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와 

예배에 관하여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는 유럽 예수교 장로회 고신 총회에 속한 교회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특정 교단 소속의 교회 전에 기독교회 입니다. 우리 교회가 기독교회라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잘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 사도 신경입니다. 사도 신경은 성경에서 계시하고 사도들이 믿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쳐 줍니다. 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고,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시며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장차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분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지금도 교회를 세우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부활의 신앙으로 이끄심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이 사도신경을 자기의 신앙 고백으로 받아들이는 교회가 기독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기독교회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 교회는 기독교회 중에서 개신교회(Protestant)입니다. 개신교회라는 것은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서 탄생한 교회라는 뜻입니다. 원래 하나였던 교회가 1054년 동방과 서방 교회로 분열된 후 두 교회는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특히 로마를 중심으로 세워진 서방교회는 카톨릭교회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서방교회는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타락하게 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교회 개혁을 통해서 교회를 다시 새롭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루터가 있습니다. 루터는 당시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95개조 반박문을 썼습니다. 개혁자들이 이렇게 기존 교회에 반발한 이유는 교회가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를 더 내세우고, 성경에 없는 많은 것들을 고안해 내어 교회의 부를 늘려가는데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면벌부입니다. 누구든지 이 면벌부를 사면, 연옥에 있었던 자기의 가족이 천국으로 가게 된다는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은 로마에 있는 바티칸 성당을 짓기 위한 헌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개혁자들은 다시 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게 만들고자 종교개혁을 지속적으로 감행해 왔던 것입니다. 종교 개혁을 통해서 로마카톨릭과 구별되는 또 다른 교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독일을 중심으로서 한 루터파교회 였습니다. 그 후에 곳곳에 종교 개혁을 통해서 로마 카톨릭과 구별되는 교회들이 생겼습니다. 이런 교회들을 개신교회라 부릅니다. 우리 교회도 개신교회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 교회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 혹은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입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회들은 그들이 고유하게 강조하는 교리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신앙고백’이라는 문서로 작성하였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다른 교회에 이 교회가 카톨릭과는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며, 또한 다른 개신교회와는 어떤 것이 다른지 보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루터파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나중에는 많은 문서를 묶어 ‘일치서’라 불리는 고백서를 만들었습니다. 루터파의 특징은 오직 믿음, ‘이신칭의’를 강조하였고, 로마 카톨릭의 전통을 어느 정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칼빈의 노선을 따르는 많은 교회들은 그들의 교회가 말씀으로 더 개혁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전체 성경, 오직 은혜를 강조하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 등으로 자신의 교회가 로마 카톨릭과 루터파와 어떻게 다른지 천명하려 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서를 받아드리는 교회들을 개혁파 교회, 혹은 개혁교회라고 부릅니다. 이 교회는 나중에 영국으로 건너가 교회에서 개교회의 회의를 넘어 노회의 장로와 목사들의 협의체의 역할을 강조하는 장로교회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한 세기 뒤에 이 장로교회에서도 신앙고백을 만들어 그들의 신앙을 천명했는데, 그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입니다. 나아가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하기 위해서 요리문답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과 대요리 문답입니다.

 

우리 교회는 기독교회이며, 개신교회이며, 또 개혁교회이자 장로교회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어떠함으로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하나의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우리 교회는 다른 신앙의 전통을 가진 분들의 신앙을 존중하며 대화를 통해서 서로에게서 배우고자 합니다. 교회는 사람의 지혜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이시고 그분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해 나가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의 언약(약속)이 충만하게 드러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함께 모여드리는 예배는 항상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초로 드려졌다는 증거 때문입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맺은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아담에게(창 2:16-17), 그리고 노아(창 8: 8-17), 아브라함(창 12:1-3), 이스라엘 백성 (출 19:1-6), 다윗(삼하 7:12-14)과 언약을 맺으셨고 선지자(렘31:31-33; 겔36:28)들을 통해서 새로운 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성취로서 예수님과 성령이 오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관계를 맺으실 때 그냥 맺지 않으시고 언약으로 관계를 맺으신다고 가르칩니다. 언약의 핵심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언약은 그 체결에서 일방적이지만 유지에 있어서 쌍방적입니다. 즉, 언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친히 선택하시고 찾아오심으로 맺어집니다. 하지만 그 언약은 그분께 순종하는 것으로 유지 됩니다. 그래서 언약은 쌍방적, 관계적, 인격적입니다. 주고 받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언약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군주와 백성의 관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런 관계의 성격이 예배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개혁자들이 개혁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관계를 예배 속에서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는 이 관계를 “가르치는 교회”와 “듣는 교회”로 양분하여 사제들은 가르치는 교회로, 성도들은 듣는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언약의 쌍방 관계를 위에서 아래로의 관계로 획일화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수동적으로 사제의 말을 듣기만 하고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보기만 했습니다.

 

또 다른 극단에는 예배를 아무런 질서 없이, 말씀을 전하는 직분자도 없이 그저 참석한 사람들이 정한 방식대로 행하는 재세례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어떠한 권위나 형식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예배의 아무런 형식이나 틀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도 드러날 수 없었습니다.  

 

개혁자들은 이 양 극단을 피하면서 예배에서 언약적 관계를 드러내고자 예배의 형식을 갖췄습니다. 그 형식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예배의 부름이 가장 먼저 옵니다. 그리고 그 부름에 응답한 회중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의 인사를 합니다. 그 축복의 인사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화답하며 찬송으로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통해서 죄를 자복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해 주십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그 용서에 감사하며 찬송 올려 드립니다. 그리고 기도로 우리의 간구를 아뢰며, 말씀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요청합니다.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들은 백성은 다시 하나님께 그렇게 살겠다는 감사와 다짐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드리고, 준비한 헌금을 통해서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 표합니다. 향기로운 예물을 받으신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늘 함께 하겠다는 축복을 약속하시며 그 백성을 세상으로 보냅니다. 순서에는 교회 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이런 내용으로 예배를 채웠습니다. 순서 하나 하나를 잘 보면 예배의 모든 과정이 수동적이거나 일방적이지 않고 하나님과 백성이 서로 계속해서 주고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약의 관계가 예배를 통해서 드러나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배의 순서 또한 인간의 고안물이 아니라 성경, 즉 언약에 근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배시간 내내 지속적으로 청중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으며 그 예배에 역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의 역동성입니다.


우리 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 합니다!!


우리의 찬양은...

또 한 가지 우리 교회의 예배의 특징은 시편 찬송과 찬송가만 예배 음악으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예배에서 사용하는 음악 또한 인간의 고안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시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인 우리에게 주신 ‘찬송 집’입니다. 시편은 단지 구약 성경의 하나가 아닙니다. 시편은 읽어야 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부르기’위해서 지어진 책이고 역사적으로 불려왔던 성경입니다. 역시 중세 로마 카톨릭은 찬송을 라틴어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 성도들은 교회 예배 때에 노래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찬송인 시편을 교회에서 자국어로 부름으로 찬송을 백성에게 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 시편 찬송을 듣기 어렵습니다. 신나는 비트의 복음 성가와 CCM을 선호합니다. 이는 시대를 반영합니다. 이 음악들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예배 음악으로서는 적절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복음 성가와 CCM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곡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들으면서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좋은 복음 성가와 CCM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에서 사용하기에는 그 곡조나 가사의 보편적인 성격이 떨어집니다. 또 유행이 지나면 잊혀집니다. 반면에 시편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된 노래이며 아무리 짧게 잡아도 2500년 이상 불려 온 교회의 노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시편을 교회의 노래로 불렀음을 증거합니다. 에베소서 5장 19절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합니다. 또 골로새서 3장 16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서 풍성히 거하며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시는 시편입니다. 찬송은 찬송가입니다. 고대 교회에도 시편 이외에도 찬송가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 기준은 아주 엄격하게 적용되어 성경에 기초한 가사만 허용되었습니다. 오늘처럼 개인의 경험과 체험으로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례로, 찬송가 3장 “성부 성자와 성령”은 1세기 교회 때부터 불러오던 가사에 19세기 곡조를 입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시편 찬송과 찬송가를 예배 때 부르되, 찬송가는 되도록이면 성경 말씀과 일치하는 곡을 부릅니다. 지금은 시편 찬송을 16세기 제네바 시편을 부르지만 점차 더 현대적인 곡조로 된 시편도 다양하게 부를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 교회 예배는 매주일이 온 세대, 온 가족 예배입니다. 요즘 교회들은 교회 안에서 세대 간의 단절로 정기적으로 세대 통합 예배 혹은 온 세대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지난 수십년 간 주일 학교 예배에 대한 반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일 학교에서 세대 별로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예배를 주일 공예배와 따로 드리면서 세대간 소통이 끊어졌다는 반성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이런 이유에서 매주일 온 가족, 온 세대가 함께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어린이를 비롯한 세대의 구분이 없이 함께 예배의 자리로 부르신다는 믿음 때문에 온세대가 함께 예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당신의 백성을 삼으시며 언약을 맺으실 때, ‘너와 네 후손’을 포함하셨습니다(창17:7-8).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유월절 어린양을 온 가족이 함께 먹었습니다 (출12:3).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자녀들이 함께 만나를 먹었고, 돌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습니다. 언제나 자녀들은 그 신앙의 여정에서 부모와 함께 하였습니다. 자녀들의 신앙 교육은 언제나 1차적으로 부모의 책임이었습니다. 신명기 6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여기서 ‘강론’한다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말하고 들려주고 설명하고 말씀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수시로 자녀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대화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부모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자녀의 교육에 대한 부모의 책임과 신앙의 여정에서 함께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께서 12살에 온 가족과 함께 성전에서 예배하셨습니다. 자녀로서 부모와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물론 성경 시대와 오늘날의 시대는 많이 다릅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종교와 국가가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 다양한 종교와 문화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믿는 부모와 함께 신앙의 여정을 함께 하지 못하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일학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주일학교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주일학교의 교육 목적이 나이에 맡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일 공예배를 이해하고 바르게 참여할 수 있도록 자녀에게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중고등부의 수준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중고등부 졸업 후 공예배에 적응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는 자녀들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됩니다. 주일학교는 주일 공예배를 바르게 드릴 수 있도록 보조해 주는 아주 중요한 교회와 기관이 되어야지 아이들의 수준에 맞게 예배를 ‘드려 주는’ 기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의 주일학교는 예배를 바르게 이해하고 무엇보다 설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을 자녀들의 수준에 맞게 가르치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예배시에 자녀들이 믿는 부모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무엇보다 부모에게 신앙을 배우도록 하고, 믿지 않는 부모를 둔 자녀들은 교사를 통해서 배우도록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일 공예배시에 자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유입니다. 예배를 온 세대가 함께 드리며 때로는 부모들이 본이 되고, 때로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좋은 선생이 되기도 하며 자연스럽게 온 세대가 신앙 안에서 교제하도록 합니다. 일정기간 동안 혹은 일정 나이가 될 때까지 자녀들이 예배시간에 돌아다녀도 괜찮고, 울어도 괜찮습니다. 예배시간에 어린 자녀들이 돌아다니고 우는 것은 듣기 싫은 소음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미래가 밝다는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온 세대가 함께 예배하며 함께 세워져가는 우리 교회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