은 참담하여 그들의 옷을 찢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한번 정탐한 땅은 아름다운 땅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것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이 그들의 힘과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신뢰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백성을 설득하고자 했습니다(5-9). 그러나 온 회중은 그 말을 듣고 돌로 그들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이 회막에서 모든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게 전염병을 내려 그들을 멸하고 새로운 백성을 모세가 이룰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범죄한 자들의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그렇게 행하시지 않기를 요청합니다.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하며 백성들을 중보합니다 (13-19).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를 듣고 그들을 용서하시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따른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들어갈 것입니다(20-24).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두려워했던 자들을 피해 광야길로 들어가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한 이스라엘 백성 중 20세 이상의 계수된 자들은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대신에 그들의 자손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싫어하고 원망했던 자들은모두 광야에서 40년 간(땅을 정탐한 40일을 년 수로 바꾸심)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정탐한 자들 중 다수파는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었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생존하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때 그들은 통곡하며 골짜기로 올라가 싸우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하나님께서 원하시던 것이 아니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셨지만 그들은 고집대로 행하여 결국 패배하고 맙니다(26-45).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멸하지 않으시고 모세의 중보로 용서하시지만, 그들의 불신앙에 대한 벌은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실 땅에 대해 평가절하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해야 하는 징계를 받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기 보다는 자신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광야 생활을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전쟁을 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조차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광야생활은 고달프겠지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사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는 전쟁은 반드시 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렵고 고달프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우리 앞에 펼쳐진 어떤 강한 적과 어려움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바란 광야 진을 치고 있고 각 지파 중에서 한 사람씩 뽑아서 보냅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 이름들을 다 열거합니다(1-16). 모세는 어떻게 그 땅을 정탐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중점적으로 보고 와야하는 지 알려 줍니다. 그 땅의 거민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얼마나 많은 지, 그리고 그 땅은 좋은지 나쁜지, 또 지형은 어떤 지, 또 토양은 비옥한지 메마른지 등을 정탐하고 오라고 합니다. 또 그 때가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기 때문에 그 땅의 과일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17-20). 이에 열 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 두 정탐꾼들은 그 땅을 정탐하러 갔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정탐 루트를 상세히 기록합니다(21-24). 이로써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거합니다. 정탐꾼들은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보고 합니다. 보고의 내용은 그 당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데, 문제는 그 땅의 백성들이 매우 강력하고, 그 성읍을 견고하여 심히 크다고 보고합니다. 특히 노아 때부터 악명 높았던 거인 족속인 네피림의 후손들이 그곳에 살고 있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아멜렉 민족도 그 땅 남쪽에 거하고 있다고 보고합니다(25-29). 이 말을 듣고 웅성웅성하던 백성들을 진정시키며 갈렙이 올라가서 그 땅을 치자고 말합니다. 그러면 능히 이길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함께 정탐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보다 강하기 때문에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불평은 땅을 악평하며 객관적인 사실도 왜곡시킵니다. 그리고 결코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32-33).다수파는 현실 앞에서 객관적인 상황도 왜곡시키며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불평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강해 보이는 적들에 실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소수파인 갈렙과 여호수아는 상황에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신뢰하며 그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땅을 보고 사람들을 보고 오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얼마나 강한 지, 그 땅이 얼마나 좋은 지 미리 보고, 그들의 힘으로 그들을 이길수 없다는 것을 먼저 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싸울 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 이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전투하는 삶으로 그 앞에 닥칠 어려움과 현실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삶 속에서 닥치는어려움은 실제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실제로 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믿음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상황을 조정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상황보다 크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우리의 생각보다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상황에서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드는 굳은 신뢰입니다.
녹록치 않은 우리의 삶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어려움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않는 우리가 됩시다. 그리하여 상황에 함몰되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 아버지를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와 격려와 공급하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1장에서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했다면, 12장에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난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미리암이 주도를 하고 아론이 함께 가담합니다. 비난의 핵심은 모세가 구스(에티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도 모세 만큼이나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리더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왜 구스 여인을 아내로 삼았는지 본문은 말해주지 않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 문제 삼지 않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모세를 ‘온유한 자’라고 소개하는데(3), 이것은 단지 모세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구스 여인을 취한 행동도 하나님께 의존하여 그렇게 했다는 암시입니다. 민족과 관계 없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미리암, 그리고 아론을 회막으로 부르시고 미리암과 아론을 책망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시지만 모세에게는 특별히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합니다(8). 이 말은 모세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보여줍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곧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워진 자입니다.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비난하는 미리암에게 하나님은 징계를 내리십니다. 이에 아론은 모세에게 중보를 부탁하였고,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하면서도 단순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미리암의 병이 바로 낫게 하지 않으시고, 칠일 동안 진영 밖으로 쫓겨나 머무는 부끄러움을 당한 후에 다시 들어오게 합니다(9-15). 모세를 비난한 잘못을 결코 가볍게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미리암이 돌아 온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을 떠나 바란 광야에 진을 칩니다. 이는 온 백성이 미리암이 징계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징계 받은 미리암이 다시 공동체로 들어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 공동체도 징계를 받은 자를 볼 때, 동일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또 범죄한 자가 다시 공동체 안으로 다시 들어 올 수 있도록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세우신 중보자였습니다. 때문에 모세를 비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앞 장에서 70인의 장로를 세워 모세와 같은 영이 부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세와 장로들이 똑같은 책임과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독특한 책임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의 중보자는 유일하고 독특한 것입니다. 모세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인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중보자이듯이 모세도 백성의 유일한 중보자였습니다. 모세를 비난하고 거부하는 자가 벌을 당하듯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욱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친구, 가족, 민족들의 무시와 조롱에도 참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이제는 교회에 직분자들을 세우셔서 다스리십니다. 직분자들은 성도들과 동등하지만 독특한 권위와 책임이 주어집니다. 직분자들은 독특한 권위와 책임을 무겁게 가져야 합니다. 그들을 부당하게 비난하는 것은 그들을 세우신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직분자들이 말씀을 따라서 그들의 일을 행할 때 협력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또 그들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아주 조심스럽게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미리암이 모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비난한 것과 같이 됩니다. 우리를 위해서 참된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고, 또 예수님께서 직분자들을 통해서 우리를 섬기심에 감사하며 함께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듣고 하나님은 진영의 끝에 불을 붙도록 하심으로 진노하십니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부르짖었습니다. 다행히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불이 꺼졌습니다(1-2). 이스라엘은 그 일을 기억하여 그곳 이름을 다베라라고 불렀습니다(3).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애굽 땅과 그곳에서 먹을 수 있던 것들을 그리워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만나는 너무 초라해 보였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영향을 받아 함께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애굽을 그리워하면서 각기 장막에서 울기까지 했던 것입니다(10). 하나님께서 이것에 진노했을 뿐만 아니라 모세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백성의 태도에 속이 타 들어가 심지어 자신이 맡은 직무를 벗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이 불순종의 백성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너무 버거웠습니다(11-12). 책임이 너무 무거워서 홀로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70인의 장로를 세워 모세의 일을 분담시킴으로 모세의 부담을 덜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모세와 같이 성령을 부어 주셔서 직무를 감당하도록 해주십니다(18). 또 하나님은 고기를 달라는 백성의 불평에 그들이 고기를 지겹게 먹게 해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모세는 그 말씀을 믿고,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성령에 감동이 된 사람들은 예언했습니다. 부름을 받았지만 나가지 않은 두 사람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예언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어떤 아이의 보고를 듣고 그 두 사람이 예언하는 것을 금하여 달라고 모세에게 요청했지만, 모세는 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져서 선지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순절의 성취를 내다보는것이었습니다(19-29).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그림자)로서 백성을 중보하고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도록 메추라기 떼를 진영으로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탐욕스럽게 그 고기를 먹음으로 결국하나님의 선물이 심판의 수단이 됩니다. 탐욕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와 하나님을 향한 불신을 보고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의 “기브롯 핫다아와”로 짓습니다(30-35).
고기를 요구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백성들의 버거운 요청에 모세는 직무를 포기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70 명의 장로를 세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보내심으로 이스라엘의 불평을 잠재우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탐욕스럽게 그 고기를 대함으로 스스로 재앙을 초래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또 하나님을 불신했던 것을 회개하지 않고 그저 그 고기에 정신이 팔렸던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오히려 심판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것에 어떤 자세로 나아갑니까? 주님이 주신 축복 자체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탐욕스럽게 그 축복만 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에게 주신 것 자체에만 몰두하여 탐욕을 부린다면 주님의 축복이 오히려 심판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주신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합시다. 또 우리 모두에게 주신 성령님을 의지하고 우리 안에 불평과 원망보다 감사와 찬송과 자족함으로 채워지도록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말씀에 순종하고 전파함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선지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은 나팔을 만들어 신호를 삼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신호는 회중을 소집하거나 진영의 출발을 알리는 용도입니다(1-2). 나팔을 두개 다 불 때는 회중이 회막 앞으로 모이는 신호입니다. 하나만 불 때는 천부장 된 지휘관만 모이는 신호 입니다. 또 크게 불 때에는 동쪽의 진영이 행진하고두 번째로 크게 불 때에는 남쪽 진영이 움직이는 신호입니다(3-6). 그 나팔을 부는 역할은 아론의 자손들인 제사장들이 합니다. 회중을 모으고 진영을 움직일 때 외에도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도 나팔을 크게 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그 백성을 기억하여 그 대적들에게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7-10). 이것은 일종의 약속의 표였습니다. 또 나팔을 불어야 할 때가 있는데, 초하루를 포함한 절기 때입니다. 그 나팔을 불 때 주님이 또 그 백성을 기억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둘째 달에 두 번째 유월절이 끝나자 구름이 성막에서 오르고 이스라엘 자손은 시내 광야에서 바란 광야로 처음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동할 때 앞에서 보았던 것 같이 유다 지파가 먼저 움직이고 각 지파의 지도자들의 인도에 따라서 일사 분란 하게 움직였습니다(14-28). 이것으로 본격적인 광야의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모세는 자신과 함께 하던 장인(혹은 처남)에게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머물러 있으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장인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모세는 다시 한 번 광야의 지리를 잘 아는 장인이 그 백성과 함께 있으면서 도움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산인 시내산을 떠나서 삼일 동안 광야 길을 갔습니다. 낮에는 성막 위에 구름 기둥이 올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며 그들에게 그늘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언약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는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말했고, 궤가 쉴 때에는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35-36).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 백성을 앞서 가며그 대적을 치시고, 또 이스라엘 가운데 계심을 지속적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은 나팔을 만들어 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방법입니다. 은 나팔을 불 때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시도록 기억하게 합니다. 따라서 은 나팔은 구름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을 이끄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청각적인 표입니다. 그것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들으시고 이끄신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팔 소리는 이러한 믿음을 촉구하는 표입니다.
본격적인 행진이 시작되었을 때 모세는 호밥이 길을 안내해 주길 바라지만 실제로 인도하는 것은 구름입니다. 그렇다고 호밥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말은 아닙니다. 광야 길을 잘 알고 있어서 안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지식과 지혜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본문은 강조합니다. 또한 모든 것이 앞에서 말씀 했던 것 대로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백성보다 앞서 가시며 그들과 함께 가심을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수동적으로 행동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인도하심 아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진하는 것이 광야 행진에서 핵심입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도 광야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행진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따라 계획을 짜고, 부지런히, 서로 도우며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을 따라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 한 이후에 2년 째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1). 유월절은 매년 첫째 달 14일에 지킵니다. 그 때,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고 오느라 부정하게 되어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생깁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할 지 물어 봅니다(5-8).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부득이하게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한 달 뒤에 유월절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 하십니다(9-13). 일종의 두번째 유월절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정결하기도 하고, 여행 중도 아니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백성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고의적으로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심판 하십니다. 이것은 부득이하게 첫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입니다. 이는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고 있는 타국인도 지키길 원한다면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합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앞으로 있을 본격적인 광야의 행진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공적으로 기억하고 지키며, 하나님과 광야에서 인도함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기본적인 삶의 양식입니다.
성막이 완성된 날에 구름이 성막을 덮었고, 밤에는 불 모양으로 아침까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움직이면 자기의 텐트를 걷어 구름을 따라 갔습니다. 레위 족속들은 성막을 걷어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구름이 멈추는 곳에서 그들은 진을 치고 성막을 다시 폈습니다. 그 구름이 몇 일, 몇 달, 몇년이라도 그곳에 머무르면 그 곳에 진을 치고 행진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구름을 따라 그들은 진을 쳤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서 직임을 지켰습니다(15-23).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을 앞서 가시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지키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부득이하게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마련하신 두번째 유월절에 대해서 봅니다. 그만큼 모든 백성이 유월절을 지키기 원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 번째 유월절 때문에 본 유월절을 경시할 수 있었습니다. 충분히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는데, 하지 않고 두번째 유월절을 지키려는 자들은 백성 가운데 끊어질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두 번째 유월절은 정말 부득이하게 첫번째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예배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공적으로 기억하며 반복해서 모이는 것이 예배입니다. 인터넷 예배는 정말 부득이하게 현장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인터넷 예배가 현장 예배를 대체하는 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현장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인터넷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부정하지 않고, 여행 중도 아닌데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사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계시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구름 기둥이 언제든지 떠날 때 따라서 움직이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 백성들은 더 있고 싶을 때에도 구름이 움직이면 떠나야 했습니다. 반대로 어떤 곳에서는 빨리 벗어나고 싶은데, 구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머물어 있어야 했습니다. 구름과 불 기둥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였고, 임재의 가시적인 표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가지고있고, 임재의 가시적인 표인 성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말씀이 가라고 할 때 가고, 서라고 할 때 서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고, 또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에서 명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믿음의 삶입니다. 날마다 말씀과 성례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성실하게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아론에게 어떻게 등불을 켜야 할 지 말씀하십니다. 금 등잔대는 금으로 쳐서 만든 것으로 성막 안 지성소 앞에 위치하고 있습니다(1-4).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레위인을 데려다 정결하게 하라고 합니다. 앞에서 언급된 레위 족속 중 특별한 임무로 부름을 받은 게르손, 므라리, 고핫 자손을 제외한 나머지 레위 족속들을 의미합니다. 레위인들을 회막 앞으로 나오게 하여 속죄의 물을 뿌리고,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고 옷을 빨게 합니다(7).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가져오게 하고, 속죄제물을 위해서 수송아지 한 마리를 가지고 오도록 합니다. 그 후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도 나아오게 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레위인에게 안수하도록 합니다(10).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레위인을 바치는 제물로 가지고 온 제물에 레위인이 수송아지들의 머리에 안수하도록 하여 속죄제와 번제물로 드림으로 속죄합니다. 레위인을 위해서 흔들어 드리는 제사(요제)를 통해서 그들을 구별하여 회막의 봉사를 하도록 합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은 모든 초태생들을 치셨고, 이스라엘에게는 사람의 초태생을 대신하여 레위인을 취하십니다(16-18). 첫 태생은 이후에 태어날 모든 생명의 대표입니다. 초태생을 치신 것은 사실상 모든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태생을 대신하여 레위인을 취하신 것도 모든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또한 레위인의 봉사는 모든 이스라엘의 봉사를 대표합니다. 레위인들은 아론과 그 자손들, 곧 제사장들과는 구별되면서 동시에 백성들과도 구별됩니다. 이스라엘이 마땅히 제사장을 도와야 하지만, 그 일을 레위인들이 대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합니다. 또 하나님은 레위인들의 봉사의 시기를 25세에서 50세로 정해 주시고, 50세 이후에는 쉬어 봉사를 하지 않지만, 돕는 일은 계속하도록 합니다(21-26).
레위인들은 제사장들과 달리 기름부음이나 특별한 의복을 받지 않습니다. 레위인들은 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위치하면서 제사장의 직무를 돕는 직무를 맡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안에서 봉사의 직무는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거룩한 사역에 종사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적절하게 준비가 되고 자기들의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 구별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맡은 직무는 다르고, 그 중요도도 다르지만, 동일하게 준비되고 책임을 다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직분자가 있고 여러 모양으로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비록 직분자는 회중의 선출을 위해서 세워지고 교회의 공적인 책임과 직무가 있고, 다른 봉사자들은 임명되거나 자발적으로 봉사하지만 동일하게 준비 됨과 책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또 직분자와 여러 봉사자들의 섬김으로 교회가 세워지지만 모든 성도들이 교회 공동체를 말씀으로 세우기 위해서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는 직분자와 모든 봉사자들을 감사함으로 협력하고 도웁시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기쁨으로 봉사하는 우리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성막이 완성된 날에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계수의 책임을 맡은 우두머리들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성막을 섬기는데 필요한 수레 여섯과 소 열 둘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것을 받아 각기 맡은 임무에 맞게 쓸 수 있도록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게르손 자손에게 수레 둘과 소 네 마리, 그리고 므라리 자손에게 수레 넷과 소 여덟을 주고,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않았습니다. 고핫 자손들은 반드시 성물을 어깨에 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1-8). 그 다음에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이 드린 예물은 예배에 사용될 제물과 기구들 입니다. 그들은 소제의 제물을 은 쟁반과 은 바리(그릇)에, 그리고 금 그릇에 향을 채웠습니다. 또 번제물을 위해 숫소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 일 년 어린 숫양 한 마리를, 속죄제를 위해 숫염소 한 마리, 화목제물을 위해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년 된 어린 양 다섯 마리를 한 지파 씩, 12일 동안 동일한 숫자로 드렸습니다(10-83). 앞에서 나실인의 법은 전체에 해당되는 헌신에 관해서 말씀했다면 오늘 말씀은 지도자들의 헌신을 보여주고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으로 성막이 완성되어 성별 되는 날부터 12 일 동안 풍성함과 기쁜 날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모든 지파의 우두머리가 동일한 수준으로 함께 헌신했음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헌신이 무엇을 위한 헌신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도자들 중에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모두 예배에 헌신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백성들을 계수하고, 각 지파를 대표하여 발언을 하기도 하지만, 성막이 완성된 그 기쁜 날에 그들의 헌신의 방향들이 모두 예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헌신의 방향은 예배로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교회의 직분자가 기본적으로 예배를 위한 직분이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교회 안에서 다른 봉사도 중요하지만 그 봉사도 모두 예배를 향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인 교회는 모두 예배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은사와 헌신이 예배를 향하고, 예배를 온전히 세워가는 공동체가 되도록 함께 헌신하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나실인의 규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실인은 남자와 여자 모두 할 수 있는 것으로 일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성별하여 헌신하기로 서원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술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자제하고, 서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머리를 자르는 것을 금하고, 모든 죽은 시체에 접근하는 것을 금합니다(1-8). 혹 그들이 이 세 개의 헌신에 대해서 의도하지 않게 위반 하였을 때에는 그것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치뤄야 했습니다. 그들은 일곱째 날에머리 털을 밀고 몸을 씻고, 여덟째 날에 산 비둘기나 집 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문에 와서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하나를 속죄제물로 드리고 다른 하나를 번제물로 드려서 서원 중에 시체를 만지게 된 죄를 용서 받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나실인의 서원의 기간을 정하고 일 년 된 숫양을 속건제로 드립니다. 그러면 다시 나실인의 서원이 시작되고, 시체와의 접촉한 죄를 용서 받습니다. 그 서원한 날이 다 차면 서원한 사람은 하나님께 헌물로 번제물로 일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한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립니다(13-18). 그리고 그날에 비로소 머리카락을 자릅니다. 자른 머리카락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두고 삶은 숫양의 어깨 고기와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하나와 과자 하나를 제사장에 받아 들고 흔듭니다. 또 흔든 가슴과 넓적 다리는 거룩한 것으로 제사장의 몫이 되었습니다. 20절에서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서원이 완성되었고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도 그들이 생각하기에 좋은 방식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어서 제사장의 축복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축복은 아론과 그 자손들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세 번 반복되는 것은 참으로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확실성과 그 복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축복이 나실인의 서원 뒤에 이어서 나온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하나님의 축복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실인의 서원은 남녀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릴 수 있는 헌신의 기회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누구도 자발적인 헌신에 배제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헌신하는 것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과 방식을 따라야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말씀을 따라서 헌신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나실인의 서원은 참된 나실인으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헌신함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것을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를 드심으로 보여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심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헌신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기본적인 헌신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가 중요합니다. 또 주일 예배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진행되어야 하고, 그러한 올바른 헌신으로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예배 마지막에 오늘 말씀으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헌신을 즐거워하는 하루가 됩시다. 또 오는 주일 예배도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의 예배가 되도록 사모하여 기다리고,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4절은 회막에서 부정한 사람들은 반드시 진영 밖에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5-10절은 도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반드시 갚아 주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또 이웃에게 지은 죄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 말씀합니다. 때문에 그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반드시 이웃에게 손해를 끼친 것의 20퍼센트를 더하여 갚아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부부 간의 신뢰가 깨어졌을 때 그것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서 드리는 ‘의심의 소제’를 소개합니다. 의심의 소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와 달리 향을 함께 드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남편이 아내의 외도를 확신하지만 그 증거가 없을 때 그는 아내와 함께 제사장에게 가서 의심의 소제를 드릴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 여인을 제단 앞에 세우고(16) 흙으로 빚어서 만든 그릇에 거룩한 물을 담고, 성막 바닥의 티끌을 물에 넣고, 여인에게 머리를 풀게 하고, 물이든 그릇을 들고 있게 합니다. 그리고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동침하여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를 받지 않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면 허벅지가 마르고 배가 부풀어 오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여자는 ‘아멘, 아멘’ 이라고 말함으로 맹세를 하게 합니다(17-22). 그리고 제사장이 저주의 말을 작은 종이에 써서 그 물에 넣습니다. 그런 다음 여인에게서 소제물(곡식제물)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서(제단 앞에서) 흔들고 제단 위에서 불사른 다음에 여인에게 그 물을 마시게 합니다(23-26). 이후에 만약 정말로 남편의 믿음을 져버리고 다른 남자와 동침한 일이 있다면 그 배가 부르고, 허벅지가 마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서 저줏 거리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그 여인은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임신하게 될 것입니다 (27-31).
오늘 말씀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구성하고 있는 각 단락이 서로 별 상관이 없는 것이 보입니다. 하지만 유심히 보면 세 단락 모두 공통적으로 거룩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것을 말한 후에 성막을 섬길 일꾼에 대해서 말하고, 이제 여호와 하나님을 그 가운데 모시고 살아가는 백성들이 부정한 상태에 있다면 진영 밖으로 나가 부정한 상태가 해결될 때까지 진영을 거룩하게 유지합니다. 이것은 제의적 관점에서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또 이웃과의 관계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서로 신뢰하고 죄를 멀리하고 또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그것을 갚아 줌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하는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배와 일상의 삶에서 모두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한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함이 요구되었듯, 새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거룩함이 요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일하게 제의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거룩한 분이셨습니다. 신약 성경은 온전히 거룩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자들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합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 사도는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 것을 거룩함이라고 표현합니다(벧전3:15). 또 바울 사도도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롬12:1). 주 예수를 믿는 우리는 모두 거룩하게 되었고, 거룩해 가야 합니다(성화).
오늘 하루도 우리가 예수를 주로 삼아 거룩하여 진 자들이고,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고 사는 자들로서 불신자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레위 족속(게르손, 고핫, 므라리)을 계수하라고 했습니다. 대상은 1개월 이상 된 남자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레위 족속 중에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30세부터 50세까지 남자를 계수하라고 명령하십니다(1-3). 고핫 자손은 진영이 전진할 때 아론 자손들이 먼저 들어가서 휘장을 걷어 증거궤를 덮고, 그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채를 꿰어 놓으면 그것을 어깨에 메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등잔대와 진설병을 놓은 상도 마찬가지로 먼저 아론의 자손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것들을 싸고 덮으면 채를 꿰어 두면 그것을 어깨에 메고 들고 가는 역할을 맡았습니다(4-15). 그리고 등유와 태우는 향과 소제물, 관유, 장막 전체와 성소와 모든 기구를 맡은 엘르아살의 지도를 받습니다(16).
그들은 레위인들 중에서 끊어져서는 안되는 귀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아론의 자손들 보다 먼저 들어가 덮이지 않은 것을 만지는 것은 금지 하셨습니다(17-20). 이어서 게르손 자손도 직무에 나아갈 수 있는 삼십 세부터 오십 세까지 계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게르손 자손들은 성막의 휘장들과 회막과 그 덮개과 그위 해달 가죽 덮개와 회막 휘장 문을 메어야 합니다. 또 뜰의 휘장과 성막과 제단 사방에 있는 휘장 문과 그것을 매는 줄과 그것에필요한 모든 기구를 메는 일을 아론의 자손 이다말의 감독을 받으며 수행해야 합니다(21-28). 또 므라리 자손도 계수를 해야 하는 데, 그들은 장막의 널판과 그 띠들과 기둥들과 받침들과 뜰 둘레의 기둥들, 그리고 말뚝들, 그것을 매는 줄, 그것에 필요한 모든 기구를 메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이다말이 그들이 메야 할 것을 지정해 주어야 했습니다(29-33). 이렇게 하나님이 명령했을 때, 모세와 아론은 그대로 행합니다. 고핫 자손 중 직무에 나아갈 자들은 2750명, 게르손 자손들은 2630명, 므라리 자손은 3200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십부터 오십 세까지 회막 봉사와 메는 일에 참여하여 일할 모든 자들은 8580명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명하신 대로 그들을 바르게 계수 하였습니다(46-49).
회막을 섬기는 봉사는 참으로 귀한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레위 자손들을 중심으로 고핫 자손과 므라리 자손과 게르손 자손이 각자가맡을 일을 하나님께서 정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넘어 아론의 자손들이 덮개로 덮기 전에 성소에 들어가거나 지성물을 만져서는 안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도 삼십세에서 오십 세로 정해 주셨습니다. 적어도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는 그 일을 위해 준비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에 역할과 질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만큼의 준비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서른 살에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을 만족 시키셨습니다(눅3:23). 그동안 주님은 공적인 사역을 위해서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레위인으로서 참된 성막인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메어 옮겨 주셨습니다. 요한 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장막을 치다)…”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하루도, 이번 한 주도, 우리 평생에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셔서 우리에게 의를 나눠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든 함께 하심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레위 족속을 계수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싸움에 나갈 자’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에 앞에서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회막을 섬기는 자들로서 또한 계수가 됩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의 숫자는 20세가 아니라 생후 1개월된 남자 아이를 기준으로 계수하게 됩니다. 그들은 나중에 성막에서 봉사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모세가 레위 지파의 대표격이기 때문에 아론의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옵니다. 아론은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을 낳았고 그들은 제사장들로서 구별되어 봉사했습니다. 하지만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레10장). 때문에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아론과 함께 제사장 직무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은 아론의 지휘 아래 아론을 도와 회막의 모든 기구를 지키는 직임을 수행하도록 합니다. 또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택하셔서 이스라엘 전체의 장자를 대속하게 하도록 했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모든 애굽 사람의 첫 아들이 죽었는데,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와 짐승의 첫 새끼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첫 태생(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함)이 거룩(하나님의 것)하게 되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구원 받은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예배). 그 첫 태생을 대신하여 레위 지파가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처음 난 남자들이 레위인들보다 273명이 더 많았기 때문에 그 나머지 자손을 대신하여 속전이 지불되어야 했던 것입니다(45-51). 레위 지파 중에서도 게르손 자손들은 성막 뒤에 서쪽에 진을 치고 성막과 장막과 그 덮개와 회막 문과 뜰의 휘장과 제단 사방에 있는 줄을 담당합니다. 고핫 자손들은 성막 남쪽에 진을 치고 증거궤와 상과 등잔대와 제단들과 성소에서 봉사하는데 쓰는 모든 기구들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므라리 족속은 성막 북쪽에 진을 치고 성막의 널 판과 그 띠와 그 기둥과 받침과 모든 기구와 그것에 쓰는 것과 기둥과 받침과 말뚝과 줄을 감당합니다. 또 성막 동쪽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성소의 직무를 행하고 외인이 무단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지키는 임무를 받았습니다(14-37).
하나님과 함께하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광야 생활의 핵심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막이 항상 진 가운데 위치합니다. 레위인들의 직무는 그 성막 주변에 머물며 ‘이스라엘 직무를 위하여’ 직무를 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자들이 종신토록 하나님의 성막에서 섬겨야 마땅하지만 일상의 생활을 해야 하니 그것을 레위인들이 대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백성들은 자신들을 대신해 봉사하는 레위인들을 존중하고 생계를 책임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직분자를 비롯하여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수고를 대신하는 자들이기에 마땅히 그 수고에 칭찬받고,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또 오늘 말씀은 특별히 교회 안에서의 모든 봉사는 중심인 성막을 향해 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방식으로 섬기지만 그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하고 싶고 필요한 일로 보여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하기 싫고 힘든 일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요구한다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다양한 모든 봉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함께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지파가 진을 칠 때와 행진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합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이동을 멈추고 진을 칠 때 모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모양을 보면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진을 치는데, 동쪽 해 돋는 곳에서 유다 지파의 깃발 아래로 진을 칠 지파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로 합이 십팔만 육천 사백명입니다. 이들이 가장 먼저 전쟁에서 앞서 나가는 지파입니다. 그리고 남쪽에는 르우벤 지파의 깃 발을 중심으로,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로 총 십오만 천사백오십 명입니다. 그들은 두번째로 전쟁에서 나아갑니다. 서쪽에는 에브라임 군대의 깃발을 중심으로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로 십만 팔천 백명입니다. 그들은 세번째로 전쟁에 나아갑니다. 마지막으로 북쪽에는 단 지파의 깃발을 중심으로 단, 아셀, 납달리 지파가 진을 치고 네번째로 전쟁에 나아갑니다(1-32). 역시 레위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성막 주변에 둘러서 진을 치고 섬깁니다. 백성달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전한 말씀으로 그대로 다 준행했습니다(33-34).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행진하는 것을 보면 질서정연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영의 모습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성막을 주변으로 진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진도 성막이 이동하면 그것을 따라서 갑니다(민10:11-28). 이것은 당시 왕들과 신하들이 전쟁에 나갔을 때 취하던 모습과 유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런 진영의 형태를 명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되새겨 주십니다. 또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서 성막을 중심으로, 곧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따라서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삶의 가장자리가 아닌 중심에 모시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을 우리 마음의 가운데 모시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민수기는 첫 장에서 백성의 숫자를 세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은 이 책의 이름을 ‘민수기’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도“Numbers”로 표기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은 ‘광야에서’가 책의 제목입니다. 실제로 이 모든 제목은 이 책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숫자를 세어 보라고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군대로서 행진을 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지 2년이 지났습니다. 둘째 해 둘 째 달 첫날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여 각 가문(각 지파별로)에 따라서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의 숫자를 세어 보라고 하십니다(1-2). 그리고 그 숫자를 세는 데에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에서 우두머리 한 사람씩 함께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들을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3-16). 모세와 아론은 그 지명된 사람들과 함께 백성의 숫자를 세었습니다. 그 숫자는 모두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명이었습니다(17-46). 하지만 레위 족속은 계수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막과 관련된 일의 책임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레위 족속은 성막을 둘러서 자기들의 진을 쳐야 했습니다. 백성과 하나님이 계신 성막 사이를 둘러 진을 침으로 회중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53-54).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의 숫자를 세라고 한 것은 본격적인 전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싸움에 나갈 자’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싸움의 승패는 그 숫자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지키는 것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군대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친히 중보자로 세우셨고, 레위인을 성막을 위한 봉사 지파로 부르셨고, 각 지파의 우두머리를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싸움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 안에도 일반 전투와 같이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지만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가 맡은 곳에서 하나님께 성실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그 백성들이 영적인 싸움을 싸우도록 백성들 안에서 질서를 세우십니다. 그 질서는 직분자들을 통해서 말씀(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신 것입니다(엡4:11-13). 주님의 교회는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이 세우신 질서인 직분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직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오늘날 영적인 싸움의 승패도 말씀과 질서에 순종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질서에 순종함으로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성장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레위기를 정리하면서 언약적 축복과 저주를 말한 후에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언급합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대한 맹세입니다. 제사와 서원, 혹은 기도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혹은 중간에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다면 지키되 혹 지키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줌으로써 하나님께 제사하고 서원할 때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해서는 안됨을 알려줍니다. 사람들은 종종 기쁜 마음에 대담하게 약속했다가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께 한 약속조차도 후회하고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결정한 사람이나 자식을 회막 봉사를 위해서 서원할 때입니다. 대표적으로 사무엘과 같이 부모가 그렇게 하기로 했을 때에는 정해진 지불을 성소에 기부하여 그 서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1-8). 그 금액은 연령과 성별과 형편에 따라서 달랐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도 부자와 동일하게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사람들은 짐승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 곧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됩니다. 정결한 짐승은 다른 것으로 바꿀 수는 있지만, 부정한 짐승은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고, 제사장이 그 값을 결정해야 합니다. 부정한 짐승은 희생으로 드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서원한 것을 무르려고 하면 값의 20페센트를 더한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또 집을 헌신하기로 해놓고 그것을 무를 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기업의 밭의 일부를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모세가 다음 희년을 계산하여 값을 정하고, 다음 희년까지 하나님께 구별된 땅으로 사용됩니다. 무르려면 그 값의 20퍼센트를 더해서 지불하여야 합니다. 희년에는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16-25).
인간과 짐승의 첫 태생은 하나님의 것이기 모두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첫 태생으로는 하나님께 서원할 수 없습니다. 부정한 짐승의 첫 태생은 그 짐승 가격의 20퍼센트를 더하여 지불함으로써 그것의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만약 짐승을 무를 수 없다면 팔아야 했습니다(26-27). 그리고 여호와의 성물로서 땅의 곡식이나 열매의 십 분의 일은 여호와께 드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헌정물’로 불립니다. 곡식과 열매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곡식과 열매의 정해진 값의 20퍼센트를 더하여 하나님께 드리면 그 곡식과 열매를 자기의 것으로 둘 수 있었습니다. 또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도 드려야 했는데,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는 열 번 째 마다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건강하고 좋은 소나 양이 지나갈 수도 있지만, 약한 소나 양이 열번째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이든 약한 것이든 구분하지 말고 열번째의 짐승을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28-33). 소나 양의 십일조는 거룩하기 때문에(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무를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모든 것(1장-27장)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이었습니다.
서원은 기본적으로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의 표현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감사와 헌신을 찬송과 기도와 헌금(헌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때문에 서원은 전적으로 자발적입니다. 하지만 그 서원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기 때문에 반드시 그 서원을 이루도록 해야 하고, 지키 못했을 때는 20퍼센트를 더하여 물러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함을 보여줍니다. 서원을 지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한나가 그러했고, 시편의 기자를 그러했습니다(61편 5-6절). 바울은 자신의 서원한 것을 이루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머리를 깎음으로 자신도 서원을 이행했습니다(행18:18).
그리스도 안에서 서원 제도는 더이상 구속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의 표현으로 하나님께 서원하고 헌신하며,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 그 서원을 하나님께서 이루셨을 때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드리는 것은 신앙 생활에 유익합니다. 찬송과 기도와 헌금, 헌물, 삶의 헌신과 결단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의 자발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과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와 삶의 결단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많이 표현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구약을 통틀어서 가장 감동적이면서 가장 무서운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1장-25장까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지 법과 규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법과 원칙을 충실하게 따를 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대해주시고, 반대로 그것을 배반할 때 어떻게 하실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1-13절은 이 규칙들을 성실하게 잘 지켰을 때 주실 축복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만들지 않고, 하나님을 성실하게 섬기며, 이 규칙들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철을 따라 비를 주시고, 농작물이 풍성하게 해 주시고, 땅에 평화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는 짐승도 없게 해 주시고, 원수를 쫓아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친히 돌보아 주시고, 번성하게 하고 크게 해주시고, 그들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행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교제하시고, 함께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1-13). 반면에 하나님을 말씀을 듣지 않고, 이 규칙들을 버리고 이방인들과 같이 살아갈 때 하나님은 언약을 배반한 것으로 여기고 놀라운 재앙을 내리시고, 병으로 생명이 쇠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씨 뿌린 것을 다른 나라가 쳐들어와서 거두어 갈 것이고, 대적들에게 패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해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말씀을 청종하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을 내리셔서 각종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시고 들짐승이 많아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역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더 강한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더 큰재앙을 내려 심지어 자식을 잡아 먹게 되는 극한의 상황이 되기까지 만드십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가 예루살렘을 에워싸서 성에 양식이 없어서 일어나게 되는 끔찍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제사를 거부하시고, 다른 민족에게 넘기셔서 흩어지게 만들 것이라고 합니다(14-40).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깨닫게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형벌을 기쁘게 받고 회개할 때 하나님은 다시 언약을 기억하시고 땅이 쉬게 만드신 후에 다시 그들을 회복하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41-45).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유심히 보면 복은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시고 벌은 점차적으로 강하게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폭군이 아니라 신실한 아버지이심을 보여줍니다. 형벌을 점차적으로 강하게 하시므로 백성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것입니다. 선지서들은 이 말씀을 풀어서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모든 형벌을 다 받은 후에 돌아옵니다. 결국 형벌을 통해서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벌하셨지만 결국 돌아오게 하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모든 축복과 저주가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축복을 믿는 자에게 주셨고, 우리의 모든 저주와 심판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축복과 생명이 있지만, 그분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저주와 심판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영원한 축복과 생명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저주와 심판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빛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고, 마지막 날에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계22:2).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과 축복에 감사하며, 더욱 신실한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레위기 25장은 ‘땅의 쉼(안식)’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땅의 안식년을 말씀하십니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쉬듯, 년(Year)에도 적용이 되어, 6년 동안 땅을 열심히 사용하여 농사를 짓고 열매를 거두고, 7째 해에는 땅이 쉬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안식년이 7번이 되면 희년 입니다. 따라서 희년은 50년 마다 한번 씩 옵니다. 그 해의 7월 14일 곧, 대 속죄일에는 그 해를 나팔을 불어 희년으로 선포합니다(1-9). 그 해는 땅의 안식년일 뿐만 아니라 자유를 공포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종으로 팔렸던 모든 사람들이 풀려나 자유를 찾게 되어 모두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날입니다. 그 해에는 밭에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있지만 다시 씨를 뿌려 새롭게 경작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희년에는 다른 사람에게 산 밭을 돌려주어야 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땅을 사고 팔 때 그 값을 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희년이 많이 남았으면 값이 비싸고 짧게 남았으면 가격이 쌉니다. 희년이 되면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10-19). 하나님은 안식년과 희년에 씨를 뿌리지 못하면 그 다음 해에 먹을 것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백성에게 6년째의 소출을 3년 동안 먹을 만큼 충분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지킬 때 먹고 사는 것을 책임지십니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땅을 영구적으로 사고 팔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형제가 너무 가난하여 땅을 팔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면 시간이 지난 후에 형제가 그 판 땅을 다시 사거나 당사자가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계산에서 다시 사야 했습니다. 하지만 형제도 가난하고 본인도 지속적으로 가난하여 다시 땅을 살 수 없다면, 희년에는 다시 자기의 땅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비교적 안전하고 부유한 성 안에 있는 집은 희년에도 돌려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성 밖에 있는 일반 사람들의 집은 희년에 돌려 보내야 합니다. 레위 족속의 집은 팔 수도 있고, 무를 수도 있습니다. 또 마찬가지로 희년에는 돌려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레위 족속의 들판은 팔 수 없습니다(34).
또 형제들 가운데 가난하게 되어 자신의 집과 밭을 팔고 심지어 자신의 몸도 팔아 종이 된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이 부리게 된다면, 그를 종과 같이 부리지말고, 이자나 이익을 목적으로 양식과 돈을 빌려주지 말고, 희년 때까지 존중해 주라고 하십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에서 구원한 백성이기에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때문에 다시 이스라엘 밖의 사람에게 종으로 팔아서는 안됩니다. 단, 이스라엘 안에서 머물고 있는 이방인에게는 팔수 있습니다. 물론 희년에는 이 사람과 그 가족들이 자유롭게 될 수 있었습니다(35-55).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자유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에 희년을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땅의 안식년 제도와 희년 제도는 오늘날의 상식을 넘어서는 법입니다. 희년은 경제적인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인과 달라야 함을 보여주는 제도였습니다. 희년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땅과 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아야 했습니다.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신 이유는 그들의 끊임없는 파종과 추수 행위를 중단시킴으로써 그들이 더욱 많은 것을 축적하려는 인간적인 욕망을 절제하고 자유 하며, 그들의 필요를 누가 채우시는 지 고백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희년이 당신의 오심으로 완성되셨다고 선포하셨습니다(눅4:18).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로 인한 빚을 갚아 주시고 죄의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심을 자주 말씀하셨고, 재물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4, 6: 33). 예수님의 보혈로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자들은 경제적인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참된 자유 함을 누립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경제 의식을 가지고 물질에 메이지 않고 감사와 자유 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 안에 있는 등잔대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명령하십니다. 대제사장인 아론이 그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아론은 그 불이 꺼지지 않게 항상 정리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불을 태우는 기름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공급 해야 합니다(1-4). 지속적으로 등불을 켜는 것은 빛의 근원이시고 모든 어둠을 밝히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항상 등불과 같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이어서 등잔대 맞은 편에 있는 떡상 위의 떡도 항상 두 줄로 한 줄에 여섯 씩 놓고 유향도 각 줄에 두고 안식일 마다 진열해야 했습니다(5-9). 일주일 뒤에 이 떡은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친 것을 하나님은 다시 제사장들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이 떡을 먹음으로써 열 두 지파의 모든 구성원들이 여호와와 식탁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이어서 어떤 사건을 소개해주는데, 혼혈인으로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던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다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일이 생겼습니다(10-11). 사람들은 그것이 십계명의 세번 째 조항을 어긴 것을 깨닫고 그를 가두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단호하게 모세를 통해서 그 저주를 들은 사람들을 시작으로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하십니다(14). 그 만큼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하신 분이지만, 그만큼 크고 두려운 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 사람을 쳐 죽인 사람도 반드시 죽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동일한 처분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는 것도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상해나 재산의 손해를 입혔으면 반드시 동일하게 갚아 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것이 자연스러운 당시 세계의 원리로는 이해할 수 없던 것입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회중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습니다(17-23).
예수님께서는 참된 등잔 빛과 떡으로 세상을 비추시고, 생명을 나누어 주시며, 교회를 당신의 식탁(성찬)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동일하게 갚지 말고 손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오른편 빰을 치면 반대편도 돌려 대라고 하심으로 그대로 갚지 말고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시며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며 세상 가운데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들임을 기억하고 율법을 완성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고, 동일하게 다른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백성으로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이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기고,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세상의 빛으로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대대로 지켜야 할 절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모든 절기들은 모든 백성들이 모여 지켜야 할 공동체적 거룩한 모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절기들을 ‘여호와의’ 절기라고 말씀하시며 그 절기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가장 먼저 말씀하신 절기는 안식일입니다. 6일동안은 온 힘을 다해 일을 하고, 일곱째 날은 쉬는 안식일입니다. 이 쉼은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입니다. 유월절은 이집트에서 나온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 다음 날부터 무교절이 이어집니다. 이 절기 첫날에 무교병을 먹고 일주일동안 지키게 됩니다. 오순절(칠칠절)은 유월절로부터 7주가 지나고 오십 일째 되는 날입니다. 나팔절은 제 칠월(대락 10월달 쯤)의 첫날입니다. 이 달에는 초막절( 15일)뿐만 아니라 대 속죄일(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모든 백성의 죄를 대속해 주는 절기로 칠월의 14일)도 있는 달입니다. 나팔 소리는 여호와의 거룩함을 상기시키고 심판의 신호가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나팔 불 때 심판하러 오십니다(계 11:15-16). 초막절(장막절)은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생활 했던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 절기는 일주일동안 계속되었고, 열매를 다 거두고 큰 기쁨이 충만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장막절은 유대인들의 모든 절기 가운데 가장 큰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모든 절기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기쁨으로 감사의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또 이러한 절기를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내셨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절기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신 사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매주 안식일을 통해서, 특정한 달의 특정한 기간과 날들의 절기를 지키면서 과거 하나님의 구원에 반복적으로 감사하고 현재 추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기 위한 삶의 시간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절기를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 마지막 날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광야 생활 때에 물이 부족했던 이스라엘에게 물을 주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하고 풍성한 추수에 필요한 많은 비와 물을 주시는 분, 구원의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드러내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무교절 주간의 첫날에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완성하셨습니다. 부활 후 50일이 지난 오순절에는 성령이 강림하셔서 교회는 성령의 능력과 기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날인 안식일은 구원의 기쁨과 감사를 경험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선포하고 다시 확인하고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구원의 행위를 매주 선포하고 기념할 때마다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감격은 커져갑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절기를 완성하신 것을 오늘날은 매주일 선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은 구원 받은 사람들의 삶의 시간표입니다. 일주일의 시작인 주일에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반복적으로 기억하고 감사하며 구원 받은 백성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일주일의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은 역사의 시작자와 종결자가 되시는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이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오심을 기다립니다. 이처럼 주일을 바르게 지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기쁨과 감사와 감격하며 예배의 날로 지키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도 역시 아론과 그의 자손인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우선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성물 가운데 제단에 올리지않기 때문에 가볍게 취급될 가능성이 있는 거제와 요제물을 거룩하게 취급하라고 합니다. 또 자신의 몸이 부정하면서도 성물에 가까이 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제명되는 무서운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악성피부병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부정하게 되면 병이 낫고 정결 의식을 마쳐 다시 정하게 될 때 까지 제사장도 성물의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또 짧은 기간 동안 부정하게 되었을 때에도 정결 의식을 하여 정하게 될때까지 성물을 먹지 못합니다(1-8). 제사(예배)의 어떤 순서도 가볍게 여겨질 수 없고, 제사장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제사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책임과 행동이 요구됩니다. 제사장들은 그렇게 함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했습니다(9).
제사장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성물을 먹을 수 없지만, 제사장이 산 노예들과 제사장의 집안에 들어온 후 태어난 자녀들은 제사장에게 준 성물을 먹을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집안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딸은 성물을 먹을 수 있지만 아론 족속이 아닌 족속으로 시집을 가게 되면 배제가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자식이 없이 돌아오게 되면 다시 성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제사장이 먹는 성물을 먹어서는 안되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흠이 있는 것을 드려서는 안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흠이 있는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갓 태어난 새끼들은 7일이 넘을 때까지는 어미로부터 취할 수 없고, 새끼와 어미를 함께 잡아서도 안됩니다(10-30).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설명 되어 있지 않지만 학자들은 다산을 위해 마술적 관행들에 뿌리 박고 있던 어떤 이교의 관습을 따라하지 못하도록 하셨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런 법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해서 거룩하고, 부주의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속되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시기원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제물을 받으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자가 불완전한 예물로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을 생각하지 않고 드리는 것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제물의 온전한 희생은 완전하신 예수님을 예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점도 없고 흠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동시에 베드로 사도는 교회에게도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벧후3:14). 점과 흠이없으신 예수님을 닮아 성도는 자신을 거룩한 제물로 흠과 점이 없도록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와 삶이 흠과점이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길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십니다(1). 그들은 백성들 가운데 죽은 자를 만짐으로 부정하게 되는 일을 피하여 자신의 직무에 영향을주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단, 그의 직계가족에 대해서는 장례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2-3). 또 머리털을 깎아서 대머리 같게 하지 않도록 하고 또 살을베어 슬픔을 나타내어서도 안됩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슬픔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아내도 구별되게 구해야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거룩함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제사장의 딸이 창녀가 되어 자신을 속되게 하면 아버지의 명예와 거룩함을 위협하기 때문에 그 딸을 불태워 죽여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먼저 돌로 쳐서 죽이고, 그 시신을 불태워 부정함을 정결하게 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만큼 제사장은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과 가정을 잘 돌보아야 했습니다(4-8).
관유를 부음 받아 세워진 대제사장은 가족과 친척의 죽음에 애도할 수 없었습니다. 성소에서 나가 그 성소를 더럽혀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회중 전체의 유익을 위한 일과 하나님을 위한 직무가 가족에 대한 책임을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대제사장은 반드시 처녀와 결혼을 해야 했고, 이혼 여인이나 과부와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자손도 나중에 대제사장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단에서 섬기기 위한 아론의 후손들의 육체도 온전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신체의 불완전성은 기능적인 면에서도 제사장의 직분을 온전히 수행하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불완전함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사장이 누릴 수 있는 몫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신체에 장애가 있는 제사장 자손들은 가난한 상태로 전락하거나 어쩔 수 없이 다른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 않도록 거룩한 것과 가장 거룩한 것으로 분류되는 화목제, 속죄제, 소제의 제물들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회막 안과 제단 근처에만 가지 못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지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면전에서 섬기며, 백성과 하나님을 중재할 뿐만 아니라 율법을 가르치고, 여러가지 종교적인 판단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거룩한 삶을 유지하도록 여러가지 제한이 있었습니다. 애도의 대상에 대한 제한, 아내의 기준에 대한 제한, 직무를 위한 신체적 제한 등 입니다. 신체적 온전함은 그의 사역의 온전함과 상응합니다. 장애를 가진 자들을 차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거룩함과 제한은 결국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절대적인 도덕적 거룩함을 유지하셨고, 그 거룩함과 의를 당신의 교회에 나누어 주십니다. 교회의 머리로서 예수님은 교회가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비록 그의 신부이며 제사장인 교회는 이 땅에서 온전하지 못하지만 마지막 날에 순결하고 흠 없게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거룩해 져 가는 성화의 길을 걸어갑니다. 따라서 거룩함과 구별된 삶은 목사나 사역자만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나라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에 주어진 의무입니다. 물론 목사나 사역자는 다른 성도들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적 기준과 거룩함의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목사나 사역자만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잘못된 생각입니다. 모든 성도는 세상의 제사장으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해야 하고, 더 높은 도덕적 정결함과 거룩함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세상으로 보내시고, 그곳에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임하도록 하신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신부와 제사장으로서 오늘 하루도 거룩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본문에서는 하나님은 앞에서 말씀한 것들 중에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식을 몰렉 신에게 바치는 사람이 이에 해당됩니다. 그런 사람은 친척과 이웃이 먼저 돌로 쳐야 합니다.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땅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 지방 사람들(친척과 이웃)이 그것을 보고도 돌로 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지방 사람들에게도 진노하십니다(1-4). 또 점이나 굿을 통해서 미래를 예언하는 자들을 따르는 자도 죽음에 해당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부모님을 저주하고 욕하는 자도 해당됩니다. 또한 부부 관계 외에 성적인 관계를 갖는 사람과 가까운 가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사람도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5-14). 나아가 짐승과 관계를 갖는 남여 모두도 사형에 해당합니다(15-21). 하나님은 이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땅이 그들을 토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전에 살던 민족들의 풍습이었습니다(22-23).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싫어하시고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에서 살아갈 때에 그곳의 생활을 본받지 않아야 합니다. 새로운 환경이지만, 그곳에서 살던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감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삶 속에서 드러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먹는 것과 입는 것과 성생활, 종교 생활, 가정 생활 모두 하나님의 법으로 무장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감으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해야 했습니다(26).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 가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에게 사형을 명하신 것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고, 또 과해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그대로 적용할 수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조금도 가볍게 여기면 안됩니다. 이것은 단지 문화적, 시대적 차이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오늘날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죄를 많은 순간 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죽지 않고 회개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지 문화적 차이때문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이런 죄를 짓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 죄에 머물러 있다면 거룩한 삶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또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영적으로 일시적인 죽음을 그 사람에게 교회의 권징(출교)을 통해서 주게 됩니다. 이로써 얼마나 심각한 죄를 지었는지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게 합니다. 구약에서 가족과 주민이 먼저 돌로 쳐 죽이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서로를 위한 권면과 권징으로 영적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세상사람들과 구별되게 삽시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 서로 독려하며 권면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듣도록 모세를 통해서 또 다른 삶의 규칙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십계명을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을 경외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긴밀히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님을 통해서 당신의 권위로 자녀들을 돌보도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1-4). 화목제물은 반드시 이튿날 안에 먹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이웃과 화해를 이루는 제물이기 때문에 공동체와 함께 먹어야 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일상의 삶은 긴밀히 연결되어있습니다(5-8). 나아가 이스라엘은 추수할 때에도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면 안되고, 떨어진 이삭도 다시 주어서는 안됩니다. 또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서는 안되고, 떨어진 포도알도 주워서는 안됩니다.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해서 버려 두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 줍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입니다(9-10).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함으로 가난한 이웃에 대한 도리를 다하고 풍요할 때 찾아올 수 있는 탐욕의 유혹을 뿌리치도록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거짓 맹세하지 말고, 서로 속이지 말라는 아홉 번째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말고 품꾼의 삯을 제때 주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없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14). 또재판할 때 공정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이웃의 피로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웃을 미워하지 말고 권면하고 견책해야 합니다. 그렇게함으로 이웃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자신을 사랑함과 같이 해야 합니다(18). 이것을 명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반복하여 알려 줌으로 이러한 실천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해서는 안되고, 밭이 두 종류의 씨앗을 뿌려서도 안됩니다. 또 두 재료로 만든 옷도 입어서는 안됩니다(19). 이런 행동은 더 많은 소출과 이익을 위해서는 뭐든지 하든 이방인들의 정신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해방되지 못한 여성 노예라도 성적으로 함부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죄가 되어 속건제를 통해서 용서를 받아야 할 죄로 취급됩니다.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지어 얻는 열매는 3년 동안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4년째 되는 열매는 거룩해 집니다. 하지만 먼저 하나님께 드려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5년째 되는 열매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수있습니다. 이러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첫 4년 동안 먹을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숨어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짐승을 잡아서 먹되 피를 먹어서는 안됩니다. 머리 가를 둥글게 깎는 것과 수염을 끝을 손상하는 것, 죽은 자를 위해서 문신은 하는 것, 딸을 창녀로 만드는 것, 신접한 자를 믿는 것은 모두 이방의 종교적인 관습과 긴밀히 연결된 것입니다. 이런 것에 현혹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보여야 합니다. 종교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노인을 공경하고, 함께 생활하는 거류민을 학대하지 말고, 재판이나 무게를 잴 때 속이거나불공정하게 하지 말고 공정하게 행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을 드러내 보여야 했습니다(23-37).
하나님께서 주신 규칙은 한 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예배에서 드러나고, 이웃 사랑은 우리의 삶의 예배에서 드러납니다. 이 둘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한 셋트 입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그분의 계명을 지킬때, 우리는 이웃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배와 일상의 삶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한 사람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이웃에 대해서 비방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바른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들임을 기억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지금까지 제사(예배)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일상 생활에서도 이방인들과 달라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성과 관련해서 말씀 하시는데, 본격적으로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당신께서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먼저 말씀합니다. 그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먼저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떠나 온 이집트의 풍속(문화)이나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 땅 사람들의 문화를 따라서 살아서는 안되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1-3).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법과 규칙을 지켜야합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표현은 의지적인 노력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바르게 지키면 생명을 약속하십니다(4-5). 하나님께서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가까운 가족끼리 성적인 관계를 금지하고 계십니다(6-20). 또 자녀를 몰렉 신에게 바치지 말며(21), 남자가 여자와 성적인 관계를 맺듯이 성적인 관계를 맺지 말라고 하십니다(22). 뿐만 아니라 짐승과 성적인 관계를 맺지말라고 합니다(23), 또 동성간의 성적인 관계도 금하십니다(22). 이러한 잘못된 성적인 관계는 차마 입에도 담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을 당시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23).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벌을 주어 그 땅에서 그들을 쫓아내시는 이유입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땅이 더러워졌다는 것은 그런 죄가 굉장히 성행했다는 말입니다. 가나안 백성들은 땅의 신, 나무의 신, 다산의 신 등을 섬기면서 그 신들을 만족시키고 풍요로움을 보장 받으려고 이런 일들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짓을 통해서 풍요로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순종함으로 풍요로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와 같은 일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끊어짐을 당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 올바른 성적인 가치관을 가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 세속의 기준과 법으로 성적인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서 세워야 합니다. 여성들은 남성의 성적인 욕망의 무차별적인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부부 중 한 명을 더럽히는 것은 다른 한 명의 명예를 더럽히고, 부부가 사이에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동물과 성적인 관계를 금지하는 법은 당시에 점술이나 마술 행위의 참여하는 일부로서 행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미래의 필요들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성애는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께서 금지하시던 것입니다. 물론 동성애자들을 모두 죄인 취급하며, 혐오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행위가 옳다고 말해서도 안됩니다.
오늘날 사회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오늘 말씀에서 언급한 모든 성적인 행위를 허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잘못된 성행위를 거부해야 합니다. 성은 부부 사이에만 허락된 신성한 것이며 성적인 영역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법을 통해서 다스림을 받기 원하십니다. 성적으로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행하는 것은 단지 성에 관한 신념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를 섬기고 있고, 누구에게 속하였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혹시 예전에는 몰라서 바른 성적인 가치관을 가지지 못하고 실수한 것 있다면 회개하고 지금 부터라도 바른 성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서 바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아론과 그 자녀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짐승(소, 양, 염소)을 도살하는 규칙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을 잡을 때에도 이방 사람들이 하는 것과 달리 하나님 앞에서 잡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화목제물로 바친 제물의 고기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다루어 지는 것은 제물을 잡는 장소입니다(5). 들판에서 제물을 잡는 행위는 당시 이방인들이 하던 관행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동물의 피를 들판에서 흘림으로 추수할 양이 많아질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제사장이 피를 제단에 쏟아야 했으며 그 기름을 살라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도록 한 후에 고기를 먹일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풍요로움은 땅의 신이 아니라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곳에서 잡으면 그 피를 흘린 댓가를 치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속죄제의 피를 뿌리는 것은 대신 희생된 생명을 의미합니다. 본래 제사를 지내려는 사람이 죽어야 하지만 희생제물이 생명을 내어놓은 것입니다(1-9).
또 사냥을 통해서 짐승을 잡게 되었을 때에도 그 짐승을 피 째 먹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든 그들과 함께 거하는 이방인이든 사냥한 짐승이나 새의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자연사한 것이나 다른 짐승에게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을 때에는 그 피를 땅에 쏟지 않았기 때문에, 먹은 후에는 그의 옷을 빨고 그 몸을 씻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의 댓가는 죽음입니다. 생명을 취했기 때문에 다른 생명으로 대속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피째 먹는 것은 그 짐승의 생명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짐승을 먹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과 달라야 했습니다(10-16).
이것은 이스라엘이 지켜야 하는 ‘영원한 규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영원한 규례’는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고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인들도 지켜야 될 규례’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제사에서 짐승의 피는 예수님께서 흘리실 피의 예고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하고 최종적인 희생제물로서 당신의 피를 흘려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구약의 제사의 피흘림은 예수님의 최종적인 희생의 그림자입니다. 그분의 죽으심 때문에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모든 자들이 구원을 얻습니다.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죽은 행실과 양심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힘을 줍니다(히9:14). 또 우리는 예수님의 이 보혈을 성찬에서 마심으로 예수님의 죽음이 주는 모든 유익을 누리고 주님과 연합이 됩니다. 그 연합은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며 예수님께서 피흘림으로 얻으신 영생의 약속과 최후의 부활에 동참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줍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새 생명을 얻어 먹는 것과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입니다(고전10:31). 이것이 영원한 규례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기억합시다. 그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고, 참된 생명을 주셨습니다. 새생명을 얻는 자로서 먹고 마시는 것에서도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아론의 두 아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향을 피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10장)을 상기하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속죄소)가 있는 지성소(지극히 거룩한 장소)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되고 일년에 한 번 모든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들어갑니다(3-4). 흔히 이 날을 ‘대속죄일’이라고 부릅니다(참고. 레 23:27-33). 그날에 대제사장인 아론은 대제사장의 옷을 온전히 갖추고, 자신을 위해서 먼저 수송아지로 속죄제를 드리고, 숫양으로 번제물을 가지고 오고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속죄제물을 위해 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숫양 한 마리를 가지고 옵니다. 그 후 아론은 먼저 자기와 자기집안을 위해서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또 모든 회중을 위해서 두 염소 중에서 제비 뽑아 한 마리는 속죄제로, 한 마리는 아사셀 염소로 구별합니다. ‘아사셀 염소’는 죄의 짐을 지고 광야로 떠나는 염소입니다(5-10).
아론은 자기와 자기의 가족을 위한 속죄제로 수송아지를 드릴 때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서 분향단에서 불을 가져다가 가져 온 향품을 태워 향기로운 냄새를 피웁니다. 그러면 성막 안은 연기가 가득해 집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백성들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지성소로 들어가 언약궤 위에 있는 속죄소에 피를 일곱 번 뿌립니다. 백성을 위한 염소의 피도 동일하게 뿌립니다. 또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번제단의 뿔에 바르고 땅 위에 일곱 번 뿌려 거룩하게 합니다. 이는 백성의 죄가 하나님의 바로 앞에까지 이를 정도로 많고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사셀로 구별된 염소의 머리에 아론은 그의 두손으로 안수합니다. 이는 온 백성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혹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고, 정해 진 사람은 진영 밖으로 그 염소를 끌고 나가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광야에 염소를 두고 옵니다(11-21). 여기서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땅과 구별되는 땅으로 사탄과 죄의 지배를 받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모든 백성의 죄를 짊어진 염소를 그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또 백성의 죄가 멀리 떠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거룩하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으로 모든 백성을 위한 제사가 끝이 납니다. 그 후에 대제사장은 몸을 씻고 다시 대제사장의 의복을 갖추고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립니다. 광야로 염소를 보낸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그의 몸을 씻은 후에 진영에 들어가고, 짐승의 가죽과 고기와 똥도 진영 밖으로 보낸 자도 그의 옷을 빨고 몸을 씻은 후 진영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22-34). 이렇게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은 모든 백성을위한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이 날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정결하게 되는 안식일의 중의 안식일이며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완전한 대속죄일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참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모든 백성을 위한 속죄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아사셀 염소로서 하나님께 버림 당하여 모든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당하셨습니다. 그분의 사역으로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하늘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여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1-12절은,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라고 말씀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는 용서 받았고,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에 날마다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날마다 이런 우리의 특권을 사용하여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갑시다. 또한 날마다 죄를 멀리하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유출이 있는 사람에 관한 규례를 말합니다. 몸(생식기)에서 피나 액체가 나오게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것은 생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고, 병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생식기에서 어떤 것이 흘러 나오게 된다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 곧 정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에 부정하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더럽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 법적인 관점에서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부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부정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부정하게 된 사람이 앉은 자리에 정한 사람이 앉게 되거나 그 사람의 침이나 분비물을 맞게 되면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 몸에 부딪히거나 만진 사람도 부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정결의식을 해야 했습니다(7). 그의 옷을 빨고 몸을 깨끗하게 씻고 하루 동안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유출병이 있던 사람이 낫게 되었다면 증상이 없어진 후 칠일 후에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자신의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팔일 째 되던 날에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 주고 한 마리는 속죄제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로 드려 속죄를 해야 합니다. 여기서 속죄를 드리는 이유는 병 자체가 죄의 현상으로 그 사람이 그 죄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께 다시 나아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어서 병 뿐만 아니라 생식기에서 자연적인 현상으로 정액이 배출이 되거나 성관계를 통해서 정액이 배출 될 때에도 몸에서 어떤 유출이 있었기 때문에 부정한 것으로 간주 됩니다. 그런 사람은 몸을 씻고, 정액이 묻은 옷가지와 가죽옷은 부정하게 되어 물로 세탁하고, 하루 후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입을 수 있게 됩니다. 남녀가 관계를 통해서 정액이 배출 되었다면 남녀 모두 부정하게 되어 둘 다 몸을 씻고 하루가 지나야 정결해 집니다. 이로써 부부간의 관계도 그들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약시대에는 여성의 생리현상도 부정하게 여겨졌습니다. 일주일 동안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다른 사람과 접촉을 삼가도록 했습니다. 일주일의 기간 동안 만약 다른 사람이 그가 앉은 곳에 앉게 되면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빨고 몸을 씻는 정결 예식을 행해야 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19-24). 만일 피의 유출이 생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여러 날을 가는 부인병이라면 그 부인병이 나을 동안 부정하게 됩니다. 그 유출이 그치면 일주일 후에 산비둘기 새끼 두 마리나, 집 비둘기 새끼 두 마리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림으로 정결하게 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25-30). 이런 법을 두신 이유가 31절에서 33절에 나오는데, 유출(병)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막을 더럽히지 않고, 그로 인해 그들이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속이고 거룩한 척하며 성소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것까지도 알고 계시고, 정결하게 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은밀한 아픔과 죄도 알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은 자신의 은밀한 병과 아픔을 주님께 가지고 나아가 믿음으로 그분을 만졌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치료해 주시고,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은밀한 곳에서도 계시고, 우리를 보고 계시고, 정결하기 원하시고, 다스리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은밀한 영역에서도 거룩하기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모든 곳에서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우리 삶의 모든 곳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이 병이 낫고 다시 공동체로 돌아오기 위한 규례를 말씀합니다. 역시 제사장이 그 병이 나았는지 확인을 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그를 진영 밖에서 만나서 관찰을 하고 병이 나은 것이 맞으면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정결하게 될 사람은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박하나무의 일종인 우슬초 풀을 가지고 옵니다. 제사장은 그 사람에게 흐르는 물(생수)을 담은 질그릇에서 새 한 마리를 잡고 다른 한 마리는 죽은 새의 피를 찍어 날려보냅니다. 또 제사장은 그 사람에게 피가 섞인 물을 우슬초에 찍어 뿌립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 사람이 죽음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줍니다. 또 그 나은 사람은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몸을 씻고 자기의 장막 밖에서 칠일 간 더 머물고 칠일 째에 되는 날에 모든 털을 밀어 확실히 병이 나았는지 다시 확인합니다. 그리고 팔일 째에 하나님께 정결하게 되는 제사를 드립니다. 번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 모두 드립니다. 특별히 그 사람에게 마치 제사장이 구별하여 세워질 때와 같이 제물의 피를 그의 오른 쪽 귓부리와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릅니다. 또 기름도 취하여 같은 부위에 바릅니다. 이렇게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치유된 그 사람의 부정함이 완전히 없어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그 사람이 공동체 안으로 완전히 받아 들여지는 것을 크게 축복하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그 제사는 병이 나은 사람의 형편에 따라서 속죄제와 번제는 새로대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건제는 반드시 어린 양으로 드려서 피와 기름을 오른쪽 귀와 손가락과 발가락에 발라야 했습니다(1-32). 그러기 위해서온 가족이 힘을 모아 제물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집에서 발생할 수 있는 나병 색점에 대한 규례를 말씀합니다. 흙으로 만든 집 벽에 발생할 수 있는 악성 균을 말합니다. 이것은 번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집 주인은 집안의 물건들을 다 치우고 제사장을 집으로 오게 하여 그 색점을 살피도록 합니다. 그 색점이 푸르고 붉은 무늬가 있고, 벽보다 우묵하면 제사장은 그 집에서 나와 일주일 동안 집을 폐쇄하였다가 일주일 후에 다시 살펴 그것이 벽에 퍼졌으면 그 부분을 파내어 성 밖에 있는 곳에 버리고, 다른 돌과 흙으로 바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색점이 발생했다면 제사장이 다시 살피고 만약에 집에 그 색점이 퍼진 것이 맞다면 그 집을 헐고 그 돌과 재목과 흙을 성 밖에 버리고 그 집에 있었던 사람은 하루 동안 부정하고, 그 집에서 잠을 잔 사람은 몸을 씻고 옷도 빨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색점이 퍼지지 않았다면 그 집을 정하다고 선언하고 그 집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새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흐르는 물에서 잡아 그 피와 물이 섞인 것을 집에 뿌리고 다른 한 마리는 놓아줍니다(33-53). 이것이 나병(악성피부병)에 걸린 사람과 균에 오염된 옷과 집에 대한 규례입니다.
이러한 규례들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은 우리의 몸과 옷과 집도 우리의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악성 피부병으로 인해서 공동체로부터 격리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옷을 좀이 먹거나 곰팡이가 생겼다고 찢고 버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집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위협적인 질병에 직면할 때,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격리 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치를 당하는 사람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아서 돌아와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질 때 각종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공동체와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온 공동체도 즐거워합니다. 결국 이 명령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손해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하기를 당연하게 여기는 주변 나라와 달라야 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나 아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나병을 진단하고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나병’은 흔히 ‘한센병(문둥병)’만을 의미하지 않고, 악성 피부 전염병을 모두 포괄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묘사되는 병의 증상과 진단은 의학적인 목적이 아니라 제사법적인 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판단하고 진단하는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피부에 나는 병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피고 그것이 전염력을 지닌 악성 피부병인지 판단하고 격리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것은 부정한 것, 곧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전염력을 가지지 않은 단순한 피부병일 경우에는 정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12-13). 만약에 전염력이 있는 피부병이 나았다면 사람을 보내어 제사장을 오라고 해서 자신의 병을 보아 진단하도록 합니다. 그들은 진영 밖에서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제사장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제사장을 불러야 합니다. 제사장이 진찰하여 나았다면 그를 정하다고 선언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증상이 있다면 일주일을 더 격리하고 판단해야 했고, 만약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여전히 부정하다고 하고 격리합니다. 또 화상 때문에 생긴 피부염도 살펴 보아 퍼지지 않으면 정하다고 선언하고, 퍼진다면 부정하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피부에 털이 있는 곳의 모근에서 발생할 수 있는 피부염도 언급합니다. 옴도 일종의 피부병으로 취급했습니다. 제사장은 증상이 있는 사람을 일주일간 격리를 시키고 이후에 그것이 전염력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살피고 피부에 퍼진다면 부정하다고 하여 진영 밖으로 보내고 전염되지 않는다면 그를 정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후에도 피부에 퍼지면 부정하다고 하고 격리시켜야 합니다. 또 일반적인 탈모증으로 인한 대머리는 정하지만, 악성 피부병으로 인해서 머리가 벗겨진 경우에는 부정하다고 선언하고 진영 밖에서 살아야 합니다.
또 사람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입는 옷에도 악성 곰팡이나 사상균이 번식하는 것도 제사장이 조사를 합니다. 만약 옷에 악성 곰팡이나 사상균이 있다면 제사장이 부정하다고 선언하고 옷을 빨고 그 부분을 찢거나 심한 경우에는 불태워야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제사장은 악성 피부병과 옷의 균들을 진단하고 판단하여 공동체를 보호했습니다.
몸에 이런 악성 피부병들이 생기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 그 자체로 공동체에 병이 퍼질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하게 취급되었고 나을 때까지 격리해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그 병에 노출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살피고 공동체를 보호하고 그 사람을 격리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몇몇 악성 피부병(한센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진단만 할 뿐이지만 참된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그들을 낫게 하시고 정하다고 하셔서 공동체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병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죄의 현상이었습니다. 주님은 죄의 현상인 병을 고치심으로 죽음과 죄를 정복하신 분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외 되었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교제를 회복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악성 전염병과 같은 죄들을 멀리하고 예수님께서 회복하신 참된 교제를 주님과 형제 자매들과 누리며 서로를 향한 회복된 사랑으로 격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인이 해산을 하고 난 뒤의 정결 규례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먹는 것에 대한 규례 다음으로 자녀를 낳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이 먹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지켜야 할 규례가 있었습니다. 여인이 아기를 낳고 나면 피를 흘리게 되기 때문에 부정하게 됩니다. 이는 더럽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칠일 동안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팔일 째에 아이를 데리고 가서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의 표피를 베는 것으로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33일이 지나야 여인은 부정하게 되는 기간이 지나정결하게 됩니다. 총 40일동안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40일이 차면 번제와 속죄제를 위해서 양과 비둘기를 드려야 합니다. 또 딸을 낳았을 때에는 그 기간이 두배 입니다. 그래서 14일간 부정하고 80일동안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는 정하게 되는 기간을 채울 뿐만 아니라 쉼을 주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자녀를 낳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태어날 때 그들이 또한 죄인인을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가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해야 할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또 산모는 몸에서 유출이 있는 부정한 상태에서 정하게 되기 위해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여자 아이를 낳았을 때 더 길게 집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성경에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학자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 때 당시에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 출혈이 더 길게 나오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여자아이들은 이후에 그들이 월경으로 인해서 부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여자아이들을 남자아이들보다 열등하게 여긴 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산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특별히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씀하신 ‘여자의 자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게 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출산은 인류의 지속성을 보장하고 언젠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바라는 소망의 행위였습니다. 때문에 출산 자체가 부정한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출산 후의 출혈이 부정한 것임을 본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번제를 바치는 것은 모든 자녀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전적인 헌신을 의미하고, 속죄제는 자녀들을 죄성의 오염으로부터 지키겠다는 열망과 경건을 보여줍니다. 또 산모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그 부정함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허락하신 것은 언약의 자녀로 양육하기 위함 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자식들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며 섬기던 신에게 제물로바치던 이방 민족들과 전혀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우리에게 자녀를 주셨고, 또 주실 것에 기대하며 자녀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구속이 필요한 존재로,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을 하는 존재로, 언약의 자녀로 양육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자녀들을 바라보는 관점도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에 따라서 바르게 가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은 이제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별된 백성으로서 일상의 삶에서 지켜야 할 규칙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구속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그 생활의 방식에서도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방 민족들과는 달라야 했습니다. 기본 원리는 정한 것(영:clean/네: rein)과 부정한 것(영: unclean. 네: Onrein)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11장은 동물과 관련해 어떤 것이 부정하고 정한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을 하는 짐승(예를 들어, 소)은 먹을 수 있지만, 굽은 갈라졌지만 되새김을 하지 않은 동물(낙타, 토끼), 혹은 되새김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은 동물(돼지)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1-8). 또 물고기 중에서도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고등어, 갈치)은 먹을 수 있지만,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메기, 미꾸라지 류)은 먹을 수 없습니다(9-12). 또 새 종류에서도 독수리, 매, 타조, 올빼미 등은 먹을 수 없습니다(13-19). 곤충들 중에서는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는 곤충은 다 혐오하되, 메뚜기와 같이 뒷다리로 뛰어 다니는 것은 먹을 수 있었습니다. 부정한 짐승과 새와 곤충들의 시체를 만지거나 닿으면 그 사람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하루 동안 정결 예식을 해야 했습니다. 또 길 짐승 중에서 부정한 것은 두더지, 악어, 도마뱀 종류입니다. 그리고 뱀과 같이 땅에서 기는 것을 다 부정합니다. 이런 것에 닿은 옷과 나무 그릇도 물에 담그고 하루동안 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흐르는 물이나 고인 웅덩이에 그것의 사체가 있으면 부정하여 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심지 않은 씨에 묻었을 때에도 부정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물에 닿았는데, 그 상태에서 사체가 닿으면 부정해 집니다. 다시 한번 땅에 기어다니는 짐승과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은 부정하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이런 것들로 자신을더럽히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당신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몸을 거룩하게 하고, 거룩을 유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44-45). 거룩은구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이렇게 생활의 규칙 가운데 음식을 가려서 먹는 것을 통해서도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당부하십니다. 이런다른 생활 규칙이 곧 그들의 거룩과 연결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연결됩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런 규례를 그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부정한 것을 정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기록된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며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원리를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고 일하길 원하십니다.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가 거룩하길 원하십니다.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기 원하십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해, 자신의 성공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세상사람들과 다른 삶의 목적과 방식으로 살기 원하십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의 직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그 날에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지않은 다른 불로 제단에서 제물을 태우려고 하자 그 불이 나답과 아비후를 살랐습니다(1-2). 이것은 단순한 사고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단 불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제사를 집례하지 않은 제사장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당신을 섬기는 제사장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거룩하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욱 더 드러내시는 행위였습니다. 아론은 침묵으로 하나님의 옳으심을 인정합니다(3). 나답과 아비후는 타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옷은 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5). 모세는 아론의 남은 아들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을 슬퍼하기 보다 나답과 아비후의 직무를 계속하게 함으로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 미침을 면하게 하라고 합니다. 죽은 자를 슬퍼하고 애통하는 일은 백성이 할 것이라고 합니다(6).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여 더 큰 화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독주와 포도주를 금하는 말씀을 아론에게 하십니다. 아마도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진 않은 불을 드린 원인이 포도주나 독주와관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석가들은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시고 분별력을 잃은 상태에서 여호와께서 명하신 불을 드렸다고 봅니다. 제사장들은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제사를 하고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쳐야 합니다(11). 그리고 그날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아론은 제사장이 먹어야 할 몫을 먹지 않고 태웠습니다. 모세가 그것을 알고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아론은 자신이 속죄제를 드리고 번제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죽었는데, 자신이 이 속죄제물마저 먹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론이 지극히 거룩한 것을 먹을 자격이 없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모세는 그 대답을 좋게 여겼습니다(20).
하나님께서는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함과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예배를 거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대로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면서 스스로 더욱 더 순종하고 거룩하게 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제사장들은 거룩한 것들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늘 바른 분별력을 가지 하나님께서 주신 규칙에 맞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고 제사의 규례를 잘 기억하고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술을 금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직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에서 직분자들의 자격 중 하나로 ‘술에 인박히지 않으며(딤전 3:3, 8)’가 있습니다. 직분자는 말씀을 바르게 판단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 스스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예배를 말씀을 따라 잘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더욱 거룩하게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직분자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들로서 더욱 경건하고 거룩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협력합시다. 또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스러움을 드러내시고, 항상 말씀을 따라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참된 제사장들로서 살아가는 하루가 됩시다. 아멘.
7일간의 제사장 위임식 마지막 날이 지났습니다. 그 후 첫날인 여덟째 날에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또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타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1-4). 이제는 모세가 아니라 제사장이 본격적으로 활동합니다. 지난 7일 동안 거룩하게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직무를 하기 전에도 역시 자신을 위해서 먼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5-7). 아론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도 아론을 도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립니다(8-11). 한번 거룩하게 구별 된 것으로 끝이 아니라 제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죄를 용서받으며 그 거룩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론은 온 백성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역시 '규례대로' 모세가 명령한 대로 정확하게 행합니다(12-21). 아론과 제사장과 장로와 모든 백성을 위한 속죄제, 번제, 소제, 화목제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졌습니다. 아론이 모든 백성을 위해 축복함으로 백성을 위한 제사가 완료됩니다. 이에 모세와 아론은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그리고 다시 백성을 축복합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태웁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 자손들과 장로들과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위한 제사를 받으셨다는 표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론이 그대로 했을 때, 그리고 백성도 그 말씀 그 대로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하나님께서 예배를 명령에 따라서 했을 때 그 예배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 백성을 축복하셨고,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 하신 대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예배 가운데 드러내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매 주일의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전심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대제사장과 제사장 위임식을 거행하도록 하십니다. 이를 위해 제사장 의복과 거룩한 기름인 관유와 속죄제를 위한 수송아지와 위임식을 위한 숫양 두 마리(번제를 위해 한 마리, 위임식을 위해 한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를 가지고 모든 백성을 회막에 모으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을 따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에 있는 물두멍에서 씻긴 후 아론에게 대제사장 옷을 입히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그 띠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적힌 패를 붙입니다(1-9).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아론에게 행합니다. 이어서 거룩한 기름(관유)를 가지고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들(분향단, 떡상, 촛대)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회막 뜰에 있는 모든 기구(물두멍, 번제단과 그 받침 등)에 발라 거룩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아 론의 머리에 관유를 부어 대제사장으로서 거룩하게 구별합니다. 또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속옷을 입히고 띠를 띠우고 관을 씌웁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명하신 그대로 하였습니다(10-13).
또 모세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해서 제사를 집례합니다. 먼저, 속죄제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여 그들의
죄를 전가, 혹은 그들과 수송아지를 동일시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수송아지를 잡습니다. 그 피를 제단 네 모퉁이에 바르고 나머지는 제단 밑에 쏟습니다.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을 제단 위에 불사르고 나머지 가죽과 고기와 배설물은 진영 밖에서 불살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제사를 행합니다. 이어서 양과 숫양으로도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피를 아론과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직분에 나아가기 전에 그들의 죄를 먼저 해결하고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모세는 거룩한 기름과 제단 위에 있는 피를 가지고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려 그 옷도 거룩하고 고기의 나머지 부분과 무교병 광주리에서 남은 떡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날에 먹도록 하고 나머지는 불사르라고 합니다. 이 위임식을 일주일 동안 행하되, 위임식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것을 지키며 회막을 나가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아론과 그 아들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지만 여호와 앞에서 죽음을 면할 것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대로 행합니다(36).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모든 위임식이 끝난 후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옷을 먼저 입고 위임식을 한 후 그 피로 거룩하게 구별되어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옷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거룩한 직분에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기름부음은 거룩하게 구별된 그들에게 그 직무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그에 합당한 능력을 주실 것을 상징합니다. 제사장으로 세워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 제사장들이 제물의 피가 아니면 하나님께 설 수 없듯, 예수님의 피를 의지 하지 않는 자는 기본적으로 어떤 직분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고, 피 뿌림을 받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거룩한 나라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벧전2:9).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행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과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이런 신자들 가운데 교회의 직분자로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 회중을 통해서 직분자를 부르시고 세우실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지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 직무를 감당하는 능력과 힘을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6장에 이어서 제사장을 중심으로 속건제를 드리는 규칙에 대해서 오늘 말씀은 시작합니다. 기본적으로 속건제는 속죄제와 드리는 규칙은 같습니다(7). 다만 피를 성소의 휘장에 뿌리는 것이 차이가 있습니다. 속죄제와 마찬가지로 제단에서 태우지 않은 속건제 고기는 제사장이 가집니다. 또 하나 추가로 언급되는 것은 번제물의 가죽을 제사장이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소제물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화덕에 구운 소제물과 냄비에나 철판에서 만든 소제물은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에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 외의 소제물, 곧 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은 모든 아론의 자손들이 균등하게 분배를 합니다(10). 제사장들 안에서도 균등한 분배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어서 화목제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화목제의 종류가 언급되는데, 먼저 감사제(12)가 있습니다. 감사제는 바치는 자의 사랑과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드립니다. 서원제(16)는 서원을 할 때 만들어지는 약속이 응답될 때 드리는 화목제입니다. 또 하나는 스스로 원해서 기쁨으로 드리는 자원(낙헌)제입니다. 이것은 한 가족이나 혈족이 하나님 앞에서 축하할 일이나 기념할 만할 일이 있을 때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입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은 그날에 다 먹어야 하지만, 서원제와 자원제로 드리는 화목제사의 제물은 이튿날까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 규칙을 어기고 셋째 날에도 그 고기를 먹게 되면 그 제사 자체가 무효가 되고 죄를 짊어지게 됩니다(18). 화목제의 특징은 제사를 드린 후에 고기는 빨리 먹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또 그 고기는 제사장 뿐만 아니라 제사를 드리러 온 가족과 사람들 가운데 부정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을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시체를 만졌거나, 몸에 전염시키는 피부병이 있거나, 출산하진 얼마 되지 않았거나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먹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제물의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름과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이 지켜야 할 규칙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화목제는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지고 와야지 종을 시키거나 다른 사람이 가지고 오게 해서는 안됩니다(30).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기름과 가슴 부분을 가지고 와서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것을 흔들어 하나님께 바치고 기름을 불 사르고, 또 그 오른쪽 뒷다리를 가지고 가면 제사장은 그것을 들어서 하나님께 바친 후 그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이 오른 쪽 뒷다리는 제사장이 자기의 소득으로 삼아 가집니다. 화목제물 중에서 흔들어 바친 가슴 부분 고기와 들어서 바친 고기를 제사장의 소득으로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합의에 의해서 정해 진 것이 아니라 아론과 그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날에 세운 것임으로 함부로 변경할 수 없는 제사장들의 영원한 소득이 됩니다(35-36). 또 앞에서 언급된 모든 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언급함으로 7장이 마무리 됩니다.
화목제는 감사와 기쁨과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들과 기쁨을 나누는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에서 제사장의 몫이 적지 않게 언급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규례는 제사장들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알게 하셨는데, 모든 백성들이 모든 제사장이 자신들의 제물에서 그 몫을 취하는 것을 기뻐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약에서 바울도 사역자들이 마땅히 취할 수 있는 몫을 언급합니다(고전9:7-14). 복음 사역에 신실하게 삶을 헌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물을 감사히, 그리고 명예롭게 받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사례는 월급이 아니라 목사의 봉사에 대한 회중의 감사의 표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기쁨과 감사로, 몫을 받는 제사장은 그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하고, 감사와 기쁨을 예배 가운데 표현해야 합니다. 찬송과 헌금은 그 성격이 같습니다. 감사와 기쁨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목제물로서 죽으심을 기뻐하고 감사함을 찬송과 예물로 표현 합시다. 날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또 모세에게 어떤 경우에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것을 훔친 것이 아니라 이웃의 것을 훔쳤을 경우에 어떻게 해야하는지 보여줍니다.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그 사실을 부인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그 사실을 부인하고 줍지 않았다고 거짓 맹세했으나 나중에 그것이 사실로 밝혀지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죄인은 감추거나 훔친 물건을 주인에게 20퍼센트를 더 보상하여 돌려 주고 모세가 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에 흠이 없는 것을 속건제로 드려야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1-7).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웃을 속이고 이웃의 것을 훔치는 죄는 단지 이웃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심을 알려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한 계명을 어기면 그것을 명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결이 됩니다.
1장부터 6장 7절까지 백성들을 중심으로 제사에 대해 설명을 하셨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제 아론과 그의 자손, 곧 제사장을 중심으로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 지 알려주십니다. 제사장은 번제를 아침과 저녁으로 드리며 제단에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합니다. 또 벌거벗고 제사하는 다른 이방 제사장들과 달리, 항상 속 바지를 입고 제사장의 의복을 입고 제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를 버리러 진영 밖으로 나갈 때는 제사장의 옷 말고 다른 옷을 입고 정한곳에 버리러 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이 소제를 드릴 때에는 고운 가운 한 움큼과 기름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함께 태워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나머지는 아론과 자손들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룩을 넣지 않고, 거룩한 회막 뜰 안에서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사장들의 소득이 되었고, 그것은 구별되어 거룩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먹는 사람도 거룩해야 먹을 수 있습니다. 또 아론을 이어 대제사장이 될 아론의 자손도 그날에 여호와께 소제로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 절반은 아침에, 절반은 저녁에 드리고 그것을 기름으로 반죽하여 철판에 굽고, 기름에 적셔 썰어서 소제로 여호와께 드리되 그 남은 것은 먹을 수 없었고 완전히 불에 태워야 했습니다(15-23). 이어서 속죄제의 제물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속죄제의 제물 중 일부는 제사장이 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기를 삶은 토기는 깨야 하고, 유기에 삶았으면 그릇을 닦고 물에 씻어야 했습니다. 또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죄한 고기는 먹을 수 없고 태워야 했습니다(24-30). 항상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형제와 자매들과의 관계가 항상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의 형제 자매에게 행한 잘못은 곧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용서와 사과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과 이웃 앞에서 하는 것이 동시에 가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말씀에서 제사의 지침을 통해서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의무)과 먹을 수 있는 것(권리)을 말합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통해서 나오는 곡식과 고기의 일부를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에 따라서 취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동시에 제사장에게 속한 고기가 어떤 것이라도 남게 되면 소각해야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제사장이 항상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으로부터 구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희생 제물로부터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도 하나님이 매일 채워 주시는 양식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부를 축적할 수 있지만 그 부요함을 의지하기 보다 하루하루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공급하심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매일매일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갑시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의무(감사와 예배)를 다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앞 장에 이어서 5장 초반부는 속죄제를 다룹니다. 그런데 죄의 성격이 좀 다릅니다. 4장에서 실수로 혹은 모르고 명령을 적극적으로 어긴 것에 대해서 속죄를 했다면, 5장에서 속죄를 해야 하는 죄는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입니다. 총 세 가지 경우를 다루는데, 먼저는 다른 사람의 저주 소리를 들었음에도 증인의 역할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부정한 것들의 사체에 닿아 부정하게 되었는데 깨닫지 못하다가 나중에 깨닫게 되었을 때 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그 맹세를 실행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속죄하여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어긴 것도 죄이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는 것, 모르고 한 것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으로 바쳐야 합니다. 만약 그가 가난하여 양을 살 수 있는 형편이 안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 비둘기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서 한 마리는 속죄제로, 한 마리는 번제로 드려야 합니다. 혹시 그가 너무 가난하여 비둘기 조차도 살 수 없다면곡식으로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보통 곡식 제사(소제)와 달리 속죄제로서 곡식을 바칠 때는 기름을 섞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죄로 인해 얻은 허물을 용서 받아야 합니다(1-13).
14절부터는 속건제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 거룩한 물건들, 곧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과 여러 성소의 기구들, 십일조, 제사장의 몫으로 주어지는 고기 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5절에서 범죄 했다는 말은 “믿음을 배반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지 않거나 감추거나 성별 된 것에 침해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배반한 것으로 속건제를 드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떤 고기가 하나님께 바쳐진 것임을 알지 못하고 먹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때 그는 흠 없는 숫양을 바치고, 자신도 모르게 먹은 것의 20프로 더해서 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물을 혼자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 숫양의 가치를 제사장이 정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알지 못한 채 어겨도 허물이 있어 벌을 당합니다. 때문에 제사장이 지정한 가치에 따라서 흠 없은 숫양을 속건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갚음이 되고 이웃에게 갚음이 되었습니다(한글 번역 “그가 여호와께 참으로 잘못을 저질렀음이니라”는 “그는 분명하게 여호와께 갚아 주었다.”로 번역 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드려진 속건제로 하나님께 갚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으로 했기 때문이지 범죄자가 하나님께 실제로 배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재산을 알 지 못한 채 취하거나 범했을 때 드렸습니다. 무지함이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모르고 짓는 죄도 하나님 앞에서 죄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속건제물이십니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취한 것도 용서하시기 위해 피 흘리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범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죄가 없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알지 못하고 범한 것도 분명히 죄이고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죄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로 속건제를 규정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죄 뿐만 아니라 미쳐 깨닫지도 못하는 죄도 용서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한 만족이 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알지도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죄도 예수님 때문에 용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게 되었을 때는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 건강, 물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 시간을 내어 기도하고 말씀을 읽는 것이고 주님께 일정 부분 헌신하는 것이고, 주일에 드리는 헌금과 십일조 등으로 표현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것을 우리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것을 훔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고 있다면 우리의 속건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4-5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는 제사는 자발적인 제사가 아니라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반드시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제사라고 해서 ‘속죄제’라고 부릅니다. 속죄제는 5장에서 나오는 ‘속건제’와 다른데, 속죄제는 고의나 알지 못하고 죄를 지었을 때 용서를 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다른 사람 또는 여호와께 속한 것(십일조나 제사 제물)을 알지 못한 채 취하여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를 살펴 보면 제사장이 그 제물을 받아서 기름과 내장은 태우고, 그 피를 뿌리고, 고기는 진영 밖에서 사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대상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른 제물을 요구하시고, 피를 뿌리는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죄를 지은 사람이 제사장이나 회중 전체이면 반드시 수송아지로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가장 비싸고 큰 제물입니다. 또 소의 피를 성소 안에 있는 휘장에 일곱 번 뿌리고 성소 안에 있는 향단에도 바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제단 아래에 쏟아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나머지 반면에 족장이 속죄제를 드릴 때는 숫염소를 드리고 피는 제단 뿔에 바릅니다. 또 평민의 한 사람이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암염소를 드리고 피는 제단 뿔에 바릅니다. 그리고 평민들이 제사를 드릴 때는 어린 양으로도 드릴 수 있는데, 암컷으로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죄제를 통해서 알면서도 지은 죄이든, 알지 못하고 지은 죄이든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죄를 사함 받도록 하십니다. 어떤 범죄이든 하나님께 마땅히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제사 후 고기를 제사장이 먹지만 속죄제의 고기는 진영 밖에서 불 살라 죄가 언제나 회중 안으로 들어 오지 못하도록 멀리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속죄제를 드리는 대상에 따라서 제물을 다르게 하고 피를 다른 위치에 뿌리는 것은 그만큼 제사장이나 회중 전체가 짓는 죄가 신자 개인이 짓는 죄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부르지만, 그 죄가 미치는 영향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짓는 죄는 백성이 지은 죄보다 공동체에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지성소 바로 앞 휘장에 피를 뿌려 거룩하게 하는 것은 제사장과 회중 전체의 죄가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 바로 앞까지 닿아 그 곳에 피를 뿌려 속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이나 회중 전체가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에 더 큰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고 죄를 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는 죄의 잔재가 남아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죄를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하여 씻음을 받고, 그 죄를 멀리하고, 우리를 죄로부터 지키도록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죄를 멀리하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지은 죄를 회개합시다. 또 국가의 지도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 그리고 가정의 부모들이 더욱 죄를 멀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은 자발적인 제사의 하나로 화목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화목제의 본래 뜻은 “온전하다, 끝내다”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적대감을끝내고 평화와 연합을 회복하는 것이 화목제의 목적입니다. 관계의 회복을 위한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흠 없는 수소, 암소, 암양, 숫양, 숫염소, 암염소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제물을 회막 앞에 가지고 와서 제물에 안수하고 본인이 잡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제물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두 콩팥과 간에 덮인 꺼풀과 함께 태웁니다. 이 화목제의 구체적인 의미는 7장에 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3장에서는 어떻게 화목제를 드려야 하는 지 방법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배의 방법은 중요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특별히 ‘두 콩팥’을 드리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콩팥’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의 장소가 있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콩팥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든 생각과 마음을 주님께 바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생각과 마음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순종을 상징합니다. 우리 주님의 자발적인 순종으로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된 관계를 종식 시킨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되셨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받으실 만한 제물로 아버지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려야 어버지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가지고 오시기 위해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께 감사하여 하나님과 화목 된 관계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다해 예수님이 하신 일에 감사하며 우리의 마음을 마음껏 드립시다.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 말씀 읽기로 마음껏 나아가 교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제사 가운데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인 소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곡식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곡식을 빻아 먼저 가루로 만들어 기름과 유향을 함께 제사장에게 가지고 갑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모든 유향을 제단 위에서 불로 태웁니다. 불로 태우기 때문에 ‘화제’입니다. 그리고 소제물의 남은 것은 제사장이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가지고 온 사람이 다시 취할 수 없습니다(1-3).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표현합니다. 또 가루가 아니라 화덕에 구운 것으로도 예물을 바칠 수 있었는데, 다만 누룩을 넣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다르고 가루로 드리는 소제와 방법은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냄비로 만든 것으로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소제물에 누룩과 꿀을 넣지 않고 소금을 치는 것입니다(11-13). 누룩과 꿀은 부패를 유발하기 때문에 죄와 부정을 상징합니다. 또 당시 다른 신에게 제사할 때 흔히 쓰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을 넣어야 합니다. 소금은 지속성과 부패를 방지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소금 언약은 이 언약이 변질되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곡식의 첫 수확물을 하나님께 소제로 드림으로서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했습니다.
소제는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리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그 중의 일부를 구별하여 다시 돌려 드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소금을 통해서 그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늘 신실하게 변함 없이 살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마 5:13). 세상에서 짠맛을 잃지 않고, 변함 없이 하나님의 언약 관계에서 살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세상에서 짠 맛을 잃지 않고 썩어져 가는 곳을 되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출애굽기는 모세를 통해 브살렐과 오홀리압, 그리고 백성들 성막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들고 배치하였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 위에 임하는 것으로 끝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 교제하시기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교제하기 위해서 먼저 그들의 죄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레위기는 그들의 죄를 어떻게 해결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지 말씀합니다. 백성들은 제사를 통해서, 그리고 삶을 통해서 거룩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제사들을 정하신 것들은 결국 참된 제사장과 제물이 되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그리고(혹은 그때에)”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출애굽기와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보여줍니다. 회막에 임재하신 하나님은 모세를 회막을 부르시고 어떻게 백성들이 불로 완전히 태우는 제사(번제)를 드려야 할지 말씀해 주십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동물을 제단에서 태우는 제사를 하려면 먼저 가축 중에서 가지고 와야 합니다. 들에서 잡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집에서 키우던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가지고 와야합니다(2). 그리고 그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아프지도 않고, 흠도 없는 온전한 제물이어야 합니다. 그 가축을 가지고 오면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이 그 가축의 머리에 안수를 함으로 자신의 죄를 전가 혹은 자신과 동일시 하여, 그 사람이 제물을 잡습니다(5절, 제사장이 잡는 것이 아님). 그러면 제사장들이 와서 피를 가져다 회막 문 앞에 제단 사방에 뿌리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나무를 놓습니다. 그리고 각 뜬 것의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에 전부를 불사릅니다. 양이나 염소로 번제를 드릴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를 태웁니다. 또 새의 번제의 방법도 나오는데, 산 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드립니다. 새를 제물로 드리는 것은 특별히 아주 가난 사람을 위한 것으로 비둘기는 양이나 염소에 비해 값이 싼 가축이었기 때문입니다. 새를 제물로 드릴 때에도 하나님은 그것을 소나 양으로 드린 것과 동일하게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17). 완전히 태우는 제사인 번제를 통해서 하나님은 백성들의 완전한 헌신을 요구하시고, 특별히 제단 주위에 피 흘림을 통해서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피흘림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대로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는”것입니다(히9:22). 따라서 번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완전한 헌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온전히 자신으로 드린것을 미리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게 해주시고, 죄의 댓가는 받드시 피흘림을 동반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전적이고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전적인 헌신을 이루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피도 흘리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살아갑시다. 또 죄를 미워하고,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길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고 증거궤와 상과 등잔대와 금 향단과 번제단, 물두멍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그것에 관유를 발라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만, “첫째달 초하루에”라는 새로운 정보가 추가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만 2년이 되는 첫 날입니다(17절).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인 시간과 각 기구들의 위치를 다시 말씀해 주시면서, 그것들을 만들 때 뿐만 아니라 배치하고 사용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도록 요구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데리고 회막 문으로 가서 물로 씻기고 그들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고 합니다. 기름을 바름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기름을 부음을 받아 거룩하게 대제사장과 제사장으로 구별되어 평생을 섬겨야 합니다. 백성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다 행한 것 같이, 모세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정확하게 행합니다(16).
이어지는 단락에서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확하게 성막을 세우고, 기구들을 배치하고,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어 세우고, 기구들에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했는지 보여줍니다(16-33). 이렇게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행하였을 때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구름과 영광이 너무 충만하고 압도적이어서 모세조차도 회막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하나님께서 성막이 완성되기를 간절히 기다리셨다가, 완성이 되자마자 그 위에 내려오신 듯한 느낌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오홀리압과 브살렐과 모세가 당신의 말씀대로 하나하나 해나갈 때, 그것을 보시면서 완성을 기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목이 곧은 백성과 함께 광야의 여정을 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것을 성막이 완성될 때 실행하셨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구름 가운데 있는 불로서 성막에 임재하심을 보여주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성령을 보내셔서 아예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함께 하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순종과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구별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도 그 말씀대로 섬기기 원하십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구별되게 예배합시다.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순종과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은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앞에서 성막과 기구들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만들어 졌습니다(출28장).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었더라”라는 말이 1, 5, 7, 21, 26, 27, 31절에 반복되면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그대로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다른 돕는 사람들이 행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절에서 31절까지 거룩한 옷을 만드는 것에 대한 말씀에서 강조되는 것은 이 옷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된 것이고 그것을 모세가 받아 전했을 때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실현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성막과, 제사 기구들, 그리고 제사장의 옷이 완성되었습니다. 32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브살렐이 감독하고 오홀리압이 그의 조수로 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장막과 그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릴제사의 기구와, 제사장의 옷을 만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에서 드리는 예배의 도구들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고안해 낸 것이며, 그들에게 그 고안하신 것을 할 수 있도록 제공하시고, 지혜와 영을 부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모세가 그것을 모두 검토해 보았을 때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축복합니다. 이제 예배를 위한 준비가 끝났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예배와 그 준비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람의 고안이 아니라주님의 명령에 따라 예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드리는 예배를 준비할 때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가 진행될 때마음과 생각이 예배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일상의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약속한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는지 확인하고 축복을 준 것 같이 우리 주님도 심판의 날에우리의 삶의 열매를 보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지 확인하시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일상의 예배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무엇보다 주일 예배를 잘 준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충만하게 누리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아멘.
이제 브살렐은 번제단을 만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출애굽기27장 1-8절의 말씀 이외의 정보는 없습니다. 역시 말씀 그대로 한 것입니다(1-7). 하지만 이어지는 물두멍을 만든 이야기는 비교적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으면서, 놋의 출처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합니다(8). 그 놋을 회막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인들이 자신의 외모를 위해서 사용하던 것을 하나님의 제사의 도구에 사용하도록 기꺼이 내어놓은 것입니다. 이 여인들인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출애굽기 저자가 이것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여인들의 특별한 헌신으로 물두멍이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성막의 뜰을 만드는 이야기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것 외에 다른 정보는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만들었습니다(9-20).
이제 모세는 증거막을 위해서 레위 사람이 쓴 재료의 항목을 아론의 아들 이다말이 계산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여호와의 성막을 만드는데 들어간모든 물품의 항목을 기록하고, 특히 은이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씩 남자를 대속하기 위해서 드려진 것임을 기록합니다. 또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도 정확히 기록합니다. 금, 은, 놋의 사용처를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예물의 양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그것이 하나도 다른 곳에 쓰이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또 실제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에서 멀어질 수록 값이 싼 금속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21-31).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이 얼마나 컸고, 그 헌신의 결과로 하나님의 성막이 지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바친 예물의 값어치만 생각해서는 안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을 자체를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성인 남자들이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드림으로 충분한 성막을 지을 수 있는 많은 은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또 여인들의 놋을 통해서 물두멍이 완성될 수 있음을 봅니다. 교회의 일은 몇몇 사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크고 작은 헌신으로 세워집니다. 교회를 세우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시고, 그들의 물질과 헌신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물질을 사용하는 것과 관리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해야 함을 보게 됩니다.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나와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브살렐은 언약궤를 만듭니다. 성막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규격에 정확하게 맞게 만듭니다(출25: 10-14). 언약궤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 판을 담아 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소의 기구들을 모두 조각목을 기본으로 금을 씌우라고 하신 것은, 조각목은 아카시아나무로 광야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가볍고 견고하며 잘 썩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브살렐은 조각목으로 성소에 둘 떡 상을 만듭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게 만듭니다(출25:23-29). 정말로 지혜롭고 여호와의 영이 충만한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멋진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지키는 사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브살렐은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듭니다. 등잔대에 살구꽃 형상을 넣은 것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살구꽃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깨어 있음’을 뜻하는 말과 유사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항상 깨어 이스라엘을 바라보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브살렐은 조각목으로 분향할 제단, 곧 분향단을 만들었는데, 역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만들었습니다(출30:1-5). 또 자세하게 소개 되진 않았지만, 거룩한 관유와 향품도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브살렐은 자신의 일을 충실하게 해 나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고, 지혜로, 그리고 그가 가진 기술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을 만들면서 브살렐은 그 의미를 하나하나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의미를 넘어, 완성은 보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성물들이 가리키는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거하시는 예수님을 알고(요1:14), 등잔대 사이를 거니시며 세상의 참된 빛이신 예수님을 알고(계 1:13), 우리를 항상 지켜 보시는 예수님을 압니다(행7:56). 또 우리는 주님께서 차려 주시는 참된 생명의 떡 상을 성찬을 통해 봅니다. 나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셔서 그분의 피로 우리로 하나님께서 계신 지성소로 나아가도록 하신 예수님을 압니다(눅23:45, 히7: 25). 그래서 우리는 이 성막과 제사 기구의 의미와 그것을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이루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묵상하며 감사하는 하루가 됩시다. 그분은 오늘도 휘장을 지나 하나님께로 저와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등불같이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브살렐과 오홀리압, 그리고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지혜와 생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 지혜와 총명을 사용하여 명령하신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1). 모세는 이제 백성들의 재료를 다 전해 줍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계속 가지고 왔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짓고도 남을 더 많은 재료가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그것을 알렸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제 그만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2-7). 우리가 생각하기에 많이 가지고 오면 가지고 온 만큼 그것을 가지고 더 크고 더 좋게 만들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마음에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짓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남은 재료가 돌려보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는 데서 멈출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제 마음에 지혜로운 자들이 출애굽기 26장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성막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8절에서 38절까지를 26장과 비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설계대로 정확하게 일치하게 만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6장과 비교할 때 몇몇 사소한 생략은 있지만 단어가 거의 일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그대로 정확하게 브살렐이 감독자로 감독하고 있고 그것을 따라서 지혜로운 자들이 행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은 반복해서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지혜로운 자들이 하나님의 성막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정확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정성이나 열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나타나납니다. 때로 우리의 열심이 지나쳐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좋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성과 열정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면 옳은 열심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정과 정성이 말씀에 근거하는지 살펴봅시다. 예배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임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는 중에 금송아지 사건으로 멀어졌던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회복된 후에 모세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성막과 여러 제사 기구들을 만듭니다. 그전에 먼저 안식일을 지키면서 일하라 말씀이 나옵니다(참고. 31:12-18). 이전에 “여호와의 안식”이라고 하면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강조했다면, 이스라엘 백성 편에서 ‘너희를 위한’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거룩한 쉼을 통해서 일에 너무 치이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성막과 기구들과 또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재료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억지로가 아니라 마음에 원하는 자들이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이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가 만들어 지기 위함 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고후 9:7). 또 백성들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들은 와서 회막과 기구들과 제사장 옷을 만드는데 함께 하도록 합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 중 마음에 감동이 된 사람들, 곧 기쁜 마음과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사람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옵니다. 남녀가 모두 자신의 팔찌와 귀고리 등 장식품을 빼어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전에는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과 제사에 필요한 도구들을 만드는데 사용됩니다. 이전에는 그릇되게 사용되던 물질들이 이제 바르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슬기로운 여인들’은 실을 빼고 가는 베실을 만들며, 염소 털로 실을 뽑아 함께 했습니다. 또 족장들은 같은 보석을 가지고 오고 등불과 향을 만드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가지고 왔습니다(28). 모두가 각자가 가진 분량과 은사대로 여호와께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원하여 예물을 드렸습니다. 이제 성막과 제사 기구들과 제사장 의복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브살렐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조수 오홀리압, 그리고 백성들의 수고로 만들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여 여러가지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홀리압은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들이 체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게 하셔서 그들이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고안하게 할 것입니다(30-35).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마다 각자의 은사와 분량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일로 각자 성막을 짓는 일에 조금씩 기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에 많은 이들이 자발적인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길 원하십니다. 바울은 다른 교회를 돕는 일에 고린도 교회에게 각각 마음에 정한대로 헌금을 하되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일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 곧 바른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 봉사는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자는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하시고 따로 책임을 맡긴 것 같이 이 일에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일은 직분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분자들의 가르침 아래 모든 성도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감당하며 해 나가야 합니다. 자원하는 마음과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예배를 중심으로 주어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겸비하는 모습과 모세의 중보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언약을 다시 세우시기 위해서 모세를 부르시며 돌판 둘을 다시 처음과 같이 다듬어 만들어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대신에 아무도 모세와 함께 산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모세는 두 돌 판을 만들어 다시 하나님의 산, 시내 산에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셔서 모세와 함께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그 이름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시라고 알려주십니다. 여기서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심을 모세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용서하실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제사의 제물을 통해서 그들을 새롭게 하고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1-9).
하나님은 계속해서 언약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 말씀해 주십니다. 그들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어서도 안되고, 그 신을 섬겨서도 안되고, 그들과 결혼을 해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그 땅의 우상들을 모두 찍어서 버려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기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결혼한 남편이신부에게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듯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언약의 남편으로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도록 합니다. 또 그들은 무교절(유월절)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애굽에 인도하여 낸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예배입니다. 또 첫 생명은 다 주님의 것이기에 대속을 해야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6일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은 안식일로 지켜야 합니다. 칠칠절(첫 열매를 거두는 시기), 수장절(곡식을 저장하는 절기)을 통해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반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기록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다시 언약을 맺었음을 확증하고 처음과 동일하게 사십일 주야를 산에서 보냈습니다(18-28).
이렇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다시 갱신하셨을 때, 모세의 얼굴에는 빛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에게 감히 가까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다시 그들을 불러 모아 여호와 하나님께서 산 위에서 하신 말씀을 다 전했습니다(29-35).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깨어진 언약을 다시 세우시며, 출애굽기19-23장까지 말씀한 ‘언약의 책’의 내용을 간추려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대해서 길게 말씀 하시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과 말씀하신 대로 섬길 것을 강조하십니다. 언약 갱신의 핵심은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민족과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했습니다. 율법을 백성에게 전해 준 중보자로서 모세에게 주어진 직분의 영광스러움을 보여줍니다. 백성을 위해서 그 영광을 감춘 것은 모세의 겸손함을 보여줍니다. 이 직분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셨고, 예수님은 모세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을 비춥니다. 예수님은 그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교회에 직분자를 세우셨습니다(고후3:3:13-18, 엡4:10-11). 직분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기 위해서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고, 모든 성도는 세상의 직분자입니다. 모든 성도는 예배를 통해서 언약을 갱신하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예배한 후,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통해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 많은 죄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를 통해서 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에게 영광의 빛을 예배를 통해서 비추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셔서 우리의 죄와 부족함에도 다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또 매 주일 삼위 하나님을 예배할 때 예수님 안에서 깨어진 언약이 새롭게 갱신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 때 하나님의 참된 은혜와 자비와 영광을 경험하시고, 그분의 영광을 반사하는 삶을 일상에서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앞에서 말한 징벌을 내리십니다(32:34-35).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은 것도 징벌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행한 은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들은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백성들은 그들을 단장하지 않음으로 스스로 낮추고 슬퍼합니다(4). 하나님은 그들에게 장신구를 모두 떼어내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심으로 다시 한번 긍휼을 베푸실 준비를 하십니다. 모세는 이제 회막을 이스라엘 진 밖에 치고 하나님을 만나며 계속해서 백성을 위해서 중보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을 찾고 만나고자 하는 자들은 진 바깥 회막으로 나가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 갈 때까지 바라보았습니다(8). 백성들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 기둥이 회막에 내려 회막 문에 섰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백성들을 위해서 모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보면서 백성들은 예배했습니다. 여기서 예배했다는 말은 엎드려 경배했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친밀하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수아는 회막에 남아 회막에 사람들이 함부로 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11).
이어지는 단락에서 모세는 더 깊이 중보자로서 역할을 수행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의 앞서 보내겠다고 약속하는 자를 알려주지 않으셨다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해 주시라는 간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4절에서 “내가 친히 함께 가리라”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면 백성들을 그 땅으로 보내지 마시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삶을 아무리 좋은 땅에서 살아도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15). 주님이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근거였습니다(16).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를들으시고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다시 한번 모세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름으로도 그를 ‘안다’라고 표현하십니다. ‘안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관계적으로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자신에게 보여달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를 바위 틈에 숨기시고 당신의 영광, 곧 하나님의 모든 선한 것, 은혜롭고 거룩한 성품으로 채워진 영광을 지나게 하심으로 모세에게 영광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아니라 본성을 둘러 싸고 있는 영광의 광채를 보여 주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증하신 것입니다(17-23).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백성의 삶은 아무리 좋은 곳에서 산다고 해도 무의미 합니다. 주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마1:23). 또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히1:3). 모세의 중보로 순전히 은혜로 그럴 자격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임재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예수님의 중보로 순전히 은혜로 그럴 자격이 없는 교회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모세에게 하신 약속보다 더 강력하게 성령으로 아예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오늘도 순전히 은혜와 긍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 복된 삶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삶에 감사하며 즐거움이 넘치기 바랍니다. 아멘.
모세가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두 돌 판을 받았을 때, 산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아론에게 찾아와 그들을 위하여 그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내라고 합니다. 모세가 40일동안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백성들을 판단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리더였지만, 그도 역시 백성들의 요청에 금을 모아 금 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다음 날을 절기로 정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1-6).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모세에게 속히 내려가라고 하시며 백성들이 부패하여 그들에게 명령한 길에서 속히 떠났다고 하십니다. 얼마 전에 하나님의 법대로 살겠다고 맹세하여 언약을 체결했던 백성들은 모세가 언약의 돌 판을 받으러 간 사이에 그 언약을 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2계명(하나님의 형상을 만듦)과 3계명(망령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과 4계명(절기에는 항상 안식일이 시작하는데, 절기를 마음대로 정함)을 동시에 어긴 것입니다. 어떤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은 이방신들을 섬기는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섬김을 받으심으로 이방신과 구별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방신과 같이 그들의 하나님을 취급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려고 하지만 모세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당신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켜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십니다(9-13).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두 증거판을 두 손에 가지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진 가까이에 가서 백성들이 송아지와 춤 추는 것을 보고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립니다. 이것은 단지 모세가 화가 나서 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이 깨어졌기 때문에 돌을 던져 깨뜨린 것입니다. 모세는 그들의 송아지를 불살라 부수고 가루로 만들어 그들로 마시게 합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죄를 마심으로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습니다. 그 우상은 갈아 마셔도 될 만큼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아론에게 물었지만 아론은 백성들에게 그 책임을 돌립니다. 여기서 백성의 중보자인 모세와 모세를 대언하는 아론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하지만 아론의 이러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아론을 세우십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아론은 대제사장의 일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옳지 않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중보 했음에도 그 일에 대한 징계 또한 내립니다. 모세는 진 문에서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을 불렀는데, 레위 지파가 나왔습니다. 그들에게 각자 허리에 칼을 차고 각 사람이 형제와 친구와 자기 이웃을 치라고 합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모세의 명대로 합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개인적인 관계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관계를 포기할 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레위인이 삼천명이 죽인 것에 대해서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인들은 상당한 부담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만큼금 송아지를 섬긴 이스라엘의 백성의 죄가 심각했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체(남자만 약 60만명)가 멸망할 심판에서 상당한 축소된 숫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섬기는 것에 대한 죄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치 후에 중보자 모세는 하나님께 다시 올라가 중보를 합니다. 모세는 슬퍼하며 그들을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용서하지 않으시려면 자신을 생명 책에서 지워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걸어 백성을 중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생명 책에서 지우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이라고 하시며 백성들에게 내려가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사자를 보내어 인도하시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세의 중보를 듣지 않으시고 백성을 치실 것이라고 합니다(35). 이것은 다음 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33:3).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으면서도 기쁨과 즐거움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때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레위 지파들이 행한 일처럼 괴롭고 힘든 일인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모세와 같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우리의 죄와 실수와 부족함을 채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하지 않은 것을 하거나, 명령하신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는 지 생각해 보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어 우리의 신앙생활을 바로 잡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금까지 말씀한 것들을 만들 사람도 지명하여 세우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브살렐입니다(1-2).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이해력과 통찰력)과 지식(신학적 지식)과 여러가지 재주(실제로 만들 수 있는 능력)를 주셔서 정교한 일을 연구(구체적인 것들은 연구함)하여 금과 은과 놋을 다듬고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3-5). 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보조자 오홀리압(하나님의 장막)이라는 사람을 세워주시고 또 여러 지혜로운 자들과 함께 회막과 증거궤와 속죄소, 회막의 모든 기구, 상과 기구와 순금 등잔대와 모든 기구 그리고 분향단, 번제단, 물두멍, 그 받침,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옷을 만들고 관유와 성소의 향을 모세가 명령 받은 대로 만들도록 합니다(6-11). 모세는 명을 받아 설계도를 들었다면 그것을 실제로 만드는 것은 브살렐을 중심으로 오홀리압, 그리고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따라서 각자의 은사와 그 분량에 따라서 섬기게 하십니다. 누구도 홀로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교회의 직분자를 역할에 따라 두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하나하나 우리를 기계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원리를 기초로 지혜와 통찰력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따라서 교회의 일에는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앞에서 말한 성막과 제사 도구들은 1차적으로 안식일(예배의 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안식일’이라고 부르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과 맺은 언약을 기억해야 합니다.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문자적으로 완전히 쉬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에 쉬는 것은 이스라엘의 삶이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유의미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에 쉼으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실제적인 삶의 패턴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을 어기는 것은 언약을 깨는 것이고 죽음이 그 벌이 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안식일에 쉬면서 백성과 교제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하여 그 교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안식일은 주일로 지킵니다. 주일은 안식일과 동일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새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입니다. 그 중심에 언약을 다시 확인하고 갱신하는 주일 공예배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친히 임명하시는 것을 봅니다. 교회의 직분자는 하나님이 부르셔서 세우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지혜와 통찰력과 각자의 은사가 필요함을 배웁니다. 또한 정교한 일, 모든 상세한 일들과 구체적인 실천에 있어서는 고민하고 연구하여 행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봅니다. 교회의 직분자와 성도들은 교회를 이러한 원리로 세워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지혜와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도들의 각자의 은사가 잘 발휘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직분자들이 늘 성령 충만하여 지혜로운 자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에 정하신 방식으로 하나님과 예배가운데 교제하는 것임을 봅니다. 참된 ‘쉼’은 하나님과 교제에서 옵니다. 매 주일 예배가 참된 쉼이 되도록 사모하며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멘.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향할 단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그것을 금으로 싸라고 하십니다. 분향단은 넓이와 길이 한 규빛(약50cm)으로 정사각형 모양으로 높이는 1미터 정도 됩니다. 언약궤와 같이 양 쪽에 금 고리 둘을 만들고 제단을 메는 채를 꿰어 이동할 수 있도록 합니다. 제단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커튼 바로 앞에 두고 아론이 아침과 저녁에 등불을 켤 때 함께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살라 등불이 꺼지지 않듯이 향도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향단 위에 다른 향을 살라서도 안되고 성막 안뜰에 있는 제단처럼 제물을 태워도 안됩니다. 향단은 오로지 향을 사르기 위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향단을 속죄하여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1-10).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숫자를 조사할 때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그 생명의 속전을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속전’이라는 말은 ‘가리다’, ‘대신 사다’라는 뜻으로 죄를 가려주시고 그들을 대신 사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자라고 더 하지도 말고, 가난하다고 덜하지도 말고 모두가 반세겔을 내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성소(성막)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감당했습니다. 그 비용이 크지 않았지만 내지 않을 때는 엄청난 징계가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구원에 감사하며 성막을 유지하는데 한 마음으로 기여를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11-16).
이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물두멍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물두멍은 성전 안뜰에 놋으로 된 큰 대야입니다. 이것은 회막과 제단 사이에 위치하면서 아론과 그아들들이 손과 발을 씻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주어진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필요한 준비를 적절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볼 수 있습니다(17-21).
또 하나님은 모세에게 향단에서 살라야 할 관유와 향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관유를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관유를 만들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관유는 거룩하기 때문에 함부로 사람이 사용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지정한 용도 외에 사용하기 위해서 이것을 만들어서도 안됩니다. 이것을 함부로 만드는 사람은 백성중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이어서 향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만들고, 소금을 쳐서 거룩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그 향 얼마를 갈아서 회막 안 증거궤 앞, 곧 향단에 두어야 합니다. 매일 향단에서 그것을 살라 향기로운 냄새가 늘 성막에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이 향단의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고 계시록에서 말합니다(계5:8).
향단과 물두멍, 관유, 향품은 모두 제사에 필요하고 또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 위해서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거룩하게 섬김 받길 원하십니다. 거룩하게 섬김을 받기 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구별되는 방법으로 섬김을 받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향단의 향이 지속적으로 피어나는 것은 성도들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면서 말씀대로 행하는 것과 기도가 항상 함께 가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딤전4:5). 오늘 하루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말씀과 기도로 나아가며 날마다 거룩한 자들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이제 산에서 내려가면 제사는 모세가 아니라 그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임식을 통해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린 수소와 흠 없는 숫양 둘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떡과 기름을 섞은 무교과자와 무교 전병을 모두 고운 가루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것들을 한 광주리 담아 송아지와 양들과 함께 제단으로 가서 아론과 그 아들들을 물로 씻기고, 아론에게 대제사장을 위해서 지은 옷을, 아들들에게는 제사장을 위해 지은 옷을 입히고 관을 씌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송아지를 회막(성막) 앞으로 끌고 와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송아지에게 안수합니다. 안수를 통해서 아론과 그 아들들의 그들의 송아지에게 죄가 전가됩니다. 모세는 그 수송아지를 회막 앞에서 잡아 그 피를손가락으로 찍어 제단 네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제단 밑에 쏟고 내장에 덮인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사르고 나머지 고기와 가죽과 똥은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있는 밖에 버리라고 합니다. 이 제사는 아론과 그 아들들의 죄를 용서 받는 속죄 제사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으로 섬기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거룩해 져야 했습니다(1-14).
다음으로 양을 가져다 완전히 태우는 제사인 번제로 드립니다. 번제는 그들의 완전하고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완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해야 합니다. 또 그 숫양의 피를 가져다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발가락에 바르고, 제단 주위에 뿌립니다. 또 제단 위의 피와 관유를 가지고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림으로 그들과 그들의 옷이 거룩하게 됩니다. 그 양의 나머지는 제사를 드린 모세의 몫이 됩니다(14-27).
또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바구니에서 떡 하나와 기름 바른 무교병과 무교 전병을 주어 흔들어 드리는 제사(요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모세는 아론의 위임식의 숫양의 가슴을 흔들어 요제로 드리고, 가슴과 넓적다리를 구별하여 가집니다. 이렇게 앞으로 제사장들의 몫이 어떤 것이 될지 몸소 보여줍니다(28). 아론이 죽은 후에는 아론의 자손들 중에 위임되어 대제사장 직분은 지속될 것입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자신들이 받은 분깃을 삶아 떡과 함께 성막 앞, 곧 하나님 앞에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 음식은 거룩하기 때문에 아무나 먹을 수 없고, 먹고 남은 것을 불살라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모세는 위임식을 일주일 동안 거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수송아지로 속죄제를 드리며 제단에 기름을 부어 항상 제단이 거룩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제단을 거룩하게 하면, 거룩한 제단이 되어 그것에 닿는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이 제단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매일 양 두 마리를 아침 저녁으로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매일 드리는 '상번제'입니다. 그냥 양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곡식을 함께 드림으로(소제), 기름을 부어 드리는 제사(전제)를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항상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백성들을 만나고 모세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거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마다 백성들은 자신의 대신해 죽은 동물을 통해서 죄의 심각성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룩한 분이시며, 거룩한 분이 그들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 인도해 낸 줄 알게 될 것입니다(44-46).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과 제사장들의 옷과 여러가지 제사법을 알려주신 이유는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과 교제하기 위함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통해서 그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오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방편도 친히 알려주십니다. 제사장들도 먼저 자신의 죄를 위해서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 자체로서 얼마나 제사장들도 불완전했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참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드리시고 완전한 번제와 화목제물로서 전적으로 헌신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가져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주님과 깊은 교제를누립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신 것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함입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셔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루가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제사장이 입어야 할 옷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제사장의 옷은 아무나, 아무렇 게나 지어서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이 정한 양식대로 옷을 짓고 오직 아론과 그 아들들만 입어야 했습니다. 아론을 위한 옷은 흉패, 에봇,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입니다. 옷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할 실은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입니다(1-5). 이것들로 먼저 정교하게 에봇을 짜서 입어야 합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옷 중의 하나로 어깨 끈과 허리띠로 메는 앞치마처럼 생겼습니다. 호마노는 붉은 빛을 내는 수정돌입니다. 그 호마노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이름을 새겨 넣고, 금테를 두른 후 에봇의 양 어깨 끈에 하나씩 붙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대표하여 양 어깨에 메고 제사를 드린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6-12).
그리고 판결 흉패를 만들어야 하는데, 판결 흉패는 에봇에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정사각형 모양입니다. 그곳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각 줄 마다 다른 보석을물립니다.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고,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입니다.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 넷째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다 금테에 물립니다. 그리고 각 돌에 한 지파의 이름을 새겨 넣습니다. 이 판결 흉패에 금 사슬과 고리를 만들고 청색 끈을 이용하여 에봇과 떨어지지 않게 연결합니다. 제사장은 가슴에 이스라엘 지파를 품고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 이름들이 하나님께 영원히 기억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흉패와 에봇 사이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돌을 넣어 둡니다.
에봇 받침 겉옷은 전부 청색으로 두 어깨 사이에 구멍을 내어 입되 갑옷 깃 같이 깃을 짜서 찌어지지 않게 합니다. 그 옷 끝에는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를 수놓고 금 방울을 간격을 두어 번갈아 가면서 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움직일 때 마다 소리를 내어 성막으로 들어갈 때 죽지 않도록 합니다. 이제 순금으로 패를 만드는데, 이것은 관위에 붙이는 패입니다. 그 패에 ‘여호와께 성결(거룩)’이라고 새기고 제사장이 쓰는 머리관 앞에 이것을 늘 붙이고 있으면서 제사장은 이스라엘 자손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먼저 성결해야 함을 늘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제물을 받으신다고 합니다(36-38).
아론의 아들들을 위한 옷은 속옷과 띠와 관입니다. 이것으로 그들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합니다. 직분의 영광스러움을 보여줍니다. 아론이 대제사장의 옷을 입었다면, 아들들은 제사장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또 대제사장과 제사장은 속 바지를 입어 그 하체를 가려야 했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대제사장과 제사장으로서 이 옷을 입고 섬겨야만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않게 될 것입니다(43).
제사장들의 옷은 그냥 옷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에게 아름다움과 영광을 주며, 그 옷을 통해서 자신의 직무가 무엇인지,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하는지, 누구 앞에서서 일을 감당하게 하는지 알게 해 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 옷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은 이 옷을 통해서 백성을 위해서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짊어지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위한 옷으로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참된 제사장의 옷인 그리스도로 옷 입은 제사장들입니다(갈3:17). 제사장들처럼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입니다. 이 옷의 영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고, 날마다 거룩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이어 모세에게 제단을 만들 설계도를 말씀해 주십니다. 제단은 조각목으로 네모 반듯하게 1.5미터 정도 높이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네 모퉁이에 뿔을 만들고 제단을 놋으로 쌉니다. 또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 불을 옮기는 그릇도 함께 놋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놋으로 그물을 만들어 제단 네 모퉁이에 놋 고리를 만들고 그것을 제단 뿔에 걸도록 합니다. 그래서 그 위에 불로 태우고 남은 제물의 고기와 재들이 떨어지도록 합니다(1-8). 또 제단을 위해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둘러 쌉니다. 역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 주신대로 기술자를 통해 만들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성막 뜰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제단은 성막 안이 아니라 바깥, 곧 이 성막의 뜰에 놓일 것입니다. 성막 뜰은 남쪽, 북쪽이 백 규빗(약40미터), 서쪽, 동쪽이 오십 규빗(약20미터) 정도 되는 직사형으로 만듭니다. 문은 동쪽으로 나 있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둥을 세우고 아래에 놋으로 받침을 하고 기둥의 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만듭니다. 뜰 문을 위해서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놓아 약 8미터 정도의 커튼을 둡니다. 그리고 그 기둥과 스무개와 그 받침을 놋을 만듭니다. 뜰 주위 모든 기둥의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으로 만들고, 받침은 놋으로 만듭니다. 세마포 커튼의 높이는 2미터정도 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 쓰는 모든 기구와 그 말뚝과 틀의 포장 말뚝을 다 놋으로 만들도록 하고 또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으로 등불을 밝혀 아론과 그 후손들이 항상 여호와의 등불을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게 합니다(9-21).
제단은 성막 뜰에서 유대인들이 제사장을 통해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드리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단을 만들라고 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야 함을 보여줍니다. 성막의 뜰 안에서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은 자신을 위해 제물을 잡고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제물을받아 제단에 올려 제사를 드립니다. 성막 뜰은 제물이 항상 잡히는 장소이고, 그곳에 있는 제단은 항상 죄인을 대신해서 죄를 짊어진 동물이 태워지는 곳입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고,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히9:22). 이는 우리 죄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죄를 짊어지시고 제물로 십자가 제단에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그분 앞에 나아오도록 하십니다. 항상 성막 안에 등불이 꺼지지 않듯 우리를 늘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하십니다. 매일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항상 등불과 같이 우리를 비추시고 계신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빛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비추실 때 회개합시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살 길을 여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의 설계도를 말씀하십니다. 먼저 휘장(커튼) 열 폭을 만들되 그 휘장에 하나님의 근위대와 같은 천사 케루빕(그룹)을 가늘게 꼰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를 놓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길이와 넓이로 휘장에 고(loop)를 만들고, 금 갈고리로 그 고를 연결해 한 텐트가 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막을 덮는 휘장을 염소 털로 열 한 개를 만들고 다섯 폭을 연결하고 여섯 번 째 폭 절반은 성막 전면에 접어서 안으로 들이라고 합니다. 안에 있는 성막과 마찬가지로 하나로 연결을 합니다. 그러면 성막은 두겹 텐트가 됩니다. 안 텐트는 스물 여덟 규빗, 바깥 텐트는 서른 규빗으로 밖의 막이 안을 완전히 덮습니다. 그리고 밖 텐트는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어 완전히 빛이 차단되고 비도 새지 않을 것입니다(1-14).
이제 조각목(아카시아 나무)로 이 천막을 세울 널판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널판들이 서로 연결 될 수 있도록 촉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널판 밑에 은 받침도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널판을 땅에 고정하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북쪽과 남쪽은 널판 스무개, 성막 뒤편인 서쪽은 널판 여섯 개를 세우고 두개는 양 끝에 두 겹으로 세웁니다. 직사각형 형태를 갖춥니다. 동쪽이 입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성막 뒤쪽에 있는 여덟 개에 은 받힘을 열여섯을 놓습니다. 그리고 조각목으로 나무 띠를 만들어 성막 널 판을 통과시켜 고정시킵니다. 그 띠는 금으로 씌웁니다(15-26).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섬세하고 정확하게 모세에게 알려주셔서 성막을 세우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께 받은 대로 성막을 세우기 원하셨습니다(30). 이렇게 큰텐트가 만들어진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휘장(커튼)을 만들되 그룹을 수놓아 금 갈고리를 네 기둥 위에 늘어뜨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만들어진 직사각형의 성막 안에 다는 커튼으로 그 안 쪽에 증거궤(법궤, 언약궤)과 그 뚜껑 역할을 하는 속죄소를 놓습니다. 성막 안의 공간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법궤가 있는 안쪽을 지성소(지극히 거룩한 장소), 바깥 쪽을 성소(거룩한 장소)로 부릅니다. 그리고 휘장 바깥쪽, 곧 성소의 북쪽에 상을 놓고 남쪽에 등잔대를 놓아 서로 마주 보도록 합니다. 또 휘장을 수놓아 성막 문(커튼)을 만들고 그것을 세우기 위해서 기둥 다섯을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고 금을 싸고 갈고리도 금으로 만들어 놋으로 다섯개의 받침을 만듭니다(31-38). 이로써 성막의 설계도는 완성되었습니다.
성막의 설계를 보면 하나님께서 마치 왕의 접대실을 설계하신 것 같습니다. 지성소 안에 있는 하나님은 왕으로서 보좌인 언약궤에 앉아 계시고, 그 주변으로 그룹들이 경호대 같이 있습니다. 그룹들은 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가장 가까이서 하나님을 모시는 천사들입니다. 그 밖은 밝은 빛이 있고, 향에서 피워지는 향이 왕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 옆에 상은 왕과 손님이 누릴 음식처럼 보입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커튼이 쳐 있어서 두 장소가 확실히 구별 되었습니다. 지성소에는 아무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이스라엘 백성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이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나누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길을 내셔서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는 길을 내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담대하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성막을 짓게 하심으로 당신께서 친히 함께 하십니다.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은 세세하게 어떻게 성막을 지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양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세심하게 살피시고 인도하신다는 것과 동시에 그들 가운데 계시지만 거룩한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세심하게 우리를 살피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으로, 예수님을 덕분에 그분의 영광과 거룩함과 위엄 가운데 나아 갈 수 있게 되었음을 잊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높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께 날마다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실 성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모든 재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애굽에서 가지고 온 예물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금, 은, 놋, 청색, 자색, 홍색 실과 염소 털, 숫양의 가죽, 해달의 가죽, 조각목, 등유, 향품, 호마노와 보석 등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소와 거룩한 텐트(성막)를 만드는 데 사용 될 것입니다. 그 장소와 그 안에 놓은 기구들을 모세 마음대로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지어야 합니다(1-9).
증거궤는 율법을 기록한 돌 판을 보관할 상자인데, 먼저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서리에 각각 긴 작대기를 꽂아 운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성막에 둘 때는 그 작대기를 꽂아 둔 채로 두어야 합니다. 그 상자를 덮는 뚜껑도 만들어야 하는데, 바로 속죄소입니다. 속죄소는 다른 말로 ‘시은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이 법궤 뚜껑도 금으로 만들되 쳐서 그 양 끝에 그룹(천사의 종류 중 하나) 둘을 쳐서 한 덩이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룹의 모양도 날개를 펴서 날개로 속죄소를 덮고 그 얼굴이 속죄소를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모세와 만나고 두 그룹 사이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모든 일을 알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10-22). 또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어 성소에 두어야 하는데, 그것 또한 순금으로 둘러 싸고, 금 테를 둘러야 합니다. 그 상을 위해서도 금 고리 넷을 만들어 운반하기 위해서 금으로 싼 막대기를 꽂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위에 항상 진설병(하나님 얼굴 앞에 두는 떡이라는 뜻으로 삶의 축복에 대한 감사를 상징함)을 두어야 합니다. 또 등잔대를 만들어 성소에두어야 하는데, 금으로 쳐서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지성소를 밝혀 주기 위한 빛으로써 항상 켜 두어야 하는 등불을 놓는 것입니다. 등잔대에는 총 일곱개의 가지가 나와서 일곱 등잔을 둘 수 있었습니다. 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한 불 집게와 불 똥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기구를 순금 한 달란드(약40kg) 가지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양식대로 만들어야 합니다(23-4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성막과 그 안에 놓을 기구들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다는 가시적인 표였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가운데 함께 동고동락하며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규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정하신 방법으로 만나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교제할 장소로서 텐트를 만드셨습니다. 그 안에 있는 시은좌에서 모세를 만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이었습니다. 등대는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항상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진설병을 두는 상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먹이실 것을 상징했습니다.
이 성막과 성막 안의 성물들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텐트를 치다)’ 우리가 그의 영광 곧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합니다(요1:14). 예수님은 참된 성막,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살아 있는 성막으로서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성막 안에 있는 시은좌에서 모세를 만나 주시듯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지금도 우리를 만나 주시고, 늘 함께 행하십니다. 더 이상 손으로 지은 장막이 아니라 참된 장막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참된 등대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서 어둠 속에서 우리를 인도 하시고, 참된 양식으로서 오늘도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실 뿐만 아니라 영생하는 양식인 당신의 몸과 피를 주셔서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로 위로를 얻고 힘을 내어 살아갑시다. 또 하나님과 교제함이 최고의 기쁨이 되는 하루 되도록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0장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시내산에서 부르시고, 당신의 소유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백성들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로 칠십 인과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를 함께 산으로 올라 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모세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도록 하십니다(1-2). 백성들의 대표로서 장로와 앞으로 주어질제사에 대한 규례를 행할 제사장들을 오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을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그 말씀을 다지키겠다고 응답하였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산 아래에서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전체를 상징하는 열 두 기둥을 세워 그곳에서 소(가장 비싸고 귀한 제물)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뒤 소의 피를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백성들에게 기록한 언약서를 읽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다 지키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모세는 여러 양푼에 담은 피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뿌립니다. 그러면서 이 피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에 대하여 그들과 세운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4-8).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제 공식적으로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이 언약을 어기는 자는 피를 흘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며 왜 자신의 피를 새언약의 피라고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하나님과 새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열 두 제자들과 언약을 체결하시고, 언약을 보증하시고, 튼튼하게 세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피로 체결한 다음에 그들을 대표하는 칠십 장로와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 먹고 마시고 함께 잔치를 했습니다(9-11). 하나님과 친히 교제하셨던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산으로 올라 오도록 하시고 백성들을 가르칠 율법과 계명을 기록한 돌 판을 주시려고 합니다. 이에 모세는 여호수아와 함께 산으로 올라 갔고 장로들에게 명하여 무슨 일이 생기면 아론과 훌에게 나아가라고 합니다. 모세는여호수아와 함께 산으로 올라 갔고, 사십일 동안 모세는 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며 율법과 계명을 받았습니다(12-18).
언약을 체결하고 언약식을 거행한 후에 모세와 아론의 두 아들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 70인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만났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신 것은 우리가 주일에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며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교제(사귐)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를 더 높은 곳에 불러서 본격적으로 언약을 이행하시며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과 교제하기 위한 규칙과 거하실 집, 곧 성막에 관한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종으로 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먹고 마시며 교제하기 위함 입니다. 이것이 당시 가나안 땅의 신과 다른 점입니다. 가나안 땅의 신들은 인간들을 부리기 위해서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교제하기 위해서 만드셨고, 이스라엘과 그 교제를 회복하며 온 인류와 교제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교회)과 맺으시고 교제하시기 원하십니다. 예배는 이 교제의 현장이며 우리가 평소에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이 교제를 일상으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우리 삶속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다시 회복하고 더 깊은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주님과 늘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나아가 이 교제를 다른 이에게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멘.
십계명의 바른 실천으로서 1절-9절은 사회 정의와 복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가짜 뉴스를 퍼뜨리지 말고, 위증하지 말고, 가난하다고 혹은 부자라고 판단을 기울게 하는 것, 이방인 차별, 뇌물을 받아 진실을 왜곡하는 등은 9계명의 실천입니다(1-3,6-9). 뿐만 아니라 원수의 길 잃은 짐승을 그냥 두지 말고 반드시 찾아 주며, 원수의 나귀가 짐을 지고 가다가 넘어지면 그냥 지나가지 말고 일으켜 세워주라고 합니다(4-5). 이는 모두 이웃의 명예를 지켜주는 일에 속합니다.
이어서 각종 절기들에 관한 규정이 나옵니다(10-19). 우선 안식년이 나옵니다. 6년 동안 땅에 씨를 뿌리고 소산을 거두어도 되지만 일곱째 해에는 땅이 쉴 수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수확물을 먹도록 해야 하며, 남은 것들도 들짐승이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안식년에땅을 묵혀 둠으로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을 억제하며 동시에 땅의 생산력을 회복시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곱째 해에는 뭘 먹고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여섯번째 해에 세배의 소출 주셔서 먹게 하실 것입니다(레25:21).
다음으로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6일동안 일을 하되 7일째는 쉬라고 합니다.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짐승과 종들도 쉬도록 해야 합니다. 당시에 주변 나라는 짐승과 종에게 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쉼은 오로지 주인과 신에게만 허락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이방신들과는 다르게 사람들에게쉼을 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날은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을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쉼은 하나님과 교제를 의미합니다.
이어서 절기들을 지키라고 합니다. 무교절을 지킴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맥추절(첫 열매를 거두는 시기)과 수장절(곡식을 저장하는 시기)을 통해서 애굽에서 건질 뿐만 아니라 먹을 것을 주셔서 친히 먹이시고 입히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번의 큰 절기에 남자는 반드시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께 보여야 합니다. 또 이 절기를 지킬 때에는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 넣은 빵과함께 드려서는 안되고 하나님께 바친 제물을 다음 날까지 두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땅에서 처음 난 열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여호와의 전에 바침으로써 농산물의 수확을 가능케 하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또 가나안 종교에서 흔히 행해지는 새끼 염소를 어미의 젖으로 삶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19). 이것은 잔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짐승의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 합니다. 안식년, 안식일, 절기에 관한 규정은 1계명에서 4계명에 해당됩니다.
‘언약의 책’을 마무리 하면서 하나님은 앞으로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 가운데 당신의 사자(천사나 지도자)를 먼저 보내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앞에서 말씀한 법과 규례를 지킬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수에게 원수가 되어 주셔서 능히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가나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무찔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따라서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신들을 섬겨서도 안되고 그들의 행위를 본 받아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한꺼번에 가나안 백성들을 물리치면 들짐승이 많아져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에 1년 동안 조금씩 그들을 쫓아 내실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그들의 신들과 언약을 맺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신들을 섬기게 되면 그것이 이스라엘에게는 올무가 되어 도리어 해롭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1,2 계명과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어떻게 그 언약에 신실하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언약 관계의 기본입니다. 하나님 역시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 관계에 신실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과 법 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신실하셔서 다양한 복과 구원의 은총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신실한 백성으로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다양한 복과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아멘.
계속해서 십계명의 구체적인 실천으로써 말씀이 이어집니다. 먼저 오늘 말씀은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의 구체적인 실천에 대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1-15). 이 계명들에 대한 실천을 보면 단순히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이웃의 재산을 보호하고, 손해를 입혔을 때 책임 있는 배상을 하며, 사람의 생명은 도둑이라고 할지라도 존중하는 삶의 태도를 요청합니다.
이어서 성적인 윤리와 종교 윤리와 관련한 법들을 말씀합니다. 사람이 약혼 하지 않은 처녀를 꾀어서 동침했다면 반드시 그녀의 부모에게 여자의 경제력 손실로 생길 손해금을 납폐금으로 주고 그녀를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해도 남자는 납폐금을 주어야 합니다. 또 무당은 살려 두지 말라고 하고 짐승과 행음하는 자도 반드시 죽여야고,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하는 자들은 멸해야 합니다(18-20). 이 세 구절들은 1계명과 7계명을 동시 어기는 것들입니다. 이스라엘 주변국에는 동물 숭배나 풍요 제사에 성적인 관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이방인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괴롭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도 나그네였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 고아와 과부의 탄식을 듣고 분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안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이 탄압받은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 중에 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 줄 때 이자를 받지말고 빚을 갚기를 독촉하는 채권자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옷을 전당 잡아 돈을 빌려 줬을 때는 해가 져 추워지기 전에 옷을 돌려 주라고 합니다. 돈을 못받는 한이 있어도 그 사람이 얼어 죽도록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27). 돈보다 사람이 우선입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은 재판장과 지도자를 모독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주신 각종 계명과 법규들을 무시함으로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모독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음 난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합니다(28-31).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1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구체적인 상황에서 풀어서 설명해 주시고,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야 할지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오늘날의 교회)은 자신의 정체성을 일상의 삶의 규칙들과 법칙을 통해서 드러냅니다. 구별되는 라이프-스타일입니다.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의 백성인지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요구하시는 라이프 스타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내어 훔치지 않고, 훔쳤다면 상응하는 벌을 받고 손해를 배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우상으로 삼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다른 사람에게 입힌 피해를 반드시 갚아주며, 하나님과 세우신 지도자들을 공경하고,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지 않습니다. 십계명은 그리스도인의 구별되는 라이프 스타일을 위한 기준과 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불신자와는 다른 우리의 삶의 스타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것을 증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십계명의 구체적인 적용을 상황에 맞게 보여줍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히브리 종에 대한 규정입니다(1-2).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너무가난하여 종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산다면 6년 동안은 종으로 부리되 칠년 째에는 자유롭게 놓아 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 종이 결혼을 했고 자식도 있다면 아내와 자식들도 함께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혹시 그 종에게 아내를 준 것이 주인이라면 그 아내와 자식은 두고 홀로 나아야 합니다. 만약 종이 그 주인과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여 떠나지 않는다면 그 집에서 죽을 때까지 종신종으로 살 것입니다(3-6). 또 어떤 사람이 딸을 아내로 삼기 위해서 여종으로 팔았다면칠년이 지나도 나오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인이 그 여종을 기뻐하지 않아 잠자리를 가지지 않고 아내로서 대우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보낼수 있지만 이방인에게는 안됩니다. 또 만약에 여종을 아들에게 준다면 그 여종을 딸과 같이 대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주인이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고해도 이 여종에게 음식과 옷과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만약 이 셋을 모두 하지 않는다면 여종을 돈을 내지 않고도 그 주인을 떠날 수 있습니다(7-11).
이어서 폭력에 관한 법률이 나옵니다. 사람을 쳐죽인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일부러 죽인 경우가 아니라면 한 곳을 정하여 그곳으로 도망하여살 수 있도록 합니다.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반드시 죽음의 벌을 받아야 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도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또 사람을 납치하고 판 사람도 사형에 해당됩니다. 심지어 자기의 부모님을 저주하는 사람도 사형에 해당이 됩니다. 상해를 입힌 사람은 반드시 배상을 하고 완치 될 때까지 돌보아주거나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남종과 여종이라도 즉사하도록 때리면 벌을 면치 못합니다. 임신한 여인을 쳐서 비해를 입혔으면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을 발로 갚아야 합니다. 이 말은 최대한 입니다. 눈이 다쳤으면 눈만 다치게 하는 정도로 그쳐야지 더 심하게 가해자에게 갚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남종과 여종에게도 같은 원칙입니다. 또 주인이 종을 때려서 이가 빠지면 그 댓가로 종에게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12-28).
뿐만 아니라 기르는 가축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경우에도 법률을 정해 놨습니다. 소가 사람을 죽이면 그 소도 죽어야 합니다. 만약 소가 사람을 들이 받는 버릇이 있는 것을 알고도 단속하지 않아 소가 다른 사람을 죽게 만들면 소와 그 주인도 죽어야 합니다.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속죄금을 그 주인에게 주고, 소는 죽여야 합니다. 또 사람들이 구덩이를 얼어 두거나 구덩이 파고 덮지 않아 사람이 가축이 빠지면 구덩이 주인이 보상을 해 주어야 하고 혹시 죽었으면 죽은 것은 가질 수 있습니다. 소끼리 싸워서 둘 중에 하나가 죽으면 받은 소와 죽은 소를 팔아 다 반반씩 나누어 가집니다. 하지만 소가 받는 버릇이 있는 줄 알고도 주인이 단속하지 않아서 소가 죽었으면 소로 갚아주고 죽은 것은 가해자가 가질 수 있습니다(29-36). 이스라엘 사회에서 재산을 가진 주인은 책임있는 모습이 요구됩니다.
이런 구체적인 규정들은 오늘날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법률들의 정신과 원리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이 법들은 우선 가난이나 경제적인 궁핍 등의 이유로 종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 종들은 7년 뒤면 다시 자유민이 되어 신분을 회복하고 금방 이웃이 될 수 있는 종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안에서 종들은 잠재적인 형제이기 때문에 비록 가난하여 현재는 종으로 살지만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또 여종도 마찬가지로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기준을 제시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저주하고 때리면 하나님께 저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거운 형벌을 내립니다. 생명을 멸시하는 자들도 엄격하게 처벌합니다.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 입은 것 이상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규정으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산과 소유에 대해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피해를 주었다면 정당하게 배상하는 책임있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이웃을 내 자신이 같이 사랑하며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언약을 증거하는 돌판, 곧 십계명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20장 22절에서 23장 33절까지 이어지는 ‘언약의 책’의 서두입니다. 이 십계명의 시작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던 분인지 먼저 밝힙니다. 이것은 십계명이 단순히 이행해야 할 계약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또 먼저 종 되었던 집인 이집트에서 건져 내신 후에 주심으로 이 십계명이 구원받은 후에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할 의무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십계명의 서문을 통해서 율법은 은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주시는 열 가지 계명은 우리가 다양한 영역 속에서 살아가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신실하게 반응하고 섬겨야 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의 백성들과 같이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되고, 자기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모양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도 안되고, 안식일을 기억해서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부모를 하나님과 같이 공격해야 하고,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대하면 안됩니다. 또 성적인 생활도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를 통해서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힘이 강하다고 함부로 빼앗아 자기 것을 삼는 도적질도 금지 되고, 거짓 증언을 통해서 이웃을 곤란하게 해서도 안됩니다. 또 이웃의 아내와 종과 물건들을 탐하는 마음을 가져도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물이자,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로 살아가는 생활 방식을 규정해 주는 것입니다(1-17).
이렇게 산 위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 당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기를 구합니다. 모세는 그들을 안심시키며, 하나님께서 임하신 것은 그들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함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위함이라고 합니다(18-21). 또한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상을 만들지 않아야 할 구체적인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그들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시로 흙으로 제단을 쌓아 하나님께 제사를 해야 했고, 돌을 깎아서 제단을 만들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 또한 당시 신들에게 최고의 인간의 기술로 만든 제단을 만들어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뛰어난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십니다(22-26).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들은 십계명을 감사함으로 지키고 애씁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은혜로 아무런 조건 없이 구원해 주셨습니다. 구원 받은 자는 십계명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의 체계를 구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지키지 못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며 회개하고, 성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신앙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최고의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작게라도 순종하길 바라십니다. 단지 우리의 삶의 기준을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씀으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돌을 잘 깎아서 좋은 제단을 만들어 섬기고, 좋은 계단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작은 한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감사함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하루가 됩시다. 아멘.
애굽에서 나온 지 삼 개월이 지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광야에 진을 칩니다(1). 그곳은 하나님의 산이라고 불리는 시내산 (호렙산)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산으로 모세를 부르셔서 모세를 중보자로 세워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체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는지,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애굽 사람들에게서 구원하셨는지 말씀하십니다. 또 온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언약을 지키면 모든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2-6). ‘소유’라는 말은 보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고, 그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가면 하나님의 보물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많은 백성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제사장 나라, 거룩하게 구별되는 백성이 되는 특권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모세가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8). 하나님께서는 구름 가운데서 음성을 들리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믿도록 하시고 중보자인 모세를 신뢰하도록 하십니다(9). 두 당사자가 구두로 승인하였기 때문에 언약 체결식을 준비합니다. 백성들은 성결하게 하여 그들의 옷을 빱니다. 그것은 마치 신부가 신랑과 첫날 밤을 보낼 때 단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스스로 먼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께서 오시길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산에 경계를 정해 놓고 백성들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셋째 날 아침에 하나님께서 시내 산 위에서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으로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말씀하시고 이제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다른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경계를 넘어 오지 못하도록 합니다(2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구원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 언약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에 조상들과 맺은 언약의 확증이고 확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족장들 개인과 언약을 맺었지만,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신부를 맞이 하듯이 언약식을 준비하셨고, 실행하셨습니다. 이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소유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참된 모세로서 언약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하나님의 소유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나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벧전 2:9). 또한 예수님께서는 참된 모세로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드러내시고 그의 말을 듣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교회는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의 보물이며, 거룩한 백성이며, 제사장 나라입니다. 새로운 언약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신부로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그분께 거룩하고 신실하길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거룩한 삶을 통해서 말씀에 신실하게 반응함으로 주님의 거룩한 신부이고 보물임을 기억하며 거룩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찾아 옵니다. 이드로는 이전에 모세가 돌려 보낸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데리고 함께 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이고 둘째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셨다”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장인과 아내와 아들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가 반갑게 맞이 합니다(1-7). 모세는 이드로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는지 다 이야기 합니다.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드로는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신들보다 큰 신이심을 고백합니다. 이에 이드로는 하나님께 번제와 희생제물들을 드리고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함께 여호와 앞에서 떡을 먹습니다. 이전에는 이방인 제사장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이드로는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의 역할은 백성을 재판함으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16). 하지만 그 재판하는 일을 모세 혼자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드로가 보기에 그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백성과 모세 모두가 지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14). 그래서 이드로는 백성들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고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들을 세워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 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큰 일만 모세가 재판하고 작은 일은 세운 사람들을 통해서 해결하도록 제안합니다. 하지만 이드로는 단순히 이런 방식이 옳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단서를 붙입니다. 모세는 장인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합니다(24). 모세가 그대로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드로는 자기의 땅으로 돌아갑니다(27).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러 동역자들을 세우게 하심으로 교회에서 한 사람에게 역할이 집중되어 지치는 일이 없도록 허락해 주심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다스리는 직분자들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하시기 원하십니다.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의 기준은 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생활에서 흠이 없는 자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일맥상통합니다. 직분자가 아닌 성도들도 자신이 가진 은사로 교회를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맡겨진다면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직분자는 더욱 엄격한 기준을 하나님은 요구하시며, 기본적으로 경건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이 요구됩니다. 넓게 보아 성도들 모두가 세상에서는 직분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도들 모두가 세상의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과 십부장들입니다.
오늘 하루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른 판단을 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바른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바른 길을 가르쳐주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나아가 우리 교회의 직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판단을 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교회를 세워가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아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르비딤에 장막을 치고 머무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물이 없었습니다(1).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모세와 다툽니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이끌고 계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주 잊고 원망하고 하나님의 사람과 다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줍니다. 이번에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하나님이 서있는 반석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물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그대로 행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2-7). ‘맛사’는 ‘시험하다’라는 의미이고, ‘므리바’는‘다투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다투고 하나님께서 자기들 가운데 함께 계시는지 시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 사건 후에 아멜렉이라는 족속이 이스라엘 민족을 먼저 공격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첫 싸움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멜렉은 물이 없던 지역에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그곳에 진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고 급습했던 것 같습니다. 아멜렉이 쳐들어 오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택하여 아멜렉과 싸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 꼭대기에 서서 손을 들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다’라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는 군대의 지도자입니다. 전쟁을 하는데 지팡이를 들고 손을 드는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것은 그 전쟁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손이 피곤하여 내려오면 전세가 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모세와 함께 산 꼭대기로 올라갔던 아론과 훌은 돌을 가지고 와서 놓고 모세를 앚히고 그의 두 팔이 내려 오지 않도록 바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고, 결국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군대는 아멜렉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싸움을 기념하여 책에 기록하고 앞으로 지도자가 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마음에 새기도록 합니다. 모세는 제단을 쌓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고부르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대대로 이스라엘의 원수 아멜렉과 싸울 것입니다(8-16). 이 싸움을 사울에게 맡겼지만 사울은 실패합니다(삼상15장).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강한 불평과 원망에도 불구하고 반석에서 물을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반석을 예수님이시라고 합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온 것은 예수님께서 참된 생명수를 주시는 것의 그림자입니다(고전10:4).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신 것은 교회가 예수님께서 주실 생명수를 마시고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은혜로운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생명의 물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은 후에 싸우게 될 영적인 싸움에서도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님(새 여호수아)의 그림자인 여호수아를 통해서 승리를 얻게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중보와 아론, 훌의 도움은 그 전쟁이 인간의 강함과 전략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원수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영적인 싸움은 우리 자신을 의지할 때 실패하지만, 승리하신 예수님을 붙들고 의지할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인 싸움의 연속입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은 예수님을 신뢰하며 행하는 것, 곧 순종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위해서 생명수를 주시고 승리를 주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며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광야에서 생활이 두 달 반이 지났습니다(1). 백성들은 다시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고기와 떡을 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3). 그 때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께서 아침에는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시고, 저녁에는 고기를 주어 먹이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그들에게 양식을 주심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할 때 구름 가운데 임재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함을 들었고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전합니다(4-12).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이스라엘 사람들 주변으로 와서 그것을 잡아 먹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에는 만나라는 음식을 주셔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전에 알지 못하던 음식이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양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양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을 따라야 했습니다. 매일 먹을 만큼만 가지고 거두어 가야 했습니다. 그것이 한 오멜씩 입니다. 그리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됩니다. 매일매일 그들은 만나를 거두러 나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6일째에는 그 다음 날 양식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그 다음 날은 안식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으로 안식일을 즐깁니다. 신기하게도 안식일을 위해서 저장한 것들은 냄새도 나지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13-29).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 만나 한 항아리를 대대로 보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는지 기억하도록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이 만나를 먹으며 지냈습니다(30-36).
만나와 메추라기는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불만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피는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광야 생활 가운데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배우도록 하신 하나의 수업이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 곧 일용할 양식인 만나를 거두러 날마다 나가야 했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수업이었습니다.
나아가 만나는 예수님께서 주실 참된 생명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만나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보존하던 이 만나와 달리 예수님은 영원한 만나로서 주님의 몸을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6:50-51). 이 말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성찬에 참여하여 주님의 몸과 피를 마심으로 그분과 교제해야 함 의미하면서 동시에 신령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먹어야 산다는 말입니다(고전10:3). 하나님께서 보내어주신 분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오늘 하루도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은혜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는 저와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홍해에서 구원을 받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그 노래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께서 방금 그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애굽의 군대에게서 건지셨고, 회개하지 않은 애굽의 군대는 바다에 잠기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힘이시고, 노래이시며, 구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1–2절). 그분은 강한 용사이시며, 권능과 영광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만물을 다스리시고 원수를 물리치시는 분이시며, 거룩하시고 찬송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인자하신 분이시며, 그 통치는 영원무궁하십니다(3–18절). 이 노래를 듣고 아론의 누이 미리암과 모든 여인들이 소고를 들고 춤추며 화답합니다(19–21절).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노래를 부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은 쓴 물 때문에 금세 원망하기 시작합니다(22–24절).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곳에 있는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쓴 물이 달게 변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례와 규례를 정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잘 지키면 쓴 물이 단물로 바뀐 것처럼, 치료하시는 여호와로 그들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5–27절). 이처럼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신실하신 하나님께, 우리도 신실함으로 응답하라는 하나님의 마땅한 요구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부른 이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직접 경험한 자들이 부른 구원받은 신자들의 노래입니다. 바로 광야교회(행 7:38)의 노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 곧 교회가 불러야 할 찬송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찬송은 모세와 여인들뿐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자연스럽게 배워 함께 부르는 공동체적인 찬송이었습니다.이처럼 구원을 경험하고 찬송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게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교회의 찬송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을 넘어, 책임 있는 순종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지키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감사하며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치료하시는 여호와가 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묵상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고백하며, 책임 있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 바닷가에 진을 치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광야에 갇힌 것처럼 보여, 바로가 그들을 잡으러 오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위험한 위치에 진을 치게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그곳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들은 바로는 모든 병거를 이끌고 그들을 추격합니다. 종으로 부리던 이스라엘을 다시 붙잡아 종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1–5절).
하지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내버려 두심으로써, 애굽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실 계획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애굽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애굽 군대는 금세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치고 있는 바닷가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이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여호와께 부르짖고,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차라리 애굽에서 종으로 사는 것이 낫겠다”고 불평합니다(12절).
이에 모세는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볼 것을 명령합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14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손을 들어 홍해를 가르라고 명하십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구름기둥이 이스라엘 진영 뒤로 옮겨가 애굽 군대를 막고,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사람들을 구별하십니다. 애굽 쪽에는 흑암이 있었고, 이스라엘 쪽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구름기둥이 막고 있었기에 애굽 군대는 이스라엘 진영으로 넘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 사이, 하나님께서는 밤새도록 강한 동풍을 불게 하셔서 바다를 말리시고, 좌우에 물이 벽처럼 서게 하셨습니다(21절).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따라 홍해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애굽 군대는 그들을 뒤쫓아 바다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새벽녘에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시고, 그 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손을 바다 위로 내밀라고 하시자, 바다가 다시 흘러 애굽 군대를 모두 덮어버렸습니다. 결국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는 홍해에서 전멸당했습니다(28절). 이처럼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능력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호와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습니다(31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홍해를 가르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의 종에서 건져내신 백성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을 끝까지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 삶을 막다른 골목으로 이끄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하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거룩한 여호와이십니다. 우리의 앞에 영적인 장애물, 혹은 인생의 홍해가 가로막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홍해를 마른 땅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신앙의 장애물이나 어려움 앞에서 절망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을 기대합시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애굽에서 나온 직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백성을 약속의 땅, 곧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그들은 이 출애굽의 날을 기억하여 처음 태어난 짐승은 모두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고, 사람은 대속(다른 동물로 대신함)해야 하며, 무교절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무교절은 누룩(이스트)이 없는 빵을 먹는 절기입니다. 이것은 출애굽의 긴급함을 상징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함으로 그들이 “거룩하게 구별”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에서는 누룩이 죄와 흠을 상징합니다(고전 5:6). 그들은 죄의 종이었던 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이제는 우상 숭배가 만연한 가나안 땅에서 제사와 삶의 방식을 통해 거룩한 삶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정해진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며, 출애굽의 날을 매년 기념하여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생활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녀들과 주변 나라 앞에서 구별된 삶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일상 속에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출 13:16). 한편, 애굽에서 나온 직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인 블레셋 사람의 땅을 지나게 하지 않으시고,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다. 만일 그들이 블레셋과 싸우게 되면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돌아가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출 13:17). 당시 그들은 믿음의 싸움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미숙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믿음의 훈련을 받은 후에야 믿음의 싸움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400여 년 전 요셉의 유언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출애굽이 자신의 능력이나 지도력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임을 알고 있었기에, 요셉의 유언대로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옵니다(출 13:19).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앞서 인도하시며, 그 기둥이 떠나지 않도록 하십니다(출 13:20–22).
죄의 종이었던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가시적으로 나타내고 외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바로 첫 태생을 제물로 바치고 절기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주일에 예배드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태생을 하나님께 바치고 대속하는 제도는, 맏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구속의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거룩한 삶의 가장 기본은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통해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배를 기점으로 한 주간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패턴이며, 구원받은 자의 구별된 삶의 방식입니다. 이렇게 구별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 앞서 행하시며, 약속의 땅(곧 구원과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맞게 믿음의 싸움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남은 한 주간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한 후, 공예배에서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기념하며 새로워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모든 장자를 치시는 재앙을 내시기 전에 모세와 아론에게 이 재앙이 내린 날을 새로운 해의 첫 달로 정하라고 하십니다(1-2). 그리고 그 달 십사일에 어린양을 잡고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여 먹으라고 합니다. 만약 식구가 양을 먹기에 적으면 이웃과 함께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의 피를 문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고기를 쓴 나물과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같이 먹되 고기는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3-9). 그리고 먹을 때에는 허리에 띠를 띠고 신발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합니다(11). 애굽에서 탈출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금방이라도 나갈 수 있게 준비를 하고 먹으라는 말씀입니다. 사탄에게 잡혔다가 벗어나는 사람은 느긋하게 사탄에서 빠져 나올 사람이 없습니다. 급하게 금방이라도 나갈 수 있는 절박성과 긴급성을 가지고 유월절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은 애굽 전체를 다니시면서 문설주에 피를 바르지 않은 집 곳곳 마다 장자를 치십니다. 하지만 피가 있는 집은 넘어갑니다(pass-over). 그래서 유월절(담을 넘어간다는 뜻)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이 날은 그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대로 지켜야할 절기가 됩니다. 매년 첫 달은 14일 부터 21일까지 일주일 동안 무교병을 먹고 14일과 21일은 성회를 열어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날 이스트가 들어간 빵(유교병)을 먹는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각 집에서 유교병을 두어서도 안됩니다(15-20). 이에 모세는 장로를 불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전합니다(21). 이스라엘 백성도 그대로 합니다(28). 밤 중에 하나님께서 멸하는 자를 보내셔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십니다. 그래서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울부짖습니다. 이제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하나님을 섬기러 떠나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할 때 그것을 애굽 사람들이 줍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430년동안 애굽에서 종 노릇했고 이제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41). 이 밤은 앞으로 대대로 기념되고 기억될 것입니다. 이 절기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잠깐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거류민과 다른 나라 품꾼을 제외한 할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본토인과 타국인, 이방인도 할례만 받으면 적용됩니다. 누구나 할례를 받으면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이 하는 말을 다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장자들은 죽지 않았고, 종 되었던 땅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이 영원히 기억하길 원하셨습니다. 순전히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장자 대신 어린양을 잡아 피를 문에 바름으로 죽음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또 그 양 고기를 먹음으로 애굽을 나갈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처음 난 것은 이후에 나는 모든 것을 대표합니다. 처음 난 것을 치신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것과 애굽 사람이 가장 큰 신으로 여기던 파라오의 장자를 침으로 파라오 또한 인간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과 그들의 목숨이 이미 죽어야 할 목숨이었지만 어린양이 대신 죽음으로 얻게 된 새생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 유월절 어린양은 우리를 대신해서 죄값을 치르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줍니다. 그분의 대속적인 죽음 때문에 우리가 새 생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본래 우리는 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우리 삶 가운데 있는죄에서 속히 벗어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앞의 모든 재앙들과 같이 마지막 재앙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1). 하나님은 이 재앙 후에야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각기 자기의 이집트 이웃들에게 패물을 요구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상해 보입니다. 다 망하게 생긴 이집트 사람들에게 너무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당한 요구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동안 애굽 사람들에게 종노릇을 하였고, 그들이 해방될 때 그 삯을 요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도 그 값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 모세를 위대하게 보이게 하셨습니다(2-3). 이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행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마지막 재앙의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합니다. 애굽에 있는 사람이나 짐승의 모든 첫 태생이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재앙과 달리 하나님께서 직접 애굽 가운데로 들어오신다고 하십니다(4). 애굽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5-6).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과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백성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바로의 온 신하들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제발 떠나 달라고 할 때 이스라엘은 떠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기 때문에 바로는 모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5-10).
하나님은 이 심판을 통해서 애굽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장자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최종적으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애굽 백성과 구별하십니다. 이러한 구별은 다음 장에서 볼 수 있듯이 유월절을 통해서 보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별되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구별될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죽기 때문에 생기는 구별입니다. 본래는 애굽 백성과 똑같이 장자가 죽어야 했지만, 유월절 어린 양이 대신 죽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신 구속의 은혜,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보혈로 얻은 구원에 감사하며 다른 이들과 구별되게 사는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모든 재앙들의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참된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게 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하기 위함입니다(1-2). 모세와 아론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시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 둘을 파라오 앞에 다시 보내십니다.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을 보내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이번에는 책망과 촉구를 함께 합니다. 만일 보내지 않으면 이번에는 메뚜기 떼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메뚜기를 통해서 우박을 맞지 않고 남은 식물들을 모두 먹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바로의 신하들을 바로를 설득합니다. 하지만 바로는 누구누구를 보내야 하는지 모세와 아론에게 묻습니다. 모세는 남녀노소 모두와 짐승들도 가지고 가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남녀노소 모두가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짐승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모든 짐승을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바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장정들만 나가라고 합니다(9-12). 적당한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메뚜기 떼를 보내어 심판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타협안 거부입니다. 메뚜기 떼들은 우박에 상하지 않은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어 치웠습니다. 이에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다시 불러 이 메뚜기 떼들이 사라지게 하여 죽음이 떠나가게 하라고 합니다. 메뚜기 떼가 온갖 풀을 먹어 없애는 것이 곧 애굽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강한 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메뚜기의 재앙이 없어지고 바로는 다시 마음이 완악해 집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보내지 않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흑암을 애굽에 내립니다. 해와 달이 빛이 잃어 애굽 온 지역이 어두웠습니다. 이집트의 최고의 신인 태양의 신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바로는 모세를 불러서 여호와를 섬기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사람들만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보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다시 보게 되면 죽이겠다고 합니다. 모세도 이제는 다시 바로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한 번은 더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는 궁지에 몰리자 모세와 타협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되 장정들만 가라고 합니다. 나중에는 짐승들은 놔두고 나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있어서 타협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참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모세는 결코 타협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고 감사하며 그분을찬송하는 자리입니다. 여기에 한 치의 양보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배는 남녀노소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드려야 하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양과소를 가지고 드려야 합니다. 예배의 대상과 방법 모두 타협할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보여줍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 예배에 있어서 이 말씀에 충실히 따르고자 합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에 성경 곳곳에 드러난 예배의 방식을 따라 예배하고자 합니다. 처음에 이런 태도가 적응하기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땅한 노력입니다. 우리는 성도 개인으로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고 살아야 합니다. 또한 무엇보다 공적 예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휴가철 어디에 있든지 주일 예배에 타협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공적 예배와 삶의 예배에서 충만하게 드러내시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의 백성을 보내지 않는 바로에게 또 다른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번에는 바로의 말, 나귀, 낙타, 소, 양 등의 가축들에게 심판으로 돌림병이 퍼지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셔서 그들의 가축들에는 돌림병이 생기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결국 애굽의 가축들은 전염병으로 죽었지만, 이스라엘의 가축들은 하나도 죽지 않았습니다(1–6절). 그럼에도 바로는 마음이 완강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지 않았습니다(7절). 이에 하나님은 다시 더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화덕의 재 두 움큼을 가져오게 하시고, 모세가 바로의 눈앞에서 그것을 하늘로 날리자, 그 재가 애굽 온 땅의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붙어 악성 종기가 생기게 됩니다(8–11절). 하지만 바로는 여전히 마음이 완악하여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더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무거운 우박이 애굽 온 땅에 내리게 하십니다. 이는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청난 무게의 우박이었습니다. 이 우박으로 인해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동물들은 모두 우박에 맞아 죽고, 식물들도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고 짐승들을 집 안으로 들여놓은 사람들의 가축은 살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짐승들은 모두 우박에 맞아 죽었습니다(12–22절).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땅에는 우박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에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치게 해달라고 부탁하며, 이제 그 백성을 보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밀과 쌀보리가 아직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마음이 완악해져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않습니다(35절).
하나님께서 가축들을 치신 이유는,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이 가축의 얼굴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염병과 악성 종기, 우박으로 그들의 신들이 실제로는 아무 능력도 없는 거짓 신임을 드러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전염병, 종기, 우박이 내리지 않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참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심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참된 능력이 되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참된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나일 강이 피로 변하는 심판 후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모세를 부르셔서 바로에게 보내십니다. 만약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개구리를 바로에게 보내어 온 애굽에 개구리가 가득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본문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바로는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아론에게 명하여 지팡이를 내밀어 개구리가 나일 강에서 올라오도록 했던 것입니다(1-7절). 그래서 다시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개구리를 없애 주면 백성을 보내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언제 그렇게 되면 좋을지 때를 택하라고 합니다. 이는 개구리가 없어지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인 것을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는 “내일” 개구리를 없애 달라고 했고,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여 개구리를 애굽 땅에서 물러가 나일 강에만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지에 있던 개구리를 죽게 하십니다. 그 흔적이 남도록 하신 것입니다. 개구리가 없어져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자, 바로는 다시 마음을 (스스로) 완악하게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않습니다(8-15절).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론이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쳐서 다 이가 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그대로 하자, 티끌이 이가 되어 온 애굽을 덮었습니다. 요술사들이 따라 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요술사들은 이 재앙부터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이 요술사들은 바로를 설득하여 “이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라고 말합니다(19절). 그럼에도 바로는 그 마음을 계속 완악하게 합니다. 얼마나 바로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에 하나님은 다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십니다.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리 떼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21절). 그래서 온 애굽 땅에 파리가 있을 것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고센 땅에는 파리가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아닌 백성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파리 떼가 온 애굽을 덮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애굽 안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를 미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바로는 한 발 물러나 “그러면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제사하라”고 하며, 파리 떼를 없애 달라고 요청합니다. 모세는 다음 날 하나님께 간구하여 파리 떼가 없어지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바로는 그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않습니다(22-32절). 예배는 장소와 형식을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해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구리 재앙부터는 하나님께서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십니다. 개구리는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애굽 사람들이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구리는 하나님이다스리시는 피조물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개구리들이 죽어 악취를 풍기게 함으로서 개구리는 신이 아니라 동물에 불과함을 보여주십니다. 그 다음으로 먼지가 이(혹은 모기 번역 될 수도 있음)로 변하게 하는 재앙 통해서 하나님은 대지의 신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파리(혹은 작은 딱정벌레)는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돋는 해를 주관하는 신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별 하실 뿐만 아니라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을 심판하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재앙을 받은 바로는 조금씩 뒤로 양보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되 애굽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고 또 조금만 가서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완전한 애굽과의 단절이 아니라 적당히 애굽에 있으면서 적당히 타협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절충주의적인 제안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적당하고 편하게 하나님을 섬기라는 제안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적당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그분이 원하시대로 예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통해서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시며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적당히 예배를 받으실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섬겨야 할 위대한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 적당히,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격으로 바르게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로의 백성과 구별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모세는 다시 자신이 말을 잘 못한다는 것을 불평합니다. 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의 앞에서 신과 같이 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또 아론에게는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아론에게 전달하면 아론은 바로에게 대언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심판을 다 받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애굽의 주민들은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1-7).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만드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로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말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행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라오(바로) 앞에 가서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지면 뱀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는 그대로 했습니다. 하지만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것을 따라서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뱀이 요술사의 뱀을 삼킵니다. 뱀은 당시에 이집트를 상징하는 동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집트를 심판하실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8-13). 그럼에도 바로는 마음이 완악하여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보내십니다. 모세와 아론은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내보내어 광야에서 섬기게 하라고 하셨지만 바로가 듣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는 애굽의 젖줄기와 같은 나일 강이 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 모든 물고기가 죽고 또 애굽의 물들과 강들과 운하와 연못과 모든 호수에 있는 물이 피로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행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14-21). 하지만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을 보고 바로는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역사로 보지 않고 단지 인간의 한 요술 행위 정도로만 본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막고 있습니다. 바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지 않고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고 칠일이 지납니다(20-25).
바로가 궁극적으로 막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예배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단지 바로와 애굽 사람들의 횡포에서의 노예 해방이 아니라 예배임을잘 보여줍니다. 구원의 목적은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바로는 예배자를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통해서 당신께서 실제로 역사하시고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른 신과는 전혀 다른 분이심을 보여주시기 시작합니다. 요술사들이 재앙을 모방한 것은 그들의 능력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무능한지 보여줍니다. 그들은 재앙을 모방할 것이 아니라 핏물이 다시 정상적인 물로 변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재앙에 재앙을 더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의 능력은 결코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일 강물을 피로 만든 것은 애굽 사람들의 풍요와 생명을 가져다 주는 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피로 만드시면서, 그리고 다른 물들도 피로 변하게 하심으로서 생명의 근원이 강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바로와 같이 완악하게 하지 않으시고 애굽과 같은 죄와 사망에서 건지셨습니다. 그래서 참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목적이 아닙니다.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곧 예배입니다. 우리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바로에게 열 재앙을 내리기에 앞서 다시 한 번 모세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 말씀해 주시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족보를 기록합니다(1-2). 하나님은 먼저 모세에게 자기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분은 언약에 실실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나아가 모세에게는 그 조상들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로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낼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계실 것이라는 이름입니다. 모세는 조상들보다 더 많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1-8). 하나님은 당신을 많이 드러내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계시의 진전은 예수님에게서 완성이 됩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고 그 관계가 더 깊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신을 심판하고 그 백성을이끌어내실 것을 모세와 아론은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모세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본질을 더욱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낼 것이라고 백성에게 전하지만 그들은 마음의 상함과 고된 노역으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9).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모세를 바로 왕에게 보내어 이스라엘을 내보내게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백성들의 부정적인 반응 때문에 그렇게 하기를 주저합니다(10-12). 백성들의 불신과 자신의 능력 부족을 염려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길 주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끝내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 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것입니다(13).
이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족보가 나옵니다(14-27). 장자와 차자인 르우벤과 시므온의 족보는 간략하게 쓰지만, 레위의 자손은 비교적 자세히 기록합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레위의 정당한 지파의 자손들이며, 앞으로 레위 자손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중요한 역할들을 감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모세는 주저하고 있습니다(28-30)
모세는 방금 바로와 자신의 동족에게 거부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이방인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실패한 그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을 더 깊이 드러낼 것임을 약속하시고 더 용기를 주시며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때로 우리도 우리의 사명이 실패한 자리에서 주저 앉고 싶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다시 우리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와 격려인 성경 말씀으로 말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통해서 실패한 그곳에서 일으켜 세워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 삶을 살아가고 다시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갑시다. 아멘
이제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내보내어 절기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고 말합니다.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며 알지도 못하는 신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겠냐고 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더 구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히브리인의 하나님이고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닥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바로는 오히려 강제 노역을 계속하라고 합니다(1-5). 모세와 아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게을러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힘들게 노역을 감당하게 합니다. 원래 벽돌을 만들 때에는 짚을 제공해 주었지만, 이제는그 짚을 각자 주어서 벽돌을 만들되 하루 생산량이 동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생산량은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로의 감독관들은 이스라엘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리며 줄어든 벽돌의 생산량을 채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기록원들은 바로에게 나아가 호소하지만 바로는 그들이 게을러서 하나님을 섬기자는 소리나 한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기록원들은 바로가 그들에게 화가 나서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임을 알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20-22). 백성의 이런 반응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지체하시는 것에 대해 호소합니다(23).
앞 장에서 구원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것을 들었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바로는 오히려 그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출애굽은 사탄의 종에서, 죄의 종에서 해방되는 구원 사건입니다. 구원의 말씀이 선포되어 종에서 해방이 되려고 할 때 사탄은 가만히 있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더욱 힘들게 함으로 출애굽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바로는 지금 사탄의 수하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붙잡고 더 힘들게 만들고 하나님의 종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효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보다 바로를 더 두려워하는 자들 입니다. 그들의 기대와 다르게 바로가 반응하자 하나님의 선지자를 원망합니다. 당장의 어려움 때문에 구원의 약속을 잊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얻고, 구원을 얻은 자 답게 살고자 할 때에 사탄도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탄의 힘도 무력하게 하셔서 결국 우리를 구원의 완성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늦어지는 기도 응답과 하나님의 반응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나요? 나의 생각과는 다른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식어버리지는 않나요? 사탄은 바로 그런 우리의 마음을 이용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시탄의 유혹과 시험에도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붙들고 인내하며 결국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이끄실 하나님을 따라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들이 믿을 것이라고 확신을 주었지만 모세는 여전히 의심하고 염려합니다. 이번에는 혹시 백성들을 자신을 믿지 않고 거짓말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나님께 묻습니다(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세에게 그가 가지고 있던 목자의 지팡이를 가지고 뱀이 되게 하십니다. 모세는그 뱀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손을 품에 넣고 빼니 나병이 걸리게 하시고, 다시 품에 넣었다가 빼니 낫게 하시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이런 기적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두 표적도 믿지 않으면 나일 강 물을 퍼서 땅에 쏟으면 그것이 피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라고 하십니다(2-9). 이 모든 표적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자신이 말을 잘 못한다는 핑계로 다른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라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노를 발하시며 말 잘하는 모세의 형 아론이 모세의 입이 되고 모세는 아론에게 마치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팡이를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10-17). 다른 설화나 영웅의 이야기와 달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이야기에서 그들을 이끌어내는 모세의 모습은 강력하고 리더십이 있는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의 강한 능력이나 비범한 힘으로 그 백성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염없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약한 자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이끄시는 능력 있으신 분이십니다.
이제 모세는 끝내 순종합니다. 그리고 장인 이드로에게 가서 애굽에 있는 형제들을 살피러 가겠다고 한 후 애굽을 향해 갑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에서 모세를 만나 다시 애굽으로 가라고 격려 하시며 이스라엘이 당신의 장자라고 격려 해 주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이기에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바로의 장자를 치겠다고 경고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바로가 끝까지 하나님을 대항 것임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후 모세가 길을 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시면서 거의 죽게 하십니다. 그 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돌칼을 가지고 가서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모세에게 피남편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모세는 할례를 받았지만 그 아들(아마도 둘째)이 할례를 받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자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놓아주었습니다(18-26). 이렇게 하신 것은 모세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는데 할례 하지 않은 아들이 있다면 그의 사명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안일하게 생각했던 부분을 다시 고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아론에게 나타나셔서 광야에서 그의 동생 모세를 만나게 하시고 기적을 통해 장로들이 모세를 믿도록 하십니다(3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의 사역을 위해서 모세를 선택하여 선지자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 선지자는 우리와 다름이 없이 연약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적을 보여주시고 때로 화를 내시며 또 그에게 필요한 사람을 붙여 주셔서 당신의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시는 일은 대단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능력이 있으신 분이셨지만 자신을 철저히 낮추시고 순종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부르심에 순종할 때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힘을 주시고, 필요한 사람을 채워 주셔서 구원의 은혜를 우리 주변에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우리를 통해서 우리 가정과 직장과 학교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아멘.
모세는 한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미디안 지역에서 오랜 세월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을 치다가 호렙 산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나무에 불은 붙었지만 타지 않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1-3). 모세는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갑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모세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그의 이름을 두 번 부릅니다. 모세는 응답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라고 합니다(4-5).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모세에게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밝히시고,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가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겠다고 하십니다(6-10). 모세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께서 반드시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고 끝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어 이 산(호렙산, 시내산)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합니다(12).
이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보낸 하나님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고 답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은 어떤 종류의 하나님, 어떤 신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야훼, 여호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가집니다. 처음부터 계신 분이라는 영원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냥 ‘계신 분’이라는 뜻으로 무소부재를 나타낼 수도 있고, 그의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신 분으로 이해 될 수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생각하면 ‘스스로 있는 자(여호와, 야훼)’라는 말씀은 영원부터 계시며 당신의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계셨고, 지금도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이름은 모세와 이스라엘, 온 교회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모세가 그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었고, 이제때가 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한다고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면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삼일 길을 가도록 허락을 구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로를 강한 손을 치기 전에 바로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 주십니다(20). 한번 듣지 않는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게 하여 빈손으로 나가지 않고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여 나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21-22).
오늘 말씀에서 모세는 새로운 사명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거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와 반드시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알려 주심으로 모세에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사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직장 생활, 학업, 가정 생활 모두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지만 때로 그 사명을 감당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신뢰할 만한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사명을 감당하고 우리의 삶을 감당할 수 있도록 반드시 함께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신뢰함으로 사명자의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모세가 태어나고 자라다가 결국 애굽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당시 애굽의 왕, 바로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나일강에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사탄의 계략이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겨 키웠습니다. 하지만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를 만들고 그 안에 모세를 넣어 나일강 갈대 사이에 놓았습니다. 마침 그때,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러 강에 왔다가 상자 속에 있는 아기를 발견했고, 모세를 불쌍히 여겨 키우기로 했습니다(1-10절). 죽을 수밖에 없던 모세가 살아나게 된 모습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의 억압 속에서 죽을 운명에 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구해 내실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자라며 애굽의 교육과 지식을 배웠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가 보모로 있으면서 모세를 돌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덕분에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인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다음 날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말리려 했지만, 그들 중 한 명이 "어제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일 셈이냐?"고 따졌습니다. 모세는 아무도 자기가 한 일을 모를 줄 알았지만, 이미 소문이 퍼졌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바로도 그 사실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했고, 모세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11-15절). 이처럼 모세는 자기 백성을 돕고자 했지만 오히려 동족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훗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같은 유대인들에게 거절당한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도망쳤고, 어느 날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 미디안의 제사장의 일곱 딸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자, 모세는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불의에 맞서 바른 일을 한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집에 머물게 되었고,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고,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게르솜’은 ‘추방', '도망'이라는 뜻으로, 애굽을 떠나 다른 땅에서 자식을 얻게 된 상황을 표현한 이름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약 40년 후),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더 심해졌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23-25절). 이 말씀은 이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모세를 통해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의 탄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의 시작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모세가 바로의 딸에게 건짐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모세는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백성을 도우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애굽 사람을 죽인 일도 그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 이후, 하나님은 미디안에서 오랜 시간을 통해 모세를 훈련시키시고,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쓰시려는 준비를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계획은 실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위기 속에 있는 자신의 백성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계획이 실패하고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끝까지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통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고, 응답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죄의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건져 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계획 가운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인내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애굽기는 “이집트를 나가는 이야기”란 뜻입니다. 출애굽기는 창세기에서 본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확장되어 지는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예고합니다.
야곱의 아들들과 자손들,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을 포함해서 칠십명이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생육하고 번성하여 애굽 온 땅에 가득했습니다(1-4).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알지 못하던 왕이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바로(왕)와 그 신하들은 점점 불어나 많아진 이스라엘을 두려워합니다. 애굽이 다른 나라와 전쟁할 때 혹시 그들이 이집트의 편을 들지 않고 적국의 편을 든다면 충분히 위협적일 만큼 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와 신하들은 꾀를 내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심한 노동을 시켜 국고성(곡식이나 무기를 저장하는 창고)과 라암셋(도시)을 짓도록 합니다. 그동안 목축업을 대대로 이어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노동은 아주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학대를 받을 수록 번성합니다(12).
이에 애굽 왕은 히브리인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불러 아기가 나올 때 남자 아이면 죽이고 여자 아이면 살려 두라고 합니다. 남자 아이는 커서 애굽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죽이려고 했고 아기가 나올 때 그만 죽게 되었다고 말하면 아무도 모릅니다. 이 두 사람은 아마도 산파 중에서도 다른 산파들도 관리를 하던 높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애굽 왕은 이 두 사람에게 이렇게 명하면 다른 산파들에게도 그런 명령을 전해서 바로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조용히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십브라와 부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당시 최고 권력자보다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를 살렸습니다. 그리고 바로의 책망에 히브리 사람들은 애굽 사람과 달라서 산파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낳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19). 이것은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은 해도 된다고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히브리 사람들이 번성하는것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바로 왕보다 당신을 더욱 두려워한 히브리 산파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습니다. 조용히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을 막는 것에 실패한 바로 왕은 이제 드러내놓고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아들이 태어나면 나일 강에 버리고 딸은 살려 두라고 합니다(22).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데 더욱 완강하게 막아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의 첫 장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 보게 됩니다. 약속대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많아졌습니다. 바로의 방해에도 하나님의 언약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점점 더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바로와 하나님을 두려워한 히브리 산파들은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약속 이루십니다. 산파들은 그런 통로가 되어 하나님께서 흥왕하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귀히 여기고, 두려워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 언약이 성취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아멘.
야곱이 죽자 요셉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릅니다. 야곱을 위해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애곡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왕이 죽으면 칠십이 일 동안 애곡했습니다(1–3). 애굽 사람들이 칠십 일 동안 애곡했다는 것은 그만큼 요셉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고 요셉은 야곱의 유언대로 그를 가나안에 장사하기 위해 바로에게 말합니다. 바로는 애굽의 많은 신하들과 병거와 기병들을 요셉과 함께 가나안으로 보냅니다. 최고의 예우를 해 주는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유언대로 가나안 땅 마므레에 장사하였습니다.
그 후에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복수를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요셉이 지난 날에 자신을 팔았던 것을 복수할까 봐 걱정합니다. 이에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살아 있을 때에 요셉에게 형제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라고 요셉에게 말했다고 합니다(17). 요셉은 그 말을 듣고 웁니다. 그리고 형들을 위로하며 안심시킵니다. 그렇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형들이 악한 일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악한 일을 선하게 바꾸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간곡한 말로 위로했습니다(21). 오히려 요셉은 그 형제들에게 출애굽 때가 되면 자신의 뼈도 함께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형제들에게 말함으로 형제들과 그 자녀들이 요셉의 부탁을 잊지 않도록 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언젠가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것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지키시는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높은 관직에 있으나 애굽이 이스라엘의 종착지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창세기가 끝이 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당신께서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관계를 맺으십니다. 또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택한 자들을 이끄시고 친히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지속적으로 배반하지만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심지어 그들의 악한 행동도 선한 것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에 약속한 것들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그 백성을 언약에 따라 보호하시는 분이시며, 백성들의 실수와 죄악조차도 선하게 바꾸셔서 끝내 당신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이끄시는 긍휼이 많으시고 신실하신 분입니다. 또 창세기가 요셉의 마지막 말로 끝나는데, 이는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하나님을 소망하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언약을 지키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도 선하게 바꾸시며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앞으로도 언약을 이루어 가실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그분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자는 복이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영원한 언약 안에 약속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요셉과 두 아들을 축복한 후에 야곱은 나머지 자녀들이 이후에 당할 일들을 말합니다. 르우벤은 장자이지만 이전에 아버지의 첩과 동침한 일 때문에 장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 시므온과 레위도 이전에 디나의 일로 세겜 사람들을 무참히 죽인 일 때문에 장자의 복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34장). 장자의 복은 요셉이 받아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기업을 더 받게 될 것이라고 야곱이 말했습니다(참조. 역대상5장1-2절). 장자의 복은 요셉이 받지만 왕은 유다 족속을 통해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유다는 형제의 찬송이 되며, 규(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기를 ‘실로(평화, 안식을 주는 사람)’가 오시기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실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와 안식을 주시는 유다의 지파의 사자 예수님을 의미합니다(계5:5). 유다 족속을 통해서 왕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궁극적으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가 이런 복을 받은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과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족속을 선택하셔서 왕을 세우시고 궁극적으로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보내시기로 정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을 통해서 11-12절에서 말하는 풍성함을 나누어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야곱의 예언대로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게 되었고, 단지파에서는 강력한 사사 삼손이 나왔고, 요셉 지파는 가나안 땅에서 비옥한 땅에 살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말한 모든 풍성함에 대한 예언들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또 베냐민에게 한 약속도 사사기 20장 21절에서 이루어집니다. 야곱은 약속대로 행하시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고 있었습니다(1-27).
그리고 야곱은 이제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자신이 죽으면 가나안 땅에 있는 선조들의 무덤에 장사하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야곱은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갑니다(33).
본문은 야곱이 죽기 전에 자녀들에게 한 예언과 축복이 이루어짐으로 인간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예언과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장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과 자신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실 것을 굳게 믿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선택으로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죽을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고집이 세고, 속이기를 잘하는 사람, 야곱을 나그네 세월을 통해서 연단하시고 깎으시고 다듬어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유다의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영원한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부족하고 연약한 백성을 다듬고 연단하시고 때로는 책망하시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알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부르셔서 믿음을 더하여 주십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고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아멘.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야곱이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립니다. 야곱은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병은 그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말을 듣고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야곱에게 나아갑니다. 이스라엘(본문은 일부러 야곱대신 이스라엘로 씀, 언약을 강조함)은 요셉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침상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루스(벧엘)에서 만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셨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으며 또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말해줍니다(1-4). 또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자신의 아들들과 같이 여겨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함께 온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손도 보게 하셨다며 하나님을 높입니다. 요셉은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쪽에, 에브라임을 왼쪽에 둡니다. 므낫세가 장남이고 에브라임이 차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른 손을 에브라임에게, 왼손은 므낫세에게 올립니다. 먼저 요셉에게 축복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날 때부터 돌보시고 기르시고, 모든 환란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서 요셉과 두 자녀에게 복을 주시고 야곱의 이름과 조상들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아 하나님과 동일한 언약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번성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15-16). 하지만 두 아들에게 축복할 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손을 엇갈리게 얹은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의 손을 옮겨 오른손을 장자 므낫세에게 얹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야곱은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야곱은 육체의 눈이 어두워졌지만 영적인 눈은 밝았습니다.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이 더 강성해 질 것이고,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게 되는 천국의 원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요셉과 두 자녀에게 에브라임과 므낫세 같게 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에브라임을 앞세웠습니다. 또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자신은 죽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손들과 함께 계셔서 언젠가는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요셉과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한 후에 이제 각 자손에게 예언적인 축복을 할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곧 하나님의 품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비록 그의 육체의 눈은 어두워졌지만 영적인 눈은 밝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끝까지 기억하고 있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자녀들에게 그것을 전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들이 자녀들을 통해서 성취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기도이자 약속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남은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살아왔던 것과 그분을 신뢰하면서 살았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복을 자녀들에게 전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 다음 세대에게 동일한 은혜와 복을 주시도록 날마다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요셉은 파라오(바로) 앞에 나아가 아버지와 형들이 양과 소와 염소를 데리고 애굽으로 와서 고센 땅에 머무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형들 중에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여줍니다. 바로는 그들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알려준 대로 조상 대대로 목자라고 하며 고센 땅에 머물도록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1-4). 바로는 요셉에게 고센 땅에 거주하도록 허락하고 형제들 중에서 능력 있는 자는 바로의 가축을 돌보는 일을 맡기라고 합니다(5-6). 또 요셉이 야곱을 파라오 앞에 세우자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하고 바로는 그의 나이를 묻습니다. 자신의 나이는 백 삼십 살로 조상들의 연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아직 가나안 땅을 주시기 전이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옵니다(5-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는 것은 단순한 인사를 넘어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 야곱에게 주신 복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27:29). 그 약속이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기근이 더욱 심하여 질 때 요셉은 애굽과 가나안 사람들에게 곡식을 팔아 돈을 다 모아 바로에게 주었습니다. 또 돈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땅과 몸을 팔아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로의 녹을 받는 이방인 제사장의 땅을 제외한 애굽의 모든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됩니다. 그렇다고 요셉이 폭력적이고 비 인간적인 방식으로 땅을 바로에게 준 것이 바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토지법을 만들어 모든 토지를 국유화 하되 씨앗을 사람들에게 주고 농사를 짓게 하여 땅의 소산의 80%는 농작인이 가지고 20%를 세금으로 내도록 하였습니다. 그 법이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까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26). 한편, 이스라엘 족속은 고센 땅에서 거주하면서 목축업을 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였습니다. 야곱은 애굽에 십 칠년을 머물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죽을 날 가까운 줄 알고 요셉을 불러 자신을 애굽에 장사하지 말고 가나안 땅에 있는 조상들의 묘지에 장사하라고 유언을 하고 요셉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27-31).
오늘 말씀을 보면 야곱과 그 자식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파라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바로가 야곱과 그 자식들에게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을 하였고, 바로는 요셉을 통해서 식량위기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위기가 오히려 온 백성과 토지를 소유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실 뿐만 아니라 애굽과 바로도 돌보시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돌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이웃과 세상을 돌보십니다. 교회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통해서 위기 속에 있는 세상을 살려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동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을 보살피신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세상을 보살피신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야곱은 가나안을 떠나 가족과 모든 소유를 이끌고 애굽을 향해 갑니다. 애굽으로 가는 길에 그는 브엘세바에서,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하며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곳에서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의 아들 요셉이 그의 눈을 감겨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4절). 하나님은 이 약속들을 신실하게 이루십니다. 야곱이 죽은 후, 그의 시신은 애굽이 아닌, 아브라함이 구입한 가나안의 가족 묘지인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기 때문입니다(50:13).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고, 요셉이 보낸 수레에 가족들을 태워 애굽으로 본격적으로 이동합니다. 이후 애굽에 함께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이 아들들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소개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야곱을 통해 열두 아들이 태어났고, 그 열두 아들을 중심으로 야곱의 가족 수는 총 70명이 되었습니다. 이는 완전수를 상징하는 7의 열 배로,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온전히 이루어 가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침내 야곱은 애굽에서 요셉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야곱은 요셉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을 다시 만났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제들과 아버지에게, 바로 앞에 서게 되면 자신들의 생업이 목축업이라고 말하라고 당부합니다. 이는 애굽 사람들이 목축을 천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들을 따로 떨어진 고센 땅에 거주하게 하려는 요셉의 계획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살게 하시지만, 애굽 사람들과 뒤섞여 동화되기를 원하지 않으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역시 세상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시고, 때로는 세속 정부의 보호 아래 살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가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곳이지,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교회가 복음을 전하며 믿음의 자녀들을 길러내야 할 사명의 자리이지, 우리가 세속의 가치에 물들어 살아갈 곳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기억합시다. 이 세상 한가운데서도 세속적인 가치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형들의 변화된 모습을 확인한 요셉은 그 마음에서 나오는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주위에 있던 종들을 물러나게 합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울며 자신이 요셉이라는 것을 밝히며 형제들이 과거에 자신을 팔았던 일 때문에 근심하고 탄식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으로 5년 동안 더 극심한 흉년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약속의 백성인 야곱과 그 아들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먼저 애굽으로 요셉을 보낸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1-8).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 이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에게 이미 이방의 객이 되서 400년 동안 종노릇하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이루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창15장 13절).
그래서 요셉은 두려워하지 말고 아버지와 가족들이 다 애굽으로 와서 흉년을 대비하라고 합니다. 요셉이 큰 소리로 울고, 형제들도 다 웁니다.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와 그 신하들이 다 기뻐합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아버지와 가족을 다 데리고 이집트로 와서 살라고 합니다. 좋은 땅도 주겠다고 합니다. 요셉은 수레를 주어 아버지와 가족들을 편하게 모시고 오도록 합니다(16-20). 바로의 말대로 요셉이 형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에서 먹을 양식도 주고, 또 각 자 한 벌씩 옷을 줍니다.
그런데 베냐민에게는 옷 다섯 벌을 주고 은 삼백을 줍니다. 요셉의 옷을 부러워 했던 형제들이 요셉에게 옷을 다 받습니다. 베냐민은 더 많은 옷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혹여나 형제들이 가는 길에 다투지 말라고 합니다. 돌아가는 길에 이전에 요셉을 판 것에 대한 책임 때문에 다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변화되었지만 여전히 또 다시 범죄할 수 있기 때문에 요셉은 형들에게 당부합니다. 드디어 형제들은 요셉이 준 수레에 양식을 싣고, 요셉이 준 옷을 가지고 기쁜 소식을 가지고 야곱에게로 돌아옵니다. 야곱은 요셉이 살아 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말과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 다시 기운을 냅니다. 요셉을 죽기 전에 보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미리 애굽에 보내셔서 그 백성을 돌보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비록 요셉 본인에게는 큰 어려움과 고난의 세월이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형들 뿐만 아니라 요셉도 더욱 성숙해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꿈을 통해서 하실 일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보다 앞서 우리를 돌보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인 꿈을 통해 그것을 깨닫고 인내했습니다. 때로는 그 과정이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의 시간 뒤에 그 고난을 넘어서는 기쁨이 있게 하십니다. 나아가 더 큰 계획으로 다른 사람들도 유익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도 어려운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그 고난을 넘어서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요셉은 형제들과 만찬을 한 후에 자신이 쓰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으라고 그의 집 청지기에 명합니다(1). 그리고 멀어지기 전에 종을 보내어 형제들 중에 누군가 요셉의 은잔을 훔쳐 갔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청지기는 그대로 했고, 요셉의 형제들은 그들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그 잔이 나오는 자는 죽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가 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베냐민을 잡아 두고 이전과 같이 동생을 넘기는 죄를 지을 것인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잔이 나왔을 때 형제들 모두가 옷을 찢고 각자 짐을 다시 싣고 요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갑니다(2-13). 옷을 찢는 것은 큰 슬픔이나 참담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제 형제들은 요셉 앞에 서게 됩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책망합니다. 여기서 유다가 전면에 나서서 형제들을 변호합니다. 유다는 그 잔이 발견된 베냐민과 함께 형제 모두가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요셉은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잔이 발견된 베냐민만 종으로 삼고 나머지 형제들은 아버지에게로 돌려 보내겠다고 합니다.
이에 유다는 과거 요셉의 이야기를 합니다. 베냐민의 형인 요셉이 이전에 있었지만 죽었고, 라헬이 남긴 아들이 베냐민 뿐이기 때문에 아버지 야곱이 그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한다고 합니다(20). 그리고 베냐민을 어떤 과정을 통해서 애굽에 데리고 올 수 있었는지 말합니다. 아버지야곱이 베냐민을 너무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지 야곱이 결국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유다는 자신이 아버지에게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그 아이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베냐민을 대신해서 자신이 종이 되게 해 주고 베냐민을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에게로 보내 달라고 합니다(32-34). 요셉은 일부러 형제들에게 자신이 팔아 넘길 때의 비슷한 상황을 연출해서 형제들이 과연 어떻게 하는 지 봅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그 때와 달리 동생을 지키려고 합니다. 특히 유다는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유다는 요셉을 팔았던 장본인이었습니다(창37:26). 하지만 이제는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 놓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변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순간입니다.
동생을 대신하여 종이 되기를 스스로 원한 유다의 모습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는 ‘대속’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의 그림자로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은 이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자들이 아니라 목숨을 구해 주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은 형제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과거의 모습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더 예수님을 닮아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가지고 온 곡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다시 애굽으로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유다는 애굽의 총리가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베냐민을 꼭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합니다. 야곱은 여전히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주저합니다. 유다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베냐민을 기필코 살아서 데리고 오겠다고 합니다. 야곱은 양식이 모두 떨어져 이대로 있으면 야곱의 가정의 모든 사람들이 위험에 처해질 수 있기 때문에 허락합니다. 대신에 총리에게 바칠 그 땅의 특산물과 이전에 가지고 온 돈과 그 두 배를 챙겨가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총리를 통해서 그 아들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잃게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합니다(1-15). 요셉을 파는데 앞장 섰던 유다는 이제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요셉은 형제들과 베냐민이 온 것을 보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준비시킵니다. 형제들은 식사 준비로 분주한 모습과 낯선 곳으로 인도 되는 것을 보고 지난 번에 돈을 가지고 간 것을 빌미로 잡아 노예로 삼으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먼저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지난 번에 양식을 사고 돌아 가는길에 보니 돈이 자루에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일부러 돈을 주지 않고 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청지기는 그들과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돈을 돌려준 것이고 그들의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16-23). 참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그들에게 넣어 준 것입니다. 또 양식 값은 이미 요셉이 지불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시므온을 감옥에서 나오도록 하고, 형제들에게 발을 씻도록 물을 줍니다. 이것은 당시에 손님이 왔을 때 대접을 하던 기본 자세 였습니다. 음식을 요셉의 집에서 먹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 형제들은 서둘러 예물을 준비합니다. 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요셉이 집으로 왔습니다. 형제들을 일제히 요셉에게 엎드려 절합니다(26). 요셉의 꿈이 성취되던 순간이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보자마자 아버지의 안부를 묻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보고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축복합니다. 야곱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14). 요셉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가 울고 다시 얼굴을 씻고나와 음식을 차리라고 합니다(30). 요셉은 자기와 애굽 사람들과 그 형제들의 상이 섞이지 않도록 합니다. 애굽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과 같이 먹으면 부정하게 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앉을 때 나이 순대로 앉게 하고 막내인 베냐민에게는 음식을 다섯 배 더 많이 주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30-35). 더 많은 사랑을 받은 베냐민에게 형제들은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꾼 꿈을 하나씩 이루고 계십니다. 기근을 통해서 야곱의 아들들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도 허사가 되기 때문입니다(창35:9-15).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서 야곱의 기도도 신실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요셉이 형제들을 먹이고 잔치를 베푸는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약속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우리 영혼의 양식과 육의 양식을 풍성하게 주십니다. 이 신실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섬김을 기억하고 오늘도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바로의 꿈대로 기근은 온 이집트와 주변 지역을 덮쳤습니다. 가나안과 같은 주변 지역들이 기근 때마다 곡창 지대였던 애굽의 도움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야곱도 아들들에게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가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베냐민을 제외한 형들 10명만 보냅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동생인 베냐민도 요셉과 같이 잃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베냐민은 야곱에게 사랑했던 라헬의 유일한 아들로 여겨졌습니다(1-4).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갔을 때 형들은 그곳에서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납니다. 하지만 요셉만 그들을 알아볼 뿐 형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요셉이 17세쯤 팔리고 30세에 총리가 되고 풍년 7년이 지나 흉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2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또 요셉이 완전히 이집트 사람처럼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과 자기 사이에 통역관을 세워 이집트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요셉은 자신이 어렸을 때 꾼 꿈을 기억해 냅니다(9). 형들은 곡식의 단이 자기의 단에 절했던 것과 하늘의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37:9). 이에 요셉은 베냐민과 아버지와 부인들도 와야 한다는 것을 깨닫았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형들을 스파이로 몰아 그들이 가족 이야기를 하게 하고, 그것을 입증할 증거로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형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이전에 요셉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갚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21-22). 한글 성경에는 21절에 “아, 그랬구나”라는 말이 생략되었습니다. 형들은 자신들의 옛 행위를 회개하고 후회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요셉은 웁니다. 요셉은 시므온을 제외한 다른 형제들은 이제 곡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돈도 받지 않습니다.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야곱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지 않기로합니다(38).
형제들은 이전에 자신들의 죄를 되돌아 보면서, 애굽에서 겪게 된 일련의 일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갚으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전의 죄를 회개하고 후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런 모습을 요셉 앞에서 보게 하심으로 요셉을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고난 가운데 있게 하셨지만 결국 형들에게 받은 아픔을 치유하셨고, 요셉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인 야곱의 가족들을 보호하십니다. 이런 요셉의 모습은 같은 민족과 제자들에게 배반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상처와 아픔으로 당신의 교회를 먹이시고 보호하심을 보여줍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도 고난 가운데있게 하고 어려움을 겪게 하시고 아픔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그 아픔을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해 주시고 교회인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상처받고 어려움을 당할 때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의 참된 위로자를 바라보며 참된 위안을 얻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8절은 바로(파라오)가 꿈을 꾸는 것과 그것을 해석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는 최강의 나라였고 그 나라의 점술가들과 지혜로운 사람들은 최고의 학문과 지혜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의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는 세상 제국의 무능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심을 보여줍니다.
그 때 마침 술 맡은 관원장이 이전에 요셉이 자신의 꿈을 해석해 주었고, 그 해석대로 되었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만 이년 동안 꿈을 해석하는 요셉은 기억에서 잊혀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애굽에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나이가 삼십 세 였기 때문에 요셉이 그 나이가 되어 애굽에서 관직을 맡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듣고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칠년 동안 풍년을 주시고 그 다음 칠년 동안은 흉년을 주실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에 요셉은 지혜로운 사람을 세워서 지금부터 수확의 20프로를 저장해 두라고 일러줍니다(9-36).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서 당신의 계획을 보여주셨고, 요셉을 통해서 그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이런 해석에서 이전과 같이 여전히 하나님이 중심에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해석과 해결 방안을 들은 바로는 그 일을 요셉에게 맡기고 높은 지위를 주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37-45). 요셉의 이름은 이제 ‘생명’이라는 뜻의 ‘사브낫바네아’로 일컬어 집니다. 온 생명이 요셉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온 애굽을 살피고 대안을 세웁니다. 동시에 요셉의 자손이 태어나게 되는데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이둘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요셉 지파로서 두 몫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제 칠년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흉년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애굽 뿐만 아니라 온 땅이 기근이 왔습니다. 하지만 미리 대비한 애굽에는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양식을 사러 애굽으로 옵니다(46-57).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요셉의 지위가 감옥에서 총리가 되었다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요셉의 순종을 통해서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야곱의 집을 돌보실 계획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요셉을 애굽에 보내고, 고생을 하게 하셨지만 자녀를 통해서 위로하시고, 궁극적으로 야곱의 자손들이 지속적으로 번성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것에 있습니다. 요셉이 존귀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는 데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요셉의 세속적인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형제들을 기근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고난과 높아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교회를 구원하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당신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또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사역에 참여시키십니다. 왜 우리를 우리 각자의 자리로 보내셨는지 생각하고,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살아갑시다. 우리 각자의 상황과 자리에서, 우리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여러 관계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이룰 수 있을 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아멘.
보디발의 감옥에서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십니다. 간수장은 요셉에게 감옥에서 일을 맡겼습니다. 파라오의 경호실장이었던 보디발의 감옥에는 파라오의신변과 관련된 범죄자가 들어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 파라오의 빵을 굽는 것을 담당하는 관원과 포도주를 담당하는 관원이 함께 감옥에 잡혀 왔습니다. 보디발은 이 둘을 요셉에게 맡깁니다(1-4). 이 두 사람이 감옥에 온 지 여러 날이 지난 후 두 사람 모두 꿈을 꾸게 됩니다. 두 사람의 안색을 보고 요셉은 무슨 일인지 물어봅니다(7). 두 사람은 꿈을 꾸었지만 그것의 의미를 알 수 없다고 합니다(8). 요셉은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말해 보라고 합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받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로 온 것으로 돌립니다. 성경에서 꿈은 종종 앞으로 일어날 일이나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먼저 술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꿈을 말했습니다. 그것을 듣고 요셉은 그 꿈을 해석하여 앞으로 술 맡은 관원장에게 일어날 일을 말해 줍니다. 그는 삼일 후에 다시 그 관직을 회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잘 되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합니다(8-14). 순간적으로 요셉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 아니라 인간의 손에 맡깁니다. 떡 굽는 관원장도 자신을 꿈을 알려줍니다.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은 삼일 후에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16-19). 삼일 후에 요셉이 각자의 꿈을 해석 한 대로 되었습니다(20-22). 하지만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었습니다(23).
요셉은 오늘 말씀에서 ‘꿈꾸는 자’에서 ‘꿈을 해석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특별한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꿈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역사를 운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술 맡은 관원장에게 맡기는 실수를 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를 운행하시는 것임을 믿고 고백하지만, 순간적으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기대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사람이 그것을 잊게 하심으로 바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할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할 때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다시 요셉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갔지만,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요셉의 주인인 보디발도 요셉이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집안의 모든 일을 맡깁니다(1-6절).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오는 성적인 유혹을 이겨내는 모습은 앞장의 유다의 모습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유혹을 거절당한 보디발의 아내는, 오히려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누명을 씌웁니다(7-18절). 요셉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의로운 행동으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감옥에서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셨고, 그에게 인자를 더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간수장의 눈에 들게 되었고(21절), 간수장은 요셉에게 옥중 죄수들을 맡기고, 모든 사무도 맡겼습니다. 간수장은 요셉을 매우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맡긴 일을 따로 살펴보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23절).
형통한 삶은 상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하나님은 늘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요셉은 여러 어려운 상황을 겪었지만, 상황이 요셉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을 이끄셨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일할 때에도, 유혹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고, 그것이 요셉을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는, 요셉이 “어찌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절)라며 하나님 앞에서 죄 짓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요셉의 삶을 이끄신 분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형통함이란 어려운 상황이 없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힘든 일들이 있을지라도, 그 모든 것을 선하게 풀어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 진정한 형통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됩시다. 비록 상황이 녹록지 않더라도, 그 가운데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형통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아멘.
앞 장에서 시작된 야곱의 족보에 관한 이야기는 요셉을 중심으로 전개가 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요셉의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고 유다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며느리 다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통해서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왕들이 나오도록 작정하셨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도 이 유다 혈통을 통해서 오십니다. 하지만 그런 영광은 유다의 인간적인 탁월함에 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임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드러나 유다의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해서는 안될 일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그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에 내려가 그곳의 여인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 엘, 오난, 셀라를 낳았습니다. 이 세 아들 중에 첫째인 엘은 아버지와 같이 가나안 여인 다말을 아내로 삼습니다. 하지만 엘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십니다(1-7). 엘이 아들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유다는 형의 가문을 세우기 위해서 형수와 결혼하여 대를 잇도록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행동이었습니다(신25:5-10). 하지만 오난은 그 자녀가 자신의 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형의 대를 이을 것이기 때문에 불의한 행동을 함으로 씨를 가질 수 없게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또한 악할 행동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난 역시 죽이십니다(9-10). 유다는 이렇게 되는 일을 보고 막내 셀라가 성인 될 때까지 다말에게 친정에서 지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셀라가 성인 되었음에도 다말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불의한 행동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는 위로를 받고 친구에게 갔을 때 그곳은 마침 다말이 살던 곳과 가까웠습니다. 이에 다말은 양털을 깎는 축제의 시기에 변장하고 유다를 유혹합니다. 유다는 다말이 매춘부인지 알고 염소 새끼를 약속하고그 약속의 증표로 도장과 끈과 (소유인의 이름이 새겨진)지팡이를 보증물로 줍니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이방신을 섬기는 방식 중의 하나가 이방인 성전에서 매춘부와 관계 갖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나안 풍습에서 이런 관계는 일반적이었습니다. 유다가 완전히 이방인의 삶의 형태로 살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일로 다말은 임신을 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유다는 다말을 불 사르라고 합니다. 다말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의 주인으로 말미암아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유다에게 보여줍니다. 유다는 자신의 위선을 인정하고 다말이 자기보다 옳다고 합니다. 다말은 죽은 남편의 가장 가까운 친족에 의해서 아이를 가질 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과부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정당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도덕적 기준으로 다말의 행동을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그녀의 행동은 옳았기 때문입니다. 다말의 행위로 인해 유다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말은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 중 베레스를 통해서 다윗 왕이 태어나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오십니다. 다말의 행동은 이스라엘의 왕과 메시야를 준비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현대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말도 안되는 행동이었지만 성경은 다말에 대해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말은 잘못된 유다의 행동을 바로 잡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도록 한 믿음의 사람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거의 끊어질 뻔한 유다 지파의 이야기를 요셉 사이에 넣음으로 앞으로 야곱의 가족 모두에게 닥칠 기근의 위험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그 위험도 하나님께서는 이방 여인 다말을 통해서 극복하도록 하신 것 같이, 요셉을 통해서 극복될 것임을 미리 보여줍니다. 또 유다의 성적으로 타락한 모습은 보디발의 아내의 성적인 유혹을 거부한 요셉과 대조가 됩니다.
유다는 불의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인 다말의 행동은 옳았습니다. 비록 가나안 여인이지만 다말은 '씨'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가나안 여인이지만 결혼으로 언약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 유다와 그 아들들보다 옳았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와 그 아들들의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다말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을 이어가십니다. 인간의 불의함에도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요셉의 형제의 불의함에도 요셉을 통해서 약속을 이어가시는 하나님을 앞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의로움 때문에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의하지만 의로우신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전적인 은혜로 얻은 구원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불의함과 죄와 연약함과 부족함을 볼 때마다, 예수님으로 의로워진 우리를 기억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 부터 창세기의 마지막 장까지 유명한 요셉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은 단순히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의 자손들에 관한 족보라는 사실입니다(2). 요셉은 야곱이 사랑하던 라헬에게서 낳은 자식입니다. 아마도 베냐민은 그 때 너무 어리거나 태어나지 않아서 이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다른 형들보다 더 사랑하여 채색 옷을 지어서 입혔습니다. 야곱의 편애는 다른 형제들과 요셉 사이에게 불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또 요셉은 아버지에게 형들의 잘못을 고하여 형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을 형제들과 아버지에게 말하여 미움을 사게 됩니다(3-11). 그 꿈은 다름 아니라 형들과 부모가 그를 섬기게 될 것임을 뜻하는 꿈이었습니다. 어느 날 야곱은 요셉에게 들에 가서 아버지의 양떼를 치고 있는 형들에게 가서 그들이 잘 있는지 보고 오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잘 있다’는 것은 ‘샬롬(평화)’입니다. 평화를 아버지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보냄 받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에 말씀에 순종하여 형들을 보러 갑니다. 멀리서 채색옷(다양한 색깔로 수놓여진 소매와 발끝이 가려지는 긴옷. 왕족, 고관, 귀족의 고급의 의복)을 입은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형제들은 ‘꿈꾸는 자’가 온다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그를 죽이고자 합니다. 다행히 장자 르우벤이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살리기 위해서 죽이는 대신 구덩이에 넣자고 했습니다. 르우벤은 나중에 그를 건져 아버지께로 돌려 보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르우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다가 앞장서서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합니다. 결국 요셉은 은 이십에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18-28). 평화의 소식을 가지고 오기 위해 보냄을 받은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서 은 이십에 팔리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그림자를 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평화를 가지고 오시기 위해서 오셨지만 형제인 가룟 유다에 의해 은 이십에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팔리십니다. 요셉이 이후에 참된 평화를 야곱의 집에 가지고 오는 것 같이 예수님도 팔리셨지만 샬롬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뒤늦게 요셉이 팔려간 것을 알게 된 르우벤은 한탄하지만 결국 다른 형제들과 함께 요셉이 죽은 것을 위장하여 아버지에게 그렇게 알립니다. 이로써 야곱은 심한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한편 요셉은 이집트 파라오의 경호 대장 보디발의 종으로 다시 팔리게 됩니다 (29-36).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자신의 동생을 죽인 가인의 영이 야곱의 집에 머물고 있음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집안에 팔려간 요셉을 통해서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은 구약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교회에도 죄의 성향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을 초월하여 평화를 가지고 오십니다. 우리 안에도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예수님 안에서우리 죄악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성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주시고 형제 자매와 평화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죄성을 십자가 못박고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죄성을 거스르고 하나님과 이웃과 화평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37장에서 시작되는 야곱의 족보에 앞서 이삭의 장자로서 에서의 족보가 먼저 언급이 됩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에서가 자발적으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난다는 것입니다(6-7). 여전히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그는 가나안 족속의 여인과 결혼하여 가나안 족속들과 유대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에서는 약속의 땅을 떠나 스스로 영구적으로 거할 장소를 택하여 갑니다. 이로써 에서의 후손들은 하나 같이 그 지역의 종교와 문화에 혼합되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언약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에서의 자손들인 에돔 족속들의 관계를 보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배격하고 공격하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족보를 통해서 에서가 큰 나라와 민족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신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에서는 야곱보다 먼저 자신의 소유지를 갖고 있었고, 먼저 커지게 됩니다. 아직 야곱은 자신의 소유지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분명히 야곱보다 커져 갑니다. 하나님은 이전에 리브가의 뱃속에 두 국민, 곧 두 민족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5:23). 지금은 에서가 강성하고 커져가지만 언젠가 에서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때에 성취가 됩니다. 에돔 족속의 영광이 한 때는 더 큰 것 같지만 하나님은 리브가와 야곱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십니다. 야곱은 그 약속을 믿고 아버지 이삭이 거주하던 땅에 지속적으로 거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언약 안에 머무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에서의 족보를 통해서 오히려 야곱에게 하신 약속이 반드시 지켜질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비록 그 기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말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사실을 믿고 때로 어려움을 겪겠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 안에 머물며,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야곱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에게 이전에 당신과 하신 약속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벧엘로 가서 그곳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합니다(1). 야곱은 즉시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가족들에게 벧엘로 올라가 자신을 환란 날에 건지신 하나님께 예배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합니다. 가족들은 야곱의 말에 순종합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이제 가나안 땅의 신들도 섬기는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기는 백성으로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 벧엘에서 뵈었던 하나님, 그리고 라반의 집에서 세겜까지 그리고 다시 벧엘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 그 때 함께 하시고 지켜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한번 앞으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겠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부르셨습니다(11).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주십니다. 그를 통해서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와 왕들이 나올 것이고 또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야곱과 그 자녀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2-13). 야곱은 그곳에 기둥을 쌓고 전제물과 기름을 부어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14-15).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셨고, 앞으로도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한편 야곱과 가족들이 이삭에게로 돌아가는 길에 라헬이 해산과 동시에 죽고 맙니다. 라헬은 아들을 낳다가 죽기 직전에 그 아들을 베노니(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르지만 야곱은 그 아들은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이라고 짓습니다. 오른손은 영예로운 지위를 의미합니다. 라헬은 베들레헴 길에 장사를 지내게 됩니다. 야곱은 라헬을 위해서 비석을 세우고 후대까지 전해 집니다. 가장 사랑받았지만 가장 먼저 야곱의 곁을 떠납니다. 야곱과 일행들은 다시 길을 떠나고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르우벤이 야곱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야곱은 그것을 들었지만 침묵합니다(22). 르우벤이 왜그렇게 했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 일을 잊지 않고 말년에 자녀들에게 복을 베풀 때 이것이 르우벤이 장자로서의 권리를 다 누리지 못하는이유로 제시합니다(49:3). 이어서 야곱의 자녀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야곱의 아들 열 둘의 이름을 정렬하면서 그가 번성한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이후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로 갑니다. 이삭은 나이 180세까지 생존하여 있다가 죽어 에서와 야곱의 손에 장사됩니다(27-29). 창세기 25장부터 35장까지는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약속을 이루시는 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그들의 의심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루셨습니다. 특히 야곱이 무사히 다시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그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이 지켜지는 것을 봅니다. 그 과정은 평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야곱의 여정 가운데 늘 평탄하고 기쁨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기쁨과 슬픔과 속임과 속음, 고난과 인내와 위로가 늘 공존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야곱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축소판처럼 보여집니다. 신앙의 여정 속에서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자신의 힘과 계략을 의지하던 야곱의 예전의 모습과 같이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야곱의 그런 부분들 마저도 하나님은 고치셔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저와 여러분들도 우여곡절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부족한 것들을 고치시며 꼭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며 예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세겜에 머무는 야곱은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을 잊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긴 했으나 그 넓은 곳이 종착지 아니라 벧엘로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야곱과 가족들은 세겜 땅에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디나는 그곳의 여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습니다. 그곳의 생활과 문화에 점점 동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아직 야곱의 가족들은 여전히 다른 신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35:2). 그런 가정에 큰 화가 생겼습니다. 디나가 세겜의 딸들을 보러 갔다가 세겜 족속의 족장 세겜이 강제로 디나를 취했습니다. 그런 후에 세겜은 디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 그녀를 아내로 삼고자 합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올때까지 침묵하고 야곱의 아들들이 돌아와서 이 말을 듣고 분노합니다(7). 그것은 디나와 이스라엘, 곧 야곱에게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세겜과 디나를 결혼을 시키고 앞으로도 서로 통혼하며 그 땅의 주민과 같이 살아갈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세겜은 디나만 아내로 주면뭐든지 다 하겠다고 합니다(8-12). 야곱과 아들들은 세겜 족속들의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으면 그렇게 하겠다고 속여서 대답합니다. 하몰과 세겜은 결혼 이야기를 숨기고 그 주민들을 속여 할례만 받으면 야곱과 야곱의 가족들의 제물이 모두 그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그 주민들이 좋게 여기고 모두 할례를 받습니다(18-24). 그들이 할례를 받고 아파서 아직 힘을 쓰지 못할 때 디나의 오빠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차고 나가서 세겜 족속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제물들을 전리품으로 취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디나를 데리고 나옵니다(25-29). 야곱은 이 말은 듣고 두 아들을 책망합니다. 오히려더 큰 어려움에 야곱과 가족들이 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그러면 그들이 디나를 창녀 취급을 하는 것이 옳으냐고 되묻고 34장은 마무리 됩니다. 야곱의 말처럼 그 아들들의 행동들로 야곱과 그 가족들은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학자들은 창세기 34장은 성경에서 가장은 지저분한 장이라고 말합니다. 강간, 복수, 비겁함, 비열함, 잔인함, 속임수, 살육이 모두 다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악한 면이 강조가 됩니다. 하지만 야곱의 부족함과 자녀들의 폭력성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켜 가십니다. 야곱의 가족들에게서 죄악 된 삶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조금씩 고쳐 가시면서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 악하여 때로 이런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까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또 우리 스스로를 볼 때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족하고 악한 나를 받아 주시고 약속을 이루어 가실까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 된 삶 속에서도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또 우리의 부족한 삶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고쳐 가시며 우리를 향한 약속을 이루십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죄악이 가득한 세상과 나 자신에 실망하지 말고 그분의 신실함을 믿고 나아갑시다. 감사함으로 결국 당신의 언약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에서가 400명의 장정들과 함께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고 야곱은 그의 자식들을 각각의 어머니에게 맡깁니다. 두 종의 자녀, 레아와 그의 자녀, 라헬과 요셉 순으로 자녀들을 배치합니다. 에서가 공격하면 라헬과 요셉이 가장 안전할 수 있도록 취한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허리를 일곱 번 굽히며 종으로서 에서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나아갔을 때 에서는 야곱에게 나아와 안고 목을 어긋 맞추며 입맞추고 웁니다(1-4). 에서는 야곱을 반갑게 맞이 했습니다. 에서는 야곱과 함께 있는 여인과 자녀들이 누구인지 물어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을 주어 은혜로 주신 아내와 자녀들이라고 합니다(5). 이어서 종들과 레아와 라헬과 자녀들이 나아와 에서에게 절합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오면서 자신이 본 떼들이 어떤 의미인지 묻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에서에게 보낸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보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뵙는 것 같고 형도 자신을 기뻐하기 때문에 주는 선물이라고 합니다. 에서는 거절하지만 야곱이 강권하자 받습니다. 야곱이 에서에서 보낸 선물은 이후에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를 가리킬 때 쓰던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소제). 그것은 향기로운 냄새로서 화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얍복 강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야곱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복을 에서에게도 일정부분 되돌려 줍니다. 야곱의 선물을 받고 에서는 야곱에게 함께 떠나자고 하지만 야곱은 자식들과 양 떼와 소 떼가 지쳤기 때문에 당장 떠날 수 없다고 합니다. 대신에 에서가 먼저 가면 천천히 따라가겠다고 정중하게 거절합니다(12-13). 야곱이 에서의 호의를 거절한 이유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인데 에서가 있는 곳은 가나안 땅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언젠가 세일로 가서 에서를 만나겠다고 말한 후 각자의 길로 갑니다.
야곱은 숙곳(오두막)이라는 곳에 이르러 우릿간(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상당 시간 머물고 세겜으로 갑니다. 야곱은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의한 지역인 세겜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정착을 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처럼 그 장막 친 곳을 돈으로 삽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곳의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짓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부르시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신 것을 경험하고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셨고 지속적으로 만나 주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후 자신의 힘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 온 것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변화 시킬 뿐만 아니라 에서까지도 통제하셔서 야곱과 화해를 이루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우리의 관계만 회복시키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관계도 회복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잊지 않았습니다. 관계를 위해서 가야할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과 이웃과 관계를 잘 맺어 나가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관계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소홀히 않기를 바랍니다. 또 은혜의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납니다. 그 수가 많아서 야곱은 그곳을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으로 ‘마하나임’이라 부릅니다(1-2). 그리고 야곱은 에서가 사는 에돔 땅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종을 보내어 형에게 동생인 야곱이 왔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야곱은 에서를 ‘주’라고 부르고 자신을 ‘종’이라고 부르며 아주 낮춥니다. 야곱은 에서가 오래 전의 일로 자신에게 보복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마침 종은 에서가 400명의 남자와 함께 오고 있다고 보고를 합니다. 야곱은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온다고 생각했습니다(3-6). 야곱은 꾀를 내어 자신과 함께 있는 가축과 사람들을 두 그룹을 나눕니다. 에서가 와서 한 편을 치면 다른 한편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함 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자신이 이렇게 많은 재물과 가족을 얻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에서의 손에서 건져 달라고 합니다. 야곱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을 가는 길에 있으며, 또 조상에게 그자손을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시겠다는 언약에 근거해서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7-12). 자신의 꾀와 방식으로 살던 야곱이 이제 한 층 더 성숙한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서에게 줄 예물을 준비하여 여전히 자신의 꾀에 의지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에서를 위한 예물을 준비하고 자신의 가축과 가족들을 다 얍복 강을 건넌 후에 야곱이 홀로 남았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치열하게 몸싸움(씨름, 레슬링)을 벌입니다. 그는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칩니다. 그래도 야곱은 그 사람을 놓지 않았습니다. 날이 새려고 하자 그 사람이 이제 그만 자기를 가게 하라고 합니다. 아마도 해가 뜨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어 야곱이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보호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이 자신에게 축복을 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묻습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뒤꿈치를 잡다’, ‘속이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제 속이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혹은 ‘하나님께서 싸운다’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알려주는 대신 축복해 줍니다. 야곱은 그제서야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 이라는 뜻의 ‘브니엘’이라고 부릅니다(24-32). 하나님께서 야곱과 씨름하시고 힘의 근원인 허벅지 관절을 치신 것은 여전히 남아 있는 그의 혈기와 자신의 꾀를 의지하고 살아가지 못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힘으로, 심지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것과 같을 정도로 힘을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허벅지 관절을 치시고, 해가 뜨기 전에 가셔서 자신을 보존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으로써 그에게 약속된 축복을 받도록 하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싸워 이기는 육체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육체의 힘을 치시고 하나님만 바라도록 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리는 이름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육체의 힘과 노력을 의지하기보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루가 됩시다. 아멘.
야곱에 대한 라반과 라반의 아들들의 태도가 변했습니다. 야곱이 점점 더 부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시기심을 느낀 것입니다. 그 때 그 동안 보이지 않게 야곱을 인도해 오시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제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1-3). 이에 야곱은 레아와 라헬을 불러서 이제 라반을 떠날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다시 라반이 자신을 속이고 아내와 자식들을 빼앗을까 염려하여 몰래 아내와 자녀들과 자신의 가축들을 데리고 떠납니다. 그 때 라헬은 라반의 집의 수호신인 드라빔을 야곱 몰래 훔쳐서 갑니다. 당시에 드라빔은 종종 그 집안의 재산권이나 집에서의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따라서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몰래 가지고 나온 것은 야곱이 더 이상 라반의 종이 아니라 라반의 재산의 일부를 정당하게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17-20).
삼일 후에 라반은 야곱이 도망친 사실을 발견하고 추격하여 일주일만에 야곱이 있는 곳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이미 라반이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아무런 책임도 추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라반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지만 드라빔을 가지고 간 것을 추궁합니다. 야곱은 라헬이 훔친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라반이 찾아서 그 드라빔이 나오는 사람은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라반은 라헬의 낙타 안장에 숨긴 드라빔을 찾지 못했고 오히려 야곱의 책망을 받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충실하게 했지만 라반은 그렇지 못했던 지난 세월을 말하고 이에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하나님께서 지난 밤에 라반을 책망했음을 말합니다. 이에 라반은 야곱과 언약을 맺고 그곳의 돌을 무더기로 쌓아 서로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야곱은 다른 아내를 두지 않을 맹세의 증거로 삼습니다(21-54). 만약 언약을 어기면 비록 서로 떨어져 있지만 하나님께서 둘 사이를 심판하시기로 합니다. 라반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자녀들과 손자들을 축복하고 보냅니다(55).
오늘 말씀에서 주인공은 라반, 야곱, 라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서 야곱에게 다시 약속을 기억하게 하시고, 가라고 명하시고, 라반의 위협을 제거하시는지, 또 둘 사이의 언약의 증인과 심판자가 되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 안에서 약속한 모든 복들과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오늘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또 하나님께 신실하게 응답하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닥치는 위협들도 미리 제거하시거나 그분의 철저한 통제 아래 두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도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에 순종합시다. 어려움 속에서 여전히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그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라헬과 레아의 자식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로 얼룩져 있습니다. 현대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보기 힘든 말씀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첩을 두는 것은 큰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자식을 얻기 위해 첩을 두는 일은 관용되던 시대였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을 볼 때에는 이 사건들의 초점이 후손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시기심을 통해서 자식이 많아지게 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고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약속하신 자녀를 인간적인 관점이나 아름다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랑을 덜 받던 레아의 태를 여시고, 라헬의 태를 닫으셨습니다. 하지만 라헬은 자신의 종 빌하를 첩으로 주어 합법적인 자식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빌하를 통해서 단과 납달리를 낳습니다. 이에 레아도 자신의 종 실바를 첩으로 주어 갓과 아셀을 낳게 합니다. 이후에 라헬은 레아의 아들인 르우벤이 가지고 온 합환채를 먹기 위해서 레아에게 남편을 양보합니다. 레아는 다시 잇사갈과 스불론과 딸 디나를 낳게 됩니다(20). 오랜후에 라헬의 기도는 응답되어 요셉을 낳게 됩니다. 이렇게 야곱에게 아들만 11명이 됩니다. 야곱의 가정이 비록 시기와 사랑에 대한 욕심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들의 태를 여시고 자손들을 있게 하시고 야곱의 후손들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와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들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조상들이 될 것인데,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교회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요셉을 낳은 후 야곱은 이제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현재 야곱의 상태를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야곱에게 자손을 주셨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땅에 대한 약속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 약속을 이루고자 그 땅을 떠나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라반은 야곱을 붙잡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더 일을 하도록 합니다. 야곱은 꾀를 냅니다. 이번에는 야곱이 라반을 속입니다. 양과 염소 중에 점있는 것과 아롱진 것, 다시 말하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어서 값을 제대로 못 받는 것을 자신이 가지겠다고 합니다(32-33). 그래서 라반은 문제가 있는 양과 염소를 자기 아들들에게 시켜서 야곱에게 주고 정상적인 양과 염소 떼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습니다(34-36). 그러면 얼룩무늬나 점이 있는 양이나 염소는 태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게 되기에 라반에게 훨씬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야곱은 남은 라반의 양떼를 치면서 양과 염소가 물을 마시며 짝짓기를 할 때 양이나 염소의 눈 앞에 있는 색깔에 영향을 받아 새끼에게 얼룩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는 데 필요한 부를 야곱이 얻도록 하시는 간섭이었습니다(37-43). 이렇게 많아진 부 때문에 라반과 그 아들들은 이제 야곱이 자기의 고향,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땅으로 가도록 허락해 줄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게 야곱에게 당신께서 하신 약속을 지켜 나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으로 많은 자녀들을 주셨습니다. 또 그 약속을 위해서 야곱에게 큰 부를 주시기도 합니다. 야곱의 부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에게 하신 약속을 지켜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때로는 인식하고 때로는 인식하지 못할 때도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는 데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재물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신 복을 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재물의 복을 사용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야곱은 벧엘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목자들을 만나게 됩니다(1-3). 야곱은 그들에게 어디에서 왔는 지 물었고, 하란에서 왔다고 하자 라반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목자들은 라반의 딸 라헬이 양 떼를 몰고 온다고 알려줍니다(4-9). 야곱은 라헬을 보자마자 달려가 라헬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일 수있도록 우물에서 돌을 옮겨 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라반의 조카이며 리브가의 아들임을 알려줍니다. 라헬은 아버지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고 라반은 조카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입맞추고(반가움의 인사) 집으로 인도하여 들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라반의 집에서 일합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일한 것에 대한 값을 정하라고 했을 때 야곱은 그 삯으로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합니다. 라헬의 언니 레아는 시력이 약했고 라헬이 더 곱고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시력이 약했다는 것은 눈에 어떤 병이 있어서 외적으로 볼품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칠년 동안 삼촌 라반을 섬겼고 드디어 약속한 날이 되어 라헬과 결혼하여 합방을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라헬이 아닌 레아를 라반이 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삼촌에게 그것을 따지자 그곳 풍습에서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결혼하지 않는다며 칠일 동안 더 일하면 라헬을 주겠다고 하며 또 칠년을 더 일하라고 합니다. 속임수의 달인인 야곱이 라반에게 속은 것입니다(21-30). 야곱은 졸지에 두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당연히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레아가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함을 보시고 레아의 태를 여셔서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31). 레아를 통해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가 태어나게 됩니다(32-35).
오늘 말씀에서의 핵심 내용은 그동안 속임수로 살아왔던 야곱이 라반을 통해서 속게 되는 것과 야곱의 결혼을 통해서 야곱의 자녀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인간의 악함과 속임수, 질투와 시기 등이 섞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야곱은 속아서 레아와 결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라반의 속임수는 그 자체로 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악함조차도 야곱에게 자녀가 많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는 것으로 바꾸십니다. 또 하나님께서 야곱의 사랑을 받던 라헬이 아니라 덜 사랑 받고 외모적으로 볼품 없는 레아를 통해서 먼저 자녀를 낳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때 볼품 없고 약한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라반에게 속게 함으로 야곱을 연단 시키시고, 레아와 라헬의 경쟁심과 시기심을 통해서도 자녀가 많게 하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 심지어는 잘못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 역사하시고 당신의 약속을 지켜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악함을 연약함으로 정당화해서는 안됩니다. 일부러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역사하길 바래서도 안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연약함 마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지 연약함을 핑계삼아 악함을 정당화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의 연약한 모습에 실망할 때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성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악함과 연약함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말에나 일에나 늘 실수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약함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죄악을 참되게 회개하고, 그것을 넘어 역사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이삭은 야곱에게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 땅이 아닌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아내를 찾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삭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손과 땅과 복의 약속이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야곱은 부모님의 말씀대로 그의 외삼촌이 있는 밧단아람을 향하여 갑니다(1-5). 이삭이 야곱의 장자권을 비로소 인정한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이런 모습을 본 에서는 자신이 가나안 여인과 결혼한 것이 잘못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자신의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과 결혼을 합니다. 이런 에서의 모습은 어느정도 자신의 삶을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지만 해결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마엘도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과 관계를 맺으며 부모님을 만족시키고자 했던 그의 노력도 결국 헛되게 됩니다(6-9). 에서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이 아닌 자기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는 것일 뿐 하나님께 인정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해가 져서 한 곳에 돌을 베게 삼아 누워서 잡니다. 그 때 야곱은 꿈에서 계단 같이 생긴 사닥다리가 그 땅 위에 있고 하늘에까지 닿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 곧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 내리락 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계단 끝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당신께서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밝혀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누운 그 땅을 야곱과 그 자손에게 주고 야곱의 자손이 땅의 티끌과 같이 되어 서, 동, 북, 남쪽으로 뻗어 나가고 모든 족속이 야곱과 그의 자손을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과 늘 함께 하며 어디로 가든지 지켜 주시고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이루실 때까지 야곱을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0-14). 이것은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장면입니다. 장차 야곱의 후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그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이 다 통일(하나가)되게 하실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엡1:10).
야곱은 잠에서 깨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며 경외심을 가집니다.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여기고 그곳에 제단을 쌓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리고 젊지 않은 야곱(당시 약76세)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무사히 다시 그곳으로 돌아와 약속의 땅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어떤 조건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시면 자신도 신실하겠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리브가를 구하기 위해서 밧단아람으로 향하던 아브라함의 종은 낙타와 많은 것을 가지고 갔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밧단아람으로 향하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극도로 험하고 어려운 길을가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타나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야곱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 주신다면 자신도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야곱과 일종의 구두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야곱을 이미 택하셨고, 보이지 않게 그를 인도하시다가 때가 되어 그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를 직접 찾아와 주셔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찾아오셔서 함께 해 주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장소입니다. 그곳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약속을 미리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곳은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야곱이 극도의 어려움과 두려움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곳입니다. 우리가 극한의 어려움과 두려움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임마누엘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늘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벧엘의 하나님을 날마다 의지하며 많은 두려움과 어려움 속에서도 늘 함께 하시며 여전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26장 34절-35절에서는 에서가 헷 족속과 결혼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불신 결혼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근심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위해서 그 곳의 여자들과 결혼 시키지 않고 자신의 친족 중에서 결혼 대상을 찾은 것과 대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관계 없는 삶을 살고,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살고자 하는 삶의 양식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27장에서 펼쳐진 장자의 축복에 대한 에서와 야곱의 쟁탈전에서 왜야곱이 승리할 수 밖에 없는지 보여줍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늙어 눈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죽기전에 장자 에서에게 장자의 복을 내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리브가가 알게 되었고, 리브가는 야곱이 그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이미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창25:23). 오늘 말씀은 리브가가 그것을 의식해서 이렇게 했다고 볼 수도 있고, 단지 야곱에 대한 그녀의 편애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둘 중에 어떤 견해를 택하든 중요한 것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 이 복에 대한 쟁탈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하신 약속의 확인과 성취와 확장이었습니다(27:27-29). 야곱은 이 복을 받을 장자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서가 그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 그것을 야곱에게 팔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삭이 에서를 장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야곱이 이삭과 에서를 속인 것은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삭은 야곱에게 장자가 받아야 할 모든 복을 주었습니다.
뒤늦게 야곱이 자신의 복을 가로챈 것을 알게 된 에서는 크게 통곡하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동생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30-41). 이러한 마음은 4장에서 보았던 가인의 마음, 곧 뱀의 후손의 마음입니다. 리브가는 그러한 생각을 알게 되었고 야곱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내는 계획을 세웁니다(42-46). 만약 야곱이 죽게 된다면 이삭이 야곱에게 준 복은 산산조각 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도 이루어질 수 없게 됩니다. 리브가의 조치로 야곱은 라반의 딸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번성하게 되어 열 두 아들을 낳습니다. 이는 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복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실현하는 그릇이 됩니다.
에서의 삶의 방식은 이방인의 삶의 방식, 가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에서는 그러한 삶의 방식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장자의 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삶은 불신자와 같은 삶을 살면서 천국만 가길 원하는 오늘날 잘못된 신자들의 모습과 병행이 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그러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에 항상 관심이 있었고 그 언약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 자체를 믿고 추구할 때 그 언약 안에 포함된 언약적 복이 임하는 것이지 복 자체만 바라는 것을 바른 신앙의 자세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복에만 관심이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읽고,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한 복을 이 땅에서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창세기 26장은 창세기 전체에서 이삭을 주인공으로 전개 되는 유일한 장입니다. 그리고 시간 상으로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입니다. 아브라함이 경험한 것과 유사하게 이삭도 흉년을 경험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애굽에 내려가기 전에 나타나셔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머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하고 복을 주고 그 땅을 이삭과 그 자손에게 주시고 그 자녀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질 것이었습니다(1-6).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의 갱신이며 재확인이었습니다. 이삭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에 머뭅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7-8). 이러한 행동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부족한 이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땅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그랄 땅의 왕이 이삭이 리브가를 포옹한 것을 보고 그를 불러 책망합니다. 아비멜렉은 그 백성들에게 명하여 아무도 이삭과 리브가를 건들지 못하게 합니다(9-11). 이는 아브라함과 이전에 맺은 약속을 지키는 그랄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이삭은 그 땅에서 백배의 소출을 내고 큰 부자가 됩니다. 이에 그곳 사람들은 시기를 하고 그곳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이삭은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머물며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파고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 대로 부릅니다. 이삭의 종들이 샘의 근원을 얻었을 때 그랄의 목자들이 와서 그것을 빼앗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싯나’는 ‘대적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과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 그랄의 목자들은 이삭을 대적했습니다. 그런 위협과 대적 속에 있는 이삭에서 나타나셔서 다시 약속을 확인시켜 주십니다(24). 이삭은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후에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과 함께 이삭에게 와서 계약을 맺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조약을 맺어서 자기들을 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삭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그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풂으로서 그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샘을 얻었기 때문에 그 샘의 이름을 브엘세바, 맹세의 우물이라고 짓습니다(26-33). 이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언약의 자손으로서이삭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34-35절은 이삭이 이야기가 마무리가 되면서 동시에 이어지는 27장과 28장의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로 넘어가는준비로서 제시 되고 있습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과 달리 가나안 땅에서 아내를 찾습니다. 이는 에서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야속을 무시하면서 사는 사람인지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삭의 모습은 아브라함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흉년을 피해 간 곳에서 자신의 거짓말로 그곳 사람을 위험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부를 얻고,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약속을 확인해 주실 때 그분을 예배하고, 그런 그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아비멜렉이 보고 와서 그와 조약을 맺습니다. 이러한 이삭의 모습은 아브라함이 저지른 동일한 실수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로서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확장하고 갱신하고 세워가심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삭의 부족한 믿음과 연약함을 넘어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삭의 순종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복을 우리의 부족함을 넘어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오늘도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시는 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