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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데는 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로 옛날 루디아 왕국의 수도로 당시 모직 생산과 염색을 주산업으로 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족하여 사치하고 방종한 생활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데에 세워진 교회에게 당신을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라고 말씀하십니다(1). 하나님의 ‘일곱 영’은 완전하신 성령을 의미하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교회의 사자들을 완전히 주관하신다는 의미 입니다. 그분께서 사데 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의 행위를 아신다고 합니다. 그들은 살아 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죽은 자라고 하십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한다고 하십니다(1-2). 겉으로는 사치스럽고 생기 있고 재미있는 교회였는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죽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하십니다. 아직 죽지 않고 남은 부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복음을 어떻게 받았고,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고 회개하여 순수한 신앙으로 회복하라는 말입니다(3). 그렇지 않으면 도적 같이 주님이 오셔서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다행히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죽어가는 교회라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두십니다. 그들은 죄와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자들 입니다. 그들은 구별과 거룩을 상징하는 흰 옷을 입고 주님과 밀접한 교제와 영광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안다’고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5).
빌라델비아는 주요 무역로의 요충지였고 상업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이 교회는 주님께 충성하여 칭찬 받은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일곱 교회 중 책망이 없는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으로 생명과 사망, 천국과 지옥,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칭찬하신 것은 그들이 말씀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는 기적이 많이 일어나고 학식도 많고, 사회적으로 권세도 있는 그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핍박과 환란 중에도 주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지켰습니다. 주님은 이런 교회에게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먼저 복음 전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십니다(8). 구원받는 성도들을 계속 보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교회를 핍박하던 유대인들 중 몇몇이 회개하고 돌아옴으로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사랑하심을 알게 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또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황제에 의한 핍박에서 이기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전의 기둥과 같이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주님의 새 이름(부활의 이름, 승리의 이름)이름을 그들에게 새겨 하나님의 확실한 소유임을 나타내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6-13).
라오디게아는 부요한 도시로서 유명한 의학 학교가 있던 곳입니다. 그곳의 안약과 연고는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곳에 세워진 교회에게 주님은 참되고 충성된 증인으로서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가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함을 책망하십니다. 주님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미지근한 자세에서 열심을 내며 결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태도가 분명하지 않은 교회를 토하여 내치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형편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만하면 되었다고 교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명한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조롱과 책망이 섞인 권면입니다. 자기 만족과 착각에 빠진 교만한 교회에게 주님은 사랑이 담긴 권면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 책망과 징계를 통해서 열심을 내고 회개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단을 촉구합니다. 주님은 문 밖에 서서 회개할 때까지 두드리십니다. 문을 열어 주님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결단하면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함께 먹고 마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이기는 자는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각 교회에 주신 말씀을 가지고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에 비추어 봅시다. 오늘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고 회개하여 순수하게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님께 칭찬 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멘.
예수님은2장에서 본격적으로 각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요한 계시록은 일곱교회에 보내는 하나의 편지이기에 일곱 교회가 돌아가면서 읽었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에게 에베소 교회가 거짓 교리를 잘 막았다고 칭찬하십니다. ‘니골라 당’은 구약의 거짓 선지자 발람처럼 성도들을 꾀어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행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들을 잘 막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책망할 것도 있는데,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4). 에베소 교회는 이단을 분별하고 배척하느라 교회에 들어 온 선한 사람들도 의심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었습니다. 진리를 잘 지키면서도 형제 사랑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회개하라’라는 원어적 의미는 단호한 변화와 결단성 있는 행동을 촉구합니다. 처음의 순수한 열심과 사랑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이 명령은 단지 에베소 교회 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권면의 말씀이기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복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는 영생을 얻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1-7).
다음으로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에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장차 있을 고난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역사의 주관자 예수님께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생명의 왕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것은 둘째 사망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은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계20:14-16). 이렇게 환란 중에 충성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에게는 결코 둘째 사망이 있을 수 없음을 보장하십니다(8-11). 이어서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 편지할 때 주님은 날 선 검을 가진 분으로 묘사됩니다. 버가모 교회는 얼마 전에 황제에 의해 죽은 안디바를 보면서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 발람의 교훈을 따라 잘못된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그곳에는 우상의 신전들이 많았는데,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도 괜찮고, 잔치에 참여하고 음행을 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입의 검으로 싸우시겠다고 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적이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반면에 회개하고 이기는 자에게는 만나와 흰 돌을 주셔서 그 돌 위에 승리의 새 이름을 새겨 아무도 지울 수 없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12-17).
예수님은 두아디라에도 편지를 보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게는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살피시고 그분의 다스림이 견고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알고 칭찬하시지만 반면에 자칭 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하고 있음을 책망하십니다. 그녀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꾀어 행음하게 만들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그녀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었지만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녀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함께 행음한 자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져지고 그 여자의 자녀들, 곧 그녀의 가르침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꽃과 같은 눈을 가지고 계셔서 마음과 행위를 다 보고 계십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이세벨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회개하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통치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새벽 별을 주신다는것은 밝게 빛나는 귀한 별같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런 존귀한 영광을 믿는 자들과 함께 나눌 것을 말씀하십니다(18-29).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모든 것을 아시고, 칭찬 하실 것을 칭찬하시고 책망하실 것을 책망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에 순종했을 때 약속도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교회가 주의 말씀으로 부족함과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 가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우리 가정과 교회를 말씀을 비추어 살폈을 때 부족하고 회개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또 붙들어야 할 약속은 무엇인지 돌아봅시다.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저마다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항상 말씀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시면 어떻게 말씀하실지 돌아보며 말씀으로 개혁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밧모섬에서 유배 중인 요한에게 하나님은 박해를 받던 지금의 터키 서쪽에 있는 교회의 성도를 위로하기 위해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편지의 형태로 기록한 편지입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천사를 보내어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신화나 판타지가 절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어날 일들입니다. 요한은 먼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예배의 자리에서 읽는 자)와 그것을 듣는 자들과 그리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1-3). 요한은 읽는 것, 듣는 것, 그리고 지키는 것을 단숨에 이야기 함으로 이 말씀을 읽고 듣는 모든 사람(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 모두)이 이 말씀을 지켜 복 있는 삶을 살도록 격려합니다.
이어서 요한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요한은 성부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으로, 성령 하나님을‘일곱 영(일곱은 완전 수이므로 완전한 영이라는 뜻)’으로, 성자 하나님을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으로 선포합니다. 이어서 요한은 성자 예수님께 더 구체적으로 영광을 돌리는데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으로서 영광과 능력이 영원히 그분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4-6). 그분은 또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알파와 오메가)로서 역사의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7-8).
요한은 이제 어떻게 자신이 계시를 받게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요한은 어느 주일날 성령에 감동이 되어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은 보는 것을 기록하여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데빌피아, 라오디게아)에 보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음성이 나는 곳을 보니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머리 털이 하얗고, 눈은 불꽃같고, 발은 반짝이는 청동과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이 우렁차고 장엄한 사람과같은 형상이 일곱 금 촛대 사이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분의 오른 손에는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추는것 같이 밝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요한은 영광스러움에 엎드러져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이 예수님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교회를 위해서 하신 일,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임으로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오른 손의 일곱 별의비밀과 일곱 금 촛대가 일곱 교회의 사자(지도자)를 의미하고 일곱 촛대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9-20). 예수님에 대한 상징적인묘사로 “우리 예수님 이상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생겼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장은 왕과 제사장을 상징하고 머리 털이 하얀 것은 그분이 거룩하고 지혜가 무한하다는 것과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발이 청동인 것을 그분의 통치의 견고함을 상징 합니다(단2:33, 41). 오른 손은 능력과 강력함을 상징하는데, 일곱 별인 교회의 지도자를 오른 손으로 붙들고계시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거느리시는 것은 교회 가운데 그분이 친히 임재해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 박해를 받는 교회가 이 편지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듣고 머리속에 이미지화 했을 때 그들은 박해 가운데 당신의 교회에 임재하시고, 당신의 능력과 위엄으로 교회를 붙으시는 것을 확신함으로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로서 세상 만물을 붙들고 계신 분이시며, 당신의 영광과 능력과 위엄으로 교회를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러한 통치를 드러내며 그분의 말씀으로 영광스러운 다스림과 보호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참된 위로와 격려를 받고, 영광이 넘치게 됩니다. 오늘도 역사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으며 어려움 속에서도 힘을 얻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예수님의 동생 유다는 로마 제국의 한 지역에 있는 유대인 중심의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1). 유다는 이 편지의 수신자에게 위협을 주었던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복음의 도를 굳게 붙잡게 하기 위해서 편지를 씁니다.
유다는 수신자들을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킴을 받는 자들이라고 매우 친근히 부르며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많기를 기원합니다(1-2). 그리고 편지를 쓰게 된 동기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유다와 수신 공동체가 함께 받은 구원에 대해서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라고 권면하기 위함 입니다(3). 유다는 거짓 선생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유대주의자들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던 자들이었을 것입니다(4). 이들은 또한 ‘꿈꾸는 자들’이라고 불리는데, 황홀경을 경험함으로써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고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이성 없는 짐승’과같이 영적인 교만으로 충만했습니다. 또 성적인 부도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유다는 이들은 가인, 발람, 고라의 행동을 따른 자들이라고 합니다.
유다는 수신자들에게 이들에 대해 ‘힘써 싸우라고’ 합니다. 그들은 옛적부터 심판을 받도록 미리 기록된 자들입니다(4). 구약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도 불신자들과 미혹하는 자들이 나왔습니다(5). 또 주님께서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자리를 떠난 천사들을 큰 심판 때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어두움 속에 가두셨다고 합니다(6). 또 소돔과 고모라의 음란한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는 것을 언급합니다(7). 여기서 말하는 바는 이해하기 상당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타락한 영적인 존재도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신자의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선지자, 꿈꾸는 자도 도덕적으로 음란하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기에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될것입니다(8). 그들은 천사들 조차도 하나님의 판단에 맡긴 것을 교만하게 안다고 생각하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9-10). 이 사람들은 의인을 죽인 가인의 길과 돈을 밝힌 발람의 길로 가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가기에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11).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을 살피지 않고 교회의 성찬과 애찬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동체에 암초이며 자신의 배만 불리는 거짓 목자입니다. 또 그들은 열매를 절대로 맺지 못하는 뿌리가 마른 나무입니다(12). 에녹의 예언과 같이 경건하지 않은 모든 행실에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또 그들은 원망하고 불만을 토하고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여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들입니다(16).
유다는 주 예수님의 사도들이 이미 그들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는 것을 상기 시킵니다. 그들은 교회를 분열 시키고 육에 속하여 성령이 없는 자입니다(17-18). 때문에 수신자들이 할 일은 그들의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영생에 이르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또 믿음이 연약하여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끌어내어 구원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자들을 경계하되 자신도 그렇게 될까 두려워하며 긍휼히 여기라고 합니다(20-23). 마지막으로 유다는 능히 그 공동체를 보호하셔서 거침이 없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하나님께 예수님 안에서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돌리는 송영으로 편지를 마무리 합니다(24-25).
성도는 세상과 싸우고 정욕과 싸울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도 힘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것들이 우리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고 서로 긍휼히 여기며 때로 서로 권면함으로 참된 진리를 보존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나이가 많이 든 요한은 가이오에게 편지를 씁니다. 요한은 디오드레베를 조심하도록 하고 가이오와 데메드리오를 칭찬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요한은 인사말에서 당시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이원론적 사고와 달리 그의 사랑하는 동역자의 영혼이 잘 됨 같이 육체도 강건하기를 기도합니다(1-2). 또 요한은 가이오를 ‘사랑하는 자’라고 반복적으로 부르면서 사랑 안에서 참된 교제를 하고 있는 가이오를 언급합니다. 요한은 다른 형제들을 통해서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바르게 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뻤다고 합니다. 말씀의 사역자가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을 볼 때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3-4). 또 가이오가 순회 선교사들에게 행한 것이 신실한 것이라고 칭찬합니다(5). 순회 선교사들은 아마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방인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청중의 지갑의 노리는 당시 순회 철학자들과 구분되기 위해서 였습니다(7). 대신에 이미 믿는 성도들 가운데 순회 선교사들의 상황을 아는 성도들의 후원과 접대에 의지했습니다. 가이오가 그런 역할을 잘 감당한 것입니다. 당시에 순회 선교사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현지 성도가 제공하는 것은 선교사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과 같았습니다. 요한은 그렇게 함으로서 가이오도 복음을 위해 함께 일하는 자가 된다고 합니다(8). 요한은 이미 가이오가 속한 교회에 순회 선교자들을 추천하는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9). 하지만 그 공동체에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그들을 영접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악한 말로 요한의 추천서를 받는 사람들을 폄하하고, 형제들을 접대하지 않고 또 접대하는 자들을 내 쫓았습니다(10). 디오드레베는 교회 안에서의 영향력을 가지고 악한 곳에 사용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요한과 그의 추천을 받은 자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좁힐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한은 가이오에게 그런 디오드레베를 본 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11).
요한은 순회 선교사에게 지속적으로 호의를 베풀어 줄 것을 가이오에게 권면합니다. 이어서 요한은 데메드리오에 대해서 말하는데 아마도 데메드리오가 순회 선교사이거나 가이오가 속한 공동체의 직분자였을 것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진리(이신 예수님)도 그가 참됨을 증거합니다(12). 요한은 가이오를 직접 만나서 말하길 원합니다. 인격적인 교감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가이오에게 평강을 빌고 여러 친구들이 가이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또 요한은 가이오와 함께 있는 친구들(선교사를 선대했던 가이오의 교회 교우들)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편지를 마칩니다(15).
오늘은 같은 공동체 있지만 칭찬 받는 자와 책망하는 자가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선교사들을 잘 대접하는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동참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디오드레베는 거부했고, 가이오는 잘 대접하여 칭찬받습니다. 둘의 차이는 말씀과 그 말씀을 전파하는 자에 대한 태도의 차이입니다. 말씀의 사역자와 선교사들을 기도와 물질로 지원하는 것은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그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 같이 앞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를 잘 돕고 사역에 동참하는데 더 힘을 쓰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의 교제를 세계로 넓혀가는 교회로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물질로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요한은 택함을 받은 여인(교회)과 그의 자녀들(교회 회원들)에게 그들이 요한과 택함을 받은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사도와 다른 성도들)의 사랑의 받고 있음을 인사말로 전합니다. 그리고 성도로서 필요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임하길 기원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수록, 사랑을 실천할 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1-3). 나아가 요한은 교회의 회원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칭찬합니다(4). 가르침과 삶이 따로 가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은 서로 사랑하자고 권면합니다. 그것은 새로 만든 계명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에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떤 감정이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 행하는 실천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들은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가장 큰 동기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애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빛속에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함께 말씀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에게 인내하고 함께 계명을 지키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랑입니다(5-6).
미혹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합니다. 당시에 미혹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참 사람이나 참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라는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성령이 임하여 그리스도가 되었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 성령이 떠났다고 가르쳤습니다(가현설 영지주의). 하나님은 고난과 죽음을 당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고, 인간으로서 겪는 기쁨과 고통과 슬픔 모두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육체로 부활하셔서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계십니다. 미혹하는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면, 사도가 가르치고 목양한 것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자신을 살피고 온전한 상을 받도록 주의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핵심적인 사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미혹하는 자들은 지나쳐 사도들이 가르친 것보다 멀리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단들은 사도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가르친다고 주장 하지만 결국 거짓 가르침입니다. 바른 교훈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부와 성자를 모시고 삽니다. 요한은 이단자를 단호하게 대하라고 합니다. 집 안으로 영접하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제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요한 당시에 순회 선교사가 오면 숙식을 제공하고 설교를 맡기는 관례가 있었는데, 이런 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지 말고 강단을 맡기지 말라고 합니다. 요한은 진리를 벗어난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더 쓸 것이 있지만 편지가 아니라 얼굴을 보고 인격적인 교감 속에서 교제를 나누길 원합니다. 현대적으로 생각하면, 전화나 화상통화나 영상예배는 인격적인 교감이 부재한 것이기에 권장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부득이한 경우에는 임시적으로 허용되나 인격적으로 함께 나아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며 드리는 예배가 더 신앙에 유익하다는 것으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7-13).
바른 공동체는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기쁨으로 지킵니다. 서로 부족한 것을 감싸주고 연약한 것을 도와주며 항상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같은 신앙 고백으로 하나가 됩니다. 또 진리를 넘어서는 것에서는 단호하게 한 마음으로 거부합니다. 이런 공동체로 세워져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요한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자녀)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에게서 태어난 다른 자녀(신자)도 사랑한다고 합니다(1). 이것이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성도들이 서로 사랑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2). 그리고 그것은 무거운 짐과 같지 않습니다(3). 왜냐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성도들에게 승리를 줍니다(4-5).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이기고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드십니다.
예수님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것은 성육신으로 우리와 같이 되셔서 세례를 받으신 것과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것을 상징합니다. 물과 피, 모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메시야(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합니다. 물과 피와 성령은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참된 증인과 증거입니다. 성령과 예수님은 또한 한분 이십니다(6-8). 이런 하나님의 증거는 사람의 증언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믿을 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이런 하나님의 증거를 무시합니다(9). 또 다른 증거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영생은 단지 영원불멸이 아니라 질적으로 천국 백성으로 세상을 이기는 증거를 가지고 실제로 세상을 거슬러 사는 삶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이 있으면 영생을 가진 자임을 다시금 확신시켜 줍니다(13). 하나님을 향해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담대함은 그분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입니다(14).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가장 선한것을 주십니다. 요한은 또 모든 불의가 죄이지만,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합니다(16). 그것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실수로 지은 죄를 의미합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적그리스도에게 소속되어 복음을 완고히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기에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17-18). 여기서 만진다는 것은 헤치기 위해서 붙잡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이고, 또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시기에 악한 자가 성도를 해하려고 만질 때 지켜 주십니다(19). 성도는 예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때로 넘어질 수는 있으나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가지 않습니다. 성도는 구원의 은혜와 지식을 가지고 그분 안에 있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임을 압니다. 그래서 요한은 넘어지지 말고 우상숭배를 멀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권면으로 편지를 마칩니다(20-21).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한 성육신의 의미와 믿음을 바르게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날마다 죄를 멀리하는 이유가 됩니까?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마귀로부터 보호하심을 믿고 우상과 습관적인 범죄에서 벗어납시다. 그리고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본문에서 요한은 그의 수신자들을 괴롭힌 교리적 문제로 돌아옵니다. 요한일서를 받는 공동체 안에는 거짓 선지자를 통해 미혹하던 영적인 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했습니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 신자를 유혹하여 믿음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이 분별에서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느냐’ 입니다. 교회는 영적 분별력을 위해서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더욱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육신,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음, 부활과 승천에 관한 올바른 신앙 고백과 가르침 위에 서 있는 교회는 이단의 공격을 이길 수 있습니다. 거짓 가르침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속하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따라갑니다. 그러나 우리(요한과 사도들)는 하나님께 속하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사도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거짓 선생들은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사도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도들을 진리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적인 신앙과 가르침을 부인하고 그럴듯한 주장으로 성경을 사용합니다. 진리는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도적인 가르침을 기초해서 성경을 읽으므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1-6).
이어서 요한은 7절부터 다시 요한일서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인 가르침인 사랑의 권면으로 돌아 옵니다. 이 사랑의 명령의 근거 역시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가장 큰 사랑의 모범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전능하신 분인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사랑은 대상에 따라 달라지지만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사랑은 변하지 않고 영원합니다. 이 사랑은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연결하는 고리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삼위 하나님 안에서도 온전하지만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그 사랑 안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내어주신 구원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습니다. 때문에 요한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받았기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합니다(7-11).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보이게 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 이루시는 사랑의 열매를 통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거듭나서 성령의 성전으로 사는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심을 믿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합니다. 요한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잠시 머물러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이 참으로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과 인간이 연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요한은 주님의 심판날을 언급함으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 사랑안에 있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심판 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12-21).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런 사랑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는 자들이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한 자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런 하나님의 먼저 사랑하심을 경험한 자들 만이 지킬 수 있는 계명입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을 먼저 충만하게 누리기 바랍니다. 그 크신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요한은 ‘보라!’라고 하면서 이 편지를 읽는 모든 사람은 영광스러운 자녀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주목해야 한다고 합니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입양된 자녀들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여줍니다(1). 주님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자녀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거룩한 삶을 살고 죄를 미워하는 삶을 삽니다(2-5). 예수님 안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거듭난 성도는 회개의 영을 받아 행동을 돌이키는 것이 정상입니다. 세상에는 그렇지 않고 행동을 돌이키지 않아도 괜찮다고 거짓 위로를 하는 교회와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미 요한은 그런 거짓말에 미혹되지 말라고 그의 공동체에게 권면했습니다. 의로운 자들은 주님의 의를 따르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해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6-8).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런 삶을 끊어버리도록 하시기 위함 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일을 근원부터 멸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성도는 죄를 짓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말씀)가 그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합니다(10-11). 우리의 생활과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에게 속하여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성도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 예로 구약의 가인이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는 것을 그 의로운 동생을 죽임으로 증명했습니다(12).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기에 성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삐뚤어진 판단을 내리기에 성도를 미워하고 핍박합니다(13).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죄의 삯인 사망에서 벗어난 것을 보여주는 척도 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를 계속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죄를 짓는 자이고 영생이 그 속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고 나아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물질로 궁핍한 형제를 도와야 하고 어려움에 있는 형제를 돌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진리가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더 믿음이 강하게 됩니다. 믿음과 실천은 항상 같이 가고 서로 강화합니다(19). 또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우리를 판단하십니다(20). 우리의 마음이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사랑을 실천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21). 또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의 기쁨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2).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은 우리가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23).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주님을 바르게 믿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주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증거이고 성령이 그 속에 계신다는 증거입니다(24).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천은 무엇보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가운데 삼위 하나님께서 계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요한은 수신자들을 자신의 자녀들로 부르면서 편지를 쓰는 이유를 더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로 범죄하지 않게 하고, 또 범죄하였더라도 우리에게 있는 대언자(옆에서 도우시는 분, 변호사)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함 입니다(1). 이것은 수신자들이 당시에 범죄를 해도 괜찮다고 여기며 하나님 앞에 죄짓는 것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우리는 두 보혜사가 있는데 한 분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이시고, 또 다른 한 분은 우리 마음 속에서 ‘격려’와 ‘책망’을 하시는 성령님 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여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2). 예수님은 온 세상, 곧 모든 인종과 민족의 구분을 초월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화목제물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으로 인해서 죄를 용서 받고, 성령이 마음에 거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3).
반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말이며, 그 속에 진리가 없는 것이라고 요한은 분명하게 말합니다(4).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즐겁게 생각합니다(5). 이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여러 갈등과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 갈등과 어려움을 뚫고 하나님께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생각으로만, 마음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단지 준수하는 것을 넘어 열정을 가지고 부지런히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삶을 본받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6).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기초합니다.
요한이 사랑하는 공동체에 전하는 것은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들어 왔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옛 계명인 동시에 새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레19:18),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그분이 행하신 구원 사역에 근거하여 마땅히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몸 된 교회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계명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아직 어둠에 있는 자이며 어둠에 눈이 먼 사람입니다(10-11).
이어서 요한은 수신자들을 자녀와 아버지들, 청년들 그리고 아이들로 부르면서 각각의 세대의 상황을 가지고 격려합니다. 12절의 자녀들은 공동체 전체에게 해당되는 것으로써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비들(나이가 있는 성도들)에게는 오래 동안 태초부터 계신 구약의 하나님을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아버지로 모시고 살고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또 청년들에게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승리하신 예수님 안에서 악한 사탄을 이겨 왔음(현재 완료)을 상기시켜줍니다. 나이가 아주 어린 자들에게는 그들의 참된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합니다. 다시 요한은 모든 연령을 막론하고 세상이나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15). 왜냐하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연결되고 그 근원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런 세상에서 벗어나 빛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이 세상과 정욕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게 됩니다(17). 세상의 명예와 욕망과 쾌락과 만족은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만족케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합니다.
이어서 요한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적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적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벌써 있다고 주의를 줍니다. 이 공동체의 일부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고 공동체에서 나갔습니다. 처음에 요한일서 수신자들에게서 이들이 분리해서 나갈 때 공동체는 마음이 매우 상했을 것이지만, 요한은 그들이 정통의 가르침에서 스스로 나갔기 때문에 애초에 그들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고 남은 자들에게 위로를 줍니다. 당시에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버리고 자신들이야 말로 최신의 진보된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무리 지어 나간 자들 입니다. 요한은 그의 수신자들에게 이런 분열 속에서 흔들리지 말고 이미 성령은 사도들의 가르침(신약)을 통해서 바르고 충분한 참된 지식을 주셨다고 확신을 줍니다(20-21).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인간의 어떠함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복음을 올바로 깨닫고 믿도록 하십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성부 하나님이 계실 수 없습니다(23). 때문에 수신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처음에 들은 말씀을 견고히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이시고 그분을 통해서만 성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복음입니다. 그분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며 그분의 의로움을 알고 그분을 따라 의를 행하며 그분에게 속해 있음을 드러내며 사는 것입니다(25-29).
우리는 혼탁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 안팎으로 많은 유혹과 가짜에 둘러 쌓여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 거하며 그분의 계명을 순종하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이 진리인 줄 확인하게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더욱더 헷갈리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함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킵시다. 그래서 진리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날마다 확신하며 굳게 서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사도 요한은 자신이 목회를 하던 공동체에 이단적인 사상과 새 계명으로서 사랑과 사랑에 근거한 사귐을 강조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이 공동체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2:22.,5:1)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4:3, 15, 5:5),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4:2), 그리고 잘못된 죄 중에 있으면서도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잘못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자들(1:5-2:6)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고자 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신약 시대의 다른 편지와 다르게 수신자와 발신자, 인사말과 같은 형식이 나오지 않고 곧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상황이 그만큼 급했고, 또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요한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생명을 주는 말씀)에 대해서 말합니다. 요한은 이 편지의 가장 첫 단어를 ‘바로 그분(혹은 그것, 관계대명사)’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어떤 분인지 설명을 합니다. 독자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개를 합니다. 그분은 태초에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시고, 성육신하신 분으로서 사도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분이시고, 눈으로 보인 바 되신 분이시고, 손으로 만져진 분이십니다(1). 이렇게 들어왔고, 보아왔고, 만져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지 않으셨다는 이단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위한 요한의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나아가 요한은 왜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는지 말합니다. 그것은 사귐(교제, 코이노니아)이 있게 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 사귐은 예수님과 신자, 신자와 신자의 사귐을 넘어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신자가 더불어 누리는 사귐입니다(3). 그리고 그 사귐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사귐 안에서 있는 기쁨을 전파하기 위해서 요한은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4).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은 아무런 걱정이나 염려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상황과 상태를 넘어 가지게 되는 하나님과 교제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 우리의 영혼에 참된 기쁨을 줍니다. 사도 요한과 그의 동료들은 이런 사실을 전함으로 기쁨이 넘칩니다.
요한이 예수님에게서 듣고 성도들에게 전한 내용은 하나님이 빛이라는 것입니다(5). 그분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스러움과 진리를 빛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격적인 빛이신 하나님은 이방 종교의 별과 우주와 연결된 비인격적 신들과 다른 분입니다. ‘어둠’은 죄와 죽음을 상징합니다. ‘빛’은 하나님의 영광, 구원 그리고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이며,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하다’라는 것은 일상 생활과 태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분과 교제하는 신자는 하나님의 빛 속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지만 죄의 영향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라고 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죄 없음 혹은 완전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가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고, 그럴 때 용서를 받고, 점점 더 죄를 제거하는 삶의 태도로 살아가는 갑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죄 없이 무결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죄에서 깨끗함을 받아 날마다 용서를 받고 죄를 미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은 죄가 없다고 하지 않고 날마다 죄를 자백하고 죄를 용서를 받으며 불의에서 깨끗해 진 것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고 살아가는자들 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성도, 거룩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7-10). 때문에 반복적으로 죄를 지으면서 그것을 정당화하고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면 하나님을 속이고 거짓말하는 자로서 예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을 굳게 믿는 저와 여러분은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빛의 자녀 답게 살아갑시다. 날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께 날마다 우리의 죄를 애통해 하며 자백하고, 용서 받아 죄용서에 대한 감격과 감사로 더욱 거룩한 삶을 살아갑시다. 그래서 우리가 어둠이 아니라 빛에 속한 자들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베드로는 베드로전후서를 기록한 목적을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이 두 편지를 통해서 수신자들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님께서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나게 하려고 쓴 것입니다(1-2).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과 사도들이 전한 것은 다가올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한 예수님의 오심과 다시 오심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의심하고 재림을 믿는 사람들을 조롱했습니다(3). 그들은 조상들이 잠든 이후로 만물이 그대로 있다고 주장했습니다(4). 그래서 재림과 같은 급격한 변화를 가지고 오는 사건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가르침을 다른 신자들에게도 이렇게 가르쳐 순수한 신앙을 위협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붙들기 때문에 그대로 있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일부러 잊으려고 한다고 표현합니다(6).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만드셨고, 다스리시며, 또한 그 동일한 말씀으로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고 계십니다(7-8). 이어서 만물이 이처럼 여전히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와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너희(신자들)들 가운데 멸망하는 자들이 없이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창세 전에 선택된 자들이 모두 구원을 얻으시기까지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 숫자가 차면 주님은 심판 주로 재림하셔서 불신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날은 도적과 같이 올 것입니다. 그날에는 하늘이 큰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세상의 모든 요소들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들이 재림 하신 주님 앞에서 샅샅이 드러날 것입니다(10). 이것은 세상이 아예 다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구성 요소들이 질적으로 변화되고 새롭고 영원한 요소들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본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이 날을 기억하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고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 베드로는 권면합니다(11-12). 성도는 소멸될 이 땅의 일에만 전념하는 것은 경건의 삶을 촉구하는 베드로의 권면을 거스르는 것이 됩니다. 성도는 주님의 재림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 날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서 점과 흠이 없이 평강 가운데서 주님 앞에 서도록 힘써야 합니다(14).
베드로가 베드로후서를 쓸 때쯤 바울의 서신도 회람되고 있었는데, 바울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준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었습니다(살전4:13-18).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억지로 해석(주님의 재림이 이미 지나갔다거나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함)하여 스스로 멸망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16). 베드로는 미리 성도들에게 이것을 알려줌으로 그런 사람들에게 미혹되어 건전한 교리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하라고 합니다(17). 그리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영광에 이르라고 합니다(18).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바라보며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지 말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날마다 자라감으로 영광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아직 만물이 그대로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크심을 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합시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건전한 교사들에 귀를 기울이고 배운 지식을 날마다의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