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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레위인과 제사장을 재정비한 다음 군대 지휘관들과 더불어 앞으로 성전에서 신령한 노래를 부를 사람들을 세웁니다. 그들은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들의 아들들이 중심이 됩니다 그들은 앞에서 본 제사장들의 순서와 같이 열두 명이 24개조를 정해서 섬깁니다. 아삽의 아들들이 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아삽의 지휘 아래 왕의 명령을 따라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두둔의 아들들은 여두둔의 지휘 아래 수금을 연주하며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헤만의 아들들은 나팔을 부는 자들입니다. 헤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왕의 선견자라고 불립니다. 이 사람들은 왕의 지휘 아래 순서를 따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이들은 성전에서 제금(심벌즈)과 비파(현악기)와 수금(하프)과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왕은 이들을 큰 자나 작은 자나 제비를 뽑아 섬기게 함으로 모두가 질서 있게 섬기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찬양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1절에서 ‘신령한 노래’말의 본래의 뜻은 ‘예언하다’는 뜻입니다. 성전 찬양대의 노랫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성전 찬양대의 책임자 중 한 명인 헤만은 하나님의 선견자라고 합니다. 선견자는 미리 보는 자, 곧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입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전달하는 것과 동일한 기능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 찬양대의 찬양 인도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 다윗 왕의 지휘 아래 있습니다(6). 또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제비뽑아 순서 대로 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들은 성전 찬양대가 찬양 할 때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왕의 감독을 받으며 질서를 따라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찬양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특히 참된 왕이시고 새언약의 중보자이시며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된 구속 사역을 노래하는 말씀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시편 찬송입니다. 어제 구역모임에서도 배웠지만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할 때 시편을 부를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만 불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시편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련된 찬송을 우리가 불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찬송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삼위 하나님의 큰 일을 노래할 때, 하나님은 참된 은혜를 우리 삶에 더하시고 말씀이 흥왕하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23장에서 레위인들을 재정비했다면 오늘 말씀은 레위인들 중에서 아론의 직계 후손들, 아론계 제사장들의 재정비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론의 자손 중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불로 향을 사르다가 죽었습니다(레위기 10장). 그들이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남은 형제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들을 대신해서 제사장직을 맡았습니다. 그 자손들이 다윗 때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엘르아살의 자손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직무를 맡는데 있어서 제비를 뽑아 차등 없이 직무를 맡게 합니다. 여기서 ‘성전의 일을 주관하는 자와 하나님의 일을 주관하는 자’는 분명치 않은데 먼저는 대제사장이 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혹은 단순히 제사장으로서 하는 일에 대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1-5). 여하튼 숫자가 많은 것에 차등을 두지 않도록 제비 뽑아 순서를 정했습니다. 그 일을 서기관 스마야가 맡았습니다. 공정을 위해서 공개적으로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 순서가 7-18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순서대로 성전에 들어가서 각각 15일씩 섬깁니다. 이들은 옛날 아론에게 주어진 직무, 곧 그 자손들과 함께 구별되어 몸을 성결 하게 하고 영원토록 지극히 거룩한 자가 되어 여호와 앞에 분향하며 섬기며 그 이름을 받들어 축복하는 일입니다(대상23:13). 비록 대제사장 아론은 죽었지만 그의 직무가 자손들을 통해서 지속되도록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입니다(19). 다윗은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서 재정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레위인들 중에서 아직 임무를 배정 받지 못한 남은 자들도 제비 뽑아 직무를 맡겨 차등이 없이 직무를 맡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20-31)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로 다윗은 임의로 직무를 재정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례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맡겨 주신 일을 할 때 차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능력에 따라서 많이 맡기고 능력이 없다고 조금 맡기지 않았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일이 집중되지도 않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사역도 마찬가지 원칙이 적용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세우신 규례, 말씀이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또 모든 사람이 함께 서로를 섬기고 교회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섬김만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직분자들이 해야 하는 일은 성도들이 지닌 은사가 교회에서 적절하고 질서있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바른 질서 가운데 모두가 서로를 섬기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성전을 위해 준비했던 다윗은 이제 나이가 많아 늙었습니다. 다윗은 다른 믿음의 조상들과 같이 평안한 노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게 그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다윗은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고 성전을 건축하고 난 뒤에 변화하게 될 레위인들의 역할을 재조직합니다. 그 수가 3만8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성막에 하나님의 궤가 있었고, 또 백성과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동하게 될 때 언약궤와 제사의 도구들, 성막의 부분들을 각기 담당하던 레위인들이 있었습니다. 게르손 자손들은 성막을 구성하는 커튼과 덮개와 줄들을 설치, 해체, 이동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고핫 자손들은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궤와 성소에 있는 떡상과 등잔대와 제단들과 봉사를 위해 쓰는 기구들과 커튼 등을 운반하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또 므라리 자손들은 성막을 지탱하는 판자와 기둥과 받침과 말뚝과 줄 등을 설치하고 운반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민3:21-37).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머물러 계실 것입니다. 이에 레위인들의 성막을 돌보는 책임이 변화가 필요하게 됩니다. 다윗은 레위인들이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의 감독하에 성전의 수많은 일들을 맡게 합니다(24-32). 그들은 제사장들을 도와 성전과 뜰과 골방에서 섬기며 모든 거룩한 물건들(물두멍, 떡상, 등잔대, 향단, 언약궤 등)을 정결하게 하고 제사를 위해 사용할 무교전병(발효되지 않은 반죽으로 만든 얇은 팬케익)을 굽는 일과 저울과 자로 무게와 길이를 측정하거나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며 찬송을 드리고 절기 마다 드리는 번제를 위해서 항상 돕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성전이 완공된 후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직무를 주어지는 것과 더불어 그 만큼 성전에서는 지속적이고 많은 제사가 드려질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죄 용서와 은혜의 역사가 끊임 없이 풍성하게 지속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제 성전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전보다 더욱 풍성하고 활발하게 백성과 교제하게 될 것입니다. 포로기 후의 백성들은 이러한 더욱 풍성한 하나님과 교제를 사모하며성전을 재건하는데 마음을 모았을 것이고, 또 성전이 완성되고 나서는 더욱더 하나님을 사모하며 예배가 풍성할 수 있도록 했을 것입니다.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는 완벽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주일 공예배를 통해서 한 백성으로서 풍성하게 삼위 하나님과 교제할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의 제사를 드립니다(롬12:1-2).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풍성하게 하나님과 교제를 누립시다. 매주일 예배를 통해서 풍성한 교제를 사모하시며 예배합시다. 또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의 제사를 매일 드리며 하나님과 더욱 자주 많이 교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다윗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많은 준비를 합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이방 사람들에게 돌을 다듬는 일(석수)을 시켜 돌을 준비하고 못을 만들철, 각종 성전 기구들을 만들 놋, 백향목을 시돈과 두로에서 수입해 준비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솔로몬을 불러 반드시 성전을 하나님의 명성과 영광에 맞게 웅장하게 건축할 것을 부탁합니다. 솔로몬은 온순한 사람(평화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선택한 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고 평화를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친히 아버지와 같이 보살펴 주시고 영원한 왕위가 이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전하여 주고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백성을 바르게 다스리고 율법을 잘 지키도록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지켰을 때 주시는 언약적인 복을 상기시켜 줍니다(13). 또한 두려워하지 말고 성전을 건축할 것과 왕으로서 바르게 통치할 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금 십만 달란트(약 400만 kg)과 은 백만 달란트(약4천만 kg)와 놋과 철은 셀 수 없을 만큼 준비하였고, 또 나무들도 준비를 많이 했지만 솔로몬에게 이에 더하여 준비하라고 합니다(14). 또 장인들도 적절하게 잘 배치하여 일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에 함께하시는 것입니다(16). 뿐만 아니라 다윗은 다른 모든 지도자들에게도 솔로몬을 도우라고 부탁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평화를 주신 것은힘을 다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성전 건축)을 위한 것임을 상시키겨 줍니다. 다윗은 이렇게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많은 인적, 물질적 준비를 하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독려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정당한 성전 건축자인 솔로몬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당시에 어렸기 때문에 성전을 당장은 건설할 수 없지만, 다윗이 죽은 후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다윗은 준비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기억하고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이 일을 이루라고 합니다. 역대기가 기록될 당시에는 화려한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후에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두번째 성전을 짓고 있거나 지은 후일 것입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의 타당성과 의미를 다시 상기시켜주고 성전 건축이 시급한 과제임을 온 백성이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성전이 재건된 후라면 솔로몬 성전은 아니지만 이미 지어진 성전을 통해서 솔로몬이 지은 성전과 같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또 지도자는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율법대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포로기 후 백성들은 성전 건축이라는 공동의 과업을 함께 수행할 때, 또 성전을 중심으로 모일 때 이스라엘의 통일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성전 건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참된 성전이자 왕이셨고, 또 그분의 지체들인 성도들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고전3:16, 6:19, 엡2:21). 성도들이 걸어 다니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 성전의 재료는 은과 금, 백향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또 신자들의 순정입니다. 말씀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이것은 항상 성도에게 시급한 과제입니다. 미루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동시에 이것은 많은 준비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로 성도들을 모으십니다. 서로가 함께 말씀에 순종하고 서로 돌보아주고 보듬어주며 서로가 죄로 부터 지켜주시고, 서로 기도하며 독려하므로 성전이 세워집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거룩한 성전임을 잊지 말고 순종함으로 성전을 지속적으로 건축하고 또 서로 힘을 모아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며 성전을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다윗은 자신의 승리에 도취되어 잠시 어리석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 빠지기 원했습니다(1-8). 놀랍게도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을 멈추시고 다윗에게 친히 성전이 세워질 곳을 알게 하셨습니다. 다윗의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징계하셨지만 긍휼을 베푸셨고, 성전을 어디에 세워야 할지 알려주셨습니다(9-22:1).
참으로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셔서 징계를 통해서 다윗을 회개하도록 하셨고, 이전에 성전을 지어 영원히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더 구체화하셨습니다. 다윗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사용하셨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더욱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경험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를 더욱 생각하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죄에 빠지고 넘어지는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나아갈 때 자비를 베푸십니다. 죄에 대한 징계를 내리실지언정, 그 가운데자비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여전히 더욱 강하게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징계는 우리 죄에 대한 값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아버지의 훈계입니다. 우리가운데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손을 내밀어 끌어주고 붙드시고 더욱 자비하심을 보여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는 바울의 말은 그만큼 하나님의 죄 용서하시는 은혜가 큼을 보여줍니다. 넘어진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회개할 때 더욱 그 약속을 구체화시키시고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요압이 암몬을 완전히 정복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사무엘하 11장에서는 다윗이 이 때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음을 기록하고 있지만 역대기 기자는 생략합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다윗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승리를 통해서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하는 것에 더 초점을 줍니다. 기록하지 않아도 독자들은 이미 다윗의 허물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물 있는 다윗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 기자는 다시 한 번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초점은 다윗의 공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과 함께한 용사들이 용맹스럽게 블레셋의 덩치가 큰 장군들을 죽인 것을 기록합니다. 이 전투로 승리의 공은 다윗이 가져가겠지만 결국 다윗은 혼자가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 있던 용맹스럽고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있었던 것입니다(4-8). 비록 적들은 거인족으로 덩치도 크고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원수들로서 반드시 제압되어져야 할 적들입니다. 다윗의 용사들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가능했습니다. 다윗의 편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전쟁에 나아갈 때 승리를 주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과 그 부하들이 전쟁에서 승승장구하여 적들과 싸워 이긴 것을 기록합니다. 이것은 역대상 17장 20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비록 적들이 아무리 강해 보이고 강한 무기를 가졌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싸울 때 승리를 얻게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강하고 강력한 무기로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해올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며 승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싸워야 할 대상은 무엇입니까? 오늘날에는 신앙생활에 온갖 편리함과 안락함으로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만듭니다. 정말 강력하여 안 넘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약간 불편하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다윗이 블레셋과 모압과 소바와 아람 사람들을 친 후에 암몬 자손들과 치른 전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암몬 왕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을 때 다윗은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냅니다. 하지만 하눈과 그의 참모들은 다윗이 스파이를 보낸 것이라고 여겨 그 사절단들의 옷을 엉덩이까지 자르고 수염도 잘라 돌려 보냅니다. 이것은 다윗에 대한 수치와 모욕이었습니다(1-5). 하지만 다윗은 먼저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인내합니다. 반면에 암몬 자손들은 다윗의 심기를 건드린 줄 알고 주변 나라들에게 무기를 빌리고 용병을 삽니다(6-7). 암몬과 연합군이 메드바에 진을 치자 다윗도 요압과 온 군사들을 보내어 싸우게 합니다. 요압은 아우와 군사들을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백성과 성읍을 위해서 힘을 내자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 전쟁을 맡깁니다. 결국 요압은 아람 사람들을 물리쳤고, 후퇴하는 아람 사람들을 보고 암몬 자손들도 후퇴하며 성읍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 있는 아람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에 하닷에셀의 군대사령관 소박이 지원군을 이끌고 진을 칩니다.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나아가 싸워 승리를 거둡니다. 하닷에셀은 이스라엘에게 패하였고 다윗과 평화의 관계를 맺고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기를 원치 않았습니다(8-19).
오늘 말씀은 또 다시 다윗의 업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승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다윗 뿐만 아니라 요압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울 때 승리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에 그의 편이 되시고 승리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위한 싸움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를 주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게 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왕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고 살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실현되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삶 속에서 다스림에 순종하며 살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회복되고 확장 됩니다. 이런 삶은 특정한 직분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약속이자 명령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우리를 통해서 우리 주변에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은 후에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아냅니다. 블레셋은 사울의 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던 지중해 해변에 터를 두고 있던 민족이었습니다. 또 모압을 쳐서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던 소바도 쳐서 무찌르고 소바를 도우러 온 아람 사람들도 쳐서 이깁니다. 다윗은 소바의 군인들을 무장해제 시킵니다. 또 아람에는 수비대를 두어 반역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전쟁을 통해서 얻은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행한 참된 왕은 하나님이셨습니다(1-8). 하맛 왕은 다윗이 원수인 소바 왕을 무찌르자 다윗에게 스스로 복종하며 조공을 바칩니다. 다윗은 그것도 하나님께 바칩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에돔도 물리칩니다. 다윗은 에돔에 수비대를 두어서 관리 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도록 하셨습니다(9-13). 나아가 다윗은온 이스라엘을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며 적절한 인재들을 잘 배치하여 내부적으로도 잘 다스립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바르게 백성을 섬기는 왕이었습니다. 그런 왕이 섬길 때 나라는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튼튼하게 세워져 갑니다.
다윗의 승리의 비결은 그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이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어디로 가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보다 더 탁월하게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그래서 승리의 삶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삶을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지만 실제적인 싸움은 다윗과 군사들이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종으로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다윗보다 더욱 더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날마다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승리하는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사무엘하 7장과 내용상 거의 동일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궁도 완공하고 하나님의 궤를 장막으로 모시고 오는 것도 이미 완료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보다 위대하시고 높으신 하나님의 언약궤가 자신보다 못한 성막에 있는 것을 봅니다. 이에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집(성전)을 지어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을 나단 선지자에게 물었더니 나단도 그것을 옳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당신을 위한 집을 짓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서 집(왕조)를 세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전은 그의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통해서 지어질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 중에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에는 부적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른 주변 나라로부터 구원하시고 평화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다윗은 그 일을 완수했습니다 (삼하7:1). 하지만 전쟁을 통해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하지 못합니다(대상28:3). 대신에 그의 아들인 평화의 왕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짓는 것 자체를 반대하신 것은 아닙니다. 단지 다윗이 성전을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다윗에게 그의 자손들의 왕조가 끊어지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다윗의 자손을 통한 하나님의 왕국은 끊이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1-15). ‘영원히’라는 말을 반복하시며 그 언약의 확실성과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그 약속을 황송하게 여겼지만 또한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지켜 주시도록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복을 영원히 누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16-27).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바벨론에서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왕조가 끊어진 것 같이 느꼈을 것입니다. 영원한 언약이 깨어진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약속의 땅으로 왔고 왕 같은 지도자도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다윗에게 약속한 말씀이 회복되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왕조를 이어갈 참된 왕을 기다립니다. 그분이 바로 메시야입니다. 다윗의 왕조를 이어가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회복시킬 바로 그 다윗의 후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왕조를 영원히 견고하게 할 다윗의 후손으로서 족보를 기록하고(마1:1), 마가는 그분이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눅2:4-7).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왕국을 영원히 통치할 참된 왕이십니다. 그분은 죄를 정복하시고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영원하고 저와 여러분은 그 나라의 영원한 백성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시고 믿으시고 하나님의 영원한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보호와 다스림을 받으며 날마다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성막을 완성하고 다윗은 그곳에 언약궤를 모셔 오는데 성공합니다. 이에 감사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전적인 헌신을 의미하고 화목제는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고 화목하게 되어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제사입니다. 또 번제는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바치라고 하신 제사이기도 합니다.
이제 무너진 예배가 회복되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다윗은 감사와 전적인 헌신과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과 평화를 얻습니다. 그리고 온 백성에게 축복하고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므로 감사와 기쁨을 표현합니다(1-3). 나아가 다윗은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게 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도록 아삽을 찬송의 인도자로 세웁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도 세우고 나팔을 불어 기쁨을 표현하도록 합니다(4-6). 또 그 날에 다윗은 아삽과 그의 형제들을 예루살렘에 음악 맡은 자들로 세우고 기브온의 큰 산당에는 오벧에돔과 그의 형제들과 여두둔의 아들 오벧에돔과 형제들, 그리고 사독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에게 기브온 산당에서 번제를 드리고 율법을 가르치도록 세웁니다(37-43). 기브온 산당이 커서 성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그곳에서 더 많은 백성들이 제사를 그곳에서 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노래를 만들어 줍니다(7-36). 이 시는 세부적인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96편(23-33절)과 동일합니다. 또 34절-36절은 시편106:1/ 107:1/ 118:1,29/136편에서 후렴구처럼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서 감사 찬송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찬송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언약에 신실한 사랑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찬송이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시편은 감사와 기쁨과 찬송과 탄식을 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주신 찬송가입니다. 자주 시편을 묵상하며 부르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또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참된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그리스도의 피로 당신의 새 백성 삼으신 은혜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늘 생각하고 감사하며 기쁨으로 그분을 예배하고 찬송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다윗은 자신의 성을 지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시 모시고 오기 위해서 준비 합니다. 이전에 왜 실패했는지 깨닫았습니다(1-2, 참조. 민3장). 수레가 아니라 레위인이 메고 옮겨야 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레위의 모든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백성을 모읍니다. 다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오고자 합니다. 다윗은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언약 궤를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행하는 왕으로 한 층 더 성장합니다. 그는 분명하게 자신의 실패의 원인을 알았습니다(13-15).
또 다윗은 레위의 지도자들에게 노래하는 자들을 세우고 악기 연주하는 자들을 세웠습니다.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도 레위인들을 중에서 특별히 선별합니다. 예배의 일부를 맡은 자들을 아무나 뽑지 않았습니다(16-24). 왕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그의 일과 예배를 맡은 사람들의 역할과 권위가 구별되었습니다. 이제 다윗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가서 여호와의 연약궤를 즐겁게 메고 옵니다. 하나님의 방식에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셔서 일이 순조롭게 진행이 됩니다. 이에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수송아지와 숫양은 가장 고급의 제물입니다. 일곱마리씩 바친 것은 다름 아니라 온전하고 온전하게 바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7’이라는 숫자는 거룩함과 완전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예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예배에 기쁨이 넘치고 이스라엘 온 무리는 인도자와 악기 연주에 맞춰 힘차게 찬송을 부릅니다(25-28). 하지만 이 예배에 함께 못하는 한 사람, 미갈이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왕 답지 않은 모습을 보고 업신여겼습니다(29). 다윗은 하나님께서 참된 왕이시기 때문에 그 왕이 오시는 것에 기뻐했지만, 미갈의 왕은 다윗이었고, 그녀가 생각하는 왕은 백성을 근엄함으로 다스리는 이방 적인 왕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가 석 달 동안 선한 일을 마음에 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아 실패한 것을 다시 회복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예배를 하나님의 방식으로 드리는데 실패한 다윗은 다시 말씀을 통해서 실패의 원인을 알고 바르게 섬기게 됩니다. 그럴 때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배를 섬기는 자들을 레위인들로만 구성합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제사와 관련된 모든 일을 레위인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모두 그것에 참여하고 함께 기쁨을 누립니다. 찬양은 온 회중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공적인 예배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성가대와 악기의 역할은 온 회중이 함께 감사와 기쁨을 표현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이지 성가대만 찬송하고 온 회중이 지켜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매주일 드리는 예배에 힘을 다해 찬송하고 마음 모아 기도함으로 참여합시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붙드시고 함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언약궤를 모시고 오는 것에 실패 한 후에 다윗의 번성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두로 왕 히람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다윗이 그 만큼 두로 왕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역대기 저자도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았다는 것을 다윗도 알았고 그의 나라가 번성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또 아들들을 나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주로 대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누릴 자녀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기 저자는 이전에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에 섬겼던 블레셋이 다윗을 대적하러 나와서 하나님께서 지시한대로 싸워 승리를 거뒀다는 기사를 기록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반복적을 묻고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인도하시며 승리를 주십니다. 결과적으로 다윗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지고 하나님께서는 주변 나라들이 다윗을 두려워 하도록 했습니다(8-17). 이것은 하나님께서 순종할 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언약의 복들이었습니다.
언약궤를 모셔오는 일에 실패한 후에 다윗의 긍정적인 모습을 다룸으로써 저자는 다시 한 번 포로기라는 실패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보여줍니다. 참된 다윗이신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셨고, 그분을 믿을 때 그 완전한 의지함과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때로 우리가 넘어지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선한 마음이 생각하지 못한 어려움을 불러 올 수도 있습니다. 여러가지 ‘실패’라고 불릴 만한 상황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온전한 순종하심과 의로움 때문에 우리는 부족함과 실패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신실하고, 다시 묻고, 다시 순종하며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어떤 실패와 절망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찾아오시고, 물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시온 성으로 처음으로 모시고 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지휘관들과 함께 의논했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온 회중을 모아 그것을 선포합니다. 회중의 동의를 구한 것입니다. 모든 회중은 그것을 좋게 여겼고 다윗은 온 회중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 올립니다. 온 회중을 이렇게 모았다는 것은 함께 예배하기 위해서 불러 모은 것입니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회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온 회중이 동의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언약궤를 새 수레에 모시고 갑니다. 그런데 기돈의 타작 마당에서 소들이 놀라서 뛰어 언약궤가 떨어질 뻔 했습니다. 웃사는 그것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잡자마자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 날에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고 오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임시로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둡니다.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십니다. 이것은 다윗이 언약궤를 모시고 와서 예배를 회복하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가장 먼저 참된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오려고 하는 바른 계획을 세웁니다. 사울의시대 동안 언약궤 앞에서 예배하지 못했던 온 회중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반드시 레위인 중에서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어야 합니다. 다윗은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당연한 것입니다. 누구도 언약궤에 손을 대어서는 안됩니다. 포로기 후에 돌아온 백성들은 다시 한번 그 의도가 좋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좋은 분이시지만 동시에 거룩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거룩함은 치명적입니다. 다른 이방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섬김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의 예배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멋지고 화려한 예배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드렸는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르게 드렸는지 더 관심있게 보십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예배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드리는 예배인지 말씀을 통해서 점검해야 합니다. 말씀에 따라 개혁되어야 합니다. 이런 예배의 자세가 우리가 개혁되는 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원함을 굴복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에 어떠한 마음으로 참여하는지 돌아봅시다. 예배 순서 하나 하나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의식하며 참여하고 있는지 돌아 봅시다. 그리고 예배의 회복에 한 마음으로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이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시간 상으로는 11장 이전입니다. 사울이 살아 있을 때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다윗은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도 이미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셨다는 것을 알고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보여줍니다. 특히 사울과 같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 중에서도 다윗을 따른 자들을 가장 먼저 다룹니다. 물론 대다수의 베냐민 지파는 사울을 지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가 강조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혈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활을 잘 쏘고 자유자재로 물매를 던지는 싸움에 익숙한 자들입니다(1-7). 갓 지파의 일부도 다윗을 추종했습니다. 이들 또한 모두 용사로서 창과 방패를 익숙하게 다루는 싸움에 탁월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윗 민병대의 지휘관들이 됩니다(8-15). 다윗 편에 선 베냐민과 유다 자손을 대표하여 아마새에게 성령이 임하여 다윗과 평화의 약속을 맺습니다. 이들이 다윗에게 나아온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 편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들을 받아들이고 지휘관으로 삼았습니다(16-18). 또 시간이 흘러 다윗이 블레셋 가드 왕의 부하가 되어 사울과 전쟁하려고 할 때 므낫세 지파에서 다윗에게 돌아 온 자들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다른 블레셋 왕들의 반대로 다윗은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와 이스라엘과 싸우지는 않았었습니다. 날마다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군대와 같은 큰 군대를 이룹니다(19-22). 이어서 헤브론에서 남쪽 지역의 왕이된 다윗에게 여호와의 말씀대로 나라를 돌리려고 하는 모든 지파 출신의 사람들의 명단이 열거됩니다. 유다, 시므온, 레위, 베냐민, 에브라임, 므낫세 반지파, 잇사갈, 스불론, 납달리, 단, 아셀, 르우벤, 갓 모든 지파에서 싸움에 능한 장수들이 다윗에게 나아왔습니다. 이들은 모든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자 왔고, 남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 한 마음으로 다윗을 왕을 삼고자 했습니다. 이에 온 이스라엘은 다윗을 왕으로 모시는데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즐기고 기뻐했습니다. 한 마음으로 큰 잔치가 삼 일 동안 열렸습니다(23-40).
온 이스라엘의 마음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데 모아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 주인을 섬기는데 모아졌습니다. 그래서 큰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고, 온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 교회의 머리, 교회의 주님으로 주셨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데에 온 세상의 교회는 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향한 헌신과 서로를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마음을 모아야 하는 것은 한 주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매우 다양한 인종과 출신과 배경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묶는 것은 바로 한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는 비결은 한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한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데 한 마음이 되어 주님과 함께 즐거워하며 주님과 서로를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사울이 죽자 온 이스라엘은 당시 헤브론에 있던 다윗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을 왕으로 택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온 이스라엘과 함께 여부스 성을 쳐서 함락하고 그곳을 수도로 삼습니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 곧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점점 강해졌습니다(1-9).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지속적으로 그 땅의 주민들을 쫓아 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는 많은 용사들, 곧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역대기 저자는 다윗과 함께 이방 백성을 좇아내는 일에 함께 한 용사들을 기록합니다. 가장 먼저 소개 되는 사람이 학몬의 아들 야소브암입니다. 다윗과 함께 초창기에 함께 했던 30명 중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는 창을 사용하여 삼백 명을 죽인 강한 용사였습니다. 도도와 엘르아살도 함께 했습니다.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밭을 지키기 위해서 다윗과 함께 싸웠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구원하셨습니다(10-14). 그들은 또한 블레셋과 싸울 때 다윗이 그의 고향인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마시고 싶어하자 적들을 뚫고 우물물을 떠 온 충성된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부어드립니다. 다윗에 대한 엄청난 헌신과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목숨을 걸고 다윗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어려운 일들도 기꺼이 하던 자들 이었습니다(15-19). 이어서 나오는 우두머리들도 다윗을 지지하고 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이루어지는 다윗의 왕위를 열렬히 지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명단들을 분명히 제시함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왕권을 주신 것일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도 인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20-47). 이는 다윗이 왕으로서 해야 할 직무의 성격도 보여줍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해서 이들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동역자로서 함께 하나님의 왕국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맡겨진 사명에 온 이스라엘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교회는 영웅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한 사람으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직분자를 세우십니다. 그리고온 교회가 그 직분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단적으로 사람을 세우지 않으시고, 청중들의 의견을 투표를 통해 반영합니다. 우리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서 투표를 통해 직분자를 세우시고, 임직하게 하셔서 온 교회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힘껏 도와 하나님의 다스림이 교회와 사회와 이 땅 전반에 미치도록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옆의 사람들을 동역자로 주셨습니다. 함께 힘을 북돋아주며 서로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용납하며 교회와 가정과 이 땅을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과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족보의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 본격적으로 왕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블레셋과 길보아 산에서 전투 중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의 죽음 이전에 그의 아들들의 죽음을 먼저 다룹니다. 그리고 사울이 죽게 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특히 역대기 저자는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그의 온 집안이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1-6). 하지만 사실상 사울의 온 집안이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손자 므비보셋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장은 사실상 사울의 집안에서 사울을 이어 왕이 될만 한 인물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오늘 말씀은 이러한 사울의 비참한 최후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또 신접 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않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이기로 하셨고 그의 나라를 다윗에게 주었다고 합니다(7-14). 이러한 일련의 평가들은 다시 한 번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지 않고 그분 만을 의지하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불성실할 때 심판하신다는 것과 그 심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셔서 보살펴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또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도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그의 아들 참되고 완전한 왕 예수님을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붙드십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불성실할 경우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심판과 징계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길 원하십니다. 어느 시대이건 간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성실하게 순종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순종을 요청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말씀에 성실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온 이스라엘이 그 족보대로 계수(was listed)가 되었습니다. 2장에서 8장까지 조상들과 포로기 후에 돌아온 자들의 족보까지 대강을 살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다시 포로 귀환 시대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선조들이 바벨론에 잡혀간 것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임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언급합니다(1). 하지만 그후손들은 돌아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범죄로 인해서 영원히 버린 것이 아닙니다. 돌아온 사람을 분명하게 기록하여 놓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포로 귀환기를 다루는 에스라와 느헤미야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에 돌아 왔을 때 그곳은 비어 있는 곳이 아니라 산발랏과 같은 이스라엘이 재건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방해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구별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이 거주한다고 밝히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에 온 이스라엘 지파가 살고 있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왜냐하면 유다와 베냐민은 남 유다 왕국을,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북 이스라엘 왕국을 대표했던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나뉘어져 있던 그들이 이제는 예루살렘 함께 거하며 함께 민족과 성전을 재건하고 적들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숫자도 정확하게 956명으로 기록해 놓습니다.
나아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족보도 정확하게 기록해 놓습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가 아니거나 이방인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족보에 기록되지 않은 제사장들을 부정하게 여겨 직무에서 배제했습니다(스2:62, 느7:64). 특히 오늘 말씀을 보면 이름만 기록하지 않고 정확하게 맡은 직무와 책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다양한 종족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그 종족별로 주어진 구역을지키는 것과 주어진 직분과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맡은 직무와 책임을 다해야 했습니다(14-34).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되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어지는 기록에서는 이제 왕들의 족보에 따라서 역대 왕들에 대해 언급되기 시작합니다. 그 시작이 사울 왕입니다. 그 또한 이전에 예루살렘에 거주했던하나님이 택한 왕이었습니다. 왕의 도시 예루살렘이 재건의 중심입니다.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귀환한 포로 공동체의 중심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온 이스라엘의 중심이자 새 출발점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은 특권이자책임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그들이 맡은 직무에도 충성을 다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참된 성전에서 참된 왕을 모시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자 새 출발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터전과사역의 터전은 세상이지만 교회는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중심이 되어야 하고 늘 새롭게 출발되는 새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그 어떤 것도 끊을 수 없습니다(롬8:39).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가 안전하듯이 주 예수님의 품 안에서 거하는 우리도 안전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책임도 있습니다. 우리는 공적 예배에 성실하게 나아와 전심으로 예배하고, 교회 안에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맡은 바 사명을 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를 믿는 사람들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더욱 강건해 집니다. 우리 평생에 주의 백성으로서 주어진 특권을 누리고 책임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베냐민의 두번째 족보 입니다. 앞에서(7:6-12) 간략하게 언급된 베냐민의 족보가 다시 등장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보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보충이 있느냐 하면 바로 이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족보에서 주목할 점은 베냐민의 후손들이 모압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입니다(8). 이는 다윗이 모압 여인 룻의 후손으로 나오게 되는 것을 다소 긍정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합니다. 뿐만 아니라 베냐민 자손의 브라아와 세마는 가드 주민들을 쫓아 냈다고 합니다. 가드는 블레셋의 한 지방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적이었습니다. 그들을 쫓아냈다는 것은 베냐민 지파의 강력함을 보여줍니다. 또 베냐민 자손들 중 예루살렘에서 거주하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은 본래 유다 지파의 땅입니다. 하지만 포로기 후에 돌아온 사람들은 중에서 지도자들과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몇몇이 예루살렘에 제비 뽑아 머무르게 했는데 (느11:3), 그 때 남은 자들입니다(참고. 9:8). 그들은 백성들 중에서 10분의 1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재건하고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사울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사울은 기브온의 조상의 후손이었습니다. 기브온 산악 지역으로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었습니다. 높은 곳에 세워진 마을이기 때문에 그곳에 큰 산당이 있었고 그곳에서 솔로몬이 유명한 일천 번제를 드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족보는 사울 이후에 열 세 세대를 보여줍니다. 이는 포로 시대 초기입니다. 이런 사울 가문의 족보는 실패한 왕 사울의 자손들도 포로시대를 마감하고 다시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주역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은 베냐민 자손의 족보입니다. 특히 사울 왕의 족보가 강조가 됩니다. 이들은 더 이상 왕족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실패한 왕의 후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한 이스라엘 재건의 한 구성원이 됩니다. 비록 실패한 왕의 후손들이지만 포로기 후에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이스라엘로 돌아온 믿음의 백성들입니다. 특히 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적으로부터 지키는데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과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가 중요 합니다. 출신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태신앙이냐 뒤늦게 믿게 되었느냐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른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매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새로운 생명을 날마다 주시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잘못도 회개하고 돌이킬 때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잇사갈과 베냐민과 납달리, 므낫세, 에브라임, 그리고 아셀 지파의 족보를 다루고 있습니다. 잇사갈은 용감한 지파로서 묘사됩니다. 그들의 군사적인 용맹함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의 정확한 숫자가 기록된 것을 보아 다윗 시대 때에 다윗이 자신의 군사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기록한 자료를 활용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비록 다윗이 옳지 못한 마음으로 실시한 군사력 조사였지만 후대에 귀한 자료로 사용됩니다. 잇사갈 또한 분명히 이스라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재건 계획에 함께 회복되어야 할 지파임을 확인시켜 줍니다(1-5). 베냐민 지파는 막내 지파이지만 그 숫자가 상당히 늘었습니다(비교.역대상 12:29). 아주 약했던 지파였지만 하나님께서 번성하게 하셨습니다(6-12). 베냐민의 족보를 기록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지파 모두를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로서 포함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납달리와 므낫세도 마찬가지 의도로 족보가 언급됩니다(13-19). 에브라임 족보도 만찬가지이지만 특별한 일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로 그 형 므낫세와 함께 이스라엘의 아들로 취급되어 요셉 지파로 두 지파를 이룹니다. 그 족보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비록 에브라임의 처음 아들들은 모두 죽었지만 모든 것을 잃은 후에 얻은 아들을 ‘브리아’를 통해서 자손들이 생겨 결국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조상이 됩니다(20-27). 역대기의 저자는 그것을 직선적으로 기록하여 강조합니다. 이는 모든 것이 없어진 상황에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회복과 건설을 숙제로 안고 있는 당시 백성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조상과 함께 가나안을 정복하고 땅을 분배한 여호수아도 절망과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태어난 한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왔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아셀의 아들들은 인구 수는 적었지만 다른 자파 못지 않게 정선된 우두머리, 곧 용감한 자들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30-40). 이는 적은 숫자가 돌아온 상황에서 숫자가 중요하지 않고, 각자가 최선을 다할 때 다시 회복될 것을 기대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의 지파가 없어질 뻔만 에브라임의 절망적인 시작점에서 결국 여호수아, 구원자라는 이름을 가진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배출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같은 이름을 지닌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절망 속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자로서 오셨다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 눌려 희망 없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희망 없이 살아가던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당신을 뜻을 이루시도록 일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주님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 절망 중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다시 번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매일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레위의 족보입니다.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가 있는데, 그핫을 먼저 소개합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모세와 아론이 속한 종족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족속은 제사장으로 임명되어 섬겼습니다. 포로귀환 후 예배 회복에 중요한 직분이기에 먼저언급이 됩니다. 그 족보가 3절에서 15절까지 소개됩니다. 이어서 게르손의 자손들이 소개가 되는데, 그 지파에서도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사무엘입니다. 선지자로서 활동을 했던 사무엘이 언급되는 것은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언약궤가 성전에 안전하게 안치되기 전과 후에 찬송을 맡은 자도 소개가 됩니다. 성전에서 찬송을 맡은 사람들도 모두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만이 대표적인데 그핫의 후손으로역시 사무엘의 후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헤만이 혼자서 그일을 다 감당한 것은 아니고 그의 형제(친형제는 아님) 아삽와 에단이 그의 오른쪽과 왼쪽에함께 있습니다. 아삽은 므라리의 후손으로 합창단의 악장이면서 언약궤 앞에서 제금을 켜는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또한 시편 중 열 두편을 썼습니다(50,78-83편). 또 에단은 므라리 지파 출신으로 므라리는 성전에서 장막의 모든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48). 다시 짧게 아론의 후손, 곧 대제사장의 족보를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지만 분명하게 구별된 직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므라리에 속한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 장막의 모든 일을 맡았고, 헤만을 중심으로 아삽과 에단은 노래하는 일을 맡았고, 아론의 자손들, 곧 대제사장들은 번제단과 향단 위에 분향하며 지성소의 모든 일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일을 ‘계열대로(32)’ 곧 '질서정연하게' 했습니다.
이어서 레위 지파가 분배 받은 성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54-81). 레위인들은 제사와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 따로 땅을 분배 받지 않고 각 지파에 들어가 성읍과 초원만 받습니다(수21:1-3). ‘사방 지계’라는 말은 레위 지파의 거처가 이스라엘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핫 자손은 중에서 아론의 자손인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에게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는 도피성 헤브론을 비롯하여 13 성읍이 주어집니다. 나머지 그핫 자손에게는 므낫세 반 지파에서 10 성읍이 주어지고, 또 게르손 자손에게는 잇사갈과 아셀과 납달리, 므낫세 반 지파에서 13 성읍이, 므라리 자손에게는 르우벤과 스불 지파 중에서 12 성읍이 주어집니다(54-65). 총합 48개의 성읍이 레위 자손들에게 주어집니다. 이어지는 66-81절은 이미 주어진 성읍의 보충 설명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레위 지파 자손들 중에서 그 역할과 직무가 다양했지만 질서 있게 말씀을 따라 유지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레위 지파에게 거주할 곳을 주기 위해서 모든 지파가 부담했던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포로기 후에 돌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처럼 이전에 레위 지파가 주어진 역할을 질서정연하게 잘 감당하여 제사가 바르게 진행되고, 또 그들의 생계를 모든 지파가 힘을 모아 분담했을 때 나라가 건실했었다는 역사는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회복하고 레위인들의 역할을 다시 적절하게 배분해야 한다는 과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참된 레위인이자 제사장인 예수님의 머리 되심 아래에서 직분자들이 바른 질서 가운데 그리스도와 성도를 섬기고 성도들이 직분자를 신뢰하며 함께 힘을 모아 예배에 참석하고 책임 있는 역할을 행해야 합니다. 이런 책임 있는 직무와 역할 수행으로 함께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육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족보를 소개합니다. 르우벤은 장자였지만 야곱의 첩과 동침하여 장자의 명분을 잃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요셉 자손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유다 지파도 강력한 지파이지만 장자의 명분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요셉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를 가리킵니다. 르우벤의 족보에서 특이한 것은 브에라의 때에 그들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에게 사로잡혀갔다는 것입니다. 르우벤 자손들은 요단 동쪽에 거주하면서 동쪽으로 세력을 넓혔지만 결국 앗수르에게 패망하고 말았습니다(1-10)
이어서 등장하는 족보 역시 요단강 동편에 유업을 받은 갓의 족보입니다. 르우벤 맞으편에 살면서 그들은 유다 왕 요담과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때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부터 그들의 족보가 기록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 족보의 기록은 없었다고 합니다(11-17). 갓 지파는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정복하는 일을 잘 감당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요단 강 동편에서 기업을 받은 두 지파 반은 믿음의 싸움을 잘 싸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에 응답하셔서 승리를 주셨습니다(18-22). 므낫세 반 지파도 영역을 넓혀 나갔습니다(23-24). 하지만 이들은 결국 하나님께 범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겼습니다. 참된 남편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사랑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렛셋(불)에게 두 지파 반을 사로잡아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그곳에서 머물고 있습니다(25-26).
역대상 저자는 왜 두 지파 반이 망하게 되었는지 상기 시켜줍니다. 다시는 그러한 일을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동시에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정복한 것도 그들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사용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렇게 앗수르를 통해서 벌하시는 것도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셔서 그들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역대기를 기록할 때는 이미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열방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그분만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다윗이 속해 있는 유다 지파의 족보가 이어집니다. ‘유다의 아들들’이라고 하면서 본문은 다윗을 제외한 나머지 가문에 대한 단편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갈미는 광야에서 모세를 대적했던 아간의 아버지입니다. 좋은 가문이지만 항상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혈통이 전부가 아니라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특별히 역대기 저자는 유다 지파의 자손들을 소개하면서 다른 개인들은 간단하게 언급하면서 지나가는데, 9-10절에서 야베스에 관해서는 좀 더 상하게 소개합니다. 야베스(슬픔, 수고라는 뜻)는 귀중한 자(원어의 뜻은 ‘영광을 얻은자’임)였다고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보다 수고롭게 얻은 아들입니다. 하지만 역시 이 출생에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존귀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 자신의 지경, 곧 땅을 넓혀 달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손으로 자신을 도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넓혀 달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재산을 넓혀 달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그곳의 이방인들과 이방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언약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되찾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빼앗긴 땅으로 돌아온 포로 후기 백성들에게 야베스는 특별한 의미를 줍니다. 잃어버린 땅을 다시는 죄로 인하여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교훈을 주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족보를 설명하면서 그에 대해서 부연설명을 했던 것입니다(1-10).
이어지는 구절들은 갈렙과 옷니엘에게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께 끝까지 신실했던 지도자 중 하나였고, 옷니엘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을 구원한 첫 사사였습니다(삿3:9). 그의 후손들은 공장(기술자, 목수, 석수 등)이였다고 추가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후에 갈렙의 자손들에 대한 족보가 나오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 유다의 아들 셀라의 족보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특별히 세마포 짜는 일과 도자기를 굽는 일을 가업을 했으며 왕의 후원을 받으며 일을 했다고 합니다(23). 이어서 야곱의 다른 아들 시므온의 족보가 나오는데, 시므온의 자손 중에서 시므이가 가장 잘 번성했고 다른 종족들은 번성을 못합니다. 이것은 시므온이 히위족속의 세겜에서 행한 대학살에 대한 야곱의 저주 때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창34장, 49:5-7). 한 종족만 겨우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언급된 성읍들은 결국 유다 지파 안에서 분배 받은 성읍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힘을 가지고 목장을 차지하여 살고 있고 또 살아남은 이스라엘의 원수 아멜렉 사람을 치고 지금도 살고 있다고 언급합니다(24-43). 이는 포로기에 모두 끌려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때문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다시 돌아 왔을 때 그들을 지지해 준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포로기에서 돌아 온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나라를 새우고 성전을 재건하는 일들을 마치고 약속에 땅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역대기 저자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약한 시므온 지파도 나름대로 믿음의 싸움을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약하다고 해서 약함을 핑계로 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싸움을 했고, 그것으로 얻은 땅에 살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야베스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하고, 시므온 지파와 같이 연약함을 핑계로 삼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강한 유다 지파에 속해 있는 것에 안주하지 말고 믿음의 싸움을 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믿음의 싸움과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다윗의 족보입니다. 앞에서 저자는 다윗까지의 족보를 언급했었습니다(2:9-17). 유다 지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족보를 언급합니다. 이 족보에는 다윗에 대한 자세한 소개보다 그가 헤브론과 예루살렘에서 낳은 자녀들에게 초점이 있습니다. 헤브론은 다윗의 초기에 다스렸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암논, 다니엘(길르압), 압살롬, 아도니야, 스바댜, 이드르암 여섯 명의 아들과 다말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통치 후기에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며 예루살렘에서 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 입할, 엘사마, 엘리벨렛, 노가, 네벡, 야비아, 엘리사마, 엘랴다, 엘리벨렛을 낳았습니다. “밧수아”아는 밧세바의 다른 표현입니다(1-9). 이어서 이 아들들 중에서 솔로몬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이 아들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밝히는 것은 역대기 저자의 의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저자는 다윗의 왕위 계승과 왕좌에 관심이 있습니다. 솔로몬에서부터 시드기야까지는 대략적인 이야기는 우리가 앞에서 열왕기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족보는 그 다음도 말해 줍니다. 17절부터 사로잡혀 간 다음 다윗의 혈통에 대해서 설명해 줍니다. 그 중에서 스룹바벨은 바사 왕고레스가 유대인의 귀환을 허락했을 때 백성의 왕과 같은 지도자가 되어 백성을 인솔했던 인물입니다. 또 귀한 후 성전을 재건하는데 앞장 섰던 인물입니다. 나라는 망했지만 다윗의 보좌를 이어 왕적인 역할을 하던 인물은 있었던 것을 17-24절까지 보여줍니다. 일종의 희망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이 구절들에 언급된 이름들이 그것을 뒷받침해 줍니다. 므술람(회복된), 하나냐(여호와는 자비로우시다), 슬로밋(평강), 브르갸(여호와가 축복하셨다), 하사댜(여호와께서 사랑의 언약을 하셨다), 유삽헤셋(사랑의 언약이 돌아온다).
오늘 말씀은 다윗의 족보를 보여줍니다. 이 족보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다윗과 약속하셨던 언약을 지키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회복시키셨고, 약하게 라도 그 씨앗을 남겨두셨습니다. 이런 족보의 기록은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다시 그들을 회복시킬 다윗 왕과 같은 다윗의 후손을 기대하게 했을 것입니다. 얼마전까지 스룹바벨이 그런 역할을 이미 했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이 있었다는 것과 그 후손의 이름들로 희망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희망이 누구인지 분명히 압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참된 왕으로 오셨고, 우리의 희망이 되십니다. 죄 가운데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참된 소망이 되십니다. 그분은 죄를 씻어 주시며 그분의 통치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참된 왕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는 능력 많은 왕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절망이 찾아 올 때 능력 많으시고 참된 희망이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 모두 말씀드리고 의지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당신의 다스림을 더욱 드러내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도 족보가 이어집니다. 복잡해 보이는 족보이지만 2장에는 이스라엘의 아들, 곧 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족보가 나옵니다. 12명의 아들을 언급하고, 가장 먼저 유다 지파의 족보가 나옵니다. 이것은 다윗 왕의 족보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의 족보를 보면 5절에서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라고 하는데, 가장 먼저 헤스론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헤스론 세 아들, 곧 여라므엘과 람과 글루배(갈렙)을 낳았다고 하는데, 10절을 보면 람을 가장 먼저 언급합니다. 여라므엘이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10절부터는 명확하게 다윗의 직계 조상들만 다룹니다(11-17). 또 헤스론의 아들 글루배(갈렙)에 대한 족보가 나옵니다(18-24). 그 후에 맏아들 여라므엘의 족보가 나옵니다(25-41). 이어서 갈렙의 맏아들 메사의 족보가 나옵니다. 이 족보에서는 헤브론이 강조됩니다(42-49). 그리고 이어지는 족보에서 갈렙의 두번째 아내 에브라다를 통해서는 낳은 자녀들의 족보가 이어집니다(50-55). 서기관 종족은 아론과 함께 백성의 종교적인 생활을 주관하던 훌의 자손들로 성막 봉사와 율법 교육들을 담당했습니다. 겐 종족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속했던 이방 종족으로 이스라엘에 편입 되면서 유다 지파에 흡수되었습니다(삿1:16).
이를 통해서는 알 수 있는 것은 이 족보들의 중심은 분명히 다윗 왕이 속한 유다 족속에게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족보에서는 아주 분명하고 단순하게 다윗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여라므엘과 갈렙의 족보는 매우 복잡하고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족보가 가장 분명한 기준이 되고 그 밑으로 같은 지파의 사람을 시작으로 다른 모든 지파들이 모여들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서 심지어는 이방 민족도 유다 지파에 흡수되어 유다 지파 안에 들어 온 것과 같이 자연 태생이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다윗의 깃발 안으로 들어옴으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족보에서 맏이가 아니라 둘째 셋째가 혹은 막내가 강조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타고난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으로 세워진 메시야 아래로 모일 때 참된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아래로 모일 때 일어납니다. 참된 다윗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자 예수님 아래로 모일 때 참된 영적 이스라엘로 회복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 아래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들어와 있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역대상하는 바벨론 포로 생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후에 백성의 지도자들 중 누군가(아마도 에스라)에 의해서 쓰여졌습니다. 당연히 기록의 목적도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의 재건과 성전의 재건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레스의 칙령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함께 살며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 하신 이유와 심판 이후에 다시 하나님 앞에서 회복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이전보다 좋아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강대국이 이스라엘 주변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대기는 기록되었습니다. 포로로 잡혀 있다가 돌아온 백성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다시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 수 있도록 기록된 것입니다. 특히 초반부(1-9장)에는 족보를 통해서 그들의 정체성을 먼저 보여줍니다. 이 족보는 아담부터 다윗 왕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열왕기와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 왕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나아가 이 족보는 언젠가 이스라엘을 온전히 회복시킬 메시야가 올 것임을 곳곳에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시작입니다. 이 책의 시작에서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어 내려오는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다른 열국들이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31). 나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와 야곱(이스라엘)에 초점을 맞춥니다. 에서의 자손들의 족보가 언급되고(35-54) 이어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족보가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의 후손인 야곱과 언약 밖에 있는 에서의 자손과 대조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조상들에 대해서 언급함으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바른 정체성을 갖도록 합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본래 한 민족이었다는 단일성을 회복하고 돌아온 백성들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이 족보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 족보들이 창세기를 요약한 것으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민족일 뿐만 아니라 온 열방을 하나님께서 다스린다는 것을 다시금 보여주고자 합니다. 역대기 저자는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됨과 정체성을 증진시킵니다.
오늘날 교회의 회복의 시작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교회와 성도 개인이 영적인 포로에서 돌아오는 회복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다시금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의 단일성과 정체성을 회복하여 교회가 다시금 하나가 되고 한 백성이며 하나님께서 택한 복된 백성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참된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로 불러 주셨다는 정체성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백성임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 정체성을 잊지 않고 날마다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벨론 왕을 배반했습니다. 그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그의 모든 군대를 모아 예루살렘을 거의 1년 6개월 동안 포위합니다. 성의 음식은 떨어졌고, 성벽도 무너졌습니다. 이에 시드기야는 남은 군대와 함께 도망을 치지만 결국 잡히게 됩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모두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도 뽑아 버리고 바벨론으로 잡아 갑니다. 아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1-7). 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그의 시위대장(경호실장) 느부사라단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것을 빼앗아 올 수 있도록 해줍니다. 느부사라단은 성전과 왕궁을 모두 불살랐고 모든 집도 불살랐습니다. 성중에 남은 귀족들은 사로잡아 가고 예루살렘에는 비천한 자들만 남겨두어 농부가 되도록 했습니다. 성전의 기구들 중 귀한 것은 다 바벨론으로 가지고 갑니다. 성전의 위엄과 영광을 보여주는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은 황폐하게 됩니다. 또 느부사라단은 성에 남은 대제사장과 부제사장, 장관의 서기관 등을 잡아 바벨론 왕에게 데리고 갑니다. 왕은 그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은 유대인 중에서 사반의 손자 그달리야를 남겨 두어 총독으로 예루살렘을 다스리도록 합니다. 그달리야는 바벨론에게 충성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 왕족인 이스마엘이 그달리야를 죽이고 이집트로 도망하게 됩니다.
한편 바벨론에서는 새롭게 즉위한 에윌므로닥이 37년 만에 유다 왕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나오게 하고 지위를 높이고 정부의 녹을 받아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과 같이 여겨주었습니다. 열왕기하 마지막 단락에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은 지금은 황폐하고 망한 유다이지만 다시 회복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한 줄기 빛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27-30).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속적으로 어기고 범죄한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겠다고 말씀하신 성전도 불에 타고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도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황폐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고 희망의 빛을 남겨 두십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이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심판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거룩하게 되고 새롭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바벨론에서도 느헤미아야와 다니엘과 에스겔과 같은 당신께 신실한 백성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완전히 망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새롭게 당신의 백성을 회복시킬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해결하시고 신실한 자들을 지금도 모으시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시며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여호야김 왕은 삼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다가 배반했습니다. 이에 바벨론 왕은 유다 주변의 나라들을 통해서 유다를 침략하여 치도록 했습니다. 사실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을 통해서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므낫세 왕을 비롯한 유다 백성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1-4). 여호야김이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 그의 시대는 바벨론의 세력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이집트 왕에게 속한 모든 땅을 다 점령할 정도였습니다. 여호야긴도 비교적 어린 나이인 18세에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것은 그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마침내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항복한 여호야긴 왕과 그 어머니와 신복들을 잡아 바벨론의 포로로 데리고 갑니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고 성전의 금 그릇을 다 파괴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패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그것을 예언했었습니다(렘20:5). 또 모든 백성과 지도자와 용사와 기술자들을 데리고 가서 정복 전쟁과 바벨론의 발전에 이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야긴 왕을 폐위 시키고 여호야긴의 삼촌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우고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꿉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도 끝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유다를 벌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지 보여줍니다(10-20).
오늘 말씀은 단순히 역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강대국에 의한 약소국의 패망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구속의 역사로 본다면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반역하고언약을 파기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의 주관자로서 다른 주변 강대국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심판을 실제로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과 저주를 실제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아 죽으셨다는 것 역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책망하시고 때로는 격려하시며, 또 복을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역사를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일하심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요시야 왕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실 것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개혁을 진행해 나갑니다. 먼저 모든 장로들과 백성들을 모으고 율법책을 들려주고 언약을 다시 새롭게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고 언약을 실천하도록 주신 규칙입니다. 이어 모든 백성들도 언약 갱신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유다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없앱니다. 얼마나 많은 우상들을 그동안 섬겼는지 그 죄악이 얼마나 큰 지 보여줍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 안에까지 우상이 들어와 있습니다. 또 산당에서 제사한 제사장들이 더이상 산당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합니다(1-14). 뿐만 아니라 요시야는 자신의 개혁을 지금은 망한 북 이스라엘에 세워진 제단을 없애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전에 여로보암이 세운 제단과 산당을 요시야가 헐고 그 산당을 불사르고 아세라 목상을 불사릅니다. 그 옆에는 여로보암이 제단을 만들 때 제단 위에 해골이 바쳐질 것이라고 예언한 선지자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의 예언이 성취됩니다(왕상 13:2). 요시야는 북 이스라엘의 산당을 다 제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왜 북이스라엘이 망했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또 요시야는 유월절을 지키도록 합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은혜를 기념하고 감사하는 절기였는데, 오랫동안 지켜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월절을 회복함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가 회복됩니다. 이 모든 노력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 이었습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모든 율법을 따라 돌이킨 왕은 없었다고 평가됩니다(24-25).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킨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유다의 멸망도 정하셨습니다(26-27). 요시야는 앗수르를 치러가는 애굽 왕과 싸우다가 결국 전사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았지만,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애굽 왕은 그를 애굽으로 잡아가고 여호아하스의 형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웁니다. 여호야김은 애굽에게 충성했고 11년간 통치하며 하나님께 악을 행합니다(28-37). 이는 유다의 어두운 미래를 예고합니다.
요시야는 개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지 않으실 것임을 이미 여선지자 훌다를 통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개혁을 단행하되 아주 철저하게 개혁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말씀대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던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하니까 하고, 안주시면 안하고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이런 개혁으로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멸망이 요시야 때에 일어나지 않는 복을 주셨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변하고 우리의 삶을 개혁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면 벌을 내리지 않겠다거나 복을 주시겠다고 하는 보상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면서 날마다 죄를 멀리하고 변화 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말씀으로 변혁되는 마땅히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 개혁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습니다. 이 마땅한 개혁을 먼저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정의 지도자들(부모)에게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삶이 말씀으로 개혁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 때문이지 어떤 보상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말씀으로 변화하는 마땅한 일을 교회와 가정에서 행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거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아몬이 죽고 요시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8세에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께 신실한 왕이었습니다. 그가 다스린지 18년째 그가 26살이 되었을 때 서기관(율법학자) 사반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내어 성전의 부서진 곳을 재건하도록 합니다. 요시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에 성전은 등한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비용은 백성이 성전에 드린 은을 감독자의 손에 넘기고 그것을 다시 일꾼들에게 주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이전에 요아스가 성전을 복구하던 방식이었습니다. 요시야는 역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동안 우상 숭배에 물들어 있었던 유다를 개혁하는 일의 시작이었습니다(1-7). 그 때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신명기로 짐작되는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율법학자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그것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왕에게 돌아가 읽어 줍니다. 요시야 왕은 그 율법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조상들이 지은 죄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옷을 찢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백성과 유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선지자에게 물으러 신하들을 보냅니다. 당시에는 여선지자 훌다가 예루살렘 둘째 구역, 곧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왕에게 율법에 기록된 대로 과연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언약을 깨뜨리고 이방인들을 섬긴 유다를 심판할 것입니다. 하지만 요시야 왕은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기 때문에 요시야 왕 때에는 이 심판이 내리지 않고 그 후에 내릴 것임을 예언합니다(8-20). 개혁의 시작은 여호와의 성전을 보수하는 것에서 시작되었고, 그 기준은 율법 책이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시작되는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유다 백성들을 개혁한 것입니다. 그는 성전 보수공사로 시작했지만 율법책을 통해서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자 죄가 죄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 개혁 후에도 하나님의 심판은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삶을 살아간 사람은 심판 중에 살아남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이 됩니다. 우리의 삶도 개혁되어야 합니다. 참된 성전이시자 참된 개혁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개혁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서 우리들의 영혼과 마음과 인격과 삶을 개혁하십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도들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우리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세상 마지막 날에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간 사람들은 칭찬을 받고 육체를 따라서 살아간 사람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말씀을 기준으로 개혁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을 의지하던 선한 왕 히스기야가 죽었습니다.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들 므낫세는 아버지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없앤 산당들을 다시 세웠습니다. 또 이스라엘 왕 아합이 섬기던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의 신을 예배했습니다. 나아가 성전에 다른 제단들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우상도 섬기고, 남자 무당과 점치는 자들을 신뢰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백성들도 악한 길로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이렇게 므낫세와 그의 꾐을 받은 유다의 범죄가 이전에 하나님께서 멸하라고 하셨던 여러 민족들보다 더 심했다고 평가됩니다(1-9).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당시에는 북이스라엘이 이미 패망한 상태입니다. 패망한 이유도 우상숭배와 회개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 기준을 유다에도 적용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릇을 씻어 뒤집어 놓는 것 같이 뒤집어 버릴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은하나님의 백성 유다도 원수의 손에 넘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므낫세 왕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긴 것 뿐만 아니라 무죄한 자의 피도 많이 흘렸습니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죄를 범한 왕입니다. 그는 자신이 죽었을 때 선왕들의 묘를 확장해서 웅장한 묘를 만들어 그곳에 묻힙니다(10-18). 므낫세는 하나님을 전혀 섬기지 않은 왕으로 기억되고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하시기로 한 이유로 그의 죄를 지적할 정도로 죽은 후에도 불명예를 안게 됩니다(왕하23:26). 그의 아들 아몬도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아버지를 그대로 닮아서 우상을 섬기고 조상들의 하나님을벌렸습니다. 그는 신하들에게 살해를 당해 죽습니다. 신하들은 그의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삼게 됩니다(19-26).
므낫세는 55년 동안 통치한 왕입니다. 정치를 매우 잘 한 것입니다. 반란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강력한 통치와 앗수르를 비롯해서 다른 나라와 적절한 관계를 맺었을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아주 유능한 왕입니다. 내부적으로 다양한 종교를 허용해 줌으로 인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 아몬도 그런 아버지의 탁월함(?)을 보며 그대로 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모세와 다윗과 맺은 언약을 모두 깨는 행위들이었지만 므낫세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래 집권한 것도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의 통치 말년에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하셔서 회개하도록 하십니다(대하33:12, 하지만 열왕기하에서는 이 내용을 넣지 않아 그의 악함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몬은 아버지의 회개를 보고도 다시 이방신을 섬기는 더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즉시로 심판을 받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에도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기다린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크게 넘어져도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가 씻지 못하는 큰 죄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만 섬기고,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회개하고 새롭게 시작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앗수르 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땅으로 돌아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온 땅의 왕들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히스기야는 어떻게 될까요? 앗수르 왕이 죽었을 때, 히스기야는 죽을 병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사야를 통해서 그것은 죽을 병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가 돌아가는 길에 다시 히스기야에게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병을 낫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삼 일만에 성전에 올라가 예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15년의 수명을 연장해 주시고 자신과 다윗을 위해 이 성도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의 징표로 해시계가 뒤로 10도로 물러나도록 하는 기적도 베풀어 주십니다(1-11).
이 본문은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참으로 들으시고, 그분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세력을 넓혀가던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사절단을 보냅니다. 이 사절단에게 히스기야는 자신의 보물 창고의 모든 것과 가진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님을 높이기보다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며, 동시에 바벨론과 앞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겠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보다 신흥 강대국을 의지하겠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이에 이사야는 히스기야를 책망합니다. 언젠가 이 바벨론이 왕궁의 모든 것과 조상들이 쌓아 둔 모든 것을 바벨론으로 가지고 가고, 왕의 아들 중에 누군가 바벨론 왕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 드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과 자녀들에게 좋지 않은 말씀이라도 그것이 선하다고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에게 불리한 말씀도 선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때로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불편하고 내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악인에 대한 심판 같은 말씀들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른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어떠하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선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믿으셨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복의 말씀 뿐만 아니라 심판의 말씀도 자신에게 이루어지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삶과 십자가에서 얻으신 의로움과 모든 복의 풍성함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전체 성경의 내용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날마다 주님의 선하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신하들에게 랍사게의 말을 전해들은 히스기야는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참담함과 답답함, 분노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백성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해산할 힘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앗수르를 대항하여 일어났는데, 그 일을 완성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앗수르의 신하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랍사게의 말을 다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 결과 앗수르 왕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7). 랍사게는 이스라엘에게 말한 후에 앗수르 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중에 왕이 립나에서 싸우고 있는 중임을 알게 됩니다. 디르하가는 구스 출신의 이집트의 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앗수르 왕을 치러 옵니다. 앗수르 왕은 랍사게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항복을 받아 내려고 합니다. 유다가 항복한다면 큰 전쟁 물자를 얻을 수 있었기 문입니다. 랍라게는 전보다 더 강도를 높여서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의 손에 넘기지 않겠다는 말에 속지 말라고 합니다. 아무 신도 앗수르 왕을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그 편지 펴 놓고 하나님이 홀로 참 된 하나님이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는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며 기도합니다. 다른 신들은 헛된 우상이기 때문에 앗수르를 막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임을 남유다를 구원하시는 것을 통해서 보여달라고 합니다(8-19).
이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와 랍사게의 말을 다 들으셨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앗수르 왕에게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유다를 처녀 딸 시온이라고 부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애정 어린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을 비웃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비방하고 교만하게 행동하고 말을 한 앗수르는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앗수르가 다른 나라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25).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모든 우주를 다스리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모든 것을 꿰뚫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상과 다른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앗수르를 무기력하게 돌려 보낼 것입니다. 이에 대한 증표로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에게 앗수르가 떠나고 예루살렘에서 나는 포도원을 심고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곡식과 과일이 심겨지고 거두어지는 것은 안전과 평화의 상징입니다. 결국 앗수르 왕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한 발의 화살도 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밤에 천사를 보내셔서 앗수르 군인 십팔만 오천명을 치십니다. 앗수르 왕은 결국 나라도 돌아가 우상에게 경배할 때 부하에 의해 죽게 됩니다(29-37).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는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히스기야는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에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또 본인도 산헤립의 협박 편지를 받았을 때 기도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보다 더 잘 들으십니다. 왜냐하면 참된 선지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들으십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유다 왕 아하스를 이어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됩니다. 히스기야는 다른 왕들보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다윗의 길로 행하였다고 평가를 받는 왕입니다. 그는 유다에 있던 산당을 드디어 제거하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예루살렘에서만 예배하도록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섬기던 모세의 놋뱀을 부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놋 조각)’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놋 조각일 뿐이라고 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 아버지가 의지하던 앗수르와 동맹관계를 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원수인 블레셋을 치고 영토를 넓혔습니다. 영토를 넓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위기가 닥쳤을 때 흔들립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한 앗수르 군대가 4년 후에 남유다를 쳐서 많은 성읍들을 정복한 것입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앗수르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많은 은과 금을 성전에서 내어다 주었습니다(1-16). 하지만 앗수르 왕은 약속을 깨고 대군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왔습니다. 히스기야는그 신하들을 보내어 협상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조건적인 항복만 강요합니다. 앗수르의 왕의 대사 랍사게는 히브리말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하여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히스기야 왕을 믿지 못하도록 하여 내분을 일으키려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으로 예루살렘을 치러 왔다고 말합니다. 이집트를 의지하는 것도 도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히스기야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앗수르 왕은 히스기야 애굽(이집트)를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항복하면 지금 사는 것과 같은 삶을 살게 해 주겠다고 설득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나라들도 자기의 신들을 의지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발언을 합니다(17-35). 이 모든말을 들은 신하들과 백성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신하들은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이 모든 말을 히스기야 왕에게 이 일을 전합니다(36-37).
히스기야는 왕은 하나님께 신실했지만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개혁을 단행하고 조상들 대대로 끊지 못하던 죄, 곧 여러 산당을 제거하고 우상을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닥쳤습니다. 어려움에 앗수르 왕에게 은과 금도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큰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무조건 다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직무와 의무를 다 할 때에라도 어려움은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그 어려움을 온전히 당하도록 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 어려움 가운데 함께하시고 또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 내용이 19장에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핏 값으로 주고 사신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영으로 함께하시고, 하늘에서 아버지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여전히 함께하시는 주님을 의지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스라엘에서는 호세아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9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덜했습니다. 앗수르 왕이 공격했을 때 조공을 바쳐 종이 되기로 했지만 나중에 배반합니다. 결국 앗수르 왕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수도 사마리아도 함락 되어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북이스라엘이 결국 멸망한 것입니다(1-6). 이어지는 구절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지켜야 할 법들을 버리고 이방인들과 같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선지자와 선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과 유다에 경고하셨지만 그들이 거부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과 조상들이 세운 언약을 깨뜨렸습니다(7-18). 북 이스라엘이앗수르에 의해 망했고, 이제 남 유다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다도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북이스라엘의 길로 행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도 멸망하게 하실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1세가 시작부터 백성들을 우상숭배의 죄로 몰아 갔습니다. 왕의 책임을 크게 강조합니다. 이제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는 앗수르 사람들이 거주합니다. 하지만 그들 또한 하나님을 섬기지 않자 하나님이 치십니다. 이에 왕에게 하나님을 섬기는법을 아는 사람을 보냅니다. 그는 벧엘에 머물며 사람들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지 가르쳤습니다(28). 하지만 그곳의 사람들도 자신이 고향에서 섬기던 신을 각자 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도 섬겼습니다. 혼합신앙이 사마리아를 점령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풍습은 대대로 이어졌습니다(29-41).
오늘 말씀에서 열왕기하 저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여로보암 왕이 행한 우상숭배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는 자신의 인기나 권력 유지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살도록 목사는 설교하고 권면하며, 장로는 심방을 통해 점검하고, 집사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결핍을 채웁니다. 이 직분들은 예수님의 직분을 이어 받았습니다. 직분자들이 바른 역할을 수행하고 그대로 살고, 성도들은 직분자들의 역할을 진지하게 받을 때 교회는 든든히 세워집니다. 더불어 가정에서 부모님들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정의 직분자는 믿는 부모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 자녀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는 것이 믿는 부모의 1차적인 사명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사마리아에 혼합주의가 주를 이루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혼합주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이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 분명한 지침이 됩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신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는 대상과 방법 모두 하나님께서 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돌아 봅시다. 날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며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남 유다 왕국에서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하스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달리 하나님 여호와께 정직히 행하지 않고 북이스라엘 왕들의 길, 곧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의 길을 걸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당시 이방인들이 섬기던 몰렉 신을 섬기는 방식을 따라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었습니다(레18:21). 뿐만 아니라 산당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1-4). 그는 일시적으로 강한 나라를 세웠습니다. 위기 때에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 왕을 의지합니다(7-8). 아하스는 다메섹에 온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갔다가 앗수르 왕이 섬기는 신의 제단을 보게 됩니다. 이에 제사장 우리야에게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보내고, 우리야는 아하스 왕이 예루살렘에 돌아오기 전에 그 제단을 완성해 놓습니다. 그리고 이제 앗수르 왕이 섬기는 신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또 성전에 있던 놋 제단을 그 제단으로 대체합니다. 성전의 놋 제단은 하나님께 여쭐 때에만 쓰겠다고 합니다. 제사장은 왕의 말대로 합니다(9-15). 또 성전 기구에 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내어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16-20).
오늘 말씀에서 아하스는 위기의 순간에 앗수르를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사야서에서 이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징표를 구하라고 했지만 그는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사 7:11-12). 아하스는 오히려 앗수르가 그렇게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 그들의 신들 덕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상 때 부터 섬겨온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강한 신으로 보였고, 그 신을 섬기도록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저 모르는 것이 있을 때 물어보는 신입니다. 아하스는 자신이 보기에 복을 주는 것 같고, 강해 보이고, 필요해 보이는 신은 모두 섬겼습니다. 위기에서 건져만 준다면 어떤 신도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앗수르를 의지하고 다른 신을 섬길 때 위기를 해결해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었습니다. 앗수르도 나중에 더 큰 제국에 의해서 망할 것입니다. 인간적인 해결책은 당장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입니다. 사실 아하스가 겪는 모든 위기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분으로서 유다가 범죄에서 돌이키도록 징벌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그 징벌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죄악을 행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저 필요할 때만 찾는 신 정도로 섬기고, 일상에서는 온갖 신을 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점집도 다니고 오늘의 운세도 봅니다. 주일에 예배 대신에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세미나와 강연도 많이 다닙니다. 심지어 모든 종교가 구원을 준다고 생각하고 종교를 하나의 취향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시대 정신입니다. 때로 효과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운을 맞추고, 어려움이 해결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것들은 일시적일 뿐이라고 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참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만이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위기 때에 의지할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 뿐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고, 날마다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분께만 묻고, 그분만 섬기는 신실한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유다 왕 아사랴는 ‘웃시야’라고도 불리는 왕입니다. 아버지 아마샤의 행실을 따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을 행했지만, 역시 산당을 없애지 않음으로 백성들이 성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을 했습니다. 아사랴는 52년 동안 강력한 왕권과 유능한 나라 운영으로 유다를 강하게 했습니다. 그 때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제사장들이 해야 하는 성전 안에 있는 향 피우는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말렸지만, 그대로 행하려고 할 때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겨 평생 나병 환자로 살아야 했습니다(1-7,대하26:21-23). 아사랴가 통치한지 38년째에 북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죽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여전히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살룸을 통해 그를 죽게 하고 왕이 되게 하십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신대로 예후로부터 4대까지 예후 왕조가 이어지고 끝이 났습니다. 살룸의 반역은 오래가지 못하고 한 달 만에 끝이 났습니다. 므나헴이 살룸을 처단하고 왕이 되어 11년간 다스렸습니다. 그도 역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당시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던 앗수르 왕 불(디글랏 빌레셋 3세 기원전 745-727)을 보내어 일종의 경고를 하십니다. 므나헴은 은을 많이 주어 앗수르왕을 돌아가게 합니다. 므나헴이 죽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대신 왕이 됩니다. 그도 역시 아버지처럼 우상숭배의 죄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에 그 장관 베가가 반역하여 왕위를 찬탈하여 20년간 다스립니다. 그도 우상숭배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자 앗수르 왕이 다시 이스라엘을 쳐서 이스라엘에 속한 여러 성들을 쳐서 함락하고 사람들을 앗수르로 잡아 갑니다. 베가도 반역을 당하여 호세아에 죽임을 당합니다(17-31).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 될 것입니다. 남 유다도 웃시야가 죽고 그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됩니다. 그도 대체적으로 바르게 하나님을 섬겼지만 역시 산당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그 후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유다의 왕이 됩니다(32-38).
남유다는 웃시야가 긴 기간동안 통치한 반면에 북이스라엘은 예후 왕조 이후에 반역이 반복되어 왕이 바뀝니다. 이는 북이스라엘의 정세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보여주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율법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것으로 여겨지는 왕을 쉽게 배반하고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면서 이방나라를 그대로 답습하여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을 보여줍니다. 남 유다는 그래도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왕들이 산당을 없애지 않아 섬기는 방법에서 어느 정도 타협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는 죄가 있었다면, 남 유다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온전히 바르게 섬기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두 왕국 모두 세대를 거듭하며 끊어지지 않는 죄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두 왕국이 직면하고 있던 영적인 상황입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죄를 끊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죄의 고리를 끊으시고 온전하게 사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로 더 이상 죄의 지배가 아니라 은혜의 지배 아래 살도록 하셨습니다. 회개할 때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계속 죄와 싸우도록 하십니다. 우리 안에 반복되고 여전히 끊지 못하는 죄가 없는지 살펴보고 회개함으로 회복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13장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는 대적들을 치고 성읍을 되찾으며 번영의 시기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두 왕국은 일시적으로 강하여 졌습니다. 이런 강함은 오늘 말씀에서도 이어집니다. 유다 왕 아마샤는 아버지 요아스와 같이 하나님께 대체적으로 충성했으나 역시 산당을 없애지는 않았습니다. 그는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모두 처단했지만, 율법대로 그 자식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또 에돔의 소금 골짜기를 치고 에돔을 되찾았습니다(1-7). 이에 아마샤는 북 이스라엘도 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상대가 되지 않으니 에돔을 친 것으로 만족하라고 합니다. 아마샤는 이를 거절했고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전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유다가 이스라엘에 패했습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벧세메스에서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 잡아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 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약 40규빗(약182미터)을 헙니다. 예루살렘의 방어를 아주 취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과 왕궁의 창고에 있던 금 은과 모든 각종 기구들을 가지고 갑니다. 또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데리고 갑니다(8-14). 요아스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를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2세도 41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이스라엘의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사람으로서 여로보암 1세의 죄를 따라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떠나지 않았습니다(23-29). 남 유다도 아마샤가 반란군에 의해 죽고 그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됩니다. 아사랴도 번영을 누리고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복귀했습니다(22).
이렇게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지만 번영을 누리는 것은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특히 선지자를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섬길 때 땅이 회복되는 언약적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은 폭풍 전날에 고요한 밤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곧 북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손에 넘기실 것입니다. 번영이 곧 하나님의 복인 것만은 아닙니다. 최후의 통첩으로 번영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사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말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게됩니다. 하나님을 떠났을 때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멀어져 있는데,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면 번영을 즐길 때가 아니라 회개해야 할 때임을 본문은 말해 줍니다. 우리의 삶을 점검해보는 귀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한편 이스라엘 왕 예후가 죽고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어 17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람을 통해서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람 왕에게 이스라엘이 완전히 넘어가도록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여호아하스가 아람 왕에게 심하게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구원자(엘리사)를 주셨고,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자 이스라엘은 다시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하여 우상을 숭배합니다. 결국 아람 왕이 다시 와서 북 이스라엘에 치명적인 공격을 했고, 마병 오십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이스라엘 왕에게 남겨두지 않습니다(1-9).
여호아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요아스가 왕이 됩니다. 요아스(남왕국 왕과 같은 이름이지만 다른 인물)도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엘리사에게는 잘 대했습니다. 엘리사가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엘리사를 찾아와 눈물을 흘렸습니다. 엘리사는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요아스를 통해서 아람을 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멸절하도록 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엘리사가 죽은 후에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 집니다(10-25). 하지만 그것은 요아스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언약을 기억하신 결과였습니다(23). 엘리사의 시체에 죽은 시체가 닿자 다시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는 죽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며 생명을 줄 것임을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던 왕이지만 징계로 인해 회개하였을 때 긍휼을 베푸시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범죄에서 이스라엘이 멸절되지 않은 것도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기억하셔서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고도 다시 하나님을 버렸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아람을 다시 보내어 거의 진멸할 정도로 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를 절대로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다시 반복적으로 죄를 지었을 때는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긍휼과 은혜의 정점인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이름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은혜와 긍휼을 의지하여 죄를 회개하고 돌이킵시다. 그러면 반드시 구원을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7세에 왕이 된 요아스는 약 40년 동안 남 유다 왕국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산당을 없애지 않아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이 제사하는 일은 막지 못했습니다(1-3). 그래도 요아스는 지속적으로 성전을 재건하고 부분수리를 통하여 백성들이 성전에서 바르게 제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시 성전은 건축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곳곳에 보수할 곳이 생겼습니다. 아달랴가 통치하고 있을 때 아달랴의 아들들이 바알을 위하여 여호와의 성전을 약탈했던 것을 역대하 24장 7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아스는 성전을 유지보수하기 위해 성전에서 드리는 모든 은, 각 사람의 몸값(레위인들을 위해 모든 처음 태어난 남자 마다 부과되는 세금)으로 드리는 은, 자원하여 드리는 성전의 은을 모두 투입할 것을 명합니다. 그 만큼 성전의 상태가 심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5절에서 각각 ‘아는 자’라고 번역된 말은 사실은 ‘수입’이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제사장의 수입도 성전의 보수 공사를 위해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23년이 지나도록 제사장들은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왕이 지나치게 제사장들에게 요구한 것을 보여줍니다. 성전을 고칠 능력이 제사장에게는 없었습니다. 이제 왕은 다시 제사장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성전 입구에 헌금함을 두어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전에 가지고 오는 헌금은 제사장이그 곳에 넣어 성전의 재정을 맡은 자의 손에 넘기면 그가 직접 성전을 보수하는 자들에게 주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 은으로는 다른 성전의 기구를 만드는데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성전을 보수하는 데에만 사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은을 주는 일에 따로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일꾼들과 은을 주는 사람들이 성실하게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일을 믿고 맡긴 것입니다. 또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제사장들에게 돌려 줌으로 제사장들의 생활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성전을 위한 은과 제사장들을 위한 은을 확실히 구별한 것입니다(9-16).
하지만 요아스는 아람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쌌을 때 성전의 성물들과 왕궁의 금을 가져다가 아람 왕에게 주어 돌려보냅니다. 이후 요아스는 부하들에게 배신 당하여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죽음은 그가 말년에 하나님을 떠난 결과였습니다(대하24:24).
오늘 말씀은 선한 왕이지만, 요아스의 개혁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는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바른 왕이었습니다. 성전을 제대로 보수하지 않는 제사장들을 책망도 하는 어진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아람 왕에게 은과 금을 줌으로 현실적에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큰 위기가 없을 때 그는 하나님께 신실했고, 스승인 여호야다의 잘못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쳤을 때 그는 하나님보다 현실적 해결책을 의지했습니다. 성전의 보수 공사는 결국 그 순수성이 잃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낡은 건물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온 유다가 무너진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 왕의 태도는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의 참된 왕 예수님은 오히려 일생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복구된 성전이십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 또한 위기의 순간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계셔서 우리를 완벽히 복구된 성전이 되게 하십니다. 날마다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평안할 때나 위기 때에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붙드셔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 예수님과 성령께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북이스라엘에서 아합에게 속한 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남유다에 한 명이 남아있습니다. 바로 아합과 이세벨에서 태어난 딸, 남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입니다. 그녀는 아들이 죽은 소식을 듣고, 남은 왕의 자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겨우 요아스만 살아남았습니다. 요아스는 성전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 후 육 년이 지났습니다. 아달랴가 다스린지 칠년 째 되었을 때 제사장 여호야다가 왕자 요아스를 백부장들에게 보입니다. 그들 중 삼분의 일은 왕궁을 지키고, 삼분의 일은 성전을 지키고, 또 삼분의 일은 요아스를 지키도록 합니다. 안식일에 성전에 들어오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이 이제 마음을 모아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여호야다는 요아스를 왕으로 삼으면서 그에게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붓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왕을 세웁니다(1-12). 아달랴는 이 소리를 듣고 반역이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그의 편은 없습니다. 여호야다는 그녀를 성전에서 끌어내어 왕궁에서 죽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에서는 누구도 죽여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야다는 왕과 백성을 모아 여호와와 언약을 갱신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약속입니다. 또한 왕과 백성 사이에도 서로에게 신실할 것임을 언약을 통해 확증합니다. 그리고 온 백성이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그 언약을 실천합니다. 신당을 헐고 바알의 제사장을 처단합니다. 뿐만 아니라 관리들을 세워 아달랴가 다스리는 동안 무너진 성전을 보수하게 합니다. 요아스는 왕궁에 앉아 어린 왕(7세)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게 됩니다(13-21).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유다에서 심판합니다. 그녀는 바알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로서 유다를 다스린 유일한 여왕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여 유다의 왕조를 지키고 회복시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제대로 지켜서 왕을 세웁니다. 여호야다는 살아 있을 동안 요아스가 바르게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제사장의 존재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왕에게 율법책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스려야 함을 보여줍니다.
남유다도 완벽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과 왕의 직분이 바르게 세워져 말씀으로 개혁된 나라였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제사장과 왕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사장으로 율법의 참된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그와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왕으로서 죄와 사단과 싸워 이겼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왕의 후손들로서 죄와 싸우도록 하십니다. 이 예수님이 교회와 우리를 개혁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으로 개혁되어 가정과 일터와 학교에서 말씀에 순종하고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예후를 통한 아합 가문의 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합의 아들들 70명이 아직 수도 사마리아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후는 먼저 아합의 아들들의 궁중 스승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 중에 왕을 세워 싸우자고 합니다. 스승들은 단번에 승산이 없음을 압니다. 이에 왕을 세우지 않고 예후가 시키는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예후는 각자 맡은 왕자들을 죽이도록 합니다. 결국 아합의 모든 아들들은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예후는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그들의 머리를 두 무더기로 쌓아 성문 어귀에 둡니다. 뿐만 아니라 예후는 아합에게 속한 모든 자들 중에 생존자를 하나도 남기지 않습니다. 이에 엘리야의 예언이 하나도 남긴 없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선언합니다(1-10).
이스르엘에서 아합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죽이고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예후는 양털 깎는 집에서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아합의 왕자들과 이세벨의 아들들과 동맹을 맺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에 예후는 그들을사로잡아 죽입니다. 또 예후는 다른 무리를 만나는데, 바로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와 동맹을 맺습니다. 여호나답은 북이스라엘에 서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이에 예후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을 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바알을 섬기는 척 하면서 바알을 섬기는 모든 자들을자들을 심판합니다(11-24). 또 바알의 신당이 있는 성으로 가서 신당의 목상들을 모두 불로 태우고, 그 신당 자리를 화장실로 만듭니다. 이로써 바알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보여줍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사대까지 왕조를 허락하십니다(여호아하스, 여호아스, 여로보암2세, 스가랴). 하지만 예후는 여로보암이 만든 금 송아지를 벧엘과 단에서 섬기도록 하는 것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자기의 방식으로 섬기는 것은 허용한 것입니다. 예후는 나름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겼지만 여호와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는 않았고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의 영토가 점점 줄어듭니다. 뿐만 아니라 예후의 왕조도 사대 까지 이어지만 한 세기도 되지 못하고 끝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후를 통해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십니다. 아합 가문이 섬기던 바알을 파괴하셨습니다. 아합이 바알을 섬겼던 이유는 바알이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바알의 산당을 화장실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풍요로움은 결국은 허상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의 마지막은 결국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다. 예후는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예후도 하나님을 끝까지 바르게 섬기지는 않았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정리함으로 이스라엘이 비교적 바른 길로 가도록 했지만 예후는 완전하게 개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 ‘하나님을 위한 열심’은 거기까지 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열심을 보십시오. 그분의 ‘하나님을 위한 열심’은 완전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우리의 열심도 아무리 그럴듯해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열심이 우리의 것이 될 때 온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지가를 통해 이루신 공로만이 우리를 온전하게 합니다. 오늘 하루도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예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은혜와 공로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을 세운 엘리사는 이제 그의 제자 중 하나를 보내어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유다 왕 여호사밧과 동명이인)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엘리사가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 아합의 가문을 완전히 멸할 것입니다(1-10). 마침 아합의 아들 요람 왕이 아람 왕과 싸우다가 부상하여 이스르엘에 있을 때 예후가 병거를 타고 가서 그의 왕 요람을 칩니다. 요람은 예후가 그의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많아 평안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반역을 눈치 채고 도망칩니다. 예후는 도망치는 요람의 등을 쏘아 심장을 뚫습니다. 요람이 죽은 곳은 이전에 이세벨이 빼앗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이었습니다. 예후는 이전에 그의 부하 빗갈과 함께 하나님께서 그렇게 심판하실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 그대로 요람을 그 밭에 던져 둡니다. 이제 예후는 요람과 함께 있던 유다 왕 아하시야도 죽입니다. 이어서 예후는 이스르엘로 이세벨을 심판하러 갑니다. 이세벨은 자신의 왕을 죽이고 칠일 동안 왕이 되었던 시므리를 빗대어 예후를 표현합니다. 그것은 그의 왕위가 얼마가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였습니다. 예후는 성 높은 곳에 있던 이세벨 주위의 신하들에게 자신의 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이세벨을 던지라고 합니다. 그 중 몇몇이 반응을 하였고 이세벨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얼마 후에 예후는 이세벨의 시체를 장사하려고 사람을 보내었지만 그녀의 머리와 발과 손만 남았습니다. 이것은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해서 예언되었던 말씀이었습니다(30-37).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예후를 통해서 하나님은 아합의 가문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일삼던 아합 가문에 지속적으로 경고의 말씀을 하시던 하나님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 심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또한 유다 왕국에서도 영향을 끼쳐서 결국 함께 우상을 따랐고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신 말씀을 그대로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약속의 땅에서 풍성함은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을 때 하나님은 축복을 약속하셨고, 어겼을 때 심판을 약속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심판으로 지속적인 반란과 심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하라고 선포하시는 긍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또한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그저 심판만 하는 분이 아니라 항상 돌이키길 원하시며 긍휼을 베푸는 신실한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하루도 언약에 신실한 우리 하나님을 기억하며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혹 실수했을 때에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심을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엘리사의 사역은 계속됩니다. 특별히 이전에 죽은 아들을 살려 준 여인에게 곧 임할 칠 년의 기근에 대해서 말해주며 다른 곳으로 피해 있으라고 합니다. 그 여인은 순종하여 칠 년 동안 블레셋의 땅에 있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그런데 자기의 땅이 왕의 소유가 된 것을 보고 왕을 찾아가 그 땅을 되찾기 위한 재판을 요청합니다. 마침 그 때 엘리사의 종 게하시와 왕이 엘리사가 한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말한 기적 중에서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를 할 때 그 여인이 들어와 게하시는 그 여인이 바로 이 여인이라고 합니다. 왕은 여인에게 물었고 왕은 그 땅을 돌려줍니다(1-6).
이어서 엘리사가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갔을 때 마침 아람 왕 벤하닷이 병이 들었습니다. 벤하닷은 자신이 살 수 있을지(혹은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람에게 물으려 하사엘을 보냅니다. 하사엘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에 지친 엘리야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으로 삼으라고 했던 사람입니다(왕상19:15-17). 그는 장차 자신의 왕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쳐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될 사람이었습니다(왕하13장). 엘리사는 엘리야의 남은 사역을 행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벤하닷이 병이 나을 것이지만 하사엘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의 말대로 하사엘의 그의 왕을 죽이고 아람의 왕이 됩니다. 이후에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이 왕이 된 지 5년째 해에 유다에서는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대리 통치를 합니다. 아마도 여호사밧의 노년에 병이 들어서 왕의 역할을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16). 비교적 하나님께 신실했던 아버지와 달리는 여호람은 아합의 딸과 결혼하여 여호와 보시기 악을 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에 유다를 심판 하시기를 즐겨하지 않으십니다.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 했을 때 역시 그 나라는 쇠퇴합니다. 에돔과 립나가 유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합니다. 유다 나라가 힘이 강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순종할 때 승리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모두 아합의 가문과 연관 되어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우상을 숭배함으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람 왕 하사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왕 요람에게 부상을 입게 만드십니다(25-29).
엘리사는 이 모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사엘을 통해서 끔찍한 일이 이스라엘에 일어날 것을 알았습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슬픈 일이 었습니다. 결코 자신이 사랑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결국 이스라엘을 돌이키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이해하기 어렵고 눈물이 날 정도로 인정하기 싫고 받아들이기 싫은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런 말씀 조차도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유익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눈물과 간구로 하나님의 뜻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일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사랑하며 순종하고 우리를 향해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과 같이 모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아멘.
엘리사를 잡으러 온 사람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엘리사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내일 이 맘때에는 하나님께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물가가 안정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 상황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왕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장관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문을 내셔도 그것은 불가능할 일이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그가 그 상황을 보겠지만, 그것을 먹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일은 아주 미천한 자들을 통해서 성에 전해집니다. 바로 성밖에 거주하는 나병환자들을 통한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은 무리에서 격리생활을 하기 때문에 성 밖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으로 들어가자니 굶어 죽고, 가만히 있어도 역시 굶어 죽을 것이니 차라리 아람 군대로 가서 항복하자고 합니다. 혹시 그들이 살려주면 살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람 군대 진영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고, 양식과 말과 나귀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군대 소리를 듣게 하셔서 그들이 도망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나병환자들이 사마리아 성에 알렸습니다. 처음에 왕은 그것이 함정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정탐꾼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함정이 아니라 정말로 아람 군대가 도망친 것입니다. 이에 사람들을 나가서 아람 군대진영에 있던 먹을 것들과 옷과 말과 나귀와 갑옷 등 모든 것을 노략하여 왔습니다. 그러자 엘리사의 말대로 물가가 안정이 되어 싼 값에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의 말을 믿지 못했던 장관도 성문을 지키다가 백성들에게 밟혀 죽게 됩니다. 그는 그 상황을 보게 되었지만 누리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엘리사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초점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믿지 못한 장관과 왕에게 있습니다. 엘리사를 죽이려고 했던 왕은 어쩌면 엘리사의 말을 듣고 정말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것을 이유로 죽이려고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회의적인 믿음을 철저히 깨뜨리고 놀라운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본문에서 반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코 말씀이 주는 풍성함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문을 지키던 장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이루어집니다. 동정녀 마리아 탄생,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등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고 살아갑시다. 그래서 말씀이 주는 풍성함에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엘리사의 제자들이 많아져 거주할 공간이 좁아졌습니다. 제자들은 엘리사에게 요단으로 가서 나무로 집을 새로 짓자고 제안합니다. 엘리사는 허락했고, 제자들은 엘리사도 함께 하길 간청합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 그만 쇠도끼가 물에 떨어졌습니다. 당시에 쇠도끼는 매우 귀한 것으로 그 제자도 그것을 빌린 것입니다. 빌린 것을 갚지 못하면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엘리사는 나무를 던져 쇠도끼가 떠오르게 하여 다시 찾아 줍니다(1-7). 엘리사는 다시 한번 위기에 처한 제자를 기적을 통해서 구해줍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군사적인 충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떠나지 않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서 아람을 사용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우상을 버리면 승리의 삶을 주실 것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람의 공격에도 엘리사는미리 아람 군대의 작전을 왕에게 알려 이스라엘을 몇 번이나 구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아람 왕은 처음에는 자기의 부하 중에서스파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모든 것을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주기 때문에 그 동안 전투에서 패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엘리사를 찾아 죽이려 포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엘리사의 종은 크게 두려워 하지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적인 눈은 자신을 보호하는 하늘의 군대를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환에게도 영적인 눈을 뜨게 하여 그것을 보게 합니다. 아람 사람들이 엘리사를 치러 올 때 엘리사는 그들의 생명을 아끼려고 눈을 임시로 멀게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한 가운데로 데리고 옵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 군대를 치려고하지만 엘리사는 오히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놓아주라고 합니다(8-23). 이는 예수님께서도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여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다 죽일 수 있었지만,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의 생명을 아끼신 것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후에 아람 군대는 그 은혜를 알지 깨닫지 못하고 사마리아성을 포위합니다. 포위의 시간이 오래 되자 성 안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물가가 엄청나게 올라갑니다. 뿐만 아니라 굶어 죽을 위기에 아들을 먹는 끔찍한 일이 생깁니다. 이에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과 엘리사를 원망하고 엘리사를 죽이고자 합니다(24-33). 왕은 엘리사가 아람 군대를 놓아 준 것은 기억하지만, 어떻게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지 잊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지속적으로 이적을 통해서 제자들과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이 이적의 목적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면 승리를 준다는 것을 보여주는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분만을 섬기는 엘리사는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영적인 안목과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은 상황에 따라서 변하며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고자 합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죽이려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그 백성을 돌보시고 아람 군대를 무찔러 주십니다. 백성을 이런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들이 우상숭배를 떠나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전에 여러 이적들에도 왕은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그 긍휼의 정점입니다. 긍휼이 많은 하나님은 아들을 심판하여 많은 사람들을 돌이키도록 하십니다. 오늘도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긍휼의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늘 함께 하셔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아람(지금의 시리아)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자신의 나병(한센병)을 고침 받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아람은 예전에 비해 큰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이스라엘과 싸움에서 어린 소녀를 사로 잡았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전투 중에 아람이 승리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나아만의 아내를 섬기는 그 소녀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에게 나아만이 간다면 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그 말을 들은 나아만은 아람 왕에게 말했습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 써서 나아만 장군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 편지가 아람 왕이 전쟁의 구실을 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옷을 찢어 참담함과 분노를 표현합니다(1-7). 엘리사는 그 이야기를 들었고 나아만 장군을 자신에게로 보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 것을 알게 하겠다고 합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로 갔고, 엘리사는 그에게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나아만은 자신의 기대와 다른 엘리사의 말에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의 종들이 나아만을 설득하여 강에 일곱 번 몸을 담급니다. 그러자 정말로병이 나아 아기 피부와 같이 깨끗하여 졌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감사의 표로 예물을 주려고 하지만 엘리사는 거부합니다. 나아만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합니다. 이방인의 개종입니다. 다만 아람 왕이 섬기는 림몬의 산당에서 왕이 자신의 팔을 의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굽히는 것은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엘리사는 평안히 가라고 했고 나아만은 떠나갑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당시 아람과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고, 더구나 아무런 댓가도 없이 아람의 군대의 장관 나아만의 병을 낫게 한 것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이에 그는 거짓을 꾸며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아 냅니다. 은혜로 주어진 구원을 돈을 받고 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사실을 엘리사가 알도록 하셨고 나아만 장군의 나병이 게하시에게 들어 그 자식들도 같은 병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8-27).
엘리사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방인인 나아만 장군이 낫게 되는 일은 참담한 일입니다. 본 백성은 불순종하고 하나님과 멀어지는데 이방인인 나아만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또한 가슴 아픈일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있음을 가장 낮은 여종은 알지만, 이스라엘 왕은 모릅니다. 이렇게 참담한 상황에서 엘리사는 예물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나아만은 구약 시대에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아만은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고 믿기로 합니다. 동시에 엘리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위기와 징계 가운데 있을 때 그것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이적들은 한결 같이 공동체의 유익을 지향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교회 공동체 구성원은 자신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 안의 문제가 있을 때 함께 마음 아파하며 내 일과 같이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선지자적인 공동체입니다.
오늘 하루도 오직 은혜로 얻은 구원에 감사하며 공동체의 유익을 나의 유익 보다 앞세우며 공동체를 살피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엘리사가 행한 여러 기적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아내 중 한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찾아 옵니다. 그의 남편은 죽었는데, 고리 대금 업자들이 와서 두 아들을 데려다가 종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 과부에게 기름 그릇을 최대한 많이 빌리라고 합니다. 과부가 갖고 있던 한 그릇에 담겨져 있던 기름이 빌린 그릇을 다 채우기까지 나오는 기적을 베풉니다. 이에 과부는 빚도 갚고 생활비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1-7). 또 엘리사를 위해서 음식을 제공하고 작은 방도 제공한 부자 여인에게 엘리사는 자신과 게하시를 위해서 세심한 배려를 하는 그 여인에게 없는 것, 곧 아들을 갖게 해 줍니다. 처음에 그 여인은 엘리사가 속이는 줄 알았으나 참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기르고 있었습니다. 몇 년 뒤에 그 아들이 갑자기 죽게 됩니다. 부자 여인은 엘리사를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렸고, 엘리사는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 줍니다(8-37). 뿐만 아니라 엘리사는 길갈이라는 지역에 있는 선지자들의 제자들를 방문합니다. 그곳에는 흉년이 있어서 보이는 풀은 뭐든지 먹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엘리사와 제자들은 큰 솥을 걸고 국을 끓여먹었는데, 그 풀 중에 독이 든 풀이 있어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사가 가루를 가져다가 솥에 넣고 퍼다가 주었는데, 독이 없어졌습니다. 또 어떤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와서 보리떡 이십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먹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고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대로 하였고, 말씀대로 모두에게 나누어 주고도 남았습니다(38-44).
오늘 말씀에서 기록된 엘리사의 일련의 기적들을 정리해 보면, 첫번째는 빚을 갚아 준 기적입니다. 둘째 기적은 죽은 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세번째와 네번째는 먹을 것을 주는 기적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모두 엘리야가 했던 기적들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역을 이어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인들이었습니다(왕상 19:15-18). 특별히 마지막 기적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과 매우 유사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적으로 통해서 당신께서 참된 생명을 주는 음식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엘리사가 행한 기적들과 예수님의 기적들은 자기 과시용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것이 구속입니다. 주님은 죄의 빚을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 생명을 가져다가 주는 이적 중에서 이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이적을 동반합니다. 거창해 보이지 않을지라도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며 신자들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이적의 결과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고, 삶의 변화와 하나님과 관계 회복이라는 놀라운 이적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유다 왕 여호사밧이 다스린지 18년째에 아합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여호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했지만, 그래도 그의 부모와 같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 아합이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의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도록 한다는 면에서는 다름이 없었습니다(1-3). 1계명은 지키지만, 2계명은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모압은 양털을 조공으로 바침으로 북 이스라엘을 섬기고 있었는데 여호람이 다스리던 때에 모압 왕이 독립을 시도합니다. 이에 여호람은 군대를 모으고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동맹을 요청합니다. 여호사밧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에돔 광야 길을 통과하여 모압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이에 에돔 왕도 함께 합니다. 세 나라 연합국은 모압을 치러 갑니다. 그런데 광야길로 칠 일을 지나는 중 군사와 가축을 먹일 물이 없어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여호람 왕은 하나님께서 세 왕을 모압 왕의 손에 넘기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물어볼 사람을 찾습니다. 엘리사가 근처에 있었고 세 왕은 엘리사를 만나러 갑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여호람에게 아버지 아합이 섬기던 바알과 어머니 이세벨이 섬기던 아세라의 선지자들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합니다. 여호람은 이렇게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인정하고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엘리사는 당시 개혁을 통해서 부패한 유다를 바로 잡고자 했던 여호사밧이 함께 했기 때문에 만나 줍니다. 현악기를 연주할 때 엘리사에게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15). 골짜기에 땅을 많이 파면 그곳에 물이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채워질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오히려 작은 일로 모압 사람도 전멸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아침에 물이 에돔에서 흘러나와 그 개천을 메웠습니다. 모압 군사는 그 후에 태양에 비치는 물을 피로 착각하고 방심한 채로 적진에 뛰어듭니다. 이에 모압은 크게 패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땅을 아예 사람이 살지 못할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에 궁지에 몰린 모압 왕은 자신의 아들을 번제로 드립니다. 그 때 이스라엘에 큰 격노함이 있어 동맹국의 왕들과 백성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개천을 많이 파라는 말씀은 믿기 쉬운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 왕들은 그대로 하였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식으로 물과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승리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도를 넘어서 모압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순종하여 개천을 판 것은 잘한 행동이었으나 엘리사의 말대로 성읍을 헐고 좋은 나무를 베고 샘을 메우는 행동은 필요이상으로 잔인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성을 에워쌀 때 과실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했습니다(신20:19). 이스라엘에게 임한 격노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으로 그만하면 족하다는 의미였습니다. 모압 왕이 그모스 신에게 아들을 바치는 인신제사를 드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만 온전히 지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1계명은 지키지만, 2계명은 어기고 순종합니다. 개천을 많이 파지만, 정도 이상으로 잔인하게 정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온전히 지켜야 합니다. 때로 넘어질 때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며 바른 온전한 순종과 승리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데라고 가십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길갈에 머물라고 하고 벧엘로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서 벧엘로 갑니다. 벧엘에 선지자의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리고 가실 것을 엘리사에게도 알고 있느냐고 합니다. 엘리사는 알고 있으니 잠잠하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다시 여리고 갑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벧엘에 머물라고 하지만 다시 엘리사는 엘리야와 함께 합니다. 그곳에서도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에게 같은 질문을 했고 엘리사도 동일하게 대답합니다. 엘리야는 제자 오십 명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자기 겉옷을 벗어 요단 물을 가르고 엘리사와 함께 갑니다(1-8). 요단강을 건너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데리고 가시기 전에 자신이 엘리사에게 어떻게 할 지 구하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성령의 역사가 엘리야 보다 두배로 많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엘리사의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가 떠난 후에 엘리사가 맡아야 할 사역이 그만큼 성령의 큰 능력을 필요하다는 것을 엘리사가 알았기 때문에 이런 요구를 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엘리사가 보게 되면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길을 걷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데리고 갑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말씀으로 지키는 병거와 마병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키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헤어짐에 엘리사는 무척 슬퍼합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예언대로 엘리사는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고, 엘리야를 이어 선지자 사역을 하게 됩니다. 엘리사는 옷을 찢으며 슬픔을 표현한 후 엘리야의 겉옷을 가집니다. 겉옷은 능력과 권위를 상징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권위를 이어 받은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후 엘리사는 엘리야와 같이 요단 강을 가릅니다. 이전에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갈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가장 먼저 정복하고 완전히 무너졌던 여리고에 갑니다. 그곳은 폐허와 죽음을 상징했던 도시입니다. 아합 때에 재건되어 선지자의 제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곳의 제자들은 성령의 역사가 엘리사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경배합니다(15). 재건된 여리고 성읍은 여전히 죽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물에 문제가 있어서 땅에서 나는 열매가 익지 못한 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물의 근원으로 가서 소금을 그가운데 던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을 다시 고쳐 죽음이 없도록 합니다. 또 엘리사는 벧엘로 가는 길에 어떤 젊은 청년들이 엘리사도 엘리야와 같이 하늘로 올라가 버리라며 조롱합니다. 이에 암곰 둘이 나와서 그들을 죽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가게 되고 엘리사는 그를 이어 선지자가 됩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을 알게 된 선지자의 제자들은 그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보다 큰 능력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는 말씀의 능력으로 여리고 물을 회복하므로 토산이 죽음을 이기고 생명(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말씀을 무시하고 승천을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엘리사는 말씀과 이적으로 여리고에 생명과 심판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승천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미리 보여 주는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의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걱정하고 염려하였지만, 승천하신 주님은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고, 더 큰 능력으로 생명과 심판의 말씀을 제자들은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말씀과 심판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죽음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 여리고의 토산과 같은 자들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말씀을 끝까지 거절하고 조롱하는 자들은 죽음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무서운 심판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감사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여 함께 참된 생명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아합을 이어 왕이 된 아하시야는 여전히 아합과 같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게 되었을 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블레셋에 속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자신의 종들을 보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엘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고 책망합니다(1-4). 엘리야는 아하시야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세붑을 의지하기 때문에 병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아하시야의 종들에게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하시야는 엘리야를 잡으러 오십 부장(오십 명의 부하를 거느린 군인)을 보냅니다. 첫 오십 부장이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는 것은 일종의 조롱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자신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사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납니다. 세번째 오십부장은 정말로 두려움을 가지고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생명을 귀히 보도록 부탁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왕에게 그가 바알세붑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라고 전하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왕에게 그렇게 전하였고, 그대로 됩니다(5-16). 아하시야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흥미롭게도 그가 왕이 되었을 때에는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된 후 2년째였습니다. 두 왕이 이름이 똑같습니다(17-18).
우리가 의지하고 살아가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아하시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계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우상 바알세붑에게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요청하기 위해서 종들을 보냅니다. 하나님을 아무것도 못하는 신으로 취급했습니다. 당시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쇠퇴하고 주변 나라가 성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의 나라가 약하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보다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신들은 우상일 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아람과 이스라엘, 그리고 유다 사이에 전쟁이 없이 평안하게 3년 동안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합은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이에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러 가자고 합니다.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께 묻고 싶었습니다. 아합은 선지자 400명 쯤 모아 물었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그 성읍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사밧은 다른 선지자가 더 없는지 묻습니다. 아합은 늘 자신에 대해서 좋지 않은 것을 예언하는 선지자 미가야가 있다고 합니다. 여호사밧는 그에게도 물어보자고 합니다. 미가야는 처음에는 아합에게 성읍을 치러 가라고 하지만 나중에 제대로 대답하라고 왕이 말했습니다. 그 때 미가야는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산에 흩어져 있는 것 같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미가야는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는 영을 다른 선지자들에게 보내어 거짓으로 예언하게 하고, 아합을 꾀어 죽이려고 하심을 알려줍니다. 많은 선지자들도 나름대로 예언을 했지만 그것은 참된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자기 확신에 차 있던 그나아나의 아들 선지자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치며 여호와의 영이 자기를 떠나서 미가야에게 말씀했을 리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자신의 소유처럼 말합니다. 미가야는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날에 그가 알게 될 것이라고합니다. 아합은 미가야를 그의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보내어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게 하라고 가둡니다.
결국 아합은 길르앗 라못을 치러 갔고, 그 전쟁에서 변장을 했지만, 무심코 쏜 화살에 맞아 죽음을 맞이합니다. 무심코 쏜 화살은 그를 일부러 죽으려고 한것이 그냥 막 쏜 화살에 맞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시기로 작정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우연히 맞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병거에서 피흘리며 전장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그날 전쟁이 매우 결렬하여 나갈 수 없었고, 병거 위에서 죽었습니다. 그를 태운 병거가 이제 사마리아까지 와서 아합을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병거를 씻을 때에 병거에 고여 있던 아합의 피를 개들이 와서 핥아 먹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왕상21:19). 아합을 이어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아하시야도 어머니 이세벨과 같이 바알을 섬기고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습니다(51-53). 유다 왕 여호사밧은 상대적으로 선한 왕이었지만 그래도 완전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 시대에 남아있던 우상 신전의 남자 창기(남색하는 자)를 없앴지만 산당을 없애지는 않는 부족한 왕입니다(41-50).
오늘 말씀에서 두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아합은 그 전쟁에서 죽으므로 하나님께서 아합을 심판하시려고 했던 것이 옳았습니다. 또 하나는 엘리야의 예언입니다. 아합이 죽은 피를 개들이 사마리아에서 핥아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아합이 죽는 상황들을 무신론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저 우연에 불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우연이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합은 자기 나름대로 말씀을 부정하기 위해서 변장하는 방법을 고안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자 하는 계획은 실패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의 삶을 우연에 맡기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고 따라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은 손길로 인도하시고, 거역하고자 하는 사람은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으로 심판을 행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아버지와 같은 손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아합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왕으로서 마음대로 행하는 사건이 또 발생합니다. 바로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는 사건입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왕궁(왕의 겨울 별장)과 가까이 있었습니다. 이에 아합은 나봇에게 그 포도원을 자신에게 팔아 채소 밭을 삼게 하라고 합니다. 그 포도원은 나봇의 조상 대대로 하나님께로 분배 받은 땅으로 사고 팔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나봇의 말대로 하나님의 율법에서 금하는 것이었습니다(신명기 19:14). 이에 아합은 근심하고 답답하여(침울하여) 밥도 안 먹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합은 그래도 하나님께서 금하셨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줄 몰라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이세벨은 나봇을 모함에 빠뜨려 죽이고, 대신 왕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 사악한 여인입니다(1-6). 이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십니다. 하나님은 아합이 또 죽이고 빼앗은 것을 책망합니다. 왕으로서 자기 마음대로 백성들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돌아 맞아 죽은 나봇의 피를 개가 핥아 먹은 것 같이 아합의 피도 개들이 핥아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식이 다 죽어 왕조가 끊긴 여로보암의 집과 같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어 이세벨에 대해서 저주를 하십니다. 이세벨은 죽으면 그 시체를 개들이 먹을 것입니다. 아합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의 시체는 개와 새가 먹게 될 것입니다. 아합은 이세벨의 꾀임에 빠져 온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를 하는 죄를 범하게 만들었습다(7-27). 아합은 이 모든 말을 듣고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뉘우칩니다. 이에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셔서 재앙을 그의 아들 시대에서야 내리시겠다고 하십니다(28-29).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뺏거나 혹은 돈으로 사려고 하는 것은 작은 죄가 아닙니다. 가나안 이방인들의 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의 땅을 뺏거나 거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달랐습니다. 땅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자기 땅을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었고, 팔아서도 안되며, 혹 부득이 담보가 잡혔을 때에는 매 오십 년 마다 본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왕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자였고, 백성에게 이스라엘의 참된 왕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어야 하는 자입니다. 왕의 모습을 통해서 참된 평화를 가져다 주는 메시야적 사역을 나타내야했습니다. 아합은 이방인 왕의 모습을 쫓아 갔습니다. 섬기는 왕이 아니라 지배하는 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우상숭배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불신자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뉘우칠 때에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아합의 모습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상과 그 사이에서 머뭇 머뭇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섬기는 왕으로서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이웃 사이에 참된 평화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왕이신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섬김과 그의 길을 생각합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불신자와 같은 삶을 버리고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주님의 길과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참된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아람 왕 벤하닷은 그의 군대를 모아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둘러쌉니다. 아람은 다른 왕 32 명과 연합하였기 때문에 그 위세는 대단했을 것입니다. 먼저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 아람 왕은 메신저를 보냈습니다. 왕에게 속한 은과 금 그리고 아내들과 자녀들을 넘기라고 합니다. 처음에 아합은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람 왕은 다시 메신저를 보내어 왕과 신하의 집을 하나하나 수색하여 마음에 드는 것은 다 가지겠다고 합니다. 아합 왕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다시 아람 왕은 그러면 사마리아의 부스러진 것이 족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마리아를 멸망시키겠다는 협박입니다. 아합은 “갑옷 입는 자가 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한다”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갑옷을 입고 싸워 보기 전에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에 아람 연합군과 이스라엘은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1-12). 그 때 한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큰 무리들을 아합의 손에 넘기심으로 당신께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겠다고 합니다.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앞세워 그렇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정오에 청년들은 앞서 나갔고 결국 아람을 무찌르게 됩니다. 그 선지자는 아합 왕에게 잘 정비하여 겨울 우기가 끝나고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다시 올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아람에서는 그들이 왜 패배했는지 분석합니다. 결론은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인데 그들이 산에서 싸웠기 때문에 졌다는 것입니다. 당시 다신교 문화에서 생각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지 특정한 지역만 다스리는 제한적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해가 바뀌어 아람과 이스라엘이 평지에서 싸울 때에도 승리를 주심으로 친히 나타내 보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아람 군인들이 숨은 성벽도 무너지게 함으로 이 싸움은 단지 이스라엘의 군사력으로 이긴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여호와 하나님, 조상들이 섬겼던 바로 그 하나님임을 드러내시고자 합니다(28).
전쟁에서 패하여 숨은 왕과 신하들은 이스라엘 왕은 자비로운 왕임을 기억하고 그에게 용서를 빌자고 합니다. 아람 왕은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이스라엘 왕 앞으로 나아갑니다.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는 것은 큰 슬픔이나 비통함, 혹은 겸손과 참회를 표현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 아합은 그렇게 나아오는 아람 왕이 옛 성들을 돌려주겠다고 하자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아 줍니다(34). 이에 선지자는 동료를 통해 자신을 상하게 만들고 왕 앞에 나아가 행동과 이야기로 왕을 책망합니다. 아합은 하나님께서 멸하기로 한 사람을 놓아 준 것입니다. 이에 아람 왕을 대신하여 아합의 생명을 찾겠다고 합니다(31-43). 여기서 멸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은 멸하라고 명령했다는 말입니다. 왕은 하나님보다 더 자비롭게 행동하여 불순종한 것입니다.
아합은 전쟁에서 승리를 통해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왕이심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우상 숭배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친히 선지자를 통해서 반복해서 말씀하셨고, 또 그 일을 아합의 눈 앞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여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아합은 끝내 그렇게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유익한 조건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경우는 없는지 되돌아봅시다. 다시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아합은 궁으로 돌아가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어떻게 바알의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죽였는지 말했습니다. 이를 듣고 이세벨은 종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복수를 다짐합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을 피하여 유다 지파에 속한 브엘세바로 갑니다. 그곳에서 자기의 종을 머물게 하고 자신은 더 남쪽으로 내려가 호렙 산, 곧 모세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시내 산으로 갑니다. 하지만 그는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가다가 무척 지쳤기 때문입니다. 이제그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취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잠이 듭니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깨우며 먹을 것을 줍니다. 먹고 다시 잠이 듭니다. 다시 천사가 먹을 것을 줍니다. 이렇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것은 그가 가야할 길을 다 가지 못할까 봐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마침내 시내 산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왜 그곳에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열심과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말씀드립니다. 엘리야는 자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유별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언약을 버리고 주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이제는 자신의 목숨도 찾기 때문이라고 합니다(1-9). 엘리야를 위협하는 것은 이세벨이 아니라 이세벨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좀 전에바알이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을 알았지만, 금새 잊고 이세벨을 중심으로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호렙 산에 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지나가십니다. 지나가시며 바람과 지진을 일으키시지만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 후에 세미한 소리에게 들립니다. 왜 여기 있냐고 묻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고, 오직 자신만 남았는데, 그들이 자신의 목숨도 찾는다고 합니다(14). 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돌아가서 다메섹에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으로 삼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선지자를 삼으라고 합니다.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를 통해서 엘리야의 목숨을 건질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 신실한백성 칠천명을 남길 것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홀로 남겨진 것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을 통해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들을 남기실 것입니다(15-18).
엘리야는 쟁기를 끄는 열두 쌍(24마리)의 엘리사를 만나 기름을 부어 자신을 이어 선지자가 되게 합니다. 그 이후에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다니며 수종을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에 지치고 닥친 두려움에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엘리야를 격려하시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광야에서 지쳐 포기할 뻔한 엘리야에게 물과 음식을 공급하십니다.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힘을 주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또 강함 바람과 지진과 불을 내시지만 그곳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심으로 없는 것 같이 느껴지게 하십니다. 하지만 그 후에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주님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오직 홀로 남은 것 같은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왕으로 세우고 선지자를 세우라고 하심으로 그 사역을 통해서 신실한 7천명을 남기고 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마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로 피하는자들에게 여전히 역사하시고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특별히 말씀과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적인 힘을 주십니다. 우리의 삶도 때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으로 위로는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많은 날이 지난 후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아합에게로 보내시어 비를 주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아합의 관리 오바댜를 먼저 만납니다. 오바댜는 그의 주인 아합과 달리 아합의 왕비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죽일 때 하나님의 선지자를 오십 명씩 나누어 숨겨주고 물과 양식을 주었던 경건한 사람입니다(1-6). 하나님께서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런 경건한 자를 통해서 지켜 주셨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아합에게 가서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바댜는 이전에도 아합이 엘리야 선지자를 잡으려고 많은 도시를 찾았다가 못 찾으면 그 도시 사람에게 그를 못 봤다는 맹세를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를 보았다고 했다가 혹시 엘리야가 하나님에 의해서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자신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오바댜를 안심시키고 아합을 데리고 오도록 합니다(7-15).
아합은 엘리야를 보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조롱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아합은 이것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기근은 엘리야가 바른 말씀을 전한 것 때문이 아니라 아합과 그의 아버지 오므리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백성들에게 우상을 숭배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가뭄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인 심판이었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더욱 정확하게 참된 신, 참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보여줍니다.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대결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지 말고 참된 신을 택하여 섬기라고 합니다. 갈멜산은 비의 신인 바알에게 봉헌되었던 산입니다. 그곳에서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면 바알이 비를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삼 년 째 비가 없는 것을 바알의 선지자들은 나름대로 둘러댔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호와의 선지자, 특히 엘리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죽어야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이 갈멜산에 모였습니다. 먼저 송아지 두 마리를 조각을 내어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내려주는 신이 참된 하나님이라고 믿자고 합니다. 모두 동의했습니다. 먼저 바알의 선지자들이 송아지를 나무에 놓고 바알 신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했습니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더 크게 바알을 불러 보라고 조롱합니다. 바알은 신이기 때문에 졸거나 어디에외출하거나 할 수 없지만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조롱하는 것입니다. 결국 바알의 선지자들이 그들의 규칙대로 자해까지 하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않았습니다(16-29).
엘리야 차례가 되었을 때 백성들을 다 불러 모으고 가까이 나오도록 합니다. 엘리야는 가장 먼저 그동안 잊혀져서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아 무너져 있던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세웁니다. 기근이 있을 동안 사람들이 여호와께 제사드리지 않고 바알에게 제사했던 것입니다. 열 두 지파의 수대로 돌을 취하여 제단을 수축합니다. 그리고 도랑을 만들고 송아지 위에 물을 흠뻑 붓습니다. 불을 감추어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어떤 현상도 그 제물을 태울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만이 그 제물을 태울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저녁 소제를 드리는 시간에 맞추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야곱)의 언약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내용도 명확했습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과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임을 나타내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는 모세가 부름을 받을 때 알려주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 뿐만 아니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물도 증발시켰습니다. ‘번제물’이라고 표현된 것은 엘리야가 그동안 무너진 제사, 곧 예배를 회복시킨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그동안 거짓 신을 섬기게 만든 바알 선지자를 처단하도록 합니다(30-40). 그리고 엘리야는 비를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땅에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는 행동은 아주 겸손한 자세로 응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국 큰 비가 내렸고 엘리야는 성령의 능력을 입어 아합 왕의 마차 앞으로 달려갑니다(41-46).
오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신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시라면 우리 또한 그분 만을 섬겨야지 헛된 다른 신을 섬기면 안됩니다. 다른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 우물쭈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는 참된 고백을 하고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 한 사람인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통해서 엘리야의 말이 다시 있기까지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않도록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기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먹이십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자 그 시내 마저도 마릅니다(1-7). 하나님은 다시 엘리야를 시돈에 속한 사르밧의 한 과부의 집으로 보내십니다. 그곳 성문에 도착하자 마침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녀에게 물을 조금 달라고 합니다. 가뭄으로 시냇물까지 마르는 상황에서 물을 조금 가져다 달라는 것은 아주 큰 부탁입니다. 게다가 물을 가지러 가려 하는데, 엘리야는 더 무리한 부탁을 합니다. 떡도 달라고 합니다. 과부는 떡이 없고 가루만 조금 있는 데, 그것은 과부와 아들이 마지막 식사를 위한 것입니다. 그 과부도 가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것으로 먼저 작은 떡을 만들어 자신에게 주고 그 다음에 과부와 아들을 위해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비가 내리기 전까지 그 통의 가루가 멈추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했고, 정말로 말씀대로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8-16).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합니다. 이 일 후에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과부는 엘리야를 원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그 아들을 달라고 하여 자기 침상에 누이고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 위에 세번 몸을 덮으니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이제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가 전하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리임을 고백합니다(17-24).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어 말씀이 있기까지 다시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엘리야를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시고 일정기간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아합에게 가장 큰 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하도 듣지 않으니 아예 말씀을 감추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고 계심을 과부를 통해 보여줍니다. 말씀을 거부하는 아합과 온 이스라엘은 먹을 것이 없지만, 말씀에 순종하는 과부와 엘리야에게는 먹을 것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과부는 아들을 잃었다고 다시 찾게 되는, 생명을 얻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를 책임지시고 붙드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참된 믿음을 보기 힘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바아사는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예후를 보내어 그에게 여로보암의 집과 같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식 중 한 명이 왕위를 잠깐 이어 받겠지만 결국 아들들이 다 죽고 다른 사람이 왕위를 이어 받게 될 것입니다. 바아사에게 속한 사람들의 죽음은 그들의 시체를 장사해 주지도 않아 개와 새가 먹게 될 것입니다(1-4). 실제로 바아사가 죽고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범하자 그의 부하 시므리가 반란을 일으켜 죽게 됩니다. 또 시므리가 대신하여 왕이 된 후 예후의 예언대로 시므리는 바아사가 속한 모든 친구와 가족 중 남자를 모두 죽입니다(11-12).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므리의 통치는 단 칠일에 불과 합니다. 또 다른 군대 지휘관 오므리가 사람들을 모아서 시므리를 공격했고, 시므리는 성이 포위되자 성에 불을 질러 스스로 최후를 맞이 합니다(15-20). 시므리가 죽은 후에 오므리와 디브니가 왕위 쟁탈전을 벌이고 결국 오므리가 승리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오므리는 세멜에게서 성읍을 사고 그곳을 사마리아로 부르며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오므리보다 더 유명한 왕은 그의 아들 아합입니다. 무엇으로 유명하냐 하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기로 유명한 왕입니다. 아합은 다른 이스라엘 왕보다 더욱 여로보암의 악을 행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면서 심지어 그것을 가볍게 여깁니다. 뿐만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여 사마리아에 바알을 위한 신전을 만들고 아세라 상을 만듭니다(29-33).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왕인지 보여주는 결정적인 것은 그의 시대에 여리고를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여리고는 여호수아에 의해서 정복된 첫번째 성으로 누구든지 그 성을 재건하는 사람은 그 맏아들과 막내를 잃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히엘이 그 터를 쌓을 때 맏이를 잃었고 성문을 세울 때 막내를 잃었습니다(3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보내어 돌이키도록 긍휼을 베푸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의 지속적인 우상숭배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선지자를 보내어 경고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무시하며 사는 왕을 포기하지 않고 경고의 말씀을 주심으로 돌이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왕들은 끝내 돌이키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적인 저주를 당하고 맙니다. 우상숭배라는 심각한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셔서 말씀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끝까지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은 그대로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가 참으로 임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자들에게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예수님은 죽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진노를 쏟으심으로 우리 자신을 우상으로 삼고, 수많은 것을 우상으로 삼아 살아가는 우리가 심판과 저주에서 용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최후의 심판을 겪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걷어내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우리 교회가 됩시다. 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훈계하실 때 하나님의 긍휼을 기억하여 돌이키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르호보암을 이어 남 유다에서 아비얌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삼 년 동안 다스렸는데, 르호보암을 이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에 지속적으로 다윗의 후손이 왕이 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등불이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취한 것 외에는 평생에 하나님께 신실했습니다. 그의 길로 따르는 왕은 경건한 왕으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아비얌이 죽고 그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되었습니다. 아사는 그의 아버지보다 훨씬 훌륭한 왕입니다. 그는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습니다. 남창(남성 창기)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고 우상을 없앴습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가 아세라 상을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자 태후 자리도 폐위하고, 우상을 찍어 불살랐습니다. 그는 일평생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1-15). 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과 전쟁에서 위기에 몰리자 그는 성전에 남은 금과 은을 가지고 아람 왕에게 보내어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의 군대를 의지하는 행동이었습니다(대하16:7-10). 다윗과 마찬가지로 경건한 왕이지만 완전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41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한편 북왕국은 아사가 왕이 된 2년째 해에 여로보암이 죽고 그의 나답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아버지와 같은 길로 갔고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에 잇사갈 족속 바아사가 그를 배신하여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나답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바아사는 왕이 된 후 여로보암에게 속한 모든 아들들을 죽였습니다. 왕위를 찬탈한 것에 대해서 이후에 적통을 따지며 자신의 왕위에 대한 이견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아사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24년간 다스립니다. 그는 여로보암의 아들들을 모두 죽여 그 혈통을 끊었지만, 그 역시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우상숭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23-34).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우상숭배를 하고 끊임 없이 왕위는 반역으로 세워지며, 전쟁이 멈추지 않는 역사를 앞으로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 또한 언약적인 저주였습니다.
앞으로 이후의 열왕기서 이야기에서는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왕에 대한 이야기를 번갈아 가면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유다 왕 아사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상숭배를 없애고 유다 땅에서 남창을 없애는 개혁을 단행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중간에 넘어지고 부족함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우상숭배로부터 멀어지도록 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인도한 왕으로 평가 받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나답은 여로보암의 적통입니다. 바아사는 반역을 통해서 왕이 됩니다. 하지만 둘 다 우상숭배를 떠나지 않고 여전히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이끕니다. 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은 지속적으로 대조가 될 것입니다. 경건하지만 여전히 다윗의 부족한 길로 걷는 모든 왕은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왕을 줄 곧 기다렸왔습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단 한번도 실수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셨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완전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믿는 자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신 왕이십니다. 믿는 자들은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비록 실수하고 넘어지지만 하나님의 언약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개혁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의 말과 일을 듣고도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고 범죄를 계속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 아비야가 아픕니다. 여로보암은 아내에게 변장하여 자신에게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선지자 아히야를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 손에 떡과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당시 선지자를 만나러 갈 때 선지자를 위한 평범한 수준의 선물들이었습니다. 아히야는 노안으로 시력이 좋지 않았지만, 변장한 아내를 알아차립니다. 육체적인시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의 아들 중에서 오직 그 아들만 험한 일을 보지 않고 평안히 죽게 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여로보암이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워주신 것과 다윗 왕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을 무시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가나안 족속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10-16). 교회가 세상을 본받아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을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16).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로보암의 아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그 아이가 죽습니다. 여로보암은 2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죽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나답이 대신하여 왕이 됩니다.
한편, 남쪽 나라 유다에서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17년 동안 다스렸는데 그가 다스리는 동안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가장 뛰어나게 악을 행합니다. 북 이스라엘과 같이 그들도 우상을 숭배했고, 심지어 남성동성애가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시삭을 통해서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기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습니다. 르호암도 죽어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비얌이 대신하여 왕이 됩니다(19-31). 전쟁이 있고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않을 때 유다와 이스라엘에 내리는 하나님의 언약적 징계였습니다.
여로보암은 선지자에게 아내를 보내어 아들에 대한 좋은 예언을 기대했습니다. 좋은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해야 할 것은 아내를 선지자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무시하면서 다른 어떤 좋은 것을 하나님께 기대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르호보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둘 모두 하나님과 더불어 우상을 섬기고,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혼합종교를 통해서 예배의 타락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의 삶과 예배의 목적은 우리의 만족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지키며 예배할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예배의 목적입니다(고후10:5).
오늘 하루도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높아진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이제 하나님께서는 북왕국 여로보암을 책망하고 돌이키도록 하시기 위해 유다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보냅니다. 마침 벧엘에서 여로보암은 왕인데도 제사를 드리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해서 저주하는 것은 제단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이 만든 우상들과 이방인과 같은 방식으로 제사하는 모든 자들을 향해서 저주하는 것입니다. 후에 요시야가 사마리아와 벧엘의 우상과 산당을 부수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왕하23장 15-20절에서성취). 왕은 그런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라고 손을 뻗었고, 그 손이 마르게 됩니다. 그러자 왕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부탁하여 손이 다시 정상이 될 수 있도록 요청하였고, 정상이 되었습니다. 이에 왕은 하나님의 사람을 식사 자리에 초청하여 예물을 주려고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은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에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1-10).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한편 이스라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을 통해서 유다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늙은 선지자는 그를 찾아 나섰고, 길에서 만났습니다. 늙은 선지자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을 자신의 집에 식사 초대를 합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의 초대를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하지만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천사가 자신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초청하라고 했다고 속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의 집에서 떡을 먹게 되고, 그 때 진짜로 하나님의 말씀이 늙은 선지자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책망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들의 묘에 함께 묻힐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 말은 이루어졌습니다. 나귀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사자가 나와서 그를 물어 죽였습니다. 나귀를 먹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이 일이 하나님으로 인해 생긴 일임을 보여줍니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가져다가 자기 성읍으로 데리고 와 자기의 묘에 두고 슬피 웁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나중에 자신의 뼈를 하나님의 사람의 뼈가 있는 묘실에 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람이 말한 것이 모두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11-32). 하지만 여로보암은 이 일 후에도 돌이키지 않고 산당에서제사를 지내며 원하는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이 망하는 길로 인도합니다(33-34).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을 돌이키기 위해서 유다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늙은 선지자의 이야기는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임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죽게 되는 이야기 입니다. 이것은 여로보암이 하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백성을 속여서하나님의 백성을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것을 그의 죽음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사람의 죽음은 여로보암 왕을 돌이키기 위한 확실한 징표가 되었습니다. 의인의 죽음을 통해서 죄인인 여로보암을 구원하시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결국 거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을 돌이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먹는 것에서 실패하지만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목마름과 굶주림에서 승리하십니다(마4:2-4).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최고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거부하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참된 선지자이자 의인을 내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살아갑시다. 또 우리 삶에 대해서 경고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돌이키며 거룩한 삶을 이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솔로몬을 이어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쳤던 여로보암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백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여로보암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왕 르호보암에게 가서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 그리고 요새들을 건축하며 들인 백성의 노역을 감해 주기를 청합니다. 그렇게 하면 영원히 르호보암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합니다. 이에 르호보암은 삼 일 후에 다시 오면 답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 사이 늙은 조언자들에게 조언을 듣고, 젊은 조언자에게 조언을 들었습니다. 늙은 조언자들은 왕이 백성을 섬기는 왕이 되면 영원히 그들이 왕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젊은 조언자들은 아버지보다 더 강압적으로 그들에게 노역을 시켜 왕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라고 합니다. 르호보암은 젊은 조언자들의 조언을 따랐고, 결국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을 배반하여 여로보암을 자신들의 왕을 삼습니다(1-20). 오직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르호보암을 따릅니다. 나라가 둘로 나뉘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르호보암을 따르는 유다와 베냐민이 나머지 지파와 싸워 무력으로 통일을 시키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를 통해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21-24). 이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로보암은 북쪽 왕국 열 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한 가지 두려운 것이 있었습니다. 남쪽 유다 왕국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북쪽 지파가 남쪽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하다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을 걱정했습니다. 이에 여로보암 왕은 북쪽에도금 송아지를 만들어 벧엘(북이스라엘의 남쪽)과 단(북이스라엘의 북쪽)에 둡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사람들을 제사장을 삼고, 자기 마음대로 유다의 절기와 유사하게 절기를 정합니다. 여로보암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왕국을 주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라고 하셨지만, 불순종합니다(25-33).
솔로몬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허용하는 외교정책을 통해서 왕국을 유지했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라는 둘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11장에서 말씀하신 것들입니다. 여로보암에게 왕이 될 것을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을 때 분명히 조건이 있었습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견고한 집을 세워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왕상11:38). 하지만 여로보암은 그 출발에서부터 불순종을 저지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보다 유사 종교적 중심지를 북왕국에 만듭니다. 게다가 금송아지도 만듭니다. 여로보암은 종교적인 중심지를 북왕국에도 세움으로 백성의 마음이 남유다로 향하지 않게 하고 하나님과 굳은 관계를 맺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닌 가나안 족속들의 방식을 가지고 섬기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결국 온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를 행하도록 만든 끔찍한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쉽게 떠나고 맙니다. 사울의 그림자가 그에게 보입니다. 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무엘의 교훈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만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섬길 때 타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오늘 하루도 말씀에 순종하며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부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됩시다. 아멘.
최고의 지혜와 부와 영광을 누리던 솔로몬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그에게 아내가 많았다는 것은 그가 외교력을 의지했다는 뜻이며, 그 아내들을 통해서 이방 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금지한 것이었습니다. 말년에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이집트의 신들과 아스다롯과 암몬 자손의 신인 밀곰(신의 이름)과 몰렉을 섬기고 모압의 신 그모스를 섬기게 됩니다. 특히 몰렉은 어린 아이를 바치는 인신제사를 드리던 가나안 땅에서 반드시 없애야 할 종교였습니다. 성전을 지은 바로 그 솔로몬이 이방신을 위해 산당을 짓습니다(1-8). 이전에 두번이나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을 잊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 나라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약속한 영원한 왕조 때문에 열 지파 중 유다 지파는 그의 아들에게 주어 다윗에게 약속한 것은 깨어지지 않도록 합니다(9-13).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자 그의 강력한 힘은 점차 쇠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을 대적하게 하십니다. 또 소바 사람 르손을일으켜 솔로몬을 대적하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탁월한 신하 중 한 명인 여로보암에게 나라의 열 지파를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여로보암에 미리 말씀하십니다. 여로보암에게도 솔로몬에게 동일한 약속을 하십니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법과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다윗과 같이 대해 줄 것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이 사실을 알고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합니다(40). 마치 사울이 하나님께 선택 받은 다윗을 죽이려 한것 같이 행동합니다. 사울의 그림자가 솔로몬에게서 보이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솔로몬은 결국 죽게 되었고, 아버지 다윗의 성에 장사됩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이어서 왕이 됩니다(41-43).
솔로몬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이방신들도 섬기게 됩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부와 영광을 다른 신을 섬기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대로 솔로몬에게 행하십니다. 하지만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그에게 단번에 빼앗지 않으시고 그 아들에 시대에 나라를 빼앗을 것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나라를 잘 다스린 것은 그의 능력의 탁월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가 불순종하자 그의 지혜는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대적들이 일어나 솔로몬을 괴롭히자 무찌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인간 왕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함에 달려있습니다. 오늘날 영적인 전투와 교회의 싸움도 지도자의 인간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때 승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을 통해 승리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솔로몬의 지혜와 부귀영화가 온 이스라엘을 넘어 주변 나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스바 여왕의 방문을 다루고 있는데, 스바는 지금의 예멘 지역입니다. 스바 여왕은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솔로몬의 지혜와 부에 대한 소문을 듣고 확인하러 왔습니다. 이는 정치적으로 강하게 된 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미래를 예상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방문입니다. 당연히 선물도 많이 가지고 옵니다. 스바 여왕은 준비한 모든 문제를 내었고, 솔로몬은 그 중에 하나도 맞추지 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또 여왕은 성전과 음식과 사람들을 보면서 그 지혜와 부귀영화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솔로몬은 스바 여왕이 돌아갈 때 왕의 규례대로 선물을 줍니다(1-13). 이스라엘 내적으로도 사람들은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세금이 어마어마하게 거둬지고 그 외에 무역으로 벌어들인 금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금으로 방패도 많이 만들고, 식기류도 금으로 만들고 상아로 왕좌도 만들어 금으로 입힙니다. 심지어 은을 귀하게 보지도 않았습니다(14-22).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시고 계십니다. 이런 소문은 주변의 많은 나라에 전해져 많은 나라의 왕들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와 부를 보기 위해 각종 예물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24). 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솔로몬에게 해 주시는 것과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을 때 그의 통치 아래 백성이 누리게 될 평화와 안정됨을 보여줍니다. 주변 나라에 하나님을 알리는 제사장 나라가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변 왕국들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와 부귀영화를 보기 위해서 찾아 옵니다. 스바 여왕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감탄을 합니다. 이것은 단지 솔로몬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온전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부를 사용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한다면 이런 나라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주변 나라들이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할 수 있었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끝내 실패합니다(11장). 하나님은 신실하시지만, 솔로몬은 끝까지 신실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온전하시고 신실한 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풍요로움과 평화를 주십니다(요14:27). 예수님이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으로 스바가 아니라 온 세상이 당신의 지혜를 듣고 오게 하십니다(눅11:31). 또 하나님께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고 그분의 돌봄을 받는 자에게 솔로몬의 부귀영화는 그분 앞에서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눅12:27). 하나님이 돌보시는 길에 꽃이 솔로몬의 부귀영화보다 낫습니다. 교회는 솔로몬과 그 백성들이 누린 부귀영화보다 훨씬 더 풍성한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지혜와 지식과 보화의 풍성함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골2:3).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부귀영화입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이 풍성함을 넘치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풍성함을 날마다 새롭게 발견하시고, 세상이 주는 공허한 부귀영화가 아니라 세상이 알지도 못하고 줄 수도 없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만족과 부귀영화를 감사하고 즐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솔로몬에게 이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신 것과 같이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대로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당신의 이름을 두시고 눈과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무조건 성전에서 기도하고 제사만 한다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왕이 다윗과 같이 마음을 다하여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계명과 율법과 모든 일을 순종하여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다면 왕조가 끊어지고, 성전도 버림 당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성전 자체가 약속과 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1-11). 언약에 신실함이 축복과 행복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성전과 왕궁의 공사가 마무리되고 솔로몬은 아마도 이전에 약속한 성전 공사와 관련한 비용을 양식으로 제공하는 것과 더불어 갈릴리 땅의 스무 성읍을120 달란트에 히람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성읍이 히람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120 달란트(1달란트는 40kg임)를 줍니다(11-14). 이후에 솔로몬은 나라를 국방력을 튼튼히 하고자 방어지와 국고성과 병거성 건축을 위해서 노역자들을 모읍니다. 그런데 그 모은 사람들 중에는 아모리, 헷, 브리스, 히위, 여부스 중에서 남아 있는 사람에게 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멸하라고 하신 자들을 자신의 역군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20-21). 대신 솔로몬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들을 감독하는 사람으로 세웁니다. 이는 솔로몬이 완벽하지 않은 왕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년에 세 번씩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립니다. 이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솔로몬은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어 히람의 종들을 고용하여 항해를 통해서 금 420달란트를 얻습니다(26-28). 이는 솔로몬의 부와 명예가 점점 쌓이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고 계십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역시 완전한 왕이 아닙니다. 그에게도 부족함과 연약함이 보입니다.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국방을 정비하는 것은 왕으로서 바른 행동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제대로 드리는 것도 바른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은 가나안 백성을 멸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유용한대로사용합니다. 솔로몬은 비교적 선하고 바른 왕이지만, 완전히 순종하는 왕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의 참된 후손, 완전한 왕 예수 그리스도를 솔로몬의 부족함을 통해서 기대하게 됩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부와 명예와 지혜를 약속대로 솔로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솔로몬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주신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왕위와 임재를 약속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 자체를 의지하거나 다른 신을 섬기면 언약적인 징벌이 닥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자체를 의지하지 않고, 주신 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분을 의지하며 약속에 신실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솔로몬은 드디어 완성 된 성전으로 언약궤를 다윗성에서부터 가지고 옵니다. 이 일을 위해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와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을 자기의 성으로 소집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궤와 회막과 성막 안의 모든 기구들을 메고 올라옵니다. 솔로몬과 회중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언약궤는 지성소 안에 있는 두 큰 천사의 날개 밑에 놓여집니다. 그 궤 안에는 두 돌 판이 있습니다. 본래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가 있어야 하지만 소실되었습니다. 제사장이 언약궤를 지성소에 놓고 나올 때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계신다는 것이 구름이 성전 안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성전을 가득히 채운 것입니다(1-11). 이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성전에서 그 백성들과함 께 계십니다. 이것은 보고 솔로몬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캄캄한 데’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초월적으로 계실수도 있는 분이시지만, 친히 성전에 임재하여 계십니다. 이어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출애굽에서부터 다윗에게 이르기까지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셨다고 고백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심을 고백합니다(12-21).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을 찬송한 후에 솔로몬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솔로몬은 손을 펴서 백성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계시기에 부족한데, 자신이 지은 이 성전에 거하신다는 것이 엄청난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백성이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한다면 들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27-30). 또 그곳에서 의인과 악인을 재판하여 주시고(31-32),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시고(33-34), 하나님의 징계 중에서도 그들이 깨닫고 돌이킨다면 용서해 주시고(35-40),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을 찾아 이 성전에서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41-43), 하나님이 원하시는 싸움을 나갈 때 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며(44-45), 심지어 범죄함 때문에 징벌로써 다른 적국의 땅에 잡혀 가더라도 그곳에서 이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돌이켜 다시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46-53). 그리고 솔로몬은 마지막으로 백성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영원히 떠나거나 버리지 말고 온전히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주님의 계명과 명령을 지키고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도록 기도합니다(54-61). 이 모든 기도는 예수님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솔로몬과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십 사일동안 절기를 지킵니다(62-66). 이로써 성전 봉헌식이 마칩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은 단순히 성전이 완성된 것에 대한 축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동시에 이 땅에 계시면서 백성들과 함께 교제하며, 그들의 기도와 예배를 받으시는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사의 축제였습니다.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고 제사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받아 주십니다. 이는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그 분안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자들의 기도와 예배를 받으시며, 예수님께로 돌이켜 오는 자들을 다 받으시며, 영원히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성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성전의 의미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참된 성전으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깊이 알게 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우리의 기도를들으시고, 우리 죄를 사하시며, 돌이킬 때 받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영원히 함께 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솔로몬은 여호와의 성전 뿐만 아니라 레바논 나무로 만든 왕궁도 짓습니다. 왕궁을 짓는데 13년이 걸립니다. 그 규모도 여호와의 성전보다 훨씬 큽니다(1-8). 왕궁 주위로 다른 집들도 짓습니다(9-12). 얼핏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왕궁을 성전보다 훨씬 크게 지음으로 자신의 부와 명예를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왕궁의 기능은 자신과 가족들이 살기 위한 집일 뿐만 아니라 재판하는 장소(7)로 사용되고 대규모의 백성을 모으는 회집 장소의 역할을 합니다. 또 그의 집을 성전과 거의 맞닿게 짓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참된 왕이심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 뿐만 아니라 부와 명예도 솔로몬은 하나님과 백성을 위해서 사용하는 모습을 왕궁 건설에서 보여줍니다.
이후에 솔로몬은 두로에서 대장장이 히람(5장의 왕과 동명이인)을 데리고 옵니다.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했다는 말은 당대 최고의 놋 전문가이자 기술자라는 말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두로 사람이고 어머니가 납달리 지파 출신인 혼혈이었습니다. 솔로몬은 그를 통해서 성전에 놋(청동)이 필요한 모든 부분을 맡겼습니다. 가장 먼저 놋 기둥 둘을 만들었습니다. 그 기둥의 꼭대기에는 여러 장식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기둥은 성전의 주랑(입구)에 세웁니다. 그 이름이 각각 ‘야긴(그가 세우신다)’ 와 ‘보아스(그에게 능력이 있다)’입니다. 성전을 세우신 분이 솔로몬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지으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성전을 능력 가운데 지키심을 상징하는 기둥입니다. 뿐만 아니라 놋으로 ‘바다(물을 받아 놓는 큰 대야, 물이 엄청 많아서 바다로 불림. 26절의 2천 밧은 약 44000리터 임)’를 열 두 마리 소가 셋 씩 동서남북으로 바치는 형태로 만듭니다. 이 대야는 제사장들이 성결 의식을 위해서 필요한 물을 받아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제물을 씻을 때 사용하는 물을 담아 두는 물두멍을 담는 수레를 열 개를 만들고 물두멍을 얻고 북쪽과 남쪽에 각각 5개씩 둡니다(27-39). 바퀴가 있는 것은 바다에서 물을 퍼서 북쪽과 남쪽으로 가지고 갔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에 필요한 부삽과 대접들과 솥도 놋으로 만듭니다. 놋이 워낙 많이 들어가서 다 재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마지막으로 성전 안에 둘 성전 기구들, 곧 금으로 향단과 떡상과 등잔대, 대접과 불집게와 그릇, 또 지성소 문의 연결고리를 만듭니다. 이로써 성전을 짓는 모든 일이 마칩니다. 외형만 지어졌다고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안도 채워져야 합니다.
이렇게 지어진 성전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 두 기둥의 이름의 의미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성전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은 유일하신 삼위의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나안 민족들은 항상 그 지역마다 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산당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래서 항상 언약궤가 있는 곳만 거룩한 장소이며 예배의 장소였습니다. 성전의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의 건축의 시작을 애굽에서 나온 지 480년만에 시작되었다고 굳이 언급했던 이유도 출애굽의 목적이 곧 유일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되새겨 주는 것입니다. 이제 솔로몬은 구원의 목적이 예배임을 성전 건축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이제는 고정 된 한 장소에서 한 분 하나님을 섬깁니다. 솔로몬은 가족 단위를 넘어 공동체로써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왕궁을 만들고 넉넉하게 제사 도구들을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백성들이 예배의 자리로 언제든지 나아 올 수 있도록 성전과 왕국이 건축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백성들과 교제하시기 위해서 성전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와 부와 명예는 백성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은 백성을 예배의 자리로 인도했던 왕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함께 예배로 이끄시는 참된 왕이자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한 분이면서 삼위로 계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매주 우리가 한 장소에서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우리가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백성임으로 확인하는 좋은 표가 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모여서 예배하시기 원하십니다. 한 하나님, 한 장소, 한 백성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매주일 함께 모여 공동체로 한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애굽에서 나온 지 480년이 흘렀습니다. 드디어 성전 건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지을 재료도 마련되었고, 일꾼들도 준비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의 길이는 약 27미터(1규빗은 약 45.6cm), 너비는 약 9미터, 높이는 약 13.7미터 였습니다. 이제 성막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멋지고 견고한 하나님의 집이 만들어 집니다. 그 성전은 위로는 삼층 구조입니다. 다락방은 제사장과 레위인들 위한 장소입니다. 성전의 외부와 틀이 갖추어진 후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증하는 것은 성전 건물이 아니라 언약에 순종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1-13).
성전이 완성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솔로몬은 널 판을 가지고 지성소를 만듭니다.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공간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공간은 일반적인 곳(뜰), 거룩한 곳(성소), 거룩한 곳 중에서 거룩한 곳(지성소)로 구별이 됩니다. 성막과 같은 구분입니다. 내소(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두기 위함입니다(21-22). 또 내소에 그룹(천사의 한 종류) 둘을 만들고 네 날개가 이 끝에서 저 끝에 닿게 합니다. 그리고 그 밖에 외소(성소)의 사방 벽에는 천사와 올리브 나무와 핀 꽃 형상을 새겼습니다. 이는 마치 에덴 동산과 같이 풍성함을 보여주며, 하나님께서 계신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천상의 세계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내소와 외소는 문으로 구별이 됩니다. 그 문에도 그룹과 감람나무(올리브)와 핀 꽃을 새깁니다. 성전 안 사방이 모두 그렇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7년 동안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줍니다. 성막(텐트)이 이동식 하나님의 거처였다면, 성전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정착하시고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 성전 내부는 최초의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의 장소였던 에덴을 연상케 합니다. 새로운 에덴으로서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성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그 분 안에서 깨어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이 될 것 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첫번째 아담은 순종에 실패하여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게 했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만드시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롬5:12-21).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사는 삶은 어떤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구체적인 삶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새 성전이십니다(요2:19). 또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셨습니다(고런6:19). 매일의 삶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과 풍성함을 누리며 거룩한 삶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두로 왕 히람은 사람을 보내어 축하합니다. 이전에 다윗 왕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성전 건축을 위한 벌목을 할 수 있도록 제안합니다. 솔로몬은 왜 다윗이 아닌 자신이 이 일을 맡았는지도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시돈(페르키아)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성전 공사에 쓸 나무를 요청합니다. 물론 공짜가 아니라 그 댓가로 양식을 주겠다고 합니다(1-6). 히람은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솔로몬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백향목은 소나무와 비슷한 나무로 다루기가 쉽지만 고급 나무입니다. 잣나무는 단단한 사이프러스 나무로 주로 기둥으로 사용하는 나무를 의미합니다. 성전 공사를 위해서 이런 나무 재료들을 공급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두로에는 이스라엘과 같은 평야지대가 없었기 때문에 밀과 기름이 필요했습니다. 둘의 계약은 이루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실제적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솔로몬은 전 국민 중에 삼 만명에게 의무적으로 노동을 부여합니다. 한 달을 일하고 두 달을 집에서 쉬는 일정입니다. 이 일의 담당자를 아도니람으로 세웁니다. 또 짐꾼도 칠 만명을 세웁니다. 또 산에서 돌을 뜨는 사람들(석공)도 팔만명을 세웁니다. 이들을 감독하는 관리가 삼천 삼백명입니다. 솔로몬은 크고 귀한 돌을 가지고 다듬어 성전의 기초석으로 사용하며 성전을 건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입니다(13-18).
솔로몬이 시작한 성전 건축에는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고, 체계가 있습니다. 또 많은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성전을 짓는 것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문화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향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모든 문화의 주인이시며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문화에 대한 주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모든 문화의 주인은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시각으로 정치, 문화, 경제, 사회, 기술 등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기술과 모든 문화들을 누리며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와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솔로몬의 신하들을 언급하는 것은 솔로몬의 영향력과 잘 조직된 정부를 보여줍니다. 서기관은 기록을 보관하고 서신을 준비하는 사람이고, 사관은 공식적인 행사를 관장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방관장의 두령은 식량 공급 체계를 총괄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이며, ‘왕의 벗’은 왕의 가까운 조언자, 상담자라는 뜻입니다(1-6). 또 솔로몬은 원활한 식량 공급을 위해서 열 두 지방 관장을 둡니다. 구체적인 지역과 이름을 밝히는 것은 이런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거합니다. 또 각 지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많아졌고(20), 주변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아서 먹을 것이 풍성했다는 것은 나라가 강해졌다는 의미입니다(21).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하루 음식을 양을 보면 어마어마 합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성경에서 풍성함과 평안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그만큼 솔로몬 시대가 태평성대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25). 그런데 이러한 풍성함과 평안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잘 지킬 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지 솔로몬이 지혜롭게 정치를 잘해서 부유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을 왕과 백성들이 잘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이렇게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던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서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넒은 마음, 곧 해박한 지식과 분별함을 주셨고, 솔로몬은 언약의 말씀에 신실했습니다. 솔로몬은 식물과 동물학에 해박한 지식 뿐만 아니라 말씀에 대한 깊이도 대단했습니다. 에단과 헤만과 갈골, 다르다는 유다 지파의 자손들로 성전에서 노래하고 시편도 지은 사람들이었습니다(시88-89). 그들보다 찬송을 더 잘 지어불렀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솔로몬은 다윗에게 물려받은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그 제도와 관리들의 일부를 수용하면서 필요한 직위를 새롭게 편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을 중시하면서 자신이 맡은 나라가 하나님의 왕국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관리들을 말할 때 제사장을 먼저 언급되는 것을 보십시오(2).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지혜와 총명을 백성들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어진 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개인적 삶과 우리가 사는 세상도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과 풍성함과 평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교회가 말씀에 순종함으로 세워져 갈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사명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함과 평안함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삶에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변화되고 그 변화로 우리 주변 사람들을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솔로몬보다 위대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솔로몬의 달라진 위상으로 시작합니다. 애굽 왕 바로의 딸과 혼인 관계를 맺은 외교적인 정책입니다. 당시 애굽은 모세의 시대에 비해서는 약해져 있었고, 이스라엘 왕국은 강해졌기 때문에 이런 외교적인 교류가 가능했습니다. 아직 성전이 공사 중에 있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다윗 성에 머물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산당에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그곳에 일천 번제(천번의 제사 혹은 천마리 희생 제물로 드린 제사)를 드리고 그곳에서 잡니다. 그리고 꿈을 꿉니다. 그 꿈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무엇을 줄지 구하라고 하십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아직 부족한 것이 많고 하나님의 백성은 많기 때문에 그들을 잘 돌볼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합니다. ‘듣는 마음’은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12)입니다. 하나님은 그 대답에 만족하셨고, 그가 구한 지혜 뿐만 아니라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과 장수를 주시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이 행함 같이 하나님의 길로 행하며 그분의 법도와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14). 이 또한 언약적인 복이었습니다. 솔로몬은 꿈에서 깨어 제사를 드리고 돌아갑니다.
그 후에 두 여인이 찾아와 솔로몬은 재판을 하게 됩니다. 왕에게 나아와 재판을 한다는 것은 그 전에 장로들이 판단을 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문제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한 두 창기 중 한 사람이 자기 아들을 자다가 죽였는데, 몰래 아이를 바꿔치기를 한 사건입니다. 솔로몬은 칼을 가지고 와서 아기를 갈라 나누어 주라고 했고, 진짜 어머니는 그 아이에 대한 친권을 포기하면서 그 생명을 살리려고 합니다. 이에 솔로몬은 진짜 어머니에게 그 아기를 돌려줍니다. 이런 판결의 소식을 온 이스라엘이 들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온 백성이 솔로몬 왕을 존경하게 되고, 솔로몬의 마음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16-28).
오늘 말씀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이스라엘이 더욱 강하여 진 것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아직 성전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방점은 성전에 있습니다. 솔로몬의 통치가 견고해지는 이유가 성전을 건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솔로몬이 애굽과 동맹한 것은 외교적인 힘을 빌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연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것도 백성을 잘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성전을 건축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것은 일천 번제를 받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백성을 잘 다스리고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데 필요한 것을 구했기 때문에 기뻐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지혜는 솔로몬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야 백성을 제대로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솔로몬보다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로 바르게 인도 하시는 참된 지혜이십니다. 이에 바울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지혜이시라고 선언합니다(고전1:30).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참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갑시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 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과 교회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다윗은 죽을 날이 가까이 오자 자신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먼저는 왕으로서 대장부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힘쎈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바른 왕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부터 다윗은 참된 대장부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고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따라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1-4). 이후에 다윗은 왕으로서 솔로몬에게 자신이 이전에 정당하게 처리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라고 합니다. 바로 요압과 시므이를 처단하는 것입니다. 요압은 평화 가운데 자신의 자리를 위해서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사실을 당시에 알지 못하고 후에 알았으며, 제대로 처단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 일을 솔로몬이 완성해 주기를 바랍니다. 시므이도 다윗이 비록 그를 용서하고 죽이지 않았지만, 그가 언제 반역을 꾀할지 모르기 때문에 적절하게 처리하라고 합니다(5-9). 그리고 다윗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다윗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10-12). 다윗이 죽자 아도니야는 다윗에게 수발을 들던 아비삭을 솔로몬의 어머니에게 요구함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비록 아비삭이 다윗에게 수발을 들었고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지만 다윗에게 속한 여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솔로몬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녀를 요구한다는 것은 여전히 아도니야가 왕에 대한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정당화할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에 솔로몬은 밧세바에게 불같이 화를 냅니다. 이것은 반역 죄와 같기 때문에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처단합니다. 아도니야를 시작으로 그를 지지했던 아비아달도 제사장 직분을 박탈하고 고향 아나돗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요압은 그 소문을 듣고 제단 뿔을 잡았습니다. 제단의 뿔을 잡는 것은 억울한 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죽을 죄를 짓지 않았는데, 누군가 죽이려고 할 때 제단의 뿔을 잡으면 누구도 건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살인한 자가 그 뿔을 잡으면 주님은 그를 제단에서라도 끌어내어 죽이라고 하셨습니다(출21:14). 이에 솔로몬은 그를 끌어내 죽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시므이를 다윗이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를 가택 연금을 시킵니다. 단, 그곳을 벗어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삼년 후에 시므이의 종이 도망쳤고, 그를 쫓아 집을 벗어난 시므이는 결국 솔로몬과 약속을 어기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결국 솔로몬은 다윗이 말한 모든 것을 이룹니다. 이것은 왕으로서 행해야 할 일을 대장부와 같이 마땅히 행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모든 것을 율법 대로 행했고, 이에 그의 나라는 더욱 견고하게 됩니다. 평화의 왕 솔로몬은 외부로의 적들로부터 평온하게 된 땅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흔적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왕의 자녀들로서 대장부가 되어야 한다고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대장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여전히 우리 안에 남은 죄악들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해묵은 갈등과 반복되는 죄악을 대장부로서 담대하게 거부하고 정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왕 다운 왕, 다윗 왕은 이제 늙어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자가 누구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왕조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입니다. 열왕기상하는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자들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이루어 가시는지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이제 누가 봐도 다윗은 늙었고, 죽을 날이 다되어 갑니다. 다윗이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아 신하들은 늙은 다윗을 시종 들고 왕이 침대에 누울 때 같이 누워 온기로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서 수넴 여인 아비삭을 데려다 줍니다. 아비삭은 다윗 왕을 시종들고 다윗은 잠자리는 함께하지 않습니다(1-3). 그 때 다윗의 남은 아들 중 서열이 가장 높았던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합니다. 요압과 아비아달도 그와 함께합니다. 하지만 선지자 나단이 아도니야와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에 나단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밧세바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줌으로 솔로몬을 왕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나단도 이어서 동의합니다. 다윗은 솔로몬을 데리고 자신의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내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제사장 사독, 선지자 나단, 브나야, 그렛과 블렛 사람들이 왕의 말대로 솔로몬을 기혼에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나팔을 불어 온 백성에게 솔로몬이 왕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솔로몬을 노새에 태워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온 이스라엘은 새 왕을 경배하며 즐거워합니다. 이 소리를 듣고 아도니야와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다윗 왕이 공식적으로 솔로몬에게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도니야와 함께 한 사람들은 흩어졌고, 아도니야는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제단의 뿔(번제단의 네 모서리)을 잡고 솔로몬이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내려 오겠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그의 목숨을 살려 주었고, 집으로 돌려 보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볼 때 서열이 아도니야보다 낮았습니다. 압살롬과 같이 외적인 탁월함도 소개되지 않습니다. 다윗이 그를 후계자로 삼은 것도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사랑하시고, 택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지 그의 인간적인 탁월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대상22:8-10). 선지자 나단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말한 것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왕은 인간적인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집니다. 이는 온 교회와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도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질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참된 왕은 하나님께 지명을 받아 보냄을 받으신 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동일한 방식으로 세상을 복음으로 다스리고 정복한 백성을 인간적 어떠함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떠함을 단 0.000001%도 보지 않으시고, 오직 은혜로 택하시고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저 100%은혜입니다. 이렇게 온전한 은혜로 택함을 받은 우리는 100% 순종으로 보답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온전한 은혜에 감사하며, 온전히 순종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하게 됩니다. 이 인구조사의 목적은 다윗 자신이 이룬 성과를 확인하고, 얼마나 많은 군대를 조직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라의 운영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불신앙의 행동이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백성을 자신이 이룬 것으로 생각하는 교만한 행동이었습니다. 악한 요압 조차도 그 일을 말렸지만 다윗은 고집대로 인구조사를 하도록 합니다. 결국 다윗은 인구를 조사한 후에 마음에 찔러 그것을 후회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깨달은 것입니다(10).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갓을 통해서 세 가지 벌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역병이 사흘 동안 백성을 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의 천사가 내려와 사흘 동안 점염병을 이스라엘에 내립니다. 죽은 자가 7만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죽지 않도록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16절의 ‘뉘우치사’라는 말은 ‘후회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잘못 하신 것을 돌이키시거나 실수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악을 심판하실 때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백성을 치는 천사가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이 있는 것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이 범죄한 것을 인정하면서, 이 백성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중보합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자신의 집을 치라고 말합니다(17). 그 날에 갓은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하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사서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향한 기도를 다시 들으십니다.
이렇게 사무엘상하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사실 23장으로 끝이 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인구조사로 끝이 납니다.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실 1절이 중요합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기 위해서 다윗을 격동 시켰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죄를 짓도록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꼬신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할 때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는것이 목적이셨습니다. 심판 가운데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셔서 멸망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을 통해서 다윗은 심판 받는 백성을 위해서 자신과 자신의 집을 치시라고 말하며 중보자와 대속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사서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다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성전이 세워질 것입니다. 따라서 사무엘상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서 백성을 중보하고 나아가 백성을 위해서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시고 참된 성전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것으로 마칩니다. 이 일은 가깝게는 솔로몬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서 백성을 중보 하지만, 예수님은 무죄하신 중에 백성을 위해서 중보하시고 대신 벌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심판을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지금도 중보자로 당신의 백성인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한 참된 성전으로서 우리로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도록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긍휼과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은 다윗의 마지막 말(1-7절)과 다윗과 함께 했던 용사들(8-39절)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은 일종의 운문(시)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들여 쓰기를 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래로 만들어 후대에 기억되기 쉽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세워진 왕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말은 다윗이 왕으로 다스릴 때 자신의 생각대로 백성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다스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공의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백성을 다스렸습니다(3).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집(가문, 왕조)를 세워 주신 것에 대해서 기억하고 감사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의 모든 구원과 소원을 이루신 것을 찬양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악한 자들은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은 자신에 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말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서 인간적인 연약함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언약, 은혜 때문에 자신이 왕적인 직무를 감당할 수 있었다고 노래합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은 다윗이 왕적인 직무를 혼자서 다 감당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와 함께 한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게 충성된 자들이었고, 심지어 왕의 소원을 위해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의 물을 길러 온 자들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땅에 쏟아 하나님께 드림으로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서 동역자들을 위험에 빠뜨린 것을 하나님 앞에서 후회 합니다. 왕으로서 자신을 위하여 그 권위와 힘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다른 민족들과 싸움에서 공을 세운 것은 단순히 한 나라를 위한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정복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과업을 함께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적인 직무를 제대로 감당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좋은 왕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오실 참된 왕,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그림자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왕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왕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에게 맡겨진 구원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사역이 승천 후에 이어지도록 제자들을 부르셨고, 훈련 시켰고, 사역을 그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마28:16-20).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복음을 전파함으로 악의 세력이 자리 잡은 곳을 복음으로 정복해 갔습니다. 제자들은 죄와 사탄을 거부하는 백성들인 교회 공동체의 기초를 놓았고, 직분자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교회가 죄와 사탄을 거부하는 왕적인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엡2:20, 4:11-12). 우리는 주님의 왕적인 사역을 이어 받았습니다. 오늘 하루도 죄와 사탄과 싸우는 왕적인 사역을 잘 감당합시다. 특별히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 곧 동역자들을 주셨음 기억합시다. 함께 동역하며 서로 세워주고 헌신하며 늘 우리 교회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함께 이 땅에서 죄와 사탄을 정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이 시는 시편 18편에 거의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는 다윗의 말년이 아니라 다윗이 왕으로 세워진 초기에 쓰여진 시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방패와 피할 바위가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서 저자는 다윗이 나이가 많고, 많은 죄악을 저지른 후인 22장에 적었습니다. 이는인생이 잘 풀릴 때 뿐만 아니라 풀리지 않을 때, 하나님 앞에서 많은 죄악을 저지른 후에 라도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인생의 가장 낮은 곳, 실패와 죄와 연약함 가운데 있을 때에도 여전히 반석이 되시고요새가 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다윗은 인생의 정점이든 가장 힘든 시간이든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뢰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시는 다윗과 그 후손에게 하나님께서 구원과 인자하심(신실함)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신실해 주시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삶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적을 많이 베풀어 사람들이 따르던 순간에도, 가장 낮은 곳인 십자가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피난처와 반석으로 의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힘으로 이 땅에서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도 인생의 정점이든 가장 낮은 순간이든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반석과 피난처로 삼아 하루 하루의 삶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큰 성벽이 있어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성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피할 반석과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발을 사슴과 같이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 순간, 모든 과정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을 피난처로 삼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다윗이 다스리던 어느 시점에 삼 년 연속으로 기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서 삼 년 연속으로 기근이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표였습니다. 이에 왕은 하나님께 여쭤 보았고, 그 원인이 이전에 사울이 기브온 족속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1-2). 기브온은 여호수아 때에 비록 이스라엘을 속이기는 했지만, 여호수아와 언약을 맺음으로 언약 백성 안으로 들어온 자들입니다(수 9장). 그들은 정당하게 이스라엘 안에서 거할 수 있었고, 제사를 위해 물깃는 역할을 감당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어떻게 하면 여호와의 기업을 위해서 복을 빌겠느냐고 묻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학살했던 사울의 잘못을 물어 그의 자손 중에 일곱을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하나님 앞에서’ 목 매어 달겠다고 합니다. 이는 단지 사적인 복수심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에 다윗 왕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 때문에 아끼고 다른 자손들을 내어줍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서 그들을 목매어 달았고 다윗은 후에 사울의 뼈와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에서 가져와 그들의 지파가 속해 있는 곳으로 가지고 와서 함께 장사를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십니다(3-14). 다시 다윗은 정의를 세우는 왕적인 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 왔을 때 다윗은 전쟁에 함께 나아갔지만,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에 다른 부하들이 왕을 지키기 위해서 이제는 전쟁에 함께 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윗은 일부러 전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만큼 육체적으로 노쇠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는 다른 부하들이 블레셋을 무찌릅니다. 부하들은 다윗의 부하들로서 신실하게 행하였고, 전투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15-22).
사울은 기브온과 맺은 언약을 깨고 그들을 학살했기 때문에 그것은 가벼운 죄가 아니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사울의 자손들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셨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므비보셋을 남깁니다. 또 다윗의 부하들은 언약관계에 있는 다윗에게 신실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신실합니다. 오늘 말씀은 비록 여러가지로 부족한 나라, 공동체이지만, 하나님께 신실한 것과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신실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는 하나님께 신실하고 서로에게 신실해야 합니다. 사울은 정당하게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지체(기브온)에게 정당하지 않게 대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기브온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지체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언약 공동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정의는 서로에게 신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맺었고,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다른 지체들과 연합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성도들의 관계는 언약 관계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다른 성도들에게 맺은 언약에 신실한 우리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비록 우리 가정과 교회가 여러가지로 부족한 공동체이지만, 항상 신실한 언약의 공동체로 세워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다윗이 유다 족속의 선두로 귀환하였을 때 나머지 지파들은 유다 지파를 원망했습니다. 그 중에서 베냐민에 속한 불량배(불경건한 자)인 세바는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반역을 꽤 합니다(1-2). 다윗은 후궁들을 잡아 별실에 두고 죽는 날까지 생과부로 지내게 합니다. 이들은 압살롬이 취한 후궁들로 그들과 다시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다윗으로서는 앞으로 왕정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에 다윗은 아마사에게 유다 사람을 모아 삼일 안에 오라고 지시했지만 늦었고 아비새에게 세바를 제압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요압은 늦게 세바를 제압하는데 합류한 아마사를 제거합니다. 역시 자신의 자리가 위협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자신을 위협하던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을 제거한 적이 있습니다(삼하3:30).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서 그의 시체를 처리하고, 아마사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들의 옷을 벗어 그 위에 덮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모두 요압을 따라 세바를 쫓습니다(12). 세바는 이스라엘 많은 곳을 도피하다가 아벨이라는 곳의 한 성읍에 들어갔고, 요압은 그 옆에 흙으로 성을 쌓아 성벽을 허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에 있는 많은 사람도 죽게 될 것입니다. 그 성에서 한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과 이야기합니다. 요압은 어머니와 같은 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세바를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고, 지혜로운 여인은 그의 머리를 내어 주는 것으로 성읍을 구했습니다(14-22). 반란이 제압되고 다윗은 관리들을 임명하고 조직을 정비합니다. 요압은 온 군대의 지휘관이 되고, 브나야는 직업 군인들의 지휘관이 됩니다. 그리고 아도람은 노역과 세금을 감독하는 자, 여호사밧은 문서와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는 사관이 되고, 스와는 비서관이 되며, 사독과 아비아달은 사관(종교적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 됩니다. 야일 사람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됩니다(23-26). 다윗과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다시 왕좌를 되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왕권이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나라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세바의 반역이 있고, 요압이 아마사를 자신의 자리를 위해서 살해하는 일도 있습니다. 다윗의 왕국은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평화가 없는 불완전한 왕국입니다. 이러한 나라는 평화의 왕국을 더욱 바라보도록 만듭니다. 비록 솔로몬의 시대에 샬롬의 왕국이 되지만, 그 역시 일시적이고 금새 무너집니다. 완전한 평화의 왕국은 참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은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 당신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이미 그 왕국은 교회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참된 평화의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교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평화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이 평화의 나라는 아직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참된 평화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와 평안과 위로와 안전을 누리며 삽니다. 평화의 왕이신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평화를 누리며, 또 완성될 평화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바랍니다. 아멘.
다윗이 압살롬을 잃어 슬퍼한다는 소식은 금방 다윗의 온 군대에 퍼졌습니다. 이에 군대의 사기는 꺾였고, 그들의 승리가 마치 패배한 것 같이 여겨졌습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나아가 승리하여 돌아 온 백성을 제대로 맞이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윗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에 다윗은 승리하여 돌아온 군대를 맞이합니다(1-8). 이후에 압살롬을 따르던 온 이스라엘은 다시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려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먼저 유다 지파를 통해서 돌아가려고 하고 또 압살롬의 군대지휘관 아마사를 요압을 이어 군대장관으로 삼을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줍니다. 유다 지파는 이 소식을 듣고 다윗 왕을 모셔오는데 한 마음이 되어 요단 강까지 왕을 마중하러 갑니다.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저주했던 시므이도 베냐민 지파 천명과 함께 유다 지파와 나아오고 므비보셋의 종 시바도 그 아들들과 종들과 함께 왕을 맞이합니다. 시므이는 지난 날을 기억하지 말라고 회개를 합니다. 자신이 범죄한 줄 알기에 요셉 지파 중에서 제일 먼저 내려왔다고 합니다(20).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저주한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므이를 죽이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줍니다(22). 이미 다윗은 그가 저주할 때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자신을 회복시켜 주실 것임을 말했습니다. 이제 다윗이 돌아 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신다는 징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회복을 주시는 기쁜 날에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또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도 왕을 맞이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왕이 돌아올 때까지 발을 꾸미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지 않았습니다. 므비보셋은 그의 종 시바의 중상모략으로 다윗을 따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으로 다윗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고자 발을 맵시 내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왕이 돌아 왔으니 재산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전에 시바의 말만 듣고 그릇된 판단을 바로 잡습니다. 한편, 다윗은 그를 어려울 때 도왔던 바르실래에게도 은혜를 갚습니다. 드디어 왕은 요단을 건너 길갈에 도착했을 때,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아와 먼저 왕을 모셔 온 유다 지파를 원망합니다. 이에 유다 지파는 자신들이 왕과 같은 지파이며 이 일로 아무런 유익은 얻은 것도 없으니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여 온 이스라엘의 원망을 이깁니다(31-43).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정리하면서 왕으로 다시 회복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이 회개하였을 때 용서하고 받아줍니다. 특별히 시바가 회개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다윗을 받아 주셨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 후에 다시 다윗에게 회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끝이 있고, 그 가운데 은혜와 긍휼이 있었습니다. 또 다윗은 자신에게 은혜 베푼 자에게 은혜를 갚아 주었습니다. 다윗의 귀환은 다윗의 후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과 승천 후에 다시 오실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회개하는 자에게 자신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용서를 주시며, 그에게 신실한 백성들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합시다. 잘못된 부분은 회개하고 신실하게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제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는 전쟁을 벌입니다. 다윗은 전쟁의 명수답게 자신과 함께 한 군사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요압, 아비새 그리고 잇대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잘 정렬하여 전쟁에 나아가도록 합니다. 이렇게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한 번에 포위를 당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다윗도 함께 싸우러 나가려고 했지만, 다윗이 잡히거나 죽으면 다른 군사들의 싸움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고 성읍에 있어 도움을 달라고 합니다. 다윗은 군대 대장들과 지휘관을 모아 놓고 젊은 압살롬의 생명을 아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1-5). 압살롬은 왕이 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30살을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젊은 압살롬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버지로서 그를 아끼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두 군대는 싸움을 벌였고, 결국 다윗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수풀에 걸려 죽은 자들이 칼에 죽은 자들보다 많았다는 것은 이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압살롬은 왕족이 타는 고급 말을 타고 큰 상수리 나무를 지날 때 그의 머리카락이 걸러 공중에 매달리게 됩니다(9). 압살롬을 돋보이게 만들던 머리카락이 이제 그에게 죽음을 가지고 옵니다. 먼저 요압의 부하가 그렇게 달려있는 압살롬을 보았지만 다윗의 부탁으로 어찌하지 못하고 요압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의 말을 들었음에도 그의 부하와 함께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구덩이에 던지고 큰 돌을 쌓았습니다. 압살롬의 무덤과 자신이 살아있을 때 세운 비석이 비교 되는 것은 압살롬이 왕으로서 세워질 그의 계획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보여줍니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승리의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고자 했지만 요압은 그를 말리고 대신에 구스 사람을 보냅니다. 왜냐하면 왕의 아들이 죽었다는소식을 다윗 왕이 기뻐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히마아스는 거듭 요청했고 결국 구스사람보다 먼저 다윗에게 전쟁의 승리의 소식을 알립니다. 하지만 그는 압살롬의 소식을 모른다고 합니다. 이어 들어온 구스 사람은 압살롬의 죽음을 다윗에게 알렸고, 다윗은 마음이 심히 아파 웁니다(33). 다윗은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아버지로서 아들을 잃은 슬픔이 더 컸던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다윗의 모습은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일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대적하던 자를 심판하셨습니다. 더구나 그는 그의 이복 형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 승리를 주심에 주목하기 보다 자신의 아들을 잃은 것에만 너무 몰두했습니다.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기보다 압살롬의 죽음에 더 큰 마음을 쓰게 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부르면서 그를 대신해서 자신이 죽었어야 한다고 슬퍼합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그의 불평은 소용이 없는 불평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을 대신해서 자신이 죽어야 했다는 다윗의 흐느낌은 그의 자손에 의해서 주어질 대속의 죽음을 예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윗의 후소이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죄인인 압살롬을 위해서 다윗은 대신 죽을 수 없지만, 그의 후손은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시고 그분과 화목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압살롬에게 조언을 하던 아히도벨은 이제 다윗 왕을 제거할 수 있도록 압살롬에게 만 이천명을 택하여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가서 다윗 왕만 제거하고 다른 모든 자들도 압살롬에게 돌아오게 만들겠다고 합니다. 처음에 이 말을 들은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은 좋은 생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후새의 조언도 들어 보기로 합니다. 압살롬은 후새에게 아히도벨의 조언을 말한 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후새는 그것이 좋은 생각은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전쟁의 경험이 많은 용사이기 때문에 백성들과 함께 있지 않을 수도 있고 만 이천명으로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패배하면 낙심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후새는 모든 군사를 다 모으고 압살롬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여 다윗과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이에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은 아히도벨의 계획보다 후새의 계획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후새의 계획을 따르도록 합니다(1-14). 사실 후새의 계획은 다윗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벌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살인하고 왕좌를 찬탈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시는 계획이었습니다. 후새는 궁 안에서 다윗의 편에 있는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이런 아히도벨의 계획과 자신의 계획을 전달하여 다윗이 그날 밤에 나루를 건너 피신하도록 합니다. 사독과 아비아달의 두 아들,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이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났고, 압살롬이 보낸 사람들에게 발각 될 뻔 하지만 결국 다윗에게 후새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획이 채택이 되지 않은 것을 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는 정세를 잘 살피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도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다윗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임을 미리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히도벨의 계획이 채택되지 않은 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응답 이었습니다(15:3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징계를 실행하시는 중에도 긍휼을 다윗에게 베풀고 계십니다.
이제 다윗은 마하나임에 도착하고 압살롬도 온 군대를 모아 길르앗에 진을 치고 전쟁을 준비합니다. 다윗이 마하나임에 있을 때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나와 다윗과 함께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힘을 북돋아 줍니다(24-29).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범죄로 인해서 참으로 그 집 안에서 전쟁이 있고, 다윗의 후궁들이 대낮에 압살롬과 함께 동침하는 징계를 내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아히도벨의 계획을 무산 시킴으로써 다윗의 목숨을 지키시고 그에게 약속하신 왕조를 이루시도록 모든 상황을 제어하고 계십니다. 다윗의 죄에 대해 징계하시면서 동시에 압살롬에 대한 죄도 징계하시고, 또 다윗에게 약속한 왕조도 지켜 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당신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사람과 모든 상황을 통제하시며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모든 상황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모두 이루십니다. 공의를 행하시면서도 긍휼을 베푸십니다.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행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다윗과 일행들이 마루턱을 지나 피신하고 있을 때 므비모셋의 종 시바가 나와 다윗과 일행을 위해 먹을 것과 탈 것을 준비합니다. 다윗은 은혜 베풀었던므비보셋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습니다. 시바는 예루살렘에서 다시 왕위를 찾으려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1-3). 사실 이것은 시바가 므비보셋을 속이고 모함하는 것이었습니다(삼하19:24-26). 다윗은 므비보셋의 재산을 모두 시바에게 줍니다. 시바는 만족합니다(4). 이것도 다윗이 왕으로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부족함을 보여줍니다. 다윗 왕이 바후림에 있을 때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나와 다윗을 저주합니다. 시므이는 사울의 족속 중에 죽은 사람의 책임이 모두 다윗에게 있다고 저주합니다. 하나님이 세운 재판장이나 지도자를 저주하는 것은 죄입니다(출22:28). 이에 다윗 옆에 있던 아비새가 시므이의 목을 베겠다고 하자 다윗은 그가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라고 하면서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사실 이렇게 압살롬에게 쫓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범한 죄의 징계로서 이미 말씀하신 것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칼이 그의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 저주를 자신에게 선으로 갚아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자신을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12).
그 때에 압살롬과 일행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아히도벨도 함께 있습니다. 다윗이 보낸 후새도 그 때 압살롬에게 만세를 부르며 나아갑니다. 그리고 압살롬과 함께 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은 다윗을 위한 것이었습니다(15-19). 이제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묻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이 남겨둔 후궁들과 백성이 보는 앞에서 동침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곧 그가 다윗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였습니다(21-22). 그렇게 함으로써 압살롬을 지지하는 측근들과 백성들에게 더 큰 확신을 주었을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조언은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지혜가 있었고 또 효과가 있었습니다.
사실 아히도벨은 알지 못했지만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압살롬이 이렇게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의 일부였습니다(삼하12:11).
다윗은 결국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고 저주를 받게 됩니다. 또 자신의 후궁이 압살롬과 함께 대낮에 동침하는 상황을 겪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밧세바에 대한 죄의 징계와 암논에 대한 압살롬의 죄에 대해서 바르게 심판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다윗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시므이를 통해서 받는 조롱 또한 먼 훗날 그의 자손이신 예수님이 받으실 저주를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조롱과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또 다윗이 조롱하는 자들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그 모든 상황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시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되갚지 않으실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다윗의 모습은 예수님이 어떠할 분이실지 미리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신뢰에 응답하셨고, 부활로 왕위를 주셨듯이, 다윗의 신뢰에도 응답하시고, 그에게 왕위를 돌려줍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심지어 그분의 징계에 있는 상황 속에서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긍휼하심은 심히 큽니다. 그 긍휼하심을 기억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그분을 신뢰하여 회복을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범죄한 암논와 압살롬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자 백성들의 마음은 다윗을 점차 떠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압살롬이 왕께 재판을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 왕께서 재판할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는 말은 백성들의 마음이 더욱 압살롬에게로 향하게 만듭니다. 왕께서 해주지 않는 것을압살롬이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1-6). 결국 민심은 왕위 계승 1순위인 압살롬에게 향합니다. 4년 뒤에 압살롬은 다윗을 속이고 헤브론에서 반란을 계획 합니다. 압살롬은 그곳에서 사람들을 보내어 헤브론에서 자기가 왕이 될 것임을 알립니다. 헤브론은 다윗이 처음 왕이 된 곳입니다. 그와 함께 있는 일부는 어떤 일인지 알지 못했지만, 또 일부는 분명히 다윗에게서 돌아서서 압살롬의 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으로 다윗의 조언자 아히도벨입니다(7-12). 이제 전령이 압살롬의 반란 소식을 전하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급히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왕의 곁에는 이전에 사울을 피해 도망할 때부터 함께 했던 가드 사람들 600명과 최측근들, 제사장 사독과 그와 함께한 레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메고 다윗과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독에게 하나님의 궤를 도로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다시 언약궤가 있는 곳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합니다(24-29).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가는 것과 제사장들이 함께 하는 것은 다윗에게 상당히 유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왕이 다윗이라는 사실은 압살롬의 반역에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언약궤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자신을 처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감람산에 올라가며 슬픔과 고통의 표인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갔습니다. 아히도벨이 배신한 것도 알게 됩니다. 이에 그를 대적할 만한 후새를 스파이로 예루살렘에 보냅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의 계략을 물리치도록 합니다.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의 아들은 연락책 역할을 맡게 됩니다(30-37).
오랜 후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도 감람산에 올랐습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분도 슬픔과 고통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책의 결과로 고통과 슬픔을 당하지만, 그의 후손 우리 주 예수님은 다른 이들을 위해서 고통과 슬픔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다시 주님이 계신 보좌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후에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듯이, 주님께서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므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다윗의 우유부단한 죄에 대한 처리는 결국 압살롬의 반역까지 불러옵니다. 왕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합니다. 다윗은 위대한 신앙의 조상이지만 완벽한 하나님의 종은 아니었고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님은 완벽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한 치의 실수 없이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올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와 같은 완전한 사람으로서 인생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배신을 겪으신 분으로 우리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완전한 왕으로서 심판하실 주님을 바라보고, 또한 그분이 우리의 아픔도 아시는 분이심을 기억합시다. 그분은 죄를 단호하게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우리의 연약함을 위로하시고 동정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힘을 주십니다. 이 예수님을 날마다 모시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있는 줄 알고 드고아의 한 지혜로운 여인에게 상복을 입히고 왕 앞에 나아가 할 말을 전하게 합니다. 1절에서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압살롬을 데리고 오고 싶어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진노나 미움이 압살롬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앞의 해석을 따르면 요압의 행동들은 왕이 압살롬을 데리고 오고 싶어 하지만 (아마도 법적인 심판을 내리지 않아) 그렇게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됩니다. 후자를 따르면 요압이 여론을 읽고 다윗의 부정적인 마음을 돌리려는 것입니다.
요압은 여인의 말을 통해서 다윗이 가상 재판에 스스로 모순이 생기도록 만듭니다. 여인의 이야기에서 핵심은 비록 형제를 죽인 자이지만, 그 마저 죽으면 그 집안의 대가 끊기기 때문에 꼭 율법대로 죽여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말을 듣고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합니다. 이 상황은 사실은 다윗의 상황이었습니다. 왕이 심판을 하지 않고도 형을 죽인 압살롬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것은 사람이 반드시 죽는 것과 쏟아진 물과 같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압살롬을 그만 용서라고 데리고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왕은 선과 악을 판단 하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은 자이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면 된다는 것입니다(12-17).
이에 다윗은 그 배후에 요압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챕니다. 요압은 아마도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압살롬과 다윗 사이에 화해를 시도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다윗은 압살롬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24). 왕으로서 최소한의 정의를 지키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압살롬이 얼마나 외모적으로나 여론적으로 인기가 많았는지 보여줍니다. 또 그의 딸의 이름을 암논에게 강간 당한 다말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동생을 아꼈고, 또 그 일을 잊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이 아들과 딸을 낳은 것을 보여줌으로 예루살렘에서 그의 세력이 커져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27). 압살롬은 2년 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합니다. 이에 인내심은 바닥났고,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어 다시 아버지를 설득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요압이 그 사람을 만나 주지 않습니다. 압살롬은 요압의 보리 밭을 태워 그를 자기에게오게 합니다. 그리고 요압을 왕에게 보내 죄가 있으면 물으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자신이 암논을 죽인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혹은 이미 3년 동안 그 죄값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압이 왕께 나아가 전하자 다윗은 압살롬을 용서하고 화해의 입맞춤을 하게 됩니다(33). 다윗이 압살롬과 화해 함으로 결국 압살롬이 반역을 꾸밀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15장).
오늘 말씀에서도 다윗이 왕으로서 자신의 직무를 정확하게 행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최소한의 벌을 내렸지만, 제대로 죄인을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죄인 압살롬을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받아 주었습니다. 예수님도 죄인을 부르시고 받아 주십니다. 하지만 다윗과 달리 그 책임을 죽음으로 물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책임도 예수님께서 지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참된 회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죄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타협 하거나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삶 속에서 죄악 된 우리의 모습에 쉽게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봅시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 죄가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해의 입맞춤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잊지 말고 감사와 순종으로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평화로워 보이던 다윗의 가정에 끔찍한 일이 발생합니다.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고, 2년 후에 그 여동생의 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다윗이 밧세바와의 범죄와 패턴이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성적인 범죄가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암논의 범죄는 다말을 강제로 취한 한 것이고, 그 후에 미워하여 내쫓은 것입니다. 다말이 ‘처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아직 암논과 약혼이나 결혼 관계를 맺지 않은 것입니다. 분명히 다말의 말대로 암논이 다윗에게 다말을 사랑하니 아내로 삼겠다고 했으면 다윗은 그것을 허락했을 것입니다. 또 다말은 암논이 하려고 하는 일이 그도 어리석게 만들 것이라고 합니다. ‘어리석게’ 된다는 말은 이스라엘에서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들을 일컫던 용어였습니다. 이렇게 다말이 암논에게 분명히 잘못을 지적했지만 거부하고 끝내 범죄하게 됩니다. 게다가 성적인 만족감을 얻은 후에는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는 암논이 다말을 성적인 대상으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말과 그의 집안을 모독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처녀를 강간했을 경우에는 남자가 신부 값을 지불하고 그 여인과 결혼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결코 겁탈한 여인을 버려서는 안됩니다(출22:16). 이에 다말은 그의 친 오빠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지내게 됩니다(1-19).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도 그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매우 진노했지만 그 후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왕으로서 이런 일을 제대로 처리해야 했습니다. 다말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든지 아니면 그에 상당하는 벌을 내려야 했습니다. 결국 죄에 대한 다윗의 이런 안일한 태도는 2년 후에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더 큰 죄악으로 이어집니다. 양털을 깎는 날은 축제와 잔치의 날입니다. 그날에 다윗 왕을 초대하여 자연스럽게 그 아들들도 참석할 수 있도록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 다윗은 압살롬의 부탁을 거절했고 압살롬은 직접적으로 암논만큼은 참석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 다윗은 어느정도 이 일을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우유부단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결국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의 가족에게로 도망치게 됩니다. 다윗은 그의 아들로 슬퍼하고, 죽은 암논보다 도망한 압살롬에 대한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죄악 대한 바른 심판보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더 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자식의 죄에 대해서 우유부단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왕으로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이는 그의 인간적인 연약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또 그만큼 자식들의 잘못에 대해서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처음에 암논에 대한 잘못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므로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됩니다. 죄에 대한 문제는 항상 비슷한 양상을 가집니다. 제대로 죄의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됩니다. 나아가 공동체를 위협합니다. 우리는 죄의 강력한 파괴력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공동체를 약하게 만들고, 위협하는 죄들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바르게 처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다윗이 범죄한 후 수개월이 지났습니다. 그 아들이 이미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죄에 대해서 회개할 기간이 충분했지만, 오히려 죄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범죄한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나단은 한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다윗의 죄를 지적하십니다(1-6). 나단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죄를 짓는데 사용한 것에 대해서 다윗을 책망합니다. 다윗은 뭔가 부족해서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권력과 부와 부인들을 주셨는데,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이용해 부하를 죽게 만들고, 마음대로 부하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아에게만 범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행위였고, 이에 하나님은 칼로 우리아를 죽였으니 칼이 다윗의 집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백주 대낮에 다윗의 아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동침하게 될 것입니다(이 일은 압살롬 때에 일어납니다(삼하16:22)). 이에 다윗은 즉시 회개합니다(13). 선지자를 통해 죄를 지적하실 때 비로소 죄를 죄로 인식합니다. 다윗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여호와의 원수가 비방할 거리를 얻었습니다. 때문에 그 낳은 아들은 죽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아이를 치셨고 7일을 앓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금식하고 엎드려 아이를 살라 달라 기도했지만, 결국 그 아이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이가 죽은 후 다윗은 기운을 차리고 음식을 먹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14-23). 다윗은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징계가 너무 가혹하다고 하나님께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비하면 하나님께 내리는 징계는 은혜로운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여디디야(여호와의 기쁨, 솔로몬)를 주심으로 회복을 주십니다(24-25). 죄의 문제가 해결 되었을 때, 요압은 다윗이 전쟁을 마무리하여 공로를 가지도록 다윗을 부릅니다. 다윗이 다시 왕으로서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나가서 암몬 자손의 성읍을 정복합니다(26-31). 이는 다윗이 다시 회복된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서 죄를 지적하기 전에는 그 죄를 감추고 덮어두었습니다. 그러나 나단을 통해서 지적하실 때 즉시 회개했습니다. 이는 사울의 모습과 달랐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서 죄의 지적을 받을 때에 회개보다는 끝까지 하나님을 자신의 권력을 위해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아주 무겁게 생각했고, 하나님은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가 받은 무거운 징계는 죄의 값이 아니라 성화를 위한 아버지의 회초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징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였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아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에게 회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해결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그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죄에 대한 심판과 저주를 우리를 대신해서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때문에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죄에 대한 심판과 저주, 영원한 죽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범죄하였을 때, 성품과 생활의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은 여전히 징계하십니다. 그것은 우리 죄의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죄를 미워하게 만드시는 성화의 방법입니다. 그렇게 징계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고 우리가 그분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히12:5-11).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안에 있는 죄를 지적하시고 발견하게 하실 때, 즉시로 회개합시다. 하나님께 회개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과 은혜를 깊이 경험하시고 우리의 삶이 변화되며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한 사건입니다. 다윗은 암몬 자손들을 멸하기 위해서 요압과 군대들을 보냈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직접 가서 전쟁을 해야 할 만큼 강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은 왕궁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저녁에 다윗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옥상에서 거닐다가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반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부하의 아내인 줄 알면서도 그녀를 왕궁으로 불러 동침합니다. “부정함을 깨끗하게 했다”는 말은 월경이 끝이 났다는 말이고 임신하게 되면 그 아이가 틀림없이 다윗의 아이 일 수 밖에 없음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다윗은 그 일을 조용히 덮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 특별 휴가를 줍니다. 하지만 우리아는 집으로 가서 아내와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그의 주 요압과 왕의 부하들이 전쟁 중에 있는데 자기 혼자 아내와 자며 편안하게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11). 우리아는 아주 충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두번째로 우리아를 취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 보내려고 했지만 역시 우리아는 집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후 다윗은 우리아의 손에 그를 전쟁 중에 죽게 만들라는 편지를 쥐어 주고 요압에게 돌려 보냅니다. 결국 요압은 다윗의 명령대로 우리아를 전쟁 중에 죽게 만듭니다(14-25). 우리아의 아내는 남편의 소식을 듣고 슬퍼합니다. 이 후 다윗은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고 아들을 얻게 됩니다. 이에 다윗은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최고의 순간에 음행을 행할 뿐 아니라(7계명) 충직한 종을 죽게 만들고(6계명), 그 일을 꾸미기 위해서(9계명) 몇 사람도 함께 죽게 만드는 큰 죄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하지만 이 죄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다윗이 하나님과 백성을 섬기는 왕으로 세워졌지만, 그 순간 자신의 지위를 남용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던 왕이 아니라 다른 민족과 다름 없는 왕의 모습으로 일순간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 왕으로서의 직무를 잊고 자신이 진짜 왕인 것 처럼 행동했습니다. 순간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앉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왕 조차도 완전한 왕이 아니라 죄인일 수 밖에 없음을 본문을 보여줍니다. 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윗보다 위대한 왕, 메시야를 기다리게 합니다. 그분은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왕으로 무죄하셨고,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완전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백성을 죽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려 구원한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수 없이 마음으로 음행하고, 살인하며, 수 없이 그 죄를 덮으려고 더 큰 죄를 지으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자유 악용하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자유를 바르게 사용합시다. 우리에게 맡겨진 왕적 직무, 곧 죄와 싸우며 승리하는 직무를 잘 감당합시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 자신을 앉히지 않고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날마다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는 암몬 자손의 왕이 죽은 것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다윗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그의 신하들을 보냅니다. 다윗은 그의 아버지(나하스)가 다윗에게 ‘은총’ 베푼 것 같이 그 아들도 은혜를 베풀어 주도록 그리고 슬픔을 위로하고자 신하를 보낸 것입니다. 여기서 ‘은총’이라는 말은 헤세드입니다. 언약적인 신실함과 인자함을 의미합니다. 이전에 다윗은 암몬을 쳐서 속국으로 삼았지만 나하스는 주인인 다윗에게 신실(충성)했고, 다윗도 속국의 군주인 나하스에게 신실(인자)했습니다. 조문은 서로에게 앞으로도 신실하자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하눈의 관리들은 다윗의 호의를 왜곡하고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수염 절반을 깎고 의복을 엉덩이가 보이게 짤라 다윗에게 돌려보냅니다. 엄청난 모욕과 조롱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곧 다윗에게 더이상 신실하지 않겠다는 반역입니다(1-5). 이런 행동들은 다윗에게 분노를 사게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암몬 사람들은 아람 사람들과 마아가 사람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다윗과 싸우려고 합니다. 다윗은 이를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어 싸우게 합니다. 요압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싸우고자 합니다. 적들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암몬은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아람 사람들과 마아가 사람들은 뜰에 있었습니다. 요압은 한 부대로 아람 사람들을 맡고, 다른 부대를 동생 아비새에게 맡기며 암몬 사람들과 싸우도록 합니다. 만약 둘 중의 한 상대가 강하면 서로 돕자고 합니다. 그리고 요압은 무엇보다 하나님께 그 싸움을 맡깁니다(12). 그의 주인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전쟁을 맡깁니다. 요압이 백성들과 함께 싸우러 아람 연합군에게 나아갈 때, 아람 사람들은 도망합니다. 요압은 싸우지도 않고 승리하게 됩니다. 암몬 사람들은 아람 사람들이 도망한 것을 보고 성 안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합니다(14). 아람 연합군은 패한 후, 나중에 힘을 모아 이스라엘과 싸우고자 합니다. 다윗은 아람 연합군이 진을 쳤다고 소식을 듣고 출정하여 아람 병거 700대와 마병 4만을 죽이고 하닷에셀의 군사령관 소박을 죽임으로써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15-18). 결국 하닷에셀에게 속한 아람의 속국들은 다윗과 언약을 맺어 충성을 약속합니다. 이제 다윗의 영향력은 이스라엘 땅을 넘어 더 북쪽에 있는 아람까지 미치게되었습니다. 이 역시 7장에서 약속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언약이 주된 주제를 차지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지 않고 충성을 저버리는 자에게 다윗은 응징을 합니다. 이런 모습은 사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규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속국으로 주인이신 왕에게 신실해야 합니다. 그렇게 신실하겠다고 말했고, 그 의무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언약적인 관계가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들과 관계에서 반영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시듯이 다윗은 속국에게 목숨을 걸고 지켜주고 보호함으로 신실합니다. 속국은 그런 이스라엘에게 충성을 다함으로 신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언약 관계를 깨뜨린 암몬 자손에게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승리는 이런 언약적인 관계에 충실할 때 하나님께서도 신실하게 반응하신 결과 입니다. 만일 다윗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버리고 언약을 어긴다면,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될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교회(그리스도인들)와 맺으셨습니다. 이 언약은 다시 깨어지지 않는 언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언약을 깨지 않으십니다. 버리지 않으십니다. 대신 우리를 책망하고 징계하셔서 언약에 신실할 수 있도록 만드십니다. 이것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언약에 신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복과 승리를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돌이켜 회개합시다. 또 서로에게 신실한 성도가 됩니다. 그래서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다윗의 나라가 더욱 확장되고 안정을 찾아가는 중에 다윗은 혹시 사울의 집에 남은 자가 있는 지 알아 봅니다. 그는 이전에 요나단에게 자신이 왕이 되면 그의 자손을 돌보아 주기로 약속을 했었습니다. 사울의 집에는 시바라는 종이 남아있었고, 그를 통해서 사울의 집에 남은 자가 있는지 묻습니다. 시바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다리를 저는 자였습니다(삼하4:4). 다윗 왕은 므비보셋을 불러 그를 안심시키며 그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이전에 사울에게 속하였던 모든 밭을 돌려주고 므비보셋을 왕자들의 하나와 같이 여겨 함께 식사를 하도록 합니다. 왕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한 가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시바를 불러 므비보셋을 잘 보살필 것을 명합니다. 사무엘하 저자는 종 시바가 본래 섬겨야 할 므비보셋보다 더 부자인 것을 언급하기 위해 시바에게 아들이 열다섯 명이이며 종이 스무명이라고 말합니다(10). 그러나 그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므비보셋의 아들은 미가라고 밝힙니다. 므비모셋의 아들의 이름을 밝히므로 므비보셋이 더 존귀한 자임을 보여줍니다. 시바는 다윗이 명령한대로 다 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후 므비보셋은 다윗 아들 중 하나와 같이 예루살렘에 머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셨듯이 다윗도 자신과 요나단이 맺은 언약에 신실하게 행동합니다(삼상20:12-17). 다윗의 이런 행동은 므비보셋에게는 전적인 은혜입니다. 므비보셋이 말한대로 다윗 앞에서 죽은 개와 같은 자기를 돌보아 주는 다윗에게 깊은 감사를 합니다. 또 다리를 저는 것을 하나님의 저주로 여기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는 비천한 존재로 살 뻔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은혜로 왕자와 같이 살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아 비참한 존재로 살 뻔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한 없는 은혜로운 보혈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므비보셋과 같이 아무런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주님께서 은혜로 건져 주셨습니다. 언약에 신실하게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 이를 성찬을 통해서 경험합니다. 비천한 우리를 예수님께서 가족으로 삼아 예수님께서 차려 주신 왕의 식탁에 나아가 교제합니다. 또 우리는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서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고 한 몸으로 살아가겠다고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언약 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어 주신 언약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신실하고 서로에게 신실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은 후 본문은 다윗의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치고(1), 모압도 치고(2), 소바(3-4), 아람(5-8), 암몬 족속(12), 에돔 족속(13-14), 아말렉 족속(12)을 모두 정복하게 됩니다. 이 모든 족속들은 이스라엘이 이미 분배를 받은 땅에서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못하던 그런 족속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족속들을 모두 무찌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영토들을 회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복된 족속들은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됩니다. 또 다윗은 이렇게 정복하여 얻은 노략물들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립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누가 그 승리를 주셨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셨던 것입니다(6,14). 다윗은 자신의 힘과 자신의 능력으로 그런 일을 수행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승승 장구하는 것은 모든 원수를 벗어나 편히 쉬게 하고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계신 하나님 덕분입니다(7:11). 다윗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전쟁을 통해서 영광을 얻으셔야 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백성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적으로 그 공을 따라서 적절하게 관리들을 임명합니다(15-18). 다윗은 백성들에게 공정하게 그 몫을 돌려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실행하시고, 다윗은 자신의 성공이 하나님의 약속 덕분임을 알고 하나님께 전쟁의 공로를 돌려드립니다. 다윗은 언약에신실한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분께 은금을 돌려 드리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또 내부적으로 정의와 공의를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인정하며 백성에게 정의를 행하는 왕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왕이었습니다. 이는 참된 왕으로서 백성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십자가에서 승리의 얻게 되시는 예수님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죄와 죽음과 사탄과의 싸움에서 얻으신 의로움과 영원한 생명을 자신만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에게 돌려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덕분에 누리는 구원의 삶과 평안에 대해서 감사하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임을 인정하며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는 화려한 왕궁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는 텐트에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단에게 말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좋은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에게 놀라운 말씀을 주십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집을 세워주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왕조(가족)’를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고 그 백성들을 한 곳을 정하여 거주하게 하며, 또 원수의 손에서 벗어나 안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죽으면 그의 자손을 세워 나라를 견고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자손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집(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은 그의 나라의 왕위를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또 다윗과 자손에게 아버지와 같이 되어 죄를 범하면 매로 벌하겠지만사울과 같이 왕의 자리는 빼앗지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10-15). 다윗의 집(가문)과 나라가 영원히 보전될 것이라고 약속을 주십니다(16-17).
이에 다윗은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큰 은혜에 감사하며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여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 것에 대해서 깊은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 없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18-29).
다윗은 하나님께 집을 지어드리려고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에게 집(왕조)을 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다윗과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왕조가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사실 이 약속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다윗을 이어 하나님의 성전을 짓게 될 후손은 가깝게는 솔로몬이지만, 궁극적으로 참된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참된 아버지가 되시고 그분은 참 아들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왕위는 영원합니다. 그분의 나라도 영원합니다. 이제 다윗의 집(가족)은 영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자와 공주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잘못할 때 책망하시지만, 구원의 자리를 빼앗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원하시고 신실한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블레셋과의 전투 후에 다윗은 다시 군사를 모읍니다. 하지만 이 군사들은 싸우기 위한 군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기 위한 군사들입니다. 다윗은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자신의 생각에 가장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실행했습니다. 드디어 바알레유다(기럇 여아림과 같은 곳)에서 언약궤를 보관하고 있던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나옵니다.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수레를 몰고 옵니다. 다윗과 온 족속은 온갖 악기로 연주하며 갑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실은 소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뛰어 그만 언약궤가 미끄러졌습니다. 웃사는 그것을 붙잡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잘못함으로 웃사를 치십니다(1-8). 본래 하나님의 언약궤는 아무나 만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옮기는 방법을 이미 알려주셨습니다(민4:15). 제사장들이 잘 싸 놓으면 그것을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어야 합니다. 새 수레에 싣고 오던 방식은 블레셋이 언약궤를 돌려 줄 때 했던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방식으로 자신을 대하기 원하셨습니다. 다윗은 이 일이 있은 후 언약궤를 일단은 오벧에돔의 집에 둡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에 다윗은 다시 언약궤를 모시고 옵니다. 이번에는 말씀대로 제사장들이 메게 합니다(대상15:2). 그리고 이전의 죄에 대한 제사(아마도 속건제: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서 죄를 범했을 드리는 제사)를 드린 후에 온 힘을 다해 춤을 추면서 갑니다. 다윗이 베 에봇을 입은 것은 겸손한 표현과 동시에 참된 왕이신 하나님 앞에 예를 갖추고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성문에 들어 올 때 이렇게 춤을 추며 들어오는 다윗을 보고 미갈은 상당히 낮게 평가했습니다(16). 드디어 다윗은 궤를 미리 준비한 가운데 둡니다. 번제(완전히 태워드리는 제사로 전적인 헌신과 충성을 의미)와 화목제(하나님과 관계 회복을 감사하는 제사)를 드리고 온 백성에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 백성들에게 떡 한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한 덩이 씩 나누어 주어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17-19). 그리고 이 기쁜 날에 자기의 가족들에게 축복하기 위해서 들어올 때 미갈은 다윗 왕이 겸손한 옷을 입고 춤을 춘 것에 대해서 비난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고 그것보다 더 낮아 보일지라도 미갈에게는 높임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20-21). 사울의 딸 미갈이 생각하는 왕은 백성 위에 군림하며 하나님 앞에서도 권위를 내세우는 왕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참 왕이 하나님이시고 자신은 단지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당신의 방식으로 섬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의도가 좋을지라도 그 과정과 방식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이방인들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방식으로 살고, 당신을 대해주시길 원하십니다. 이 측면에서 예수님은 다윗보다 훨씬 탁월한 참된 왕이십니다. 그분은 온전히 하나님의 방식으로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떡과 포도주를 백성에게 나누어 준 것 같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섬김으로 얻으신 모든 것을 나누어 주십니다.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하나씩 고쳐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모시고 있는 것은 없는지 날마다 우리를 살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서 얻으신 의로움과 기쁨과 하나님과 관계 회복 등을 나누어 주심을 누립시다. 그리고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살피며 부족한 것들을 발견하고 하나씩 수정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이스보셋이 죽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나아와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웁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전에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온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예루살렘에서 33년을 다스리며 총 40년 6개월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릴 것입니다(1-5).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어떻게 다윗이 시온성(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에서 다스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알려줍니다. 시온성은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군사들은 다윗이 절대로 그 성을 정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성을 정복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성벽과 성벽 사이에 흙을 채운 ‘밀로’ 성벽을 만들어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6-10). 다윗은 그곳에서 40년동안 머물면서 처첩들을 더 두었고 아들과 딸들이 더 많이 태어납니다. 이는 다윗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왕이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솔로몬의 이름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을 볼 것이지만 미리 복선을 만들어 둔 것입니다(11-16). 신명기 17장 17절에서 왕은 아내를 많이 두어 마음이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성적인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왕이 아내와 첩을 두는 것은 정치적인 동맹과 긴밀히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외교력과 동맹 관계를 의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블레셋과의 전투 이야기에서 다윗은 비록 아내와 첩을 많이 두었지만 그것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큰 위협일 뿐만 아니라 이전에 아기스의 부하였기 때문에 일종의 반역 행위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블레셋은 다윗을 잡으러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 때 싸우는 다윗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 묻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전쟁을 임합니다.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 누구인지 다윗은 분명히 알고 있었고, 자신의 전쟁 경험과 군사력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순종합니다(17-25).
우리의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무엇을 의지하며 살 것인가 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왕으로 모시고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식을 그 분의 말씀에 따라서 구성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진정한 우리의 삶의 주인과 왕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자신을 왕으로 세우고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보셋은 낙심하게 되고, 온 이스라엘도 놀라게 됩니다(1). 게다가 이스보셋은 그의 군대 지휘관 바아나와 레갑 형제에 의해 살해 당하고 맙니다.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왕을 죽여 앞으로 통일 왕국의 왕이 될 다윗에게 호감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이렇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왕으로서 이런 불의를 행한자들을 심판합니다. 다윗은 의로운 왕으로서 불의를 통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자들을 통해서 왕의 자리를 추구하는 왕이 아님을 보여줍니다(2-12). 오늘 말씀 4절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죽음 바로 앞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넣어 둡니다. 므비보셋이 절름발이라는 것을 밝히는 이유는 그가 실질적으로 백성을 위해서 싸울 수 없는 자임을 보여주어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울의 집에서 이제 더 이상 왕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집은 흥하고 사울의 집은 완전히 약해졌습니다.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역사 가운데 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분을 신뢰하면서 사는 삶은 생각보다 고달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고,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된 판단을 했지만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왕위의 공식적인 성취가 이제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에도 다윗은 인간적인 방식에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징계함으로 왕적인 사역을 합니다. 우리 주님도 왕으로서 최후의 날에 심판을 오차 없이 하실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을 정확하게 가려내시고 심판하시고, 악인을 악인으로 의인은 의인으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닮은 왕적인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인간적인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 사이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며, 하나님의 방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지, 아니면 나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하는지 우리 자신을 살피고 판단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길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